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FILM

HomeOnlineFILM

그림, 화음… 나치의 진실

2020.04.13 11:27

<작가 미상>은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모티프 삼은 영화다. 제2차 세계 대전 속에서 진실을 직시한 한 화가를 조명한다. / 손현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작가 미상> 2020

나는 작업실에 스스로 고립되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곤 한다. 스크린 너머로 타인의 작업대에 어떤 도구들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 그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관찰한다. 그들은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 삶의 자세한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하고, 안도한다. 나와 타인은 어떻게 닿아 있는가? 바이러스로 마비된 세계, 삶에 침투한 감염의 종식을 바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고립과 연대를 강조하던 2020년 어느 봄날, 나는 나의 친애하는 타인,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작가 미상>(2020)을 만났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2018

쿠르트는 장차 화가가 될 아이다. 어린 쿠르트는 이모 엘리자베트와 함께 간 <퇴폐미술전>에서 텅 빈 눈의 조각상과 시선을 맞춘다. 이모가 말한다. “눈을 돌리지마.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다워.” 그는 버스 경적이 만들어낸 화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예술의 순간을 음미한다. 엘리자베트가 나치에게 강압적으로 끌려가던 날, 쿠르트는 이 끔찍한 장면을 손으로 가려보지만 그 뒤에 맺힌 현실은 잠시 흐려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폭격과 함께 은박지가 쏟아져내리는 전쟁을 목도한 쿠르트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세상의 비밀이라고 여겨지던 것을. 이제 쿠르트는 진실을 찾아내,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종전 후, 쿠르트는 폐허가 된 동독의 거리를 거닐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사랑에 빠지게 될 여인 엘리,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 과거를 은폐한 제반트 교수의 집무실을 바라본다. 이내 쿠르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진실한 리얼리티를 그리는 ‘나, 나, 나’의 길을 선택하며 서독으로 망명한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2018

그는 뒤셀도르프아카데미에 진학해 현대미술의 문법을 습득해 나간다. 쿠르트는 새로운 삶의 진실을 로또 번호로 이해한다. 무작위로 나열된 6개의 숫자가 당첨 번호임을 알아챈 순간의 마법 같은 힘과 그 연결성. 페르펜 교수는 질문한다. “쿠르트, 네가 직접 느꼈기에 완전히 이해한 너의 진실은 어디 있지?” 쿠르트는 흉내 낸 미술작품을 불태우고 자신의 진심을 담아낼 텅 빈 캔버스와 마주한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보았던 어린 시절의 진실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리고 사진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캔버스에 옮겨 그린 사진을 붓질로 흐린다. 앞을 가려 보이지 않던 진실의 순간이 화면에 맺힌다. 그의 그림은 곧 사진이자 진실이 된다. 그가 그린 가족사진과 보도 사진, 이 진실의 순간들은 상을 흐리는 붓질로 서로를 연결한다. 쿠르트의 개별 그림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지만, 함께 연결되는 배열 속에서 진실을 관통하는 화음이 되고 아름다운 로또 번호가 된다.



영화 <작가 미상> 스틸컷 2018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발화 중인가?’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지금 여기, 나의 몸이다. 나는 생각이 몸의 기억을 더듬어 수행될 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진실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경험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미래의 경험을 향해 우리는 몸을 움직여 나갈 수 있다. 나는 작업실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진실을 좇는 또 다른 몸을 찾아 나선다. 끊임없이 움직이다 보면 ‘나, 나, 나’로 연결되는 각자의 화음이 서로의 몸을 관통할 것이다.



손현선 <서서히 떠오르고 지는 면>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00×96.2cm 2019_필자 손현선이 전시 <미치지않는>(페리지갤러리 2019)에서 발표했던 작품. ‘사진’이라는 물질의 속성을 회화적 과정으로 표현하고 드러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작업 구상 단계에서 리히터의 회화 방법론과 작품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Posted by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