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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2.02

Abstract

2012년『동방(東邦)의 요괴(妖怪)들』의 4번째 행진이 시작됐다! 신진작가 발굴육성 프로젝트 『동방의 요괴들』이 2009년 한국미술을 아시아와 세계의 중심으로 이끌어 나갈 '요사스런 귀신(작가)'을 뽑고자 출범한 지 벌써 4년이 됐다. 그동안 미술저널의 사회교육적 사명 의식으로 신진작가 '발굴'과 더불어 '육성'의 대안적 프로모션을 실천하며 한국 미술계에 요란한 돌풍을 일으킨『동방의 요괴들』. 이제는 한국미술의 '젊음'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올해는 총 260명의 '요괴들'이 탄생해, 2009년 241명, 2010년 461명, 2011년 372명에 이어 1,300여 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그 가운데 외부 심사위원의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선정된 BEST21 작가들의 작품을 생생한 화보와 함께 소개하며, 작가 노트와 인터뷰, 본선 심사위원의 '선정 이유'도 곁들인다. 또한 올해 공모 현황과 지난 4년 간의 변화 추이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지난 2009~2011년 '동방의 요괴들'과 그 전신인『New Face』출신 기성 작가들까지, art in culture가 배출한 작가들의 활약상과 체험담을 싣는다.

Contents

01    표지  한운성 〈매듭〉 캔버스에 유채 193.9×130.3cm 1986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김복기

38    핫피플  김홍희
    미술관을 개혁하는 왼손 역할을  장승연

42    프리즘
     ‘위대한 지휘자’ 같은 미술관장을 바란다  장동광
    예술의 천국 뉴욕? 99%의 지옥!  호경윤

46    오후의 아틀리에
    삼청동의 새벽달을 보며  박상희

64    포커스
    텔미텔미: 한국-호주 현대미술 1976~2011展  양은희
    윤동천展|여의도비행장에서 인천공항까지展  정현
    박진영展|화덕현展  김현호

77    특집 동방요괴 2012
    [1] Best21 Artists
    [2] 리포트, 공모전 심사평
    [3] art in culture가 뽑은 작가들

110    스페셜 프리뷰 
    2012 전시기상도  김재석

119    작가 인터뷰  한운성
    ‘지속 vs 변혁’의 조형론  김복기

128    아티스트 인사이드
    [1] 표영실_소소한 마음을 돌보다  김수영
    [2] 김상연_나를 드립니다  선산

136    아트포럼
    [1] 오늘날, ‘큐레이팅’이란 무엇인가  이정연
    [2] ‘리서치’로 미술작품이 탄생될 때  고동연

149    테마스페셜  2012마을미술프로젝트
    ‘지붕 없는 미술관’에서 만나요!  김해곤

160    암흑물질
    네이버는 ‘아트’를 좋아해  장승연

165    브랜드뉴
    Ka-talk Archi-talk  김보란

166    전시 리뷰
    포스트모더니즘: 양식과 파괴 1970~1990
    Being on the Move: 이주를 사유하다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김효|송은미술대상
    김덕기|파동, The Forces Behind
    안혜빈|김화현 이민하

174    전시 프리뷰
    정종미|작업의 정석|2012화랑미술제|문지하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Q&O|공명|Link Up

182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네이버는 ‘아트’를 좋아해! 미술 검색부터 뮤지엄 뷰까지

네이버 '미술검색' 장면

네이버는 ‘아트’를 좋아해! 미술 검색부터 뮤지엄 뷰까지

글|장승연 기자

네이버는 NHN사(1999년 설립)에서 운영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검색 포털 웹사이트다. ‘네이버’라는 이름은 ‘항해하다’라는 뜻의 ‘Navigate’와 ‘~하는 사람’의 접미사 ‘er’이 만나,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발음상으로 이웃, 친구를 의미하는 ‘Neighbor’와 같아서 ‘인터넷 항해를 도와 주는 친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현재 회원수는 약 3,400만 명, 1일 방문자수가 1,700만 명 정도로 통계상으로는 국내 인터넷 사용자의 약 50%가 네이버를 이용한다고 한다. ‘인터넷 속 친구’라는 이름이 가히 무색하지 않은 수치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특정한 날짜에 맞춰 네이버 홈페이지에 독특한 로고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가깝게는 지난 구정 연휴에도 등장했다. 연휴 첫날 네이버 홈페이지 상단 왼쪽의 로고 부분에는 우리나라 옛 그림에 나오는 친숙한 인물들이 한가롭게 연을 날리거나 세배를 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움직이는 고전 그림’이 왠지 친숙하다 싶더니, 역시 한 쪽 끝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다. 바로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이 함께 한 ‘네이버 로고 아트 프로젝트’다.

작가 이동기의 네이버 스페셜 로고

로고아트프로젝트‘작가와의 깜짝 이벤트’

http://logoartproject.naver.com
네이버의 ‘로고 아트 프로젝트’는 명절이나 기념일 등 특정한 날에 현대미술 작가가 제작한 특별한 로고를 선보이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작업이다. 첫 시작은 7월 24일 등장한 로봇태권브이 로고로, 이는 작가 이동기가 로봇태권브이 25주년 기념일에 맞춰 제작했다. 그 뒤를 이어 12월 7일 대설(大雪)에 사진가 배병우의 눈 내린 풍경 사진이 등장했고, 25일 크리스마스에는 중견화가 황주리와 2012년 1월 1일 새해 첫날 이종상 화백의 그림이 등장했다. 그리고 최근 1월 21일 구정 연휴가 시작되면서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의 스페셜 로고가 네이버 홈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로고 아트 프로젝트의 모토는 바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예술의 즐거움’이다. 즉 네이버는 현대미술 작가와 함께 만드는 깜짝 이벤트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예상치 못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 주고, 나아가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미술 정보를 제공한다. 즉 이벤트적이고 친화적인 방식을 통해 이용자들이 현대미술을 편안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물론 스페셜 로고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종 타 사이트인 ‘구글(www.google.com)’에서 먼저 시작됐다. 하지만 좋은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네이버는 색다른 차이를 가미했다. 웹디자이너가 특정 날짜에 맞는 이슈로 로고를 디자인해 표출하는 구글과는 달리, 직접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그 안에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이슈를 담아 낸 것. 즉 ‘토종 검색 포털 사이트’답게 한층 한국 정서에 맞게끔 ‘네이버’ 식으로 풀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이 스페셜 로고의 경우,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의 호응과 관심이 꽤 뜨겁다. 실제로 배병우의 스페셜 로고가 표출된 당일에는 작가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 순위 3위에 오를 정도로 큰 반응을 얻었다고 하니 말이다.

2011화랑미술제에 설치된 미디어 부스 장면

미술검색 ‘정보부터 이미지 디테일까지’

http://arts.search.naver.com
과연 언제부터 네이버는 ‘미술’을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게 된 것일까. 이는 네이버의 본업인 ‘검색’ 기능과도 관련된다. 네이버는 이용자들이 때마다 요구하는 정보의 트렌드나 변화 등을 가장 근접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 결과’는 해당 날짜와 시간에 한국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이슈로 통용되기도 하지 않는가. 심지어 《네이버 트렌드 연감: 검색어로 읽어 보는 대한민국 트렌드》도 발간한다. 이처럼 네이버가 보유하게 되는 검색어 통계는 시대의 트렌트와 이슈를 분석하는 주요 자료로서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네이버 측의 설명에 따르면 ‘네이버와 미술과의 만남’은 이용자들의 요구와 함께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네이버 이용자들의 미술 관련 검색 횟수가 부쩍 늘었고, 이렇게 미술 저변이 확대되는 시점에서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재고하게 된 것이다. 초반엔 주요 검색어의 대부분이 서양 명화나 작가에 관한 것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국내 미술 관련 용어의 검색 비중이 높아졌다. 따라서 네이버에서도 이용자들의 요구에 맞춰 다양한 미술 관련 서비스들을 점차적으로 기획 실행하며 보폭을 맞추게 됐다.
‘네이버 미술검색’ 역시 이용자의 편의를 돕는 미술 서비스 중 하나다. 현재 약 14만 5천 여 건의 작품 이미지를 검색할 수 있는데, 작가별 사조별 연대별 등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검색 가능하다. 예를 들어 미술검색 창에서 ‘이중섭’을 찾으면 약 170여 점의 작품 이미지와 캡션, 작품 설명 등이 나온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이미지 확대 기능이다. 고화질 이미지가 제공되는 작품의 경우는 확대 기능을 사용하여 그림의 디테일까지 관찰할 수도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몇몇 유명 작가를 제외하고는, 서양미술사 명화 작품에 비해 한국 고미술 및 근현대미술 검색 자료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사실이다.
네이버 미술검색은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합을 통해서 사용권이 확보된 외국 작품 12만 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 국내 갤러리 등을 통해 제공 받은 한국 미술 작품 7천여 점을 서비스하고 있다. 사실 서양미술 작품의 비율이 현저히 높은 이유는 아직까지 정확한 저작권 문제가 정립되지 않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 작품의 경우 네이버에서 유럽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 저작권 관리 단체인 RMN과 장기 계약을 체결하여 사용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다양한 미술사 속의 명화들을 보여 줄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미술관 소장품일지라도 저작권이 작가 혹은 제3자에게 있는 경우가 많은데다, 이를 관리하는 통합적 시스템 역시 구축되어 있지 않아 빠른 진행이 어렵다고 한다. 역시 ‘미술’ 분야에 있어 얼마나 더 폭넓게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는가에 대한 관건 중 하나는 바로 저작권 문제가 아닌가 싶다.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 장면

