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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0.06

Abstract

특집_집중 연구 Battle of Residency 레지던시 붐을 넘어 레지던시 '전쟁 시대'다. 국내에 본격적인 레지던시의 개념이 도입된 지도 벌써 10여년. 작년에도 올해도 계속 생겨나는 창작 공간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가장 '핫'한 레지던시는 어디인가. art는 지난해 야심차게 출발한 창작 공간들 중에서 '접전지'로 불리는 3곳의 레지던시(경기창작센터 인천아트플랫폼 서울시창작공간)를 직접 찾아가, 현재 개최되고 있는 전시 및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집중 취재했다. 아울러 서울문화재단 창작공간추진단장 김윤환의 글을 통해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 보고 현 시점의 쟁점을 점검한다. 또한 지금 우리 레지던시의 여건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변화했는지, 한국 레지던시 역사의 증인 격인 김홍희 경기도미술관장의 이야기도 들어 봤다. 마지막으로 국내와 해외의 레지던시 109곳의 정보를 보기 쉽게 디렉토리로 정리했다. 각 기관별 지원 조건에서부터 입주 작가까지, 레지던시의 현황과 함께 해외 레지던시 참가기도 함께 전한다.

Contents

표지  이승조 〈Nucleus 83-8〉 캔버스에 유화 53×65.1cm 1983

에디토리얼

프리즘 
    ‘광주 5월’의 고통과 저항을 넘어서_홍성담
    공공미술의 비전, ‘재원 조성’이 관건이다!_바바라 골드스타인

핫피플  니콜라스 샤프하우젠_김현

포커스
    임충섭展|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展_김백균
    김을展|임자혁展_이선영
    이형구展|손동현展_진휘연
    Mr. Kim과 Mr.Lee의 모험|김범展_김성원

특별 기획  야수마사 모리무라_김동현

아티스트 인사이드
    1) 이호인_감성으로 본 자연_김지연
    2) 이샛별_현실의 ‘다른 장면’_장승연

집중 연구  Battle of Residency
    1) Residency Big 3 
     경기창작센터+인천아트플랫폼+서울시창작공간_김수영
    2) Report 한국 레지던시, 어디까지 왔나?_김윤환
    3) Residency all Guide 109_호경윤

나의 얼굴  이만수

암흑물질
    ‘꿀’의 꿈, 에셔의 공간_이영준

작가 재조명  이승조
    환영에서 몰입으로_전영백

해외 작가  베르트랑 라비에
    가치 서열의 전복, 진화된 레디메이드_정현
 
전시리뷰
    한-아세안현대사진전|살롱드카페|박기원|이광호
    강이연|황세준|김종구|천경우|이명호|지천명

크리티컬 포인트  ‘포스트민중미술’, 무엇에 대한 ‘포스트’인가_이대범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이재욱|이효진|이일정|이경민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20세기 역사의 주인공 ‘되기’

(왼쪽)<진혼곡: 창조 극장/파블로 피카소 되기>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0×90cm 2010
(오른쪽)<진혼곡: 창조 극장/앤디 워홀 되기>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0×90cm 2010

20세기 역사의 주인공 ‘되기’

