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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2.04

Abstract

현대 예술이 지각과 감각 전반에 걸쳐 새로운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art는 소리의 예술에 주목하는 특집을 꾸몄다. 미술관과 공연장을 아우르며 소리의 예술을 탐색해 온 국내외 21인의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사운드아트'를 위한 담론의 장을 마련했다. 한국 미술계에 사운드아트가 등장한 지도 10여 년, 그 도전의 성과와 당면 과제를 점검하고, 흐르고 뻗어나가는 '소리'의 무한한 미래를 조망한다.

Contents

01    표지  유현경 〈무제〉 캔버스에 유채 50×40cm 2011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김복기

38    핫피플  매그너스 랜프루
    “홍콩을 국제 미술시장의 미팅 포인트로”  김재석

42    IMAGE&ISSUE [1]  “참 보기 싫은 색채다!”  이영준 

44    프리즘
    핵과 미술,‘보다 나은 세상’에의 교감  최은주 
    불편한 돈: 누구를 위한 예술 기금인가?  홍희진

62    오후의 아틀리에  삶의 작은 노래  오명희

66    포커스
    레이나우드 아우츠혼展|최기석展  김종길
    배영환展  심상용
    노마딕 리포트展|안창홍展  홍지석
    클러스터展|구현모展|네오제네시스展  이선영

82    스포트라이트  카와마타 타다시
    건축과 풍경 사이  김수현 

92    해외미술  2012 휘트니비엔날레
    휘트니의 ‘젊은 피’는 살아있는가?  이정연

100    WHO WE MET  자비에 베이앙  김보란

102    아트 마켓  2012 아모리쇼
    뉴욕 미술시장의 봄, ‘아모리 위크’  박숙희

108    아티스트 인사이드
    [1] 유현경_나, 화가와 모델  호경윤
    [2] 백현진_무념의 풍경들  김재석

117    특집  SOUND/ART
    [1] 화보_ 사운드아티스트 21  편집부
    [2] 글_ 사운드아트, 새로운 도전의 역사  양지윤

143    BRAND NEW  
    트란스페어 대한민국-엔에르베 2011/12/13  장승연

144    작가연구  전준호
    미래에서 현재를 보다  류한승

159    암흑물질 “만나고 갈리기는 연분이라오~”  이용우

168    전시 리뷰
    High Times, Hard Times|산수너머
    공성훈|군산 리포트|이숙자|수이 지엔궈|김기라
    조소희|이주리|오영은|정금형

178    전시 프리뷰
    여백,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다|서울국제조각페스타
    한국의 그림_매너에 관하여|올라퍼 엘리아슨
    고상우|김한나|마유미 테라다|양동 이후, 네 개의 시선들
  
186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만나고 갈리기는 연분이라오~”

빅단마 그랜드 쇼단의 1950년대 공연모습 (사진: 김천길)

“만나고 갈리기는 연분이라오~”
일본과 미국, 두 제국과 한국의 사운드스케이프

글 | 이 용 우

*이글의 제목은 가수 박단마가 1939년에 발표한 <가야금 가곡>의 가사 중 일부이다.

여기, 필사(筆寫)로 써내려 간 외사랑의 노래가 있다. 미8군을 등지고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서면 맞닥뜨리게 되는 두 개의 낯선 풍경들. 찌그러져 가는 낡은 판자촌과 뾰족하고 새끈한 미군청사. 그 사이 어디선가, 벌겋게 익어 가는 수육의 냄새와 무심하게 국수를 성큼성큼 손으로 뽑아 내는 아낙네가 있다. 고개를 돌리면 담배를 고쳐 물고 스타킹을 여미며 앙칼지게 ‘헬로 미쓰터~!’를 외치는 여자도 있다. 먼지만 날리고 떠난 미군용 트럭을 향해 아이들이 외친 ‘김미츄잉껌!’이 공허하게 메아리치면, 우린 잠시 아득해진 정신을 추스리며 여기저기서 소매를 끌어당기는 이름없는 유령들과 함께 서 있다. 이윽고 갓 포자한 씨앗들이 부유하며 아무렇게나 기억의 싹을 틔우는 용산의 어느 거리 한가운데서, 우리는 노래하는 한 여자와 운명처럼 맞닥뜨린다.
김천길의 사진집 《서울발 외신종합》에 실린 한 장의 흑백 프레임에 등장하는 이 여가수의 이름은 박단마. 우리는 이 사진에서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민족분단 그리고 미군의 개입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트라우마에 아슬아슬하게 이물질처럼 끼어 있는 가수 박단마의 흔적을 발견한다. 총력전 시기 일시 정지되었던 모던걸의 육체와 패션이 애매하게 접합된 슬픈 여가수의 신체는, 스스럼 없는 눈빛으로 관능과 퇴폐미를 맘껏 발산하며 빅밴드 재즈 곡에 맞춰 노래 부른다. 이 여가수를 1930년대 엔카 요나누키 음계에 맞춰 간드러진 비음으로 단조의 노래 <웨 몰라주나요>를 흥얼거리던 16세의 수줍은 소녀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박단마는 일본점령기인 1936년 빅타레코드사로 데뷔해 단박에 히트가수 대열에 올랐다. 그러던 그가 1953년 전후 한국의 ‘미국’에 대한 욕망을 대변해 이제 새로운 점령자의 언어로 소리 높여 부른다. “슈사인~ 슈샤인 보이!”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욕망이 팽배하고 할리우드 영화와 PX물품에서 흘러나오는 페티 페이지와 빙 크로스비의 재즈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미군 병사들의 시선에 물화된 여성의 신체는 갓 일본식민지를 벗어나자마자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 놓이게 된 한국의 중층적 식민 현실을 우의적으로 설명한다. 미군 캠프쇼 무대에 올라 마치 자신을 미끼처럼 내던진 32살의 여가수 박단마는, 두 번이나 남한을 ‘침입자’의 손에서 구해준 미국을 위해 마치 스펙터클한 미국을 온몸으로 전사(轉寫)하기라도 하듯, 위험하고도 은밀한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 김천길의 카메라는 이처럼 모든 것이 죽고 새로운 것이 채 태어나지 못한 이상한 시공간인 전후 한국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남한인들의 식민적 영속성과 권력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동시에 이것이 강압이 아닌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김해송이 설립한 KPK악단의 연주 모습 1948

두 제국 사이의 식민 한국

일본제국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기제로, 제국의 문명과 미개의 식민이라는 이항대립적 인식 구조를 두 개의 주요 식민국인 대만과 조선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투사했다. 일본에게 대만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원주민의 이미지였다면, 조선은 민족성의 차이로 일본인과의 변별점을 만들어 냈다. 즉, 조선인은 빈곤하고 불결하며 태만하고 교활하다는 민족적 특징들로 구분 지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의 강조는, 결국 민족성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일본인과 조선인의 계급적 차이를 더욱 공고히 했다. 동화정책과 내선일체, 일본인간의 결혼 등을 통해서도 조선인은 결코 일본 내지인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다는 철저한 배제로서의 식민주의였다.
이에 반해 해방 후 미국은 동아시아 자유진영의 최전선이라는 의미로 남한을 프런티어(Frontier)라 지칭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른 전선 국가 남한의 지정학적 위상은 한미 관계의 성격을 구성하는 중요한 수사법이었는데, 전선 국가로서의 남한은 냉전체제 하에서 팽창주의적 미제국이 도달할 수 있는 아시아의 최전방을 의미하는 영토였다. 따라서 미국에 남한은 대만이나 필리핀처럼 ‘야만적인 원주민’이자 ‘개도하고 교화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다, 문명과 야만이 상충하는 지대에서 미국을 투영하고 미제국의 동아시아 권력의 알레고리를 투사하는 지형학적 반공요새가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급속도로 번져 나간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와 남한 사람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 위생방역작업이나 보건 활동을 통해, 미국은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검역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임을 남한 사회에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군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로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관계를 수립해 나갔다. PX구호물자 배급으로 시혜자와 수혜자의 관계를 더욱 명확히 각인시킴으로써 미국의 전쟁 개입 정당성을 확보하고 6.25전쟁을 문화 선전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체정치(bio-poli tics)’로 남한과의 위계적 권력 관계를 재편하고 반공 최후의 보루인 프런티어로서의 남한을 재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여기서 전후 첫 한국 밴드의 미군 공연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논의를 진행해 보자.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여성적’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한다는 중계방송을 한 이후, 미군이 정식으로 남한에 주둔(1945년 9월 8일)하기 이전인 8월 말, 미군장교들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사전협의를 위해 여의도 공항에 속속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조선호텔에 투숙했는데 환영 파티를 위해 연주단이 급조됐다. 조선호텔은 일본강점기 때도 몇몇 일본인 음악인들과 이옥직 김재호 김희조 등으로 구성된 양악대 실내악단이 있었지만, 이날은 좀더 규모가 큰 실내악단을 구성하여 한국에도 정식으로 실내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연미복도 채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최대한의 서구식 표상을 보여 주기 위해 모닝코트를 입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식 찌까다비를 신고 있었다. 이 모순적 장면은 식민지인의 자기 규율과 정체성 그리고 전후 한국인들의 근대성과 연속된 식민의식에 대한 대혼란의 예고편처럼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해방 전후 한국인은 어떻게 ‘진짜’ 미국 관객들 앞에서 ‘진정’ 서구화된 음악적 표현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또 다른 하나는, 동양인이 서구 대중음악을 연주한다는 인종적 핸디캡에도 그들의 급조된 ‘서구 음악’이 어떻게 미군 병사들에게 상찬받을 만큼 훌륭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 관객 앞에서 유로-아메리칸 곡을 연주하면서 일본식 개다를 신고 있는, 첫 전후 한국 밴드의 연주에서 어떤 징후를 읽어 낼 수 있을까?
한국인은 식민통치가 바뀐 상황에서의 영속된 식민성의 혼란과 미국의 부드러운 전지자적 시선 속에 포섭된 인종적 자기인식과 모멸감을 느꼈다. 이는 자기검열적이고 투쟁적 패러다임을 재구축해야 하는 전후 한국 예술인들의 정체성과 맞물렸다. 또한 ‘미국적 근대성’이라는 해방 전후의 모호한 문화적 언설들 속에서 남한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발명하는 데 따른 분노 공격성 자기비하라는 총체적 증후학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음악적 진정성에 대한 고민도 없이 정확하게 재단된 서구-미국 음악의 복제 능력은, 복잡다단한 음악에 관한 담론과 역사성을 거세하고 봉합한 체 깨끗하게 절단되고 덧붙여진 페스티시를 만들어 냈다. 이처럼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모방의 식민주체들은 일제 총력전기 적성국의 음악으로 분류되어, 검열되고 금지되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의 상상 미국을 기어이 소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체인징 파트너’

“우리는 함께 왈츠를 추고 있어요. 이 꿈결 같은 멜로디에 맞춰서 말이에요. 그들이 파트너를 바꾸라고 말하면 당신은 왈츠를 추며 나에게서 멀어지죠. 이제 내 팔은 텅 비어 있고, 주위를 둘러봐요. 나는 계속 파트너를 바꿀 거예요. 당신을 다시 안을 수 있을 때까지.” 페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1953)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팝송 중 하나였다. 이 노래는 마치 볼륨무도장에서 유연하게 일본에서 미국으로 ‘체인징’되는, 남한의 미끈거리는 식민영속성의 댓구처럼 읽힌다.
해방 후 남한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인자한 미군이 던져 주는 풍선껌과 초콜릿으로 표상되는 강력한 이미지와 상호 연동하였다. 미군정부는 내선일체와 강압적 동화정책을 추구했던 일본과는 달리, 더 유연한 권력과 이미지를 한국에 투사하여 남한의 자발적인 동조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에 의해 ‘걸러진’ 근대가 아니라, 미국인과 미국 대중문화를 통한 보다 직접적이고 세련된 ‘진짜’ 근대성의 허상을 남한인의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총력전기에 잠시 잊혔던 미국에 대한 환상은 미군정기의 도래와 함께 서구적 가치, 도덕의식, 민주주의, 성적 방종, 자유연애 그리고 냉전 이데올로기에 관한 미국적 환상의 토대 위에 덧씌워졌다. 또한 북한을 ‘불황’과 ‘가난’의 담론으로 타자화하면서 재빠르게 구축되어 갔다. 이처럼 해방 후 미국 대중문화는 한국인의 자기 조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전후 패전 일본은 남성적 미국으로부터 수혜를 받는 수동적 여성으로서의 오리엔탈 일본이라는 서사로 스스로를 ‘재발명’했다. 반면에 전후 한국은 일본과의 역사적 매듭이 채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미군정이 만들어놓은 안전한 미국적 근대성이라는 스펙터클의 관객 입장에 놓여 있었다. 미국식 근대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열망과 인정욕구, 그리고 분단 현실에 대한 자기혐오의 양가적 욕망으로 분열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권력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남한의 식민적 영속성은 한국 대중음악의 서사 속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수 박단마의 노래 두 곡을 들어보자. 1937년에 발표된 박단마의 <웨 몰라주나요>의 전형적인 요나누키 단음계의 엔카 사운드와 1951년 빅밴드 스타일의 스윙재즈곡인     <슈샤인 보이>와 <닐리리맘보>(1952)가 보여 주는 아득한 간극. 이 노래들 사이에 발현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축음기로 매개된 소리가 재현해 내는 시공간의 압축과 식민적 모방의 서사들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미국화 담론이 처음 생성된 1930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949년 당시 서울의 풍경

