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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1.06

Abstract

특집 호주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 2011년은 한국 호주 수교 50주년의 해. 문화계 전반에 '호주 열풍'이 불고 있다. 미술계에서도 『호주_디지털도시 초상』전(서울시립미술관 4. 29~6. 26), 『텔미 텔미』전(국립현대미술관 11. 8~2. 19. 2012) 등 호주미술을 소개하는 주요 전시가 연이어 열린다. 이즈음 art는 호주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대형 특집을 마련했다. 먼저 호주 현대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대표하는 주요 작가 19명을 화보로 소개한다. 독특한 원주민미술(애보리지널아트)과 첨단매체미술의 공존, 다문화사회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시각언어 등 호주미술의 '오늘'의 얼굴을 집약했다. 이어서 1970년을 기점으로 호주 현대미술사를 개괄하는 글렌 바클리 시드니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논고를 싣는다. 호주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과 특성을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조망했다. 마지막으로 시드니와 멜버른의 아트씬을 주요 미술관 및 기관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Contents

01     표지 프랑수아 모렐레 <벗기기-장난 중인 두 짜임들(0°-15°) 그림 15°>  
    캔버스에 아크릴릭 121×121cm 2008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호주에서 ‘Asia-Pacific’ 미술을 찾다  김복기

38    핫피플  김용대_큐레이터 30년, 새로운 꿈과 도전  김재석

42    프리즘
    문광부, 베이징 798에 레지던시 운영하면  김유림
    ‘소통과 공감’의 미술관 문화를 위하여  김준기

48     포켓 속〉〉〉디카 속〉〉〉이미지 채집  이승애

62    포커스
    코리안 랩소디展  정영목
    오형근展|백승우展  신수진
    피처링 시네마展|미디어스케이프, 백남준의 걸음으로展  정연심
    황수경展|김이수展  심상용

78    호주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
    [1]화보_호주 미술을 이끄는 아티스트 19인  
    [2]삶과 풍경_1970년대 이후의 흐름  글렌 바클리
    [3]‘남쪽 미지의 땅’_원시와 문명이 걸어온 길  김복기

120    아티스트 인사이드
    노충현_살풍경 속 두 가지 흔적  장승연
    이제_폐허를 보는 신(新)감성  김수영

128    해외 리포트
    몬트리올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ELEKTRA12  호경윤
    아트베이징2011 컨템포러리 아트페어  김재석

139    해외 작가 프랑수아 모렐레
    지루할 틈이 없는 부정적이고, 허무하고,
    모욕적이며, 장난스러운 말들  프랑크 고트로

150    크리티컬 포인트
    공간 연구: 로댕갤러리에서 플라토까지  임근준(이정우)

154    이미지 링크  유르겐 텔러

160    암흑물질  지금, ‘디지털 미술관’이 뜬다  김정화

164    오후의 아틀리에  거룩한 낭비  이순종

166    전시 리뷰
    황인기|春.4人4色|민병옥|실비 오브레이
    be mobile in immobility(the materialized memory)
    몬차 지오바니 비엔날레
    장민승+정재일(Feat. DJ 소울스케이프)|임정은
    유토피아 유감|이상한 풍경

176    전시 프리뷰
    키츠 카터|탈루 L.N.|Paranoid Scene|세실리 브라운

182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지금, ‘디지털 미술관’이 뜬다

경기도미술관 홈페이지의 초기화면과 미술관 소장품에 관람객들이 남긴 태그를 한꺼번에 보여 주는‘태그클라우드’(www.gmoma.or.kr)

지금, ‘디지털 미술관’이 뜬다

글|김정화 ·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지난 4월 6일부터 4일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Museum & Web>은 전세계 30여 개 국의 박물관, 미술관 관련 전문가 7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프로젝트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세계적 컨퍼런스이다. 매년 새로운 기술적 이슈와 함께 박물관, 미술관의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인 <Museum & Web> 컨퍼런스의 금년도 기조연설은 바로 ‘디지털 정보의 트렌드’에 관한 것이 었다. 앞으로의 인터넷 환경은 ‘이동성(Portable)’  ‘참여성(Participatory)’ ‘독자성(Personalized)’ 의 특성으로 더욱 진화할 것이라 분석했다. 박물관에 대한 내용 하나 없이 오로지 인터넷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발표로 컨퍼런스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이는 박물관, 미술관의 운영이 인터넷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술의 발전’이 모든 변화의 원인이라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홈페이지, 온라인 전시, 스마트폰 앱(App.) 등이 미술관의 영역에 등장한 것이, 단순히 인터넷이 확산되어 생겨난 현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기저에는 미술관 본연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철학이 분명히 변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서 근대적 개념의 미술관들이 생겨나고,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미술관들이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미술관의 전시방식이나 전시내용, 전시공간의 활용 등이 변하긴 했으나 미술관과 관람객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관계에도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관람객은 누구인가? 그들이 미술관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관람객이 직접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미술관 경험은 불가능한가?’ 이는 큐레이터가 해석해서 전달하는 내용보다도 관람객 각자가 가진 문화적 배경, 개인적 기억, 사회적 경험이 미술관 경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에 기인한다. 모더니스트의 확실성과 미술제도로서의 권위주의에 머물던 미술관의 중심축이 이제는 사회적 네트워킹으로 옮겨 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집단 지성과 대중 참여와 소통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놓이게 되었고, 미술관은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주는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더 원활한 소통과 공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경기도미술관 홈페이지의 초기화면과 미술관 소장품에 관람객들이 남긴 태그를 한꺼번에 보여 주는 ‘태그클라우드’(www.gmoma.or.kr)

버추얼미술관과 소셜태깅의 등장

PC가 등장하면서 미술관 큐레이터들은 작품 정보를 일정한 체계 아래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효율성과 편의성 추구라는 목적에 철저하게 부합했다. 이후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작품 정보를 온라인에 공개하게 된다. 하지만 실물을 디지털화하여 DB로 만들고, 이를 온라인으로 구현한 모습에 는 커다란 차이가 발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 온라인 컬렉션은 단순히 정보의 전달이나 공개가 아니라, ‘공유’를 목적으로 두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은 최초의 버추얼(Virtual)미술관을 개선해 나가면서 사용자로 하여금 그 내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고 있다.
2008년 온라인 컬렉션을 새로이 정비한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컬렉션을 선보였다. <Artscope>라 명명된 이 컬렉션 DB는 총 5,514점의 작품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사용자는 마우스 작동으로 작품을 확대해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다른 작품과의 관련 사항, 배경, 내용 등을 상세히 전달함으로써 감상과 이해를 돕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온라인 컬렉션 <Timeline of Art History>는 각 작품과 함께 세계 미술사에 대한 정보 포털을 제공한다. 지역 시대 주제 작가 등의 카테고리를 통해 미술관 컬렉션을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감상 테마와 작품 순서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일은 실제 미술관에서는 불가능했지만, 버추얼미술관에서는 전적으로 온라인 관람객이 스스로 선택하고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소장품을 확대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은 물론, <Connections>라는 서비스를 통해서는 연관성 있는 소장품들을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제공한다.
초기의 버추얼미술관이 진화하면서 미술관들온라인에서 사용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제공해줄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독일의 쿤스트매트릭스처럼 3D 기법으로 생생한 전시장을 전달한다거나, 게임기법을 활용하는 등 수많은 방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소셜태깅’이라 하겠다. 2006년부터 미술관 연구자들은 컬렉션에서 소셜태깅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태그들이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미술관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 낸다고 밝혔다. 태깅은 관람객이 작품에 대한 의견을 키워드로 첨언하는 것으로, 소셜태깅을 통해 온라인 관람객은 소장품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홈페이지 상에 직접 피력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진 생각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작품 해설은 미술관 큐레이터들의 독점 업무였다면, 이제는 관람객들이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변화이다. 작품에 달린 태그들을 통해 원하는 개념어를 따라 다른 작품을 찾아가 볼 수 있는 새로운 동선이 만들어진 셈이다. 앞으로 미술관에서의 감상 과정은 관람객 간 네트워크의 모습을 띠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품 해석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게 되었다. 브루클린미술관,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 포틀랜드미술관, 파워하우스 등의 미술관들이 버추얼미술관에 도입하기 시작한 소셜태깅 시스템은 점차 미술관과 관람객이 만나는 새로운 시도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경기도미술관이 소셜태깅 시스템을 도입하여 관람객과 미술관 사이의 새로운 만남을 국내 최초로 주도하고 있다. 소장품에 관람객이 자신의 의견을 태그로 달 수 있으며, 경기도미술관 소장품 전체의 태그를 모아서 만들어지는 ‘태그 클라우드’에서 흥미로운 개념을 찾아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다른 작품들을 찾아가 볼 수도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실제 전시장에서도 관람객이 전시에서 본 작품에 대해 직접 태그를 달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관람객과 작품의 관계를 쌍방향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경기도미술관에서는 온라인 관람객들의 태그를 바탕으로 큐레이팅하는 새로운 개념의 전시도 기획할 예정이라고 한다.
온라인상에서의 관람객과 미술관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플리커 등의 소셜 미디어는 쌍방향 소통과 무한 공유의 기능으로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멀티미디어 작가그룹 레지던츠(Residents)의 회고전을 기획하면서 ‘The River of Crime’이라는 주제로 일반인들의 비디오를 공모해 선정된 영상물을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외에도 앤디 워홀의 〈모션 픽쳐스〉 전시에서는 관람객들이 워홀의 방식대로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상에 축적해 나가도록 했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이 직접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역할을 부여했다. 이제 세계 곳곳의 미술관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온라인 세상의 고객과 직접 소통하고 있다. 테이트모던은 무려 350,263명의 팔로워, MoMA는 이보다 더욱 많은 581,847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국내 미술관의 소셜 미디어 활용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은 벌써 10,977명의 팔로워를 기록하고 있어, 앞으로의 팽창가능성을 보여 준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박물관 관련 학회에서도 현재 이 현상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고 있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도 지난달 트위터 팔로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하였다. 필자도 연구진과 함께 경기도미술관의 팔로워를 대상으로 지난 3월 유사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는데 4,000여 명의 팔로워들 중에서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밝힌 사람이 280여명으로 약 7%에 지나지 않았다. 미술에 관심이 없고 미술관을 가본 적은 없으면서도 미술관 트위터를 구독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이다. 또한 이들 가운데 미술관의 흥미로운 트윗을 리트윗하는 사용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경기도미술관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직접 현장에서 태그를 달고 있는 모습