____〈포스트 바르코네그로(Post Barco Negro)〉 작업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촬영이 끝난 것 같군요. 하여튼 고생하셨습니다.
모리무라 올 1월 14일 촬영한 〈간디(빛과 땅을 짓는 사람)〉가 마지막 작업이었죠. 이틀 동안 촬영할 예정으로 준비하다가, 하루 만에 촬영을 끝내기로 했죠. 스튜디오 사람들이 기겁을 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2주 동안 취재와 대담이 계속 이어져 정신없이 지냈어요. 이렇게 짧은 기간에 내 작품에 관해 많이 얘기한 적이 없었어요.
____인터뷰나 대담에서 작품 얘기를 나누면 생각이 잘 정리되십니까?
모리무라 아직 잘 모르겠네요. 다만 이번에 하려는 작업은 ‘역사에 손을 댄’ 행위라는 건 분명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역사에 대해 ‘아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손을 댄다’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접근이지요.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안다’는 것보다도 직접 역사에 ‘닿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역사에 손을 대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되기’, 즉 셀프 포트레이트입니다. 20세기라는 100여년 동안 시간은 어마어마한 시간이 축척되었고 인간의 활동도 무시무시하죠. 혼자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일을 저지른 셈이죠.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었어요.
____테스트 프린트를 보고서 지금까지 작업했던 미술사나 여배우를 테마로 한 작품에 비하면, 삶의 냄새가 풍기는 현실과 직접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도쿄도사진미술관 전시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예술가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장면을 모리무라 씨가 ‘되기’로 연출한 작품이 나오잖아요, 모리무라 씨 입장에서 그러한 인물들이 왜 중요한 존재인가요?
모리무라 제가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어 캐스팅을 한다면 물론 좋아하는 배우를 선택할 겁니다. 그러나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쇼와(昭和)천황과 맥아더는 농담에서도 ‘농’에 해당하죠. 게다가 쇼와천황은 주역급 중 한 사람이지요. 쇼와천황은 노(お能)의 일종인 〈무겐노(夢幻能)〉의 주인공, 즉 죽은 혼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무겐노〉는 신이나 귀신, 죽은 혼령과 같은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들이 이 세상에 되살아나서 원통한 일을 말하고 되돌아가는 구조입니다. 쇼와천황은 그중에서도 특히 죽은 혼령의 느낌이 드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번 작품에서 비중이 큰 존재입니다.
____말씀을 듣고 보니, 모리무라 씨가 청춘시절을 보낸 1960년대에 일어난 천황제를 둘러싼 사건이 연상됩니다.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의 소설 《풍류몽담(風流夢譚)》에서 촉발된 테러 사건,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정치소년 죽다》를 둘러싼 협박 사건 등이 있었죠. 그 시대는 좌익 세력 활동이 활발했던 정치의 계절이었고, 천황제를 둘러싼 논의가 소란스럽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에서 고쿄(皇居: 황제가 거처하는 곳)를 허무의 중심으로 묘사했듯이, 천황은 그런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침묵을 지키며 허무의 중심을 지켜야 했었죠. 그래서 더욱 말 없이 사라진,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요.
모리무라 그의 존재가 허무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위에서 지나치게 겹겹이 둘러싼 것이겠죠. 이 사진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쇼와천황의 안경에 스며든 빛입니다. 실은 원본에는 안경에 빛이 들어 있지 않았어요. 안경에 비치는 빛은 그가 본 것을 반사하잖아요. 거기에는 무한한 빛만 있죠. 강한 빛이 아니라 미묘하게 스며든 빛. 바로 그러한 빛이 쇼와천황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빛을 그 안경 위에 떨어뜨리면 허무한 쇼와천황의 존재 위로 도리어 큰 역사적 사건, 시간, 드라마가 드러나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장소를 저의 고향집 다실(茶室)로 설정하여, 이름 없는 한 인간의 역사와 접점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쇼와천황과 맥아더 장군이 함께 있음으로서 1945년이라는 날짜에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죠.
19세기는 회화의 시대, 20세기는 사진의 시대
____이 작품의 원본이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더니, 첫째는 전쟁이 끝나고 처음 일본에 도착한 역사적 순간의 상징이라는 것, 둘째는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와 패한 나라의 관계가 이 한 장의 사진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건장한 맥아더 장군과 왜소한 쇼와천황. 맥아더는 점령지 사령관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민주주의 성숙도를 12살짜리 소년의 수준으로 평가했다던데, 바로 그 관계를 이 한 장의 사진이 말해 주고 있는 듯 보이네요.
모리무라 젠더적으로 해석하면 미국이라는 남성과 일본이라는 여성, 투 샷(Two-Shot)으로 읽어 낼 수 있지요. 지배와 피지배 관계. 미묘하지요. 그러나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만 볼 수는 없죠. 일본 사람들이 미국 문화를 동경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맥아더의 근사한 모습에, 일본 사회와 문화는 어떤 의미에서 ‘확’ 넘어갔죠. 그런 의미에서 이 사진은 결혼사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식으로 말하면, 결혼사진에서 일본은 여성의 입장이지요. 그래서 미시마는 “이러면 유감이지”라고 말했다던데, 그건 남자의 입장에서 말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모든 결혼사진이 축하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무튼 복잡한 의미를 지닌 사진입니다.
____처음 촬영한 것은 어떤 작품이지요?
모리무라 1991년에 촬영한 베트남 전쟁사진(Vietnam War)입니다. 때마침 걸프전(1990~91)이 벌어지고 있을 때 뉴욕의 갤러리에서 처음 개인전(Luhring Augustine)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그 때 걸프전을 테마로 회화 작품을 전시했었죠. 왜 그랬는지 그때 딱 한 작품, 바로 이 사진을 넣었어요. 최근에는 뒤쪽에 있던 백화점이 부서져서 없어졌고 당시와는 풍경이 상당히 변했죠. 그런 점도 사진적으로 재미있더라고요.
____1990년대에는 로케이션 촬영을 거의 하지 않으셨나요?
모리무라 1995년부터 작업했던 〈여배우가 된 나〉는 로케이션 촬영이 대부분이었는데 1990년대 전반까지는 거의 하지 않았죠. 그래도 베트남 전쟁 사진은 계속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____이번 신작은 〈서양미술사〉이나 〈여배우가 된 나〉 시리즈의 정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광각렌즈로 움직임이 있는 피사체를 포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진에는 어떤 카메라를 쓰셨나요?
모리무라 4×5와 6×6을 썼어요. 배경은 4×5이고, 인물은 6×6으로 찍어서 합성한 것이지요.
____모리무라 씨의 작품을 보고 20세기는 ‘사진의 시대’라고 새삼스레 생각했습니다. 영화도 텔레비전도 있었지만, 그 사건은 그 사진, 이런 식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사진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지요.
모리무라 19세기의 테마는 회화였다고 생각합니다. 회화를 테마로 하여 줄곧 작품을 만들어 온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습니다. 20세기에도 뛰어난 회화 작품은 많이 있습니다만, 시대를 느끼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영화와 사진이었지요. 영화는 이미 〈여배우가 된 나〉 시리즈로 다뤘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진, 그중에서도 보도사진을 가지고 작업했어요. 잡지 《life》를 비롯하여 보도사진은 20세기에 매우 큰 영향력을 지녔죠.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를 바꿀 정도였으니까요. 확실히 20세기는 사진의 시대였지요. 저도 아직 뭐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순전히 직감으로 봤을 때 20세기는 ‘기억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억을 남기는 건 사진이라는 매체죠. 이것에 비해서 인터넷이 보급된 21세기는 기억이 없는 시대지요. 네트워크로 중요한 정보가 갱신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죠. 때문에 현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 장(場)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니까 기억을 확실히 고정시켜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세계입니다. 21세기와 비교하여 적어도 20세기는 기억의 시대, 단정적으로 확신적으로 ‘20세기=사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다의 선물: 전장에 정상에 꽂은 깃발> HDTV 21분 2010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____모리무라 씨는 이번 작품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진의 세부까지 검증하고, 또 거기에 ‘현재’ 유효한 아이디어를 집어 넣는, 복잡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셨는데요. 왜 그렇게 하셨나요?
모리무라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기억과 기록은 다르다고 하죠. ‘이런 시대가 있었습니다’라는 회상은 기록이죠.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보다도 좀 더 생생한 것이어야 합니다. 기록되고 있는 사진 이미지를 기억시키는 것. 즉, 사진을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피를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내 피를 수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셀프 포트레이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다큐멘터리 이미지에 피를 흐르게 해서 ‘휴우’ 하고 숨을 쉬게 하는 것은 그 절차에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문득 생각난 것인데요. 이런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것보다 그런 쪽 사진을 모아서 ‘20세기란 무엇이었나’라는 전시회를 열면 어떨까요.(웃음)
____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은 모리무라 씨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진은 일회적인 것이라서 단 한순간 존재하는 것을 찍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더군요. 반면, 모리무라 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 사진을 골라서 피가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다시  숨 쉬게 만드는 데 공을 들이시는군요.
모리무라 시노야마처럼 ‘단 한순간’에 승부를 보거나, 아니면 저처럼 거의 죽어 있는 사진에 수혈을 해서 다시 한 번 되살아나게 하거나….
____시노야마는 늘 가장 최근의 ‘지금’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하지요. 반면 모리무라 씨는 과거를 발굴하여 ‘지금’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군요.
모리무라 재미있는 대비군요. 시노야마는 늘 ‘지금’을 다룹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순간에 사진을 찍죠. 피가 통하는 신선한 피사체를 카메라 앞에 끌어당겨서 사진을 늘 신선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가장 좋은 순간을 놓친 사진은 쓸모없지요. 시노야마는 절집 집안에서 자랐는데 묘에는 흥미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반대로 저는 묘에만 흥미가 있지요.(웃음)
____죽은 시체를 끄집어 내어 거기에 피를 흐르게 하거나, 수술을 해서 개조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로군요.
모리무라 음! 기억해 둘 만한 말이군요. 시노야마도 저도 대충 말하자면 ‘사진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해 각자 해답을 찾아보려고 작업하는 태도가 공통점이죠.
____스승이신 어네스트 사토(Y. Ernest Satow)는 모리무라 씨께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모리무라 어네스트 사토 선생은 제게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 속에 있는 모더니즘의 미학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죠,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겨우 서양 미학에 대해 조금씩 깨우치기 시작했어요. 회화도 사진도 마찬가지지만 서양의 모더니즘 미학이 없으면 몬드리안도 없고, 르 코르뷔지에도 없고, 피카소도 없지요. 우선 캔버스 비율이 황금 비율로 얘기되었으니까요. 이것은 서양 그림을 볼 때 중요한 점이고 사진 세계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밑바탕에 엄밀한 수학적 미학이 있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사진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저는 그것을 ‘피부와 뼈’라고 부릅니다. ‘피부’는 ‘무엇이 찍혀 있는가’를 말하고, ‘뼈’는 ‘화면 구성의 짜임새’를 말합니다. 화면 구성이 잘 짜여 있지 않으면 화면 전체에 시선이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은 ‘피부와 뼈’가 확실히 있지요. 이번에 〈누군가를 향한 진혼곡〉 시리즈를 촬영해 준 카메라맨 후쿠나가 카즈오(福永一夫)도 어네스트 선생의 제자이기 때문에 똑같은 미학을 공유하고 있죠. 그래서 안심하고 촬영을 맡길 수 있었어요.
____모리무라 씨가 셀프 포트레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제작한 작품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탁자 위의 바르코네그로〉(2006)는 모리무라 씨가 셀프 포트레이트를 제작하기 이전 작품인데요. 그 시리즈에서 구성주의나 쉬르리얼리즘 등 미술적 교양을 느꼈습니다.
모리무라 미술소녀 시절과 사진소녀 시절이 뒤섞인 작품입니다. ‘탁자 위’라고 제목에 넣었는데, 이 스튜디오에 있었던 책상만 사용하여 자연광으로만 촬영한 사진입니다.
____유머가 있고 시적인 느낌이던데요. 확실히 모리무라 씨의 일관된 스타일이 느껴집니다.
모리무라 이 시리즈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덕분에 불쑥 사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왼쪽)<미술사의 딸-공주A> 컬러프린트 210×160cm 1990
(가운데)<초상-소년1> C프린트 210×120cm 1988
(오른쪽)<초상-반 고흐> C프린트 54.5×82cm 1985