네이버캐스트 ‘전문가가 펼치는 웹진’

http://navercast.naver.com
네이버의 메인 홈페이지는 뉴스 오픈 테마 등 다양한 ‘캐스트’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네이버캐스트는 문화 생활 과학 인물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네이버가 함께 만드는 생활 문화 콘텐츠 서비스이다. 쉽게 말하면 네이버에서 기획한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웹 속의 잡지’라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미술 관련 기사를 연재하고 있는 섹션이 바로 ‘오늘의 미술’이다. ‘명화 속 성서 이야기’‘서양미술 산책’‘인상파 아틀리에’‘전시회 산책’‘테마로 보는 미술’‘한국미술 산책’‘한국의 일러스트 작가’로 구성되어, 고전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미술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전문가의 기사를 전달하고 있다. 아트인컬처 역시 ‘오늘의 미술’에 필자로 참여 중이다. 네이버캐스트가 처음 오픈하던 2009년 1월부터 약 1년 간 ‘한국인-미술가’편을 연재 진행했으며, 지금은 ‘한국미술 산책’에서 한국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네이버캐스트의 기사는 네이버 이용자들을 위한 ‘볼거리이자 읽을거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이 작성한 검색 정보로도 활용가치가 있다. 더욱이 네이버캐스트에서는 종종 전시회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는 엄청난 홍보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네이버가 미디어 후원사로 참여한 KIAF 행사 기간 동안 네이버 화면을 통해 행사 정보와 주요 작품 등을 소개했는데, 실제 관람객 수가 예년에 비해 확연히 증대할 만큼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전한다. 물론 이러한 효과는 네이버캐스트를 통해 소개되는 작가와 작품에도 해당된다.  
최근엔 이용자 참여형 서비스인 오픈캐스트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이용자가 블로그 등을 이용해 관심 있는 정보를 수집하고 직접 캐스트를 발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에 최근 김달진미술연구소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각종 정보들이 다양한 캐스트 형식을 통해 웹 공간에서 순환된다. 정보가 고이지 않고 흐르는 온라인에서는 그야말로 누구든 발행인이자 이용자가 될 수 있는 셈이다.

2011KIAF의 아트월 설치 장면

뮤지엄 뷰 ‘실제 미술관에 온 것처럼’

http://map.naver.com
IT의 발달로 온라인 상에서도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 기반이 구축되면서, 정보를 취하고 활용하는 양상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 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 해도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마치 방문한 것처럼 이동하며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이 신기한 서비스가 바로 ‘뮤지엄 뷰’다. 이는 미술관의 전시실을 고해상도 파노라마 영상으로 촬영하여 3차원으로 구현한 서비스로, 웹 상에서 클릭만으로도 고화질의 전시실 실제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이는 실제 거리 촬영과 지도 서비스에 활용된 ‘거리뷰’ 서비스 기술을 도입하여 촬영한 것인데, 무엇보다 사진의 해상도가 달라졌다. 사진 한 장당 해상도는 그 용량이 8억 픽셀로, 화면을 확대하여 전시장 전경뿐만 아니라 개별 작품을 확대해 상세하게 관람할 수 있다. 각 유물을 촬영한 이미지는 2천 4백만 화소의 이미지를 50여 장으로 부분 촬영하여 연결했다고 하니, 이미지 확대 크기 범위가 정말 어마어마해진다.
뮤지엄 뷰 서비스의 첫 시작은 지난해 11월 국립고궁박물관이었다. 이후 9월 초부터 진행한 국립중앙박물관의 6개관 52개실의 촬영이 완료됨에 따라  이제 컴퓨터 모니터로 생생히 관람할 수 있다. 네이버 지도 홈페이지로 들어가면, 클릭만으로 박물관 안을 돌아다니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전시장과 유물들을 일일이 볼 수 있다. 또한 현대미술 관련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텔미 텔미>의 뮤지엄 뷰 서비스를 오픈했다.
물론 뮤지엄 뷰보다 먼저 시행된 ‘구글아트프로젝트’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버 측은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구글은 글로벌 사이트인 만큼 해외 유명 미술관 및 박물관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네이버는 좀 더 한국의 콘텐츠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교육적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있다. 가보지 않고도 전시장과 각종 유물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 학교에서 뮤지엄 뷰를 학습교재 및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여기에 네이버는 전시장과 유물의 정보 설명 기능을 부가하며 더욱 ‘친절한 네이버’가 됐다. 현재 전시실이나 확대한 유물이나 작품을 클릭하면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설 및 정보가 나오는데, 앞으로 작품설명 음성서비스도 추가되어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뮤지엄 뷰의 경우, 무엇보다도 중요한 아카이브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미술계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텔미 텔미>전과 같이 일정 기간만 진행되는 전시 장면도 추후에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네이버는 한국의 여러 국공립 및 사립 미술관과 박물관들을 시작으로, 전시장에서 나아가 다양한 문화재 역시 생생히 기록할 계획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내의 7개 문화유산 역시 뮤지엄 뷰를 통해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2차원을 넘어 3차원 디지털이미지로 우리의 문화 유산과 다양한 작품을 기록 보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술행사 후원과 다양한 프로젝트

‘오프라인에서 스마트폰까지’
‘미술의 대중화, 정보화, 저변확대’의 목표를 지향하는 네이버의 다양한 미술 관련 서비스는 일단 그 자체로 전문가부터 대중 모두에게 유용하고 실용적이다. 한편 역으로 이러한 서비스와 네이버 홈을 통해 작가나 작품 등 미술 정보가 노출되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가 있다. 더욱이 각 정보들은 미투데이 라인 블로그 등 다양한 SNS서비스를 통해서 연계 활용되기 때문에 그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결국 콘텐츠나 이용자 간의 시너지 효과는 구르는 눈덩어리처럼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무한한 온라인 공간마저도 네이버에게는 좁기만 한가 보다. 이제 네이버는 온라인 상의 친구로만 머물지 않고, 직접 이용자들을 찾아서 오프라인 상에서 마주하기도 한다.
2011년 9월 KIAF 행사장에 특별한 이벤트가 펼쳐졌다. 작가의 작품이 인쇄된 거대한 포토월이 세워진 것이다. 키아프를 찾은 사람들은 이동기의 아토마우스, 김동유의 마릴린 먼로, 배병우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함께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서 각 작가들의 대표작 및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포토월은 2011KIAF의 공식 후원사인 네이버가 기획한 것이다. 이렇게 네이버는 화랑미술제, KIAF 같은 아트페어를 비롯한 미술 행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행사의 공식 후원사로서 관람객들을 찾아 직접 현장을 찾기도 한다. 특히 올해 화랑미술제에서는 관람객들이 네이버 미술검색을 통해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QR코드를 설치하여 ‘스마트폰을 활용한 아트페어 관람’을 주도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가나아트갤러리와 손을 잡고 서울스퀘어 미디어캔버스에서 환경보호를 위한 연말 나눔 캠페인 ‘Be Green, Go Green!’을 진행하며, 서울 도심에도 특유의 녹색을 등장시키지 않았던가.
분당에 위치한 네이버 사옥 ‘그린팩토리’에는 특별한 도서관이 있다. 약 300평 규모로 설립된 디자인 및 IT 전문도서관 ‘라이브러리1’이다. 이 공간은 누구든지 소장도서 2만 여 권을 열람할 수 있도록 오픈되어 있다. 이색적인 점은 이곳에 네이버의 인기 콘텐츠 ‘지식인의 서재(http://bookshelf.naver.com )’를 통해 사회 유명인사들이 추천한 책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전시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온라인의 연재 콘텐츠가 직접 오프라인에서 실용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네이버가 보여 주고 있는 거침없는 추진력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보자면, 곧 미술계에도 이 녹색 이웃의 기획으로 더욱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문득 생긴다. 물론 네이버가 다루는 문화예술 영역이 비단 미술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분명 지금 네이버는 아트를 만나고 있다. 그것도 다양하고 깊이 있게 말이다.

