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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0.03

Abstract

특집_Publishing Art 최근 미술가들이 제작한 출판물이 '오리지널의 복제' 개념을 넘어 또 하나의 예술로 진화하고 있다. 출판물 그 자체가 곧 작품이 되어 동시대 미술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표현 매체이자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다. 미술가들이 직접 출판 메커니즘에 뛰어들어 제작한 찌라시에서부터 포스터 드로잉북 아티스트북 독립잡지 등 개성 넘치는 출판물의 사례와 그 주변에 자생적으로 설립한 소규모 출판사,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등을 소개한다.

Contents

표지  이강우 〈재현의 재현 Chain of Representation〉 디지털 C-프린트 100×120cm 2009

영문초록
에디토리얼_김복기  
핫피플  볼프강 욥_장승연

프리즘 
    인도, 오리엔탈리즘 넘어 거룩한 땅_김용익
    미디어 운동의 허브 ‘미디액트’를 지키자_김연호

포커스
    최기석展|이형展_유진상
    박준범展|오용석展_정현
    임상빈展|표면문화를 넘어서展_이선영

작가연구  이강우
    정치적 풍경에서 시뮬라크르의 재현으로_최광진

특집  Publishing Art
    1)INDEX 출판물 아트 80  편집부
    2)INTERVIEW & PICTORIAL
    스펙터 프레스|미디어 버스|snow man|책 속의 미술관
    가슴시각개발연구소|roundabout|쎄 프로젝트|workroom
    Post Poetics|모임 별|BAAN_호경윤, 김수영
    3)REPORT 미술, 출판으로 ‘그리다’ _호경윤

해외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삶과 죽음, 그 ‘슬픈 사랑’의 아카이브_김승덕

나의 얼굴  정정엽

크리티컬 포인트
    미술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_김장언

리포트 타이완 미술의 현장을 가다 
    타이완Boom! 아시아의 중심을 노리다_박만우
    타이완 현장 리포트! 하오 하오_김현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노순천|노준구|안남영|이재하

온사이트
    고비사막: 모래로 빚은 사막의 예술_최태만

전시리뷰
    죄악의 시대|유정다방|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정정주
    김주현|고승욱|김병주|김창겸|정경연|오원영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실재와 허구의 교차, 미디어 브리콜라주

오용석 <소연소희>(Duet) 싱글채널비디오 2010

실재와 허구의 교차, 미디어 브리콜라주

글|정 현

미디어 기술의 진화는 끝이 없어 보인다. 영화 <아바타>의 대중적 성공과 함께 3D 기술의 상용화가 논의되고, 스마트폰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 없이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다양한 정보가 넘쳐난다. 현대인은 가까운 지인은 물론 유명인, 특정 기관과 기업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를 통한 다양한 소통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감각적인 삶과 미디어적 삶 사이에서 길을 잃고 떠돌이가 될 수도 있다. 미디어아트의 기술적인 발전과 환각적인 이미지의 세계와의 관계 또한 이런 마술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3D 기술을 접목한 사물놀이 공연의 성공적인 평가와 함께 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은 더욱 넓은 분야로 확장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도한 시각 효과의 의존이 과연 작가는 물론 관객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경험하는 기회를 축소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미디어 기술에 감성을 덧붙이는 일,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역할임을 잘 알고 있지만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의 동거가 그리 쉽게 이뤄지지는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과학적 시각효과만이 뇌리에 남아 버리는 경우가 잦다.
폴 비릴리오는 “현실이나 상징적으로도 건축-조각 시대는 이미 지나고 영화가 건축을 대신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의 발전과 인공적인 빛의 시대는 곧 동일한 시대의 흐름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 미디어는 환영의 재현이 아닌 실재를 이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세대 작가는 이 도시의 빛을 먹고 자란 세대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디어는 기술이나 과학 이전에 생활의 도구며 장난감에 가깝지 않을까? 박준범과 오용석의 미디어 작업은 수공의 흔적이 담겨 있다. 박준범은 오리기 붙이기 쌓기 접기 등과 같은 공작으로 이뤄지는 브리콜라주(Bri colage)의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하는데 그에게 미디어는 초현실적 세계를 구현하는 눈속임 도구처럼 보인다. 한편 오용석의 미디어는 실재에서 상상으로, 또는 상상에서 실재를 왕복하게끔 도와주는 무한의 패치워크 공간으로 회화 매체의 한계를 넘기 위한 대안적 공간에 가깝다.

