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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고 탄생하라!

2020.06.09 17:35

2018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전소정. 그가 수상작가전으로 <새로운 상점(AU MAGASIN DE NOUVEATUES)>(5. 8~7. 5 아뜰리에에르메스)을 열었다.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모조 근대를 발견한 문학인 이상을 모티프로 삼아 신작 영상과 설치작품을 공개했다. 전시와 함께 발간한 단행본 『ㅁ』은 영상작품에 대한 해설서이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각주다. / 김해리 기자



전소정 개인전 <새로운 상점> 전경

‘사각의내부의사각의내부의사각의내부의사각…’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처럼 무한한 사각 그리드를 만들어내는 이 구절은 한국 근대 문학인 이상(1910~37)의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 중 표제작 ‘AU MAGASIN DE NOUVEATUES’의 첫 문장이다. 이 시는 건축학과를 막 졸업한 이상이 1930년대 경성 모더니티의 핵심 공간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느낀 감각과 사유를 자동기술적으로 풀어낸다. 불어로 된 시 제목과 달리, 그 내용은 일본어, 중국어, 한자, 영어가 뒤섞여 형식 자체만으로 혼종성 짙은 한국 근대기를 은유한다. 꾸준히 문학을 레퍼런스 삼아온 전소정은 이상의 시와 동명의 전시 <새로운 상점(AU MAGASIN DE NOUVEATUES)>을 열어 식민지 조선의 모순을 기민하게 감지한 이상을 모티프로 영상, 조각,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2018년 제18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으로 4개월간 파리 레지던시에 체류한 작가는 경성이 모방한 일본, 일본이 모방한 파리 현지에서 서구 모더니즘을 얼기설기 쌓아올린 한국 근대기에 작은 균열을 내고 새로운 탈주로를 상상한다. “이상은 1930년대 당시 새롭게 생긴 도시 풍경을 건축가로서 경험하고 시에 그 이미지를 담았다. 백여 년의 시차에서 현재를 보는 하나의 장치이자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 축으로 시를 활용했다.”



<절망하고 탄생하라> 비디오 24분 45초 2020
아치형 철골이 짜여 있는 어두컴컴한 전시장. 버려진 공원인지 조야한 상점의 복도인지 알 수 없는 철제 구조물을 통과하다 보면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끈적이게 녹은 지구의 잔해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뚜-’하는 정오의 사이렌 소리에 맞춰 녹아내리는 경성의 모습을 상상했던 시인처럼 전소정은 도시는 물론 지구까지 용해한 소비의 열기를 진열했다. 인체 장기, 오르간 악기, 제도 기관을 연상시키는 <organ>이란 제목처럼 사람의 육신, 정신과 아름다움, 사회 시스템이 투명 플라스틱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다. 소비와 한몸이 된 지구를 구경하고 돌아서면 한국어, 일본어, 불어 내레이션이 따로 또 같이 나오는 영상 <절망하고 탄생하라>를 볼 수 있다. 작품명은 이상의 시 「삼차각설계도」 중 ‘선에관한각서2’의 한 구절 “사람은절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절망하라”에서 연유했다. 탄생하므로 절망하고, 절망한 데서 재탄생하는 인간 삶과 인류 역사. 작가는 이 순환 구조를 단순히 재현 또는 비판하기보다 일방향으로 회전하느라 누락되었던 근대적 감각들을 현재로 소환해낸다.
<절망하고 탄생하라>에서는 서울, 도쿄, 파리의 거리 영상, 다큐멘터리 클립, 오래된 광고 장면들이 비선형적으로 교차한다. 가령 서울 종로구 일대와 인왕산 자락, 도쿄의 백화점과 파리의 지붕이 다양한 시점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드문드문 전 시대의 광고 영상과 다큐멘터리 장면이 튀어나와 도시 풍경을 자르는 것이다. 특히 전소정은 파리 레지던시 생활 중 아무런 장비 없이 맨몸으로 도시의 구조물을 넘는 파쿠르(parkour)에 주목해 영상작업에 녹여냈다. 지붕 사이를 뛰어넘고, 달리기, 매달리기, 올라가기, 균형잡기, 구르기로 도시를 통과하는 파쿠르는 인간의 이동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움직임의 자유를 쟁취하는 수련이자, 거리를 뚫고 나갈 때 발생하는 현기증을 표피 끝에서 체감하는 행위다. 파쿠르 레이서의 움직임에는 인간 정신의 정수에 가닿길 바랐던 근대 모더니스트들의 갈망과 그를 따르고자 우후죽순 생겨난 모조 근대 도시의 어지러운 높이, 위험천만한 속도가 들어 있다. 이상이 매끄럽게 깔린 도로와 위로 솟은 건물이 즐비한 경성의 도시 풍경에서 ‘타’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의 모순을 의식했다면, 전소정은 이상이 포착한 근대성을 난반사시켜 아찔한 촉각과 불협의 사운드로 그 모순을 사방팔방 흩어지게 한다.


<organ> 플라스틱 40x30x40cm 2020
 
이번 전시와 함께, 작가는 영상작업의 해설서이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각주로 단행본 『ㅁ』을 발간했다. ‘ㅁ’이라는 제목은 이상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각 그리드이자, 한자의 입 구(口), 전시장을 연상시키는 큐브로서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한국, 일본, 중국, 프랑스의 이상 애호가들이 모여 편집한 이 책은 그에 대한 동시대적 사유를 각자 분야의 어법으로 풀어낸다. 미술사학자 제롬 글리센슈타인, 건축가 박창현,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인카 앙, 수학자 그레고리 지노, 현대음악 작곡가 정진욱, 과학자 엠마뉴엘 페랑, 영화 평론가 시몽 다니엘루, 비교문학 연구자 사노 마사토, 미술평론가 곽영빈, 소설가 에덴 레빈, 기획자 현소영, 디자이너 강문식이 참여해 각각 설계 도면, 악보, 시, 기하 도형, 평론 등으로 이상을 되새겨본다. 이 가운데 전소정은 「도해된 로봇」이라는 텍스트를 작성했다. 텍스트에서 작가는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근대적인 것과 오래된 것, 체계적인 것과 급조된 것의 모순적인 결합”으로 분해된 로봇의 기괴함, 즉 경성에서 전래한 도시 서울의 불완전한 체계를 해부하고 바라본다. 영상작업뿐 아니라 밴드 활동으로 작사를 해온 전소정은 이번 전시에 문학적 글쓰기를 적극 들여와 시대를 종횡하는 ‘만남’을 지속한다. 향후 작가는 바르셀로나 한네프킨 재단과의 협력으로 2015년작 <먼저 온 미래>의 연장선상에서 작곡가 윤이상의 삶과 음악에 관한 작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전소정 프로필
전소정 / 1982년 부산 출생. 서울대 조소과 학사, 연세대 미디어아트학과 석사 졸업. 송은아트스페이스(2017), 두산갤러리(2015), 인사미술공간(2015) 등에서 개인전 개최. 오타와시립미술관(2020), 국립현대미술관 청주(2019), 아르코미술관(2018),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7), 제11회 광주비엔날레(2016)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폐허』,『EUQITRIC』 등 출판.
Posted by 김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