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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2.07

Abstract

아트피플 45인이 내놓는 내 생애 최고의 기념품 누군가가 소중히 아끼는 물건에는 그 사람의 관심사와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애장품은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거나 혹은 그 삶 자체를 대변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타인의 물건은 언제나 우리의 비밀스런 호기심을 자극한다. 수많은 물건 중에서도 여행 기념품은 한층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여행은 또 다른 세계와의 설레이는 만남이다. 여행 기념품은 그 만남의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놓은 '기억의 랩소디'이다. art는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등 '아트 피플' 45인이 해외 여행 중에 '득템'한 '내 생애 최고의 기념품'을 소개한다. 관광, 답사, 레지던시, 해외 전시 등 여행의 목적은 각기 다양하다. 이들이 공개하는 동서고금의 물건, 그것에 담긴 저마다의 사연은 '예술과 함께 걸어 온' 미술인들의 삶의 자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작가들에게 기념품은 창작을 위한 영감을 제공해 주기도 하고,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이 들려 주는 기념품 사연은 예술가를 향한 연서이자 미술 현장의 증언이 되기도 한다. 기념품에 얽힌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세계를 누비는 미술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힌트다. 이제, 여행 기념품의 풍성한 멋을 함께 즐기자!

Contents

01    표지  토니 크랙 〈Work (rusty steel 300)〉 코르텐 스틸 300×80×70cm (부분) 2011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김복기

38    핫피플 
    대구미술관장 김선희  장승연

42    오후의 아틀리에 
    오래된 마음의 풍경  김보희

62    포커스
    유영국展|이인성展  김미경
    이기봉展|리경展  이선영
    난다展|이샛별展  김성호
    모성展|고백: 광고와 미술, 대중展  정현

78    특집 My art, My Souvenir
    강석호 강홍구 구민자 권여현 권오상 김구림 김기라 김도균 김준기 노재운    
    노정란 다발킴 도윤희 류동현 박상희 박수진 박영택 박윤영 신세미 신옥진    
    심문섭 안창홍 안필연 유상옥 윤범모 윤재갑 이미혜 이순종 이종구 이종명    
    이지호 이추영 임근준 장동광 장지아 정   현 조숙진 최정화 최종태 한금현
    한만영 현시원 홍  범 홍보라 홍현숙

118    스페셜 아티스트
    [1] 토니 크랙_조각 본질로의 귀환  패트릭 엘리엇
    [2] 헤르난 바스_새로운 퇴폐적 관능미를 향하여  도미닉 모론

136    WHO WE MET
    앙리 루아레트  김수영 

138    이슈 앤 크리틱  
 [9]
    문화 충돌과 ‘정체성’ 탐구  김백균

144    BRAND NEW!    
    아트쇼부산  호경윤

146    해외미술
    [1] 마니페스타9_탄광도시를 기억하는 ‘비엔날레 시학’  워크온워크(장혜진 박재용)
    [2] 아르세날레 2012_‘포스트 소비에트’, 세계로 문을 열다!  김새미

168    암흑물질  
    ‘테크노필리아 괴짜’의 인공과 기계 예찬  조우석

172    전시 리뷰 
    김구림|TriAd|심문섭|김도균|라틴아메리카의 시선|핀 율|박영근
    외국미술 국내전시 60년|생존의 기술: 저항의 내러티브
    김아영|방자영 & 이윤준|윤하민|송민규

184    전시 프리뷰
    무브 온 아시아|이일|강정헌
    서민정|알렉산더 칼더|리얼 DMZ 프로젝트 2012

194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포스트 소비에트’, 세계로 문을 열다

아나 마리아 파체코 <Shadows of the Wanderer> 폴리크롬한 나무 260×390×605cm 2008 Courtesy the artist and Pratt Fine Art Ightam, UK

‘포스트 소비에트’, 세계로 문을 열다

글 | 김새미 · art in ASIA 기자

‘김태희가 밭 갈고 전지현이 소 키운다’는 미녀 천국의 나라, 득점기계 축구영웅 안드리 세브첸코의 조국, 폴란드와 함께 유로 2012을 공동개최하여 본선에 진출했으나 지난 20일 잉글랜드에 패배함으로써 수많은 자국의 엘프녀들이 눈물을 쏟은 나라. 어디인지 짐작이 가는가? 추가 힌트. ‘오렌지 혁명’의 나라, 그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있었던 나라. 그렇다. 답은 ‘우크라이나’다. 미녀, 축구, 체르노빌로 우리에게 알려진 우크라이나가 올해 처음으로 현대미술 비엔날레 ‘키예프비엔날레 아르세날레’를 개최했다. 광주비엔날레가 1995년에 시작했으니 우리에 비하면 매우 늦은 출발이지만, 러시아의 모스크바비엔날레가 작년에 4회를 맞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고무적인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폴케르트 드 융 <The Shooting… At Watou; 1st of July 2006> 혼합재료 2,000×800×300cm 2006 Courtesy the artist and the James Cohan Gallery New York/Shanghai

10살도 되지 않은 우크라이나 현대미술계

올해 처음으로 비엔날레가 열렸다고 해서 우크라이나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계에 진출한 것이 최근의 일은 아닐 터. 1991년 독립 이래 이들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립국으로 소개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공식 국가관을 마련하기까지 또 10년이 걸렸다. 소련관에서 벗어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베니스에 참여한 것이 국가문화예술부의 주관 하에 열린 2001년의 단체전부터이다. 이후 매회 여러 형태의 특별전 형식으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던 우크라이나 작가들은 핀축아트센터가 2007년 베니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부터 국가관의 모양새를 갖춘 전시를 통해 소개될 수 있었다. 공식 우크라이나 국가관은 작년 54회에서 첫 선을 보였다. 수천 년 전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이어지고 있는 부활절 달걀 ‘피산키’의 제작 전통을 보여 주는 옥사나 마스(Oksana Mas)의 채색된 달걀로 만든 설치작품을 소개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현대미술 인프라가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시기는 2000년대 중반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에 우크라이나 근대미술관과 ‘에이도스 미술발전재단’이 개관했고 이듬해에는 키예프를 대표하는 예술공간 ‘핀축아트센터’가 개관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아트페어 ‘아트 키예프’가 첫 행사를 치렀다. 2007년에는 현대미술전문잡지 《아트 우크라이나》가 창간했고 시네마테크를 갖춘 야(Ya)갤러리가 오픈했다. 그간 소더비에서 러시아 미술로 분류됐던 우크라이나 미술은 2009년이 되서야 비로소 ‘우크라이나’ 미술로 소개됐다. 소로스 재단이 1993년 키예프에 세운 소로스 현대미술센터(SCCA)는 2008년 폐관 이후 FCCA(Foundation Center for Contemporary Art)로 재개관하여 2010년부터 정보센터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까지 M17현대미술센터(2010), 스테들리 미술재단(2011), 스추르벤코 아트센터(Shcherbenko, 2012), 예밀로브 센터(Yermilov Center, 2012) 등 여러 아트센터가 연이어 문을 열었고 다양한 온라인 매체와 창작공간들이 생겨났다.

왼쪽 · 웨이 동 <You are a Bird> 캔버스에 아크릴릭 127×96cm 2010 Courtesy the artist and Hanart TZ Gallery, Hong Kong|오른쪽 · 안드리 사가이다코우스키 <Young Blood> 카펫트, 유성 페인트 146×206cm 2009 Courtesy of Ya Gallery Pavlo Gudimov Art Centre, Kyiv

‘바보야, 문제는 오직 현대미술이야!’

