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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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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컨템포러리 아트의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미술사'를 써 내려 간 정상급 작가 3인의 최근 전시를 주목한다. 세계 미술의 거점 도시 파리와 뉴욕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고 있는 빌 비올라(그랑팔레), 시그마 폴케(MoMA), 윌리엄 켄트리지(메트로폴리탄미술관)가 그 주인공. 이들은 미국,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각기 다른 성장 배경만큼이나 표현매체에서도 비디오, 회화, 설치 등 독자적 형식을 구축하며 'Master'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들의 작품은 저마다 다른 모티프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시간과 공간 등 인간과 예술을 둘러싼 근원적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 Art는 각 작가들의 생애과 작품세계를 압축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이번 전시를 한자리에 모아, 컨템포러리 아트의 횡단면을 파고든다. 필자의 생생한 현지 리뷰를 싣고, 전문가의 객관적인 평가를 곁들였다. 또한 세 작가가 'Master'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곁에서 그들을 밀어 준 숨은 조력자들도 소개한다.

Contents

COVER
         빌 비올라(Bill Viola) <The Dreamers> 7채널 HD 컬러 비디오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각155.5×92.5×12.7cm(부분) 2013 ⓒBill Viola Studio


SPECIAL FEATURE
         우리 시대의 거장

         ❶ LEE UFAN VERSAILLES
070     이우환, 무한으로의 초대 / 김복기
         ❷ 3 MASTERS
086     빌 비올라(Bill Viola): ‘사이’의 존재론 / 김홍기
096    시그마 폴케(Sigmar Polke)
         : 알리바이 여정(Remembering and Working through the Past)
         / 프랑크 고트로(Franck Gautherot)
106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시간의 블랙홀 / 이정연


PRISM

046    외국 작가 레지던스의 명암 / 김희영
047    찰나를 붙잡는 모든 행위를 찬양하라! / 조동섭


CAST

139    괴력난신 怪力亂神
         ❶ 귀신이 난무하는 세상 / 황루시
         ❷ 애도의 차원들 / 문강형준
         ❸ 부적, 천계의 비밀코드 / 오현리


FOCUS

048    티엔리밍(Tian Liming)展, 정재호展: ‘격세지감’의 풍경 / 이선영
052    트로이카展: 전략적 테크놀로지 / 홍지석
056    데이비드 오케인(David O’Kane)展: 반복과 차이의 판타지 / 박경린
058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공공예술 다시 읽기 / 박재용
062    아랍현대미술展: 너와 나, 정체성 게임 / 조선령
066    소음인가요展: ‘소음-예술’의 이중주 / 양지윤


CRITIC

118    고갱, 원시의 심연 / 이용우


ART MARKET

126    아트바젤(Art Basel)
         : 아트바젤, 글로벌 마켓의 ‘바로미터’ / 전민경


ART ON PAGE
116    U: 금강산도 식후경, U: 이왕이면 다홍치마 / 이슬기


ETC.
045    EDITORIAL / 김복기
161    ART FIELD
176    P.S
177    SUBSCRIPTION
178    CREDIT

Articles

[ART MARKET] 아트바젤(Art Basel)

아트바젤(6. 19~22)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34개 국가에서 285개의 갤러리가 참여하고  9만2천여 명이 관람했다. 참여 작가 수는 4천여 명에 이르며, 전 세계 수퍼 컬렉터 및 주요 미술관 관계자가 스위스의 작은 도시 바젤에 모였다. 세계 최고의 ‘블록버스터’ 마켓플레이스인 동시에, 세부 프로그램에서는 비엔날레형 대작, 근교 도시와 조응하는 설치 특별전, 전문가 대담 및 영화 상영까지 영리와 비영리를 넘나들며 아트페어의 범위를 무섭게 확장 중이다. 아트바젤을 통해 아트페어 구조적 ‘진화’의 현 주소를 알아 보자.

아트바젤, 글로벌 마켓의 ‘바로미터’

/ 전 민 경

아트페어에서 퍼포먼스 작품을 판다?


뉴욕 개빈브라운스엔터프라이즈(Gavin Brown’s Enterprise) 갤러리 부스 전경

바젤에 가면 한 해 아트 비즈니스의 추세가 한눈에 보인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거짓이 아니다. 몇몇 자극적인 기사들을 보면 대부분 마켓의 수치에만 연연한다. 그러나 작품의 판매 가격 혹은 한해의 수입 현황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아트바젤과 같은 대규모의 국제적인 아트페어가 지니고 있는 구조와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곧 소프트웨어의 구성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아트바젤의 특징을 살펴본다면 세계 미술시장을 대표하는 아트페어가 지니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

아트바젤은 페어 전반에 걸쳐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생산, 진화시키며 고유한 방향으로 특성화하고 있다. 올해는 <14개의 방들>이라는 퍼포먼스 위주의 전시 섹션을 처음 도입했다. 이 섹션은 바이엘러(Beyeler)재단 및 시어터바젤(Theater Basel)이 주최하고, MoMA의 퍼포먼스 총괄 큐레이터이자 P.S.1의 관장인 클라우스 비젠바흐(Klaus Biesenbach)와 런던 서펀타인갤러리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공동 기획했으며, 올해 <언리미티드> 섹션 재개관 장소인 메세 바젤(Messe Basel)을 리모델링한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14개의 방들>의 건축 디자인을 맡았다. 게다가 존 발데사리가 ‘아카이브’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전시 서문 역할을 하는 텍스트와 개념 정리 아카이브를 전시장 초입에 설치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짧은 글을 카탈로그에 싣기도 했다.

