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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박이소씨, 우리는 행복해요?!" ②

2011.09.16 18:57
art in culture 2006년 4월호의 특집 '박이소씨, 우리는 행복해요?!"에 실린 또 다른 글을 소개한다. 필자 이정우(임근준)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현대미술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 박이소의 행보를 추적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심층 분석했다. 작고 전 필자가 경험한 박이소의 개인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과 박이소에 관한 불확정적인 메모
 
글 | 이 정 우
<박모의 단식 퍼포먼스> 1984

<박모의 단식 퍼포먼스> 1984



문화번역가로서의 박모를 기억함

한국현대미술이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박철호 혹은 박모 혹은 박이소가 맡았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처음 박모(본명 박철호)란 기이한 이름을 본 것은 1990년 즈음 미술잡지 지면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잡지를 읽는 독자의 눈에, 그는 작가라기보다는 ‘말 되는 기사를 기고하는 국외의 지식인형 예술가’였다(물론 그런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안규철). 박모라는 미지의 인물은 한국인의 위치에서 독해한 미국과 유럽의 현대미술을 쓸 만한 모국어로 풀어내는 경이로운 필자였다(박모가 미국 당대미술에 대한 질 높은 기사를 실으면, 곧이어 질세라 안규철이 유럽의 당대미술에 대한 기사를 싣는 식었다).

당시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내게 현대미술은 그저 가벼운 지적 호기심을 끄는 정도의 ‘교양거리’에 불과했지만, 박모가 기고한 기사들은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그의 글은 매력적이었다. 박모의 글이 묘한 흡인력을 지녔던 까닭은 당시의 시각문화의 담론이 그려낸 지형이 꽤 논쟁적이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1980년대 말부터 한국문화예술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 수입한 담론을 놓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갑론을박을 반복하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대학가에서는 미학 관련 스터디 모임이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당시 인기 있었던 것은 역시 맑스주의 계열의 미학 서적들).

박모에서 박이소로

미지의 인물이 근접할 수 있는 실체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1995년 6월의 어느 날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을 본 이후의 일이었다. 허나 솔직히 말해 그의 ‘썰렁한’ 전시는 그리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적잖은 이들에게 이 전시는 작품들 자체보다는 도록에 실린 평문이나 좌담으로 더 기억에 남았다). 1988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는 매해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 이어지는 흥미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7~8년간의 굵직굵직한 전시들만 꼽아도 상당하다. 어쩌면 박모 또한 자신의 개인전이 급격히 변화된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에 걸맞지 않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1995년 sadi의 브로슈어에서 ‘교수’ 박모의 얼굴을 처음 봤다. ‘뉴욕에서 대안공간을 운영하기도 했다는 그’가 굉장히 세련되고 멋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해왔던 나는, 그의 ‘너디한 외양’에 크게 실망했다. 그를 실제로 처음 본 것은 아트선재센터의 건립부지에서 열린 <싹>전에서였는데, 그는 ‘보통의 세련됨’과는 담을 쌓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실망은 무관심으로 발전했다(사실 어느 정도의 무관심은 그가 여느 ‘유학파 작가’처럼 결국 교수직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의심에서 야기된 것이기도 했다).

나는 1995년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시작, 이태동안은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미술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당시 한국의 문화계에는 병적인 쾌활함과 활력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이론가와 활동가, 예술가 가운데 안 바쁜 사람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난 한동안 박모란 사람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1997년 문득 광주비엔날레에서 그의 강력한 존재감을 마주했다. 광주비엔날레의 혼잡스런 전시장을 테러 당한 빌딩을 서둘러 탈출하듯 돌파해나가던 어느 순간이었다. 장터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 ‘고고하게 빛을 발하며 보는 이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박모의 <유엔타워>(1997)였다.

