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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1.03

Abstract

My Favorite Things '작가는 어떤 작품을 좋아할까?' '좋아한다'는 의미의 층이 넓게 열려 있듯이, '좋아하는 작품'의 의미도 실로 다양하다. 예술적으로 공감하는 작품에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작품, 남다른 추억을 간직하고 있거나 누군가와 함께 감동을 나누고 싶은 작품 등... '좋아하는 작품'에는, '무거운 것'에서부터 '가벼운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연이 얽혀 있을 것이다.'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봤을 이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 art는 작가 21인에게 좋아하는 작품의 추천을 의뢰했다. 추천 작품은 동서고금의 시각 예술 전반을 대상으로 했다. 작가들이 고심을 거듭해 선정한 작품 62점과 추천 작가 자신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가상의 미술관'을 꾸몄다. 작가의 추천사는 구구절절한 애정의 서신이며, 번뜩이는 비평문이고, 또 다른 작가 노트이자 관람객에게는 친절한 작품 안내서이다. 작가에게는 '좋아하는 작품'을 회상하고 독자와 공유하는 자리가, 독자에게는 추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동서양 미술사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작가들이 까다롭게 선별한 작품이 눈앞에 펼쳐진다.

Contents

01    표지  이용백 <엔젤 솔저> 사진 130×130cm 2007(p.124)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38    핫피플  
    이종덕_시민을 위한 ‘명품 공연장’  김수영
    김성희_아시아 다원예술의 ‘허브’ 김재석
    공상구_인사동의 부활을 꿈꾸다  김복기
 
42    프리즘    
    구글 아트 프로젝트, 그리고 미술관의 미래  김정화
        “당신의 작품은 통하지 않았어요”  김재석

46    오후의 아뜰리에
    이 꿈이 슬프게 끝나지 않기를  이명미

64    포커스
    Painters展|신수혁展|안창홍展  심상용    
    파트타임스위트展|이정展  이대범    
    눈 위에 핀 꽃展  윤범모
    정기용展|이헌정展  정현 

80    특집  My Favorite Things
    홍승혜 이승택 김옥선 박소영 허구영 설원기 윤정미 김호득 박미나 김도균 문경원  
    오인환 이배경 배종헌 한운성 이동기 김화현 원경환 함진 양아치 이완

111    aMart_What we do
    1) MEDIA_art in culture|www.artwa.kr|art in ASIA
    2) Event_동방의 요괴들|New Vision|Asian Editor’s Conference
    3) Publishing_art 출판 프로젝트  
        
124    작가 연구 이용백
    천사와 아바타, 테크노샤먼  류병학
    
138    이슈 앤 크리틱 
    정치적 예술과 예술적 정치  김백균

144    해외 취재  최울가 
    프리미티즘을 넘어선 미학  신지웅

152    특별기고    
    영국의 예술 정책, 무엇을 배울 것인가  김정희

156    암흑물질
    1) H Box 이동하는 비디오아트 스크리닝 룸  벤자민 베일
    2) 사이트 산타페 인터내셔널 비엔날레 2010  한금현
    
164    잇 아티스트  
    김용관|송민규|장규정|이수성

168    전시 리뷰
    서울사진축제|인세인박|권부문|21&THEIR TIMES
    송은미술대상전|국동완|RETRO|성완경|가짜 전시|정승    

178    전시 프리뷰 
    
182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유목’의 시대, 비디오의 진화

알리 카즈마 <박제사> 컬러 디지털비디오와 스테레오사운드 17분 2009

‘유목’의 시대, 비디오의 진화

글|벤자민 베일·<H BOX> 프로젝트 큐레이터, 스페인 라보랄창작센터 수석큐레이터

2006년에 시작된 <H BOX> 비디오 제작 지원 프로그램은 여러 장소를 이동하는 오늘날의 생활 양식에 적합한 비디오라는 매체로 새로운 작품의 제작을 후원하고 싶다는 에르메스의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에르메스가 현대미술에 동참하게 된 것은 2000년 브뤼셀에 첫 번째 갤러리를 열면서부터다. 현재는 서울 싱가포르 도쿄 뉴욕 베른에도 각 하나씩 5개의 전시 공간이 추가됐다. 에르메스재단(Foundation d’entreprise Hermes)은 이들 갤러리의 전시에서 신작 제작을 후원하면서, 전시가 열리는 나라 중 많은 곳에서 해당 지역의 현대 미술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영향력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남화연 <당신의 유령을 해치지 마시오> HD비디오, 사운드 16분 40초 2010

여행을 염두해 제작된 특별 상영관

사람과 사상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에 미술이 산포되고, 작가들이 전시 일정을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걸쳐 잡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비디오라는 매체는 매우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매체로서 비디오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발달했다. 처음에는 1950년대에 방송용으로 제한되어 사용되다가, 1960년대 후반 휴대용 녹화장치가 발명되자 널리 보급되어 대중적인 매체가 되었다. 그 후 녹화 및 재생 장치는 질적인 면이나 사용 편의성뿐 아니라 휴대성이나 크기 면에서도 계속 발전했다. 휴대하기 편하고 기능적으로도 막강한 컴퓨터 또한 편집 도구를 사용하기 쉽게 해 주었고, 특히 프로젝터는 비디오 영상이 TV 모니터라는 형식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결과 비디오는 점점 더 많은 작가들에게 사용하기 쉽고 매력적인 매체가 되었다. 지난 40년 동안 미술 분야에서 비디오라는 매체는 많은 작가들의 작업에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다. 동영상은 설치 혹은 프로젝션의 형식으로 제시되는데, 더 큰 작업의 일부일 때도 있고 독자적으로 선보일 때도 있다. 24시간에 달하기도 하는 장편부터 몇 초에 그치는 짧은 것까지 다양한 길이를 망라하며, 실사이미지 애니메이션 콜라주 등과 이 모든 것이 혼합된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된다. 싱글채널로 상영되기도 하고, 동시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이미지들이 한데 모여 복잡한 내러티브를 형성하기도 한다.
비디오는 회화, 드로잉을 비롯해 시각 예술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매체뿐 아니라 영화 TV 광고의 언어를 빌려 온다. 비디오는 연극, 음악 같은 다른 분야의 예술적 실천이 지니는 중요성을 반영하는 한편, 모든 문화에서 이미지의 중요함을 반영하는 풍부한 매체다. 비디오는 지역 문화의 특수한 국면을 표현하기를 장려하는 동시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흥미와 관심을 병치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가 되어 왔다. 비디오는 새로운 내러티브 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참조들을 뒤섞고 현실과 허구 사이의 다양한 상태들 간에 역동적인 대화를 양성한다.  
<H BOX> 프로그램은 출범 후 매년 4명의 작가를 선정해 제작비를 지원하고, 결과물인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을 전 세계의 여러 기관과 이벤트를 순회하는 접이식 구조물(H-BOX)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약 90분 길이의 프로그램은 매번 바뀌는데, 가장 최근에 의뢰한 작품 중 선별해 구성된다. <H BOX> 상영관은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이 일반적으로 상영되는 조건을 반영하고 작품에 맥락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H BOX>의 디자인은 여행용 가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H BOX는 여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최적의 관람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쉽게 세웠다 해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담한 디자인과 실험적인 건축물로 유명한 건축가 겸 작가 디디에 포스티노(Didier Faustino)는 <H BOX>를 디자인하면서 이러한 제약 조건을 고려했다. (포스티노는 파리에 위치한 <1제곱미터 집(One Square Meter House)>과 강원도 양양 해변을 조망하는 전망대 <하늘이 경계다(Sky is the Limit)>(일현미술관 소재)의 설계자) 포스티노는 비디오 관람에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 주된 특징인 오브제, 즉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상영 조건을 고무하는 보호 환경(Protec-ted Environment)을 디자인했다.
상영관은 ‘진귀한 진열장(Cabinet of Curiosities)’이나 일종의 과학 설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건축의 미학은 모양이나 재료의 측면에서 우주 시대 공상과학영화를 암시하기도 한다(실제로 <H BOX>를 짓는 데 사용한 벌집 모양의 브러시드 알루미늄(Brushed Honeycomb Aluminum)은 항공 산업에 주로 사용되는 재료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포스티노는 군사용 방공호를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회사와 협동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바다와 대양을 넘나드는 여정에도 견딜 수 있는, 가볍지만 튼튼한 구조물을 구상한 최신 공학 기술에 접근할 수 있었다. <H BOX>의 미학은 철저히 실용적이고자 했던 건축가의 신중한 의지에 입각해 있다.

