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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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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2013년 2월호 특집은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지형도를 그린다. Art는 컨템포러리 아트 현장에서 일련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미래의 판을 짜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22명의 큐레이터에게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는 누구이며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거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들이 정성껏 보내 온 추천 작가와 작품의 리스트를 기본 설계도 삼아, 2000년 이후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또한 국내외에서 열린 주요 전시제목과 이론 및 평론 영역에서 등장한 키워드를 뽑아 컨템포러리 아트를 이해하기 위한 다이어그램을 제작했다. 이를 토대로 각 작가의 작품 성향을 꼼꼼히 분석하고, 다음과 같은 7개의 주제로 나누어 스크리닝했다. 경계 없는(있는) 구축, 시간성, 현실 참여와 비판, 미디어와 대중문화, 포스트미디엄, 상호작용과 관계성, 마이크로 내러티브. 이를 다시 주요 키워드로 세별해 개별 작품이 지닌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을 집중 조명했다. 두 번째 단계로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를 둘러싼 논쟁적 이슈를 제시한다.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등 5명의 필자는 숨가쁘게 흘러간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토양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Contents

COVER
          박미나 색칠공부 종이에 연필 27×19cm(부분) ⓒMEENA PARK


SPECIAL FEATURE
          The Paradigm Shift, Korean Contemporary Art

077    ① NEW WAVE 2000’
          경계 없는(있는) 구축: 
          (비)기념비, (비)물질, (탈)구축과 (탈)장소
          시간성: 
          지시와 수행, 비디오와 시네마, 극장과 무대
          현실 참여와 비판: 
          행동과 발언, 뉴 다큐멘터리, 픽션과 재구성
          미디어와 대중문화: 
          변주와 패러디, 대량생산과 키치, 아이콘
          포스트미디엄: 
          메타형식주의, 장르 혼성, 콜라보레이션
          상호작용과 관계성: 
          관객과 소통, 프로세스와 프로젝트, 커뮤니티
          마이크로 내러티브: 
          (비)가시성, 섹슈얼리티와 페티시, 의식

125    ② ESSAY
          우리의 ‘현대’란 무엇인가? / 조앤 기
          동시대성과 세대 변환 1987~2008 / 임근준 AKA 이정우 
          아주 낯설거나 익숙한 7개의 키워드 / 김성원
          다가올 미래의 ‘지금’을 위하여 / 유진상
          ‘컨템포러리’한 시간들, 회고와 전망 / 윤진섭
          Art Work / 안규철, 최정화, 김홍석


ARTIST

164    최병소
          ‘지우기’의 미학 / 김미경

172    임충섭
          천지의 ‘달빛 노래’ / 김이순


CRITIC

055    FOCUS
          신로 오타케展:
          존재를 탐구하는 수집광 / 김정복
          (불)가능한 풍경展:
          신데렐라의 구두 / 이재룡
          팀 버튼展:
          ‘B급 영웅’의 부활 / 함영준
          잭슨 홍展, 나현展: 
          게임, 전략, 아이러니 / 정현
          회화의 예술展, 김정욱展: 
          회화적 충동 / 정연심


ART FIELD

180    Viewable
          국립현대미술관 ‘iF Design Award 2013’
          김동욱展, 제55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발표
          파운데이션展, 사랑에 반대하다展
          정서영: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김동현展, My Arty Valentine展
          김준기: 사비나미술관 사건 종결

181    Prism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무엇이 중요한가 / 박신의
          미술관과 ‘공공-대중-수익’, 그 현실과 과제 / 김애령


ETC.

052    EDITORIAL / 호경윤
186    P.S.
187    SUBSCIPTION
188    CREDIT

Articles

신데렐라의 구두

이기봉 <Hole of Solaris>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12

신데렐라의 구두

(불)가능한 풍경展 2012. 11. 8~2013. 2. 3 플라토

 글 | 이재룡_문학평론가 

파스칼은 《팡세》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마을에서 평판에 연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의 이익에 매달리지 말라고 했다. 영원한 구원을 추구했던 파스칼은 이승을 한순간 머무는 곳,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의 유배지 정도로 생각했다. 오랫동안 서양 예술이 오로지 예수의 삶을 그린 성화에만 몰두했을 뿐, 이승의 풍경을 외면했던 것은 이런 종교관에서 비롯됐다. 프랑스와 달리 현세를 긍정하고 물질적 풍요를 신의 축복이라 여긴 개신교의 나라에서 풍경화가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닐 터. 게다가 저지대 국가 네덜란드 사람에게는 한 뼘의 땅, 풀 한 포기까지 바다를 가로막아 얻은 뿌듯한 재산이니 오래 간직하고 기념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즉 풍경이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이념, 조금 넓게 말해서 심상이 반영된 것이다.
문학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벤야민은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에서 별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랑과 명예를 둘러싼 갈등에 빠진 코르네이유의 주인공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여유는 없었다. 자본주의의 치열한 생존 조건에 처한 우리 역시 별을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남의 나라 고전 비극뿐 아니라 지금 우리네의 시, 소설에서 풍경이란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장죽, 요강, 사립문처럼 지칭할 대상이 사라진 어휘는 자연스레 함께 용도 폐기되었다. 시인 최승호는 도시인의 삶을 보이는 것은 광고뿐인 지하철 풍경이라고 요약했는데, 여행을 유혹하는 관광지 포스터가 진짜 풍경일 수 없다.

