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Magazine

Art in Culture

2011.05

Abstract

특집 "Shall We Dance?" ART on STAGE 최근 미술에서 연극 무용 음악 등 공연예술의 형식을 결합하는 작품이 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2007년에 출범한 『페스티벌봄』이 미술가에게 전시장이 아닌 '무대'에서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새로운 장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현대무용이나 실험극을 하던 공연예술가가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8년 개관 이후 해외의 주요 퍼포머들을 초대했으며, 『플랫폼서울』과 『요코하마트리엔날레』 등에서도 공연예술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다. 이러한 대규모 행사 외에도 미술가들이 개별적으로 공연 형식의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경우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형식을 가리켜 '다원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시대미술의 최전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 예술적 실천은 그 정확한 명칭에서부터 이론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아직은 '논쟁 지대'에 있다. art는 장르간 '융합'과 '통섭'의 코드를 내세우는 '무대 위의 예술'에 주목해, 국내외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화보로 소개하고, 전문가들의 논고와 현장 발언을 싣는다.

Contents

01    표지 라 리보 <래핑 홀> 퍼포먼스 2008 백남준아트센터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요즘, 미술계 이슈가 뭡니까?  김복기

38    핫피플  
    옌스 호프만_창조자로서의 큐레이터  김재석
    나카무라 마사토_대재앙에서 예술을 보다  김수영
    지명문_미디어아트의 새 파트너  장승연
 
42    프리즘    
    약찰 문화재 반환, ‘명분’과 ‘실리’ 찾기  이광표
    다이나믹 코리안, 나는 ‘문화 외교관’이다!  선승혜

48    포켓 속〉〉〉디카 속〉〉〉이미지 채집  노석미

66    포커스
    도윤희展|김혜련展  이선영    
    구본창展|한성필展  진휘연    
    권순영展|오용석展  정현
    안필연展  윤진섭

82    특집  “Shall We Dance?” ART on STAGE
    (1)Artist on Stage 19
    홍성민, 케런 시터, 테렌스 고, 서현석, 남화연, 양아치, 라 리보, 정서영
    김홍석, 도라 가르시아, 윤동구, 아니 비지에와 프랑크 아페르테, 로메오 카스텔리
    임민욱, 정금형×이정우×잭슨홍, 양혜규, 정연두, Sasa[44], 마시모 푸를란
    (2)‘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의 전쟁  문지윤
    (3)왜, 다원예술인가?  프리 라이젠, 김성희, 한스-페터 리처, 정연두

119     테마 스페셜  추상하라!
    (1)화보: 4가지 키워드로 본 추상하라!展  편집부
    (2)소장품 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  유진상
    (3)구상을 추상하기, 추상을 구상하기  심상용
    
136    해외 작가  아이작 줄리언
    만 개의 물결, 비디오아트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  서현석

146    리포트  2011창원아시아미술제  
       ‘셀카’로 찍은 아시아 근대의 얼굴  박천남

152    동방의 요괴들
    또 다시 ‘요괴들’이 출현하다  김지연
    
156    오후의 아틀리에  나의 환경적 촉각  이옥련

158    크리티컬 포인트  
    관계미학, 그 이후  김성원

166    전시 리뷰
    인터뷰|장종완|근대 일본이 본 서양
    바늘하나 들어 갈 틈|노상균|임선영|육근병
    김상돈|김용식|임태규|성낙희|이소연    

178    전시 프리뷰
    
182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관계미학, 그 이후

피에르 위그 <황금양털> 1993

관계미학, 그 이후

글 | 김성원 ·  전시기획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1990년대 현대미술 비평서인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대미술 현장에서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관계미학》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들이 현재 미술현장의 선두 그룹이라는 점이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리암 길릭, 피에르 위그, 필립 파레노, 더글러스 고든,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스터, 카르스텐 횔러, 마우리치오 카텔란, 호르헤 파르도 등을 비롯한 많은 작가의 미술계 입지와 영향력을 감안할 때 《관계미학》의 파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관계미학》에 대한 여타 반론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작가들의 성공(?) 여부와 어느 정도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관계미학》에서 거론되는 작가들은 대부분 1996년 보르도 현대미술관(CAPC)에서 니콜라 부리오가 기획한 <트래픽(Traffic)>전을 계기로 그 당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예술 실천들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트래픽>전 이후 이들의 성공 또한 반드시 《관계미학》이란 후광(?) 때문만은 아니며, 이들의 개별적 행보와 작업세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메이저급 작가들과 스타 큐레이터의 상관관계를 떠나서, 《관계미학》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작가들 작업의 태동기로 돌아가 봐야 한다.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미학》에서 그 당시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를 최소화하며 새로운 시도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평적 기준들을 시기적절하게 제안했다. 그는 <트래픽>전 전후로 이들의 예술 행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평 텍스트들을 미술잡지들에 발표했고, 이러한 텍스트들로 구성된 단행본 《관계미학》이 1998년 레프레스뒤레알에서 출간됐다. 현장비평이란 100년 뒤를 되돌아 보는 예술 이론과는 다르다.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탄생한 예술 형태에 새로운 이론적 근거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비평은 반론과 공격에 스스로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자신의 입장을 가장 먼저 선언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론적 근거가 출중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관계미학》은 현장비평서로서 1990년대 등장한 과거의 기준으로는 분명하게 파악이 안 되는 ‘과정적이고 행동적인’ 예술 행위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했다.

왼쪽 · 제스 브린츠 <Give the kid a break> 1993 | 오른쪽 · 핸릭 플랜지 야곱슨 <Watch out> 1994

관계미학을 둘러싼 논쟁

《관계미학》이 공격당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관계예술의 미학적 판단과 정치윤리적 판단의 문제에 있다.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미학’을 사회적 컨텍스트 안에서 인간 상호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예술작품이 상상하고 유발하는 예술 형태를 판단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작업은 각기 다른 이슈 관심 방법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이들 작업의 공통적 접지는 현실이며 주된 관심사는 사회 안에서 생성되는 인간 상호관계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이론은 사회적 컨텍스트에 기반을 두고 인간 상호관계 전반을 실질적 혹은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관계미학》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은 사회성의 모델을 생산하고, 이 사회성의 모델은 현재를 바꾸거나 현재에서 스스로 번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계예술(Relational Art)은 즉각적으로 ‘관객참여’와 ‘사회참여적 예술’이라는 특징을 호출한다. 이것에 대한 다른 관점들과 시각의 차이들이 생겨, ‘관계미학’은 공격을 받고 있기도 하다.
2004년 클레어 비숍은 <적대감과 관계미학(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이란 에세이를 통해서, 《관계미학》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 상호관계’와 ‘관객참여’를 민주적 윤리 혹은 도덕의 차원에서 비평하고 있다. 클레어 비숍은 대화와 공존을 허용하는 모든 교류와 관계는 민주적이며, 그래서 관계예술이 민주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언급한다.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평화적 공존과 교류뿐만 아니라 갈등과 대립도 포함하고 있고, 《관계미학》은 현실의 이러한 조건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민주적인 것을 기본으로 하는 이러한 ‘관계’의 퀄리티인데, 이것은 《관계미학》에서 전혀 검토되지 않았으며, 만일 관계예술이 인간관계를 생산한다면 논리적으로 그다음 질문은 어떤 타입의 관계가 생산되며, 누구를 위한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클레어 비숍은 니콜라 부리오가 《관계미학》에서 관계의 유형과 그것이 탄생되는 환경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음에도, 작품이 생산하는 관계와 그 형태에 대한 분석을 정치윤리적 판단과 미학적 판단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클레어 비숍은 관객을 위해서 식사시간을 기획하고, 휴식공간을 만들며, 미술관을 아파트로 전환하고, 소규모 커뮤니티 활동을 활성화하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업에서 평화적 공존, 화목 추구, 선행, 조건 없는 만남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 효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의 효력은 정치, 윤리 혹은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그것의 실질적 효력이 발생하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만일 이러한 맥락에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업을 본다면, 그의 작업에서 발견될 수도 있는 공존과 교류의 화목함, 초대와 선물의 무상거래에 대한 정치윤리적 효력이 공존과 교류의 형태를 파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자크 랑시에르도 그의 저서인 《관객의 해방(Le spectatuer emancipe)》에서 관계예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참여적 예술에서 오래전에 시효가 소멸한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인증 모델을 거론하며, 이러한 예술이 실질적 효력을 위한 교육 모델로 비치는 것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관계예술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들은 그 누구도 예술의 실질적 효력을 현대예술의 프로그램으로 표명한 적은 없다. 필자가 파악한 관계예술, 또 거기에 거론된 작가들의 작업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그것의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정치의 관계 형태들을 ‘시각적 현실’로 전환하는 데 있다. 작가는 형태를 생산하는 것이지 그것의 실질적 효력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필립 파레노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입구의 차양> 2008

