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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0.11

Abstract

특집_Art Management 5社5色 바야흐로 '예술 경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아트가 기업 경영의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최근의 예술 경영은 사회 공헌 차원의 문화 예술 지원 활동, 이른바 메세나(mecenat)와는 또다른 개념으로 흐르고 있다. 기업은 자사의 상품만을 홍보하기보다는 예술 친화적 '브랜드 이미지'를 대중에게 부각시키는 아트마케팅을 꾀하고 있다. 특화된 미술품 컬렉션에 집중하거나 전시 공간을 직접 운영하고, 기업 이미지에 부합하는 작가와 작품을 예술 경영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기업의 전시 공간은 잠재적 고객 개발을 위한 새로운 예술 서비스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또한 최근의 기업 중에는 특성화된 미술상 운영,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가동, 해외 주요 미술 기관과의 협력 관계망 구축 등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다차원적인 매니지먼트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art는 최근 예술 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다섯 회사의 각기 다른 다섯 빛깔의 활약을 소개한다.

Contents

표지  박윤영 〈까르띠에/Lmited edition〉
까르띠에 카탈로그에 먹 28×42cm 2004~2007

영문초록

에디토리얼
    ‘동방의 요괴’를 찾습니다!

프리즘
    아트 레지던시, 국제 컨퍼런스 참관기  백기영
    2011년 미술품 양도소득세 시행, 문제 많다  김윤섭

리포트  동방의 요괴들-하이서울아트페어

포커스
    우회전략展  임근준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展|감각의 확장展  정현  
    김지은展|김소라展  이대범
    고낙범展|김인영展  이선영

특별 기획  Art Management 5社5色
    1. Doosan Gallery_작가 지원, 레지던시에서 미술상까지
    2. Hite Collection_기업 컬렉션의 전문성, 일반 공개의 철학
    3. 一宇 Space_사진미술관으로의 특성화 전략
    4. Art Valley_고객과 만나는 아트 밸리를 꿈꾸다
    5. Six_꼼데가르송의 전위적 비주얼 감성

작가 연구  박윤영
    카르마의 세 축  유진상

작가 인터뷰  김해곤
    깃발에 펄럭이는 삶의 메시지  호경윤

이슈 앤 크리틱 2 삶과 죽음
    이미지의 과잉과 의미의 실종  김백균

테마 스페셜  서울을 그리는 마음
    서울 바라보기의 시차視差와 시차時差  민병직

현장 취재  2010코펜하겐 컨템포러리
    원더풀, 코펜하겐!  호경윤

나의 얼굴  김석

아트 포럼
    글로벌 시대의 미술, 지역과 소통하기  김수영

이미지 링크  지뷜레 베르그만

뉴비전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파이널리스트 3인 본선 3. 자유주제 평론

전시리뷰
    색-욕망에서 숭고까지|한국현대도자|배형경
    Memories in Progress|조성묵|데비한|릴릴
    Lack of Electricity|이선경|나나|하태범|김성오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art in culture가 주최하는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New Vision 미술평론상’

art in culture가 주최하는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New Vision 술평론상’

미술평론상’. 올해는 현실적인 공모 시스템이 절실해진 현 미술계의 흐름에 따라 기존 공모 진행 방식을 대폭 수정, 더욱 보완된 방법으로 새 평론가 찾기에 나섰다. 3인의 파이널리스트가 각각 3개의 과제 원고를 작성하는 것으로 본선 프로그램을 진행한 가운데, 그 마지막 과제가 지금 막 완성됐다. 바로 ‘자유주제 평론’이다. 전시 리뷰와 작가 인터뷰 등 특정 형식의 과제가 주어진 지난 1, 2차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파이널리스트 3인이 각자 쓰고 싶은 주제를 정하고 30매 분량의 평론문을 작성했다. 각자의 비평적 사고와 기량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최종 1인 당선자 선정이 코 앞에 다가온 지금, art는 지난 3개월 간 미술 평론의 새 지평을 열고자 최선을 다해 참여해 준 파이널리스트 3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왼쪽부터 김범 《눈치》 책 18×12.7cm 2009|강태희 기획, <책 속의 미술관> 시리즈 중 첫 번째 책 《향》 2009 두 번째 책 《모래》 2010|《향》에 게재된 작가 정서영의 작품 2009

언어가 말하는 이미지에 관한 단상
김범의 ‘눈치’를 중심으로

글|박 경 린

 

2010년을 고작 두 달 정도 남겨 놓은 지금, 올 한 해 진행되었던 미술 전시들을 돌아 보면 단연 ‘언어’를 주제로 한 전시가 유달리 많이 등장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렸던 <언어놀이>전이 있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언어의 그늘>전이 열렸다.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씨의 출발>이라는 전시가, 공간해밀톤에서는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이상과 텍스트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전시는 언어 그 자체를 하나의 재료로 삼거나, 혹은 조형 언어와의 관계항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는 도구로 기능하는 언어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술에서 때 아닌 언어의 범람이 진행되는 가운데 필자는 문자 언어를 사용하지만 앞선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과는 조금 다른, 어찌 보면 미술보다는 문학의 구조에 더 가까워 보이는 작품이 곳곳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여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김범의 개인전에 소개된 작은 책 《눈치》로 이 짧은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눈치》는 한 마리의 특이한 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치’라는 이름을 가진 개에 대한 1인칭 화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작중 화자는 우리가 이 개를 입양할 수밖에 없도록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설득한다. 그리고 글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하고 책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때로는 눈치가 바로 독자 앞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움직이지도 않고. 그리고 그 개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 온다”(김범 《눈치》 p.18)는 것처럼 상상의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때로는 어설프게 그려진 개의 집 모양이라던가, 혹은 화자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경계선을 집어 넣어 독자의 상상을 돕는다. 사실 문자나 텍스트를 사용하는 미술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지만, 책장을 하나씩 넘기며 왠지 낯선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것은 미술이라고 불리기에는 지나치게 문학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현대문학이라는 표제가 붙은 서가가 아닌, 바로 이곳 전시장 복도의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일까?

‘미술사 속의 텍스트’와는 다른 《눈치》의 형식

미술 작품이 처음 출판물 형식으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미 50여 년 전부터 작가들이 이 같은 방식을 실험했던 것이다. 당시 플럭서스와 팝이 융합된 로버트 모리스의 <카드 파일>이 있었고, 에드 루샤는 <26개의 주유소>를 찍어 인쇄된 책의 형식으로 배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대 후반에는 조셉 코수스, 로렌스 와이너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여 텍스트를 이용해서 미술이라는 기본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와이너는 <의도의 진술>에서 작가는 작품을 구성할 수도 제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꼭 만들어질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며 작품을 오브제 중심이 아닌, 보다 언어화된 개념적인 그 무엇으로 확장시켰다. 코수스는 1980년대 이후 <하이퍼카텍시스> <영과 무>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텍스트를 사용하되, 그것을 시각예술이 갖는 형상성을 해체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텍스트를 사용한 앞선 예술가들, 넓게 보면 개념미술가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이미지를 해체하거나, 모방이나 재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데 이용되었다. 아니면 지시적인 언어의 성격을 이미지와 함께 끌어들이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비록 그들이 시각적 경험보다는 순수한 개념, 사고, 이성을 중요시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텍스트의 사용을 보편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눈치》와 같은 이야기가 전시장에 등장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시각성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거나, 혹은 사진이나 그림, 오브제와 함께 등장시킴으로써 시각성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미술은 근본적으로 시각성에서부터 시작하는 장르이므로 개념미술가들이 지나치게 언어화된 것은 이 영역 밖으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술의 역사에서 당당히 한 흐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분명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가 전시장에 있는 것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책 속의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 보면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일단 루샤의 경우 책의 형태를 빌렸지만 사진집에 더 가까우니 열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텍스트를 이용한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차이가 보다 두드러진다. 코수스와 견주어 볼 때 그의 작품 속 언어가 언어의 형상성을 이용해 재현을 부정하는 데 이용되었다면, 《눈치》에서의 텍스트는 언어의 재현적 요소를 매개로 하여 관람자의 상상 속으로 이미지의 장을 확장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 또 다른 예로 들었던 와이너의 경우, 오브제를 만들어 나가는 어떤 상황을 지시하고 설명함으로써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오브제에 다시 속박당한다는 점에서,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도 일어나지도 않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는 《눈치》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눈치》는 미술이 아닌 문학에 더 가까운 것인가? 
문학과 미술의 차이에 대해 가장 직관적이고 분명한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고트폴트 에프라임 레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레싱은 문학이 시간적인 예술이며 회화는 공간적인 예술이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는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였다. 《눈치》를 살펴 보면 표지를 여는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의 시간, 병렬되는 언어 기호가 발생시키는 의미 작용과의 관계를 통해서 미술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형식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문학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눈치》의 13페이지 끝에는 점선 모양의 그림이 있고 다음 장에서 화자는 이와 같이 말한다. “당신이 만일 그 경계를 넘고 싶지 않았다면 이 책을 더 이상 읽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미리 알려드렸듯이 당신은 이미 그 개의 영역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독자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경계를 넘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언어를사용한 것은 1차원적이기보다는 2차원과 3차원을 바라 보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26페이지의 한 구절을 들 수 있다. “지금 눈치는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있다.” 이 문장에서 독자는 현실 공간에 개입하고 상상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방법은 레싱이 말하는 문학과 미술의 공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레싱이 극복하고자 했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ut pictura poesis, 그림처럼 시는)의 전통에 더 부합하는, 각각의 장르를 서로 모방하며 혼재된 공감각적인 차원으로 돌아간다.

