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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9.05

Abstract

특별기획 오리지널 판화 아직도 유효한가 판화는 복제미술, 복수미술, 간접표현미술 등으로 불리며 회화나 조각보다 저급한 장르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판화의 복수성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미디어와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주요한 특성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판화의 가장 큰 장점은 미술의 대중화에 있다. 그러한 반증으로 1990년대에는 '저가' 시장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떠오르며 수많은 판화공방과 판화전문화랑이 문을 여는 현상이 벌어졌다. 1995년에는 (사)한국판화사진 진흥협회에서 『서울판화미술제』를 조직, 2005년부터는 『SIPA : Seoul International Print, Photo & Edition Works Art Fair』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행사를 열고 있다. 1980년 『국제소형판화비엔날레』로 시작, 올해로 설립 30주년을 맞이하는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4. 9~5. 10 서울시립미술관)이 열리고 있다. 아시아 제일의 판화 비엔날레로 등극하기까지의 궤적과 변화하는 판화 환경을 심포지엄과 앙케트 결과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또한 한국 판화의 발전에 앞장서온 윤명로 화백이 『관란국제판화 비엔 날레』(5. 14~7. 14)의 심사위원으로 다녀와 관란판화기지의 위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Contents

표지 변종곤 <꿈의 해석> 혼합재료 53.5×24.3×17.8cm 2008


에디토리얼 Po Kim, 아르카디아로의 초대_김복기 


프리즘
    국공립미술관 학예실장 인사의 문제점_장동광 
    대안공간 아트씬, so contemporary!_호경윤


김순응의 이슈 아트마켓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세계 미술시장


아티스트 아틀리에 아카이브
    유영희_이선화


포커스
    박성태|성동훈_장동광
    오용길|송수련_김백균
    야코 올리비에|김혜련_김정락
    안규철|이정혜_강수미 


뉴욕 현지 취재
    변종곤, 오브제의 마술_김복기 


핫피플
    표미선, 한국을 ‘미술거래 중심지’로_이성희 


아트 마켓 아시안 옥션 위크
    K옥션|킹슬라이트옥션|신와아트옥션|라라시티


특별 기획 오리지널 판화, 아직도 유효한가
    (1)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박성태 
    (2) 관란국제판화비엔날레_윤명로


아티스트 인사이트
    (1) 노재운, 세상을 향한 인식의 교묘한 균열내기_장승연
    (2) 이명호, 한 장의 천으로 세상을 들춰내다_이성희


암흑 물질
    서교육십2009: 인정게임_편집부


이미지 링크 안나 클라렌 



미술 속에 ㅁ가 있다
    어머니_신지영 


작가 연구
    김영원, 부재의 리얼리즘_김복영


    나의 얼굴 황주리 


전시리뷰
    신오감도|박미나&잭슨홍|이모셔널 드로잉
    아트인블루 블루인아트|배영환
    이경주|신수혁|윤정원|공시네
    최기창|이은우|이소정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아시안 옥션 위크' 아시아 4개국 경매회사 대표와의 인터뷰

왼쪽부터·김순응 K옥션 대표이사, 쳉 천대 킹슬리아트옥션 대표이사, 요이치로 쿠라타 신와아트옥션 대표이사, 다니엘 코말라 라라사티 대표이사

'아시안 옥션 위크' 아시아 4개국 경매회사 대표와의 인터뷰

A 경매회사의 경영 철학과 그동안의 활동 실적
B‘아시안 옥션 위크’의 개최 의의와 기대 효과, 아시아 미술시장의 글로벌 비전
C‘아시안 옥션 위크’에 출품하는 작가와 작품

K Auction

김순응 K옥션 대표이사
협력과 연대, 시장 확장 모색한다

AK옥션은 30억원의 자본금으로 2005년에 설립되었다. 2005년 11월 최초의 경매가 개최된 후, 매년 거의 9회의 경매를 주최하고 있다. K옥션은 불과 3년 만에 한국의 메이저 경매회사 중 하나로 성장하였고, 매년 300%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지금까지 약 640억원의 미술품을 판매했다. 2007년에는 경매에 올린 작품들 중 70~80%가 낙찰됐다. 2008년 6월 메이저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29억 5천만 원(295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했다. 이 작품은 한국의 미술시장에 소개된 고흐의 최초의 작품이었다. 또한 이 낙찰가는 한국 미술시장에서는 물론 국제 미술시장에서도 가장 비싼 가격대에 속한다. K옥션은 이제 국내에 머물지 않고 세계 미술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B세계 미술시장은 다극화되고 있다. 뉴욕이나 런던은 더 이상 유일한 지배적인 시장이 아니다. 아시아, 중동, 러시아, 제3세계 등 새로운 시장들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극화 시대에 갤러리, 아트페어, 경매회사 등과 같은 지역 미술시장 중개인들은 각자의 독창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이들이 서로 협력하여 시장을 개발하고 확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지난 4월 대만에서 K옥션, 대만의 킹슬리아트옥션, 싱가포르의 라라사티, 일본의 신와아트옥션의 대표들이 모여 협약을 체결하고,
5월 15일 홍콩에서 열릴 ‘아시안 옥션 위크’의 계획을 면밀히 검토했다. ‘아시안 옥션 위크’는 아시아 각국의 경매 회사가 컬렉터와 시장을 함께 공유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아시아 미술시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공감에서 시작된 행사다. 각국이 서로의 지점이 되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싱가포르나 대만, 인도네시아 등에서 팔 수 있고 반대로 그들의 작품을
우리 시장에 소개하기도 용이하다. 한국작가들의 작품은 밀도와 완성도 면에서 뛰어나 해외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우리는 최소한 매년 1회 이상의 ‘아시안 옥션 위크'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 외에도,
우리는 상호주의 원칙 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협력할 것이다. ‘아시안 옥션 위크’는 다른 아시아 경매 회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CK옥션은 이번 ‘아시안 옥션 위크’에서 다양한 국내 컨템포러리 작가와 미국 팝작가들의 작품 총 40점을 선보인다. 백남준 김창열 배병우 전광영 이동기 이환권 홍경택 배준성 김준 잭슨홍 등의 국내 유명 컨템퍼러리 작가들을 비롯하여 강유진 신선미 신영미 고상우 손동현 이소정 배주 장재록 권경엽 등의 이머징 아티스트를 소개한다. 또한 앤디 워홀, 탐 웨셀만, 장 피에르 레이노 등 해외 유명 컨템퍼러리 작가들의 작품도 선보인다.
‘아시안 옥션 위크’는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경매와는 차별화된 경매다. 그들과 비슷한 작품으로는 승부를 겨루기 힘들다. 우리는 이번 ‘아시안 옥션 위크’에서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그러나 곧 주목하게 될 각국의 미래의 블루칩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출품한다. 가격도 5000 달러(약 500~1000만 원대)로 매력적이고, 홍콩아트페어와 같은 기간에 진행되어 해외 컬렉터들의 반응이 기대된다.

배병우 <소나무> 젤라틴 실버프린트 86×178cm 2000(추정가 18만~27만 홍콩달러)

Kingsley Art Auction

쳉 천대 킹슬리아트옥션 대표이사
아시아 통합을 위한 첫걸음

A킹슬리아트옥션은 2007년 2월에 출범했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발전과 더불어 아시아 미술품에 대한 수요 역시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킹슬리는 정확한 정보 채널, 날카로운 감각, 우수한 직원들을 바탕으로 고객들에게 우수한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의 역할은 고객들이 자신만의 예술적 취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고객들에게 최상의 섬세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20년 이상 지역 미술시장을 관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킹슬리는 대만시장을 겨냥해 왔다.
B글로벌시대에 지역 미술시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시안 옥션 위크’는 미술시장이 그 지역 내로 한정되어선 안된다는 원칙에 동의한 주요 아시아 경매회사들의 발전 전략이다. 이러한 개념은 이전에 실현된 사례가 없는 최초의 시도다. 아시아 전역의 4개 경매회사들을 규합하는 것은 ‘지역적 통합’을 위한 큰 출발점이다. 세계화로 인해 현 시대는 국가들 간의 상호의존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역적 통합과 국제적인 협력 역시 불가피한 추세다. 특히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기에 운영 및 관리를 공유할 수 있는 공동 경매는 경비 절감에 유용한 방법이다.
아시아 각국의 경매회사들과 협력하여 경매 운영 시스템을 공유하는 것은 경비 절감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고객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각 경매회사는 자신의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수집하기 위해 전문성을 발휘할 것이다. 따라서 각국에서 엄선된 작품들과 고객 자원을 바탕으로 하는 총체적인 브랜드 개발 협력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여건을 창조한다. 킹슬리는 ‘아시안 옥션 위크’를 전 세계 미술애호가들의 미술 플랫폼을 구축하는 기반으로 이용할 것이다.
우리와 파트너인 경매회사들은 그들만의 컨템퍼러리 미술을 아시아와 전 세계에 홍보한다. ‘아시안 옥션 위크’는 미술시장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축제다. ‘아시안 옥션 위크’는 컬렉터들에게 아시아 유명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매에 작품이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떠오르는 스타들의 플랫폼이 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아시안 옥션 위크’는 국제 미술시장에서 인정받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경매회사들이 함께하는 자리다.
이 행사의 장기적인 목표는 아시아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국제적인 경매로 성장하는데 있다.
C이번 ‘아시안 옥션 위크’에서 킹슬리는 중국과 대만의 모던, 컨템퍼러리 작품 27점을 선보인다. 킹슬리는 아시아 및 여타 지역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유럽 시장에서 인기 있는 중국 컨템퍼러리 작품과 정치적 민족적 색채를 독특하게 발전시킨 대만 미술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만의 인기 조각가 주밍(Ju Ming)의 다이내믹한 리듬을 강조한 브론즈, 나무 조각, 또 대만 컨템퍼러리 미술을 이끄는 작가 리 첸(Le Chen)의 섬세하게 다듬어진 조각 등을 선보인다. 또한 중국 추상회화의 기수 주 테천(Chu The chun)의 환상적인 작품도 출품한다. 이번 ‘아시안 옥션 위크’를 통해 대만 컨템퍼러리 미술의 진가를 확인하기 바란다.