<(불)가능한 풍경> 설치 전경_(앞) 이불 <나의 거대서사­바위에 흐느끼다…> 혼합재료 280×440×300cm 2005

풍경의 탄생, 근대화의 징후

내게 풍경은, 이념은 접어두고 우선 넓이와 깊이가 확보된 물리적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너른 배경이라도 특정 대상에 초점을 맞춰 심도를 지운, 예컨대 아웃 포커싱된 시야나 옹색한 크기의 엽서에 재현된 경치는 아무래도 풍경답지 않다. 딱히 통 큰 사람도 아닌 주제에 이런 편견을 가진 것은 아마도 학습된 지식, 언필칭 역사적 구성물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풍경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초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이다. 표음 문자의 문물이 동아시아에 들어오면 굴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인도의 불교가 무(無), 공(空)과 같은 중국의 토착 어휘에 의탁한 나머지 격의불교로 변성된 것과 같은 과정을 풍경도 겪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는 사회, 개인, 미, 존재, 자연, 자유와 같은 단어가 실은 일본 근대화가 낳은 번역의 산물이고 풍경이란 어휘도 여기에 속한다.1)
풍경화로 번역된 서양어는 원래 16세기 말 네덜란드 화가들이 사용한 ‘landschape’인데 이는 바다 그림과 구별된다는 뜻에서 육지 그림쯤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2) 우리보다 먼저 서양에 눈을 돌린 일본도 에도 중기까지 풍경이란 개념이 없었다. 산수화나 명소구적(名所舊跡)을 그린 유사 지도 같은 그림만 있었다가, 소위 이름 있는 곳(名所)에서 이름이 사라진 익명의 공간이 나타난 것이 메이지 말기이다. 대상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위상이 강화됨을 뜻한다. 그래서 일정 시간 부동의 원근법적 시점이 유지될 경우에 발견되는 풍경은 근대 의식의 산물이다. 즉, 다양한 초점에서 세상을 두루 그린 그림이나 전지적 화자의 고전 소설이 저물고 풍경화와 1인칭 소설의 탄생했다면 그것은 근대화의 징후라 볼 수 있다.  
플라토의 <(불)가능한 풍경>이란 전시제목은 우리에게 2개의 화두를 건네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풍경은 그 뿌리를 캐볼 수 있는 명사인데 반해 그것을 수식한 “(불)가능한”이란 표현은 전시 기획자의 자상한 설명에도 사태를 매우 착잡하게 만들고 있다. 예술의 맥락에서 ‘가능성’이란 표현은 개연성, 혹은 있음 직한 현상쯤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럼 직한 것, 개연성을 표현하는 것이란 뜻, 보다 범박하게 말하면 재현예술을 뜻하는 단어로 가능성이란 수식어를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획 의도는 문자 그대로 재현예술로서의 풍경을 보여 주는 것에 그칠 수 있지만, 관객의 심사를 착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괄호 안에 넣은 접두사 ‘부(不)’에서 비롯된다. 이 문제를 푸는 단서 중 하나를 마르셀 뒤샹의 메모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1913년 뒤샹은 “가능성은 단지 모든 미학적 (esthetique), 혹은 미용학적(callistique)인 것을 불태우는 물리적 부식액(황산 같은)일 따름”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메모가 의미하는 것은 예술이란 아름다움에 저항하는 것, 이른바 반미학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전시제목에 발목이 잡힌 이유는 제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품은 14명의 작가를 하나로 모든 공통 주제가 ‘풍경’과 ‘가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현대미술은 한 작품만으로도 다양한 해석의 길이 열리지만 여러 작품이 모이면 이웃 작품과 맥락을 형성하고, 개별 작품은 맥락에 의해 의미가 재구성된다.

김소라 <풍경: 한 지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지는 확산운동> 가변크기 2012 사운드 작업은 장영규와 협업