관객참여와 이행성

자, 그러면 이제 니콜라 부리오가 《관계미학》에서 분석한 관객 참여에 관해서 살펴보자. 1990년대 초반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탕더미 혹은 포스터 더미들의 설치 앞에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커다란 냄비가 놓인 철재 곤돌라와 인스턴트 수프박스 앞에서, 또 리암 길릭의 미니멀한 구조물 앞에서, 관객은 과연 무엇을 보아야 하며 기대하는가? 니콜라 부리오는 1990년대 예술에서 관객의 역할을 작가가 생산하고자 하는 예술 형태와 연결시킨다. 사탕이나 포스터를 집어 가는 관객의 행위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행위로 인한 예술 형태의 변화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 이제 더 이상 ‘사적이고 독립된 공간’으로서 그 어떤 관조의 대상을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술작품들을 구성하는 원칙은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의 연쇄작용에 의거하고, 작품은 형태를 생성하는 역동적 구조가 된다는 것을 포착했다.
그렇다. 1990년대 작가들은 ‘형태를 생산할 수 있는 역동적 구조’를 만들었고, ‘관계미학’은 이러한 작품들이 상상하고 도출시키는 형태에 대한 미학적 판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식사시간 휴식공간 커뮤니티 활동, 필립 파레노의 축제 시위 연설,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스터의 자서전 써 주는 사무실, 크리스틴 힐의 여행사, 리암 길릭의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플랫폼은 관조의 대상이 아닌 사용 가능한 혹은 참여해야 하는 역동적 구조들이다. 그리고 이 구조들은 인간 상호관계, 교류, 공존,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1990년대 예술에서 관객은 사회적 관계와 상호교류를 활성화하는 핵심적 구성원들이고, 이들은 직접 작품에 참여하면서 작가가 제안하는 역동적 구조 안에서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하며 사회적 모델로서의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니콜라 부리오는 외형적으로는 그 어떤 유사점도 찾아볼 수 없는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리트리트 티라바니자, 리암 길릭,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스터, 필립 파레노, 피에르 위그 등의 작업에서 관객참여와 이행성(Transitivity)이라는 공통분모를 제안한다. 많은 이들이 주지하고 있겠지만, 관객 참여와 오브제의 이행성은 뒤샹의 ‘예술함수(Art Coefficient)’, 그리고 1960년대 행위예술과 플럭서스, 또 비단 미술뿐만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혹은 ‘독자의 탄생’,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Open Work)’ 등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됐던 이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니콜라 부리오의 이론과 그가 언급하고 있는 1990년대 일련의 작가들의 작업에서 핵심적 요소로 등장하는 관객 참여와 이행성은 과거의 이러한 제안들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인가?
관계예술의 관객 참여와 이행성의 대략적 백그라운드는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그 현실에 있다. 급증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 인터넷, 멀티미디어 시스템의 거대한 집단적 욕망 앞에서 작가들은 이러한 거대 욕망과 반대되는 리듬으로 인간 상호관계를 생산하는 소규모의 화목한 공간, 상호교류, 유연한 시나리오를 제안하고 있다. 《관계미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1990년대 작가들의 작업은 뒤샹의 ‘예술함수’가 열어 놓은 무한한 가능성과 1960년대 미술의 개념적 과정적 측면을 연장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서로의 시대가 대변하는 미학적 이념적 그리고 관계적 영역의 참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품의 이행성과 관객참여를 공통분모로 하는 관계예술은 인간관계 영역에서 참조할 수 있는 모든 유형, 즉 커넥션, 랑데부, 협업, 계약, 미팅, 시위, 축제, 게임, 초청, 화목한 장소 등이 이제는 하나의 완벽한 ‘예술적 형태들’이 되었다는 것 또한 입증하고 있다.
니콜라 부리오는 이러한 작가들의 프로젝트는 현실과 함께 그리고 현실 속에서 쓰이지만 현실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 강조한다. 그는 이것을 ‘실행적 리얼리즘(Operative Realism)’이라고 부른다. 실행적 리얼리즘은 관계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행적 리얼리즘은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을 과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재현하지 않으며, 현실 속에 존재하는 관계적 형태와 함께 예술적 생산 장치로서 활동 모델을 고안하는 데 있다. 이들의 새로운 ‘재현’ 방식은 현실 속의 다양한 삶의 유형에서 예술적 모델들이 작동할 수 있는 관계 혹은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다.

찰스 에이버리 <무제(The Head of an Aleph)> 2008~2009

‘예술형태’와 정치적인 것

《관계미학》은 또한 바로 1990년대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이 생산하는 형태와 그것의 정치적인 것과의 관계를 분석한다.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미학》에서 이 ‘형태(Form)’에 관한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관점에서 1990년대 예술실천들의 형태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작품이 형태를 생산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또 그것을 작품과 감상자 간의 전통적 소통방식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면, 1990년대 예술실천들에서 생산되는 형태는 ‘관계와 교류’에 의해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물론 관계와 교류에 의해 탄생하는 형태는 예술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삶의 형태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1990년대 작가들은 삶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와 교류를 탐구하며 그것을 하나의 예술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니콜라 부리오는 오늘날 예술이 그 어떤 민주적 윤리성이나 도덕성의 환기와 같은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도 없으며, 미래를 준비하거나 예고하는 선구자적 입장도 벗어 던졌다고 강조한다. 그는 예술이 정치적인 것을 대신할 수가 없다면,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와 대안은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파악한 정치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를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서 가능한 모델을 제안하는 것이다.
니콜라 부리오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모더니티의 목적론적 합리주의라는 한 버전이 종결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모더니티의 정신 그 자체가 종결된 것은 아니다. 그는 오늘날 작가들에게 모더니티는 주어진 문화를 뜯어고치고 재생하며 일상을 창안하고 경험된 시간을 각색하면서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탄생하는 ‘예술 형태’는 스타일과 서명의 개입으로 그 안에 갇혀 있는 오브제와는 달리, 예술적이든 그렇지 않든 다른 구성물들에 의해 예술적 제안이 유지될 수 있는 마주침과 그것의 역동적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우발성의 유물론과 마르크스의 사회적 간극을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예술형태는 요소들의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 일상의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과는 반대되는 지속적 시간, 모든 이미지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발생하는 유대감, 인간 상호교류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에 의해서 탄생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마치 우리가 완결되고 결정적인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게 하며 변하는 것은 단지 그것의 부수적 요소라는 것을 강요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이러한 불변의 메시지를 주장하면 할수록 오늘날 현대미술은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형태들, 규칙들, 제도들의 ‘상황적이고 과도기적 본질’을 지속적으로 표출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1990년대 작가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불완전한 세계이다. 이를 인식하고 이 세계의 불완전함과 어떻게 협상하는가에 그 지향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작가들의 예술 실천은 이 세계가 구축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래서 연출이 가능하고 각색할 수 있으며, 편집과 조합에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관계미학, 그 이후

이후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미학》을 연장하는 저서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Culture as Screen play: How Art Reprograms the World)》을 근간으로 2004년에 팔레 드 도쿄에서 <플레이리스트(Playlist)>전을 기획했다. <플레이리스트>에 초대된 작가들은 존 암리더, 리차드 프린스, 캐롤 보브, 샘 듀런트, 베르트랑 라비에, 데이브 뮬러, 세르클 라모 나슈, 앨런 루퍼스버그, 부뤼노 페나도 등이다. 이들의 작업은 모두 이미 생산된 재료들을 재생산 재활용 재편집 믹스 리믹스 샘플링 등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 《관계미학》이 오늘날 작가들은 왜 사회성의 모델을 생산하는가, 또 왜 인간 상호관계 영역에 천착하는가를 질문한다면, 《포스트프로덕션》은 인터넷 시대의 네트워크가 유발하는 지식의 형태란 무엇인가, 어떻게 문화적 혼돈을 헤쳐 나갈 것인가, 어떻게 여기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유추할 수 있을지 질문하고 있다.
《포스트프로덕션》에서 다루고 있는 예술 형태는 기존의 작품들을 재편성하거나, 역사화된 형태와 스타일을 자신에게 맞게 재생산하며, 영화 이미지들에 다른 요소를 첨가 혹은 삽입하고, 사회를 형태생산을 위한 레퍼토리로 사용하며, 패션과 광고계의 요소들을 재활용한다. 이들 각각의 작업 형태는 시각적으로 매우 이질적이지만, 공통점은 ‘이미 생산된’ 형태들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손대지 않은 재료에서 창조하거나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반면, 엄청난 양의 생산의 흐름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관계미학》(1998)과 《포스트 프로덕션》(2002) 이후 최근 니콜라 부리오는 《라디컨트(Radicant)》(2009)라는 비평서를 내놓았다. 《라디컨트》는 2009년 테이트미술관에서 열린 테이트 트리엔날레의 <얼터모던(Altermodern)>전의 컨셉트를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하며 이론화한 비평서다. ‘얼터모던’은 문자 그대로 모더니티의 대안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미학》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모더니티의 정신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며 연장하는 방법을 바로 이 ‘얼터모던’에서 찾았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풍토, 습관, 사유방식과의 단절, 그 파열된 접점에서 생성된다는 일종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라 부리오가 《라디컨트》에서 ‘얼터모던’이 열어 놓은 질문들은 과연 새로운 모더니티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이것은 어떠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어떠한 형태일까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니콜라 부리오에 따르면, ‘얼터모던’은 군도(archipelago)의 형태이다. 이러한 군도적 사고와 그것의 상호연결이 유발하는 특이성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또한, ‘얼터모던’ 시대에는 탈식민주의, 탈서구주의 등의 ‘탈-(Post-)’에서 벗어나 소군도처럼 존재하는 인간공동체 간의 지속적 번역과 협상의 수평적 공간이 중요해진다. 서구 주도적인 세계가 아니라 비서구권에서 새로운 근거들을 정립하는 글로벌 모더니티의 도래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미학》과 《포스트프로덕션》이 서양철학 전통을 토대로, 서구 유럽의 모더니티의 다양한 양상, 문화적 전통의 변화를 배경으로 1990년대 이후 현대미술을 분석했다면, 《라디컨트》에서는 이원성의 사유에서 출발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풍토와 결별을 고한다. 그는 완전히 다른 토양과 사유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군도 형태와 사유방식이라고 제안한다. 《관계미학》에서 작가들은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사회성의 모델을 고안하며,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작가들은 문화 영역에서 특이한 경로를 생산하는 ‘기호 항해사’가 되며, 《라디컨트》에서 작가들은 각기 다른 시공간을 유랑하며 각기 다른 문화적 종자들의 다수성 사이에서 모종의 협력을 시도하고 지속적 번안을 제안하는 ‘번역가’가 된다.