한국 음악인들의 양가적 욕망

미국화 혹은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은 광범위하게 서구화, 경제적 근대화, 그리고 미국과 전지구적 문화에의 적응양태를 뜻한다. 한국의 맥락에서는 1930년대 초반 조선 지식층이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이래, 새롭게 등장한 서구식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일제 통치 기간 조선에 근대화란 제국의 부와 권력의 축적을 조력하기 위한 사회 문화적 팽창주의에의 열망을 의미했다. 조선인의 인식 속의 미국식 근대성은, 신세계를 위한 식민 지식인의 개인적 근대화 과정이었다. 흔히 육체적 표현 말투 표정 패션 언어 습관 등  서구적인 것을 베끼고 모방하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서구에 기반을 둔 아메리칸 근대성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서구 중심주의와 상동하여 조선인의 집단적 망탈리테(mentalit?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총력전기 일제가 미국을 적성국이라는 이유로 할리우드 영화와 재즈를 금지한 후, 식민지 음악인들의 미국화에 대한 양가적인 욕망은 총력전기에 동원된 노래들의 친일 행각과 식민 트라우마를 교묘히 은폐하고 봉합하는 기제가 되었다. 해방 후 미국화에의 추동은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양태로 가속화되었다. 미국적 근대성에 대한 매혹과 일제 식민경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모순된 서사로서의 대중음악들의 징후를 살펴보자. 이 유령들은 해방 후에도 출몰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집단적 망탈리테 혹은 망각의 징후로 읽어 낼 실마리를 제공한다.
총력전에 대한 집단 무의식으로서 대중음악의 서사들은 먼저 1937년 중일전쟁 후 일본제국찬미가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 노래들은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서사화된다. 주로 전쟁에 출정하는 병사와 뒤에 남겨진 여성화자로서의 어머니, 아내, 종군간호부가 전선에 나가 있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조선병사의 기상을 독려하고 군국주의의 영웅으로 찬양하며, 헌신과 희생의 서사를 통해 남편과 아들에게 죽음으로써 기꺼이 황군신민이 되리라고 말한다. 이처럼 다양한 군국가요 속 화자들은 여성이었고, 여성화된 총후의 정체성은 식민지 여성, 특히 신여성과 모던걸의 성적 평등이라는 논리를 황민이 되기 위한 제국신민의 동등한 전쟁 동원 서사로 대변되기에 이른다.
그럼 도대체 일제통치 마지막 5년 기간 동안, 가요 속에 무수히 나타난 열대수와 야자림, 탱고와 하와이언 기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본 제국의 남방 영토에 대한 과잉 열기가 식민조선에 전염병처럼 유행했다. 일본과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쟁 발발의 계기가 된 1942년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 이후, 황민화를 통한 일본의 식민 정책은 보다 효율적인 영토 정책을 위해 만주와 중국 등 북방의 전진기지로서의 조선, 그리고 필리핀 수마트라섬 싱가포르 등 남방의 전진기지로 대만을 각각 설정했다. 이 시기 한국의 음악인들은 제국의 북방기지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 선동적 일본 제국주의 찬양을 위한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노래들을 만들어 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기 국경 베이징 만주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직접적인 중국어 노래 가사가 빈번하게 등장하거나, 중국풍의 선율과 악기 편곡을 통한 이국적인 아우라를 지닌 김정구의 <왕서방의 연서>(1938)나 채규엽의 <북국 오천키로>(1939) 같은 곡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새삼 놀랍지 않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일본의 칼루아 카마이나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하와이안 팝 음악, 메렝게, 삼바 등 라틴선율을 담은 ‘이국적’ 음악 장르들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비록 이런 열기가 해방 이후 미군 대중문화의 유입과 카바레 문화로 정점을 맞았지만, 이런 조류들이 가능하게 했던 생산소비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총력전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남진론이 유행했고, 이를 뒷받침할 체계적인 제국의 생물학적 종적 의학적 인프라로 더욱 과학적인 남방학을 만들기에 이른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남방담론은 지적 체계의 열악함 때문에 인해 열대지역에 대한 잉여적 판타지로 재현되었고, 주로 정글탐험 이미지로 표상되는 상상의 영역으로서 기능했다. 이러한 남방에 대한 상상적 서사는 제국의 상상지리적 영토 아래에서 다른 식민지들보다 좀 더 높은 계급적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피식민자 조선의 인정 욕구와 열망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총력전 시기 다양한 군국가요와 총후담론과 맞물린 여성 화자의 등장, 그리고 남방담론과 이국적 음악 장르의 유행은 전쟁 경험과 식민지 음악인과 수용자들의 양가적 위치성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왼쪽 김해송과 이난영의 자녀들로 미국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둔 킴시즈터즈
오른쪽 2009년 <노바디>로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즈

해방 이후, 이질적 소리 풍경들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급작스런 충격을 안겨줬다. 이는 갑작스러운 희망과 자유에 대한 열망, 사회적 재건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호미 바바(Homi bhabha)가 말하듯, 재현적 불결정성이라는 불확실한 시간으로 점철되어 또 다른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욕망과 해방에의 일탈적 환락은 많은 대중가수의 노래로 불렸다. 이들은 주로 총력전기 친일 군국가요를 만든 음악인이거나, 상하이 베이징 만주 등 악극단으로 떠돌며 조국으로부터 추방됐거나 망명한 디아스포라 가수들이었다. 이 시기 유행가는 이분화되었는데 후자가 주로 해방의 기쁨과 조국찬가류의 노래를 불렀다. 대표적인 예로 현인의 <신라의 달밤>(1946)이나 <럭키서울>(1947)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애상적 음률로 조국의 분열을 표현하는 악극단 출신의 가수들이 있었다. 남인수나 이난영, <가거라 삼팔선> (1947)의 이인권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 당시 한국 유행가는 정치적 해방과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서구화된 근대성에 대한 함의를 표방한다.

동시에 해방의 기쁨과 국토분단의 아픔이라는 조울증적 서사를 왕래하면서 은연중에 일본식민기를 되풀이하려는 기묘한 서사를 재생했다. 수많은 한국 유행가 속에서 일본 제국시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의식적으로 망각하려는 기제는, 일본적인 것을 언급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사회적 금기’로 여겼던 이승만 정부의 공산주의 척결과 새로운 ‘해방의 날’이라는 언술로 자연스레 대체되었다. 충족되지 못한 일본 제국에 대한 잉여의 원한들은 이후 동족상잔의 반공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제주 4.3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망각되고 억압되어야 하는 일본이라는 괴물적 잔재, 그리고 이런 억압기제를 은밀하게 헤게모니로 이용하려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변주곡이 한국 대중가요의 서사가 되었다. 남한의 탈식민화와 서구적 근대화는 일본을 망각하고, 서구 문명을 따라잡고자 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적 근대성의 구축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일제의 전쟁 선동선전과 대국민 방송을 담당했던 경성방송국(JODK)은 계속해서 미군정의 복화술사로 재등장한다. 일제와의 정치 사회적 절연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디어의 정체성은 일제시대의 관료와 기술적 기반시설을 재전유하여 후식민적 기시감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전후 한국은 이러한 은닉된 인적 제도적 식민 영속성으로 무의식적 복종기제를 자가 생산하는 기계가 되었다. 이런 식민적 연속의 징후들을,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부류의 대중가요를 통해서 알아보자.
전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아이콘이자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망명 가수 중 한 명인 현인의 <고향만리> (1947)는 남방군도에 파병된 소년 병사의 고향에 관한 노스텔지아로 사후 멜랑콜리아(postmortem melancholia)를 재현한다. 가사 속에 등장하는 식민과거로부터의 탈주 불가능성은 이국적 메렝게 선율로 총력전기 유행한 이국적 선율과 함께 구체적인 남방의 지명(보르네오)을 언급함으로써, 군국주의의 향수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하고 있다. 남방 탱고로 표출된 유목민 현인의 노스텔지아는 그와 비슷한 김해송의 <풍차돌리는 마을>(1937)이 은유적이고 자조적인 식민지 모더니즘을 표현한 것과는 다르다. 현인 노랫속의 군국주의 유령들은 사라진 표상 안에서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식민영토의 상실과 우울증, 가사가 말하는 지도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국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소년 지원병 유령의 목소리로 대체된다.
과거를 재구성함으로써, 많은 음악인들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거리 두었다. 전후 한국 유행가에 등장하는 이러한 충돌하는 서사들은 과거를 필사(筆寫)하고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아를 상기시킬만한 순간과 장소들 속에 자신을 안착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후 외상적 식민구조의 반복은 영구적으로 과거로부터 초원해지거나, 억지로 망각하거나, 새로운 점령자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함으로써 과거에서 영원히 부재하려 한다. 또 다른 노래를 들어보자. 이인권이 1948년 해방의 기쁨과 국가통일의 염원을 담은 <가거라 삼팔선>(1947)은 해방이 3년이나 지난 후, 강박적인 해방의 자족감을 노래한다. 하지만 유행가의 뒤에는 총체로서의 국민의식 형성을 주도하고 개개인 주체의 발현과 재생산을 방해하는 그림자가 감춰져 있다.
해방에 대한 과도한 언급과 과잉 민족주의적 상징들(무궁화, 태극기)은 역설적이게도 지배와 복종의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국민을 동원하려는 식민적 수사를 함의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 후 한국 대중음악을 두 개의 연속적 식민 경험과 분절된 근대성(disjointed modernity)이 충돌하는 서사로서 재규정해 본다면, 미군정기 3년간의 대중음악은 전후 이데올로기적 생산과 경제적 열망으로 변모를 꿈꾸던 남한의 집단적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미군 하위문화에 경도된 포스트-모던보이 모던걸은 의식적으로 일본의 가치 시스템과 절별하려 했지만, 여전히 엔카풍의 음악 장르들은 국가적 정감을 표현하는 기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대다수의 음악 작곡 컨벤션으로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총력전기의 무의식들이 유령처럼 부지불식간에 표면 위로 떠오르는, 자크 데리다가 세익스피어를 인용해 한 “시간이 완벽히 분절되어 있던” 시기였다.
여성적 수사로 변모한 전후 일본과는 달리 남한은 가부장적 빅브라더로 미국을 상정하고 한국전과 베트남전,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동성사회적(homo social) 동맹 구도를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재현한다. 듀 보이스(Du Bois)가 언급했듯 이러한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은 전후 한국사회에서 두 개로 분절되어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나뉜 집단적 정신 구조를 주형해 냈다. 해방 후 대중가요 속에 녹아 있던 남한인이 겪었던 일본과 미국의 식민 경험의 이중적인 서사는, 이렇듯 내부와 외연의 서로 다른 영토를 모두 아우르기 위해 기억을 저장하고, 재접속하며 집합적 기억과 향유의 저장소가 되어 갔다.
우리가 ‘흘러간 옛노래’로 통칭하는 <가요무대>의 노래들로 6.25와 분단을 기억해 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음악 수용자와 생산자들은 대중음악으로 복잡다단하고 중의적이며 역설적인 이중의 네러티브들을 직조했다. 이러한 두 식민경험 사이에 끼인 양가적 감수성들은 대중가요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위치해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산하고 분절하였으며 자기 정체성과 공명함으로써 세상을 인지하게 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대중음악은, 한국인의 감정의 구조뿐만 아니라, 이중 식민화를 겪은 집합적 기억의 흔적이다.

지난 1월 31일 미국의 유명 토크쇼 <데이빗 레터맨쇼>에 소녀시대가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 참여한 영화배우 빌 머레이와 기념 촬영.