한국과 호주가 나눈 미술의 대화

브룩 앤드류 <순환회로: 세계의 작동 모델> 벽화, 네온 형광등 가변크기 2008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2011

한국과 호주가 나눈 미술의 대화

글|양 은 희

한국과 호주의 현대미술을 소개한 전시 <텔미 텔미: 한국-호주 현대미술 1976~2011>은 기획의도 면에서는 다소 특이한 반면, 전시장에 펼쳐진 작품의 면면에서는 매우 주목할 만한 전시였다. 이 전시를 주최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보도자료와 도록에 따르면 한국과 호주가 수교를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2011년을 맞아 양국의 예술적 교류에 초점을 두고 이 전시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시드니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글렌 바클리와 국립현대미술관의 김인혜 학예사가 소속 미술관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자국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정했고, 먼저 지난해 호주에서 전시를 가진 후 한국에서 이번 전시를 연 것이다.
근자에 들어 국교를 수립한 두 나라는 그간 서로 문화 교류가 많았던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 일변도로 이루어졌던 미술 소개의 기회가 호주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라도 이번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양국의 외교부가 적극 후원한 이 전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공립 미술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미술관 내부의 자발적 노력이 아니라 양국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고자 하는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시를 기획해야 하는 미술계의 다소 서글픈 자화상을 보여 준다.

캔 언스워스 <돌집(폴케를 따라서)> 강변의 돌, 금속 200×78×78cm 2011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한국과 호주가 공유하는 기억과 역사

전시를 기획한 두 큐레이터가 보여 준 ‘대화’의 결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권이 겪은 역사 기억 환경을 토대로 현대미술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해석의 맥락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해석의 맥락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대미술을 다루는 평론가와 큐레이터가 항상 추구하는 가치이며, 미술의 의미를 고정관념에서 구출시켜 폭넓게 확장시키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는 20세기 해석학의 대가였던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시각과도 상통한다. 즉 이미 존재하는 미술작품의 의미는 대화를 통해서 극대화되고, 그 작품을 만든 인간의 존재는 대화를 통해 드러나며, 언어의 교환을 통해 의미는 보다 더 분명해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미술작품은 항시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으며, 그 의미가 고갈되지도 않는다.
그럼 <텔미 텔미>전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먼저 두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이 전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은 단일민족을 지향해 왔던 국가이자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지배 아래서 근대화를 경험했다. 이후 해방을 거쳐 분단된 갈등 지역으로 남았으며, 남한은 자본주의와 소비문화를 수용한 후 첨예한 소비문화의 실험실로 접어들었다. 반면, 호주는 원래 거주하던 원주민의 땅을 영국식민지로 흡수한 후 유럽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았다. 지금도 영국연방 체계에 속한 국가이지만 그 과정에서 200개가 넘는 소수 언어를 가지고 있던 원주민 부족들은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17개 정도 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호주 문화에서 유럽인과 유럽 문명은 주류이며, 원주민의 목소리는 주류로 편입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원주민 출신의 작가 브룩 앤드류가 사용한 위라주리 부족의 방패 문양, 원주민들이 그리던 수피화 기법을 활용한 랄라라 가이야비자의 <무제(여행하는 바위)>가 보여 주는 은밀한 지시문, 에밀리 캐임 캔와리의 자신의 원주민 촌의 기억을 표현한 추상화 등은 이강소 이우환 곽인식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정신적 추상 작업과 어우러져 전시됨으로써 정신적 전통과 추상적 형식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시각적 형식 뒤에 아픈 역사적 기억을 씁쓸하게 가리고 있다. 나는 여기서 한국 6.25전쟁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호주의 군인들과 이 전쟁을 통해 20세기 이념적 정치적 구도에서 열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에 대한 추모의 제스처로, ‘전쟁/갈등’이라는 주제를 어딘가에 추가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갈등의 흔적은 사실 양국 문화의 근간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한-호 관계를 맺은 촉매제이자 이 전시를 열게 한 궁극적 기원이기 때문이다.(1951년 경기도 가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호주 왕실3대대는 영연방 제27여단 소속 군인들과 함께 중공군과 싸웠으며, 결국 198명 전사, 38명 실종, 892명 부상이라는 뼈 아픈 결과를 얻었고, 호주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왕실3대대를 ‘가평대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루이스 위버 <놀라워> 고농축 발포 고무, 코바느질용 양털 자수용 면실, 호두나무, 세라믹 크롬 ABS 플라스틱 등 230×500×366cm 2005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2011

국제 미술계를 횡단한 한-호 작가의 만남

<텔미 텔미>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화는 1960년대 이후의 개념적 현대미술을 매개로 전개되는 지점에서 벌어진다. 한국과 호주는 모두 이 시기부터 서양식 현대미술을 완전히 수용하여 형식주의 미술을 극복한 역동적인 실험미술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이 전시가 출발점으로 삼은 1976년 경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개념미술이 양 국가에도 도달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 전시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이안 번은 호주 출신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아트 앤 랭귀지(Art & Language)’ 그룹에 가담한 주요 멤버이자 초기 개념미술의 정초에 기여한 작가로 1977년 호주로 돌아와 활동했다. 한국은 1960년대 이승택의 실험적 작업에 이어, 1970년대 들어 이건용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등을 중심으로 개념적인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복영 등의 이론가가 주축이 되어 조셉 코수스, 메를로-퐁티, 이우환 등 미국 유럽 일본에서 전해진 이론적 태도를 흡수하면서 활동했던 ST는 그 대표적인 그룹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출신 국가를 떠나 국제미술계를 광폭으로 행진한 작가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는데, 그러한 환경에 힘입어 예술가의 작업을 통한 ‘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호주의 이안 번이 영국과 미국을 유랑하면서 활동했고, 한국의 백남준과 이우환은 일본 독일 미국 등을 유랑하면서 작업한 작가들로 이들이 바로 이 움직이는 국제미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점에서도 양국은 유사점을 갖는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들은 1976년에 열린 제2회 시드니비엔날레에 출품한 한국과 호주 작가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시 백남준이 샬롯 무어맨과 함께 호주를 방문했던 기록을 토대로 이 전시의 대화 고리를 찾는다. 이 시기를 ‘포스트 오브제’ 시기로 명명하면서, 당시 큐레이터인 탐 맥컬로가 기획한 ‘태평양 트라이앵글’이라는 지리적 틀 안에 동아시아와 호주의 작가들을 담아 낸 이 전시를 토대로 당시 작가들이 전시했던 작품을 본 전시의 중심에 둔다. 탐 맥컬로는 당시 호주 내에서 밀두라조각트리에날레에서 형식주의 작업을 극복하고 설치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소개하여 유명해지던 차였다. 그는 회화 중심적 시각으로 아시아 미술을 소개했던 1973년 시드니비엔날레의 한계를 극복하고 밀두라에서 추구했던 입체와 설치 위주의 작업들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로 기획된 전시에는 일본의 후지코 나카야, 독일의 요셉 보이스 등과 함께 이우환 곽인식 심문섭 이강소의 작업이 ‘국제미술의 최신 형식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역사와 문화를 넘어, 예술의 보편적 가치

출발점은 역사적 전시와 사건이지만, 그로부터 얻은 힌트를 바탕으로 보다 확장된 시각을 보여 준 <텔미 텔미>전은 위에 언급한 작가들 외에도 예술 개념의 확대를 실천한 양국의 작가들을 대거 소개하고 있다. 정령주의와 미디어의 소통을 이루어 낸 박현기,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승택의 작업과 전통적 한국의 정가와 탱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수경 등 여러 세대의 한국작가들을 소개했다. 마찬가지로 일상 전통 치유 등의 주제를 다룬 뉴엘 해리, 로잘리 개스코인 등의 작업도 전시되었다.
이러한 작업들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양국의 작가들이 유사한 주제를 선택하고 유사한 형식을 취하면서 현대미술이라는 담론을 구현할 때 추상적 형태와 관념을 통해 그 유사함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용 등장인물 재료 매체를 통해 각자의 문화적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1960년대 이후 국제화, 글로벌화를 겪고 있는 지구상의 인간이 서구 모더니즘의 수혜를 받은 지역에 거주할 때 그 역사적 변화 속에서 보편적 가치와 개념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특히 그 공유된 가치를 구체적인 현상과 문화적 변화를 통해 필연적으로 실천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예술은 한 문화의 지적 산물이자 의식과 무의식 활동의 산물이지만, 역사적 문화적 영향과 이동의 연결고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지속 vs 변혁’의 조형론

<열두 개의 사과> 캔버스에 유채 324.2×227.3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지속 vs 변혁’의 조형론

글│김복기·본지 발행인

한운성은 한국 미술계에서 ‘교수 작가’의 길을 걸어 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미술 분야에서는 최초로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단행했으며, 귀국 후에는 공모전에서 큰 상을 잇달아 수상하는 등 단숨에 유망작가로 급부상했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의 탄력을 받아 3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대학 교수에 올랐다. 한운성은 미술계에서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거침없이 달렸다. 이후 그는 교수와 작가로서의 덕목을 어느 한쪽 부족함 없이 다 갖추고, 오로지 강의실과 작업실만을 묵묵히 지켜 왔다. 그의 뛰어난 교육자적 자질과 성실한 작가적 태도는 우리 미술계, 특히 회화와 판화 부문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겼다. 이즈음, 한운성이 한국미술에서 차지하는 작가적 위상, 작품의 비평적 쟁점을 짚어 보고자 한다.
한운성 예술 40년을 둘러싼 비평적 논제는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미술의 여러 양식적 부면들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그의 작품은 어느 극단의 양식에 치우쳐 있지 않고 언제나 ‘열려’ 있었다. 양식의 균형 절충 혼성 중립 그 자체가 한운성 예술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분석의 잣대를 들이대기가 만만치 않다.