국제 미술계는 키예프의 현대미술을 이끌어 가는 양 날개로 사업가 빅토르 핀축(Victor Pinchuk)이 세운 핀축아트센터와 기자 출신 큐레이터 나탈리아 자볼로트나(Nataliia Zabolotna)가 지휘하는 미스텝스키 아르세날(국립 문화예술 및 미술관 단지)을 꼽는다. 핀축은 철강제조업으로 사업에 성공한 뒤 제2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ima)의 딸과 결혼하여 부와 명예를 쌓은 컬렉터다. 현재는 투자 자문회사와 빅토르 핀축 재단을 운영하는, 우크라이나 최고의 ‘미술 외교관’이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비엔날레가 열린다면 이는 필시 핀축아트센터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핀축이 2007,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우크라이나관을 만들었고 미래세대예술상과 핀축미술상 등을 제정하여 우크라이나와 전세계의 젊은 작가들을 지원할 뿐 아니라 현재의 아트센터보다 훨씬 더 큰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엔날레 창설의 주도권을 거머쥔 사람은 미모의 여전사 나탈리아 자볼로트나였다.
이번 비엔날레의 전시장 아르세날레는 사실 핀축이 오래전에 탐냈던 공간이다. 핀축은 1801년부터 200여년 간 군사시설로 사용되었던 아르세날레를 사유지로 매입하여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하려 했고, 이 계획은 핀축이 2004년 아르세날레에서 〈군대여 안녕히〉라는 전시를 엶으로써 공표됐다. 그러나 20 04년 겨울에 일어난 ‘오렌지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빅토르 유셴코 전 대통령이 아르세날레를 ‘우크라이나의 루브르’로 만들겠다며 핀축의 계획을 불허했다. 핀축아트센터는 울며 겨자 먹기로 키예프 시내 구 백화점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핀축과 유센코의 대립을 “구정권의 현대미술과 혁명정부의 고미술이 벌인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고미술품 애호가로 알려진 유셴코 전 대통령은 2005년부터 보수공사를 진행했고 사람들은 아르세날레가 루브르로 재탄생하리라 기대했다.
2009년 8월, 루셴코는 당시 국립문화예술센터 ‘우크레니앤 하우스’의 전시 및 미술행사 책임자였던 나탈리아 자발로트나에게 독립기념일(12월 1일)에 맞춰 아르세날레에서 대규모 조각전을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자국의 근현대 조각가를 대거 소개한 〈죽음으로부터(De Profundis)〉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자발로트나는 이듬해 미스텝스키 아르세날의 총감독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그는 정부의 ‘루브르’형 미술관에 반기를 들었다. 아르세날레에 소장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19세기형 미술관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2014년에 재개관할 미술관이라면 미래형 현대미술센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립한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국제 미술계에서 우크라이나 미술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매우 낮다는 사실, 아트페어나 대형 전시만으로는 그 인식을 바꿀 수 없으리라는 판단, 그리고 유로 2012가 그로 하여금 비엔날레 창설을 서두르게 했다. 먼저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는 대신 ‘아르세날레 프렌즈 클럽’을 만들어 코카콜라와 소니 등 대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유치했다. 그리고 자신이 창설한 아트페어 ‘아트 키예프 컨템포러리’와 ‘파인아트 우크라이나’, 국제북페어 및 대형전의 행사장을 모두 아르세날로 옮긴 뒤 2010년 11월부터 14개월간 무려 열 개의 행사를 치르며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현 대통령은 이곳을 우크라이나의 퐁피두센터로 만들자며 적극적 지원 의사를 밝혔고, 루셴코 전 대통령 또한 고문으로 활동하며 협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5월 24일, 루브르가 아닌 퐁피두를 꿈꾸는 아르세날레가, 야심차게 기획한 키예프 국제 현대미술 비엔날레가 문을 열었다.

최정화 <Golden Lotus> 방수천, 모터 2012

두 도시/국가/시대 이야기

커미셔너 나탈리아 자볼로트나가 비엔날레의 틀을 만들었다면, 그 틀에 콘텐츠를 채운 사람은 예술감독 데이빗 엘리엇이다. 영국 출신으로 스톡홀롬 근대미술관, 도쿄 모리미술관, 이스탄불 근대미술관 등에서 디렉터로 활동한 뒤 2010년 17회 시드니비엔날레를 기획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글로벌 큐레이터다. 자볼로트나는 참여작가 선택을 엘리엇에게 일임하고, 자신의 욕심과는 반대로 자국작가의 참여율을 30% 이하로 제한했다.
엘리엇이 내세운 주제는 〈최고의 시대, 최악의 시대. 현대미술의 부활과 종말(The Best of Times, The Worst of Times. Rebirth and Apocalypse in Contemporary Art)〉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1859)의 첫 문장에서 따온 구절이다. “때는 최고의 세월이요, 또한 최악의 세월이었다. 지혜와 우둔의 시대요, 광명과 암흑의 계절이요, 신앙과 불신앙의 기간이요, 희망의 봄이요,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 앞에는 온갖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한 아무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두가 다 천국으로 곧장 연결될 것들이었으며, 지옥으로 곧장 떨어질 것들이었다.” 소설의 제목과 도입부의 내용 모두가 비엔날레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키워드다. 우크라이나 현대미술은 지금 두 개의 시공간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잠재적인 유럽의 경계선’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동남부와 서부의 양극적 대립구도, 친러 성향의 여당과 친유럽 성향의 야당이 팽팽히 대립하는 정치계, 5년간 부도 누적확률 세계 5위국(영국 Credit Market Analysis Ltd사의 4월 17일 보고서)이라는 불안정한 경제,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의 정치 경제적 침투, 폴란드와의 민족적 사회적 갈등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같은 나라다. 당연히 현대미술에도 이러한 현실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주최 측은 슬로건의 의미를 “현대미술이 미래를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과거가 필요했는지, ‘과거’라는 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감옥이 되었는지, 또 그들은 어떻게 그 감옥을 무너뜨렸는지를 고민하겠다는 것이다. 과거가 감옥이 아닌 미래적 가능성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용기있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소련의 유령, 공산주의의 유령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영토가 넓고 영향력이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국제 비엔날레에 있어 ‘포스트소비에트국가’의 정체성 문제는, 피할 수는 없지만 전면에 내세울 것은 아니다. 엘리엇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유산이 여전히 반향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제는 각 지역의 미학적 전통이 이보다 우세하게 현대미술에 작용하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도록 서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조곡 〈전람회의 그림〉 10번에 묘사된 ‘골든 게이트’의 도시로 유명한 키예프는 역사적인 슬라브족 도시다. (…) 나는 이번 비엔날레의 출품작을 선택하면서 시야를 구소련 소비에트 국가로 한정시키지 않고,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디아스포라적 유산을 반영하고자 했다. 우크라이나와 CIS(독립국가연합) 작가들의 작품은 전세계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될 것이며, 특히 동양의 작품이 두드러질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꿈꾸었던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유토피아적 희망이 오늘날 그만큼의 테러 빈곤 불평등 전쟁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을 덧붙인다. 민주적 자본주의 같은 건 없다는 게 증명됐고 그 증인은 미국 한국 우크라이나 모두라는 거다. 그들의 유령뿐 아니라 ‘세계종말’의 징후를 다 함께 바라보고, 가만히 앉아 세계가 끝나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그가 선택한 작가/팀이 100명이고 그 지역별 구성비는 우크라이나 24명, 러시아 5명, 카자흐스탄 2명, 우즈베키스탄 1명으로 CIS가 가장 많았다. 중국 9명, 일본 8명, 한국 3명, 홍콩 2명, 인도 3명, 몽골 3명, 베트남 1명으로 아시아가 그다음이었으며 영국 10명, 독일 2명, 미국 5명 등으로 미국 유럽작가의 비율은 25% 정도였다.

왼쪽 · 스텔리오스 파이타키스 <Pincer of Germany-Revolution of Machno> 혼합재료 7.8×7.6m(부분) 2012 Courtesy of The Breeder, Athens|오른쪽 · 루체자르 보야디에프 <Untitled-Mummy Project(Hold Your Breath)> 혼합재료 각 200×70×60cm 2012

