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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말하는 작가 ⑧ 김순기 * 김아영

2018.10.31 16:50

Art는 10월호 특집에서 작가의 시점으로 한국미술계의 지평을 넓혀 온 주요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시 조명했다. 이름하여, <작가는 작가의 작가>. 작가는 전시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한 작가의 조형 방법과 예술정신은 다른 작가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또 다른 관객이자 그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동지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작가 매칭’이라는 방법론을 끌어들였다. 총 11명의 작가들이 직접 보내 온 원고를 공개한다.


김순기 * 김아영

김순기 <Passage> 캔버스에 콜라주 351.5×434.5cm 1987_<0 Time>(8. 30~11.11 아라리오갤러리)전 출품작. 재불작가 김순기(1946년생)는 ‘예술은 저항이다’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매체로 실험적 작업을 선보여 왔다. 장자, 비트겐슈타인, 자크-데리다 등 동서양 철학을 꾸준히 공부한 작가는 시간의 확장과 언어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작품에 절묘하게 녹인다. 전시제목 <제로 타임(0 Time)>은 작품의 핵심적 개념. 시간의 흐름과 방향성이 뒤섞여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전시장에 출품된 콜라주, 회화, 영상 30여 점은 “여기도 저기도 이고,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딘가로 관객을 이끈다.
 

어디에도 있거나, 어디에도 없는 곳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1층, 2층, 지하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공간 중에서, 지하층으로 향하는 길고 깊은 계단을 내려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리츄얼 같다. 얼마나 깊은 공간이기에 이렇게 긴 계단이 있는 걸까? 거기를 지나면 넓고 깊은—높은 천장의—, 움푹 파인 공간이 나타난다. 한쪽 벽면에 크게 투사된 영상 <Voie-Voix Lacteé(음성 추적 학습자)>(1988)에서, 이미지보다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소리다. 커다란 노이즈,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 영상 위에 엠베드된 텍스트로 말미암아, 아마도 파리에서 서울로 향하는 어느 비행기에서 기록되었을 하늘 풍경과 비행기 소음-이동.
이 영상을 호위하듯 일련의 지도들이 주변 벽들의 일부를 덮었다. 영상의 오른쪽 벽에는 큰 퀼트 이불 같은 지도가, 영상 맞은편 벽에는 섬처럼 군도를 이룬 13개의 캔버스가 있다. 패치워크 방식으로 콜라주된 이불 같은 지도인 <Passage>(1987)를 들여다보면, 세계지도는 물론이거니와 온갖 국가와 도시의 지도들이 선명히 나타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굵은 펜으로 덧그려진 어떤 도로들이다. 아마도 작가가 오랫동안 체류했을 파리로부터 메츠, 뮌스터, 함부르크 등지를 지나 베를린에 다다르는 길고 가느다란 여정의 자국. 펜으로 그려진 선은 함부르크까지 굵고 힘차게 이어지다가, 그로부터 베를린까지의 구간에는 실선으로 변해 있다. 작가는 당시 베를린까지의 여정은 실현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를 들여다보며 오래전 어느 초겨울을 떠올렸다. 당시 나는 곧 체류허가가 만료되는 영국 런던으로부터 파리로의 이주를 위해 밴을 섭외해 이삿짐을 싣고 도버 해협을 건너는 큰 페리에 올랐었다. 얼마나 오랫동안일지 모르지만, 밴에서 내려 파리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이어가게 될 것이었고, 그 사실은 조금의 안도감을 주었다. 페리는 카지노와 레저시설을 포함한 큰 배였다. 빗방울이 흩날려 미끄러운 갑판에서 바라본 물살은 검푸르며 거셌고, 배는 흰 거품을 내면서 전진했다. 전시작 <Voie-Voix Lacteé>의 창밖 푸른 하늘의 구름과, 그때 본 파도의 검푸름과 흰 포말은 많이 닮아 있었다. 공기를 가르는 비행기 엔진 소음과, 바다를 건너며 내가 들었던 배의 모터 소음도 아주 많이 닮았다.
고개를 돌려 다른 벽에 걸린 13개의 캔버스 지도들을 들여다본다. <Carte du monde>라는 제목과 함께 ‘1989~1990’이라는 작품의 시간을 확인하고 놀란다. 이불-지도와 이 캔버스들 사이의 2년의 시간 동안 작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지도-군도들은 더 이상 식별 가능한 공간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길들은 알아볼 수 없게 파쇄되고 해체되어, 토막토막 조각난 종이 위, 선들의 중첩 또는 미로로 존재할 뿐이다. 분절된 공간들의 병치이자 불연속 공간만이 낙엽처럼 덮인 이 캔버스들은, 왠지 영원히 이주하는 자의 불안감, 고단함, 고립감을 담아내는 것 같다. 그런데 또한, 불안감과 고단함 속에서도 그러한 여정(voyage)에는 한 줄기 낭만이 배어 있다. 
국경 너머, 해협 너머로. 밴에 이삿짐을 싣고, 페리에 올라,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때로는 트롤리에 슈트케이스를 얹고서. 김순기의 전시에서 회화와 설치, 조각의 다양성 사이에서도 반복해 등장하고, 또 자꾸만 기억나는 것은 이러한 길들로 가득한 지도, 지도들이다. 때로는 연결되어 있고, 때로는 섬처럼 끊겨 있다. 이들이 지시하는 공간들은 모든 시간대에 걸쳐 존재할 수 있되, 어디에도 있거나, 어디에도 없는 곳들이다. 길들이 내파(implode)하듯 해체된 평면은 차라리 ‘제로 타임(0 Time)’으로 향하는 포탈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전시장 1층에 있는 영상 속에서 한가로이 길을 거니는 꿩 네 마리는 마치 그 포탈 너머 아무것도 아닌 곳에 다다른 초월자들 같다. 한데, 그 알 수 없는 길에 방목된 꿩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현재 전쟁 중인 도시들만이 전구로 장식되어 밝게 빛나고 있는 또 다른 세계 지도다.

김아영 / 1979년생. 국민대 시각디자인 및 런던 LCC 사진학과, 첼시칼리지오브아트 순수미술학과 석사 졸업. 지리, 지질, 역사 등에 관한 풍부하고 꼼꼼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내러티브 구조를 영상, 사운드, 텍스트, 퍼포먼스 등으로 실험한다.

Posted by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