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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0.07

Abstract

특집_아티스트, 책에 빠지다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책은 진정한 '여름의 벗'이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읽는 시집, 휴가를 떠나는 지루한 비행기 안에서 읽는 소설책, 혹은 장맛비가 내리는 날 편안히 방바닥에 엎드려 읽는 만화책. 독서는 그 어떤 물리적 체험보다도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특히 아티스트들은 독서를 통해 무궁무진한 영감을 얻기도 한다. 문자가 엮이며 만들어 내는 구절과 구절 사이에서 불현듯 창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그 끝없는 상상의 영역을 유영하며 예술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아티스트들. art는 책을 벗 삼을 시간이 많아지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아티스트 16명의 독서 체험을 듣는 특집을 마련했다. 곁들여 독자들에게 아티스트가 추천하는 책을 소개한다. 단, 익숙한 미술관련 서적은 제외한다. 시집부터 만화책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을 통해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스며 있는 정신 세계를 엿본다. 구구절절,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하는 아티스트들의 추천글은 또 하나의 '에세이'다. 여기에 책을 읽은 후 영향을 받고 그린 간략한 드로잉부터 작품, 혹은 작가들이 직접 선택한 관련성 있는 작품을 함께 전한다. 마지막으로 각 아티스트들이 뽑은 5권의 추천 리스트는 다독을 즐기는 독자를 위한 작은 선물이다. 자, 이제 올 여름 art를 읽는 누구나 아티스트의 독서삼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부터 시작한다.

Contents

마이클 웨슬리 <Stilleben(18.3.-29.3. 2007)> 186×205cm C-프린트 디아섹 2007

영문초록

에디토리얼  하리우 이치로를 추모하며  김복기

프리즘    
    미술관 건립 ‘대통령의 약속’, 부도직전?  정준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수술’ 필요하다  하계훈

아티스트 인 코리아  추태이  김현

포커스
    도쿠진 요시오카展|프리 스타일展|윤희섭, 최원정展  정연심    
    쉬린 녜사트展|문경원展  정용도    
    홍성철展|김주현展  이선영
    우리 시대 다문화展  파비앙 다네시

특집  아티스트, 책에 빠지다
    최종태|윤석남|주재환|안규철|최진욱|황주리|이광택|신하순
    고산금|노정하|허윤희|나 현|서승모|잭슨홍|정직성|김혜나
    
아티스트 인사이드  
    남경민_호시우행접영  김준기
    서혜영_무한히 증식하는 브릭의 공간  호경윤

해외 작가  
    비트, 키타노, 그리고 타케시  김홍기

추모 특집  루이스 부르주아 1911~2010
    나의 몸은 나의 조각이다  임현숙

해외 미술
    제6회 베를린비엔날레_이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문지윤

이미지 링크  롤란드 피셔

크리티컬 포인트
    ‘젊은 모색 30년’, 국립 미술관의 미션은?  이인범
    백남준을 향한 인류학적 해석학  임근준

나의 얼굴
    별빛 아래 떠오르는 얼굴  최승호

전시 리뷰
    심문섭|홍성담|기억의 풍경|문지방|유령the invisible|김영재
    디자인 올림픽에는 금메달이 없다|원성원|심철웅|이해민선, 추미림
    부지현|베른트 키르쉬너     

현장 리포트  
    동방의 요괴들 PT-day, 열띤 토론 마당!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Takeshi Kitano

키타노 다케시 카르티에재단 개인전 전시 전경 2010

Takeshi Kitano
비트, 키타노, 그리고 타케시

글 | 김홍기·본지 통신원, 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영화 〈하나비〉 〈자토이치〉 〈기쿠지로의 여름〉의 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일본의 키타노 타케시. 그의 파격적인 개인전이 파리 카르티에재단(3.11~9.12)에서 열리고 있다. 타케시는 놀라운 상상력과 시대를 앞서는 감각으로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일본 대중문화를 선도해 왔다. 그의 기발한 머릿속을 들여다보자.

순수미술이 아닌 다른 분야의 창조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미술관에서 전시를 여는 것은 오늘날 꽤 흔한 일이다. 건축가 디자이너 영화감독 가수 등 다양한 직종의 유명인사들이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이렇듯 다른 분야의 유명인사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전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선은 이런 성격의 전시가 각각 내세우는 고유한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가 어떤 형식을 띠고 하나의 전시로 구현됐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시의 주인공이 순수미술 분야는 아니지만 음악 건축 영화 문학 등 창조적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 그 전시의 의도는 대부분 그 주인공이 자신의 주된 활동으로 간주하는 분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보완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키타노 타케시의 전시도 그런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꿈꾸고 즐기는 ‘화가 소년’ 타케시

타케시는 자신을 일컬어 ‘일요일의 화가’라고 말한다. 그는 비전문적이고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여가를 활용해 그림을 그린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토로했듯이 한참 이 전시의 준비가 무르익어 갈 무렵, “잠깐만요! 정말로 이 전시를 열려는 건가요?”라고 카르티에재단에 반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그런 식의 딴죽을 걸지 않았고 예정대로 전시는 3월 11일부터 관객을 맞이했다. 심지어 이 전시는 9월 12일까지 반년 동안이나 지속될 예정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그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미술비평적인 용어는 아마도 ‘나이브 아트’일 것이다. 그리고 미술 어법에 충실하고자 그의 그림을 예컨대 앙리 루소의 그것과 비교해 보려 한다면, 물론 그것도 하나의 시도로서는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미술사적 접근 방식은 타케시가 한편의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전시를 공개한 의도를 배반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런 식으로 타케시를 현대미술의 계보에 등록시키려는 태도는 너무나 성급하고 무모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이 전시를 어린이를 위한 전시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이 규정은 정확히 카르티에재단 측에서 제시한 그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전시의 제목도 〈비트 타케시 키타노: 화가 소년〉이지 않는가? 재단은 “전시는 성인에게도 말을 걸긴 하지만 어린이에게 호소한다. ‘화가 소년’을 통해 비트 타케시 키타노는 어린이들을 진지하게 다루며 어린이가 생각하고 꿈꾸고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화가 소년’이라는 제목은 타케시의 유년 시절 별명이기도 하다. 타케시의 아버지는 페인트공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어린 타케시는 주위 친구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 당시 친구들이 조롱하는 어조로 그에게 붙인 별명이 ‘화가 소년’이었다고 한다. 전시를 들여다보면 그가 태어난 동네 아다치구와 관련된 깃발도 있고, 어린 타케시가 자주 드나들었던 아사쿠사의 분위기를 차용한 작업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전시관 뒤편 정원에는 부처 모양을 한 일본식 전통 와플을 판매하는 간이매점이 어린이들의 군침을 돌게 만들고 있다. 카르티에재단은 이번 전시와 관련해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전시가 어린이를 위한 전시라는 의견도 일정 부분 옳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물론 출품작들의 나이브한 성격이 어린이들의 흥미를 매우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고, 위에 열거한 대로 어린이를 위한 배려가 잘 갖춰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나이브 아트가 어린이를 위한 미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아디치구에서 태어나 아사쿠사를 드나들던 어린 ‘화가 소년’의 흔적은 이 전시에 관한 텍스트의 도움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을 뿐 전시 자체를 통해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시가 ‘화가 소년’의 전시라기보다는 ‘비트 타케시 키타노’의 전시라는 측면에 더욱 주목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유명인사를 주인공으로 삼는 전시의 일반적인 의도를 다루며 했던 언급을 타케시에게 적용해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다. 즉 타케시의 이 전시에 출품된 ‘나이브한’ 작업 자체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것들이 그가 주로 활동하는 다른 분야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어떠한 기여를 하는지 묻는 것이 훨씬 더 정당하고도 생산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약간의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타케시가 주로 활동하는 다른 분야란 무엇인가? 그는 영화감독인가? 아니면 유명한 코미디언인가? 아니면 텔레비전의 사회자인가? 또는 영화배우인가?

전시 전 카르티에재단을 방문한 다케시

하나의 신체에 깃든 이중 정체성

이런 당혹감은 이 전시를 다루기 위한 하나의 좋은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전시가 타케시의 정체성에 관한 전시라는 가설을 지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두 개의 정체성을 지닌 채 활동해 왔다. 때로는 비트 타케시로, 때로는 키타노 타케시로. 그가 일본에서 코미디언이나 텔레비전 사회자 또는 영화배우로 등장할 때, 그는 자신을 비트 타케시라고 부른다. 그리고 1989년 〈그 남자 흉폭하다〉를 시작으로 영화감독으로 활동할 때는 그는 자신을 키타노 타케시라고 부른다. 예컨대 그의 1997년 영화 〈하나비〉를 보면 연출, 각본, 편집은 키타노 타케시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는 비트 타케시로 기재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정체성은 오늘날까지 하나의 인격 속에 공존하며 다방면의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즉 그의 인격은 비트와 키타노가 엄격하게 분리된 채로,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일종의 ‘환경’이다.
이런 상황은 전시관 앞쪽 정원의 한 나무에 조성된 오두막에서 엿볼 수 있다. 오두막에 설치된 한 인체 해부 모형을 보면 심장 쪽에는 영혼의 선한 본성을 상징하는 ‘타마-지’라는 이름의 작은 인형이 놓여 있고, 창자 쪽에는 영혼의 악한 본성을 상징하는 ‘콘-탄’이라는 이름의 인형이 놓여 있다. 그리고 오두막이 놓인 나무에도 그 두 인형이 서로 거리를 둔 채 자리하고 있다. 한 인간 내에 공존하는 이 두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타케시의 영화 〈하나비〉에서도 목격된다. 타케시가 직접 연기한 영화 속 주인공 니시는 병에 걸린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하고 위트 있는 남편이지만, 야쿠자 앞에서는 극단적으로 비정하고 잔인한 폭력을 서슴지 않는 전직 형사이다. 한 명의 인물 속에 공존하는 이중적 정체성은 영화 속 인물 니시의 상황이기도 하지만 그 인물을 연기하는 타케시의 상황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 〈하나비(花火)〉는 불꽃놀이를 뜻하는 일본어이며, 직역하자면 꽃불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그리고 타케시는 꽃을 삶과 사랑의 상징으로, 불을 폭력과 죽음의 상징으로 새긴다. 이처럼 그는 한 인간 내에 공존하는 이중적 정체성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런 관심은 재귀적으로 이어져 자신 안에 공존하는 비트와 타케시의 이중성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 설치된 타케시의 마네킹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마네킹은 자신의 뇌를 끄집어 바라보면서 “너는 누구냐? 나를 바라보는 너는?”이라고 자문하며 자신의 인격을 1인칭과 2인칭으로 이분화하고 있다. 이처럼 타케시의 이중적 정체성은 하나의 신체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 서로 대화하는 자아 속의 타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전시와 관련해 다소 특이한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전시는 키타노 타케시의 전시도 아니고, 비트 타케시의 전시도 아닌, 〈비트 타케시 키타노〉의 전시이다. ‘비트 타케시’와 ‘키타노 타케시’의 공통분모인 ‘타케시’를 중심으로 ‘비트’와 ‘키타노’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대칭적으로 놓인 이 기이한 명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명칭은 흡사 양팔저울을 연상케 한다. 타케시라는 몸통에 연결된 양쪽의 이름은 서로의 입지를 주장이라도 하는 듯 팽팽한 긴장감을 지니고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전시가 한 사람의 인격 속에 내재하는 이 두 이름,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균형에 관한 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 자체가 이런 이중적 정체성의 공존을 마치 구체시의 형식을 빌린 것처럼 시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전시 속에서 이런 정체성들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시도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타케시라는 인물의 다채로운 측면들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일본인을 제외한 다른 국적의 관객들에게 타케시는 아무래도 비트 타케시이기보다는 키타노 타케시이다. 우선 그가 1981년 이후로 줄곧 비트 타케시라는 이름으로 일본 텔레비전에서 활동한 내용에 대해 외국인으로서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가 일본 바깥에서 광범위한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가 1997년 영화감독 키타노 타케시로서 영화 〈하나비〉를 통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였기 때문이다. 국제 무대에서 그는 익살스러운 코미디언 비트 타케시이기보다는 진지한 영화감독 키타노 타케시이다. 심지어 그가 영화배우로서 여러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도 대부분 비정하고 무심한 인물들이었다. 예컨대, 오시마 나기사의 〈고하토〉(1999)에서의 사무라이 역할, 후카사쿠 킨지의 〈배틀 로얄〉(2000)에서의 선생님 역할, 최양일의 〈피와 뼈〉(2004)의 아버지 역할은 모두 비정하고 냉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우리 외국인들에게 타케시는 코미디언이나 사회자이기보다는 영화감독이며 영화배우로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카르티에재단의 전시 속에서 타케시의 두 정체성 사이의 균형은 기발하고 엉뚱하며 동시에 순진무구한 코미디언 비트 타케시에게 대부분의 공간을 할애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전시관 지하의 한 편에 붉은 장막으로 가려진 공간에서는 프랑스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타케시의 텔레비전 버라이어티쇼의 단편들이 우스꽝스러운 장식 속에 둘러싸여서 방영되고 있다. 이 작은 공간에 타케시가 붙인 이름은 〈비트 타케시의 진정한 작업〉이다. 그가 직접 소개하는 비트의 진정한 작업은 사람이 타고 있는 자동차를 강물에 빠뜨리기도 하고, 비트가 여러 동식물들로 기괴하게 분장해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 프로그램들이다. 바로 이런 종류의 활동이 타케시가 비트로서 대중들에게 타전하는, 이제껏 불균형적으로 감춰져 왔던 그의 ‘진정한’ 면모이다.