<과일 채집> 캔버스에 유채 각 100×100×10cm 1999

‘교수 작가’의 길, 정년을 마치다

한운성은 대학 시절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세례를 받았지만, 이후 추상미술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구상미술의 길을 찾았다.(여기서 편의상 ‘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 용어 자체가 논쟁 지점이다. 1970년대 말부터 한국 미술계에서 ‘신형상’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지만, 이것도 프랑스의 신구상(Nouvelles figuration)과의 혼선을 피할 수 없다.) 한운성의 구상은 1970년대 미국의 팝아트와 포토리얼리즘에 유전적 젖줄이 닿아 있다. 그러나 한운성은 구상을 견지하면서도 시각적 구현에서는 차가운 이성의 통제를 요구하는 추상 조형(공간, 구성, 구조, 시점)을 결코 버린 적이 없다. 그는 주도면밀한 프리 프로덕션(판화나 드로잉은 물론이고 사진을 찍어 컴퓨터로 배열하고 디지털 프린트를 하는 과정)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한운성의 작품에는 확실히 ‘장인적인 기질과 지적인 연출’ 혹은 ‘구상과 추상의 교집합’ 이라는 명제가 늘 잠복해 있다. 그러니까 구상이냐 추상이냐는 구분 자체가 큰 의미를 띠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본다면 한운성의 작품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과의 ‘단절’이라기보다는 그것의 ‘극복 혹은 대안’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운성은 작품의 형식 못지않게 내용(메시지)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작가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의 현재 삶이 어떤 모습인가, 결국은 그런 것을 드러내 주는 사람이 예술가다. 그래서 내 작업에는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상황, 또는 실존적인 모습, 그런 주제가 작품에 일관되게 깔려 있다.” 이제, 한운성의 예술적 지향점이 선명하게 다가오는가 싶다가도, 여기에서 또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상황과 실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또 어떤 표현 방식으로 풀어내는가.
한운성은 나의 문제로부터 출발해 점차 주변의 세계로 작품 주제를 넓혀 왔다. 요컨대 현대사회의 위기, 현대인의 갈등, 혹은 사회적 난제에 대한 경고 등 한 지식인의 ‘올바른’ 시선을 작품에 정직하게 투사했던 것이다. 문제는 주제를 표현하는 형식의 문제다. 한운성의 구상미술은 온전한 서술 구조를 거부한다.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을, 직유법보다는 은유법을 끌어들인다. 그는 화면이라는 가상공간에 또 하나의 가상공간을 장치하길 좋아한다. 요컨대 실체와 허상의 이중구조(혹은 다중구조)를 즐겨 구사한다. 이 허상의 표현 방식은 적막한 배경,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무대 같은 장치, 창문 같이 뚫은 레이어, 디지털 기법의 변형과 조작 등으로 다양하게 이어졌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 양 축 모두에서 들끓고 있는 이 치열한 ‘이원론적 내부 투쟁’. 지속과 변혁이 교차하는 조형론, 이것이야말로 한운성 예술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매듭 3부작> 100×200cm, 150×150cm, 110×200cm 198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87

“작품의 질은 양이 결정한다”

art 이번 인터뷰를 위해 작가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가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 여행에서 돌아온 지 2, 3일 뒤의 일이었다. 좀 이른 시간인가 싶어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남편이 이미 작업실로 갔다는 것이다. 좀 놀랐다. 이 작가는 휴일도 없는가.
Han 강의하는 날을 빼고는 매일 작업실에 간다. 명절 연휴 때면 더 좋다. 3일간 연이어 작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금, 토, 일요일’을 ‘금, 금, 금요일’로 작업실에서 사는 것이 좋다. 과학자들이 휴일도 없이 연구실에서 파묻혀 사는 심정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들은 수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지만, 매번 실험에 임할 때마다 새로운 발명의 기대를 잔뜩 품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작업실로 발길을 옮길 때면, 오늘은 정말 ‘걸작’을 만들어낼 것 같은 벅찬 기대를 안고 간다.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어제 그리던 그림에 잽싸게 눈을 돌리면, 희열에 젖을 때도 있고 실망에 빠질 때도 있다. 좋은 작품의 가능성이 보이면 곧바로 작품 앞에 털썩 앉고, 그렇지 않으면 청소부터 시작한다. 작품이 잘 될 때면 집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이 캔버스 화면으로 가득 찬다.
art 한운성은 정년퇴임식 때의 짧은 인사말 중에 그동안 자신이 제작했던 작품 수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유화 판화 드로잉을 통틀어 1200여 점을 제작했노라고 고백했다. 이 정도의 작업 양이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많은지 적은지 언뜻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다작(多作) 화가로는 수화 김환기와 고암 이응노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이 작고 이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의 ‘질’ 못지않게 작품의 ‘양’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Han 작품의 질은 양이 결정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지난 세월, 일주일에 평균 한 점 꼴은 꾸준히 제작했으니, 30년이면 얼추 1500점은 제작할 수 있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번에 막상 정리해 보니 1200점 정도였다. 앞으로 남아 있는 작업 시간을 생각하면 1500점은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들이 평생 작품을 제작해도 전체의 10% 정도가 그나마 괜찮은 축에 들어간다고 한다. 예를 들어 피카소 같은 대가는 일생 동안 2만 여점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 중 10% 정도가 명화라 부를 수 있거나 작품다운 작품이지 태작도 많다는 얘기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큐레이터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덕수궁미술관의 네 전시실을 한 작가의 작품으로 모두 채우려면 적어도 150~200점의 작품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이 150점의 전시 작품도 1500점 정도의 작품에서 추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10%론’이 나름 근거가 있구나 싶었다. 그 큐레이터는 우리나라에서 1500점을 남긴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art 한운성은 작품 양도 양이지만, 〈지혜〉 〈받침목〉 〈매듭〉 〈문, 벽〉 〈신호등〉 〈상황〉 〈풍경〉 〈과일〉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숨 가쁜 조형적 변주를 거듭해 왔다. 작품 시리즈의 변화가 이처럼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똑 떨어지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동안 3~4년을 주기로 새로운 시리즈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개인전도 이 시리즈에 맞춰 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술은 반복이 아니다. 이 말은 항상 나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렇다면 작품 시리즈가 변화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일까?
Han 이건 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감각적인 문제다. 내가 그림으로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이성을 사랑할 때, 처음에는 살갗만 닿아도 짜릿짜릿 전기가 통한다. 그러나 이렇게 뜨거운 감정의 불덩이도 일정 시기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권태기도 있고. 내 경우엔 그림이 그렇다. 하나의 시리즈를 계속하다 보면 캔버스 앞에 앉아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시기가 온다. 그땐 시리즈에서 떠난다. 기존 시리즈의 권태와 새로운 시리즈의 출현. 어느 쪽이 먼저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묘하게도 시리즈의 이행에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여자야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바람을 피울 순 없지만, 그림이야 내 마음껏 즐기며 바람을 피울 수 있지 않은가.