미첼 황 <대만고양이Ⅰ> 캔버스에 유채 116.5×91cm 1992(추정가 62만~80만 홍콩달러)

Sinwa Art Auction

요이치로 쿠라타 신와아트옥션 대표이사
미술시장 공동 프로모션의 장점

A신와아트옥션은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일본 최대의 경매회사다. 18년 연속 시장 점유 1위를 기록했고, 2005년에는 오사카증권거래소 헤라클래스에 상장, 미술품 경매회사로서는 아시아 최초의, 일본 국내 유일의 상장 회사가 되었다. 신와옥션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흐의 유화 작품 <농부>를 발굴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보석 장식품, 와인, 서양 골동품과 같은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도 모색했다. 또한 국경 없는 의사회, 중국사천대지진 등을 위한 자선경매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미술작품과 사회를 연결하는데 공헌해 왔다.
그리고 현재 신와옥션은 21세기야말로 아시아가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갖게 될 시기라는 전제 하에 일본에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 전역의 네트워크 구축을 중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보다 유연한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하면서, 아시아에서 하나의 극이 되고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경매회사들과 함께 2008년 11월 마카오에서 제1회 ‘아시안 옥션 위크’를 개최했다.
B아시아 4개 경매회사들이 홍콩에서 ‘아시안 옥션 위크’를 개최한다. 본 프로젝트의 장점은 첫째, 고객이 동일한 장소, 동일한 시간, 1권의 카탈로그로 여러 국가의 다양한 미술작품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각 나라 경매회사의 고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경비를 공동 부담함으로써 프로모션 활동을 비롯해 한 개의 회사로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으로 2회를 맞는 ‘아시안 옥션 위크’는 향후에도 계속 지속될 것이며, 전 세계의 미술전문가가 주목하는 아시아 이벤트의 하나로 정착시켜 나갈 것이다.
C신와옥션은 이번 ‘아시안 옥션 위크'에서 가능한 많은 일본 컨템퍼러리 유명 작가들을 아시아 미술시장에 소개하고자 한다. 유명 애니메이션 원화가로 더 잘 알려진 요시타카 아마노(Yoshitaka Amano)의 팝적인 회화, 테라코타로 망가와 애니메이션의 영웅들을 만드는 히로토 키타자와 (Hiroto Kitagawa)의 조각, 구슬로 제작한 동물 두상으로 이미지의 반사와 분열을 보여주는 코헤이 나와(Kohei Nawa)의 조각, 미니자동차, 장난감, 성인오락 등을 소재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파라모델(Paramodel)의 회화 등 39점을 출품한다.
재팬 팝의 원류인 나라 요시모토와 일본적인 특징을 각기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출품작을 구성한 신와옥션은 현재의 일본 컨템퍼러리 작품 경향을 중점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또한 출품 가격도 3000~5000 달러로, 부담 없는 가격으로 미래의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타쿠로 수기야마 <무제> 종이에 아크릴릭 94.5×200cm 2008(24만4000~4만8000 홍콩달러)

Larasati Auctioneers

다니엘 코말라 라라사티 대표이사
지금이 미술품 투자의 적기

A2000년 설립된 라라사티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첫 번째 경매를 개최했고, 이어 싱가포르 한국 대만 일본 등으로 뻗어나감으로써 아시아에 기반한 경매회사로서 입지를 쌓았다. 최근에는 뉴욕, 런던 다음으로 큰 경매시장인 홍콩에 사무실을 열었다. 지난 몇 년간 라라사티는 새로운 토양을 구축해 왔고, 아시아 미술시장 역사에서 몇 가지 ‘첫 번째’ 성과를 올렸다. 라라사티는 2000년에 네덜란드의 가장 큰 경매회사인 글레럼(Glerum)과 제휴 협약을 맺었고, 현재는 암스테르담에 국제적인 경매장도 갖추고 있다. 2003년에 인도네시아를 넘어서 싱가포르에서 최초의 경매를 개최했고, 지금은 매년 2회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라라사티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전문성을 갖춘 아시아 미술 권위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동남아시아의 미래 아이콘을 발견하는 뛰어난 경매 기록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가장 건실한 자산은 오직 훌륭한 미술 컬렉션’임을 매회 경매에서 고객들에게 증명해 왔고, 이를 통해 컬렉터, 판매자, 바이어 그리고 작가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단순히 미술품을 사고파는 개념을 넘어서 라라사티는 아시아 미술의 감식안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아시아 미술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믿는다.
라라사티는 미래의 미술 아이콘, 다시 말해 우리의 컬렉터나 바이어들에게 건실한 자산 가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보물’을 찾는데 주안점을 둔다. 우리는 이 요만 마스리아디(I Nyoman Masriadi), 위에 민준을 처음 선보인 경매회사다. 이 두 작가 모두 국제적 미술 아이콘이 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현재 전 세계 아시아 미술품 경매에서 탑 프라이스를 기록하고 있다. 일례로, 라라사티에서 2005년 11만7000 싱달러에 팔린 위에 민준의 <Kites>는 1년 후 크리스티에서 60배가 넘은 가격인 740만 싱달러에 팔렸다. 마스리아디의 <Me and My Coke>는 2006년 싱가포르 라라사티에서 7605 싱달러에 팔렸는데, 2년 후 다시 라라사티에서 30배가 넘는 23만1000 싱달러에 팔렸다.
B아시아를 이끄는 대만의 킹슬리, 일본의 신와옥션, 한국의 K옥션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아시아의 가장 우수한 작품들을 홍콩에서 선보이는 ‘아시안 옥션 위크’를 개최한다. 결과적으로 라라사티는 바이어, 판매자, 작가들에게 싱가포르 홍콩 인도네시아 한국 대만 일본의 6개 시장에 노출되고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부터 라라사티는 홍콩에서 ‘아시안 옥션 위크’와 더불어 모던 컨템퍼러리 미술품 경매를 연 2회 개최할 계획이다. 또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의 경매를 지속하면서, 국제적 판매망인 암스테르담의 글레럼과 함께 유럽에서 아시아 미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간책 구실을 할 것이다.
홍콩은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의 미술시장이며, 아시아 유일의 글로벌 미술시장이다. 이곳은 지역과 국제 바이어들, 컬렉터에서부터 갤러리, 경매회사에 이르기까지 중요 운영자들에게 가장 경쟁적인 장터이다. 이렇듯 홍콩 컨템퍼러리 미술시장은 매우 활성화되어 있지만, 경매에서만큼은 아시아적 관점이 결여된 단점이 있다. 우리의 파트너 경매회사들은 모두 자국의 선두 경매회사로 명성을 쌓아 왔다. 이와 같은 파트너십을 통해 홍콩 미술시장에 신선한 시각과 다양성을 불어넣고, 컨템퍼러리 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의 위상을 격상시키기를 바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홍콩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하며 아시아 미술의 진정한 가치를 전 세계 컬렉터에게 보여줄 기회를 갖는 것이다.
C라라사티는 이번 ‘아시안 옥션 위크’에서 마스리아디, 나얀짓 니캄(Nayanjeet Nikam), 아판디(Affandi), 아구스 스와게(Agus Suwage), 포포 이스칸다(Popo Iskandar) 등의 인도네시아 유명 작가들에게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지금 미술품 가격은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이다. 요즘처럼 고점에서 40~60% 정도 조정된 시점이 구매의 적기이다. 지금 좋은 작품을 구매하는 것은 장기적인 투자 포트폴리오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나얀짓 니캄 <자이완타 음악가 가족> 캔버스에 아크릴릭 107×229cm 2009

안규철|이정혜

안규철 <2.6평방미터의 집>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9

생산 라인 밖 ‘삶’의 건축
안규철의 <2. 6 평방미터의 집>전(3. 11~4. 26 공간화랑)|이정혜의 <주거연습>전(3. 7~4. 26 아트선재센터)

글|강수미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보다 크고 화려한 집으로 이사를 한 후, 뭔가를 놓고 왔거나 혹은 또 다른 어떤 이유로 그 전에 살던 집에 가본다. 아직 새로운 살림이 들어오지 않아 텅 비어 있는 그 집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 전까지 잘 살았던 옛집의 작음과 소박함에 새삼 놀란다. 예전 사는 동안에는 크게 비좁다거나 궁색하다고 느끼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유는 아마 우리가 이사 간 새집의 규모와 장식에 눈높이를 맞춰 헌집을 봤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우리의 공간에 대한 지각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러나 이 상대성과 가변성은, 특히 한국 사람의 집에 대한 취향에서는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즉 점점 더 크고 과시적인 집 쪽으로 나아가지, 좀 더 소규모에 단출한 거주 형태로 방향을 뒤집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한다. 이 사회는 그런 상황을 인생의 ‘파산, 실패, 낙오’ 따위로 판결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것이 얼마나 공공적인 것인가