새로운 관객의 발굴, 새로운 역할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미술관 트위터를 통해 새로운 관객층이 형성된 것은 아닐까? 더욱 면밀하게 연구해야 할 문제이기는 하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단지 마케팅의 도구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소통과 참여는, 분명 미술관 경험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점이 오늘날의 세계 미술관들이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전략 연구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디지털 플랫폼으로 거듭나는 미술관의 미래온라인과 모바일 인터넷의 발전을 토대로 한 미술관 진화의 또 한 단계는 모바일미술관의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두에 언급한 <Museum & Web> 컨퍼런스에서도 스마트폰의 ‘앱’은 중요한 화두였다. 앱 개발자를 위한 데모와 워크숍이 따로 개최되었고, 미술관의 앱 소개, 연구자와 개발자의 발표가 이어지는 ‘모바일 퍼레이드’라는 특별 세션이 마련될 정도였다. 최근 한국사립미술관협회에 의해 시작된 모바일미술관은 이제 단순히 정보를 모바일 미디어에 탑재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최근 개발된 경기도미술관의 앱은 자동 업데이트 기능, 음성 도슨트 기능, ‘마이 갤러리’ 만들기 기능, 모바일 웹기능 등 다양한 부가 기능이 추가됨으로써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온라인상의 정보들을 모두 통합시킨 초대형 버추얼미술관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는 지난 2월에 오픈한 구글아트프로젝트에서 이미 목격한 바이다. 전세계 최고, 최대의 17개 미술관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만들어 관람객은 이 미술관에서 저 미술관으로 넘나들며 작품을 즐길 수 있다. 현재 이러한 방향의 프로젝트들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미 발표된 프로젝트 중에서 미국 예일대에 속한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아카이브의 정보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통합 서비스하는 ‘Discover Yale Digital Commons(discove.odai.yale.edu/ydc)’와 유럽 전역의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아카이브를 연동하는 유로피아나 프로젝트(www.europeana.eu/portal) 등에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놀라운 프로젝트와 콘텐츠를 접하면서 늘 함께 드는 생각이 있다. 인터넷과 일상생활을 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오늘날, 미술관이 지닌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큐레이터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눈앞에 무한한 변화가 펼쳐지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술관의 모든 변화가 결코 디지털 테크놀로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미술관의 탄생에서부터 변화의 중심에는 늘 관람객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 스미소니언협회는 웹와 뉴미디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전략 방향을 발표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위키피디아식의 웹사이트(smithsonian-webstrategy.wikispaces.com)를 열어 담론을 이끌어 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적용하기에 앞서 각 미술관은 소장품 하나하나를 어떻게 디지털화했는가 하는 기본이 제대로 서야 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드는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눈앞에 현란한 새로운 기술만 도입한다고 해서 미술관이 새로워진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미술관도 기본을 다지고, 이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비전과 전략을 세워야 할 때가 왔다.

‘구름’이라는 태그로 분류되어 나타나는 브루클린미술관의 컬렉션들(www.brooklymuseum.org/opencollection/tags/clouds)

미술관련 어플리케이션

 

몬트리올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캉딩 레이, 레스터 노튼 <OR> 오디오+비디오 퍼포먼스 2011

몬트리올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ELEKTRA 12

글 | 호경윤 수석기자

몬트리올은 서울에서 상당히 멀었다. 직항이 없어 도쿄에서 한 번, 밴쿠버에서 한 번 더 갈아타야 했다. 출발한 지 총 18시간이 걸려 몬트리올 현지 시간으로 저녁 7시에 도착했다. 무척 피곤했지만, 밤 9시에 시작하는 퍼포먼스에 꼭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숙소에 짐만 풀고 바로 달려갔다. 처음 가본 도시의 낯섦과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에 대한 호기심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느덧 퍼포먼스가 열리는 UsineC 공연장에 당도했다.
첫 공연은 미국 작가 커트 헨트슐라거의 <피드(FEED)>. 공연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관람객은 주최 측에서 나누어 준 서류에 필히 서명을 해야 했다. 그것은 퍼포먼스를 보다가 중간에 발작이라든가 건강상의 어떤 이상 증상이 생겨도 주최측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데에 대한 ‘동의서’ 비슷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공연이길래, 하며 겁을 잔뜩 먹고 공연장 안으로 갔다. 공연 전반부에는 ‘미디어아트’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릴 만한 그래픽 이미지와 저음의 사운드가 흘렀다. “뭐야, 이 정도 갖고…”라는 생각이 들 무렵, 잠시 암전이 흐르더니 공연장 바닥에 연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연기는 점점 더 차올라 어느새 공연장 전체를 에워쌌다. 심지어 바로 옆에 앉은 사람조차 전혀 감지되지 않을 만큼, 연기로 완전히 가득 찼다. 누군가는 가스실에 들어온 것 같다며 속삭였다. 장시간 비행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마치 구름 속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듯한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고 나서는 혼자 연기 속에 갇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어지럽기도 했다. 정말 이러다간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중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모르는 척, 툭 치며 타인의 존재를 확인해 가면서 겨우 버텼다. 그렇게 30분쯤 시간이 흐르니, 어느새 공포심과 불안감은 사라지고 마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간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프랑크 브레트슈나이더 <EXP> 오디오+비디오 퍼포먼스 2011

미디어아트가 발전한 배경

그렇게 몬트리올에서의 여행은 꿈꾸듯 시작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길마다 붙여진 이름도 모두 프랑스어였다. 북미가 아닌 유럽,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파리에 온 것 같았다. (심지어 몬트리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노트르담대성당이다!) 몬트리올을 포함한 퀘벡주는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도시로, 캐나다의 주요 지방 정부 중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높은 곳으로 꼽힌다. 특히 캐나다는 스마트폰 블랙베리를 생산해 낼 정도로 IT 사업이 발달돼 있다. 지정학적으로는 아메리카 대륙, 즉 미국과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유럽과 훨씬 더 유대감이 강한 몬트리올. 이곳에서 유독 미디어아트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회화와 조각 등 미국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적 미술 장르와 차별화하려는 그들의 ‘전략적 선택’도 깔려 있다고 본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한 시기에는 몬트리올비엔날레도 열리고 있었는데, 오래된 대학 건물에서 열린 전시는 <일렉트라>의 열기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출품작 수준도 낮았다. 기타 상업 화랑이나 미술관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나마 좋았던 전시는 사설 재단에서 만든 DHC미술관의 씨엘 플로이에의 개인전 정도였다. 그에 비해 미디어아트에 대한 관객층은 폭도 넓을 뿐더러,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일렉트라>에서 선보인 오디오+비디오 퍼포먼스의 음악은 클럽에서 들려 주는 신나는 테크노 댄스 음악이 아니라, ‘21세기 존 케이지’를 떠올리게 할 만한 단조로운 전자음이 대부분이었는데 완전히 심취해 있거나 심지어 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관객도 있었다. <일렉트라>와 함께 열리는 또 다른 대형 사운드아트 페스티벌인 <뮤텍> 외에 몬트리올 내에는 크고 작은 미디어아트 관련 이벤트들이 줄지어 열린다. 대형 건물에 설치된 공공 조형물도 미디어아트로 된 사례가 많았다. 확실히 몬트리올은 ‘미디어아트’의 도시였다.
몬트리올 시민의 뜨거운 사랑 속에 올해로 12번째 행사를 치른 <일렉트라>는 페스티벌이 열리는 5일 동안 저녁 시간대에는 UsineC에서 퍼포먼스 중심의 미디어아트를 소개하고, 낮 시간대에는 퀘벡수아즈시네마테크에서 IMDA 컨퍼런스를 열고, 그밖에 시내 갤러리에서 오브제 중심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에 따라 관객들은 주요 행사장인 UsineC와 퀘벡수아즈시네마테크를 밤낮으로 오가느라 바빴다.
행사 스케줄이 없는 오전 시간대에는 미디어아트 관련 기관을 견학했는데 대표적인 곳을 꼽자면 헥사그램이 있다. 헥사그램은 몬트리올의 주요 대학인 UQAM과 콩코르디아 등에 정부 지원으로 설립된 일종의 R&D연구소라고 볼 수 있다. 대학 부설기관인 만큼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미디어 관련 연구자들을 인큐베이팅하는 성격이 크다. 이틀 동안 스무 곳이 넘는 랩실을 방문했는데, 각 랩실은 대부분 작가 중심으로 연구원이 구성되어 있고 작업에 필요한 최첨단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가운데 미디어아트를 육성하는 헥사그램은 3D, 사운드, 인터랙티브 로보틱, 키네틱 등 다양한 분야를 골고루 다루는 가운데, 특히 뉴미디어를 패션디자인 혹은 현대무용 등과 결합하는 학제 간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가령 패션디자인에 미디어 기술을 혼합시켜 직접 몸을 움직일 때 발생하는 자가 전력으로 인조 꽃이 피었다 지는 의복을 만들어 내거나, 현대무용 안무와 오디오 비디오를 결합해 공감각적인 퍼포먼스를 만들어 내는 식이다. 주제적 측면으로는 최첨단의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자연과 인간에 관련 짓는 데 관심이 높았다. 만났던 작가들마다 ‘휴먼 바디’와 ‘휴먼 라이프’에 주목하면서,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자가 만난 한 중국작가는 자신의 랩실에서 화초를 키우고 있었다. 대개 미디어테크놀로지 연구소에서는 전자파와 건조한 공기 때문에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인데, 그는 역으로 식물을 위한 특수기계 장치를 만들어 식물을 키운다는 것이다.

