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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1.12

Abstract

12월 art는 2012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Best of 2011'을 선정했습니다. 『Image&Issue』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부터 스티브 잡스의 죽음까지 올 한해를 뜨겁게 달군 이미지를 이미지비평가 이영준이 해부합니다. 폭발적이고 아름답고 위대했던 2011년을 이미지로 되돌아봅니다. 『Exhibition』은 큐레이터, 평론가, 언론인 등 59명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 한 해의 한국 전시 지형을 분석 평가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전시 문화의 다양한 층위를 보다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하기 위해 1)기획 컨셉트&주제 2) 작품성 3) 디스플레이 4) 학술&교육&도록 5) 홍보, 관객 호응 등 다섯 가지 평가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Book』에서는 올해 미술 관련 출판 지형도를 파악하고, 올해 출간된 미술 관련 서적에서 주목할 도서를 선정했습니다. 절제된 조형언어로 추상과 구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는 이상국의 작품세계,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와 일본의 대표적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도쿄까지 art 12월호에서 만나세요.

Contents

01    표지  이상국 <산동네> 종이에 혼합재료 54×78cm 1986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김복기

38    핫피플 로저 브뤼겔 2012부산비엔날레 총감독

42    프리즘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말하다  이인범
    부산미술의 파수꾼, ‘반디’ 폐관에 부쳐  이영준

46    오후의 아틀리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순간’  임현락

64    포커스
    노재운展|우순옥展  정현
    쇼 미 유어 헤어展|시티 위드인 더 시티展  강수미
    최진욱展|김지원展  이영욱
    불사조의 심장展  정연심

81    특집  Best of 2011
    [1] Image & Issue_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이우환의 작품까지  이영준  
    [2] Exhibition_전문가 59인의 베스트 전시 앙케트 분석  편집부
    [3] Book_올해의 미술출판 트렌드  정민영

122    WHO WE MET  이노코 토시유키  김수영  

125    작가 인터뷰  이상국
    뼛속에 꿈틀대는 풍경  김복기

138    암흑물질  페스티벌도쿄, 19금 퍼포먼스 릴레이  
    [1] 공연예술의 최전선, 재난의 카오스를 재현하다  서현석
    [2] ‘19분의 퍼포먼스’, 다원예술의 새 지평을 열다  김해주

148    BRAND NEW !
    Hyundai Card×MoMA  호경윤

150    이미지링크  염중호
    A Sad Comedy

156    특별기고  최종태 개인전 ‘구원의 모상’을 보고  
    구도의 조각  박희진    

160    전시리뷰
    새로운 발흥지|최인호|시월의 고백
    장태원|TV코뮨|손혜민    
    최기창|배종헌|박미나|제니조

170    전시 프리뷰  
    오픈 마인드|남도 묵향 내일을 가다|빛
    자독 벤 데이비드|칸디다 회퍼
    산허리 꼬부랑길|김근중

176    동방의 요괴들  2011 Best of Best
    [1] “요괴들의 미래, 지켜보겠습니다”  조은비
    [2] 도어즈 아트페어_동방의 요괴들 특별전  김재석

182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요괴들의 미래, 지켜보겠습니다”

전시 오프닝 전경 (앞)변상환 <무제>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1

“요괴들의 미래, 지켜보겠습니다”

글 | 조은비 · KT&G상상마당갤러리 큐레이터

얼마 전 TV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상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자작곡을 준비해 온 참가자는 지난해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해 악평 속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었고, 이번 재도전을 위해 1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 참가자의 열정적인 연주와 노래를 대중음악계에서 각자 권위를 갖고 있는 3명의 심사위원이 준엄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노래가 끝난 뒤, 제 각각 심사평이 이어졌고 탈락과 합격을 가르는 긴장된 순간, 심사위원의 “한 번 더 지켜보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참가자의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감격스러워 하는 참가자의 말과 표정에는 ‘절실함’이 묻어났다. 저이를 저토록 절실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나는 그것을 ‘인정 욕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능력 성공 생존’이라는 원리가 충실하게 작동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예술계의 구조는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술적 재능에 대한 평가나 판단 근거는 대체로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때문에 작가로서의 공식적인 승인은 공인된 제도나 권위 있는 전문가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질적 정서적 보상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척박한 현실에서, 제도적 승인 없이 예술가로서 활동을 지속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일 것이다.
나 역시 갤러리의 작가 공모를 진행하며 확인한 바지만,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제도의 인정을 받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한다. 각종 공모제의 홍수 속에서 선택과 배제의 원리는 예비 작가들에게 지속 가능한 작품 활동, 다시 말해 예술가로서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장치 같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술 공모전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빗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눈물을 터트린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참가자처럼 어떤 판에서 자신의 ‘몫’(기회)을 갖길 원하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이러한 ‘판’(시스템)을 조직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동방의 요괴들〉 역시 ‘발굴과 육성’이라는 구호 아래 공모전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여타 공모전과 일부분 차별성을 지닌다. 연초 공개 모집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동방의 요괴들>의 구성은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인 형식에서 출발한다. 지원자 전원에게 <동방의 요괴들>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매체에 노출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만, 이들이 1년 동안 진행되는 전시, 아트페어, 레지던시 프로그램,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각 행사마다 추가적인 선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시 연계 행사로 열린 특강(11월 9일, 12일)에 초청된 평론가 정현(작가 정연두도 초청됐다)

요괴들, 작품으로 그리는 ‘청춘’

KT&G상상마당갤러리에서 열린 〈2011 동방의 요괴들 Best of Best〉전은 연초 공모에서 경쟁을 뚫고 선발된 21명의 작가들을 위한 전시이다.(이번 전시엔 이들 중 17명의 작가만이 참여했다) 1부와 2부 전시로 나뉘어 선보인 작품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1부는 평면회화에서부터 영상 동양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되었고, 2부는 전반적으로 입체 작업이 집중되면서 그 시각적 풍부함이 공간에 잘 반영되었다. 무엇보다 KT&G상상마당갤러리의 노출 콘크리트 내벽과 그것이 주는 거친 분위기는 조금은 덜 다듬어진 요괴들의 작업과 제법 잘 어우러졌다.
전시 전반에 걸쳐 꿈이나 비현실과 같은 판타지적인 요소를 표현한 작품이 두드러졌는데, 현실 사회와의 관계에 허구적인 요소를 결합시키는 것은 젊은 작가들이 처한 불안정한 정서적 상황과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1부 참여 작가인 김웅현의 영상에는 대중매체에서 반복되어 온 일종의 클리셰가 등장한다. 작가는 판타지와 현실 세계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경계에서의 분열을 평지를 오르고 또 오르는 ‘헛짓’을 반복하여 드러낸다. 영상과 오브제, 슬라이드 사진을 이용해 공간을 구성한 작가의 의욕과 재기발랄함이 인상적이다.
‘청춘’이라는 두 글자를 네온사인 간판 위에 옮겨온 김다혜의 작품 <청춘>은 <구태의연한 풍경> 시리즈의 일부이다. 동양화로 그린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단어가 나열된 작품은, 그 단어가 지닌 친근하고 희망적인 의미를 걷어 내고 마치 생경한 풍경을 마주한 듯 당혹스럽고 낯설게 느껴진다. ‘청춘’이라는 상투어가 일으키는 생동적인 어감이 껄끄러워지는 것이다. 그 이물감은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불안과 혼란을 투영한다.
오브제의 변주를 통해 매체를 확장하는 작업들도 눈에 띄었다. 추수희는 알루미늄 포일과 비닐과 같은 연약한 재료 위에 바느질로 ‘드로잉’을 시도한다. 아직 흩어진 실들에 불과한 얼굴과 글자가 서로 연결되어 인물과 시대의 초상이 된다. 현실 정치를 둘러싼 다분히 편향적인 신문 기사 속의 말과 구호들은 실과 바늘에 의해 그 진실과 거짓의 양면성을 꼼짝없이 포박 당한다.
김대환은 아크릴 모양자의 형태를 이용하여 정교한 구조물을 만든다. 이제 거리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공중전화 박스를 형상화한 작품 <소셜 네트워크>에는 SNS를 상징하는 로고와 컴퓨터 아이콘 등 최근의 온라인 환경의 변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작가는 이러한 아이콘을 통해 시대적 변화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 기저에 깔린 체제의 규격화와 맹목성을 환기시킨다.
2부 참여 작가인 김규리의 회화 <빛드는 방>은 가구가 된 인물들의 모습을 희화화한다. 하나의 구조가 되어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인물의 둔한 동작과 표정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고단해 보인다. 온 몸으로 ‘구조’를 지탱하면서, 어느새 그 구조가 되어버린 인간의 모순을 드러낸다.
변상환은 사물에 대한 복원과 발굴을 시도한다. 전시장에 소박하게 놓인 돌덩어리들은 언뜻 보기에 희귀한 유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멘트 혹은 석고로 캐스팅한 돌 뼈다귀 호두과자 고무장갑과 같은 사소한 물건들이다. 용도 폐기된 오브제에 주목하여 그 쓰임과 물성을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사물에 숨겨진 의미를 회복한다.

강숙진 <Be Adrift> 캔버스에 유채 72.7×90.1cm 2011

요괴들의 힘찬 성장을 위하여

나는 이번 전시 진행을 가까이 지켜보고 일부분 함께 나누면서 젊은 작가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 이들에게서 의욕과 열정, 성실함과 함께 작가로서의 절실한 열망도 보았다. 해마다 많은 수의 미대 졸업생이 배출되지만 실상 이들이 어떠한 경로로 미술계 현장에 진입하고,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실제적인 정보는 부족하다. ‘예비 백수’이자 ‘예고된 비정규직’인 예비 작가들의 불안은 출구를 찾기 위해 각종 제도의 울타리로 쉽게 포섭되지만, 단순히 제도의 형식적인 틀을 갖춘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것이다.
〈동방의 요괴들〉이 ‘발굴’보다는 ‘성장’에 더욱 초점을 맞춘 신진작가 프로그램인 만큼, 수상 작가의 개인전 개최로 압축되는 여타 공모 제도의 획일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특히 지난 1년, 프로그램의 결과물로서 이번 전시에 출품한 신작들은(물론 작업의 변화와 성장을 1년이라는 시간으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지만) 연초의 공모 선정작에서 한 층 더 성장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동방의 요괴들〉 프로그램이 갖춘 여러 미덕에도 불구하고, 전시 자체는 작품에 대한 평면적인 배치와 구성을 보여 완결된 전시로서의 완성도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 해에는 전체적인 전시기획에 있어 작가들의 개성과 작업 맥락이 긴밀히 연결되어, 작가들에게 전시의 형식적 참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장은 크고 작은 경험 속에서 출현하는 다양한 계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선발된 소수의 ‘요괴들’뿐만 아니라, 응모 작가로서 한 해 동안 다양한 활동을 펼쳤을 모든 ‘요괴들’에게도 현재의 경험은 성장을 위한 의미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동방의 요괴들〉 역시 새로운 형태의 신진작가 발굴육성 프로그램으로서,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어 또 다른 성장의 발판을 다지길 희망한다. “요괴들의 미래, 지켜보겠습니다!”