오용석 <Classic No.1978> 싱글채널비디오 2009

블록 쌓기

토탈미술관의 작은 공간 더룸(The room)의 전시 <붕괴>는 3개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일종의 예고 전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박준범은 초기작부터 미디어 작가로 주목받았지만, 사실 그의 작업에서 미디어의 기술 매체로서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못한 편이다. 매체와 장르의 구속에서 벗어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작업이 이뤄지는 현상이 현대미술의 흐름을 대변한다면, 박준범이 사용하는 미디어는 기록적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보인다. <선물>(2010)의 경우, 작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물 50개를 선정, 마치 상품 카탈로그를 찍듯 하나씩 구매 시기와 모델명(간혹 자신이 명명한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을 제목으로 한 의인화된 사물을 짧은 동영상으로 녹화한 DVD 50개가 소개된다. 이 DVD는 미술관의 카페 입구에 진열되어 관객이 직접 플레이어에 삽입하여 버튼을 눌러 감상하도록 구성해 놓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박준범이 원하는 것은 ‘손의 역할’이다. 잠시 그의 초기작 <주차>(2001~2002)을 살펴보자. 마치 미니어처 자동차를 손으로 갖고 놀 듯 실제로 주차하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거대한 손의 개입은 박준범 작업의 중심이었다. 그에게 실재는 미니어처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반대로 미니어처는 실재의 반영에만 머물지 않고 소유할 수 있는 실재의 환영으로 등장한다. <아파트 만들기>(2005)에서도 거대한 창조자의 손은 상하이의 한 아파트 사진 위에 동일한 모델의 아파트 건물을 미니어처로 증축한다. 일련의 작업은 공작의 즐거움과 반대로 토대가 불안정한 동아시아의 현재를 풍자하고 있다. 이런 전지자적 시선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이후 기계적인 논리의 도시 풍경을 포착한 구성주의 미학의 사진과 매우 유사한 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진가로서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의 부감법을 이용한 시점은 소비에트 사회의 획일화된 도시의 기계적 풍경, 건물과 민중의 모습은 그래픽 모티프의 일부이자 세상을 구성하는 구조물과 다르지 않다.
박준범의 작업 속 세상은 이 사회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권력자의 시점으로 다루고 있다. 작업 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세상은 아파트 주차장 간판 등과 같이 토건국가의 현실이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동일한 맥락으로 <메시지>(2010)는 용기 안의 메주콩이 부패하면서 발생하는 물리적 에너지에 의해 서서히 십자가가 그 속에서 융기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초자연적 현상이 종교적 신비로 둔갑하는 사회를 풍자한다. 블록 쌓기와 같은 작업의 과정은 놀이로 포장된 제도의 불합리이며 미디어는 이런 현상을 과장시킨다.