왕 지안웨이 <제로> HD비디오, 사운드 11분 2010

내러티브 동역학의 창출

아시아와 유럽, 북아메리카 출신의 21명의 작가들과의 만남은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다. 그중에는 동영상 이미지에 주력한 작품도 있었지만, 영상을 여러 가지 매체 중 일부로 활용한 작품도 있었다. 선정 작가 중 다수는 이제 경력을 시작하는 이들인데 이들은 자신의 예술적 탐색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는 데 에르메스의 지원을 이용한 반면, 또 다른 작가들은 야심찬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중요한 전시에 참여하는 데 이번 프로젝트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에르메스재단은 참여 작가 모두가 <H BOX> 프로젝트로 인해 그들 각자의 경력에서 중요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본래 정해진 주제는 없지만 매년 선정된 4명의 작가들의 방향성이 점차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비디오를 퍼포먼스 기록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결과적으로 새로운 내러티브 동역학을 창출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다. 다큐멘터리를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활용하거나 새로운 재현 체계로서의 미술 개념을 재규정하는 것 또한 흥미의 초점이다. 형식적으로는 애니메이션도 최근 관심사 중 하나며, 시각 예술에서부터 연극, 매스미디어를 망라하는 다양한 미학적 참조들을 뒤섞는 것 역시  <H BOX> 프로젝트 기획진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특성이다.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비디오를 이용하는 일이 계속되면서, 비디오는 동시대 문화에 중심이 되는 개념적 형식적 관심들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디오는 우리 세계의 진정한 거울에 해당하는 매체로서 지속적으로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녹화 장치가 그 어느 때보다 소형화되고 네트워크화되면서, 그것을 재생하는 비디오 영상 역시 전보다 훨씬 유동적으로 공유되고 배급된다. 이러한 사실은 미래에는 어떤 방식으로 비디오를 즐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킬 것이다. 미술계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최적의 관람 조건에 대한 재정의와 아울러 작품의 맥락화에 적절한 수단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번역 | 문혜진

오머 패스트 <일요일 아침> HD비디오, 사운드 5분 30초 2010

H BOX 2011 상영작 시놉시스

로사 바바(Rosa Barba, 1972년 이탈리아 출생)
<경험적 효과> 16mm를 HDcam으로 변환 22분 2009 서사적 구조와 물리적 기술로서의 새로운 영화 형식을 보여 준다. 작가는 복합 설치 작업과 더불어 <픽션들> 이라는 고전 서사 연작을 전개시켜 왔다. 이 연작의 가장 최근 작업이자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베수비오(Vesusius) 화산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업에서 화산은 사회와 정치의 복잡한 관계, 특히 작가가 태어난 시실리 지역의 상황에 대한 은유로서 다뤄진다.

왕 지안웨이(Wang Jianwei, 1958년 중국 출생)
<제로> HD비디오 사운드 11분 2010 화가로 훈련 받았던 작가의 배경은 퍼포먼스 영상의 시각적 구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비디오 작업은 영화보다 마치 고전 회화처럼 보인다. 자신의 연기를 무대화하는 단순한 방식은 일견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연극을 연상시킨다. 급변하는 중국 사회를 강하게 반영해 온 작가는 사회적 변화의 핵심을 날카롭게 관찰하여 무대화한다. 특히 이번 작품은 존재의 중간적 상태, 이행 중의 상태, 개인이 ‘연옥’을 통과하는 상태를 탐구하고 있다.

오머 패스트(Omer Fast, 1972년 이스라엘 출생)
<일요일 아침> HD 비디오, 사운드 5분 30초 2010 작가는헐리우드 영화에 종종 나오듯이 실화에 기반하여 진짜 같은 허구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최근 작가는 무인 비행 물체를 다루는 조종사들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에 대한 성찰을 덧붙이는 단편 비디오 연작 <터널>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그 연작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단편으로 현실과 가상성이 어떻게 뒤얽혀 왔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제로 이 조종사들은 군사 작전에 참가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조종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그들의 경험은 액션 영화 같은 전투 현장의 경험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하는 10대 소년의 경험에 더 근접하다.

마크 루이스(Mark Lewis, 1958년 캐나다 출생)
<TD 센터, 54층> 싱글 스크린 프로젝션, 35mm와 4K를 2K로 변환 6분 2009 작가는 일반 극영화처럼 대개 암실에서 상영되는 단편 영화들을 제작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듯한 영화 속 장면에서 시간의 흐름은 유예된다. 내러티브는 긴장을 유발하는 카메라의 단순한 움직임일 뿐이며, 영화의 상영 시간은 필름 분량으로 결정된다. 이번 작품은 1967년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마지막으로 설계한 건물의 옥상에서 촬영되었다.

남화연(1979년 서울 출생)
<당신의 유령을 해치지 마시오> HD비디오, 사운드 16분 40초 2010 퍼포먼스 설치 글쓰기 드로잉 영화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하여 수사적 양식과 연극성에 초점을 맞추어 온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퍼포머들을 어떤 풍경 속에 놓아 두고 보이스오버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모두 퍼포머의 경험 기억 환상과 연관된다. 퍼포먼스가 이야기된다는 생각은 그 이야기가 결코 실제로 존재한 적 없으리라는 것, 그 이야기들의 집합이 사실은 한 여배우가 공연하는 영화의 시나리오일 것이라는 사실과 맞닥뜨린다. 그렇다면 ‘픽션’은 대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율리카 루델리우스(Julika Rudelius, 1968년 독일 출생)
<드레사쥐> HD비디오를 DVC pro로 변환 9분 2009 작가는 특정 집단에서 나타나 궁극적으로 그 집단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언어, 비언어적 소통 방식을 작품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사회적 계급이 다른 사람들에 맞서 자신들을 정의하는 데 동원되는 사회적 규약인데, 이 규약을 통해 한 계급 내에서 위계가 형성되고 정체성이 규정된다. 이번 작품은 어리고 유복한 사춘기 직전의 아이들이 영화 촬영을 준비하면서 생기는 의외의 사건들을 보여 준다.

니킬 초프라(Nikhil Chopra, 1974년 인도 출생) & 무니르 카바니 (Munir Kabani, 1976년 인도 출생)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 HD-CAM 마스터드테이프 20분 2011 니킬 초프라는 수 년 동안 주로 공공 영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행동에 맞추어 다양한 얼터 에고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퍼포먼스를 해 왔다. 작가는 마치 무대 위에 있는 양 의상을 갖춰 입고 연기를 해 보이지만, 그곳은 무대가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이고 청중은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영상화를 의도하고 연출한 퍼포먼스의 첫 번째 기록으로,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바위 그림을 무대로 여러 배우들과 함께 스펙터클한 풍경을 누빈다.

알리 카즈마(Ali Kazma, 1971년 터키 출생)
<박제사> 컬러디지털 비디오와 스테레오사운드 17분 2009 작가는 장인의 작업장, 청바지 공장, 도축장 등 생산 체계와 노동 과정에 초점을 맞춘 단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 왔다. 그의 카메라는 날카로우면서도 내밀하게, 정교한 시선으로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찰한다. 이번 작품은 놀라운 환영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장인의 작업 과정을 그린다. 동물 가죽은 믿을 수 없이 정교한 손놀림과 기술을 보여주는 박제사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프리미티즘을 넘어선 미학

<엑스피 시리즈-I’m Dreaming, Aren’t> 캔버스에 유채 163×130cm 2009

프리미티즘을 넘어선 미학

글 | 신지웅 · 아트 어드바이저

최울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파리를 근거지로 한 유럽, 도쿄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그리고 뉴욕을 근거지로 한 북미 지역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펼쳐 왔다. 삶과 작업 장소의 이동이라는 ‘유목성’이 최울가 예술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중복되는 이미지와 중첩적인 텍스트 사이의 ‘유동성’이 최울가 예술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본질적으로는 ‘흐르는 움직임’ 그 자체이지만, 예술에서 유동성은 특정한 감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 형식화되면서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포착되고 이해되어 재현된다. 예술 작품의 흐름과 고정은 내용과 형식이라는 틀로 짜이고 엮이면서 그 틀 자체가 다시 더 큰 흐름 속으로 흘러 들고, 더욱 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구성된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반복적 확장은 궁극적으로 인생과 예술을 하나의 거대한 내용과 형식으로 직조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생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인생이 되는 것이다. 물론 꿈 같이 이상적이고 몽롱한 이야기다.

