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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 Culture

2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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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며, 작품이 가장 비싼 살아있는 작가, 제프 쿤스. 그의 초대형 회고전이 휘트니미술관(6. 27~10. 19)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와 함께 록펠러센터 앞에 거대한 토피어리 조각「Split-Rocker」까지 설치돼 2014년 여름 뉴욕의 아트씬은 제프 쿤스의, 제프 쿤스에 의한, 제프 쿤스를 위한 한바탕 축제를 치루고 있다. 이번 회고전은 쿤스가 35년 동안 펼쳐 온 작품 세계를 연대기별로 조망하는 자리로, 초기작부터 신작을 포함한 150여 점의 작품이 사상 최초로 한 장소에 모인 기념비적 전시다. 미술관은 제프 쿤스를 이렇게 소개한다. "전후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고, 대중적이며, 논쟁적인 작가." 이번 특집에서는 이 문장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질문한다. 과연 쿤스와 그의 작품이 동시대 미술에서 왜 중요하며, 그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분출되며, 작품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말이다. 구닥다리처럼 보이던 레디메이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미술과 대중문화의 판타지를 결합하며, 산업화된 제품 생산 공정처럼 동시대 미술의 제작 과정의 한계를 실험한 선구자. 헐리우드 배우만큼 유명 인사이자, 글로벌 아트마켓의 살아 있는 신화, 제프 쿤스! 그를 향한 미디어의 상찬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상일까... Art는 1979년부터 시작된 쿤스의 작품 세계를 '레디메이드의 후예' '키치의 제왕' '천국과 지옥 사이' '소비시대의 기념비' '유희-회화의 향연' 등 5개의 테마로 살핀다. 또한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하고, 제프 쿤스 삶의 궤적을 따라 그가 왜, 어쩌다, 우리 시대의 문제적 아이콘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추적한다.

Contents

COVER
        제프 쿤스(Jeff Koons) 〈Large Vase of Flowers〉 나무에 채색 132.1×109.2×109.2cm 1991 ⓒJeff Koons

 

SPECIAL FEATURE
         제프 쿤스(Jeff Koons)
         창조와 파괴의 마술사

070    ➊ Pictorial
         5개의 테마, 쿤스의 1979~2014 / 김재석, 탁영준
093    ➋ Report 
         휘트니미술관 회고전, 쿤스에 의한, 쿤스를 위한 / 이정연
096    ➌ Essay
         위대한 예술? 그 진실과 허상 / 김재석

 

PRISM

046    예술인에게도 ‘보편적 복지’ 적용하라! / 김준기
047    지금, 온라인 미술시장이 뜬다 / 박숙희

 

FOCUS

048    박진아展: 헤테로토피아의 공간 / 강수미
050    장 샤오강(Zhang Xiaogang)展: 기억과 망각의 헌시 / 박소영
054    긴 호흡展: 현재로의 질주 / 정연심
058    김영원展: 명상의 ‘인체 조각’ / 김이순
060    Silence is Movement展: 정중동의 미학 / 김종길
064    New Habit展: 시공간을 비트는 습관들 / 김진주

 

ABROAD

108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Berlin Biennale)
         : 주변에서 중심까지 / 백기영
146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Venice Biennale) 건축전
         : 건축의 ‘근본’을 읽다 / 심영규

 

CRITIC

154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展
         : 모더니티의 그 다음 문장들 / 김계원

 

CAST

129    그녀의 시간
         ➊ 할머니들 때문에 버텨 온 세월 / 최상일
         ➋ 이상한 할머니들 / 김용언
         ➌ “내 진심을 그대에게!” - 아시아 디바와 근대성의 목소리들 / 이용우 

 

SAY ARTIST

120    배병우 
         : Mr. 소나무’의 삶과 사진 / 호경윤

 

ART ON PAGE
118    Signal / 진달래&박우혁 

 

ETC.
045    EDITORIAL / 호경윤
165    ART FIELD
178    P.S
179    SUBSCRIPTION
180    CREDIT

Articles

[CRITIC] 아카이브 전시

최근 아카이브 전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아키비스트’형 작가라는 지칭도 등장했다. 왜 우리는 역사학자처럼 바스락거리는 과거의 세계에 매료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상상의 향수에 젖을까? 필자는 한국 근현대사를 읽고 쓰며 듣는 학습 행위의 매커니즘으로 조망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전(6. 26~9. 21 일민미술관)을 통해 기록물에 기반을 둔 아카이브 전시의 문맥을 되짚는다. 모더니티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떤 아카이브를 만들고, 어떤 아카이브를 폐기할 수 있을 것인가? 자, ‘다음 문장을 읽어 보자.’

모더니티의 그 다음 문장들

/ 김 계 원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인문학박물관 아카이브전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 전경. 박물관의 책과 각종 관련 자료 중 500여 점을 선별했다. 가상 주인공 2명으로 한국 모더니티의 양상을 살핀 ‘모더니티의 평행  우주.’ 책이 교육의 ㅁ 시절을 주목한 ‘인간의 생산.’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과거를 각종 이미지와 영상 사운드로 조합한 ‘이상한 거울들’ 등 3개의 섹션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영국 작가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가 대영박물관에서 재발견한 유물로 이루어진 전시 <이름 없는 장인의 무덤(The Tomb of the Unknown Craftsman)>은 2012년 영국 문화계의 큰 이슈 중 하나였다. 페리는 그동안 상설전이나 기획전에 전시되지 않았던 ‘이름 없는’ 오브제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해석하여 5개의 카테고리로 섞어 놓았다. 물론 전시장 곳곳에 자신의 설치 작업을 살짝 끼워 넣기도 했다. 마치 아이폰이 내 라이브러리에 저장된 mp3 파일을 셔플링하듯, 이 악동 아티스트는 중앙아시아의 휴대용 신전과 자바에서 발견된 태피스트리의 박물관적 맥락을 과감하게 섞어 버렸다. 페리 자신이 시스템의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물관을 ‘무덤’이라 정의 내린다.