왼쪽· 코드 액트의 <Cycloid-E> | 오른쪽·브래드 토드 <La Foret Bleue> 영상 설치 2011

최소한의 테크놀러지, 감각을 일깨우다

헥사그램의 다양한 랩실을 둘러보며, <일렉트라>에서 본 일련의 퍼포먼스들이 단지 겉만 번지르르한 ‘IT박람회’가 아니라, 장시간 동안 연구를 거친 창조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헥사그램에서 자주 목격했던 예술적 주제와 기술적 형식이 <일렉트라>의 프로그램에서도 그대로 연장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디어아트의 가장 새로운 이슈는 화려한 테크놀로지 기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기술로 획득하는 디지털 미학’ ‘기술을 통한 감각의 확장’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UsineC의 위층에 마련된 전시장에서는 크리스 살터의 개인전 <Just Noticeable Difference>를 볼 수 있다. 사전 예약제로 진행되는 이 전시는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밀폐된 공간에 누워 느껴질 듯 말 듯한 소량의 빛, 소리, 진동이 흘러나온다. 이미 충분히 미디어화되어 있는 도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최소한의 미디어 장치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운다. 오디오+비디오 퍼포먼스로 진행된 프랑크 브레트슈나이더의 <EXP> 역시 마치 턴테이블 위의 미세한 파동이 먼지를 모았다 흩어지는 듯한 단순하고 추상적인 영상을 극도의 저음과 함께 선보였다. 퀘벡수아즈시네마테크에서 전시된 헤르만 콜겐의 영상 작품 <Dust Restriction>은 마르셀 뒤샹과 만 레이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를 초고해상 카메라로 촬영해 선보였다. 아주 느리게 영상을 재생시킴으로써 물과 공기를 표류하는 작은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마치 무중력 공간을 표류하는 듯한 입자와 파동은 우리의 시각 인지 능력을 최극한으로 끌어 올린다.
또한 과거 조선소로 쓰였던 공간을 전시장으로 바꾼 달링파운드리에 설치된 코드 액트의 <Cycloid-E>는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몇 개로 연결된 기다란 금속관이 지름 11m의 큰 원을 그리며 공간을 탐색하듯 접혔다 펴졌다 움직인다. 금속관이 중력에 의해 움직일 때 생성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음원이 되어 실시간으로 음악이 생성된다. 형제 작가인 코드 액트는 이 작품으로 아르스일렉트로니카에서 상을 받았다. 이 작품의 진정한 예술성은 미니멀한 외관에도 있지만 거대한 금속관을 움직이는 동력을 가장 중심에 위치한 단 한 대의 모터로만 이끌어 내는 ‘최소한’의 기계 장치에 있다.

루이스 필립 데머스 <The Tiller Girls> 로보틱 퍼포먼스 2011

미디어아트, 과거와 미래를 투영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미디어아트’에 전형적으로 기대하는 미래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작품들도 있다. UsineC에서 퍼포먼스가 열릴 때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애녹 위퍼레흐트와 제인 킹 글리, 마리어스 킨텔은 바이오메카닉 칵테일을 제공한다. 관객이 진실게임에 동참하면 사이보그처럼 완벽한 외모의 금발 미녀가 자신이 입고 있는 칵테일 제조 드레스에서 방금 만든 음료를 준다. 페스티벌 마지막 날 공연을 장식한 프랑스의 신진 작가 1024아키텍처 그룹의 <유포리>는 빛이 투사되는 재질의 스크린을 겹겹이 설치해 놓고 그 위에 테트리스 같은 기하학적 도형이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틀어 놓았다. 동시에 그들은 스크린 뒤에서 테크노 음악을 트는 DJ가 되기도 하고 기타 연주자와 가수가 되었다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 전자빔을 휘두르는 파이터가 되기도 한다.
한편 루이스 필립 데머스의 <The Tiller Girls>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로봇이 퍼포머로 등장한다. ‘H’ 구조의 금속제로 만들어진 로봇 수십대가 음악에 반응하며 군무를 춘다. 1900년대 유행했던 댄스 그룹 ‘틸러 걸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원격조종에 의해 삐걱이고 서로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난다. 또한 마틴 메시에르의 <Sewing Mach ine Orchestra>는 재봉틀을 이용해 전자 음악을 만들어 낸다. 관객은 소리를 듣고 볼 수 있으며, 작가는 마치 재봉틀이 턴테이블인 양 이곳저곳을 다니며 ‘박아 댄다’.
또한 스티브 다니엘의 키네틱아트 작품인 <Sessile>은 관객이 손을 가져다 대면 곤충 다리를 연상시키는 작은 구조물이 움직다. 일종의 초기 미디어아트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은 최첨단 미디어아트 환경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부대 전시로 오보로갤러리에서 열린 브래드 토드의 <La Foret Bleue> 역시 마찬가지다. 구형 발열기와 오래된 라디오를 송수신기 삼아 영상 작업을 보여 주거나, 초기 안테나를 이용한 설치 작업 등에서 비슷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작가는 해가 지고 나면, 갤러리 외벽을 스크린 삼아 숲의 정경을 그래픽화한 영상물을 상영했다.

미디어는 마사지다!

<일렉트라>의 부대행사로 열린 컨퍼런스 프로그램 IMDA(International Marketplace for Digital Arts)에서는 미디어아티스트는 물론, 미디어아트 전시를 전문으로 기획하는 큐레이터와 저널리스트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미디어아트는 단지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경험해 온 디지털 시대 또는 디지털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매일매일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IMDA에 참여한 패널들은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는 전통적 예술의 과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이슈 아래 점점 가속화되는 미디어아트의 새로운 지형을 탐색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특히 미디어아트 분야를 이끌고 가는 실무진의 네트워크도 강조했다. 그래서 올해 컨퍼런스에는 한국의 최두은, 일본의 수미토모 후미히코와 유키코 시카타, 중국의 짱가 등 아시아 지역의 미디어아트 전문가를 대거 초청함으로써 아시아 미디어아트씬을 상호 점검했다. 사실 <일렉트라>의 가장 큰 목적은 국제적인 미디어아트 전문가들이 함께 만나 작품과 함께 투어를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 일환으로 <일렉트라>는 이미 작년 송도에서 개최된 INDAF의 파트너로 참여해, 헤르만 콜겐, 장 뒤부아 등 캐나다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를 소개한 바 있다. 컨퍼런스에 발제자로 나온 아트센터나비 최두은 큐레이터의 말처럼, 오늘날의 관객들은 예술 작품을 더 이상 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공동의 창작자가 되고자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디어아티스트와 미디어아트 전문가들은 보다 열린 ‘소통’의 창구로서 미디어를 재정의하고자 한다. 그런가하면 일각에서는 미디어가 일상적으로 완전히 침투한 오늘의 상황과 더불어 미디어를 더 이상 대중매체적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심리, 정신 상태, 윤리적 측면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오래 전 맥루한이 미디어는 ‘마사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미디어아트는 오감 중에서 가장 촉각적인 매체이고, 나아가 ‘제6의 감각’을 끌어 낼지도 모르겠다. 기자가 몬트리올에 도착하자마자 봤던 <피드>의 연기 속에서 경험했듯이 말이다.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안창홍 <봄날은 간다> 패널에 사진, 아교, 드로잉 잉크 아크릴릭 207×400cm 2005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글|정영목  ·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

삼성미술관 리움이 한동안의 침잠을 깨고 <코리안 랩소디: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라는 야심찬 기획전을 선보였다. 소위 ‘삼성’이라는 그동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내용과 방법의 전시였다. 전시를 관람한 필자의 첫인상은 다음 두 가지다. “삼성이 하면 무언가 다르다”라는 느낌과 “아, 이런 것이 삼성의 한계”라는 느낌이 미술관을 떠나며 동시에 떠올랐다. 정치적으로는, 홍라희 관장의 ‘컴백’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성격의 전시? 그냥 컴백하기보다 이제는 ‘역사’라는 중후함의 무게를 실어 미술에 대한 삼성의 의지를 더욱 강화하고, 아울러 기존의 삼성 이미지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싶은, 그래서 경제 권력의 ‘아우라’를 탈피한, 한국 근현대 미술을 리드해 가는 새로운 삼성의 이미지를 내심 보여 주고 싶은 전시? 이런 생각들이 필자의 과잉 반응일 수도 있다. 시각문화 코드를 적용한 요즘 추세의 단순한 기획전시인 것을 고려한다면.