작가 안규철이 공간화랑에서 선보인 〈2.6 평방미터의 집〉이라는 작품은, 말 그대로 2.6㎡ 공간에 한 사람이 실제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은 박스 형태의 집이다. 평수 개념으로 따지면, 이 ‘작품-집’은 한 평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앞서 말한 경험의 눈높이에 비춰보면, 안규철이 지은 집은 최소한으로 축소된 삶의 공간이자, 참 보잘 것 없고 불편하며 궁핍한 처소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몸 편안하게 뉠 수 있는 침대가 있고, 생각에 잠기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으며, 식료품을 포함한 생필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면의 양식인 책을 담는 수납 공간이 있다. 심지어 이 무척 작은 집에는 여느 부유층의 초고가 아파트라 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천창(天窓)이 마련돼 있어, 침대에 누우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대낮의 따스한 햇볕과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빛을 만끽할 수 있다.
바르트(R. Barthes)는 《기호의 제국》에서, 일본의 다다미방이나 공예품 상자가 작은 크기 속에서 극도의 정밀함으로 구축되는 사실을 두고, ‘작음의 정수’를 논했으며, ‘섬세한 희박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요컨대 그것은 사물에서 허식적 의미를 제거하고, 애매모호하게 남거나 쓸데없이 넘치는 일 없이 대상을 틀 짓는 감각이다. 우리는 안규철의 2.6 평방미터 작품에 고스란히 그 ‘섬세한 희박성’이라는 언어를 부여할 수 있다. 거기에는 과잉도 결여도 없는, 딱 그 만큼의 섬세하고 세련된, 그러나 자연스러운 삶의 감각이 물리적이고 물질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건축 자재 중 가장 값싼 재료에 속하는 목재 합판으로 만든 이 작은 집에서 특히 의미심장한 부분은, 중세 성곽의 해자(垓子) 위에 걸리는 다리처럼 전체가 위에서 아래로 열릴 수 있는 벽면 구조다. 외세로부터 보호하는 벽이자 타자와의 교통을 위한 다리 구실을 하는 이 부분이, 그야말로 집의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사적인 공간을 공공에 개방’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안규철이 “도시와 건축물을 설계하는 전문가 집단이 위치한 공간 사옥 안에 가장 아마추어적인 집을 설계”한 목적이, 바로 ‘개인적인 것이 얼마나 공공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성찰토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 국가 내에서 개인의 삶은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공적 구조에 의해 지탱되고 지지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라고 우리 모두는,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국민’으로 호명되는 과정에서 부과되는 각종 의무, 규율과 통제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적 제도, 체계는 아무리 작은 단위의 삶이라도, 아무런 기능이나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소수자의 생이라도 보호하고, 건강하게 유지시켜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황금 성(城)을 찬양하는 지금 이곳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권력, 그리고 소위 전문가 집단은 경제 위기 속에서 거리로 내몰린 노숙자, 미래를 봉쇄당한 채 취업 공부로 도서관을 떠도는 젊은이, 가족도 친구도 없이 공원이나 여관방을 전전하는 노인의 삶에 무책임하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그런 이들의 ‘일상’이 위협받고 있는 데도 말이다. 1970년대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로, 여성-사적 영역/남성-공적 영역이라는 남성 중심사회의 고착화된 이분법을 비판했다. 현재의 우리는 이 구호를 약간 비틀어 ‘개인적인 것이 공공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사회 체제에서 가장 작고 취약한 단위인 개인이 무너지면, 공공 또한 없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규철의 이번 전시에서 다리 형태로 열어놓은 벽은, 그 작고 소박한 거처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아래서 집 잃은 이들, 집을 가질 희망을 빼앗긴 이들 앞에 언제나 문호를 개방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예술가의 실천적 기호다. ‘아마추어적 집’이라고 몸을 낮추는 미술가가 생산한, 한 평에도 못 미치는 사적 건축물이,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구제하지 못하는 빈곤과 실업과 노후 문제를 푸는 ‘실천’인 구체적 근거는 어디 있는가? 〈2.6 평방미터의 집〉을 포함해, 안규철이 전시에 내놓은 세 채의 집이 모두 실제로 거주할 수 있으며, 어디로든 이동 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것들은 미술관의 박제된, 붙박이, 미적 오브제가 아니다. 앞서 그 구조를 자세히 묘사한 박스 형태 집이든, 전시장 입구에 설치한 할로윈 호박 형태의 다각형 집이든, 공간 사옥 안마당의 원추형 집-그 형태는 선사시대 움막 같기도 하고 거대한 치마 같기도 하다-이든, 안규철이 구축한 집들은 ‘이동성(Mobility)’이 좋다.
1980년 대 말 보디츠코(K. Wodiczko)는 〈노숙자 수레(Home- less Vehicle)〉라는 작품을 통해, 당시 뉴욕시만 해도 7만여 명에 달했던 노숙자들이 최소한의 안전과 인권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모바일 주거 공간’을 제안했다. 이때 그는 ‘이동성’을 〈노숙자 수레〉의 핵심 조건 중 하나로 꼽았다. 보디츠코가 고려한 그 조건이 노숙자들의 유동적인 생활 방식을 고려한 것이라면, 안규철의 집이 갖는 ‘이동성’은 딱히 노숙자들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다. ‘1인 가구’라면 누구나 쓸 수 있고, ‘2.6 평방미터’라면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집, 이것이 세 채의 안규철 ‘작품-집’이 함의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위한 집

비슷한 시기,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디자이너 이정혜의 〈주거 연습〉 전시 또한 집과 거주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실제 집’이 아니라 ‘모델하우스’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이정혜는 한국사회에서 아파트 ‘모델’ 하우스가 도리어 우리의 ‘실재’ 집에 대한 관념과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는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말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례가 될 것이다-에 비판적으로 다가선다. 동시에 그러한 현실의 모델하우스 양식을 벗어나는, 세 개의 ‘작품-모델하우스’를 전시장에 가설했다. 건설회사가 아파트 모델하우스로 제시하는 주거 형태는, 보통 ‘4인 가족’이 한 단위가 되고, 동식물은 키우기 어려우며, 격자로 구획된 공간에 기능적으로 배치된 방들에 거주자가 순응하며 생활해야 하는 구조다. 이는 사람들의 무의식 차원에 ‘정상/비정상 가족’이나 ‘인간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새겨 넣고, 사람들의 몸에 ‘피동성’을 부과한다. 이정혜의 ‘3.5평형/14.8평형/0.9평형 모델하우스’는 이에 맞서서,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스턴트맨의 꿈을 가진 남자와 유치원에 다니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가 함께 살 수 있도록 가로로 길고 복층의 구조를 가진 집이 되거나, 요가수행자, 고양이, 앵무새가 자연 공동체처럼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툭 터진 마루와 몇 개의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집이 된다. 또는 광장 공포증이 있음에도 타인과의 교류를 원하고, 고독한 시 쓰기와 자연에 대한 관찰을 동시에 하길 원하는 늙은 시인을 위해 천을 기워 만든 ‘옷’과 같은 집이 된다.
물론 전시장에서 직접 마주치는 이정혜의 모델하우스들이, 모두 이와 같은 작가의 의도를 잘 구현한 건축 모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규철의 ‘누구나, 어디서나’ 실제 거주할 수 있는 집 세 채와 더불어 이정혜의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의 맞춤형’ 모형 집 세 채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생산 라인을 벗어난 생에 대해 꿈꾸게 한다. 우리의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공간감과 미의식은, 이러한 작가들의 ‘예술 실천적 건축물 생산’을 통해서 대규모, 첨단, 효율을 창조적으로 뒤집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정혜 <3.5평형 모델하우스> 혼합재료 2009

변종곤, 스튜디오는 나의 학교, 나의 인생

<Psychodrama> 혼합재료 51×17×57cm 2008

오브제의 마술

글 | 김복기·본지 발행인

변종곤의 뉴욕 스튜디오를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뉴욕에서 변종곤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스튜디오를 방문할 기회는 언제나 바람처럼 비켜갔다. 나는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변종곤의 스튜디오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스튜디오 가 봤지?”하면서 변종곤의 작품과 사람 이야기를 출발하는 것이었다. ‘뭔가 특이하긴 특이한가 보다’는 궁금증이 쌓여갔다. 화가 H는 변종곤 화실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울의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가 최근 나에게 이런 말을 건내줬다. “(변종곤)스튜디오에서 잠을 자다가 밤에 거리로 뛰쳐 나오고 말았다. 박물관 같은 스튜디오 안의 오브제들이 모두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세찬 기(氣)를 내뿜었다. 그 아우성에 눌려서…” 스튜디오란 게 한 예술가의 삶과 창작의 체취가 묻어 있는 물리적 정신적 공간임은 당연할진대, 변종곤의 경우 그 정기가 그렇게도 세차고 세단 말인가. 나는 변종곤 스튜디오를 희괴한 박물관이나 요상한 사원 같은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변종곤의 스튜디오를 실견(實見)해야 했고, 그래서 급작스레 뉴욕으로 떠났다. 나는 케네디 공항에서 곧바로 브룩클린의 변종곤 스튜디오로, 그 베일 속으로 치고 들어갔다.