'한류’라는 사운드스케이프의 기원

얼마 전 소녀시대의 <데이빗 레터맨쇼> 퍼포먼스로 미디어가 떠들썩했다. 자랑스런 ‘한류’의 아이콘이 된 소녀들과 그들의 늘씬한 다리는 한국 대중문화가 글로벌 서사 속에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목도하게 해 준 기회였다. 소녀시대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이질적 문화제국의 영토 속에서 더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서로 다른 마켓 포지셔닝을 구사한다. 일본에서는 대개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여성의 이미지로, 미국에서는 과감하고 역동적이며 자기 오리엔탈리즘을 재투사한 여성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실제로 소녀시대는 미국 진출을 위해 타이틀곡 <The Boys>의 템포를 좀더 빨리 편곡했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거기엔 한국 혹은 한국 문화라는 기표가 없었다. 혹자는 물을지도 모른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그렇다면 고쳐 물어보자. 한류의 아이콘인 소녀시대의 <데이빗 레터맨쇼> 출연이 어째서 그 흔한 국가적 자부심과 마치 한류의 정점을 찍은 듯한 ‘민족적’ 사건으로 보도되고 담론화되는가? 아마도 그건 소녀시대의 노래가 ‘한국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국적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문화적 욕망과 우월성을 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인’ 최초로 <데이빗 레터맨쇼>에 섰던 이 위대하고 숭고한 소녀들은 ‘한국’이라는 기표가 탈각된 텅 빈 한류 민족주의로 물신화된다. 하지만 이런 한류의 수사학은 암묵적으로 좀 더 잘 살고 싶은 ‘부강한 나라’로서의 한국인의 집단적 욕망, 신식민적 파퓰리즘, 차이와 배제, 아시아 내 인종 간의 계급적 재배열, 아시아의 문화첨병으로서의 한국과 한국인의 신식민지자적 차별의 양태들을 은밀히 후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품화된 걸그룹의 초국가적인 성공과 한류 담론에 내재한 우월적 인종학의 서사와 윤리적 망각의 계보학을 우리는 과연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한류’라는 사운드스케이프의 기원일지도 모른다.

이용우 코넬대학의 아시아학과와 인문사회연구소(Society for the Humanities)에서 비판적 미디어 문화연구, 동아시아의 소리문화, 후식민적 역사서술방식과 번역의 문제, 집단 무의식과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 및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동아시아 대중음악으로 식민의식의 연속성과 근대성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함께 살펴볼 《Voices between Empires》를 집필하고 있다.

뉴욕 미술시장의 봄, ‘아모리 위크’

올해도 아모리쇼에는 설치 조각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한자리에 소개됐다.

뉴욕 미술시장의 봄, ‘아모리 위크’

글 | 박숙희ㆍ아트넷 온라인 경매팀

2012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총 4일에 걸쳐 진행된 아모리쇼는 예년과 다름없이, 맨해튼의 미트타운 55가 서쪽 끝에 위치한 PIER92와 PIER94에서 개최됐다. 총 228개의 참여화랑은 출품작의 성향에 따라 ‘모던’과 ‘컨템포러리’로 나뉘어 각기 두 곳의 옛 공장 건물에서 부스를 꾸몄다. 컨템포러리아트를 다룬 PIER94는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PKM갤러리 원앤제이갤러리 등 국내화랑 4곳을 포함한 전 세계 총 120개의 갤러리가 참가하였고, 모던아트를 선보인 PIER94에는 총 9개국의 71개 갤러리가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주최 측에서는 크게 3개로 구성된 특별전시를 마련했다. 그 중 <아모리 포커스: 노르딕 국가들(Armory Focus: Nordic Countries)>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북유럽 국가들을 초청,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아이슬란드에서 초청한 19개의 갤러리 전시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11개의 갤러리가 참여한 <솔로 프로젝트(Solo Project)>, 그리고 7개의 미술관련 비영리단체로 이루어진 <낫 포 프로핏(Not-for-Profit)>도 눈길을 끌었다.
올해 오프닝 행사를 후원한 곳은 뉴욕현대미술관으로, 일반인에게 오픈되기 하루 전날인 3월 7일 뉴욕현대미술관에서는 아트페어에 참여한 여러 작가들은 물론 사회 각층의 VIP들이 초대되었고, 인디밴드 ‘네온 인디안(Neon Indian)’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한편 올해는 특별히 새로 도입된 VIP 서비스도 눈길을 끌었다. 즉 VIP티켓을 소유한 고객은 일반 관람객 입장 시간보다 1시간 전에 미리 전시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그림을 관람하고 구입 문의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변화 속에 올해 아모리쇼에는 총 6만 5천 명 가량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파악된다. 판매 실적 또한 지난해에 비해 순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왕 두 <Image Absolue> 플라스터 페인트 52×42×37cm(30개) 2011 Cortesy of Galerie Laurent Godin, Paris(사진: Gregory Copitet)

차별화된 공간 구성

어느덧 14회를 맞이한 아모리쇼. 올해는 영국의 대표적인 아트페어 ‘프리즈(Frieze)’의 뉴욕 상륙(5. 4~7)을 의식한 것일까. 무엇보다 공간 구성의 차별화된 시도가 눈에 띄었다. 즉 획일화된 부스와 통로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아트페어 공간에서 탈피하려는 듯 건축회사 ‘베이드 스테이지버그 콕스(Bade Stageberg Cox)’에 공간 설계를 의뢰한 것이다. 그 결과 전시 공간과 함께 라운지, 카페 등 구석구석 다양한 컨셉트의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페어를 찾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문화적인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각 부스 당 면적도 한층 넓혀 전시의 시각적인 효과를 끌어 올려 참여 갤러리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공간 구성에 대하여 아모리쇼 공동 설립자인 폴 모리스(Paul Moris)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층 더 넓어진 부스 면적과 공용 공간, 그리고 15곳에 달하는 라운지 등 고급스러운 공간 구성으로 인해 많은 참여 갤러리에서 개인전 형식의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다. 아모리쇼에서 열린 5일간의 전시는 일반 갤러리에서 5주간 열린 전시에 상응하는 효과를 보여 준다.” 실제로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David Zwirner Gallery)의 경우, 일반적으로 ‘ㄷ’자형으로 구축되는 부스의 한쪽 벽면을 과감히 해체하고 ‘ㄴ’자형의 벽면을 이용하여 이색적인 디스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독일작가 마이클 리델(Michael Riedel)의 실크스크린 패널 3점과 그 작품의 설치 장면을 촬영한 이미지를 다른 한 면에 부착하고, 나머지 부분은 그저 하얀 벽면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마이클 리델의 작품은 오픈 20여분 만에, 3점 모두 서로 다른 고객에게 1점 당 5만 달러의 가격에 판매됐다.
한편 여전히 미술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일본작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작품으로 참가한 런던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Victoria Miro Gallery)는 출품작 5점을 모두 솔드아웃했으며, 2000년 이후 처음으로 참가한 런던과 베를린의 스프뤼스 매저스 갤러리(Spruth Magers Gallery)는 1980년대 활약한 주요 작가인 조지 콘도(George Condo),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작품으로 부스를 채웠다. 그 중 지난해 뉴욕의 뉴뮤지엄에서 회고전을 개최하기도 했던 조지 콘도의 캔버스 회화 작업과 종이 작업은 각각 48만 달러와 12만 달러에, 이미지와 언어의 적절한 배합으로 유명한 작가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은 17만 5천 달러에 판매되었다. 미술시장의 스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작품도 눈에 띄었는데, 다이아몬드 가루를 이용하여 해골 모양의 인물상을 장식한 작품 <For the Love of God>는 1천개의 에디션에도 불구하고 판매가격은 각 3천 달러였으며, 총 4점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올해 <아모리 포커스>는 ‘북유럽 국가’에 주목하여, 북유럽 화랑 19곳을 초대하고 다양한 관련 퍼포먼스와 이벤트 시설 무료 기념품을 준비했다.

북유럽 미술에서 실험 영화까지

올해 아모리쇼도 어김없이 다양한 부대행사가 마련되어 현장을 풍성하게 채웠다. 그 중 특별전 <아모리 포커스: 노르딕 국가들>은 큐레이터 제이콥 패브리셔스(Jacob Fabricius)의 기획으로 진행됐다. 최근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미술 및 디자인계에 불고 있는 ‘북유럽 열풍’에 뉴욕도 예외는 아닌 것일까.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의 다섯 국가에서 19개의 갤러리(갤러리 안하바, 마틴 아스벡 갤러리, 비버프로젝트, 갤러리 니클라스 벨레니우스. 갤러리 보 베어가르드, 크리스탈, D.O.R, 도르트문트 보데가, 엘라스틱, i8, IMO, 갤러리 마그너스 칼손, 크리스티안 라르젠, NO플레이스 갤러리 수잔 오테젠, 데이빗 라이슬리 갤러리, 갤러리 크리스찬 토프, V1갤러리)가 참여해 특별 부스를 꾸렸다. 각 갤러리의 전시 외에도 ‘포스터, 기념물 그리고 기타 증정품(Poster, Souvenirs and Other FREE Stuff)’라는 제목을 내걸고, 자 램프 펜 연필 신문 막대사탕 스티커 가방 냅킨 우편엽서 포스터 등 각 갤러리에서 만든 소품들을 관람객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이벤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모리쇼의 운영 담당 디렉터인 마이클 홀(Mich ael Hall)에 따르면, 이번 <아모리 포커스>는 “2012아모리쇼를 대표했다고 할 만큼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됐으며, 특별전을 기획하고 진행한 큐레이터 제이콥 패브리셔스는 아모리쇼에 처음으로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으로 인해 2012아모리쇼에 좀 더 신선한 감각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라고 만족스럽게 평가했다. 그의 말대로 관객들은 ‘북유럽’이라는 같은 지역에 기반한 작가들의 공통점과 동시에 서로 다른 다양한 감성을 함께 만나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특별전 외에도 <아모리 필름(Amory Film)> <솔로 프로젝트(Solo Projects)> 그리고 <아모리 퍼포먼스(Amory Performance)>와 같이 올해 들어 처음 기획된 특별행사도 마련됐다. 아모리필름은 <Fli ght> <Gun Play> <The Syphilis of Sisyphus> 같은 실험성 짙은 영화 혹은 비디오 작업 등을 선정하여 Pier94에 마련된 《월 스트리트저널》의 미디어 라운지에서 상영하였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11명의 (비교적 젊은 연령의) 딜러에 의해 선정된 11인의 작가들을 소개한 <솔로 프로젝트>는, 딜러들의 연합인 아트페어의 성격에 맞게 큐레이터가 아닌 딜러의 시각에서 작가를 선정하여 그룹전 형식으로 전시를 기획한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다. 참여작가는 다리오 에스코바(Dario Escobar, 호세 비엔비누 갤러리), 빌리 해어(Billy Hare, 갤러리아 루시아 드라 푸엔테), 패트릭 잭슨(Patrik Jackson, 니콜 카스브런 갤러리) 월리스 휘트니(Wallace Whitney, 호튼 갤러리) 탐 패어즈(Tom Fairs, KS Art), 마이크 바인(Mike Bayne, 멀헤린), 클리포드 오웬스(Clif ford Owens, 온 스텔라 레이즈), 케이트 오운즈(Kate Ownes, 세븐틴), 크리스찬 아이젠버거(Christian Eisenberger, 티팟), 제니퍼 달턴(Jennifer Dalton, 빈켈만 갤러리)이다. <아모리 퍼포먼스> 역시 올해 처음 진행된 이벤트로 특별전과 공동으로 연계하여 북유럽 및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 욈 알렉산더 아문다손(ㅤㄲㅞㄲ Alexander Amundason)을 선정하여 경제적인 위기상황을 주제로 한 작업, <A Sympho nic Poem about the Financial Situation in Iceland>를 페어 기간동안 진행하였다.