<욕심 많은 거인> 석판화 75×65cm 1974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타일러스쿨오브아트 소장
오른쪽·<The Giant Ⅱ> 애쿼틴트 75×56cm 1981 국립현대미술관 동아일보사 소장

‘환쟁이 아들’, 엘리트 코스를 밟다

art 화가 한운성의 가계에는 미술의 피가 흐른다. 부친 한홍택(韓弘澤)은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다. 유안양행 아트디렉터, 홍익대 교수, 한홍택도안연구소 소장, 대한산업미술가협회 회장, 세계공예회의(WCC) 회원, 서울시 문화위원 등등을 지냈다. 특히 해방 직후 1946년 한국산업미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모던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그래픽 아트’ ‘시각 언어’와 같은 디자인 개념과 명칭을 새롭게 이끌어 갔던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부인 김희영은 한국화가이며, 큰아들 병우는 영상설치, 작은아들 민우는 영화를 전공하고 있다.
Han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환쟁이 아들’로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과반수를 차지하던 시절에 ‘화가’라고 떳떳이 이야기했으며, 그 멘토는 분명 부친이었다. 아버님은 애초에 순수 화가의 길을 걸었으나 해방 후 가계가 급격히 기울어 그나마 돈이 되는 디자인 쪽으로 전향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버님의 외할아버지는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떠나면서 선상에서 태극기를 제작해 최초로 배에 게양했다는 박영효(朴泳孝)다. 박영효의 핏속에 이미 디자인적인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지 않았을까? 태극기야말로 뛰어난 디자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서울고등학교 시절, 처음에는 의과대학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내 성격상 환자 다루는 일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고3 때 입시를 앞두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대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art 한운성은 1965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류경채 김태 전성우 윤명로의 지도를 받았다. 이번에 발표한 화집에는 대학 시절의 작품이 실려 있다.
Han 대학 시절에는 실존주의 영향에 끌려 작가보다는 인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엔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베르그송의 ‘생의 도약’에서 영향을 받아 결국 그것을 작품 주제로 삼았다. 생의 도약은 항상 자신의 변신이 있어야 하고, 그게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담았다. 잭슨 폴록처럼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뿌렸다. 강하고 터질 듯한 충동, 이성보다는 감정에 복받쳐 나오는 행위였다.
art 한운성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풀브라이트 재단의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단행했다. 그는 1973년부터 2년간 템플대학 소속 타일러미술학교에서 현대 판화를 전공했다. 첨단의 판화 기법을 습득했다.
Han 대학원 때 프랑스 유학을 꿈꾸다 미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미술 쪽의 장학금은 풀브라이트가 유일했다. 토플 점수로 장학생을 선발했다. 죽으라고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영문과의 입학 기준에 이르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미국 장학금 수혜 기간이 2년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분야는 판화였다. 또 대학원까지 6년 동안 수십 장의 에스키스가 쌓였는데, 유화보다는 판화로 표현하기에 걸맞다고 판단했다. 미국에서는 판화를 ‘그래픽’이라고도 부른다. 그래픽은 평면성을 전제로 한다. 부친께서 상품 광고 디자인을 많이 제작하셨는데, 내가 판화를 선택한 것은 알게 모르게 이런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art 한운성의 데뷔작은 1974년 미국 유학 시절에 제작한 석판화 〈욕심 많은 거인(巨人)〉이다.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을 실제보다 확대해(75×56cm)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그는 유학시절 미국미술을 풍미했던 팝아트와 포토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이미 한운성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양식적 특징이 명쾌하게 드러나고 있다. 화면 구성에서 물체나 풍경, 상황의 단편을 마치 하나의 정물처럼 클로즈업하는 수법이 주목된다.
Han 〈욕심 많은 거인〉은 냉전시대에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국에 코카콜라가 상륙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접하고, 미국의 상업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제작했다. 나는 내가 내세우는 주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하고 확실하게 내미는 걸 좋아한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 뭐 그런 의도에서다. 그래서 대상을 화면 한가운데에 좌우대칭으로 배치하고, 배경은 일체의 부차적인 설명을 뺀다.
art 선진 판화를 배우고 돌아온 한운성은 1975년에 귀국판화전을 열었다. 이후 그는 판화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과 대상, 공간 국제소형판화제에서 우수상,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판화가로서의 입지를 굽혔다.〈지혜의 기둥〉〈문〉〈거인〉 등 한국 현대판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모두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Han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드로잉과 판화가 회화에서 하나의 독립된 장르를 차지하게 됐다.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치고 판화에 손을 대지 않은 작가들이 드물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판화가, 서양화가를 구분한다. 나는 판화로 데뷔했기 때문에 한운성 하면 판화 이미지가 강했다. 판화와 회화는 언제나 넘나들 수 있는 분야다. 나는 판화에 어울리겠다 싶으면 판화로 제작하고, 사이즈가 큰 캔버스에 어울리겠다 싶으면 유화 작업을 한다.

한운성 1946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과 필라델피아 펨플대 대학원 판화과 졸업. 1978년 덕성여대 교수를 지내다 1982년부터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동아미술제 대상,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등 수상.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몬슨갤러리(1989), 앤드류샤이어갤러리(2005)를 비롯, 신세계화랑(1973) 한국미술관(1987) 금호미술관(1999) 노화랑(2002) 갤러리인(2010) 등에서 개인전 개최. 상파울로비엔날레(1981), 류블라냐국제판화비엔날레(1983), <한국미술전>(파리 그랑팔레 1985) 등 다수의 국제전 및 단체전 참여.

1980년대, 매듭을 묶고 매듭을 풀다

art 1980년대의 한국미술은 ‘집단의 시대’였다. 미술 그룹운동이 용광로 같은 열기를 뿜었다. 민주화 운동 같은 정치 사회적 격변 속에서 민중미술이 전위부대로 이 시대를 이끌었다. 화단은 기존의 모더니즘 진영과 새로운 세력의 민중미술 진영이 이원적 구도를 형성했다. 형식/내용, 추상/형상, 순수/참여 등의 대립 구도가 워낙 첨예하여 중간지대의 ‘제3의 흐름’은 줏대 없는 회색분자로 치부되기까지 했던 살벌한 시대였다. 한운성에게도 1980년대는 그룹 운동의 시대였다. ‘형상성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미술의 조형성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양 진영 모두의 대안이고자 했다.
Han 1984년에는 〈동세대전〉 창립에 가담했다. 한국 화단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학연, 지연 등의 틀을 깨고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다양한 표현 양식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1986년에는 서울대와 홍익대의 구상작가들이 규합하여 〈현상전〉을 창립했다. 극사실회화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1987년에는 서울대 동문 그룹 〈레알리떼 서울〉을 창립했다. 이 그룹전에 가담했던 많은 작가들이 90년대 이후 화단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대학 교수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art 1980년대는 〈받침목〉에 이어 〈매듭〉 시리즈가 이어졌다. 이전까지 판화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한운성은 유화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매듭〉은 하찮은 일상 소재의 물신화(物神化)라는 조형 전략을 고수하면서도 웅대한 울림의 기념비적 신전 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매듭〉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살아 숨 쉬는 미지의 생명체 같은 인상을 준다. 극도로 팽창되어 용트림하듯 위로 불끈 치솟아 있거나 곧 터질 것 같은 어느 한 찰나를 포착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감정이 묻어나는 시리즈였다. 〈매듭〉은 작가가 품고 있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사회적 갈등, 고난 극복이나 인고(忍苦)의 시간 같은 메타포로 쉽게 읽혀 독립기념관과 전쟁기념관의 조형물로 전시되어 있다.
Han 보통 우리가 ‘매듭’하면 ‘매듭을 짓다’ 혹은 ‘매듭을 풀다’라고 말하듯이, 매듭에는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결말을 본다는 의미가 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얽힘, 풀리지 않는 것, 가슴 속에 응어리 같은 의미를 연상하게 된다. 내 매듭은 후자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매듭〉을 그렸던 1980년대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여서, 학교는 거의 매일 같이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가득 차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매듭에는 이런 시대 분위기가 젖어 있다. 그러나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19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탓인지 〈매듭〉은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에 자주 초대됐다. 연초에 1년 동안의 전시 스케줄이 모두 잡힐 정도였다. 그래서 이 시리즈가 좀 오래 지속됐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남북통일이 되면 매듭이 풀릴 거냐고 말했다.
art 1990년 미국에 일시 체류했던 한운성은 또 다른 작품 변화를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신호등〉 〈상황〉 시리즈다. 〈상황〉 시리즈는 지금까지의 상징이나 은유의 메시지 전달에서 벗어나 좀 더 서술적인 이야기 방식을 보여 주었다. 일상 사물에서 인물이나 전통 유산으로 소재가 바뀐 점도 눈에 띈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핍박을 받아 온 한국의 여인사를 그린 〈외출〉, 장삼을 걸친 군상을 통해 현대에 팽배해 있는 전근대적 악습을 비유한 〈망령들〉 같은 작품이 눈에 띈다.
Han 미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 예전 유학 때보다 현대 문명의 위기 상황이 더 넓게 팽배해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 같은 것으로 절단된 인간 형상, 벽, 신호등 같이 더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소재를 선택했다. 화면을 분할해 마치 무대 세트 같은 배경을 설정하고, 배우가 연기를 하는 상황처럼 이야기를 꾸몄다. 화면을 구획하는 방식은 이후 <한라산> <DMZ-월정리역-겨울> 등 풍경 시리즈에서는 창(窓) 같은 레이어로 이어졌다.