시각적 재현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환영

루돌프 아른하임은 시각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이 언어의 1차원적인 연속과 비교해서 형체를 2차원과 3차원의 공간으로 표시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1차원에 속한 언어는 각 유형에 선명하고 분명한 표지를 마련해 주고, 따라서 지각적 심상이 시각 개념의 목록을 안정시키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지적 개념의 연쇄 작용을 일으켜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 속에 그리게 하며 동시적 상호작용을 발생시킨다. 아른하임은 레싱이 말한 회화와 시의 구분은 시의 언어가 공간을 다루는 회화의 영역을 지나치게 침범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를 할 경우, 오히려 독자의 마음에서 이미지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곧 언어가 이미지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인간이 사고를 할 때 시각적 연상 작용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른하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사고의 심상이 꿈이나 회화가 이루지 못한 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꿈이나 회화가 보여 주고 제시하는 이미지는 이미 완성된 것이지만, 인간의 생각 속에서 존재하는 심상은 감각을 지각하는 상태에서 여러 개별적인 추상성의 수준을 결합해 이미지를 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른하임의 지적은 김범의 《눈치》가 왜 미술인가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전시장 복도에 앉아 《눈치》를 읽어 내려가면서 느꼈던 낯설음은 언어로 쓰인 이야기가 언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지시하는 상황과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마음의 상에 투사됨으로써, 볼 순 없지만 머릿속에 분명히 그려지는 특정한 상을 그려 내기 때문이다. 김범은 실제로 “물감으로 그리지 않는 회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진정한 의도는 아니다. 천착해 온 것은 이미지와 이미저리(Imagery)의 의미와 예술 작품의 구조이며, 이것은 결국 관람자에게 속한다. …기본적으로 ‘텅 비어 있음’은 관람자의 마음 속 이미저리를 위한 스크린이 될 수 있다.”(《김범》 p.22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물리적 실체나 작가가 제시하는 고정된 장면이 아닌 마음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의 환영을 보는 것은 다소 낯설지만, 이미지와 환영에 관해 다루어 온 미술의 가장 근본적 질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해석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김범의 2009년 작 《눈치》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형식을 빌려 이미저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러한 예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함양아의 <넌센스 팩토리>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전시장에 텍스트를 놓아 둔다. 관람자는 전시장에 와서 텍스트를 읽고 그 공간을 상상한다. 그리고 관람자는 전시장에 들어가서 작가가 관람자의 상상을 돕기 위해, 혹은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드로잉이나 설치 작품을 통해서 상상을 더욱 구체화시켜 나간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와 파편화된 이미지는 관람자의 상상 속에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고, 각자의 마음 속에 확장된 세계를 담아간다.
또 다른 예로 강태희가 기획하고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한 <책 속의 도서관> 시리즈인 《향》 《모래》 《공항》도 있다. 이는 작가들이 각각의 제목을 모티프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거나, 때로는 관련 드로잉 작업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작가가 이미지를 사고하고 그것을 그림 혹은 다른 형태로 완성하여 관람자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초기 상태로 환원시켜 이미지가 완성되기 이전, 작가가 만들어 내는 상상의 영역으로 관람자를 초대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드로잉은 작가가 만들어 내는 세계를 완성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람자의 상상을 보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관람자, 혹은 독자는 다른 어떤 시각적 매체보다도 확실하게 상연되는 마음 속의 이미지를 바라볼 수 있다.
플라톤은 문자가 참된 지식이 아닌 지식에 대한 가상만을 가져다 주거나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참이라면, 문자가 전달하는 의미가 비록 거짓이거나 허황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분명 그 속에서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작가들이 책 속으로 들어가 문자로 된 언어로 말을 거는 것은 사실주의적 환영이나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 내는 회화가 아닌, 보다 정신적인 환영을 만들어 내는 회화로 기능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비록 가상의 이미지이거나,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본 어떤 것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수없는 이미지의 환영을 만난다. 그것은 때로는 과거의 기억과 연관되기도 하며, 충족될 수 없는 상상의 영역과 관계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그 무엇이다. 그러나 복제된 이미지가 원본을 대신하고, 실체 없는 가공된 이미지가 실제 삶을 점령하며, 그 어떤 이미지도 진실함을 보장할 수 없는 현 시대에서 가장 확실하고 진실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그려지는 심상, 즉 이미저리(Imagery) 바로 그것일 수 있다.

왼쪽·노순택 <망각기계> 아카이벌 피크먼트 프린트 135×100cm 2006~10
오른쪽·노순택 <망각기계> 아카이벌 피크먼트 프린트 135×100cm 2006~10

사진으로 망각과 싸우기
노순택의 사진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글|김 현 호


과거는 죽지 않는다. 과거가 되는 일조차 없다.-윌리엄 포크너
1 이 사진은 슬프다. 선글라스 너머로 렌즈를 응시하는 저 노인은 가히 살아 있는 슬픔이라 할 만하다. 빳빳하게 다린 그의 군복과 자랑스럽게 달려 있는 그의 계급장, 꾹 다문 그의 입술과 주름진 그의 턱이 이 사진의 슬픔을 웅변한다. 그는 왜 이런 절망적인 센스의 옷을 입고 있을까. 이 옷이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왜 거리에 나와 있을까. 자신이 이곳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은 스스로를 근대적인 국민 국가로 만드는 데 그의 인생을 얼마간 잘라서 썼을 것이고, 그는 고통스럽게 혹은 기쁘게 그것을 제공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회에 대해 당연한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그를 외롭게 만들 것이다. 그의 고통과 기쁨, 긍지와 분노는 전혀 공유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그의 언어는 정밀한 담론의 형식으로 정리되거나 유의미한 사회적인 파장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점점 강퍅해질 것이고, 그들은 결국 한 장의 사진이 될 것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물성의 인화지에 프린트되고, 보존 처리된 뮤지엄 매트 보드와 액자로 마감되어 세계를 떠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이상한 박물지의 일부가 되어 벽에 걸리게 될 것이다. ‘예술’ 사진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노순택의 사진은 100년 전 프란츠 카프카가 쓴 문장을 닮았다. 카프카처럼 차갑고 건조하게 묘사한다. 카프카처럼 초현실적이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 숨결이 닿을 만한 가까운 곳에 어떤 섬뜩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누구도 등장인물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의 이유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질서를 꿰뚫어 볼 능력도 없고, 탈출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피사체였던 노인이 점점 기력을 잃고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이 사진은 그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돌아다닐 것이다. 한 번 만들어진 사진은 이미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서 독립된,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저 노인은 이 사진에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2 사실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사물의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만들어지는 불완전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지닌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사진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독특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이런 성격을 가장 깊이 깨달았던 이는 아마도 롤랑 바르트였던 것 같다. 그의 유작이 된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죽은 나폴레옹 3세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고 경악한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가 독자를 추억으로 안내하는 실마리에 불과하다면, 바르트가 생각하는 사진은 과거의 현실 그 자체이다. 그가 보고 있는 사진은 황제의 몸에 반사된 빛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일종의 저장 장치이다. 우리는 그 사진에서 사진가가 셔터를 눌렀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순간의, 그 각도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 사진은 단순한 기록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과거를 오려 낸 작은 조각에 가깝다. 즉 사진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한 장의 사진이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은 연속적으로 흘러가지만 사진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분절하는 존재다. 이는 사진이 과거를 선택적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기억이 곧 망각의 다른 의미라고 썼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인정하겠다는 말이고, 이는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을 배제하겠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노순택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가 만들어 낸 남한의 늙은 우파들의 촌스럽고 폭력적인 이미지는, 그들이 지니고 있을 수 있는 다른 속성들, 자상한 할아버지, 성실한 직업인, 평범한 남편을 억압한다. 노순택의 사진 앞에 아마 그들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그들은 대항할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 유통시키지 못할 것이고, 결국 추레한 우익 늙은이로 남을 것이다. 즉 사진은 한편으로는 강력한 기억의 도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기억을 압살하는 망각의 무기이기도 하다.
수잔 손탁은 오늘날의 기억이 주로 사진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썼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네이팜탄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울면서 뛰어가는 소녀를 찍은 닉 우트의 사진이나, 사이공의 시가지에서 포로로 잡힌 베트콩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베트남 국립경찰대장을 찍은 에디 아담스의 사진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우리는 당시 베트남의 시공간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진들을 ‘기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베트남전을 머릿속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장 보드리야르가 걸프전에 대해 썼듯이, 실제 전쟁이 일어났거나 일어나지 않았거나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사진을 비롯한 미디어 환경을 바탕으로 ‘현실’을 구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완전히 정보화된’ 세계에 있다. 우리는 굳이 사건을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 우리를 둘러싼 사진 이미지가 단순한 기억의 도구가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새로운 기억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진을 통해 과거를 서술하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말의 무망함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또한 이것은 지금도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근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신화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자신의 카메라로 타인의 삶에 존재하는 ‘결정적 순간’을 포획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예술의 재현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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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시대착오적이다. 물론 예전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기억이 한국 사회의 공식 기억(Public memory)의 위치를 놓고 격렬하게 싸움을 벌였던 시절도 있었다. 이는 주로 ‘광주 사태’는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지배적 기억과, 신군부가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다는 대항 기억(Alternative Memory)의 싸움이었다. 물론 사진 역시 격렬하게 대리전을 벌였다. 이는 전자가 광주에 잠입한 간첩의 얼굴을 신문에 실으면, 후자는 대학가를 돌면서 광주의 참상을 찍은 사진을 붙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2010년이고, 19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기억의 싸움은 1996년의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공식적으로’ 종전된 바 있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고, 정치인들은 매년 망월동에서 고개를 숙인다. 죽은 이는 망각되었고 생존자들에게는 전리품이 배분되었다.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는 비로소 애도(Trauer)가 허락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다시 나타난 이 <망각기계>라는 작업은 과연 현재적으로 유효한가. 혹은 단순한 양심의 마스터베이션은 아닌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작업을 꼼꼼하게 독해해 볼 필요가 있다. 노순택은 망월동 구 묘역에 방치되다시피 놓인 영정 사진들을 다시 카메라로 찍었다. 그는 훼손된 사진 속의 이미지와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육체가 겪은 ‘해부학적’ 참상을 교묘하게 중첩해서 보여 준다. 사진 표면의 감광유제는 물에 불었다 햇빛에 마르기를 반복해서 조각조각 갈라지고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구멍이 뚫리거나 녹아내린 부분도 있다. 하지만 사진이라는 평면적인 대상을 복사하듯 다시 촬영한다고 해서, 노순택 특유의 예리한 미감(美感)이 감추어지지는 않는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매체 기자로 일했던, 게다가 지금도 수잔 손탁과 존 버거를 읽으면서 시선의 정치와 사진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는 이가 한국의 사진 역사상 가장 독특한 미적 감각과 집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진들을 미학적으로 더욱 기괴하게 만든다.
특히 사진 하단에 작가가 직접 눌러 쓴 텍스트가 작품에서 기능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이 텍스트가 있는 공간에는 좌표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프레임과 이미지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순택은 여기에 글씨를 쓰는 것으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묘한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낸다. 물론 우리가 이 단정한 글씨에서 일차적으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응축된 분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노순택은 오히려 우리를 한 번 더 속이려 시도한다. 분노와 속임수라니. 이 속임수는 마그리트가 파이프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넣을 때와 닮아 있다.
마그리트는 말과 사물의 개념적 미끄러짐을 통해 재현의 구조와 질서에 대해 질문했다. 반면 노순택의 질문은 좀 더 복잡하다. 그가 찍은 것은 방치된 영정 사진이지 총에 맞아 죽은 젊은이가 아니다. 하지만 차분하게 사인(死因)을 말하고 있는 텍스트는 우리를 속여 훼손된 영정 사진을 시체로 잘못 보게 만든다. 그의 텍스트 한 줄로 인해 우리는 복잡한 문제의 구덩이에 던져진다. 작업을 구성하는 2개의 이미지와 하나의 텍스트가 지칭하는 것은 모두 비슷한 듯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즉 살아 있었을 때 찍었을 영정 사진은 상처를 입기 전의 상태이므로 텍스트와 일치하지 않는다. 훼손된 사진 이미지는 영정 사진과 같은 사진이지만 시각적인 양상과 놓여 있는 역사적 층위가 다르므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훼손된 사진 이미지는 사진을 다시 찍은 것이지 시체를 찍은 것이 아니므로 텍스트와 일치하지 않는다. 3가지 요소는 모두 미끄러지며 우리를 현혹한다. 이런 종류의 질문과 싸우다 보면 우리는 결국 사진적 재현이란, 언어의 질서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진을 다루는 관습적인 방법으로 이 사진들을 분류하기는 어렵다. 이 사진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 사진’의 계보에 속하지도 않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분류에 거하지도 않는다. 만약 노순택이 평범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면, 그는 이 사진의 유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아물지 않은 슬픔을 찍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묘역의 관리 상태를 고발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희생당한) 이들을 국가와 사회가 과연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이런 사진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오히려 탈정치적이다. 질문의 답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답이 정해져 있는 어떤 질문도 예술은 아니다.
사실 사진 속에서 우리를 바라 보고 있는 이들은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의 희생자였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광주의 학살이 같은 민족 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정복 전쟁’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국가 폭력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이들을 민주화의 화신으로 포획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국가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사진의 날카로운 질문은 결국 폭력의 시스템이 노렸던 것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술은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잊어도 되는가. 우리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는 혹시 피 묻은 손을 몰래 씻지 않았는가 하는 것들이야말로 예술이 물어야 하는 것들이다.
모든 사진은 기억을 위해 생산된다. 잊혀지기 위해 굳이 사진을 찍는 이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모든 사진이 곧 ‘망각을 위한 기계’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기억과 망각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노순택의 <망각기계>는 이러한 사진의 구조를 탐색하는 질문을 쉴새 없이 던지는 작업이다. 밀란 쿤데라는 끝까지 가 보는 것이 예술이라고 썼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한국 사진의 지형에서 노순택보다 더 ‘끝까지 가 보려’ 하는 이를 알지 못한다. 