<유엔타워>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 깊고 멋진 작업이었다. 잘난척하지 않으면서 잘난척하는, 문화적 맥락을 다른 맥락으로 번역해 옮기는 것을 작품의 근간으로 삼는 <유엔타워>는 최정화와 이불과 같은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스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교묘한 지식인형 블랙 유머를 구사하고 있었다. ‘지식인 속물’인 나는 그 점이 좋았다. 그때서야 나는 박모에 대한 관심을 되찾았고, 이후 그가 블랙 유머의 달인인 데이빗 해먼즈(David Hammons, 1943년생)나 조크 페인팅의 일인자인 리차드 프린스(Richard Prince, 1949년생)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러나 1998년 <도시와 영상: 의식주>전에 내놓은 작품을 기점으로 그의 작업은 굉장히 시니컬하게 변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박모’가 아니라 ‘박이소’였다…. 자, 이쯤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박모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활동을 했고, 또 한국미술계엔 어떤 굵직굵직한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984년부터 1995년 사이의 박모의 활동과 한국미술계의 변화

1984년 박모는 추수감사절 이후 밥을 굶었다. 이해 11월 22일 박모는 코네티컷 페어랜드에 있는 미국인 가정의 추수감사절 만찬에 초대받았고, 그 후로 삼 일간 프랫 하우스에서 단식을 실시했다. 그는 단식의 마지막 날인 25일 정오에 직접 만든 밥솥을 목에 걸고 프랫 하우스에서 브루클린 대교까지 행진했고, 프랫인스티튜트의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학위 논문 제목은 ‘회화전의 사진기록과 결론적 진술’)한 1985년 9월,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지역에 대안공간 마이너인저리(Minor Injury)를 개관했다. 박모는 마이너인저리를 1989년까지 운영했고, 공동 운영자였던 샘 빙클리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함께 활동했다(박모는 당시 뉴욕의 거의 유일한 건축전문 대안공간이었던 스토어프론트(Store Front)의 운영자 박경과도 가깝게 지냈다).

1985년에 박모가 발표한 작품:
<영어로 배운 역사의 끝에 서서 뒤돌아보며(Looking Back at the End of My History of Learning English)>
<무제(untitled)>
<무제(untitled)>
<무제(untitled)>
<쌀과 기름통(Rice and Oil Drum)>
<무제(untitled)>
<무제(untitled)>

1984년 한국미술계 최대의 화제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그에 이은 34년 만의 귀국이었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는 일성으로 한국의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미술계의 반응은 꽤 부정적이었다. 이해 3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은 <김환기 10주기>전을 열어 한국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역사를 확인했으며, 차미례는 《계간미술》 봄호에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라는 (린다 노클린이 제기했던) 질문을 한국 미술계에 던졌고, 서울미술관에선 <임옥상전>이 민중미술 특유의 풍자와 비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반면 박불똥 이섭 등이 소속된 실천그룹은 관훈미술관에서 3회전을 열어 1980년 창립된 현실과 발언 이후의 다양한 민중미술의 전개에 일조했고, 그로리치 화랑에서 열린 <이석주전>과 동산방화랑에서 열린 <한만영전>은 한국식 극사실주의 회화를 보여줬다.

그러나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두렁>전은 현실과 발언의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종류의 민족적 민중미술운동이 형성됐음을 알렸으며, 1984년의 <삶의 미술>전이나 1985년에 열린 서울미술공동체의 <미술대동잔치>전 등은 민족미술운동이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그 가운데에서 1985년 제3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김봉준은 적잖은 주목을 받았고, 관훈미술관에선 여성미술운동의 맹아를 품은 윤석남 김인순 김진숙의 <시월모임>전이 열렸으며, 서울미술관의 <제5회 문제작가>전이 선정한 다섯 작가 가운데 하나였던 이철수의 역사 판화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86년에 박모가 발표한 작품:
<무제(untitled)>
“나는 그림그릴때마다 이 그림이 딴 사람들 맘에 들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요즘 세상에 가만히 벽에 붙은 그림이 뭘 할 수 있을까 하면 자꾸 한심해한다.”
<자본=창의력>
<무제(untitled)>
“내가 밥솥을 만들 때는 그것을 벽에 걸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것을 벽에 걸때엔 그것을 그릴 것이라고는 또 생각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한국현대미술계의 주류는 모던한 작업을 펼치는 예술가들이었다. 1986년 3월 18일 예화랑에서 열린 <문신전>이나 같은 달 11일 현대화랑에서 열린 <권영우전>은 한국식 모더니즘의 범본이었고, 대중의 사랑은 6월 12일 국제화랑에서 열린 <장욱진전>에 몰렸다. 특히 8월 20일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을 열었는데, 민중미술작가의 작품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1987년에 박모가 발표한 작품:
<꿈속금강도>
<역사의 문(Entrance of History)>
<인간적-비인간적(Human-Inhuman)>
<그냥 풀(Simply Weed)>