뉴욕에서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다

그러나 이 꿈 같은 이야기가 최울가의 예술적 꿈이자 야욕이며, 또한 작품의 여정이다. 그 꿈 때문에 최울가는 지난 10년 동안, 스스로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겨우 익숙해진 자신의 삶의 공간을 떠나 뉴욕에서 홀로 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굳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뉴욕에 스튜디오를 두고 혈연단신, 말 다르고 물 다른 곳에서 혼자 밥을 지어 먹으면서 궁상스럽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울가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자명한 세계에서 자기를 떼어 내고 낯선 장소나 이질적 공간에 자신을 투입시켜, 자신이 투입된 새로운 세계를 관조하고 의심하면서 자신의 주체를 대상처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즉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자기 내면을 이질적 세계로 만들면서 외부 세계를 동질화시켜, 그 낯선 이질적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여 다시 동질적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현실적 공간은 최울가의 몸을 통해서 회화적 공간으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다지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 데도, 낯선 세계, 새로운 장소에 거주하는 경험 자체가 작품의 섬세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최울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것은 작년 여름의 끝 무렵이었다. 스튜디오는 맨해튼의 북서쪽 끝, 워싱턴 하이츠(Washington Heights)와 인우드(Inwood) 지역의 접경에 있었다. 그다지 미술과 상관이 없는, 게다가 도미니카인과 아일랜드인이 밀집해 있는 이 동네에 아시아 출신의 작가가 혼자서 작업과 생활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전통적으로 맨해튼 북부는 아일랜드인과 유태인 중산층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한 블럭만 더 동쪽으로 내려가면, 지난 수 십 년간 세계 각국에서 유입된 이민자들로 인해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쓰일 정도로 요란스러운 동네가 있다. 이곳은 십 수 년 전만 해도 남미 출신의 거대마약 조직 카르텔이 밤의 거리를 장악하던 흉흉한 동네였다. 그런 도심의 전장 같은 곳에 맨 몸으로 이민을 와서 구멍가게나 동전 세탁소를 운영하던 한국 교포들의 서바이벌 무용담이 전설처럼 녹아 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옛 말이다. 맨해튼 전체가 재개발(gentrification)되면서 섬 전체의 거주 비용이 비싸지고 치안이 강화되어 지금은 대체로 맨해튼의 대부분 지역이 안전해졌다.
최울가의 스튜디오가 위치해 있는 블럭은 이전에도 이런 야성의 세계에서부터 분리된 일종의 섬처럼 평온한 지역이다. 가게 하나 없이 길 한쪽으로만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지은 오래된 성채 같이 견고한 아파트가 줄지어 있고, 북쪽으로 몇 블록 위에는 포트 트리언 파크(Fort Tryon Park)라는 대단히 아름답고 숲이 울창한 공원이 있다. 그 공원의 북쪽 끝에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중세 유럽 미술품과 건축물을 소장하고 있는 클로이스터(cloister)라는 분관이 있다.
이렇게 오래된 동네에 정착한 최울가는 맨해튼 기준으로는 상당히 넓은 원 베드룸 아파트의 거실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아파트 자체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지은 것이라 요즘 아파트와는 다르게 벽도 두껍고 천정도 높다. 그다지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높은 천장 때문에 스튜디오는 실제 면적보다 상대적으로 넓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엑스피 블랙 시리즈-You Don’t Fool Me> 캔버스에 유채 183×122cm 2010

머리 속에 새겨지는 그림

최근 몇 달간 작업을 했던 그림들이 벽에 기대어 새워져 있었다. <블랙 엑스피> 시리즈라고 한다. 이른 새벽의 하늘 빛 같은 어두운 바탕색을 칠한 캔버스 위에 화려한 색색으로 형상화된 조형들이 빽빽하게, 마치 바위에 정으로 새긴 듯이 그려져 있었다. 그 새긴 듯이 그려져 있는 이미지 때문에 언뜻 보면 동굴이나 바위에 새겨져 있는 암각화 같기도 하고, 또 자연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프리카와 남미 원주민들의 토기 위에 새겨져 있을 법한 문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최울가의 작품을 두고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하고 평가한다. 그러나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최울가의 그림 속 이미지는 더 없이 세련되고 숙련되어 보였다. 그 이미지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아티스트로서 엄격하게 훈련된 숙련된 손과 엄밀하게 단련된 세련된 눈이 아니면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프리미티비즘이 끼친 영향을 찾는 일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프리미티브스(the primitives)에게 프리미티비즘이란 존재하지 않듯이, 프리미티비즘은 프리미티브스가 아닌 사람이 프리미티브하다고 생각되는 소재를 사용하여 동시대적 표현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닌가. 그러니까 프리미티비즘은 서양 미술사에서 스스로의 미술에 대하여 만들어 낸 대항적 이미지(counter-image)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분리될 수 없는 서양 미술의 하나의 경향이며, 상대적으로 비서구 사회에서는 서구 미술의 역사가 부재하다고 여길 때 사용하는 자폐적인 미술 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레드 폭스 시리즈> FRP에 혼합채색 165×110×48cm 2008(아래)  FRP로 제작한 조각 작품들

이미지의 이미지, ‘메타 이미지’

엉성하기도 하고 설렁설렁 그린 것 같은 개나 늑대의 얼굴을 한 남자, 물고기와 새, 그리고 그것들을 감싸는 다양한 채색 배경이나 나선 같은 도형과 그 배치는 다분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최울가의 머리 속에서 자라나 그의 눈과 손 아래에서 재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울가에게 중요한 것은 캔버스에 그려질 조형 자체가 아니라 그의 머리 속에서 새겨지는 이미지들이다. 최울가의 그림은 손이 많이 간다.
그러나 그는 캔버스에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머리 속에 이미지를 새겨내는 데 사용한다. ‘머리 속에 새겨지는 그림’은 현실의 이미지라기보다는 특정 이미지에 대한 아이디어이다. 최울가의 이런 아이디어는 현실에서 우리 관념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이미지, 즉 ‘메타 이미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최울가의 예술에서 이미지를 이미지 자체로 직접 이해하는 것과 이미지 일반의 본질에 대한 아이디어를 형성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최울가가 재현해 내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사실상 최울가의 머리 속에서 일상 이미지 자체가 이중화되어서 재귀적으로 구성된 아이디어로서의 이미지인 것이다. 최울가의 작업 방식을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 비유해 보면, 그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거나 부재한 것으로 느껴지는, 경험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대상을 감각 작용과 사유 작용을 통해 마치 머리 속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이미지를 어둠 속에 투영시켜 일종의 ‘정신의 그림’을 스스로 그려나간 것이다.
그러나 지각과 상상력으로 작가의 정신에 새기는 그림은 카메라의 원리처럼 광학적으로 전도된 수동적 이미지가 아니다. 정신 속에 새겨진 이미지는 자동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문지르고 그리는 신체를 통해서, 또 그 신체를 훈련시킨 문화적 필터를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캔버스 위에서 재구성된다. 통상적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전도된 이미지가 신체의 수행적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 생활 과정에 의해 여러번 재해석되고 재조정되어  그 자체가 원래 아이디어에서 독립된 것으로 작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은 그 과정에서 역으로 아이디어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환원이 불가능한 비가역성 속에서 최울가의 작품은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한국적’ 그림이라는 역사 사회성을 획득한다.

<엑스피 화이트 시리즈-Man Portrait in 2001 Year Sweet Memories>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08

천진난만한 유희로 가득 찬 풍경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형용은 한국적 소재를 대상으로 했다거나, 한국적 오방색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한국적 미술 재료를 사용했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최울가와 동시대의 한국인들이 이미지를 이중화시키는 방식, 즉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묘사하고, 상상력의 활동을 상상하고, 형상화의 실천을 형상화하는 특유의 패턴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품의 구상을 머리 속에서 도면처럼 차곡차곡 엄밀하게 배치한 다음, 그 전체 설계도에 입각해 마치 건물을 짓듯이 하나하나 촘촘하게 밑 공사가 끝난 캔버스 위에 이미지를 채워 나가는 것이다.
최울가의 그림은 워낙 노동의 강도가 높은 고밀도로 색을 칠하고 그려 놓았다.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엉성한 듯이 그려져 있고, 느슨한 듯이 배치된 형상들은 피상적으로 보면 마치 어린 아이가 그려 놓은 낙서처럼 보이지만, 좀 느린 호흡으로 집중해서 보면 그야말로 천라지망(天羅地網)처럼 물 샐 틈도 없이 촘촘하다. 그 촘촘한 세계야말로 우리가 숨막히고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인 것이고, 최울가는 그렇게 팍팍하게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천진난만하고 헐렁하게 숨통을 트이게끔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장난스럽고 유희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최울가의 작품 세계는 사실 심각하고 우울하여 슬프기조차 한 진지함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최울가의 그림은 그런 아이러니로 꽉 찬 세계….

