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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과 ‘밈’의 미술

2020.08.05 10:15

인세인박 개인전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와 <그림을 그립시다>(6. 25~8. 15 아라리오갤러리)가 동시에 열렸다. 그는 대중문화와 사회 이슈 전반을 가로지르는 폭넓은 관심사를 가진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한 소재는 ‘짤방’과 ‘밈’. 영상과 회화라는 상이한 매체로 꾸민 두 전시는 각각 레트로 미디어의 감각을 밀어붙이고, 기존 미술시스템에 의심을 품는다. / 조현대 기자



<나는 아무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전 전경 2020 아라리오갤러리

한 작가의 두 개인전이 동시에 열렸다. 인세인박의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이하 <아무 생각>)와 <그림을 그립시다>가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최된 것. 각 전시 출품작의 매체도 판이하다. 지하층에는 영상 및 미디어작업을 소개하는 <아무 생각>이, 2층에는 풍경화가 내걸린 <그림을 그립시다>가 펼쳐졌다. 인세인박은 무슨 생각으로 다른 콘셉트의 전시를 한번에 선보였을까? 전시 제목은 이목구비를 직직 그어놓은 멍한 표정의 ‘짤방’과 함께 유행했던 문구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작가에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인세인박은 심지어 전시마다 서로 다른 작가명을 쓸 요량이었다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의 ‘insane’을 활동명으로 사용하는 그가 떠올린 또 하나의 이름은 ‘다나까(danakka)’였다. “일본 만화 속 나랑 똑 닮은 캐릭터의 이름이자, 나의 오랜 별명이다. 20년 넘게 인터넷 ID로 사용 중이다. 이를 요즘 유행하는 ‘부캐’처럼 불러와 전시와 작가, 작품 사이에 써먹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부캐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래한 신조어 ‘부캐릭터’의 준말로, 더 흥미로운 플레이를 위해 새로 추가한 캐릭터를 의미한다. 이 단어가 일상 영역으로 들어오며 ‘누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인격체인 듯 행동할 때’를 가리키는 말로 재정의되었다. 실제로 두 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만큼 작가가 갖고 있는 관심과 시야의 폭이 넓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전략일지 모른다.



<나는 아무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싱글채널 비디오 25초 2020

먼저 <아무 생각>을 살펴보자. 계단을 따라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그린 스크린(green screen)을 연상시키는 녹색 커튼이 전시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커튼을 여는 순간 인세인박이 소환한 레트로 미디어의 세계가 펼쳐진다. 작가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구식 브라운관 TV, 컴퓨터 모니터를 주된 송출 장치로 활용했다. 화면에는 1990년대 MTV 스타일의 그래픽 영상, KKK단으로 변장한 작가가 등장하는 영상, 인간 여성을 닮은 AI 로봇을 조야한 그래픽으로 재구성한 애니메이션 영상 등이 반복된다. 작가가 직접 샘플링한 사운드는 전시장 여기저기 설치된 스피커에서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며 감각적 혼란을 가중한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재생, 일시정지, 정지 버튼과 마우스 커서의 아이콘을 형상화한 네온사인도 눈에 띈다.
이처럼 <아무 생각>에서는 인세인박의 여러 작품이 저마다 존재감을 뽐낸다. 때문에 작품끼리 특정한 맥락은 이루지 않는다. ‘MTV 키드’라 자칭하는 그가 대중 매체의 문법과 감성을 오로지 감각만으로 관객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사실 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근데 졸업하고 보니 혼자 벽에 못 하나 박을 줄 모르더라. 조각과 출신 동료들과 함께 작업실을 쓰며 여러 도구와 매체를 다루는 법을 배워 나갔다. 흥미나 필요에 의해 하나씩 익혀서 그런지, 기술적 완성도가 완벽한 편은 아니다. 이 전시는 새로 익힌 영상 툴로 디지털 이미지를 갖고 놀기 위한 튜토리얼이자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시장 바닥 군데군데 뿌려진 작고 네모난 타일 또한 비트 단위의 픽셀로 이뤄진 디지털 이미지를 작가 나름대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Joy of Painting> 캔버스에 유채 60.6 x 45.5 cm 2020

