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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불규칙한 정렬

2019.04.15 16:15

나탈리 뒤 파스키에(Nathalie Du Pasquier)의 개인전 <사물들의 불규칙한 정렬>(3. 8~5. 25 페이스 서울)이 열렸다. 작가의 20여 년을 아우르는 회화, 드로잉 및 세라믹 작품 30여 점을 공개했다. 입체와 평면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창립 멤버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만들어갔다. / 김재석 편집장
 


<On a Table Again> 캔버스에 유채 150×100cm 2018

“저는 정물을 그리는 작가입니다.” 나탈리 뒤 파스키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 단순한 소개 문장이 그의 작업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서 그의 작품이 지닌 순수한 매력이 발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페이스 서울에서 열린 한국 첫 개인전 <사물들의 불규칙한 정렬>은 오랫동안 사물의 본질적 세계를 탐미한 작가의 20여 년을 아우르는, 작지만 알찬 전시다. 1990년대 제작한 회화부터 최근에 만든 오브제 작업까지, 작가가 세심하게 작품을 선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각각 다른 시기에서 선택한 작품들이 특정 전시에서 어떻게 결합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조합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무작위적인 정렬 속에 어떻게 공존하는지 집중했다.”
나탈리 뒤 파스키에는 1957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바이러스 학자 아버지, 예술사학자 어머니로부터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배웠다고 한다. 18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나 친구들과 아프리카 가봉에서 새 삶을 준비한다. 그곳에서 텍스타일과 그래픽에 눈을 뜬다. 훗날 그의 직물 디자인에서 아프리카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78년 로마로, 이듬해 밀라노로 정착지를 옮긴다. 1981년 에토르 소트사스(Ettore Sottsass)를 주축으로 밀라노에서 설립된 ‘멤피스(Memphis)’의 창립 멤버로 활동을 시작한다. 멤피스의 디자인은 기존의 획일화된 상업 디자인에서 벗어난, 화려한 색감과 패턴, 다양한 소재의 조합으로 주목 받았다. 키치로 치부되거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던 그들의 디자인은 레트로 열풍을 타고 4~5년 전부터 재조명받고 있다.
 


<Pugno> 세라믹 8.5×31×30cm 2018

1987년 멤피스가 해체된 후 그는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에 몰두한다. 작가의 홈페이지의 회화 아카이브 섹션에서 당시의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남자가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일 찰나다. 남자의 심리를 반영한 듯 배경의 구도는 뒤틀리고 화면의 색감은 무척 음울하다. 하지만 공간 곳곳에 놓인 사물의 배치에서 질서를 찾는 작가의 본능적 관심이 나타난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조르조 데 키리코 풍의 초현실주의적 장면과 조르조 모란디 풍의 서늘한 정물화가 묘하게 중첩된 회화를 제작했다. 점차 사물의 배경이 추상적으로 패턴화되고 색감도 단순해진다. 작업 양상의 전환점은 1990년대 후반. 작업실을 더 넓고 채광이 좋은 곳으로 옮기면서부터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지낼 때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좀 더 인상주의적으로 그렸다. 채광이 좋은 스튜디오로 옮기면서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내가 그릴 사물을 직접 제작하고 그것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으로 방식을 전환했다.” 현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난 작가는 점점 더 추상적인 도형의 다채로운 변주를 실험해 나갔다.
페이스 갤러리에 들어서면 갈색 기단에 등받이가 긴 의자가 놓여 있다. 등받이에는 추상회화나 직물의 한 부분을 확대한 것처럼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굵은 선의 교차, 원색의 대비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옆에는 아이보리색 테이블에 꽃병과 그릇, 장식용 그릇이 짝을 이룬 듯 놓여 있다. 그 형태만큼 투박하다는 표현이 맞을 배열이다. 직접 만든 3차원의 구조물을 다시 평면의 회화로 옮기고, 그림 속 사물에서 영감을 받아 다시 3차원의 오브제를 만드는 교차 작업 속에서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그는 “기하학과 공간의 표현 사이를 연결하는 것, 즉 3차원의 입체가 평면 상에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모호함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Marmo> 마호가니 구조물, 시트, 인쇄된 직조물 146×58×40cm 2018

최근 작가는 입체를 제작하는 대신 캔버스에 바로 정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유롭게 추상적인 작업을 제작하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에서는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갈색 기단에 세라믹, 나무 오브제, 드로잉, 회화 작품들을 정교하게 배치했다. 전시장 벽면에 맞춰 수평으로 이어지는 전시 구성은 매우 장식적인 상품 진열대의 한 풍경 같기도, 장면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색색의 그림책을 펼쳐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전시장을 플랫하면서 동시에 입체적인 추상화된 세계로 조성하는 특유의 전시 스타일에 대해서는 쿤스트할레 빈의 큐레이터 루카 로 핀토(Luca Lo Pinto)가 적절하게 평한 바 있다. “나탈리의 상상력은 새로운 사물과 흔적으로 끊임없이 풍성해지며, 작품마다 이상을 넘음과 동시에 모든 규칙의 틀을 벗어나 미지의 영역으로 모험을 떠날 수 있다.”
공간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탐구는 책 작업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동명의 책도 출간했다.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것으로, 오랜 시간 몰두한 ‘사물들의 불규칙한 정렬’에 관한 생각을 담았다. 드로잉, 손글씨, 색색의 오브제, 회화, 전시의 한 장면 등이 병치 되며 경쾌하게 흘러간다. 전시가 잡지나 책의 스프레드 페이지 같다고 언급하자,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다. “책도 곧 하나의 전시라 생각한다. 그림이나 전시와는 다르게 책은 누구나 소장할 수 있다. 내게 책은 정말 좋은 하나의 사물이다. 페이지를 배치하면서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일이 즐겁다.” 작가는 한국의 책가도 컬렉션을 볼 수 있는 곳을 추천해달라고 물었다. 화사한 색감과 자유분방한 구도 속에서 규칙적인 배열이 돋보이는 이국적 회화에서 자신의 작품과 닮은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페이스 제네바로 이어진다.
 

나탈리 뒤 파스키에 / 1957년 프랑스 보르도 출생. 1981년 에토르 소트사스를 주축으로 밀라노에서 설립된 멤피스 그룹의 창립 멤버. 류블랴나 국제그래픽아트센터 (2018~2019), 브레시아 아팔라조갤러리(2018), 런던 캠든아트센터(2017~2018), 페이스갤러리 런던(2017)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개최. 디종 르콩소르시움(2018), 베니스 APlusA갤러리(2017), 파리 갤러리데루이용(2016), 빈 엑자일갤러리(2015) 등에서 다수의 단체전 참여. 현재 밀라노를 거점으로 활동 중

Posted by 김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