‘불편한 진실’을 둘러싼 세 이야기

안창홍 <무례한 복돌이>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94cm 2010

‘불편한 진실’을 둘러싼 세 이야기

글|심 상 용 · 미술평론가, 동덕여대 큐레이터 전공 교수

안창홍의 ‘불편한 진실’은 무엇인가? 문신한 남자, 농부, 백화점 직원의 정면을 응시하는 도전적인 시선인가? 그러한 ‘응시’란 자주 혁명의 내재화된 반흔일 것이므로? 관자에겐 성(性)적 반응을 유발코자 과도하게 노출된 성기(性器)들의 퇴폐적 동기가 원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생식기의 반문명적 속성이, 그것도 제법 비중있는 상업 갤러리, 곧 제도권 예술 체계의 중심에 위치한 가나아트센터를 점령했다는 데서 비롯되는 사회학적 불편함일까? 최태만에 따르면 안창홍의 ‘가공되지 않은 몸’은 우리의 허위 의식에 대한 일종의 냉소다. 그렇다면 가나아트센터에서의 이 정갈한 디스플레이와 세련된 공간 연출이 그 ‘허위 의식에 대한 냉소’를 뭔가 거창해 보이는 예술로 되돌려 보내는, 또는 재가공하는 역설의 과정이 정작 불편한 진실의 내용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불편한 진실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은 이렇다. ‘사실적이고 노골적인 누드’ ‘육체의 즉물성’ ‘현실적인 몸’ ‘삶이 숨김 없이 각인된 견고한 몸’…. 이런 몸에 더해 저돌적인 포즈와 표정이 ‘소시민적 삶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당당함’의 신체 언어인데, 바로 이 견고한 몸, 해방을 재현하는 포즈, 당당한 시선으로부터 진실을 고발하는 불편함이 초래된다는 것이다.(최태만) 이 정도면, 안창홍의 불편한 진실은 개략 서술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언급되어야 할 불편한 진실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안창홍의 ‘가공되지 않은 몸’, 신체의 당당한 해방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일련의 서사기제 안에서 목격되는데, 아틀리에 바닥에 쏟아진 물감통과 이리저리 널려 있는 물감튜브들이 그것이다. 보시라. 강인한 신체와 엎질러진 물감, 저돌적인 포즈와 흐트러진 붓 그리고 물감튜브 사이에선 극적인 대비가 존재한다. 더 나아가 문신한 남자의 자부심인 듯 노출된 성기에 비해, 회화는 한낱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남자의 뒤로 물러나 있다. 신체의 서사, 성기의 드라마가 진출적인 반면, 회화는 고작 배경 장식으로 후퇴 중이다. 특히 그것들(회화들)이 모두 뒤집어져 있다는 사실이 비중있게 지적되어야만 한다. 정면을 향하는 것은 이미지가 그려진 앞면이 아니라, 십자형 나무틀이 앙상한 뼈대처럼 드러나 있는 뒷면이다.
배경에 지나지 않는 회화, 뒤집혀진 회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단지 존재로서만 의미를 입증할 뿐인 회화. 이렇듯 여기서는 모던 회화론의 핵심을 조롱하고 있다. 이야말로 안창홍의 회화가 우회적으로 들춰 내는, 퇴락한 회화의 가난한 진실이 아닐까! 게다가 안창홍의 회화는 뒤집히고 배경에 지나지 않는 캔버스와 엎질러진 물감,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붓과 물감튜브로 구성되는 퇴락한 회화 담론에 의해 그 극적인 효과를 담보받고 있다. 정작 가난한 회화의 알레고리에 의해 회화적 서사의 존립이 허용되는, 이 모순이야말로 안창홍의 불편한 진실의 한 내재적 단면이 아닐까?

되풀이되는 ‘회화님’의 신화

회화를 재차 담론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릴 때 습관처럼 읊는 논조는 ‘회화가 철 지난 유행가나 재미없는 서커스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숱한 ‘회화 예찬론’이 이러한 논조를 인용하고 재인용하면서 수그러들 듯하다가 다시 머리를 들고 당당하게 되돌아 왔다. PKM갤러리의 <Painters>전의 논리 기반도 ‘평면’에 ‘회화하기(Painting)’를 ‘미술의 본질’로, ‘그리기에 대한 본원적 성찰’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전시는 그리기를 ‘정직한 예술적 노동’으로 추켜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미 익숙한 추임새다. 여기에 회화가 특별히 더 ‘인간의 근원적인 매혹을 다시금 일깨우거나’ ‘진실되고 감성적인 소통의 계기’가 된다고 추가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경우들이 그런 것처럼) 회화나 회화하기가 특별히 ‘인간의 근원적인 매혹’에 결부되어 있다거나, ‘진실되고 감성적 소통에 부합’한다고 믿게 할 만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강령적 평면성을 어떻게든 다시 불러 들이려는 진부하고 실망스러운 재활용이 아니라는 명백한 근거 또한 제시되지 않는다.  
삐딱한 바로 보기를 시도해 보자. 매체로서 회화는 이미 순결하지도 않고, 중립적일 수도 없다. 그것이 무엇이건 매체는 그 자체로 어떤 격앙된 ‘메시지’ 못지않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금권적이다. 특히 작금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 회화는 그것이 매매에 더 부응하는 매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회화는 이미 물신주의와 소유 욕망으로 점철되는 사람들의 라이프 패턴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회화에 대한 모더니즘의 강령은 이미 낡고 노쇠한 것이 되어 버렸다. 평면 이데올로기는 이미 폐기되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평면성을 여전히 맑은 영혼을 담는 질그릇쯤으로, 지적 노블레스의 형식버전 쯤으로 정의하려는 입장에 혐의를 두는 태도는 정당하다.
사실 모던 페인팅의 강령에선 회화 자체가 회화의 내용이 된다. 뉴만이나 로스코의 회화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그토록 많은 것들을 자신의 회화로부터 제거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가치는 바로 ‘회화’였다. 빵 굽는 냄새도 없고, 계절도 없고, 환희나 분노도 없고, 가슴 울렁증도 없는 회화! 바로 이 과묵하고 점잖은 ‘회화님’께 누가 될까 노심초사 소음과 잡티를 제거해 나갔던 것이다. 반면 워홀이 먼로를 프린트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회화님’에 대한 봉헌이 아니었다. ‘회화님’께선 반쯤 감은 섹시한 눈초리나 반쯤 열린 에로틱한 입술에는 별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먼로나 프레슬리를 열호하는 주체는 회화가 아니라 미디어화된 대중이다. 이 시절부터 회화는 더 이상 회화에 봉헌하지 않았다. 회화 본연은 자부심이나 명예의 근거가 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배반적 회화’ 또는 ‘일탈적 회화’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이었던가? ‘자기배반적 회화’를 배반하는 회화거나 ‘일탈적 회화’를 일탈하는 회화고, 다시 ‘자기배반적 회화를 배반하는 회화’의 배반이거나 ‘일탈적 회화를 일탈하는 회화’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배반과 일탈은 늘상 신선한 것, 즉 ‘상시적 청춘, 에버그리닝(Ever Greening)’인 셈이다.
자크 엘륄은 오늘날의 ‘막장 문명’을 일컬어 ‘돈의 공격성에 사람을 노출시키는’ 문명으로 정의했다. 오늘날 회화도 자신의 새로움을 끊임없이 연출해 냄으로써, 즉 끊임없이 새롭다고 강변하면서 스스로를 돈의 논리에 노출시킨다. 이 시대의 예술은 돈의 공격성에 사람을 노출시키는 재앙적인 문명에 파묻혀 가고 있다. ‘회화가 조각보다는 정직하다’거나 ‘감성을 건드리는 데 유효하다’는 식의 담론들은 현대회화론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아직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매체나 장르에 밑줄을 긋는 논의들은 (본의 아니게) 핵심을 비켜 나가도록 도와 왔다. 오늘의 이 시점에서 유효한 회화론은 이 질문의 준엄한 검증대 위에 그것을 올려 놓는 것으로부터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도래할 회화론의 핵심은 매체로서 회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조각이나 사진과 다른 회화가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는 회화, 회화가 주제가 아니라 회화의 주제가 중요하게 언급되는 회화론! 도래하는 시대의 회화론에선 이러한 질문이 보다 중요하게 취급될 것이다.

왼쪽 · 이누리 <House36(The Host)> 캔버스에 유채 150×120cm Courtesy: The artist and PKM Gallery | 오른쪽 · 신수혁 <Officetel #3> 캔버스에 유채 131×162cm 2010

불편한 진실 사전검열하기

신수혁의 <블루노트>전은 작가가 발견한 도시 풍경의 요인들을 괄호로 묶고, 푸른색으로 처리한다. 여기에 안창홍이 의미하는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할 겨를이 없다. 일상을 다루는 대신 비일상을, 현실의 무거운 부조리가 아니라, 경미하나마 몽환을 다루기 때문이다. 모티프는 현실, 일상으로부터 오지만 결과는 현실적이거나 일상적이지 않다. 대상은 묘사되고 재현되는 대신, 삭제되거나 탈색된다. 인디고 블루가 풍경과 사물을 하나의 톤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최수혁의 도시는 오히려 더욱 익숙한 어떤 것이 되어간다. 아마도 긴장감이 완화된 부동의 전범성이 담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계에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로 인해 그 전범성이 더욱 극화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부재함으로써 거리는 더욱 거리가 되고, 상점 앞은 가장 정확하게 상점 앞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폭로해야 할 부조리나 시비를 걸어야 할 권력의 드라마가 누락되어 있는 도시 혹은 마을이다. 사건이 누락되고, 상황이 부재함으로써 도시와 거리와 나무는 거의 전적으로 비현실의 소산이 된다. 불편한 진실이 사전적으로 검열되고 삭제된 세계인 것이다. 안창홍이 주변 인물의 몸과 시선을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의 미학에 관련시켰다면, 신수혁은 도시의 풍경을 언제나 변함 없었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떤 것으로 처리한다.

천사와 아바타, 테크노샤먼

〈피에타〉 FRP, 철판 400×340×320cm 2008

천사와 아바타, 테크노샤먼

글 | 류병학 ·  미술평론가

‘이용백’하면 적어도 필자는 무엇보다 ‘첨단’과 ‘실험’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이용백이 맹목적으로 첨단 매체와 실험적인 작품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 관해 용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시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관객과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여러 가지 미디어를 혼재해서 사용하고, 따라서 첨단 미디어뿐만 아니라 전통적 미디어도 사용합니다.”
작가 이용백은 흔히 ‘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린다. 하지만 미디어아트는 국제 미술계에서 아직 동의된 정의가 없다. 왜냐하면 미디어아트는 ‘미디어’라는 개념을 어떤 뜻으로 국한여 사용할 것인지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통적 미술, 즉 회화나 조각 등도 한결같이 ‘미디어(매체)’를 사용한다고 말이다. 만약 미디어아트가 대중매체를 미술에 도입한 것으로 상정한다면, 미디어아트에는 팝아트도 포함돼야 할 것이다. 혹자는 ‘뉴 미디어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뉴(New)’의 시점을 언제로 상정할 것인지에 대한 국제 미술계의 동의 없이는 ‘뉴 미디어아트’ 역시 모호한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새로운 미디어가 발 빠르게 등장하는 오늘날 ‘뉴’의 개념도 적절하지 않다.
이용백은 말한다. “미디어는 생각보다 빨리 늙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미디어아트를 어떻게 정의할까? 작가 왈, “미디어아트는 텍스트와 오디오 비디오 인터랙션 등 여러지 미디어를 종합한 예술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필자가 이용백의 진술을 따른다면, 그는 2개 이상의 미디어를 사용하는 멀티미디어 아트 혹은 인터랙티브 아트를 지향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용백은 조각 사진 비디오 설치 회화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해 오고 있다.