<반공국민가요집> (승공사상계몽회 중앙본부, 1969)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 유럽의 수많은 박물관은 현대문화의 조류를 좇는 노력과 제국의 아름답고도 실리적인 파트너로서의 자기 역사를 끊임없이 반추해 왔다. 특히 대영박물관은 단순히 제국의 괴력이 닿은 영토로부터 약탈한(looting) 유물의 보관소가 아니라, 후기 식민지 시대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새로운 전시 테크닉으로 연출해 왔다. 현대적 박물관의 모범이자 뉴 뮤지올로지(New Museology)의 실험장으로 평가받는 이곳은 페리에게 이름 없는 장인의 무덤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작가에게 수장고를 서슴없이 내어 줄 만큼 대영박물관의 배포가 컸다는 사실이다. 또한 자신의 심장 한가운데에 작가가 살 방을 허락할 만큼 너그러웠다. 작가는 문자 그대로 박물관 안에서 그 심박수를 느끼며 살았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유물을 보고 보존 기술을 배웠다.


이광수, 《나(소년편)》 (문연사, 1951)

유물 속에서 역사를 읽고 역사 속에서 이름 없는 장인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렇게 해서 기획된 전시는 말할 것도 없이 그레이슨 페리라는 작가의 1인칭 시선으로 선별, 해석, 연출한 제국 박물관의 베타 버전이었다. 로제타 스톤이나 이집트 미라가 아닌, 역사적 의미도 확실하지 않고 고증도 더 필요한, 수장고 한편에 놓여 있던, 어느 시대나 장소에서 어느 이름 없는 장인이 만들었을 유물을 페리가 열심히 꺼내고 보여 주고 배치하는 동안, 세계문화사의 토폴로지(topology)는 새롭게 구성된다. 그의 뛰어난 시각적 센스가 골라낸 공예와 디자인, 취향과 문화, 지리와 마법, 종교와 성(性), 젠더와 물질, 그리고 사물이 가진 매력과 힘이 다중심적(multi-centered)으로 배치, 교환, 공존하는 세계사. 적어도 이 전시장 내에서 이제껏 우리를 지겹게도 따라다니던 대문자 ‘모더니티’는 하나의 관념적 카테고리로 상대화될 뿐이다.


《국민학교 국민교육헌장풀이 (5-6학년)》(문교부, 1977)

모더니티가 지도에 새겨 넣은 공간적 분류(중동, 오리엔트, 극동 등의 문제적 경계)와 역사주의(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어느 문명권에서도 매끈하게 들어맞지 않는 범주)가 더는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시공간,1) 패트론과 장인의 갑을 관계만으로 해석될 수 없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공예품, 다른 문화 간의 항해와 교섭, 젠더와 종교와 마법으로 재소환되는 문화사, 그 안에서 오롯이 드러나는 이름 없는 장인들의 얼굴. 페리는 유물의 공동묘지를 장인과 사물, 관객 간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장소로 변환시켰다. 물론 그곳은 자신이 고른 오브제가 인쇄된 에코백을 제작, 판매하는 문화산업의 중심부이기도 하다. [이하 생략]

[REPORT]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Venice Architecture Biennale)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6. 7~11. 23)은 특별하다. 총감독 렘 콜하스는 ‘건축가 없는 건축’을 선언하고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로 ‘근본’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모든 전시를 관통시켰다. 각 국가관은 ‘근대성의 흡수 과정 100년을 탐구하라’는 미션을 받았고, 한국관은 남한과 북한, DMZ라는 공간축과 분단의 역사라는 시간축을 촘촘히 엮어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필자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콜하스의 전시 의도를 수용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아카이브 전시를 시도한 국가관 중 한국관이 수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비교 분석한다.

건축의 ‘근본’을 읽다

/ 심 영 규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전경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은 꼭 가서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한국관의 황금사자상 수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년이 자르디니 공원에 마지막으로 지어진 국가관인 한국관의 건립 20주년이고, 예전 건축전과 질적으로 달라진 몇 가지 변화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근본(fundamental)’이라는 주제로 건축의 요소를 분석하고 국가별 근대성의 흡수에 대한 역사 사회 정치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건축이 사회와 어떻게 연관되고 보이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프리뷰 기간 동안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국관 수상 현장이었지만, 베니스 전역에서 열리는 수십 개 국가의 수백 가지 전시가 11월까지 열리고 있다. 올해 건축전의 특성과 한국관 수상의 배경에 대해 ‘속성 핵심 정리’를 한다.