‘풍경’으로서의 미술, 풀리지 않는 숙제

통상적으로 선을 긋고, 칠하고, 깎고, 덧붙여서 최종적으로 세우는 일이 미술과 관련된 관습적 행위이다. 예술가는 이런 동작을 통해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킨 후 가급적 오래도록 자신이 의도했던 형태를 지속시키려고 한다. 전시된 다양한 작품을 이런 행위를 기준으로 나눈다면 그리고 칠한 것은 평면 회화, 깎고 덧붙여서 세운 것이 설치작품에 해당한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작품은 축 늘어져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은박지의 물결(김소라)이다. 작가의 행위는 물질이 중력과 바람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것에 머문다. 딱딱한 것을 우뚝 세우는 것과 반대로 흐느적거리는 것을 늘어뜨리는 행위는 우리에게 편안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프레쉬레(M. Frechuret)는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런 조각의 흐름을 푸코가 묘파한 시대정신의 반영이라 해석했다. 그는 《부드러움과 그 형태들》에서 인간의 의지대로 자연을 주물러 고정하는 기존 예술 질서를 비판하는 일련의 작품을 도전과 해방적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깎고, 세우는 대신 떨어뜨리고, 매달고, 쌓는 행위를 기준으로 현대미술을 분류한 프레쉬레는 물성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1960년대의 이념을 읽었다. 이와 반대로 딱딱한 것을 아래부터 위로 쌓아 고정하는 건축적 의지가 반영된 것이 <성스러운 도시>(김동연)나 <나의 거대서사-바위에 흐느끼다…>(이불)와 같은 작품이다. 이런 관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 <눈덩이와 괴물의 지도, 15분>(정서영)이다. 이 작품은 매달거나 늘어뜨리는 수직성이 아니라 수평적 굴리기를 연상시킨다. 따로 떨어져 있는 2개의 눈덩이를 마주한 관객은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2개의 덩어리를 합한 눈사람 형상을 그려 본다. 작은 덩어리를 뭉쳐 굴리면 바닥에 흔적을 남기며 몸피를 키워 제 무게로 응축된 눈사람 형상이 된다. 천천히 축적과 응축으로 완성된 눈덩이는 그 안에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함께 전시된 <괴물의 지도, 15분>을 본다면 시간의 궤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굴리기란 표현은 김범의 제목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현관 열쇠>이다. 저물녘 역광을 받은 산 그림자쯤으로 생각하고 다가섰다가 제목을 읽고 난데없이 들라크루아가 떠올랐다. 들라크루아가 1849년 숲 속에서 느끼고 남긴 메모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작은 것에는 큰 것의 구조가 담겨 있다. 현대 용어로 정리하면 자연은 프랙탈 구조로 이뤄졌으므로 기암괴석의 장대한 풍경을 그리기 위해 굳이 금강산에 가지 않고 책상 위에 작은 돌을 올려 놓고 그려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열쇠는 인공물이지만 열쇠의 굴곡에서 자연을 읽을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고, 열쇠라는 제목 자체가 상징적이다. 문범의 작품을 보며 관객은 그의 그림을 눈으로 만지고 쓰다듬게 된다. 서양어로 감동을 주고받는 데 쓰이는 동사는 촉감과 관련된다. 인간이란 촉감이 자극되어야만 감동 받게(touched, touche)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어떤 심상을 표현한 ‘풍경’일지 몰라도 감동적인 것은 그의 손가락 덕분이다.
사람은 낯선 대상과 부딪히면 가급적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로 환원하려 든다. 예컨대 작품과 작가의 의도성 관계가 그런 주제 중 하나이다. 작가의 의도가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데에 어떤 위상을 갖는가. 과연 나는 오로지 시각 체험만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작가가 글이나 말을 통해 의도를 드러내지 않아도 작품이 온전히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해석학의 낡은 비유인 ‘신데렐라의 오류’가 여기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구두가 없다면 어떻게 신데렐라를 알아볼 수 있을까. 과연 작가의 말은 신데렐라의 구두이기 때문에 거기에 작품을 끼어 맞춰야만 온전한 감상이 되는 것일까. 혹자의 주장처럼 구두가 관객의 몫이라면 무슨 수로 신데렐라를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현대예술에서 의도성과 작품은 아예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1) 야나부 아키라, 《번역어의 성립》, 김옥희 역, 2011

2) 이효덕, 《Hole of Solaris》, 박성관 역, 2002 

김홍주 <무제> 혼합재료 각각 150×240cm(3점) 1994

최병소: ‘지우기’의 미학

<무제> 신문에 연필, 볼펜 39×55cm(부분) 2008

최병소: ‘지우기’의 미학

글|김미경_강남대 교수 

작가 최병소에게 ‘붓’은 연필과 볼펜, ‘캔버스’는 신문지다. ‘긋기와 지우기’를 방법론으로 삼아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최병소의 개인전이 대구미술관에서 열렸다. 대구에서 태어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그는 한국 단색조 회화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루할 정도로 일관된 반복과 수행을 통해 집약된 물성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정신적 깊이를 보여 준다. 필자는 7가지 키워드로 최병소의 ‘검은 화면’ 뒤에 숨은 미학적 성취를 분석한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물음은 가장 중요한 출발 지점이어야 한다. 그 물음은 내적 자아 및 타자와의 소통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언제나 언어의 문제를 관통한다. 최병소의 예술은 놀라운 역설의 힘으로 그것에 집중하고 초월한다.

사유(思惟)

예술 작품을 보는 시선과 인식의 폭은 사유의 깊이에서 결정되며,     주체/타자의 사유는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순환할 때 생동하며 살아 있게 된다. 막힌 곳은 사유로 풀어야 한다. 사유의 우물을 깊게 파지 않고는 가로막힌 주체/타자 간의 통로를 뚫을 수도 없지만, 한 쪽이 말라 있다면 물은 일방적으로 쏟아질 뿐 아니라 굴절되고 뒤틀리기 십상이다.  
오랫동안 서구 모노크롬이나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담론’도 아닌, 피상적 ‘용어’에 의존해서 기술되어 왔던 한국 단색 조회화의 ‘운동사’는 한국현대미술의 현장으로부터 역사화(歷史化)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화사적/미학적 반성 없이 그 운동사를 ‘받아 적은’ 비평/미술사 또한 사유의 부재 내지 엉성함을 입증했던 결정타라면, 이를 반전시키는 동시에 주체/타자의 사유를 순환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최병소의 예술이다.