《계간미술》 1987년 봄호는 “후기모더니즘의 대표작가들”이란 특집을 실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슈를 전면화 했고, 민중미술은 민주화운동의 현장 곳곳에서 걸개그림 등을 통해 큰 힘을 발휘했다. 최병수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보통 사람들의 가슴을 불을 질러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미술계 최대의 화제는 <88서울올림픽세계현대미술제>였다. 대기업들의 각출로 마련된 90억 원의 예산도 화제였지만, 편중된 운영방식과 다소 파행적인 사업 진행 때문에 더 큰 반발을 샀고, 몽촌토성 훼손 논란까지 이어져 여름 내내 공방이 오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의 길고긴 논란은 <올림픽 미술제>라는 거대 이벤트를 빌미로 한 미술계의 좌우대결의 결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해 9월 1일 서울미술관은 마르셀 뒤샹의 대형 회고전을 유치, <큰 유리> <여행 가방> 등 주요 작업 100여점을 선보였는데, 《계간미술》 가을호엔 달랑 반 페이지의 리뷰 기사가 실렸을 정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작품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1988년에 박모가 발표한 작품:
<비무장지대 해제를 위한 실용적인 제안(A Practical Proposal for the Dissolitionof D.M.Z.>
<비전통적(Non Traditional)>
<삐딱한 호 위에 쌀 벽화(Rice Mural on Tilted Arc)>
*페더럴 플라자에 있는 리차드 세라의 <삐딱한 호>를 ‘재활용’하려 한 작업.

서울올림픽의 해인 1988년을 맞아 본격적으로 해외의 현대미술이 국내에 소개되고 주목받기 시작한다. 7월 15일 호암갤러리와 현대화랑의 공동주최로 킴 레빈이 큐레이팅한 <뉴욕현대미술>전이 열렸고, 같은 해 9월 7일 독일 문화원 주최로 페터&율리아 본이 디자인한 아방가르드 건축물에서 슈트로에 브로스 등이 벌인 테크노 이벤트 <쿤스트 디스코>가 문을 열었으며, 같은 달 29일엔 뉴욕 아티스트스페이스 화랑에서 <민중미술과 문화운동>전이 열려 한국의 민중미술운동을 국제미술계에 알렸는데, 박모가 공동기획자였다.

1989년에 박모가 발표한 글과 작품:
<뉴욕 한국미술의 실상을 말한다: 현지좌담> 《월간미술》 1989년 2월
<교훈적(Didactic)>
<전통(Tradition)>
<달밤도(Moon-Night Picture)>

1990년에 박모가 발표한 글과 작품:
<서울-뉴욕 미술교류, 무엇이 문제인가> 《월간미술》 1990년 4월
<뉴욕의 소수민족 미술과 한인작가: 뉴욕미술계과 한인작가> 《가나아트》1990년 5/6월
<역사(History)>
두 번째 개인전 <미국말 말하기(Speak American)> 브롱스 미술관 이 전시 이후로 그의 작업은 캔버스에서 설치·미디어 쪽으로 확장된다.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Exotic-Minority-Oriental)>

1989년 전수천은 서울올림픽 1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한강수상드로잉>을 펼쳤고, 1990년 최재은이 (타다시 가와마타의 작업과 유사하긴 했어도) 서울 경동교회 옥상에 3천여 개의 대나무를 설치한 <싱크로노스>로 큰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고낙범은 사진전송과 팩스로 서울과 LA를 연결하는 <전자카페프로젝트>를 선보였으며, 1991년 3월 15일 이상현은 토아트스페이스에서 상황주의와 존 로널드 류엘 톨킨의 서사를 재활용한 <이상현 설치-지오매트릭 클락>전을 열었고, 같은 해 9월 31일 윤동천은 최갤러리에서 <제3회 개인전>을 열어 기호학적 설치미술의 전형을 보여줬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3월 1일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르네 블록의 큐레이팅으로 열린 <테크놀로로지의 예술적 전환>전이었다.