건축 전시는 보통 도면, 모델, 사진 등으로 구성된다. 물리적으로 구축된 공간과 건물을 제한된 화이트 큐브로 들여올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영상이나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을 사용해 화려하게 ‘치장’도 하지만 그 한계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건축 전시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건물 자체나 일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행동이나 반응을 감지하고 이를 전시에 반영하는 것이다. 이번 비엔날레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공간을 보여 주기 위한 ‘전시 프레젠테이션’이라는 형식에서 탈피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런 가운데 올해 건축전의 총감독을 맡은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이례적으로 모든 국가관에 흥미로운 과제 하나를 공통으로 내 줬다. 각 국가별로 지난 100년간의 근대성 흡수 과정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건축계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에, 그리고 각 국가의 커미셔너들은 경쟁전이라는 형식 때문에 “우린 다른 나라와 달라!”라고 외치며 차별화에 애를 쓴 모습이 역력하다. 덕분에 새로운 전시 방법을 찾는 국가관들도 많았다. 외형적으로는 아카이브 전시지만, 모아 놓은 자료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각 국가의 특수한 경제 체제나 사회 환경 속에서 건축을 비교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서 타임라인을 꺼내 든 곳도 많았다. 그래서 이번 건축전은 ‘본다’기 보다는 ‘읽는다’고 해야 적합하다. 텍스트가 많아서가 아니라 다양하게 패치워크된 정보는 단순히 시각적 접근이 아닌 컨텍스트와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립 모이저 〈김일성 광장, 평양〉 사진 2010

2000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콜하스는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이다. 이 거장은 올해 70세를 맞았지만 건축계 누구나 ‘렘’이라고 편하게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일찍이 20대부터 저널리스트와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뒤늦게 건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도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40년 가까이 자신의 이론을 풀어 냈다. 거대 도시 뉴욕을 연구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가 1978년 《광기의 뉴욕》을 집필했고, 고층 빌딩으로 숲을 이룬 뉴욕을 자신이 만든 프리즘인 ‘멘하타니즘(Manhattanism)’으로 분석했다. 자신의 사무실도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라고 이름 지었다. OMA는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미국 LA주립미술관 등으로 유명해졌다. 콜하스는 2008년 베이징의 중국국영방송본사(CCTV) 사옥을 설계하는 등 최근 중국과 아시아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종종 진행하고 있다. 자르디니 공원 내 중앙전시관에 마련된 〈건축의 요소(Elements of Architecture)〉전은 OMA의 브레인격인 연구스튜디오 AMO와 하버드대학 디자인대학원 연구팀과 함께 기획했다. 이 전시를 통해 콜하스가 이번 비엔날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또 무엇을 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건축의 요소를 천장, 창, 바닥, 발코니, 화장실, 에스컬레이터 등 15개로 낱낱이 분해한 뒤, 동서양의 다양한 파편을 직접적인 사물로 제시해 그 시간과 역사를 망라했다. 이 리서치 자료를 모아 2,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서적 《건축의 요소》를 출간했다. 그가 보여 준 전시는 기존의 총감독처럼 특정 주제만을 천명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를 실현하는 새로운 방법론과 시스템까지 포함한다. 한국관 커미셔너 조민석도 “지금까지 비엔날레는 건축 스타를 광고하는 곳이었고, 건축이 미술을 너무 따라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는 건축전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콜하스의 의지가 있었다. 기존의 건축전에 회의를 느끼고 몇 가지 변화를 줬다. 본래 건축전은 미술전보다 짧은 3개월간 열렸다. 1895년 태어난 할아버지 격이었던 미술전에 비해, 1975년 미술전의 한 부분으로 시작된 건축전은 1980년에 와서야 독립했다. 콜하스는 건축전에 미술전과 동등한 위상을 부여하고 싶었다. 이에 따라 올해는 건축전을 미술전처럼 6월에 시작하고 전시 기간을 2배로 늘렸으며 비엔날레 내 다른 전시를 자신이 만든 무대인 〈몬디탈리아(Monditalia)〉전과 연계했다.

하나의 대주제, 건축의 ‘근본’


OMA, 스와로브스키 협업 〈루미네어(Luminaire)〉 2014_아르세날레 〈몬디탈리아〉전 설치 전경

앞서 언급한 대로 베니스비엔날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자르디니 공원의 각 국가관, 공원 내 중앙전시관과 과거 조선소였던 아르세날레 주제관이다. 이전까지 이 세 장소의 전시는 각 국가관의 ‘대표선수’들과 총감독, 그리고 전 세계의 스타 건축가가 기획해 왔다. 올해는 세 가지 전시가 ‘근본’이라는 대주제 아래 유기적으로 엮이면서 한층 흥미진진한 전시를 만들었다. 모든 국가관에 통일된 〈근대성의 흡수: 1914~2014〉전은 지난 100년의 세월 속에서 글로벌과 로컬, 중심과 주변 사이의 맥락과 서사, 파편적 이미지와 요소를 분석하고, 중앙전시관의 〈건축의 요소〉전은 콜하스 특유의 탈구조적 패치워크 가운데 건축의 요소와 근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텍스트와 문법에 대한 가능성을 읽어 낸다. 아르세날레의 〈몬디탈리아〉전은 이탈리아 최남단에서 스위스와 국경을 마주 보고 있는 최북단까지 지엽적인 도시적 맥락의 이야기부터 보편적인 사회, 정치, 경제 시스템의 관계를 훑어 보는 동시에 춤과 영화도 함께 보여 준다. [이하 생략]

[ABROAD]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Berlin Biennale)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5. 29~8. 3)가 열렸다. 베를린의 예술과 문화 생산 활동의 거점인 서베를린과 베를린-미테의 박물관 및 현대미술 기관 4곳에서 작가 53명(팀)의 작품을 선보였다. 제7회 행사가 쏟아 낸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로 존폐 위기까지 겪은 후 주최 측은, 다시 ‘미술’ 그 자체에 주목했다. ‘열린 결말’을 위해  아예 주제를 없애는 대신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전시의 키포인트로 삼았다. 현대미술의 생산과 그것이 전시/소비되는 장소의 관계를 재맥락화하려는 시도다. 타국의 작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유행처럼 자리 잡은 인류학적 유물과 현대미술을 병치하는 전시 방식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본질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현대미술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 것일까? 질문에 관한 답변은 베를린비엔날레의 로고처럼 비어 있다.