의미있는 데쟈뷰

가장 먼저 관객을 반기는 작품은 최정화의 〈금빛 연꽃〉. 비엔날레 입구 쪽 실외분수에 설치해 제목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작가는 키예프 시내 교회의 금빛 돔에서 영감을 받아 지름 10m의 대형 플라스틱 꽃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비엔날레 개막 전 3월 7일 독립광장에 설치되어 약 세 달간 시민들에게 보여져 비엔날레의 서막을 알리는 랜드마크로 기능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전시된 미스텝스키 아르세날레 건물의 실내면적은 2만 4천㎡로, 베니스비엔날레 아르세날레의 실내면적 2만 5천㎡에 필적한다. 물론 베니스의 아르세날레만큼 정돈되진 않았지만,  200여년의 세월을 겪은 건물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한 현장의 상황을 감싸안았다.
결론부터 말하자. 각각의 작품이 충분한 공간을 차지하여 전시가 시원시원해 보였는데, 같은 이유로 어떤 공간은 휑뎅그렁한 느낌을 줬다. 작품의 수준과 규모는 베니스비엔날레에 버금가는 유럽의 대표적 비엔날레가 되겠다는 이들의 포부를 여실히 드러냈다. 요컨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엄선된 작가들을 이미 다른 비엔날레 혹은 그러한 규모의 행사가 먼저 보여 줬다는 점이다. 주최측은 새롭게 제작된 신작이 40여 점에 달한다고 했지만, ‘어디서 이미 본 것 같은’ 작품이 과반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표적 예가 인슈젠의 〈무기〉이다.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의 중국관에서 강한 인상을 줬던 작품이다. 미와 야나기의 〈바람에 휘몰린 여인들〉는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에서, 스텔리오스 화이타키스의 〈사기 교향곡〉은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덴마크관에서, 송동의 〈빈민의 지혜〉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긴 했지만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서, 리차드 그레이슨의 〈메시아〉는 2010년 시드니비엔날레에서 발표됐다. 이 외에도 일리야 & 에밀리아 카바코브의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기념비〉나 빌 비올라의 〈뗏목〉, 아이 웨이웨이의 〈12지신 두상〉, 아나 마리아 파체코의 〈방랑자들의 그림자〉, 토야 시게오의 〈나무 10〉 등은 유럽과 미국의 유명 미술관 또는 공공장소에 여러 번 전시가 되었던 작품들이다.
비엔날레가 신작만을 보여 줘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많은 출품작을 선취한 주체가 기관이나 갤러리가 아닌 다른 비엔날레라는 점은 국제 미술계의 시각에선 당연히 진부해 보인다. 그러나 ‘최초’라는 사실에 방점을 두면, 본국의 관람자들에게 그러한 수준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일이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작품이 ‘여기 이곳’에 전시되어야 할 당위성에 비례할 것이다.
이제는 폐허가 된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의 중공업 지역을 촬영한 보리스 미하일로브의 사진, 우크라이나의 고전 영화감독 알렉산더 도브젠코의 영화를 콜라주하여 소비에트 프로파간다의 이면을 고발한 루츠 베커의 영상,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의 알레고리를 역전시킨 폴케르트 드 융의 〈2006년 6월 1일 와토에서의 사격〉, 1937년 나치가 기획한 전시 〈예술의 퇴보〉의 주역들을 해골 얼굴을 한 사람들로 연출한 제이크 앤 디노 채프먼의 〈극단의 절망〉,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의 그림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적 도상들을 재조합한 AES+F의 〈알레고리아 사크라〉, 폴란드 유대인 부활운동의 지도자 시에라 코우스키의 가상 장례식을 구성한 야엘 바르타나의 〈암살〉, 베트남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장면들을 보여주는 딘 큐레의 〈음성과 격정〉 등은 그러한 당위성이 쉽게 파악되는 작품들이다. 문화혁명기의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정책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웨이 동의 〈민주주의〉를 비롯한 중국 작가의 작품이 특히 많은 것은 ‘포스트소비에트’의 감수성이 만연한 후기식민주의적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태도를 중국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첫 비엔날레 개최에 박수를

비엔날레 개막 이틀 뒤인 5월 26일, 우크라이나 의회에서는 러시아어의 제2 공식어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이 난투극을 벌여 일부 의원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1991년 독립 이후의 후기식민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최근에는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주변국들이 반발하여 5월 11일 얄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중동부유럽 정상회의가 취소되고 영국 등 일부 유럽국의 정부 각료가 유로 2012 방문을 보이콧하는 등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일부 유럽 언론은 프레스회의에 엘리엇이 늦게 도착했다느니, 오프닝 당일에도 일부 작품의 설치가 완료되지 않았다느니, 주최측이 프레스투어의 스케줄을 변동하여 기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느니 하며 부정적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이런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상황에서 비엔날레를 열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쳐 줄 만 하다.

식민주의와 근대 콤플렉스를 넘어

유영국 〈산〉 캔버스에 유채 135×135cm 1989

식민주의와 근대 콤플렉스를 넘어

글 | 김 미 경

우리의 문화예술에서 ‘식민주의(colonialism)’와 ‘근대(the Modern)’의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다양하고 깊게 해석되어 왔는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함으로써 36년 동안 지속된 조선 식민 지배는 종결되었다. 하지만 효과적이고 강력한 통치 정책으로 정치 경제 사회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 조선인의 의식 구조에 침투했던 일본의 흔적은 사실상 여전히 곳곳에 만연해 있다. 그리고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해서든, 역사적 둔감증 때문이든, 껄끄러운 자신들의 역사를 들추어 내기 싫은 데서 연유하는 고의적 기피이든, 일제 식민지 시대와 관련된 막대한 연구 과제는 한일합방 100년이 지났어도 상당 부분 미해결 상태이다. 최근 조선의 천재 시인 이상이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을 때 그들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진지하게 벌어지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남았던 터에,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각각 탄생 100주년을 맞는 이인성과 작고 10주기(탄생 96주년)를 맞는 유영국의 전시가 열린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국립 미술관과 상업 갤러리에서 각자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이라는 두 개의 중심축을 다루게 된 셈이다. 한편 이는 다시 한 번 ‘식민주의’와 ‘근대’의 문제를 숙고하게 했던 전시들이기도 했다.

이인성 〈가을 어느 날〉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1934

극단적 신화화는 경계해야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위해 서울과 대구 지역의 주요 신문에 두 달 반 동안 공고를 내어, 흩어져 있는 이인성 관련 사료들을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거쳤다고 한다. 또 전시에 앞서 6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대대적인 학술행사도 개최했다. 그런 만큼 이 전시는 학술 데이터베이스를 탄탄하게 구축하려는 기획 구성을 보여 주었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고 과거의 오류가 수정됨으로써 축적된 아카이브 연구는 확실히 한국 근현대미술계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한편 갤러리현대 강남의 유영국 전시는 광범위한 연구의 스펙트럼을 보여 주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상업 공간으로서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관객들에게 1950~60년대 이후 유영국 추상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풍성하게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는 점에서 역시 노련한 전시 기획의 전문성을 보여 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인성과 유영국은 탁월한 색채 감각을 포함한 각자의 조형성을 지니고 있어, 국내에서의 지명도도 높고, 미적 평가에 대한 공감대의 폭이 넓은 작가들이다. 그러나 조형성의 문제가 작품 감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이 작가들의 국제적 평가를 위해서는 그 이상의 역사적 철학적 담론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제 한국미술에 관한 전시 기획과 학술 연구가 ‘작품이 좋다’는 막연한 인상주의적 비평 수준으로 색채나 구성을 논하는 조형적 분석에서 더 나아가야 함을 뜻하며, 예술에 있어서의 사회학적 지정학적 연구가 훨씬 더 심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이제는 한국미술의 미학적 담론화가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이인성의 예술에 있어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발굴’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사실상 ‘이제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각도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극단적 신화화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인성과 함께 이중섭과 박수근 같은 작가의 예술이 국내에서 신화화되는 것과 국제적 인지도를 갖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인성이 매국노가 되지는 않았더라도 조선미전의 기린아(麒麟兒)로 살았던 그의 삶이 친일은 친일이라는 점, 조선총독부 주최로 일본인들이 조선미전에서 조장했던 조선 향토색 및 지방색이 곧 온전히 조선인에 의한 근대적 자각의 발현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언술해야 한다. 또한 “이인성은 친일이 아니다”라고 성급하게 말하기 전에, 전시와 연구를 통해 그의 작가적 태도와 예술에서 드러나는 ‘하이브리드’ 속성에서 어떻게 ‘친일’과 ‘서구 근대’와 ‘조선’이 얽히는지 좀 더 투명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대표작 〈경주의 산곡에서〉의 경우, 이인성은 지배자 일본이 보기 ‘원하는’ 식민지 조선의 이국적 풍경으로서 ‘향토색’(경주)의 중요성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은 그들이 동경했던 ‘서구 근대’로서의 유럽으로부터 고갱과 프랑스령 남태평양 타히티 식민지의 관계 구조를 빌어 와 이를 한국에 대입함으로써 매우 기묘한 ‘하이브리드’를 만들었다. 그것은 지배자로부터 ‘칭찬받기 위해’, 즉 타자의 시선과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변형하고 그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믿어버렸던 조선의 식민주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 준다.