자연에 각인된 시간의 기호

왼쪽 · 도윤희 <눈이 내린다. 빛이 부서진다.> 캔버스에 유채 색연필, 금박, 바니시 75×160cm 2011 | 오른쪽 · 도윤희 <Unknown Signal> 캔버스에 한지, 디지털프린트 아크릴릭 설치 장면 2010

자연에 각인된 시간의 기호

글 | 이선영  · 미술평론가

자연의 풍경에 기초를 둔 도윤희와 김혜련의 작품은 단순한 자연의 외관이 아닌, 그 내부에 새겨진 시간의 기호(Chronosigne)를 그린다. 여기서 공간적 범주는 끊임없이 시간적 범주로 전이된다. ‘Unknown Signal’이라는 부제를 가지는 도윤희의 전시에서는 시간 기호들이 얇은 피막들로 공간을 중층화시킴으로써, ‘그림에 새긴 문자’라는 부제를 가지는 김혜련의 전시에서는 시간 기호들이 풍경을 역사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전이가 이루어진다. 도윤희의 작품은 모노톤이고 김혜련의 작품은 자연색을 뛰어 넘는 화려함이 특징이다. 둘의 풍경에는 흑백과 컬러 사진의 차이 같은 것이 존재한다. 도윤희의 풍경이 보다 존재론적이라면, 분단지대를 그리는 김혜련에게 풍경은 보다 정치적이다. 그러나 관객이 그들의 그림을 보면서 정지된 한 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타는 어떤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점은 동일하다.
여러 시간대가 겹쳐진 화석 같은 표면을 보여 주는 도윤희에게 시간은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차이를 두고 끊임없이 회귀하는 것이다. 도윤희의 그림은 오래된 화석 같은 고색창연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계속 열리는 터치스크린이나 인터페이스, 또는 영화 같은 움직임이 내재해 있다. 시간은 추상적 단편들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흐름 중에 있다. 바니시로 마무리한 그림의 층은 또 다른 시작을 이어감으로써, 예기치 못한 만남과 공존이 가능해지게끔 한다. 도윤희의 작품에서 시간의 공간화가 이루어진다면, 김혜련의 작품에서는 공간의 시간화가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풍경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문구들에는 분단의 상처가 아로 새겨져 있으며, 여기에서는 그 풍경의 과거가 회상될 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예견된다. 기억과 망각의 교차로 직조되는 풍경 속에서, 작가는 고고학자처럼 역사의 흔적을 발굴한다.

자연 요소, 존재들의 재구성

도윤희의 풍경은 물 햇빛 얼음 먼지 같은 자연의 요소로 재구성된다. 작품 제목에 붙은 ‘Being’이라는 단어처럼 이 요소들은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다. 낡은 종이 위에 색연필 연필 잉크 등으로 그린 <무제> 시리즈에서 작가는 다양한 입자와 율동감 있는 선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요소를 탐구한다. 시간적 요소는 일부러 낡게 만든 바탕 종이에 잘 나타나 있다. 낮과 밤으로 대별될 수 있는 시간대는 빛과 어둠으로 조율된다. 대별되는 시간조차도 한 순간 고정됨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된다. 밝음에는 어둠이, 어둠에는 밝음이 내재해 있다. 도윤희의 작품 제목과 작가 노트는 언제나 역설로 가득하다. 작품 <백색 어둠>은 산란하는 생선알 같은 밝은 입자들이 공간을 잠식해 들어간다. 포도알 같은 입자들이 흐릿해지거나 흩어지려는 작품 <어떤 시간은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에서, 작가는 어둠을 ‘빛의 응축’으로 간주한다. 금종이와 색연필을 사용한 작품 <눈이 내린다. 빛이 부서진다.>는 환희로 산산이 흩어지는 입자를 보여 주는데, 여기에서 자연의 요소는 정신과 감성의 요소이기도 하다.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자연처럼, 도윤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파동적 요소에는 날카로운 선의 흐름이 내재해 있다.
작품 <살아 있는 얼음>에서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부터 뻗친 선들은 동식물이나 광물의 미세 조직을 연상하게 하며, 동시에 ‘속에서부터 얼어 붙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설치 작품 <Unkno wn Signal>은 작가가 찍은 풍경 사진을 보정하여 한지에 출력한 것인데, 9개의 패널로 나뉘어 걸린 강 이미지는 조명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에 따라 그 기조가 수시로 바뀐다. 흐르는 강물에서 예시되는 시간의 흐름은 관람 과정에도 이어진다. 기존의 것을 계속 밀어내고 순간적으로나마 공간을 새로이 차지하는 강물의 이미지, 계속 멀어지는 그것은 붙잡을 수 없는 자연을 상징한다. <읽을 수 없는 문장>은 강물 이미지를 세로로 배열했는데, 이는 마치 폭포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 나타남과 사라짐의 역학 관계에는 더욱 속도감이 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나 묵직한 세월의 무게를 담지하고 있는 식물 이미지에 비해, 먼지를 표현한 작품들은 매우 발랄한 느낌을 준다. 뿌리 줄기처럼 연결된 먼지 입자들은 중층적 표면을 이루면서 사방팔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간다. 먼지는 노을 지는 하늘부터 칠흑 같은 밤을 배경으로 하며, 향기를 품기도 한다. 향기 역시 먼지 같은 미립자들의 유출에 의한 것이다. 햇살 속의 먼지 알갱이들로부터 원자론을 유추한 고대 유물론 철학자들처럼, 도윤희의 작품 속 먼지는 존재의 근본적 원소가 된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데모크리토스나 루크레티우스 같은 철학자가 물질원소들의 쉼 없는 동요를 묘사한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고대 원자론자들은 덧문 틈으로 새어 드는 햇살 속에서 수천가지 방식으로 뒤섞이는 무수한 물체들을 보면서 운명에서 벗어난 자유 의지를 발견했다. 먼지, 이 물질적 미립자들은 현실의 씨앗이 된다.
도윤희의 먼지 입자들은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이 뒤얽힌 전체를 이루며, 새로운 것들은 이전 세계의 잔해로부터 형성된다. 춤추는 입자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허공은 먼지만큼이나 무한하다. 먼지들의 움직임을 극화하는 것은 바로 빛이다. 도윤희의 작품에서 빛은 입자와 파동으로 변주되면서 시간의 흐름을 타고 무수한 계열로 펼쳐진다. 형상을 그리고 바니시로 마감하고, 이를 다시 반복하는 작업 방법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만나게 한다. 이러한 시공간적인 ‘차이 만들기’를 통해 이전의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생성을 유도한다. 잠재된 것은 현실화되고 현실은 다시 잠재적인 것으로 가라앉으면서, 시간의 지층은 새로운 존재와 사건을 출현시킨다. 투명한 막으로 닫히고 다시 열리는 얇은 평면들은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며 중심 없는 흐름을 낳는다. 움직이지 않는 단면들은 지속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것은 들뢰즈가 영화에 대해 말했듯이, ‘움직이는 단면’이 된다. 매번 조망을 변화시키는 시간적 변위(Dislocation)는 지각과 기억의 동시적 산물이다.

김혜련 개인전 전경

이미지와 결합된 시간의 기호

김혜련은 150×200cm 사이즈의 동일한 크기의 유화를 간격 없이 붙여 놓았다. 전시장 한 면이 큰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바깥 풍경과 연결되는 장소에서, 이러한 배치 형식은 그림을 걸었다기 보다는 설치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DMG 2009’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그림에 새긴 문자’라는 전시 부제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글자는 풍경의 반을 가르는 색띠 위에 새겨져 분단을 상징하기도 하고, 세로로 세워져 깃발이 되기도 한다. 검은 대지 위에도, 붉게 타오르는 하늘 사이에도, 매번 다른 색으로 흐르는 임진강 위에도 어김없이 써 있다. 비무장 지대라는 의미를 가진 이 약호는 때로 화려하기까지 한 풍경으로부터 착잡한 생각을 낳게 한다. 선적 기호를 닮은 철조망은 풍경을 이리저리 찢어 놓으면서 대지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들쑤신다. 임진강이 보이는 마을에 사는 작가는 이 풍경들에서 ‘주홍글씨처럼 낙인 찍힌 풍광’을 보며, 정치 논리와 시장 논리로 촘촘하게 뒤덮인 기호들을 읽는다. 자연의 심연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하나의 가시적 형식으로서의 기호는 세계를 거대하게 펼쳐진 책처럼 만든다. 사물과 기호는 완전히 일치되지 않는다. 미셀 푸코는 이러한 주제를 다룬 책 《말과 사물》에서, 신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적 형태의 언어는 사물들에 대해 전적으로 확실하며 투명한 기호여서, 이때의 언어는 사물들과 유사했다고 본다. 한 사물의 이름은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투명성은 인간에 대한 징벌인 바벨탑과 함께 무너졌다.
언어의 첫 번째 존재 이유였던 사물과의 근원적 유사성을 상실하자마자 제 언어는 분화되었고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양자의 어긋남은 반복되는 해석을 요구한다. 김혜련의 작품에서 기호는 파주 지역, 그리고 작품에 반영된 이 장소의 아름다움을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기능을 가진다. 기호도 지층처럼 중력의 작용을 받아 ‘수세기에 걸친 장엄한 퇴적의 광경’(소쉬르)을 이룬다. 지질학과 달리, 언어는 사회적 결정 작용을 받는 차이가 있다. 김혜련이 다시금 펼쳐 놓은 ‘자연의 책’에서 언어는 더 이상 ‘신적인 상형 문자나 성스러운 기호’(카시러)로서 신비스럽게 나타나지 않으며, 정략적인 이해 관계라는 거대한 세속적 힘에 휘둘린다. 세계와 언어와의 사이에 권력이 작용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더욱 불투명해진다. 그것은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읽어 내야 하는 미지의 것이 된다. 화가가 세계를 묘사하고, 관객이 그 의미를 읽어야 하는 과정 속에 기호가 개입되어 있다. 기호로 매개되는 묘사와 서사에서 시간은 필수적이다. 김혜련의 작품 속 시간 기호는 모든 그림에 써 놓은 단어와 숫자, 즉 언어뿐 아니라 이미지와 결합된 기호들에 기초해 있다. 풍경을 난데없이 반으로 쪼개는 노란 강, 서럽게 울고 있거나 또는 피 흘리는 듯한 붉은 노을, 땅인지 물인지 모를 푹 꺼져 들어가는 어두운 심연 등이 그것이다.