(왼쪽)키타노 다케시 <무제> 도자에 채색
(오른쪽)키타노 다케시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릭 91×117cm 2009

위트와 풍자로 세상을 바라보다

전시를 통해 목격되는 비트의 모습들을 살펴보자. 우선 그의 다양한 모습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유머와 위트일 것이다. 이로부터 비트의 관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에 관심을 둔다. 이 전시엔 인간과 동물, 식물과 동물, 기계와 동물 등이 결합된 기괴한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둘째, 그는 수학과 과학에도 남다른 호기심을 지니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하노이탑〉이라는 일종의 수학적 퍼즐게임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우연의 확률〉은 시계, 볼트, 진동면 등 간단한 장치를 통해 지구에 생명이 창조될 확률이 얼마나 극도로 낮은지 보여 준다. 이런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은 타카시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르네상스 지식인에 대해 품고 있는 동경과도 상통한다. 셋째, 그는 공룡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타카시는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해 공룡의 멸종 원인에 대한 희한한 가설들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공룡은 팔이 너무 짧아서 용변 후에 청결을 유지하지 못해 위생적인 문제로 멸종했을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또한 그는 아무도 보지 못한 공룡의 색깔은 무엇이었을지 상상해 볼 것을 권유한다. 이처럼 공룡이라는 과거의 생명체가 남긴 빈 칸 속을 타케시는 자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누비고 채워 나간다.
사실 키타노와 비트는 보편성과 지역성을 대표하는 두 정체성이기도 하다. 키타노는 보편성을 갖춘 영화를 통해 상대적으로 큰 유명세를 획득한 반면, 비트는 일본 문화의 지역성 속에 더 깊숙이 관여한 탓에 상대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즉 키타노는 일본의 보편성을, 비트는 일본의 특수성을 지시하는 기호일 수 있다. 따라서 키타노보다는 비트에게 무게를 실어 준 이번 전시에서 일본의 지역성에 관한 작업들이 눈에 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시에 선보인 새로운 두 비디오 작업은 일본 문화의 특수성과 그것을 향한 외부의 편견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보여 준다. 또한 거대한 세 동그라미 속에는 200개에 가까운 일본의 전통적인 행운의 표식인 다루마 인형들이 가득하다. 다른 곳에 설치된 작은 인형극장에는 가부키극 전통 인형, 일본 설화의 인물들, 일본의 갖가지 신들이 빼곡히 놓여 있다.
비트의 유머와 위트의 대상에는 현대미술도 그 예외가 아니다. 〈무슈 폴록〉은 네모난 상자 속에서 무작위로 움직이는 물감 묻은 축구공이 폴록의 액션페인팅을 재연하고 있으며, 굉음을 동반한 거대한 재봉틀이 보잘것없는 리본을 꿰매고 있는 모습도 현대미술에 대한 하나의 풍자로 읽힌다. 이 전시의 개막을 앞둔 전날 3월 10일에 프랑스에서는 키타노 타케시의 2008년 영화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인상주의와 입체주의부터 액션페인팅을 거쳐 팝아트와 그래피티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미술의 비일관적인 엄숙주의를 풍자한다. 영화 속에서 현대미술의 담론은 제논의 역설의 거북이처럼 아무리 뒤쫓아도 따라잡히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학적인 분석과 조바심을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을 때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훌쩍 앞지른다. 영화의 이런 메시지는 타케시의 전시에 고스란히 반영된 듯하다.

6th Berlin Biennale

닐바 귈스 <알려지지 않은 스포츠> C-프린트 180×120cm 2009

6th Berlin Biennale

이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이하는 베를린비엔날레가 6월 11일부터 8월 8일까지 개최되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는 카트린 롬버그가 맡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 출신의 대표적 미술사가인 마이클 프리드가 공동 기획에 참여했다는 대목이다. 베를린비엔날레는 흔히 ‘비엔날레용 아트’로 불리는 스펙터클한 설치작품보다는 다큐멘터리, 퍼포먼스 혹은 19세기의 그림을 내세우면서, ‘리얼리티’를 둘러싼 균열과 패러독스를 드러내고 비엔날레의 제도적 한계성을 성찰하고자 했다.     글|문지윤·런던 골드스미스대학 박사과정

베를린비엔날레를 같이 보러 가자고 하니까 친구가 말한다. “이제 어딜 가도 비엔날레는 다 똑같아.” 한때 비엔날레라는 단어는 새로운 예술 생산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어느덧 비엔날레는 그리 길지 않은 역사임에도 현대미술의 생산 현장의 피로함을 대변하는 기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실 비엔날레는 그동안 유럽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시각예술의 생산, 유통, 비평의 구조를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효과적으로 비판했고, 하바나에서 광주, 이스탄불에서 상하이까지 지역성(locality)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 실천의 정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양한 입장들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해냈다. 또한 미술관이라는 제도에서 아카이비스트로서의 큐레이터 역할을 거부하는 문화 담론 생산자들이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위 ‘지구촌’이라는 개념 아래 새롭게 설정한 삶의 영역 속에서 예술 생산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듯했다.
하지만 비엔날레에 대한 실망감은 여기저기에서 노출되었다. 새로운 예술 생산과 소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했던 비엔날레마저도 아방가르드 역사 속에 수없이 반복되었던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는 현실감은 ‘신제도주의(new institutionalism)’란 이름으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근래 부상하고 있는 회화로 복귀하는 현상과 퍼포먼스의 부활은 설치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사에 편입되기 시작한 비엔날레의 생산 구조에 대한 반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비엔날레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비엔날레라는 예술 생산, 유통, 소비의 메커니즘에 어떤 희망이 남아 있는가. 국제 비엔날레가 도시마다 생겨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비엔날레에 대한 피곤함은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리얼리티의 패러독스

이번 베를린비엔날레의 큐레이터는 베니스비엔날레 슬로베니아관을 비롯해 <마니페스타 3>의 큐레이터로 활동했던 카트린 롬버그(Katrin Rhom berg)이다. 그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로 “이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현실감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또한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라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다. ‘적극적 생산자’였건 혹은 ‘소극적 소비자’였건, 그 어떤 형태로든 비엔날레라는 문화 생산과 소비 메커니즘에 공헌했던 우리에게 롬버그의 물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질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롬버그가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리얼리티(reality)라는 개념을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끊임없는 도망자로 전락시킬 뿐이다. 이번 전시 도록에 수록된 리얼리티라는 개념을 주제로 열린 라운드 테이블에서 올라프 니콜라이(Olaf Nicolai)는 리얼리티의 패러독스에 대해 라캉을 빌어 설명한다(2010년 베를린 비엔날레 도록, p. 108). 라캉에 따르면 리얼리티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상호작용으로 구축되는 무엇이다. 그러나 ‘실재적(the real)’이라는 개념은 상징계 속에 포함될 수 없는 혹은 상징계 속으로 포섭할 수 없는 이질적인 그 무엇이다. 따라서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는 것은 실재계로부터 도주선을 타는 일이다. 그것은 안전한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욕망이다. 다시 말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그 순간 우리는 실재계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도망자가 된다.
따라서 롬버그는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대신 리얼리티의 ‘균열’에 대해 주목하고자 했다.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 마레 부아그니에(Marie Voig nier)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롬버그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부아그니에는 24년간 자신의 친딸을 감금하여 7명의 아이를 낳게 하여 세계를 경악시킨 조셉 프리츨에 대한 재판 과정을 <Hearing the Shape of a Drum>이란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부아그니에는 사건 그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취재하는 수많은 언론의 카메라 워크가 만들어 내는 다층적인 리얼리티를 드러냄으로써 ‘당신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현실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롬버그는 리얼리티라는 개념을 단일적으로 설정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비엔날레를 통해 수없이 고발되었던 리얼리티들의 균열에 대해 생각하고자 했다
롬버그는 이번 전시 서문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극작가이자 피터 한케(Peter Handke)의 <모라비아인의 밤>이라는 소설을 인용해 ‘정말로’ 혹은 ‘실제로’와 같이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수사구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이번 비엔날레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정말이라니까. 실제로 말해서. 내가 진짜로 말하는 거야….’ 롬버그는 우리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사용하는 이러한 언어들이 우리 안의 리얼리티의 균열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롬버그는 묻는다. 우리가 알고 있고, 보고 있다고 여기는 리얼리티와 실제로 존재하는 리얼리티는 과연 일치하는 것이냐고…. 그러나 사실 리얼리티의 균열을 인식해야 한다는 입장 역시 ‘완벽히’ 진실한 상태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리얼리티의 패러독스이다. 이것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자나 리얼리티의 균열을 인식하는 자나 피해 갈 수 없는 함정이다.