1991년에 박모가 발표한 글과 작품: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체와 한국미술> 《월간미술》 1991년 1월
<포스트 모더니즘의 계보와 그 정체> 《가나아트》 1991년 5/6월
<미술의 고정관념을 깨는 연출가-데이빗 헤먼즈> 《월간미술》 1991년 6월
<미국의 소수민족 복합문화주의> 《가나아트》 1991년 11/12월
<젓가락을 쥐는 방법을 위한 드로잉>
<동양적>
<극동을 바라보며(Looking at Far East)>

1992년에 박모가 발표한 글과 작품:
<미술 비제도권 미술운동의 실례> 《가나아트》 1992년 1/2월
<다인종 복합문화의 수용과 반영-디스로케이션 전> 《월간미술》 1992년 2월
<90년대 미국 서부미술이 준 충격-헬터 스켈터> 《월간미술》 1992년 7월
<미국말 배우기(Learing American)>

1992년엔 박경미의 기획으로 국제갤러리에서 <임충섭전>이 열렸고, 7월 30일엔 대전엑스포93을 빌미로 보니토 올리바의 기획전과 더불어 <20/21세기 예술 심포지움>이 열려 이름난 해외의 평론가와 국내의 평론가가 조우하는 첫자리가 마련됐고, 연말엔 큐레이터 김선정이 귀국했으며, 비슷한 시기인 12월 19일엔 이불 김형태 등이 참가한 <바이오인스톨레이션>전이 열려 소위 ‘신세대미술’의 도래를 알렸다.

1993년에 박모가 발표한 글과 작품:
<미주 이민사회의 미술과 복합매체> 《가나아트》 1993년 1/2월
<사진과 미디어이미지의 사용의 선구자, 존 발데사리> 《월간미술》 1993년 3월
<유머와 역설로 파헤치는 부조리-아이다 아펠브르그> 《월간미술》 1993년 6월
<환경파괴를 경고하는 가상의 숲-로버트 고버전> 《월간미술》 1993년 7월
<전통의 바람-3> <십장생도-미국식>

금융실명제 덕분에 미술시장이 얼어붙은 1993년엔, 엄혁 김수기 김진송 등이 주축이 된 현실문화연구가 앤솔로지 《압구정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를 발간하며 본격적인 문화연구의 시발을 알렸고, 같은 해 3월 3일엔 예술의 전당 등에서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이 펼쳐졌고, 같은 달 14일엔 덕원미술관에서 이불 조덕현 최정화 윤동구 등이 참가한 <성형의 봄>이 열렸고, 4월 10일 호암갤러리는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을 열어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마지막을 불태웠으며, 같은 달 15일엔 구본창이 갤러리서미에서 <구본창전>을 열어 뮤제알적인 굿바이 파라다이스 시리즈를 선보였고, 6월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황금사자상을 탔으며, 7월 31일엔 <휘트니비엔날레93>(3.4~6.20)가 통째로 수입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휘트니비엔날레서울>전의 이름으로 대단원의 막을 열었고(당시 평론가 정헌이는 월간미술 9월호에 “우리는 휘트니의 충실한 바이어인가?”란 글을 기고했다), 10월 15일 뉴욕 퀸즈뮤지엄에서 이영철과 제인 파퍼의 기획으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전이 개최됐다. 박모는 <태평양을 건너서>의 실현 과정에서 전시 주관 및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다.