다시 사진으로 되돌아오다

____이번 도쿄도 사진미술관에서의 전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모리무라 이번 전시는 순전히 사진 작품을 위주로 내걸었어요. 영상 작품도 있지만, 비교적 선명한 흑백사진(monochrome)을 전시장에 진열하기로 했죠. ‘되돌아오다’가 이번 전시의 키워드입니다. 아마 제가 과거형 작가여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마치 묘지 순례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예전에 퍼포먼스나 영상 작품을 해보기도 하고, 심지어 글을 써보기도 했는데 예전에 내가 붙들고 작업했던 사진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바깥세계를 둘러보고 다시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오듯 말이죠. 고향집 다실을 촬영한 것도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 되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탁자 위의 바르코네그로〉와 이번 작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20세기를 상대로 하다니 제법 큰 일을 하고 있잖아”라고 말예요(웃음). 〈탁자 위의 바르코네그로〉는 오로지 저 혼자 한 작업이었지만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로케이션 촬영까지 했어요. 주위에서 ‘바르코네그로의 세계’를 좋아한다고 해서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죠.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틀을 넓혀 보고, 그래야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출발할 때와는 다른 형태가 되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____사진이라는 매체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죠.
모리무라 바르코네그로에 들어 있는 사진은 찍힌 피사체에 그림도 그려 넣었어요. 사진에는 그림도 그릴 수 있고 당연히 사진적인 감수성도 집어넣을 수 있지요. 그 점이 재미있더군요.
____모든 것을 평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사진의 큰 특성이지요.
모리무라 그림도 입체도 물론 사진도, 모두 한 장으로 가능하기 때문이죠. 제가 34살 때 〈초상〉(1985)을 만들었는데, 그때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소득은 없었죠. 그동안 작업해 온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정리하기 위한 촉매가 저에게는 사진이었죠. 그리고 셀프 포트레이트라는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하나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____셀프 포트레이트로 작업하는 걸 착상한 것은 고흐가 되어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작업을 하신 건가요?
모리무라 저는 원래 허구와 실재가 뒤섞여서 극점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은 현실 그대로가 아니잖아요. 이미 그 상태가 허구죠. 하지만, 사진은 현실에 강력한 파이프를 대고 있어요, 그 점이 사진의 큰 매력입니다. 리얼한 것을 얼마든지 허구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죠.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고흐〉 작업을 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진이 아니면 어떻게 그걸 표현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최근, 저는 ‘리얼’이라는 말대신 ‘육(肉)’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요. ‘여기에는 좀 더 육적인 것이 들어 있어야 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신체로 치면 육체, 얼굴로 치면 육안(肉顔)이랄까. 최근에는 디지털 합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안이 없지요. 이번에는 될 수 있으면 ‘육’적인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죠. 합성하거나 가공한 작업은 허구화하는 데 비중을 두지만, 가공하더라도 어느 정도 육체나 육안이 서로 다투다가 ‘육’적인 느낌이 생겨난는 식이죠.
____사진이라는 가공법, 조리법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오히려 아날로그적 방식이 눈에 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모리무라 씨도 작업에 디지털 처리를 하고 있지만, 흑백필름(銀鹽)사진만이 가지고 있는 ‘리얼함’으로 디지털을 공격하고 있는 거죠. ‘사진의 역습’ 같은 난폭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리무라 사진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이고 순수한 매체예요. 다시 말하면 거의 식칼 하나로 무엇이든 처리가 가능한 식입니다. 사진은 늘 ‘무언가’를 찍고 있죠. ‘무언가’는 현실이며 피사체가 없는 사진이 없듯이, ‘무언가’가 없는 사진도 있을 수 없죠. 20세기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허구와 현실의 틈새에서 현재에 다시 되살아나게 하고, 무언가를 말하게 하는 작업으로 진혼하는 셈이죠. 제가 하려는 작업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전통을 품은 새로운 스펙터클

(왼쪽)이형구 <Mirror Conopy> 혼합재료 158×150×100cm 2010 오프닝 퍼포먼스 장면
(오른쪽)이형구 <Creeper> 혼합재료 54.5×143×84cm 2010

전통을 품은 새로운 스펙터클

글|진 휘 연

영화 속의 엄청난 재앙과 다른 생명체의 광학 구조 경험하기,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가능한 듯 보이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허구는 늘 과학이라는 제3자의 도움을 받아서 진실에 가깝게 다가간다. 물론 그것이 가상을 현실로 온전히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한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많은 정보들은 인간의 해석을 통해서 인식된다. 결국 사실로 밝혀진 내용도 해석의 개입을 통해 주관적인 반응과 결부하게 된다. 예술은 상상력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 둘의 매개체로서 가장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는 미술은 상상과 과학 중 어느 특정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새로움의 전통과 상상력의 발휘라는 고전적 명제에 충실하게 작업한다.  
그런데 상상력이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 새롭게 첨가된 ‘스펙터클’의 효과 때문에, 미술은 어법의 다양함을 상실할 수 있는 단계에 직면해 있다. 재난, 재앙은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주제이자 새로움의 명패 뒤에 숨은 ‘기술력’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영화는 자본주의 시각예술의 관심인 스펙터클을 이루어 내는 데에 최근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다. 자본과 이미지가 궁극적 결합을 이룬 스펙터클에 대한 기대는 미술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작가들은 상상이 구현되는 방법이나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거나, 완성도 높은 장인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자본력의 부족을 은폐하기도 한다. 최근 과학, 상상력, 그리고 스펙터클의 문제를 고전적인 매체와 접근 방식으로 푼 2명의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신체’로 연결되는 실제와 가상

이형구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단독 전시’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서 주제와 형식, 즉 표현은 늘 온전하게 짝을 이루어 진행되고 완성도는 지극히 정교하고 깔끔하다. 그는 앞서 설명한 대로 상상의 나래를 조각이라는 입체를 통해 표현해 왔고, 그 과정에서 가시적 형태의 재미를 추구해 왔다. 이형구의 이번 전시 주제는 ‘안구 추적’이다. 〈Eye trace〉라는 제목이 말하듯 작가는 최근 현대미술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시선, 응시, 이에 따른 주체의 문제나 욕망의 문제를 배제한, 눈이란 신체 기관에 대해 관찰하고 있다.
눈의 기능과 구조는 결국 대상과 세계에 대한 바라보기인데, 인간의 눈과 다른 구조와 기능을 갖춘 생물체 중 어류와 양서류, 사슴 등 몇 가지의 광학적 예를 가시화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과정을 재연했다. 2010년 신작으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에는 일상적 소재를 사용한 장치나 도구, 또는 형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는 마치 우주복처럼 보이는 옷이 보인다. 얼굴 부위에만 어류의 안구 각도대로 플라스틱을 덧댔는데, 마치 SF영화에서 볼 법한 복장이 탄생했다. 이것은 〈Fish Eye Gear〉로 물고기의 눈을 경험할 수 있는 도구이다.
〈Mirror Canopy〉는 바퀴달린 나무 의자에 여러 개의 작은 거울들을 눈높이에 여러 각도로 달았는데, 이것은 전후좌우, 360도를 볼 수 있는 생물체의 광학 렌즈를 형상화했다. 〈Creeper〉는 썰매와 같은 모양으로, 바닥을 향한 낮은 위치에 돋보기처럼 확대경이 부착되어 있는데, 엎드린 인간이 확대경을 통해 바닥이나 땅 속에 묻힌 여러 가지 작은 오브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Orange Deer〉는 오렌지색을 볼 수 없는 사슴의 눈을 위해 오렌지색 필터를 씌운 가면 형태이다. 작가의 퍼포먼스는 전시 오픈 당일 각 장치들을 쓰고 입고 탄 채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이 타 생물체의 광학 체계를 보여 준다고 하지만, 모든 실험과 제작은 결국 주체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즉 인간의 응시로 다른 종의 ‘보기’를 엿보는 것으로, 주체로서의 인간의 관찰과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퍼포먼스에서 마치 종교 의식처럼 이들을 통해 또 다른 보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특이한 시력이나 보는 기술, 또는 눈의 구조 등은 이전에 보였던 작가의 꾸준한 관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형구는 전작들을 통해 머리, 얼굴, 손에 착용할 수 있는 의학 기구처럼 보이는 ‘장치’를 통해서 신체를 확대하거나 기괴한 모양으로 변형시켰다. 또 만화 속 주인공의 뼈대를 구현함으로써 가상 존재를 실체의 세계 속으로 가져오고 그에게 보편적인 구조를 부여했다. 그에게 실재와 가상 사이의 매개는 ‘신체’이다. 그의 관심은 보이는 것을 왜곡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함으로써, 결국 비틀어진 몸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의 단면을 실험하지만, 이것은 생명체의 구조와 조직에 대한 상당히 전통적인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형구는 이런 믿음을 드러낸다. 다른 종의 가시화된 눈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경험되지만, 여전히 그 경계가 강조된다. 백과사전적인 작가의 진지한 관심은, 그러나 지식의 차원에서 예술적 상상력의 점화에 힘을 북돋지 못하는 듯 보인다.