왼쪽부터 조동환, 조해준 <1937년부터 1974년까지> 2002~ 2010, 박영근 <박정희의 무궁화/유지자사경성 (有志者事竟成)> 2006, 윤석남 <어머니Ⅱ-딸과 아들> 1993

과거와 현재의 관계망

전시는 크게 두 개의 대단원으로 나뉘어 있다. ‘근대의 표상(Symbols of Modernity)’과 ‘낯선 희망(Unfamiliar Hopes)’. 두 단원이 딱히 연대기적인 시대 구분은 아니나 전시 내용의 성격상 전자는 대한제국 시기에서부터 해방 이전을, 후자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시각문화의 코드로 편집하고자 했다. 편집의 의도는 뚜렷하다. 우선, 수평 혹은 수직 구조적인 일직선상의 나열방법(Linear Concept)을 배제하고, 씨줄과 날줄의 입체적 편집의 그물망을 촘촘히 하여 사건으로서의 구체적인 역사와 개인으로서의 감성적인 역사 모두를 붙잡는다. 관객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충동하여 기억하고 느끼게 하고자 한, 그 노력의 흔적들이 도처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선택된 작품과 여타 이미지들은 서로서로의 관계망을 형성한다. 이런 가운데 넌지시 상징으로, 아니면 사건의 핵심에 대한 도덕과 윤리, 진실의 결론을 유보한 채, 관객에게 다가와 막연하나마 역사 또는 과거에 대한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개인과 집단,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떠한 사건이나 경험의 지극히 개인적인 회상의 편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응들 모두가 관객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미지들에 관한 모든 판단과 정서는 전적으로 관객들의 몫이다.
예를 들어 보자. 김동유의 <이승만>과 박영근의 <박정희의 무궁화/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을 감상하는 태도는 관객의 시선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제각각 다를 수 있다. 필자는 두 작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나타내기 위해 두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구의 수많은 작은 얼굴들로 합성된 이승만과 무궁화와 고사성어로 상징을 뒷받침한 박정희는, 그들의 정치적 업적이나 과오의 문제 이전에 선과 악, 좌와 우 등의 ‘이데올로기’가 극심하게 대립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되새기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근대의 표상’에 등장하는 이미지들도 마찬가지다. 시선과 재현의 정치학이라 하더라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형성된 근대의 모더니티는 우리로 하여금 정체성에 관한 더욱 폭넓은 사고를 요구한다. 일본을 통한 서구식 모더니티의 이양은 우리의 과거와 문화를 상대적으로 더욱 평가절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상의 천재성과 최승희의 예술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주목해야 할 미학적인 대상으로 승격했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오른쪽부터 조덕현 <리플렉션 리플렉션> 2011  최승희 관련 영상물

회화와 기록 사진 역할이 두드러져

전시에 출품된 각 작품과 이미지들은 매체에 구속됨 없이 다양한 장르들로 구성되었으나, 그래도 회화 작품과 기록 사진의 역할이 두드러진 전시였다. 물론 안중근의 소중한 붓글씨에서부터 이육사의 난(蘭),이응노의 <삼일운동>과 <양색시>, 일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우끼요에’에 이르기까지 개별적으로 매우 접하기 어려운,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정예의 작품들을 선보인 것이 돋보였다. 아울러 사진 비디오 설치 작품 등의 적합한 현대적 응용은-가령, 정연두의 <구보씨의 일일>, 서도호의 <유니폼들>, 윤석남의 <어머니>, 김수자의 <보따리 트럭> 등-적절했지만, 전시 전체의 매체적인 구성상 조각 작품이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했다.
권진규와 백남준의 회화적 부조 릴리프와 육태진의 설치 조각 <가장(假裝)>을 조각이라 치더라도, 박종배의 앵포르멜식 추상조각 <역사의 원>과 송영수의 용접 추상조각 <작품 59-2>가 조각의 전부라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필자의 생각 같아서는 ‘근대의 초상’ 쪽에 김복진 윤효중 김경승 등의 인체조각을 추가하거나, ‘낯선 희망’ 쪽에 특히 민중미술 계열의 조각을 추가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와 작품의 선정이 전적으로 기획자나 기획팀의 권한이므로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으나, 아마도 제한된 공간과 작품 대여 등 여러 난관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작가와 작품의 선택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이미 제작된 작품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기획의도와 제시한 주제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작가를 선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근대의 초상’ 쪽에 들어간 서용선 박생광의 작품이 좋았고, 전수천의 <영원한 혹성들>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여 주제의 상징적인 효과와 매체로서의 표현 방법이 약하고 애매하다. 손장섭의 <조선총독부>는 필자라면 최진욱의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왼쪽·변영원 <반공여혼(反共女魂)> 캔버스에 유채 77.5×114.3cm 1952
오른쪽·한운성 <매듭> 캔버스에 유채 193×130cm 1987

서사성의 기획전에 찬사를

‘낯선 희망’ 쪽의 구성은 무언가 압축하여 골고루 많이 집어넣으려 한, 조금은 억지스럽고 혼란스럽다. 좋게 보면 경계를 넘나들며 몽타주의 효과를 극대화하려한 측면도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이것저것 섞어 놓은 비빔밥 같은 인상도 있다. 매체 주제 내용 간의 혼성이 파편화되면서 컨텐츠를 위한 작품 위주의 선별보다 작가 위주의 작품으로 메운 느낌이다. 차라리 기획 단계에서부터 ‘낯선 희망’을 두 단원으로 분리, 정리하여 구성, 운영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예를 들어, 윤명로 박서보 윤형근 서세옥 전혁림의 추상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낯설다. 또한 오윤 신학철 이종구 박찬경의 작품은 오히려 ‘낯선 희망’을 비판하고자 하는 태도이므로 서로 상충한다. 물론 전자나 후자 모두 큰 범주 안에 모아 놓아도 코에 거나 귀에 거나 부처님 손바닥이니 대세에 지장은 없겠으나, ‘근대의 초상’과 비교하여 왠지 혼란스럽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움이 이러한 서사성의 기획전을 시도한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이렇게 풀어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여건은 매우 빈약하다. 사설 미술관이 다루어야 할 기획이 아닌 것 같으나 역설적으로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문화적인 파급효과는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크다. 그러므로 리움의 저력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기관들이나 인력들과의 상호교류나 공조를 통해 보다 열린 미술관으로서의 보편성과 대중성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와 민족이 결부된 한 세기의 역사적인 서사성을 다루는 이러한 전시야말로 더욱 ‘복합적인’ 또는 ‘융합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이다.

 

지루할 틈이 없는 부정적이고, 허무하고, 모욕적이며 장난스러운 말들

<몸짓 1번, 2번, 3번> 프랑수와 모렐레 스튜디오 설치 전경 2009

지루할 틈이 없는 부정적이고, 허무하고, 모욕적이며 장난스러운 말들 Cul Con Non Nul

글 | 프랑크 고트로  ·   디종 르콩소르시움 디렉터

모든 시작에는 기준이 되는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술계에서 활동할 때 출발 지점을 이야기한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첫 번째 지점’, 즉 미술로의 ‘첫 번째 접근’이나 미술인들과의 ‘첫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내게 있어 그 첫 출발점은 프랑수아 모렐레였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곳이 바로 모렐레의 아틀리에였기 때문이다. 1976년 어느 날, 나는 비디오 인터뷰를 촬영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것은 파리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릴 그의 회고전에서 상영하기 위한 비디오였다.
모렐레의 작업실이 위치한 곳은 프랑스 서쪽에 있는 도시 숄레였다. 수공으로 만든 붉은 손수건(30×30cm 크기의 이 바둑판 무늬 손수건은 추상화에서 자주 쓰이는 주제이며, 특히 네덜란드의 대가인 단 반 골든은 1960년대 일본에서 이를 주제로 작업한 바 있음)으로 유명한 이 도시에서, 모렐레는 나무가 우거지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자택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모렐레는 지방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이 운영하는 유모차 공장의 주인으로 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예술에 한껏 심취할 수 있었다.

왼쪽 <후배위> 1986년 르콩소르시움에서 열린 개인전 <오르가즘 중인 기하학>의 출품작 | 오른쪽 <셋이 뒤에서 하는 체위> 1986 르콩소르시움 소장

프랑스 부르주아, 브라질에서 새로운 예술에 눈뜨다

이미 오래 전에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후예들의 기하학적 추상이 모렐레의 고향 숄레까지 알려져 있었다. 작가로 한참 성장하던 시기의 모렐레는 전쟁 직후의 앵포르멜 추상을 응용한 계열의 회화를 시도한 바 있다. 그러던 도중, 1951년 두 차례 떠난 브라질로의 여행(그에게는 가히 ‘그랜드 투어’라 할만한 의미가 있는)을 통해 그는 전혀 다른 세상에 빠지게 됨으로써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모렐레에게도 어떤 출발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막스 빌의 교차된 색채와 교묘한 체계로 구성된 예술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모렐레에게 스위스 출신의 구체예술가 막스 빌의 전시 사진을 보여 주었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근대기의 브라질에서는 트로피칼리즘(Tropicalism) 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트로피칼리즘은 자유의 운동이자, 아프리카계 아메리카문화와 유럽의 모더니스트 문화(건축, 시각예술, 문학, 그리고 가장 대표적으로는 시와 음악)를 결합하고자 하는 연대적 움직임이었다. 그리하여 만나게 된 트로피칼리즘과 취리히의 구체예술! 그것은 서구의 모더니티나 아방가르드 예술의 차디찬 표현에 곡선과 색, 감정과 관능을 가미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과 노예들의 북소리가 혼합된 양식을 생각해 보자.
모렐레는 속이 꽉 찬 상자와 운명의 장난을 모두 받아들였다. 가령 피카비아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에 리차드 폴 로스의 장엄한 정통 스위스 소스를 얹는 식이다. 프랑스인은 부랑아 가브로쉬와 대가 푸생을, 다시 말해 천한 것과 고귀한 것을 한 데 섞는 재능을 쥐고 있다. 그것은 비극과도 같은 행운이다. 구성을 갖는 추상과 주고 받는 숨 가쁜 말장난이라니! 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모렐레는 군수의 딸인 매력적인 다니엘르와 결혼했지만, 말장난 치는 유머 감각을 잃어버리는 법이  결코 없었다. 반항적 기질을 타고난 모렐레는 부르주아의 부조리함과 대담성도 내려놓지 않았다. 애당초 모렐레는 각종 난관을 자초했으며, 그들과 마주했다. 소위 미술계의 굵직한 거장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0˚와 90˚선의 2가지 교차 궤적> 네온 가변크기 1971(2011년 퐁피두센터 개인전 재설치 장면)