‘PooL아트페어’ 포스터

위성아트페어의 선전

이 시기의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아모리쇼가 열리는 기간에 맞춰 ‘위성아트페어’가 함께 열린다는 점이다. 보통 주요 아트페어는 참가화랑을 제한하므로 여기에 속하지 못한 그 외의 화랑 및 주요 미술단체들이 연합하여 개최하는 또 다른 행사를 바로 위성아트페어라고 부른다. 즉 이들은 주요 아트페어가 열리는 근처의 창고 같은 규모가 큰 공간을 임대하여 주요 그룹전을 함께 개최함으로써 컬렉터들이 이곳까지도 발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유도하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주요 아트페어와 연계한 마케팅을 함께 펼치기도 한다. 뉴욕의 경우, 아모리쇼가 개최되는 기간을 ‘아모리 아츠 위크(Amory Arts Week)’로 부르고 있으며, 올해는 볼타뉴욕(Volta NY), 아트나우페어(Art Now Fair), ADAA 아트쇼(ADAA, The Art Show), 파운틴(Fountain), 인디펜던트(Independent), 무빙이미지(Moving Image), 뉴시티아트페어(New City Art Fair), 풀아트페어 뉴욕(PooL Art Fair New York), 스프링/브레이크 아트쇼(SPRING/ BREAK Art Show), 스코프 뉴욕(SCOPE New York), 버지 아트 브룩클린(Verge Art Brooklyn)과 코리안아트쇼(Korean Art Show)를 포함한 무려 12개의 위성아트페어가 아모리쇼 기간에 동시에 열렸다. 이 중에서도 아모리쇼와 직접 연계해서 개최되는 ‘볼타뉴욕’과 갤러리협회의 그룹 전시인 ‘ADAA 디 아트쇼’, 그리고 많은 미술전문가들의 주목을 끈 ‘인디펜던트’를 들여다 보자. 위성아트페어 특유의 독특한 기획력도 살펴볼만 하다.  
아모리쇼와 공동으로 연합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볼타뉴욕은 미술평론가 아만다 쿨슨(Amanda Coul son)이 처음 기획하여 개최된 후, 3명의 딜러 카비 굽타(Kavi Gupta, 시카고), 울리히 보그스(Ulrich Voges,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프리드리히 룩(Fried rich Loock, 베를린)에 의해 올해까지 총 8번째 행사를 선보여 왔다. 그동안 볼타뉴욕은 특별히 모든 참여 갤러리마다 단 한사람의 작가만을 소개하는 독특한 방식의 페어를 선보여 왔는데, 올해 총 25개국 45개 도시에서 참여한 80개 갤러리에서 선정한 각 작가들은 현재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머징 작가들이 주를 이뤘다. 아모리쇼와 공동으로 진행되는 행사인 만큼, 아모리쇼의 특별전 <아모리 포커스>와 흐름을 같이 해 북유럽국가의 갤러리를 특별 조명했다. 볼타뉴욕과 함께 스위스의 바젤에서 열리는 볼타 8(Volta 8)역시 6월 바젤아트페어와 함께 공동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미국화랑협회(Art Dealers Association of America)에서 주관하는 ADAA 디 아트쇼 역시 아모리쇼와 같은 기간에 진행됐다. 입장권과 수익금의 일부를 소외된 사람들을 수용하는 기관(Henry Street Settlement)에 기부하는 의미 있는 행사를 기획한 올해의 디 아트쇼에는 총 72곳의 갤러리가 참여했다. 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총 2만여 명이 넘는 컬렉터, 미술관 관계자, 큐레이터, 작가, 그리고 미술애호가들이 전시장을 찾았으며, 입장권과 특별 판화작품을 판매해 벌어 들인 올해의 수익금이 총 12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페이스갤러리에서 출품한 요시토모 나라(Yoshitomo Nara)의 작품과, 채임앤리드갤러리에서 출품한 미국조각가 린다 뱅글리스(Lynda Benglis)와 영국작가 애담 퍼스(Adam Fuss)의 작품, 그리고 리건프로젝트의 엘리엇 헌들리(Elliott Hundley)의 작품이 모두 매진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례적인 ‘한국’ 아트페어

총 43개의 갤러리가 참여한 인디펜던트는 첼시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엘리자베스 디(Elizabeth Dee)와 대런 플럭(Darren Flook)에 의해 설립되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비교적 신생 아트페어이다. 전시 장소는 예전에 디아센터(Dia Center)가 위치해 있던 첼시의 22가로, 건축가 크리스찬 와스만(Christian Wassman)이 공간 연출을 맡았다. 더불어 실내 공간에 전시된 출품작 이외에 건물의 옥상정원에도 지구의 남북축에 맞춰서 작품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설치 작품을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무엇보다 독특한 점은 참가한 모든 갤러리와 전시담당자와 함께 작가 한 명을 선정한 뒤, 그 작가에게 아트페어의 로고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올해에 선정된 작가는 1978년생의 폴란드 출신 작가 아니츠카 쿠란트(Agnieszka Kurant)로, 그가 디자인한 로고는 인디펜던트에서 특별 제작한 토트백과 관련 상품들에 인쇄되어 전시 중 판매되었으며, 스티커로도 제작되어 관람객들에게 배포됐다.
마지막으로 아모리 아츠 위크의 또 하나의 이색 아트페어로 한국 갤러리들이 모여 만든 ‘코리안아트쇼’의 개최를 들 수 있다. 코리안아트쇼는 뉴욕의 아모리쇼 시즌에 맞춰 한국화랑협회에서 2010년부터 기획, 진행하고 있는 전시이다. 소호에 위치한 전시장(82 Mercer Street)에서 올해 3회째 행사를 개최한 이 아트페어에는 한국갤러리 14곳(1&9 Flow 갤러리고도 갤러리금산 갤러리나인 박영덕화랑 샘터화랑 아트링크 아트밸리 자리아트 줄리아나갤러리 청작화랑 킵스갤러리 표화랑)이 참여하여 진행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뉴욕한국문화원, 뉴욕한인회의 후원 아래 진행된 코리안아트쇼의 주요 목적은 아시아 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전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역시 최근 들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미술을 더 확고히 알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로, 전시장을 찾은 외국인 관람객들은 앞서 살펴본 아모리쇼, 볼타, 스코프 등이 세계 각국의 갤러리들의 그룹전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코리안아트쇼는 한 국가에서 출품된 화랑들만의 연합전시로 그 문화의 특이성 혹은 개성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은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코리안아트쇼만의 개성과 특성을 느낄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가 담긴 구성을 선보였으면 하는 점이다. 같은 기간, 아트페어의 홍수 속에서 그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작품성을 기반으로 한 짜임새 있는 구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코리안아트쇼가 앞으로도 꾸준히 전개되는 행사가 되어 나름의 역사를 지니게 되고, 한국미술의 특성과 그 고유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행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즌 동안 뉴욕사람들의 공통 화제는 단연 ‘아트페어’이다. 여기저기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아트페어들을 찾아 다니다 보면 일주일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 현실적으로 몇 시간만에 출품된 작품을 모두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그 수와 규모가 무척 방대하다. 그렇지만 한 세대를 앞서 살아간(Modern) 혹은 오늘날 동시대를 살고 있는(Contemporary), 많은 작가들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이야말로 페어 실적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 뉴욕 미술시장의 진정한 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포스트 아방가르드 예술의 한 풍경

<디오니소스의 노래> 깨진 병, 철, LED조명, 에폭시 270×270cm 2008 (사진: 김상태)

포스트 아방가르드 예술의 한 풍경

글 | 심상용

3채널 비디오 영상작업 <후쿠시마의 바람> 가운데 한 채널은 배영환과 일본 사회학자 후쿠니쉬 도시로의 순차적인 ‘텍스트-대화’로 구성된다. 도시로가 배영환에게 건네는 말 가운데, 아마도 그의 예술론이랄 수 있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술은) 인류의 그러한 근원적인 정신의 움직임에 관여하고 있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더욱 더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물음을 형상화하는 것…”.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진술은 어떤 의미에선 상당히 낙천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가 예술이라는 표제어로 지시하려는 활동과 요즈음 통상 예술로 범주화되곤 하는 것 사이에는 최소의 유사성조차 없다. 오늘날 예술로 통칭되는 많은 행위와 활동은 인류의 근원적 정신과 크게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관심조차 없다. 그다지 인생에 대한 총제적인 질문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펜실베니아대 사회학 교수인 다이아나 크레인이 보기에도, 예술은 이미 1970년대부터 시대를 분별하거나 가늠할 능력을 상실했다. 부분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거나 재현하긴 했더라도 말이다. 아메리카가 역사의 대주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예술은 자신의 미적 전통을 상업 문화의 이미지들과 뒤섞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통찰력이 동시대 다른 이미지 생산자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도 바로 이시기부터였다.
20세기 초에 전위 예술가들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 우상파괴주의자, 미적 혁신주의자, 그리고 사회적 반항아(이단아) 정도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이들이 기꺼이 그러한 역할을 자처했던 것은 그러한 정체성이 후쿠니시 도시로가 마음으로부터 떠올렸던 예술, 곧 존재의 근원적인 정신의 움직임에 관여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행위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정체성은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고 쇠퇴했다. 예술가들은 동시대의 부르주아 문화로부터 소외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야 하는 의미나 필요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직업의 목표나 생활 스타일에 있어 중산층에 동화되어 갔다.

<남자의 길-사열> 버려진 나무로 만든 기타 2005

플라토의 배영환, ‘자본주의 4.0’의 풍경?

플라토에서 열린 배영환의 개인전 <유행가-엘리제를 위하여>는 이러한 피하고 싶은 문제가 피할 수 없는 현안으로 대두되는 바로 그 지점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일테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예술 정신을 견인해 온 아방가르드 정신이 지속적으로 그 신뢰를 상실해 왔던 기억들, 세상에 더 이상 저항적이지도 신경증을 앓지도 않는 예술, 동화되고 순응하고 타협하고 한통속, 곧 전위가 아니라 ‘중위(Moyen-Garde)’화되어 온 예술이 다시 논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지점. 깨진 소주병과 담배꽁초, 본드와 두통약은 정치, 경제적 지배집단에 대해 도전하는 아방가르드 주의의 약호들이고, 그것들로 대변되는 노숙자, 불량청년, 사회부적응자, 불면증에 시달리는 시민의 리얼리티는 엘리트 문화의 영지, 로댕(A. Rodin)의 기념비가 축성된 전당인 플라토에서 그것이 기초하는 패러다임이 절충되거나 소진되는 일련의 중위화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예컨대 공공과 민간 영역의 새로운 관계 수립, 거대 주류 기업과 반항아 사이의 정치적 조율, 소비와 감상의 상호동화 같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이 말하는 풍경의 예술적 버전으로 읽어 내야 할 것인가?

왼쪽 <걱정-서울 오후 5:30 P.M> 사진, 소리 가변설치 2012
오른쪽 <황금의 링-아름다운 지옥> 나무, 철, 금색 페인트 350×350×150cm 2012(사진: 김상태)

반항아(rebel)들의 역사는 어디 있는가?

플라토는 굴지 기업의 메인 라운지 같은 분위기의 전실과 흰색의 창문도 소음도 없는 아방가르드 갤러리(어떤 타협도 불사할 듯한)로 구성되어 있다. 기업과 아방가르드를 아우르는 듯한 플라토의 유리 파빌리온에 들어서는 순간 어떤 정화의 작용, 그것 없이는 내부로 들어갈 수 없을 듯한 감상, 어떤 내밀한 검열의 인상, 또는 영토화에 대한 직관적 거부에서 기인하는 긴장감이 전해진다. 하지만 경계를 넘어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들> 앞에 섰을 때, 회의는 주제넘은 짓이며 특히 온당치 못한 것임이 불편한 안도감과 함께 느껴진다. 솟구쳤다 해체되는 의구심과 그에 기인한 인식적 포만감으로 인해, 플라토 안쪽 화이트큐브에서의 감상은 자주 들뜬 기분과 유감스러운 긴장 상태에 교착되기 십상이다. 삼성과 로댕의 기호적 우생학과 접촉을 의미하는 전실의 강력한 기호작용에 의해, 안쪽에 위치한 아방가르드 갤러리의 분위기는 일종의 좀비적 전락을 잠재적으로 내포한 것이 되고 만다. 지옥의 문을 품은 채 기호의 비만을 앓고 있는 플라토의 전실을 지나면서, 관객은 이미 침범당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전위의 중위화이자 번민의 폐기장치이기도 한 플라토의 장소성이 특히 배영환의 것 같은 아방가르드 텍스트들과 충돌하는 방식이야말로 이 시대의 도처에서 목격되는 상징적 풍경이다. 지옥의 문 우측에서 시작되는 화이트큐브 갤러리 안에는 배영환이 알약과 약솜으로 쓴 <유행가2-청춘>의 가사가 벽에 걸려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지는 꽃잎처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 짓 슬퍼지면…” 우리는 이 노래가 단지 무너져 내리는 청춘과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만을 위한 것일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는 4만 달러와 아이돌과 한류 열풍 속에서 아픔의 까닭조차 망각하도록 내몰리는 금세기 한국인들의 정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런 회환의 정서조차 지난 세월 동안 부단히 거세되었다. 그 회한 내에 사람들의 시선을 진실로 돌리도록 만드는 미량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소비를 위협하고, 소비를 진작시킬 수 없다면 진실이라도 희생시켜야 마땅하다는 게 시대정신이니까.
요즘에는 한국미술을 아이돌그룹이 성취한 한류 산업에 편승시키자는 데까지 선동을 하고 있다. 노출과 성형, 고도로 훈련된 군무(群舞)의 복합이 불러일으키는 흥분 상태에서 예술의 지향을 탐사해야 할 만큼, 우리의 상상력은 노후하고 누추한 것인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약솜과 깨진 유리, 병뚜껑과 면도날, 본드로 쓴 텍스트, 야산에 버려진 자개장으로 만든 기타들은 전술했듯 좀비화된 플라토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너무 멋진 오브제로서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확하게 세련된 오브제를 강요받는 분량만큼 긴장이 완화된 톤으로 그토록 아픈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욕망에 눈을 뜬 중산층 지향적인 이 시대의 예술로 흔들기에 플라토는 지나치게 기호화된 영토다. 아마도 배영환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전실의 한 복판에 격투기를 환기시키는 황금의 링을 배치하기로 작정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미적 명품의 부르주아적인 감상에 봉헌된 그 제의적 장소에서, 싸움이나 결투, 최소한 시비걸기라도 아니라면, 대체 배영환이 다른 무엇을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표면적으로 배영환은 로댕의 검은 <지옥의 문>의 대립항으로 황금빛 사각의 링을 배치했다. 그럼으로써 <지옥의 문>의 감상에 할당되었던 공간은 격투기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다. <황금의 링-아름다운 지옥>을 오브제나 설치가 아니라 장소특정적 미술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이유다. 하지만 쉿! 부랑아와 낙오자, 노숙자로 대변되는 탈부르주아적 아방가르드의 신념을 고백하는 싸움을 그 대척지에서 표현주의자처럼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것이 3.5m의 정방형에 높이 1.5m인 링 위에서의 싸움이 단지 암시적으로만 진행되는 이유가 아닐까. 황금빛 권투 글로브만 바닥에 놓여 있고 선수는 거기 없다.