<과일> 시리즈 이후 〈디지로그 풍경〉을 그리다

art 이전의 작품 소재가 모두 인공물이었는데 〈과일〉 시리즈는 처음으로 자연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시리즈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일이나 채소를 그리고 학명을 적어 일종의 시각 정보로 ‘병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디지털로 재구성해 나열하는 것이다.
Han 2000년 새 밀레니엄이 열리던 시기에 나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설레었다. 새 천년을 맞이하자 유전공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비등했다. 황우석 박사의 유전자 복제로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과일〉 시리즈는 이러한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작품이었다. 처음에 용인에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만 해도 길거리에 줄지어 있는 과일 행상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행상인들이 팔았던 과일은 크기나 색깔, 모양새가 제각기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마을에 마트가 생기자 과일은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생긴 과일들이 흠집 하나 없이 기계로 찍어낸 듯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인간 위주로 자연을 마음대로 바꿔가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미 우리 주변의 자연이 인위적으로 개량되고 변모되고 있는 것이다. 크기, 빛깔, 심지어 당도까지도 일정한 생산 시스템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렇게 일률적으로 조작된 과일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과일이 더 변모되기 전에 곤충 채집하듯이 희귀종을 캔버스에 옮겨보자, 화면으로나마 과일을 채집해 보자, 이런 의도에서 이 시리즈를 시작했다.
art 화집을 보면 〈과일〉 시리즈 이후를 예고하는 작품이 실려 있다. 〈디지로그 풍경〉이란 것이다.(사실은 작가의 부인이 귀띔을 해 주었다.) 한운성은 작년부터 〈과일〉 시리즈를 끝내고 이미 열 점 정도의 신작을 제작하고 있다.
Han 새로운 시리즈는 〈디지로그 풍경〉이다. 재작년에 서울대 미대와 자매결연 학교인 영국의 브라이튼(Brighton)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양 대학은 졸업 전시 중에서 뛰어난 작품을 골라 상호 교류전을 열어 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영국 학생을 선발하는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때 해변가에 있는 호텔(Old Ship Hotel)에 3박 4일간을 묶게 되었다. 그런데 오래된 호텔이어서 시설이 후졌고, 문짝이 잘 맞지 않는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솔직히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귀국 후 우연히 인테넷으로 이 호텔을 검색해 봤더니,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4성급 호텔이었다. 나는 3박4일 동안 이 호텔에서 무엇을 본 것인가? 결국 속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껍질만 본 것이 아닌가. 이런 발상에서 〈디지로그 풍경〉을 시작했다.  
art 한운성은 인터뷰 도중에 핸드폰에 저장해 둔 〈디지로그 풍경〉을 여러 점 보여 주었다. 그는 새로운 이성과 바람이 난 듯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디지로그 풍경〉은 영화 세트장처럼 건물의 파사드만 덩그러니 그려 놓은 풍경화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들끓는 유명한 관광지나 유락시설이 들어 선 거리 풍경이었다. 풍경 속의 많은 사람들은 사이트의 역사 문화의 본질을 얼마나 올바로 바라보고 있는가. 쇼핑에 눈이 팔려 정작 본질이 일회용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Han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면 작품에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이 새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신인처럼 공모전에 출품하고 싶을 때도 있다. 정년은 솔직히 홀가분하다.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 줬다. 이제 정년도 했으니, 지금까지 가지고 온 많은 부분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방향의 작업을 해 보라. 그때서야 진짜 한운성의 예술이 익어 나오지 않겠는가 하고. 그러나 오랜 세월 지켜 온 작가적 관성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따지고 보니, 한운성은 참으로 변화하지 않는 작가다. 작품 소재는 줄기차게 바뀌었을지언정 작품의 본질이 바뀐 적은 없다. 언제나 지속과 변혁이 교차한다. 한운성의 작품 편력을 돌이켜 보면, 마치 어려운 시험에 대비해 모범 답안을 여러 개 준비해 놓는 우등생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작품 시리즈의 변화가 언제나 긴밀한 내적 필연성의 고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머리보다는 가슴만 내세우는 감상주의, 일탈과 해방의 숲에서 유영하는 낭만주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작가다. 그래서 나는 한운성의 ‘작가 유형’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1992년 뉴욕 MoMA의 큐레이터 존 엘더필드(John Elder field)가 제시했던 미술사의 거장 ‘마티스와 피카소의 대조표’를 읊조렸다. 마티스/피카소는 종합/단편, 조화/부조화, 평면성과 형태/공간과 형태, 휴일/전쟁, 전통/전위, 프랑스 부르조아/국제적 보헤미안, 화가(painter)/아티스트(artist). 이 대조는 이 세상의 수많은 ‘작가 유형’을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운성의 유형은 당연히 마티스에 가깝다. 그도 즉각 동의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한운성은 ‘밀애의 현장’인 작업실로 달려갈 요량인 듯 황급히 자동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 시간이었지만, 나는 새로운 사랑에 푹 빠져 있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지금, 한운성이 바람을 피운다?

포스트뮤지엄을 위해

김홍희 1948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불문학과, 동대학원 미술사학과, 캐나다 콘코디아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정보예술>전 큐레이터, 1999년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전시기획위원장,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06년 광주비엔날레 예술총감독, 쌈지스페이스관장 및 경기도미술관장을 역임했다. 국내외 큐레이터 11명의 체험과 전시 노하우를 담은 기획서 《큐레이터 본색》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포스트뮤지엄을 위해

글|장승연 기자

서울시립미술관이 새 사령탑을 맞았다. 바로 김홍희 관장이다. 1월 12일 임명된 김 관장은 2006광주비엔날레 예술총감독, 2003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등 국내외 주요 전시를 도맡아 온 큐레이터 출신이다. 또한 쌈지스페이스를 이끌며 한국 레지던시의 기틀을 다졌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경기도미술관 초대 관장을 역임했다. 이렇게 한국미술 현장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겨 온 동안, 그의 이름 앞에는 ‘첫 여성 00’이라는 타이틀이 자주 등장한다. 지난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첫 여성 예술총감독’이라 불렸고, 이제 서울시립미술관 개관 이래 ‘첫 여성 관장’이 됐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가 경기도미술관장 재임 시절 열었던 어느 기획전의 제목이 떠오른다. ‘언니가 돌아왔다!’

경기창작센터 전경. 김홍희 관장이 경기도미술관 재임 시절 오픈했다.

“미술관을 개혁하는 왼손 역할을”

‘최첨단 현대미술’과 ‘소통’. 바로 김 관장이 취임 직후 발표한 서울시립미술관 운영 모토이다. 그는 이   ‘양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미술관이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이 한국의 수도이자 아시아의 대도시, 그리고 세계 중심 도시의 위상에 걸맞게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글로벌 스탠다드를 충족시키는 수준 높은 전시를 열고 그 밖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반하여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한편, 시민들의 삶 속에 (미술)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미술 문화의 저변 확대를 도모해야 겠죠. 수직과 수평을 함께 이뤄내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합니다. 불가능하지 않아요. 이제 대중들의 문화적 안목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요. 시민들이 수준 높은 전시도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적절한 소통의 방법론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미술계와 대중이 각기 바라는 미술관의 균형을 모색하기 위해서, 김 관장은 스스로 “미술관을 개혁하는 왼손”이 될 생각이다. 그가 그 간의 행보를 통해서 기존의 전형을 답습하기보다는 개성 강한 대안적 성격을 보여 주었던 만큼, 이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스펙트럼을 보다 넓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취임하던 날 인사말 내용이 바로 이 ‘양 바퀴’에 대한 것이었어요. 또한 이를 이뤄 내기 위해서 ‘양 손잡이’ 조직을 구사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지난 관장들이 다듬어 놓은 것들, 노하우 등의 안정성이 오른손이라면, 저는 개혁을 하는 왼손의 역할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안전성과 개혁을 함께 조화롭게 도모해 가면서 전체적인 변화를 모색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변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안정성이 기반이 되어야해요. 변화나 혁신을 관장의 리더십만으로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이것을 저 스스로의 사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미술관의 관행, 특히 나쁜 관행을 깨는 의미에서 포스트뮤지엄을 만드는 길이죠.”
김홍희 관장이 취임과 함께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블록버스터 전시 대관 미술관’이라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오명(汚名)이 아닐까 싶다. 김 관장은 큐레이터 출신답게 이를 ‘전시의 질’ 문제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블록버스터 전시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죠. 사실 미술의 저변 확대에 중요한 공을 세운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단, 저변확대의 기반 위에서 이제는 관객의 눈높이가 좀 더 높아지도록 미술관에서 신경을 써야죠. 따라서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전시를 열더라도 외부에서 기획한 전시를 그대로 가져 올 수는 없습니다. 미술관 내부의 기획력이 주축이 되어 상대 국가의 기관에 직접 개입하면서 자체 기획의 비율을 높이는 대가(大家) 전시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다. 그간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역할을 충분히 펼쳐 보이지 못하고 활기가 없다는 미술계의 지적들, 그리고 수준 높은 기획전 부재의 아쉬움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김 관장 역시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미술관의 전문 인력들이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지원해 나갈 생각이다. “큐레이터의 자질을 높여야 된다고 봅니다. 큐레이터를 ‘문화생산자’라고도 부르죠. 담론과 문화를 생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항상 공부하고 글을 써야 해요. 큐레이터는 ‘전시 공학’ 이전에 ‘전시 철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실력과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한국에 스타 작가는 많은 데 비해 스타 큐레이터는 거의 없어요. 기관을 대표하는 소문난 큐레이터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이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런 큐레이터를 만들어 낼 겁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2010미디어시티서울 전경. 올해 9월 11일부터 11월 4일까지 제7회 행사가 열린다.