한스 슈버스 <The shaft of Babel> 람다프린트 35.5×55cm 2003

이것은 리얼리티가 아니다, 리얼리즘이다

예술 작업을 하는 것과 전시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또 영화나 소설과 같이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구축되는 스토리텔링과 전시를 통한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텍스트를 사용하는 소설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면, 영화와 전시의 공통점은 컬렉티브한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텍스트가 발생시키는 이미지 혹은 수행성과 또 다른 벡터를 가지고 있다. 영화 만들기와 전시 만들기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둘 모두가 공동 작업에 기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시 만들기는 공동 작업에 기초하고 있으나, 저작권(authorship)의 문제에 있어서는 영화 쪽보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영화도 대본 배우 조명 의상 등 수 많은 전문가가 공동으로 생산하지만 디렉터가 저작권의 특권을 누린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큐레이터는 영화감독과는 다르다. 그는 저작권의 특권을 누릴 수 없다. 간혹 저작권이 강하게 느껴지는 큐레이터의 작업은 작가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사이에서도 공격받는다. 그렇다면 큐레이터는 개념 작가의 작업들을 통해 시각화하고자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도 자율적인 작업들의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믹싱하는 DJ인가? 아무도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오늘도 많은 큐레이터가 불안한 줄타기를 계속해 나간다.
전시를 생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누가 전시를 소유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조망하는 관람자는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글을 쓴다는 작업이 결코 생각의 속도를 잡을 수 없기에 그 어떤 거인도 자판 앞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듯이, 전시라는 생산의 메커니즘은 새로운 감각 운동(sensori -motor)을 가동하기에 너무나 느리고 더디다. 보는 이도 만드는 이도 실패를 전제로 하는 무모한 도전이다. 여러 갈래로 굴절되는 지배 체제들이 쉴  새없이 협상하는 매우 고단한 현장이다.
이처럼 전시라는 녹록치 않은 환경에 리얼리티라는 복잡한 회로를 어떻게 접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롬버그는 6개의 사이트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본관에 해당하는 쿤스트베르크(KW)에서의 전시는 7명 작가의 그룹전이었고, 오라니엔플라츠(Oranien platz)에서 열린 전시는 3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두 전시 중 한편에서는 마크 볼로스(Mark Boulos), 렌조 마르탱(Renzo Martens), 마레 부아그니에, 아비 모그라비(Avi Mograbi) 등과 같이 전통적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프리즘은 결코 비정치적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바탕으로 나이지리아의 석유 문제, 콩고의 국제 지원사업,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봉쇄 등 사회적 문제를 재조명한 영상을 선보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나 위트(Anna Witt), 한스 슈버스(Hans Schabus) 그리고 페르하트 오즈구르(Ferhat ㅤㄲㅞㅅgㅤㅇㅝㅍ)와 같이 페미니즘 미술사에서의 외부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가정의 실내 공간을 재구성하는 작업들로 짜였다. 그 외의 세 전시장에서는 존 스미스(John Smith), 단 보(Danh Vo), 카메론 제이미(Cameron Jamie), 조지 쿠차르(George Kuchar) 등이 개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이트는 옛 베를린국립미술관에서 열렸는데, 롬버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술사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와 공동으로 19세기 독일 화가 아돌프 멘젤(Adolph Menzel)의 드로잉과 과슈화 작품들을 전시했다. 여기 전시장에서 롬버그는 멘젤의 전시가 이번 비엔날레에서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리얼리티 개념에 대한 문맥을 잡아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공동 큐레이터인 프리드는 19세기 에드몽드 두랑티(Edmond Duranty)라는 미술사가의 용어를 빌어 멘젤의 드로잉전을 ‘극단의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붙였다. 프리드는 <정리되지 않은 침대>라는 22×35cm의 드로잉 단 한 점을 자신들의 협업의 출발점으로 제시했다. 전시 서문에서 프리드는 지면의 많은 부분이 이 드로잉을 자세히 묘사하는 데 할애했다. 멘젤이 방금 사람이 자고 나간 듯한 침대 자리를 너무도 생생히 묘사해 냄으로써 이러한 침대가 실제로 존재하는 오브제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프리드는 이 드로링의 ‘오리지널리티’는 멘젤이 이 드로잉을 위해 사용한 실제 침대의 장면이 종이로 옮겨지면서 발생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프리드는 멘젤의 드로잉이 리얼리티의 재연이 아니기에 ‘극단의 리얼리즘’을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롬버그가 프리드를 선택한 이유가 아닐까? 앞서 밝혔듯이 롬버그는 리얼리티의 균열을 드러내고자 했고 프리드의 ‘극단의 리얼리즘’, 다시 말해 리얼리티를 부정함으로써 성취해 낸 리얼리즘을 리얼리티의 균열의 한 증상으로 여긴 것이 아닌지…. 하지만 이 전시에서 롬버그가 프리드와 협업을 통해 이뤄 낸 것은 리얼리티의 균열을 작동시킨 것이라기보다는 한 유명한 미술사가의 ‘극단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일러스트하는 데 성공한 것일 뿐이다.

(왼쪽)안드레이 쿠즈킨 <Whatever is out there> 베를린비엔날레 전시 장면 2010
(오른쪽)피에르 발-블랑 <The Living Currency> 베를린비엔날레 공연 장면 2010

연극성과 극단적 리얼리즘

마이클 프리드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미술과 대상성(Art and Objecthood)> 이후에 침묵을 깨고 1990년대 이후 쿠르베를 기점으로 멘젤을 거쳐 카라밧지오까지 리얼리즘이라는 주제 아래 새로운 연구서들을 출간했다. 이 시리즈에서 프리드는 19세기 리얼리즘 작품들을 자신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연극성과 비연극성의 이분적 그리드 안으로 억지스럽게 위치시킨다. 예컨대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을 회화에서 비연극성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설정한다. 여기서 롬버그가 프리드를 초청한 의도를 확대해 추측해 볼 수 있다. 롬버그는 단지 리얼리티에 대한 논의를 미술사의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함이 아니라, 최근 다시금 불거져 나오는 연극성에 대한 논의를 한때 영미권 미술사 연구자들 간에 뜨거운 논란거리였던 프리드의 연극성과 비연극성 개념에 접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롬버그는 이를 통해 문화연구의 논쟁적인 테제들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이 별반 지적인 관심을 더 이상 유발시키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비엔날레라는 문화 생산 기제에 기존의 비평적 논의를 새롭게 문맥화시키는 역할을 부여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롬버그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피에르 발-블랑(Pierre Bal-Blanc)의 전시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특별 초청함으로써 완성시키려고 하는 듯하다.
발-블랑의 프로젝트는 프리드가 그토록 비판했던 연극성을 전시라는 기제를 통해 실현한 프로젝트이다. 프리드의 연극성 비판의 내용 중 하나는 미니멀리즘 작품이 관람자를 포함한 전체적 상황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발-블랑의 프로젝트에서는 핵심적 메커니즘으로 적극적으로 실행되었다. 발-블랑의 프로젝트에서는 여러 개의 퍼포먼스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데, 예를 들면 테레사 마르골레스(Teresa Margolles)의 비누거품이 천장에서 흐르고 있는 동시에 한쪽에서 로만 온닥(Roman Ondㅤㄴㅡㅀ)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니 비지에 & 프랑크 아페르테 무용단(Annie Vigier & Franck Apertet)이 동시에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형식이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2006년 파리의 한 댄스 스튜디오에서 처음 시작했다. 이후 2007년 벨기에의 스툭(STUK)으로 옮겨져 무대 위에 실행되었고, 2008년 런던의 테이트모던으로 장소를 옮기며 진화해 왔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베를린의 현대공연 전문센터 하우(HAU)에서 진행되었는데 관람자는 무대 뒤 쪽으로 안내되어 공연장으로 입장한다. 어리둥절한 관람자가 이후 발견하는 것은 무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퍼포먼스이다. 관람객들은 무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퍼포먼스를 지켜볼 수도 있고, 원하면 무대 앞 관객석으로 돌아가 전통적인 공연 관람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다 자신의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가 다음의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아티스트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상황을 지켜보아도 ‘완벽한 시점’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람자는 매 순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즐겨야 한다.
 마이클 프리드가 리얼리티의 균열을 관찰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그것을 자신의 도그마적 공리에 편입시켜 ‘극단적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이즘(ism)을 생산하는 것에 그쳤다면, 발-블랑은 리얼리티의 균열을 리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사유 가능성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리얼리티는 추구해야 할 진리도,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균열을 관찰하는데 만족해야 하는 대상도 아닌 매 순간 창조해야 할 아직 존재하지 않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뉴미디어 아트의 감각적 유동성

문경원 <그린하우스_#1> 캔버스에 유채 150×200cm 2009

뉴미디어 아트의 감각적 유동성

글|정 용 도

쉬린 네샤트展 6. 1~7. 25 몽인아트센터|문경원展 6. 9~7. 4 갤러리현대

미디어아트에 대해 평가할 때, 미디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감각적 지성을 일깨워 줄 수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적 지성은 일종의 현상에 대한 직관적 파악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물을 인식하는 속도를 말하는 것이다. 미디어를 말할 때 우리는 속도를 이야기한다. 현재의 미디어아트에서 문화적 특성은 속도에 관한 의미를 기본 프레임으로 관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아트에서 속도감은 실제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 속도는 아니다. 실제 속도는 대단히 빠를 수도 있고, 대단히 느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감각적인 속도는 실제 속도의 차원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이는 미디어아트에서 속도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차원, 기억, 회상 등과 같은 인간적 요소들과 뒤섞이기 때문이다.

현실 혹은 숨겨진 이야기들

문경원의 영상설치 작품 <그린하우스>에서 투명한 격자 하우스의 중앙 부분에 실제 자연을 촬영한 이미지가 영사되고 있다. 그리고 한쪽 벽면으로 연장된 난간 위에서 체조선수인 듯한 미니어처 인물이 계속 운동을 하는 장면이 영사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린하우스가 가지고 있는 가상의 공간과 신체적인 운동에 의해 감각이 받아들이게 되는 공간의 유사성이다. 여기에서 유사성은 감각적 유사성이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카메라는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게 해 준다. 이런 무의식적인 세계는 우리 눈으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예민한 감각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숨겨져 있는 듯한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움직임은 일상적인 세계의 삶 속에 숨어 있다. 이런 숨겨진 이미지들은 인터넷의 웹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새 우리 삶의 깊숙한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쉬린 네샤트는 그런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 제도와 삶의 규칙을 위해 생략된 사랑의 노래를 채집한다. 라오스의 노인들이 부르는 전통가요 램(Lam) 장르의 노랫말들은 애절한 연모의 정과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욕망이 노랫말 속에서는 거침없이 표현되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멜로디를 통해 감성을 전달하는 멜로디 중심의 노래라기보다는 가사의 내용 전달이 우선순위다. 그래서 멜로디는 한국에서 장을 담아 놓는 옹기처럼 투박하고 반복적이다. 그러나 이런 멜로디는 현대적인 감성의 단면을 해부하듯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자극한다. 이런 기억들은 들뢰즈의 ‘리좀’처럼 끝없이 확장되고 수평적으로 지속된다.
문경원의 회화 작품 <그린하우스> 시리즈에서 나무 넝쿨들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는데, 이런 성장은 영화적인 시간의 축약으로 성취된다. 온실 안의 장비들은 실험실의 장비처럼 놓여 있고, 온실은 또 다른 세계를 연상시킨다. 그 세계는 영상 작품 <Superposition>이라는 제목 그대로 중첩되어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성장하는 의심과 불안이 마치 줄기식물의 넝쿨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속도는 느낄 수 있지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현실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 속에 쌓이고, 기억이 활성화되면 회상의 형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반면에 네샤트는 스틸이미지를 통해 기억을 고착시킨다. 영상 작품의 무조 멜로디 노래를 노인들의 표정으로 고착시킴으로써 그들의 삶을 박제화시킨다. 이것은 기억에 대한 저항이다. 네샤트는 사진 이미지를 통해 기억을 삶을 역사화시키는 장치들에 대한 저항의 도구로 변화시켜 버린다.