왼쪽ㆍ이인성 <자화상> 나무에 유채 26.5×21.8cm 1950
오른쪽ㆍ이인성 <여름 실내에서> 캔버스에 수채 71×89.5cm 1934

조형성 평가 이상의 역사 철학적 담론 시급

유영국의 예술에 대한 아카이브와 다양한 관점의 연구들은 그간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의 성과를 통해 꾸준히 축적되어 왔다. 이번 갤러리현대의 전시 또한 상업성과 함께 학술적 태도를 어느 정도 수반한 기획으로, 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에 대한 연구를 두텁게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러나 거시적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유영국 개인의 예술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담론을 생산하는 큐레이터들과 학자들의 연구를 모으고 도전을 시도하지 않은 채 조형성 자체를 조명하는 데 그치는 전시가 반복되는 한, 한국의 추상미술을 국제적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일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2009년 앤디 워홀의 〈다른 목소리, 다른 방(Other Voices, Other Rooms)〉전을 기획했던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의 워홀 아카이브 연구 분량과 내용에 더 이상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 때는 과연 언제일까.
유영국의 예술에 대해서도 일본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이 추구했던 추상미술의 세계와 해방 후 서구 근대의 물결 속에서 한국인 예술가가 헤쳐 나갔던 추상미술의 세계가 식민주의와 서구 근대 콤플렉스 속에서 어떤 장애와 도전의식을 수반했는지에 관한 역사적 조망이 더욱 필요하다. 아울러 유영국의 추상미술을 단순히 서구의 추상미술과 오버랩하여 분석하는 대신, 식민지 시절에 단절되었던 우리의 전통 미학과 어떤 연결고리들을 형성하는지 ‘문화적 잠재태’로서의 요소들을 끌어 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서구의 식민 지배를 당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에는 식민주의의 여파가 오래 남게 되고, 유령 같은 서구 근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서구’를 대체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을 본뜬) 친일적(親日的)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식민주의의 여파를 강하게 보이고 있는 동시에, 감정적으로는 극히 반일적(反日的)이라는 모순된 구조를 갖고 있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동안 조선 시대 우리의 실학 판소리 탈춤 서민문학 등에 대한 연구는 단절되었고, ‘아세아 공영권’이라는 명분과 ‘내선일체(內鮮一體)’ 아래 ‘일본화(日本化)’가 잘 살게 되는 선진화이며 곧 ‘근대화’로 인식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 후에 ‘일본화(근대화)’는 ‘청산해야 할 쓰레기’로 치부되고, 우리를 해방시켜 준 미국을 추종하는 ‘서구화’가 곧 ‘근대화’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친일(親日)은 곧 친미(親美)였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인성과 유영국의 예술은 ‘우리 미술은 좋은 것이다’라는 자화자찬을 넘어, ‘식민주의’와 ‘친일’ 및 ‘반일’ 그리고 근대적 자각에 대한 문제와 서구 근대에 대한 인식 및 재해석의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이들의 예술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 서구화의 물결과 함께 한국미술이 걸어 온 길에서 작가들이 취했던 ‘태도’의 문제를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비단 과거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현재 한국작가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퇴폐적 관능미를 향하여

<A Landscape to Swallow You Whole> 리넨에 아크릴릭, 블록 프린트, 실크스크린 182.9×304.8cm(부분) 2011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Gallery, New York

새로운 퇴폐적 관능미를 향하여

글 | 도미닉 모론 ·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죽음의 휘파람과 소리 없는 음악이 그리는 동그라미가, 이 사랑 받는 육체를 상승시키고, 넓히고, 떨리게 한다. 마치 유령처럼. 검붉은 상처 자국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육체 안에서 터져 오른다. 생명의 고유한 빛깔이 짙어지고 춤추며 환영의 주위를 표류한다.” -아르튀르 랭보, 〈미의 존재〉중
19세기 후반 유럽의 미술과 음악, 연극과 문학은 오랫동안 퇴폐적이라며 조롱당하고, 현실 도피적이라고 무시당했다. 또한 대단히 열성적인 모더니스트들과 비교하여 다소 하찮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흥미롭게도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이 두 세계의 대립과 그 대립 안에서 생겨나는 또 다른 미래의 격변, 즉 귀스타브 클림트의 회화,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 아르튀르 랭보의 시, 그리고 귀스타브 말러의 교향곡에 나타난 의도적인 화려함의 저변에 깔려 있는 우려와 두려움을 감지하기도 한다.
헤르난 바스의 작업은 이러한 양식과 감수성, 그리고 19세기 후반의 더욱 어둡고 복잡한 양상들에 대한 암시를, 숲이 무성한 배경과 환경 속에 자리한 성적 매력이 있는 어린 남성들의 그림에 적용시킨다. 그의 회화와 드로잉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늘날 패션 산업에서 이상적인 남성미로 여겨지는 남자 모델들만큼이나 에곤 쉴레의 세기말적(fin de siㅤㄹㅙㄿle) 그림에 나오는 늘씬한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그가 1800년대 후반 이미지를 참조한 것은, 이제는 경험할 수 없지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매력적인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스탤지어는 각기 다른 두 시대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데, 하나는 루치아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간 세기의 미학적 양상들을 역사적 객체에 근거하여 작품 속에 담아 낸 캐런 킬림닉의 회화와 설치작업이다. 바스의 작품은 이에 비해 더욱 고딕풍이고 로맨틱한 성향을 띠지만, 동시대 남성성의 새로운 기준을 옹호하는 그의 특징이 이를 근본적으로 상쇄하고 완화시킨다. 이와 동시에 그는 우리들의 타락한 시대를 특징짓는 두려움과 불안의 미묘한 암시 또한 담아 내고 있다.

<Tracing Shadows(or, the mistaken silhouette)> 리넨에 아크릴릭, 실크스크린, 블록 프린트, 에어브러쉬 152.4×122cm(부분) 2012

 ‘초 자연적’인 동성애에 대한 옹호

바스의 작업에 등장하는 첫 번째로 중요한 신체는 다이어트 쉐이크 음료인 ‘슬림-패스트(Slim-Fast)’ 가루를 사용해 그린 유령 같은 남자 형상들이다. 〈무제(슬림-패스트 실루엣(Untitled-Slim Fast Silouette)〉(1999~2000)에는 분홍색 갈색 노란색으로 그려진 세 명의 인간 형상들이 한 공간 안에 모여 있다. 비록 그들은 서로에게 관련이 없지만 ‘팀 웨이프(TEAM WAIF)’라는 글자가 그들 사이를 맴돌고 있다. ‘웨이프(Waif)’라는 단어는 1990년대 많이 쓰였던 표현으로 케이트 모스나 스텔라 테넌트처럼 굉장히 마른 여성 수퍼모델들을 묘사하는 단어다. 바스는 이 단어를 스포츠나 운동선수에게나 어울릴 법한 표현인 ‘팀(Team)’으로써의 남성 형상들을 집합적으로 총칭하기 위해 전용하고 재해석하였다. 회화의 재료로 슬림-패스트를 사용한 것도 그가 힘과 남성성이 남성의 이상적인 신체와 동일시되었던 기존의 문화적 기준에서 벗어난 특정 신체 타입을 지지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바스의 다음 작업인 〈헤르난의 가치와 최근에 나타난 계집애 같은 남자들(He rnan’s Merit and the Nouveau Sissies)〉(2001)은 종이에 단색조의 유화 붓질로 여린 소년들과 남성들을 그려 넣었다. 옷을 입거나, 입지 않거나 혹은 반만 걸치고 있는 회화 속 등장인물들은 느긋하게 누워 있거나 무심히 카누의 노를 젓고 있고 샤워를 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자연 환경 속에 그냥 놓여 있다. 그들은 좀처럼 관람자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끌지 않은 채 다만 시각적 유희나 객체화를 의도하고 있을 뿐이다. 계집애 같은 남자들(Sissies) 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특히 이러한 의도, 즉 경멸조의 별명에서 성적 매력이 있는 사람을 묘사하는 표현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다(It’s Super Natural)〉(2001~02) 시리즈는 종이에 유화로 제작한 작업으로, 바스는 야위고 어린 남성들을 위해 더욱 어둡고 정교하게 표현된 배경과 환경을 제시한다. 이 작업들의 제목에는 〈쌍둥이 로켓 미스터리(Twin Locket Mystery)〉(2001)나 〈텅빈 오크나무의 미스터리(Mystery of the Hollow Oak)〉(2001)처럼 ‘미스터리’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하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어둑어둑한 구성과 기괴하고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를 반영한다. 전면에는 각각 금발과 어두운색 머리카락의 남자아이 둘이 똑같이 생긴 팬던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데, 이 둘은 각자 꿈을 꾸듯 수심에 잠긴 채 서로를 외면하고 있다. 뒤편으로 언덕 위를 올라가는 계단이 불길하게도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동안 이들은 마치 연민과 애정, 심지어는 음모마저도 꾀하는 듯하다.
〈무제-나무 위의 집(Untitled-Tree House)〉(2001)과 〈와일드 읽기-보이스에 시달리다(Reading Wilde-Haunted by Boise)〉(2001) 같은 다른 작업들에는 책을 읽는 동안 벌어지는 초월적 경험들을 제시함으로써 바스 작업의 문학적 근거를 확인케 한다. 책 읽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혹은 성적인 노력마저 요구되는 ‘혼자 있기’의 성격을 띤다. 〈일광욕-옥상(Sunbathing-Roof top VT)〉(2001)과 〈악령/시끄러운 유령(Possesd/Poltergeist)〉(2001)의 자위 이미지는 불쾌할 정도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관음증적인 장면 속에서, 심지어 중앙에 있는 인물이 특정 자위 행위를 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이 모든 연작을 아우르는 제목인, ‘이것은 초자연적이다’는 의미가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말장난을 통해 그 주제들과 테마들을 압축해서 보여 준다. 화면을 채운 유령이나 영혼, 환영과 같은 ‘초자연적(supernatural) 존재’와(이 점에 있어 〈들쭉날쭉한 기슭에서(On the Jagged Shores)〉(2002) 만한 작품은 없다) 아주 미묘하지만 틀림없이 동성애에 대한 옹호를 암시하는 ‘초 자연적(Sup er Natural)’이라는 뜻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왼쪽·<Untitled-Slim Fast Silhouette> 종이에 연필, 잉크, 슬림 패스트 27.9×21.6 cm 1999~2000 | 오른쪽·<Sunbathing-Rooftop VT> 종이에 수성유채 9×14cm 2001