Less is More

모렐레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3년, 나는 3개의 수평선과 3개의 수직선을 써서 그림 한 장을 완성했다. 16평방미터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완벽했다. 거기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이후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회화적 표현을 사용한 작품 <16평방미터>(1953)는 이 예술가의 진실한 ‘발언’에 해당하는 것이다. 3번의 무(無)를 통해, 우리는 모든 것에 도달한다. 모렐레의 이 이야기에서 나는 스위스의 시인 오이겐 곰링거(볼리비아 태생의 구체시인)가 쓴 이하의 시와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S A U
A U S
U S A
S, A, U 라는 세 알파벳이 만들어 내는 세 쌍 배열의 구체시다. 독일어로 Sau는 ‘암퇘지’를 의미하고, Aus는 ‘~로부터 온’이라는 전치사인데 그렇다면 이 시구는 ‘USA에서 온 돼지’라는 뜻일까? 어쨌든 이 구체시는 최소한의 것으로 충분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잘 알려진 중국 속담에 ‘less is more’ 즉, 적을수록 많다고 하지 않던가!
1955~56년 즈음부터 모렐레는 미니멀리즘 회화, 소위 그것의 ‘시스템의 정신’에 가담한다. 어떤 작품이 그려지기 이전에 이미 완벽하게 구상하고, 그것이 정확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프로그램적 사고’에 동조했다. 하지만 모렐레에게 있어 시스템과 프로그램은 어떤 절대적인 선언으로서의 의미가 있기보다는 일종의 요령이자 기계이며 도구였다.  이후 모렐레는 숫자 파이(π)의 소수들과 전화번호부에 등재된 짝수나 홀수의 숫자를 이용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그는 선들의 짜임, 연결 부호를 그리거나 사전에 고정된 회전 앵글들에 따라 겹쳐지는 점들과 물결무늬 효과 등을 그렸다.
1960년에 시작한 시리즈 회화 작업인 <전화번호부의 짝수와 홀수에 따른 4만 개의 정사각형의 우연한 분할>에서는 2개씩 짝을 맞춘 여러 가지 색상들의 조합들(빨강과 파랑, 빨강과 갈색, 흰색과 밝은 회색, 검정과 짙은 회색, 마젠타와 파랑, 파랑과 검정, 빨강과 녹색 등)이 다양한 크기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1963년 파리비엔날레에서 한 전시공간의 벽 전체를 장식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나즐로 모홀리-나기가 1922년에 오로지 전화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하며 간판 제작소에 지시를 내려 완성했던 5장의 애나멜 그림 <전화 회화> 연작에 내재된 암시를 볼 수 있다.

<눈사태> 네온 400×400cm 1996(2011년 퐁피두센터 개인전 재설치 장면)

시류를 따르는 액티비스트

모렐레의 예술은 늘 시류(時流)와 함께한다. 혹은 그것을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예언적 제스처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옵아트 시대에는 빅토르 바자렐리의 무리가 구사했던 소위 ‘눈을 아프게 하는’ 효과들을 썼다. ‘ZERO’ ‘NUL’과 같은 각종 약자를 사용했던 1960년대에는 그 당시 활동했던 다양한 예술가 그룹들(당시에는 ‘집단’, 혹은 ‘단체’를 의미하는 ‘COLLECTIVE’라는 말을 아직 쓰지 않았다)의 변두리에서 훌리오 레 파르크, 가르시아 로시, 프란시스코 소브리노, 조엘 스탱, 이바랄과 함께 시각예술탐구그룹인 GR AV(Groupe de Recherche d’Art Visuel)를 창설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 회화는 이미 죽은 예술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다른 재료를 찾아야만 했다. 지금까지 모렐레가 쓰는 네온은 바로 그 새로운 재료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68년의 5월 혁명은 그들을 오갈 곳 없이 만들었다. 무기력 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고자 했던 사람들이 그들 없이도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렐레와 동료 작가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말이다. 결국 GRAV는 1968년 해산되었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 시작한 <지오메트리> 시리즈는 미니멀리즘으로부터 기하학적인 선들의 질서정연한 구조를 띠기도 한다. 그는 1986년 르콩르소시움에서 개최된 <오르가즘 중인 기하학>전에 하얀 캔버스를 사랑을 나누는 듯 두 장씩 혹은 세 장씩 포개어 만든 작품을 출품했다. <69> <정상 체위> <파이프(구음)> <후배위> <마차 체위> <셋이 뒤에서 하는 체위> 등의 작품은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암시하기도 했다.
모렐레 작품의 제목에는 청소년 같은 유치한 유머 감각과 말장난, 그리고 심오한 추상의 계획을 흔들어 놓으려는 미술적 장치들이 복잡하게 녹아 들어 있다. 이것을 ‘엉터리 프랑스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예술 파괴자의 ‘아무렴 어때?’ 같은 정신의 발로로 봐야 할까? 참으로 이상한 점은 이 이상한 프랑스어 때문에 모렐레는 예상을 뒤엎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준엄함으로 무장된 이 엄격한 아방가르드의 나라들에서 말이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네덜란드의 아방가르드 화가라면 대표적으로 테오 판 뒤스부르흐가 떠오르는데 그는 ‘구체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새로운 예술운동의 리더였으며, 전통적 이젤 회화를 지양하기 위해 대신 중립주의와 수학과 과학을 내세웠다. ‘구체예술’은 여전히 부르주아의 감수성으로 얼룩진 추상과 대면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판 뒤스부르흐는 다다이스트인 I.K. 본셋과 미래주의자인 알도 카미니와 함께 등장해 엄격했던 구체회화의 기준을 완화했다.
그러나 모렐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이 역설과 반전, 부조리,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에서 각종 횡설수설하는 예술들과 함께 크게 유행했던 개념놀이를 좋아했으며, 그러한 취향을 혼자서 잘 발전시켜 나갔다. 1882년 파리에서는 쥘 레비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련의 전시회들이 열리곤 했는데, 이른바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린 그림들’을 모아 소개하는 전시회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아카데미즘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했으며, 그들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나 격렬한 복수심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야유 섞인 빈정거림만 살짝 섞여 있을 뿐이다. 유쾌한 ‘프리-다다이스트’ 모렐레 역시 이러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다. 모렐레는 정부의 돈을 받고 초청되어 여기저기 공공장소에 그의 작품을 놓아달라는 청탁에 기꺼이 응하는 ‘공식적인 액티비스트’다.

최근 퐁피두센터 회고전 열어

지금 퐁피두센터에서 열리는 모렐레의 회고전에서는 1926년 출생한 이 노년의 작가에 대한 미술계의 최종적(물론 최종적이라는 말에는 오류가 있겠지만) 인식과 인정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대개 예술가에게 있어 이러한 회고전은 작가 자신에게 다소 지루하고,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2000년 퐁피두센터에서 회고전을 열었던  쿠사마 야요이는 전시를 요청받았을 당시 전시와 관련해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쿠사마 야요이는 과거의 영예로운 대가 중에서 특출나게 생기 넘치고 창조적인 예술가로 재평가받을 수 있었다.
모렐레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예술가가 본격적인 입체작업(설치나 환경)의 영역에서 활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실용적인 아상블라주의 기술을 선보이면서 그들에게 일을 의뢰한 공간에 맞춰 다양한 작업을 잇달아 행해왔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와 반대로 대칭적인 특징을 꼽아 본다면 쿠사마의 행보가 매우 형식적이었다면, 모렐레의 행보는 더욱 직접적으로 연대기적인 흐름을 지닌다는 것이다.
최근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프랑수아 모렐레는 그가 이제껏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일련의 공간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나이 많은 작가들의 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 예를 들면 젊었을 때 작품에서 조금 가져오고, 검증된 자신의 명작들을 대량 선별하고, 거기에 약간의 과도기 작업들과 실험들을 조금 끼워 넣는 식의 ‘표본추출법’으로 구현된 전시는 확실히 아니다.  
한편 모렐레는 그 입체적인 전시 구성의 연결 선상에서 또 다른 3차원적 제안들과 자신이 평생 탐구해 온 심대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63년부터 2011년까지 제작된 26점의 설치 작품이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본 전시를 위해 다시 설치되었다. 관람자는 공간을 두루 돌아다니며, 원로 작가의 새로운 발견에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는 구성에 참여했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GRAV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그러다가 마침내 푸른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네온의 비에 흠뻑 젖는다.
오랜 세월 동안 미술제도 안에서 활동했으며, 수백 회의 개인전을 치렀고, 공공미술 영역에서 상당수의 작업을 해온, 85세의 프랑수아 모렐레가 이제야 최근작(물론 여기에는 그의 과거의 작업들을 상기시키는 요소들이 존재한다)을 들고 한국에 데뷔했다. 유난히 표피적 모노크롬 중심으로 모더니즘이 전개되어 온 나라인 한국은, 지금껏 구성적인 속성을 지니는 구체예술보다는 미국의 명상적인 미니멀리즘 미술을 좋아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프랑수아 모렐레가 마땅히 받아야 했을 ‘따뜻한 환대’를 해 줄 시간이 왔다. 또한 이러한 예술도 보편적인 모던의 역사 속에 하나의 거대 주류로서 재위치 시켜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번역·이정연