비디오아트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

<마조, 터닝(텐 싸우전드 웨이브즈)> 엔듀라 울트라 포토그래프 60.3×80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Gallery, London

만개의 물결
비디오아트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

글 | 서현석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어느덧 우리는 미술관에서 우리의 감각을 압도하는 비디오 영상의 위력에 경탄을 보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1990년대부터 비디오아트가 ‘기술의 감동’을 증배시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 준 게다. (빌 비올라 등이 당당히 미술관 벽에 걸었던) 최초의 플라스마 모니터가 주던 감흥을 어찌 잊으랴. HD프로젝터로 쏘는 그림은 육안으로 보는 현실보다도 생생하다. ‘스펙터클’이라는, 비디오아트의 본연의 적이 언제부턴가 그 정체성이 되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미술계를 훑고 지나가니, 초기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저항했던 대중매체와 영화적 장치의 권력은 하루아침에 비디오아트의 권력이 되었다. 매체에 대한 모더니즘적 성찰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서나 보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빌 비올라나 매튜 바니로부터 (심지어는 ‘관계미술’에 연루된) 더글러스 고든이나 필립 파레노 등에 이르기까지, 비엔날레를 수놓는 대부분의 단골 작가들에 있어서 이미지의 환영적 기반은 고민해야 할 딜레마가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 ‘이미지에 대한 성찰’을 고지식하고 진부한 과거의 흔적으로 축소시킨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와 스펙터클의 헤게모니가 제조한 위대한 업적이다.
미술관의 스크린을 통해 발산되는 것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아티스트의 숨은 열망일까? 스크린의 환영적 마력과 관객의 영적 몰입에 대한 부러움의 고백일까? 영화관의 객석이 자연스럽게 확보하는 ‘부동성’의 계약을 미술관에서 구현하려는 소망은 그토록 절실한 것일까? 비디오아트도 이제 ‘블록버스터 시대’를 맞은 지 오래다. 가장 저항적이고 전복적이었던 어제의 예술은 그 어떤 다른 문화 행위보다도 할리우드의 미학적, 제도적 장치와 친밀하다. 최신식 디지털 장비가 동원되는 비디오아트 작품의 전시에는 그에 걸맞는 할리우드식 기획이 실행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비스타 장만옥을 캐스팅한다던가.) 비디오아트 덕분에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필독서로 남을지도 모른다.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전시되는 아이작 줄리언의 <텐 싸우전드 웨이브즈(Ten Thousand Waves)>는 압도적이다. 2010년 시드니비엔날레를 필두로, 엑스포에 맞춰 상하이에서도 전시된 이 신작은 제목부터가 광활하다. 아홉 개의 대형 스크린은 중국 역사와 신화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촬영감독 자오 샤오시의 현란하고도 정제된 영상미는 오감을 온통 애무한다. 스크린의 육질은 눈이 시릴 정도로 수려하다. 여기에 장만옥과 양푸동 왕핑 공파겐 등 중국을 대표할 만한 영화배우 미술가 시인 서예가가 확실한 ‘흥행 요소’로 가세, 수호신 ‘마조’에 관한 신화에 현대적 관점을 심어 넣는다. 여러 스크린으로 영사되는 이미지를 통합 분할 충돌 교접시키는 줄리언의 장인적 솜씨는 가히 그가 이미지로 보여 주는 중국 장인들의 실력에 비견할 만큼 훌륭하다.
하긴, 커다란 나라의 신화를 커다랗게 다루려면 커다란 스크린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영상의 해상도와 밝기가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으니, 갤러리 벽 정도를 압도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리. ‘Less is More’라는 모더니즘의 슬로건은 그 말뜻만큼이나 왜소해졌다. 하지만 다른 예술 영역은 몰라도 적어도 비디오아트만큼은, 저항과 불일치를 태생적 근원으로 삼았던 그 삐딱하고 까다로운 미학적 장치에서만큼은 그 매체의 ‘진화’가 ‘기술’이 아닌 ‘발상’에서 이뤄지길 바란다면, 그것은 편집증적인 시대착오일까?

<웨스턴 유니온: 작은 배(Western Union: Small Boats)> 풀HD 수퍼 16mm 컬러필름, 5.1사운드 18분22초 2007 뉴욕 메트로 픽처스(Metro Pictures) 설치 장면 Courtesy of Isaac Julien and Metro Pictures, New York, Photography Christopher Burke Studio

비엔날레로 간 대항 영화의 유망주

아이작 줄리언은 1980년대에 인종 문제에 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과감한 형식적 실험으로 풀어 내면서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영화 감독’이다. 흑인의 관점에서 영국 사회를 보는 것이 얼마나 복합적인가를 절묘하게 풀어 낸 <구역들(Territories)>(1985)로부터 1920~30년대 흑인 문화운동인 할렘 르네상스를 조명한 실험적 다큐멘터리 <랭스톤을 찾아서(Looking for Langston)>(1989), 그리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극영화 <젊은 영혼의 반항아들(Young Soul Rebels)>(1991)에 이르기까지,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인종과 계급, 성에 관한 사회의 편견적 장치들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영화의 주제나 내용도 파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복합적인 층위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단지 사회적 상황을 재현하여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연동되는 다층적인 기제들을 조명하기 위해, 내러티브나 다큐멘터리 등 하나의 정해진 형식에 귀속되지 않고 현실만큼이나 다각적인 수사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영화 작품들이 소통하려는 중요한 메시지였다. 다큐멘터리에 연출된 상황이 섞이는가 하면 허구적 연출에 실재적인 것이 난입하고, 역사적 사실은 사적인 생각이나 시적인 정서를 거쳐 사유되기도 했다. ‘장르’의 경계를 뛰어 넘는 이러한 혼성적인 형식은 사회적, 역사적 사실이 고정된 정보의 군집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이나 동기를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늘 관객에게 상기시켰다. 작가적 창의력과 역사적 현실은 서로의 경계를 교란시키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문제들은 보다 세밀한 질감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와 역사에 수행적(Performative)으로 접근하게 된 것은, 그가 형식적으로 다루는 인종, 성, 사회 계급 등의 문제가 추상적인 역사적 과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몸소 투쟁적으로 접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곧 일상이자 현재요, 사회 문제는 사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영화는 곧 역사이며, 그 말은 영화의 구조나 형식이 정해진 평면적 관습이나 장르에 묶이지 않는 ‘열린 담론’이어야 함을 의미했다.
오늘날 갤러리 벽을 화려하게 수놓는 대부분의 비디오 프로젝터 이미지들에 담기지 않는 중요한 목적 의식이 줄리언의 멀티스크린에는 깔려 있으니, 바로 ‘영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보수적인 미학적 기반은 극장의 평면적인 스크린이었다. 상영관의 건축적, 미학적 조건들을 거부하는 것이 영화 안에서 비판적인 내용이나 형식적인 실험을 지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노선이라는 말이다. 멀티스크린은 곧 ‘태도’였다.

