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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avorite Things

2011.03.16 18:02

 


artinculture 3월호 특집 ‘My Favorite Things’는 ‘작가는 어떤 작품을 좋아할까?’라는 간단한 물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좋아한다’는 의미의 층이 넓게 열려 있듯이, ‘좋아하는 작품’의 의미도 실로 다양했습니다. 예술적으로 공감하는 작품에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작품, 남다른 추억을 간직하고 있거나 누군가와 함께 감동을 나누고 싶은 작품 등… 작가 21인이 고심을 거듭해 선정한 ‘좋아하는 작품’에는, ‘무거운 것’에서부터 ‘가벼운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연이 얽혀 있었습니다. 동서양 미술사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선별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추천사는 구구절절한 애정의 서신이며, 번뜩이는 비평문이고, 또 다른 작가 노트이자 관람객에게는 친절한 작품 안내서였습니다. 최종 편집 과정에서 미처 지면화되지 못한 작가들의 추천사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박미나
좋아하는 작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한다. 학생 때 좋아했던 작품이 더는 어떤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하고, 중요하다고 배우기는 해서 머리로 이해했으되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거 뭐야’하고 무시했었는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 먹어가며, ‘아, 정말 좋은 작업이구나’라고 뒤늦게 진가를 깨닫는 작품도 있다. 내가 고른 세 점은, 시간 순으로 좋아했던 그림들이다. 이 작품들은 내가 작가로서 작업을 어떻게 전개해야 옳을지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줬다. 또 세대를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화가의 고민거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는다.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패널에 유채 117×163cm 1559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패널에 유채 117×163cm 1559

 

피터르 브뤼헐은 대학 1학년 당시 첫 미술사 수업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함께 나를 사로잡았던 작가다. 이번엔 <네덜란드 속담>을 고르긴 했지만, 브뤼겔의 다른 작품들도 좋아한다. 종교적인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화가들과 비슷하지만, 그려내는 방식이 달랐던 점이 좋았다. 풍속화와 비교되는 이유도 마음에 들었다. 여타 화가들이 눈에 뵈지 않는 성경 구절들을 환상이나, 꿈, 또는 어떤 의의로 그려냈다면, 브뤼헐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의 부분으로 그려냈다. 또 화면 구성 면에서 수수께끼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밀도가 높아 한참을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가는 줄 모른다. 100가지 정도 되는 속담을 그림에서 하나하나 찾아보는 일도 즐겁다.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대학 3학년 때 좋아했다. 작품의 내용이나, 화면 자체, 무엇을 그렸는가 하는 점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지, 작가의 작업 태도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대작을 2년 동안 꾸준히 작업한 점이나, 60 여 점의 드로잉을 준비하는 태도 등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줬던 그림이다. 또 직접 작품을 보고는 이 작품의 테두리에 반했었다. ‘이런 것이 디테일이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티치아노의 수태고지 이후> 연작 린넨에 유채 125×200cm 1973

게르하르트 리히터 <티치아노의 수태고지 이후> 연작 린넨에 유채 125×200cm 1973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티치아노의 수태고지 이후>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작업에 매진하던 즈음 알게 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하나의 작업으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여러 점이 연작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서양화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수태고지’가 지닌 종교적 의미와 더불어,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메시지를 붓질로 뭉개, (알아보기 어려운) 추상적 이미지의 메타 서사를 만드는 리히터만의 방법론이 담겼다. 또한 작가의 이러저러한 고민들이 어떻게 하나의 작품으로 물화/귀결되는가를 여러 층위와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편으론, ‘내가 태어난 해에, 피카소는 죽었지만, 리히터는 이런 고민을 했구나’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미술가 일개인이 일궈낼 수 있는 역사의 일부분으로서의 미술은 그리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내 가슴은 설렌다.

 

 

박소영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3점을 추천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수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동시대를 사는 수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쏟아 내고 있는가….
모든 것이 현대미술의 아이디어가 된다는 것 을 일러준 팀 울리히, 서술적인 설치미술로 여전히 감동을 주고 있는 일리야 카바코프, 1992년 빨간 립스틱과 노란 장화가 인상적이었던 루이스 부르주아 할머니, 통증을 눈물로 안겨준 키키 스미스, 드라마틱한 슬픔을 주는 레베카 혼, 드로잉을 깨우쳐준 로즈마리 트로켈, 배수구를 통해 소외와 불안을 부각시킨 로버트 고버, 완벽한 마무리로 역시나 매력적인 카타리나 프릿치 등 많은 작품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마디로 작가를 압축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느끼는 그들에게 감정이다. 작가가 만드는 그 작업들은 한 사람의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고민에 대한 과정이며 결과물이다.
최근 독일에서 본 많은 작업 중 뒤셀도르프 k21 쿤스트잠룽(kunstsammlung NRW)에서 본 일리야 카바코프의 <내 할아버지의 오두막>과 카타리나 프릿치의 <문어>라는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일리야 카바코프의 <내 할아버지의 오두막>은 허접한 각목으로 만든 작은 컨테이너 크기의 나무공간으로 돼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몇 발자국가면 조도가 극도로 낮은 조명 속에 흐릿하고, 조악하며 스산한 나무로 만든 소박한 마을위로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희미한 조명만큼이나 애잔하다.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유년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밖의 벽에는 플라스틱 파리로 ‘The Sky is Calling’이라고 쓰여 있었다. 날씨만큼 고독한 작업이었다.

