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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설치, 응축된 에너지

2019.03.05 17:20

회화-설치, 응축된 에너지

콜롬비아 출신 회화 설치 퍼포먼스 작가 오스카 무리조(Oscar Murillo)가 한국 첫 개인전을 열었다. 어려서 영국으로 이주한 ‘노동자계급 출신 이민자’는 조각난 천위에 원색의 유채로 거칠게 휘갈긴 회화-설치 작업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에게 캔버스는 에너지를 쏟아내는 그릇이자, 주변과의 화해, 단합을 이루는 장이다. / 한지희 기자
 


<(무제)촉매> 앞에 선 오스카 무리조

국제갤러리에서 오스카 무리조의 국내 첫 개인전 <촉매(Catalyst)>(2018. 11. 29~1. 6)가 열렸다. 2012년 영국왕립예술학교 재학 중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무리조는 데뷔 후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런던 사우스런던갤러리, 뮌헨 하우스데어쿤스트 등 세계 유수의 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열고 베니스(2015), 샤르자(2017), 베를린(2018) 등의 비엔날레를 휩쓴 스타작가다. 2016년에는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 참여해 <힘만 있는 자들의 영혼을 위하여>라는 설치조각으로 국내 관객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번 개인전에는 전시와 동명의 연작 4점을 포함해 회화 설치 드로잉 영상 최신작 18점을 선보였다.
콜롬비아 태생의 작가는 10살이 되던 해 설탕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실직한 후 런던으로 이주했다. 노동계급 출신의 이민자라는 자전적 요소는 훗날 작업의 중심 주제이자 소재가 됐다. 이주 경험을 겪은 장본인이자, 물리적 제약 없이 전 세계의 뉴스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대의 일원으로서 무리조는 항상 이주와 이동에 관심을 갖고 ‘정착 혹은 안주의 불가능성’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복잡하게 얽힌 선과 화면을 가르는 선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며, 설치작업의 경우 특히 흐르는 듯한 외형을 띤다. 여행을 자주하는 만큼 작업 역시 정해진 장소가 아닌 어디서든 행하고,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설치 사운드 영상 등 매체도 가리지 않는다. ‘유동성’은 작업의 주제일 뿐 아니라 예술적 실천 방식의 키워드인 셈.
 


<AAAAI> 캔버스와 리넨에 유채, 오일스틱, 흑연 170×165cm 2018

노동 역시 무리조의 주된 관심사다. 생산과 소비, 이때 소요되는 노동력에 대한 질문이 작업 전반을 꿰뚫는다. 이는 소재로 등장할 뿐 아니라 창작 과정에서도 ‘협업’의 형태로 발현한다. 아상블라주한 천 조각에 유화 물감을 휘갈긴 양상의 회화-설치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는 천을 깁는 과정에서 가족 친구 지인 재봉사와 협업한다. 기운 캔버스는 “집단적인 노동을 통해 만든 것이다. 천을 잇는 행위 자체가 단일함, 단합을 상징한다.” 때로는 전시장 바닥에 천을 깔고, 관객이 그 위를 지나가게 해 작업을 실시간으로 만들어 가기도 한다(2013년 사우스런던갤러리 개인전).
노동에 대한 관심은 유동성이라는 키워드와 맞물려 자본주의, 소비주의, 세계화 등의 정치적 사안으로 뻗어 나갔다. 2014년 뉴욕 데이빗즈워너에서 선보인 개인전 <상업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일하던 사탕공장을 그대로 재현했다. “맨하탄은 상업과 문화의 세계적 중심지다. 좋은 것은 다 가져다 놓은 이곳에, 노동력이 투입된 공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신자유주의, 소비주의를 염두에 둔 전시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무리조의 작업은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함의하거나 특정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힘주어 말한다. “작업을 정치적 담론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행적 수단으로 삼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안에 강한 의견을 갖고는 있지만, 동시에 나는 예술의 도구화를 거부한다. 내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미학이나 형태의 자유다. 이는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고동치는 주파수> 캔버스와 리넨에 유채, 오일스틱, 흑연 210×295cm 2018

이번 개인전은 최초로 <촉매> 연작을 중심으로 삼은 전시로, 무리조가 즐겨 쓰는 레퍼런스를 포괄적으로 제시하여 작가의 예술적 실천방식을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촉매’는 작가에게 연작 제목이기 이전에 어떤 행위, 실천을 하기 위한 방법론이기 때문. “내 에너지를 내려 받아 손끝으로 표출하고, 이를 응집한 결과물 자체가 <촉매>다. 이러한 실천이 성공해야만 회화가 된다. 하지만 실천이 회화 작품 자체보다 중요하다. 이 점을 이해함으로써 관객이 내 작업 방식에 익숙해지길 바랐다.”
전시장 K3에는 <촉매> 4점을, K2 2층에는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비행> 연작 드로잉과 이 과정을 설명하는 영상을 전시했다. K2 1층에는 컬러풀한 유화 최신작 7점을 선보였다. 3개 전시실을 통틀어 설치된 검은 캔버스 작업 <화해를 위한 기관>은 전시의 필수 구성 요소. 2014년 첫 공개 후 전시 때마다 해체, 재구축한 작업이다. 협업으로 꿰맨 천이 주재료며, 천의 특성상 형태 자체에 유동성이 있다는 점에서 작업의 키워드를 두루 내포한다. 이는 전시의 전반적 동선을 만들며, 모든 작업이 하나의 내러티브로 꿰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전시를 할 때마다 작업과 공간의 긴밀한 연계성을 중시하는 작가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났다.
스스로 “나의 작업세계는 늘 복잡성을 함유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회화전시를 열기 어렵다”고 밝힌 만큼 무리조의 작업에는 해석의 층위가 여러 겹 존재한다. 종종 ‘어려운’ 작업이라 평가되는 데 대한 의견을 묻자 작가는 밝게 화답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답변이 만들어 낸 작은 범위에 갇혀 자아도취하기 쉽다. 내게 창작은 지속적인 도전이다. 내 작업이 어렵기로 분류된다면 이는 아마도 창작이 능동적이며 고난이도인 행위고, 시간이 드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야 지난번에 일어났던 사건과의 연관성, 일관성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니 예술 창작을 하려면 살아있어야 한다.”
 

오스카 무리조 / 1986년 콜롬비아 출생. 런던 웨스트민스터대학 순수미술 학사, 영국왕립예술대학교 회화과 석사 졸업. 국제갤러리(2018), 뮌헨 하우스데어쿤스트(2017), 바쿠 야라트현대미술센터(2016), 런던 사우스런던갤러리(2013) 등에서 개인전 개최. 베를린비엔날레(2018), 샤르자비엔날레(2017),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 베니스비엔날레(2015) 등의 단체전 참여. 현재 런던과 보고타를 주요 거점으로 전 세계를 이동하며 활동 중

Posted by 한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