<오토누미나> 청자 오브제, 나무 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0

묘사되거나 재현되지 않은 ‘싸움’

2006년 이맘때 쯤, 바로 그 플라토의 전실에는 박이소의 사방이 부스러진 커다란 콘크리트 배가 놓여 있었다. 무겁고 뜰 수 없기에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그것은 분명 박이소의 자전적인 고백이었다. 물론 그 배치는 박이소의 생각이 아니었다.(유작전 기획자의 것이었을 뿐) 박이소 본인이었다면 아마 전시 자체를 거부했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거부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2006년의 생경한 유작전처럼 그토록 단정하고 질서정연하고 자기신화적인 문법을 구사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배영환은 세상에 대한 박이소의 절망이 위치했던 그 자리에 황금의 링을 설치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지옥’이란 자기모순의 부제를 달았다. 격투기의 야성, 하지만 도금되고 장식화된 야성에 대한 환기인가? 앞서 말했듯 싸움은 묘사되거나 재현되지 않는다. 주먹을 감싸야 할 글로브는 바닥에 얌전하게 놓여 있다. 도금된 시각의 링은 미니멀하고 공허하다. 싸움이 아니라 싸움의 부재를 웅변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테면 반항아들의 역사가 아니라, 그 소멸된(되어 가는) 역사에 대한 담론인가? 다시 시작되어야 할 싸움에 대한 암시인가? 확실한 것은 없다. 답은 관객들 각자의 몫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배영환이 스스로 답하는 대신 말이다.

미래에서 현재를 보다

<백악관(The White House)> 디지털 애니메이션 32분16초 2005~06
아라리오갤러리 베이징 전시 전경

미래에서 현재를 보다

글 | 류한승 · 미술평론가

영상 작품 <부유하다>에서 전준호는 한국 지폐에 새겨진 경회루, 오죽헌, 도산서원을 홀로 돌아다닌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에서는 미국의 10달러 지폐에 새겨진 재무부 건물과 2달러 지폐에 그려진 존 트럼벌(John Trumbull)의 그림 장면, 그리고 10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독립기념관을 차례로 방문한다. 한편 <백악관(The White House)>에서 그는 20달러 지폐에 당당히 그려져 있는 백악관의 모든 창문과 문을 하나하나 지워 나간다. 소위 <뱅크노트(Bank Note)>라고 불리는 이 독특한 시리즈의 작업은 사람들의 이목을 한순간에 사로잡으며 작가 전준호를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지폐 속에서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기발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유명세는 오히려 작가로서의 그의 위치를 협소하게 규정짓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그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도 가져왔다. 즉 ‘작가 전준호’라고 하면 사람들은 ‘돈과 자본주의’라는 주제를 쉽게 떠올렸고, 심지어 후자의 두 작품과 관련하여 ‘반미’와 연결되기도 하였다. 전준호의 작품 중 유독 <뱅크노트> 시리즈가 집중적으로 소개되면서, 그 동안 우리는 그의 작업 세계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해 온 부분도 없지 않다. 사실 이 시리즈의 유명세에 비해 그의 초기 작업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그가 예전에 ‘물’과 관련된 다수의 작업을 했다는 사실도 그렇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 디지털 애니메이션 8분10초 2004

‘물’을 다룬 초기 작업들

1998년 12월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전준호가 처음 착수했던 작업은 <운문댐 프로젝트>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불교조각연구소에서 불상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오래전부터 근본적이고 원론주의적인 철학과 사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인도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 전준호는 6개월 동안 청도 운문사에서 파견되어 일한 적이 있었고,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1999년 다시 운문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믿지 못할 장면과 마주해야만 했다. 운문댐이 건설되면서 운문사 일대의 마을 7곳이 모두 물에 잠겼던 것이다.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들만 그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짧은 기간 머물렀던 전준호도 그 마을에 대한 기억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데,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그 미묘한 감정들을 작품에 담아 시각화하기로 마음먹은 전준호는 우선 수장된 마을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촬영 허가를 받기 위해 10개월에 걸쳐 한국수자원공사에 협조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수중촬영 전문기술이 없었던 그는 MBC 수중촬영팀의 도움을 받아 촬영했고, 동시에 그 지역을 조사하며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수몰된 마을의 모습과 인터뷰를 담은 영상, 마을 지도를 이용한 설치, 중학교 사진 등으로 구성된 완성작을 2000년 토탈미술관에서 전시한다.
<운문댐 프로젝트>는 전준호의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배작가들과는 차별되는 여러 새로운 특징들을 보여 주고 있다. 먼저, 그의 작업은 영상 사진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져 있다. 특정한 한 가지 매체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따라 가장 적합한 매체를 선택하는 작가의 판단 때문이다. 그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술이 없을 경우, 테크니션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즉 작품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형식보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작품의 내용을 공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둘째, 그는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였다. 이런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작가는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하기보다는 각종 자료를 찾고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폐쇄적인 태도를 버리고 일반인들과 소통해야 하며, 심지어 예상치 못했던 우연적 요소도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현실적(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준호는 초창기부터 ‘형식’ 보다는 ‘내용’, ‘결과’ 보다는 ‘과정’, ‘추상적 소재’ 보다는 ‘구체적 소재’, ‘혼자’ 보다는 ‘협업’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후 전준호는 <운문댐 프로젝트>로 성곡미술관의 ‘내일의 작가’ 공모에 지원한 뒤 선정작가로 뽑히며 2001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성곡미술관 별관은 원래 빌라 건물이다. 그러다 보니 1, 2, 3층의 구조가 같고 가운데에 커다란 기둥이 있다. 다른 작가들이 이 공간에서 전시할 때 대부분 1층은 회화, 2층은 조각과 같이 독립적으로 공간을 운용한 것과는 대조되게, 전준호는 1층부터 3층까지의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길 원했다. 당시 그가 전시한 작품은 <관폭도>이다. 원래 <관폭도>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방 안에서 폭포를 감상하며 스스로를 수양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전준호는 동명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밀양 호박소 근처의 어느 폭포에 직접 들어갔다. 폭포의 물 세례는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고 작가는 회상한다. 그가 이런 고통을 감내한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한 일종의 반성적 행위였다. 그는 그렇게 직접 폭포에서 촬영한 영상을 미술관에서 상영했는데, 각 층마다 기둥 옆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3층에선 작가의 머리, 2층에선 몸통, 1층에선 발이 물 세례를 맞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그 결과 미술관 3층에서 1층으로 폭포수가 떨어지고, 사람이 폭포수를 처절히 맞고 있는 광경이 연출된 것이다.
또한 기둥과 스크린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긴 공간에는 각각 <잠자는 물> (3층), <무거운 물>(2층), <우울한 물>(1층)을 설치했다. 이중 영상설치 작품인 <잠자는 물>에 주목해 보자. 이 작품에서 그는 프로젝터에서 나온 영상을 스크린이 아닌 얼음에 투사하였다. 그 영상은 자세히 보면 사람의 이미지인데, 이 이미지가 얼음에 투사되면서 마치 사람이 얼음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은 바로 전준호였다. 당시 그는 얼음이 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냉동 장치를 설치했는데, 만약 냉동 장치의 전원이 끊긴다면 얼음은 녹고 이미지는 일그러질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사회 시스템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는 연약한 개인을 연상시킨다.

<또다른 기념비를 위하여> FRP 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04. 제5회 광주비엔날레 전시 전경

영상 속의 블랙코미디, ‘지폐’ 작업의 시작

성곡미술관 전시 이후에 발표된 작업이 싱글채널 비디오 <전준호, 물 위를 산책하다>이다. 영상의 주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작가가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바위에 앉아 있다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면 경회루가 나타난다. 이 작업과 함께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초기작에는 전부 ‘물’이 등장한다. 이는 항구도시 부산에서 나고 자랐으며 가족이 목욕탕을 운영했었던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물은 이미 작가에게 친근한 존재였다. 또한 “동양의 산수화를 보면 <관수도> <관폭도> <수상도> 등 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자연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 위해 그러한 그림들이 그려진 것이다”라는 언급처럼, 그는 과거 동양화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한편 <전준호, 물 위를 산책하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경회루를 걷고 있다. 경회루! 바로 1000원짜리 지폐에 담긴 이미지이다. 지폐의 이미지가 처음 도입된 작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유하다>가 아니라 바로 이 작품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지폐 뒷면의 그림을 보니 예쁘고 정교했다. 지폐의 이미지를 결정할 때, 그 나라의 정체성과 이상과 가치 등을 참고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지폐에는 건축물만 있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그곳은 마치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유토피아 같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환상과 이상을 보여 주지만, 우리는 결코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했다. 우리의 삶과는 너무 괴리된 곳. 그래서 난 호접몽처럼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싶었다.”
2003년 전준호는 <유쾌한 공작소>(서울시립미술관)전에서 <부유하다>를 출품했다. 여느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의 설치와는 다르게, 그는 이 영상이 설치된 방에 마치 전망대를 연상시키는 철제 계단과 통로를 설치했다. 관객은 계단을 올라가고 통로를 지나야만 비로소 작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더불어 통로가 비교적 좁았기 때문에 적은 수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록 관객의 동선에는 다소 불편함이 생기더라도, 그는 관객이 작품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하여 내밀하고 섬세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제한된 동선으로 인해 관객은 화면 앞으로 다가갈 수 없었는데, 이는 지폐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절대로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후에도 전준호는 싱글채널 비디오를 보여 줄 때, 영상이 보다 효과적 혹은 극적으로 보일 수 있게 새로운 장치를 끊임없이 개발해 왔다. 이는 작품이 공간과 호흡하며 생동감을 갖기를 원했던 작가의 의도 때문이다.
2004년 제작된 영상 작업 <In God We Trust>에서는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 사람이 미국의 거리를 걸으며 한국말로 독립기념관이 어딘지를 찾는다. 곧 그는 미국 독립기념관 안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한국말로 낭독한 뒤 그곳을 빠져나온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현실에선 벌어질 수 없는 다소 엉뚱한 상황이다. 이 작업의 제작 동기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립’이란 게 과연 무엇인지를 다루고 싶었다. 가령 미국이 영국에 독립을 원하고, 한국이 일본에 독립을 원하는 것 말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어떤 누구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즉 인간에게는 항상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거다. 즉 구속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의사 결정을 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이게 나에겐 더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나라의 인권, 미국의 패권주의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특히 당시 2004년 초는 이라크 파병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같은 해 2월 국회에서 자이툰 부대 파병안이 논란 속에서 통과됐고, 정부는 파병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4월 한국과 이라크의 대표팀 친선 축구 경기를 상암경기장에서 개최했다. 지금 보면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미국의 요구에 따라 우리는 남의 나라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야만 했다. 비록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이런 일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독립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지만, 실상 힘의 논리에 의해 부당한 요구에 타협하고 굴복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감이 생기며, 그걸 보고 사람들은 허탈해 한다.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백악관>은 전준호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업 중 하나이다. 이 작품에는 복잡한 내러티브도, 자극적인 이미지도, 뚜렷한 메시지도 없다. 그저 평범한 어느 한 사람이 미국 백악관의 창문과 문을 흰색 페인트로 묵묵히 지우고 있다. 무려 32분 동안. 백악관의 경우 관람 신청을 하면 건물 내부까지 관람객이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열린 평등주의를 반영하는 것 같지만, 반면 ‘화이트(White)’라는 이름에는 백인우월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전준호는 백악관이 외부와 소통이 되지 않게 창문과 문을 모두 제거하여, 말 그대로 ‘White House’을 만들어 버렸다.
이 작업은 2005년 12월 아라리오갤러리 베이징에서 첫 선을 보였다. 전시개막 한 달 전에 미리 베이징에 도착한 전준호는 주조공장을 전시장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전시장 왼쪽 벽의 창문을 흰색으로 칠하여 마치 창문을 지워 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한 천정을 지탱하는 철제 구조물을 삼각형 형태로 변형시키고, 동시에 간접 조명을 주어 이 삼각형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이는 마치 페디먼트(Pediment,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건축물의 박공)처럼 보였는데, 사실 백악관 건물에도 커다란 페디먼트가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작품과 전시 공간에서 어떤 공통적 요소를 반복하는, 즉 일종의 라임(Rhyme)을 구사함으로써 작업이 보다 생생하고 웅장하게 보이게 한 것이다.