프랑수아 모렐레(Francois Morellet)_1926년 프랑스 숄레 태생. 회화와 조작을 독학으로 익히고 25세인 1950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한국 전시는 통산 456번째 개인전이다. 1964년 카셀도큐멘타,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쳐 왔다. 최근 유럽 미술계에서는 모렐레 작업의 미술사적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2010년 루브르박물관은 모렐레에게 영구 설치 작업을 의뢰했으며, 올해 3월 2일부터 7월 4일까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재설치>라는 제목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큐레이터 30년, 새로운 꿈과 도전

대구미술관 전경. 대구미술관은 대구광역시 삼덕동 대구스타디움 부근 7만 여m2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됐다. 어미홀과 5개 전시실, 휴식공간과 강의실 등을 갖추고 있다. 단일 시립미술관으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큐레이터 30년, 새로운 꿈과 도전

글 | 김재석 기자

5월 26일 대구미술관이 개관했다. 김용대 관장은 ‘대구시립미술관 개관준비단장’에 임명되면서 1년 반 정도 대구미술관의 개관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개관 기자간담회 전까지 언론 인터뷰도 일체 거절한 채 완성도 높은 전시 준비에만 몰두했다. 김 관장은 “완전군장하고 가슴에는 훈장을 단 채, 마지막 전쟁터로 출격하는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했다”고 한다. 대구미술관 건립의 우여곡절을 아는 이라면 그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오랜 숙원 사업’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보다 적확할 수 있을까? 대구미술관 건립 사업은 1997년 대구미술협회와 작가 권정호 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지역 미술인들의 요구로 출발했다. 1998년 건립자문위원회를 구성, 1999년부터 미술관 건립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대구 지하철 참사, 대구시장 교체, 민간투자 방식인 BTL사업으로 미술관 건립 계획이 변경되는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걸림돌로 작용해, 2007년 기공식의 첫 삽을 뜨기까지 난항을 겪었다. 2009년 대구미술관 건물이 완공됐지만, 개관이 쉽지 않았다. 예산 배정, 소장품 부족, 관장 선임을 둘러싼 지역 미술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러저러한 난제가 병풍처럼 둘린 상황에서 대구미술관의 첫 관장을 역임한 그의 어깨가 꽤 무거웠을 터.

개관전 ‘기가 차다!’, 인문학적 코드로 한국미술을 조명하다

대구미술관이 개관과 함께 공개한 연간 프로그램은 대구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의 맥락에 결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관전 1부에서는 주제전인 <기(氣)가 차다>를 중심으로, 이강소, 리차드 롱, <Made in Daegu> 등 총 3개의 프로젝트 전시가 열린다. 10월부터 열리는 2부에서는 주제전 <삶과 풍토>, 데비드 네쉬, 김수자의 특별전, 대구 출신 작가 정점식 김종복의 2인전, 주경을 비롯한 대구의 근대미술 작가 6인전이 상설전으로 선보인다.
‘기(氣)’를 키워드 삼은 개관전은 시대를 초월해 동서양 미술에 내재된 ‘기’의 의미를 상호 비교하며 한국 미학의 특수성을 인문학적 코드로 조명한다. <기가 차다>는 풍수적으로 미술관의 ‘배꼽’인 제1전시실 초입에 설치된 이건용의 <신체항>으로 출발한다.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하종현 등의 모노크롬 계열의 추상회화와 박현기 이우환 심문섭 등 한국의 개념미술 작품이 ‘관계’를 맺으며 한 자리에 놓였다. 추사 김정희의 붓글씨와 로만 오팔카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 있고,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으로 출발한 전시 동선은 김아타의 <온에어 프로젝트>로 마무리된다. 김 관장은 개관전 기획의 출발이 ‘대구미술’임을 강조한다. “대구미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고심했습니다. 공부를 해보니 조선 후기까지 올라가더군요. 대구 출신의 석재 서병호가 떠올랐고, 그가 흠모한 추사 김정희와의 관계가 흥미로웠습니다. 아, 이건 인문학이다! 대구 출신의 한국 근대미술가부터, 박현기 이강소 곽훈 정병국 등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까지 대구를 관통하는 미술사적 흐름을 한 자리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개관전을 본 이들은 김 관장만의 색깔이 가장 잘 드러난 전시라고 입을 모았다. 그 역시 이번 개관전이 30여 년 넘게 큐레이터로 활동한 ‘프로 인생의 응축’이라 말한다. 국내 큐레이터 1세대인 그는 현직 국공립 미술관장 중 몇 안되는 큐레이터 출신이다. 부산시립미술관장을 역임했지만, 그에게 대구미술관은 완전히 다른 도전이었다. 미술관의 이름부터 성격, 전시공간의 활용 방안, 학예팀장을 비롯한 연구직 인력 구성, 소장품 정책 등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용대 관장을 미술의 세계로 인도한 이는 아버지의 친우였던 화가 하인두였다. 원래 작가를 꿈꿨던 그에게 하인두 선생은 큐레이터를 권유했고, 이후 혼자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1986년 삼성의 첫 큐레이터 공채 모집에 당당히 1등으로 합격, 큐레이터의 세계에 입문한다. “당시에 큐레이터 한 사람이 1년에 5개의 전시를 맡았습니다. 정신없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죠.” 이후 그는 인문학 철학 미술사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기획전과 세련된 전시 구성을 선보여 미술계의 호평을 받았다. 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2002년 기획한 <격조와 해학>전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김 관장은 유학을 하면서 한국적 미학의 정체성을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전세계 미술관을 다 돌아봤어요. 이제 우리만의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성에서 일하면서 외국 작품을 컬렉션할 때면, 한국 미학과 관련된 작품을 구입하자고 건의했습니다. 전 윤형근과 마크 로스코, 추사 김정희와 브라이스 마든을 충돌시키고 싶어요. 누가 센지 1대1 정면 승부를 보는 거죠. 그렇게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지점에 뭔가 새로운 의미가 생기지 않을까 늘 고민합니다.”

특별전 <리차드 롱> 전시 전경

소장품 등 산적한 숙제들… 미술관은 시민이 주인

김 관장은 향후 5년을 대구미술관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워밍업 기간’으로 계획하고 있다. 그는 세계적인 ‘네임 밸류’를 지닌 대구미술관이 목표다. “예산 문제가 있지만, 미술관 중앙 로비의 ‘어미홀’에 아니쉬 카푸어, 볼프강 라이브 등 세계적인 설치 작가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국제적인 이목을 끌고 싶습니다.” 테이트모던의 터빈홀을 연상케 하는 어미홀은 ‘어미’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세계적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위한 ‘인큐베이팅’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그는 애초에 있던 중앙홀의 계단까지 없애면서 공간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했다.   
그가 꿈꾸는 대구미술관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행정상의 문제를 지적한다. “대구미술관은 대구시 문화예술과 소속 사업소에 불과합니다. 제 직급이 4급입니다. 광주시립미술관 관장은 2급이에요. 전문가를 대우하지 않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창의적인 미술관 운영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미술관의 학예 연구와 경영의 균형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따끔한 지적이다. 개관 이후 많은 이들이 대구미술관의 접근성과 빈약한 소장품을 문제로 꼽았다. 그는 미술관의 미래를 보자고 말한다. “미술관을 찾는 시민을 위해 교통편을 확대할 예정입니다. 아직 미술관 주변이 휑하지만 5년 후에는 대구스타디움을 비롯한 주변 시설과 연계된 최고의 문화예술 공간이 될 것입니다. 소장품이 부족한 것은 예산 문제입니다. 보통 미술관이 소장품을 제대로 갖추려면 20~30년은 걸려요. 한동안 기획전 위주로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신중히 소장품을 수집할 계획입니다.”
김용대 관장은 무엇보다 미술관의 핵심이 시민을 위한 질 높은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좋은 전시만을 보여 주겠다는 것도 욕심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신조가 ‘높은 산, 구름 위는 늘 푸른 하늘이다’입니다. 최고의 작품은 미술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반드시 감동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그런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를 기획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 전시의 주인은 시민입니다.”

주제전 <기가 차다> 전시 전경

김용대_1955년 출생. 대구미술관 관장. 한성대, 건국대 교육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원, 삼성문화재단 아트프로젝트 팀장, 중앙대 예술대학 겸임교수, 부산시립미술관장,  APEC KOREA 정상회담 공간연출감독 역임, 현재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감정위원.