세기말적 상징주의에서 모더니즘적 감수성까지

바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꾸준한 색채의 증가는 2003년 시리즈 중의 하나인 바다를 그린 작업, 〈우리 모두 안의 작은 모비딕(A Little Moby Dick in All of Us)〉에서 특히 심화된다. 비록 같은 해에 제작된 두 화면의 비디오 설치 작업 〈부서지기 쉬운 순간들(Fragile Moments)〉(2003)이 흥미롭게도 흑백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가장 사랑스러운 노래(The Loveliest Song)〉(2003)에서는 두 명의 젊은 남성들이 해변에 있는 잔디밭에 누워 있고 그 중 한명은 소라고동 껍데기로 피리를 불고 있다. 이 그림과 함께 자화상인 〈에디 슬리먼에 의해 노략질을 당한 유령선과 함께 사해를 표류하다(Floating in the Dead Sea with Ghost Ship Pirated by Hedi Slimane)〉(2003)의 분위기 또한 조용한 불길함이라기보다는, 모비딕의 숭고한 강렬함과는 거리가 먼, 더없이 황홀하고 사치스러운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바스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가볍지만 자신감 있는 붓질로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작은 모비딕’이 울려 퍼지는 에로티시즘과 감정을 담아 낸 깨지기 쉬운 시나리오들을 창조한다. (짐작컨대 바스는 책에 나오는 하얀 고래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저자인 허먼 멜빌이 지닌 19세기 중반의 로맨틱한 감수성을 차용했을 것이다.)
캔버스나 패널에 그린 회화에서 바스는 다양한 역사 혹은 신화적 상황들 속에 요즘 사람으로 보이는 어린 남성들을 그려 넣기 위해 보다 풍부한 색상을 사용하였다. 1800년대 후반, 기이하면서도 동성애자로 알려진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는 백조의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스의 작품 〈백조 왕자(The Swan Prince)〉(2004)에 영감을 주었다. 그림엔 화환으로 장식된 세 마리의 백조가 이끄는 조개 모양의 보트에 나른해 보이는 어린 사내가 힘없이 누워 있다. 이와 유사하게 시대착오적인 작업, 〈베수비오산(Vesuvius)〉(2005)  은 두 명의 소년이 더 오래되고 전통적인 나룻배에 몸을 싣고 대재앙을 불러올 화산 폭발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다. 그 중 한명은 폭발하는 화산 쪽을 응시하는 다른 한 소년을 열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이 회화 작업들은 동시대의 인물과 사물, 모티프를 역사적으로 과거의 시점에 위치시키기를 선호하였다는 점에서 영국 영화감독 데릭 저먼을 연상케 한다. 가령 〈카라바지오(Caravaggio)〉(1986)와 〈에드워드2세(Edward)〉(1991)에서는 과거와 현재 간의 공감이 예상치 못한 표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백조 왕자〉가 대단히 화려하고 개인주의적인 루드비히와의 동일시의 감정을 암시한다면, 걸프 해안 대부분을 파괴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했던 해에 그려진 〈베수비오산〉은 아마도 자연재해는 언제나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패권’에의 끊임없는 도전이 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가장 최근의 회화들은 모더니즘적 요소들과 감수성을 담아 냄으로써 미술에 이르는 보다 전통적인 접근들에 대한 그의 반복된 시도 너머로 나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얌체, 도와주는 손들(The Prude, Helping Hands)〉(2005~06)에서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 인물은 수많은 표정이 담겨 있는 많은 양의 추상적 붓질들로 녹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태는 〈융합(The Merger)〉(2005)에서도 반복되는데, 두 명의 어린 소년은 마치 잭슨 폴록이나 윌렘 드 쿠닝의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키는 회화적 제스처들의 정신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연결망의 한가운데를 헤쳐 나아가고 있다. 〈무제-어릿광대(Untitled-Harlequin)〉(2006)는 피카소의 초기작에서 선호되었던 어릿광대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모더니즘적 연결 고리를 형성한다. 바스는 화면 전체에 어색하게 붙여 놓은 직물들에 어릿광대 패턴의 모티프를 확장시키고 비극적으로 패배의 자세를 취하는 인물을 그려 넣었다. 바스가 만들어 낸 세기말적 상징주의와 지독하게도 운명론적인 1950년대의 표현주의, 그리고 추가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불만족스러운 모더니즘 간의 불안정한 조합은 한계선까지 치달은 복잡한 형식과 살과 물감 모두의 감각적 가능성들에 대한 성욕의 찬양 사이에서 매력적으로 변덕을 부리는 교착 상태를 만들어 내었다.

왼쪽·<The Swan Prince> 캔버스에 혼합재료 76.2×101.5cm 2004 | 오른쪽·<Well Aged> 종이에 혼합재료 77×58cm 2005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관한 쓰라린 사색

최근작인 〈바다의 교향곡-피지 인어를 위한 장송곡(Ocean’s Symphony-Dir ge for the Fiji Mermaid)〉(2007)은 평면 작업에서의 고정된 성적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재구축, 재정의를 3차원 설치작업으로 확장시킨 대표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잊힌 피지 인어(서커스 사업가인 P.T.바넘이 메인 서커스 이외의 소규모 쇼를 위해 원숭이와 물고기의 박제를 조합하여 만든 혼성체)의 사기극을 주제로, 19세기를 향한 회고적 시선을 다시금 담아 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장례식장을 연상케 하는 바스의 설치작업은 조개껍데기로 만들어진 음악상자에서 ‘바다 장송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동안 피지 인어의 복제품이 관 속에 누워 있으며, 이들의 의식을 기록한 3개의 흑백영상과 2개의 컬러영상이 동시에 상영된다. 그의 작업 제안서에 의하면, 〈바다의 교향곡〉은 때 묻은 비둘기와 같은 작고 추한 상징들이나 사람들이 너무나 믿고 싶어 하는 시대의 유물들을 초자연적 현상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외에도, 동시대 문화와 사회가 지닌 혼성과 그 외의 것들의 개념에 대한 쓰라린 사색을 제공한다.
바스가 1990년대 미술계에 등장한 이래, 그의 작업은 연약함과 불확실성에 대립하는 기존의 남성성에 대한 대안적 형태의 정체성을 진지하면서도 조용히 지지했던 것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양분된 양식과 감수성들을 좀 더 대담하고 확고하게 혼합해 내는 쪽으로 꾸준히 발전하였다. 이는 신기하게도 19세기 후반의 퇴폐미로부터 꽤나 성급하게 도래한 20세기 전반의 모더니즘으로의 전개를 극적으로 압축된 새로운 유행을 재등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바스는 포스트모던의 유행 안에서 이 두 가지를 의도적이고 신중하게 뒤섞어 놓거나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롭게 여명이 밝은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그는 이 두 양상이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현 세계를 정확히 반영하고 새롭게 재탄생한 관능성의 평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 둘이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대구미술관의 새 수장, 김선희 관장을 만나다