1994년에 박모가 발표한 글과 작품:
<집요한 반복, 거대한 풍경, 30대 설치 미술가 앤 해밀턴> 《월간미술》 1994년 4월
<태평양을 건너서: Across the Pacific> 《미술세계》 1994년 4월
<또 하나의 경계선과 그 가능성> 《가나아트》 1994년 7/8월
<무제 시리즈(untitled series)>
<칠성 사이다(Chilsung Cider)>
<호모 아이텐트로푸스(Homo Identropus)>
*박모는 이 작업을 자화상으로 그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접합점, 교차, 합류(Junction)>
<무제(untitled)>
<무제(untitled)>
*미제 야구방망이를 간장에 담군 것.
<식탁용 의자(Country Style Dining Chair)>
<삼위일체(Trinity)>
<쓰리 스타 쑈(Three Star Show)>

1994년 2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민중미술 15년전: 1980-1994>을 기점으로 민중미술은 당대성을 상실했고, 이영철은 <태평양을 건너서>에 화답하는 형식으로《상황과 인식》이라는 시의적절한 평론집을 발간했다. 3월 17일 갤러리이콘에선 파리 제1대학에서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서 언어의 인식>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장영혜가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달 26일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여성, 그 다름과 힘>전(윤석남 김수자 조경숙 박영숙 오경화 등 참가)의 오프닝에선 전투적인 이불이 벌거벗은 채 곡괭이를 휘둘렀다.

6월 24일엔 경주선재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키엔홀츠, 길버트와 조지, 야수마사 모리무라 등의 작품을 동원한 <휴먼, 환경 그리고 미래>전이 열렸고(이 전시는 후미오 난조의 기획전에서 몇몇 작품을 빌려와 만든 전시였다), 8월 20일엔 호암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전이 개최됐는데, 오프닝 당일에 《빌리지보이스》를 모방한 무가지인 <인서울매거진>의 창간호가 배포됐다.

1995년 한국에 귀국하기 전의 박모는 소호의 드로잉센터 옆 건물(과거 팻헌 갤러리 자리)에 약 140평의 현대미술 전시장(뉴욕인터아트프로그램[New York Inter Art Program])을 설립하는 프로젝트(대표 최성호, 운영위원 임충섭 존배 이영철 홍가이 박모)에 관여하고 있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뉴욕인터아트프로그램의 기본 취지는 마이너인저리에서의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한국 작가의 국제적 활동을 지원하자는 데 있었다.

뉴욕인터아트프로그램의 실현이 무산된 후 박모는 sadi의 기초과정에서 드로잉 컨셉트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귀국한다. 그가 sadi의 교수직을 맡았던 이유는, (2002년 포럼에이에 게재된 인터뷰에 따르면) 졸업 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받았던 교육이 1980년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후진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학미술교육에 대한 소명의식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교수직은 불과 4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미술교육에 대한 그의 남다른 실천의식은 sadi 교수직을 사임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일반 강사’로서의 활동으로 드러난다. 뉴욕을 떠날 때, 박모는 “정체성에 관한 한 나는 이제 졸업했다”라고 말했고, 귀국후의 어느 시점에서, ‘박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박모’라는 이름을 버리고 ‘박이소’라는 새 이름으로 개명하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박모란 이름은 국내에서도 한동안 사용됐다. 귀국한 해 박모는 약 15일간 ‘비공식’적인 두 번째 단식을 감행한다.

그리고 1995년은 ‘미술의 해’가 됐고(조직위원장 이대원), 엄청나게 많은 전시와 카셀도쿠멘타에 맞먹는 예산을 자랑하는 광주비엔날레가 열렸다(전시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떼를 지어 이동하던 도우미 아가씨들의 위용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들을 활용한 작업이 없었다는 점은 참 안타깝다). 이렇게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은 1988년 이후 크게 변화했다. 그것은 국내 대중시각문화의 지형이 변화한 탓도 있었고, 외래문화에 대한 문호가 넓어진 탓도 있었고,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민주화’와 소위 ‘문민화’의 영향도 있었고, 새로운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심리적 공동체가 앙포르멜과 민중미술의 대립이 무너진 자리에서 급성장한 탓도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콘크리트, 고무용기, 제소, 나무 120×75×400cm 1998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콘크리트, 고무용기, 제소, 나무 120×75×400cm 1998



