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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VIEW

도시의 역사성을 내면화한 전시공간의 ‘힘’

2017.11.07 18:10

도시의 역사성을 내면화한 전시공간의 ‘힘’

지하 비밀벙커, 석유비축기지, 민주화운동의 유산 위에서 만나는 미술

전시 ‘풍년’을 이뤘던 이번 가을시즌도 끝이 보이고 있다. 그동안 국공립미술관 대형 기획전부터 자그마한 공간의 개인전까지 체크하느라 수첩 속 노트가 빽빽해졌다. ‘팔도유람’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전국 곳곳을 탐방하며 전시장 안팎의 이미지를 두 눈에 꼭꼭 집어넣었다. Art의 ‘지면전시’로 선보일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단순한 현장사진 공유가 아니다. 전시를 아직 보지 않은 독자에게 핵심장면을 골라내 ‘보여주고’, 전시를 더욱 깊이 파고들 독자를 향해 작가/큐레이터의 말(statement), 평론가/이론가의 해석(interpretation), 에디터의 안내 글(introductory text)을 다듬어 ‘읽어주는’ 전문적 행위다.

다만 지면전시의 특성상 제약도 있다. 첫째, 퍼포먼스 비디오아트 미디어아트의 장르적 속성, 즉 시간성과 운동감각을 2차원의 공간에 완벽히 재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2016년 11월호 포스트인터넷아트 특집을 기획했을 때, 인터넷 특정적 미감을 시각화하는 이 미술조류의 속성을 절감했다. 디지털 공간에서의 유통에 최적화된 이미지가 스크린을 뚫고나와 3차원 공간 위에서 물질화될 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극심한 ‘낙차’가 가장 생생하게 노출되는데 지면으로만 본다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다. 둘째, 전시공간의 장소적 특성 자체를 주제로 삼은 전시의 경우, 공간 자체의 시청각적 환경은 물론 공간이 품고 있는 내러티브가 전시와 직접적으로 연동되기 때문에 직접 전시장을 발로 밟았을 때의 감각이 감상경험을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급격한 정치적 변동을 겪은 한국의 근현대사 속 공간은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은폐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문화적 코드를 이식하는 장치로 미술이 들어올 때 현장의 감각이 한층 더 중요해진다. 지난 10월 개관한 ‘SeMA벙커’와 ‘문화비축기지’는 도시공간의 역사성을 전시장의 정체성으로 삼은 중요한 두 사례다. 이 두 공간의 개관전이 드러낸 ‘작동원리’를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SeMA벙커’는 1970년대 극비리에 조성된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가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사례다. 총 면적 180평가량으로 유사시 대통령의 대피를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0월 19일 개관전으로 <여의도 모더니티>가 열렸다. 작가 양아치 기획으로, 작가와 큐레이터, 평론가 총 11명(팀)이 프로젝트별로 협업해 신작을 제작하며 여의도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시선이 교차하는 장면을 구성했다. 전시장 안쪽에 위치한 역사갤러리에서는 벙커 발견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고, 1960~80년대 여의도의 군사적 기억을 사진자료로 보여준다. 1978년 국군의 날 행사 단상 위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사진도 있다. 이 단상 하부에 지하 벙커가 감춰져있었던 것. 작가 윤지원의 영상작품 <나, 박정희, 벙커>도 함께 전시됐다. 지난 20여 년간 영화에서 박정희 역할을 주로 맡았던 배우 이창환이 등장한다. 금융의 중심가로 다시 태어난 여의도 지하에 잔존하는 역사의 흔적을 들여다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문화비축기지’는 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 매봉산 산자락에 에워싸인 석유비축기지가 전신이다. 1973년 석유파동 당시 정부가 서울시민이 한 달 가량 소비할 수 있는 석유 수천만 리터를 저장하는 탱크 5기를 비밀리에 건설해 운영했다. 2013년부터 공원화사업을 거쳐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4만㎡ 부지 중앙에 개방된 문화마당이 있고, 총 6개의 탱크가 이를 둘러싼 형태. 지난 10월 10일 ‘탱크4’에서 개관전으로 방앤리 개인전 <탱크 가득 리볼브(TANK·ful + RE·volve)>가 열렸다. 큐레이터 신보슬 기획으로 방앤리의 설치작품 <노테이션 머신(Notation Machine)>(2016), <아레나 투어(Arena Tour)>(2016)와 <투명한 스터디(Transparent Study)>(2008)가 전시됐다. 작품의 모듈화된 특성을 살려 높낮이와 각도를 조절해, 거대한 탱크 내부중앙에 원을 그리도록 설치됐다. 석유저장탱크라는 장소적 특성을 반영하며, 특히 빛 소리 파장의 순환이 생성하는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졌다.

이렇게 전시공간의 장소적 특성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전시는 강렬한 경험을 선사했다. 기자는 10월 어느 날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도 방문했다. 1980년 당시 광주 카톨릭센터 건물로서 광주시민, 학생, 신부가 무장군대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이곳은 이제 전 세계에 이곳의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이 되었다. 2016년에는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 코퍼라티바 크라터 인베르티도(Cooperativa Crater Invertido)가 이곳에 상주하며 작품을 제작하고 비엔날레 오프사이트 전시도 개최했다. 콘텐츠를 담는 ‘그릇’의 가치를 되새겨본다. 비평의 플랫폼에서 키워온 에디터 특유의 시각을 지면을 넘어 실제 전시공간에서 수평 또는 수직으로 확장해볼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전시현장 속 ‘매개자’로서의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Posted by 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