이데올로기적 물질성의 거부

두 작가의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의미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이 작품으로부터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 행위 자체는 이미 관객 스스로 이미지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된다. 이들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차원은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행위의 차원이다. 문경원이 넝쿨식물들의 성장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차원을 이미지의 역사에 의거해 현실의 직접성 속에서 바라보려 한다면(인간의 무의식과 끊임없이 교유하는 시각적 생산물이기 때문에), 네샤트는 이미지를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속성들, 즉 이미지를 이미지가 기록하는 사회 시스템의 비자연적이고 비인격적인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부정법으로 보여 주는 도구로 활용한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두 작가 모두 삶과 이미지는 혼융되어 버린다.
문경원과 네샤트는 작품 모티프가 가지고 있는 소재적인 요인들을 테마로 변용시킨다. 그리고 그 테마의 속성은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Automatism)적인 잠재성의 차원을 ‘현실에서 사유’라는 개념적 장으로 개방시킨다. 사실 우리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특성들을 스틸사진적인 기억 속에 간직해 왔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구성해 왔다. 동영상의 지속적인 장면들보다는, 동영상을 캡처해 스틸이미지화시킨 장면들이 우리 기억에 더욱 강렬하게 남는다. 그리고 이것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 감독이 자신의 주제나 제작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런 장치들은 전통적인 회화 작품에서 혹은 사진 작품에서 다양하게 활용됐지만, 현대의 미디어아트 이미지는 이런 장치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쉬린 네샤트 <욕망의 유희> 다이본드로 고정된 C-프린트, 잉크 127.3×84.7cm 2009

행위의 차원에서 삶을 보다

미디어아트가 지향하는 이미지의 속성은 의미를 결정화시키지 않는다. 의미를 결정화시킨다는 것은 이미지를 우상화시키는 경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현대미술이 삶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결정화는 이미 우리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정화시킨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다. 네샤트는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결정화된 물질로 취급한다. 사진 속의 노인들 이미지와 그 배경의 나한 이미지는 영상작품의 노랫말을 물질화시킨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물질화된 이미지는 네샤트가 사유하는 세계를 부정어법을 통해 드러나게 한다. 이미지는 삶을 제어할 수 있는 행위의 방향키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추억으로 남는 것이고 기억의 잔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삶은 이미지로 전이될 수 있지만, 이미지는 삶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문경원의 넝쿨들 역시 삶과 이미지, 행위와 기억의 관계가 역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보면 반복은 인간의 기억 구조를 닮아 있다. 기억은 삶의 형식이 된다. 마치 관습과 전통이 일반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의 지표로서 작용하는 것처럼, 반복적인 행위들(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이다)은 일상적 행위의 표지가 된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의 특성은 이런 정적인 표지들을 삶의 차원으로 개입시키지 않는다. 디지털 문화는 행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유동적인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운동 상태를 지향하게 된다.
문경원의 넝쿨과 의심스러운 시선들은, 네샤트의 삶으로 작용하기를 그친 역사의 결정화된 물질적 시선들에 대한 거부와 연결될 수 있다. 두 작가 모두 삶을 삶으로부터 만들어 내길 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삶을 역사화시키는 행위가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매체 미술들의 이야기 방식이었다면, 미디어아트가 지향하는 이야기 방식은 삶을 현실로 개입시키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는 관객의 참여가 미디어아트 작품을 완성한다는 식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행위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뉴미디어 테크놀로지 시대에 우리가 지향하는 예술은 삶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오는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고, 물질적인 결정성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 문경원과 네샤트의 미술은 두 작가가 모두 이데올로기적인 물질성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뉴미디어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삶의 차원과 연결할 수 있다.

“나의 몸은 나의 조각이다”

(왼쪽)루이스 부르주아 <아버지의 파괴> 혼합재료 237.8×362.3×248.7cm 1974
(오른쪽)루이스 부르주아 <밀실 Ⅷ> 혼합재료 1998

“나의 몸은 나의 조각이다”

글 | 임현숙·미술사 박사, SADI 강사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가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킨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 새벽, 뉴욕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98세. 유족은 두 아들 장-루이와 알랭, 두 손자와 증손녀가 있다. (1939년에 입양한 아들 미셸은 1990년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비공개로 치렀다고 부르주아 스튜디오 측이 밝혔다. 부르주아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다. 지난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려 본격적으로 작품이 소개된 바 있다. 또한 국제갤러리는 2002년부터 네 차례나 부르주아의 작품전을 열었다. 올해 3월의 개인전에서는 〈꽃〉이라는 전시 제목으로 드로잉을 중점적으로 소개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부르주아 예술을 대표하는 대형 거미 작품 〈엄마〉를 야외에 설치해 두고 있다. (스페인의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과 일본의 모리미술관도 이 거미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일종의 ‘랜드 마크’ 역할을 맡고 있는 작품이다.) 부르주아는 20, 21세기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그녀의 작가적 위상과 작품의 비평적 쟁점은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부르주아는 70대에 접어들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대기만성의 전형적인 작가로 꼽을 수 있다. 부르주아는 한국 나이로 100살에 이른 센티네이리언(Centenarian)이다. 그녀는 긴 생애의 마지막까지 뜨거운 창작열을 불태우며 실로 화려한 늘그막을 보여주고 갔다. 우리는 번데기 같은 주름살에 검버섯이 피어오른 부르주아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할머니 작가’의 식지 않은 예술혼은 미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뜨거운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부르주아는 드로잉 회화 조각 인스톨레이션 등 특정 사조나 양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작품, 파격의 작품을 남겼다. 그럼에도 부르주아 작품의 일관된 주제는 농밀한 자전적 요소로 짜여 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지배했던 ‘부친=폭군’의 그림자는 전 작품에 트라우마로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근적 이미지는 비평의 주요한 키워드다. 부르주아의 작품에는 남성중심적인 세계관과 예술관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담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부르주아는 젠더의 문제를 작품에 녹여낸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셋째, 부르주아 작품은 내면적 감정과 심리를 표출하는 표현주의적 조형 어법이 지배적이다. 요컨대 그녀의 작품은 미학적으로 형식론보다는 표현론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작품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둘러싸고 정신분석학, 심리학을 동원하는 다양한 이론 작업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 편집부

식지 않는 예술혼, 98년의 생애

“Be sure to come back!” 이것은 루이스 부르주아가 나와 헤어질 때 던진 인사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언제나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실상, 이 말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95세를 넘긴 이 할머니가 ‘대체 언제까지 산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하고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침내, 루이스 부르주아가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부르주아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삶과 작품에 열과 성을 모두 다 바쳤으리라.
루이스 부르주아는 20, 21세기로 이어지는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1982년 뉴욕 MoMA에서 열렸던 회고전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그 이후, 부르주아는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런던의 테이트모던갤러리를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70대의 인생 황혼기에 들어서 비로소 국제적으로 작품 세계를 인정받기 시작한 셈이다. 이렇듯 부르주아의 작품이 1980년대에 이르러 뒤늦게 조명받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주된 이유는 그녀의 작품이 고정된 양식이나 재료, 특정한 조형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루시 리파드는 1975년에 〈루이스 부르주아: 안에서 밖으로〉라는 평문에서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을 확실하게 규정지을 구조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썼다. 부르주아에 대한 비평문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 문구는 그녀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양식의 다양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70년대에서 80년대로 이어지는 미술계 풍토의 변화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와 미술계는 그동안 우세를 보였던 형식 분석 비평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다원적인 비평 경향을 띠게 되었다. 특히 개인사적인 내용과 개성적인 주제 등 ‘작은 이야기’가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결국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작업해 온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이 양식적 다양성과 표현주의를 환영하는 시대 분위기와 잘 부합되었던 것이다.

루이스 부르주아 <붉은 방(아이)> 혼합재료 210.8×353×274.3cm 1994

인체 드로잉과 기하학적 조각

부르주아는 파리에서 태어나 1938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으로 피난 온 초현실주의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이후 그녀는 추상표현주의에 동참했다. 부르주아는 1940년대 초부터 판화 드로잉 회화에서 가정적 상황에 처해 있는 여자의 신체를 환상적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드로잉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해 일생 동안 드로잉을 줄기차게 지속했다.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인체는 엄마와 아이의 이미지였다. 모성에 대한 부르주아의 관심은 일생 동안 지속되어 말년에 사실적 은유적 조각으로 제작되었다. 그녀는 드로잉을 ‘생각의 깃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불현듯 떠오르는 창작의 영감을 마치 파리나 나비 같이 잡아채어 종이에 옮겨 놓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드로잉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위로하고 치료하는 역할을 했다. 부르주아의 드로잉 중 어떤 것은 조각으로 연결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진정한 감정의 정화는 조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부르주아에게는 조각만이 자신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부르주아는 미국에 건너온 초기부터 이미 나무를 조각하거나 조합하고 쌓아서 어떤 존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형상은 거의 추상적으로 단순화시킨 형태인데, 프랑스에 두고 온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조각들은 인물의 실제 크기에 가깝게 제작되어 그룹으로 전시되었다. 이 초기 작품에서 부르주아는 프랑스에 두고 온,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불러내어 그녀가 전쟁이라는 힘든 시기에 고향을 떠나와 느끼는 공허함을 채우도록 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의 조각은 두려움을 다시 경험하게 하면서 그것에 실체를 주어 내가 그것을 난도질할 수 있게 해 준다. 두려움은 다룰 수 있는 실재가 된다. 조각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객관적 실제적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는 자신의 무력감과 고통을 물리적인 형태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감정의 무질서와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기하학을 사용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부르주아는 회화가 실재성을 표현하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해 조각으로 관심을 옮긴다. 그녀는 조각이 재료의 특성상 강한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자전적인 드라마를 표현하는데 있어 회화보다 더 적합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예술을 시작하기 전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배웠던 수학과 기하학을 반영하는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부르주아가 초기부터 관심을 가졌던 작품 이미지는 인체다. 인체는 그녀가 1960년대에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그녀는 “조각은 인체다. 나의 몸은 나의 조각이다”라고 했다. 그녀의 작업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인체 이미지는 자전적 주제 및 페미니즘 논쟁의 토대가 되었다. 부르주아는 당시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되었던 젠더와 성의 문제를 작품으로 제기함으로써 많은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스트 작가들로부터 이 방면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았다.
부르주아의 작품은 매우 자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녀는 아버지와 얽힌 자신의 감정이 작품 제작의 기초가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79년에 열린 한 강연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예술 작업의 원천이 아버지의 외도라는 어릴 때의 상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언급은 이후 그녀의 작업을 설명하는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부르주아에게 있어 작품을 제작하는 의미는 처음부터 감정의 ‘정화 작용’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무의식적인 고통을 조각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만들어 내고, 그 고통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하면서 소멸시키고 싶어 했다. 그녀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주로 인체와 집의 이미지에 이끌렸다.