왼쪽 최현석 <신묘년 구제역매장도(소의 역습)> 마에 수간채색 194×112cm(부분) 2011
오른쪽 김보남 <Stone Development> 나무 180×140×5cm(부분) 2011

공연예술의 최전선, 재난의 카오스를 재현하다

버드 파크 <침수 지역의 끊임없는 온기> (Photo: Fumiko Tsukada)

공연예술의 최전선, 재난의 카오스를 재현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도쿄

글|서현석·연세대 교수

플래시백 1: 쇼헤이 이마무라 감독 <간장선생>의 마지막 장면. 평생을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살아 온 한 섬마을 의사가 자신을 사모하는 여인과 뱃놀이를 간다. 느닷없이 바다 너머 제2의 태양이 뜬다. 이 이상한 무언가가 역사를 바꾸어 놓는 핵폭탄임을 그들은 알 길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는 암전된다.(사실 영화는 이 장면 직전까지 이야기의 배경이 1945년이라는 사실을 명시한 바가 없기에 이 붉은 빛은 관객에게조차 느닷없다.) 무지의 무게는 평생을 지켜 온 지성과 열정을 무색케 한다. ‘역사적 현실’은 피부와 감각을 점령하며 순식간에 일상으로 침투하지만, 여전히 몰이해 속에 머물 뿐이다.
플래시백 2: 3년 전 한국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오카다 도시키의 <3월의 5일>에서 두 남녀는 호텔 방에서 사랑이나 열정도 없이 돈이 떨어질 때까지 섹스만 하다가 헤어진다. 세상과 단절된 닷새를 지내고 밖으로 나오니, 미디어는 그 동안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음을 알린다. 물론 이를 알게 된다고 그들의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무기력의 무게는 욕망보다 크다.
공원에 입장하면 무대도 없는 공간에 멀찌감치 빈 의자가 관객의 수만큼 수십 개 무심하게 놓여 있다. 공연의 절정은 이 빈 의자들의 난데없는 퇴각으로 이루어진다. 예고도 없이 빈 의자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한꺼번에 한쪽으로 휩쓸려 가는 것이다. 그 초현실적인 광경의 섬뜩함은 몇 달 전의 재난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퍼들쩍 공포가 되어 증폭된다. 관객의 안일함을 후려치는 레퍼런스는 하나의 강렬한 역사적 현실이다. ‘쓰나미’ ‘후쿠시마’. 이번 페스티벌도쿄의 개막작인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I’라는 현상>은 이렇게 후쿠시마의 충격을 환상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재현한다. 프로이트의 통찰대로, 악몽을 반복하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생길 수 있을까?
이번 페스티벌에 따르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의 현재는 급박하다. 아니, 정말로 급박한 것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현재의 불안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점증한다. 어제의 여파가 내일 어떤 비극으로 확산되어 나타날 것인지 알 수 없는 초조함. 한술 더 떠, 머지않아 도쿄가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에 초토화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 20~30년 후에는 아예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두려움. 오늘의 일상이 언제든지 하루아침에 무(無)로 사멸할 수 있다는 가공할 진실. 삶의 무상함마저도 무색케 하는 파멸의 힘에 대한 무심한 공포. 무지에 의한 무기력. 절대적 무의미에 대한 절대적 무지. 역사는 ‘미디어 이벤트’임을 넘어섰다. 역사적 현실은 일상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쓰나미처럼. 그리고 피부를, 얼굴을, 정신을 강하게 후려친다. 무지의 무게를, 무기력의 무게를 극복할 힘이 필요한 때다. 후쿠시마 사태는 진행형이다. 아니, 모든 일본인에 있어서 정말로 그런 걸까?

미야자와 아키오 <토탈 리빙 1986-2011> ⓒNobuhiko Hikiji 연극의 배경은 국민 모두가 일본을 떠난 미래의 국가다.

후쿠시마 이후, 진행형의 악몽

올해 페스티벌도쿄의 슬로건은 후쿠시마의 충격을 예술의 중심으로, 기반으로 설정한다. 이에 따르면, 일본의 관객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허심탄회하고 거리낌 없는 대화다. 환상이 아닌 현실, 은유가 아닌 직설이 절실한 것이다. 올해 행사에서  특히나 자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의 스펙트럼을 가장 크게 넓힌 프로젝트는 타카야마 아키라의 <의견 조사>다. 기본 취지는 일본의 현 상황에 대한 청소년들의 의견을 묻는 인터뷰 영상을 제작, 사서화하는 것으로, 아카이브의 기능을 하는 장소는 트럭이다. 도쿄 전역을 이동하는 트럭 안에는 장차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만약 시장이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등 소박한 질문들에 대한 수십 명 청소년들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다. 단순한 질문들은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단면을 보여 준다. 관객이 입장하여 정리된 인터뷰 영상을 열람할 수 있는 이 트럭의 예정된 최종 전시 장소는 후쿠시마다.
이러한 직설의 전략과 균형을 이루는 작품군은 무대의 환영성을 담보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젊은 연출가들의 ‘연극’ 작품들이다. 이들에서 쉬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어두운 미래상이나 일상을 벗어난 암울한 대체 현실이다. 무대의 대안적 현실은 오늘의 불확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젊은 유망주들의 연극적 비전이 형식적인 변혁이나 전복적인 태도보다는 현실에 대한 주제 의식을 소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 역시 후쿠시마의 여파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어떤 조형적 작가적 구성적 완성도를 배제하고 직설의 정치학을 펼친 <의견 조사>가 무대 밖의 공간으로 소통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면, 전통 연극의 관습적 장소가 제공하는 기본 조건은 말의 내용에 집중하게 해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보호된 직설의 장이랄까. 관습과 직설은 역사적 현실의 빙의를 공모한다.
미야자와 아키오의 <토탈 리빙>은 모두가 일본을 떠나 이민자가 다수를 형성하게 된 미래의 새로운 국가상을 그리며 재현 체계의 실타래를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오카자키 극단의 <반구형의 적과 흑>은 일본과 체르노빌을 비교하며 두서도 없고 결론도 없는 이야기의 파편들 속에서 ‘혜안’의 실마리를 찾아 쳇바퀴를 돈다. 버드파크 극단의 <침수 지역의 끊임없는 온기>는 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가상적 세계 속에서 한 작은 공동체가 죽음의 징조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차갑게 묘사한다. 암울하다.
이들의 허구적 현실에서는 세상의 논리가 살짝 뒤틀린 채로 반영된다. 창밖으로 몸을 던진 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고, 동물과 사람의 구분이 엇갈리기도 한다. 인물과 배우의 간극이 엉겁결에 벌려지며 무대 현실의 견고함이 와해되는 건 예사다. 환영을 유지시키는 기제들은 불안하게 진동하지만, 그렇다고 브레히트식 거리두기로 관객의 현실 감각이 예리해지리라는 공식이 전제되는 것은 아니다. ‘후쿠시마’라는 현실은 거리두기 장치로 더 이상 생경해질 수도 없는 게다. 도리어 브레히트의 쇠약한 유령이 깨진 현실의 틈에서 정육점의 고기처럼 아른거리며 현실의 불균질성에 대한 힘 없는 조소를 자아낸다. 비판적 거리를 두자니 허구의 무게가 무겁고, 무대 위의 논리에 동조하자니 그 조직이 너무 거칠다. 무대의 관습은 혼란의 과잉을 전달하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피첨 극단의 <부활>은 아날로그 방송의 종료에 따라 전파 송신의 기능과 함께 전후 재건의 상징성을 잃게 된 도쿄타워 앞 공원에서 후쿠시마의 치명적 상흔을 곱씹는다. 과거형의 영예는 현재의 어두움에 대한 대립적 역설이 된다. 장소특정적 연극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복원을 위한 국가적, 조직적 노력에는 제국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갑자기 체감되는 자위대의 존재감, “힘내자, 일본!”이라는 슬로건 등 공동체 의식의 복원을 염원하는 범국가적 노력이 편하게 다가오지만은 않은가보다. 응집의 호소는 그만큼 전제적 수사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언급한 ‘연극’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균질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 여정은 개인적 역량으로 극복할 만한 순탄한 것이 아니다. 해결책은 늘 자아의 외부 어디엔가에서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아른거린다. 과거로부터 영예의 흔적을 복구해 보려는 애달픈 노력은 그 무언가의 총체적인 힘에 의해 단호하게 좌절된다. 과거는 오히려 현실의 부조리를 들추는 유령이 되어 그들을 괴롭히기만 할 뿐이다. 이를테면 <부활>에서는 후쿠시마에 남겨진 반려견들이 언급되고, 여기에 1957년 남극 탐험이 실패로 돌아가며 현지에 버려두고 온 개들의 혼령을 불러일으킨다. 이 공연이 이 때 살아남은 두 마리의 허스키 ‘타로’와 ‘지로’의 동상이 있는 도쿄타워 앞에서 이루어지면서 이런 불편한 과거사의 재림은 불가피해진다.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되는 불안의 무게를 현재형으로 환산한다.
체르노빌. 히로시마. 도쿄타워. 디지털 방송. 남극 탐험. 프란다스의 개. 자위대. 욱일승천기. 이주민. 정신분열. 자살.
트라우마는 온갖 기표들을 동원한다. 그것의 이해를 위한 작은 지푸라기 단서들로써 말이다. 아니, 주변의 모든 기표들이 하나의 트라우마를 지시하기 시작한다. 서로 상관 없는 이 기표들은 공공연한 관계의 망을 형성한다. 이 망은 궁극적으로 거대한 질문을 잠재울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마츠모토 유키치 <랜드스케이프-도쿄, 이케부쿠로> ⓒYoshikazu Inoue