왼쪽·<백남준> 바이올린 케이스에 채색, 바이올린과 혼합재료 81.2×58×12.7cm 2009|오른쪽·<르네마그리트> 바이올린에 혼합재료 79.6×5.3×15.2cm 2009

“스튜디오는 나의 학교, 나의 인생”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좁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2층과 정원을 합치면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골동품과 공예품, 레디메이드 등 각종 오브제들과 책들이 사람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브제들이 주인처럼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가의 설명인 즉, 300평 건평에 6층 건물은 돼야 모든 물건들을 제대로 진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하나의 오브제들은 대부분 작가의 손길이 마무리된 완벽한 작품이었으며, 더러는 앞으로 작품으로 탄생하길 기다리는 재료이자 모티프인 상태도 있었다. 아예 진열이 불가능해 보물 가방 같은 곳에 차곡차곡 보관해 둔 오브제도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바로 눈 앞에 들어오는 오브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만히 불러나갔다. 비행기, 성경, 불상, 바비인형, 마네킹, 안경, 모자, 구두, 시계…, 아~ 숨이 차다. 만물상이다. 그 종류가 글자 그대로 천태요, 만상이다.
주목할 것은 변종곤이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오브제들의 진열 방식이다. 효과적인 소장과 진열을 위해 오브제들의 정체화 작업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듯, 자연스레 마치 철물점 같이 ‘시각적 유사성’에 따라 오브제들을 배열했다. 비행기는 천정에 매달려 날고 있고, 시계는 벽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종곤의 손길로 조합된 오브제 하나하나로 눈길을 돌리면, 그것은 마치 무차별적인 이종교배의 현장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동양/서양, 성/속, 과거/현재, 고대/현대, 문명/미개, 삶/죽음, 예술/키치, 고급/저급, 모던/프리모던, 싼 것/비싼 것, 무거운 것/가벼운 것, 영원/순간, 남/여, 오리지널/카피, 정지/움직임…등등 서로 이질적인 속성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아이보리코스트의 데드마스크가 피렌체의 천사상과 함께 서 있는가 하면, 워크맨을 귀에 꽂은 예수상이 불상 맞은 편에 서 있고,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있는 예수의 유해가 수퍼맨 복장을 하고 있다. 작품은 비극적이리만큼 해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독설을 품고 있다.
변종곤의 스튜디오는 뒤죽박죽의 카오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작가가 결벽증 환자처럼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정리해 둔 창작의 산실이다. 요컨대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그 혼돈 속의 질서 속에서 작품이 뿜어내는 기묘한 4차원의 세계, 마치 블랙홀 같은 시공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갔다. 미키마우스 인형 속으로 들어가 보니 수수께끼 같은 카프카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다시 맛본다.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아 악몽을 꾼 듯한 기분, ‘부조리’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상황 말이다. 가면을 마주 보았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에서 주인공(톰 크루즈)이 비밀 가면무도회에 들어가 인간 근원의 벌거벗은 성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장면과 오버랩되었다. 어느 나라 불상인지 날 보고 지긋한 미소를 지었다. 2003년 도쿄 모리미술관의 개관기념전으로 열린 〈행복(Happiness)〉의 전시 장면이 떠올랐다. 크메르 왕조의 여인 조각상과 댄 플래빈의 형광등 작품이 열반(Nirvana)이라는 주제로 나란히 걸려 있었다. 10세기 조각과 20세기 추상작품에서 인간 육체의 한계에서 해방되는 지복(至福)의 상태,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______변종곤의 스튜디오는 살아 움직이는 대형 설치작품이다. 미술사에서 설치의 전시 방법을 시도한 사례로 흔히 다다이스트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 바우(Merzbau)’를 꼽는다. 그게 별 것인가. 주변에서 발견한 오브제를 작가의 집 지하실에서부터 쌓아 올려 집 전체를 하나의 환경미술로 제시한 것이다. 공간을 환경화한 것이다. 변종곤의 스튜디오는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60년의 여정을 하루하루 일기를 쓰듯 송두리째 오브제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 공간에 변종곤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변종곤 ‘예술 종교’의 사원이 아니겠는가.
변종곤 이 스튜디오 자체가 거대한 한 점의 작품이다. 오브제들 서로가 맥락을 만든다. 나는 그런 기운을 참 좋아한다. 이 작품, 저 작품 내가 봐도 재밌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공룡을 주웠다. 공룡 뱃속에 작은 도자기, 옛날 애인 사진, 해골, 사람 뼈다귀, 철판을 넣어봤다. 이렇게 별의별 장난을 다 한다. 작품이니 돈이니 미리 생각하면 재미없다. 목적을 떠나면 작품이 마냥 즐겁고 강해진다. 나는 이 오브제들과 하루종일 이야기하며 지낸다. 내 친구들, 내 가족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비평가들은 날 두고 ‘스토리 텔러’라고 부른다. 그렇다. 난 이 오브제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이 스튜디오가 바로 내 학교요, 내 인생이다.

작가 변종곤

1970년대, 극사실 회화에 시대 상황을 담고

______1970년대 말, 나의 미술학도 시절, 변종곤은 당시 한국 화단을 풍미했던 극사실 회화의 선두주자로 큰 명성을 날렸다. 1978년 ‘새로운 형상성’의 기치를 내걸고 민전(民展) 시대를 열었던 동아미술제의 제1회전에서 변종곤은 영예의 대상을 따냈다. 이 무렵 그는 에콜 드 서울 같은 단체전에서도 마치 ‘사진 같은 그림’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줬던 젊은 스타 화가였다.
변종곤 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에 대구로 내려가 선생(대건고)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유신 시절이어서 창작 활동의 규제가 심했다. 나는 그런 규제를 상징화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대구 앞산의 미군 비행장 활주로 풍경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 박정희의 인권 정책에 항의해 지미 카터 대통령이 미군을 철수시킨 뒤였다. 비행장이 마치 폐허의 풍경처럼 황량했다. 혼혈아, 양공주들이 주변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이들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미국의 필요에 따라 어느 날 논밭이 비행장으로 변하고, 그 땅에 3류 문화가 뿌리내리고, 이젠 폐허로 변해버리고…. 반미 감정이 울컥 치쏟았다. 이때부터 숨어서 비행장 기지를 촬영해 그림을 그렸다. 비행장 그림으로 동아미술상을 받았다. 이 무렵 작품 중에는 《타임》지 표지가 빨래줄에 널려 있고, 방독면이 한국의 논밭에 휘날리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또 지하철 계단에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 바람에 날리는 그림도 있다. 미국이 이 땅에 남긴 흔적들, 그 분노의 표적들을 그려냈다. 또 대형 캔버스에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확대해서 그렸다. 타자기는 지식과 언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구다. 유신 독재 상황에서 언론 자유의 통제를 타자기에 비유한 것이다. 또 박정희 암살사건을 다룬 잡지 《타임》 표지가 텅빈 콘크리트 바닥의 어두운 실내에 떨어져 있고, 창이 열려 커튼이 휘날리는 음산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______그는 1981년 돌연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까지 국내 화단과 단절된 채 지냈다. 그는 왜 한국을 떠났을까?
변종곤 장발 단속을 했다. 신체발모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이건만, 신체 일부를 국가가 다스리다니. 자유의 구속에 난 예민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은 시인이고 화가였는데, 왜 우리 예술가들은 누드나 그릴까? 이 무렵 나는 사회적 이슈를 다룬 위험한(?) 작품을 그렸기 때문에 주위에서 “당신 잡히면 끝장이다”라고 걱정했다. 정보기관에서 전화가 걸려와 그런 그림 그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정국은 전두환의 군부통치로 치달았다. 결국 피하는 게 좋겠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______변종곤은 왜 하필 미국으로 떠났을까? 당시 한국과의 미묘한 갈등, 반미 감정을 작품에 쏟아내던 그가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변종곤 프랑스는 역사가 너무 아름다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미국은 팝아트와 자연스레 연결되어 내 작품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1인용 전기밥통 하나에 옷하고 물감만 챙겨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뉴욕에 도착했다. 3년 동안 할렘의 빈민가에서 비참하게 생활했다. 히터도 수도 시설도 없었다. 수시로 살인사건이 일어나 길바닥에는 늘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때 나는 혼자 이렇게 읊조리며 다녔다. “죽음을 호주머니에 넣고 사는구나.” 그러나 무얼 그리든 제약을 주지 않는 자유가 있어 행복했다. 돈이 없어 물감을 살 수가 없었다. 드라이버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 냉장고,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뜯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곤 인간이 만든 기계는 모두 인간을 닮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계가 사람 뼈 같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 같기도 했다. 너무 외로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재료의 혼합, 이거 참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오브제를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할렘에서 느끼고 체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그때 내 예술 인생의 구호가 필요했다. 나는 외쳤다. “신이시여! 날 얼마나 좋은 작가로 키우려고 이런 고난을 내려주십니까?” 그때부터 나는 어떤 고난한 상황이 와도 인생을 행복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Sotheby's> 혼합재료 46×83×63.5cm 2008