박준범 <Toyota TUNDRA high-lift> 싱글채널 HD 1분 2010

오려 붙이기

오용석의 작업은 영화의 일부, 자신의 옛날 사진 한 장,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의 사진 한 컷 등에서 출발한다. 갤러리현대의 창고였던 주택을 개조해 새로 문을 연 16번지의 개관전 <클래식>은 사진 영화 설치가 혼재하고 작가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 히치콕과 오드리 햅번, 에곤 쉴레가 공존한다. 매체나 기법의 연관성이 없었다면 다소 혼란스러운 구성이지만, 한편으론 작가의 자의식과 역량을 드러내는 기회였음이 분명할 듯하다. <Classic No. 1978> (2009)은 작가의 세 살적 사진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경우, 기억에서 사라진 시절의 증거물인 사진은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에 대한 경험일 것이다. 작가는 사진을 바탕으로 사라진 기억을 재조합한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를 재현하는 방식에 있는데, 눈속임을 위한 하나의 이미지로 불확실한 어떤 시공간을 구현하는 대신, 분절된 여러 화면을 끼워 맞추는 방법으로 이미지가 완성된다. 단초가 되었던 사진의 진실성과 주변의 허구성은 이미지와 리얼리티 사이를 교란시킨다.
오용석의 모든 작업은 이미지와 기억, 한 조각의 원본과 그와 유사한 다른 이미지를 디지털 화면 위에 오려 붙이는 일종의 패치워크 틀 안에서 완성된다. <기억> 시리즈는 과거를 재현하는데 주목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나는 오히려 회화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에 관심이 간다. 모든 화가의 욕망이 평면성과 재현성을 뛰어 넘는 것이라면, 오용석은 한 화면에 고정된 이미지와 움직임을 함께 끼워 놓으면서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오용석의 ‘사진’과 ‘기억’은 이미지에 관한 보편적 정서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 같다. 오려 붙이기와 같은 브리콜라주의 감성이 디지털의 차가움을 흐리게 해주기도 하고, 문화적 관점으로 보면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경험이 함께 뒤섞인 상태로 배치되기도 한다. <러브레터>(2008) 같은 편집 영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오드리 햅번이 <문 리버>를 창가에서 부르는 장면 사이에 작가가 종이 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장면을 삽입한 설치 작업이다. 교차 편집으로 완성된 <러브레터>는 영화 미학의 기본인 컷과 컷 사이의 연접성이 내러티브를 이끌어 내는 영화 어법을 유희적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이는 영화라는 공유지를 해체하여 이야기 구조에 침범하는 작가의 판타지에서 출발하는 듯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영화라는 공유지에 개인적 주석을 ‘오려 붙이는’ 일종의 사유지가 침범한다.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미국의 화가 데이비드 리드(DavidRe ed)의 <주디의 방>은 회화 설치 영상에 걸쳐 여러 버전으로 제작되었는데, 히치콕의 영화 <버티고>에서 가장 극적이 장면인 주디가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신의 한 장면을 발췌한 뒤 그의 침대 머리맡에 자신의 그림을 집어 넣어 공적 공간인 영화의 한 부분에 사적 공간을 개입시킨다. 리드는 이 장면을 전시 장소에 실현하면서 다양한 매체가 서로 섞이는 조합을 의도했다. 아서 단토는 리드를 동시대미술의 표본으로 삼았다고 고백하면서 모더니즘 예술과 같은 거대서사의 시대에서 벗어나 공통적이고 대중적인 역사의 지표(<버티고>와 같은) 사이에 작가 개인의 주석이 개입되는 방식을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실재와 허구 사이의 소모적인 이미지의 진실게임 이전에 이런 변화에 대한 담론적 반응과 해석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단토는 역설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를. 새로운 기술이나 시각적 효과와 과학적 진보 이전에 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문화적 비판의 시각이 존재하는가를. 그리고 이런 비판적 시선이 매체적 속성과 연동되고 있는지를.

박준범 <Mamiya 645 pro> 싱글채널 HD 4분 37초 2010

타이완Boom! 아시아의 중심을 향하여

(왼쪽)메이 딘E <해와 별에 관한 이야기> 종이퍼즐 59.6×78.7cm 1992
(오른쪽)우 티엔창 <The rule of chiang chiung-kuo> 캔버스에 유채 310×360cm 1990

타이완Boom! 아시아의 중심을 향하여

글|박만우·미술평론가

불과 3개월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번째로 타이페이를 찾았을 때 타이완 미술계의 최대 화제는 중국 작가 차이 궈창의 회고전(2009. 11. 21~2010. 2. 21)이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차이 궈창이 10년여 만에 타이페이시립미술관에 되돌아와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한 결과, 그 관중이 20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타이페이 시내 지하철이나 버스 할 것 없이 도시 전체가 이 전시가 위한 광고로 도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공격적인 홍보 방식에 부응하듯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서도 대중적인 인기몰이를 하기에 충분한 스펙터클 전시임에 틀림없었다.

