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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의 원더랜드

2019.12.11 10:37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는 회화작가 박가희. 그가 한국 첫 개인전 <We Used to Be Fish>(10. 31~12. 28 페로탕 서울)를 열었다. 대형 페인팅부터 소품 드로잉까지 총 20점의 출품작에는 먹고, 마시고, 애무하며 사랑을 소근거리는 연인들이 등장한다. 그림 속 여성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유로운 나체와 관능적인 제스처로 일상을 즐긴다. Art는 전시를 맞아 방한한 작가를 만났다. 그가 꿈꾸는 다정하고 야릇한 ‘욕망의 세계’는 무엇일까? / 이현 기자



박가희 개인전 <We Used to Be Fish> 전경 2019 페로탕 서울_자신의 드로잉 앞에 선 작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 (…) / 커피의 김과 /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 커서는 껌벅거리며 최면을 걸고 / 은밀하게 시작되는 / 한낮의 점성술”(오은 <아이디어> 중에서)
먹음직스러운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와 라즈베리 생크림 조각 케이크, 몽글몽글한 체리 방울토마토 복숭아 바나나, 오동통 살이 오른 깐 새우, 무드와 색감을 더하는 양초와 꽃병까지…. 만찬이 정성스럽게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박가희의 그림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커튼을 홱 치고 화면에서 사라질 것 같다. 작가가 직조한 다이닝 룸에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향연이 펼쳐지는 대신, 사랑하는 연인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이 흐른다.



<We Used to Be Fish> 캔버스에 유채 152.4×172.7cm 2019

박가희의 개인전 <We Used to Be Fish>가 최근 페로탕 서울에서 개최했다. 2015년 필라델피아에서 데뷔전을 치른 후 1년에 1번씩 꾸준히 개인전을 열어 왔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작가는 21살 유학길에 올라 지금까지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보수적인 한국사회를 떠나 먼 낯선 땅에서의 정착 경험은 오늘날 박가희의 작업세계를 만든 중요한 토대가 됐다. “가부장적이고 종교에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나 7살부터 과일을 깎거나 남자와 여자가 같이 앉지 못하는 전통을 강요당하고, 또 그걸 당연시하며 자랐다. 그런데 대학 시절 9개월간 어학연수로 떠난 마이애미에서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쨍그랑 하고 깨졌다. 그곳 선생님과 친구들을 보며 내가 친절하지 않아도, 막살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후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 진학해 자유로운 여성 신체에 대한 관심을 작업으로 확장해 나갔다. 부모님께는 한동안 꽃 그림만 그려서 보내드리곤 했다.(웃음)” 작가는 대학생 시절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저서 《자기만의 방》을 읽고 충격을 받아 페미니즘과 구조주의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랜 시간 투쟁해 온 페미니스트 여성 교수들에게 용기와 에너지도 얻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여성 교수님들을 정말 잘 만났다. 그들이 작업을 하는 태도는 너무나 순수하다. 그림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거나 작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본인이 애정하는 작품이 있으면 내 손을 잡아끌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정체성을 떠나서 그런 태도를 내 작업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연습을 많이 했다.”



<Shrimps and Cocktail> 캔버스에 유채 86.4×63.5cm 2019_작가는 유학을 떠나면서 본가에 남겨진 그리운 반려견을 작업에 그렸다. 이후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는 사람과 유대감을 맺(지 않)는 대상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사람의 키만 한 대형 페인팅과 잔재미 풍기는 작은 드로잉으로 이루어져 작업의 경향을 폭넓게 조망하는 자리로 꾸려졌다. 꿈과 실재를 오가는 초현실적 이미지, 단순한 형태가 퍼즐처럼 맞춰진 복잡한 공간 구성, 동시다발로 엮여 있는 시공간, 알쏭달쏭한 제목 등 명료한 메시지가 아니라 감각을 톡톡 건드리는 요소는 그림을 한 편의 시로 읽게 한다. 그중 전시 타이틀로도 사용된 페인팅 <We Used to Be Fish>(2019)에는 투명한 사각 수조에 들어가 칵테일 마시고 담배 피우며 물고기에 둘러싸인 두 여성이 등장한다. “남편과 술을 마시다가 인터넷에서 이상한 글을 발견했다. 화석을 연구해 보니 사람이 원래 물고기였다는 거다. 일종의 가짜 뉴스였는데, 남편에게 ‘야, 우리가 물고기였어’라고 하니 말도 안 된다며 어디서 읽었냐고 물었다. 글을 다시 검색하다가 못 찾아서 내가 말을 막 지어내기 시작했고, 상상력과 기존에 들은 것들을 유추해서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취해서 자다 깼는데, 어항 속에 들어간 내 자신과 유리 때문에 몸이 왜곡되는 현상이 흥미로워 보여서 작품을 구상했다.”



<Window of Time> 캔버스에 유채 121.9×88.9cm 2019

작가의 그림에는 반복되는 입(술)과 거미 다리를 연상시키는 손가락 등 과장된 신체를 가진 여성이 자주 출현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연인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에 스스럼이 없고 종종 딴생각에 빠져 있기도 한다. “여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포르노그래피의 한 장르로 취급하는 오늘날, 그 사고를 깨부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나 유대감 형성은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욕망인데, 외설적으로 변질되어 비칠 때가 많다. 또한 무언가를 잡는(grab) 남성적 이미지의 손을, 매니큐어 칠한 굵고 긴 손톱으로 전환해 사회의 관습에 대항해 싸우려는 의도를 표현했다.”
작가는 미국에서 유학하며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부하는 아시아인은 많지만, 정작 학교에서 배우는 미술사에 그들이 이야기는 없다는 것. 특히 미술관에서 명화를 보면 감탄을 하다가도 여성이 피사체로만 재현되어 온 현실에 분노하고 “엄마 없이 아빠만 많은 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고갱(Paul Gauguin)이 타히티에 간 일화를 듣고 화가 났다. 나는 길을 걷다가도 ‘니하오’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성적 농담을 정말 많이 듣는데, 고갱이 이국적인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리면 내가 성추행당하는 기분이 느껴진다. 만약 내가 덩치 큰 백인 남자였어도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하며 살았을까? 그림 양식은 영향 받았을지라도, 좀 더 나만의 언어를 사용해 내 그림을 만들고 싶었다.”
시인이 기존의 언어를 사용해 낯선 감각을 창출하듯, 박가희는 기존의 신체들을 소환해 그가 꿈꾸는 사적인 욕망의 세계, ‘에로티시즘 원더랜드’를 창조한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야, 우리가 물고기였어.” 우리는 거짓말이 만드는 야릇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기꺼이 속는다. 진실 검증은 필요 없는 그의 세계에서.



<Man with Tulip> 종이에 연필 25.4×20.3cm 2019

박가희 / 1985년 서울 출생. 필라델피아 타일러예술대학 및 뉴욕 헌터컬리지 졸업. 페로탕 서울(2019), 런던 테이모어그라네(2018), 브루클린 모텔(2017), 브루클린 세컨드플로어갤러리(2016), 필라델피아 마지널유틸리티 갤러리(2015)에서 개인전 개최. <No Patience For Monuments>(페로탕 서울 2019), <Cheeky: Summer Butts>(뉴욕 마리아로갤러리 2018), <Picnic>(브루클린 칼리코갤러리 2018) 등의 단체전 참여. 오는 6월 페로탕 뉴욕에서 개인전 개최 예정.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

Posted by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