할렘의 어둠이 ‘창작의 빛’이 되다

______변종곤의 오브제 작업은 빈한한 현실 생활의 배경에서 탄생했다. 마치 파리의 이응노가 경제적 절박함에서 콜라주를 시작한 것처럼, 우연하지만 운명 같은 계기가 작용했다. 아무튼 남의 나라 땅에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한국 미술가들의 해외 체류사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변종곤의 뉴욕 생활도 하나의 드라마와 같다.
변종곤 아트스튜던트 리그에 다녔다. 집에서 100블럭 이상의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어느 날 커피를 마시다 돌연 쓰러지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데다 너무 많이 걸어서 탈진한 것이다. 깨어나보니 안면이 있는 한국 아주머니가 200달러를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다. 내 처지가 너무 부끄러웠다. 결국 돈을 되돌려 드리고, 그날부터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그래서 3개월간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나는 산 짐승 목을 따는 게 너무 힘들었다. 길거리 지나가다 나도 모르게 개미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시력이 나빠 늘 손을 다쳤다. 주인이 생선 목을 자르지 말라고 했는데, 목을 잘라 싸우고, 배달 잘못 해서 문제 일으키고….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피묻은 손을 비닐로 감싸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흉흉한 행색 때문에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중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할렘가 풍경〉을 생선가게 뒷벽에 걸어두었다. 어느 날 그 작은 그림을 한 신사가 ‘발견’하면서 내 삶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이 신사가 내 그림을 여기저기 주선해 3만 달러나 팔아줬다. 당시 3만 달러면 소호의 작은 빌딩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이 분이 리버데일(Riverdale)갤러리를 운영하던 핼뮤트라는 갤러리스트였다. 덕분에 나는 작품 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분이 나한테 말했다. “마음대로 작품 해라. 마음껏 경험해라. 자유없는 나라에서 30년 살았으니 이젠 풍부하게 인생을 즐겨라.” 그는 내가 제일 어려웠을 때 운명처럼 만났던 아버지 같은 분이다. 지금은 은퇴해서 복원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______변종곤은 1985년에 처음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 이후 재미화가라는 타이틀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쳤다. 변종곤 작품의 뿌리에는 언제나 동양의 전통, 한국의 정신이 깔려 있다. 그는 자주 자신이 몽골리안의 후손이며 기마민족의 후예인 한국인임에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는 언제나 고향을 느끼며 고향을 만나며 살고 있다.
변종곤 첫 개인전에서는 아이들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 때문에 고통이 컸다. 길을 지나다 인형을 주웠다. 몇 년간 얼굴을 시계로 바꿔 소리나는, 기계 부속 같은 어린이를 만들었다. 내 작품은 근본적으로 인간 이야기다. 그래서 작품이 모두 인간을 닮았다.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나는 이 일을 평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일만 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가 있으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내 작품을 두고 다른 사람들은 서양 작가를 거론했다. 나는 그런 작가의 작품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 오브제로 작품전을 열었는데, 뉴욕 사람들은 동양을 잘 몰랐다. 어쩌면 그게 결국 나한테 유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깊이는 부족하지만 불교 같은 동양의 종교에 대한 감성이 풍부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는 날 데리고 다닐 때 자기보다 큰 돌이나 나무가 있으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셨다. 큰 달만 뜨면 길거리에서 엎드려 절을 하셨다. 자연 숭배가 삶 속에 배어 있었다. 절, 교회, 성당을 다 다녔다. 어릴 때였으니까…. 교회는 공포였다. 절의 지옥도도 너무 무서웠다. 그런 오랜 문화적 체험이 내 삶과 작품을 동여매는 풍부한 끈이었다.
______오브제 작품의 대표 시리즈라 할 수 있는 현악기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어떤 작품 시리즈보다 대중적 상업적 인기를 누리는 작품이다.
변종곤 바이올린을 보니까 여성의 나체를 닮았더라. 바이올린을 벽에 걸어두니 이 물건이 날 유혹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아주 민감한 감정을 던져줬다. 그래서 푹 빠지게 되었다. 작지만 집중력이 아주 강하다. 이 완벽한 조형, 그 재미에 빠졌다. 바이올린 작품은 전시 오픈 때 작품이 매진됐다. 고상하고 품위 있어 결혼 선물로 최고라는 것이다. 그때 그림이 아주 잘 됐다. 손놀림이 좋았다. 재주를 한껏 부렸다. 달콤한 유혹이 너무 많았다. 작품이 경제적인 도움을 주니까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 때가 작가로서는 위험하다. 이래서 작가가 망하는구나 싶었다. 이러다간 도장 파는 사람 비슷하게 되겠다 싶어 바이올린 작업을 멈췄다. 원래 취지와 달리 돈벌이했다고 반성하고 한참 동안 바이올린을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콘트라베이스와 대결하면서 좀더 진지해졌다. 이건 바이올린과 달랐다.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악기가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줬다. 악기는 마모가 되어야 한다. 금이 간다든지 그 나름의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우선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 악기와 내가 서로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악기를 꼭 비싼 돈으로 구입한다.

사진가 전세창이 변종곤의 뉴욕 작업실 풍경을 콜라주한 사진 작품. 변종곤이 수집한 각종 오브제를 비롯해 그의 독특한 삶의 풍경을 알 수 있는 작업물이다.

창작의 영감은 여행, 서점, 벼룩시장

______골동품이나 민예품 같은 오브제는 모두 어디에서 수집한 것일까.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예사롭지 않다. 또 오브제에 결합한 소품들은 패션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 변종곤은 미술뿐만 아니라 주변 문화 장르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변종곤 내 그림 공부는 여행을 통해서 이뤄진다. 인도 페루 아마존 이집트 아프리카 등 수십 년간 세계 여러 지역의 문명을 경험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맨해튼의 스트렌드(Strand) 서점에 간다. 또 벼룩시장을 찾아다니거나 음악회에 간다. 옷가게에 가서 패션 디자이너들과 자주 만난다. 그들은 계절을 앞서 사는 민감한 감성을 지니고 있어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영화, 건축, 패션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내 작품의 표현이 더 풍부해진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축적되니 세상을 보는 폭이 넓고 깊어진다. 나는 그 경험에서 흘러나온 아이디어가 넘쳐 나서, 그게 너무 재미있어 마법에 걸린 듯 환자처럼 스튜디오에 파묻혀 산다. 나는 오직 나한테만 시간을 투자한다.
______물건에 대한 집착, 사물에 대한 호기심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변종곤은 성장기에 어떤 시각 체험을 겪었을까? 미술 수업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변종곤 나는 2남 3녀의 막내였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는 부유하셨고, 아주 당당한 여성이셨다. 나는 일본 집에서 스시와 우동, 바나나를 먹고 다녔다. 귀족처럼 살았다. 동네 주면에 화려한 요리집이 많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입술 연지를 바른 예쁜 얼굴의 기생들이 요리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아주 자유분방하게 키우셨다.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가 제일 행복했다. 할머니께서는 늘 톰보 연필, 사쿠라 물감을 준비해 주셨다. 그림 교재는 책과 패션 잡지였다. 할머니가 미군 PX에서 쓰는 카탈로그를 가져다준 적이 있다. 그 카탈로그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천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초콜릿에서부터 보트, 믹서, 세탁기 등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나는 그 물건들을 들여다보며 꼼꼼히 그려봤다. 그 물건들과의 대면은 내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대구 중심가의 만경관 극장 근처에 집이 있어서 극장 앞에서 늘 그림을 그렸다. 혼자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놀이가 그림 그리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내공이 터졌다. 학생 때 대단히 유명했다. 전국 실기대회에서 국회의장상, 내부부장관상, 문교부장관상 등 큰 상을 휩쓸었다. 고3 때 영남일보 후원으로 경북 문화공보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실기대회 나가면 다른 학생들이 자기 그림은 그리지 않고 내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곤 했다. 이런 유명세 때문에 결국 대학 들어가니까 교수도 우습게 보였다. 오만함이 작용하니 학교 생활이 문제였다.
______변종곤의 작품을 서양 미술사의 맥락에서 이야기할 때, 흔히 많은 논자들은 입체 작품의 경우 레디메이드나 아상블라주(assengblage) 같은 기법을 끌어들인다. 오브제와 오브제를 연결하는 조합은 작가의 의도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이고, 그 개입의 과정이 곧 예술이다.변종곤은 오브제 조합에 마술 같은 전략을 구사한다.
변종곤 나는 그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오브제가 모두 다 재미있다. 미국에 와서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무연탄 말고는 버리는 걸 보지 못했다. 버린 물건들을 주워 하나하나 뜯어 봤다. 나는 시간의 흐름이 담겨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나는 오브제 하나하나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주인한테 버림받은 이 오브제들은 얼마나 화가 날까? 그래서 오브제를 서로 결합해 봤다. 용도가 폐기된 오브제의 새로운 탄생,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나는 생명 탄생의 신비 같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오브제는 생명체다. 그래서 여행할 때면 집에 있는 오브제한테 꼭 인사를 나누고 떠난다. 한 식구들처럼 친하게 지낸다. 그러니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그저 재미있다. 버려진 것까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니까 정신이 아주 건강해진다. 오브제에의 몰입, 이게 내 종교라면 종교다.