예술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역사적 파장이 예술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까? 1960년대의 대안적 예술이 역사를 직시하며 변혁과 전복의 무한한 가능성을 연 것처럼, 후쿠시마 사태는 예술적 혁신을 위한 자극제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일본 아방가르드의 전성기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예술적 변혁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첨예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역사와 예술은 서로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오늘의 급박함 속에서 대화와 소통의 필요성 아래 왜소하게 잠자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보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시급한 것이다. 아직 충격은 진행형이기 때문에.
우연이 아니게도 무대 언어의 조직을 가장 과감하게 풀어 헤치는 것은 오늘의 젊은 유망주들이 아니라 현대 공연예술의 살아 있는 전설들이다.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제롬 벨의 2001년 작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가 일본 출연자들에 의해 개작되었고, 유럽 아방가르드 연극의 선구자 르네 폴레쉬의 최근작 <시네시타 아페르타 2부>가 초청되었다. 무용과 연극의 기반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고전’의 형태로 배치된 셈이다. 그만큼 기존의 미학적 장치를 배편성하는 것에는 조심스럽다.
후쿠시마와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이 ‘대가’들의 작품들 외에도, 초청 공모 공동제작으로 나뉘는 26편 작품의 대부분은 후쿠시마와 무관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공모 프로그램에는 정금형의 <유압진동기>와 김재덕의 <awake> 등 아시아 유망주들의 기존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이들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거대한 질문은 통합적 주제가 아니라 담론적 맥락이 된다. 후쿠시마는 피해갈 수 없는 대기층이 되어 모든 작품에 빙의한다. 후쿠시마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작품이 어쩌면 후쿠시마에 대해, 위기에 대해, 불안에 대해, 애국심에 대해, 시대에 대해, 더 날카로운 통찰을 가질 수도 있다. 주제와 이탈의 간극이 흥미로운 것은 이방인의 관점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페스티벌의 가장 큰 파격을 발견할 수 있는 오묘한 지점은 역시 후쿠시마와도 관계 없고 예술에 대한 모더니즘적인 성찰과도 무관한 작품이다. 예술적 형식에 대한 질문은 공교롭게도 ‘예술성’이나 ‘문제 의식’을 지향함에 있어서 가장 무색한 작품에서 하나의 역설로 엎질러진다.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질문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한 편의 문제작에서 현기증 나는 미로로 떨어진다. 〈순수한 바나나 여학생반〉이 그 주인공이다.  
오늘날 일본의 공연계에서 가장 ‘튀는’ 극단으로, 〈순수한 바나나 여학생반〉이라는 콜렉티브, 아니 팬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는 20대 초반의 ‘오타쿠’ 니카이도우 토우코가 이끄는 공연/유희 집단으로, 이번 페스티벌에 소개된 기존 작품 <BANAG AKU★☆Super Spunky Sports Autumn Grand Tournament!!!!!>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연은 한 마디로 생지랄 난장판이다. 그나마 점잖은 언어로 포장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소극장의 작은 무대를 점령하는 50여 명의 퍼포머는 거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빠른 템포의 대중음악에 맞추어 집단 무용/율동을 하고 있거나, 집단 성교를 연기하거나, 극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관객을 농락하거나, 자기들끼리 뭔가를 주고받거나, 그것도 아니면 극장 구석 어디에선가 홀로만의 행위에 몰입해 있다. 주된 의상은 교복이지만, 코스프레를 위함직한 괴짜 의상 혹은 땀범벅의 반나체에 섞인 규범적 복장은 일찌감치 일탈의 코드로 둔갑한다.(‘여학생반’의 남학생들도 대부분 치마를 입고 있다) 출력이 낮은 싸구려 스피커를 찢을 기세로 터져 나오는 음악은 차라리 소음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들이 휩쓸고 가는 무대는 순식간에 페인트, 옷가지, 야채와 과일 부스러기, 온갖 소품 나부랭이로 아수라장이 된다. 객석이라고 다를 건 없다. ‘미친 바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뿌려 대는 물과 땀 페인트 야채 소품들은 극장을 엉터리 요리에 흡사한 쓰레기터로 전락시킨다. 정신 없는 와중에, 관객의 무릎에 앉거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기념품을 선사하는 등 일일이 알아채기도 힘든 즉흥적인 교류가 쉴 틈 없이 난무한다. 여기에 안무 소품 세트 캐릭터 상의 각종 클리셰들이 가세하며 공연장 전체는 이름 없는 범벅이 된다. 연극적 숭고미는 시끄러운 열병으로 대체된다. 끈끈이로 보행로를 청소할 만큼 청결한 도쿄 중심에서 이런 쓰레기더미를 극장에서 만날 줄이야.

정금형 <유압진동기> (Photo: Gajin Kim)
아시아 이머징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한국 작가 정금형 김재덕의 작품이 공연됐다.

혼란과 무질서에 숨은 역설

하지만 시간의 축을 뒤흔드는 듯한 무질서의 파열을 작동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무자비한 방종이 아니라 정제된 질서다. 엄청난 난장을 지탱하는 것은 정확성과 일사불란함이다. 작은 무대를 수십 명이 점령하고 온갖 ‘광기’나 ‘파행’이나 ‘추태’를 전람해도, 그 와중에 정교한 연출력과 견고한 통제의 힘이 드러난다. 일탈적 신체들이 과감히 실행하는 것은 파괴적 카오스가 아니라, 놀랍도록, 무섭도록 정확하고 정교한 조직의 결인 것이다. 난장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은 맞물림의 연속이다. 관객을 혼란에 던져 넣는 실체는 미친 열기가 아니라 견실한 약속이다. 이러한 역설이 설파하는 바가 아방가르드의 갱생인지 죽음인지는 알 수 없다.
수개월의 연습을 통해서나 가능할 이 정확성의 원천은, 놀랍게도 앙상블의 소속감이 아니라 파트타이머들의 일시적인 자발성이다. 극장을 뒤엎는 수십 명의 퍼포머들은 전문적인 ‘전속 단원’들이 아니라, 오로지 무대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순수한 바나나 여학생반〉의 ‘팬’들, 즉 ‘오타쿠’들이다. 출연료도 받지 않고 열정을 열망하며 무대에 선 이들에게 있어서, 이 집단 행위는 관객을 위한 ‘공연’이기 전에 스스로를 위한 일탈적 분출구다. 외부인에게 있어서는 ‘공연’이기 이전에 하나의 흥미로운 사회학적, 인류학적 현상인 셈이다. 양적으로 보자면, 미시마 유키오의 사립군대보다도 훨씬 많은 신봉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행동대다.
이 엄청난 오타쿠들의 결집 속에서, 질서는 가히 무질서보다 파괴적인 힘이 된다. 지난 세대 오타쿠의 폐쇄적인 개인주의가 아닌 광적인 집단주의가 무대를 점령하며, 일체감의 헤게모니가 오열처럼 극장에 흩뿌려진다. 교복과 군복, 대규모 집단 율동은 파시즘적인 균질성을 발산함에 서슴없다.
“자위대 파일럿 모집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균질성은 무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엉터리 현수막 따위를 통해 그 실체를 광고하는 척한다. 이에 반응하듯, 두서없이 춤만 추던 ‘학생’들은 관객을 향해 줄을 지어 경례를 하며 ‘애국’의 의지를 연기한다. 미친 무모함과 공동체 의식이, 이드와 수퍼에고가, 어이없이 하나가 된다. 무의식을 점령하는 이 논리 없는 수사, 불화 없는 획일성은 애초부터 카니발의 광기를 한 줄로 꿰고 있었던 게다.
그러나 〈순수한 바나나 여학생반〉의 학생들이 모조리 자위대에 입대한다는 이야기의 바닥에 도사리는 것은 맹목적의 애국심이 아니라 맹목적성 그 자체다. 밑도 끝도 없는 허무맹랑함이다. 이 이상한 광경에는 선동의 작은 의도조차 없다. 그 어떤 인간적, 집단적 목적 의식도 없다. <관객 모독>을 자폐적인 푸념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격렬함에는 ‘모독’의 의지조차 결격되어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자위대’란 오카다의 이라크 전쟁보다도 추상적인 기표일 뿐이다. 〈순수한 바나나 여학생반〉의 ‘반장’ 토우코가 드러내듯, 무대 위의 모든 기표는 텅 비어 있다. 극장은 더 이상 정치적 담론의 장이 아니다. 파시즘의 증후군이 되었건, 억눌린 열정의 제의적 분출이 되었건, 혹은 사회 규범에 대한 전복이 되었건, 이들의 거친 몸짓에 대한 그 어떤 ‘해독’이던 간에 모조리 하나의 거대한 공백에 휩쓸리고 만다. 알레고리는 없다. 이 광활한 하수구멍에 흥분은 가득하되 명분은 없으며, 광기는 충만하되 동기는 없다.(이 구멍에게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운명을 묻는 것은 진부한 바보짓이 되고 만다.) 규범을 뒤흔들지만, 그 떨림에 자유나 해방을 위한 이념은 물론 없으며,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그 근원은 지독하게 공허하기만 하다. 공허감마저 흡수하는 그런 공허. 파격도 없고, 주이상스도 허용치 않는 공허. 거대한 일탈의 파장을 무모하게 방출하는 빅뱅이자, 모든 의미와 의지를 흡수하는 블랙홀. 무위의 폭력, 무지의 폭풍이다. 한마디로 무의미의 쓰나미다.
결핍은 과장하면 할수록 증대한다. 그들이 탐닉하는 것은 어쩌면 열정과 통합의 감흥이 아니라 이 결핍의 위대함이다. 결핍의 무게는 욕망보다 크다. 이 결핍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늘에 뜬 두 번째 태양과 그것이 비추는 거대한 몰이해의 광기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앎의 의지가 아니라 미친 춤이다. 아니, 미친 춤은 두 번째 태양과 그것이 던지는 파격을 동물처럼 미리부터 예견하고 있었던 게다. 아니, 정말로 그랬던 걸까? 이 토끼굴 속의 요지경에서 나와 보니,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 미디어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바다 너머 멀리서 바라보는 새로운 역사의 파장은 여전히 몰이해 속에 놓여 있다.

인식의 경계를 어슴푸레 긋다

우순옥 <12편의 신기루> 영상설치 2011

인식의 경계를 어슴푸레 긋다

글|정 현

예술가에게 인식이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호기심이다. 그것은 과학자나 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일 것이다. 인식적 물음은 잠든 무의식을 깨우지만, 그렇다고 의식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시 알아내야 할 것 사이에 서 있는 창작자에게 인식적 물음이란 세계에 관한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짐짓 관념적이고 시학적인 관조처럼 들리는 이 행위는 사실 창작자에게는 고통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에게 작업이란 꼬리를 무는 물음의 사색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뒷짐을 진 채 세상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다.
동시대미술이 소비와 오락으로 치우치고 있는 가운데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의미가 과거에 비해 퇴색된 것이 사실이지만, 전시를 경험하는 시간이 꼭 소비를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간은 현실과 다른 세계, 다른 공간을 체험하는 ‘시간 밖의 시간’이자 물리적 시간 안에서 길러 낸 ‘시간 안의 시간’이기도 하니까. 우순옥의 <잠시 동안의 드로잉>은 문화 활동마저 생존의 목적에 따른 요구라고 강조하는 생산적 시간에서 조금 비껴난 사색의 시간으로 초대한다. 이처럼 비껴난 시간에 (우연히) 초대된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낯섦’은 인식을 위한 통과의례이니까. 이제 여러분 역시 인식의 경계를 어슴푸레하게나마 다시 그어볼 시간과 마주한 것이다. 한편 노재운의 <목련아, 목련아>는 장르 영화적 상상력으로 생산된 영화적 시공간을 재해석한 ‘혼성적 시공간’을 제안한다. 그의 어두운 시공간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마치 조립완구키트의 포장을 열었을 때의 감정과 유사할 것 같다. 모든 조립완구에 그만의 질서가 있는 것처럼 노재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인 관객에서 나아가 스스로 조립완구를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순옥 <잠시 동안의 드로잉_그 곁> 석고 형태 30×15cm