남근의 공격, 그리고 양성 이미지로

1960년대에 들어와 부르주아의 조각은 급진적인 변화를 보인다. 이 시기에 그녀는 새로운 시각 언어를 선택해 1950년대의 초기 조각에서 보이던 기하학적 추상적 경향에서 사실적 유기적 경향으로 이행한다. 이 당시의 작품은 석고와 라텍스로 제작했다. 부르주아는 나무 작품들에서 돌연 액체 상태로 바뀐 이 조형상의 변화를 그녀 스스로 ‘견고함에서 유연함으로의 전이’라고 표현했다. 1960년대는 부르주아 예술의 성숙기였다. 이때부터 매우 에로틱한 성격의 작품이 제작되었다. 특히 60년대 후반에는 섹슈얼리티가 그녀의 작품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작품 성격을 ‘성 이전(pre-sexual)’이라고 규정했다. 작품이 생명력의 가장 기초 수준에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부르주아는 1962년에 〈미로의 탑〉이라는 실험적인 작품을, 1963년에는〈초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들은 형상을 녹이고 퍼뜨림으로써 남근적이고 승화된 신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작품은 1966년 루시 리파드가 기획한 〈기이한 추상〉전에 출품되었다.
부르주아는 그 후 1968년에 제작한 〈작은 소녀〉와 〈야누스〉 연작에서 자신의 작품에서 새로운 핵심 개념을 이루는 양성적 특성을 독특하게 표현해 냈다. 〈작은 소녀〉는 부르주아의 예술 역정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부르주아가 남근 형태의 〈작은 소녀〉를 한쪽 팔에 끼고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 유명한 사진 때문에 〈작은 소녀〉는 일종의 이차적인 속성으로 인식되어 그녀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라텍스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 단단하고 부드러움, 강함과 약함의 상극을 상징하며 아기와 팔루스 사이를 교대로 오가고 양육과 공격의 상호작용을 동시에 보여준다. 반면 〈야누스〉 연작 중의 〈개화하는 야누스〉는 겹쳐진 형상으로 매달려서 유아기의 무기력과 거세의 폭력 사이에서 진동하며 부드러움으로 남성의 공격성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 전통적으로 남근은 남성성의 표상으로서 추상적 이성을 대변하며, 인간과 자연의 정복을 상징하고, 공격성과 전투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이 작품에서 남근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연약한 동물적 속성을 드러낸다. 남근은 자극에 상처받기 쉬운 민감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남성성의 지배와 자율성, 권력과 특권,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 아니다.
부르주아의 작품에 드러나는 이러한 양성의 이미지는 1980년대에 〈자연 연구〉에서 양성의 동물로 나타난다. 그녀는 상징적인 수호 동물인 스핑크스와 여우를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양성의 동물로 표현해 그 수호적인 형상을 잔인하고 부드럽게 묘사함으로써 파괴적인 공격을 계속했다. 부르주아가 이렇게 남성과 여성을 혼합하고 서로의 역할을 도치시킨 것은 다시 한번 성에 대한 구별이 생기기 이전의 유아기적 ‘성 이전(pre-sexual)’ 상태로 귀착되는 것이다.

(왼쪽)루이스 부르주아 <작은 소녀> 석고에 라텍스 59.5×26.5×19.5cm 1968
(오른쪽)루이스 부르주아 <침대 위 일곱> 천 철 29.2×53.3×53.3cm 2001

파편화와 절단, ‘부분 조각’으로서의 인체

20세기 미술의 혁명은 오귀스트 로댕과 메다르도 로소와 같은 조각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전통의 사슬을 단절함으로써 미술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의 혁명은 토르소와 파편으로 가시화되었다. 파편 형태의 조각은 지극히 간략한 형태로 복잡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몸짓으로 로댕은 파편이 육체성에 더 크고 효과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댕이 파편을 사용하는 개념은 부르주아의 〈밀실〉 연작과 특별한 연관성을 가진다. 이러한 조각적인 언어는 모방적 재현의 전통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는 새로운 경향이다. 파편의 개념은 로댕이 양식적 개념적으로 새로이 성취한 것이다.
부르주아의 1980년대 작품 양식은 파편화와 절단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인체를 분절하고 다시 조립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실험했다. 이 실험은 1980년대의 10여 년간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표현된 사람의 신체는 다양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통합체로 지각되며, 그 속에서 각 ‘부분적 대상(partial object)’은 특정한 인물을 암시한다. 작품의 재료와 상관없이 부르주아의 작품은 감각 기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부르주아는 1980년대에 눈 귀 손 발 같은 인체 부위를 자신이 좋아하던 대리석으로 만들어 재현과 추상을 결합시켰다. 당시 그녀는 이태리를 오가며 대리석 작업에 매진했다. 이 전통 재료를 작품에 구사한 것은 그녀가 조각의 선례로 삼은 로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르주아는 1984년에 대리석으로 〈벨벳의 눈〉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리석 외에도 고무나 휘기 쉬운 재료로 추상적인 인체 부위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86년에 제작한 〈다리〉이다. 또한 돌덩어리에서 뻗어 나오거나 그 위에 얹혀 있는 손과 발은 1980년대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이다.  1986년에 대리석 좌대 위에 제작한 〈자연 연구〉는 추상과 재현을 혼합하여 그 이분법을 다시 한 번 깨는 작품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1856~1939)의 정신분석은 프랑스의 신경심리학자 장 마탱 샤르코(1825~1893)의 여성 히스테리아  연구에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이들이 연구한 히스테리아의 극적인 자세는 예술 분야에 적용되어 20세기 모더니티의 역사에 전환점을 이루었다. 정신 분열의 예술은 1922년 한스 프린쫀이 쓴 《미친 사람들의 예술》이라는 책에 소개되었을 때부터 문화적 상상력에 큰 영향을 끼쳐 에른스트와 마송과 같은 화가뿐만 아니라 앙토냉 아르토와 같은 저술가와 자크 라캉(1901~1981)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사고를 형성했다.
부르주아는 정신분석과 의학에 관심이 많아 히스테리아에 관한 샤르코의 연구 성과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20세기 말에 이 히스테리아의 자세에 임상적 비극적 의미를 부여해 〈밀실, 히스테리아의 아치〉 등에서 사용했다. 이와 같은 히스테리아의 자세는 1960년대에 제작했던 무정형의 이미지 그리고 1980년대에 제작했던 신체 파편과 함께 〈밀실〉 연작에서 인체 파편의 주요한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공간 개념의 변화, 안과 밖 경계의 확장
부르주아에게 집이란 가족의 드라마를 담은 공간이다. 이 공간은 평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그녀에게 보호와 밀실 공포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또한 집은 사람들 사이의 심리학적 역학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르주아에게 집은 여성과 동일시되는 공간 개념이다. 집은 그녀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상징적인 매개체이다. 집은 곧 여성을 상징한다. 부르주아는 이미 초기 회화 〈여자-집〉 연작에서 집의 이미지와 여자의 이미지를 결합시킨 바 있다. 1946년에 제작된 이 연작은 4점의 회화로 이루어져 있다. 〈여자-집〉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상징성이 큰 것으로 꼽히는데, 그녀는 인체의 머리 부분에 새장 같은 집을 얹어 가정성과 인습적 구조를 풍자한다. 이 연작은 자전적인 기억에서 나온 것으로 그녀가 경험했던 감정을 유기적 건축적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1947년에 전시된 이 작품들에 대해 당시의 비평가들은 여자와 집 사이의 동질성을 확인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후에 페미니스트들은 이 작품을 여성의 정체성 소멸과 구원을 청하는 비명으로 읽으면서 남성들이 주도하는 예술 운동에 부르주아를 포함시키려는 비평가들이 그녀의 페미니즘적 관심사를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줄리 니콜레타는 부르주아가 〈여자-집〉 연작에서 자전적 경험뿐만 아니라 라캉이 관심을 가졌던 여성성, 정신 분석, 그리고 의사소통의 문제를 연구했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에 부르주아의 예술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집이라는 주제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작품의 형태가 새집이나 굴집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인다. 부르주아는 나무 조각으로 과거의 인물을 재창조하여 새로운 환경에 옮겨 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향수를 극복한 뒤에 자신을 위한 피난처로서의 집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듯하다.
〈굴집〉은 야생적 성격의 비인간적인 거주지이다. 이 모티프는 부르주아가 어렸을 때 정원에서 발견했던 새집에서 따온 것이다. 이어서 부르주아는 1963년에 어머니를 상징하는 〈재봉새〉를 제작한다. 고리가 달려 있어 매달 수 있는 이 작품은 구멍을 통해 미로와 같은 내부가 드러나 보인다. 부르주아는 “굴집은 피난할 수 있는 보호의 장소이다 …굴집은 덫이 아니다. …덫에 걸린다는 두려움은 남을 잡고 싶다는 욕망이 된다. 그런 뜻에서 나는 영원한 사냥꾼이다”라고 말했다. 굴집의 역할을 피난처에서 감옥으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도치시키는 것은 부르주아의 철학이 가지는 전형적인 역설이다.
1974년 12월에 만들어진 〈아버지의 파괴〉라는 작품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즉 그것은 ‘아버지의 파괴’이다. 축제를 위한 향연으로서 이 작품의 기초가 된 것은 모성적이고 남근적인 형태가 축적된 것으로 깊은 속까지 노출된 음침한 동굴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이 작품에 〈저녁 식사〉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여 제의나 카니발의 개념을 암시한다.
이 장면은 60여 년 전의 어린 시절에 그녀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 겪었던 감정을 3차원의 공간에 재현한 것이다. 온 식구들이 식사 중에 증오의 대상인 아버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그에게 복수하는 것을 상상한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을 남편이 죽은 바로 그 다음 해에 만들었다. 이것은 그녀가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파괴하여 자신을 엄마와 부인의 속성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권위의 형상’들이 가진 당당한 이미지를 죽이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새집과 굴집과 같은 조그만 집들을 만든 후에 부르주아는 자신 또는 관객이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집을 이상화시켜 그 구체적인 형태를 조각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관람자를 단순하게 물리적으로만 참여시켰던 〈여자-집〉 연작에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확장하여 1986년에 제작한 〈분절된 굴집〉에서는 관객을 그녀의 공간에 들어오도록 했다.
부르주아는 이같은 논리로 1988년에 비상구처럼 보이는 〈출구 없음〉을, 1989년에 〈도망갈 수 없음〉을 제작한다. 이 두 작품은 〈분절된 굴집〉을 단순화시킨 것으로 모두 계단을 중심 은유로 사용하면서 관객을 입구 또는 출구 가운데에 바로 위치시킨다. 부르주아가 은유적인 표현으로 계단을 끌어들이는 것은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계단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리킨 데 반해, 부르주아는 이를 모호성의 용어로 보았다는 차이가 있다. 부르주아는 이렇게 관객을 공간 안에 들어오게 하여 작품의 역동성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1990년대에 〈밀실〉 연작이 출현하는 전조를 마련한다.