총 14개로 구성된 방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때론 놀랍기도 하고 때론 싱겁기도 하고 혹은 당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난감하기도 한 라이브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티노 세갈은 본인이 소속된 마리안굿맨(Marian Goodman)갤러리의 공동 디렉터 두 명을 등장시켜 서로 한 단어씩 내뱉어 대화의 문장을 이어나가며 그 문장이 끝날 때 지시하는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산티아고 시에라는 벽면 구석에 뒷짐 지고 있는 한 사람을 관객과 호흡하게 했으며, 오노 요코의 경우 ‘touch’라는 텍스트로 시작되는 어두운 검은 방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사지를 벌린 전라의 여성이 한가득 빛을 받으며 벽면에 매달려 있는 <Luminosity>를, 조안 조나스도 나체 여성의 정적인 거울 퍼포먼스를 소개했다. 젊은 작가 중에는 에드 앳킨스(Ed Atkins)의 3D 영상과 ‘spoken word’, 즉 일종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대화라기보다 랩에 가까운 시적인 후렴을 동반한 언어 퍼포먼스가 흥미로웠다. 그는 1982년생으로 약관의 나이에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고, 파리 팔레드도쿄와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개인전(예정)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언리미티드〉 섹션의 뉴욕 볼토라미(Bortolami)갤러리 부스

이 섹션은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커리어의 작가군을 선정하고, 눈길을 사로잡는 전시 기획자 명단을 앞세운다. 또한 라이브 퍼포먼스라는 예측불허의 요소를 도입해 단발성 프로젝트와 전시의 경계에 있는 작업들의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압축하여 효과적으로 보여 줬다. 이 섹션의 전신은 2012년 맨체스터국제페스티벌에서 선보인 <11개의 방>이다. 아트페어에 퍼포먼스가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티노 세갈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테이트모던 탱크가 퍼포먼스 전용관을 개관하는 등 퍼포먼스가 시각예술의 어엿한 공식 주체로 자리 잡은 가운데, 시어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 같은 ‘무형’의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이는 실험적 팀이 화이트큐브의 전속작가가 되고, 심지어 페어 개막일에 그의 두폭 페인팅이 미화 30만 달러에 팔려 나간 사례는 매우 시사적이다.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 아트바젤홍콩 디렉터의 말에 따르면, <14개의 방>을 선보인 것이 당장 내년에 퍼포먼스를 잠재적인 마켓 상품으로 간주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같은 형식의 전시가 지속적으로 페어에 고무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트페어가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고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잘 팔리는’ 상업성에만 집중하는 것으로는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기대하는 미술애호가들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CRITIC] 고갱, 원시의 심연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고갱: 변신들>(3. 8~6. 8)은 폴 고갱의 작품을 해석하는 또 다른 지평을 마련한 전시다. 우리에게 친숙한 그의 회화와 조각 작품의 원형을 찾기 위해, 좀처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없던 목판화, 석판화, 세라믹,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로 제작한 작품 150여 점을 대거 선보였다.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칭하며 타히티 섬에서 짐승처럼 예술 창작에 매진했던 고갱. 그가 작품 속에 꽁꽁 숨겨 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필자는 현대철학과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미술사 등 각종 담론을 종횡으로 오가며 깊은 우물 속 같은 고갱의 심연을 추적한다. 열락을 꿈꾸며 뿔 달린 괴물들이 서로 사랑하고 춤을 추는 고갱의 유토피아로….

고갱, 원시의 심연

/ 이 용 우


<우파 우파(Upa Upa, The Fire Dance)> 캔버스에 유채 72.6×92.3cm 1891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중

코발트블루의 바다, 밀림의 심연, 그리고 형언하지 못할 만큼 애처로운 표정을 한 광대 굵은 구릿빛 여성의 나신 열상들…. 현실에서 탈주해 폴리네시아 낙원으로 도피한 백인 식민지자의 비틀어진 환상이 직조한 빽빽한 열대 밀림의 세계는 과장과 원색으로 도상된 포르노그래피의 정글이었다.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그림들이 표현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다소 과장되고 허풍으로 점철된 부르주아의 도화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과 괴리된, 작가가 의도하고 싶었던 환상의 세계로의 초대장은 늘 불편하고 진정성 결여된 판타지의 유토피아로 해석됐다.