 

카타리나 프릿치 <문어> 금속, 폴리에스테르, 페인트, 나무 140×120×120cm 2006/2009 사진: 박소영

카타리나 프릿치 <문어> 금속, 폴리에스테르, 페인트, 나무 140×120×120cm 2006/2009 사진: 박소영

카타리나 프리치의 <문어>는 약간 경사진 철재 삼각 받침대의 흰색판 위에 야광 오렌지색으로 칠한 문어가 한 뼘 크기의 검정색 잠수부를 휘어 감고 있는 작업이다. 야광 오렌지색과 침전하는 듯한 검정색의 강렬한 대비는 매혹적이었다. 독일 여성작가 카타리나 프리치의 작업은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우리 일상 속에 친숙한 대상들을 확대, 복제, 배치하여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지녔고, 선과 악, 흰색과 검은색, 크기의 대비를 통해 대립을 상징화 시킨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교묘한 변형과 강렬한 색채는 관객을 각성시킨다. 그는 제46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 대표로 참가했으며, 테이트 모던, 샌프란시스코 MoMa 등에서 수많은 개인전을 열었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성 카타리나>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검게 칠한 성모상을 받침대 없이 바닥에 세웠다. 관객에 대한 배려와 완벽한 마무리는 작품의 내용에 충실했다. 악몽에 대한 <인간과 쥐>, <코끼리>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완
삶에서 좋은 예술 작품으로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것은 고요한 침묵의 호수를 깨뜨리는 물 한 방울처럼 진실의 눈을 뜨게 하는 힘을 가져다준다. 또한 현실과 가깝게 자리 잡고 있으며 진실에 가까운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도리스 살체도의 <십볼렛(Shibboleth)>에서 그런 현실과 가까운 교훈을 볼 수 있었다. 그 미세한 실금에서부터 시작된 커다란 균열은 나와 당신과의 관계처럼 소소한 것들에서부터, 얼마 전 일어난 이집트사태까지 비유되어 ‘관계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을지 모를 거대한 균열에 현상적으로만 대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균열로 붕괴되기 직전의 건물이 표면만 미장한 체 서있는 것처럼….

 

도리스 살체도 <성경의 대학살(Shibboleth)> 2007~08

도리스 살체도 <성경의 대학살(Shibboleth)> 2007~08

나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미술작품은 멋진 풍경화류였다. 그리고 아들인 내게 기대하셨던 작업도 그러하다. 그런 그림은 꼭 그 옛날 EBS방송에서 ‘밥로스 아저씨’가 가르쳐 주던 풍경화 같은 그림이라고 예를 들 수 있다. 거기에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살고 싶은 초가집과 지붕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이 있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그림 하나를 마루에 걸어 놓고 싶어 하셨다. 정말 저 이발소 그림 속 그림 같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 가능할까? 언덕위의 초가집과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설원의 산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파온다.

 

가끔 프란시스 알리스의 <불합리한 방법 Ⅰ>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미 오래전에 들은 얘기지만 요즘 들어 그의 작업이 가끔씩 떠오른다. 이것은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근로자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정된 미래에 대한 선택을 제시받는 시대의 현실 속에서 결국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린 항상 선택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후회를 하거나 잘했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다.
돌이켜본다면 어떤 선택을 했건 사회의 융통성은 내 선택에 출렁이지 않으며 설령 출렁임을 일으킨다 해도 시스템 내에서 하나의 도출과정의 '패턴A'식으로 수집되어 그것에 대한 대안을 찾아 일정한 보편적 펄스를 유지시키려한다. 결국 마지막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물이 담긴 컵 속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져 출렁이는 파장을 만들지만 잠시 후 그 물은 다시 잔잔해 지고자 하는 원리와 같다. 한때 잠시나마 컵 속을 출렁이게 만들었던 것은 단 한 방울의 곤두박질이었다.

Posted by 김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