시간 밖으로 미끄러지기

우순옥에게 작업이란 빛을 찾는 과정이자 빛을 매개로 교감의 경험을 나누려는 시간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빛은 사상을 품고 있는 거대한 서사를 위한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에게 ‘빛’이란 재료는 역사 이전부터 존재하는 진리이자 아직까지 그 고유성을 지키는 귀한 대상이다. 그에게 빛의 가치란 생명에 대한 경애이며 예찬이고 잃어버리고 잊혀진 것들을 다시 불러오려는 몸짓이다. <잠시 동안의 드로잉>은 언어와 이미지, 사물과 기억, 공간과 움직임 그리고 빛과 온도에 관한 전시다. 전시는 차가움으로 시작된다. LED 텍스트 작업 <우리는 모두 여행자>가 관객을 맞는다. 바로 왼쪽 벽 위에 스스로 공전하는 시퍼런 달 <그곳>이 떠 있다. 이 여행이 시간 밖의 시간을 향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시간 밖의 시간이란 과거-현재-미래의 연대기적 방향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형광등을 단 <커플 트리> 두 그루가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비디오 설치 작업 <12편의 신기루>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펼쳐진다. 작가가 평소 즐겨 보던 영화 중 12편에서 발췌한 일부 장면을 반복 편집한 영상이 자신만의 공간에 놓이고 그 사이로 소박한 화분들이 모니터 주변에 자리 잡는다. 이제 빛은 기억을 담는다. 12편의 영화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하는 과정을 장면으로 옮긴 생명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멀게는 장 콕토의 <시인의 피>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 이르는 이 영화적 여정은 12편의 이미지와 소리(말)의 섞임에 의해 낯설면서도 익숙한 설명할 수 없는 정감을 만들어 낸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12편의 신기루>는 나지막이 생명이란 시간의 불가역성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하지만 예술은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저항하는 시적인 몸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듯 이 기억의 정원에 초대된 사람들은 영화와 영화 사이,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맴돌게 된다.
12편의 영화적 여정 중에서 유독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의 발췌된 장면은 내게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5권 《갇힌 여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는데, 욕망에 관한 심리적 불안감과 모호함을 다루는 장으로서 자아와 또 다른 자아 사이의 심리적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다. 우순옥은 <갇힌 여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목욕 장면(남자가 욕조에 있고 욕조 옆의 불투명 유리로 된 벽 건너편에는 여자가 샤워를 하고 있다)을 발췌한 후, 이 장면에서 뒤샹의 <큰 유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영화 속 장면처럼 결코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없는 남과 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은 그저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애무하는 행위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프루스트의 원작 속 인물들의 관계가 가진 모호성이 애커만의 영화에서 다시 우순옥의 관점으로 이동하는 연속적 탈주선이다. 프루스트가 창조한 인물 알베르는 프루스트 자신의 반영이었고, 여자 알베르틴은 알베르의 반영이었다. <갇힌 여인>의 여주인공 아리안(ARiANE)은 애커만(AkERmAN)의 반영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마르셀 뒤샹의 이름(MAR-CEL)에서 신부(MARiee)와 독신자(CELibataire)로 파생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프루스트에서 애커만으로, 이어서 뒤샹에서 우순옥으로 이어지는 이 여정의 상상력은 연속적으로 탈주선을 타고 이행한다. 우순옥의 작업에서 이와 같은 이행의 탈주선은 언어와 이미지, 이미지와 조형 작업 그리고 공간과의 조우로 끊임없이 상호적으로 이어진다. 관객은 우순옥의 세계 안에서 어쩌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묻는 것, 시간과 공간의 심리적 위상을 되묻는 것이야말로 인식의 첫 걸음이니까.

노재운 <목련아 목련아>전 전경

시간에 관해 다시 묻기

노재운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자신만의 조형 언어와 구조를 실험하는 작가다. 그는 설치작업이란 용어 대신 ‘인터페이스’란 개념을 적용하는데, 이 개념은 크게 두 가지의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는 전통적 미술 개념에서의 완성이 아닌 매개체로서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디지털시대에서의 인식의 태도를 지시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물리적 시공간 대신에 정보를 수집해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에 인터페이스란 동시대적인 인식의 구조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재운의 조형 작업은 쉽사리 읽히거나 미학적인 총체적 쾌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의 세계는 영화적 상상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영화의 도상학적 재해석이 아닌 영화라는 허구적 시공간의 시스템을 분석하고 이를 자신만의 조형 언어 문법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목련아, 목련아>는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의도적으로 키치적인 느낌을 부여한 듯한 이 제목에서 서글픈 초봄의 목련꽃을 연상한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목련은 불교 경전 《목련경》에서 따온 것으로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는 목련존자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지옥의 공간은 어떠할까? 사실 전시에서 곧바로 지옥을 연상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는 지옥을 재현하지 않고 지옥을 재현했던 1960~70년대 고전 아시아 공포영화를 참조했다. 재현의 전통을 따르는 헐리우드 영화의 지옥 대신 그가 참조한 동양영화 속 지옥은 묘사보다 심리적 상태를 주목한다. 작가는 이런 표현의 차이를 불교 또는 유교적 가치관의 반영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노재운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조형 언어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프레임 사이즈인데, 이는 영상을 담는 구조(특히 필름의 크기와 화면을 잡는 앵글)가 본질적으로 지역의 문화적 가치관에 따라 프레이밍의 차이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본생경>은 지옥에서 죄를 비추는 거울 ‘업경’의 개념을 100년의 영화사에서 명멸한 프레임 사이즈를 자신을 비추는 붉은 빛의 거울로 공간화한 작업이다. 여기서 프레임 사이즈는 문화적 시공간의 차이가 생산한 인식의 틀의 형태일 것이다. 그의 인터페이스는 들뢰즈가 말한 쁠랑(Plan)에 관한 해석처럼 영화적 화면의 지리 정치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며, 동시에 영상의 본질인 이미지의 움직임과 소리의 역학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이다.

노재운 <산고리_뇌사경 시리즈> 2011

뼛속에 꿈틀대는 풍경

<홍제동에서 Ⅰ> 캔버스에 유채 324.4×130.3cm 1990

뼛속에 꿈틀대는 풍경

글 | 김복기·발행인 겸 편집인

1) 2011년 4월 3일 일요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한 달 동안 열린 이상국 개인전이 마감되는 날이었다. 나는 막 잡지를 내고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전시장으로 내처 달렸다. 워낙 오랜만에 열리는 개인전인 데다, 작가가 몇 년간 암 투병 중이어서 꼭 얼굴을 내밀어야 도리였다. 나는 이상국의 멀쩡한 듯 환한 얼굴을 대하고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시는 대학 졸업 때부터 최근까지 40년간의 작품이 망라된 회고전이었다. 나는 이미 몇 달 전 그의 화실에서 전시 작품을 일별한 바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작품에 액자를 새로 끼우는 등 자신의 유산을 정성스레 단장하고 있었다. 그날 그는 이런 말을 불쑥 던졌다. “이제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거야.”
2) 올해 8월의 일이다. 나는 대구미술협회로부터 제12회 이인성미술상 후보작가 추천 의뢰를 받고 다음과 같은 추천서를 보냈다.
화가 이상국. 그는 오로지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는 전업작가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주변의 소박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과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 왔다. 산동네, 공장지대, 이웃들에는 삶의 희로애락을, 산과 나무에는 풋풋한 한국적 미감을 담아냈다. 양식적으로는 구상에서 출발해 대상을 해체, 재구성하는 추상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또한 이상국은 목판화에서도 독자의 경지를 이룩해 냈다.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등 그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균형 감각이야말로 이 작가의 크나큰 미덕이다. (…)작가의 공적(功績)은 예술적 업적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이상국의 작품 외적인 공적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거꾸로 보면 작가로서 크나큰 공적이 아닐 수 없다.
3) 1979년 《계간미술》 여름호. 김윤수는 〈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라는 특집기사에 이상국을 뽑았다. 그는 추천의 변을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적인 것, 전통의 계승이라는 것을 말로만 외치고 외면적인 데서 찾는 경우와는 달리 그는 그 내면 속에 파고들어 그 본성을 파악하고 형상화하려 한다. 그것이 아직은 미흡하나 그 가능성은 어디서나 엿보인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런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얼마만큼 성공을 거둘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이상국 예술은 어떻게 흘러 왔고, 어디까지 왔는가.

<모하비의 산> 목판 위에 유채 34×17cm 1998
<산 4322-Ⅰ> 캔버스에 유채 219×61cm 1989

병마를 이겨낸 회고전, 이인성미술상 수상

art 이상국은 지난달에 제12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다. 나는 미술상이 창작 활동에 대한 격려와 분발의 모티베이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가 이상국에게 수상의 의미는 어떠했을까?
이상국 그동안 상이란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해 왔다. 수상이 현실이 된 만큼 앞으로 시간이 지나가 봐야 알겠지만, ‘이제 조금은 외롭지 않겠다’, 생각했다. 나는 대구에서 시상식 날 이렇게 소감을 얘기했다. “솔직히 저는 상을 받는 것을 보기만 해 와서, 과연 상이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제가 이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지금까지 역대 수상자 면면을 보면 이인성미술상, 아주 좋은 상, 꽤 괜찮은 상이라고 기뻐하시더군요. 아직도 이렇게 큰 상을 받는 데는 실감이 나지 않고 다소간 송구스럽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까지 화단이나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고,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거의 모든 것을 피해 왔습니다. 이렇다 할 공적도 없는데 상이라니, 과분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인성미술상이 이제까지 살아온 저의 삶과 그림 세계에 대한 일정한 평가라 생각하고, 또 앞으로 더욱 정진하라는 격려로 알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를 오늘에 있게 해 주신 이철이(李哲伊) 선생님, 저의 정신을 살찌게 해 주시고 용기를 주신 김병기(金秉騏)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art 가나아트센터에서 2000년 이후 10여 년 만에 유화 전시를 열었다. 12회 개인전이다.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을 선보인 회고전 성격의 전시였다. 이 개인전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상국 4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처음에 의사 소견은 간암이었다. 주치의가 “운명이라 생각하라”고 했다. 뭐, 섭섭하긴 했지만 그저 그랬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죽음이라니…, 그 후 보름 정도의 정밀 검사 끝에 대장암으로 판명났다. 그때 주치의 말씀이 “여생이 있겠다”고 했다. 지금 나는 그 여생을 사는거다. 죽음 앞에서 나를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는 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을 정리해 보자. 훼손된 것을 고치고 새로운 시각으로 옛 작품을 보완해 보기도 했다. 다행히 그러고도 새로운 작품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올해 개인전이 나의 전부를 보여준 회고전이라기에는 좀 뭐한 점이 많다. 내 손을 떠난 작품도 있고, 70년대 초 대학을 갓 졸업하고 방황하던 때의 작품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그간의 작품을 총정리한 화집도 만들고 싶었다.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뭔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art 개인전 카탈로그에는 미국에 계시는 원로 김병기 화백의 서문이 실려 있다. 새로운 비평문을 싣지 않고 이 짧은 글을 얼굴처럼 실었다. 이상국은 전시를 중비하면서 나에게 이 글을 미리 보여 주었다. 나는 아주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망백(望百)의 노화가, 그가 제자에게 전하는 우렁찬 목소리와 꼿꼿한 자태가 문장의 행간에서 우러났다. 이런 구절이 있다. “가슴으로 보라는 말이 있다. 눈이 아니고 가슴이라 함은 마음으로 보란 말이다. 이상국은 가슴의 화가다. 가슴으로 봐야 그가 보인다. 특히 그가 의도하는 현실성의 반영이 보인다. (…)추상과 구상의 조화, 우리들 현실 인식의 분열을 넘어.”
이상국 작가 생활 중에 나의 가장 중요한 멘토는 중학교 때의 이철이 선생님과 고등학교 시절의 김병기 선생님이시다. 지금도 김병기 선생님의 미론(美論)과 미술사 강의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선생님은 나에게 참 예술가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셨다. 1966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분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셨다. 그 20년 후에 서울에서 몇 년간 다시 뵈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선생님의 글은 단문이지만 사흘 밤을 새워 쓰신 것이다. 그 원고를 나에게 넘겨주시면서 멀리 미국에서 세 시간 이상 전화로 그 내용을 설파해 주셨다. “이상국이는 이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나무 4327-Y Ⅱ> 나무판에 유채 162×130cm 1994