〈밀실〉 연작, 기억을 불러내는 공간

1990년대에 들어서 부르주아 예술의 중심 주제였던 집과 인체 두 이미지는 설치미술의 형태로 결합된다. 이 이미지는 1940년대에 이미 〈여자-집〉이라는 회화 연작에서 그 결합이 시도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설치 작품으로 그 결실을 맺는다. 〈밀실〉 연작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들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생을 담아 과거의 작업을 종합한 것으로 그녀의 조각 개념을 총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또한 이 연작은 부르주아가 개척한 고유한 형식의 설치 작업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의 독창성을 증명한다. 이 작품들의 연구를 통해 부르주아가 자전적 입장에서 추구한 심리적 효과와 그녀가 추구한 기본 과제, 즉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부르주아는 자신의 추억을 담아 그 동안의 예술 작업을 종합한 〈밀실〉 연작을 제작한다.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경험을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인체 이미지와 공간 이미지라는 두 주제에 이끌렸다. 그녀는 〈밀실〉 연작에서 이 두 주제를 결합하고 여기에 발견된 오브제로 극적 효과를 더해 20세기 말의 새로운 설치 조각의 분야를 개척했다.
1992년 루이스 부르주아는 크리스찬 메이어 토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상은 ‘우리가 향해가는 것과 우리에게 향해 오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향해 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하면서 “향수는 생산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너에게로 오면 그것은 조각을 잉태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강박 관념이 이미지를 생산하는 비밀스런 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강박 관념은 우리에게 환상을 파악하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신화적 원형적 그림을 새로 발견하도록 해 준다. 게다가 부르주아는 생애를 통해 느꼈던 감정을 감각적이고 시적인 대상과 공간으로 변형시키는 힘을 가졌다. 〈분절된 굴집〉에서 집에 대한 조절의 가능성을 시험한 부르주아는 이번에는 완전히 자신의 뜻대로 집을 재창조하려는 마음을 가진 듯 연극적으로 방을 재구성해 그 안에서 과거의 드라마를 다시 상연한다. 새로운 개념의 표현으로서 부르주아는 〈밀실〉에서 이미지가 가진 회화적 형태를 현대적인 서술구조와 결합시킨 조각 체계를 발전시켰다.
최초의 〈밀실〉 연작은 I에서 VI까지의 번호가 매겨져 1991년 미국 피츠버그의 카네기인터내셔널에서 전시되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6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이 〈밀실〉 연작은 부르주아의 경력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술사적으로도 분수령이 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는데 있어 ‘관객의 참여’를 필수적인 요소로 끌어들임으로써 작품을 경험하는 방식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녀는 이어 1992년에 카셀도큐멘타를 위해 〈귀중한 액체〉를 제작하고, 1993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밀실(히스테리아의 아치)〉과 5개의 밀실을 전시했다. 그 후 부르주아는 〈붉은 방〉을 제작하고 〈밀실〉 제작을 계속해 2000년에는 〈밀실 XI〉에 이른다.
앱젝션 혹은 ‘성 이전(pre-sexual)’의 형상들
〈밀실〉 연작은 그 구성 부분으로 나누어 그에 상응하는 정신분석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밀실에서 사용된 인체 이미지는 주로 파편의 형태로 1960년대에 제작된 무정형의 작품들과 1980년대에 제작된 로댕 식의 절단된 형태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1960년대에 제작된 무정형의 성적 이미지의 작품들은 ‘부분 대상’으로서 1980년대의 인체 파편들과 구별된다. 오히려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 이론’과 관련이 있다.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드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아동 심리를 놀이를 통해 분석하는 ‘놀이 분석’의 창안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프로이드의 욕동 중심적인 이론의 패러다임을 깨고 관계 중심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실질적인 개척자로 꼽힌다. 그녀는 아브라함(K. Abraham)이라는 정신분석학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독창적인 공헌은 ‘전 성기기(pre-genital)’적 발달 단계에 대한 연구이다. 그의 연구에서 전 성기기의 대상은 ‘부분 대상(part-object)’이다. 이 용어는 아브라함이 만들었다. 사람으로서의 부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젖가슴이나 페니스와 같은 부모의 해부학적 신체 부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또한 부르주아의 〈밀실〉에서 사용된 인체 파편들의 의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영향에 의해 1990년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이론으로 떠 오른 앱젝션(abjection)의 개념에서 그 이론적 토대를 찾을 수 있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앱젝트(폐물, 폐인)란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경계 위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오물 쓰레기 고름 체액 시신 그 자체가 모두 앱젝트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배신자 거짓말쟁이, 법률 위반자, 부끄러운 줄 모르는 강간범, 구세주로 자처하는 살인자, 한도를 초과한 모략 교활 비겁 혹은 위선 등을 통해 법률의 취약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범죄자’도 모두가 앱젝트이다. 앱젝션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문학의 중요한 전통인데, 현대에 와서 프랑스와 미국 비평가들 사이에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크리스테바의 영향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부르주아가 1960년대에 라텍스로 만든 작품들을 1990년대에 나타난 비천한 물질과 신체의 작용을 회복하려는 앱젝션으로 해석하며 부르주아를 이 개념의 선구자로 본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작품은 앱젝션을 설명하는 탁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여성성에 대한 정의와 양성 이미지에 대한 강조 그리고 모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은 라캉의 상징계에 도전하는 크리스테바의 이론과 공명하는 것이다. 〈밀실〉 연작에서 ‘발견된 오브제’의 주된 모티프로 사용된 거울은 엄마와의 분리와 정체성의 문제를 은유하는 것으로 라캉의 ‘거울 단계(The Mirror Stage)’이론과도 연결된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충실한 추종자로 그와 함께 정신분석학에 있어 대표적인 ‘아버지의 형상’이다. 프로이드와 라캉은 여성의 정체성의 문제를 생물학적 성과 결부시킨다. 특히 라캉의 이론에서 성 정체성의 구축은 ‘상징계’의 진입으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남성적 가부장적 질서와 아버지의 법을 의미하는 남근의 지배 하에 통제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는 그들의 이론에 동조하지 않는다. 〈밀실〉에 반영된 거울 단계와 모성에 대한 강조는 페미니스트적 논리와 상응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작품의 성격을 ‘성 이전(pre-sexual)’이라고 규정한 부르주아의 발언은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성적 구별이 생기기 이전의 ‘전 오이디푸스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르주아와 크리스테바는 여성의 정체성을 모성의 우월성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에서의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한다.
부르주아 본인은 부정하지만, 외도로 인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부르주아를 페미니스트 작가로 규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가부장적 정신분석에 거부감을 표현해 온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들과 밀접하게 연관시킬 수 있다. 부르주아의 작품에서 나타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여러 정신분석학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크리스테바의 이론이 브루주아의 작품과 부합되는 점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부르주아의 작품을 특수한 정신분석 이론으로 설명하는 작업은 앞으로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백남준을 향한 인류학적 해석학

(왼쪽)<바이 바이 키플링>에서 엠파이어TV를 들고 있는 백남준 1985
(오른쪽) 《백남준의 귀환》의 표지

백남준을 향한 인류학적 해석학

글|임근준·미술, 디자인 평론가

지난 4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설립한 총체 미디어 연구소에서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아 백남준 연구서 《백남준의 귀환》을 출간했다. 이 책은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 후 2년간 마련해 온 전시와 각종 포럼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다. 《백남준의 귀환》은 1962년 백남준의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선언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유라시아 코드’를 집중 조명한다. 백남준을 향한 기존 서구 중심의 미학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문화인류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1932년 7월 20일에 태어난 위대한 예술가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서거했다. 이후, 고인의 업적을 누가 어떻게 관리하고 연구하게 될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뒤를 이었다. 2008년 10월 8일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에 문을 연 백남준아트센터는 준비 과정에서 드러났던 크고 작은 문제에도, 초대 관장 이영철의 창조적인 운영에 힘입어 백남준 연구의 주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스튜디오로부터 백남준 연구의 중추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백남준 이후의 백남준

2009년 4월, 백남준의 작품에 관한 모든 권한을 지닌 백남준스튜디오의 켄 백 하쿠타(Ken Paik Hakuta)는, ‘백남준 아카이브’를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미국미술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백남준 사후 하쿠타는 스미소니언미국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국미술관 폴게티미술관과 접촉, 백남준 아카이브의 기증 조건을 논의하며 ‘아카이브 운영 계획’의 제시를 요구했다고 전한다.
살아서 현대미술의 금자탑으로 역사에 기록되길 원했던 백남준이지만, 1996년 4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일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회고전이 문제였다. 뉴욕현대미술관은 황인종 작가인 백남준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고,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치를 때, 어쩐 일인지 고인은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국제 현대 미술계엔 백남준에 관한 상찬과 평가절하가 공존한다. 인색한 평가는 대개 이런 식이다. ‘백남준은 수많은 플럭서스(Fluxus) 예술가의 한 명으로서, 플럭서스 운동이 잦아들 즈음 비디오아트를 시작해, 뉴미디어아트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얼핏 들으면 별 문제가 없는 듯싶지만, 그렇지 않다. ‘플럭서스 운동의 리더는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였으니까 백남준은 전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선 아류고, 비디오아트를 가장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곧이어 다른 이들도 비디오아트를 비롯한 뉴미디어아트를 실행했으니까 그리 대단할 것은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뉴욕현대미술관은 플럭서스 연구의 핵인 ‘실버맨 부부 컬렉션(The Gilbert and Lila Silverman Fluxus Collection)’을 기증받았다고 발표했다. 이는 백남준스튜디오에겐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을 터. 그렇다면, 하쿠타가 차선책으로 스미소니언미국미술관을 선택한 까닭은 뭘까? 사정은 두 가지일 듯싶다. 우선 백남준의 활동 궤적에 밝은 존 핸하르트(John G. Hanhardt)가 구겐하임미술관을 떠나 스미소니언미국미술관에 필름과 미디어아트에 관한 고문 큐레이터로 적을 두고 있었다. (핸하르트는 1982년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 필름과 비디오아트 큐레이터로서 회고전 〈백남준〉을 큐레이팅했고, 2000년 구겐하임에서 필름과 미디어아트 선임 큐레이터로서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를 기획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스미소니언은 미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관이므로, ‘백남준 아카이브가 스미소니언의 몫이 되면 미국 문화사의 일부가 됨으로써 황인종 작가의 핸디캡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스미소니언은 미술관 내에 백남준센터를 추진키로 합의했다 전한다.)
아무튼 하쿠타로선 백남준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렸겠지만, 백남준 연구의 핵인 아카이브가 핸하르트의 손에 들어가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입장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에 다름 아니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백남준아트센터를 ‘팥소 없는 찐빵’으로 생각할 단계. 그러나 이영철 관장은 포기하지 않고 타개책을 찾았다. 그의 선택은 ‘인류학적 해석학’으로 백남준을 연구하는 것이다.