“우리가 롤모델이 되어야죠!”

일반적으로 ‘미술관’하면 보통 ‘전시’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전시 말고도 소장품 정책이나 연구 교육 등 미술관이 다져가야 하는 정책과 사업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인터뷰에 앞서 홈페이지를 통해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현황을 확인해 보니, 장르의 불균형 문제가 다소 심각해 보인다. 약 3,000여 점 가량의 소장품 중 미디어 및 설치 작품은 각각 22, 13점뿐이다. 격년제로 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개최하는 기관으로서는 부끄러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김 관장은 적극적으로 ‘왼손’ 역할을 맡을 계획이다. “소장품의 정체성이 곧 미술관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소장 정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구입한 모든 작품의 리스트를 분석한 다음, 장르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부분으로도 덩어리, 즉 ‘범주’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물론 장르 불균형을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들을 구입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미디어시티서울은 외부 총감독이 진행하지만 주최는 어디까지나 우리 미술관이니까요. 매해 행사의 결실을 미술관의 노하우로 축적해, 비엔날레 주최 기관의 족적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 소장한다면, 바로 작품을 통해서 미디어비엔날레의 역사가 축적되는 거죠.”
사실 김홍희 관장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레지던시’다. 쌈지스튜디오부터 경기도미술관 재임 시절 개관한 경기창작센터까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김 관장의 ‘주 전공’ 중 하나이지 않는가. 김 관장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 중인 난지창작스튜디오를 국제 활성화의 요지이자 전초지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난지창작스튜디오가 그 동안 꾸준히 운영되어 온 것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만큼, 이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단계라고 역설한다. 또한 서울시립미술관이 도시 중심에 위치하면서 대중 친화적인 전시를 선보이며 ‘가족 미술관’의 역할을 해 온 만큼, 이제는 ‘작가를 위한 미술관’으로 더욱 거듭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한편, 전시 기회가 적은 중견 및 원로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를 구상하되, 1차적인 개인전 형식이 아니라 그의 작품과 후 세대 간의 영향 관계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획력 있는’ 전시 개최 역시 김 관장의 계획 중 하나다.  
검은 단발머리에 한 가닥 내린 컬러풀한 인조 머리와 어깨에 멘 작은 보조 가방.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난 김홍희 관장은 현장 곳곳에서 마주치던 친숙한 모습 그대로다. 최근 몰입했다는 마라톤 덕분인지 한층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인상이다. 미술관 관장 집무실은 아직도 새 주인을 맞은 티가 역력하지만, 그 안의 공기만큼은 벌써 열기로 가득 찬 것 같다. ‘시작’에는 늘 많은 과제들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더불어 서울시립미술관을 향한 그동안의 아쉬움만큼이나 그곳의 변화를 원했던 미술인들의 기대어린 관심이 김 관장을 향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 특별히 롤모델로 삼은 미술관이 있는지 물었다. 김 관장은 특유의 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이제 우리가 롤모델이 되어야죠!”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줄곧 바라왔던 말이 아닐까. 서울시립미술관에 개혁과 대안의 순풍이 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금부터다.

Since 2009, 네번째 요괴들의 잔치

2012년 동방의 요괴들 BEST 21_앞줄 왼쪽부터 차례대로|박여주 김희영 김홍 신제헌 이일석 이학민 박보리 김경진 백호현 강승지 강민숙 신승주 노종남 심은아 나유림 유목연 천영수

Since 2009, 네번째 요괴들의 잔치
‘요사스런’ 신진작가 발굴육성 프로젝트, 미술계 지형을 바꾸다

글 | 편 집 부

공모리포트

art in culture에서 주최하는 신진작가 발굴육성 프로젝트 <동방의 요괴들>이 4주년을 맞았다. 2009년 시작된 <동방의 요괴들>은 지난 3년 간 여러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다양한 ‘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한국미술의 대안적인 공모제로 자리잡았다. 이제 <동방의 요괴들>이라는 이름이 한국 미술계의 ‘젊은 작가 군단’을 가리키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괴’라는 톡톡 튀는 이름만 듣고도, 단번에 ‘젊음’을 떠올리는 이들이 그만큼 많아졌다.
<동방의 요괴들>의 인지도가 매년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 사실은 매해 진화되고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각 지역의 여러 전시 공간은 물론, 문화재단과 기업 등에서도 러브콜을 보내는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계가 <동방의 요괴들>을 ‘새로운 활기’를 향한 갈증을 풀어 줄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일례로 2010년 하이서울페스티벌 기간 중 서울시창작공간페스티벌 부대행사로 한강 여의나루에서 개최된 <하이서울아트페어>와, 지난해 <동방의 요괴들> 작가들이 대규모 공장 외부 벽화를 디자인한 <샘표아트팩토리프로젝트> 등 이제 요괴들은 다양한 미술 사업에도 동참하고 있다. 눈에 띄는 성과와 함께 성장을 거듭한 <동방의 요괴들>은 지금까지 다져 온 노하우와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2012년 한 해도 더욱 흥미진진하게 물들일 것이다.

<동방의 요괴들 In the City>전 2010 충무갤러리

260명의 새 식구를 맞다

올해는 <동방의 요괴들>에 총 260명의 젊은 작가들이 응모했다. 지난해 총 누적인원 1,074명을 돌파한 ‘요괴 가족’의 규모가 해를 거듭할수록 확장되고 있다. 올해의 응모자 분포도를 보면, 성별로는 여자가 188명으로 72%, 남자가 72명으로 28%를 차지한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141명으로 53%, 경인 지역이 77명으로 30%, 중부 7명 2%, 영남 18명 12%, 호남 7명 2% 강원 11명 1%, 해외 6명 2%로 분포되어 있다. 장르별로는 서양화의 강세가 여전했다. 총 161명이 지원해 지난해 58%보다 4% 높은 62%를 차지했다. 반면 동양화 29명 11%, 조소 31명 8%, 사진 20명 8%, 영상과 설치가 각각 8명 3%, 도예 애니메이션 등 기타 장르가 1%이다. 전체 통계 상 지난해에 비해 특별히 달라진 부분은 없다. 하지만 2010년부터 지원 자격에서 나이 제한을 폐지한 이후로, 매년 응모 작가들의 연령대도 높아지고, 그만큼 작품 수준이 성숙되고 안정된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올해도 마찬가지다.  
공모 심사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 두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단, 지난해 예심 심사는 art in culture 편집부가 맡았던 것과 달리, 올해는 외부 심사위원들을 따로 위촉했다. 응모 작가들의 연령대가 높아졌더라도 여전히 졸업 예정자나 재학생들의 응모율이 높은 만큼, 학교에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 접하며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교수진 위주로 선정했다. 예심 심사위원은 곽남신(한예종) 권여현(국민대) 김섭(울산대) 문경원(이화여대) 박영근(성신여대) 이수홍(홍익대) 홍순주(동덕여대) 홍승혜(국립서울과학기술대)가 맡았다. 특히 공정한 심사를 위해 응모 작가의 이름 출신학교 등 개인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응모자 260명 중 139명의 작가가 본심 심사에 올랐다.  
본심 심사위원은 미술 현장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위촉했다. 올해는 외부 초청 본심 심사위원으로 권오상(작가), 이대형(Hzone 대표, 큐레이터), 정현(미술평론가), 그리고 장승연 본지 기자가 참여했다. 심사는 KT&G상상마당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어 총 21명의 BEST 작가를 선정했다.

