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버티컬 빌리지〉전 전경
떠나는 것과 머무는 것
글 | 정 연 심
한스 마리아 드 울프가 기획한 〈원더러스트: 또 다른 언덕 너머로 가는 끊임없는 여정〉은 ‘여정’‘여행’‘이동’을 주제로 작업한 다섯 명의 벨기에 작가들을 소개한다. 반면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더 버티컬 빌리지〉는 떠나는 것이 아닌 머무는 곳, 즉 도시공간과 거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네덜란드의 젊은 건축가그룹 MVRDV는 글로벌 싱크탱크 The Why Factory(T?F)와의 3년간의 리서치 끝에 아파트라는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구조를 향한 새로운 대안으로 ‘버티컬 빌리지(The Vertical Village)’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원더러스트’라는 용어가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면, ‘버티컬 빌리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공간을 지금 이곳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단어이다. 아트선재센터의 전시가 ‘떠나는’ 수사학적 행위를 통해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 현상을 표현한다면, 토탈미술관의 건축 전시는 한국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아파트형 주거 공간에 대해 리서치 형식으로 질문을 제기하고 사회학적이고 건축적인 관점에서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호노레 도 〈진주 목걸이〉 정릉천 설치 전경 2012
작업에 담긴 이동, 여행
〈원더러스트〉전에 참여한 프란시스 알리스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물리적인 이동과 시간적인 이동을 축으로 끊임없이 여행하는 작가다. 벨기에 태생으로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는 알리스는 걷기를 통해 국경의 경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즉, 이 전시는 ‘원더러스트’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미술가들의 여정이 어떻게 정치적이고 제도비판적인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 준다. 이러한 주제를 상징적으로 다뤘던 작가는 마르셀 뒤샹으로, 그가 제작한 〈여행용 박스(Boite-en-valise/box in a suitcase)〉가 이 전시에 함께 소개됐다. 뒤샹은 이 작품을 1935년에서 1940년 사이에 처음 제작했다. 이 이동식 여행용 가방은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과 프랑스를 오갔던 다다이스트이자 초현실주의자였던 뒤샹의 정체성을 입증한다. 그가 기획한 초현실주의 전시 〈마일 오브 스트링(Mile of String)〉에서 표현한 것처럼 뒤샹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온 유럽작가들의 망명, 정치적 이산을 상징적으로 다뤘다. 또한 그는 자신의 대표작을 모두 포함하여 휴대용 박스로 제작했기 때문에, 이는 이동식 아카이브와 같은 상징적인 개념을 띤다.
뒤샹의 여행용 가방은 호노레 도의 〈오페라 아페르타(Opera Aperta)〉나 죠엘 투엘링스의 여행가방으로 이어지며, 투엘링스의 〈엽서〉는 실재와 사진 이미지의 경계를 유희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투엘링스는 돌을 통해 인간 문명의 가장 기본이 된 고고학적 유물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근본적인 컬렉션(la colletion fondamentale)〉을 제작했고 이 작품과 함께 광물학 서적에서 뜯어낸 낱장을 함께 전시했는데, 이는 책이 가진 절대적 가치를 전복시키고 시적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 준다.