예술가는 왜 도시를 담는가?

강홍구 <그 집-암벽> 피그먼트 프린트에 잉크, 아크릴릭 105×200cm 2010

도시 이미지에 대한 현상적 질문


글|서 준 호


공식적인 기억에서 사라진 이 집들을 다시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도록 해 보려는 이 작업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종의 대안 기억(Counter Memory)일까 아닐까? 뭐, 의미가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집이 그렇듯이 미술 작품이라는 것도 의미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사실 끔찍한 현실이 심미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잔인한 일은 없다. 빈집과 전쟁터와 폐허가 그러하다. 내가 찍고 색칠한 집들도 원래 흉흉했지만 촬영 프린트 색칠 등의 과정을 통해 일종의 심미성이 생겼다. 그리고 현실과 심미성 사이에는 깊은 균열과 파열이 있다. 미술 작품에 의미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 갈라진 틈새에서 솟아나는 것일 것이다. -강홍구 <그 집>

왜 도시 이미지인가?
국국제통화기금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을 기점으로 지구촌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Finance & Development 2007) 2010년 현재 한국의 도시 인구 비율은 81.5퍼센트로 국민 대부분이 도시에 모여 살고 있으며,(아시아개발은행 2010)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만 2400만 명 이상이 밀집해 있다.(국가포털통계 2007) 그 압도적인 규모와 영향력으로 도시는 현대적 삶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도시 이미지를 작업의 주요 대상으로 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최근 두드러지는 도시 이미지에 대한 작업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드림하우스> <휘경, 사라지는 풍경><강홍구 개인전: 그집> <도시회화의 행방> 등 굵직한 전시가 이어졌고, 소규모 전시까지 더하면 그 수는 거의 전시 작품의 반 이상이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물론 도시 이미지 작업이 최근에 새로 생겨난 경향은 아니다.1) 비록 식민지 근대라는 외피에 싸여 있었다 해도 우리의 도시 경험은 ‘파리에서는 죽음마저도 대량 생산된다’며 탄식한 릴케의 절망(《말테의 수기》)이나, ‘비밀스러운 상품의 사원’에 도취된 벤야민의 몽상(《아케이드 프로젝트》)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미 근대 도시는 매혹과 상실감이라는 분열된 이미지로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도시 이미지 작업들은 어떤 양상과 특징을 띠고 있을까? 또 하나의 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도시 이미지가 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는 하나의 사물로서 물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2) 벽돌의 도시 로마가 대리석의 로마가 되듯 도시는 시대마다 차곡차곡 쌓인 욕망이 기억이 되고, 그 기억에 또 다른 욕망을 덧씌우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도시는 한마디로 인간이 모여서 삶을 이어 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 그리스 신전 터 위에 세워진 성당처럼 중첩되어 남아 있는 곳이다. 도시의 원형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도시를 그 자체로 사유한 시도를 검토해 보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그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필자의 개인적 기억을 고백해도 된다면, 최초로 접한 대도시 서울의 이미지는 속도와 날카로움이었다. 한강을 배경으로 63빌딩이 직각을 만들며 솟아 있었고, 지하철에서 인파에 휩쓸려 어리둥절했던 기억은 지금도 충격으로 남아 있다. 그때 이곳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 나는 여전히 ‘도착’의 과정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필자에게 서울은 석관동과 압구정, 이태원과 홍대, 삼청동과 통의동, 청와대와 용산, 청계천과 명동, 이순신 동상, 남산타워와 광화문 광장을 분주히 도착하고 떠나가는 그것이다.
하지만 최근 대도시를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글 위성사진을 통해 어디서건 서울 전체를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의 굴곡은 지도와 같은 평면적 이미지로 추상화되어 있고, 삶의 구체적인 세목은 정보 이미지로 기표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직, 간접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서울’이라는 이미지는 구호와 미디어로 조합되고 추출된 상상의 이미지(Imaginary image)로 구성된다. 이는 우리의 도시적 삶을 다시 규정하는 요인이 될 것인가? 여전히 서울은 거대하고 분주하지만 살갗으로 만져지지 않는 기괴하고 낯선 느낌의 스펙터클로 다가 온다.

도시 이미지의 스펙터클

1980년대 작품인 손상기의 <난지도>와 이선우의 <철거지대>를 살펴 보자. 전경의 판자촌과 오래된 건물, 그리고 후경의 고층 빌딩이 대비된다. 매체와 양식은 달라도, 또한 지울 수 없는 당대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이 두 작품은 부서지고 버려지는 도시의 이면을 다룬다는 점에서 2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서로를 비추고 있다. 정재호와 정직성의 2007년 작업은 철거되기를 기다리는 건물을 집합적으로 그린 것이다. 1960~70년대 개발 시기에 집적률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는 화면 속 장면은 과장되게 건물을 중첩한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집합 주거체의 본연을 그대로 드러 낸다. 강홍구의 <은평 뉴타운> <그 집> 연작 또한 철거되기를 기다리는(현재는 철거되었을) 건물들이다. 이들 작품은 ‘재개발’이라는 도시 문제를 의식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손상기의 작품 속에는 거대해지는 도시 속에서 쓰레기 더미와 함께 소외된 사람들이 드러나고, 이선우의 경우는 오랫동안 인간 삶을 가능하게 했던 기와집, 현재 아파트의 개발 논리와 유사하게 한 세대 이전에 난개발로 우후죽순 생겨난 정직성의 빨간 벽돌집, 30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정재호의 집, 개발에 떠밀려 외곽으로 가서 손수 집짓고 살던 사람들이 또 밀려나가는 현실을 볼 수 있는 강홍구의 집에는 작가가 바라 본 현실이 투사된다. 그들이 바라 보았던 풍경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을 반영한 그들의 작품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수잔 손탁을 빌어 강홍구가 말한 것처럼 작품은 존재하기에 의미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작품을 존재하게 만들기 전 작가가 그 풍경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답을 내리자면 큐레이터 조선령이 말한 대로 “예술가는 자본에게 버림받은 공간에 개입하는 사람”3)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들은 자본에게 버림받은 공간에 개입하려는 것일까? 질문은 돌고 돈다.
거대 자본은 도시를 스펙터클로 만들고 도시 이미지는 스펙터클 그 자체가 된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도시와 인간을 잠식한다.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의 위용은 그 속에서 조각난 하늘을 바라 볼 수밖에 없을지언정 그 자체로는 스펙터클하다. 그러한 거대 건축의 스펙터클에 양가적 변증법적으로 떠오르는 또 다른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바로 철거되길 기다리는 낡은 건물 혹은 철거되는 풍경일 것이다. 유리창이 깨지고, 문이 뜯겨 나간 집이 즐비한 풍경, 언덕 위에 빼곡히 들어찬 달동네, 페인트가 벗겨지고 세월의 먼지를 그대로 덮어 쓰고 있는 건물, 이 모두가 30년 전에는 기존의 것과 다른 스펙터클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원래 있었던 듯 익숙한 풍경으로 변한 그것들은 지금 다시 곧 사라질지도 모를, 기억되어야 할 불안한 스펙터클로 떠오른다. 그래서 작가들은 자본이 내버리기에 만들어진 그 공간, 틈에 주목하는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의미 그리고 역할