2010유럽아트투어에서 리버풀을 방문한 <동방의 요괴들>

공모제 붐을 주도한 <동방의 요괴들>

4회를 거치면서 <동방의 요괴들>은 이제 신진작가들의 ‘동반자’, 그 이상의 역할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한국 신진작가 지원제도의 지형을 조금씩 바꿔 가고 있다는 평도 듣는다. 이는 올해 응모자 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동방의 요괴들>의 인지도가 계속 상승한 것과 달리, 올해 응모자 수는 지난해 371명보다 100명 가량 줄었다. 최근 1~2년 사이 다양한 신진작가 공모제가 연이어 생겨나 응모자들이 자연스레 분산됐고, 따라서 기존 공모제들의 응모자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동방의 요괴들>에만 해당되는 바가 아니다. 중앙미술대전도 지난해 33회의 응모자 수가 전년에 비해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방의 요괴들> 응모자 수는 감소했을 지라도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부분이 크다. 즉 여러 신진작가 공모제가 지속적으로 생겨 난다는 것은 그만큼 공모제가 젊은 작가들이 의지하는 중요한 제도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국미술의 공모제 붐이 일기까지, 먼저 시작된 <동방의 요괴들>이 선두 역할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art in culture는 이미 10년 전인 2000년부터 신진작가 공모제 <New Face>를 기획했고, 지금은 <동방의 요괴들>로 그 정신을 이어가며 신진작가 등용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4회에 걸쳐 축적된 <동방의 요괴들> 응모자 현황 통계 자료는 현재 신진작가들의 성별, 지역, 장르 분포도를 보여 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 내용을 분석하면, 4년 간 응모자 현황에는 큰 변화가 없다. 단지 지난 3년 간 응모자의 성별 비율은 여자 64~65%, 남자 35~36%를 비슷하게 유지한 반면, 올해는 여자 72% 남자 28%로 예년보다 여성 작가의 지원율이 10%가량 늘어난 점이 특징이다. 그 밖에 지역별로는 서울이 4년 간 50% 이상의 강세를 유지했고, 그 뒤를 경인 영남 중부 지역이 잇는 점도 동일하다. 단, 해외 응모자의 수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3년간 1%대를 유지하다가 올해 처음 2%에 들어섰다. 장르는 서양화의 강세가 4년 내내 이어졌다. 단, 2009년 52%의 비율이 2010년에 39%로 줄었다가 이후 2011, 12년에는 각각 58, 62%로 상승했다. 조소 사진 영상 분야의 응모 비율도 소폭 상승했다.   
art in culture는 해마다 응모작가 앙케트를 통해서 <동방의 요괴들> 지원 동기를 체크한다. 그 중 가장 많이 나온 답변도 4년 내내 한결 같이 동일하다. 바로 ‘일회적인 전시 개최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점이 여타 공모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올해도 <동방의 요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 3번의 행사를 거치면서 더욱 알차고 탄탄해졌다는 것이다.

하이서울페스티벌 기간 중 서울시창작공간페스티벌의 부대행사로 한강 여의나루에서 개최된 <하이서울아트페어> 전경 2010

전시 교육 출판, 올해의 프로젝트

(1) 전시 프로젝트
①지역 순회 전시: <동방의 요괴들> 전원이 참여할 수 있는 전시. 서울부터 각 지역까지, 전국의 요괴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지역 순회전을 개최한다. 특히 하반기에는 지난해 전시를 연 대구MBC 갤러리M과 그룹전 기획을 추진하고 있다.
②선정작가 전시: BEST21 작가들의 그룹전을 상반기에 진행한다. 1~2회 두산갤러리, 3회 KT&G상상마당갤러리에 이어 올해는 충무아트홀에서 개최하며, 도록 제작 및 다양한 강연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③소그룹 전시 공모 지원: <동방의 요괴들> 중에 소그룹을 결성해 전시기획안을 공모하면 심사를 통해 전시장과 홍보를 지원한다.
(2) 교육 프로젝트
①PT-day: 작품을 프로모션하고 작가들 간의 자유로운 소통과 대화, 토론 기회를 마련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특히 현장 전문가들을 초청해 작가에게 필요한 프리젠테이션 방법을 배운다.  
②강연: 미술계 인사들의 초청 강연. 국제 미술 동향, 미술 시장의 변화 미술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실전 교육’을 통해 동시대 미술 흐름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3) 해외 프로젝트
①해외 전시: 1월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에서 개최한 <동방의 요괴들 글로벌프로젝트: Drag-On N.Y>를 시작으로, 뉴욕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전시 공간과 협력하여 해외 프로모션 전시를 연다.
②아트페어: 2009년부터 참여해 온 일본 도쿄의    <게이사이아트페스티벌>(무라카미 다카시 기획)에 작품 출품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해는 도쿄 지진으로 불발됐으나, 올해 4월 개최에 맞춰 응모작 중 심사를 거쳐 참여 작가를 선정한다.  
③아트투어: 2009년 파리-베니스-런던, 2010년 런던-리버풀-파리, 2011년 파리-베니스-베를린 아트투어를 마련해, 베니스비엔날레와 리버풀비엔날레부터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미술대학 및 레지던시 등을 견학했다. 올해는 카셀도큐멘타 등 유럽 주요 미술 행사와 전시를 탐방할 계획이다.
(4) 출판 및 홍보 프로젝트
①기사 게재: 2월호 특집을 시작으로 연간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art in culture에서 지면 중계한다.
②연감 제작: 1년 동안 진행된 다양한 프로그램 활동상을 총 수록한 ‘애뉴얼 리포트’를 발간한다.
③홍보: 응모 작가들의 전시 광고 혜택 및 프리뷰 기사를 게재한다.

 

심사평

안전성보다는 실험성을!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동방의 요괴들>이 되기 위한 참가자들의 욕망이 ‘하나라도 더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런 가운데 텍스트나 출품작 이미지에서 그 ‘욕망’을 컨트롤하여 심사위원들에게 ‘가독성’ 높은 프리젠테이션을 선사한 포트폴리오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으로서 나는 3가지 측면을 보려고 노력했다. 형식적인 완성도보다는 방향성에, 상업성보다는 실험성에, 이론적인 무장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용기에 높은 점수를 줬다.
art in culture와 영문 잡지 art in ASIA의 매체 영향력은 앞으로 선정된 작가들에게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그래서 책임도 큰 <동방의 요괴들>이다. 미술시장 경기가 불황이라다고 해서 좀 더 안전하고 팔기 좋은 성향을 따르는 소심한 모습은 <동방의 요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미술계는 “이것도 예술이야?”라는 논란을 야기할 만한, 그런 요상하고 기괴한 작품을 <동방의 요괴들>에게 기대한다. 그 많은 염원이 오랫동안 지켜지길 바란다.|이대형·큐레이터, Hzone 대표

자기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길

BEST21에 선정된 작가들의 작업 대부분에서 동시대의 사회상을 적지 않게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프라모델에 빠진 키덜트, 다양한 매체로부터 발췌한 이미지의 활용,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물음 등과 같은 주제는 최근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젊은 세대의 인식을 스케치해 준다. 반면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작품이 극히 드물어 아쉬웠다. 이는 아무래도 주제 매체 개념의 다양성이 빈약한 것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특히 본심에서 심사한 130여 점 중 서양화가 2/3 가량을 차지하는 것은 새로운 매체를 향한 젊은 작가들의 도전이 상당히 빈곤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고하는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더욱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형상 위주의 구상화의 흐름이 강하게 포착됐는데, 이는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국 미술교육의 현실을 잘 알기에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반면 한국화나 판화는 매체의 속성이 강해서인지, 이렇게 포트폴리오로 심사를 하는 경우에는 약간 불리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심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인은 아니었지만, 거의 모든 지원자가 제출한 작업 설명글은 작품과 무관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잘 읽히지 않았다. 글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앞으로 작가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자신의 작업을 판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정현·미술평론가

1년 간의 동행에 보내는 응원

본선에 오른 130여 명 작가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로운 작품이 많지 않아 다소 실망도 컸다. 작가들 간의 작업적 완성도의 격차가 들쑥날쑥한 인상도 들었다. 회화가 응모작의 주를 이루는 반면, 상대적으로 조각 미디어 동양화 등의 지원자가 월등히 적은 점도 아쉬웠다. 언제까지 이러한 장르 불균형 현상이 계속될까. 한편 놀라웠던 점은 기성작가의 작품이 연상되는 작업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동방의 요괴들>은 여타 공모제와 다른 형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1년 간 이들이 작가 생활의 틀을 자리잡아 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동행해 주는 존재라고 할까. 이것이 <동방의 요괴들>만의 긍정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New Face> 출신의 작가로서 2012년을 장식할 <동방의 요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하자면, 좀 더 집중도를 높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 BEST 작가를 더 적은 인원만 뽑는 것은 어떨까.|권오상·작가

젊은 객기 vs. 탄탄한 완성도

본선 심사 동안 심사위원들이 대화를 나눈 이슈 중 하나는 바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작품들’이었다. 기성작가, 혹은 출신학교 교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작업도 있었다. 아니면,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소재나 주제에 맹목적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요즘 젊은 작가들이 그야말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 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작가도 작품도 모든 것이 포화상태인 요즘 아닌가. 더욱이 미술이란 ‘시각예술’인 만큼 다양한 시각 경험에서 수용되는 것들로부터 자신만의 진정한 표현력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트폴리오 심사로 작품의 면면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번 응모작들은 ‘신선한 창의성’ 혹은 ‘젊은 객기’라는 표현과는 다소 무관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결국엔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 준 작품들이 더욱 돋보였고, 좋은 평가를 얻은 것 같다. 심사에서 ‘완성도’는 ‘더’ 노력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남보다 더 노력한 사람이 보다 먼저 자신의 작업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순간을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장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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