프란시스 알리스의 〈걷기〉는 프랑스의 국제상황주의자였던 기 드보르가 ‘심리지리학’을 구축하기 위해 기존의 지도라는 데이터에 주관적인 경험과 상황을 구축하였던 일상적 행위를 연상시킨다. 특히 알리스는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걷기와 기록으로 작업해 왔다. 〈고리(The Loop)〉에서 알리스는 자신이 가는 곳을 모두 지도로 표시하고 또 자신이 체험한 공간에 대한 성실한 기록을 아카이빙하는 행위를 시도했다. 알리스는 이 작품을 샌디에고에서 전시하기에 앞서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가는 단거리 비행노선을 선택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장소를 거치는 행로를 선택함으로써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 국경에 대한 미국의 장벽을 상징적으로 제시했다. 알리스의 〈걷기〉는 때때로 자석이 달려 있는 장난감 차를 끌고 다니며 걷는다는 일상적 행위에 정치적인 침묵의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벨기에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비판 미술가이자 개념미술가인 마르셀 브로타에스는 본래 오랫동안 무명의 시인이자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1963년에 갑자기 미술가가 된 초현실주의 작가다. 그는 ‘예술 제작’이나 ‘미술관’의 작품 분류 방식, 디스플레이 방식을 비판하여, 다니엘 뷔렝, 한스 하케, 마이클 애셔와 함께 대표적인 제1세대 제도비판 미술가로 손꼽힌다. 그가 제작한 가장 유명한 작업은 〈현대미술관, 독수리부서(Musee d'Art Moderne, Department des Aigles)〉로 고급미술(회화, 조각)을 분류하는 미술관의 이미지 분류 방식, 미술작품에서의 양식의 문제, 미술관이라는 제도의 문제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했으며,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원더러스트〉전에 전시된 브로타에스의 작품은 〈북해로의 여행(A Voyage on the North Sea)〉이라는 영상 작업으로, 그는 1974년에 같은 제목으로 책과 영상을 동시에 제작했다. 각각에는 배가 한 채 바다 위에 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19세기 아마추어의 그림 이미지와 20세기 돛단배의 사진 이미지이다. 작가 스스로 이러한 혼성적인 스타일을 ‘북-필름(book-film)’이라고 불렀다. 이 작업은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공간을 연출하며, 동시에 오리지널과 복제품, 이미지와 텍스트, 책과 영상과 같은 경계를 미묘하게 오간다. 〈겨울 정원(jardin d'hiver)〉도 미술관에 식물원과 19세기 백과사전식 ‘호기심의 캐비넷’을 옮겨와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제도적인 비판을 가한다. 한편 조각적이면서도 건축적인 공간은 파나마렌코(Panamarenko)가 제작한 〈비행기 모형제작자(The Aeromodeller)〉에서 공중에 부유하는 이동식 공간처럼 구현되었다.
왼쪽ㆍ마르셀 브로타에스 〈겨울 정원〉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2
오른쪽ㆍ죠엘 투엘링스 〈근본적인 컬렉션〉 나무 테이블 종이, 돌 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2
개성과 특성을 살린 신개념 빌리지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더 버티컬 빌리지〉전은 ‘건강한 커뮤니티’에 대한 특성을 규정하며, 오늘날의 재개발과 지나친 도시 개발이 지닌 문제점을 슬라이드 형식으로 보여 주면서 도시(Urban)의 주거공간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는 섹션으로 이어진다. 이 전시는 고층빌딩과 도시화가 가속화되는 아시아의 도시 주거공간의 삶과 실태를 역동적으로 조사하였다. MVRDV의 이러한 조사와 연구가 시작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도시의 하나의 대안이었던 아파트의 수직적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거주자 각각의 개성과 주거 특성을 살릴 수는 없는가?
전시 중간에는 정연두의 〈상록타워〉(2001)가 설치되어 가족들의 사진들이 슬라이드 형식으로 엮어지는 장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같은 아파트 평수에 거주하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32개 가정의 초상을 순차적으로 보여 주는데, 그들의 개성은 표정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인테리어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다음으로 이어진 섹션에는 ‘당신은 진정 당신이 원하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개성과 차별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며, 이는 ‘꿈’을 희망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획일화되고 전통적인 주거 공간이 무너지는 아시아의 도시 공간들을 사례 연구로 삼아, 오늘날의 건축 공간에서 개인의 사적 공간 혹은 문화적 심리적 공간이 어떤 식으로 새로운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전시장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대형 설치물 〈모든 마을은 다르다〉는 다섯 개의 마을에 관한 연구로서 ‘버티컬 빌리지’에 대한 가상 혹은 실현가능한 모습을 디자인한 섹션이자,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서로 엮어 성장하는 ‘고층’ 마을, 비눗방울이나 버블 속 빌라, 둥지마을, 라이프스타일 말미잘 등은 수직적인 버티컬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형태의 다양성이나 유동적인 공간 등을 통해 그리드와 나선형, 방사선 형태 등이 다양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수직 구조는 기본적인 건축의 골격으로 고정된 느낌을 주지만, 버블이나 둥지 등은 유동적이고 투명한 공간으로 비정형적이고 친밀한 개인적 공간을 구축한다. 이것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루프 공간에서 전시 중인 토마스 사라체노의 〈클라우드 시티(Cloud City)〉 프로젝트처럼, 공중에 부유하는 비정형적인 구조로 도시에 다양성과 개성을 구성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두 전시는 각기 미술과 건축 분야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이지만, 결국 현대미술에 있어 조각과 건축의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로 개념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들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이 구축하는 공간 문제는 점차 주거와 이동이 동시에 중요해진 현대인들의 일상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은 사회학자인 마크 오제의 말처럼 ‘수퍼모더니티(supermodernity)’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