모든 예술 작품, 이미지는 심미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 심미성은 주관적이다. 현실은 이미지가 아니지만, 도시는 실체이면서 동시에 이미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현실과 틈을 만들며 의미를 생산한다. 예술가는 관조자이면서 동시에 개입자다. 도시를 관조하며 심미성을 내포한 이미지로 관람자의 사고에 개입한다. 혹은 관조를 넘어 스콰트(Squat)나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 도시 그 자체에 반대의 입장에서, 혹은 적극적으로 도시를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며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의 결과는 과정 자체이며 그 행위는 이슈화를 통해 현실을 반영하고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글머리에 적은 강홍구의 말처럼 현실과 작품의 심미성 사이의 틈은 언제나 벌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추운 겨울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체온을 유지하는 고슴도치처럼 작품과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적당한 거리가 얼마만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타자적 관조자의 입장과 주체적 개입자로서의 입장을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지는 작가가 결정할 몫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제작된 이주요의 <한강에 누워>는 한강을 배경으로 작가가 공간 자체에 개입함과 동시에 한강에서 자란 풀 너머로 도시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여기에는 한 푼 가진 것 없는 남녀의 이야기가 한강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라스베가스의 지하 공간과 같이 서울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공간인 한강 둔치를 소재로 도시에서의 삶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는 공간을 바라보고 개입하는 태도가 다르지만, 결국은 도시 이미지와 도시를 소재로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삶을 환기시킨다.
넘쳐 나는 도시 이미지 중에서 균형을 잡은 작품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 하나하나가 개인이 경험한 도시 이미지를 충실히 재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만 시류에 휩쓸린 듯 도시를 소재로 삼아 작업대 위의 정물과 마찬가지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기본적 속성이 메타비평적인 것이라면 언제나 예술은 기존의 사회, 혹은 거대 권력에 적대적이다. 반면 그 적대는 양가적으로 상대에 대한 욕망을 내재한다. 물론 도시를 이용하고 이미지로서 재현하는 작가들의 시도가 자본주의의 마지막 밑 무늬로 기능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인리히 뵐플린은 ‘바로크 시대에는 정물조차도 진동한다’고 했다. 정직한 응시와 진지한 분투가 전제된 작품이라면, 정물적 반영처럼 보일 뿐인 이러한 시도도 예술가의 민감한 촉수가 그 시대에 어떻게 떨리며 반응하는지를 보여 주는 흔적이 된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의 언어로만 가능한 폭로와 고발이다. 균형을 잡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예술 또한 신자유주의, 자본의 손바닥 안을 맴돌 수밖에 없을 지라도4)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할지 모른다.
권력은 도시를 기획하고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에 반해 예술가는 저들이 제시하는 스펙터클에 또 다른 스펙터클, 혹은 스펙터클이 제거된 듯 담담하고 사소한 이미지로 비판, 대항한다. 분절되어 깡그리 사라질 도시의 기억을 작품에 새기면서 삶의 흔적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 도시 풍경 속에 숨은 억압된 진리를 드러내려 노력하기보다는 다만 현실 속에 숨은 진실을 환기시키는 것, 그것이 예술의 몫이 아닐까? 예술이 삶을 대상으로 하고 또 삶을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도시는 예술의 소재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시 경관을 풍경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그 속에 숨은 힘, 도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작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결국 자본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 말하듯 윤리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벤야민은 “‘진보는 늘 새로운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반복동일성’”이라고 했다. 문명의 전시장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것만을 향유하고 사는 것이 진정 진보일까? 웬만한 예술 작품보다 더 거대한 스펙터클의 예술을 보여 주는 현 정부의 모습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법하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예술가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이다. 거기에 압도되지 않고 저항하듯 이미지를 만들며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현재를 꿈꾸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술이 도시와 관련해 떠맡아야 할 역할이 아닐까?



1)강수미, <다공성의 무늬, 동시대 한국의 이미지>,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 현실문화연구, 2006, p.234
2)민현식, <이 시대, 우리의 도시>, 대한건축학회, 건축, 제49권, 2005. 8, p.20
3)조선령, <버려진 공간, 분열된 시각: 미술이 도시 현실에 개입하는 몇 가지 방식>, 문화과학사,
문화과학, 2009년 여름호, 2009.6, p.219
4) Julian Stallabrass, <The Fracturing of Globalization>, 서양미술사학회,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제31집, 2009.8, p.299~314

 

 

 

Wonderful Copenhagen

닐스스터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올라프 브루닝 개인전 장면

Wonderful Copenhagen

지난 9월 2일부터 5일까지 덴마크 관광국과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의 공동주최로 제3회 <코펜하겐 컨템포러리>가 개최됐다. 덴마크는 비엔날레 대신 ‘아트 위크’ 개념의 이 행사를 통해 덴마크 현대미술의 오늘을 효율적으로 알리면서 스칸디나비아 미술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art가 이 행사에 초대를 받아 현지 취재를 다녀왔다. 루이지애나미술관, 오버가든 등 코펜하겐의 주요 미술관 및 기관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 호경윤 수석기자

공교롭게도,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의 초청으로 덴마크에 도착한 날은 광주비엔날레의 프레스프리뷰와 에르메스미술상 시상식이 동시에 열리던 날이었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날은 전국에 아주 심한 폭우가 쏟아졌고, 국내 주요 미술 관계자들은 광주에 간 사람과 서울을 지킨 사람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만약 기자가 한국에 있었다면 어디를 갈까, 꽤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각, 기자는 덴마크의 아름다운 풍광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에서 제공한 밴에 몸을 싣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덴마크에는 비엔날레가 없다. 그러나 예페 하인, 올라퍼 엘리아슨 등의 대표 작가를 위시해 동시대 미술계 메인스트림으로의 합류를 꾀하고 있다. 덴마크는 비엔날레 대신 일종의 ‘아트 위크’와 같은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를 개최한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는 덴마크 관광국 ‘원더풀 코펜하겐’과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2008년부터 매해 열리고 있다. 올 행사가 개최되는 9월 2일부터 5일까지 4일 간 코펜하겐의 주요 미술관 및 갤러리의 전시 오프닝이 한꺼번에 열린다. 따라서 이곳에서 봤던 인사들을 또 다시 저곳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자연스레 얼굴을 익힐 수 있다. 또한 홍보 활동 역시 관광국 ‘원더풀 코펜하겐’에서 통합적으로 진행, 서울 뉴욕 베를린 헬싱키 봄베이 등에서 온 기자를 한데 모아 시간대 별로 가이드투어에 참여시킨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의 공식 전체 오프닝 파티가 열린 장소 장소는 IMO, 닐스스터크갤러리, 갤러리니콜라이왈러,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 등의 현대미술 기관들이 들어서 있는 옛 칼스버그 양조장 지구였다. 특히 이곳에 위치한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의 대표 토벤 센트는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코펜하겐퍼블리싱’을 조직해 1년에 한 번씩 《New Danish Art》를 펴내 덴마크의 신진작가들을 한데 모아 소개해 온 덴마크 미술의 주요 인사다. 한편 덴마크 최대의 주류회사 칼스버그는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를 포함한 주요 미술관 스폰서에 빠지는 일이 없을 정도로 현대미술 분야에 막강한 지원을 보내고 있다. 덕분에 술 떨어질 걱정 없이 새벽 3시까지 흥겨운 파티가 이어졌다. 오프닝 파티를 마친 다음 날 아침부터 투어 강행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립 미술관인 덴마크내셔널갤러리를 시작으로, 샬롯텐버그미술관 같은 사립 미술관이나 일종의 대안공간 성격을 지닌 원더랜드아트스페이스와 피프스플로어, 그리고 갤러리포슈 데이비드라이즐리갤러리 미카엘안데르센갤러리 크리스티나윌슨갤러리 V1갤러리 등의 상업 화랑까지 골고루 둘러 볼 수 있었다.