차이 궈창 회고전을 통해 본 양안 갈등

그러나 이런 블록버스터 전시의 대대적 파급 효과에도 불구하고 미술인 대부분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런 반응의 표면적인 이유는 현 대만 총통인 마잉주의 두 딸이 차이 궈창의 뉴욕 작업실 어시스턴트라서 대중매체의 관심은 작가와 총통 일가 사이의 개인적 친분 관계에만 쏠릴 수밖에 없다든지, 아니면 이번 전시를 시립미술관과 공동주최한 청핑(誠品)갤러리는 타이완 최대 서점인 청핑그룹이 운영하고 있고, 관람객 입장 수입의 대부분을 이 갤러리가 독식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런 문화 현상 배후에는 타이완 사회에 내재한 모든 역사적 모순의 조건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완 미술인의 시각에서 이런 현상을 이해하자면 작가 차이 궈창의 이력을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57년 중국 푸지엔성 취엔주(泉州)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 섬에서 가장 가까운 양안(兩岸) 반대편의 중국 대륙 지역이다. 커지아(客家)인들과 더불어 타이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난(   南)인은 바로 3백여년 전 이 지역으로부터 타이완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 후,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을 지배하면서 중국 본토로부터 이주해  온 ‘외성인’(外省人)들과 구별하여 이들을 ‘본성인’이라고 하며 외성인들과 내성인들 사이의 갈등은 ‘성적(省籍) 차이’라 하여 대만 사회의 기본 모순을 이룬다. 타이완에 올 때마다 고향에 온 것 같다고 말하는 작가 차이 궈창의 출생 이력 자체가 대만 사회의 내재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로는 작가의 학업 이력을 언급할 수 있다. 차이 궈창은 중국 상해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이후 1986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계속했고, 1995년까지 일본에 머물며 활동을 한 까닭에 일본어가 능통하다. 그가 ‘일본통’이라는 사실은 ‘친일독대’(親日獨臺)를 구호로 내세웠던 국민당의 리떵후이 총통의 정책에 반대했던 일부 타이완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과거의 국민당 정권을 ‘외래정권’으로 내몰며 타이완의 민족 감정을 부추겼던 리떵후이는 중국 대륙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며 오히려 55년간 타이완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일본 친화적 정책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사항은 작가의 최근 활동 경력이다. 40여 년 간 타이완을 지배해 온 장씨 일가의 국민당 정권은 ‘반공친미’를 국시로 삼았었다. 탈냉전의 문제를 중요한 이슈로 삼고 있는 타이완의 지식인들에게 뉴욕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차이 궈창의 대규모 회고전 배후에 친미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현 마잉주 총통이 있다는 사실은 곱게만 보일 리가 없었다. 중국인 최초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작가라는 명성이 오히려 일부의 타이완 미술인들에겐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마잉주 총통은 양안 경제협력 정책 하에 과거 누구보다 중국 대륙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중국 본토가 아닌 타이완에서 차이 궈창의 회고전을 개최해 준다는 사실은 통독(統獨) 문제 즉, 중국과의 통일 아니면 타이완 독립주의에 민감한 타이완 국민들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었다. 비록 차이 궈창의 개인전을 둘러싼 잡음을 이해하기 위한 사례 분석이었지만 타이완 미술의 현황을 개관하기 위해선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형 파악은 필수 관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타이완 동시대 미술이 한국에 소개된 경로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은 첸치젠의 작품을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다시 볼 수 있었고,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선 타이페이의 대안공간 그룹인 IT파크와 포스트8 그리고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클 린 등을 만나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외에는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나 부산비엔날레 및 서울시립미술관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시티넷아시아〉에 참여하는 타이완 작가들 그리고 최근 서울 부산 광주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창작 레지던시 등을 통해 리 밍웨이(Lee Ming-wei), 위엔 광밍(Yuan Goang-ming), 취 광유(Tsui Kuang-yu)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이 소개되었다. 물론 2002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널리 알려진 타이완 출신 퍼포먼스 작가 테칭 쉐(Shieh Tei-ching)는 30여 년 전 그가 미국에서 시도한 퍼포먼스 작업으로 최근 미술사적 재조명을 받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타이완 미술이 이렇게 낯설게 다가온 반면 타이완 뉴시네마의 기수라고 할 에드워드 양, 후 샤오신, 차이 밍량 등의 영화는 보다 ‘친숙하고 낯설게’ 한국의 씨네필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나 〈쓰리타임즈〉와 같은 영화를 본 미술인이라면 타이완의 역사, 문화 그리고 기본 정조가 우리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타이완 사회의 내면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만의 지역적 특수성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수록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같고 다름을 넘어서 타이완의 동시대 미술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한국의 동시대 미술의 현실을 인식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이페이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차이궈창의 회고전