멀티미디어 혹은 인터랙티브아트?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 이용백의 〈앤젤 솔저(Angel-Soldier)〉(2005) 시리즈일 것이다. 〈앤젤 솔저〉 시리즈는 오브제와 사진 그리고 퍼포먼스와 비디오 영상으로도 제작되었다. 영상 작품을 먼저 보자면, 우선 인조 꽃으로 도배된 ‘정지된’ 공간이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지된’이란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마치 스틸사진과 같은 평면성을 뜻한다. 꽃밭에는 새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새소리가 멈추면 갑자기 어느 부분의 꽃들이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움직이는 그림’이 시작되는 것이다. 관객은 그 꽃 사이로, 꽃으로 위장한 군인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오브제 작품은 바로 그 퍼포먼스에 사용된 꽃무늬 군복과 꽃으로 장식한 헬멧과 군화 그리고 총 등으로 이루어진다. 꽃무늬 군복에는 장성 계급과 함께 ‘Windows’‘Quick-time’‘Word’‘Explorer’ 등의 로고가, 그리고 명찰에는 보이스 피카소 뒤샹 백남준 다빈치 등 미술사의 중요한 대가들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사진 작품은 매체의 특성을 살려 퍼포먼스를 재현하여 촬영한 것이다.
이 작업은 이용백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이미 관객에게 잘 알려졌다. 천사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신과 인간의 중개자이다. 작가는 ‘앤젤’ 즉 천사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의 중계자’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군인은 무엇인가? 왜 이용백은 꽃무늬로 위장한 군사 작업에 천사를 첨가한 것일까? 혹 그는 ‘전쟁’을 상징하는 군사를 천사처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의 중계자’로 상징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발생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용백 왈, “미디어아트는 물질적 가치보다는 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두는 예술입니다.”

〈뉴 폴더-드래그〉 나무 뒤퐁 260×80×210cm 2007

불온함? 끊임없는 전복

이용백의 또 다른 대표작인 〈피에타(Pieta)〉(2008)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모델로 삼아 제작한 작품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이용백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포즈만 차용하여 합성수지(FRP)로 제작한 일종의 ‘사이보그 피에타’이다. 이용백 왈, “우선 흙으로 마리아 형상을 조소한 후 거푸집을 뜹니다. 이것을 네거티브 폼이라고 합니다. 그 거푸집 안의 흙을 파내고 다시 포지티브 폼을 떠요. 또 다른 거푸집이죠. 바로 그 포지티브 폼이 완성본, 즉 조각 작품입니다. 따라서 흔히 완성본을 만들기 위해 처음 제작한 거푸집(네가티브 폼)을 버립니다. 그런데 저의 〈피에타〉는 완성본이 예수로, 거푸집이 마리아가 된 경우예요.”
이용백은 조각에서 당연시한 것을 환기시킨다. 오히려 예수가 거푸집에서 탄생했으니, 거푸집이 마리아가 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이다. 그런데 머시라? 거푸집(마리아)에서 태어난 예수가 마리아보다 작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예수가 마리아보다 커야 하지 않느냐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시라! 상식적으로 보자면 예수의 신체가 마리아보다 커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예수를 마리아보다 작게 조각해 놓았다. 와이? 왜 미켈란젤로는 마리아를 예수보다 크게 조각한 것일까? 만약 미켈란젤로가 예수를 마리아보다 크게 조각했다면? 십중팔구 관람객에게 더 가까운 예수의 몸이 마리아의 몸보다 크게 부각되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보였을 것이다. 머시라? 이용백의 〈피에타〉는 화이트 마리아와 핑크 예수를 현실과는 달리 같은 표정과 같은 피부를 가졌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조타! 그럼 필자가 당신에게 질문 하나 던지겠다. 왜 미켈란젤로는 비현실적으로 예수보다 마리아를 더 젊게 조각해 놓았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당시의 나이가 33세이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나이는 50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서 마리아를 예수보다 젊게 조각해 놓았다. 와이? 미켈란젤로가 6세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 프란체스카는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표현되었을 것이고, 그에게 ‘어머니’ 프란체스카는 6세 때 기억, 즉 젊음과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멈추어 있는 셈이다.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이나 〈천장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동정녀인 마리아의 모습은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남는다. 이용백의 〈피에타〉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분신(分身), 즉 아바타(Avatar)이다. 천사가 신과 인간의 중개자라면, 아바타는 현실 세계와 가상 공간을 이어주는 중개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용백은 아바타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의 중계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이용백은 관객과 적극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종교’와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여러 가지 미디어로 풀어 가며, 마치 예술에는 금기가 없다는 듯 도발적인 작품들을 제작한다. 앞으로 필자가 이용백의 작품을 간략하게나마 읽어 보겠지만, 그의 작품은 상식적 관점에서 보면 불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인해 빈곤해진 정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상식을 뒤집는다.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이용백이 사용하는 매체가 다름 아닌 정신을 빈곤하게 만든 첨단 매체라는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 이용백은 적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티스트다. 그 점에 관해 이용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 작업을 오목이나 바둑에 비교하자면, 저는 (판이 큰) 바둑을 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전체를 가늠하긴 어려울 거예요.” 물론 그의 바둑 게임은 끝나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그가 혼자 바둑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게임 상대로 관객 바로 당신을 삼고 있다. 당신은 이용백의 게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앤젤 솔저〉 뉴 폴더 속 100개의 유니폼 200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 〈신호탄〉전 설치 장면

유동성, 최면 영상

필자가 독일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이용백의 작품 중 하나는 조각과 영상을 접목시킨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나무로 제작한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유리컵으로 구성됐다. 테이블 위에 연출되어 놓인 유리컵 안에는 물이 1/3 가량 담겨 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얼핏 보면 작품은커녕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여기고 지나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물을 마시고자 유리컵에 접근한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리컵 물 속에 부처와 예수 이미지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부처와 예수 이미지는 시간적 차이를 두고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부처 이미지가 차츰 변해 예수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이다.
필자는 당시 이 작품을 매우 신기하게 보았다. 도대체 유리컵 안에 어떻게 부처와 예수 이미지를 담은 것일까? 작가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의 한 부분, 즉 유리컵을 놓을 곳에 구멍을 내서 모니터를 설치했다. 따라서 관객이 보는 유리컵 안의 영상 이미지는 사실 모니터에 나타난 영상 이미지인 셈이다. 이용백은 그 작품을 〈예수와 부처 사이(Inbetween Buddha and Jesus Christ)〉라고 명명했다. 그리고‘LIQUIDITY’라는 부제를 달았다. ‘LIQUI- DITY’는 흔히 유동성, 즉 액체와 같이 쉽게 흘러 움직이는 성질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용백은 관객에게 영상 이미지가 마치 액체와 같이 쉽게 흘러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란 말인가? 물론 ‘유동성(LIQUIDITY)’은 자산을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경제학 용어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경제학에서 유동성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교환 수단인 ‘화폐’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화폐는 구매력이 가장 강하므로 유동성 또한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유동성은 화폐의 유동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부처에서 예수로 혹은 예수에서 부처로 변화되는 유동성, 즉 부처와 예수의 자리바꿈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처가 예수로 변신하고, 예수가 부처로 변신한다는 것은 부처와 예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가 곧 예수(예수가 곧 부처)란 말인가?
이용백은 〈예수와 부처 사이〉를 처음 제작하고 난 10년 후인 2002년 〈예수와 부처 사이〉 2탄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같은 해 개최된 〈미디어 시티_서울 2002〉에 출품되어 관객들로부터 주목받는다. 물론 〈예수와 부처 사이〉 2탄은 1탄과 달리 조각이 부재하는 영상(싱글채널 비디오)으로만 제작되었다. 그는 〈예수와 부처 사이〉 2탄의 부제를 ‘ABNORMAL’이라고 붙였다. 비정상? 무엇이 비정상이란 말인가? 우선 〈예수와 부처 사이〉 2탄을 제작한 작가의 육성을 들어 보자. “가시관을 쓴 채 피를 흘리는 예수의 모습과 미소를 띤 부처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이미지를 많이 모아서 스틸이미지로 촬영했습니다. 이 사진들은 컴퓨터 작업을 통하여 예수에서 부처로 다시 부처에서 또 다른 예수로, 계속 다른 모습으로 합성화되는 과정을 영상화했습니다. 이 모습은 고개를 들었다가 숙이는 모습, 또는 처참함과 웃음이라는 극단적 감성을 오고 갑니다. 이 작품의 중요점은 합성화를 위해 필요로 했던 예수와 부처의 스틸이미지를 영상화시킨 이후 그 스틸이미지의 원본을 삭제했다는 데 있습니다. 관객은 단지 비디오를 통하여 예수의 모습 근사치에서 부처 모습의 근사치로 변화되는 과정만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도 부처도 아닌 디지털화된 시뮬레이션만을 보게 되는 것이죠.”
〈예수와 부처 사이〉 2탄은 〈예수와 부처 사이〉 1탄보다 이미지 수도 다양해지고 해상도도 높으며, 이미지 변환 속도도 빨라진데다 사운드까지 첨가되어 조각적 풍경 없이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한 이 작품은 몰핑(Morphing) 기법을 통해 부처와 예수를 마치 유동성(LIQUIDITY)처럼 영상으로 전이시켰다. 작가는 〈예수와 부처 사이〉의 중요점을 ‘스틸이미지의 원본을 삭제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작가가 차용한 ‘스틸이미지의 원본’은 다른 원본(회화나 조각)을 복제한 사진 이미지가 아닌가? 부처가 예수로 변형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필자는 정상적인 의식이 아닌 비정상적인(Abnormal) 상태, 즉 마치 최면에 걸린 듯한 몽환 상태(Trance)에 빠져 든다. 이용백의 〈예수와 부처 사이〉는 자를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가 특수한 희열에 잠기게 하는 일종의 ‘최면 영상’으로 작용한다.