샬롯텐버그미술관의 <Make Yourself at Home>전 전시 전경

통합의 전략, 스칸디나비아 미술의 선두

이번 투어의 백미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의 하나로 정평이 나 있는 루이지애나미술관이었다. 코펜하겐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훔레벡 지역 바다가 펼쳐진 언덕에 자리한 루이지애나미술관은 1958년 컬렉터인 크누드 W. 옌센이 설립한 곳이다. 특히 미술관 내 조각공원은 덴마크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 조건과 현대미술의 이상적인 만남을 제시하고 있다. 루이지애나미술관에는 1945년 이후 현대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로버트 라우센버그, 루이스 부르주아 필립 거스톤, 모리스 루이스 등의 거장부터 토마스 데만트, 조나단 메세, 줄리 메레투 등 최근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까지 3,000여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으며, 핀란드에서 거주하는 한국 디자이너 아무 송(컴퍼니)의 <레드 드레스>도 이곳에서 전시된 바 있다. 현재는 소피 칼의 개인전과 기획전 <뭉크 이후의 워홀>이 열리고 있었다. 또한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은 오프닝을 며칠 앞두고 설치 중이었으나 기자들은 미리 작품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기자단은 코펜하겐 외곽에 있는 아티스트레지던시스튜디오에도 방문했다. 이곳은 한적한 숲 속에 있어 세계 곳곳에서 온 작가들이 편안하게 휴식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이러한 환경을 십분 활용, 입주작가를 중심으로 조각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그곳에 입주해 있는 니카 오블락&프리모즈 노박은 2005년 쌈지스튜디오에 입주했던 작가라서 더욱 반가웠다. 이들은 슬로바키아 출신의 부부 작가인데, 그 동안 아기를 낳아 레지던시에서 육아와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기자가 애초에 기대했던 덴마크 신진 작가의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옛 도축장 지구와 ‘오버가든’이었다. 2007년 옛 도축장 지구에 작가 예페 하인과 그의 동생 레르케 하인이 문을 연 레스토랑 겸 클럽 ‘카리에르’는 댄 그래함, 올라퍼 엘리아슨 등 작가들이 인테리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작가들의 정서적 구심점인 카리에르는 비정형적인 프로젝트를 실험하는 장이자, 동명의 정기간행물도 발간해 냄으로써 덴마크 미술의 비전을 발신하는 곳이다. 한편 오버가든은 대안공간의 성격을 띤 기관 중 가장 큰 규모와 체계적 프로그램을 갖춘 곳으로 덴마크의 신진 작가를 프로모션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 주간에는 부대 행사로 ‘인스티튜션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주디스 슈와츠바르트 박사가 모듈레이터로 나왔고, 스웨덴 인근의 말뫼에서 온 제이콥 파브리치우스 말뫼미술관장, 마크 슬라덴 샬롯텐버그미술관 디텍터가 패널로 참가했다.
사실, 이 글의 서두에 꺼냈던 말은 다른 기자들이 한참 비엔날레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혼자만 좋은 구경했다는 자랑이 결코 아니다. 3개의 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덴마크의 ‘상생과 공생’의 미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우 “A비엔날레에 참여하면 B비엔날레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작가에게 선택을 강요하거나, 개막식에 지자체장 의전 준비, VIP리스트에 열을 올리는 등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오히려 덴마크는 하드웨어 기반이 약한 데 비해 컨텐츠 확보와 실리를 추구하는 ‘통합’의 전략으로 스칸디나비아 미술의 선두를 차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트릭스터로 살기

왼쪽·백남준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부분) 1997
오른쪽·지아니 모티 <기금 전시> 2009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트릭스터로 살기

글|정 현

어느 신문의 10월 23일자 해외 칼럼에 ‘류샤오보 노벨상… 중국도 못 막은 트위터’라는 제목으로 중국 베이징대 인터넷학 교수 후용의 기사가 게재됐다. 10월 8일 중국인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소식과 관련된 인터넷 미디어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내용이었다. 악명이 자자한 중국의 미디어는 그의 수상 소식을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보도를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많은 트위터 유저들에 의해 수상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트위터 사이트를 차단한 중국은 심지어 중국판 트위터 ‘판퍼우 닷컴’도 문을 닫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우회 서버를 통해 여전히 트위터에 접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통제를 피한 인터넷 환경은 중국인의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다. 이런 ‘트위터 혁명(Twivolution)’은 사회저항 운동 및 여론 파악 그리고 광둥성의 쓰레기 소각장 반대 운동에 이르는 미디어 혁명을 일구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직은 미미한 수준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후용 교수는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기반이 일종의 마이크로 파워를 이끌어 내는 인터넷 미디어의 잠재력을 높이 산 것이다.
미디어의 탄생은 새로운 기계기술에 의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이란 마샬 맥루한 주장처럼 삶의 방식을 이끄는 패러다임이 됐다. 결국 새로운 매체에 의해 인식하는 방식이 바뀔 것이란 예견은 기계기술 문명의 발전과 함께 전인류의 현실이 되었다. 반면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역사적 시공간 내에서 인류 전체의 존재 방식은 그들의 감각적 지각 방식과 방법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감각적 지각을 조직하는 (지각 매체인) 방식과 방법은 자연적으로 제한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한된다.” 즉 이것은 인간의 지각이 발전하듯 기술도 함께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외부 환경의 조건은 개인의 지각과 인식의 한계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전과 대안공간루프에서 열린 <감각의 확장>전은 미디어아트가 이성 중심의 이분법적 서구 인식론에 머물지 않고 있음에 초점을 둔다. 즉 다양한 감각이 뒤엉켜 논리적 사유 너머, 되레 사고의 혼돈을 야기시키는 실험을 통해 미디어아트의 전형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두 전시는 제도화된 인식 체계에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 또는 상황을 개입시켜 궁금증을 유발하는 관객의 자발적 행위를 유도한다.
마술 연금술 눈속임 허구 가상 전복 실재…. 예술가는 예전부터 사티로스와 같이 욕망을 드러내고 술과 음악에 취한 채 인간 관계를 엮어 주거나 훼방 놓는 이중적인 존재였다. 예술가의 정체성은 불확실할 때 더욱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뒤샹이 ‘로즈 셀라비’로 변했을 때, 요셉 보이스가 동물과 함께 샤먼이 되어 초자연적 존재로 등장했을 때, 백남준이 국경을 뛰어 넘은 지구인이 되어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흘러내린 순간에 예술적 논리나 계보의 틀은 흐트러지고 만다. 예측불허의 순간은 마치 죽비를 맞는 깨달음의 찰나를 떠올리게 한다. 루이스 하이드의 동명 저서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로부터 촉발된 이 전시는 경계 위에 서 있는 트릭스터에 의해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논지를 펼친다. ‘사기꾼, 협잡꾼’의 의미를 가진 트릭스터를 창의적인 사람의 의미로 확장해 미디어와 권력의 관계를 조롱했던 앙팡테리블 백남준의 속임수 속에 담긴 정치적 태도를 전시로 다루는 것이다.
트릭스터로서 백남준의 활동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유럽으로 건너가 “내가 황색공포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된 그의 ‘예술적 사기’는 암묵적으로 사회 제도로부터 일탈하고픈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트릭스터란 개념은 백남준의 작업을 TV나 미디어라는 소재와 장르에 제한하지 않고 동일한 작업을 다른 태도로 바라 보게 만들어 준다.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가 열린 백남준아트센터 1층 상설 전시실엔 주재환의 비판적 해학의 회화가 간헐적으로 등장해 백남준의 유머 사이에서 현존하는 트릭스터의 면모를 강조한다. 2층 전시실은 백남준을 포함한 12명의 작가가 미술 제도의 한계를 토로하거나, 때론 의견이 없는 관람객을 조롱한다. 싱가폴 작가 림 차이 추엔은 미술관 안에 닭튀김 냄새를 피웠다. <끝내 주는 맛>은 그가 경험한 여름밤의 서울의 냄새였다. 지아니 모티는 기금으로 받은 지원금 800만원을 전시장 바닥에 뿌려 놓은 <기금 전시>를 선보였다. 세금에 의해 운영되는 작가 지원 기금 체제에 대한 작가의 난처한 질문은 누구나 던져 보는 현실적 물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왼쪽·한경우 <붉은 캐비넷> 라이브 비디오 설치, 혼합재료 2005
오른쪽·차동훈 <District_AR on Google Earth> 콜라주 25×240×240cm 2010

혼재된 감각들

그림과 눈속임은 그리스 신화 속 두 화가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예술가의 고민 한 가운데 놓여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서구 미술의 계보는 재현의 기술에 의한 눈속임의 시각 효과에 의해 진화하였다. 원근법적 사고, 하나의 소실점을 가진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는 고전주의적 시점으로서 눈속임은 권위적 기술이었기에 오히려 ‘반 트릭스터’에 가깝다. <감각의 확장>전은 대안공간루프에서 진행하는 한일 미디어아트 교류전이다. 출발은 미디어 기술의 논리적 태도가 서구적 합리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 동양적 직관에 의해 기술과 사상, 물질과 정신을 통섭하는 총체적 미디어 미학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양국에서 각각 3명의 미디어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에서 미디어 기술의 감각적 사유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양방향의 미디어 실험이 주는 오락 오감 지각 인식에 관한 요소가 소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기계적 논리와 착시에 바탕을 둔 작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 한경우의 <Corners of LOOP>는 감시카메라의 권력적 응시를 미학적 이미지로 전복시킨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흥미롭게도 실내의 구석을 줌인 상태로 촬영해 벽에 걸린 모니터로 전송한다. 고정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실시간 전송되고 있기에 시간성이 전복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거시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난 미시적인 앵글을 이용한 실재의 분할이 인상적이다. 지하에 전시된 야마구치 타카히로의 작업은 GPS를 토대로 도쿄 시부야를 자전거로 이동하는 궤적의 원리를 이용해 영문 타이포를 제작한다. A부터 Z까지 자판 중 하나를 누르면 알파벳에 해당하는 타이포그래피가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시부야 거리에서 찾아 낸 도시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작업에는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는데 하나는 인공위성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에 달아 놓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매크로와 마이크로의 분할과 조합은 현대 미디어 환경을 재연하고 있다.