고갱은 프랑스의 대표적 후기인상주의 화가로 상징주의와 원시주의(primitivism) 등 탈인상적 화풍을 통해 근대적 회화 작법의 포문을 연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보여 주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오후의 씨에스타처럼 나른한 부르주아 식민지자의 시선은 내게 게으른 잔재주의의 사치스러운 만찬쯤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명화를 전시하는 대규모 미술관 안에 꼭 한 점씩 걸려 있는 고갱의 그림이 담고 있는 과장스러운 관상으로 표상화된 동양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시선 때문에 그림 앞을 몇 번이고 서성이게 하거나 호기심을 자아내진 못했다.

고갱의 그림은 종종 드라마틱한 삶만큼이나 불운한 생애를 살았던 고흐의 작품과 비교되었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에 내재한 가난과 비굴함의 서사, 히스테리아와 욕망의 스펙트럼 속에 감춰진 멜랑콜리아, 애틋한 메타내러티브의 드라마를 고갱은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한 점의 그림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림 스스로의 아우라뿐만 아니라 작품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고갱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타히티에서 제작한 작품들은 그가 의도했던 딱 그만큼의 방식, 즉 강렬하고 원시적이며 남근중심적 가부장제의 시선이 덧칠된 이상향의 직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롤리타 콤플렉스와 현실도피주의자라는 스캔들을 자랑스러운 휘장처럼 아우른 고갱의 문란한 사생활과 중첩된다. 그림 속에 수밀도의 유방을 드러내고 소처럼 둥그런 눈망울을 한 원주민 여인이 던지는 부끄러움과 불편한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남았다.

고갱의 무의식 속 원형들


<Portrait of the Artist with the Idol> 캔버스에 유채 43.8×32.7cm 1893년경

뉴욕현대미술관(이하 MoMA)에서 열렸던 <고갱: 변신들(Metamorphoses)>전은 우리에게 관성적으로 투영된 고갱에 관한 선입관에서 벗어나 있다. 이를테면 <마나오 투파파우>, <두 명의 타히티 여성> 등 프랑스 식민지자가 원주민에게 보내는 불편한 인류학적 성적 호기심이 덧입혀진 오리엔탈리즘의 원시성 탐구라는 모티프나, 소위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클리셰의 반복을 영리하게 피한다. 그 대신 드로잉과 회화부터 우리에겐 다소 낯선 그의 판화, 조각, 목각과 세라믹 작품까지 세심하게 선별된 150여 점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이를 통해 의식의 심연 깊숙이 파고들어 고갱이 그의 고향인 브르타뉴(Bretagne)와 폴리네시아, 타히티와 마르케즈의 히바오아(Hiva Oa)의 수많은 열대섬에 정착해 제작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의 원형이 된 이미지들의 뒷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원주민과의 삶 속에서 은밀하게 진행했던 의식의 교접들, 우리가 그의 유명 작품을 통해서는 결코 인지하지 못할 식민지자 둔갑술의 근원과 속내가 그의 사후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MoMA의 수석 큐레이터 스타 피규라(Starr Figura)는 고갱 대표작들의 원형으로 알려진 희귀 작품을 중심으로 주로 그 지역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와 목재로 제작한 드로잉, 판화와 각종 인쇄물, 목각 조각상을 전시의 주요 테마로 부각시킨다. 관객은 마치 성급히 써내려 간 뒤늦은 연애편지 같은 고갱 무의식의 파편들, 원시 토템 신앙에 접신한 고갱의 섬뜩한 ‘사이코 오리엔탈리즘’의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수공예품을 한 줄 한 줄 짜듯 꼼꼼하게 수행된 듯 보이는 고갱의 중후기 화풍 작법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과 영상물, 폴리네시아 거주시 고갱의 작품에 일관되게 드러난 원시 토템 신앙 속 악마 이미지의 원형들, 고갱의 그림 속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수줍은 나신의 여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판 듯한 원주민 여인의 대담한 포즈와 접신 들린 눈동자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부끄러움 없이 가랑이를 벌린 원시성의 고요한 심연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하 생략]

[SPECIAL FEATURE] 우리 시대의 거장

SPECIAL FEATURE ❶무한으로의 초대

/ 김 복 기


〈관계항 - 베르사유의 아치〉 스틸 아치 1,113×1,500×3cm, 돌, 스틸 판 3,300×300×3cm 2014

화가이자 조각가인 이우환(77)이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매머드급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6. 17~11. 20). 그는 궁전 내 박물관과 17세기의 천재 조경사 르노트르(Andre Le Notre)가 설계한 바로크식 정원에 신작 조각작품 ‘관계항’ 10점을 선보였다.