김선희 1959년 경기도 여주 출생. 전남대 미술교육과 및 동대학원 석사 과정 졸업.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을 거쳐 일본 모리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중국 상하이 젠타이그룹 히말라야센터 예술감독, 조선대 외국어대학 동양학부 겸임교수 및 전시기획자 역임

대구미술관의 새 수장, 김선희 관장을 만나다

글|장승연 기자

개관 1주년을 한 달 앞둔 지난 4월, 대구미술관이 새 수장을 맞았다. 바로 김선희 관장이다. 이제 ‘신생 미술관’이라는 타이틀을 벗게 된 대구미술관은 지난 1년 간 다져 온 기반을 유지하고 보강하는 동시에, 미술관만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때가 됐다. 따라서 새 관장의 임무와 역할도 막중할 터. “흔한 지역미술관으로 남을지 아니면 국제적 흐름에 동참하는 미술관이 될지, 과제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대구미술관이 지역작가를 위한 플랫폼이자 국제적인 미술 트렌드를 한껏 접할 수 있는 쌍방통행의 장(場)이 되도록 이끌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선희 관장의 새로운 비전이다.

대구미술관 프로젝트룸에서 열린 〈메이드인 대구〉(2011. 8. 10~11. 20)전 전경

대구의 잠재력 보여 주고, 국제화의 활로 찾아야

“처음 대구에 왔더니, 저를 아는 분들이 정말 거의 없더군요.(웃음)” 김선희 관장은 사실 미술계에서도 국내보다는 아시아 현장에서 활약해 온 전문가로 더 친숙하다.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을 지낸 뒤 해외로 건너간 그는 지난 10여 년 간 모리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중국 상하이 젠다이그룹 히말라야센터 예술감독, 중국 CCAA미술상 디렉터 등을 역임하며 국제적 기량을 다져 왔다. 2006년 모리미술관의 ‘맘 프로젝트(MAM Project)’에 작가 최우람을 선정하여 그를 국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소개시킨 이가 바로 김 관장이다. 대구시 또한 “글로벌한 안목으로 지역 미술인들을 아시아 무대에 소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했다”고 밝히며, 그의 해외 활약을 이번 관장 임용의 중요한 사유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국제화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대구시민과 미술인들과의 소통을 점검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할 과제다. 개관 1주년을 맞아 김 관장이 대구 미술인과 시민 500여 명을 초대한 ‘소통의 장’ 기념행사를 마련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지난 1년 간 대구미술관은 다양한 테마의 기획전을 선보여 왔다. 해외 유명작가부터 한국의 원로 및 신진작가의 개인전이나 특정 주제의 기획전을 열었고, 프로젝트룸과 어미홀 전시를 통해 미술관 공간의 특성화를 시도했다. 물론 지역 미술관으로서의 역할과 의무에 맞춰 대구미술 관련 기획전도 꾸준히 진행했다. 대구를 포함한 한국미술을 국제적 시각에서 조망한 〈기(氣)가 차다〉전, 작고한 원로작가 주경을 비롯한 대구작가를 소개한 〈대구의 근대미술Ⅰ〉전, 대구화단의 역사를 대변하는 작가 〈정점식〉전과 원로 여성화가 〈김종복〉전,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한 〈메이드 인 대구〉전과 〈디아티스트〉전 등을 개최했고, 현재 대구 출신 근대화가들의 인물화를 한 자리에 모은 〈11인의 인물화〉전을 열고 있다. 김 관장은 이제 전시뿐만 아니라 대구의 역사와 미술에 대한 미술관 자체 보유의 자료와 콘텐츠를 보강해야 함을 강조한다. “대구는 근대 이후 한국 제2의 미술도시로 중요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술대학만 7군데나 되는 문화예술 도시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현대에 와서 활동이 위축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과거에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확인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제시해야 합니다. 기획력을 갖춘 전시를 통해 이를 보강하고, 동시에 대구의 역사와 미술을 충실히 되짚기 위해서 학계와의 협업도 필요합니다. 대구미술 자료 아카이브도 마련해야 하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대구가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키우고, 또 조금씩 국제 교류전을 비롯한 다양한 해외 기관과의 협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최근 김 관장은 내년을 목표로 세계 무대를 주도하고 있는 현대미술 거장의 대규모 전시를 추진 중이다. 흔히 말하는 기획사 주관의 ‘블록버스터’ 전시와는 차별화된 미술관의 야심찬 자체 기획전이다. “대구작가들을 국제무대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또 그러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대로 현재 세계미술무대의 트렌드를 접할 수 있는 생생한 기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가는 것만을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반대로 들여오기도 해야죠. 공공 미술관의 대중성과 전문성을 함께 갖추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김 관장은 귀국 전까지 중국현대미술상(Chinese Conteporary Art Awards, 이하 CCAA) 디렉터를 역임했다. 1997년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중국 현대미술 컬렉터 울리 지그가 당시 불모지였던 중국 미술계를 격려하고자 설립한 CCAA는 비평이나 전문적인 인식이 부재하던 중국미술을 질적인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수상제도이다. 세계적인 큐레이터들을 심사위원으로 초빙하며 상의 권위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높였던 당시 경험을 살려, 오늘날 대구 미술계에 부족한 전문적인 도전과 실험 정신을 더욱 북돋고 국제화의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것이 김 관장의 바람이다. “대구화가 이인성은 한국의 중요한 문화 콘텐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대구시에는 이인성미술상도 있어요. 마침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주최로 특별전(9. 11~12. 9)을 개최합니다. 이 전시에서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합니다. 특히 이러한 수상제도 역시 국제적으로 프로모션할 수 있는 활로를 찾아야 합니다. 미술관도 마찬가지죠. 가까이 아시아권에서만 보더라도 지역 미술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들이 굉장히 많으니까요.”

전시 오프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는 김선희 관장

‘먼’ 미술관이 아닌, ‘멀어도 가고 싶은’ 미술관으로

대구대공원 내에 자리한 대구미술관은 대덕산을 배경으로 한 자연환경 속에 웅장히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우수한 환경 여건을 품은 대신, 시내에서 다소 먼 위치와 미술관 부지 내의 넓은 동선 탓에 개관 때부터 접근성 문제에 대한 지적이 늘 뒤따랐다. 예상보다 적은 관람객 수(개관 1년 간 약 13만1천96명)의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제 김 관장은 대구미술관이 더 이상 ‘먼’ 미술관이 아니라, ‘멀어도 가고 싶은’ 미술관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 듯하다. 대구 도심과는 다른 여유로운 공기와 자연환경을 이점 삼아, 시민들이 언제든 맑은 공기를 찾아 나들이를 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발을 이끌 다양한 콘텐츠가 준비돼야 한다. “미술관 마당에서 비보이 공연을 펼치면 어떨까요? 미술관은 이제 미술뿐만 아니라 최근 추세에 맞게 종합예술적인 특성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 음악 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어요. 앞으로 이 넓은 공간을 맘껏 활용할 수 있는 퍼포먼스나 공연 예술 등의 프로그램도 추진해 봐야죠. 현재 영화 건축 음악 등 다원적인 내용의 교양강좌도 진행 중입니다. 저도 틈틈이 들어가 강의를 듣는데 아주 유익해요. 앞으로 한층 다양하고 유연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겠습니다.”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김 관장은 자신의 소박한 취미인 ‘텃밭 가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아름 풀어 놓았다. 씨앗이 싹을 틔워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돌봐 주고, 곁가지를 쳐 주고, 물과 바람을 적당히 공급하며 병충해로부터 돌보는 정성어린 과정이 지나면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직한 수확의 기쁨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그런데 김 관장은 이제 그동안 돌봐 오던 자그마한 텃밭이 아닌, 대구미술관이라는 거대한 텃밭의 정원사가 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사령탑’이라는 의미에서 관장을 배의 선장에 비유하기도 해요. 저는 그보다도 지금 시대와 사회 공동체의 문화를 꿰뚫는 통찰력을 지닌 문화 컬티베이터로서 ‘정원사’에 비유하고 싶어요. ‘산의 나무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잘 자란다’는 말도 있죠. 얼마나 자주 세심하게 돌봤는가에 따라 수확이 결정됩니다. 저 또한 식물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 일처럼, 미술관의 수확을 위해 인간적이며 현명하고 정직하게 노력하고 싶습니다.” 때마침, 메마른 가뭄 속에 장맛비가 내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요즘이다. 이제 대구미술관에도 봄과 여름을 거쳐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 금세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5월 18일 개최된 개관 1주년 기념행사 ‘소통의 장’ 전경. 대구 미술인 및 시민 500여 명을 미술관에 초대했다.