<발러스트레드(웨스턴 유니온 시리즈 No.12)> 라이트박스에 듀라트랜스 이미지 120×300cm 2007 Courtesy of Isaac Julien and Victoria Miro Gallery, London

관능과 냉철 사이

전주영화제와 광주 및 부산비엔날레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1990~2000년대의 줄리언의 멀티스크린 작품들은 언제나 육감적이었다. 초대형 스크린의 엄청난 자력, 육즙이 흐르는 듯한 강렬한 색상과 질감, 여러 스크린에 걸쳐 안무된 현혹적인 움직임의 벡터, 감각적인 편집에 의한 세련된 리듬감 등 그의 영상 작품들은 조형적 완성도에 목마른 미술관의 관객에게 섹시한 달콤함을 한껏 선사했다. 스크린과의 육감의 섹스를 구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진한 관능 속에는 정치적 첨예함이 유전자처럼 흘렀다. 사회의 통념에 대한 투사적 정신이 폐쇄회로를 따라 순환했다. <파라다이스 오메로스(Paradise Omeros)>(2002), <웨스턴 유니온: 작은 배(Western Union: Small Boats)>(2007) 등은 남성적 신체를 미화하며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온 이성애적 이데올로기의 장에 불온하고 불편한 ‘시각적 쾌락’을 부가했다. 관능은 흑인과 동성애라는 두 정체성의 좌표를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디지털 포토제니(Digital Photogenie)’는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설파하는 비언어적 항변이 되었다.
<마자틀란으로 가는 먼 길(Long Road to Mazatlan)>(1999)에서 차용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중의 “뭘 봐?”라는 유명한 대사는 한 나체의 미남 카우보이가 던지는데, 이는 남성적 신체에 대한 (미술관 내에서의) 은밀한 시각적 쾌락을 들춰 낸다. 위협과 폭로가 섞인 이 외마디 대사는 미술관 내의 ‘미학적’ 응시들에 묻혀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략하는, 그에 기꺼이 동조해 온 관람객들의 허를 찌르는 도발적 반문이었다. “우리는 정녕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떤 쾌락을 취하고 있는가?” <발티모어(Baltimore)> (2003)에서는 1970년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Blaxpoitation Film)의 대부 멜빈 반 페블스가 텅 빈 현대미술관을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지배 미학의 아성 안에서 저항문화의 아이콘이 배회하는 광경은 가히 언캐니하다. “흑인이 텅 빈 현대미술관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보다 더 전복적인 이미지가 어디 있겠는가?”
2004년 전주영화제에 초청될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서현석, “작가와의 대화: Isaac Julien” 양지윤 옮김 《MIA Lists》 1호 2005 참조)에서 줄리언은 강조했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때깔 좋은 신작들에 맹목적으로 현혹될 것을 거부하는 일부 관객들이 초기작들의 정치성을 배신한 것은 아닌지 반문할 때에도 그는 단호했다. 초기의 상영용 ‘영화’들보다 멀티스크린 작품들이 더 입체적인 ‘저항’임을. 동성애나 인종에 관한 편견을 말로 비판하는 것보다 이미지로 지배 문화를 ‘오염’시키는 것이 더 위협적인 ‘전복’임을. 그의 사전에서 ‘쾌락’은 ‘저항’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더 나은 미술?

<텐 싸우전드 웨이브즈>에 흐르는 정치적 냉철함을 읽고자 한다면, 아홉 개나 되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그 작은 단서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이 작품이 상하이의 ShanghART갤러리에서 전시될 때 바로 옆에서 벌어진 엑스포는 ‘Better City, Better Life’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줄리언은 ‘더 나은 삶’을 지향한다는 정부 프로파간다의 역사에 냉소적으로 접근한다. 그가 재활용하는 문화 혁명 시기의 기록 영상은 ‘더 나은 삶’을 선전하기 위해 행진하는 무리들을 보여 주며 신화라는 이 작품의 기반에 역사적 맥락을 중복시킨다.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는 신 마조에 관해 연출된 화면 역시 이를 촬영하는 현장 화면과 충돌하며 이미지에 대한 통시적인 관점을 생성한다. 특히 마조를 연기하는 장만옥이 컴퓨터 합성을 위해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은 신화의 ‘신화적’ 기반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감을 시원하게 제안한다. 스크린 이면에서 작동하는 영화적 장치에 대한 이러한 메타 비평적 시선은 이 작품을 신화에의 환상적 도취로부터 이미지의 근원과 역사에 대한 성찰로 유연하게 이동시킨다. 초기 영화의 성찰적인 혼성적 구성은 이제 아홉 개의 스크린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텐 싸우전드 웨이브즈>는 분명 신화와 (사회적) 역사, 과거와 현재, 허구와 현실 등 영화적 장치가 재현할 수 있는 이미지의 이중성에 대한 질문을 진중하게 던진다. 그 질문들은 신화를 다루는 이미지를 접하는 관객이 이를 복합적이고 개방적이며 다층적인 텍스트로 해독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어쩔 수 없이 일으키는 비디오아트의 역사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질문들은 그가 보여 주는 적당한 자기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지적 만족을 넘어선다. 오늘날 이미지에 대한 성찰은 얼마만큼 진중하게 구체적인 정치적 태도로 이어져야 하는 걸까? MTV의 등장 이후 자기 반영성이 아예 소비의 논리가 된 시점에서 스펙터클에 대한 자기 비판적 태도는 얼마나 ‘깊숙하게’ 이루어져야 할까? 자본주의의 논리와 수사에 동참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갖는 유희적인 비판 의식이 ‘비평’으로서 얼마나 유효한 것일까? 스펙터클을 전람하면서 그 신화적 기반에 대한 분석적 지평을 열어 놓는 것이 스펙터클의 신화를 맹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미술’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서 오며, 그 근거는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


오늘날 비디오아트를 향한 질문들


<텐 싸우전드 웨이브즈>는 정치적으로 묘묘한 작품이다. 스펙터클의 헤게모니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 문화의 매혹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혜안을 줄 필요성을 끝없이 유보하기 때문이다. 그 유보의 필요성을 문제시하지 않고 즐기도록 종용하기 때문이다. 담론을 유희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매튜 바니, 빌 비올라 등) 최근 일부 비디오아티스트들이 ‘신화’에 대한 19세기 말의 관심을 재활용하고 있음을 주시하면서, 이러한 신화로의 회귀는 오늘날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 의식이 붕괴된 것에 대한 ‘환영적 미봉책’이라 규정한다. 그가 중요시하는 문제는, 이러한 미봉책에 적용되는 정치적 의미가 모호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갖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지극히 미온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작품을 ‘미학적’으로 감상하려는 우리에게 그 어떤 명료한 정치적 비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의 효과가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공유하는 근본적인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날 비디오아트가, 그리고 미술이 당면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근본적인 정치적 불확실성이야말로 새로운 스펙터클 사회의 인기 있는 소비품이 된다는 사실이다. 조형적 수려함과 어중간한 자기 반영, 스펙터클에 대한 동의와 그에 대한 (사과에 가까운) 부수적 설명, 이미지 신화의 확고함과 불화의 미적거림 사이에서 발생하는 반론적인 양가성을 계속해서 지적인 쾌락으로 소화해도 좋을까. 반론이 스펙터클에 버무려진 감치는 양념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아티스트도 이미 모두 알고 있다면, 그 반론에는 어떤 최소한의 무게와 책무가 따르는 것일까.
<텐 싸우전드 웨이브즈>의 정치적 묘묘함이 남기는 씁쓸한 잔상들은 사실 비디오아트의 기능과 역사를 돌아봐야 할 필요성으로 남는다. 즉 만 개의 질문의 물결로 다가온다. 이제 테크놀로지의 원대한 현란함에 대한 관대한 동조가 비디오아트의 생명으로 작동하는 것도 충분히 즐기지 않았는지. 미술관이 관객들에게 마치 영화적 체험을 확장한 듯한 통감각적인 감흥에 푹 젖어 이미지의 신화적 권력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약발이 다하지는 않았는지. 오늘날 미술 담론에서 스펙터클을 자기 반영이라는 양념에 버무려 전람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은 1990년대부터 이어져 오는 비디오아트의 스펙터클화에 대한 더 과감하고 냉철한 비판적, 역사적 담론이 아닌지. ‘커다란’ 비디오아트의 제스처들이 이제는 이와 같은 질문들을 갤러리 벽에 투사할 때가 온 건 아닌지. 미술이 사회 변혁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조각이 오늘날의 비디오아트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믿어도 되는지 말이다.

아이작 줄리언 1960년 런던 출생. 세인트마틴 예술학교 졸업. 영국의 대표적인 영상 작가이자 영화감독. 1991년 칸 영화제 비평가상, 2003년 쾰른 쿤스트필름 비엔날레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2001년 영국 터너상 후보에 올랐다. 테이트모던 퐁피두센터 구겐하임미술관 빅토리아미로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04부산비엔날레와 2008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 중이다.

소장품 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

임옥상 <먹구름> 종이에 먹, 아크릴릭 44.5×66.5cm 1990

소장품 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

글 | 유진상  ·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국립현대미술관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한국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한 세기에 걸쳐 한국화 현대회화 조각 사진 뉴미디어 판화 드로잉 건축 서예 공예 디자인 등 주요 분야의 작품 6,684점을 수집, 보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순수미술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회화 2,451점, 조각 689점, 한국화 681점, 뉴미디어 83점, 드로잉 및 판화 1,338점 등이 있다. 필자는 현재 열리고 있는 <추상하라!>전을 기획하면서 이 작품들을 모두 살펴 볼 기회를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크게 1960년대 이전의 구상 중심 소장품, 기증품과 이후의 추상회화, 그리고 1980년대 구상회화의 흐름과 1990년대 이후 사진 및 뉴미디어 작품으로 크게 가늠할 수 있다. 약 한 달 가까이 걸린 선별을 거쳐, 다른 전시에 출품되기로 이미 예약되어 있는 작품들을 제외한 93점의 작품을 전시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단계에서 이미지 데이터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하였는데, 작품의 숫자도 숫자려니와 오늘날 모든 작품 심사가 최소한 예비 단계에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전문적인 소장품 연구, 기획을 위해서는 수장고의 파악과 관리도 중요하지만 각각의 작품에 대한 높은 해상도의 이미지 데이터와 세세한 제원과 미술사적, 비평적 정보를 포함한 수준 높은 텍스트 데이터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규모로서는 전체 소장품을 모두 열어 본 담당자들만이 전시 기획을 전담할 수는 없으므로 더 더욱 데이터의 의존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보다 나은 소장품 연구, 전시 기획, 교육 및 홍보를 위해서는 전문적 자료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왼쪽 · 공성훈 <개> 캔버스에 아크릴릭 227.1×181.8cm 2008 | 오른쪽 · 이광호 <재연-어머니로부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겼을 말들> 캔버스에 유채

