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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사물들

2020.11.03 15:36

디지털 이미지를 참고해 평면적 레이어를 그려온 전현선이 개인전 <열매와 모서리(From Fig to Cone)>(10. 15~11. 14 갤러리2)를 열어 신작 21점을 선보였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들쭉날쭉 이상한 ‘정물화’로 시간과 공간, 관계와 소통의 상대성을 탐구했다. 이곳저곳 널린 물체를 단서 삼아 시시각각 달라지는 ‘너와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 김해리 기자



<열매에서 기둥> 캔버스에 수채 180×130cm 2020

토끼를 따라 굴에 뛰어든 앨리스는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모험 끝에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상식과 법칙, 요상한 말을 건네는 고양이와 카드 병정이 당연한 원더랜드다. 전현선은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호한 사물을 펼친 숲속 원더랜드에 관객을 초대했다. 21점의 신작으로 2년 만에 개최한 개인전 <열매와 모서리>는 시간과 공간, 관계와 소통의 ‘상대성’을 탐구한 결과. 작가는 피차를 지켜보고 의심하는 거대한 원기둥, 혼자만 훌쩍 자란 무화과가 덩그러니 놓인 ‘정물화’를 선보였다. “크기 가늠에 대해 생각했다. 열매는 구체적인 대상, 모서리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선의 교차점이다. 두 요소를 옆에 대봐도 형상의 실제 사이즈를 감지하기란 어렵고, 그보다 부질없다. 오히려 나는 열매와 모서리의 상대성 자체, 그 사이에 생겨나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은유와 비유로 인간을 다루는 고전 동화의 방식으로. 특히 숲은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정물이 된 나와 남의 기묘한 만남을 마주한 우리는 자문한다. ‘정말 나는 누구일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의 모서리> 캔버스에 수채 240×130cm 2020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시간과 공간에 따른 물질 변화 현상에 주목했다. 이전에는 화면을 외부와 무관한 무중력의 납작한 평면으로 여겼다면 신작에서는 사물이 차지하는 시공간의 좌표로 가정했다. 개인전 출품작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한 <시간과 모서리>(2020). 여기엔 시공에 대한 작가의 사고 실험이 들어 있다. 서부극이 펼쳐질 듯한 황량한 벌판에 열매와 원뿔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원뿔이 떠난 자리엔 검게 익은 열매가, 열매 같은 도형이, 도형을 닮은 불꽃이 끝말잇기처럼 연이어 나타난다. 하단에는 흰 원뿔이 사막, 숲, 호수라는 다른 배경에 놓여 있다. 작가는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 한 장소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사물을 사진 찍듯 그리고, 마지막에는 장소만 바꾸는 변칙을 줬다. 긴장감 넘치는 내러티브, 현란한 액션은 없지만 알쏭달쏭한 게스트가 왔다가는 시퀀스다.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지만 사실 입체적인 시간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사물들의 판타지 스토리다.
이후 전현선은 180cm 높이의 연작 8점을 제작한다. ‘From A to B’ 형식을 한 각 작품의 영문 부제는 A에서 B까지 변모해가는 시간과 공간을 암시한다. 낮게 깔린 지평선에 놓인 가지각색의 만남을 둘러보자. 색면에 숨어 빼꼼 가지를 내민 나무, 전조등을 비춰 서로의 몸을 더듬는 원기둥, 닿을락 말락 아찔하게 쌓인 성냥과 각목···. 그 주변엔 팔랑팔랑 맴도는 나비, 임의의 장면을 뽑은 프린트물, 붓을 땔감 삼아 피어오르는 모닥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것이 진짜 크기고, 가짜 장치인지,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분간할 수 없다. 일관된 코드 읽기가 어려운 이곳은, 그야말로 현실의 물리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사물들의 나라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두고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인물이든 도형이든 그릴 때의 마음은 같다. 사람을 다루더라도 꼭 그 형상이 있을 필요는 없다. 대면한 순간 영향을 주고받지만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관계 자체에 중점을 뒀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살다보면 중요하다 싶던 것도 순간이기 마련이다.” 여기에선 내가 잘못된 걸까, 네가 달라진 걸까, 이것이 중요할까, 저것이 진실일까를 따질 필요 없다. 이곳저곳 널린 물체를 단서 삼아 시시각각 달라지는 나와 너의 모습을 마주하면 된다. 둥글둥글해서 이제 다 알 것 같다가도, 금세 뾰족한 원뿔을 쓰고 나타나고 마는 게 동상이몽의  타인이다. 



<녹색에서 흰색> 캔버스에 수채 180×110cm 2020

한편 전현선은 인터넷에서 모티프를 낚아온다. 판판하게 눌린 풍경, 인공적인 그러데이션, 자글자글 깨진 픽셀 형상의 산과 나무. 검색어 하나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이미지의 행렬과 들쭉날쭉한 해상도의 비물질 파일을 회화로 변환했다. 작가는 눈앞의 사물을 보고 그리는 정물화 전통을 외려 “특이한 것”으로 칭하며 인터넷 창들의 무의미한 겹침, 전자 기기의 액정 불빛을 평면적인 구성과 높은 채도로 “솔직하게” 반영했다. 여기저기서 포착되는 인터넷 이미지는 소재의 수집 과정을 가리킬 뿐 아니라 가상 공간에서 이뤄지는 피상적인 만남과 단편적인 관계를 시사한다. 또한 작가는 모든 작품을 캔버스에 수채로 그린다. 잘 마르고 흡수되는 수채의 특성상 레이어를 여러 차례 겹쳐 빠르게 덧칠했다. 톡톡 얹힌 수채 물감은 평평한 표면에 타격감과 속도감을 더해 비현실적인 시공간의 감각을 강화한다. “수채화로 그릴 땐 이 터치들이 모이고 겹쳐서 무엇을 만들지 생각한다. 가만히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점을,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상태를 그리려 한다.” 전현선의 작업은 주제와 매체에서 모두 비결정적이고 유기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 현재 작가는 올 연말에 열릴 제20회 송은미술대상전을 준비 중. 검은색에서 시작해 흰색으로 끝나는 ‘회화의 인생’을 선보일 계획이다.

전현선 / 1989년 인천 출생. 이화여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P21(2019), 대안공간루프(2018), 위켄드(2017), 이화익갤러리(2016), 플레이스막(2015) 등에서 개인전 개최. <동그라미에게>(의외의조합 2020), <현대회화의 모험: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19), <이야기 없는 이야기>(갤러리룩스 2017), <뿔의 자리> (인사미술공간 2016) 등의 단체전 참여. 종근당 예술지상(2017) 수상.
Posted by 김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