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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니의 '경이로운 방'

2011.02.17 18:26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의 '언캐니' 방 전경. 사진: 권현정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의 '언캐니' 방 전경. 사진: 권현정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중국의 테라코타 전사에서 미국산 섹스 인형까지, 이를 한데 모아 놓은 제4전시실의 ‘언캐니’ 방이다. 총감독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b. 1973)는 마이크 캘리(Mike Kelley, b. 1954)가 1993년 손스빅 국제 조각전에서 기획한 <언캐니(Uncanny)>전에 대한 헌사이자 변화/변형/재해석의 의미로 “경이로운 방(Wunderkammer, 도록에 실린 감독의 표현)”을 만들었다.

<언캐니>전은 2004년 테이트 리버풀에서 1993년 이후 제작된 작품을 추가한 -'yba'를 역사화하는 성격이 강한- 버전으로 다시 열렸다. <언캐니>전이 1992년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 b. 1950)가 기획한 <포스트-휴먼(Post-Human)>전과 대구를 이룬다면, 지오니의 '언캐니' 방은 그가 디렉터로 일하는 뉴뮤지엄에서 2010년 다키스 조아누(Dakis Joannou)의 컬렉션을 제프 쿤스(Jeff Koons, b. 1955)가 전시로 엮은 <스킨 푸르트(Skin Fruit)>전과 묶인다. 한편, 1993년 <언캐니>전에서 잊히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는 큐레이터 댄 카메론(Dan Cameron, b. 1956)은 이 전시실이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다른 종류의 실패”이며 시각적으로 어색하다고 혹평했다.

지오니는 각종 미술이론(정신분석학에서 비주얼컬처까지)을 성실히 공부한 학생이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을 롤모델 삼고 전시를 기획한 것처럼, 미술품과 비미술품 사이의 의미 맥락을 가려내고, 작품과 작품이 일대일로 대응하도록 전시를 구성해, 전시의 의미 구조가 생산/반복/강화되는 ‘낱말 맞추기’식 큐레이팅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정점에 달하는 것은 이 전시실에서다. 지오니의 이런 전시 구성은 아시아에서 선택한 다수의 비미술품(또한 컨템퍼러리 하지 않은 작품) 사이에 유럽과 미국의 인맥, 소위 ‘자기 사람(작품부터 컬렉터까지)’을 어떤 자리에 어떻게 꽂아둘 것인가란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 하지만 상당히 실리적인 고민에서 비롯되기도 했을 터.

총 5막으로 구성된 전시에서 인트로를 맡는 방에는 맷 밀리컨(Matt Mullican)과 두에인 핸슨(Duane Hanson)의 작품이 있다. 맷 밀리컨의 인형과 죽은 사람의 얼굴 사진, 베게 위에 목재가 놓인 <자고 있는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유사성의 드라마’ 속 삼위일체의 주인공이다. 맷 밀리컨의 작품에서 도출된 인간 형상의 재현 구조와 그 인식을 둘러싼 심리적 물리적 의문문을 두에인 핸슨의 폴리크롬 조각품이 되받는다. 메인 전시실 입구 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여자 희생자의 캐스트 사진과, 출구 위 로댕의 플라스터 파편 조각 사진은 재현으로서의 조각의 기원과 동시대적 의미는 무엇인가란 전시실의 큰 주제를 갈무리하는 수미상관의 지시문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전시실로 들어가면 양옆에 중국의 테라코타 전사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파리한 몸을 웅크린 베를린더 더 브라위케러(Berlinde De Bruyckere)의<파스칼레>가 놓여 있다. 동양과 서양/남성과 여성/강인함과 냐약함 등의 일차원적 의미 대립 구조는 정확히 대각선을 그리며 다음 전시실의 맨 구석에 놓인 <한복 입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상>과 -일주일마다 옷을 바꿔 입히는- 존 밀러(John Miller)의 <마네킹 러버>로 이어진다. 한편, 아기 예수상은 쿠도 데츠미(Kudo Tetsumi), 폴 텍(Paul Thek), 아르 오리앙테 오브제(Art Orienté Objet)의 <철망 원숭이 대리모>를 바라보도록 배치된 원숭이 박제 -이 전시실에서 가장 유치하지만 귀여운 셋팅이다- 등과 한 단에 있는 간호 실습용 남녀 아기 인형과 연결되고, 한복 입은 마리아상은 왼편의 발가벗고 뒤틀린 한스 벨머의 인형 사진과 성(聖)과 속(俗)의 대립 구도를 그리며 한 프레임에 자리 잡고 있다. 베를린더 더 브라위케러의 히스테릭한 여성상은 왼편의 눈물 흘리는 성모마리아상 사진과 조응하는데, 사진 속 마리아상이 베를린더의 작품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꼴이다.

세 번째 공간 입구 벽면에는 <호프만의 이야기>의 1931년 베를린 공연 스틸 사진(左), 모하메드 알-파시 맨션의 방화 사건 사진(中), 독일 경찰이 찍은 시기 미상의-아마도 신체 훼손 현장-사진(右)이 역삼각형 구조로 삼면화처럼 붙어 있다. 이 사이에 조나단 브로도브스키(Jonathan Borofsky)의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인간 형상 <내가 날 수 있는 꿈을 꾸었다>가 매달려 있다(이 작품과 앞 전시실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의 뒤집혀 매달린 두 머리에서도 삼위일체 구조는 반복된다. 제프 쿤스의 <진부함의 도래>까지 포함해). 그 바로 아래에는 농담을 치듯 같은 작가의 기계 형상 <재잘대는 남자>가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이는 도록에 수록된 모리 마사히로의 <언캐니 밸리> 그래프를 재현/요약/설명하는 구성처럼 보인다.

작가 오윤의 아버지 오영수의 데스마스크는 특정 여성의 나체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존 드 안드레아(John de Andrea)의 <케이티>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반대편 공간에서 바라보면 두 작품 사이를 상업적 이유로 대량 생산된 각종 인형들(태아에서 섹스 인형까지)이 중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죽음과 삶/동일성과 유사성/미술품과 대량 생산품의 미묘한 경계에 대한 전시장의 이야기 얼개를 풍성하게 한다. 그 인형들 바로 앞에는 폴 맥카시(Paul McCarthy)의 거대한 인형 <어린이를 위한 해부교재용 인형>이 각종 인형들의 주인인양 혹은 전시장의 모든 상황을 관조하는 부처마냥 선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잠깐의 암전과 같은 시프리엥 가이야르(Cyprien Gaillard)의 <무제>를 지나 마지막 전시실에 들어가면,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십자가에 못 박힌 듯 엎드린 여자의 뒷모습, 전시장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이 인형처럼 갖고 노는- 살아 있는 무용수, (애초에 제1전시실로 설치가 계획된) '조선 의친왕의 왕자 흥영군의 비' 박찬주의 어린 시절 증명사진 속 얼굴 없는 손이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캐니"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던지며 전시는 마무리된다.  

*이 전시실에 대한 지오니의 열정(?)은 광주비엔날레 공식 도록에도 잘 나타난다. 자잘한 단편적 텍스트를 제외하고 도록에는 총 11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전시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만 총 4편(W.J.T 미첼의 <생명의 징후:공포의 복제>, 모리 마사히로의 <언캐니 밸리>, 데이비드 프리드버그의 <진짜 같음과 닮음>, <이미지에 의한 자극>)으로, 지오니의 '경이로운 방'을 보충/해명하는 캡션 역할을 맡는다.
Posted by 김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