주변에서 중심까지

/ 백 기 영

베를린과 베를린 사이에서


고쉬카 마쿠가(Goshka Macuga) <Preparatory Notes for a Chicago Comedy>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4

제8회 베를린비엔날레를 보기 전에 필자는 지난회 총감독 아투르 지미옙스키(Artur Zmijewski)의 정치적인 비엔날레의 충격을 떠올렸다. 과연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 후안 가이탄(Juan A. Gaitan)1)은 이전 비엔날레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그리고 중남미와 베를린이라는 지역적 맥락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베를린비엔날레는 KW인스티튜트의 클라우스 비젠바흐(Klause biesenbach)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ich obrist), 낸시 스팩터(Nancy spector)와 함께 1998년에 설립했다. 통독 이후 독일의 사회 정치적 변혁기를 관통하는 동시대 예술 행사로 유럽의 어느 비엔날레보다 사회정치적인 성격을 전면에 드러내는 대표적인 전시 행사로 알려져 있다. 창립 당시 주제로 <Berlin | Berlin>을 제시, 베를린비엔날레가 변화하는 도시 환경에 주목하고 동시대 예술의 사회정치적 경향을 드러내는 행사임을 표방했다. 특히 제7회는 비엔날레라는 제도에 ‘오큐파이(Occupy) 운동’과 같은 비제도적인 예술행동주의를 수용하면서 한 도시의 정치적 역동성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비엔날레는 예술계의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지 못하고 행사의 존폐까지 거론하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아로히 압달리안(Zarouhie Abdalian) <a caveat, a decoy>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4

베를린비엔날레가 표방했던 사회정치적인 성격의 비엔날레는 지난 비엔날레에서 그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 폴란드 국가관의 큐레이터이자 폴란드의 정치적 예술 그룹 ‘크리티카 폴리티차냐(Krytyka Polityczna)’의 멤버이며 같은 이름의 저널의 디렉터였던 작가 아투르 지미옙스키와 조안나 와르자(Joanna Warsza), 그룹 보이나(Voina)가 월가 시위대의 정치적 이슈들을 전면에 내세워, 전시라기보다는 정치적 토론과 시위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반면, 2012년 당시 같은 독일에서 벌어졌던 세계적인 미술 행사인 카셀도쿠멘타를 기획한 캐롤린 크리스토프 바카기예프(Carolyn Christov Bakargiev) 감독은 미술사와 고고학을 전공한 전시기획자답게 사회정치적인 예술을 제고하고 그 현실에서부터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전시를 만들어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지미옙스키의 베를린비엔날레가 정치만 난무하고 예술이 실종된 비엔날레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 비판을 의식해서였을까? 이번 비엔날레는 성찰적인 성격이 강했던 2012년 카셀도쿠멘타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백과사전적인 전시 형태를 선보인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가까웠다. 아마도 유럽 내 국제 미술 행사에서 이러한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또한 예술감독의 결정에 비중을 많이 둔 지난 7회와 달리,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기획을 분장하는 큐레이터 팀을 운영하여, 별도의 주제 없이 베를린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 공간을 연결하고 리서치 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다 보니 비엔날레라는 전시로서의 일관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역사적 맥락에 치중하는 포스트 개념미술 성향의 작업이 주로 출품되었다. 작품의 형식적 실험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사운드를 실험하는 작가, 개념미술과 공예적 작업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작가를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큐레이터 팀에는 달렘박물관2)에 진열된 악기를 베를린의 실험음악가인 타렉 아투이(Tarek Atoui)와 리히텐베어크의 버려진 수퍼마켓에서 전등을 옮겨 설치한 올라프 니콜라이(Olaf Nicolai), 이미지의 생산과 매장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한 카탈리나 로자노(Catalina Lozano), 이중의 삶을 다룬 나타샤 진왈라(Natasha Ginwala), 이미지 발굴하기에 집중했던 마리아나 뭉구이아(Mariana Munguia), 1837년 이름 없는 작가가 그린 프랑스 순교자 장 샤를 코르네의 처형 장면을 새긴 티셔츠를 어린이들에게 입혀서 촬영한 베트남 작가 얀 보(Dan Vo)가 참여했다.


샤흐라야르 나샷(Shahryar Nashat) <Hustle in Hand> HD 비디오, 사운드 10분 20초 2014

제8회 비엔날레는 알렉산더 훔볼트로 대표되는 중남미 연구 기관과 문화인류학적 유물을 전시하는 달렘박물관이 있는 베를린 서남부의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KW인스티튜트 혹은 뮤지엄 인젤 홈브로이히가 있는 미테 지역은 ‘역사적 베를린의 중심’이 되고, 리히텐베르크는 베를린의 남부이면서 지구상의 남부와 훔볼트 포럼과 이웃한 달렘박물관과 연결된다. 도시를 전 세계의 작은 모델로 간주해 전 지구화된 동시대 예술을 주목하는 방식의 전시기획은 이미 카셀도쿠멘타에서 여러 차례 사용했던 개념이다. 여기서 도시의 중심은 ‘텅 빈 중심’ ‘생각 하는 머리’ 등으로 은유된다. ‘텅 빈 중심’의 상징은 이번 비엔날레의 횟수인 숫자 ‘8’의 중간을 텅 비어 있게 디자인한 심볼 로고에도 나타난다. 예술감독 후안 가이탄은 비단 베를린뿐 아니라 전세계 메트로폴리스들은 중심이 비어 있는 상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도시의 중심은 외부에서 온 관광객의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하 생략]

* 본 기사는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의 지원으로 아트인컬처(아트인아시아)와 시각예술 플랫폼 더아트로(theArtro)가 함께 기획·게재하는 글입니다.

