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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질서의 시간

2019.05.14 13:03

미국작가 린 마이어스(Linn Meyers)의 한국 첫 개인전 <토성의 고리>(4. 4~5. 30 제이슨함)가 열렸다. 그는 미국 주요 미술관에서 선보인 장소특정적 벽 드로잉으로 잘 알려졌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 15~16개월 사이에 제작한 신작을 선보였다. 미국 화단에서 그는 ‘시간의 순례자’로 통한다. 무수한 점과 선을 이어가며 캔버스에 혼돈과 질서의 균형을 잡는 과정은 일종의 명상과 같다. / 김재석 편집장



<무제> 패널에 아크릴 잉크, 플래쉬 61×45.7cm 2018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그림이 관객을 맞는다. 캔버스에 일렁이는 노란빛 물결이 봄바람에 퍼진 송홧가루처럼 보인다. 검푸른 배경 때문에 나사(NASA)에서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머나먼 우주의 광활한 풍경도 닮았다. 컴퓨터로 만든 3D 렌더링 이미지와도 흡사하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자, 캔버스를 덮은 무수한 점이 실체를 드러낸다. 생명체처럼 자가증식하듯 퍼진 크기가 다른 점들, 점과 점 사이의 불규칙한 거리와 물감의 농도가 화면에 리듬감 있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반복되는 작은 점들의 집합과 분산이 구축한 혼돈과 질서의 에너지가 캔버스마다 이어진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린 마이어스의 추상화는 관객을 무한 상상이 펼쳐지는 시각적 세계로 안내한다.
미국 화단에서 린 마이어스는 ‘시간의 순례자’로 통한다. 패널에 밑바탕을 칠한 작가는 사전 드로잉이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캔버스에 점을 찍고 선을 그으며 작품을 완성해 간다. 그 수고스러운 노동의 시간이 캔버스와 벽면에 고스란히 담긴다. 점과 선들은, 작가가 캔버스를 끼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 신체 행위의 흔적이자 작품과 씨름한 시간의 기록이다. “개별 작품의 이미지는 다르지만,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같다. 나는 캔버스에 혼돈과 질서의 균형을 찾아간다. 캔버스에 보이지 않는 그리드를 채워가는 느낌으로 점이나 선을 그리다 보면, 화면에 의도하지 않은 파동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곧 이전과 다른 질서를 찾아 화면 구성을 바꾸면서 작업을 계속 진행한다. 작품이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면 그리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의자에 앉아 작품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기 위해 검은 하늘에 주의를 기울이듯, 작품의 완벽한 조화를 찾기 위해 집중하고 또 고민한다. 이런 작업 과정과 작품이 완성되는 시간은 내게 명상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과 같다.” 
린 마이어스의 한국 첫 개인전을 개최한 제이슨함은 그의 제작과정이, W.G. 제발트가 영국 동남부 지역을 여행한 뒤 쓴 문화 고고학적 여행기 작품 《토성의 고리(Rings of Saturn)》에 등장하는 ‘걷는다’의 의미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작가에게 동명의 전시 타이틀을 제안했다고 한다. “(제발트의 소설에서) 걷기가 특별한 목적이나 수단으로서의 걷기가 아닌 것처럼, 린 마이어스의 작품은 무엇을 그리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그리기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결과물라는 점이 중요하다.” 제이슨함 대표의 설명이다.



<무제> 패널에 아크릴 잉크, 플래쉬 182.9×157.5cm 2018

작가에게도 그리기 과정은 그 자체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나는 어떤 환영을 만드는 일에 흥미가 없다”고 단언하며, “인간의 뇌는 익숙한 패턴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것에서 이 세상에 있는 비슷한 무엇을 찾으려 한다. 관객의 자유로운 해석을 위해 대부분 작품에 <무제>라는 제목을 붙인다. 무엇보다 내 관심은 작품에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며 회화의 내재적 질서를 찾아간 미술사 선구자들의 영향이 그의 작품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다.   
린 마이어스는 어떤 계기로 점과 선에 열정적인 전도사가 됐을까. 30여 년 전, 그는 수평선이 두드러지는 마술적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익숙한 수평선 풍경에 자신의 상상에만 등장하는 오브제를 덧그린 생경한 느낌의 풍경화였다. 어느 날, 작품의 중심이 되는 수평선을 가리면서 드라마틱한 변화의 문이 열렸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추상’으로 향하는 종교적 여정이었다. “내게 익숙한 것들을 화면에서 하나둘 없애고 나니, 작품이 훨씬 강렬해졌다. 내 감정과 그리기 프로세스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고, 작품은 점차 추상화가 되고 더욱 심플해졌다.” 하지만 작가에게 주변 풍경과 환경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선보인 장소특정적 벽화는 하나의 풍경이자 관객을 그 풍경의 일부로 부드럽게 흡수한다. 그는 2000년부터 대형 벽화를 제작해 왔다. 거대한 벽면을 마주한 작가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에 걸쳐 끈기 있게 촘촘하고 복잡한 점과 선들을 그려 나간다. 캔버스가 점의 세계라면, 벽면은 선의 세계일 것이다. 때로 두 세계는 한 작품 안에 병치되거나 중첩된다. 드로잉의 바탕이 되는 미술관의 건축과 주변 환경을 관찰하는 일로 작업을 시작한다. 2011년 로스앤젤레스의 해머미술관에 선보인 벽화는 미술관의 계단 벽면을 따라 상승과 하강의 운동이 동시에 느껴지는 형태의 선 조합을 그려 놓았다. 보랏빛이 감도는 벽면에 원형으로 무리를 이루며 에너지를 축적한 선들이 천장과 위층, 아랫층을 향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해머미술관의 큐레이터 앤엘레구드는 “마이어스의 중첩된 원형 패턴은 세포부터 해일까지, 지문에서 우주까지, 동시에 크고 작은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을 연상시킨다”고 분석했다. 2016년에는 허쉬혼미술관의 2층 원형 복도를 따라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형 벽 드로잉 <Our View From Here>를, 2018년 콜럼버스미술관에서는 왜곡된 형태의 푸른 면을 둥근 점선이 가로지르는 미니멀한 벽 드로잉 <Gazing Has Its Limits>를 발표했다. 
린 마이어스는 2018년 경험 디자이너, 사운드 디자이너,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하면서 또 다른 변신을 시도했다. 보도인대학미술관의 아치형 구조에 조응해 연기처럼 공간에 퍼지는 마이어스의 벽 드로잉 <Let’s Get Lost>를 스코어 삼은 음악 <Listening Glass>를 공동으로 제작한 것. 일찍이 추상미술가들이 음악에 보인 대단한 열정을 상기하면, 무척 자연스러운 행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한국의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서정적인 그의 작품과 빼닮았다. “몸과 마음을 열고 세상을 볼 것.”



린 마이어스 / 1968년 미국 워싱턴D.C 출생. 뉴욕 쿠퍼유니온 미술학사, 캘리포니아미술대학 미술학 석사 졸업. 워싱턴D.C 허쉬혼미술관 조각공원(2016),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2011) 등에서 개인전 개최. 앨버커키 타마린드미술관(2019), 쾰른 쿡갤러리(2018), 베를린 힐베르트라움(2017)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현재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활동 중.

Posted by 김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