〈거울〉 모니터, 매킨토시 거울, 스피커 2007

물질적 혜택과 정신적 만족감

“‘반 고흐의 잘린 귀가 오른쪽일까요, 왼쪽일까요?’ 난데없는 작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설명이 이어졌다.‘반 고흐의 자화상으로 보면 오른쪽 귀인 것 같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렸으니 실제 잘린 귀는 왼쪽이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용백의 대표작 〈거울〉의 발단이다. 그는 거울에 맺힌 상과 실제 모습의 좌우가 뒤집히는 것에 착안해 〈거울〉 작업을 시작했다.”(2011년 1월 16일자 한국일보 〈인터뷰: 2011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 이용백〉 중에서)이용백의 〈나르시스 아기: 모니터 속의 둥이(Baby of Nar- cissus: Twins in Monitor)〉(1999~2003)는 백색 받침대와 TV 모니터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백색 받침대 윗면은 거울이고, 그 거울 위에 내장을 드러낸 TV 모니터가 놓여 있다. 따라서 내장을 드러낸 TV 모니터는 거울에 반사된다. 그런데 TV 모니터 안에 있어야 할 쌍둥이 아기 영상은 TV 모니터 밖에 위치한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필자는 이 작품을 처음 보곤 홀로그램으로 제작된 것으로 착각했고, 홀로그램 필름을 찾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용백의 〈나르시스 아기〉는 어떻게 출현한 것이란 말인가? 우선 백색 받침대 윗면의 거울은 일반적인 거울이 아니라 일종의 ‘특수거울’이다. 그 거울은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이 보이지 않는 거울이다. 이용백은 그 거울 밑, 즉 백색 받침대 안에 쌍둥이 영상을 담은 모니터를 설치한다. 때문에 관객은 마치 환각 상태에 빠진 것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쌍둥이 영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쌍둥이 영상이 마치 자유롭게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첨단 과학기술로 가능해진 물질적 풍요로움은 반면 정신적 빈곤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 문명에서 얻지 못하는 정신적 만족감을 늘 추구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에 이용백은 주목한다. 이를테면 그는 현대 문명이 이룩해 놓은 물질적 혜택과 정신적 만족감 사이의 균형을 되찾는 작업에 몰두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위해 그가 주목한 매체는 흥미롭게도 앞에서도 언급된 ‘거울’이다. 따라서 ‘거울’은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셈이다. 1993년 이용백은 처음 거울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거울 작업은 CRT 모니터로 제작했다. 하지만 디스플레이가 효과적이지 못해 그는 2007년 다시 ‘거울’로 작업을 시도한다. 이용백의 〈거울(Mirror)〉(2007)이 그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용백의 〈거울〉 앞에 선다면 당연히 거울에 당신의 모습이 비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큰 파열음과 함께 깨져 버리는 게 아닌가. 당신은 갑작스런 ‘사건’에 놀라게 되겠지만, 당신의 불안감은 곧 안정감을 되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 실제로 깨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당신은 곧 궁금증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어느 곳에도 빔 프로젝트가 없는데 어떻게 거울이 깨지는 영상을 비추는 것일까?
이용백은 특수거울 뒤에 LCD 모니터를 설치한다. 특수거울은 거울 뒤에 설치된 LCD 모니터 화면과 프레임을 안보이게 은폐하면서 거울이 깨지는 영상만을 투과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따라서 관객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자체가 깨지는 듯한 환영을 경험하게 된다. 이용백의 〈거울〉은 작가 말대로 “거울이라는 실제 사물이 지닌 물질적 느낌과 가상적 영상을 완전히 하나로 융합”시킨 작품이다. 머시라? 무슨 말인지 접수되지 않는다고요? 만약 이용백이 거울이 깨지는 영상 작업을 단순히 LCD 모니터로 당신에게 보여 준다면, 당신은 전쟁영화를 보듯 팝콘을 먹으면서 별다른 반응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LCD 모니터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실제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LCD 모니터의 영상을 실재의 사건이 아닌 가상적 사건으로만 본다고 말이다. 하지만 LCD 모니터가 아닌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 깨진 것처럼 보인다면, 당신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이라는 실제 사물이 지닌 물질적 느낌과 가상적 영상을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것으로 당신이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죠?

〈인공 감성〉 박제된 소 인공호흡기, 5채널 인터랙티브 설치 300×500×500cm 2000

테크노 샤먼?

“거울속의 나는왼손잡이오 내 악수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 왼손잡이오”(이상의 〈거울〉 중에서)앞서 말한 〈피에타〉보다 1년 먼저 제작한 또 다른 〈피에타〉(2007) 역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모델로 삼아 제작한 작품이다. 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포즈’를 차용하여 제작한 일종의 ‘사이보그 마리아’와 특수거울 받침대로 구성된다. 사이보그 마리아는 특수거울 받침대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허공에 부유하도록 벽면을 이용하여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사이보그 마리아는 특수거울과 간격을 두고 특수거울에 반사된다. 이용백은 사이보그 마리아를 엉뚱하게도 하늘을 향해 거꾸로 설치해 놓았다. 때문에 특수거울에 비친 사이보그 마리아는 반전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출현한다. 하지만 이용백의 〈피에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재한다. 아니다! 특수거울에 반사되는 사이보그 마리아의 두 팔 안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등장하는 예수의 포즈를 차용한 일종의 사이보그 예수(이미지)가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이 이미 감 잡았듯이 특수거울 받침대 안에 예수의 이미지를 담은 모니터가 장착되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 특수거울 안에 장착된 모니터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특수거울은 거울 뒤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과 프레임을 안보이게 은폐하면서 예수 이미지만을 투과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은 마치 사이보그 마리아의 두 팔에 사이보그 예수(이미지)가 올려져 있는 듯한 환영을 경험하게 된다. 이용백의 〈피에타〉에 관해 김원방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전통적인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은 사이보그 혹은 로보트로 대체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이제 디지털시대에는 휴머니즘적 의미의 인간과 신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온갖 불경스러운 혼성적 사이보그나 로봇 그리고 생명공학적 괴물들이 차지하리라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통찰을 환기시키는 듯하다.”지난해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INDAF)에 출품한 이용백의 〈피에타〉 시리즈의 하나인 〈미지의 조각(Unknown Sculp-ture)〉은 도나 해러웨이의 진술을 극한까지 몰고 간다. 전통적 조각은 받침대 위에 조각이 설치된다. 그런데 이용백의 〈미지의 조각〉은 전시장에 받침대만 놓여 있는 모습이다. ‘모바일 아트’에서 그 받침대는 일종의 마커 역할을 한다. 따라서 관객이 스마트폰을 마커에 가져가면, 받침대 위에 3D로 제작된 피에타 조각상이 출현한다. 그리고 스마트폰 화면에 ‘격투’와 ‘키스’ 버튼이 등장한다. 만약 당신이 격투 버튼을 누르면 부활하는 예수를 마리아가 구타해서 다시 죽게 한다. 만약 당신이 키스 버튼을 누르면 예수와 마리아는 키스를 한다. 이용백의 〈미지의 조각〉은 관객의 참여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시장에는 조각(작품)을 기다리는 받침대만 있기 때문에, 관객은 직접 스마트폰을 통해 작품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신의 손가락 터치로 인해 증강현실(AR)로 부활하는 예수가 다시 죽음을 당할 수 있으며, 어머니와 아들이 근친상간을 할 수도 있게 된다. 결국 이용백의 〈미지의 조각〉은 관객을 난공불락에 빠트린다. 그리고 반대로 오늘날 유행하는 인터랙티브 아트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용백은 물질 문명과 정신적 만족감 사이의 균형을 되찾고자 모색하는 테크노 샤먼(Techno-shaman)이란 말인가?

시민을 위한 ‘명품 공연장’

이종덕_1935년 출생. 연세대 사학과 졸업. 문화공보부 정책연구관, 88서울예술단 단장, 서울예술단 이사장,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 성남아트센터 사장 역임. 2009 보관문화훈장, 2010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문화경영 명인상 수상. 현 충무아트홀 사장.