오브제의 결합, 새 생명이 탄생하다

______변종곤 작품의 요체는 오브제와 오브제의 결합, 아상블라주다. 그러면서도 변종곤은 그린다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화와 오브제가 만난다. 그래서 변종곤의 작품은 앙상블라주(ensengblage)라는 용어가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미술의 제왕인 회화의 혈통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변종곤 나는 시력이 아주 나빠 돋보기를 대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큰 작품은 몇 달간 걸려 완성한다. 닮게 그리는 일은 아주 쉽다. 나는 그저 그림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날 추스르는 방법으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힘들 때, 나를 스스로 보살펴야 할 때, 흐트러진 나를 다시 모아야 할 때, 나는 오브제 작업보다 그림을 그린다. 내가 사실 묘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때는 머리털이 바짝 선다. 나를 들여다 보는 일, 요컨대 참선하는 일과 같다. 사람들은 내 그림이 완성도가 있기 때문에, 오브제도 완성도가 있는 것으로 좋게 평가해 준다. 나는 에어 브러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세필로 그리는 손 작업이다. 그린다는 건 미술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고향이 있어 나는 언제나 두렵지 않다.
______변종곤은 《뉴욕 타임즈》에 큰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 그는 뉴욕 화단에서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그는 뉴욕의 소수 인종으로서 과연 주류미술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일까?
변종곤 뉴욕은 흑백논리의 세계만 통한다. 회색지대는 없다. 뉴욕에는 수많은 부자들이 거주하는가 하면, 수많은 빈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도시 경관은 흠잡을 데 없지만 지하도와 골목길은 먼지와 악취로 들끊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색다른 인종적 색채와 분위기를 만난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이다. 거기서 느끼는 삶의 이중성, 아이러니, 극단성이 나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물론 주류미술에 편입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지금까지 개인적인 노력으로 5개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30여년을 살았지만, 언제나 뉴욕은 타향이고 객지다. 그래도 개인적인 작품 발언은 언제나 중요하다. 가능성을 버릴 수는 없다. 이런 기운으로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다. 미국에서 나는 세금 잘 내는 만큼 큰소리치며 잘 살고 있다. 어깨 펴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너무 아름답다.” “너무 재밌다.” 변종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그의 상용어. 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사물에 대한 변종곤의 호기심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란 삶에 대한 호기심,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반응이 아닐까. 그 결핍이 채워도 채워도 결코 성이 차지 않는 변종곤의 창작 욕구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예술적 표현의 결핍이야말로 그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덕목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사실 변종곤의 작품을 대할 때면 데페이즈망, 오브제 트루베, 아상블라주, 네오 다다, 인용, 혼성모방, 이종교배 같은 20세기의 미술용어가 정신 없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그렇다. 어쩌면 그의 작품은 저 길고 긴 모더니즘의 진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혁신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미술사조가 모두 섞여 있는 일종의 형식적 혼성 혹은 ‘잡종성’, 그 시각적 충격 요법이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변종곤은 그 충격 요법의 즐거움에 단단히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종곤은 그림이라는 전통의 표현 무기를 존중하고 고수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그 오브제의 혼성에도 하나의 분명한 질서가 있다. 그것은 역동적 균형이랄까, 서로 대립되는 듯 보이면서도 결국 하나를 이루는 카오스모스, 요컨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 부를 만하다. 분명한 것은 변종곤의 작품 문법과 정신이 서구 미술의 문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변종곤의 거대한 ‘스튜디오 작품’이 1989년에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렸던 〈대지의 마술사들〉 같은 전시의 기획 이념과 아주 유사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 전시는 지금까지 서양에 의해 억눌려 왔던 다른 문화의 문맥을 존중하고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종래 프리미티비즘이나 민속미술품으로 규정했던 제3세계의 미술에, 서양의 현대미술과 완전히 등가(等價)의 시점을 제공한 획기적인 전시였다. 무엇보다 1990년대 ‘문화 다원주의’의 논의를 활짝 열었던 기념비적인 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비평가들 사이에서 흔히 ‘현대 문명의 비평’이라 평가받는 변종곤의 작품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변종곤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명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문명의 정복자보다 피정복자의 목소리를 증폭시킨다. 동양인으로서 서구를 조롱하고, 버려진 물품의 생명을 되살려 현대 소비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변종곤의 작품은 문명 ‘비판’뿐만 아니라 문명 ‘찬양’ 쪽으로도 문을 열어 두고 있다. 익살과 독설이 공존하는 ‘현대판 풍자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변종곤은 동양과 서양, 문명과 미개, 주류와 비주류 등등의 대개념을 어느 하나 절대 우위에 두기보다는 상대적 가치로 바라보면서, 마침내 그의 예술은 대개념 모두가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계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변종곤은 동서고금과 시공을 가로지르며 이 세계 문명의 가치를 상대화하며 인류사를 다시 쓰고 있다. 절대 가치, 절대 진리에서조차 벗어나 ‘절대 자유’를 구가하는 예술로!

표미선 15대 한국화랑협회 회장

<제27회 2009 화랑미술제-부산> 전시 광경. 2009 화랑미술제는 24,813명의 관람객과 32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표미선 15대 한국화랑협회 회장

한국을 ‘미술거래 중심지’로

글 | 이성희 기자

art 이번 회장 선출은 ‘경선’이 아니라 ‘추대’ 형식이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미선(이하 표) 회장직은 ‘봉사’하는 자리다. 그래서 투표라는 형식과 절차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많은 분들이 나한테 회장직을 권유할 때, 나는 경합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최선을 다해 소신을 펼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회장이 되었다.

회장 취임 첫 임무, 부산 화랑미술제 성공적 개최
art 화랑협회의 주요 사업은 화랑미술제, KIAF, 미술품 감정이다. 작년 말 국회를 통과한 양도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큰 과제다. 우선 회장 취임 후 화랑미술제를 첫 행사로 치렀다. 지방미술 활성화를 취지로 부산에서 개최한 2번째 행사다. ‘KTX아트열차’, 젊은 작가 60여 명의 100만 원대 작품으로 꾸민 <아트인부산> 등 이색적인 기획으로 주목을 끌었다. 작년에 비해 매출은 부진했지만 미술시장의 봄 기운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예산 확충이었다. 부산시와 벡스코에서 40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확충된 예산으로 협회 회원사에게 숙박 을 지원했다. 부산에서 행사를 개최하면서부터 대다수 참가 화랑들은 부스비 외에도 숙박, 교통 등 기본 경비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이나 위성 도시 컬렉터들을 부산으로 유치하기 위해선 아트페어 현장에서의 작품 관람 외에도 관심을 끄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로 생각한 것이 원로 작가들과 만나는 기획이었다. ‘KTX아트열차’ 프로그램을 마련해 원로 작가들과 컬렉터와 미술인들이 함께 격의 없는 담소를 나누고, 또 이주헌 선생의 강의도 들으며 알찬 시간을 가졌다. <아트인부산>은 참여 화랑들이 젊은 유망주 두 작가씩을 추천해 200만 원 이하 작품을 소개하는 특별전이었다. 출품작이 거의 매진되는 예상 외의 성과를 올렸다. 내년에는 화랑미술제를 연 2회 개최할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art 9월에 KIAF가 열린다. 취임 후 협회 업무 공약에서 KIAF의 국제적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이를 위해 정부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KIAF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히기 위해선 국내 참여 화랑의 질적 관리가 절대 필요하다. 2008년 KIAF 참여 화랑 선정과 관련해 탈락 화랑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좋은 작가를 발굴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 화랑의 바람직한 역할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화랑들은 눈앞의 이익을 쫓아 명분을 버릴 경우가 많다. 일부 화랑들 중에는 수준이 떨어지는 작가들에게 부스를 팔아 아트페어 경비를 충당하는 행태가 남아 있다. 이런 수준 미달의 작품이 KIAF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올해는 작가에게 부스를 파는 행위를 근절시킬 것이다. 작가 수준을 담보하기 위해 평론가들이 유망 작가를 선발하고, 참여 화랑이 그중의 작가를 선택해 KIAF에서 출품하는 방식을 시도하고자 한다. 화랑들에게 이후에도 출품작가와 관련해 어느 정도 권리를 보장해 줄 계획이다. 작품의 격이 생기면 화랑도 자연스럽게 격이 올라간다. 올해 KIAF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출품작의 ‘질’ 관리다.
art 2007년에 시장 상승의 정점을 찍었던 KIAF는 2008년 행사 개최 직전에 터진 미국발 금융 위기로 실적이 부진했다. 올해는 환율 폭등과 경기 침체로 해외 화랑 유치가 쉽지 않을 것 같다.
5월에 열릴 홍콩아트페어를 준비하면서 부스, 호텔, 운송 등 제반 경비를 계산해 보니 1억 원이 넘게 생겼더라. 환차 때문에 경비가 30% 이상 더 소요되는 것이다. 아무리 판매를 잘 한다고 해도 며칠 사이에 어떻게 1억 원의 수익을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달러 강세로 KIAF에 참가하는 외국 화랑은 한국에서 지출하는 1차 경비를 30% 절감할 수 있다. 우리로서는 좀 슬픈 현실이지만 외국 화랑들에게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상반기에 열리는 가장 큰 아트페어인 홍콩아트페어의 성과가 하반기 KIAF의 흥행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KIAF는 문광부의 작품구입 예산(미술은행제도)이 이미 확보돼 있고, 관세와 거래세가 없는 메리트가 있다. 작년에 판매가 부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절반 이상의 외국 화랑들은 좋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일본 화랑들의 실적이 아주 좋았다. 독일과 스위스 화랑 몇 곳은 다른 아트페어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현재 60개 해외 화랑이 참가 의사를 밝혔는데, 계속 추진 중에 있다.
art 2009 KIAF의 주빈국은 인도다. 어떤 행사를 계획하고 있나.
현재 인도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가 인도 화랑들에 부스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해도, 인도측은 운송비와 체재비 부담 때문에 참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도 주빈국 행사 대신에 인도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특별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큐레이터 가야트라 신야에게 기획을 맡겼다. 특별전 예산은 3만 달러 정도 예상하고 있다.
art 화랑협회의 큰 사업 중 하나가 미술품 감정이다. 이 사업은 감정의 전문성, 신뢰도 문제가 관건이다. 화랑협회와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 두 기구간의 감정 업무 제휴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내가 회장이 되기 전에 제안했던 내용이다. 그렇지 않아도 감정 전문 인력이 부족한데, 두 기구를 분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가들의 전문적 안목과 화랑주들의 오랜 실무 경험을 합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구상 계열의 작품 감별에는 자신 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미술품감정을 감당할 수는 없다. 나는 28년 동안 화랑을 경영하면서 박수근 작품을 6점밖에 취급해 보지 못했다. 때문에 박수근 작품의 감정을 할 수 없다. 그림을 돈으로 취급해 본, 그래서 사업적 책임을 맡아 본 화랑주가 가장 정확하게 작품을 감정할 수 있는 법이다. 국내에 감정 전문 인력은 모두 합쳐도 20명 정도다. 이들이 전부 머리를 맞대고 감정 업무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화랑협회의 역사와 경험, 감정협회의 연구 업적과 아카이브. 각 기관이 가진 특성을 유지하고 존중하되, 실제 감정 업무만 같이 하고 있다. 이익은 정확히 반으로 배분하고, 20%는 감정 발전기금으로 쓰기로 했다. 앞으론 ‘시가 감정’에도 주력할 생각이다. 최근 청와대에서 500점 정도의 시가 감정 의뢰도 들어왔다.
art 미술시장 경기가 좋을 때 화랑협회와 경매회사 간에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경매회사와 화랑이 공생할 때 건전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겠는가.
물론 경매회사가 부흥하면 미술시장이 살아난다. 다만 한국의 경우, 화랑이 경매회사의 대주주가 되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 앞으로 이런 구조는 조정해야 할 것이다. 1차 시장(화랑)이 존재해야 2차 시장(경매)이 존재한다.