물질(物質)

물질은 공간을 전제하며 시간과 함께 있다. 우리는 미술관의 어두컴컴한 방에 숙연히 서 있는 검은 물질과 만나다가, 바닥을 타고 벽을 넘어 무한 공간 확장을 반복하는 검은 물질에 흠칫 놀라지만 그것이 거울로 인한 일루전 때문임을 알고 잠시 안도한다. 물질 표면에 드리워진 명암의 대조는 시시각각 달라져서 급기야는 어둡던 표면이 밝게 느껴지고 밝았던 표면은 어둡게 인식된다. 시간을 타고 몸이 공간을 이동하는 동안 명암을 식별할 절대 기준을 상실한 채 오직 촉각에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또다시 밝은 표면들 사이에 검은 암(暗)의 세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오로지 ‘빛’ 때문이다.
미술관의 한쪽 벽면 전체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보도하는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 신문이 가득 붙어 있다가 갈갈이 파편화되어 건너편 벽면으로 날라가 있다. 대구의 《매일신문》 9~10월 신문지는 작두로 잘려져 비닐과 함께 바닥에 설치되고, 화장품 샘플이나 성냥갑 그리고 커피봉지와 눈약 상자는 검게 칠해져 레디메이드 오브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벽에 매달린다. 신문용지의 앞뒷면을 빈틈없이 볼펜과 연필로 채운 대형 설치 작품은 공간을 점유하며, 거울을 통해 무한히 확장된다. 신문지 전지, 볼펜 잉크, 연필의 흑연, 거울, 빛의 입자 파동, 시공간 속의 신체 그 모든 것은 ‘물질’이다. 이 물질들은 물리적 반복을 엄청나게 거듭하면서 ‘무엇’을 향한다. 우리는 그 ‘무엇’을 쫓아 독특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최병소의 작업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언어(言語)

체험은 언어를 앞선다. 언어를 말하기 위해서 페르디낭 드 소쉬르(F. de Saussure)의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 이후 롤랑 바르트(R. Barthes)의 《신화론(Mythologies)》(1957)과 자크 라캉(J. Lacan)의 《에크리(Ecrits)》(1966)를 잇는 사상들을 관통하면 더 대화가 풍부하겠지만, 최병소의 예술을 말하기 위해서는 특히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차연(差延·differance)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을 주목해야 한다. 데리다의 차이와 지연에 대한 사유는 텍스트 지우기의 ‘과정’과 관련된 최병소의 ‘언어’의 문제를 건드리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고,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는 육조시대 시에허(謝赫)의 ‘상의 바깥(象外)’과 당대(唐代) 리우위시(劉禹錫)의 ‘경(境)은 상(象)의 밖에서 생겨난다’ 만큼이나 최병소가 다가서고 있는 그 ‘무엇’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언어가 흩어진 바벨탑 사건 이후, 우리는 하나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수만 개의 단어를 동원하면서도 끝없는 결핍과 허기를 느껴왔다. 오순절 사건의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양극의 일치(coincidentia opposotorum)나 메타노이아(metanoia), 회개(悔改)나 깨우침(覺)과 같은 말에 기대를 걸면서 언어의 벽과 싸우는 사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는 최병소의 물질과 언어를 넘어 있는 ‘그것’에 근접할 수 없다.       
열자(列子)의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故事)를 역설적으로 반전하듯이 우직하고 집요하게 반복되는 작은 획들이 산처럼 쌓일 때, 그것은 획들의 집적을 넘어 전혀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뿜어 내는 ‘그것’을 드러낸다. 작품 앞에 섰을 때 전율하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검은 물체’의 세계적 독특성은 최병소의 삶 자체로부터 짜낸 진액이기 때문에 언어를 넘어서는 농도만큼이나 분출의 힘이 강하며, 그는 일체의 사회화된 시니피앙의 언어를 단번에 무화시킨다.

기억(記憶)

기억은 각인되고 보유되며 재생되고 재인(再認)되어 남은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기억의 강렬함이란 절대 기준이 없으며 ‘사소함’과 ‘강렬함’의 경계도 없다.
6·25전쟁으로 출판사나 제본소가 초토화되고, 초등학교 2학년 1학기에 그가 교과서라고 받은 것은 교과목 내용이 앞뒤에 인쇄된 한 장의 신문지 전지였다. 꼭꼭 접어서 그리드가 생긴 신문지 교과서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기억은 뇌리에 박혀 있다가 어느 날 재생되었다.1) 1975년 즈음 작업실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던 최병소는 연필, 볼펜과 같은 필기구를 이용해 가장 익숙한 신문지를 캔버스 삼아 작품을 제작한다. 신문지를 접어 그리드를 만든 뒤 검은 볼펜과 연필로 한 칸씩 집요하게 박박 그어대어 결국에는 도저히 신문지임을 알아 볼 수 없게 된, 시커먼 누더기 물질 2장을 들고 어느 날 그가 전시장에 나타났던 것은 결코 느닷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핍과 가난의 기억은 최병소에게 생성을 가능케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젊지만 가난했던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가 땅을 파고 흙더미를 쌓는 광경은 ‘무위’(無爲)로서 다가와 이우환의 유명한 평론 ‘존재와 무를 초월하여: 세키네 노부오론’(1969)을 낳았다. 최병소가 자기혐오를 무화(無化)시킬 요량으로 불경을 들으며 눈앞에 놓인 신문지에 볼펜을 휘적거리던 손짓은 검은 걸작을 낳았다. 그가 제작한 ‘검은 신문지’는 어디서 구경해 본 적도, 미술대학에서 ‘배운 예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견뎌야 했던 가난 속에서 기억으로 재생된 반복 행위로부터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유신(維新)과 사회(社會)