베르사유 궁은 매년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를 초대해 궁전과 정원의 역사적 공간을 현재진행형의 조형 공간으로 되살리는 초대형 전시 프로젝트를 열고 있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한자리에 만나는 이 창조적 대화의 장에는 2008년 미국의 제프 쿤스(Jeff Koons)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7명의 거장들이 초대를 받았다. 그동안 베르사유를 장식한 작가로는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 프랑스의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과 베르나르 브네, 포르투갈의 조안나 바스콘셀로스(Joana Vasconcelos), 이탈리아의 주세페 페노네(Giuseppe Penone) 등 컨템포러리 아트의 유명 작가들이 망라되었다.

베르사유 프로젝트는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리는 〈모뉴멘타(MONUMENTA)〉와 함께 프랑스 미술의 문화적 자존심과 역량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전시 중의 전시’라 할 수 있다. 두 전시 모두 살아 있는 현대미술 거장을 초대해서 신작전을 개최하는 프로젝트다. 워낙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프로젝트이니만큼, 전시 작가로 선정되는 일 자체가 현대미술가로서 세계적 입지를 다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미 대가 반열에 오른 작가들도 누구나 선망하는 ‘꿈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무대에 한국의 이우환이 성큼 올랐다. 그에게 베르사유 입성은 파리 주드폼과 뉴욕 솔로몬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 같은 굴지의 행사와 함께 자신의 예술 생애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전과 영광의 자리이다. 또 다시 이우환이 컨템포러리 아트씬의 중심에서 하이라이트를 받고 있다.

베르사유 정원, 대가들의 경연장


〈관계항 - 대화 Z〉 스틸 판 각 300×400×4cm, 돌 2014

컨켐포러리 아트에서 ‘전시=작품’이라는 등식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베르사유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르사유라는 사이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바로크 시대의 역사적 유물이다. 이 궁전에 베르사유 정원이 조성되었다. 조경사 앙드레 르노트르(1613~1700)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의뢰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설계에 착수한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며 유명한 정원 설계를 도맡았던 르노트르의 조경 양식은 ‘프랑스 정원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베르사유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의 최고봉이다. 그것은 4세기를 거친 지금도 변함이 없다. 프랑스식 정원 양식은 먼저 성관(城館)을 중심으로 하나의 축을 설정하고, 대칭으로 화단과 잔디밭을 배치한다. 방사선 형태의 좁은 길로 높낮이 차이를 두고, 구나 원뿔 등의 형태로 가지런히 자른 나무를 심고, 대리석 동상을 배치한다. 기하학적 형태로 정돈된 화단에는 각양각색의 식물을 심을 수 있다. 또한 인공 운하를 만들고, 장식적인 형태의 연못과 그리스 로마 양식의 조각으로 치장한 화려한 분수 등이 곳곳에 배치된다. 나뭇가지 끝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장려한 디자인은 보는 사람을 감탄케 한다. 이 조경에는 자연마저도 지배하는 위정자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는 위엄이 깔려 있다. 그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조예와 관리 기술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바로 이 베르사유 공간이 이우환의 개인전이 열리는 사이트다. 베르사유 정원은 대지미술을 펼쳐 놓아야 할 정도로 광활하다. 전시를 위한 공간 앞에 서면 입이 떡 벌어진다. 무엇보다 신작을 선보여야 한다. 그러니 이우환의 베르사유 프로젝트가 예고되었을 때 이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우환은 과연 베르사유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아시아 출신 작가가 베르사유의 역사성을 제대로 알겠는가? 어떻게 르노트르의 위대한 천재성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이런 우려와 비아냥거림이 가능했을 것이다.) 마침내 베르사유 프로젝트의 뚜껑이 열렸다. 이우환은 조각 작품으로 그 독자의 대화법을 내놓았다.


〈관계항 - 4인의 사자〉 스틸 판 각 400×250×2cm, 돌 2014

“나는 원래부터 장소와 대화하며 작품의 발상을 얻는다. 공간의 장소성을 훼손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베르사유 정원은 대단히 완벽한 공간이다. 단순히 식물이 놓여 있는 정원이라기보다는 건축 공간 개념에 더 가깝다. 이 완벽한 공간에 내 작품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이 완벽한 정원의 조형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무한 개념의 도입에 있다. 인간의 콘셉트인 완벽, 그 완벽 너머 장소와의 대화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무한, 그것이 내 작품의 개념이다.”

이우환은 앙드레 르노트르가 구현해 놓은 정원 개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베르사유 정원의 미학적 개념에는 이미 미니멀리즘과 여백이 들어 있다. 르노트르의 천재성은 거대한 자연을 완벽한 하나의 화이트 큐브로 환원시킨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우환의 작품만큼 베르사유 정원에 잘 어울리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까 이우환은 르노트르의 완벽을 십분 활용하여, 그 풍경을 바꾸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작품으로 그 공간 안에 또 하나의 공간을 연다. 이우환의 열린 공간을 발견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관람객은 이 거대한 공원을 거닐어야 한다. 넉넉잡아 두어 시간은 발품을 팔아야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이우환은 정원 중심축을 따라 초록 풀밭과 플라타너스로 조성된 미로에 군데군데 작품을 배치해, 베르사유를 찾는 관람객에게 ‘숨은 보물 찾기’ 같은 게임을 제안한다. 그 게임의 이면에는 이 대정원을 또 하나의 거대한 화이트 큐브로 설정하고, 그 완벽을 넘어서려는 이우환의 더 높은 ‘장소의 조형론’이 도사리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관계항 - 바람의 날개〉 20개의 수평 스테인리스 판 각 150×500×1.5cm, 20개의 수직 스테인리스 판 각 150×500×1.5cm 2014