백남준 <칭기스칸의 복권> 1993

백남준과 유라시아 코드

2010년 1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선 이영철은 ‘백남준 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발표하더니, 지난 4월 백남준아트센터 총체 미디어 연구소의 명의로 백남준 총서 I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와 백남준 총서 II 《백남준의 귀환》을 발표하며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무려 659쪽에 달하는 《백남준의 귀환》은 괴이한 문제작이다. 백과사전처럼 생긴 이 책은 백남준의 글과 백남준에 관한 글과 백남준의 활동 자료를 뒤섞어 제시한다. (편집자는 “교과서처럼 꾸미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처음 책장을 펼치고 읽는 이라면, 반쯤 미쳐 버린 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판이다. 사실 반쯤 미쳤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의 편집을 주도한 이영철은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미쳤다. 출간기념회에 참석한 어느 비평가는 “이쯤 되면 신흥종교 수준이야”라고 되뇌며 황당한 표정을 지어 뵈기도 했다. 그나마 이 책이 반만 미친 것은, 그의 주변에 미치지 않은 보좌관들이 포진한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편집자의 글 - 무모한 여행에의 권유〉를 보면 자신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편집을 기획한 이영철관장은 ‘돈 키호테’로, 편집을 진행한 김남수 연구원은 ‘산초 판자’로 묘사돼 있다.) 
목차만 봐도 범상치 않다. 일단 목차가 둘이다. 왜냐하면 백남준 연구서와 백남준페스티벌 도록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페스티벌 도록은 부록처럼 뒤에 붙었지만, 사실 편집 기획자의 관심 밖이었을 게다. 고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22~23쪽에 제시된 목차 속의 ‘세부 목차’다.
이영철이 해석한 백남준의 세계에 맞춰 9곡의 형태(교향곡이라기보다는 오페라에 가깝다)로 브리콜라주된 각종 자료의 배치를 제시하는 이 목차는 간단하게 해설하면 이렇다. 제1곡은 백남준이 1962년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선언한 내용에 연루된 자료를 묶은 장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에서 샤먼 거울의 형식을 찾아내 민속학적으로 비교한 부분은 탁월하다.) 제2곡은 백남준의 제1회 개인전인 1963년의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관련된 자료를 제시한다. (백남준이 파르나스갤러리에 내걸었던 도살된 소머리를 달의 상징 등으로 바라본 시도나, 〈총체 피아노(Klavier Inte-gral)〉를 비서구적 타악기의 차원에서 해석한 바는 신선하다.) 제3곡은 백남준과 존 케이지(John Cage)의 인연(백남준은 케이지를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서머스쿨에서 처음 봤다)에 관한 자료를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성립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눠 제시한다. 제4곡은 백남준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로 꼽았던 쿠르트 슈비터즈(Kurt Schwitters)에 관한 자료를 묶은 장으로, 작곡가로서의 백남준의 정체를 묻는 역할을 맡는다. (백남준은 뒤셀도르프미술학교 재직 시절 슈비터즈미술상을 탄 적이 있다.) 제5곡은 1961년 백남준이 〈오리기날레(Originale)〉에서 펼친 퍼포먼스를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삼계가 다 텅 비었다”는 화두로 해석해, 그의 예술 세계를 선불교의 차원에서 고찰한다. (1950년대 말 백남준은 일종의 ‘선불교 화두 모음집’인 《벽암록》을 탐독했고, 자신이 필사한 벽암록의 일부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제6곡은 1984년 1월 1일 펼쳐진 위성예술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중심으로 이러저러한 자료를 묶은 장으로, 키워드는 달이다. 제7곡은 1965년 백남준이 처음 비디오카메라로 작업을 개시한 때를 기준점으로 삼아, 그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을 넘어선 지점을 고찰한다. 제8곡은 1967년 백남준이 샬롯 무어먼(Charlotte Moorman)과 펼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를 바탕으로, 사이보그, 사이버네틱스, 로봇의 문제에 관한 자료를 묶었다. 제9곡은 알렉산더대왕이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아스가 묶어 놓은 매듭을 파괴하고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BC 333년을 표제로 내세워, 백남준의 성장 배경에 관한 자료를 엮은 회귀적 피날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또 안내하기 위해, 이영철이 도입한 인류학적 해석학의 편제는 대단히 독창적이다. 그리고 잠정적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백남준의 귀환》은 백남준 예술의 어떤 실체를 포착하는 데 성공한 상태다. ‘상태’라고 표현한 이유는, 완성된 양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미완의 책은 기존의 작고 작가의 자료집이나 전작집(카탈로그 레지오네)이 놓치기 십상인 생동감과 역동성을 지녔다. 그런데 이를 실감하기 위해선 3권의 책을 한데 펼쳐 놓고 볼 필요가 있다.
《백남준의 귀환》을 가운데 펼치고 그 옆에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놓은 뒤, 두 권을 비교해 가며 읽어 보라. 그리고 이영철의 인류학적 해석학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살피기 위해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STAY HUNGRY, STAY FOOLISH)-디자인/예술 입문자를 위한 제안》을 참조하면 금상첨화다.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는 백남준아트센터가 2009년 몽골답사를 진행한 뒤 2010년 발간한 비매품 책자로, 서지사항에 “유효기간은 1년입니다”라고 적은, 용도를 알 길이 없는 실험작이다.)
또한 에디트 데커(Edith Decker-Phillips)와 이르멜린 리비어(Irmeline Lebeer)가 백남준의 글을 묶어 1993년 편집, 발간한 자료집이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다. 시간의 역순으로 편집된 이 책에서, 백남준의 글은 1992년의 〈미디어의 기억〉으로 시작해 1947년의 〈많고 많은 날이 지난 후〉(악보)로 끝난다. 백남준 연구에 관해 도움을 받을 곳조차 마땅치 않던 당시에, 데커와 리비어는 최선을 다해 자료집을 준비했다. 일차적인 텍스트를 통해 백남준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최선의 방편을 제시한다. 다만 〈케이지와의 대화〉(1961)처럼 일본어로 발표된 글들과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의 전시 서문(1963) 등 몇몇 귀중한 자료가 빠진 점은 아쉽다.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와 《백남준의 귀환》을 비교 독해하면, 《백남준의 귀환》은 마치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공중 분해해 이영철이 마련한 인류학적 해석학의 체계에 맞춰 재정렬한 결과처럼 보인다. 물론 《백남준의 귀환》에 백남준의 원고만 게재되지는 않았다. 주요 전시 장면, 주요 작품 도판, 백남준에 관한 글, 편집인의 해제 등을 망라했다. 하지만 역시 뼈대 노릇은 백남준의 글이 맡는다. (한국어 번역문을 공유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예를 들어 (《백남준의 귀환》의 목차에는 나오지 않지만) 책을 시작하는 서곡에 해당하는 〈자서전〉은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의 1964년 장에서 왔다. (이는 제9곡의 끄트머리에 수록된 〈태내기 자서전〉과 수미쌍관하는 구조를 이룬다.) 제1곡의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는 1988년의 장에서, 〈도쿄 소게츠(草月) 홀 콘서트〉는 1990년 장의 〈보이스복스〉의 일부를 발췌한 결과다. 시간의 순서가 어떻게 분산되고 재배치됐는가를 추적하면, 백남준의 사상이 성장한 궤적과 이영철의 인류학적 해석학이 발달한 궤적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독일 아헨공과대학교에서 <황색 의자> 퍼포먼스를 하는 백남준 1965

미완의 보고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백남준의 귀환》은 미완의 보고(報告)다. 이영철은 본디 전시건 책자건 끝없이 재편집을 시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작품과 작품에 담긴 시선을 교차시킴으로써 ‘관점의 스펙터클’을 직조하는 일을 즐기는 그는, 전시 연출과 편집 디자인의 영구 혁명을 당연히 여긴다. 그 과정에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들은 몸살을 앓고, 편집 디자이너들은 작업에서 손을 떼기 십상. 《백남준의 귀환》의 제작 과정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편집 디자인을 맡은 스튜디오 워크룸의 색채는 찾을 수 없고, 아마추어(필경 이영철과 김남수)가 손수 이리저리 편집을 뒤바꾸다 보니, 다소 정신 사나운 꼴의 결과물이 독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허나, 그 결과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 이런 작업 방식은 깔끔한 결과와는 거리가 멀지만, 지면에 묘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장점이 있다. 그래도 어느 것이 백남준이 직접 쓴 글이고 어느 것이 백남준에 관한 글인지 한눈에 구별이 되도록 편집을 했더라면 좋았을 테다. (목차에도 이를 구별해 표시했어야 옳다.)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가 담지 못했던 초출자료 〈케이지와의 대화〉(1961), 〈매그넘 인터뷰〉(1963),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1995) 등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꼭 실었어야 할 글이 빠진 점도 눈에 띈다. 예컨대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이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 1974)를, 제7곡 〈1965년: 마르셀 뒤샹의 바깥〉에 넣었으면 좋았을 테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예술〉(1972)은 백남준의 기념비적 미술관 회고전인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1974년, 에버슨미술관)의 도록에 게재된 바 있는 중요한 글인데, 《백남준의 귀환》에 게재되지 않았다. 보완해야 할 점은 더 있다. 생전의 백남준은, 그간 책자를 발표할 때마다 에버슨미술관에서의 전시 자료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제외해 왔다. 전설로 회자되는 이 전시의 자료를 발굴해 추가해야 한다. 그리고 1982년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고전에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 불프 헤어초겐라트 박사(Wulf Herzogenrath, 당시 쾰른미술관장), 폰투스 휠텐(Pontus Hulten, 당시 LA MoCA관장), 데이비드 로스(David Ross, 당시 보스톤현대미술관장)를 초청해 토론회를 연 바 있다. 그 자료 또한 찾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백남준의 귀환》과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출간한 백남준아트센터의 다음 과제는 무엇일까? 《백남준의 귀환》을 보완해 영문판을 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겠다. 핸하르트의 백남준 아카이브 도록의 발간에 맞춰 영문판을 출판하면 여러모로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연구자의 해석과 한국인 연구자의 해석이 이루는 대조가 자못 흥미롭지 않겠는가? 나는 백남준을 향한 인류학적 해석학이 국제적 논쟁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2010 July Special - 아티스트, 책에 빠지다

(왼쪽)안규철 <드로잉> 2004
(오른쪽)황주리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2010

아티스트, 책에 빠지다

뉴욕3부작  안규철

시간 날 때마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가장 큰 여가 활동이다. 대개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씩 들리던 대형서점이 지난 달부터 보수 공사로 문을 닫은 상황이라서 요즘은 일종의 금단 현상을 겪고 있다. 신간 소설 코너에서 시작해서 인문학과 미술을 거쳐 외국 서적까지 한 바퀴를 돌면 대개 2시간쯤 걸린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이라도 그곳에 머물고 싶다. 여유가 생긴다면 프랑크푸르트의 발터 쾨닉 미술책방이나 후겐 두블 같은 대형서점, 아니면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 같은 곳에서 한 보름씩 책만 보다 돌아오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렇게 만난 책들 중 폴 오스터의 《뉴욕3부작》을 추천한다. 그의 책을 처음 만난 2003년 당시, 그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였지만 요즘은 대형서점에 특별 코너가 생길 만큼 한국 독자들에게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고 강렬하고 매혹적인 그의 책들은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독자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아직 그의 책을 접해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뉴욕3부작》 외에 《고독의 발명》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아래 드로잉은 소설 《향수》로 유명한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파리의 다락방 작업실에서 방문객을 들이지 않고 지내던 시절에, 그래도 어쩔 수 없을 때를 위해서 의자 하나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려본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에 은둔하며 책을 읽고 생각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독한 고독과 절제와 극기를 요할지라도 나는 그 놀라운 행운을 받아들이고 싶다.