타이완 동시대미술 인프라의 역동성

타이완의 동시대 미술계를 개괄하자면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접근 방식에 충실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주요 미술기관과 제도들을 방문하고 기관장들과 대담할 기회를 가졌다. 타이완을 대표하는 국립 미술관은 타이완의 수도 타이페이가 아닌 타이충에 있다. 1999년 대지진으로 붕괴되었던 미술관 건물을 재건축하면서 2004년 오늘날의 국립 미술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이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웅장한 건물이나 적지 않은 운영 예산 등이 아니라 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턱 없는’ 미술관으로 자리잡게 된 미술관의 소프트웨어였다.
공공적 접근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시아의 미술관 가운데 손꼽을 정도의 성공 사례가 아닐까 싶었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이 미술관의 정책은 이 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아시아비엔날레 전시 기간에도 일관적으로 적용되고 있어서 가족 단위의 일반관람객들이 늘 줄을 이었고, 심지어는 미술관 전시보다는 산책 나들이나 점심식사를 위해 미술관을 찾는 시민들이 적지 않은 걸 보고 놀랐다.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한 지리적 장점도 작용하겠지만 미술관이 운영하는 각종 대중 프로그램이나 미술관 스스로의 ‘몸 낮추기’ 태도가 주요 원인임을 황 차이량 관장을 만나보고 알 수 있었다. 지난 10여년 타이페이시립미술관과 카오슝시립미술관 등 타이완의 주요 미술 관장직을 두루 역임한지라 미술관 경영 전문가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작가 친화적, 관객 친화적 태도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미술관의 주인이 누군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의 수용자 중심 경영 방침은 미술관 안으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불러들여 시민들의 참여 의식 고취는 물론 인건비 절감에도 한몫하고 있다니 부러울 뿐이다.
실제로 황관장은 2009년 7월에 부임했고 오늘날의 국립현대미술관 기틀을 세운 이는 현재 타이난국립미술대학교 교수인 에바 슈라고 보는 것이 옳다. 본인이 화가이기도 한 그는 행정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 2008년 제1회 아시아비엔날레를 창설했고, 정부의 특별 지원으로 미술관을 디지털아트의 창구로 특화시켰으며, 아동미술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타이충국립미술관을 가장 모범적인 아동미술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밖에도 다큐멘터리 영화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타이페이로부터 150km 정도 떨어진 지리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국립 미술관다운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과거 청나라 지배 당시 대만성의 성도였다는 이유로 인구 백여만의 도시 타이충에 타이완 유일의 국립 현대미술관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약했다. 상업 갤러리들도 숫자나 수준으로 보아도 타이페이에 비해 열세였고, 미술대학 등의 교육기관들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오히려 타이완 제2의 도시 카오슝이나 타이난 등에 비해 미술 인프라는 국립 미술관을 제외하고는 주목할 만한 대상들이 적었다. 단지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타이충시의 도시 계획과 맞물려 상당수의 신흥 부유층들이 기후가 좋은 타이충으로 이주하면서 미술 컬렉터들이 증가하고 하고 있다는 점 등은 이 도시의 잠재력으로 열거될 만했다. 2006년에 설립된 신생 갤러리이지만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등으로 진출해 해외 사업을 펼칠 구상과 프리즈아트페어 등 주요 아트페어에 적극 참여할 계획을 갖고 있는 다샹 갤러리가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고, 타이충 중앙역의 하역창고를 개조해 만든 창작예술센터 및 작가 레지던시 〈스톡20〉가 발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타이완의 미술 인프라는 국토의 협소함 때문인지 수도 타이페이의 집중화 현상이 한국보다 덜 했다. 