‘아트텍스 프리존’, 외화벌이의 지름길
art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미술품 양도세와 부가세 부과 방안은 미술계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화랑협회는 어떤 자구책을 구상하고 있는가.
미술품 양도세를 2011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추이는 지켜봐야 한다. 20억 세원을 벌어들이기 위해 1000억 원의 ‘문화 자산’을 소비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사그라진 미술판을 다시 살리고, 문화를 살리려면 20억 세금보다 몇 십 배 큰 돈이 필요할 것이다. 작품 ‘사는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사는 사람’에게 세금을 물리면, 미술시장을 죽이는 거다. 100만 원짜리 옷이나 보석을 사는데, 이름도 적고, 세금도 내라고 하면 누가 사겠는가. 나는 오히려 ‘아트텍스 프리존(Art-tax Freezone)’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art 아트텍스 프리존은 무엇인가.
한국을 국제적인 미술 거래 중심지로 만들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미술품 거래에 세금 면제 혜택을 부여해, 외국인들이 한국 은행계좌를 통해 작품을 사고팔 수 있는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국내 화상들에게는 당연히 세금을 부과해야 할 것이다. 이 제도는 특별한 천연자원도 관광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안다.
art 예술특구 조성에 대한 얘기가 구체적으로 들린다. 중국의 798단지나 미국 산타페의 아트밸리가 모델인데, 특히 지자체와 연계해 사업을 펼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인천 영종도, 강원도 정선시가 대상지로 거론되고 있다. 국내에 처음 생기는 아트밸리라면 무엇보다 접근성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여러 시에서 제안이 들어와 타진 중에 있다. 접근성을 고려했을 때, 국제공항을 끼고 있는 인천이나 서울에서 1시간 30분 거리 이내 지역에 제1의 예술특구가 만들어져야 한다. 예산과 기본 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되어 있느냐가 중요하겠다. 적어도 중심 도로엔 50~100개의 화랑들이 1차 시장을 형성하고, 그 뒤에 작가 스튜디오와 화방, 아트숍 등의 2차 산업이 모여야 할 것이다. 3차로 카페, 레스토랑 등의 부대시설, 4번째로 미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이 4가지 요소가 합쳐졌을 때 바람직한 예술특구가 형성될 것이다. 미술관이나 문화 시설 등을 기본적으로 갖춘 구조라면, 아트밸리가 10만 평 정도만 조성돼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복합 문화가 공존하는 아트밸리는 미술계에 활력을 줄 뿐만 아니라 관광 메카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외국 관광객은 물론 컬렉터, 화상들도 자연스럽게 한국을 찾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트밸리 안에서는 아트텍스 프리존이 실행되어야 한다.
art 화랑협회 신임 회장으로서 새로운 사업 구상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화랑 경영은 어떠한가. 표화랑은 중국 진출에 이어 LA까지 뻗어나갔다. 또 국내 최초로 출시한 아트펀드는 어떤 상황인가.
우리가 운영하는 아트펀드는 수익률이 좋은 상황이다. 표화랑은 국제 활동의 중간 거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진출했다. 국제 미술계의 주요 인사를 초청하려면 한국보다 중국이 더 용이하다. 조나단 보로프스키를 한국에 초청하긴 힘들었는데, 중국으로 초청했더니 바로 승낙을 받아냈다. 기존의 지우창에 있는 화랑 이외에 798에 하나 더 오픈하게 됐다. 미국 진출은 뉴욕에서 승부를 걸기가 힘들다고 판단해 LA를 선택했는데, 현재 아주 희망적이다.
art 화랑협회의 중장기 비전을 실천하려면 어깨가 무겁겠다.
요즘 우리 화랑일은 거의 돌보지 못하고 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 회장을 맡은 만큼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KIAF를 성공적으로 치러야 하고, 이후 아트밸리 조성과 아트텍스 프리존 등을 꼭 실현해 한국을 아시아와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다.
art 화랑협회의 발전과 미술시장의 불황 탈출을 기대한다.

한국화랑협회 사무국 직원들 모습

2009 May Special -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30년을 다시 본다

<제1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전시 광경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30년을 다시 본다
현대 판화의 무한한 가능성, 오리지널 개념의 새로운 논의

글|박성태·공간사 상무이사

“공간사가 왜 국제판화전을 하세요?”

2004년, 그러니까 13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유명 작가였던 그는 첨단 뉴미디어 시대의 순수 판화의 영역은 점점 축소될 거라며 좀 더 현대미술의 현장을 이끌 수 있는 ‘새끈한’ 행사로 바꾸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당시의 한국 미술계는 화랑-옥션-아트페어로 이어지는 미술시장의 호황 속에 판화의 위상은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상태였다. 신문 지상에는 어느 옥션에서 누구의 작품이 수억 원에 낙찰됐고, 어느 ‘블루칩’ 작가의 전시가 시내 어느 화랑에서 열리고 있고, 아트페어에는 사상 최대의 관객과 최고의 판매액을 보였다는 기사로 채워졌다. 이런 환경 속에서 판화가 설 자리는 크지 않아 보였다.
그 당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판화는 회화의 자매품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수명을 다한 예술 장르일까? 판화가 갖는 일상성은 결국 무의미한 것인가? 판화의 복제성과 간접성은 디지털 시대와 호흡할 수 없는가?” 아시아 지역에서 대표적인 판화국제전을 진행하는 실무 담당자로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절실했다. 더욱이 13회 행사의 출품 국가와 작품 수가 46개국 542점으로, 12회의 63개국 1,029점에서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자 그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돈선필 <상처와 공격> 아쿼틴트 에칭 90×60cm 2008_대상 수상작

왜 판화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익히 알려졌듯이, 현대미술사에서 판화는 타 장르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표현 영역을 확보해 왔다. 다른 복제 예술인 사진이나 디지털 작품도 확연하게 다른 수공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판화는 복제성 대중성 등과 관련하여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그만큼 사회적 접점도 다른 장르보다 넓다. 판화의 복수성 또한 뉴미디어와 쉽게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특성 중 하나다. 이러한 점들이 다원화된 디지털 시대에 더욱 판화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미래적 가능성을 확인해 주는 속성이기도 하다.
중앙대 김영호 교수는 판화에 대한 밝은 전망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평론가다. 그는 2008년 KIAF 발제에서 “판화가 비단 ‘회화적 표현 형식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부수적 차원의 논의를 넘어 ‘동시대 예술의 경향성을 대변’하는 중심적 매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고 평가하며, “디지털 미디어와 더불어 점차 심화되고 있는 복제시대의 총체적 예술 형식으로서 판화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할 산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 현대미술사를 논의할 때 판화는 거의 열외였다는 점이다. 미술사에 본격 편입되지도 못했고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론서도 거의 없다. 한국의 대표적 판화작가에 대한 소개나 그들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비평도 드물다. 판화보다 역사가 짧은 미디어아트나 설치미술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 이론서가 출간되는데 반해, 판화 관련 서적의 대부분은 판화의 제작 방식과 감식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에 머물렀다. 판화계 내부에서는 원작에 대한 논의만을 반복했고, 이를 미술시장에 대응하는 초보적인 전략으로 삼았다. 미술사가 김정락은 이에 대해 “진정한 논의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하면서 판화는 상대적으로 저급한 장르처럼 치부됐다”며 “더군다나 작품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도 회화에 비해 가볍다”고 비판했다. 결국 미술 장르로서 진지한 논의 대상에서 소외된 판화는 그 예술성을 인정받는 기회도 적었고, 그로 인해 판화에 대한 무관심과 낮은 가격이 지속됐다. 판화의 형식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위에 펼쳐보여야 할 내용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케이스케 야마모토 <계단 G> 석판화 60×85cm 2008_우수상 수상작