<무제> 디지털 애니메이션, 나무 유리, 레진, 모니터 외 혼합재료 2007~08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묻다

2008년과 2009년 열린 두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전준호의 작업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지폐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사회 현상을 소재로 채택하고, 그것에 보다 폭넓은 관점으로 접근하며 사회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인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실 어떤 사건도 단 하나만의 이유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아무리 개인적인 일이라도 전적으로 개인(가족)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현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며, 따라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전준호는 작업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노골적으로 고발하진 않는다. 그는 그런 현상 배후에 있는 힘들의 역학관계 또는 미시적 흐름을 효과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이 그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작품에 메시지를 담아서 나의 생각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태도는 정말 위험한 것이다. 그 대신 제언 제시 저항을 하는 거다. 모두가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규정된 무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반성하고 돌아보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이다.
이 무렵 사회적 현실을 다룬 전준호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는 5편의 싱글채널로 구성된 <하이퍼리얼리즘(Hyper Realism)> 시리즈이다. 각각의 화면에서는 맥아더 장군이 “나는 돌아온다(I Shall Return)”를 외치는 장면, 국군 장교와 인민군 병사가 서로 껴안으려고 하지만 결국 튕겨져 나가는 장면, 퇴근 후 한 남자가 김일성 생가로 들어가는 모습, 탈북 주민이 대사관 벽을 넘는 장면, 바지를 치켜 세우는 남자와 그를 붙잡으려 하는 여자의 장면이 상영됐다. 이 시리즈는 모두 러닝타임이 짧고(가장 짧은 것은 15초, 긴 것은 1분 22초) 따로 크레딧 표시도 없이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그는 2004년 이미 <디스 이즈 잇(This Is It)>을 통해 CF형식의 영상으로 단순명료한 의미 전달방식을 선택한 바 있다.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있어 많은 것을 표현하지 않고, 특정 동작만을 반복함으로써 그 상황을 압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작가가 작품 제목에 대하여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극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그릴 때, 꼼꼼히 잘 그려서 장면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이 잘 드러나야 한다. 내겐 그것이 ‘하이퍼리얼리즘’이다”라고 설명하듯이, 그의 용어는 장 보드리야르 혹은 미술사의 하이퍼리얼리즘(또는 포토리얼리즘)과 관계가 없다. 그가 말하는 ‘하이퍼’란 ‘과도’와 ‘초과’가 아닌 ‘최고도’의 의미이다. 즉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최고도로 잘 드러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품에 시제가 혼합되면서 어떤 현상을 보다 광범위하게 접근하는 방식의 작업이다. <하이퍼리얼리즘> 시리즈의 일부이기도 한 <무제>는 북한의 100원짜리 지폐를 활용하였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김일성 생가에 들어가며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치지만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감히 김일성 생가에 들어가는데, 감시하는 사람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다. 이데올로기 공방이 모두 사라진 미래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또한 2009년 발표된 <웰컴(Welcome)>은 북한돈 50원에 그려진 백두대간이 배경이다. 이 풍경은 북한 선전화에 자주 등장하며 김일성이 연설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곳에는 김일성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흔적조차 없다. 전준호는 이 묘한 상황을 모든 것이 변해버린 미래의 북한으로 간주했다. 백두대간에 할리우드를 연상시키는 간판을 세우기 위해 헬리콥터가 ‘WELCOME’이라고 새겨진 각각의 글자판을 운송한다. 그런데 알파벳 철자가 틀리게 배치되고, 그것을 수정하다가 헬리콥터끼리 충돌하면서 산과 들에 불이 난다. 세월이 흐른 후 북한이 개방되고 경제 논리에 의해 사회가 급변한다면 이런 해프닝도 벌어질 수 있다. 그저 유머넘치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마치 머지않아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예견하는 듯하다.
불교조각연구소에서 갈고닦은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같은 맥락이다. 불교 교리에서 미륵보살은 석가모니의 제자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언약을 받은 보살이다. 그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56억 7천만 년 후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 때 빠진 중생을 구할 미래불이다. 무려 56억 7천만 년 후에 이미 사람들이 다 죽고 유골만 남았는데도,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이 작품에서 전준호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신념과 믿음, 나아가 그것에 대한 허구와 상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신념과 믿음을 다른 차원으로 보길 권한다. 바로 ‘미래의 시점’으로 ‘현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당시에는 너무 절실했어도, 목숨을 다 바쳐 신봉했어도, 시간이 지나보면 그게 아닌 경우가 많다. 왜 그땐 그렇게 집착을 했었는가. 인간의 어리석고 허무한 것, 그것은 일종의 ‘바니타스’일지도 모른다.

영화 <세상의 저편(El Findel Mundo)> 메이킹 필름. 2채널로 구성되는 이 영화는 다른 시간대에 같은 장소를 거쳐 간 두 주인공, 세상 종말 직전의 남자와 그 이후 세상의 여자를 함께 보여 준다. 각 남녀 주인공은 배우 이정재와 임수정이 연기했다.

존재 의미와 역할을 묻는 여정

2008년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 중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의 <골고다의 행진>를 모태로 한 것이 있다. 작품명은 <패닉 디스오더리우스(Panic Disorderius)>로, 그가 새롭게 만든 작업에선 원작에서 등장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단지 브뤼겔이 있던 자리에 전준호가 나타나는데, 그는 겁먹은 표정으로 텅 빈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나무 뒤에 숨어서 말이다. 이러한 작가의 모습은 시대에 항변하지 못한 채,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예술가를 의미한다. 즉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는 모습이다. 예술가와 사회. 물론 시대에 따라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혹은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가들의 삶은 어떤가? 사실 많은 작가들이 고상한 척하며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을 만든다. 그들은 마치 자기만족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듯이, 소통불가의 난해한 작품을 쏟아 내고 있다. 만약 예술가들이 사회와 소통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들은 사회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오랫동안 이런 고민을 품었던 전준호는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가진 문경원과 색다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바로 <뉴스 프롬 노웨어(News from No where)>란 공동작업이다. 《뉴스 프롬 노웨어》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였던 윌리엄 모리스가 1890년에 쓴 유토피아 소설이다. 사회주의 운동을 꿈꿨던 모리스가 당시 영국의 귀족사회와 군국주의의 폐단을 절감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결과물이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잠을 자다 깨고 보니, 미래인 2000년대에 와 있다는 내용이다. 이 미래의 사회에서는 사유 재산, 대도시, 권력, 화폐 제도, 이혼, 법정, 감옥, 계급 제도 등도 없고, 모두가 차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이는 모리스가 미래의 시점으로 당시 1890년대 영국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리스가 소설을 통해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 뛴 것처럼, 문경원과 전준호도 100여 년 뒤 가상의 세계를 상정한다. 100여 년 후 대재앙이 일어나 인류가 황폐화되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가정 하에, 각 분야에서 재건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논의하고자 한 것이다. 전준호는  이 작업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가치가 사라졌을 때 건축가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기능성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조형성? 심미성? 마찬가지로 그때의 예술은 어떤 형태일까? 어떤 예술이 바람직할까? 이를 찾아나가는 거다.”
전준호가 작업 초기부터 무엇보다 고심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역할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여러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겪으며 학업과 작업, 취업 등을 병행했지만, 결코 그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거나 피상적으로 다루진 않았다. 주어진 현실에 적극 대응하면서 스스로를 차근차근 정립해 나갔고, 그런 과정을 통해 한국미술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그는 관객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예술가의 입장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관객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호흡하며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강구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작가-작품-관객’의 관계에서 다시금 작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보다 심층적으로 작가의 존재 의미와 역할을 숙고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예술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다를 바가 없다.
지난 활동에서 전준호는 요행을 바라거나 성급한 해답을 이끌어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시대와 국가 등 시공을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길 원했다. 이 수고스러운 여정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정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와 역할을 계속해서 생각할 기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운문댐 프로젝트> 영상 설치 물, 상자 1200×800×550cm 2001 부산시립미술관 설치 전경

전준호 1969년 부산 출생. 동의대 미술학과 및 영국 첼시 미술대학원 졸업. 도쿄 스카이 더 바스하우스(2009), 파리 테디우스 로팩 갤러리(2008), 아라리오갤러리 천안(2008), 뉴욕 페리 루벤스타인 갤러리(2007)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요코하마트리엔날레(2011), 모스크바비엔날레(2009), 부산비엔날레(2008), 싱가포르비엔날레(2006), 광주비엔날레(2004) 및 <Your Bright Future>((2009 LACMA, 휴스턴미술관), <Metamor phosis>(2008 파리 에스파스루이비통), <All About Laughter> (2007 도쿄 모리미술관)등의 국내외 비엔날레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 비엔날레상, 2007년 루블라

홍콩아트페어 디렉터, 매그너스 랜프루

매그너스 랜프루 1975년 스코틀랜드 출생.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 미술사 전공. 2006년까지 런던 본햄즈의 아시아 컨템포러리 부문 담당. 상하이 콘트라스트갤러리 운영. 2008년 《ART+AUCTION》 ‘미술계의 핵심 인물 15인’, 2009년 《CANS》 ‘아시아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인’, 2010년 《ART REVIEW》 ‘Power 100’에 선정됐다. 현재 홍콩에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홍콩아트페어 디렉터, 매그너스 랜프루