[SPECIAL FEATURE] 제프 쿤스, 창조와 파괴의 마술사

SPECIAL FEATURE ❶Pictorial_5개의 테마, 쿤스의 1979~2014

/ 김재석, 탁영준

레디메이드의 후예 1979~1985


The New Jeff Koons
​듀라트랜, 형광라이트박스 106.7×81.3× 20.3cm 1980_<새로움> 연작. 사진은 쿤스가 1960년 처음 드로잉 수업을 받던 날 크레용을 들고 찍은 것. 그는 이때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 예술가라고 느꼈으며 이 사진이 “내적 완전함이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를 보여 준다”고 회고했다.


제프 쿤스의 초기 작업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병치 기법과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상점에서 구입한 팽창형 인형(꽃, 토끼), 전자제품(스피커, 전화기, 진공청소기, 찻주전자, 프라이팬, 소형 냉장고), ‘새로움’을 강조한 광고(자동차, 음료, 담배), 농구공, 나이키 포스터 등을 있는 그대로 재활용했다. 형식적으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 의미가 알쏭달쏭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쿤스는 일상의 오브제를 조작하지 않으면서 본래의 모습을 변형하는 방법을 가리켜 ‘변형된 레디메이드’라 칭했다. 팝아트풍의 팬시함과 연약함을 연상케 하는 비닐 인형과 미니멀리즘풍의 거울과 플렉시글라스를 조합한 <팽창형(Inflatables)>(1979),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한 ‘우산과 재봉틀의 기이한 만남’처럼 형광등과 각종 전자제품을 야릇하게 ‘접촉’시킨 <Pre-New>(1979~80), 신형 진공청소기를 인간 신체에 관한 은유로 선택, 형광등을 넣은 플렉시글라스에 상점대처럼 수열식으로 배열한 <The New>(1980~87), 농구공이 하나, 둘, 셋씩 짝을 이뤄 수조 정중앙에 떠 있는 <평형(Equilibrium)>(1983~1993) 연작까지…. 그의 작품은 미술의 본질이 새로움만 추구하는 소비 문화와 맺는 관계를 탐구했다. 일상 오브제의 드라마틱한 마술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레디메이드는 쿤스의 최근 작업까지도 지속된다. [이하 생략]


Inflatable Flower and Bunny(Tall White, Pink Bunny)
비닐, 거울 81.3×63.5×45.7cm 1979_ <팽창형> 연작. 뉴욕 이스트 4번가의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제작한 첫 작품. 쿤스는 여러 상점에서 장난감이나 장식품을 사들였고, 1977년부터 이 물건들을 함께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로 다양한 높이와 색깔을 가진 밝은 색상의 비닐 풍선 꽃을 약 30cm 길이의 거울이나 반투명 플라스틱에 놓았다.


New Hoover Celebrity Ⅳ, New Hoover Convertible, New Shelton 5 Gallon Wet/Dry, New Shelton 10 Gallon Wet/Dry, Doubledecker
후버 셀레브러티 Ⅳ, 후버 컨버터블, 셸턴 습식/ 건식, 플렉시글라스, 형광등 251.5×135.9× 71.1cm 1981~1987_<새로움> 연작. 쿤스는 진공청소기가 남녀의 성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인간처럼 폐로 숨 쉬는 인격화된 대상으로 보았다.



One Ball Total Equilibrium Tank(Spalding Dr. J. 241 Series)
유리, 스틸, 염화나트륨시약, 증류수, 농구공 164.5×78.1×33.7cm 1985_<평형> 연작. 농구공을 물속에 떠 있도록 하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P. 파인만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농구공의 반만 가라앉히거나 공의 개수를 2, 3개로 늘리는 등 ‘실존하지 않는 존재의 상태’를 주제로 삼았다.



Dr. Dunkenstein
액자를 씌운 나이키 포스터 115.6×80cm 1985_<평형> 연작. 이 연작은 수조, 나이키 포스터, 청동으로 제작한 고무보트, 잠수구, 구명조끼 등으로 구성됐다. 쿤스는 이 세 분류를 <평형> 연작의 ‘삼위일체’로 보았다. 포스터는 비버턴, 오리건에 있는 나이키 공장에서 공수했고, 액자의 재료와 색상을 선택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SPECIAL FEATURE ❸Essay_위대한 예술? 그 진실과 허상