크렘린 광장의 거친 호흡들

이순종_엽서_2005년 러시아

크렘린 광장의 거친 호흡들
이순종_작가

2005년 러시아를 여행할 때 구입한 엽서다. 아마도 레닌의 시신이 안치된 크렘린궁 앞의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러시아가 급변하던 시기여서 궁전 앞에는 대형 맥도날드 가게가 있었고, 그 풍경은 매우 흥미로웠다. 자본주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와 과거 공산주의 유산은 기념품으로 진열되고 있었다. 레닌은 빨간 카펫이 깔린 궁 안에 안치되고 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참배객이 줄을 이어 카펫 위를 걷는데 너무 엄숙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체증에 걸려 트림하듯 키득 웃음이 나왔는데 갑자기 수많은 경계의 눈이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움찔했다.
자연 환경이 온화하지 않은 러시아의 풍경은 참으로 이색적이다. 시베리아의 폭설과 낮과 밤이 나뉘지 않는 백야(白夜)를 곁에 두고 사는 그들은 어떤 극한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밑바닥을 바라보고 성찰하는 대문호의 문학 작품이 나왔을 게다. 마치 땅 밑으로 깊은 굴을 파면 서로 통로가 연결되어 만날 것처럼 러시아 대문호의 작품은 지금도 우리와 만나 주고 있으니 위대한 일이다.
여행 중에 길거리 광장 골목에서 이방인인 나는 뭔가 특별난 기운을 느꼈다. 여기저기 모여 있는 젊은이들의 불안정하고 열정적인 목소리, 대낮에도 보드카를 병째 들고 마시는 광장의 사람들, 그림이나 영화의 장면 같은 어두운 밤의 뒷골목. 과감하고 무모한 러시아의 문화 풍토 속에서 놀라운 예술이 탄생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새로움은 ‘edge’, 즉 맨 가장자리에서 탄생한다. 가장자리에서 시작한 새로움이 중심으로 이동해 확고부동한 힘을 갖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니며 가장자리는 다시 새로움을 잉태하게 된다. 물론 그 새로움이 인간을 항상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러시아는 새로움을 잉태하는 거대한 산모 같기도 하고 출산하는 산모의 거친 호흡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여러 장의 엽서를 구입했는데 선전적 요소가 다분한 이미지들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시각예술은 대부분 선전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미지들은 과장되거나 조증(躁症)을 유발시키거나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보여 준다.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억지로라도 웃고 떠들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쉽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너무나도 밝고 명랑한 러시아 민속 음악과 서커스. 사회적 정치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시각 선전물들.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눈길을 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재미있다. 고전도 아니고 현대도 아닌, 그러나 그들보다 더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그리스 로마 중심의 서양 문명권에서 가장 언저리에 위치한 러시아.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에는 너무나 과격한 자연과 풍토. 공산혁명 후 갈등 모순 역설과 같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듯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바로 이거야” 하고 정답을 제시하듯 진실의 여부와 관계없이 복잡한 생각의 과정을 축약시켜 머릿속에 그대로 입력된다. 단순하지만 폭력적이고 무모하지만, 어쩐지 신파조의 그 이미지가 나를 웃게 만든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궁전 광장 사원 군인을 봤지만 그중 선전 광고물이 압권이다. 정답이란 게 원래 금방 지겨워지는 것인데 신기하게도 싫증이 안 난다. 나는 그 엽서들을 7~8년째 벽에 붙여 두고 보는데 아직도 볼 만하다. 세뇌는 그렇게 되나 보다. 참 알 수 없다. 예술이 무언지….

왼쪽 · 안창홍_남녀 인형_2011년 1월 인도 뉴델리
오른쪽 · 안창홍 <India 인상> 인도 종이에 인도산 포스터칼라 75×56cm 2011

부둥켜 안은 남녀
안창홍_작가

2011년 1월 인도 뉴델리 다운타운, 여행자들이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는 밤길 한쪽에서 좌판에 조악한 물건들을 펼쳐 놓고 한 청년이 뭔가를 팔고 있었다. 좌판 앞 땅바닥에서 뭔가(?)가 메뚜기처럼 요리조리 폴짝대는데, 자세히 살피니 크기가 손가락만한 남녀 인형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좀더 관찰해 볼 요량으로 쪼그리고 앉자마자 ‘그럼 그렇지’하며 입에서 김새는 소리가 빠져 나왔다. 가느다란 낚싯줄에 매달린 관절 인형이 청년의 손놀림에 따라 요리조리 뒹굴었던 것이다. 어둠 때문에 낚싯줄이 보일 리 없으니 마치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듯한 뻔한 수법이 어리석고 호기심 많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한 순간, 영감 비스무리한 것이 내 머릿속에서 휘리릭 지나갔다. 나는 형편없이 조악한 인형 한 쌍을 형편없이 싼 가격에 구매한 후 호텔방으로 돌아와선 눈에 잘 띄는 곳에 뉘어 놓고 주섬주섬 화구들을 펼쳤다. 그리곤 잠시 동안 집중해서 관찰과 그리기에 열중한 결과 썩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한 장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박윤영_돌고래_2011월 10월 미국 버지니아 루레이 동굴

꿈꾸는 것
박윤영_작가

흰돌고래에게는 항상 함께 다니던 친구 얼루돌고래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얼루돌고래가 사라졌다. 흰돌고래는 얼루돌고래를 한동안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흰돌고래는 자신이 직접 얼루돌고래를 보기 전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지 않기로 했다. 홀로 신나게 바다를 누비던 흰돌고래는 구름 그림자를 만났다. 그들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구름 그림자는 홀로 다니는 흰돌고래에게 얼루돌고래의 안부를 물었다. 흰돌고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흰돌고래는 구름 그림자에게 말했다.
“얼루돌고래는 굶어 죽었을 수도 있고, 상어와 싸우다가 죽었을 수도 있고, 병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고, 물방울이 되어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어.”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구름그림자는 흰돌고래에게 말했다.
“네가 예전에 내게 말해 주었던 얼루돌고래가 지금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얼루돌고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너와 내가 있는 장소 외의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얼루돌고래는 이 장소에서 멀어질수록 발견될 가능성이 줄어 들고, 특히 달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아주 낮아. 기쁜 소식은 실제로 얼루돌고래가 발견될 가능성은 우주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어. 슬픈 소식은 너와 나 외에 그 누군가가 얼루돌고래를 발견한다면 그 가능성은 단 하나의 값으로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 이유는 네가 존재하는 것이 너를 바라보는 내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유란다.”
2011년 10월 30일, 얼루돌고래는 동굴을 찾은 어떤 여인와 그녀의 어린 조카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들은 지하 동굴의 싱크 홀 아래로 밧줄을 내리고 그곳으로 미끄러져 내려 왔다. 꿈 속에서 내 의지대로 상황을 만들고 원할 때까지 그것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흰돌고래가 구름그림자에게 묻자 구름그림자는 흰돌고래에게 신비로운 에너지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12개의 문이 있으며 그 문들은 ‘꿈’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흰돌고래는 신비로운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구름 그림자에게 이 에너지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구름 그림자는 마치 흰돌고래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신비한 에너지는 어느 곳에나 흐를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은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이 세상과 우리가 볼 수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을 연결한다고 했다. 흰돌고래는 그곳이 그가 살고 있는 동굴의 방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름그림자는 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비로운 에너지가 없는 세상은 속이 빈 나뭇가지의 어두운 그림자와 다를 바가 없을 거야, 나는 내가 흘러 다니는 이 세상이 그러한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꾸러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다. 신비로운 에너지로 이루어진 세상은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단다.”     