 

삶과 풍경 1970년대 이후의 흐름

브룩 앤드류 <애뮤 테마 공원> 2008~09 시드니현대미술관 전시 장면

삶과 풍경, 1970년대 이후의 흐름

글 | 글렌 바클리 · 호주 MCA 큐레이터

미술계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중심으로 존재할 수도, 예술가나 컬렉터 혹은 기관을 중심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미술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이러한 점을 반영하여 미술계를 하나의 영역이 아닌 서로 겹치는 여러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호주 미술계에 대한 정의 또한 다르지 않다. 호주 미술계에는 다층적이고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며, 현재 우리가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는 흐름이 시작된 시기로 볼 수 있는 1970년대 이래로 서로 상이하며 겹치기도 하는 여러 가지 흐름으로 분화되었다.
한때 호주의 미술적 실천에서 회화는 기본적인 양식으로 우위를 점한 장르였지만, 지금의 호주 미술계는 사진과 영상 등 다양한 예술적 형태들이 혼재해 있다. 예전에는 ‘변두리’에 머물렀던 장르인 사진과 영상이 지금은 미술의 중심부로 이동한 것이다. 1970년 이래로 호주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인 마이크 파(Mike Parr)의 생애와 작업은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일시적 수행적 양태의 작업을 진행했고, 이것은 지금도 그의 작업에 있어 중심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매체와 재료에 있어서는 퍼포먼스, 영상, 사진에서부터 드로잉과 판화처럼 전통적 창작 과정으로 여길 수 있는 매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변화를 거쳤다. 사실 그의 판화 작업은 호주 판화의 한 정점을 대표한다. 그가 캔버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판화가 존 로안(John Loane)과 협업하여 제작한 작업들은 판화 매체의 역작으로 남아 있다. 마이크 파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변화와 변동은 어떤 면에서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물론 개별 작가 차원에서의 이런 변화는 유일한 것이며, 그의 작업은 개념과 이미지 모두를 활용한 철저한 자아 분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다원적인 성격은 국제적인 유행과 흐름을 반영하고 그것의 변형을 보여 주는 호주 미술의 성격을 반영한다.

풍경화의 다양한 변주

호주 현대미술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세계적인 미술 흐름의 반영과 수용의 성격 대신 호주 현대미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차이점을 찾는다면, ‘토착민과 비토착민 사이의 교류와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 분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식민 지배자들에 의해 수입된 유럽 풍경화의 전통, 이와 더불어 회화에 기반한 미술적 전통 안에서 일종의 ‘국가적 미술’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대화 속에서 끊임없는 협상과 재협상의 과정을 겪었다.
1788년 영국이 호주를 식민화한 이래, 호주 미술에서 풍경의 묘사는 형태와 개념 면에서 다양한 양태를 거쳐 왔다. 여기에는 새로운 식민지의 경제적 지리적 잠재성을 지도로 만들기 위한 초창기의 지형학적 연구에서부터 ‘픽쳐레스크’나 인상주의와 같이 수입된 미술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범위가 포함된다. 20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모더니즘의 유래와 확립은 풍경에 대한 새롭고 혁신적인 접근을 가능케 했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작가는 멜버른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드니 놀란(Sidney Nolan)이다. 빅토리아주의 위메라 지방을 그린 1940년대의 초기작들, 그리고 호주 내륙 사막 지역을 그린 그의 작업들은 호주 풍경화의 발전 과정의 중요한 순간을 장식한다. 놀란의 사막 풍경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호주 특유의 심리, 즉 ‘내륙 지방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주는 광대한 국가이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해안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국제적인 이미지는 상상과 클리셰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인 거칠고 로맨틱한 ‘아웃백(오지)’을 출처로 해서 만들어낸 상징과 형상, 도상을 통해 구축되어 있다.
시드니 놀란보다 좀 더 젊은 작가인 프레드 윌리엄스(Fred Williams)는 이런 전통을 더 밀고 나갔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세대에 속한 그 어떤 작가보다도 풍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모너니즘적 표현주의의 원칙을 통해 작업하였고, 이와 함께 풍경을 본질적 요소에 이를 때까지 간소화시킨 미니멀리즘, 즉 구체적 풍경을 지평선에 대비되는 나무의 패턴이나 단색으로 보이는 대지에 흩어진 경관 같은 것들에 이를 때까지 축약한 거칠고 실용적인 미니멀리즘과 혼합했다.
성숙기에 이른 윌리엄스의 작업은 풍경에 대한 두 가지 접근 방법의 결합을 개념적으로 또 연대기적으로 대표한다. 그의 작업은 풍경에 대한 유럽식의 접근 방식을 어느 정도 집대성했으며, 관찰을 중심으로 하는 외광파 회화와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실험의 전통에서 나온 논리적 결론과 시각적 결론에 도달했다. 윌리엄스의 접근 방식은 풍경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단지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내가 호주의 황무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단지 그것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다.”1)
윌리엄스의 작업은 간소화의 미학과 형식상의 우아함에 있어 앞으로 다가 올 것들을 상당 부분 예견했다. 그의 작업은 특히 서부 사막 지역의 원주민 미술과 동시대 토착민 미술 운동의 등장을 예비했다. 윌리엄스의 후기 회화 작업들이 ‘겉껍질을 벗겨낸 풍경화’라는 말로 묘사된다는 점, 또한 거리를 두고 작업하는 그의 풍경에 대한 접근법이 토착민 미술의 접근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토착민의 체계 안에서 작가는 단지 밖에 나가 풍경 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으며, 복잡한 영적 정치적 신화적 체계의 일부분이 된다.

왼쪽·시드니 놀란 <Fist class maksman> 하드보드에 리폴린 에나멜 90×121cm 1946 | 오른쪽·이만츠 틸러스 <Nature Speaks: CH> 16개의 캔버스 보드에 아크릴릭과 과슈 102×143cm 2009

토착민 미술과 비토착민 미술 사이의 대화

동시대의 토착민 미술은 1970년대 초반 파푸냐 지역에 있는 멀리 떨어진 토착민 정착지에서 떠오른 캔버스, 아크릴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토착 원주민 공동체의 원로와 구성원들이 당시 학교 교사였던 제프리 바돈(Geoffrey Bardon)과 함께 일하면서 시작되었다. 애초 이러한 협업의 본질적인 목적은 일시적이고 수행적인  행위에 기초를 둔 시각 예술의 형태인 모래 그림과 원주민 의식에서 유래한 디자인을 좀 더 영속적인 형태인 회화로 전환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에서 만들어진 회화 작업들은 처음에는 정착지 주변에서 모은 판자와 폐품 위에 그려졌고, 이후에는 품질이 좋은 캔버스에 그려졌다. 이들이 수집했던 판자와 폐품들은 지금은 ‘파푸냐 보드’라는 이름으로 맹목적이고 열광적으로 수집된다.
비토착민 출신의 작가인 팀 존슨(Tim Johnson)은 1970~72년 앞서 언급한 마이크 파, 그리고 피터 케네디(Peter Kennedy)와 함께 시드니의 중요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인 인히보드레스(Inhibodress)를 설립했고, 1980년대 초에는 얼마 동안 파푸냐에서 거주하며 자신의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작업은 개념주의에서 출발해 회화로 복귀하며, 제프리 바돈으로부터 시작해 하나의 기술과 양식으로 발전된 파푸냐 운동의 개념적 의미와 유효함을 받아들인다. 또한 그는 파푸냐 공동체 주변에 모여 있었던 많은 중요한 작가들의 가까운 친구이자 협력자가 되었다. 이들과 존슨의 협력은 일종의 도용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작가와 작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교환에 더 가까운 것이다.
“1970년대에 젊은 작가로서 나는 프레드 윌리엄스가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호주의 풍경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나와 나의 예술적 동료들 중 누구도 호주 풍경화의 전통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 했다. 우리는 이 전통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개념미술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로 원주민 작가들이 이런 풍경화의 전통을 매우 인상적으로 다시 찾아 재해석했고, 윌리엄스의 작업에 뜻하지 않게 새로운 연관성을 부여했다. 보통 혼란스러운 패턴으로 이루어진 상형 문자를 조직해서 추상화시키는 윌리엄스 특유의 호주 황무지에 대한 묘사에서, 우리는 일종의 불가사의한 언어를 인지한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묘사된 자연이 ‘말을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한다는 것을 확인한다.”2) -이만츠 틸러스
때로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러한 교환과 도용은 이만츠 틸러스(Imants Tillers)의 작업에 있어서는 작가 특유의 핵심적 전략으로 나타난다. 틸러스의 작업은 ‘중심-주변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그의 작업은 보통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중심부에서 유래한 이미지를 출력된 형태로 재생산하여 주변부로 전송하고, 그 결과로 일어나는 이미지의 불안은 모방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적 시각 문화를 창조한다. 틸러스는 격자와 저렴한 캔버스 판을 활용해 다양한 출처의 이미지들을 뒤섞은 기념비적 작업들을 만들어냈다. 틸러스는 호주에서의 흑백 관계라는 영역으로 ‘엇나가면서’, 호주의 독특한 시각적 언어인 호주 서부 사막 지역 화가들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일부 호주 작가들과 학자들은 틸러스의 전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미술평론가 폴 테일러(Paul Taylor)는 틸러스와 그의 작업을 ‘백인 토착민’이라는 모순된 표현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이 모순적인 표현은 틸러스의 중요한 초기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이기도 하다.
브리즈번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토착민 혈통의 앵글로-셀틱 중견 작가인 고든 베넷(Gordon Bennett)은 훨씬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유효성을 가지고 틸러스가 사용하는 ‘인용(Appropriation)의 전략’을 활용한다. 틸러스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이미지와 개인적 이미지를 사용함에 있어 때로는 느슨한 인용의 전략을 취하고 토착민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베넷은 이러한 틸러스의 전략을 또 한 번 전유한다.
틸러스의 최근 작업은 풍경에 대해 직접적으로, 시적으로 응답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특성은 모두 프레드 윌리엄스와 같은 작가의 작업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찾아 낸 것이며, 틸러스가 현재 살고 있는 모나로 지역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틸러스의 새로운 회화 작업의 이러한 풍경은 강렬한 황금빛과 명징성, 맑고 신선한 공기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왼쪽·일디코 코박스 <Lulu> 나무에 유채 151.5×275cm 1999 안 루이스 AO 기증(2009) Courtesty the artist and Martin Browne fine art ⓒthe artist| 오른쪽·일디코 코박스 <위와 아래> 나무에 유채 122×94cm 2009 Courtesy of Hugo Michell Gallery, Adelaide