글|김재석 기자

홍콩아트페어의 디렉터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가 내한했다. 그는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디렉터를 맡아 행사를 진두지휘하며 홍콩아트페어의 가파른 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렌프루는 아트페어가 열리기 전후, 전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전투적으로 행사를 홍보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번이 벌써 15번째 방한이다. 작년에 홍콩아트페어의 지분 60%가 아트바젤과 아트마이애미를 운영하는 스위스 MCH그룹에 인수된다는 소식이 발표되면서, 국제 미술시장의 관심은 온통 홍콩에 쏠렸다. 2008년 첫회부터 3회까지 아시아 미술시장에서 점차 영향력을 넓힌 홍콩은 작년 4회째를 맞으며 그 규모를 2배 이상 키웠다. 그리고 오는 5월 17일 MCH그룹 인수 후 열리는 첫 행사가 홍콩컨벤션센터에서 공개된다. 올해 홍콩아트페어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가장 국제적인 아트페어가 될 전망이다. 깐깐하게 선별한 참여 갤러리의 라인업은 막강하다. 홍콩아트페어를 홍보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나 홍콩아트페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비전을 물었다. 쌀쌀하고 흐린 날씨였지만, 그는 영국의 봄과 같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홍콩을 국제 미술시장의 미팅 포인트로”
홍콩아트페어의 성공 배경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홍콩’이라는 도시 자체다. ‘아시아의 월드시티’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글로벌한 도시의 정체성, 아시아 미술(특히 중국미술)에 대한 국제 미술계의 관심 증가, 잠재 구매층이라 할 고액순자산보유자의 높은 비율, 동서양의 관문이라는 지형학적 조건, 뉴욕과 런던 다음으로 큰 경매 미술시장 규모, 비행기에서 내리면 페어장으로 단시간에 이동할 수 있는 도시 공간의 밀집력,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미술품 비관세 정책까지, 홍콩은 ‘국제’ 미술행사를 조직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아트페어를 준비하는 과정이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다. 매그너스 렌프루는 초반에 서구 갤러리의 참여를 이끌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 놨다. “유럽과 미국의 유명 갤러리들은 아시아 마켓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홍콩으로 가야만 하는지를 질문했어요. 국제적인 명성만 믿고 섣불리 진출하기에는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겠죠. 2010년 홍콩에 첫 아시아 지점을 오픈한 래리 가고시안은 개관까지 4년이란 준비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는 홍콩아트페어가 성장한 결정적 원동력은 결국 ‘타이밍’이었다고 덧붙였다. “아시아 미술시장에서 정말 ‘국제적’인 규모의 아트페어가 열려야 한다는 국제 미술계의 요구가 있었어요. 서구 갤러리들은 포화 상태인 유럽과 미국 미술시장의 대안으로 아시아에 눈을 돌렸죠. 반면 아시아의 주요 갤러리들은 서양에 진출하기 위한 적절한 플랫폼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에 국제아트페어가 열린 겁니다.”
렌프루는 홍콩아트페어의 모토가 ‘글로벌 미팅 포인트’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의 다른 아트페어가 국제 행사임을 표방하지만 자국 갤러리 중심으로 열린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참여 갤러리들이 홍콩아트페어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홍콩은 아시아에서 열리는 행사라는 로컬 정체성을 살리고, ‘국제’ 아트페어라는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동서양 갤러리 분포를 ‘50:50’으로 맞추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트페어의 생명이 참여 갤러리의 수준에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얼마나 많은 갤러리냐의 문제보다는, 어떤 갤러리냐가 중요한 것. 아트페어 준비위원회와 함께 갤러리들의 소속 작가 수준, 과거 전시 프로그램 그리고 아트페어의 참가 제안서를 꼼꼼하게 검토한다. 올해 홍콩아트페어에는 총 39개국 266개의 갤러리가 참여한다. 아시아 53%, 서구 47%의 비율이다. 이 중 갤러리 80개는 첫 참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홍콩아트페어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분할 수 있다. 메인 갤러리 섹션, 전도 유망한 아시아 작가들의 개인전 형식으로 부스를 꾸미는 <ASIA ONE> 섹션, 국제 미술시장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신생 갤러리가 참여하는 <ASIA FUTURES>. 특히 올해는 아시아와 서구 갤러리의 네트워킹을 강화하기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전체 공간 플랜에 변화를 주었다. 두 개의 층을 각각 갤러리 섹션과 <ASIA FUTURES>로 꾸리고, 각 층 전시장 중앙을 <ASIA ONE> 섹션으로 구성했다. 행사장 중앙에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을 모아 소개하면서 전체 전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고, 동서양의 명성 높은 갤러리와 신생 갤러리가 전 층에 고루 분포하는 전시 풍경 지도를 짠 것이다. 디렉터로서 갤러리 부스를 적절히 안배하고, 갤러리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 가능하면 겹지지 않도록 사전 조율을 하는 과정은 흡사 어려운 퍼즐을 맞추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전시장에 노는 공간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관람객에게 모든 공간이 볼거리로 풍성한 아트페어를 선사하고 싶습니다.” <HK프로젝트>는 전시장의 빈 공간에 세계적인 유명 작가의 대형 작품을 설치, 아트페어의 ‘쇼’적 측면을 강화하고 복잡한 전시장 내에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세계적 큐레이터 유코 하세가와가 프로젝트를 맡아 총 10개의 작품이 전시장 곳곳에서 스펙터클한 풍경을 연출할 전망이다.

2011홍콩아트페어 전경. 올해 홍콩아트페어는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아트는 아트로 배운다”

매그너스 렌프루는 고고학자인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학자가 아니라, 미술시장에 뛰어든 계기도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학자의 길이 얼마나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인지 알게 됐다고.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본격적으로 미술시장에서 활동한다. 런던의 본햄즈와 상하이의 콘트라스트갤러리 등 아시아 미술 관련 업무를 맡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 아시아 미술의 가능성을 엿봤고, 선견지명을 발휘해 홍콩아트페어를 조직했다. “수만 개의 유명 작품을 앞과 뒤, 작가의 서명까지 직접 꼼꼼히 만지고 살펴보면서 ‘아트는 아트로 배운다’는 말을 몸소 깨달았습니다. 최고와 최악의 작품을 함께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작품을 보는 눈을 실전에서 터득한 셈이다.
렌프루는 아시아의 도시에 아트페어가 적극적으로 개최되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기본 인프라가 서구에 비해 부족한 점을 꼽았다. 그는 아트페어가 상업적인 행사라는 데에 큰 거부감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아트페어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문화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관람객의 미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일뿐만 아니라, 미술시장의 저변 확대와 인프라 구축이 아트페어와 적극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트페어에 관한 그의 철학이 홍콩아트페어의 성장을 통해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지난 3월 영국의 유명 갤러리 화이트큐브가 홍콩 지점을 오픈하며 길버트와 조지의 전시를 개최해 화제를 모았다. 래리 가고시안, 밴 브라운, 에도아르도 말링규 갤러리 등 서구 유명 갤러리가 홍콩에 아시아 분점을 냈으며, 서구 갤러리의 홍콩 입성은 추후 더 늘어날 전망이다. 홍콩은 2008년 3조 5000억 원을 투자, 서구룡문화지구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곳엔 2018년 개관을 목표로 테이트모던의 거의 두 배 규모인 현대미술관 M+가 건설 중이다. 아트페어를 앞두고 해외 언론은 홍콩 아트씬의 급격한 변화를 집중 보도하며, 홍콩아트페어의 역할을 주목했다.
그는 홍콩아트페어가 일반 관객은 물론, 미술계 인사들에게 좋은 경험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시작인 거에요. 아시아와 서양이 이렇게 만나는 것은 홍콩이 처음일 겁니다. 이것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홍콩아트페어의 성장은 한국의 미술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MCH그룹에 인수된 후 처음 열리는 홍콩아트페어가 국제 미술시장의 판도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 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아트페어에 관한 뚜렷한 철학과 시대의 흐름을 읽는 렌프루의 날카로운 판단력이 돋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11홍콩아트페어 전경

2011홍콩아트페어 전경. 전시장 1층에 폴 맥카시의 거대한 작품 <대디스 토마토 캐첩 팽창형>이 설치돼 관객의 이목을 끌었다.

사운드아트, 새로운 도전의 역사

하룬 미르자 <그때와 지금의 국가관> 무반향실, 스피커, LED, 앰프, 전기회로 2011 Courtesy of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Francesco Galli)

사운드아트, 새로운 도전의 역사

글│양지윤·독립 큐레이터

왜 사운드아트인가?

새로운 밀레니엄의 도래와 함께 사운드아트는 세계의 주요 미술관들에 입성하였다. 2000년 개최된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의 〈소리의 부상(Sonic Boom)>전, 뉴욕 P.S.1의 〈소리의 바닥(Bed of Sound)>전, 도쿄 NTT ICC의 〈사운드아트: 미디어로서의 사운드(Sound Art: Sound as Media)>전을 시작으로, 2002년 퐁피두센터의 〈음향 작업(Sonic Process)>전, 휘트니비엔날레의 사운드아트 특별 섹션 등이 열린 이래 ‘사운드’가 미술계의 주요한 이슈가 되었다. 서울에서도 최근 5년간 사운드아트라는 장르를 소개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전시가 있었다.
청각예술로 분류되던 사운드아트가 시각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한 지 10여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 기간 동안 다양한 관심과 가능성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운드가 영상예술이나 미디어아트의 배경음악을 제공하는 정도에 그치는 부차적 요소가 아니라, 사운드 자체가 ‘예술적 매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와 함께 미술가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 ‘사운드아트’라고 명명되기 이전의 사운드아트는 1960년대 이후 상황주의 플럭서스 해프닝 개념미술 등 비물질적 예술장르에서 본격적으로 실험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에서 사운드 설치라는 독립된 형식으로, 또는 조각 비디오 퍼포먼스나 미디어아트와의 접합점에서 실험되는 다원예술의 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사운드아티스트는 공공미술이나 도시 디자인의 분야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건축 환경 혹은 가상의 공간이 가지는 음향의 문제들을 실험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운드아트는 여전히 그 정의와 범주에 있어 모호한 듯 여겨진다. 이는 현대예술의 이슈로 떠오른 사운드아트의 역사가 아직은 짧은 데에서 기인한다. 기존의 전시 문화나 미술관 같은 시각예술 제도가 청각예술인 사운드아트를 받아들이는 데 생소한 실험의 과정 중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이기도하다. 이 글은 사운드아트에 대한 역사적 개괄과 함께, 사운드라는 매체가 현대 예술의 이슈로 떠오르기까지의 도전의 과정을 기록한다.

자넷 카디프 <크로족의 살해> 2008 Galerie Barbara Weiss, Berlin, Luhring Augustine, New York

사운드아트의 이전과 이후

사운드아트는 미디어아트와 마찬가지로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해 왔다. 사운드를 녹음하는 기술의 발명과 음률 재현 장치인 악기의 발명 및 음향증폭 기술의 발전, 사운드 복제와 유통의 기술적 진보, 전자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변화는 사운드아트의 행위와 범주를 끊임없이 확장시킨다.
1877년 토마스 에디슨은 〈메리는 작은 양을 가졌네(Mary had a little lamb)>라는 시를 읊는 자신의 목소리를 고체 밀랍 레코드에 녹음하여 재생함으로써, 최초의 축음기 발명가가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목소리는 신체에서 분리되었고, 사운드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기록’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는 1877년 이후부터 소리를 기록하며 원할 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라스코 동굴벽화가 기원전 1만 700년 경에 그려진 최초의 시각 기록임을 떠올릴 때, 소리를 기록하는 역사가 130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시각예술과 청각예술이 지니는 테크놀로지의 의존성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상기시킨다.
에디슨이 최초의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사운드 테크놀로지는 전통적 음악의 형식에서 벗어나, 지금의 사운드아트라는 확대된 영역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1948년에 피에르 쉐페르(Pierre Schae ffer)는 비음악적 사운드를 녹음한 음향테이프를 잘라서 구체음악(Musique Concrㅤㄹㅚㄶe)을 탄생시킨다. 구체음악은 녹음용 마그네틱테이프가 등장하면서 확대되었는데, 이 테이프는 사운드를 아주 작은 비트 단위로 쪼갤 수 있고, 다시 그 조각들을 붙여서 속도와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이는 음악의 관습적 작곡 형식을 탈피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쉐페르는 연주가나 악기 없이 녹음 테크놀로지만을 이용하여 음악을 제작하는 새로운 방식의 작곡을 시도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더불어 발생한 새로운 사운드를 미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의 미래파였다. 미래파 화가인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는 1913년에 쓴 〈소음 기술(잡음예술 미래파 선언)>에서 근대화로 인한 기계 시대의 도래가 몰고 온 도시의 생활 환경 변화를 이야기하며, “고대 삶은 모두 조용하였다. 19세기에 기계의 발명과 함께 노이즈(Noise)가 탄생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는 속도 기계 도시 전쟁을 찬양하는 다분히 파시즘적인 미래주의와 함께 산업혁명의 거리 공장 광산의 소음을 예술 영역으로 받아들인다. 그에게 노이즈란 산업화되고 문명화된 체계에서 나오는 여과물이자 원하지 않는 무언가였다. 또한 이를 예술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과거의 예술에 대한 부정적 대응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아방가르드적 혁명이었다. 루솔로는 근대화가 가져온 기계 시대의 상징인 노이즈를 음악 안에서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존 케이지(John Cage)를 비롯한 현대 음악가와 노이즈 음악가들에게 중요한 미학적 영향을 끼친다.
1951년 존 케이지는 적극적인 청취를 통해 모든 ‘사운드’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과거 음악의 완성도를 위해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었던 노이즈를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침묵의 불가능성을 뒤집어 제시한 이 역시 존 케이지였다. 증폭이라는 조작을 사용한 〈4분 33초 제2번 [0분00초]>(1962)에서는 사람의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숨쉬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무언가 쓰는 소리 등 일상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노이즈를 콘택트 마이크와 앰프를 통해 대음향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음의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1)
이와 같은 새로운 움직임은 당시의 예술계에서 급진적으로 여겨졌지만, 여전히 음악적 형식 안에머물러 있었다. 루솔로는 ‘악기’라는 고정관념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존 케이지는 여전히 ‘작곡가’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 예술은 더 이상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에만 힘을 쏟지 않으며 혼합장르(퍼포먼스 포스트미니멀 비디오아트 환경미술)에 에너지를 투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탈 장르에 대한 관심은 사운드아트를 음악의 영역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서 이해하는 데 일조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캐나다의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에서 머레이 쉐페르(Marray Schaeffer)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소리를 녹음하여 문맥이 다른 공간에서 재생하는 사운드스케이프(Sound scape)를 주창한다. 작가가 스스로의 작업에 새로운 용어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연구를 상품화하려는 의도가 다소 있었지만,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는 의지는 강력했다. 이는 사운드스케이프 작가가 탈 음악적 태도를 지니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또 한 명의 사운드스케이프 작가인 뤽 페라리(Luc Ferrari)는 “현대음악은 더 이상 음악을 ‘물(物) 자체’로 볼 수 없다. 오히려 현대과학과 정치의 맥락에서, 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조건 아래서 음악을 논해야 한다”고 말하며, 음악의 영역 자체를 새로이 하고자 했다.
사운드아트가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행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는 새로운 장르로서의 인식을 공고히 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미술관으로의 입성을 가능케 했다.