다시 경계의 끝으로

기술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빛을 좇던 고대인의 신화와 닮았다. 그리스 신화의 트릭스터 헤르메스는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이었지만 동시에 이질적 문화의 메신저로서 질서를 흔드는 긍정적 의미의 트러블 메이커로 비유되곤 한다. 미디어와 체제는 창과 방패 같이 모순된, 그러나 공존하는 현실이다. 글머리에 언급했던 중국의 트위터 혁명은 극단적으로 제한된 체제이기에 가능한 미디어 혁명의 예다.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은 체제에 복종하거나 저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인터넷 환경은 폭력과 무의미한 소통의 낭비가 심화되어 사이버 쓰레기(Cyberdust) 문제가 대두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소셜 네트워크와 같은 현대 미디어 기술의 힘은 획일화된 공동체의 일부가 아닌 주류와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는 또 다른 개인과 가상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지만, 동시에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할 가능성 또한 내포하기에 주의해야 한다. 형식적인 제도로부터 자유의지를 드러내는 개인 미디어의 역할은 바로 자율성과 독립성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다. 백남준의 다양한 미디어 실험과 퍼포먼스의 밑바닥엔 권위와 체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국민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한 후 일상 생활에서 조차 모국어를 사용할 때 이웃의 감시를 받았다는 경험을 통해 표현의 억압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를 깨달았다. 결국 그는 다락방에 숨어 그의 누이가 남겨둔 영화 잡지(미디어)를 보면서 탈영토의 꿈을 키웠다. 어린 백남준이 통제의 엄격함 속에서도 국가 언어 인종의 경계를 넘어 지구인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을 키운 것과 현재 중국에서 태동하고 있는 트위터 혁명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카르마의 세 축

<“Bye, Noah, see you tomorrow!”> 몽인아트센터 전시 전경 2010

카르마의 세 축

글 | 유 진 상 

2000년대 후반에 가장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들 가운데 박윤영이 있다. 박윤영의 작품은 동양화, 하드코어 판타지, 스릴러, 하위 문화, 저널리즘, 사적 글쓰기, 그래피즘이 혼재된 독보적인 스타일을 보여 준다. 이 작품들은 텍스트와 함께 패키지 프로젝트로 진행됐는데, 예를 들어 <Cane>과 <로고산수> (2003, 브레인팩토리),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파란 기둥들>과 <픽톤의 호수>(2005, 인사미술공간), <가로등 없는 캄캄한 로히드 하이웨이>와 <아겔다마로의 여정>( 2006, 삼성미술관 리움), <정육면체와 다양체의 의미>와 <검은 날개>(2009, 아뜰리에 에르메스), <노아의 파란 별>과 <붉은 물고기가 강 위로>( 2010, 몽인아트센터) 등이 그러하다. 이 밖에 <익슬란 스탑>(2007,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소설 《익슬란으로의 여행》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각각 독자적인 범주임에도 서로 참조를 주고 받으며 예기치 못한 조합과 경로를 만들어 낸다. 몽상과 암시, 분열과 독백으로 채워진 작가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독자 스스로 박윤영의 내면으로 들어가 작가의 눈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는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수시로 다른 인물로 정체성을 바꾸며, 이야기가 전개되던 곳은 삽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른 곳이 된다. 사물들은 의미심장하게 그것의 고유명으로 적시된다. 마치 이 이야기가 꿈이 아니라는 근거라도 대듯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박윤영의 카르마

세 개의 축이 박윤영의 카르마를 굴린다. 첫 번째는 작가조차 알아 볼 수 없는 분신과 같은 여성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사물의 주변을 배회하기도 하고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종종 사라지거나 핍박당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희생이나 소멸은 아름다움의 종식을 의미하며 때로는 세계 전체가 불안으로 가득 차는 계기를 마련한다. 두 번째는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공간들이다. 영역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정착했던 것처럼, 그리고 매일 창 밖으로 보이는 베이커 마운틴의 일기(日氣)를 관찰해야 했던 것처럼 공간은 마치 게임의 무대와 같이 그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그가 인용하는 영역은 작가 삶의 반경이자 작가가 세계를 내다 보는 현창(舷窓) 혹은 게임의 서로 다른 스테이지를 연결하는 웜홀(Worm hole)과도 같다.
세 번째는 ‘다면체’ ‘유리알’ ‘깨진 거울’의 형태를 띠고 있는 사물이다. 각각의 사물은 복수의 면을 지니고 있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주변을 비춘다. 그것은 고유명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한다. 이 세 개의 축은 박윤영의 내적 상념들로 이루어진 서사의 바퀴를 움직이는 동인(動因)인 동시에 그가 쓰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생성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바퀴는 어디로 굴러가는가? 그것은 불안에 휩싸인 존재가 스스로의 분열을 통해 소멸 혹은 해결(Resolution)로 나아가는 윤회를 무한히 반복한다.
 

희생자들


박윤영의 작품에서 가장 충격적인 동시에 매혹적인 모티프는 여성이다. 작가 자신이 여성임에도 작가가 묘사하는 여성은 지나치리만큼 대상화되어 있다. 심지어 여성들은 극단적인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2005년 전시 <픽톤의 호수>에서 인용한 캐나다의 픽톤 농장 살인사건은 마약 중독 및 매춘부 경력을 지닌 여성 64명의 실종에 관한 것이다. 이 여성들은 농장주인 로버트 픽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뒤 분쇄기로 처리되어 돼지사료에 이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이 사건을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악마 로스벌트와 오데트, <트윈 픽스>의 밥과 로라 파머, 에어로스미스의 노래 <Janie’s Got a Gun>에 나오는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뒤 살해당한 제니의 이야기 등과 결합해 관객이 복수의 희생자 시점으로 그녀들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독특한 구조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 전시는 그가 이전에 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파란 기둥들>이라는 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스스로 FBI 요원이 된 작가는 자신의 집 주변 풍경들로부터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암시를 발견한다. 코끼리 모양을 한 언덕, 이제는 사라진 스프루스(Spruce) 나무로 가득 찬 붉은 숲, 호수 위의 백조들, 인근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파란 기둥의 집 등이 그것이다. 백조들은 다시 숲 속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일단의 여성들로 바뀐다. 꿈 속에서 주인공은 로스벌트, 밥 혹은 로버트에 쫓겨 어느 붉은 방으로 피하는데, 거기서 제니라는 여성과 만난다. 픽톤의 살인사건 수사를 맡은 주인공은 ‘선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고, 이는 로스벌트에 의해 드러나며 결국 제니라는 여성을 구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마지막 장면에는 주인공 선녀가 정신병동으로 끌려간다는 암시가 주어져 있다. 주인공은 수사관이지만 동시에 태어나자마자 기형아로 버려진 인물이며 상상 속의 구원자이자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박윤영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 여성은 작가의 얼터 에고이자 살해당한 여성들의 화신(化身)이며, 동시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 속에서 희생된 여성들의 총화(總和) 같은 것이다. 초기의 픽토그램 수묵화 속에서 이 여성들은 극히 단순화된 기호로 제시되거나 알 수 없는 문장의 우물거림에 의해 차마 발설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시화되곤 했다. 2005년에 그린 <선녀와 그림자>는 일종의 캘리그램(Calligram) 혹은 제발(題跋)로,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파란 기둥들>에서 그림자의 형태로 등장하는 로스벌트가 주인공의 귀에 속삭이는 문장인 ‘Bad girl, Sunyuh, bad girl. Seat. Seat. Good Girl’을 뒤집어서 그린 것이다. 이 글 그림에는 중국 수묵화에 나올 법한 선녀옷을 입은 여성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바로 화자가 볼 수 없는 문장의 뒤편, 즉 관객이 바라보는 쪽에 숨어 있다. 그림자(로스벌트, 밥 혹은 로버트)에게 발견되면 희생되어야 하는 이 여성들은, 그럼에도 우아함과 관능미 그리고 약간의 무심함마저 지니고 있어 한층 더 비극에의 예감을 강화한다.
<가로등 없는 캄캄한 로히드 하이웨이>는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파란 기둥들>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여기에서 수사관인 ‘나’는 로히드 하이웨이를 달리는 차에 올라타 있다. 리버뷰(Riverview) 정신병원에 이르자 나는 목에 연결된 줄에 끌려가 마취되어 잠이 든다. 의식을 되찾은 나는 붉은 수녀복처럼 생긴 옷을 입고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눈다. 지휘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은색 까마귀가 그녀에게 말을 건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벌레로 변해 있다. 벌레의 이름은 ‘선녀’다. 그것은 은색 까마귀를 따라 시공간을 넘어 자신이 사는 도시가 어떻게 황폐해져 가는지 목격하기도 하고, 눈이 내리는 날 강림한 천사가 시민들에게 린치를 당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천사는 하얗게 내리고 있는 눈의 착시일 수도 있다. 그것은 금세 더러운 진창으로 변한다. 이 벌레의 꿈은 로히드 하이웨이를 따라 리버뷰 정신병원을 지나치면서 순식간에 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자리를 바라 보니 커다란 보름달만 만년설을 비추고 있다. 이 로드무비는 ‘Are you full moon?’이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고속도로 옆 광고판의 문구에서 튀어 나왔을 법한 이 카피는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지나간 이 모든 이야기에 한층 더 초자연적인 울림을 더해 준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이나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고속도로 장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환각적 경험이나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는 이 놀라운 전개 속에서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세계가 비극에 대해 구조적인 무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작가의 놀람 혹은 슬픔이다. 이 글에서는 여성 대신 백향목과 포도나무, 연어, 천사처럼 내리는 눈발들과 같은 자연의 구성물이 희생의 대상이 된다.
<노아의 파란 별>은 ‘나’로 제시된 준호라는 아이가 2027년이라는 미래의 상상 속 친구인 노아와 나눈 짧은 동행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에 나오는 ‘노아’라는 이름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이 글에서는 회복되지 않는 자연에 대한 깊은 슬픔을 지닌 소년의 이름으로 인용되고 있다. ‘나’는 노아가 느끼는 절망적 감정과 그로 인한 행동(낙엽을 부서뜨리기, 거미줄에 걸린 나비의 날개를 떼어내어 거미에게 달아주기, 새 둥지를 돌로 맞혀 떨어뜨리기)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느끼는 존재다. 이 짧은 이야기는 인위적인 개발에 따른 자연의 쇠락으로 모든 생명체가 사라져 버린 세계를 바라 보는 아이의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이 글은 몽인아트센터의 전시 <붉은 물고기가 강 위로>와 함께 미묘한 반향을 일으킨다. 이 전시의 설치작품인 <“Bye, Noah, see you tomorrow!”>는 캐나다의 원주민 말살 정책을 위해 설립된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학대와 폭력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박윤영이 사는 지역 인근의 한 학교 주변을 거닐다가 알게 된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곳에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고 캠코더로 촬영하면서 따라가던 작가는 이 동물이 인근의 다른 건물, 즉 정신병원 철책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이 병원이 원주민 학교에서 정신이상을 일으킨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임을 알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이 사소한 조우는 작가에게 학교와 병원의 관계, 원주민들의 희생과 자연의 소멸, 백인들의 폭력과 희생자에 대한 기억 등이 뒤얽힌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기서 노아는 과거에 희생된 아이들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사라져 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을 대신하는 이름이다.

