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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말하는 작가 ⑩ 박이소 * 돈선필

2018.11.05 10:21

Art는 10월호 특집에서 작가의 시점으로 한국미술계의 지평을 넓혀 온 주요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시 조명했다. 이름하여, <작가는 작가의 작가>. 작가는 전시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한 작가의 조형 방법과 예술정신은 다른 작가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또 다른 관객이자 그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동지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작가 매칭’이라는 방법론을 끌어들였다. 총 11명의 작가들이 직접 보내 온 원고를 공개한다.
 

박이소 * 돈선필

박이소 <북두팔성> 스펀지, 벽돌, 스티커, 알루미늄 호일, 바늘 210×117×39cm 1997~99_<기록과 기억>(7. 26~12. 1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전 출품작. 박이소(1957~2004)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동시대미술계에 남다른 영향을 미쳤다. 뉴욕에서 대안공간 ‘마이너 인저리’를 운영하며 한국과 미국 미술계를 잇고, ‘경계의 미술’을 실천하며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양분화된 한국미술계에 변화를 촉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최근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2014년 작가의 유족이 기증한 대량의 아카이브와 대표작을 통해 작가와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어떤 기억, 어떤 기록 

2018. 9. 미술이 뭔지 잘 모르겠다. 10대에는 시험 기간에 스쳐 가는 암기형 암호였고, 20대에는 신기하고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30대가 된 지금 어떤가? 안타깝게도 여전히 미술이 뭔지 잘 모르겠다. ‘미술’을 하며 살고 있다고 가볍게 자신을 소개하는 그 순간마저도 미술이 뭔지 모르고 있다. 책을 읽어도 모르겠고 다른 작가와 이야기해 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는 것에 비해 몇 배로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 심지어 알던 것도 모르겠다. 질리지 않고 항상 재미있는 게 미술이겠거니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수명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뭔지 잘 모른 상태로 살 것 같다. 

2018. 6.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정확히 대화라기보다는 질의응답에 가깝다. 내가 질문하면 상대가 답한다. 요즘 행복하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어떤 대답을 해도 상관없는 물음이었지만, 망설임 없는 답변과 행복을 알고 있는 모습은 무척 사랑스럽다.

2016. 9. 수년 전 죽은 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속 얼굴도, 마지막으로 나눴던 이야기도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이름만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이름 없는 형태뿐이다. 2010. 12. 느리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단어를 신중히 고르지만, 장난기도 가득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생각을 말한다. 행복은 감정이나 기분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잠깐 스쳐 가는 순간과 비슷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2009. 8. 의욕적으로 신청한 계절학기 덕분에 좀 더 학구적인 인간이 된 것 같다. 강사는 박이소라는 미술가가 있었다고 말한다. 흐릿한 도판 속 그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냈다. 수년 전에 보았던 간판은 작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국어는 강력하다. 망막을 스치는 순간 머릿속에 각인된다. 짧은 문장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어떤 것들보다 선명한 주홍빛의 모습으로 남는다.

2004. 9. 비엔날레 순례자들이 100만 명에 육박한다. 이틀간 서울에서 광주와 부산을 거치는 촘촘한 일정 덕분에 버스 안에는 미대생 시체가 한가득이다. 의식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몽롱한 상태에서 버스가 주차장에 멈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을 햇살 덕분에 자다 깬 눈은 더욱 안 떠진다. 시력을 조금 회복할 때쯤 “우리는 행복해요”라 쓰인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부산시의 공익광고 같은 걸까. 주황색으로 칠해진 간판을 보며 롯데를 사랑하는 시청 공무원이 간판 업체에 발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공익광고는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이야기한다. 거대한 간판은 ‘행복’을 말하지만, 전혀 현실감이 없다. 각진 서체는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인다. 지금 바라는 행복은 좀 더 잠을 청하는 것뿐이다. 이틀간 수많은 미술을 보았지만 뭔가 흐릿하다. 아마도 귀가하는 버스에서 잠드는 순간 전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다.

2004. 4. 미술가 박이소는 작업실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오늘 아침. 사망 이후에도 이어지는 작가의 연표는 ‘미술가의 죽음’을 모호하게 한다. 전시장에 차분히 진열된 사물은 멈춰버린 시간을 말없이 진술한다. 과거를 기록한 글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단절 앞에 무력하게 보인다. 행복에 대한 미완결의 질문은 미술가의 의도처럼 보는 이를 심란하게 한다. 14년 전 주홍빛 간판을 담은 사진은 소리 없는 구호 같다. 오늘 아침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마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불안정한 기운이 있다고 한다. 행복의 안락함은 자신을 그 자리 묻어 버리는 것만 같다 말한다. 장애물을 지나쳐야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요즘은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행복이 뭔지 모를 것 같다.

돈선필 / 1984년생. 홍익대 판화과 및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과 석사 졸업. 피규어를 소재로 그 표면과 형태만을 취해 조각, 설치로 재해석한다. 작가생산판매플랫폼 <굿-즈> 공동기획(2015), 편집숍 취미가(2016~) 오픈베타공간 반지하 공동운영(2012~15)

Posted by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