박모의 귀국, 박이소로의 전환, 그리고 양가적 냉소

여러모로 보아 1995년 박모가 귀국을 결심한 것은 분명 전략적이었을 테다. 아니, 귀국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한국미술계의 급작스런 변화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가 1995년 귀국하기는 했지만 그가 작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획득한 것은 IMF로 상징되는 금융위기 이후고, 또 아트선재센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작가군이 형성된 이후의 일이다. 만약 그가 좀 더 일찍 귀국하거나, 좀 더 늦게 귀국했다면 어땠을까? 과거를 놓고 만약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부질없지만, 그가 좀 더 일찍 귀국해 최정화와 이불 등 1980년대 후반의 한국이 배태한 새로운 종류의 예술가들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에 함께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는 일은 즐겁다. 그가 서울을 방문한 <휘트니비엔날레>전에 작가로서 화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울에 좀 더 일찍 대안공간이 만들어졌더라면 현재의 지형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85년 프랫인스티튜트를 졸업한 박철호’는 박모로서 약 10년간 뉴욕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졸업한 해 9월에 문을 연 대안공간 마이너인저리를 통해 엄연한 ‘미국 문화계의 소외된 일부’로 활동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정치학이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토크니즘’을 활용해 자신의 입지를 넓히지는 않았다. 스스로에게 윤리적으로 엄격해 성격상 ‘토크니스트’로 나서지 못했던 것이니, ‘못했다’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다.

일부 유학생 출신 재미 한국인 작가들이 코리안아메리칸 행세를 하며 미국의 주류사회가 아시아 작가에게 허락하는 조그만 기회를 차지하려 발버둥 칠 때, 필경 그는 큰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 또한 정체성의 정치학이나 탈식민주의의 자장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는 귀국 후 다소간 양가적 감정에 빠져있었던 같다. 예를 들어, 이번 ‘유작전’에 선보인 그레고리 마스와의 인터뷰(1998년)에서 그가 인터뷰어의 몇몇 질문에 간단히 구석에 몰려 버리는 까닭은 당시 그의 작업이 여전히 주류 사회에 대한 비판과 냉소의 맥락·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 선보인 민영순과의 인터뷰(2004년)에서 ‘우울하면 조울증 치료제나 드시라’고 심한 말을 내뱉는 까닭은, 그가 정체성의 정치학이 제시하는 고지식한 ‘정치적 올바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4살 연상의 동료 예술가의 모습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모의 그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나를 대할 때에도 명확히 드러났었다(내가 그와 정식으로 인사를 한 것은 2000년 초, 그러니까 아트선재센터에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부터다). 미국의 선례를 따라 동성애자인권운동을 벌이고 글을 쓴 경력이 있는 나에게 그는 심술 맞은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의 의중에 일관된 바는 정체성의 정치학에 따라 ‘피해자의 게임·예술’을 펼치는 게 추악하고 손쉬운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심통은 내가 참가한 무크지 《디자인|텍스트》에 대해선 반대로 작용, 이번에는 ‘아시아의 꼬마들이 백인 지식인들처럼 멋이나 부린다’는 것이 그의 불평이었다. 거꾸로 내겐 그가 노래방에서 다소간 자학적인 태도로 ‘정직성’을 부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영 갑갑하고 짜증나는 일이었고, 따라서 그와 진지하게 대화하기는 어려웠다. 그와의 대화가 편해진 것은 내가 2001년 12월 계간지 《공예와 문화》를 낸 뒤의 일로, 그는 내가 한국의 전통을 동시대적인 무엇인가로 번안해내는 일에 집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로 내게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콤플렉스나 트라우마(정시적 상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박이소는 내게서 약간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발견한 뒤 무척 만족스러워 했고, 몇 번 전화 통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만나기만 하면 “예술은 이정우 씨를 무시하는데 이정우 씨는 예술을 짝사랑한다”고 놀려먹는 일을 잊지 않았고, 작업에 대해 물었을 때 한 번도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내가 어떤 종류의 상황의 개선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마다 얄궂은 웃음을 날리며 비웃었는데, 사실 그것은 자신의 과거 혹은 욕망을 향한 것이었을 테다. 나는 그가 언제나 개혁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단적인 예를 들어, 한 때 뉴욕에서 박모와 이영철과 코디 최는 거의 ‘삼총사’였다는 데, 한국에서의 모습만을 아는 후배 세대들에게 이 세 명의 조합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당시 그들을 한데 묶었던 공통의 열정은, 당연 백인 사회를 향한 아시아 남성들의 정치적 발언의 욕구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개혁의 욕망’이란 애초에 권력의 부조리를 담고 있는 법이란 것을 깨달은 이후 매우 시니컬한 블랙 유머의 세계에 빠져 들어간 것이라 추론한다. 그것은 그가 ‘나는 개혁이나 발언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고 누차 강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잡지 기고문들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광명쇼핑센터> 합판, 조명장치, 종이, 연필 160×230×145cm 2003