한국적인 것, 전통에서 자양분을 길러 내다

art 이상국은 원래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선후배 중에는 동양화가들이 많아서 이들과 함께 스케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오늘날 동양화냐 서양화냐 하는 장르 구분은 진부한 논란이지만, 젊은 미술학도 이상국에게 전공 선택은 아주 민감한 문제였을 터이다.
이상국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떻게 좋은 그림을 그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찍이 이철이 선생께서는 소위 말하는 동양화/서양화의 개념 틀 없이 작품을 하셨다. 기름으로 캔버스에 그리기도 하셨고, 한지에 채색과 필묵을 사용하시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릴 때부터 재료 사용의 문제에 상당히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 3학년에 올라갈 때 동양화 서양화 중 하나를 전공으로 선택해야 했다. 나는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본질적으로 전통을 제대로 체득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동양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졸업 후 나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 왔다. 나는 동양화가도 아니고 서양화가도 아니다. 그냥 화가다.
art 이상국의 작품을 다시 보라! 초기 작품부터 줄기차게 작품을 지배하는 양식의 골격, 저 꿈틀대는 검은 윤곽선을 보라! 그것은 기(에너지)가 넘치는 수묵의 필선, 동양화의 문법을 유화로 번안한 것이 아닌가. 간결하면서도 힘찬 칼맛이 돋보이는 흑백 목판화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확실히 서구의 조형어법과는 달리 동양적이랄까, 한국적인 미감이 우러난다. 그는 이 전통의 자양분을 어디에서 길러온 것일까?
이상국 젊었을 때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읽고 쓸 자료도 없었고, 이렇다 할 교훈거리를 배울 만한 기회도 없었다. 그때 내가 감동을 받았던 것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서문》과 만해 한용운의 《불교유신론》, 동주 이용희의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었다. 그림이란 나를 찾는 일이었고, 나를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전통이건 모던이건 전후위(前後衛)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으며,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 그 표현에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나 현실도, 새로운 자연에 대한 느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art 이상국은 197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1977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 1978, 79년에는 ‘6인전’(회원은 권순철 김정헌 오수환 원승덕 이상국 최상철)이라는 그룹 활동을 펼쳐 나갔다. 미술잡지에 ‘주목받는 신예작가’ 혹은 ‘새로운 구상작가’라는 이름으로 뽑혀 서서히 화단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1970년대의 한국미술은 이른바 단색화로 대표되는 현대주의 미술이 화단을 강력하게 지배했다. 1970년대 말부터는 극사실주의 회화의 대두와 함께 형상미술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미술계는‘80년대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시간을 헤쳐나간 이상국의 지적 풍경을 더듬어 보고 싶다.
이상국 나는 이미 전위미술-단색화, 인간성 배제, 동시대성, 행위미술, 팝아트, 옵아트 등-에 식상해 동양화를 선택했고, 주변 현실 풍경에 관심을 두게 됐다. 유신정권 때 ‘한국적 민주주의’란 걸 내걸었지만, 내 젊은 시절은 한국적 미의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탈춤, 민화, 진경산수, 둔황 벽화, 고구려 벽화, 독일 표현주의에 관심을 뒀다. 대학 시절부터 남사당놀이, 탈춤, 판소리 등의 연희 모임에 자주 어울렸다. 김윤수 선생은 그때부터 만난 사이다. 젊었을 때 김선생은 우리들의 멘토였고 리더였다. 또한 백낙청의 《민족주의란 무엇인가》《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의 창비신서, 디트리히 본 회퍼 등의 기독교 사상사, 세계문화사, 사회사 등을 통독했고, 이 시기에 〈영정조 시대 실학사상이 회화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도 썼다.
art 이상국은 1970년대 말 <홍동지> <허재비> <맹인 부부 가수>를 거쳐 1980년대 초 <어머니> <서커스 여인> <벌서는 아이> 등 인물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1980년대에 유독 인물 그림이 집중되어 있다. 그의 인물 그림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그 형상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거나 절규하듯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상국은 따스한 연민의 시선으로 인간 영혼을 어루만졌던 루오의 표현주의 작품처럼 이 암울했던 시대의 사회, 현실, 인간, 삶을 그려냈다. 거기에는 분노의 눈으로 현실을 고발하고, 고독과 외로움을 함께 기대고 나누는 ‘민중 정서’가 녹아 있었다.
이상국 유신시대, 5공시대는 인간의 삶이 무참히 짓밟히고 인권이 탄압받던 암흑의 시대였다. 시대적인 아픔은 인간의 형상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art 이 무렵 ‘현실과 발언’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현실과 발언’은 1979년 겨울에 창립되어 1980년 창립전을 치르면서 관의 탄압으로 ‘촛불 전시’를 여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후 ‘현실과 발언’은 80년대 민중미술의 좌표를 제시하고 이끌어간 주축 세력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상국은 ‘현실과 발언’의 창립멤버였다. 그러나 그는 이 그룹에서 결국 탈퇴했다. 이상국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집단적 미술운동보다는 개인 작업에 치중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상국은 여러 사람과 섞이기보다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토론과 대화보다는 사색과 글쓰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그는 외톨이의 삶을 스스로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이상국 삶의 태도와 미술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나는 ‘현실과 발언’을 떠났다. 나는 화가이지 운동가는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다. ‘현실과 발언’을 떠나면서 화단에서의 일정한 소외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괴롭고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보상도 있었다. 구호가 아니라 소화된 현실로서의 표현,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여유, 권력에 아부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등…
art 1989년에는 미술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변신했다. 1990년대 초, 미술 경기가 제법 좋았을 때다. 어느 재일교포 컬렉터에게 이상국의 작품을 소개했더니, 그가 곧바로 이상국의 작업실에 들러 작품 2점을 구입했다.(이 작품은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으로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그는 서울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었다.
이상국 오래 근무했던 보성학교가 89년에 올림픽촌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생활 근거지가 완전히 바뀌었다.우선은 여기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내가 직장을 갖고 있어 쉽게 결단할 수 있었다. 에히리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에서 나는 존재를 선택한 셈이다. 명실공히 화가가 직업이 되었으니 열심히 작업했다. 특별히 불편하거나 심심한 적은 없었다.

<벌서는 아이 Ⅱ> 마포에 혼합재료 61×90cm 1985

인물에서 풍경으로, 구축에서 해체로

art 이상국은 일찍부터 풍경을 즐겨 그렸다. 1970년대부터 공장지대, 산동네 등 도시 풍경과 산 그림을 발표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인물 그림은 거의 중단하고 풍경에 더욱 몰입했다. 특히 초기의 풍경은 유독 작은 집들이 닥지닥지 모여 있는 달동네 풍경이 많다. 고단한 민초들의 생활상을 건강한 현실로 불러내는 애정어린 시선이 묻어나는 작품이다.(1990년 전후에 나는 이상국과 홍은동 작업실에서 자주 만났다. 그의 스승 이철이 선생이 연결고리였다. 나는 작고작가 이철이를 미술잡지에 발굴기사로 실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족은 작은 회고전을 열었다. 이후 화집 출간 등 이철이의 미술사적 재조명이라는 과제로 우리는 함께 뭉쳤던 것이다. 가끔 바둑을 두며 놀기도 했다. 당시 홍은동은 이상국의 달동네 풍경 그대로였다.)
이상국 중학교 때부터 하루 한 장 이상의 정물이나 풍경을 그렸다. 그때 계동 쪽에서 본 인왕산 풍경이 있었고, 홍제동 쪽에서 본 인왕산도 있었다. 북한산은 어렸을 때부터 늘 올랐던 동네 산이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인왕산 밑 누하동에 화실을 차렸다. 이곳은 이철이 선생이 사시던 동네였다. 학교를 퇴직하고 홍은동에 화실을 잡았다. 여기에서 산동네 풍경을 많이 그렸다. 홍제동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뛰놀던 동네를 그때 그 감정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산동네 풍경에는 나의 개인사가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art 전업작가, 화랑의 전속작가가 되고 나서, 이상국은 사회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점차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이 늘어난다. 산이나 나무의 표현으로 옮겨 갔다. 또한 작품 양식이 점차 추상화 과정을 밟게 된다. 산이나 나무 혹은 산동네 풍경은 이제 대상의 설명적인 요소는 확연히 사라지고 꿈틀대는 골격, 뼈대만 버티고 있는 화면이다. 이상국은 이전까지 대상을 ‘구축’해 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대상을 ‘해체’하여 단단하게 응축된 하나의 추상적인 구조를 만들어냈다. 오광수는 이 변화를 ‘산문적인 세계에서 시적인 세계로의 추이’로 표현한 바 있다. 이상국은 나무건 산이건 산동네건 대상의 기(氣), 혼, 요컨대 현실과 자연의 내면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질서와 에너지를 또 다른 외연으로 드러냈다. 이상국의 해체된 추상 풍경은 자연의 본질로 더 치열하게 육박해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 마침내 최소 단위의 작은 마디(원소)의 파편으로 환원된 화면, 그게 바로 자연의 단자(monad)의 세계가 아닌가.
이상국 전업작가로 돌아선 후 사회생활에서 오는 인간관계는 다소 느슨해지고 자연히 주변 환경, 산, 산동네, 나무 등 자연이 마음에 다가왔다. 북한산 자락을 헤매며 산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농장에 쌓아 놓은 고사목(枯死木)을 그리기도 했다. 나는 나무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고, 화면 좌우에 띠를 두르고 점을 찍어 아픔, 상처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본격적인 풍경의 해체 과정은 영국 체류 이후의 일이다. 헤겔의 정반합의 이론을 내 그림에 대입해 형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작품을 시도한 것이다. 형상 과정에서 작품이 마무리되면 구상이고, 해체나 재구성의 과정에서 작품이 마무리되면 추상이 되는 식이다. 몬드리안이 시도했던 화면의 단순화에서 오는 추상화(抽象化), 그리고 조선 청화백자나 호랑이 그림의 변형에서 오는 추상화를 응용한 것이다. 좌우간 형체를 해체하면서 화면에서의 긴장감과 구성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
art 이상국은 1990년대에 두 차례 해외에서 생활했다. 가족 삶의 변화에 따라 외유(外遊)에 나선 것이다. 삶의 환경의 변화는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상국의 풍경은 어떻게 변했을까.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양을 그리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땅의 기운, 공기의 흐름, 빛의 감동을 포착해서 화면에 구현해 내는 일일 터이다. 그뿐이랴. 그 풍경을 뒤덮고 있는 역사까지 얹힐 수 있으리라.  
이상국 영국 웨일스에서 1년간 체류하는 동안, 내 그림 세계를 반성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그들의 생활과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 한국 밖으로 나가 본 여행이었다. 젊었을 때 막연하게 들어 왔던 환상과는 다소간 거리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어느 선생이 파리를 처음 방문하고 ‘뒷골을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는 그런 실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3년간 생활했다. 영국보다 기후도 좋았고 볼거리도 많았다. 동문들도 많이 있어서 몇 명과는 매주 만나 누드 크로키를 하기도 했다. 외국 생활은 일시적인 나그네의 삶이었다. 이 삶 속에서도 나는 자연의 색다른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부지런히 작업에 매달렸다. 자연을 스케치하고 그 느낌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영국에서의 〈나무〉 연작, 미국에서의 〈바다〉 연작은 큰 수확이라 생각한다.