이우환은 〈관계항〉 9점을 야외 정원에 전시했다. 자연을 상징하는 돌과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철판의 만남, 그 ‘관계항’을 작품으로 드러냈다. 한마디로 돌과 철판, 이 두 사물로 인간의 역사를 들려주려고 한 것이다.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만든 것과 만들지 않은 것, 자연과 문명, 사상의 안과 밖 등의 양면성을 끌어안는 작업이다.

“돌은 시간의 덩어리다. 지구보다 오래된 것이다. 돌에서 추출된 것이 철판이다. 그러니까 돌과 철판은 서로 형제 관계인 것이다. 돌과 철판의 만남, 문명과 자연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내 작품의 발상이다.”

이우환의 작품에서 자연석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그 돌은 모두가 제멋대로 두리뭉실하게 생긴 것이다. 그는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는 중성적인 성격의 돌, 추상성이 높은 돌, 그야말로 그냥 돌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그런 돌을 찾는 일이 그에겐 대단히 중요하다. 이우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 전시를 위해 자연석을 찾아 나섰다. 전시에 선보인 돌은 22개다. 10개의 돌은 독일 쾰른 근교의 돌집에서 구했다. 스칸디나비아와 폴란드 태생의 돌인데, 대단히 단단하다. 쾰른 근처에 일본식 또는 중국식 정원을 꾸미는 부자들이 많아서 그런 돌을 구할 수 있었다. 또 12개의 돌은 이탈리아의 알프스 몬테로자 산 밑에서 가져왔다. [이하 생략]


SPECIAL FEATURE 3 Masters

빌 비올라(Bill Viola)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빌 비올라의 대규모 회고전이 3월 5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로써 비올라는 그랑팔레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비디오아티스트가 되었다. “나는 비디오와 동시에 태어났다”고 힘주어 말하는 빌 비올라, 그가 작가로서 보낸 40여 년의 세월은 오로지 비디오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바쳐진 시간이었다. 그는 백남준의 어시스턴트로 일했으며, 영상작업과 설치작업을 꾸준히 병행해 왔고, 아날로그 비디오부터 가장 첨단적인 디지털 비디오까지 모든 비디오 테크놀로지를 작업에 적용해 왔다. 따라서 비올라의 작품 세계를 조망해 보는 시도는 그 자체로 비디오아트 역사의 한 중요한 횡단면을 일별해 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가 새로운 예술적 표현 매체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날로그 매체에서 디지털 매체로 진화해 온 비디오가 오늘날 변함없이 던지는 미학적 화두는 무엇인가? 필자는 비올라가 빈번히 사용하는 슬로모션 기법에 주목해 볼 것을 제안한다. 슬로모션은 운동과 정지 사이의 모호한 상태를 형상화해 새로운 지각의 대상으로 만든다. 비올라는 슬로모션 기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삶과 죽음, 실재와 가상, 의식의 무의식 등 여러 대립쌍들이 긴장감 있게 공존하는 모호한 공간을 시각화해 낸다. 이 ‘사이 공간’이 강렬한 파토스와 함께 등장할 때, 관객은 세계의 진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

‘사이’의 존재론

/ 김 홍 기


〈Tristan’s Ascension〉 4채널 비디오 10분 16초 2005

프랑스 파리의 유서 깊은 전시장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빌 비올라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비올라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20점의 대표작이 50개의 스크린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개별 작품을 관람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7분부터 35분까지 다양하다. 관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올라가 비디오를 통해 구현해 낸 도저한 형이상학적 여정에 동참할 기회를 얻는다. 이 전시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것이 그랑팔레에서 열린 최초의 비디오아티스트 개인전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예술가로서 비올라는 의심의 여지없이 ‘현대미술의 대가’로 공인된 동시에, 한 예술 매체로서 비디오는 진지한 미학적,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비올라는 1972년 처음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40여 년간 줄곧 비디오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두고 작업해 온 외골수의 예술가이다. 사실 이건 무척이나 드문 경우다. 물론 오늘날 세계 곳곳의 현대미술 전시공간에서 비디오 작업을 발견하기는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비디오란 단지 그들이 확보할 수 있는 여러 매체 중 하나일 뿐이지 비올라처럼 오랫동안 비디오만 고집하며 파고드는 작가는 흔치 않다. 더욱이 비올라는 작업을 구상하면서 최소치의 서사성만을 이용함으로써 작업의 내용적 측면보다는 그것을 독특한 지각과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어 내는 비디오의 매체적 가능성에 더욱 주목한다. 스티브 맥퀸이나 쉬린 네샤트처럼 비디오 작업을 하던 여러 작가들이 서사성을 중시하는 극영화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긴 세월 동안 묵묵히 비디오의 예술적 형식 언어를 조탁하는 데 바친 비올라의 뚝심은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하다. 그랑팔레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마련해 준 최초의 비디오아티스트가 빌 비올라인 것도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비디오에 대한 무한한 예술적 탐구의 열정과 그 성과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시간을 조각하는 비디오아티스트