위대한 예술? 그 진실과 허상


/ 김 재 석


〈The New〉 연작의 아크릴릭 케이스를 청소하는 제프 쿤스 1985년경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초대형 회고전을 앞두고 쿤스의 인터뷰 기사가 패션지 《베니티 페어》에 실렸다. 이름하여, “제프 쿤스가 돌아왔다!(Jeff Koons Is Back!)” 앤디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 매거진》의 편집장이었던 잉그리드 시쉬(Ingrid Sischy)가 글을 썼다. 그는 ‘제프 쿤스의 모든 것’이라 할 만큼 다양한 도판과 정보가 포함된 타셴의 《제프 쿤스》(2009)에 작가의 전기를 작성한 바 있다. 레즈비언 에디터와 <메이드 인 헤븐> 연작으로 여성혐오증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작가와의 오랜 인연도 흥미롭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잡아 끈 것은 첫 페이지를 장식한 쿤스의 나체 사진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가 뉴욕 첼시 스튜디오의 체육관 파워 케이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서 있는 모습. 쿤스의 <뽀빠이> 연작이나, <헐크 엘비스> 연작의 포효하는 헐크와 고릴라가 겹쳐진다. 사진은, 할리우드 배우나 유명 인사를 고전주의 회화 속 귀족처럼 촬영해 그 역시 유명인사가 된 애니 리보비치(Annie Leibovitz)가 담당했다. 리보비치는 1990년 온몸에 황금색 페인트를 칠한 나체의 쿤스와, 2005년 《보그》 12월호에서 여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를 납치하는 날개 달린 원숭이로 등장한 쿤스를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그는 작품 속 원숭이가 자신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곤 했다.)

제프 쿤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엉덩이가 더는 낯설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그의 성기가 발기했을 때 어떤 모양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메이드 인 헤븐> 연작에서 일로나 스톨러의 얼굴과 성기, 엉덩이에 정액을 내뿜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노년에 웃통을 벗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던 파블로 피카소의 이미지처럼, 서구 백인 남성 작가를 재현하는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는 무한한 창조력을 과시하는 남성상이라 할 수 있다. 《베니티 페어》에 나체 사진과 함께 실린 <게이징 볼> 연작을 위해 회반죽으로 제작한 거대한 헤라클레스상을 올려다보는 사진이나, 쿤스의 가족 사진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부인 저스틴 윌러와의 사이에서 낳은 6명의 아이들과 니콜라 푸생의 <실레노스의 승리>가 걸린 침실에 나란히 앉은 ‘아버지’ 쿤스. 그는 대학 시절 부모의 반대로 여자친구와 결혼하지 못하고 입양 보낸 딸 섀넌 로저스(Shannon Rodgers)와 <메이드 인 헤븐>의 결실인 루드비히까지 총 8명의 자식을 두었다. 1979년 팽창형 인형과 거울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한 <팽창형> 연작으로 귀여운 ‘농담’처럼 미술계에 등장, 35년 동안 변신을 거듭하며 미술계의 수퍼 영웅이 된 그가 기어코 옷을 벗으면서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혹시 거대한 회고전 이후 뒷방 늙다리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성대한 대관식의 열기에 쐐기를 박는 황제의 나르시시즘적 제스처일까?


〈바닷가재〉 알루미늄에 채색, 코팅된 스틸체인 246.4×47.9×94cm 2003


살바도르 달리 〈바닷가재 전화기(Lobster Telephone)〉 스틸, 석고, 고무, 레진, 종이 17.8×33×17.8cm 1936 

먼저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의 전후 맥락을 살펴 보자. 그는 2013년 데이비드즈워너(David Zwirner)갤러리에서 최신 연작 <게이징 볼>을 발표했다. <메이드 인 헤븐> 이후 쿤스의 조각품에 처음으로 인체 형상이 등장한 작업으로, <유물> 연작의 회화에서 이어진 고대 조각의 레디메이드 버전이었다. 우체통, 눈사람을 비롯해 비너스, 헤라클레스, 아리아드네, 디오니소스 등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에 미국에서 정원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반짝이는 푸른 유리공을 결합했다. 작품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지난 10년간 발표된 쿤스의 작품 중 가장 강렬하며 초월적인 느낌을 전달한다며 상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푸른 공(Blue Ball)’이 남성이 오르가즘 상태에서 사정하지 못할 때 느끼는 고환 통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쿤스 작품에 충만한 성적 은유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이 연작을 조합한 팝가수 레이디 가가의 앨범 디자인 작업에서는 이 유리공이 거대한 클리토리스처럼 보였다.

쿤스가 신작을 공개하는 장소로 가고시안의 경쟁사인 데이비드즈위너를 택하자, 미술인들은 그가 데미안 허스트와 야오이 쿠사마처럼 가고시안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가고시안은 쿤스가 <셀러브레이션> 연작을 제작하면서 겪은 재정난을 해결해 준 갤러리였다. 결국 쿤스는 가고시안에서도 같은 시기에 <새로운 회화와 조각>이라는 타이틀로 또 다른 개인전을 개최해 <하이브리드>, <유물> 연작을 선보였다. 5월 ‘프리즈 뉴욕’ 시즌에 맞춰 열린 쿤스의 거대 전시는 메이저 갤러리의 ‘배틀로얄(battle royale)’처럼 비춰졌다. 두 전시에 맞춰 기획된 《뉴욕매거진》의 기사에서는 <게이징 볼>의 조각상처럼 온몸에 흰 페인트를 칠한 쿤스가 작업실에서 푸른 공을 자유의 여신상처럼 들고 있는 모습을 양면을 할애해 실었다. 흰 옷을 맞춰 입은 가족 사진도 포함됐다. 올해 회고전을 앞두고 2013년부터 쿤스의 작품을 무책임하게 내다 파는 의리 없는 컬렉터가 골칫거리였지만, 기록상으로는 아트마켓에서 그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3년 11월 열린 크리스티 전후미술 및 컨템포러리 아트 경매에서 유명 컬렉터 피터 브란트(Peter Brant)의 소장품이었던 <풍선 강아지(오렌지)>가 5,840만 달러(한화 약 590억 원)에 거래돼, 쿤스는 살아 있는 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을 제작한 주인공이 됐다. [이하 생략]