손동현 <섬> 전시 전경 2010

파괴되는 뉴욕

또 다른 방식으로 상상력을 표현한 손동현은 이형구에 비하면 나이나 경력, 모두 훨씬 젊다. 그는 대중매체에서 형성된 여러 이미지들을 사용하면서도 매우 고전적인 동양화 기법을 채택했다. 그의 작업은 형태와 내용간의 간극을 강조하지만, 그 역시 제도로서의 미술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대중매체의 대표인 영화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들은 끊임없이 영웅이나 악당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이고 단순한 성격의 존재들을 생산해 낸다. 작가는 이전에 서양 만화 속의 로봇이나 유명 아이콘, 가상의 수퍼 히어로를 동양화의 수묵담채 기법으로 종이 위에 그렸다. 내용보다는 동양화의 초상화 형식을 결합시킨 서양 인물의 재현이란 반응이 많이 언급되었던 것을 보면, 장르간의 교차 표현이 눈에 띄었던 듯하다. 그러나 동양화의 기법이나 서구의 문화컨텐츠의 결합에서 의미가 생성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범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지극히 단순한 지적일 뿐이다.  
이번 사루비아 전시에서는 3편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장면들을 병풍으로 옮겼다. 〈아마겟돈〉에선 우주 행성의 파편이 불똥처럼 땅에 떨어지고 사방은 불바다로 변해 간다.  〈딥 임팩트〉는 해일로 인해 물에 잠기는 맨해튼의 빌딩 숲을 보여 주고, 군대와 대치한 거대한 괴수가 맨해튼 빌딩 숲 속에서 이들을 공격하는 〈고질라〉는 전형적 괴수 영화로 보인다. 수묵과 담채의 8폭 병풍에 담긴 ‘섬’, 즉 맨해튼의 모습은 매체의 전통적 관습에 비교적 충실하다. 구도는 동양 산수화와 흡사한데, 맨해튼의 빌딩들은 북송시대 거대 산수의 준봉처럼 보인다. 모든 부분은 화면을 따라 능동적인 시점 이동을 통해 서술적 공간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파괴되는 뉴욕’일까? 많은 영화 안에서 배경이 되는 뉴욕, 맨해튼의 재난에 대해 작가는 ‘세상의 중심인 공간과 그 종말에 관한 대중의 욕망을 담은 진경(眞景)으로… 그 섬에 대한 질투와 분노, 그리고 이로 인한 대중들의 관음증이 뒤섞인 욕망의 표현이다’라고 전시의 취지를 말했다.
21세기 뉴욕을 향한 작가의 욕망의 의미는 무엇일까? 상상력도 과학도 재미도 스펙터클도, 관객에게 그곳을 걷고 직접 경험하게 하는 진경의 묘미를 살려 주지는 못했다. 뉴욕이 대중문화나 미술 등의 권력의 중심으로 작동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손동현의 이런 시각은 뉴욕을 더욱 강력한 문화의 주요 코드로 내세운다. 파괴는 강조의 장치 외에 별 다른 흥미를 불러오지 못한다. 대중매체의, 미술의, 경제의, 권력의, 문화의 ‘중심’이란 믿음은 괴수나 재앙에 의해 깨어지기보다는 이런 작품들이 반복하는 배경을 통해 더욱 끈질기게 재생산될 뿐이다.
가상 세계에 대한 자기 투사와 관찰자로서의 주체에 대한 존재의 재확인이 두 작가의 작업에서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두 작가 모두 미술의 고전적이고 보편적인 전통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견고함을 보여 준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미술의 본질적 물음을 품고 있는 작가들이 진정한 상상력에 빠지는 모습을 그려 본다.

환영에서 몰입으로

(왼쪽)<핵 PM-76> 캔버스에 유채 162×162cm 1969
(오른쪽)<핵 84-2> 캔버스에 유채 72.7×60.6cm 1984

환영에서 몰입으로

이승조는 1960년대 한국 화단에 기하학적 추상을 확립하고 이후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화면의 구조적 분석과 시각적 환영에 일관성있게 몰두했던 작가이다. 그러한 이승조의 작품 세계는 오늘날의 후배작가들에게 2차원 평면에서 시작된 ‘환영’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전시의 기획은 이것에 착안한 것이다. 시대에 따라 매체가 달라지고 테크놀로지가 발전하지만, 미술작업의 근본 시각과 표현의 관심은 동일할 수 있다. 미디어 아트의 기계적 현란함과 아날로그식 유화의 손자취가 유사한 개념을, 비슷한 시각구조를 나타낸다는 점은 때로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세대 간 소통이고, 매체 사이의 대화이다.

‘이승조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시 기획

두 차례에 걸쳐 열리는 전시는 I부-환영에서 몰입으로(From Illusion to Immersion)와 II부-검정으로의 회귀(Back to Black)로 구성되어 있다. 첫 전시에서는 1960년대 기하 추상의 도입과 확립의 주역에 선 이승조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현재 새롭게 발전된 뉴미디어로 전이 변형 심화하는 기획이다. 우선, 시대를 연결하고 미술의 맥을 연계하는 아이디어가 시기적절하다. 그리고 이승조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추상의 시각적 환영을 2010년의 오늘, 다양한 미디어로 확대해 보려는 의도는 충분히 개연성을 갖는다. 그만큼 이승조의 작업은 미래를 함유하고 있던 듯하다. 따라서 이번 전시 기획은 ‘백 투더 퓨쳐(Back to the Future)’라고 불러도 좋겠다.   
활용하는 도구와 재료가 다를지라도 핵심 미학이 같다는 점은 놀랍다. 2차원적 일루전이 현재의 3차원적 공간을 다루는 미디어 작업에서 어떻게 변형되는가를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승조 기하추상 회화의 2차원적 ‘환영’이 현재의 미디어 아트의 3차원적 매체 ‘몰입’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환영과 몰입이라는 지각의 매커니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제기된다. 첫 전시에는 이승조의 작품 10여 점과 6명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 10여점이 함께 전시되고, 두 번째 파트인 ‘검정으로의 회귀’에서는 이승조의 블랙페인팅 15점을 볼 수 있다. 그의 주요 색채이자 유일한 색이라 할 수 있는 검정의 무한한 확장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오늘날 발달된 테크놀로지로 인한 매체의 공간 확장을 직결시켜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전시의 기획에서 아날로그식 색채의 동요와 공간 구조는 디지털의 코드와 전파로 번역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기획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대부분 미디어아티스트들로서, 이승조 작업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자신의 작업으로 재해석한 신작들을 선보인다.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작가도 있지만, 대부분은 근본적 시각구조를 공감하고 이를 자신의 매체로 전이하고 발전시킨 작가들이다. 시대가 다른 작가와 유사한 조형적 고민을 갖으며 공동으로 전시를 갖는다는 세대간 연계의 목적뿐 아니라, 이승조 기하추상의 근본 미학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를 위해 이승조 회화의 미적 구조와 그 의미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승조의 회화는 순수 기하학적인 추상이지만, 파이프라는 구체적 대상을 재현한 것 같다는 점에는 이견(異見)이 없다. 한국 기하추상의 선구적 작가이면서 동시에 ‘파이프 화가’로 불릴 정도로 특정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이렇듯 이승조 작업이 갖는 추상과 구상 양자의 특징은 어느 한쪽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균형을 지닌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핵〉(核, nucleus) 연작의 수직, 수평의 규칙적인 패턴과, 정확하고 명료한 구조적 조형은 무한한 공간을 시각화한다. 이는 이일의 말대로 ‘매커닉한 입체감’ 내지 ‘입체공간’을 제시한다. 여기에 매끄러운 표면 처리와 광택이 나는 금속성 안료는 시각적인 착시를 가져오는데, 여기서 슬며시 실제 삶의 리얼리티로 넘어간다. 즉 공장에서 찍어내는 수많은 파이프라인의 구조물로 이뤄진 산업 건축물의 숲에서 현기증을 느끼며 경험하는 망각과 착시가 그의 회화에서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승조의 그림을 오래 쳐다볼 때 은근히 몰려오는 두려움은 아마도 이 망각이며 착시에 기인하는 듯하다.     
나를 잊어버리고 착시에 매몰돼 버릴 것 같은 무아(無我)와 소멸의 두려움인가. 아니면, 그림자보다 어둡고 공장의 폐유 같이 치명적인 검정의 흡입력에 의한 위축인가. 빨려들어 갈 것 같은 검정의 깊이와 눈의 혼동을 일으키는 공간의 동요가 관객을 엄습한다. 이것이 파이프 그림인가? 알 수가 없다. 작가 자신도 결정하지 않았다. 이승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파이프관’의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별로 원치도 않고 싫지도 않은 부름이다. 구체적인 대상의 모티프를 전제하지 않은 반복의 행위에서 오는 착시적인 물체성을 드러냄의 이름일 뿐이다.” 전혀 다른 그림이지만 우연히 말만 같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This is not a pipe)’라는 초현실주의자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이미지와 개념 사이를 오가는 불확정성을 이승조 회화에서도 목격한다. 차갑고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명암으로 금속성 물질의 둥근 파이프라인을 부분 확대한 듯한 그의 재현은 어느새 추상으로 전환되고, 다시 역전되면서 우리를 정확히 그 중간에 위치시킨다.

(왼쪽)<핵 77-18>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1977
(오른쪽)<핵 87-4> 캔버스에 유채 130.3×97cm 1987

이것은 파이프인가?