자신의 태생적 ‘기질’에 직면하는 작가는 진정하다. 소위 ‘서양화과’ 출신이었던 그가 공간과 물질 그리고 텍스트로 작가 인생을 시작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空)의 공간에 대해 인식하며 위선적 언어를 단호히 지워버리는 침묵의 파워는 강력하고 저항적이며 자기 내면의 찌꺼기인 미미한 이기적 욕심조차 용납하지 않는, “껍데기는 가라”2)는 선언적 기질이다.    
1974년, 그가 대구의 대백화랑에서 첫 전시를 했을 때, 전시 공간의 기둥 2개 사이를 굵은 테이프로 가로질러 연결한 뒤 바닥으로 이어지게 했던 작업은 사물과 공간에 대한 질문의 출발이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10월 유신이 발효된 지 2년 뒤인 그 해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날 총탄에 쓰러졌고,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효되어 유신헌법을 반대 비방하는 발언이나 행위에 대한 보도가 전면 금지되었다. 블루진과 통기타 청년문화가 폐쇄적인 현실에 대한 침묵에 저항하고 있었으나3)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로 자유 언론 실천을 외쳤던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되었던 때였다. 미국의 반(反) 공산주의 광풍보다 더 위협적인 한국판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반공’을 무기로 삼았던 유신 시대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하는 최병소에게 미술대학에서 철학적 사유가 아닌 ‘그리기’로 배운 ‘서양 그림’은 전혀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없었다.  
다음 해인 1975년, 친구들과 ‘35128’ 4)그룹을 만들고, 대구 시립도서관에서 이강소와 2인전을 열었을 때, 그는 ‘검은 신문지’ 2장을 처음 내걸었다. 볼펜과 연필로 일체의 폭력적 권위의 메시지를 지운 ‘신문 아닌 신문’이자 기괴하리만치 침묵하는 저항의 힘으로 탈바꿈된 시커먼 물질이었다. 강력한 집요함으로 물질성을 초월하여 뿜어 나오는 ‘그것’의 에너지는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abro)가 바닥에 깐 신문지나 가네자키 히로시(金崎博)의 신문지, 아라카와 슈샤쿠(荒川 修作)의 웹스터 사전 지우기나 싸이 톰블리(Cy Twombly)의 획들을 무색하게 한다. 그것은 “고급예술의 취향과 모더니즘의 절대적 순수주의 강령에 물들지 않았고, 삶과 예술, 일상과 예술, 현실과 미술을 이어주는 레디메이드 오브제”이자 “충격과 마찰의 물리적 과정에서 몸(행위)의 살아있음이 감각의 부활과 함께 의식의 연금(鍊金)으로 화(化)하게 되어, 완전히 변용되어 버리는”5)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1970년대 한국 단색조 회화의 열풍 속에서 ‘백색 모노크롬’이라는 단어의 공허함을 냉소하고, 시대와 사회를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었다.  
예술은 사회를 말한다. 최병소의 예술은 한국의 유신 사회에서 배태되었다. 한국 단색조회화의 운동사가 유신시대의 정치적 전략으로서 표방되었던 ‘한국성’을 겉옷으로 삼고 있었던 동시에 일본 식민주의를 속옷으로 입고 있었다면, 거기서 ‘모노크롬’이라는 말은 화장품이었다. 최병소의 작업을 ‘단색(單色)’ 혹은 모노크롬이라는 말로부터 시작하는 비평은 쑤동포(蘇東坡)의 ‘논화이형사, 견여아동린(論畵以形似 見與兒童隣)’, 즉 ‘형사(形似)로 그림을 논하면 생각이 아이들과 다름없다’라는 말을 메타비평으로 받아야 한다.
작은 방에서 작은 상을 펴고 앉아 검정색 모나미 볼펜과 4B 연필을 쥐고,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낙서로 휘적거리듯 신문지의 모든 활자를 지워버리는 그의 모습과 결과물은 노자(老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상기하게 한다. 정신이 빈곤한 사회, 사유가 부재한 미술 사회,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횡포가 난무했던 정치 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분노를 삭이듯 불경을 들으며 프로파간다의 메시지들을 지워나가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것이었다.       

