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PEOPLE

HomeOnlinePEOPLE

회화, 우연과 필연 사이

2020.04.09 10:39

드로잉 북부터 건물 외벽까지, 다양한 넓이의 평면을 바탕 삼아 그림을 그려온 임자혁. 그가 개인전 <그러는 동안에>(3. 5~4. 18 갤러리기체)를 열고 신작 회화 11점을 공개했다. 다채로운 색채의 크고 작은 붓질이 교차하고, 원과 줄무늬 등 이질적 조형 요소가 조화를 이룬 그의 ‘그림’은 우리의 평범한 삶을 닮았다. / 조현대 기자



<노란색>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193.9cm 2020

가장 원초적인 시각 표현의 매체이자, 오랜 시간 인간의 끊임없는 시지각적 호기심과 탐구의 대상이 되어왔던 ‘회화’. 이를 단순한 조형 요소로 분해해보면 평평한 표면에 그려진 점과 선, 면의 집합체다. 이것이 구체적 형상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 구상과 추상이라는 장르로 분기하고, 여기에 색이 덧입혀져 특정한 감각과 심상이 강조된다. 미술사에서 회화는 주로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것을 지칭해왔고, 또 다른 평면과 재료를 활용한 드로잉, 벽화, 판화 등 주변 장르로 세분화된다. 그리고 이를 쉽고 간편하게 ‘그림’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갤러리기체에서 개인전 <그러는 동안에>를 연 임자혁은 스스로를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소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회화작품 11점을 선보이지만, 그간 그의 그림은 캔버스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대학 재학 시절, 다니던 학교의 도서관 벽에 마스킹 테이프로 고개를 숙이고 학업에 몰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도서관의 사람들>(1998), 건물의 유리 외벽 위 사람의 팔꿈치 안쪽 살갗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형상의 <손가락과 어깨 사이>(2004)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화면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잘 알려준다. 한편, 그는 작은 화면에 일상의 소소한 관찰기를 부지런히 남기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려내는 드로잉들은 그가 캔버스 회화와 대형 벽화를 유연하게 오가는 동력이다.



<연보라> 캔버스에 아크릴릭 90.9×116.7cm 2020

임자혁의 유연함은 ‘어디에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왜 그릴 것인가’에 있어서도 발휘된다. 그는 “작가에게 오랜 시간 고정된 형식이나 주제, 내용을 갖는 것이 어쩌면 부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대신 “그림 그리기란 무엇일까? 군더더기를 다 빼면 그림에는 무엇이 남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고정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태도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지만은 않는다. “나의 관심사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있고, 그 폭은 그리 넓지 않다. 때문에 평면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평면 위에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올려다 놓는 것이 흥미로웠다.”
2018년 개인전 <착륙>(페리지갤러리)에서 ‘색종이 콜라주’를 선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 전시 출품작은 모두 캔버스 회화다. 이는 캔버스에 대한 의미 부여라기보다, 평면에 대한 오랜 관심이 확장 혹은 다각화한 결과다. 작품 제목들이 알려주듯, 굵은 붓으로 시원하게 칠한 ‘노란색’, ‘흰색을 조금 섞은 녹색’, ‘설명하기 어려운 연두’ 등 색채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붓이 화면 위를 움직이며 만든 희미한 빈틈과 결 사이로 다채로운 모양의 색이 세심히 그려져 있다. 이 크고 작은 붓질 사이로 줄무늬 패턴과 원이 화면의 생뚱맞은 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가거나, 무심하게 올라가 있다. 작가는 캔버스에 밑칠을 한 다음, 주로 활용할 배색을 결정한다. 이때 결정된 색이 제목으로 붙여졌다. “이번 작품은 특히 그림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시작점이 된 색 이름을 제목으로 정했다. 나중에는 수많은 다른 색이 더해졌지만 말이다.” 커다란 붓질이 끝나고 나면 화면 안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세워진다. “앞으로 몇 시간, 몇 주 동안 열심히 들여다볼 어떤 것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작품들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생방송과 같은 ‘on air’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작가에게 크게 선을 그리는 것이 ‘대근육’을 사용하는 일이라면, 세필로 그 사이를 채워나가는 일은 ‘소근육’을 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품은 빨리 그려낸 것과 천천히 완성된 것의 시원하고 섬세한 기법을 동시에 보여준다.



<흰색을 조금 섞은 녹색>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112cm 2020

작가는 작업 후반부에 원과 줄무늬 패턴 등 “화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조형 요소를 첨가했다. 이를 통해 작품들은 일시적으로 전시 공간을 점유하며 일관적 조형성을 드러낸다. 2010년대 초반 그의 아크릴릭 회화가 자연 풍경으로 읽혔던 것과 달리, 화면의 새로운 요소들은 상투적인 연상 작용에 의문을 던지며, 절대적 기준처럼 여겨지곤 하는 회화의 조형적 조화와 시각적 균형감에 균열을 가한다. “특히 원들은 임의적이고 즉흥적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처럼 자유로우면서도, 틀이 없지는 않은 상태에서 점차 예측이 가능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 어떤 일이 굉장히 빨리 결정된다면,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것.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것이 계속 생겨나고 그걸 기대하는 것. 마치 삶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때문일까, 임자혁은 자신의 그림을 그렇게 특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들을 활용해 그리는 그림에는 이처럼 계획과 우연, 치밀함과 허술함이 교차하며, “별것 아닌 것이 때로는 별것이 되기도 하는” 숱한 삶의 형태가 녹아 있다.

 


임자혁 / 1976년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학사 및 동대학원 판화과 석사 졸업, 크랜브룩 아카데미오브아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페리지갤러리(2018), 갤러리누크(2015), 이화익갤러리(2012) 등에서 개인전 개최. 로테르담 PHK18(2017), 하이트컬렉션(2016), 토탈미술관(2014) 등의 단체전 참여. 현재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Posted by 조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