압록강은 흐른다  황주리

사춘기 무렵 이후, 나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책 중의 하나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인 이 책을 읽고 난 뒤, 언제부턴가 압록강은 나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의 강이 되었다. 1987년 처음 미국에 건너갈 때도 나는 가방 속에 이 책을 넣어 갔다. 그 외로웠던 시간 속에서 막막한 밤중에 홀로 깨어 들춰 보던 책이 또한 이 책이다. 밤마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던 맨해튼 26번가의 피자 집 2층에 있던 나의 숙소에서 아무리 외롭다고 한들 그보다 더 외로우랴 싶었다.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미륵은 그의 어머니가 미륵보살을 찾아가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다. 그는 1917년 고향인 해주를 떠나 서울로 가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고 3년 동안 의학 수업을 받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비밀리에 금지된 전단을 뿌리다가 고향으로 피신한 미륵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네가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멀리 가거라.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독일이라는 나라로 가거라.” 그렇게 그는 고향을 떠나며 낯익은 압록강에 대해 말한다. “압록강은 유유히, 그리고 시퍼렇게 흐르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만주 평야를 지난 후, 중국을 지나 상해에서 배를 타서 그는 홍콩에 도착한다. 그 다음에는 베트남과 스리랑카를 구경한다. 수에즈 운하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을 지나 유럽 땅에 도착하는 과정은 나처럼 여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각별하게 다가 온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항구들을 지나 그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끝없는 항해를 시작했고, 독일에 정착한 이후에도 부다페스트와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등을 여행하기도 한다. 그 옛날에 그 낯선 땅들을 밟았던 이미륵의 감회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떨린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독일에 도착한 이미륵은 오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편지를 받는다. 뉴욕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을 때도, 나는 《압록강은 흐른다》를 떠올렸다. 1920년 5월 26일 독일 땅을 처음으로 밟은 조선인 청년 이미륵은 1928년에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 자전적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외로움과 질병이 그를 엄습하기 시작했고, 그리운 조국 조선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채 1950년 3월 20일 그는 세상을 떠난다. 30년 동안의 긴 고독이었다. 언제 읽어도 내 마음을 적시는 이 책을 요즘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권하고 싶다.

(왼쪽)주재환 <손금> 캔버스에 유채 65×54cm 1995
(오른쪽)주재환 <캔디3> 캔버스에 오브제 53×45.5cm 2007

사주명리학 이야기  주재환

요즘도 내가 자주 만나는 동료와 선배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강호파가 대다수다. 정해진 궤도 위를 잘 달리면서 그 분야에 성공하여 일가를 이루고 노년의 휴식을 즐기는 강단파는 드물고, 대개는 고장난 자동차처럼 시동이 꺼질 듯 삐걱거리면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 역시 내 꼴을 조만간 폐차장으로 갈 고물차로 보겠지만.
몇 해 전에 어느 대기업 회장의 빈소에 문상을 간 적이 있다. 빈소를 가득 채운 저명 인사들의 조화 행렬은 병원 마당까지 길게 늘어 서 있었고 물론 조의금도 받지 않았다.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면 망자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던 그 수많은 조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걱정 아닌 걱정을 하다가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 몇 달 후 수십 년간 친하게 지냈던 H선배가 별세하여 그의 빈소를 찾아갔다. 놀랍게도 그 흔한 조화 한 송이도 그곳에 없었다. 아하, 진짜 개털 인생이구나.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왔다. 그는 자유의 구속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평생 독신으로 지낸 지식인이다. 출판계에 평생 몸담아 왔지만 이렇다 할 저서나 역서를 남긴 것도 없다. 그의 사글세 방문 앞에는 세숫대야가 없다. 목욕탕으로 직행하면 되니까. 40여 년 전 대입 학습지 《진학》의 편집장 시절에 띄어쓰기가 문제되었을 때 ‘날씨가 더우면 띄고 추우면 붙이면 돼’라고 간단히 정리했다. 맞춤법을 무시한 파격처럼 잘 마시고 잘 놀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강호파의 거두인 그의 일생은 어느 이름난 스님보다도 공수래공수거의 정직한 모범으로 보인다.
누가 더 행복한 삶을 누렸을까. 한 사람은 타고난 사주팔자가 좋아 생전에는 부귀영화를, 죽어서는 양지바른 명당에 묻히고 또 한 사람은 입에 풀칠하는 수준으로 만족하다가 허공으로 산보 가버리고.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은 돋보이는 사람만을 끝까지 돕는다는 말이 있다. 욕망이란 먹잇감 앞에 늘어선 길고 긴 행렬이 이 세상의 본질로 보이는데, 모처럼 정신차린 하나님이 ‘뒤로 돌앗’ 호통 치면 일등이 꼴찌가 되는 천지개벽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나 같이 철없는 강호파의 망상이고 어느 인생이든 명암과 고저의 우열을 따지며 가치 판별하는 줄타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정해진 운명의 갈래는 사람의 머리털 수보다 훨씬 많을 것이니 저마다 타고난 대로 지지고 볶으며 살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침묵의 고향으로 가는 수밖에. 그럼에도 사주팔자가 가리키는 결정론적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 해결사를 자처하는 역술인 등을 찾는 발걸음은 인류가 존속할 때까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한 때 나와 가까웠던 6척 거구의 E선배는 그 몸짓과 목소리가 양산박의 두령 같은 경상도 사내다. 그의 말을 옮기면 이러하다. 오래 전에 도봉산 언저리에 한국역술회관 건립 계획이 있었다. 일명 ‘도봉산 청와대’(지붕을 청기와로 덮을 예정이어서)로 불리었던 그 사업은 건립자금 등의 내부사정으로 공수표로 끝나고 말았다. 초대 관장으로 내정되었다고 자랑하던 E선배는 그가 운영했던 점집의 실태를 술자리에서 들려 주었다. 점집을 찾아 온 S여사는 어두운 조명의 좁고 긴 복도를 지나면서 긴장하게 되니 심신이 더 위축된다. 이윽고 미륵불 같은 남성을 대면하면 더욱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말없이 여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난 다음 두터운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E도사의 개구일성(開口一聲).
“왜 이제 왔노. 이젠 안심하거라.” 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기똥찬 복음이 아닌가. 그날 이 한마디에 도취된 나는 거듭 술잔을 비우느라고 연이은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일 점괘가 맞든 틀리든 관계없이 S여사 역시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 복음 한마디에 홀려서 아낌없이 복채를 내 놓고 개운한 마음으로 귀가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일간지에 연재되는 오늘의 운세를 보니 ‘40년 생 많이 웃고 낙천적으로 살 것’이라고 나와 있다. 도사님, 많이 웃고 낙천적으로 살면 안심이 됩니까.

허윤희 <일기 드로잉> 노트에 아크릴릭 24×18cm 2003

월든  허윤희

시 한 줄을 장식하기 위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독일 유학 시절,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란 책을 읽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과 인간에 대해 경험하고 사색한 글을 모아 낸 책인데, 문명 사회에 대한 비판과 자연에 대한 예찬이 담겨 있다. 감수성이 풍부한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선택하고, 사회의 고정관념과 제도에 맞서 자유롭게 살 것인가. 그의 실험과 실천은 삶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 후에 그가 남긴 다른 책들을 찾아 읽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 중에 《소로우의 일기》는 그가 매일 매일을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의 하루에 대한 기록이다. ‘일기’라는 매일의 흔적, 과정으로서의 기록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일기 형식을 내 작업에 시도하고자 하였다.
“모든 나무와 모든 관목, 모든 풀 하나하나마다 그것이 푸른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그 식물 특유의 가장 선명한 색을 띨 때 잎 하나를 표본으로 채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잎의 윤곽을 그린 다음, 물감으로 그 색을 정확하게 표현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 책은 얼마나 멋진 기념품이 되겠는가? 아무때나 책장을 들추기만 해도 가을 숲을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만드는 데 아직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의 에세이 <가을의 빛깔들>에 나오는, 이루지 못한 그림책에 대한 구상을 내가 실현하고 싶었다. 그 글이 실마리가 되어 나의 <나뭇잎 일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매일 집 뒤의 북악산을 산책하며 그 날의 빛깔을 대표하는 나뭇잎 하나를 주워 와서 그 크기와 모양, 색깔을 똑같이 그렸다. 그리고 그 날 만나거나 기억나는 사람, 혹은 스쳐가는 단상을 기록하였다.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 일기는 2008년 5월 4일부터 2009년 2월7일까지 252장의 드로잉으로 남았다.

(왼쪽)잭슨홍 <Amazing Stories> 디지털 드로잉 2656×3318pixels 2007
(오른쪽)호시노 유키노부 《2001 SPACE FANTASIA》1권의 내용

2001 SPACE FANTASIA   잭슨홍

내가 이 만화를 처음 접한 곳은 1980년대 후반 동네 만화가게였다. 당시의 만화가게 서가의 대부분은 대본소 용 공장 만화가 점령하고 있었지만, 나름 국산 만화의 여명을 알리던 《만화광장》 《주간 만화》와 같은 간행물이 세를 불리고 있었고, ‘불법 해적판’ 형태의 일본 만화들이 카운터 언저리의 인기 코너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유령과 같은 일본 만화들이 만화가게 주인이 지켜보는 카운터 언저리의 서가에 있었던 이유도, 아마 해당 공무원의 단속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불법해적판’ 일본 만화들은 회전이 상당히 빨랐는데, 단속이 한번 지나간 빈자리가 새로 들어오는 더 강도 높은 ‘불량한’ 시리즈로 채워지고는 했다. 가끔 시기를 놓치면 시리즈의 결말을 영영 알 수 없게 되는 슬픈 경우도 있었지만, 화실에 간다는 핑계로 만화가게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나에게 ‘대량’의 컨텐츠를 ‘저가’에 ‘신속’하게 즐길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은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운좋게 보석 같은 시리즈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2001 SPACE FANTASIA(2001 야화)》가 그 중 하나였다. 개인적으로 유독 좋아했던 만화인지라, 대학 지원서를 사러 갔다오는 길에도 들려 또 일독을 했었다.(그리고 나는 그해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책은 호시노 유키노부가 후타바샤 월간 《슈퍼액션》에서 1984년 6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하드보일드 SF극화로서, 우주로 진출하는 인류의 이야기를 4세기 동안의 시간과 막막한 우주공간의 축 속에서 짤막한 단편들의 형태로 그려낸 것이다. 각 단편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느슨한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 우주 진출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화들을 담담한 그림체로 이야기한다. 각 단편들은 모험과 공포, 로맨스, 심지어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적 형식을 선보인다. 제목이 지시하듯이 이 만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동명 영화, 그리고 아더 C. 클라크의 SF소설인 《2001 스페이스오디세이》에서 빌려온 줄거리 위에 여러 구미 SF 단편들을 인용하여 작가의 상상력으로 버무린 것이다. 원전들의 아이디어를 기계적으로 도용했다면 하나의 짜깁기 만화로 끝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2001 야화》는 원전의 아이디어에 생기있는 상상력이 더해져서 애초에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먼 지점으로 나아가는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에피소드는 1권에 있는 에피소드인  <다섯번째 밤 : 스타차일드>와 2권에 있는 <열번째 밤 : 내일을 앞지르는 여행>이다. 최근에 내가 접했던 놀라운 소식 중에 하나는 호시노 유키노부의 이 책과 그의 다른 시리즈가 정식 출간되었다는 것인데, 20년 만에 깔끔하게 인쇄된 ‘정품’으로 보니 또 다른 깊은 맛이 느껴진다. 물론 세월이 세월인지라 약간씩 촌스러운 구석도 있고, 달달한 요즘 만화체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면 조금 싱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체와 화법에 익숙해지면 이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는데, 더운 여름밤 마루를 뒹굴거리며 볼 수 있는 만화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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