반복(反復)

‘반복’이란 무엇인가? 공간 속에 시간을 타고 넘나드는 최병소의 ‘검은 물질’은 시각적으로 거의 알아챌 수 없는 엄청난 ‘반복’ 행위가 집적(集積)된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치적, 사회적 저항이나 한국현대미술의 헤게모니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결과로만 읽는다면, ‘반복’이 형성된 사유의 과정을 간단히 간과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세미나 11’에서 무의식과 반복, 오브제 a로서의 응시, 전이와 충동, 타자의 장(場)과 전이로의 회귀를 말했던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으며, 언어나 담론이 재현할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간극을 통해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고 외쳤고, 1920년 프로이트는 ‘포르트(fort)! 다(da)!’를 반복해서 외치며 실 묶은 실패를 던졌다 다시 끌어당기는 놀이를 반복하는 그의 손자를 통해 어머니의 ‘부재’라는 고통의 상황을 극복하는 동시에 ‘부재’와 ‘현존’을 능동적으로 이해하는 주체에 대해 썼다.6) 한편 유년 시절 서당에서 붓에 먹을 찍어 점찍기와 선긋기를 반복했던 이우환의 경우, 그가 어렸을 때 쌀을 씻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왜 그렇게 쌀을 씻고 또 씻는지 물었을 때 “매번 똑같이 반복해서 쌀을 씻는 것처럼 보여도 매번 다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7) 또한 반복적인 붓질을 ‘수행’으로 여기는 태도는 동양의 시서화(詩書畵)가 갖추고 있는 기본이다. 우주는 생성소멸과 회전을 반복하는 행성들의 운행, 포톤(photon)이라는 입자인 동시에 광자(光子)의 파동으로서 움직임을 반복하는 빛 등으로 차 있다.     
그런데 최병소 예술의 ‘반복’은 조금만 거리를 두어도 추상화되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가까이 보면 촉각적 사태가 극대화된다. 기계적 혹은 몰아적(沒我的) 손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 그의 반복적인 행위 사이에는 간극이 만들어지고, 간극은 차이를 낳으며 패럴렉스(parallax)의 장소를 점유한다. 그것은 선형적이지 않다. 이미 표면적 반복의 시작은 이면적 반복과 같이 시작하며, 모든 것은 반복이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물질과 공간과 시간과 인식과 개념의) ‘차이’이다.
한국 단색조 회화의 운동사와 관련된 많은 작가들에게서도 이 반복과 차이를 말할 수 있지만, 아우라가 빠진 매너리즘을 경멸하는 예술 애호가와 지성인들에게 최병소만큼 감동적인 생동감을 회복시키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8) 이후 ‘숭고’(sublime)와 관련된 철학적 사유로 그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무제007> 신문에 연필, 볼펜 50×40cm 2007

1) 최병소-김미경 인터뷰, 2013.1.15, 대구미술관
2) ‘껍데기’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신동엽의 시(詩)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되었으며, 1960년대 대표적인 참여 문학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중 민족 문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3) 젊음의 광장-오늘날의 젊은 우상들 (《동아일보》, 1974.3.29), 젊은이의 풍조 (《중앙일보》, 1974.5.1) 등 참조. 김미경, 《한국현대미술자료 略史-정치, 경제, 사회와 함께 보는 한국현대미술》, ICAS, 2003, pp. 293~297
4) 최병소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1975년에 대구에서 이향미, 이명미, 황현욱 등과 함께 결성한 그룹 ‘35128’은 대구의 위도 35.87N, 경도 128.63E에서 따온 숫자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2010년 제1회 대구건축문화비엔날레는 대구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찾는 정체성을 건축에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35.87N, 128.63E 분지”라는 테마를 선정했다.
5) 폐교된 청도의 대산초등학교에서 남춘모, 이영배, 김선혜, 이현재, 김호득, 이태 등이 모여 ‘대산 포름’이라는 세미나를 갖던 무렵인 2000년 9월 23일, 김선혜가 발표한 〈최병소의 모노크롬에 제시된 지각된 사건으로서의 세계〉라는 글의 내용을 최병소는 자기 발표의 일부로 삼았다고 한다. 최병소-김미경 인터뷰, 2013.1.15, 대구미술관
6)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London, Vienna: International Psycho-Analytical, 1922
7) 이우환-손지민의 대화, Kwun's dining, Paris, 2012.5.4
8) 이우환 역시 그의 특강에서 최병소의 문화 미학적 의미를 특별히 거론했다. 이우환 특강, 국립현대미술관, 2012.3.17

<무제012> 영국 신문 《The Times》에 잉크 없는 볼펜, 연필 230×1950cm 2012

Special February 2013

<The Paradigm Shift, Korean Contemporary Art>

 