왼쪽·<One Tree Hill-Ⅳ> 화선지에 먹, 비단 88×67cm(부분) 2007
오른쪽·<One Tree Hill> 화선지에 먹, 비단 2007

닫혀 있는 영역들

박윤영의 작품에는 많은 장소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녀의 방, 베이커 마운틴, 픽톤 농장, 파란 기둥이 있는 집, 붉은 방, 로히드 하이웨이, 리버뷰 정신병원, 붉은 나무숲, 코끼리를 닮은 언덕, 백조의 호수, 아겔다마(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 익슬란 등은 모두 실재하는 공간의 참조이자 동시에 연극의 무대처럼 언제든지 비현실적 서사들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이다. 책이나 영화에서 인용한 붉은 방(트윈 픽스)이나 아겔다마와 익슬란 등의 지명을 제외하면 이들 상당수는 작가가 실제로 방문한 장소다. 박윤영의 글과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가 독서 산책 음악 영화 등과 같은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거기에 연관된 이야기의 복잡하고도 광대한 구성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소들은 대체로 닫힌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야외일 때조차 공간은 산이나 언덕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밤의 어둠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밝혀진 풍경들이다.
이 공간들은 그림자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가해자, 어디선가 날아오르는 검은 새, 숨어 있는 희생자,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표지판, 선녀나 정령 등이 아무 때나 그곳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낼 것처럼 보인다. 역할수행 게임에서처럼 시점은 언제나 일인칭이어서 갑자기 변환된 장소의 성격에 따라 독자나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나는 ‘누군가 내 목에 연결되어 있는 줄을 잡아 당기면’ 함께 끌려가고, ‘그녀가 우아한 자세로 다가와 내 귓가에 무엇인가 속삭이면’ 그것을 들으며 꿈에서 깬다. 박윤영의 공간은 ‘나’와 ‘공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몽환과 상념을 만들어낸다. 닫힌 영역들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것은 꿈속에서 그러하듯 빈 여백을 통해 삽시간에 이루어진다. 박윤영은 2002년 <장판몽유>에서 미끄러운 장판 위를 한 면에서 다른 면으로 몽유의 상태에서 걸어가는 법을 그린 바 있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꿈의 역학은 이미 이때부터 시연(試演)되고 있다.

<아겔다마로의 여정> 화선지에 먹, 혼합 재료 2006

사물들

작가가 2008년에 쓴 <일곱 살 조카로부터 받은 유리알>은 이 유리알에서 촉발된 연상이 일련의 연쇄적 기억을 불러들이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족과 함께 콘서트에서 감상한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콘체르토 제1, 2번 G 단조>는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베르트랑의 <사이렌>에서 고개지의 <낙신부도> 속에 나오는 ‘견희’로, 다시 베르트랑의 <물의 요정(Ondine)>으로 이어진다. 그날 밤 작가는 지하실에서 검은 그랜드 피아노가 유리알처럼 신비로운 화음을 펼쳐 놓는 것을 목도한다. 이 글은 2009년의 또 다른 글 <정육면체와 다양체의 의미>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작가는 새벽에 창밖으로 보이는 베이커 마운틴 위에 떠있는 별의 관측, 갑자기 지나간 검은 날개, 육각형의 수많은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섬, 일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다가 건네 준 그 안에서 솟아오른 또 다른 유리알들의 화음 등에 대해 묘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유리알들이 일종의 다양체, 즉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동시에 단단한 결정을 이루고 있는 크리스탈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크리스탈은 훨씬 이전에 작가가 까르띠에 카탈로그의 여백에 그렸던 <까르띠에> 시리즈를 떠올린다. 영롱한 보석들이 섬세하게 세공된 공예품 주위를 휘감고 있는 미인을 그린 이 드로잉들은 처음부터 투명한 다면체의 현란한 변화를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이후의 다른 드로잉에서도 종종 이 수정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붉은 물고기가 강 위로>에 전시된 <Noah’s Bright Morning Star>에서 이 다면체는 설치 작업의 한가운데 바닥에 투사된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새벽의 베이커 마운틴 위 하늘에 붉게 떠있다. 그것은 베이커 마운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속에서 쉬지 않고 분기와 연쇄를 반복하는 상념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노아가 사는 ‘붉은 물고기가 강 위로’라는 의미의 ‘퀴엘람’ 마을에 일어난 쇠락을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처럼 보이기도 하며, 폭력 때문에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원주민 아이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면체에 대한 또 다른 참조로서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가 있다. 이상향 카스탈리엔에서 행해지는 유리알 유희는 학문과 예술, 통찰과 사유의 정수(精髓)를 가늠하는 최고의 지적 체계를 가리킨다. 이곳에 온 이들은 자신이 지닌 모든 앎과 기술, 경험과 예지를 통합하여 정신적 구성을 이룩하는 유희에 몰두한다. 박윤영이 몰두하는 시각과 언어의 유희 속에서 ‘유리알’은 단어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며 음악이나 노래 혹은 그림, 영화의 한 장면, 뉴스에 실린 재난이나 사건, 흘깃 스쳐지나간 광고판의 문구, 해파리들, 거실의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까마귀의 날개이기도 하다. 각각의 대상은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투명한 면을 향하는 다면체이자 무한히 달라지는 숫자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암시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붉은 물고기가 강 위로>에는 두 번째 설치 작품인 <“Bye, Noah, see you tomorrow!”>가 있다. 이 작업의 한가운데에는 고풍스러운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맞은 편 벽에는 작가 특유의 붓글씨체로 쓴 ‘Coyote you could be anywhere in the hole wide world’라는 문장이, 그 왼쪽에는 양가죽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코요테들을 그린 캔버스가 이젤 위에 놓여 있다. (박윤영은 ‘whole wide world’ 대신 코요테의 세계를 ‘구멍(Hole)’으로 표기해 놓았다.) 좀 더 오른쪽의 캔버스 뒤에는 꽃이 그려진 병풍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뭔가를 지운 듯한 파도 모양의 검은 선 위 아래로 ‘Noah is a scaredy cat’이라는 붉은색 글귀가 적혀 있다. 코요테 무리는 <노아의 파란 별>에서 ‘나’에게 불안을 일으키는 굶주린 존재들로 표현된다. 그것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세계의 일부이자 그림자의 존재처럼 잠재해 있는 근원적 위협이기도 하다. 제목인 ‘안녕, 노아, 내일 봐!’는 뇌리 속에서 노아를 상상하는 미래의 준호라는 아이가 혼자 되뇌는 독백이다. 이 아이는 작가 자신의 투영이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유리알을 건네준 일곱 살의 조카를 떠올린다. 준호의 세계에서 붉은 연어들은 강 위로 오르지 않는다. 모든 결과는 작가의 현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이 끊임없이 ‘나’의 불안을 자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윤영은 새해에 그의 방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내 왔다. 그는 자신의 방 창문이 향하고 있는 베이커 마운틴과 그 위의 하늘을 바라 본다. 창밖의 풍경은 그의 방에서 유일하게 변화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고요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없이 많은 형태와 그림자들을 그가 있는 곳으로 몰고 들어온다. 하늘은 분기하고 다시 합쳐지며, 또다시 분기하기를 반복한다. 어둠과 빛의 교차, 비와 바람의 소리들, 먼 것과 가까운 것들의 움직임이 그것을 통해 존재를 알려 온다. 하늘은 그의 벗이면서 불안의 원천이다. 어느 것도 거기에 오래 머물 수 없다.

2010 November Special

Art Management 5社5色

바야흐로 ‘예술 경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아트가 기업 경영의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최근의 예술 경영은 사회 공헌 차원의 문화 예술 지원 활동, 이른바 메세나(mecenat)와는 또다른 개념으로 흐르고 있다. 기업은 자사의 상품만을 홍보하기보다는 예술 친화적 ‘브랜드 이미지’를 대중에게 부각시키는 아트마케팅을 꾀하고 있다. 특화된 미술품 컬렉션에 집중하거나 전시 공간을 직접 운영하고, 기업 이미지에 부합하는 작가와 작품을 예술 경영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기업의 전시 공간은 잠재적 고객 개발을 위한 새로운 예술 서비스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또한 최근의 기업 중에는 특성화된 미술상 운영,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가동, 해외 주요 미술 기관과의 협력 관계망 구축 등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다차원적인 매니지먼트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art는 최근 예술 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다섯 회사의 각기 다른 다섯 빛깔의 활약을 소개한다.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두산아트센터는 그룹 창립 111주년을 기념, 기존의 연강홀을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연강재단에 속해 있으며, 뮤지컬 전문극장 연강홀과 소극장 Space111, 두산갤러리 등 전시 공연 음악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펼치는 공간이다.

Doosan Gallery_작가 지원, 레지던시에서 미술상까지

지난 10월 5일 두산그룹 연강재단(이사장 박용현)의 두산아트센터에서 제1회 두산 연강예술상 시상식이 열렸다. 두산 연강예술상은 평소 인재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고(故) 박두병 회장의 경영 철학을 이어가기 위해, 그의 탄생 100년을 맞아 제정했다. 이 상은 공연과 미술 부문에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만 40세 이하 대한민국 국적의 예술가에게 수여한다. 첫 수상자로는 공연 부문에 김낙형, 미술 부문에 박미나 김시연 구동희가 선정됐다. 미술 부문 수상자에게는 각각 천만 원의 상금과 2012년 상반기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개인전 및 두산레지던시 뉴욕 입주의 혜택이 주어진다.
박용현 이사장은 이날 “기업 경영 외에도 문화 예술 분야의 인재 발굴과 지원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 하나”임을 강조했다. 시상식이 열린 두산아트센터와 함께 2007년 개관한 두산갤러리(두산갤러리 서울, 두산갤러리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는 한국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세미나와 워크숍을 비롯한 교육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해 대중의 현대미술 접근성을 높이고자 만들어졌다. 두산갤러리 서울은 개관 이래, 조각 사진 회화 등 각 장르를 구분해 전도유망한 작가를 선정 및 소개하는 〈Korean Young Artists〉전을 기획했으며, 이상원 이문호 최수앙 김명범 등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연강재단의 미술 부문에 대한 프로그램은 서울과 뉴욕을 잇는 기반 시설의 확충과 더불어 점차 확대되고 있다. 2009년 뉴욕 첼시에 개관한 두산갤러리 뉴욕(160㎡)과 두산레지던시 뉴욕(81㎡)은 국내 최초로 뉴욕 주정부와 교육청의 정식인가를 받은 비영리 전시공간이다. 두산갤러리 뉴욕은 연간 10회 정도 한국 작가의 전시 및 작품 활동을 지원하고, 유명 미술관 큐레이터나 비평가, 갤러리 등과의 교류를 지원하고 있다. 두산레지던시 뉴욕은 작가에게 작업실은 물론 별도의 거주 공간을 제공한다. 또한 세계 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의 다양한 예술지원 프로그램 혜택을 한국 작가에게 직접 제공하는 국제적 수준의 작가지원 프로그램이다. 현재까지 이형구 정수진 최우람 권오상 성낙희 홍경택 등이 참여했다.