김기철 <소리 보기-비> 음향장치, 봄비소리, 가변크기 1995~2012

사운드아트 vs. 음악

‘사운드아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운드아티스트이자 이론가인 브랜든 라벨르(Brandon LaBelle)는 “사운드아트는 소리에 관한 예술이다”라고 간략하게 정의한다.2) 소리를 매체로 사용하는 동시에 소리를 관심 주체로서 다루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즉, 사운드아트는 물리적 측면에서의 사운드 웨이브 그 자체와 개념적 맥락에서는 듣는 행위 및 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음악의 방해 요소로 여겨지는 노이즈나 신체가 내는 말소리와 웅얼거림, 사운드 웨이브가 퍼져나가는 공간과 사운드를 담은 CD나 MP3 파일까지 아우르며 청각예술의 형태를 무한히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초기의 많은 사운드 아티스트들은 자동으로 연주되는 악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훈련된 음악가 없이 자동 재생되는 악기 소리나 음악 재생 기계 자체의 소리가 예술이 된다는 사실은 사운드 아티스트들에게 전통적 음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오토모 요시히데(Otomo Yoshihide)가 발전시킨 ‘레코드 없는 턴테이블 연주’는 턴테이블이 이미 녹음된 소리를 충실히 재현하는 기계로서의 기능에서 벗어나, 턴테이블이라는 기계 자체가 발생시키는 노이즈가 예술 작품이 된다. 여기서 음악 재생 기계의 역할은 확장된다. 턴테이블이 내는 ‘기계의 고유한 목소리’3) 를 통해 녹음 및 재생 장치 고유의 기술적 물질적 특성에 따른 소리가 드러난다.
사운드아트가 소리로 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음악이라는 전통적이며 견고한 틀을 탈피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는 결국 음악을 해체하는 전위적인 패러다임으로 재탄생한다. 캐나다의 사운드 아티스트인 크리스토프 미곤(Christof Migone)은 자신의 작품은 음악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듯이, 대다수의 사운드 아티스트는 탈 음악적 태도를 택한다. 이로써 사운드아트는 전통적 관점에서 음악이 제공하는 청각적 즐거움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사운드아트를 감상하는 관객은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음을 참고 견뎌야 하거나, 침묵의 공간에서 자기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할 것을 요구받는다. 오랜 기간 악기를 훈련한 연주가가 들려 주는 아름다운 연주처럼 전통적 음악이 전달하는 쾌락은, 사운드아트라는 탈 음악적 개념에 의해 전복된다.
사운드아트가 갖는 탈 음악적 경향은 소리 자체에 대한 해체뿐만 아니라, 이를 해체하는 형식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음악가가 일정한 시간 안에 행해지는 연주라는 틀을 통해 즐거움을 제공한다면, 사운드아티스트는 사운드 웨이브를 공간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보다 집중한다. 기체 상태로 존재하는 사운드 웨이브는 3차원 공간 안에서 반사와 흡수, 회절을 하며, 사운드아트의 청각적 경험이란 새로운 소리와 이를 전달하는 건축 공간의 상호적인 반영을 일컫는다. 음악은 시간 예술인데 반해, 사운드아트는 공간 예술의 경향이 강하다.
자넷 카디프(Janet Cardiff)와 조지 뷔레스 밀러(George Bures Miller)의 사운드 작업은 음향을 입체적으로 재생한다. 〈40 파트 모테트(40 Part Motet)>(2001)는 스피커가 텅 빈 갤러리를 가득 메우며, 합창단원의 준비하는 목소리에 이어 장엄한 합창곡이 울려 퍼진다. 관객은 전통적으로 관객석에앉아 합창단원의 노랫소리를 일방적으로 듣는 경험에서 벗어나, 스피커 사이를 걸어 다니며 합창단원 개개인의 각기 다른 위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는 공간적 경험을 제공 받는다.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은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사운드를 입체적으로 녹음하여 재생하는 행위에 보다 본격적으로 집중한다. 필립 사마르치스(Philip Samartzis)는 마이크와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하여 일정한 공간을 연구하고, 그 환경을 녹음한다. 베니스에서 제작된 〈들어 보지 못한 공간들(Unheard S paces)>(2006)에서 작가는 그 공간을 알려 주는 청각적 정보, 공간마다 달리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운드, 소리를 녹음하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대, 하루 동안 어떻게 사운드가 변화하는지와 같은 질문을 실험한다. 마이크가 다룰 수 있는 범위의 대상을 녹음하고자 수중 청음기를 사용하여 도시의 지상이나 지하에서 사운드를 녹음하고, 이를 갤러리라는 또다른 정치적 공간으로 가져온다.
사마르치스는 갤러리 공간이 ‘중성적’인 공간이 아님을 인지한다. 갤러리라는 화이트큐브는 예술가와 관객을 일상생활로부터 낯설게 하며, 이러한 갤러리의 벽은 예술작품에 또 하나의 문맥을 제공한다.4)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은 일상의 3차원 공간에서 존재하는 사운드를 포착하며, 이를 또 다른 공간 안에서 재현한다. 이는 일상에 존재하는 사운드를 그대로 차용하여 예술로 문맥 바꾸기를 한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뒤샹적’이다.

김소라 <Don’t ask me why> 나무, 페인트, 오디오 사운드 2010

한국의 사운드아트, 홍대 클럽에서 삼성미술관까지

한국에서 사운드아트는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서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시가 아닌 사운드 퍼포먼스나 이벤트의 형식으로 홍대의 카페나 클럽에서 먼저 소개되었다. 2003년 신촌에 위치한 ‘러쉬’라는 장소에서 시작된 〈불가사리>라는 이름의 음악회는 포크와 인디 음악, 노이즈를 포함하는 실험적 즉흥 음악 연주회였다. 밴드 아스트로노이즈로 활동하던 아티스트로 구성되어 2005년에 시작한 ‘릴레이(Relay)’의 전자 즉흥 음악 연주회는 사운드를 전자적 물질로서 실험한다. 릴레이의 기획자이자 사운드아티스트인 류한길은 출판 레이블인 〈매뉴얼(Manual)〉을 설립하여 실험적 음반과 독립 출판물들을 발표한다. ‘훈련된 음악가’가 아닌 사운드아티스트들과는 달리, 현대음악 분야에서 전문적 음악 교육을 받은 장재호가 속한 태싯그룹은 현대음악과 미디어 퍼포먼스의 교차점을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한편 2000년 서울미디어비엔날레 등의 영향으로 한국 아트씬에서는 현대미술, 특히 미디어 설치,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에서 사운드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각예술의 부차적 매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퍼포먼스 형태로 산발적으로 행해지던 사운드아트 관련 행사들은 미디어아트의 일부로 주로 소개되다가, 2006년 이후 서울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사운드아트 관련 페스티벌과 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인사미술공간의 〈랜드스케이프 뮤직 프로젝트>(2006)와 쌈지스페이스의 〈사운드아트 101>(2007)은 새로운 매체에 비교적 열린 태도를 취했던 대안공간에서부터 사운드아트를 받아들이기 시작함을 의미했다. 또한 2007년 사운드아트코리아의 기획으로 토탈미술관과 송원아트센터 열린 〈사운드 이펙트 서울>은 미술관에서 전시 형식으로 사운드 설치 작품을  소개한 첫 번째 국제 사운드아트 행사였다. 총 3회의 행사를 통해 〈사운드 이펙트 서울>은 사운드아트를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라디오아트와 사운드스케이프 등 사운드아트의 특정 주제들을 다루며 국내 사운드아트의 저변을 확대했다.
2011년에 이르러,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있었던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개인전 〈소리를 보는 경험(What You See Is What You Hear)>에서는 LP레코드판을 사용하여 즉흥적인 소음 음악을 실험하는 턴테이블 작업이나, 레코드 표지나 악보같이 소리를 대변하는 이미지를 사용한 오브제 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소리를 중심으로 편집한 작업에서는 사운드와 시각이 어떻게 관계하는 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드러났다. 또한 올해 열린 존 케이지 탄생 100주년과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엑스 사운드>(3. 9~7. 1 백남준아트센터)는 존 케이지와 백남준이 사운드아트의 개념화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 주며, 젊은 사운드 아티스트들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이렇듯 서울의 카페나 클럽에서 이벤트성으로 행해지던 사운드 퍼포먼스는 대안공간을 통해 전시의 형태로 미술계에 수용된 이후 삼성미술관과 같은 메이저 미술관까지 소개되는 양상은 지난 10년간 국내의 사운드아트가 걸어 온 빠른 변화의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태싯그룹 <훈민정악 2009>

사운드아트를 환영하는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의 디렉터인 찰스 에셔는 이제 현대미술관은 문학이 아닌 문학, 영화가 아닌 영화, 철학이 아닌 철학, 음악이 아닌 음악을 흡수하는 ‘장’이 되었음을 이야기한 바 있다. 콘서트홀에서 공연되지 못한 음악,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는 비디오아트, 극장을 찾지 못한 현대 무용이 현대미술관에서 흡수되어 소개된다. 회화 조각 같은 식의 과거 예술 매체의 장르 구분이 모호해진 현재, 미술관이 이러한 매체 통섭의 중심에 서고자 함을 시사한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이는 현대예술이 가져온 반미학적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시작된 근대 모더니즘을 해체하려는 반미학적 시도는, 모더니스트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집착을 반대하였다.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라는 글에서 말하는 대로,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반미학의 흐름은 예술이 지닌 가시적 사물의 재현물로서의 지난 역사를 떠나게 한다.
일상의 소음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인 행위는 예술의 본질 자체에 대한 전복적 시도다. 사운드아트가 음악이 주는 관습화된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버렸다면, 미술관은 시각예술의 고유한 ‘눈의 즐거움’을 버렸다. 사운드 아티스트들은 현대 시각예술 분야의 시각적 강박을 배제한 상태에서 새로운 독자적 미학을 개척할 수 있다.

<사운드 이펙트 서울〉라디오 진행 장면.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DJ 윤사비, 한배에서 난 개새끼들, 부추라마 2008 스페이스헛

사운드아트의 과제

하지만 애초에 시각예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청각예술을 펼치는 데에는 현실적 문제점이 따른다. 방음을 고려하지 않고 지어진 갤러리나 미술관에서는 각기 다른 사운드아트 작업의 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미술 전시로 보자면 두 개의 다른 회화 작품을 겹쳐서 건다는 것은 작가의 특별한 의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인데 반해, 한 공간 안에 여러 개의 사운드 작품들이 들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운드 웨이브를 3차원적으로 느껴지는 청각적 경험을 위해서는 헤드폰 대신 스피커를 사용해야 하지만,  완벽하게 방음되지 않는 현재의 미술관 시설로는 역부족이다. 또한 여전히 미술관에서 사운드아트를 접한 관객은 볼거리가 없음을 불평한다. 그 만큼 사운드 아티스트의 창작 활동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한국에서 사운드아트가 미술계로의 진입을 시작한 현재, 사운드아트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데 뒷받침이 될 만한 인프라나 시스템은 물론 그에 대한 인식조차 부족하다. 여전히 미술대학에서는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 예술장르를 벗어난 사운드아트나 퍼포먼스를 독립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비물질적 예술의 영역을 담론화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와 미래를 ‘탈 장르와 통합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말이다.
어느새 1세대 사운드 아티스트로 볼 수 있는 작가들이 중견작가들이 되었으며, 많은 신예 작가들이 현대미술에서 사운드의 비물질성과 반미학적 특성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모색하고자 한다.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역사가 너무나 깊어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을 찾기 힘든 전통적 장르에 대한 관심은 줄어 들기 마련이며, 반면 그 역사가 짧은 미디어아트나 사운드아트는 먼저 깃발을 꽂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실험의 장이 된다. 지금, 사운드아트는 이전과는 다른 도전의 순간에 직면해 있으며,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다음 세대의 예술과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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