한국 미술에서 추상이 하나의 양식으로 내적 논리와 정체성을 가지고 등장한 것은 1950년대 말 형성된 앵포르멜 운동에서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앵포르멜 회화가 초기의 신선함을 잃고 형식화된다는 비판이 커지면서 다양한 모색이 나오게 되었다. 사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 화단의 경향은 ‘6.25세대’의 뜨겁고 열정적인 앵포르멜보다는 차갑고 이성적인 기하추상으로 전이된 것이다. 1963년 결성된 〈오리진〉 그룹은 그러한 기하학적 추상을 대표하며 국내 추상의 맥을 이어갔다. 이승조를 비롯하여 최명영 서승원 신기옥 김수익 등이 결성한 이 그룹은 ‘회화에서의 기본적인 조형 질서의 확립’을 목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일부 멤버들이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1969~72) 그룹에 참여했고, 해프닝, 개념미술, 오브제 작업 등을 소개한 〈무〉 동인과 〈신전〉 동인과 함께 앵포르멜 이후의 미학 정립에 앞장섰다. 이렇듯 〈오리진〉 그룹의 주요 동인은 이른바 ‘4.19세대’를 대표하는 20대 초반의 젊은 화가들이었다. 이들보다 앞 세대인 ‘6.25세대’가 앵포르멜식 추상 표현주의를 고양했다면 반대로 ‘4.19세대’는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반(反)표현주의적’ 미술을 지향했다고 평가된다. 이일은 이들의 ‘기하학주의’가 “가장 명확하고 단순한 조형 언어의 기본 어휘에로의 회귀”를 목표로 삼으면서 등장했다고 하면서 이를 미국의 현대미술과 연결시켜 이해하였다.1)
이 중, 이승조는 1960년대 후반 기하학적인 추상을 주도하고 이를 옵티컬 아트에 접목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는 1965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초기 앵포르멜 형식에서 벗어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부터 기하학적인 양식으로 전환하여 시각적인 착시의 느낌이 강한 〈핵〉 시리즈를 제작했다. 1968년 부산 동아대에서 주최한 국제미술전 대상을 시작으로, 같은 해 국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또 1971년 특선 수상까지 4회 연속 수상하였다. 1969년 4월 신문회관에서 열린 〈오리진〉전에는 이승조 최명영 박석원 등의 기하학적인 작품들이 다수 출품되었다. 이 전시에 대해 유근준은 앵포르멜에서 시작된 〈오리진〉 회원들의 미학이 기계미학으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전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2)
이승조가 정식으로 화단에 등장한 1968년, 박서보는 이승조만의 독특한 성향으로 ‘시각적 일루전 추구’와 매커닉한 요소로 인한 ‘비정한 시각적 문법’을 꼽았는데, 이는 당시의 다른 젊은 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던 특징이라고 서술했다.3) 이렇듯 ‘매카닉하고 비정한’ 이승조의 회화를 포함한 국내의 기하학적 추상은 앵포르멜의 뜨거움을 식히고 냉정하게 회화의 조형 원리로 집중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이후 응집된 미술운동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개별 작가들의 실험으로 분산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승조는 개인적으로 25년 동안의 작업 시기 동안 이러한 기하추상의 평면 구성과 옵티컬한 공간 구축을 지속적으로 심화시킨 집념의 미술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의 회화는 2차원과 3차원 사이를 동요하고, 매끄러운 표면 처리와 광택이 나는 금속성 안료로 시각적인 착시를 일으킨다. 그의 회화는 1960년대 후반 추구했던 회화의 근본 조형 원리를 결코 잃지 않으며 수직, 수평의 규칙적인 패턴과 정확하고 명료한 구조적 조형으로 무한한 공간을 시각화하였다.
그는 전 작업 기간 동안 고집스럽게도 〈핵〉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지식하게 ‘파이프통’이라는 특유의 모티프에 천착하면서 시각적 탐색을 지속하였다. 그를 ‘모더니스트’로 규명하기에 파이프의 모티프가 다양한 변주를 모색하며 기하학적 평면과 구축적 공간을 추구한 점을 강조해 왔다. 이승조의 파이프는 대부분 실제 오브제의 재현이라기보다 순수 조형의 요소로 보는 것이 비평의 일반적 양상이다. 예컨대, 이일은 파이프(筒)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모티프가 아니라 ‘독자적인 시각언어 체계의 한 단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고,4) 이승조의 추상이 초기의 착시적 입체 구성에서 일체의 대상성이 배제된 순수 조형의 세계로 귀착한다고 강조하였다. 김복영은 “그의 작품들이 마치 파이프통인 것처럼 물체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우연의 결과이며, 그 어떠한 대상이나 구체적인 모티프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라고 서술했다.5)  
그런데 아무리 순수추상이라고 해도, 이가 처했던 시대적 맥락을 간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분이 결여된 해석이라 봐야 한다. ‘시대의 리얼리즘을 어떻게 미적으로 시각화하는가’라는 화두로 우리는 추상작가에게 중요한 시각적 매커니즘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조 기하추상의 진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파이프 모티프를 회화 요소로 도입할 당시의 사회 상황과 화단의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파이프 모티프를 채택한 근거와 그러한 리얼리즘적 양상을 순수 조형적 요소와 연계시킬 수 있는 설명이 요구된다. 요컨대, 이승조의 기하추상의 면모는 양자를 분리시키기보다 이를 연계시킬 때, 훨씬 돋보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가의 스케치북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작업실

해석의 전환, 사회적인 연관성

이승조의 작업이 나올 당시의 사회적인 연관성을 고려하려는 시각은 그가 제시하는 옵아트 방식의 착시와 기계적 표면의 환영이 순수한 시각추상일 뿐 아니라, 당시 1960년대의 산업화와 기계문물의 상징 및 그 반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처한 시대적 리얼리즘을 반영하는 내용적 측면에서도 접근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그의 작업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러한 해석의 예로, ‘산업화의 명암과 한국미술’이라는 큰 화두로 이 시대의 미술을 접근한 김미정은 이승조의 기하추상을 도시화와 기계화의 스펙터클과 연결시켜 설명했다.6) 그는 이승조의 〈핵〉 시리즈를 ‘산업 기계화 시대의 추상 풍경’으로 이해하는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승조의 소위 ‘메탈릭 비전(Metallic Vision)’은 1960년대 후반 산업화의 리얼리즘과 당시 국내 화단이 처했던 미술의 자체적 흐름이 만나 이뤄낸 창의적 시각이며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술 자체적으로는, 이미 언급했듯, 앵포르멜 이후 4.19세대의 기하추상의 미적 필요성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1960년대 후반 제3공화국의 산업화 양상과 공보사진 전시이다. 여기서, 장관을 이루는 산업사진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각종 홍보물뿐 아니라 특히 국전 사진부에서 선호된 주제였다는 점이다.     
김미정은 1960년대 후반의 작업에서 기하학적 추상과 미니멀 형태의 조각이 출현한 것을 당시 사회의 급속한 변모와 연관시킨다. 특히, 매끈한 표면의 알루미늄, 플라스틱, 유리와 같은 재료의 사용이 가능하였던 것은 당시 공업화의 진전과 그 물적 관계에서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1960년대 후반 한국 기하학 추상을 ‘산업화 시대 기계미학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승조는 〈핵 G-70〉을 출품하면서 “기계시대의 시각적 반영으로 절실한 조형 감각을 새 세대의 조형 발언으로서 신선함을 주고자 한다”고 자신의 목적을 밝힌 적이 있다. 이승조의 파이프 그림의 모티프에 대한 정확한 규명을 찾기 힘들지만, 공업 배관을 연상시키는 파이프의 재현성은 그의 작업에 핵심적 부분임에 틀림없다. 1960년대 산업화와 리얼리즘적 맥락을 어떻게 추상화했는가는 그의 기하추상이 가진 시의성을 환기시킬 뿐 아니라, 그 미적 조형성이 가진 시각적 가치를 더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승조는 추상작가로서 자신의 시대를 충실하게 화면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오늘날의 작가들과 이승조의 기하추상