<광명쇼핑센터> 합판, 조명장치, 종이, 연필 160×230×145cm 2003



박모의 잡지 기고문들; 태도의 변화 이전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모는 월간미술과 가나아트 등에 인상적인 평문들을 기고한 빼어난 평자였다. 1990년 월간미술 4월호에 실린 “서울-뉴욕 미술교류, 무엇이 문제인가”는 아마 그의 글 가운데 가장 직설적인 평문일 것으로, 스스로도 서두에 “이글은 서울과 뉴욕간 미술문화제도상의 차이, 한국작가들의 발표무대, 재미작가들의 실상 등을 살펴보면서 서울-뉴욕 간의 미술문화교류의 실상과 허상을 파헤치고, 나아가 진정한 문화교류의 의미와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고 밝힌바 있다. 그가 뉴욕 미술계의 구조를 간단한 다이어그램으로 정리한 것이나, 한국인 작가의 처지를 3중 소외의 구조로 정리한 것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재밌다.

하지만 대학시절의 내게 가장 논쟁적인 텍스트로 기억된 기사는 《월간미술》 1991년 1월호에 실린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체와 한국미술”이고,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기사는 《월간미술》 1991년 6월호에 게재된 “미술의 고정관념을 깨는 연출가 - 데이빗 해먼즈”와 1992년 7월호에 지면화된 “90년대 미국 서부미술이 준 충격 - 헬터 스켈터전”이었다. 첫째 것은 한국의 미술을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이야기한 가장 설득력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고, 둘째 것은 소박한 설치 작업들이 보여주는 블랙 유머에 맛을 들이는 계기가 됐고, 셋째 것은 1993년의 휘트니비엔날레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흐름을 인지하는 중요한 기회가 됐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박모는 잡지에 더 이상 기고문을 싣지 않았지만, 1997년 현실문화연구에서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의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번역·출간했고, 1999년에는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번역했다(1998년 <도시와 영상>전에서 박이소란 이름을 썼지만, 《문화연구와 문화이론》도 박모란 이름으로 번역·출간됐다). 이 두 권의 책 모두 미지의 독자들을 계몽하고픈 욕망 없이는 번역·출간하기 어려운 것들이다(그는 출판사로부터 번역비 3,000만원을 못 받았다며 제자인 모 작가에게 자기 대신 번역비를 받아서 작품 제작에 사용하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진담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우리들의 재능을 꽃피우자