“그림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 같이…”

art 이상국은 목판화에서도 한 경지를 이루었다. 목판화만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목판화 화집을 따로 제작했다. 특히 그의 목판화는 간결한 형태, 강렬한 흑백 대비, 웅혼한 리듬, 탄력적인 구성 등에서 한국 현대미술사의 그 어떤 작가의 목판화보다 뛰어난 조형적 성과를 얻고 있다. 특히나 이상국의 유화는 목판화의 양식적 번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판화가 조형세계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상국 중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그 당시 학교마다 미국의 USOM 원조를 많이 받았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중앙청 광장에서 큰 전시가 열렸다. 그때 우리 학교를 소개하는 팸플릿 표지에 판화가 실렸다. 이철이 선생이 그림을 그리시고 내가 칼로 조각해서 찍은 고무판화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기특한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중국 혁명시대 노신(魯迅)의 목판화 운동에 관한 동주 선생의 강의를 들었고, 조선시대 목판화 오륜행실도, 독일 표현주의 목판화에 관심을 뒀다. 판화가 내 그림에 새로운 활로가 되리라 믿었다.
art 이상국은 오래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항상 무당이 칼 위에 선 것 같이 긴장된 일이다.” 섬뜩한 말이다. 그림 그리는 일을 ‘피를 보는 일(죽음 같은)’에 빗댄, 화가로서의 절체절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던 그가 2000년대 10년간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작가 생활을 보냈다. 병마와 싸우면서 작품 발표 기회가 뜸했다. 자연히 역사상 최고의 미술시장 호경기를 절묘하게 피해 갔다.
이상국 1999년 귀국 이후 우리 가족사에 큰 변혁이 왔다. 가족들의 문화적 충격이랄까,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억장이 무너지는 시간도 많았다. 작품의 긴장감 같은 것을 얘기할 형편이 못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슬럼프 기간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 와중에서도 목판화를 계속 만들었고, 2006년에 그 작품을 모아 큰 전시를 열었다. 4년 전 수술을 끝내고 철갑을 두른 환자복을 입고, 기를 쓰고 복도를 돌며 걷기 운동을 했다. 간호사들이 “이제 그만 쉬셔요” 라고 할 정도로. ‘무당이 칼 위에 선 것 같이…’ 젊었을 때 뱉어 놓은 말은 지금 내가 다시 되뇌어도 무섭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더 무섭다. 나는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한다. 그래서 나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후회할 일은 없다. 나는 살아 있고,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 변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좋게 변해야 되고 끊임없이 변해야 된다. 그림은 나 자신의 표현이다. 내 꿈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예술가로 불리는 것이다.

4) 이상국의 작품 세계는 1990년대 초 40대 중반에 이르러 구상에서 추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양식적 사이클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초기의 ‘변혁과 도전’의 과정은 이제 ‘지속과 천착’의 과정으로 이행되고 있다. 이상국의 작품 세계는 진폭이 크다면 크고, 좁다면 좁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작품은 구상/추상, 현실/이상, 참여/순수, 감성/이성, 단편/종합, 내용/형식 등의 대립항을 넘나들면서 양축 모두를 수용하는 것이 강점이다. 그래서 그는 진부한 자연주의적 구상의 한계를 훌쩍 넘어섰다. 그렇다고 그는 어느 한 축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전위성(혹은 전투성)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추상화의 단계를 밟았지만, 그것은 미술사적으로 이미 고전이 돼버린 자연주의적 추상이다. 요컨대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뒤처지는 부면이 없지 않다.
이쯤이면 우리는 마땅히 이상국의 작품에 한국적인 것, 전통의 현대화 같은 논제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국의 그림 앞에서 버내큘러리즘이나 글로벌리즘 혹은 그것들의 길항관계나 상호 변증의 관계 모두를 자유롭게 뛰어넘고 싶다.(이론적 구호와 예술적 실천은 자주 엇갈린다.) 나는 지난봄의 개인전 때, 이상국의 손톱 밑에 낀 살아있는 물감 세포를 보았던 기억을 다시 불러내고 싶다. 그 물감의 세포 속으로 진입하여 이상국의 작품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나로서는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 여행지는 화가가 붓과 신체라는 감각의 더듬이로 세계와 뜨겁게 만나는 회화적 노동의 현장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호방한 붓 터치와 그것의 거침없는 질주, 점성의 물감을 겹겹이 쌓은 견고한 지층…, 그리고 시간의 강물은 흘러,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고 난 이후의 휴화산 같은 정중동의 세계…, 대범한 생략과 밀도 높은 구성, 집(방) 같은 작은 면과 그것을 울타리처럼 감싸는 뼈대 같은 선의 약동…. 그것은 풍경 너머의 풍경이요, 안의 풍경이 아닌가. 이상국이 그려낸 저 뼛속에 꿈틀대는 풍경에서 우리는 마침내 하나하나 열려 있는 소우주를 만나리라.

2012부산비엔날레 총감독_로저 브뤼겔

로저 M. 브뤼겔 1962년 서베를린 출생. 비엔나예술아카데미 및 비엔나대학에서 미술 철학 경제학 미학을 공부했다. 1999년 이후부터 미술사가인 부인 루스 노악(Ruth Noack)과 함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Things we don’t understand)>(2000), <정부(The Government)>(2003~05)를 공동기획했고, 2007년 <도큐멘타 12>의 예술감독을 맡는 등 유럽의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2013년에 개관할 취리히의 요한제이콥스박물관의 창립 디렉터로 재직 중이다. 2002년 메닐컬렉션에서 큐레이터에게 수여하는 월터 홉스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 Lidwien van de Ven, 2011

2012부산비엔날레 총감독_로저 브뤼겔

글|김재석 기자

2012부산비엔날레의 총감독 로저 브뤼겔(Roger M. Buergel)을 만났다. 그는 부산비엔날레가 주최한 <현대미술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국제심포지엄과 개막을 1년 앞둔 비엔날레의 진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또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Black Sheep>(사무소 주최) 강연에서 부산비엔날레의 전시 주제와 전시 기획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소개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부산비엔날레 조직위 측은 그가 국제 미술계의 동향에 밝을 뿐 아니라, 향후 부산비엔날레의 성장을 위한 전환점을 마련할 실험적인 기획의도를 가진 점이 이번 전시감독 선정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고 발표했다. 광주비엔날레가 오쿠이 엔위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등 국제 미술계의 스타 큐레이터를 연달아 영입하며 고답적 분위기를 쇄신한 점을 상기할 때, 로저 브뤼겔을 선택한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브뤼겔은 비엔날레의 스펙터클한 전시 방법을 지양하고, 관람객의 미적 경험과 교육 프로그램이 강조된 대안적인 전시를 기획해 온 큐레이터이다.

아이 웨이웨이 <원형> 혼합재료 2007_<도큐멘타 12> 출품작.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의 공업화와 현대화로 철거된 전통 건물들의 목제 창문 1001개를 카셀로 가져와 모자이크 조각처럼 연결했다. 로저 브뤼겔은 2010년 독일 DKM미술관에서 아이 웨이웨의 <Barely Something. On Ai Weiwei>전을 기획했다.

“배움의 정원, 그 첫 주인공은 나”

로저 브뤼겔은 미학 정치학 경제학 등의 다양한 전문 영역이 교차하는 전시를 기획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 미술계에 신진 큐레이터로 두각을 나타냈다. 추상표현주의를 개념적으로 조망한 <성과 속 사이의 회화(Painting Between Vulgarity and the Sublime)>(1999), 미학의 개념을 재정의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Things We Don’t Understand)>(2000), 권력의 시스템을 해부하고 재조직한 <정부(The Government)>(2003~05) 등의 전시가 대표적이다. 그는 2007년 카셀토큐멘타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국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브뤼겔은 <도큐멘타 12>에서 카셀이라는 도시를 유럽 문명의 상징적 구심점으로 설정하고, ‘삶, 교육, 모더니티’를 주제로 서구 미학의 낡은 패러다임을 외부자의 시선에서 재조명했다. 그는 <도큐멘타 12>에 지역 정치 경제 역사적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동유럽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소개했으며, 화이트 큐브형 전시에서 벗어난 비제도적인 연출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도큐멘타 12>는 “1990년대 이후 대형 국제 전시의 관행을 깨는 전시다”또는 “이러한 전시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브뤼겔은 2012부산비엔날레를 위해 ‘배움의 정원(Garden of Learning)’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 개념을 설정했다. 첫째, 예술의 제도적 또는 훈육적 정의를 버린다. 둘째, 작품을 제시하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새롭게 한다. 셋째, 관람객의 개념을 재정립한다. 그는 기존의 유형화된 비엔날레 전시방식에서 탈피해 관객과 전시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전시를 선보이겠다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수집한 작가들의 작품 30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아둔 전시, 속된 말로 ‘있어 보이게’ 꾸민 전시, 고급스러운 주제를 강조하는 구태의연한 전시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그가 이 세 원칙 중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관람객’이다. 브뤼겔은 ‘배움의 정원’이라는 전시 주제의 첫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여름 전시 준비와 부산이라는 도시의 다양한 결들을 살피기 위해 부산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직 한국이나 부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지만 이제 그런 것들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배움의 정원’이란 테마에 걸맞지 않나요? 제가 이번 비엔날레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첫 관람객인 셈이죠.”
그는 관람객이 작품 감상이라는 1차원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작품 제작은 물론 비엔날레 전시 준비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 중이다. 참여작가 한 두 명과 10~15명 내외의 일반 관객들로 구성된 4~50개 이상의 소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이 함께 작품을 제작하는 방안을 세웠다. 그는 비엔날레에서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조선업을 다룬 앨런 세큘라의 <피쉬 스토리(Fish Story)>를 예로 들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사학자나 큐레이터의 짧은 지식이 아니라,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의 전문지식이 필요합니다. 농부나 어부, 주부나 회사원, 10대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관람객의 범위와 역할은 다양합니다. 이들의 전문지식과 경험이 서로 다양하게 얽혀 기존의 표준적인 전시 방식이 지니지 못한 풍부하고 직관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할 것입니다.”