[FOCUS] Silence is Movement展

정중동의 미학

/ 김 종 길

Silence is Movement展 5. 23~7. 30 아트클럽1563


천경우 <Seventeen Moments> 2채널 비디오 2012 / 천영미 <Secret Star> 형광등, 쇠프레임 90×90×90cm 2009_한국과 독일의 국제교류전으로 열린 이번 전시는 독일의 볼프 헤으조겐라트(Wulf Herzogenrath)와 한국의 이지윤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했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하찮다. 예술가 사기꾼은 정법의 논리를 벗어나서 혹은 삶의 가장자리나 한복판에서 뒤집고 헤집고 요절복통치는 트릭스터와 다르지 않다. 백남준의 언술은 트릭스터의 언술이다. 그는 이곳과 저곳 사이를 헤집어서 창조의 수를 확보하는 말들과 그 말들의 행동, 말들의 예술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는 그는 말들의 파장을 파고들어서 말이 가진 자력과 말이 가진 에너지로 비디오를 창조했다. 거기, 여기, 저기의 3수 분화 언술은 북방 샤머니즘의 체계다. 0과 1사이, 1과 3사이, 그리고 9와 81. 이때 0은 제로(空)이면서 빛(光)이다. 모든 것을 품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한다. 대초원의 유목은 늘 텅 빈 충만을 향해 열려서 움직일 때마다 제로가 되고, 그 드넓은 제로의 대지에 햇빛이 쏟아진다. 이동하는 모든 삶의 동선과 흔적은 길로 남아서 빛이다. 0과 1은 또한 침묵과 수다의 경계를 여는 미학이다. 음악이 침묵을 강요한 뒤에 듣는 화음일 터인데, 그 질서의 패턴을 제로에 놓고 1을 던지면 음과 화는 깨져서 소음만 난무하게 된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창조의 수 1에서 온 것이다. 1에서 3으로 건너뛰는 엇박, 이종교호의 불확정성과 우연성, 무작위! 백남준의 뒤통수는 존 케이지를 만난 뒤에야 바짝 쪼였다가 깨졌다. 0이 없이 1+2+3+…으로 성장하였으나, 이 열정적인 예술 에너지의 청년이 급기야 임계점에 다다라서 깨달은 것은 그 더하기의 다다익선이 아니라 ‘더하기(+)’를 뺀 수의 혼돈이었다. 더하기(+)를 슬쩍 빼버리자 댐이 터지듯 알파와 오메가만 남고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되는 이변이 창출되었다. 무대를 제로섬으로 만들고 연주자들에게서 ‘더하기(+)’라는 음을 슬쩍 뺀 자리에 파고든 모든 것들의 소음을 생각해 보라! ‘모든 것들의 소음’이라는 <4분 33초>의 사건은 ‘모든 이들의 말’에서 창조된 것이다. 말들의 수다, 말들의 뒤섞임, 말들의 혼돈, 말들의 창조. 존 케이지는 말과 말이 이어져서 말이 제로가 되고 빛이 되는 사유를 전개한 뒤 <‘시민들이 불복종할 수 있는 의무에 대하여’ 에세이 쓰기>를 시도했다.

공간음악, 침묵의 활력


마리케 하인즈-혹 <Musil in Jemgum> 무음 비디오 영상 5분 2006, <Sun in Net> 무음 비디오 영상 분 2007

존 케이지는 3수 분화의 엇박, 창조 수의 사이사이에 빈 제로 수를 발견하듯, 글의 각 행의 글자를 수직 방향으로 조합해서 읽는 메조스틱(mesostic) 원리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시민 불복종》을 해체 조합한 뒤 낭송하는 ‘낭독음악’을 작곡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시청각 문자언어의 ‘들리는 말’의 구조를 비틀어서 단지 들릴 뿐인 소리로 바꾼 이 작업은 청각 상태에 놓인 시민들의 언어를 카오스로 몰아넣는다. 말들의 ‘더하기(+)’로 이어지는 문장이 아니라 말과 말, 말, 말, 말로만 이어지는 말소리의 웅성은 시민 군중 모두가 떠들어 댈 때의 ‘카오스 목청’과 다르지 않다. 존 케이지는 그것을 마치 초원에서 낮게 울려 퍼지는 흐미(Khoomii)처럼 위아래 소리로 연주했다. 그래서 말들은 말들로서만 존재할 뿐 말이 말로써 이어지지 않아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소로의 말들은 존 케이지의 말들로 태어나서 공간을 돌아다닌다. 알 수 없는 말들이 서로 부딪혀서 말로 이어지는 꿈을 꾸지만 깨어서 듣는 사람들의 귀는 그것을 이어주지 못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1987년(6.10항쟁이 있었던 해다), 존 케이지는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를 주장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집어 든다. 《시민 불복종》은 소로가 1848년 투옥된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 강연한 내용이다. 그는 이듬해 1849년 《에스테탁지》에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이 글을 발표했었다. 소로의 삶과 철학은 자연(自然)과 자유(自由)로 함축된다. ‘자(自)’ 돌림의 두 형제 말인 자연과 자유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쪽이 결코 앞서지 않는다. 시작과 끝에서 두 말의 수레바퀴는 함께 가고 함께 선다. 소로에게 있어서 자연이 없는 자유는 허구이며 상상이다.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자연을 우리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둘 중 하나가 앞서거나 뒤로 물러섰다면 그 균형이 깨진 것일 수 있다. 소로의 그런 철학은 그러나 지금 완전히 불균형한 상태로 깨져 있다. 우리 삶은 자연이 없는 자유를 외치고, 자유 없는 자연을 파괴한다. 소로의 철학은 ‘스스로 그러하다, 스스로 존재하다, 스스로 생겨나다(自然)’,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다(自由)’일 것이나, 그가 자연으로 완전히 귀의한 뒤 20세기는 쉼 없이 그것을 부정하는 나날이었다. 그가 숲 속 오두막에서 기록한 《월든》 속의 자연인, 자유인은 어디에 있을까?