미술관 컬렉션으로 전시를 만드는 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컬렉션의 규모는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십 만 점의 현대미술 소장품을 운용하고 있는 프랑스의 FNAC(Fond National d’Art Contemporain), 뉴욕현대미술관(MoMA), 테이트미술관 등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책은 한정된 예산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전체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작품들을 빼놓지 않고 수집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미술관 규모에 걸맞는 걸작과 당대의 세계 및 아시아 현대미술품을 수집하는 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컬렉션에는 지난 41년 간 누적된 흥미로운 작품들이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는데, 바로 이 작품들이야말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소장품 연구와 기획을 통해 이 작품들의 가치를 제고하고 프로모션하며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국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국립 컬렉션의 수준에 걸맞는 위상을 창출해 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현재의 논의는 기존의 소장품 컬렉션을 소장가치에 따라 재편하거나 국가 기관들에 분산되어 있는 미술품을 통합 관리하는 등의 행정적인 이슈에 맞춰져 있다. 이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작품의 소장 가치를 제고하는 제반 활동과 시민들이 소장품을 애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뛰어난 전시 기획 역시 미술관의 핵심 임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박서보 <묘법 16-78-81> 면천에 유채, 흑연 130×162cm 1981

미술관의 전문성과 외부 인력의 활용

외부 큐레이터가 소장품 전시를 기획한 <추상하라!>전의 기획의도는 2009년 3월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국립현대미술관,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위한 미래 설계’에서 필자가 한 발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초청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인력 운용방안>이라는 주제에 대해 발표하였는데, 주된 요지는 2006년 12월에 수립된 <미술관 진흥(비전 2020) 기본 계획>의 제안을 바탕으로 국립미술관이 활용할 수 있는 인력 풀(Pool)을 미술계 전체로 확대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었다. 즉 보다 다양하고 많은 전문가들의 제안과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세계적 수준의 국립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포괄적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 발제에서 언급한 방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외부 전문가들을 미술관의 연구 전시 기획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 틀 안에서 필자는 소장품전 기획안을 제출하였다.
이 전시의 오프닝에서 배순훈 관장이 언급한 바와 같이,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외부 기획자를 초대할 계획이다.(2012년에는 ‘한국 단색 회화’를 테마로 윤진섭 교수가 한 기획하는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추상하라!>전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획된 소장품 전시로서, 그 목적은 소장품의 가치를 드러내고 새롭게 해석하며, 시민들이 소장품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애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상된 <추상하라!>전의 기획 방향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컬렉션에서 1960년대 이후의 추상미술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소장품을 전반적으로 프로모션할 수 있는 주제를 ‘추상(Abstraction)’으로 선정하였다. ‘추상’은 원래의 의미와 달리 특정한 시대나 유형의 미술을 가리키는 용어처럼 다뤄져 왔다. 게다가 일반 관객들에게 ‘추상’이란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처럼 느껴진다. 이 전시에서는 관객들이 ‘추상’을 예술 창작과 감상에서 요구되는 일반적 과정이자 다양한 경험으로 이어지는 조건으로 이해하도록 설명한다. 이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컬렉션이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된 근본 맥락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전시에서 관객들은 전형적인 추상회화나 추상조각 뿐 아니라 구상 민중미술 사진 설치미술 개념미술 뉴미디어 등에서도 놀라운 추상성이 빛을 발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주로 시대별 유형별 사조별 작가별로 구분되어 기획되던 기존의 소장품 전시 방식에 변화를 시도하였다. 즉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매번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작품의 배치와 해석이 자칫 소장품의 의미를 고정된 것으로 결정할 위험이 있다고 보고, 새로운 조명 아래에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작품들은 유사한 시대나 유형의 기준으로서가 아닌 상이한 형식과 내용의 병치 안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작품들 간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에서 작품들은 두 작품 혹은 세 작품이 쌍으로 연관되어 있거나 많은 경우에는 잠재적 내러티브를 통해 5~6개의 작품들이 상호 지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전혀 다른 맥락의 작품들과 함께 놓임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각 작품이 지닌 잠재성을 보다 깊이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이러한 배치는 기획자에 따라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소장품은 끝없이 새로운 관계와 맥락 안에 놓이게 되며 관객들은 그 때마다 작품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감정을 즐기게 된다.  
셋째, 일반적인 소장품 전시에서 작품 옆에 붙이는 명제표와 설명문을 없앴다. <추상하라!>전은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 필요한 제목이나 설명을 설명서와 가이드북에 모두 요약해 놓음으로써 전시장에서 불필요하게 작품 앞에 다가가 몸을 구부리고 설명을 읽어야 하는 불편이 없도록 했다. 관객들은 우아하게 등을 곧게 편 채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으며 동선에 따라 배열된 설명서와 가이드북의 내용을 참조하면서 작품 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대체로 국립미술관의 소장품들은 여러 번에 걸쳐 소개되거나 잘 알려진 작품일 경우가 많아 오히려 전시 공간을 깔끔하게 다룰 수 있는 ‘명제표 없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더 클 수 있다. 비전문가인 관객들의 경우에도 작품을 있는 그대로 감상한 뒤 천천히 작품 정보를 확인하는 방식에 친숙해질 수 있다. 이 전시에서는 벽에 부착된 월텍스트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인터뷰 영상물로 이러한 설명을 보완하는 역할과 동시에 전시에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또한 양장도판을 담는 도록을 전시장에서 들고 읽으면서 볼 수 있는 ‘가이드북’으로 대체하였다. 같은 미술관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될 소장품을 매번 비싼 도록에 담기보다는 기획자에 따라 새로운 해설과 평문이 제공되는 가이드북 형식의 책자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소장품 전시는 단지 작품을 공개하는 전시가 아니라 소장품의 탁월한 작품 가치를 극대화하는 미장센(Mise-en-Scene)을 필요로 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작품 하나하나가 최대한으로 가치 부여(Mise-en-Valeur) 될 수 있도록 깨끗하고도 여유 있는 여백의 확보와 공간과의 비례, 조명과 벽의 톤을 조절하는데 연출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추상하라!>전은 크게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는 전시가 열린 덕수궁미술관의 구조에 의거한 것으로, 단순한 동선을 취하고 있다. 각 섹션의 내용은 어두운 풍경을 다룬 작품(모호함과 비-가시성),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그린 구상화(일상 속의 추상), 가장 잘 알려진 추상미술의 사례(추상의 기술),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작품(추상적인 면, 혹은 바깥)으로 그룹화 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의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대중성’이다. 즉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존재 자체가 시민들이 낸 세금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 컬렉션 전시는 한편으로 시민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전시 연출과 설명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시 구성의 가독성만으로 전시 기획의 수준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절충점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기봉 <채식주의자> 캔버스에 왁스, 못, 나무판, 목탄, 스테인레스 스틸, 합성수지, 가죽 가변 크기 1995

추상하라!전이 내딛은 첫걸음

<추상하라!>전은 오늘날 세계의 주요 미술관들이 소장품을 수집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완전히 새로운 문제 의식의 패러다임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관점을 반영하는 전시이다. 그것은 바로 소장품의 적극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창조적 프로모션 및 마케팅이다. 오늘날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 퐁피두센터, 미국의 구겐하임미술관과 같은 대표적 미술 기관들은 컬렉션을 보유하지 않는 미술관을 자국 및 해외에 구축하는 공통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사업은 이미 수십만 점에 달하는 자체 컬렉션을 보관하는 수장고가 포화 상태에 이르러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적극적으로 소장품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추진됐다. 모(母)미술관에서 소장품을 임대하여 수많은 다양한 전시들을 기획, 제작하는 과정에서 소장품은 참신한 해석과 의미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국내외의 대중들에게 친밀하고 흥미로운 작품으로 각인되는 효과를 얻는다. 이것이 문화선진국인 프랑스와 미국 등이 추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화 홍보 및 전파 전략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아직 규모와 내용에 있어 이들 주요 미술관과 비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시 기획 사례를 창조해야 한다는 요구를 피할 수는 없다. 주어진 소장품들을 어떤 실로 어떻게 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국립미술관 소장품의 수집 방향과 전략에 그대로 반영된다. <추상하라!>전에 주로 소개된 현대회화 소장품들만 놓고 보더라도 그 수가 약 2,500점에 불과하고, 주요 작품들이 주로 1960년대 이후의 추상 회화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거나 유사한 형태의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 어려운 난점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국공립미술관은 현대미술의 미술사적 관점 뿐 아니라 풍부한 동시대 지식의 생산 및 발신지로서의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따라서 소장품 수집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창의적이고 지적이며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전시 기획 테마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우며 탁월한 작품들을 보유하려는 노력이 있기를 기대한다.
<추상하라!>전은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시도할 많은 변화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전시가 예시하는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한 전문성을 보다 많은 한국 현대미술 분야의 인력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의 많은 전문 인력들이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법인화와 2013년 서울관 개관 등의 중요한 과업을 앞두고 있다. 현재 운용하고 있는 심의위원회 뿐 아니라 워킹 그룹, 연구 그룹, 제안 활동, 협업 프로젝트, 논문 및 출판 지원 등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당면하고 있는 많은 과제를 재야의 전문가들과 더 많이 공유하고 지원해 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더 큰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키고 명실상부한 국제적 수준의 핵심 미술기관으로 발전하게 만들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의 전쟁

