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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생명력

2020.07.08 10:16

다양한 인물 피사체를 촬영해온 사진작가 전명은. 이번 개인전 <글라이더(Glider)>(5. 28~6. 27 갤러리2)는 도약 직전의 체조 선수와 텅 빈 체조장을 찍은 사진으로 구성됐다. 연속된 시간, 응축된 에너지를 한 컷에 담았다. 작가는 과도기에 내재한 긴장감과 생명력을 찰나의 순간에 포착한다. / 김해리 기자



<Glider PB I>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88x66cm 2019

모두가 숨죽인 시간이 있다. 응원과 함성을 간절한 마음으로만 전하는 시간. 선수는 십수 년간 반복해온 동작을 조용히 복기한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팽팽한 긴장을 허물고 온몸의 예민한 감각을 곤두세워 익숙한 동작을 이어 나간다. 그가 완벽하게 착지했는지 무참히 낙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작가 전명은은 기술에 돌입하기 전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체조 선수와 그 선수들이 퇴장한 텅 빈 체조장을 촬영해 개인전 <글라이더(Glider)>를 열었다. 글라이더는 별다른 기계 장치 없이 바람이나 중력만을 추진력으로 삼는 무동력 비행기다. 작가는 금세 고꾸라질 걸 알면서도 날아보려는 글라이더에 체조 선수를 빗댔다. “철봉 체조 선수가 한 마리의 새처럼 떨어진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이 진짜 날려고 했던 거구나’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동작에 들어가기 전 가만히 숨을 고르고 에너지를 응축하는 선수의 그 마음이 가장 완성된 단계가 아닐까 한다. 사진 역시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Glider PH VI>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68x51cm 2019

그간 전명은은 감각의 전이를 경험하는 인물을 피사체로 삼거나 함께 작업해왔다. 수화로 소리를 듣고 전하는 시각 장애인과의 협업 <나는 본다> 시리즈(2010),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우주의 풍경을 눈앞으로 당겨오려는 아마추어 천문가에 관한 <사진은 학자의 망막> 시리즈(2011~12), 점자로 세상을 읽는 시각 장애인과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 <어떤 사람의 사진>(2015), 기상천외한 도구로 영화의 사운드 이펙트를 만드는 폴리아티스트의 작업을 촬영한 <새와 우산> 시리즈(2014~15). 작가는 자신만의 특수한 방식으로 보고 듣는 사람과 그들이 인지해온 세계를 찍었다. 
전명은에게 체조 선수는 신체의 모든 감각을 일시에 깨워 역동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공감각에 대한 관심은 ‘조각’ 매체에서 출발했다. 그는 조각과 출신이자 조각가 아버지를 두고 있다. 2016~18년에는 이른 나이에 작고한 아버지의 유작 조각을 찍는 <누워 있는 조각가의 시간>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손으로 물질을 매만져 시시각각 변화를 만드는 조각가의 행위와 감각을 사유한다. 특히 연속된 시간 속에서 진화를 거듭하는 조각의 작업 과정이 찰나를 박제하는 사진에도 반영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전명은은 특정한 순간이 다른 시간의 다른 감각으로 이행되는 추상적인 단계를 사진에 담으려 그 모든 것이 압축된 장면을 촬영했다. “선수가 세상에 펼쳐 보이려 준비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순간, 모든 움직임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그게 오히려 살아 있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약 직전,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는 선수의 정지 동작을 담은 <글라이더> 시리즈는 변화하는 시간을 응축해 하나의 물질로 제시하는 조각을 닮아 있다.



<Glider Rings X>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48x36cm 2019

작가는 2016년 처음으로 체조 선수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다. 작년에는 서울 전농초등학교 체조부 여자 아이들의 포트레이트를 찍은 <플로어>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경희대학교 체조부와 연이 닿은 그는 2019년 8월과 11월 사이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20대 남성 선수 6명을 촬영해 <글라이더> 시리즈로 엮었다. <플로어>는 색종이 붙인 전농초 체조장 뒷마당에서 자연광 아래 반짝이는 아이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반면, <글라이더>는 작가가 직접 체조장 안으로 들어가 기구와 인물이 만들어내는 긴장 상태를 포착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사진이라는 반대항의 매체에 녹여낸 것이 <글라이더>의 내용적 측면이라면, 형식에 있어선 단단하게 응결된 에너지의 형태를 환기한다. <Gilder FE Ⅰ>, <Glider PB Ⅰ>, <Glider PH Ⅵ>에서 볼 수 있듯, 선수의 몸에 딱 맞게 잘려 나간 사진의 타이트한 구도는 중력을 거슬러 자세를 취하는 선수의 압박감을 나타낸다. 
전시장 한 쪽 벽면에 일렬로 배치된 <풀(Pool)> 시리즈는 오래된 체조 기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신촌 창천초등학교 체조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공중에 아찔하게 매달린 링, 얼기설기 내린 밧줄, 바닥을 짚고 선 안마, 반듯한 선이 그어진 바닥, 엉성하게 쌓인 빛바랜 매트를 찍은 <풀>은 가볍고도 육중한, 체조장의 이중적 공간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작가는 훨훨 뛰어다니던 선수들이 빠져나가고, 먼지마저 차분히 가라앉은 빈 체육관에서 일렁이는 물을 상상한다. “<글라이더>는 기구와 인체의 조형성, 압축된 시간의 기록이 중요했다면 <풀>은 처음부터 체조장이 아니라 수영장, 내지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나 물웅덩이처럼 느껴졌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뿌리는 새하얀 탄산마그네슘 가루가 파도 거품 같았다. 이 시리즈에선 자유로운 연상이 중요했다.”



<Pool #1>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8x81cm 2019

이처럼 전명은은 사진을 두고 내러티브를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줄거리나 구체적인 스토리를 담지는 않는다. 작가는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내러티브라 부른다. “나는 사진 너머에 있는 것들, 그 배경과 세계에 관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그렇게 하는 게 사진에 어떤 힘을 불어넣기라도 할 것처럼. 사진에 내러티브를 구축한다고 할 때 그건 어떤 줄거리를 담겠다는 뜻이 아니라 사진의 바깥으로 증폭되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싶다는 의미다.” 에너지를 힘껏 모은 채 정지한 체조 선수의 모습에서 비행을 시도하는 글라이더를 생각하고, 열기가 식은 체조장에서 수영장을 보는 작가. 그에게 사진작업은 피사체가 농축해온 삶의 감각에 상상력을 덧입히는 일이다. 이번 전시 이후 작가는 2014년부터 진행해온 <네가 봄이런가> 작업을 발전시킬 계획. 이 시리즈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3월 중순의 풍경을 촬영했다. 변화하는 시공간 속, 피사체의 과도기적 ‘생명력’을 포착하려 한다.


전명은 / 중앙대 조소과 학사, 파리8대학 사진과 석사 졸업. SeMA창고(2019), 아마도예술공간(2017), 캔파운데이션 오래된집(2014), 플레이스막(2013) 등에서 개인전 개최. 서울시립미술관(2020), 하이트컬렉션(2019), 송은아트스페이스(2018), 프랑스 파비옹포퓰레르(2017), 경기도미술관(2016)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Posted by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