‘세상을 뜨기 직전의 그’라고 해서 개혁에의 욕망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생전의 박모가 마지막으로 기획한 전시는 2003년 5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중정에서 펼친 대학원생들의 그룹전 <재능을 꽃피우자>였는데, 그가 쓴 전시 발문 ‘재능을 꽃피우자’에는 분명 어떤 순진한 희망사항이 숨어있었다. 그 글을 학생이 쓴 것으로 착각해 전시를 보러간 (한마디로 속아 넘어간) 나를 보고 실실 (비)웃던 작가는, 자신의 학생들에게서 좀 더 나은 미래를 보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의 글들을 다시 읽고,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아도, 내내 풀리지 않는 한 가지 큰 의문이 있다. 왜 그의 꿈은 그토록 내면적으로 윤리적이야 했을까? 그가 자신에게 그토록 윤리적으로 엄격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옛날 옷을 꺼내 입고 있었고, 나는 ‘만면에 이상한 웃음을 띠고 있는 그’에게 소수자의 윤리적 엄격함은 결국 굴절된 잘난 척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는데, 그는 나와 헤어질 때 ‘앞으론 긍정적으로 살며 긍정적인 작업을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답이 듣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생전의 작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지독한 홀아비 냄새가 함께 되살아나곤 한다. 가끔은 보고 싶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행복해요> 혼합재료 700×4200cm 2004

<우리는 행복해요> 혼합재료 700×4200cm 2004



잠정적인 추론·결론·의문: 상당한 비약을 포함한

첫째. 적어도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박모는 미국현대미술계의 거대지형과 한국현대미술의 지형 모두를 이해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독일현대미술계의 거대지형과 한국현대미술의 경우라면, 역시 안규철. 그렇다면 프랑스의 경우는?). 그러나 그는 양 지형의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의 차이나 위계를 이용해 개인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고, 지형학적 위치를 이용해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낮게 평가했다. 그렇다면 그의 ‘잘난 척’은 ‘나는 이미 그 단계에 가봤다’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이었을까? 과연 미술은 윤리적인 필요가 있는가? 혹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둘째. 1990년대를 불균형하게 양분하는 금융위기 이후 한국현대미술계에서 박이소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데, 그 역할은 언술하기 묘한 상담자 혹은 정신적 지주(라기 보다는 정서적으로 믿고 의지할만한 ‘무직자 삼촌’에 가까운)의 그것이었다. 그 모호한 위상은 대학교수직를 사임하면서 강화됐지만 에르메스미술상을 타거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작가로 선정되면서부터 다소 약화됐다. 그에겐 박철호와 박모, 박이소를 하나로 재통합시키고 싶은 욕망이 없었을까?

셋째.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알브레이트 뒤러를 연구하면서 ‘나는 뒤러가 가장 훌륭한 작가이기 때문에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독일적인 토착 예술가와 서유럽적인 르네상스의 예술가라는 이질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그 둘을 통합하고자 애쓰는 점이 흥미로워서 연구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뒤러는 양자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결코 둘을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마찬가지로 박철호·박모·박이소는 서양 현대미술의 리터러시를 거의 완벽하게 습득한 자가 토착적인 예술가의 정체성과 서구적인 현대예술가의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대상이 될 법하다. 그러나 박이소는 그 둘을 통합시키지 못한 게 아니라 통합시키려 들지 않았다. 비서구 출신의 작가는 영원히 이러한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따라서 최정화와 박이소가 서로의 작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박철호·박모·박이소에게는 개인사적으로도 하나의 단절이 존재한다. 아직 한국인들이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획득하지 못했던 시절, 마이너리티의 대행인으로서 활동했던 시기와, 한국인들이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 유사 선지자적 태도를 견지하며 언어로 쉬이 포섭되지 않는 작업을 시도했던 시기 사이의 단절 말이다.

넷째. 하지만 언제고 그에겐 어린이처럼 순진한 희망이 함께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실패하는 프로젝트만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지만, 또 거의 실패하는 프로젝트에 진지하게 임했지만, 늘 실패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가 2000년 <무제(표류)>를 준비할 때, 말도 안 되는 실험이라고 생각한 나는, 작가가 실패할 것을 알고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지나치게 개념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정작 실패했을 때, 크게 낙담한 작가는 작업실에서 한동안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에겐 매순간이 희망의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일종의 통일을 위한 플럭서스-부적인 <비무장지대(D.M.Z.) 해제를 위한 실용적인 제안>(1988)에서도 그는 진심이었을까?
Posted by Exhib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