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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에 찬 슬랩스틱

2020.06.10 14:36

휘도 판 데어 베르베는 인간의 시련과 삶의 윤회라는 무거운 주제를 ‘웃픈’ 영상작품으로 풀어낸다. / 조현대 기자



<Nummer Veertien, Home> 4K 비디오 54분 2012

네덜란드 작가 휘도 판 데어 베르베(Guido van der Werve)는 언제나 자신의 영상에 직접 출연한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장면은 보는 이로서는 황당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은 끊임없이 ‘넘어지고, 떨어지는’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남겼던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를 떠오르게 한다. 비록 아더르는 작은 돛단배로 태평양을 건너려다 젊은 나이에 실종되어버렸지만, 다행히도 베르베는 15년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한국 첫 개인전 <Trials and Resurrections>(4. 27~7. 11)를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고 2003년부터 2015년 사이 제작한 영상작품 총 8점을 선보였다.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국제 미술기관 ‘데아틀리에(De Ateliers)’의 디렉터 산더 카르스컨스(Xander Karskens)가 협력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베르베 영상의 형식적 특징은 ‘클래식 음악과 영화.’ 클래식의 악장 형식을 빌려와 영상을 구성하거나, 영화처럼 뚜렷한 서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 제목이 알려주듯, 작가는 이 드라마틱한 형식 속에 인간 존재의 ‘시련’과 삶의 ‘윤회’라는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유머로 풀어냈다.



Number zeventien 2채널 비디오 9시간 48분 2015

그의 작품은 제목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첫 작품 제목 <Nummer Twee>는 네덜란드어로 2번, 근작 <Nummer Zeventien>은 15번을 의미한다. <Nummer Twee>(2003)는 그가 나고 자란 암스테르담 교외 주택가를 배경으로 한다. 오프닝 부분에서 작가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다 지나가는 차에 크게 부딪힌다. 이내 유려한 현악기 연주곡이 재생되며 거리에 쓰러진 작가 앞으로 밴 차량이 등장한다. 차에서 내린 5명의 발레리나는 다소 뜬금없는 공연을 펼친다.
이후 작가는 발표하는 영상마다 슬랩스틱 코미디, 음악, 영화적 서사 등의 요소를 변주하거나 가감해가며 작품적 완성도를 높여간다. 빙하를 깨부수며 전진하는 쇄빙선 앞을 유유히 걷고(<Nummer Acht>), 북극점에 선 채로 24시간 동안 자전 반대 방향으로 돌거나(<Nummer Negen>), 존경하는 음악가 라흐마니노프를 기리기 위해 마라톤을 강행한다(<Nummer Dertein>). 심지어 작가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계획을 세우는데, 연습 삼아 오른 남미에서 가장 높은 산 ‘아콩카과’에 올라보고는 곧장 그 계획을 철수해버린다. 그리고 등정을 대신할 신체적 수행을 자신의 침실에서 우스꽝스럽게 반복한다(<Nummer Zeventien>).



 <Trials and Resurrections>전 전경 2020 송은아트스페이스

베르베는 작업 초기 19세기 작곡가의 음악을 사용하다 <Nummer Negen>(2009)부터 자신이 직접 피아노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음악적 요소는 영상의 형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내용 구성 차원에 개입한다. <Nummer Twaalf>(2009)에서 체스판 위 말의 무작위적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음계, 즉 화성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법이 만들어낸 음악을 삽입해 인간 지성과 감각의 한계를 드러내고, <Nummer Veertien>(2012)에서는 자신의 유목적 정체성이 투영된 역사적 인물 알렉산더 대왕과 쇼팽에게 헌정하는 레퀴엠(Requiem)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레퀴엠의 3악장 구성과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 ‘철인 3종 경기’의 형식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작품 속 잠수복과 오리발을 착용한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베르베의 모습은 여전히 웃기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꽤나 철학적이다. 스스로에게 가했던 육체적 괴롭힘은 작품을 통해 삶의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이자, 그 우스꽝스러움도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예술가의 자아와 창작의 고통이다

Posted by 조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