〈Chott el Djerid〉 컬러 비디오 테이프 28분 1979

1965년 뉴욕에서 백남준이 소니에서 출시한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포터팩(portapak)으로 교황 행렬을 촬영해 한 카페에서 동료 예술가들에게 선보인 이후, 비디오를 다룬 초창기 예술가들이 이 새로운 매체에 열광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영화카메라에 비해 월등히 저렴한 가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간편한 조작과 가벼운 무게로 인한 휴대성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필름을 인화할 필요 없이 촬영과 동시에 실현되는 리얼타임 이미지의 가능성이었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비디오는 순식간에 예술가들의 새로운 필수 아이템이 되었고, 간편한 휴대성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작가 개인의 내밀한 이미지까지 담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으며, 촬영하는 즉시 시간의 지체 없이 모니터에 피사체의 이미지를 구현해 내는 비디오카메라의 능력 덕분에 작가들은 비디오를 이용해 일종의 거울 이미지의 상황, 즉 피사체와 피사체의 이미지가 동시간적으로 마주보게 되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사적인 공간인 작업실 안에서 스스로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어 즉각적인 비디오 피드백을 통해 모니터에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예컨대 1970년대 초 비토 아콘치의 여러 비디오 작업들이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상황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다. 초창기 비디오아트의 나르시시즘적인 경향을 목도한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1976년 <비디오: 나르시시즘의 미학>이라는 글에서 “비디오의 매체는 나르시시즘이다”라고 주장하며 나르시시즘적인 비디오 작업들에 대한 이론적 준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크라우스의 주장과 달리, 비디오라는 ‘거울’은 피사체의 현재를 왜곡 없이 즉각적으로 재현하는 충실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오히려 비디오는 피사체의 시간적 리듬을 교란시키며 왜곡된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불량한 ‘거울’이다. 크라우스는 비디오의 즉각적 피드백에 기반을 둔 ‘리얼타임’ 이미지에 주목했던 탓에 비디오의 나르시시즘적인 특성을 강조했지만, 사실 예술가들이 비디오에서 발견한 진정한 예술적 가능성은 거울과 같은 상황을 연출할 때조차 피사체와 그것의 이미지 사이의 동일시를 좌절시키는 비디오의 남다른 능력이었다. 이런 탈동일시가 가능한 이유는 비디오가 시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올라는 1989년에 쓴 한 작업노트에서 자신의 예술을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이 ‘조각가’는 비디오라는 도구를 이용해 시간을 마치 찰흙처럼 늘리고 이어 붙여서 복합적인 시간성을 지닌 작품을 빚어낸다.


〈Ancient of Days〉 싱글채널 컬러 비디오 12분 21초 1979~1981

비올라의 초기작 <The Reflecting Pool>(1977~79)은 크라우스의 나르시시즘 테제에 대한 정면의 반박으로 보인다. 한 남자(빌 비올라)가 숲에서 나와 물이 가득한 연못 앞에 선다. 그가 연못을 향해 도약하자 갑자기 시간은 멎는다. 거의 움직임이 없는 이 장면 속에서 다만 수면에 형성된 그림자와 파동만이 움직이고 변한다. 이렇게 늘여진 시간 속에서 단지 물에 비친 그림자로만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펼쳐진다. 이 작업에서 연못의 수면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한다. 연못 앞에 선 남자와 수면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정확히 대칭적인 거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남자의 도약 이후 멈춰진 시간 속에서 거울 관계는 색다른 형태로 펼쳐진다. 남자는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일렁거리는 수면 위에는 그 남자의 그림자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여러 이미지들이 비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이때 연못의 표면은 남자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 짧은 시간을 길게 늘여 확보한 이미지의 공간이다. 비올라가 찰나의 시간을 길게 늘이고 다양한 이미지들을 이어 붙인 건 비디오 장치 덕분이므로, 이 ‘거울 연못(reflecting pool)’의 변화무쌍한 표면은 비디오라는 영상 매체에 대한 시각적 은유라고 할 만하다. 비올라가 들여다본 이 ‘비디오-거울’의 표면에 비친 것은 그 자신의 동일한 모습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자아, 또 다른 세계의 잠재적인 이미지이다. 이렇게 그는 ‘비디오-연못’에 뛰어들어 상징적인 세례를 받아 새롭게 거듭난다. 이것이 그가 비디오와 동시에 태어난 사건의 전말이다. [이하 생략]