호어스트 뮐러 <Lamp, Illuminated by an Illuminated lamp> 혼합재료 50×65×25cm 2001

존 케이지는 36개의 스피커를 준비했다. 24개의 조명과 관객이 앉을 수 있는 의자 6개도 배치했다. 행의 가운데 글자를 아래로 연결해서 낭독한 서로 다른 음높이의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진다. 소리 재생의 순서는 따로 없다. 어느 것을 먼저 하더라도 소리들은 공간을 파고들거나 벽에 부딪히고 위로 솟고 낮게 엎드리면서 흘러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들이 충돌하고 흩어지고 부서지고 사라지는 공간에 대해 깊게 사유한 듯하다. 작품이 영구 설치된 독일의 브레멘 쿤스트할레의 공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소리들의 우물이 될, 소리들의 천장이 될, 소리들의 우주가 될, 소리들의 배꼽이 될 공간을 배려했는지 알게 된다. 그에게 소리들의 공간은 제로(0)여야 했다. 텅 비어서 가득 채우다가도 바람처럼 연기처럼 스며들어 사라질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때 창조 수 1(하나)은 관객이다. 1에서 3으로 9로 81로, 다시 9로 3으로 1로, 그러다가 다시 0에 이르는 무작위, 불확정, 우연의 관계는 존 케이지의 작품을 완성하는 공명수, 공진화를 상징한다.

공간을 배회하듯 걷다가 멈추고 듣고 앉는 관객들의 행위가 활력이다. 소로의 ‘스스로 생겨나다(自然)’, ‘스스로 비롯되다(自由)’의 정신이 최소한의 정부를 주장하는 철학적 뿌리였듯이, 존 케이지의 ‘시민 불복종’ 공간은 무작위의 소리들이 스스로 생겨나고 비롯되어서 떠도는 공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관객들이 또한 스스로 생겨나고 비롯되는 음(音)과 행(行)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존재들인 1(하나)과 1(하나)이 서로 엇박으로 어울리면서 음과 행이 되고 3이 된다. 조명은 그들을 비추지 못한다. 비추지 못하는 조명은 조명이 아니어서 바탕이 되는 대지를 향하지 못한다. 빛은 벽과 동선의 유역들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관객은 그것들의 사이를 배회할 뿐이다. 존 케이지는 트릭스터의 꿈을 관객의 실재로 현실화했다. 이 공간에서 트릭스터는 오롯이 관객이다.

아직 당도하지 못한 존 케이지적 공간


존 케이지 <‘시민들이 불복종할 수 있는 의무에 대하여' 에세이 쓰기> 36개의 CD, 36개의 스피커, 24개의 램프, 6개의 의자 1985/1991_존 케이지의 이 작품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백남준의 사유가 터진 곳에서 미술의 시각언어가 문장력을 상실했듯이, 존 케이지의 공간음악 작업은 미술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는 창조언어를 보여준다. 무엇이 미술이고 무엇이 음악이며 무엇이 연극일까? 무엇이 해프닝이고 퍼포먼스이며, 춤이고 무용일까? 무엇이 시이고 선언이며 문장일까? 보는 것과 듣는 것의 미학은 무엇이며, 침묵과 웅성거림의 미학은 또 무엇일까? 통째로, 통시적으로 시청각의 언어를 분절하고 해체하고 조합하는 새 언어의 말들은 어떻게 들어야 들리는 것일까? 접신해 들어오는 귀신의 음파를 공수의 언어로 터트리는 샤먼들의 말처럼, 말들의 우주에서 접신해 들어오는 음파의 음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오선에 그린 음의 캐논을 연주하는 악기 음과 말들의 비선형적인 덩어리인 ‘떠듦’의 차이는 무엇일까? 법질서의 세계를 구축한 근대국가의 권력이 행사하는 구조적 헤게모니를 삶의 캐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세계는 미학 속에 있는가, 미학 밖에 있는가?

존 케이지의 화두는 브레멘 쿤스트할레에 있다. 의자와 스피커, 조명과 사운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해 놓은 공간 전체에 있다. 그 공간은 잉태의 자궁이며, 하늘과 대지를 연결하는 신목, 우물, 즉 대지의 배꼽이다. 그 구멍을 오가는 미르다. 미리내다. 그런 맥락에서 아트클럽1563의 <Silence is Movement>전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들은 미술의 언어로 존 케이지를 전유하고자 했으나 분절도 해체도 공명도 공진화도, 심지어 최소한의 공간도 창조하지 못했다. 존 케이지를 에디션하고자 했다면, 소리나 의자 따위가 아니라 존 케이지가 창조한 자궁을 사유했어야 한다. 태아가 듣는 모든 분절의 언어가 말이 탄생하는 시원의 언어이듯이, 그 공간에서 관객은 말이 되지 못하는 시대의 세계와 마주해야만 한다. 1987년을 전유하고 싶은 2014년의 한국 사회에서 존 케이지를 호명하는 기획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아트클럽1563의 공간을 오래도록 배회하면서 아직 이곳에 당도하지 못한 존 케이지의 공간을 상상했다. 소리 없이 장면으로만 떠오르는 굿판과 오버랩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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