사막으로부터, 도시에서부터

“매우, 매우 많다. 아웰예(나의 꿈), 아를타톄예(펜슬 얌), 아르케르테(가시 악마 도마뱀), 은탕에(잔디 씨앗), 팅구(호주 원주민 신화인 ‘꿈의 시대’에 나오는 강아지), 안케레(에뮤 새), 인테퀘(에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작은 식물), 아튼웰레(콩깍지), 켐(얌 씨앗). 이것이 내가 그리는 것들이고, 매우 많다.”3) -에밀리 캐임 캔와리
호주 현대미술에 있어 토착민 미술과 비토착민 미술 사이에 일어난 또 다른 대화는 형식적 관계 혹은 미학적인 관계에 기반한 교류이다. 호주 중부에 있는 토착민 공동체인 유토피아 출신인 에밀리 캐임 캔와리(Emily Kame Kngwarreye)는 1980년대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점과 패턴이 풍부하게 그려진 표면에서부터 깊은 모노크롬의 행위적 추상에 이르는 여러 가지 스타일을 빠르게 섭렵했다. 에밀리 캐임 캔와리의 영향력은 글로리아 페티야레(Gloria Petyarre) 같은 토착민 작가들뿐만 아니라 일디코 코박스(Ildiko Kovacs)같은 비토착민 작가들에게까지 미친다. 일디코 코박스의 경우에는 풍경과 추상작업을 진행하며, 이 같은 형태의 작업에 있어 작가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토착 미술의 힘과 독창성을 마주하고 인정하며 작품에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도시에서 외진 공동체에 이르는 호주의 많은 부분으로 퍼져나간 예술 운동, 그리고 예술과 관련된 경제가 사막 지역으로부터 자라났다. 이와 동시에 ‘어반 아트’ 운동 역시 시작되었다.(모든 지역 사회가 어떤 점에서는 도시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운동에 속하는 작업의 특징은 개인적 문화적 차원 모두에서 정치적인 관계에 더 직접적이고 뚜렷하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매체로 나타나며 특히 사진과 영상에 치중한 작업이 많다.
토착민인 위라쥬리족 출신으로 멜버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인 브룩 앤드류(Brook Andrew)는 장르의 경계를 쉽게 뛰어넘으며 작업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토착민 문화에 녹아 있는 문화 언어 미학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네온 조명, 사진, 판화, 때로는 거대한 벽면 드로잉을 함께 사용한다. 그가 만든 작업 중 상당수는 옵아트적인 추상적 모티프를 사용하는데, 이는 뉴사우스웨일즈의 유서 깊은 토착민 자치구 출신의 작가들이 만든 전통적 나무와 방패 문양에서 유래된 것이다.

마 그라운즈 <꼭대기 끝의 조각> 1976

다양한 문화의 혼재, 미술의 정체성

호주 미술에서 풍경에 대한 묘사는 그것의 보호에 대한 강조와 엮여 있다. 지난 40년간의 호주 미술을 분석한다면 어떻게 풍경화가 상당히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갈등의 장이 되었는지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1950년대 유년기 동안 내 두 친구와 나는 조그마한 오두막을 많이 만들었다. 우리는 물탱크 받침대 밑에 오두막을 지었고, 뒷마당에 가득 찬 붉은 흙 위에 평면도를 새겨놓곤 했다. 과일 나무 옆에 있는 풀밭에는 평평한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늘진 시더나무 아래에 나무집을 지었다. 수확철이면 큰 오두막을 지었는데, 포장용 나무 상자를 쌓아 벽, 바닥과 천장, 벽과 현관을 만들었다. 이 오두막들은 마을에 있는 로빈 베일 협동조합에 수확물을 나르기 위해 상자들이 마른 과일로 채워질 때면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우리는 커다란 레드검 강의 모래톱에 있는 텅 빈 나무둥치에서 놀았다. 거기에 귀를 맞대면 저 위에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4)
인용한 보니타 일리(Bonita Ely)의 글은 그와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 준다. 보니타 일리에게 있어 풍경화는 깊숙이 내재한 역사가 존재하는 장소이며, 정치적 장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인 공간이다. 일리는 당대의 환경 변화를 다루는 이미지를 만들어 왔으며, 환경을 작성하고 기록하고 그 변화에 대응하는 장치로서 사진을 사용한다. 그녀와 동시대의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리는 작가로서 긴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고정되고 일시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의 혼합이 가진 잠재성을 탐구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수채화 사진 설치 영상 퍼포먼스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를 아울러 작업을 진행한다.
일리의 작업 중 상당수가 머리 강을 소재로 사용한다. 머리 강은 뉴사우스웨일즈 주와 빅토리아 주의 거대한 긴 내륙 평야를 가로질러 흐른다. 이 강은 농업과 산업 분야의 중요한 수자원일 뿐 아니라 여전히 강을 따라 살고 있는 토착민들에게는 큰 중요성을 띤다. 보니타 일리는 빅토리아 주의 시골 지역에 있는 로빈베일의 강가에서 자랐다. 그곳의 풍경과 유년 시절은 지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의 발상과 주제가 솟아오른 원천으로서 일리의 예술적 실천에 녹아들어갔다. 지난 몇 년간 일리의 전시 경력은 두드러졌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이유는 환경이 가진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정치학에 대해 그가 지속하고 있는 연구에 세간의 새로운 관심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는 그녀의 머리 강 관련 작업이다. 사진 기록, 에칭, 퍼포먼스, 회화와 영상 작업으로 구성된 일리의 머리 강 작업은 최근에 시드니공과대학과 멜버른 RMIT대학에서 있었던 전시 등에 포함된 바 있다.

케할드 사브사비 <Naqshbandi Greenacre Engagement> 영상 2010 Commissioned by Campbelltown Arts Centre for Edge of Elsewhere 2011. Courtesy the artist

차이와 다양성의 풍경

호주 미술에는 풍경에 대한 상징적 독해와 문화적 독해가 혼재하고 있다는 점에 덧붙여 다루어야 할 점은 호주라는 국가의 현실에 관한 것으로, 호주를 문화적 언어적 다양성을 띤 탈식민적 사회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래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호주에 자리를 잡고 이곳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기 위해 이주했다. 이민자 유입의 초창기에는 인종차별적인 백호주의에 따라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유럽 출신의 백인이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법 이민과 관련된 긴장 관계, 이른바 ‘보트 피플’이라고 불리는 이들에 대한 갈등은 이민자들이 호주 사회를 침략한다는 불안이 팽배했던 슬픈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 백호주의 정책이 폐지되었고, 이로 인하여 아시아 중동 태평양 아프리카 지역 출신의 이민자들이 호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시 이민자들의 숫자와 인종적 구성에 있어 큰 변화를 일으켰다.
백호주의 정책의 폐지로 시작된 문화의 혼재는 한편으로는 긍정적 변화와 차이를 가져다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충돌하는 사회적 불안을 초래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차이에 대한 인정은 호주 사회가 앞으로 어떤 사회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호주의 시각 문화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급진적으로 확장시켰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주는 인구의 대부분이 멜버른, 시드니, 브리즈번이 있는 동쪽 해안가에 살고 있으며, 교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교외의 풍경은 자체적으로 세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호주의 기풍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통찰이 교외의 공동체 안에서 다듬어지고 있다.
할레드 사브사비(Khaled Sabsabi)와 같은 작가들이 맞딱드리는 도전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향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쌓아나가는 일이다. 레바논 출신인 사브사비는 호주의 주요 도시인 시드니의 서부지역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시드니의 서부지역은 매우 다양한 지역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어 어떤 면에서는 ‘제2의 도시’로도 여겨지는 곳이다. 사브사비는 자신이 속한 시드니 서부의 지역 공동체를 작업의 주된 소재로 사용한다. 그의 작업은 이슬람의 영적인 측면에서부터 작가 자신이 지금도 진행 중인 수피주의 운동과의 협력을 거쳐, 자신의 모국인 레바논의 강한 행동주의적 정치성, 그리고 멀리 떨어진 그의 새로운 고향에서 이 정치성이 가지는 반향을 소재로 다룬다. 그의 작업은 가족과 전통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며, 역설적이게도 불편함을 자아내는 동시에 차분한 느낌을 안겨 준다. 작업에 활용하는 매체에 있어서 그는 주로 영상과 소리를 이용한다. 작품의 관객은 전 지구적 디아스포라에 속한 사람들로, 현재 작가가 귀화한 새로운 고향을 역동적인 곳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이들이다.
다른 모든 나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호주의 현대미술이 무엇인지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임무일 것이다. 특정한 국가에 대한 어떤 개념을 통해서 문화를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며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도하는 것은 흥미로운 지적 활동이다. 이 글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호주의 현대미술을 ‘풍경’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한정시켜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호주 현대미술의 의미와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 | 번역 ·  박재용

 주
1) 패트릭 맥클로에, 《프레드 윌리암스 1927~1982)》, Murdoch Books, 멜버른, 2008
2) 이만츠 틸러스, 작가 노트 중, 2011 애들레이드 그린어웨이아트갤러리 개인전
3) 에밀리 캐임 캔와리, 로드니 구치와의 인터뷰, 번역 캐슬린 패트야레
4) 2010년 11월 필자와 주고 받은 이메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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