윌리엄 켄트리지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내 말이 아니다> 2010페스티벌봄 초청작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의 전쟁

글 | 문지윤 ·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박사과정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당신의 혁명에 동참하지 않겠어요!(If I Cannot Dance, I Don’t Want to be Part of Your Revolution!)” 이것은 애니 프레처(Annie Fletcher)와 프레데릭 베르그홀츠(Frederique Bergholtz)가 5년간이나 이끌었던 전시 프로젝트의 제목이다. 이 프로젝트는 공연예술 페스티벌에서 일한 경험을 공유한 시각예술 큐레이터 친구들 사이의 작은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다양한 문화 생산자들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협동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지식을 공유하는 프로젝트 준비 과정 자체가, 조명 연출가 음향 배우 투어매니저 등 다양한 전문가들간의 협업이 절대적인 공연예술의 생산 과정과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협동 과정을 거치며 시각예술과 무용, 음악, 연극의 접점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새로운 작업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블랙박스의 귀환
특히 이 장기 프로젝트의 2010년 주제는 ‘가면무도회(Masquerade)’였는데 여기서 피날레를 장식한 프로그램은 <해 질 무렵부터 새벽녘까지>였다. 이 프로그램을 초청했던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이 문을 닫는 시간부터 다음날 다시 미술관이 여는 시간까지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 큐레이터들의 프로젝트뿐 아니라 퍼포먼스, 콘서트, 영화 상영, 강의, 출판물 등이 밤새도록 소개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비디오 작가로 잘 알려진 케런 시터가 극장에서 선보였던 작업이었다. 시각예술, 연극, 음악 그리고 춤이 한데 어우러진 이 작업은 그가 ‘디 아이 이 나우(D.I.E. Now)’라는 무용 컴퍼니를 창립하고 선보인 첫 공연이었다. 다시 말해 시각예술 현장에 ‘블랙박스’가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1) 다다에서 플럭서스, 구축주의에서 바우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시각예술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들이 모더니즘의 방파제를 넘어 비엔날레라라는 요란한 잔치를 지나 시각예술 생산 활동 깊숙이 다시 침투하고 있다.
시각예술가가 극장에서 작업을 선보이는 경우와는 반대로 공연예술가가 미술관에서 자신의 개인전을 여는 사례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금년 4월 런던에 있는 예술기관 이니바(Institute of Internatio nal Visual Arts)에서는 레바논 작가 라비 무르에(Rabih Mroue)의 개인전이 있었다. 무르에는 레바논 내전 속에서 발생한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작동할 수 있는 픽션의 정치성을 강조하며, 독백의 형식으로 극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놓는 렉처 퍼포먼스 작업을 했다. 이러한 그가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을 위해 동시다발적 시점이 가능한 화이트큐브를 선택한 것이다. 이제 시각예술가가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도, 또한 극장에서 활동하던 예술가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것도 그다지 낯선 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공연예술의 언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시각예술의 언어로 포섭되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은 서로 상대의 공간과 형식을 새로운 매체로 포섭하거나 새로운 미디어(Media) 환경의 일부로 설정하고 있다.

왼쪽 · 윌리엄 포사이드 <흩어진 군중들> 2007스프링웨이브 초청작 ⓒJulian Gabriel Richter | 오른쪽 · 피에르 위그 <오프닝> <디애니스페이스왓에버>전의 개막식에 진행한 퍼포먼스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가 만났을때

이러한 현상은 2000년 이후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데 작가들의 개별 작업뿐만 아니라 전시 생산 현장에서도 쉽게 목격될 수 있다. 블랙박스를 주제로 삼은 근래의 대표적인 전시를 예로 들어보면, 2005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캐서린 우드(Catherine Woods)가 기획한 <무대로서의 세상(The World as a Stage)>전과 2007년 바르셀로나 MACBA에서 베르나르 비리스테네(Bernard Blistene)와 얀 체테이그네(Yann chateigne)가 기획한 <극장 없는 극장(Theatre Without Theatre)>전 등이다. 또한 전시의 주제로서 블랙박스를 사용하는 것을 너머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를 충돌시키며 새로운 전시 생산 기제를 발생시키려는 실험이 종종 시도되고 있다. 화이트큐브 공간은 관객이 이동하면서 스스로 선택해서 볼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짐으로써 동시 다발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반면, 연극 음악 춤 등의 블랙박스 공간은 시간의 지속성에 의존하며 관객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고정시켰다. 관객들은 지정된 좌석에서 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작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중력과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 움직이는 신체이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작동 메커니즘을 충돌시켜 새로운 전시 생산 원리로 사용한 예로는 기욤 데장주(Guillaume Desanges)의 2008년 파리와 루벵에서 진행한 <픽-업(Pick-Up)>를 들 수 있다. 데장주는 블랙박스의 작동 원리를 화이트큐브에 옮겨 심었다. 이를 위해 블랙박스가 아닌 화이트큐브에서 전시장에 있던 조명들을 끄고 무대에서 흔히 사용해온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사용했다. 이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정해진 시간에 하나의 작업만을 비추며 돌아가는데 마치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에게 극장에 앉아 공연을 보는 듯한 경험을 안겨 주었다.
이와 반대로 화이트큐브의 작동 메커니즘을 극장 무대로 적극적으로 끌어 들인 경우로는 2006년부터 시작된 피에르 발블랑(Pierre Bal-Blanc)의 <Living Currency> 프로젝트를 들 수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06년 파리의 한 댄스 스튜디오에서 처음 시작되어 2007년 루뱅의 스툭(STUK)의 대극장, 2008년 런던의 테이트모던, 2010년 베를린의 하우 극장으로 장소를 옮기며 화이트큐브와 블랙박스를 오가며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공연 전문 극장인 하우(HAU)에서 개최된 공연에서는 극장을 찾은 관람자들을 무대 뒷편으로 들어오게 했다. 어리둥절한 관람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무대 곳곳에서 제각각 진행되고 있는 퍼포먼스였다.
예를 들면 테레사 마골레스(Teresa Margolles)의 비누 거품이 천장에서 흐르고 있는 동시에 한 쪽에서는 미술가 로만 온닥(Roman Ondak)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아니 비지에 & 프랑크 아페르테 무용단의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관람객들은 무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퍼포먼스를 지켜 볼 수도 있고, 원하면 무대 앞 관객석으로 돌아가 전통적인 공연 관람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다 자신의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가 다음의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아티스트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지켜 보아도 전통적인 블랙박스의 시점을 고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것은 화이트큐브의 정지된 사물들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미술관 속의 관람자의 경험과도 같다. 하지만 관람자의 앞뒤 혹은 주위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들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는 존재이고 전체적인 국면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육체들이다. 마치 화이트큐브의 오브제들 또한 제 각기 소리를 내며 떠들고 움직이는 개체들이 되듯이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대여섯 개의 퍼포먼스들이 동시에 진행시킴으로써 발블랑은 화이트큐브적인 시점을 블랙박스 안에 접합시켰다. 이를 통해 화이트큐브의 영원성과 블랙박스의 현재성, 화이트큐브의 다원적 시점과 블랙박스의 고정된 시점들이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그곳은 새로운 예술의 ‘생성(Becoming)’이 일어나는 전쟁터가 되었다.