2층 전시 <그림을 그립시다>는 인세인박의 첫 회화 개인전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출품작 모두 작가 자신의 오리지널 회화는 아니다. 흔히 ‘밥 아저씨’로 알려진 밥 로스의 그림을 따라 그린 모작이기 때문이다. 밥 로스는 1994년 EBS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 <그림을 그립시다>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림을 그립시다>는 밥 로스가 빠르고 유려한 솜씨로 풍경화를 그리며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유년 시절 이를 애청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일종의 ‘밈(meme)’으로 부활시켰다.
인세인박도 <그림을 그립시다>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시를 준비하며 밥 로스의 작법을 충실히 모방했다. 주로 미국의 웅장한 자연 풍경을 대상으로 삼았던 밥 로스의 그림에서 작가가 선택한 분홍빛 하늘은 묘한 이질감을 준다. 캔버스 하단에는 ‘Insane Bob’이라는 서명을 적어놓기도 했다. 전시장 한 구석에는 ‘그림을 그립시다’의 한 에피소드가 재생된다. 그런데 그 내용에 자세히 귀 기울여 보면 뭔가 이상하다. “오늘은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볼 거예요.” 화면을 들여다보면 역시나 익숙한 추상화 한 점이 합성되어 있다. 이우환의 대표작 <선으로부터>다. 정확히는 이 그림도 밥 로스로 분한 인세인박이 이우환을 모방한 것이다.
1990년대 TV를 보며 자란 세대에게 밥 로스는 생애 처음 만난 화가다. 현대미술 문외한이라면 이우환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래도 밥 로스와 그의 풍경화만큼은 안다. 인세인박은 이러한 상황에 의심을 품는다. “나는 미술시장과 담론 모두 특정 인물, 그룹의 주도로 이뤄져왔다는 사실에 다소 부정적 입장이다. 그래서 서울의 대표적인 화랑가 한가운데에 소위 ‘이발소 그림’을 걸어보고 싶었다. 심지어 이 모작이 팔린다면, 누구의 그림이 팔리는 것일까? 인세인박일까, 밥 로스일까. 아니면 ‘인세인 밥’일까? 이 친숙하고도 낯선 그림을 보며 우리가 속한 미술시스템을 재고해보려 했다.”



<Joy of Painting> 싱글채널 비디오 6분 49초 2020

밥 로스가 종종 내뱉는 “참 쉽죠(That easy)?”라는 말도 어느덧 친숙한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작가는 특히 밥 로스가 실수를 저지른 뒤 “행복한 사고가 일어났군요. 즐겁게 그리면 됩니다. 그게 전부예요.”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덧칠하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 프로그램의 영문 원제가 ‘그리기의 즐거움(The Joys of Painting)’이다. 그렇다면 인세인박에게 미술은 과연 즐거운 일일까?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있다. 밥 로스의 말들이 마치 나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미술 없이 못 살 것 같았던 날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예전에는 욕심도 계획도 많았다면, 이제는 조금 내려놓았다. 혼자 재밌게 갖고 논 것을, 기회가 된다면 잘 보여주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행복한 미술이다.”


인세인박 / 1980년생. 경기대 서양화과 졸업. 아라리오뮤지엄동문모텔Ⅱ (2018), 영은미술관(2012), 신한갤러리(2009) 등에서 개인전 개최. <잘 못 보이고 잘 못 말해진> (복합문화예술공간행화탕 2020), <생생화화> (경기도미술관 2013), <통과의례>(수원시미술전시관 2008) 등의 단체전 참여. 제2회 에트로미술대상(2014) 수상.

Posted by 조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