이번 〈기하학적 환영: 이승조에 경의를 표하며〉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승조의  근본적 시각 구조를 공감하고 이를 자신의 매체로 전이하고 발전시킨 작가들이다. 김병호의 말대로,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작가와의 유사한 조형적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은 이들의 참여에 중요한 동기 부여이다. 뮌이 이 전시 기획의 연결점을 찾은 부분은 철학적이고 성찰적인 내면을 추상적인 언어로 시각화한 이승조와 같이 작가의 주관적 개념을 추상화한다는 것이었다. 김승호는 이번 전시를 위한 구상을 하면서 이승조의 작업을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을 때 멍해지면서” 무언가 떠오르게 만드는 느낌에서 발상을 찾았다고 했다. 또한 한승구는 이승조의 회화에서 무한히 화면 밖으로 확장하는 회화의 리듬감을 포착하였다. 여기, 참여 작가들의 작업 컨셉트를 간단히 스케치해 본다.   
미디어 설치미술가 김병호는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경우인데, 순수한 도형들을 조합하여 입체작업을 하고 여기에 미디어가 복합된다. 이승조의 회화를 공간적으로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기하학적 조형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했는데, 이승조가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재해석한 것과 그의 시각적 명료성을 가진 조형성에 주목했으며, 자신의 작업에서는 비물질적 대상(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을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겪었다. 추상적인 대상을 구조적으로 가시화시키면서 명쾌한 구조와 기하학적인 시각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보인다.
뮌(Mioon: 김민 + 최문)의 경우, 이승조 작업과 유사한 기하학적 도형을 기반으로 한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으로 참여한다. 시각적 환영을 다루는 작업을 주로 해 왔던 이들은 13개의 검은 구슬의 움직임을 다룬 비디오 작업을 선보인다. 13개의 구슬이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구슬과 부딪히며 그 움직임을 전이하는 역동을 전달하는데 “구슬들이 튕겨가는 움직임을 통해 기하학적 운동감과 힘의 이동을 유추”하는 컨셉트로 이승조의 작업을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프로그래밍을 활용하는 미디어 작가 김성훈은 ‘빨대’로 원형의 이미지와 일루전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여 이승조의 ‘파이프’와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원형 구조물을 활용한 점과, 추상적이면서 반복적 패턴의 사용에서 유사하다. “스틸이미지 같지만 무수한 픽셀들의 작은 움직임이 모여 전체 패턴을 구성하며 스틸이미지라고 생각했던 이미지가 어느 순간 바뀌어 있게 된다.” 이러한 픽셀들의 움직임은 이승조의 옵아트적 성격과 통하는 면이다.
태싯그룹(Tacit Group:장재호, 이진원)의 작업은 기계적인 사운드를 배경으로 하며, 사운드를 이미지로 옮겨 놓은 듯한 도형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음악적이면서도 미니멀한 작품들을 제시한다. 옵 아트(Op Art)에서 온 ‘옵 사운드(Op Sound)’를 전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착시를 청각적으로 풀어낸다는 의도이다. 기본 모티프가 되는 소리가 16개의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데, 각 스피커마다 속도와 리듬이 조금씩 차이가 나서, 곡의 진행에 따라 복합 박자의 사운드를 만든다. 그 청각적 구조가 기하학 이미지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한승구는 파이프 모양의 조각과 4원소 그리고 소리를 이용한 작업을 계획했는데, 형태상으로 봤을 때 유사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소리는 파이프 면을 타고 흐르는 물을 만짐으로써 생성되며,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으로 구성된 그의 작업은 이승조의 전통 회화를 공감각적으로 새롭게 확장시킨다고 하겠다.
끝으로, 영화감독이자 무대미술가, 미디어아티스트인 김태은은 기계적인 구조에서 기하학적 추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면에서 이승조의 작업과 연결성이 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그린 이미지를 압축시켜 그 근원적 기하학적 도형들을 기계적으로 전환시키는데 관심을 가진다. 작업은 2차원의 이미지 위에 시간성을 부여하고 이를 기록하는 행위를 보이는데, 그의 말대로 “원본 텍스트(회화)를 재매개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 그리기’가 회화의 기본적 행위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하기’는 영상의 특징이기에, 회화와 영상의 메타포를 나타내고자 한다.
자신을 “테크놀로지 아트를 꿈꾸지 않는 미디어 작가”로 규명한 한승구처럼,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은 기술과 전통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양자를 활용하기도 하면서 그 접점을 모색한다. “전통적이고 아날로스적인 뜨거운 감성을 디지털의 화려함과 조화시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은 분명 진성성이 있다. 아날로그(과거)와 현재(디지털)를 연결시켜 이 중요한 화두를 공론의 장에 내놓은 본 전시의 기획은 오늘날의 미디어 작가들에게 좋은 도전적 기회라 생각된다. ‘아날로그’를 구현하는 훌륭한 ‘디지털(뉴미디어)’작가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하여 40여년 전 이승조가 과감히 시도했던 기하추상을 첨단의 기술로 확장하고 심화시키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이승조의 회화에 대한 경의를 제대로 표하는 길일 것이다.

“예술의 힘은 사회정치적 이슈를 던지는 것”

(왼쪽)샤프하우젠이 디렉터를 맡고 있는 로테르담 비트드비드 외관
(오른쪽)2008년 리암 길릭의 개인전 전경

“예술의 힘은 사회정치적 이슈를 던지는 것”

이번이 열 번째 한국 방문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니콜라우스 샤프하우젠은 한국에 꽤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나 현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오가며 활동하는 그는 오는 9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제8회 미디어시티서울(9. 8~10. 17)에 클라라 킴(미국), 후미히코 수미토모(일본)와 함께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다. 전시 총감독인 김선정과는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 특별전 때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예술은 원하지 않는다”

2007년과 2009년 연속으로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커미셔너를 맡았던 샤프하우젠은 국가의 ‘대표 선수’들을 보여주는 그룹전이 아닌 한 작가의 개인전을 고집했다. “젊고 떠오르는 작가를 단순히 ‘소개’만 하는 전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작품 세계가 분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죠.” 복잡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인간 존재의 유약함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기념비적 설치작품을 만드는 조각가 이자 켄즈켄(2007)과 가설적인 사회 모델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리암 길릭(2009)이 바로 그가 선택한 작가다. 그는 지역이나 국가라는 물리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영국 작가 리암 길릭을 독일관에 단독으로 내세운 것도 이 같은 그의 유연한 사고가 관철되어 있다. “베니스의 국가관 전시 성격이 꼭 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역이나 국가 같은 경계에 얽매여서 전시를 만드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행히 예전부터  독일관 자체가 국가라는 틀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에 한국의 백남준이 전시했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예요. 저와 같은 세대의 유럽인은 각각의 국가 개념보다는 하나의 통합된 유럽으로 널리 이해하죠.”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한국과 독일은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면서 분단국가라는 아픔을 겪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친숙하게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한국은 제가 다녀 본 아시아 국가 중에 가장 글로벌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지적이면서도 때론 매우 감성적인 부분이 독일의 현대미술과 많이 닮아 있기도 하고요. 한국의 미술 교육 시스템도 그렇고, 많은 작가들이 해외 유학을 경험했기 때문에 국제적인 감각과 분위기를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07년 에르메스코리아미술상의 심사를 맡은 바 있는 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한국 미술계의 현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그는 1991년 마르쿠스 슈나이더와 함께 베를린에 루카스앤호프만갤러리를 열어 큐레이터로 데뷔했다. “처음 갤러리를 오픈하고 전시를 기획했을 때만해도 지금처럼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어요. 주변의 친한 작가들과 ‘좋은 쇼를 보여주자’고 시작한 것이죠.”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에 참여한 올라퍼 엘리아슨, 카스텐 횔러, 카이 알트호프와 같은 작가들은 현재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후 슈투트가르트미술관, 프랑크푸르트미술센터, 쾰른 유러피안미술관 등 독일 유수의 예술기관의 디렉터를 역임하며 수많은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샤프하우젠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로테르담의 현대미술센터 비트드비드(Witte de With) 디렉터를 맡고 있다. 비트드비드는 유럽의 미술기관 중에서도 개방적이고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하다. 네덜란드 현지인이 디렉터를 역임한 적이 없고, 팀원들도 다양한 국가에서 온 글로벌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디렉터 재임 기간이 최대 6년으로 정해져 있어 2006년부터 비트드비드에 몸 담았던 샤프하우젠은 2011년에 임기를 마친다. 그는 현재 오프라인 전시뿐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비트드비드 웹사이트(www.wdw-morality.nl)에서 진행되는 웹 프로젝트 <Morality>가 바로 그것이다. 오프라인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 온라인상에서 예술과 윤리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만들어 낸다는 취지로, 일종의 온라인 토론장인 ‘웹 플랫폼’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윤리(Morality)’에 관한 질문에 대해 글 사진 동영상 등으로 다양한 피드백을 줄 수 있다. ‘윤리’에 관한 어떠한 해답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전 세계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입장과 해석을 모아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프로젝트다. 이는 올해 미디어시티서울의 주제 〈신뢰(Trust)〉와도 개념과 접근 방식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시티서울의 웹사이트(www.mediacityseoul.org) 역시 <Morality>를 프로그래밍한 디자이너 리차드 버그너(Richard Vigner)와 협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유사한 웹 플랫폼에서 출발하고 있다.