시민을 위한 ‘명품 공연장’

글 | 김수영 기자

뮤지컬 전용의 복합 문화공간 충무아트홀이 새로운 수장을 맞이했다. 새 사장은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거쳐 지난 6년간 성남아트센터를 국내 정상급 공연장으로 올려 놓은 ‘한국 공연예술계의 대부’ 이종덕. 그는 1963년 문화공보부 공무원으로 처음 문화계에 발을 들인 이래, 국내 최고 공연장의 사장을 두루 역임하며 몸으로 예술행정을 펼쳐 온 ‘문화예술경영 1세대’다. 한 평생을 공연예술계에 바친 그의 나이는 76세. 성남아트센터의 임기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나려던 차, 충무아트홀에 부임해 공연장과의 끈질긴 인연을 또 다시 이어갔다.
“나는 늘 젊게 살고자 한다. 항상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 나이대로 살기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눈에 난 좀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식지 않는 열정의 원천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건장한 체격의 그가 껄껄 웃으며 답한다. 성남아트센터에서 세계적인 공연자의 초연을 유치하고 뮤지컬을 자체 제작하는 등 매번 새로운 시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그다. 그만큼 앞으로 그가 충무아트홀에 어떤 변화를 몰고올지 관심이 집중된다. 동시에 그가 상대적으로 소규모, 저예산으로 운영되는 ‘아담한’ 문화 공간의 사장직을 수락한 배경이 궁금해진다.
이종덕 사장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충무아트홀의 문화적 지리적 매력에 주목하고 있었다. “모든 게 중구에 몰려 있다. 한옥마을과 동대문역사공원… 또 명동이라면 우리 학창 시절에 거길 지나치지 않으면 뭔가 빠진 듯 느낄 정도였다. 지금의 국립예술극장도 우리 세대에게는 ‘시공간’이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추억에 남아 있다. 이 지역에서 충무아트홀이 가지는 문화적 역할이 크다고 본다. 2005년 개관 이후 뮤지컬 붐 시대에 뮤지컬 전용 극장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는 앞으로 충무아트홀이 앞서 이루어 놓았던 성과와 특성을 존중하면서, ‘명품 공연장’으로 발돋움시키기 위한 그만의 계획을 펼칠 예정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작은 공연장이긴 하지만 이번이 충무아트홀을 서울의 ‘명품 공연장’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걸 느꼈다. 명소가 되는 길은 최고 컨텐츠의 작품을 올리는 거다.” 이를 위해 고급 예술 공연도 함께 시도할 생각이다. 앞으로 연간 50%의 뮤지컬, 30%의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 등 순수 예술 프로그램을 더하고, 나머지 20%는 시기성을 고려한 이벤트성 공연 행사로 구성할 계획이란다. 충무아트홀은 컨벤션센터와 규모 있는 전시 공간을 갖춘 데다, 체육 시설까지 인접해 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시민에게 폭넓게 다가서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발전시킬 예정이다.
이종덕 사장의 문화 예술 경영관의 중심에는 무엇보다 ‘시민에 위한 예술’이라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다. 관객을 위한 서비스는 기본,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충무아트홀이 시민의 예술 활동을 위한 매개자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아카데미를 개설해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서클’을 만들어 공연 등 예술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다.

My Favorite things

‘작가는 어떤 작품을 좋아할까?’ ‘좋아한다’는 의미의 층이 넓게 열려 있듯이, ‘좋아하는 작품’의 의미도 실로 다양하다. 예술적으로 공감하는 작품에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작품, 남다른 추억을 간직하고 있거나 누군가와 함께 감동을 나누고 싶은 작품 등… ‘좋아하는 작품’에는, ‘무거운 것’에서부터 ‘가벼운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연이 얽혀 있을 것이다.‘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봤을 이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 art는 작가 21인에게 좋아하는 작품의 추천을 의뢰했다. 추천 작품은 동서고금의 시각 예술 전반을 대상으로 했다. 작가들이 고심을 거듭해 선정한 작품 62점과 추천 작가 자신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가상의 미술관’을 꾸몄다. 작가의 추천사는 구구절절한 애정의 서신이며, 번뜩이는 비평문이고, 또 다른 작가 노트이자 관람객에게는 친절한 작품 안내서이다. 작가에게는 ‘좋아하는 작품’을 회상하고 독자와 공유하는 자리가, 독자에게는 추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동서양 미술사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작가들이 까다롭게 선별한 작품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르지오 드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수> 캔버스에 유채 88×72cm 1914

홍승혜 <유기적 기하학> 500 900cm 2005 서울산업대학교 도서관 로비에 벽화 설치

홍승혜 >>> 거리의 우울과 신비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미술 교과서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종이의 얇은 표피에 구멍이 뻥 뚫리며 미지의 공간으로 빠져 드는 느낌이었다. 아득한 로마식 열주(列柱), 비현실적 원근, 밤과 낮이 불분명한 광선, 텅 빈 거리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그림자는 이상한 시간, 이상한 공간으로 나를 인도했다.
도시의 무인풍경(無人風景)은 ‘폐허(廢墟)’에의 취향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문명으로서의 건축은 원래 사람의 자리인데 비어 있는 도시는 정체 모를 애수를 자아낸다. 그건 시간의 흐름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실상 건물처럼 인간의 부재를 잘 드러내는 도구는 없다. 음악으로 치면 그건 단조(短調)에 해당한다. 누구나 다 좋아해도 결코 싫어할 수 없는 그런 작가들이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렇고, 조르지오 모란디가 그렇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그렇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들은 모두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와 영감을 공유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모종의 우울한 공기를 우리 모두는 사랑한다. ‘신비’와 ‘우수’는 불안과 고독의 어머니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기쁨과 환희보다는 슬픔과 비애를 훨씬 더 쉽게 나눌 수 있나보다. 비극의 정화작용이랄까. 데 키리코의 이 가늠하기 어려운 적막한 그림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게 그 어떤 추상화보다도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공기로 가득찬 어떤 ‘깊이’로 남아 있다.

추천 리스트
조르지오 드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수> 캔버스에 유채 88×72cm 1914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 나무에 유채 117×162cm 1565
지울리오 파올리니 <Grandezza Naturale> 액자에 넣은 사진, 찢어진 확대 사진, 흰 좌대 82×50×40cm 1986~87

잭슨 폴록 <Number 1A, 1948>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172.7×264.2cm 1948

이승택 <물 그림> 한강변에서 물감 뿌리기 1981

이승택 >>> Number 1A, 1948

늘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고 비틀기를 좋아하는 나는 현대미술 거장들의 난해한 방법과 독창적 비밀을 꼼꼼히 추적한 바 있다. 이중에서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액션 페인팅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그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중 가장 위대한 선구자로 새로운 회화적 혁신을 가져 왔다. 그는 미국 현대미술이 국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데 기여 했으며, 뉴욕을 중심으로 새로운 현대미술의 역사가 창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폴록은 1947년 ‘드리핑(Dripping)’을 창안, 형태 그리기를 거부하고 형태를 넘어서 순간의 직접적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회화의 즉시성을 추구했다.
드리핑은 혁신적이고 표현적 필요에 응하는 완전히 새로운 제스처이다. 그는 회화와 데생이 하나가 되는 커다란 크기의 엮음, 캔버스의 배치와 전달, 그림 전체에 범람하는 순수하게 회화적인 공간을 탄생시켰다. ‘올오버(All-over)’로 신비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블랙 페인팅을 창안해 낸 것이다.

추천 리스트
잭슨 폴록 <Number 1A, 1948>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172.7×264.2cm 1948
마르셀 뒤샹 <샘> 혼합재료 63×48×35cm 1914
이브 클라인 <인체 측정> 퍼포먼스 페인팅 1960