김구림_스피커와 오디오 장비(페트리샨800 스피커, 맥킨토시275 파워앰프, Maraniz 8B 등)_ 1987~2000년 미국

오디오 매니아의 일급 애장품
김구림_작가

나는 오디오 매니아다. 20대부터 음악 듣기를 좋아해 돈이 생기면 자그마한 라디오에서 규모가 큰 턴테이블까지 각종 오디오 기기를 사 모았다. 현재까지 명반 1,500장 정도를 소장하고 있다. 돈도 돈이지만, 옛날에는 한국에서 좀처럼 명기(名器)를 만져볼 수 없었다. 1984년 미국으로 이주해 15년 정도 생활하면서 한국에서 느낀 오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나는 그중 미국에서 구입한 일렉트릭보이스 사에서 나온 페트리샨800이라는 스피커를 가장 아낀다. 1960년대에 생산된 이 명기(名器)는 일반 시중에서는 더 이상 간단히 구할 수 없기에 나에겐 더없이 소중한 기념품이 되어버렸다. 페트리샨800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요즘 생산된 대부분의 스피커가 인공 자석인데 비해, 이것은 자연 자석을 사용하고 있다. 자고로 좋은 스피커란 저음이 중요하다. 보통 다른 스피커가 저음이 15인치인데, 페트리샨800은 그 두 배인 35인치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다 다르듯이, 오디오도 그렇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다른 것들은 거의 다 팔았지만, 이 스피커만은 끝끝내 팔지 않고 한국에 가져왔다. 소리의 세계는 섬세하고 그만큼 복잡하다. 피아노 실내악 성악 등 소리에 맞는 전문 스피커가 따로 있다. 나는 보통 힘차고 걸걸한 소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 음악에 맞는 가장 적절한 소리의 질감을 찾으려면 스피커뿐만 아니라 엠프를 비롯한 기타 주변 기기도 잘 맞춰야 한다. 세포처럼 모든 것이 긴밀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달까. 케이블선 하나만 바꿔도 소리의 질감이 달라진다.

임근준_콘돔 그릇_1998년 뉴욕

행운을 부른 작은 도기
임근준 AKA 이정우_미술, 디자인 평론가

1996년 10월 뮤지엄바 살에서 〈금호동 찬가〉란 정치적 설치와 퍼포먼스를 선뵌 뒤, 내가 신출내기 동성애자운동가로서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보다 실질적인 위협, 즉 에이즈였다. 아직 한국의 에이즈단체들은 에이즈 예방을 위해 순결서약 운동을 펼치던 한심한 시절이었으므로, 능동적인 세이프섹스 교육을 주장하는 내게 흔쾌히 동의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자비로 콘돔을 상자째 구매해서 주변에 나눠 줘 보기도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했고, 국고 지원을 받는 에이즈퇴치연맹과 에이즈예방협회는 콘돔 무상 배포를 요구하는 게이인권단체의 목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요즘은 주요 게이 업소 곳곳에서 인권단체가 배포한 무료 콘돔과 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 지지부진한 상황에 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론의 동성애자 차별적 보도였다. 1998년 1월 6일 국내 주요 일간지가 “국내 동성애자 11만 명 추정, 에이즈 문제 심각”이라는 기사를 지면화했고, 1월 7일 KBS의 〈뉴스파노라마〉가 동성애자를 에이즈 전파의 주범으로 고발하는 뉴스를 보도했다. 1월 16일 이에 맞서는 ‘왜곡된 언론보도와 에이즈 정책에 대항하는 범동성애자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고, 1월 23일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앞에서 ‘동성애자 차별적 에이즈 정책의 철폐’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반격의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나는 콘돔 사용을 당연시하는 세이프섹스 포스터를 기획했다. 동료 게이 청년들을 설득해 성기만 가린 누드 포스터를 제작하고 게이 공동체에 두루 배포했는데, 전과 달리 게이 업소 사장들도 홍보물 게시에 우호적이었다. 일련의 사건과 시위가 게이들의 마인드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렵사리 세이프섹스 홍보를 시작한 셈이었지만, 아직 무료 배표할 콘돔만은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뉴욕의 게이/에이즈단체들을 견학하기로 마음먹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미국의 LGBT 기금 어디로부터 (콘돔 제작과 배포를 위한) 지원금을 받아 낼 요량이기도 했다.
1998년 6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뉴욕 맨해튼의 GMHC(Gay Men’s Health Crisis)를 방문해 미국의 게이들이 어떻게 에이즈에 맞서 싸우는지 한수 배우고 있었다. GMHC는 1982년 래리 크레이머, 에드문트 화이트 등이 설립한 게이 공동체 기반의 전설적 에이즈운동조직으로, 에이즈로 투병하는 게이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유명하다. 또 실제로 1980년대 에이즈 대위기의 시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바 있기에, 내겐 일종의 성지순례나 다름없었다. 무상 의료 프로그램, 상담, 마사지, 음식 제공, 외출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방문 도우미 서비스 등 부럽기 짝이 없는 GMHC의 활동 면면을 살펴보고, 베테랑 에이즈운동가들과 인사를 나눈 뒤, 3층의 청소년센터에서 로비로 내려올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장대처럼 키가 큰 백인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안녕?” 인사로 답하자, 한 쪽 팔에 링거를 꼽은 그가 물었다. “네가 입은 키스 해링 티셔츠는 어디서 구한 거니?” 왜 그러냐고 되묻자, 안색이 좋지 않은 미남은, “난생 처음 보는 드로잉이거든”이라고 답하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나는 그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 줬다. “아마 가짜일 거야. 홍콩에서 산 물건이거든.” 그의 마지막 말엔 약간의 사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꽤 귀엽구나.”
1층에서 인사를 나누고 바로 헤어졌지만, 그가 내게 특별한 관심을 표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게이 세상은 좁다고, 나는 6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개최된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그와 다시 조우했다. 괴상한 드랙(drag) 차림의 그는 나를 제집에 초대했고, 그렇게 해서 친구가 됐다. 알고 보니 그는 키스 해링과 스튜디오 54, 제논, 댄스테리아, 팔라디움을 주름잡던 왕년의 이스트 빌리지 키드였고, 자연 뉴욕의 문화 예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미모가 출중하고 성격마저 좋았지만, 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는지, 에이즈 칵테일 요법이 잘 듣지 않았다. 죽음을 직감하고 있던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고, 이러저러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서울로 떠나는 나에게, 그는 선물로 이것저것을 챙겨 줬다. 아마 다시 보지 못할 것을 확신했던 모양이다. 당시 받은 물건 가운데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콘돔 그릇’이다. 침대 옆에 그가 만든 도기 그릇을 두고 항시 콘돔을 비치해 놓으라는 뜻으로, 그는 내가 동성애자인권운동가임에도 ‘어떤 경우든 반드시 콘돔을 사용하라’는 말을 반복 또 반복하던 터였다. 아마추어 도예가였던 그는 도기 작품을 만들어 제 삶을 기념했는데, 집 한쪽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들의 그릇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마치 밀교의 제단이나 소형 공동묘지 같은 느낌을 풍겼다.
실제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가 선물한 이 작은 그릇은 행운을 불렀다. 그해 11월 초 문학과 지성사의 편집위원이었던 철학가 김재인 선생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콘돔 회사인 서흥산업에서 후원을 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서흥산업은 에이즈 대위기의 시대에 콘돔 수출로 적잖은 돈을 벌었고, 늦게나마 동성애자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에서 후원을 결심했다고 들었다. 홍보 문구가 새겨진 콘돔 1만 패키지(총 2만 개)가 인권운동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다들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11월 28일 남성동성애자인권모임 ‘친구사이’ ‘동의모(동성애자의료인모임)’, 서울대 동성애자인권운동 동아리 ‘마음006’이 공동으로 제작한 세이프섹스 교육용 리플렛과 함께 콘돔을 무상 배포하는 거리 선전전에 나섰고, 영화제와 강연회도 열었다. 세이프섹스운동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1999년 5월 12일 ‘친구사이’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와 함께 국제게이레즈비언인권위원회(IGLHRC)의 ‘펠리파 디 수자(Felipa De Souza)’ 인권특별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를 추억하며, 국내 최초로 무상 배포된 세이프섹스 콘돔을 그릇에 담아본다. 나는 되갚지 못할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무척 그립고, 그리운 만큼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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