비트드비드와 서울미디어시티가 진행하는 웹 프로젝트

‘차가운’ 미디어를 다루는 뜨거운 열정의 큐레이터

2000년 출범 이후 10년을 맞이한 미디어시티서울은 지난 5회의 비엔날레를 정리하고 미디어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을 재고하는 시점으로 삼았다. 전시 주제인 〈신뢰〉는 끊임없는 매체의 발달로 현실과 허구의 간극이 무의미해진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타인에 대한 믿음과 의심의 여지를 모순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미디어시티서울을 같이 준비하고 있는 큐레이터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형식적인 측면보다, 전시의 주제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 스스로도 ‘미디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1990년대 이후 ‘미디어아트’는 가장 트렌디한 미술의 상징이었죠. 그러나 지난 10년간 미디어아트의 발전을 지켜 보면서 발견한 것은 미디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는 예술가를 위한 하나의 소재이자 도구일 뿐이죠. 이제 우리는 미디어에 대한 환상을 깨고 전혀 새로운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시기에 와 있습니다.”
샤프하우젠은 이번 미디어시티서울에 주디 라둘, 에릭 반 리스하우트, 더글라스 고든, 사라 모리스와 같이 미디어의 비주얼적인 측면보다도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면서 소통의 방식을 모색하는 작가들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예술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회적인 역할입니다.” ‘차가운’ 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샤프하우젠에게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큐레이터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 글·김현 기자, 사진·권현정 사진기자

2010 June Special - 한국 레지던시, 어디까지 왔나?

경기창작센터 <아카이브>전 전시 장면

한국 레지던시, 어디까지 왔나?

글|김윤환·서울문화재단 창작공간 추진단장한국 미술계에서 미술창작스튜디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작가 이강소가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연구소(The Institute for Comtem porary Art)가 주관하는 P.S.1 국제 레지던시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부터다. P.S.1은 세계 각국의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의 현대 미술가들에게 1년 동안 창작 공간과 전시 공간을 제공하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작가는 1년간 현지 보고전 형식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당시로선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1) 작고한 박이소도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P.S.1의 레지던시에 참여한 바 있다.당시에는 소수의 한국 작가들만이 개인적으로 국제 무대 진출의 교두보로서 해외 레지던시에 대해 관심을 두었을 뿐 국내에 유사한 기관의 설립은 1990년대 후반에서야 등장하게 된다.  
통상 창작스튜디오로 불리는 예술가 거주 프로그램인 레지던시(Artists in Residence)2)는 한국의 경우 1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자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매우 빠르게 활성화되면서 미술계의 주요한 기관으로 정착되고 있다. 레지던시는 작가 등단 시스템의 주요한 제도인 동시에 국내외 작가들을 위한 국제 교류의 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 단체들이 레지던시 설립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새로운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지자체의 레지던시 설립은 공공 자금을 활용하는 특성을 살려 단순히 예술가 지원에 그치지 않고, 시민에게 문화예술을 환류하는 내용이 새롭게 추가되고 있다. 이는 예술가들에 대한 레지던시와 창작 활동의 지원을 통해 도시의 활성화를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풀이된다.
이 글은 우리나라 레지던시의 역사를 운영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작가 등단 시스템의 변화를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레지던시의 변화 추이와 향후 전망 속에서 그것을 둘러싼 쟁점과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천아트플랫폼 개관 기획전 <다시 개항> 장면

폐교 활용에서 도심 유휴 공간 활용으로

한국에서 정부 차원의 창작스튜디오 추진은 공간의 활용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폐교가 늘어나자 방치된 폐교의 활용이 정부 정책 차원에서 주요한 의제로 등장한 것이다. 1995년 일부 예술가들이 충북 청원군 소재 회서분교를 임대하여 ‘청원마동창작마을’을 조성하자, 그때부터 폐교를 예술 창작 공간으로 전환 및 지원하는 사례가 하나둘 생겨났다. 1997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충남 논산과 인천 강화 2곳에 폐교를 활용한 미술 창작실을 조성했다. 이는 ‘예술 창작 공간 확충사업’의 일환으로 미술창작스튜디오 조성을 추진한 것인데, 2004년까지 전국 폐교 총29곳을 창작 공간으로 조성하게 된다.3)  
이 같은 예술가 지원 정책이 추진된 배경은 창작실 임대에 대한 예술가들의 경제 부담과 정부 차원의 폐교 활용의 필요성이 서로 만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폐교 재산의 활용 촉진을 위한 특별법’(1999. 8. 31 제정)에 근거하여 폐교의 매각, 대부를 도와 창작스튜디오 및 기타 문화시설을 활용하도록 추진했다.
이 특별법에 의거하여 전국적으로 폐교를 활용한 창작 공간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1998년 김해 1곳, 1999년 달성 양평 평창 단양 무주 구미 성주에 7곳, 2000년 강릉 청원 진안 김제 김천 5곳, 2001년 광주북구 안성 제천 담양 상주 남해 6곳, 2002년 함평 해남 산청 정선 4곳, 2003년 장수 합천 2곳, 2004년 동해 정읍 진해 거창 4곳이 조성되었다. 폐교를 활용한 창작 공간들은 정부 지원금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후의 운영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4)
첫째, 예술가들의 경제적 생활권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자체 재원 확보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둘째, 폐교의 시설이 노후되어 관리 및 보수 비용이 상당수 발생했다. 셋째, 예산 부족으로 프로그램과 전문 관리 인력이 미비했다. 그 밖에도 관련 법령 개정 및 재원 확보 등의 문제로 현재 폐교 창작공간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거나 심지어 폐쇄된 곳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입주 작가들의 지혜와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농촌의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뿌리 내린 곳도 있다. 이 공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창작 공간이라는 기존의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농촌에 어울리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새로운 성격을 부가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은 중앙 정부뿐 아니라 다양한 공공기관들이 창작스튜디오 조성에 나선 시기이다. 정부의 미술 창작스튜디오 조성 사업은 크게 ‘예술 창작 공간 확충 사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정부에서는 직접적으로 작가를 지원하는 방식보다는 미술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간접적인 지원 방식으로 정책의 기본 개념을 바꾸고 있다. 특히 작가에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거나 혹은 지역 문화를 특화하는 미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효과적인 문화 사업이라고 여긴다.
공공기관에서 앞 다투어 창작스튜디오 설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97년 광주시립미술관은 광주비엔날레 장소였던 중외공원 내 팔각정을 창작스튜디오로 조성했고, 2004년에는 양산동에 있는 근로자 아파트 일부를 재활용한 미술창작스튜디오를 추가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은 2002년에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2004년에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를 건립했다.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난지창작스튜디오, 서울시설관리공단의 청계창작스튜디오와 서울장애인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시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등이 문을 열었다. 이 창작스튜디오들은 신축한 건물도 있지만 리노베이션을 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국내에서 앞서 경험했던 폐교 활용 사례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유휴 산업 시설을 재활용하는 프로젝트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는 폐교를 활용해 창작스튜디오를 조성하는 흐름이 점차 줄어들고, 국제적 흐름에 따라 도시의 공공 유휴 시설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유형의 창작스튜디오가 ‘창작 공간’5)이라는 다소 포괄적인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서울시의 금천예술공장(2009), 신당창작아케이드(2009), 연희문학창작촌(2009), 서교예술실험센터(2009), 문래예술공장(2010), 인천의 인천아트플랫폼(2009), 경기도의 경기창작센터(2009) 등이다. 소위‘작업실 2.0버전’이라 불리는 이 공간들은 시설을 조성하는 과정에서부터 건축가, 기획자, 작가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참여시킨다. 모집 분야도 미술뿐 아니라 여러 예술 장르를 포괄하고, 지역 특성에 기반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공간들은 레지던시의 고유한 기능 외에도 ‘도시 재생’ 혹은 ‘도시 활성화’라는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 옛 도심의 재개발 사업의 일부로서, 문화예술이 지역을 재생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서울시는 작년부터 일련의 창작공간들을 설립해 보다 다양한 전략으로 레지던시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가장 먼저 개관한 금천예술공장은 국제 레지던시와 지역 산업과의 연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문래예술공장은 이미 자생적으로 생겨난 창작촌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쇠락한 산업 지역을 재생시키는 개념, 신당시장 지하상가에 조성된 신당창작아케이드는 공예를 중심으로 재래시장을 활성화하는 목적에서 출발한다. 그 밖에 서교예술실험센터는 홍대 문화를, 연희문학창작촌은 문학 장르를 특화시키고 있다.
미술에만 집중되어 있는 기존 레지던시에 비해, 지자체 주도의 창작 공간들은 ‘도시 재생’의 과제를 결부시킨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일각에서는 창작 공간에 시민을 위한 문화 향유의 공간, 혹은 도시 활성화의 거점 역할까지 맡기는 것은 예술가에게 너무 무리한 책임을 가중시키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또 시공간적으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가에게 시민 연계 프로그램 등을 기대하다 보면, 과연 정상적인 창작이 가능하겠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와 함께 정부에서는 2000년대 후반에 들면서 프로젝트형 창작 공간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광주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2008), 서울 수유시장 프로젝트(2009), 대구 방천시장의 문전성시 프로젝트(2009) 등은 정부 기관에서 프로젝트 공모를 하면, 민간 기구가 해당 지역과 연계해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매개공간미나리가 운영하는 대인예술시장프로젝트는 광주비엔날레와 연계하여 작가를 지원하고 동시에 재래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문화체육부가 추진하는 수유시장과 방천시장의 문전성시프로젝트 등은 작가 지원 개념보다는 시장 활성화 사업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