판화의 본원적 속성과 미학적 가능성 탐구

&lt;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gt;에서도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판화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주제의 혁신성과 창의성에 대해서는 유연한 시각을 유지했고, 반면에 복제성과 간접성은 비교적 ‘원칙적’으로 논의해 왔다. 특히 출품작 크기를 10×10cm에서 전지 크기로 확대한 2002년부터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본격적이고 치열한 토론의 장을 열어 왔다.
&lt;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gt;의 산파이자 오늘까지도 운영위원으로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윤명로 선생은 “손에 의한 장인정신의 존중”, “복수예술로서의 창작판화의 대중화”, “창의성 높은 우수 신인의 발굴” 등을 판화 전시의 근간으로 제안하면서도 예술성과 창작판화의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디지털판화를 수용하는 것을 적극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올해의 일본 심사위원 노다 테츠야는 “새로운 컴퓨터 기술이 판화 제작 방법과 우리의 사고를 혁신시켰다”면서도 “예술가의 손길은 아직 중요한 요소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반해 2002년 대만 심사위원 리아오 시오우 핑은 “작가들이 프린트 기법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작품의 창의성에 보다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2004년 미국 심사위원 크리스틴 스판젠버그는 “작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기법이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년 판화전의 일본 심사위원 케이세이 고바야시는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를, 미국 심사위원 아넷 딕슨은 “작품에 표현된 아이디어가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려고 했다면서 무엇보다 작품성을 중요시했다. 위와 같은 공개적인 발언 이외에도 수시로 열렸던 운영위원회나 심사위원단 회의에서는 보다 진지하고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올해는 제15회를 맞아 이런 논의를 확장, ‘오리지널 판화, 아직도 유효한가?’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심포지엄을 준비한 한운성 운영위원장은 “21세기 영상시대에 판화의 역할과 한계에 관해서 국제적인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다”면서 “디지털 이미지가 전통적인 회화 이미지를 대체해 나가고 있는 작금의 세대에 과거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오리지널판화에 관한 정의가 과연 현시점에서 아직도 유효한가 아니면 사장되고 퇴색된 정의에 불과한 것인가를 논의해 보는 것이 본 심포지엄의 의미”라고 밝혔다. 디지털 기술의 대중화와 다양한 혼합매체의 두각 속에서 판화의 본원적 속성과 미학적 가능성을 설문과 전문가 발제로 보다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자는 것이다.

민지에 장 &lt;무제 No.4&gt; 목판화 76×86cm 2008_우수상 수상작

판화 오리지널리티의 새로운 개념들

첫 번째 발제가인 일본 타마미술대학 교수이자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커미셔너였던 미나토 치히로는 일본 작가 마사오 오카베의 작품을 중심으로 ‘오리지널’에 대한 신선한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탁본 또는 문지르기라는 기법을 통해 히로시마의 역사를 오늘날로 다시 끌어들인 마사오 오카베의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작품과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해 제작한 베니스의 옛 흔적을 담은 탁본 작품을 예로 들면서 “모든 것은 판이 될 수 있다. 결과물이 아니라 탁본을 뜨는 행위와 촉감 경험, 기억 자체가 작품이다”라는 오리지널의 개념을 제시했다. 탁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판화의 형태인데 그 판의 개념을 확장하면 판화의 복제성과 간접성에 새로운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판화 이론가 브레다 스크랴넥은 류블리아나그래픽비엔날레의 주된 실무자로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경향의 판화 작업을 보여주면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가, 어떤 주제를 다루는가에 따라 제작 방식이 선택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의 형태 또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그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작품의 사회적 영향력은 무엇인가?”라는 쪽으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판화가 작은 평면을 벗어나 공공미술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행동으로서의 공동 작업으로 확대된 예들도 소개했다.
미국 휘트니미술관 판화 드로잉 전문 큐레이터인 카터 포스터는 미국 작가들의 최근 판화작업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한편에서 제기되고 있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논란을 소개했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을 예로 들면서 매체가 콘텐츠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고, 판화가 가지는 본원적 속성의 범위를 다른 매체와의 교차(crossover)로 확장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리처드 프린스, 아담 헴즈, 글렌 라이곤 등 미국에서 활동 중인 몇몇 유명 작가의 작품을 예로 들면서 ‘유네스코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가 도전받고 있는 상황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특히 판화의 복제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받아들인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한정 복사할 수 있는 포스터 설치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나누어 주는 행위 자체가 복제라는 예를 들기도 했고, 로버트 고버가 제기하는 작가 서명의 문제도 언급했다.
김영호 교수는 사무국이 실시한 설문을 정리해 오리지널 판화의 논쟁을 소개했다. 그는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환경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확산된 판화 개념은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끈을 연결시키는 통로”라며 “디지털 프린트와 사진 그리고 인쇄기법 등을 판화의 기법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설문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100명의 판화가, 큐레이터, 판화 전문 딜러 등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설문 내용은 9개의 객관식 문항과 1개의 주관식 문항으로 구성됐다. 설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비엔나 규정이 명시한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가 63%, ‘들어본 적이 있다’가 25%로 응답해 총 응답자의 87%가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규정이 자국에서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가 42%, ‘부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가 55%로서 총 97%의 높은 비율로 비엔나규정의 건재를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유효하게 통용되어야 된다’는 입장도 83%의 지지율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여전히 오리지널 판화의 필요성에 지지를 보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리지널 판화의 필요성에 대한 지지와는 별도로 시대적 변화 추이에 따라 유네스코 <국제조형미술협회>가 1963년 제시한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는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중론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서 디지털 이미지와 뉴미디어 이미지가 판화의 범주에 수용되고 있는 추세이며 이에 따라 전통적인 ‘판’의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전체 응답자의 33%)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개념이 부족하면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매체의 특성에 부합하는 주제를 담아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 판화 또한 그 정의가 모호해지고 허용 범위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다른 장르와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도 그 변화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회가 거듭될수록 참가 작가와 작품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전통 제작 방식으로 제작한 판화만 참여시키고 있다. 많은 분들이 조언해 주셨듯이 제작 방법이 중요한 잣대는 아닐 것이다.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판화에 애정을 갖고 꾸준히 길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를 다양한 생각 속에 빠지게 하는 좋은 판화 작가와 작품을 더욱 많이 만날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공간대상의 국제판화전으로 시작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는 1980년 제5회 공간대상의 <국제판화전>으로 시작됐다. 공간대상은 한국 현대미술과 문화예술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 공간사가 벌이던 일련의 사업이었다. 4회까지는 국내 작가를 대상으로 공모하다가 5회에 국제적인 규모로 확대하면서 <국제판화전>의 형식을 갖게 됐다. 판화 작품이 비교적 제약 없이 교류 가능하다는 점에서 당시의 국제 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위상을 점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르였던 것이다.
초기의 비엔날레는 더 많은 해외 작가의 출품을 유도하기 위해 윤명로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10×10cm의 작은 크기로 한정한 것이 큰 특징이었다. 소형 판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예술성은 대형 판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작용했고,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판화비엔날레 등 다른 국제전과의 차별성도 자연스레 갖게 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 세계 28개국에서 758점이 응모한 것이다. 공간사옥 곳곳에 판화를 전시했는데, 그 흔적이 오늘날 공간사옥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2회 때는 26개국 537점, 4회 때는 27개국 449점이 접수됐다. 5회 295점, 8회 220점, 9회 382점이 접수됐다.
주요 심사위원으로는 이경성 서승원 윤명로 오광수 등이다. 보통 대상 4명(국내2, 국외2), 우수작 8명(국내 4, 국외4)그리고 14명의 가작과 다수의 입선작을 뽑았다. (10회 때는 출품작이 급감해 수상작을 반으로 줄이기도 했다.) 이런 형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02년이다. 공모 작품의 규격을 전지 크기로 확대하고 시상 금액을 대폭 증액했다. 그리고 해외 미술계에 적극 홍보하면서 국제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3년 11월에 한국메세나협의회의 기업메세나대상 보급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예술인총연합회 문화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또한 2004년부터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는 서울시립미술관과 공동으로 이 행사를 주최해오고 있다.

왼쪽·4월 8일 서울시립미술관 로비에서 개최됐던 개막식 테이프 커팅 장면|오른쪽·4월 8일 서울시립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심포지엄 장면

29년의 역사, 새로운 판화의 장을 열다

지난 4월 8일 오후 5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제1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의 개막식이 있었다. 주최측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 중앙홀에 6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상 수상자인 돈선필, 우수상 수상자인 야마모토 케이수케(Yama moto Keisuke)를 비롯한 수상 작가들, 심사위원들, 공동 주최자인 공간그룹 이상림 대표, 서울시립미술관 유희영 관장, 본 행사 운영위원진 등 많은 분들의 자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자리는 모든 수상작가들과 영화배우 왕빛나, 스틸코리아의 박대열 회장 등 미술계와는 관련이 없는 매입상 시상자들과 테드 립만 캐나다 대사를 비롯한 각 국을 대표하는 10여 분들을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개막식 행사의 주된 내용은 상을 주고받는 것으로 채워졌다.
상에는 카터 포스터 등 심사위원이 뽑은 대상과 우수상도 있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 뽑은 43점의 매입상도 있었다. 미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들도 있었지만, 처음 판화작품을 소장하는 분들도 있었다. 상을 주고받고 박수를 받는 모습은 판화의 일상성을 대변했다. 그리고 소장자들이 작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큰 부담 없이 소장할 수 있고 작가와도 서로 교류할 수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예술을 더 가까이 느끼는 기쁨과 교류의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이어진, 보기 드문 개막식이었다.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은 3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오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독보적인 판화비엔날레로 성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70년 시작한 《동아일보》가 주최한 국제판화비엔날레가 환경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수명을 다했다. 일본에서는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가 제11회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고 이후 와카야마는 제5회로, 오사카 요코하마 삿포로에서 열렸던 판화미술전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타이페이비엔날레가 지속되고 있지만, 아시아에서 30년 넘게 생명을 유지하는 판화전은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이 유일하다. 바로 그것이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다.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서울>은 오랜 역사와 판화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판화의 보급을 통해 대중들의 일상에 보다 쉽게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게 함은 물론, 국제적인 규모와 진정한 판화 작가를 발굴하는 신뢰받는 진행을 통해 동시대 미술계가 인정하는 국제 판화 행사로 자리매김하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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