[FOCUS] 소음인가요展

‘소음-예술’의 이중주

/ 양 지 윤

소음인가요展 5. 13~6. 22 서울시립미술관


<소음인가요> 전경_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인 뮤지션 19팀을 통해 한국 사운드아트의 현재를 진단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 제목은 참여작가 홍철기가 2007년 ‘릴레이(Relay)’의 웹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글의 제목에서 착안했다. 관객이 ‘노이즈의 정원’처럼 꾸며진 전시장에서 각 뮤지션의 공연 영상이나 음원을 헤드폰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참여 뮤지션의 영상, 음원, 텍스트 자료를 스스로 취합하여 DIY리플릿을 제작할 수 있도록 했다.

노이즈, 즉흥음악, 전자음악 등 다양한 실험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3층의 프로젝트 갤러리에 등장했다. 19명의 뮤지션이 참여한 <소음인가요>전은 화이트큐브 갤러리 공간을 ‘보는 공간’에서 ‘듣는 공간’으로 바꿔 낸다. 권병준 류한길 진상태 최준용 트렌지스터헤드 홍철기 등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화음이나 화성이 아닌 특정한 기계나 매체가 만들어 내는 소음을 소재로 즉흥적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세대부터, 그레이, 다미라트, 루마한, 모임 별, 미묘, 민, 스클라벤탄츠, 시마킴, 오대리, 정세현, 최태현, 하임, 히치하이커 등 전자음악을 토대로 유연한 협업 체제와 실험적인 활동을 하는 새로운 세대까지 망라한다.

이탈리아 미래파 아티스트인 루이지 루솔로는 1913년 <소음예술선언>에서 “고대에서 삶이란 고요함뿐이었다. 소음이 실제로 나타난 것은 기계가 발명된 19세기 와서의 일이다. 오늘날 소음은 인간의 감수성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기계가 다양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순수한 소리로는 지루함을 줄 뿐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미래파의 음악가들은 음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노이즈를 음악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솔로가 1914년 처음으로 런던에서 ‘거대한 도시의 깨어남’과 ‘자동차와 비행기의 만남’을 공연했을 때에 관심을 기울인 이들은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몇몇 작곡가뿐이었다. 기관차의 커다란 소음은 당시 관객에게는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들을 가치가 없는 소리’로 치부되었다.

20세기 초는 혁명의 시대였다. 기성의 문화 예술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새로운 정신과 형식을 찾는 활동의 시대로, 소음예술 역시 지배적이고 대중적 문화에 대립하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에서 출발한 것이다. 존 케이지는 1952년 <4분 33초>에서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침묵의 존재를 뒤집으며, 음악의 개념을 극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케이지에게 음악은 노이즈와 침묵이 벌어지는 사건을 수용하는 하얀 캔버스였다. 4분 33초 동안 들린 청중들의 소곤거림, 기침 소리, 호흡 소리가 음악이 된다. 케이지는 작품 제목이 보여 주는 시간, 즉 작품 자체는 어디까지나 예술의 프레임 안에서 작동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방가르드한 형태로 기능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지배적인 듣기 문화란 감각적인 오락성과 상업성을 전면에 내세운 대중음악이다. 대중음악은 시장가치의 재생산 시스템과 자본의 구조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 소음예술은 그 내용과 태도에서 지배적 문화에 비판적이다. 소음예술은 자본주의적, 상품적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소음을 작품의 주제로 택한다. 소음예술은 산업사회가 가져온 실수나 불완전함, 오류 등을 강조함으로써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기술 사회를 비웃는다.

어디까지가 사운드아트인가?


전시에 참여한 <모임 별>의 공연 장면. 사운드 아카이브 형식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음원이나 공연 영상 이외에도 각 뮤지션이 그동안 발표했던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이번 전시를 위해 오대리와 popexpope의 깜짝 협업 앨범이 발매됐으며, 공연 실황과 함께 전시장에서 선보였다. 또한 전시기간 중 네 차례에 걸친 작가와의 대화 및 워크숍도 진행됐다.