The Paradigm Shift, Korean Contemporary Art  

art는 2013년 1월호 특집으로 글로벌 컨템포러리 아트 씬에서 활동 중인 작가 100여 명을 선정, 그들의 작품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망했다. 국제 무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본질을 바로 보기 위한 프레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혹자는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망망대해를 누비는 유용한 나침반을 발견했을 것이고, 혹자는 손에 잡히지 않는 사막 위 신기루를 재확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월호 특집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를 종합적으로 탐색하고, 국제 미술계를 향한 지표를 세우고, 새로운 비평의 장(場)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2월호 특집에서는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지형도를 종횡으로 그린다. 그 첫 단계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생산되는 미술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다. Art는 컨템포러리 아트 현장에서 일련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미래의 판을 짜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22명의 큐레이터에게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는 누구이며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거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들이 정성껏 보내 온 추천 작가와 작품의 리스트를 기본 설계도 삼아, 2000년 이후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또한 국내외에서 열린 주요 전시제목과 이론 및 평론 영역에서 등장한 키워드를 뽑아 컨템포러리 아트를 이해하기 위한 다이어그램을 제작했다. 이를 토대로 각 작가의 작품 성향을 꼼꼼이 분석하고, 다음과 같은 7개의 주제로 나누어 스크리닝했다. 경계 없는(있는) 구축, 시간성, 현실 참여와 비판, 미디어와 대중문화, 포스트미디엄, 상호작용과 관계성, 마이크로 내러티브. 이를 다시 주요 키워드로 세별해 개별 작품이 지닌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을 집중 조명했다.   
두 번째 단계로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를 둘러싼 논쟁적 이슈를 제시한다.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등 5명의 필자는 숨가쁘게 흘러간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토양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Art는 특집을 준비하며 각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쟁점을 제안했다. ‘컨템포러리’라는 용어의 인문, 철학, 문화, 사회, 미술사적 규명,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시기 구분과 작가들의 세대 변환, 관계미학과 포스트프로덕션 등 기존과 전혀 다른 예술 창작 방법론의 확산, 대안공간, 비엔날레, 미술시장 등 창작 환경을 둘러싼 시스템의 변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미술이론의 유입과 논쟁 등이다. 각 필자는 편집부와 긴밀한 논의를 거쳐 몇 차례의 퇴고를 거듭했다. 필자들이 풍성하게 직조한 텍스트의 결 속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한국 미술계는 ‘컨템포러리’라는  용어를 어떤 관점에서 사유해 왔는가? 한국미술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동시대성’의 맥락을 획득했으며, 그 굴곡의 드라마 속 주인공은 누구인가? 과연 우리는 어떠한 맥락에서 누구와 무엇과 어떻게 ‘컨템포러리’ 했는가? 지난 20여 년 간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가 성취한 성공의 이면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의 ‘눈’과 ‘입’을 통해 역사를 회고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Art가 마련한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는 무엇인가?’라는 특집에 화답하는 안규철, 최정화, 김홍석 작가의 ‘지면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이번 특집은 일회성의 기획물이 아니다. 미시적으로는 1999년 창간 이후 한국 미술계의 정론지로서 컨템포러리 아트의 흐름을 기록해 온 Art의 날 선 ‘비전(Vision)’을 담고 있다. 거시적으로는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가 처한 작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이제 다시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와 첨예한 논란과 흥분을 불러일으키길 희망하며, Art가 한국 미술계를 향해 던지는 화두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컨템포러리 아트는 어떻게 전개될까? 아직 당도하지 않은 험난한 미래의 ‘현재’를 앞둔 지금,
그 한계와 가능성을 모색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제 우리들의 ‘컨템포러리’한 시간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1. New Wave 2000’

feat. 고원석, 김노암, 김윤경, 김인선, 김장언, 김현진, 김희진, 김해주, 배명지, 배은아, 백곤, 신보슬, 신은진, 안소현, 양지윤, 워크온워크(박재용, 장혜진) 이수연, 이은주, 조선령, 최빛나, 현시원, 황록주

 

2. Essay

우리의 ‘현대’는 무엇인가? / 조앤 기
동시대성과 세대 변환 1987~2008 / 임근준 AKA 이정우
아주 낯설거나 익숙한 7개의 키워드 / 김성원
다가올 미래의 ‘지금’을 위하여 / 유진상
‘컨템포러리’한 시간들, 회고와 전망 / 윤진섭
Art Work / 안규철, 김홍석, 최정화

김지은 <어떤 망루> 혼합재료 2012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 전경

권용주 <부표등> 혼합재료 가변크기(부분) 2010 인사미술공간 전시 전경

아래ㆍ김나영+그레고리 마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를 잡는다>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0 공간해밀톤 전시 전경

 

