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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경, 오늘의 ‘진경’

2020.10.06 13:56

섬세한 동양화법을 구사하는 이진주가 개인전 <사각 死角 (The Unperceived)>(9. 9~2021. 2. 14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을 개최했다. 14m 길이의 대형 신작과 설치 회화 등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작가는 집요한 관찰과 치밀한 묘사로 유기적이면서도 이질적인 현시대의 면면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초현실적 풍경이 아니라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린 ‘진경’이다. / 김해리 기자



<사각> 리넨에 동양화 안료, 아크릴릭 각 122×488cm, 122×488cm, 122×244cm, 122×220cm 2020

동양화 감상은 눈으로 보는 간화(看畵)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독화(讀畵)라 한다. 그린 이의 마음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읽을거리가 빼곡히 쌓여 있는 그림을 독화해보자. 검붉은 진창에 머리를 처박은 여성, 고무나무의 수액 채취에 열중한 뒷모습, 무기력한 미성년의 아이, 곤히 잠든 갓난아기. 바짝 말라가는 국화, 거꾸로 매달린 박쥐, 달큼한 무화과, 떠내려가는 황금 상자, 중심 잃은 형광 폴대, 그물, 야구공, 의자, 밧줄, 낫···. 화면의 중심도, 주제도, 경중도 없는 그림에서 작가의 심상을 읽어내려 할수록 미궁에 빠진다. 세밀하다 못해 치밀한 동양화법으로 ‘기억’을 사유하는 이진주가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에서 개인전 <사각 死角 (The Unperceived)>을 열었다. 14m 길이의 대형 신작을 비롯해 총 7점의 회화와 설치로 전시를 꾸렸다. 집요한 관찰과 정교한 묘사로 ‘불완전한 풍경’을 그려온 작가. 그 풍경에서 이진주의 어떤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사각>

반지하 전시 공간에 A자 모양의 회화 설치물 <사각>이 비스듬히 서 있다. 반 칸 높은 곳에서 이를 내려다보면 두 개의 긴 그림이 예각삼각형의 가장 날렵한 꼭짓점을 만든다. 좌우로 발을 움직여도 어느 한 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가까이서 차근차근 뜯어보기로 한다.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 터진 그물 매듭 한 코까지 다 그리는 이진주의 작풍은 그 시간과 수고만큼 공들여 보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각자 진지한 행위에 몰두하지만 그림은 소란스럽거나 수다스럽지 않다. 이진주는 세밀한 이미지로 화면을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특정 내러티브를 가볍게 튕겨낸다. 전시 제목이자 대형 신작명인 ‘사각’은 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는, 그렇기에 일반의 관심과 영향에서 벗어나는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작가는 가시적 삶 이면에 관한 고민을 작품에 녹였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볼 수 없거나 보지 않는 풍경과 그에 담긴 다층적 진실을 현시한다. “나는 오랫동안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의 진짜 모습을 생각해왔다. 우리의 언어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지만 삶의 면면에서 시제를 뛰어넘는 풍경을 마주하곤 한다. 같은 물리적 시공간을 경험할지라도 각자의 기억, 감정,  상상에 기대어 풍경을 해석하고 인지한다. ‘본다’는 늘 ‘주관적인 불완전한 보기’다.”

 


<사각>(부분)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주관적 진경’으로 작품을 수식했다. 한국 동양화 전통에서 ‘진경’이란 중국의 관념적 산수화법에서 탈피해 실재하는 우리나라의 경치를 그리며 사용된 단어다. 이진주는 각 대상을 실감나게 묘사하되 이질적인 양상 그대로를 공존하게 만들어 개인이 다 헤아릴 수 없는 ‘동시대의 진경’을 만들어냈다. 작가의 이전 작업을 ‘초현실적’ ‘심리 풍경화’라 일컫던 데서 ‘주관적 진경’으로 변모한 것은 기억을 다루는 태도가 사회적 관점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과 일상에서 비롯된 내면 풍경화일지라도 ‘이것이 과연 나 혼자만의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각>에서는 일상 소재와 인물을 알레고리 삼아 정치, 환경, 여성, 인류의 문제를 드러냈다. 맥락이 툭툭 끊겼을지라도 유기적으로 놓인 군상은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갖고 살아가지만 공동체로서의 의식을 공유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기억은 개인의 온전한 산물이 아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사회 시스템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거나 갱신된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이상 세계를 향한 열망을 꿈꾸고 예술의 전복적 힘을 믿는 초현실주의적 풍경이라기보다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린 우리의 진경이다. 



이진주 개인전 <사각> 전경 2020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

움푹 파인 A자 구조물의 밑변은 세 폭 제단화처럼 활용됐다. 새까만 검은 배경에 희뿌연 재가 흩날리는 가운데, 가부좌를 튼 성인 여성과 그 어깨에 올라탄 소녀가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세상만사를 어디서든 듣고 보는 ‘모녀관음상’ 같다. 이는 실제 작가 자신과 딸을 모델 삼아 변형한 인물로, 이진주는 각자도생(各自圖生)한다지만 실은 공명지조(共命之鳥)하는 현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편 그는 해당 이미지의 바로 뒷면이자 A자 구조물의 안쪽 면, 즉 전시장을 높은 곳에서 관망해야만 겨우 눈에 닿는 사각지대에 합장하는 손을 그려넣었다. 이 의미심장한 기도가 불완전한 풍경을 딛고 살아갈 모든 생명을 위한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 



<그것의 중심> 리넨에 동양화 안료 45.4×53×3.3cm 2017

이외에도 전시장 곳곳엔 <허망한 수사들>(2020), <뒤따라오는 것>(2020), <정오에>(2020), <(불)가능한 장면> (2020), <검은, 얼굴들>(2017), <그것의 중심>(2017)이 놓여 있다. 그중 <그것의 중심>은 이진주의 작업 태도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차분한 손 하나가 주렁주렁 매달린 갖가지 사물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어느 한 곳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드라마를 만들지도, 특정 사건을 논리적으로 구술하지도 않지만 “티끌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듯, 집요하게 들여다볼 때 가닿는 세계” 그대로를 진중하게 묘사하고 있다. 향후 작가는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할 예정. 작업적으로는 ‘구조물’을 활용해 평면회화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탐구할 계획이다. 이는 복수의 현실과 세밀한 이미지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실험이다. “내 작업은 개인적 내러티브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고정된 독백에 그치지 않기를 원한다. 개인과 사회는 이항 대립적 개념이 아니다. 개인의 주관 속에서도 사회의 일부를 만날 수 있다.”


이진주 / 1980년 서울 출생. 
홍익대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모스크바 트라이엄프갤러리(2019), 자카르타 에드윈즈갤러리 (2018), 아라리오갤러리(2017), 뉴욕 두산갤러리(2014), 갤러리현대 16번지(2011), 갤러리정미소(2008) 등에서 개인전 개최. <광주화루>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19), <프리퀄 1999-2019>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18), <무진기행>(금호미술관 2016), <판타시아: 동아시아 페미니즘>(서울시립미술관 2015), <Wonderful Pictures> (일민미술관 2010) 등의 단체전 참여.

Posted by 김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