피에르 발블랑 <The Living Currency > 2010베를린비엔날레 출품작

퍼포먼스아트의 등장과 연극성 논란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의 조우는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공연예술은 시각예술 작업과 달리 상품으로 쉽게 전환될 수 없는 성격으로 인해 자본 경제에 대해 저항력이 있다고 인식되어 왔다.2) 일찍이 마르크스는 <생산의 직접적인 과정의 결과들>이라는 에세이에서 문학이나 시각예술과 같은 지적 노동의 산물들은 그 생산물이 생산자와 분리되어 자본 경제 속으로 쉽게 편입되어 버린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공연예술은 공연자와 퍼포먼스 외에 어떤 생산물도 남기지 않아 자본 경제의 흐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지적은 공연예술이 왜 시각예술사, 특히 아방가르드의 역사에서 저항의 도구로 인식되었는지 설명해 준다.
그런데 1960년대로 진입하면서 시각예술의 내부에서 특이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시라는 예술 생산 기제가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충돌을 발생시키는 도구로 적극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연과 전시의 접점에서 발생한 다양한 유형의 작업들이 ‘퍼포먼스아트’라는 이름으로 장르화 내지 역사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이론가가 로즐리 골드버그(Roselee Goldberg)이다.3) 골드버그가 제시하는 ‘퍼포먼스아트’의 개념은 1960년대의 반전운동과 히피운동 혹은 학생운동의 유산을 바탕으로 시작된 1970년대 혹은 1980년대 다문화주의 영향권 아래 작동한다. 소위 바디아트라 불리는 예술가의 몸을 내세우는 작업들이 퍼포먼스아트의 중심이 되고 몸을 매체로 하는 다양한 작업들이 퍼포먼스아트라는 이름으로 묶여졌다. 이본 라이너의 공연에서부터 로버트 모리스의 퍼포먼스 조각, 화이트큐브에서 펼쳐지는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신체 퍼포먼스 작업에서 앨런 카프로의 해프닝까지 모든 것이 퍼포먼스아트가 되었다.
이러한 골드버그의 인식은 오늘날의 ‘다원예술(Interdisciplinary Arts)’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골드버그는 퍼포먼스 아트에서 발전된 다원예술이라는 개념을 전통적인 공연예술 페스티벌의 작동 메커니즘과 결합시켜 2005년부터 <퍼포마(Performa)>라는 행사를 이끌어 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이브리드 공간’의 문제점은 공연과 전시가 각기 다른 배경과 다른 작동 메커니즘을 유지한 채 상대를 포섭하려는 것에 있다. 탈중심화의 긴장 관계가 발생하지 않는 이러한 ‘일시적인 동거’에 대해 1980년대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돌이켜 냉정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백인중심주의가 절대 위협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다문화주의 문화 정책이 문화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으로서 유용한 수단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과연 다원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발생하는 축제의 시공간 역시 어떠한 새로운 사유, 어떠한 생성을 가능케 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퍼포먼스아트의 이론화 작업의 다른 한편으로는 화이트큐브에 깊게 드리우기 시작한 블랙박스의 그림자에 저항하는 이론화 작업들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미니멀 아티스트들과의 논쟁에 불을 지폈던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의 연극성(Theatricality) 개념은 평면성으로서의 회화의 조건, 조각의 3차원적 입체성과 ‘몰입’의 잠재성을 제거해 버리는 작위적 연출의 위험을 강조함으로써 시각예술의 정당성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의 주장은 미술과 공연예술과 섞이는 개념적 통로 자체를 차단하는 시각에서 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가 지적하듯이 전통적인 화이트큐브 환경에서 관람자는 그의 몸을 라커에 보관하고 입장할 것을 요구받는다.4) 그는 손을 사용해 만질 수도 목소리를 사용해 소리를 낼 수도 없다. 그에게 작동이 허락된 것은 두 눈일 뿐이다. 두 눈만이 둥둥 떠다는 유령과 같은 상태. 이것이 화이트큐브에서의 관람자의 존재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억압된 것들이 도처에서 귀환하는 길에서의 다급한 임시방편적 제방에 불과했다. 시각예술가는 현전, 일시성, 공간과 경험의 다양한 층위들을 서로 엮어 내기 위해 회색 지대에 있는 존재이다. 더욱이 몸이 확장된 것으로서의 미디어 개념에 대한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의 해석은 예술 생산에 더욱 많은 유동적 국면들을 초래했고, 현대의 다양한 설치 작업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양한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더니즘 이후 설치 작업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 배경에는 상기와 같은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프리드가 미니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화이트큐브라는 매체성을 거부하고 블랙박스의 연극적인 속성을 끌어들이는 것이라 맹렬히 비판했지만 그의 연극성 거부 논란은 실제로 연극의 역사에서 제기된 연극성 논란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공연예술의 역사에서 연극성을 둘러싼 논란은 블랙박스가 모더니티의 ‘재현 기계(Representational Machinery)’에 불과하다는 상이한 관점과 지적인 성찰에 기초해 있다. 포스트 드라마틱(Postdramatic) 비평가로 알려진 페터 스촌디(Peter Szondi)를 비롯하여 엘리노 푹스(Elinor Fuchs), 한스 티에스 레만(Hans-Thies Lehmann) 등의 이론들은 이러한 전통에서 발전되었다. 이들은 블랙박스가 재현을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기계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연극성의 발현으로 규정하고 이를 거부하는 이론화 작업을 진행해 왔다.

테시가와라 사부로 <시간의 파편> 2008요코하마트리엔날레

수행성 이론에 대한 오해

프리드와 연극성과 포스트 드라마틱 진영의 연극성 논란이 이론적 연관 관계가 없듯이 지금의 시각예술 생산 현장에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수행성(performativity)’ 혹은 ‘퍼포머티비티’라는 개념도 사실 그 출발은 블랙박스가 생산하는 퍼포먼스와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다.5) 현대 시각예술에서 블랙박스의 귀환을 설명하며 흔히 수행성 이론이 거론된다. 그 이유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블랙박스 안에서 발생하는 퍼포먼스는 살아있는 몸이 움직이기에 생명이 없는 사물들과 관계하는 화이트큐브 비해 ‘퍼포머티브하다’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랙박스의 언어를 사용하면 작업이 퍼포머티브해진다”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퍼포먼스아트를 화이트큐브에서 진행하게 되면 화이트큐브 공간이 퍼포머티브한 공간으로 바뀐다는 논리가 지금의 전시 생산 현장에서 자주 쉽게 통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큐레이터이자 퍼포먼스 이론가인 프랑스 철학자 다비드 제르빕(David Zerbib)가 최근에 《아트프레스》에 기고한 글에서 지적했듯이, 시각예술사에서 말하는 퍼포먼스와 언어학에서 발전한 개념인 퍼포머티비티는 그 어원적 유사성에서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맥락에서 이론화 작업을 거친 개념들이다.6) 그렇다면 퍼포머티비티 혹은 수행성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퍼포머티브라는 개념을 가장 처음 논의한 이는 언어학자 오스틴(J. L. Austin)이었다. 그는 1950년대 하버드 대학 교수 시절 자신의 언어학 강의에서 언어의 진술성(Constative)보다 일상 언어의 수행성을 강조했다. 언어의 진술성이란 “입술이 사과처럼 빨갛다” 등과 같은 사실적 묘사나 “나는 부자이다” 등과 같은 사실 혹은 거짓을 증언하는 기능을 뜻한다. 하지만 오스틴은 결혼식 서약에서 “I Do”라는 말이 사실이나 거짓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구체적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수행적 속성이다. 말은 생각을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2차적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행동과 상황을 생성하는 창조적 도구라는 것이다! 이후 오스틴의 퍼포머티브 개념을 새로운 논쟁의 중심으로 초대한 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였다. 데리다와 영미권의 대표적 언어학자 존 설(John Searle)과의 논쟁이 아니었다면 오스틴은 영원히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7) 데리다는 <서명 사건 문맥(Signiture Event Context)>이라는 글에서 어스틴의 퍼포머티브 개념을 자신의 해체적 글쓰기 논의와 접합시켰다.8) 데리다의 이러한 해체적 글쓰기의 개념이 전복시키는 것은 주체성이다. 다시 말해 오스틴의 수행성 개념을 확대 발전시킨 데리다가 수행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던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복성이었다.

퍼포먼스는 퍼포머티브하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지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는 퍼포먼스는 주체성을 전제로 하지만 퍼포머티비티는 주체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발생시키는 주체 없이 가능하지 않은 퍼포먼스가 퍼포머티브하지 않는 이유이다. 퍼포먼스는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에 퍼포머티비티는 주체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퍼포머티비티는 새로운 존재 가능성들의 효과가 구축되는 통로이다.9) 그렇다. 퍼포먼스는 퍼포머티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퍼포먼스와 퍼포머티비티 개념은 대립적 상태로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지금의 시각예술 생산 현장에서의 ‘블랙박스의 귀환’이라는 현상을 수행성 이론으로 개념화하는 작업은 불가능한가? 수행성 이론은 언어철학, 문학이론, 페미니즘 등을 거치며 다양한 변용과 적용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다. 데리다가 오스틴의 언어 수행성을 글쓰기 혹은 문자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으로 넓게 해석했듯이 데리다의 글쓰기 개념을 몸이라는 텍스트로 확대시켜 읽으려는 이론적 노력들이 최근 퍼포먼스 이론에서도 특히 안무(Choreography) 이론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안무는 문자 그대로 몸(Choreo)으로 쓰는 행위(Graphy)를 말한다.
최근에 벌어지는 일련의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의 혼성적 시도들을 보면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몸으로 쓰는 행위가 저자를 너머 읽는 이에 의해 어떻게 수행될 수 있는가? 블랙박스의 재현 기계 속의 기호적 몸과 화이트큐브의 현상학적 몸을 넘어 ‘수행적 몸’이란 어떻게 생성되는 것인가?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의 시점과 시간성이 서로 충돌하는 전쟁터에서 수행적 몸을 발생시키기. 결국 이것은 퍼포먼스를 발생시킨 주체가 전복되고 나아가 보는 이 혹은 참여하는 이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와해적 상태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철학적 사건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현대적(Contemporary)’이라고 부른다.

1) 블랙박스(Black Box)는 공연예술이 행해지는 극장을 지칭하는 비유어로 흔히 사용된다. 특히 영화가 상연되는 시네마와는 달리 연극무대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2) Karl Marx, “Results of the Immediate Process of Production", Capital vol. 1, trans. Ben Fowkes (New York: Vintage, 1977), 1048.
3) Roselee Goldberg, Performance Art: From Futurism to the Present (New York: Thames & Hudson, 1979/2001)
4) Brian O'doherty, Inside the White Cube: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panded Ed edition, 2000)
5) 퍼포머티비티(performativity)는 우리말로 수행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퍼포먼스와 퍼포머티비티의 어원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경우 우리말 대신 발음 나는 대로 퍼포머티비티라고 쓰기로 한다.
6) David Zerbib, "Is Performance Performative?“ (Artpresss Sept/Oct, 2010), 23-29.
7)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8) Jacques Derrida, "Signature Event Context"in Limited Inc., trans. Samuel Weber and Jeffrey Mehlma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88)
9) Judith Butler, "Gender as Performance: An Interview with Judith Butler", interview by Peter Osborne and Lynne Segal (Radical Philosophy 67, Summer 1994)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