코노이케 토모코 <지구아기>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9_2010부산비엔날레 출품작

비엔날레의 새로운 미적 경험을 위하여

비엔날레에서 관객의 존재와 역할을 재정의하거나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시도는 비단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프란체스코 보나미가 총감독을 맡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의 ‘관객 독재(Audience Dictator ship)’나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이용우 감독이 도입한 ‘참여관객제’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브뤼겔은 관객에게 초점을 맞춘 앞선 비엔날레의 선구적 전시 방식을 인정하면서도 부산비엔날레와 명확한 선을 그었다. “베니스나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만의 전시담론이 내재한 특정 형태가 이미 존재한 상태에서 관객이 참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2012부산비엔날레는 기존의 전시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 작가와 함께 관람객이 전시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작가 작품 전시가 관객과 하나의 유기체처럼 같이 성장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의 준비 과정을 일반 시민에게 개방하고, 작품 제작에 참여시킨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을 터. 그는 이러저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작가를 대폭 줄였다. 한 비엔날레에 40명 이상의 작가를 한꺼번에 수용해 제대로 된 전시를 꾸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부산비엔날레가 부산시립미술관을 중심으로 열린다는 공간적 제약도 고려했다. 이와 함께 참여작가가 부산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부산이란 도시의 맥락을 파악하고, 관객들과 함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로저 브뤼겔이 관객의 미술에 대한 호기심에 주목하고, 그들 삶의 특수한 지식과 경험을 미적 경험으로 전환하는 전시를 기획한 데에는 그가 처음 큐레이터의 세계에 발을 내딛으며 품은 본질적인 질문과 상통한다. “미술을 전공하긴 했지만, 항상 작가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전시 기획이 뭔지도 모르고 큐레이터를 시작했죠. 작가의 행동과 작품을 이해하고,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한 공간에 재구성하는 과정은 또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오늘날 전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수많은 비엔날레가 작가들의 창작 에너지를 비생산적으로 착취한다고 걱정한다. 비엔날레는 적은 예산을 투자해 작가들의 신작을 전시하길 원하고, 작가들은 비엔날레 전시 이후 작품을 팔기 위해 상품성 있는 작품만을 생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우울한 현실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문화의 제반 환경은 국제 비엔날레와 같은 전시를 아트페어의 형태로 천천히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대안의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결과 맥락을 살리고, 여타 국제 비엔날레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표준화된 미적 경험을 탈피할 수 있는 급진적인 비엔날레를 2012년 부산에서 제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우리는 각 지역의 서로 다른 미적 유산과 동시대미술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파리 뉴욕 서울의 작가들이 다음 비엔날레를 채울 작품을 계속 쏟아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전지구적 환경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예술의 미학적 경험의 근본적인 가치가 모호성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예술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배움의 정원’에서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가 부산에서 작가와 관람객과 함께 가꾼 ‘배움의 정원’이 어떤 모습을 펼칠지, 1년 후를 기대해 본다.

강태훈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0_2010부산비엔날레 출품작

Best of 2011_Image & Issue

지난 3월 11일, 일본 동북 지방 해저에서 발생한 규모 8.9의 강진 여파로 대형 쓰나미가 일본 동북부 지방을 휩쓸었다.

Best of 2011_Image & Issue

글 | 이영준 ? 이미지비평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vs 개그콘서트
정말, 나쁜 눈물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영상이 처음 언론에 나왔을 때만 해도, 나는 멍청하게도 폭발 장면 자체를 신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평소에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폭발 영상을 즐겨 봤었기 때문이다. 즉 나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 장면도 그런 스펙터클의 하나로만 봤던 것이다.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하게 죄송스런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연재해를 스펙터클로 보게 된다. 그런 이미지는 기묘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상당 부분 충족시켜 주며 방송상품으로 기능한다. 새로운 유형의 재난사고가 나면 방송국으로서는 더 좋다. 예를 들어 쓰나미가 센다이 공항 활주로까지 쳐들어와 항공기들이 물에 잠기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엄청난 쓰나미가 건물과 자동차를 삼키는 장면에서부터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은 재난 이미지의 새 역사를 쓰는 듯하다. 체르노빌 때도 쓰리마일 아일랜드 때도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동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고화질로 된 현장 장면은 없었다. 일본 쓰나미는 HD급 화질로 보는 최초의 자연재해일 것이다. 그러나 방송국과는 달리, 전에 없던 종류의 이미지가 나타날 때마다 평론가는 당혹한다. 기존의 코드로 해석되지 않는 사진이 나타나면 어떤 잣대를 들이대서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걸프전이 터지던 날 CNN으로 생중계되던 바그다드 공습장면이 그랬으며 9.11테러의 장면이 그랬다.
이미지로도 사건의 내용으로도 후쿠시마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새로운 이미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필자는 어떤 학회에서 ‘전쟁과 사진’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었고,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 수용자들을 미군이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진이 폭로됐을 때도 이미지의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 역시 어떤 학회에서 발표했었다. 그러나 후쿠시마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난감했었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평론가를 배려해서인지 의미의 막음(closure)을 준비해 주었다. 동아일보는 “방호복-산소통 무장한 50인의 결사대 목숨 건 펌프질”이라는 제목으로 1면에 눈물이 가득 찬 어떤 사람의 사진을 실었다. 이걸로 됐다는 판단이 들었다. 눈물은 지난 몇 년간 한국 대중문화의 영상을 지배해 온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
나는 평론가로서 아주 무식하고 단호하게 한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눈물은 ‘나쁘다’라고 단정 짓는다. 어린 애 하나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어린 애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듯이,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어른들도 다른 사람이 울면 따라 울고,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서 눈물을 짜내는 코드만 살짝 건드려 주면 따라 운다. 눈물은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오로지 따라 울게 만든다. 그래서 눈물이 나쁜 것이다. 눈물은 진한 공감대를 통해 시청자가 영상 속의 인물과 강한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 눈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겪은 후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이 세상은 변한 것이 전혀 없다. 눈물은 웃음과 정반대의 효능을 가진다. 모든 코미디에서 등장인물은 항상 실패한다. 그것은 미국이건 한국이건 마찬가지다. 16년간 자기 분야에서 5만 7천 가지의 기술을 익혔다는 달인은 항상 맞고 쫓겨난다. 기껏 잡아 온 오랑캐는 항상 빈정 상했다며 정보를 불기를 거부하고 집에 가버린다. 그런 실패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면 속의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극작가 브레히트는 횡격막을 울리는 것만큼 비판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은 없다고 했다. 웃으면서 화면 속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눈물은 시청자를 쉽게 적신다. 드라마의 눈물은 점점 밖으로 번져나가서 다큐멘터리를 적시고, 예능을 적신다.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등 이 시리즈의 핵심은 기후 변화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가 아니라 ‘눈물’이었다. 기후 변화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만 방송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감동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오디션 프로의 핵심은 심사받는 사람이 심사위원의 평을 들으며 우는 장면이다. 그럴 때 카메라는 그의 눈을 클로즈업하여 눈물방울을 크게 확대한다. 그러면 시청자의 가슴 속에도 큰 눈물이 맺힌다. 무한도전도 눈물바다다. 체력이 달려서 울고, 코치에게 야단맞아서 울고, 성적이 나지 않아서 자책하며 운다. 대한민국을 온통 눈물범벅으로 만들어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매스미디어의 힘은 급기야는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는 무시무시한 사건에까지 뻗쳤다. 그래서 결국 후쿠시마는 울고 말았던 것이다. 복잡한 사태에 대한 간편한 결론이다. 평론가는 해석하는 사람이지 훈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는 도를 넘어서 명령한다. 너무 답답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여 뚝 그쳐라!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 건물 폭발 장면과 사고 8개월 뒤 제1원전에서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작업하는 근로자들

우면산 산사태 vs 오세훈
무너진 산, 분열된 사회

서울에 있는 산 중 우면산은 존재감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해발 293m인 이 산은 북한산(836m), 도봉산(739m), 관악산(631m) 등에 비해서도 아주 낮을 뿐 아니라 뚜렷이 눈에 띄는 봉우리도 없다. 북한산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보현봉, 도봉산의 선인봉 만장봉 주봉 등 모양으로나 역사성, 상징성으로나 두드러진 봉우리들에 비하면 우면산에는 봉우리라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이다. ‘소가 잔다(牛眠)’라는 이름 자체도 졸리기만 할 뿐이다. 그러던 우면산이 2011년 7월 27일에 깨어났다. 백두산 화산은 폭발해도 우면산은 절대로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주 충격적으로 깨어났다.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우면산이 깨어난 것도 놀랍지만, 그 직접적 피해를 입은 것이 삼성 래미안아파트라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보통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그 피해를 본 것은 시골이나 산동네 등 열악한 지역에 사는 못 사는 사람들이다. 서울에 잘 사는 사람들은 강과 산에 콘크리트로 된 든든한 방재시설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재해의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는 일이 드물다. 도시화라는 것은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막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골이나 도시의 주변부는 그런 혜택으로부터 소외돼 있기 때문에 자연재해의 피해를 많이 입는다. 자연재해는 빈부와 도시의 중심-주변부의 구조화를 그대로 따른다. 그런 구조화는 자연재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를 낳는다. 자연재해 하면 항상 떠오르는 이미지는 못 사는 지역에 산사태나 홍수가 나서 남루한 할머니가 무너진 집 앞에서 우는 장면이다. ‘전쟁’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 이미지가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 스카프를 쓴 아랍 아주머니가 죽은 가족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진이듯이, 자연재해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는 ‘가난’과 ‘변두리’였다. 자연재해는 지형상으로나 이미지상으로나 사람을 차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면산 산사태는 그런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우면산 아래는 예술의 전당,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악원, 아리랑TV, 불교방송 등 수많은 고급문화예술 관련 시설이 몰려 있고, 수많은 악기상, 파스타 레스토랑과 커피숍 등 때문에 한마디로 우아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산사태가 나서 고급 아파트를 덮쳤다는 점 때문에 그 이미지가 일으킨 파장은 더 넓고 크다. 그런 의외성 말고도, 우면산 산사태의 이미지는 자연재해의 이미지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것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지평이다.
보통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그 이미지는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기 때문이다. 수해가 나서 집이 물에 잠겼는데 잘됐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자연재해 사진은 항상 일정한 반응을 일으키는, 매우 안정적인 함의를 가진 사진이다. 물에 잠긴 지붕의 사진 한 장 때문에 입장과 생각이 다른 여러 사람이 수재의연금을 내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흡사 사이가 안 좋아서 싸우던 부부가 애가 몹시 아프면 싸움을 중단하고 마음을 합쳐서 애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수해 장면 사진이다. 사진은 가능한 처참하게, 황당하게 수해를 묘사해야 한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한결같이 “원, 세상에 저기가 저렇게 되다니” 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그 반응 덕분에 사회는 잠시나마 하나로 통합된다.
이런 반응은 1990년대까지의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분열이 심한 지금, 자연재해의 이미지도 분열의 자리가 된다. 문제는 우면산이 서초구에 있기 때문에 벌어졌다. 선거에서도 유달리 보수 정당에 표를 몰아 주는 부자동네 서초구에 재해가 일어났는데, 국민의 세금을 써서 지원해 줄 필요가 있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서울을 베네치아로 만들겠다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공약을, 가장 표를 많이 준 강남 3구를 물바다로 만들어서 보답했다”라는 뼈있는 농담도 있다. 이제 수해의 현장은 온정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의 분열이 확인되는 자리가 됐다. 자연재해는 의미상으로나마 안정적인 이미지의 장이었으나, 2011년의 한국에서 그런 안정성도 사라져 버렸다. 우면산 산사태의 이미지는 한국이라는 사회의 곳곳에 깊은 금들이 가고 있음을 알려 주는 불길한 징후이다.