마르셀 뒤샹 <너는 나를 Tu' m> 캔버스에 유채와 흑연, 병 닦는 솔, 기저귀 안전핀, 너트와 볼트 69.8×303cm 1918

허구영 <여기를 보라> 천에 안료, 먹물, 돋보기, 녹은 고무풍선 가변크기 2008

허구영 >>> 너는 나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마지막 회화 작품 <너는 나를(Tu m’)>은 유별나게 좌우로 길쭉하다. 미술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캐서린 드레이어가 자신의 서재 위를 장식할 목적으로 뒤샹에게 특별히 주문하여 제작된 것이다. 뒤샹이 장식적이라는 이유로 이 작품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음에도, 이 작품의 구석구석에는 이후 현대미술에서 거론되는 여러 핵심 쟁점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동사를 원하는 대로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붙여진 <너는 나를>이라는 제목이 흥미롭다. 이것은 자신의 몇몇 이전 작품에 대한 요약이자 미술에서 행해진 다양한 방법들을 한 화면에 표본 추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3개의 커다란 그림자 중에서 <자전거 바퀴>(1913)와 <모자걸이>(1917)는 자신의 레디메이드를 반영한 것이다. 왼쪽 아래 구석에 길게 그려진 형상은 <세 개의 표준 정지 장치>(1913~14)를 단순화해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중앙 아래의 집게손가락을 편 손은 광고판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서명하도록 한 것이다. 왼쪽 위 구석부터 화면의 중앙으로 향한 기하학적 형상들(컬러차트를 연상시키는)은 이본 샤스텔이 칠을 하여 완성된 부분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화면 중심의 노란색 마름모 형상 위의 너트, 찢어진 천 그리고 이를 고정하고 있는 세 개의 기저귀 안전핀과, 이로부터 고정되어 화면 바깥으로 길게 돌출된 솔 등의 오브제를 교묘히 도입함으로써 시각적 교란을 조장하고 있다.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하여 작품이 갖는 원전성과 작품 제작에 있어서 수작업이 갖는 가치, 회화가 갖는 시각성의 문제에 대해 복잡하고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개인전 서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Index Finger, M. Duchamp <Tu m’>에서의 Index Finger, 홀로 있는 그림자들, 구겨진 그림자, 사진이란 것, 텅 빈 화랑의 벽면, 하나둘셋(ONETWOTHREE), 한 쌍, 테마로서의 커플, 특히 아주 작은 종이 상자, 결과 주름, 감행(敢行)한다는 것, 탁본, 프로타주, 릴리프, 광택 나는 그림 표면, 질 좋은 나무각재와 커다란 판재, 내 것(나의 작품)을 보고 있는 나,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왠지 알 것만 같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이제 작품은 나를 상처 냈다’, Broken My Index Finger, 각인, 상감이란 테크닉, 뒤샹이 말한 ‘극히 얇은 것(Infra-mince)’이란 것, 먼지, 진흙, 타고 남은 재, 1904년의 폴 세잔.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또는 새롭게 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미지와 사물들이며 내가 좋아하거나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계속된 의문 하나가 또 있다. ‘왜 뒤샹은 작품 제작 포기 선언 후에도 작품을 남겼나?’

추천 리스트
마르셀 뒤샹 <너는 나를 Tu' m> 캔버스에 유채와 흑연, 병 닦는 솔, 기저귀 안전핀, 너트와 볼트 69.8×303cm 1918
정광호 <Chained & Unchained Object> 혼합재료 가변설치 1988

왼쪽 · 김홍도 <선인송하취생도(仙人松下吹笙圖)> 족자 종이에 담채 109×55cm 18세기 말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오른쪽 · 김호득 <문득-공간을 긋다> 먹칠한 한지에 분필선 209×95cm 2010

김호득 >>> 선인송하취생도

피카소 세잔 김홍도 정선 등 대가들의 실제 그림을 보면 주변에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어떤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릴 때의 고뇌와 희열을 공유해 보려고 온 몸의 감각과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까지 일치시켜 몰입하면 정말 짜릿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육체와 정신이 일치하는 어떤 지점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대가들의 작품에만 나타나는 어떠한 마술을 나는 가끔 본다. 온 몸의 오감과 육감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어떤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김홍도(金弘道, 1745~?)의 <선인송하취생도(仙人松下吹笙圖)>를 원화로 처음 본 것은 박물관의 어느 특별전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때는 서양미술에 대한 식견보다 동양미술이나 한국미술에 대한 식견이 부족해 부끄럽게 생각하던 시절이었지만, 단원이나 겸재 정도는 잘 알고 있고 둘의 장단점을 토론할 정도의 안목은 있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전통 산수화나 인물화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이해하기 힘들고 해결이 잘 안 되는 점들 때문에 힘들어 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전통과 현대, 독창성, 정신성 등에 대해서 깊이 고뇌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 그림을 가까이 보면서 서서히 호흡을 일치시켜 나가는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아! 이렇게 기법과 내용이 혼연일체가 되면서 물 흐르듯 자유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림 속의 음율, 선과 점의 리듬, 작가의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황홀경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시각은 물론 청각 후각까지 동시에 자극하면서 고고한 정신성을 구가하는 미의 결정체, 공간과 시간의 완벽한 결합을 본 것이다. 오랫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답답하게 해결하지 못했던 어떤 화두가 일시에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균관참치배봉시(筠管參差排鳳翅) 월당처절승룡음(月堂凄切勝龍吟): 생황(笙簧)에 붙은 대쪽은 봉의 날개를 펼친 듯하며, 월당(月堂)에서 들리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보다 드높다.

추천 리스트
김홍도 <선인송하취생도(仙人松下吹笙圖)> 족자 종이에 담채 109×55cm 18세기 말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팔대산인(八大山人) <팔팔조도(叭叭鳥圖)> 종이에 수묵 31.8×27.9cm 1694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에서 본 마크 로스코의 암갈색 대작 시리즈

김학량 <부작란> 인화한 사진에 네임펜으로 화제(畵題)를 써넣음 20×25cm 2002

배종헌 <유랑농부> 고안된 트레일러에 각종 장치와 기구들, 태양판 모듈, 종이에 연필과 과슈, 디지털 C-프린트 2009

배종헌 >>> 부작란

김학량(1964~)은 ‘부작란(不作蘭)’이라 하였다. 나는 ‘부작란이위작란(不作蘭而爲作蘭)’이라 하였다. 난(蘭)을 그리지 아니하였으되 난을 그린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그리 적었었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작란이위진부작란(作蘭而爲眞不作蘭)’이거나 ‘부작란이위진작란(不作蘭而爲眞作蘭)’인 것 같다. 그에게 난은 한낱 풀이다. 애당초 옛 선비의 형이상학적 상징물로서의 난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그리려 하였겠으나 진실로 그러한 난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난은 형이하학적 현실계의 미물을 그려 놓은(찍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학량의 난은 난이 아니고 뒷동산의 풀이거나 파괴된 도시의 철근 자투리거나 길바닥의 무엇이다. 그의 부작란이 고고한 문인 완당(阮堂)의 부작란에서 연유하였으되 진실로 부작란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김학량의 부작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작란이위진부작란(作蘭而爲眞不作蘭)이라 적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풀은 난이다. 그는 난을 그리지 아니하였지만 진실로 난을 그린 것이 되어버렸다. 도처의 풀은 한여름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선 난처럼 그윽한 향기를 내지도 못하고 오탁한 세상과 거리를 둘 만큼 까탈스러움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무취의 향내는 혼탁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비의 절개보다 더 굳건한, 자기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 생의 의지로 깊고 깊은 생각의 골짜기를 건너게 한다. 온갖 더러운 장면들을 목격하고서도 스스로를 다스리며 생의 새로운 국면을 모색할 줄 아는 풀, 파괴의 현장에서 앙상한 뼈를 드러내며 소리치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는 철선은 그 옛적 군자의 난에 견주고도 남음을 본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현시적 군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로 난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 김학량의 부작란을 진작란(眞作蘭)이라 또 적는다.
김학량의 부작란 연작이 완당의 그것과 다른 결정적 중요성은 초월적 이상을 생의 현장 곁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고자 한 데 있다. 완당의 부작란에 대한 주석의 방법을 취한 것은 이 연작의 한계로 여겨지기보다 현실계에서의 수행적 차원이 부각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작업 전개의 시작점에서 자기 부정과 모순의 구조를 역설적으로 잘 드러낸 귀한 작품이다.

추천 리스트
김학량 <부작란> 인화한 사진에 네임펜 20×25cm 2002
강수경 <내 가족 내 가죽> 텍스트 2010
김민경 <소멸되는 일기> 싱글채널 영상 4분 49초 2010

스즈키 오사무 <산 위에 걸린 구름> 혼합재료 44×60×16cm 1983

원경환 <흙의 인상 09>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9

원경환 >>> 산 위에 걸린 구름

스즈키 오사무(鈴木 治, 1926~2001)는 현대도예의 선구자로 미국을 포함하여 유럽 등 세계 현대도예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작가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중심이 된 민예 운동이 한참이던 근대 도예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순수미술로서의 도예를 지향하고자 한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흙으로 가능한, 물레로는 불가능한’이라는 그의 말은 흙의 구축이라는 프로세스에 맞추어 나가면서 실용성을 배제한 작품의 추구를 말한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983년 교토의 한 화랑에서였다. 군더더기가 없는 간단 명료 한 포름으로 시점이 정면으로 고정화되어 있었다. 작품 전면을 붉은색 화장토로 바르고 그 위에 재유(灰釉)로 시유하여 소성한 것은 흙의 물성을 강조하고자 하였음일 것이다. 아무리 간결한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해도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구상은 아니다. 말 산 구름 등 현실의 구체적인 이미지에 근거하여 그만의 형태로 구현한다. 특히 구름이라는 비정형의 현상을 테마로 채택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산 위에 걸린 구름>의 경우 산은 잘라 낸 공허한 이미지로, 구름은 채색된 점토로 표현하고 있다.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환기력이 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읽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풍부한 상념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시(詩)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했는데, 스즈키 오사무의 작품에는 넓은 의미의 시(詩)가 있다. 결국 그의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 완결되지 않고 보는 이의 내면에 침투하여 즐거움과 꿈으로 충족시킨다. 이 시적인 환기력이야말로 이 작가의 가장 주목해야 할 특성일 것이다.

추천 리스트
스즈키 오사무 <산 위에 걸린 구름> 혼합재료 44×60×16cm 1983
심문섭 <Opening Up> 스톤클레이 118×68×24cm 1981
심문섭 <Thoughts on Clay> 점토 87×32×40cm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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