금천예술공장 1주 입주 작가 박능생의 작업실과 휴게실

쌈지에서 비영리 기관 레지던시까지

1990년대 말, 정부에서 농촌을 주목하고 있을 때 민간 영역에서는 도시 혹은 근교에 창작 레지던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동시대 미술이 ‘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1998년 (주)쌈지의 쌈지스튜디오, 2000년 대유문화재단의 영은미술창작스튜디오가 있다. 가나아트가 운영하는 평창동 스튜디오와 양주시 장흥 조각아카데미와 아틀리에,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금호창작스튜디오도 뒤이어 개관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대안공간이 미술계의 새로운 ‘힘’으로 떠올랐다. 1999년 대안공간루프과 대안공간풀을 시작으로 서울의 인사미술공간과 사루비아다방, 부산의 대안공간반디 등이 잇달아 개관하면서 ‘대안공간의 시대’를 열었다. 뒤이어 브레인팩토리 아트스페이스휴 갤러리정미소 등 많은 대안공간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흥미로운 점은 대안공간과 레지던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모양새를 갖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레지던시에서 신진작가를 발굴하면 그 작가는 곧바로 대안공간에서 전시를 열었고, 반대로 대안공간에서 전시했던 작가들 중 상당수가 레지던시 입주로 이어졌다.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레지던시 혹은 대안공간에서 발탁된 신진 작가들은 비엔날레나 국제 미술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레지던시와 대안공간을 거쳐 간 많은 작가들이 현재 한국 미술계의 ‘중추’로 성장한 셈이다.
최근에는 미술시장을 겨냥한 창작 공간들도 생겨났다. 가나아트갤러리나 아라리오갤러리 같은 상업 화랑에서는 경쟁력 있는 중진 작가들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또한 달링스튜디오 같은 경우는 젊은 작가 집단이 공동 스튜디오를 마련해 함께 작업을 하면서, 틈새 미술시장을 겨냥해 미니 옥션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비영리 공간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젝트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스톤앤워터에서 석수아트프로젝트 일환으로 운영하는 예술가레지던스인안양, 인천 스페이스빔의 국제레지던시 프로그램, 부산의 오픈스페이스배와 아트팩토리인다대포가 운영하는 레지던시, 서울 문래동의 프로젝트스페이스 LAB39가 운영하는 국제 레지던시 등이다. 이들은 공공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물론 이러한 프로젝트성 레지던시에서는 프로그램 면에서 좀 더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나 최근 민간 레지던시들이 보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상징적 징후로는 10년 동안 운영해 오던 쌈지스튜디오가 문 닫게 된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각에서는 메세나 기업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주된 이유는 최근 정부 주도의 창작 공간에 비해 민간 영역의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고 있는 현상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시창작아케이드 전경

새로운 작가 등단 시스템으로 발전

레지던시와 대안공간 출신 작가들의 약진으로 인해 이제 레지던시는 새로운 ‘작가 등단 시스템’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신진 작가에게 인기를 누렸던 각종 공모전은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1차 포트폴리오 심사, 2차 프레젠테이션 및 인터뷰 심사 등으로 진행되는 레지던시의 심사 방식은 공모전보다 다면적이라는 점에서 평가에 대한 신뢰성도 높다. 이 과정을 통해 선정된 작가들은 기대주로서 인정받는 효과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언젠가부터 해외 예술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레지던시를 방문하는 것이 필수코스처럼 되면서 입주 작가들은 앉은 자리에서 이름난 큐레이터나 세계 유수의 미술관장까지 만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탁되어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사례들도 빈번해졌다. 이처럼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전도유망한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여 국내외 미술 무대에 소개했고 국제 교류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레지던시 경력이 공모전 수상 경력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레지던시가 상설 지원 기관으로 정착되면서 작가들은 안정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레지던시가 사회와 만나는 ‘창구’ 역할로 확대되면서 개인이 운영하는 창작 공간(작업실, 아틀리에)의 성격도 변화하게 되었다. 작가만을 위한 전통적 의미의 작업실 개념에서 점차 사회와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개인 작업실들이 연합하여 오픈스튜디오 등의 행사를 개최하는 데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레지던시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문제점도 복잡다단하게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존재 가치의 하락과 중복 투자로 인한 예산 낭비에 대한 지적이 많다. 물론 레지던시 간, 혹은 미술대학과의 차별화도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로6) 남아 있다. 또한 창작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공모를 통과하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절대 다수의 젊은 작가들에게 레지던시는 아직도 요원한 공간임에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서 대부분의 레지던시에서는 작가에게 ‘거주’와 ‘창작’을 조건으로 삼는 데 반해, 실제로는 잠시 머물면서 교류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에서 운영되는 레지던시의 기간은 보통 1개월에서 1년까지다. 안정적으로 거주하면서 창작하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따라서 여러 레지던시를 ‘순회’하는 작가도 있고, 또는 개인 작업실을 별도로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엉뚱한’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레지던시 정책만으로는 작가 지원이 미흡하다는 지적과 함께, 사회보장제도 차원에서 예술가를 위한 새로운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사회적 노동 혹은 사회적 가치를 발휘하는 활동으로 바라보고, 이러한 관점에서 창작권을 인정하면서 보다 안정적인 지원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프랑스의 ‘예술가의 집’사례7)처럼 정부가 나서서 작업실을 영구 임대해 주는 정책을 참고할 수도 있겠다. 여론에서는 아예 정부에서 집단 창작촌을 조성하는 방안, 대형 아파트 내에 작업실을 별도로 설계해 임대하는 방안8), 또한 작가들이 스스로 조성한 스튜디오의 임대료 일부를 보조하거나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등의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요구하고 있다. 기타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단지 거주 기간을 길게 확보하는 것만이 현재 한국의 레지던시가 가진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9)

레지던시에 대한 시선들

최근 몇 년간 창작 공간 사업과 더불어 정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한 분야는 ‘공공미술’ 혹은 ‘커뮤니티 아트’였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매우 미흡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프로젝트팀이 지역에 잠깐 들어가서 ‘치고 빠지기 식’으로 작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미술의 주된 취지가 후기자본주의 아래 병들어 버린 사회를 치유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전제한다면 그에 합당한 작업 방식이 요구된다. 역시 이때 필요한 것은 진정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지역과 구체적으로 관계 맺기를 시작할 수 있는 ‘거점형’ 창작 공간이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자율적인 실천 행위가 공공미술의 진정한 내용이 될 것이며, 미술관 밖의 새로운 미술 행위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과거 10여 년 동안 민간 영역에서는 양질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레지던시를 새로운 신진작가 등용문으로 정착시켰다. 레지던시는 유망 작가들을 조기에 발굴하여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국제 미술계에 소개함으로써 한국미술의 세계 진출에 공헌했다. 한편 정부는 1990년대 말 폐교 활용 정책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국공립 레지던시를 조성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주요 지자체가 대대적으로 창작 공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 등의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이 기존 레지던시의 성격을 다변화시키고 있다. 창작 공간의 다양화는 미술 제도의 시스템뿐만 아니라 미술 작품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공공 기관의 레지던시 사업은 예술가의 창작 공간 지원을 포함해 시민의 문화 향유와 도시 재생까지 망라하는 종합적인 정책을 담고 있다. 공적 자금으로 벌이는 사업인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예술계 내부에서는 예술을 도구화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다. 이 같은 비판에 대해 공공 기관 입장에서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여한 데 대해 예술가의 사회적 기여를 요구할 수도 있다. 둘 사이의 간극은 앞으로 한국 레지던시의 전개에서 중요한 쟁점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공공 기관이 대규모 자금과 행정 조직을 투여하는 통에 예술계 전반의 자율적인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더욱이 그동안 민간 영역이 땀 흘려 이루어 놓은 성과들이 공공 영역으로 흡수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생기는 것 같다. 공공 기관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중요하고 민간 영역의 노하우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의 ‘라 프리쉬’나 일본의 ‘뱅크아트1929’처럼 정부와 민간이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했던 사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정부와 지자체는 정책과 예산을 지원하고, 창작 공간은 민간 기구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된다면 앞서 제기한 여러 문제들을 조금은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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