경계 없는(있는) 구축

(비)기념비
1997년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박이소의 <UN타워>. 합판으로 만든 가벽과 이를 만들다 남은 쓰레기들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이다. 박이소의 비주류적 감수성과 냉소적인 개념성은 당시 한국 미술계에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주었고, 조각과 설치의 기념비적인 스케일과 이에 상반되는 남루한 표현은 2000년 이후 한국미술 현장에서 마치 유행처럼 번져갔다. 일례로 몇몇 작가들은 조각과 설치의 경계가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레디메이드 오브제와 작가가 직접 만든 모형 등을 구분없이 재배치시켜 전체의 일부로 구성한다(정서영,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권용주). 이처럼 미술의 재료는 더욱 일상적이고 누추해졌지만, 상대적으로 기념비적 형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조각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설치로 전환되는 지점을 유쾌하게 캐치해 내는 이러한 작업들의 공통점은 ‘형(形)’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물질
‘인스톨레이션’이라는 말이 이제 과연 형식적 차원에만 국한된다고 볼 수 있을까? 2000년대 이후 ‘인스톨레이션’은 시각적 ‘장면’을 의미하는 것에서 나아가, 보이거나 만질 수 없어도 경험을 이끌어 내는 ‘감각적 환경’까지 아우른다.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들은 때때로 비물질적 요소들을 재료 삼아 관객에게 공감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빛과 그림자(이창원), 향기와 바람(양혜규), 사운드(김기철) 등도 관객 개개인의 오감을 환기시키는 재료로 사용된다. 물론 이러한 비물질적인 요소를 흡수하면서도 미니멀리즘의 계보를 잇는 물질성 자체에 천착하는 작업들도 있다(박기원). 기존의 조각적인 흐름을 따르며 빛과 같은 요소를 흡수하는 방식의 작업(김주현) 또한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탈)구축과 (탈)장소  
포스트모더니즘 아트의 어법이 ‘해체’ 즉 ‘탈구축’이었다면, 컨템포러리 아트는 구축과 탈구축의 방식을 동시에 수용하며 그 개념의 테두리 자체를 넓히거나 아예 이탈한다. 이는 ‘인스톨레이션’과 직결되는 지점이자, 미술의 차원을 공간 및 건축적 요소로 확장시키는 형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김지은 김주리). 나아가 ‘구축/탈구축’ 현상에 대한 작가들의 물리적인 고민이 심화되면서 작품이 자리하게 되는 ‘장소’의 영역 또한 넓어졌다. 전시 공간의 유형도 다양해져 전시 작품들이 처하는 상황을 그대로 작품의 주된 요소로 활용하기도 하고(양혜규 이주요), 다양한 공간들이 화이트큐브를 대체하는 대안적 장소로 기능하게 된다(정서영,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장소특정성’과 ‘탈미술관’의 시대를 거친 뒤 바로 지금, ‘장소’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위치되는 ‘곳(place)’일 수도, 혹은 비정형적인 ‘제도(institution)’이자 ‘소재(subject)’일 수도 있다.

 

김소라 <2007-04-03> 5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사운드 2007

오용석 <드라마 변주> 싱글채널 비디오 2008

김아영 <PH 익스프레스> 2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2011

시간성

지시와 수행
‘지시’와 ‘수행’의 복잡 미묘한 역학 관계는 2000년 이후 컨템포러리 아트의 문제적 지점으로 등장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에 상이한 입장을 띠고 있지만, 관객과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살아 있는’ 소통 방식을 모색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이를 작품에 반영하는 작가들은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제작해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 즉 전통적인 시각 예술이 지녔던  ‘완결’된 상태의 작품을 거부한다. 작가가 작품을 수행하는 주인공으로 직접 등장해 스스로 작품의 일부가 되거나, 이와 반대로 작품의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지시하는 연출가가 된다. 혹은 그 중간 지점에서 여러 역할을 맡기도 한다. 전자는 이미 1970년대, 1세대 아방가르디스트 이승택의 퍼포먼스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친숙한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2000년 이후 두드러지는 최신 경향으로, 작품의 완성을 유보하면서 현재 진행형의 ‘지시’로서만 작품이 존재하도록 하는 다양한 작업이 등장하고 있다(남화연 김소라 파트타임스위트).

비디오와 시네마
백남준 이후 영화, 비디오아트, 디지털아트 등 테크놀러지에 기반을 둔 영상예술에서 ‘시간’은 편집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물질’로 사용됐다. 작가들은 시간을 조작하고 파편화하며, 시간과 시간 사이에 예상 밖의 균열을 발생시키며 선형적 시간 개념을 파괴했다. 그들은 시간의 조작을 은폐하기보다는 오히려 강조하며, 기존의 미디어 매체의 문법을 차용해 ‘시네마틱(Cinematic)’의 문제를 작품의 주제나 방법으로 활용했다. 상황, 공간, 기억 등의 일상적 시간을 채집하고 다시 중첩시켜 또 다른 시간의 개념을 제시하거나(오용석 이재이), 또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금 여기의 시간과 교차시키고 재생한다(김아영 정은영). 이러한 접근 방식은 개인의 내면에 잠재된 불완전한 기억의 순간을 끄집어 낼 때도 마찬가지로 작동된다(김성환).

극장과 무대
모더니즘의 상징인 무균질한 ‘화이트큐브’를 거부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전시 공간은 미디어 작품을 상영하는 ‘블랙박스’에 이어 실험적 예술을 펼칠 ‘무대’ 즉 ‘극장’으로 확장되어 갔다. 연극, 무용, 춤, 음악, 공연을 결합해 ‘무대’에서 선보이는 미술 작품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의 경계를 재정의하며 ‘다원성’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작품을 경험하는 순간 자체를 ‘살아 있는’ 미술 작품으로 새롭게 인식시키는 새로운 전략으로 떠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미술 작품 제작 과정이 지시하던 자기 만족적이고 폐쇄적인 작가상을 벗어나, 다양한 문화 영역의 전문가와 협업하며 시간과 개념을 열어 둔다(홍성민 양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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