서초구 방배동 남부순환로가 우면산 산사태로 쓸려 내려온 토사와 부러진 나뭇가지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사진: 김주성, 서울=연합뉴스)

소녀시대 vs 김윤옥 vs 이우환
텅 빈 기표들의 만남

이우환 그림의 의미는 뭐라 해석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 그림들에 대해 뭐라고 해석하는 평론가는 그 순간 바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가 찍어 놓은 점들은 어떤 해석도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해석의 영도(零度, zero degree)’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점은 인간의 실존도 되고 영원의 시간도 되고 우주도 되고 하나의 조형요소도 된다. 한 마디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이다. 기호학을 모르는 사람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기표가 뭐야?’라고 묻는 그런 당혹감이 이우환의 그림을 바라볼 때의 반응의 요체인 것 같다. 어떤 식으로 보건 간에, 이우환의 그림을 어떤 말로 가두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가 ‘만남(encounter)’이란 말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자 만남이란 뭐냐, 영어로 인카운터의 어원은 무엇이냐고 우르르 몰려가서 알아보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것들 모두 작가의 말 한마디에 ‘낚인 것’이다. 이우환은 그냥 놔두고 봐야 하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 특정한 컨텍스트에 들어가자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소위 ‘장소특정적(site specific을 이렇게 황량하게 번역해서 쓰는 분들이 미술을 다룬다는 것은 좀 우습다. 언어의 상상력이 그것밖에 안 되나? 나 같으면 ‘자리에 맞는’이라고 쓰겠다)’이 되니까 몇 가지 굴레가 씌워지고 애매하고 다양한 함의들은 가지가 척척 쳐지면서 자연스러운 이해의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소녀시대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대통령 부인 김윤옥 씨를 만나는 사진을 봤을 때였다. 그들은 베이지 색의 화사한 벽지가 뒤덮인 청와대의 어떤 방에 마주 앉았다. 소녀시대의 멤버들이 테이블에 둘러앉고 가운데는 김윤옥 씨가 앉았는데, 그 뒤의 벽에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시리즈 중 한 점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우환의 점들은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극단적인 자유의 표상이다. 그런 점에서 고결하다. 그 그림에 뭐라고 언어를 들이대서 의미를 묶어버리려는 해석은 오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그림이 들어 있는 컨텍스트는 어떤 것인가? 이우환의 그림과 달리, 청와대라는 컨텍스트는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엄청난 폐쇄성과 선별성이다. 청와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통사람이 청와대에 들어갈 기회란 극히 드물지만, 설사 기회가 있다고 해도 신원조회를 거쳐야 한다. 걸그룹이라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엉덩이를 쑥 내밀고 흔드는 민망한 춤을 추는 걸그룹은 음원판매 차트에서 1위를 한다고 해도 못 들어갈 것 같다.
말로는 청와대가 국민 모두에게 열린 청와대라고 하겠지만 그런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엄격한 배제의 시스템을 뚫고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청와대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우환의 그림은 미니멀한 텅 빈 기표이기 때문에 더 대단하다. 점만 몇 개 찍었는데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텅 빈 기표라는 말이 아무 뜻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것이 기표라면 당연히 어떤 뜻과 결부되는데, 기표가 어떤 뜻과 만날 것 같은데 못 만나고 계속 미끄러지는 상태가 텅 빈 기표이다. 즉 어떤 기표로부터 기대하는 그 뜻이 거기 없고 어딘가 딴 데 있을 것 같기 때문에 텅 빈 기표라고 하는 것이다. 이우환의 점은 아무리 따라가도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의미가 잡히지 않기 때문에 텅 빈 기표라고 할 수 있다.
텅 빈 기표는 미끄러지고 미끄러져서 결국은 청와대라는 엄청난 배제의 시스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는 엄청난 영광이 더 돋보이는 이유는 그 미술관도 엄청난 배제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아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구겐하임에서 개인전을 할 기회는 극히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동양의 사상을 접목한 독특한 미니멀리즘’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 전략에 낚인 것일 뿐이다. 텅 빈 기표들이 바늘구멍 같은 배제와 선별의 시스템을 뚫고 들어간다는 사실이 이우환 예술의 핵심인 것 같다.
걸그룹의 노래가 이우환의 그림과 닮은 점은 텅 빈 기표라는 점이다. 걸그룹의 노래에는 아무 내용도 없다. 이우환의 그림을 말로 해석하는 평론가가 그 순간 바보가 되듯이, 걸그룹 노래의 가사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해석하려 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바보가 된다. 소녀시대가 <소원을 말해봐>를 부르면서 메뚜기춤을 췄다고 해서, 소망하는 인간의 심리와 메뚜기의 생물학적 특성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걸그룹의 노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있는 다른 음악들―베토벤에서 핑크 플로이드까지, 이미자에서 서태지까지―과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걸그룹 노래의 내용은 가사나 사운드가 아니라 노래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획력이다. 그것은 SM엔터테인먼트라는 대기업의 직원들이 열심히 기획회의하고 회식하고 밤새워서 만든 어떤 제품의 표상이지, 노래하는 사람 자신의 개성이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김윤옥 씨도 텅 빈 기표이다. 그는 ‘한식세계화추진단’의 명예회장으로서 국가의 돈 300억 원을 써서 떡볶이를 세계화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어떤 사람이지만, 그런 사업은 걸그룹의 노래만큼이나 내용이 없다. 그런 노력으로 떡볶이가 세계화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영부인으로서 하는 관례적 제스처일 뿐이다. 사실 영부인이라는 자리 자체가 원래부터 텅 빈 기표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적당한 미소와 포즈만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을 하면 곤란하다. 5공 때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가 욕을 먹었던 이유가 너무 나댔기 때문이다.
이우환과 소녀시대와 김윤옥이라는 세 가지 텅 빈 기표들이 만나는 장면은 극도의 부조화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 김윤옥이 소녀시대의 노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소녀시대가 김윤옥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김윤옥이 이우환 그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이우환이 소녀시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소녀시대가 이우환 그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장인물 모두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영화 <펄프 픽션>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미술과 대중문화와 정치가 만나는 장면은 영화보다 더 기이하다.

지난 8월 19일, 걸그룹 소녀시대가 ‘한국 방문의 해’ 홍보대사로 위촉돼 영부인 김윤옥 씨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사진: 청와대 제공)

스티브 잡스 vs 안철수
두 가지 죽음의 의미

죽는다는 일 만큼 고결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죽은 사람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죽음은 나쁜 사람이건 좋은 사람이건 사람의 삶을 깨끗이 정화해 버린다. 롤랑 바르트는 ‘la mort plate’라는 말을 썼는데, 여기서 ‘plate(평평한, 납작한)’란 말은 죽으면 모든 의미가 납작하게 사라지고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뜻인 거 같다. 그래서 죽음이란 사실 슬퍼할 일이라기보다는 어떤 중요한 일이 한 단계를 매듭지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졸업식이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죽었을 때 뭔가 중요한 역사적 시기가 막을 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애플 제품을 하나도 쓰지 않지만 내가 그런 창의적인 사람과 같은 세기를 살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도 계속 강의를 도강했는데,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때 배운 감각을 컴퓨터에 접목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글을 맑은 고딕체로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같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타이포그래피를 적용하여 편지봉투를 만들었거나 책표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타이포그래피와 컴퓨터의 결합이라는 희대의 상상을 한 스티브 잡스는 그래서 창의적인 인간이다.
스티브 잡스와 가장 비교되는 한국 사람이 안철수 씨다. 스티브 잡스가 죽고 나서 안철수 씨는 다른 식으로 죽음을 실행했다. 그는 1500억 원이라는 많은 돈을 죽였다. 자기가 쓰지 않고 사회에 희사한 것이다. 그의 기부가 빛이 나는 이유는 무슨 꼼수를 부려서 자기가 만든 재단에 기부하지 않고 사회에 척 내놨기 때문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거액의 돈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장렬하게 죽여 버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의 기부 행위가 정말 나에게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간 기부라던가 봉사, 나아가 사회의 높은 분들이 일반 국민을 위해 봉사나 선행 등을 해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등의 단어를 들을 때마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 명확히 풀려버렸기 때문이다.
질문은 그것이다. 안철수 씨의 1500억 원은 영영 그를 떠난 것인가? 어쨌든 그는 그 돈을 다시는 쓸 수 없게 됐다. 그러면 그는 아무 대가 없이 그 돈을 허공에 날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기록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한 안철수 씨는 영원히 자기 돈 1500억 원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명예로운 기억은 은행계좌보다 더 확실하게 돈을 맡겨 놓을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맡긴 돈은 평균이자율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원주인에게 되돌아온다. 1500억 원은 죽지 않고 ‘정말로 멋지고 선한 사람’이라는 더 큰 무형의 가치가 되어 그에게 엄청난 자산으로 돌아올 것이다.
핵심은, 돈이란 교환 될 때만 가치를 지니는데 기부는 돈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교환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즉 돈을 없애버리는 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기부도 교환이다. 안철수 씨는 1500억 원의 돈을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가치와 교환한 것이다. 그것도 1500억 원어치 만큼. 일반인은 그런 교환행위를 감히 할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런 큰 돈이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당장 급한 일에 써야지 그렇게 척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죽일 시간은 많아도 죽일 돈은 없다.
안철수 씨가 정말로 자기 돈을 죽이려면 아무도 모르게 기부해야 한다. 그런데 안철수 씨는 모두가 알게 기부 사실을 공표해 버렸다. 만일 그가 1년 후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면 지금의 기부 행위 때문에 몇 십만 표 혹은 몇 백만 표는 더 얻을 것이다. 누가 기부했다고 크게 알리고 기부하는 것은 결국은 기부한 사람에게 그 돈의 가치를 확보해주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몰래하는 기부가 정말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병든 곳에 정확히 쓰이지 않고 아무 곳에나 흘러 들어가 눈먼 돈이 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연말에 구세군 자선냄비에 어느 얼굴 없는 신사가 넣고 간 1억 원짜리 수표가 흐르고 흘러서 도가니 문제로 폐교된 인화학교 같은 끔찍한 기관의 교장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까?
안철수 씨의 돈은 한 푼도 죽지 않았다. 그 돈은 1년 후에 부활할 것이다.

지난 10월 5일,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다.

2007년 <All Things Digital> 컨퍼런스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를 인터뷰했다.
지난 9월 6일, 박원순과 안철수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에 관한 입장을 발표한 뒤 포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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