하이트컬렉션 전시 전경 Photo: Park Myung Rae

Hite Collection_기업 컬렉션의 전문성, 일반 공개의 철학

(주)하이트맥주가 2007년 설립한 하이트문화재단(이사장 박문덕)은 지난 10월 8일 본사 내에 전시관 하이트컬렉션을 개관했다. 이 전시관은 기업이 장기간에 걸쳐 수집해 소장하고 있던 미술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의미에서 컬렉션(Collection)이라 이름 지었다. 개관기념전으로 권진규(1922~1973)의 〈탈주〉와 서도호의 〈인과(Cause & Effect)〉를 2011년 3월 4일까지 개최한다. 서도호의 설치작품 〈인과〉는 약 11만 여 개의 소형 인물상이 줄줄이 이어지는 작품으로 높이가 8m에 이르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색색깔의 인물 군상은 허리케인이자 태풍의 눈처럼 하나의 소용돌이 형태를 띠며 하이트컬렉션 1층 로비 천정에서부터 지하 1층 바닥까지 설치되어 있다. 서도호는 전시관 리노베이션과 새로운 작품 설치를 함께 진행하면서 하이트맥주 본사 로비 전시관 공간에 가장 적합한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문화재단이 중점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권진규 컬렉션를 비롯한 한국 근현대 조형미술 정신의 계승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한편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권진규의 전시는 하이트문화재단에서 소유하고 있는 120여 점의 작품 중에서 40여 점의 작품을 엄선해 선보였다. 미술사가 김현숙을 초청 큐레이터로 영입, 영원과 내면으로의 ‘탈주’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 했던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전령’ ‘구멍’ ‘구원’ ‘침묵’이라는 4개의 섹션으로 나눠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정한 미술사조나 양식의 구분 없이 소장품의 아이덴티티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국내 기업 소장 활동 문화를 감안해 보면, 하이트의 경우는 한 작가에 주목해 주요 작품을 두루 모았다는 점에서 보다 ‘전문성’을 갖춘 셈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 소장품이 사옥 수장고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 꼭꼭 숨겨져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한 발짝 진일보했음을 시사한다. 백남준, 안드레아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칸디다 회퍼, 보테로의 대형 조형물 등 국내외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하이트컬렉션은 향후 조각과 입체를 중심으로 소장품을 꾸준히 늘려 나가면서, 소장품을 바탕으로 하는 기획전을 연 2회 이상 개최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조양호 회장(가운데)이 김종규 전 박물관협회장(왼쪽)과 함께 개관 전시 작가 배병우(오른쪽)로부터 작품 설명을 듣고 있다.

一宇 Space_사진미술관으로의 특성화 전략

지난 4월 한진그룹 산하 일우재단(이사장 조양호)이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에 일우스페이스를 개관했다. 일우스페이스는 한진그룹이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개관한 사진 및 미술 전시 전문 미술관으로, 총 면적 547.2㎡에 각각 266.3㎡, 95.6㎡ 규모의 제 1,2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 특히 전시장 외부인 서소문 대로변에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가로 10m, 높이 3.7m의 초대형 윈도우 갤러리를 설치해 도심을 오가는 시민도 전시 작품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일우재단의 예술 후원 활동은 사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조양호 회장의 ‘사진 사랑’에서 비롯됐다. 그는 프로급의 사진 실력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담은 캘린더를 직접 제작해 선물할 정도이며, 2009년에는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촬영한 사진을 묶어 사진집을 출간했다. 일우스페이스는 개관기념전에서 사진작가 배병우의 남해와 서해, 제주 오름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신작을 포함한 대표 작품 총 14점을 전시했다. 일우스페이스는 〈배병우〉전을 시작으로 일우사진상 수상작가인 백승우, ‘동구리’ 캐릭터로 유명한 권기수 등의 전시를 개최했으며, 국내 최대 아마추어 사진공모전인 〈대한항공 여행사진 공모전〉 입상자 전시도 준비중이다. 일우재단의 일우사진상은 국제적 경쟁력을 지닌 한국의 사진작가가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제정한 상으로, 2009년 제1회 수상자로 김인숙 백승우가 선정됐다. 일우재단은 국제 수준에 맞는 심사를 진행하기 위해 스테판 쇼어, 제프 로젠하임, 퐁피두센터의 부관장인 디디에 오탱제 등 사진계의 거장들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강연회도 열었다. 일우사진상의 가장 큰 특징은 1차 선발자도 창작 활동의 멘토가 될 만한 국내외 최고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게 직접 작품을 선보이고 1:1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선정된 작가에게는 개인전 개최, 사진집 출판 등 1인당 5,500만원 규모의 상금을 지원한다. 일우스페이스는 ‘어린이 사진 교실’과 같은 전시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포함해, 사진 미술 애호가와 서소문 일대의 직장인, 덕수궁 시청 광화문광장을 찾는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전시를 제공할 계획이다.

어린이들과 함께 〈과자나라 피터팬의 네버랜드〉 관람하는 윤영달 회장.

Art Valley_고객과 만나는 아트 밸리를 꿈꾸다

제과전문그룹 크라운-해태제과(회장 윤영달)는 사옥 내 갤러리쿠오리아 운영, 송추아트밸리 조성, 작가에게 회사 제품을 작품의 소재로 협찬하거나 작품 제작을 의뢰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아트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다. 크라운-해태제과의 미술 관련 프로젝트는 윤 회장의 소문난 미술 사랑과 임직원의 ‘예술적 감각’을 강조하는 경영 철학에서 출발한다. 윤 회장은 작품 구매를 할 때에도 여러 예술 작품들 중에서 직원들의 투표를 거쳐 구매를 결정하며, 2009서울오픈아트페어와 2010아트광주의 조직위원장을 맡는 등 미술계 대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2007년 남영동 본사 사옥에 총 3층으로 개관한 갤러리쿠오리아는 제과전문 회사의 성격에 맞게 어린이를 대상으로 과자를 활용한 미술 작품 감상 및 직접 조형물을 제작할 수 있는 체험 전시를 주로 기획하고 있다. 크라운-해태제과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곳은 2007년부터 경기도 장흥 일대의 회사 연수원 부지 약 330만㎡에 조성하고 있는 송추아트밸리이다. 이 곳은 “소수만 즐기는 골프장보다 장애인도 편히 쉴 수 있는 종합 문화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는 윤 회장의 꿈이 실현된 곳이다. 갤러리와 카페테리아로 구성된 아트숍, 작가에게 창작과 전시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뜰리에, 임직원이 직접 제작한 작품들로 꾸민 낙락도(樂樂道)와 동락도(同樂道) 같은 산책로, 예술가와 함께 어울려 강습을 듣고 직접 작품을 제작하고 체험할 수 있는 AQ체험장 등으로 이루어진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문화단지이다. 낡은 모텔을 개조해 만든 아뜰리에에는 김상균 나점수 신치현 성낙중을 비롯한 젊은 작가 13명이 입주해 있다.

왼쪽·요코오 타다노리 <Gold Tooth> 61×50.5cm 1966 ⓒTadanori Yokoo | 오른쪽·오사카 식스에서 열린 요코오 타다노리의 <핑크 걸>전 전경.

Six_꼼데가르송의 전위적 비주얼 감성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패션 브랜드인 꼼데가르송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서울에 문을 열었다. 불어로 ‘소년처럼’이라는 뜻을 가진 꼼데가르송은 일본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1969년 설립했다. 가와쿠보는 1981년 첫 파리 컬렉션에서 블랙 컬러를 재해석해 기존 여성복의 전형을 완전히 깨뜨린 의상으로 ‘히로시마 시크’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남동에 위치한 꼼데가르송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 전체 1,719㎥ 규모의 글래스 파사드의 기존 건축 외관을 유지하면서 레이 가와쿠보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반영해 재탄생했다. 가와쿠보는 이곳을 단순히 패션 스토어가 아닌 꼼데가르송의 총체적인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자, 아트갤러리 ‘Six’를 오사카 매장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했다. 육감(Six Sence)에서 따온 ‘Six’라는 명칭은 가와쿠보가 1991년부터 8년 동안 발간한 비주얼 매거진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 왔다.
꼼데가르송 한남 Six는 가와쿠보의 전위적 패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 첫 번째 전시로 영화계의 아방가르디스트로 불리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1977년 〈이레이저헤드〉로 데뷔한 린치는 1990년 칸영화제에서 〈광란의 사랑〉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1993년 〈트윈 픽스〉라는 TV 시리즈를 제작해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에 파리 카르티에재단에서 회고전을 연 바 있는 린치는 이번 첫 한국 개인전 〈Darkened Room〉 (2010. 11. 5~2011. 1. 2)을 통해 12편의 대표작 영화와 회화 7점을 함께 선보인다. 특히 상영작 중에서 〈Six Men Getting Sick〉(1967), 〈The Alphabet〉(1968), 〈The Amputee〉(1974)는 그가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하기 전에 제작한 작품으로, 평소 “움직이는 회화 작품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는 린치의 작가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 앞으로 꼼데가르송 한남 Six는 미술이나 영화는 물론, 디자인 음악 건축 등 ‘전위’라는 이름 아래 모든 예술적 실험을 아우르는 센터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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