<소음인가요> 전시는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한 노이즈 뮤지션들을 한국 사운드아트의 출발로 삼는다. 이 전시는 음악이 아닌 소리들이 어떻게 시각예술 분야에 침투되었는지 그 경위를 들려 준다. 재즈 연주자나 현대 음악가와 같은 화성적 체계나 리듬의 규칙을 구축하는 숙련된 연주자는 전시에 포함되지 않는다. 전시기획자는 이번 전시가 노이즈 뮤지션은 물론 DJ나 전자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을 매체기술과 서브컬처의 맥락에서 되짚어 본다고 밝힌다. 전시 제목 <소음인가요>는 참여작가 홍철기가 2007년 Relay 웹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다소 자조적이고 회의적인 내용의 게시물 제목에서 착안했다. 이 제목은 <소음 in 가요>로도 읽힌다. 즉, 소음예술을 대중음악 담론 안에서 평가하며 그 비상업성과 비합리성을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류한길은 2000년대 중반부터 홍대 지역을 중심으로 전자즉흥연주회를 기획하며 연주해 왔다. 그의 노이즈는 시계태엽, 타자기, 전화기와 같은 버려진 사물들의 내부 진동음을 사용하여 연주한다. 즉흥성에 기반을 둔 그의 연주는 일상의 사물들 속 비워진 기표들을 소리로 전환하는 독자적 연주법을 구축한다. 또한 2006년 독립 출판 레이블인 매뉴얼(Manual)을 통해 디지털 실험음악의 창작, 제작과 배급을 진행 중이다. 홍철기는 전기-전자장치들을 악기로 사용하여 다양한 노이즈 연주를 소개하고 있다. 1997년 최준용과 한국 최초의 노이즈 음악 그룹인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를 결성했으며, 2000년부터는 실험음악 전문 레이블인 벌룬 앤 니들(Balloon and Needle)을 공동으로 운영 중이다. 2003년부터 CD플레이어나 MD녹음기, 턴테이블과 같은 일상의 녹음/재생장치를 악기로 활용하여 전기-전자적 소음을 산출하는 대상들을 이용한 집단적인 비-관습적 자유즉흥음악을 탐구하고 있다.

권병준은 1990년대 초반 펑크밴드 삐삐롱스타킹의 싱어로 음악을 시작하여 얼터너티브 록에서부터 미니멀 하우스를 포괄하는 6개의 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이다. 영화 사운드트랙, 패션쇼, 현대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만의 음악적 장치들과 퍼포먼스 툴을 이용한 공연들을 선보여 왔다. 이후 네덜란드 헤이그의 왕립음악원에서 전자음악과 미디어아트를 전공하며 대중음악에서 벗어난 실험음악으로 작가적 관심을 돌렸다. 최근에는 실험 악기를 직접 제작하는 음악 관련 하드웨어 개발자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1970년대 생들이 노이즈 뮤직씬의 주를 이루었다면, 1991년에 출생한 그레이(Graye)는 비트 뮤직 프로듀싱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군산에서 쌀 대신 비트 농사를 짓는다고 말하는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행해진 실험 음악계와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이다. 10여 장의 힙합 앨범 작업에 참여한 그의 음악은 힙합, 펑크, 재즈, 부기에 영향을 받은 비트와 칩튠, 펑키 등 다양한 장르를 변용한 신디사이저 사운드로 눈앞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전한다.

사운드아트는 사운드 웨이브를 예술의 전달 매체로 삼은 미디어아트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소리를 들을 때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듣는다. 가청권을 벗어난 초음파나 저주파 또한 사운드 웨이브의 떨림을 통해 느끼고 있다. 시각예술을 전시하는 방식은 예술작품과 관객의 위치를 분명히 구별한다면, 청각예술을 전시하는 방식은 사운드 웨이브가 관객의 몸을 3차원으로 감싸며 작품과 관객의 명확한 시각적 분리는 어렵다. 여기에 사운드아트 전시의 곤혹이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시 공간은 시각예술을 전시를 위해 이상적인 형태인 화이트 큐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사운드와 청취의 특성을 간과하여 방음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각각의 작품 사운드는 무질서하게 뒤섞여 버린다.

화이트 큐브에서 만난 사운드 아카이브

<소음인가요>전은 개별 모니터와 개별 헤드폰이라는 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한다. 각각의 모니터는 작가 마다 사운드 퍼포먼스를 나열하여 소개하며, 이는 사운드 웨이브를 3차원 공간에서 느끼는 대신 사운드 아카이브 전시로 기능한다. 사운드라는 재생과 복제가 용이한 예술 형태를 전시하면서 기획자는 종종 사운드 자체의 질에 대한 긴장을 놓친다. 어떤 스피커를 사용하는지, 어떤 헤드폰을 사용하는지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기 일쑤다. 소리가 뒤섞이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의도가 아닌 한에서 그림을 겹쳐 걸지는 않지만, 사운드 전시에는 각자의 소리들이 곧잘 뒤섞여 버린다. 그리고 사운드아티스트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 뒤섞임에 익숙한 듯 여겨진다.

<소음인가요>전은 전통적 의미의 음악에서 확장되어 청각성과 청각적인 경험에 대해 실험해 온 작가들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있는 실험적인 청각 문화를 아카이브하여 현대 예술의 문맥으로 가져왔다. 한국은 대중음악씬의 확대와 산업적 발전과 함께 듣는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는 오히려 빈곤해지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은 사운드를 전시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콘서트홀의 관습적 공간은 노이즈 뮤지션에게는 가급적 탈피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회적 제약들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다양한 듣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아티스트가 오늘도 연주한다. 글리치와 노이즈, 히스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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