전국 어디든 고속열차 등을 통해 한 두 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어서인지 몰라도 미술 교육 기관, 미술관, 상업 갤러리 등도 고루 분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중남부에 위치한 타이난에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사진, 비디오아트 등의 뉴미디어 작품 컬렉터들이 많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미술 인프라의 간판은 아무래도 타이페이시립미술관(Taipei Museum of Fine Arts)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는 타이페이비엔날레 개최 장소로 잘 알려져 있지만 타이페이시립미술관은 1983년 개관한 타이완 최초의 근현대미술관이다.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던 당시 타이완의 국제 정치 상황을 의식한 탓에 이 미술관은 초기부터 미술을 통한 국제  교류의 거점 역할을 수행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 비엔날레로 등극한 타이페이비엔날레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부터 타이완 파빌리온을 운영하는 주체도 역시 다름 아닌 타이페이시립미술관이다.
한국의 비엔날레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 규모이지만 타이완 동시대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주요 플랫폼으로 키운 장본인은 창 팡웨이다. 그는 미술관 내의 국제프로젝트 디렉터이자 타이페이비엔날레 실무디렉터 역할을 지난 10여 년 간 묵묵히 수행해 온 인물이다. 지난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의 타이완관 전시 큐레이터이기도 했던 그는 글로벌 미술 환경에 대응하는 타이완의 일련의 미술 전략을 구축해 온 전문가로 꼽힌다. 지난 2009년 타이페이시립미술관에서 본인이 직접 기획한 〈누구의 전시인가?〉(Whose Exhibition is This?)는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성의 미학’을 타이완 미술계의 맥락에 접목시킨 탁월한 전시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관은 정부로부터의 직접적인 검열, 역대 관장들의 지나친 관료주의적 리더십, 내부 인력의 전시 기획력 부재 등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타이완 신세대 작가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동시대 미술의 중심지는 2001년 개관한 타이페이현대미술관(Taipei Museum of Contem-porary Art)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 건물로 쓰이다가 이후 타이페이 시청사로 쓰였던 건물을 개조해 사용하고 있는 타이페이현대미술관은 우선 그 접근성이 최대의 장점으로 꼽힐 수 있다. 도심 한복판 지하철 중산역에서 나오면 바로 옆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타이페이 중앙역은 물론 구도심과도 가까운 탓에 대중성을 미술관 운영 전략의 최우선 순위로 삼는 듯했다.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을 중심으로 한 기획 전시 방향은 디자인, 패션 그리고 건축 등과 동시대 미술 간의 크로스 장르 분야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젊은 관람객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2004년 이후 정례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Animamix 비엔날레〉, 건축과 현대미술 페스티벌인 〈City on the Move〉 등이 대표적인 기획 전시들이다.
2008년 취임한 미술평론가이자 독립큐레이터인 시 루이런(J.J. Shih) 관장은 미술관의 이러한 차별화 전략을 확고히 견지한 탓에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벌써 차기 타이페이시립미술관 관장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소문이 미술계에 돌고 있을 정도였다. 2001년 개관 당시 타이페이시 정부와 민간기업이 합작으로 운영하는 반관반민 체제로 출범한 타이페이현대미술관은 이제 타이페이 문화재단이라는 민간재단이 운영 주체로 탈바꿈되어 관장의 운영 능력은 매년 재단 평가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타이페이국립예술대학 교수 출신인 시 루이런 관장은 불과 정규직 직원 3명뿐인 학예실 스태프를 이끌고 객원큐레이터 제도와 외부 기관과의 협업을 통한 전시기획 등 인건비 절감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미술관을 새롭게 변신시키고 있다. 중산 지하철역 내의 갤러리 공간을 직접 안내하는 관장으로부터 스태프들과 함께 몸소 행동하는 미술전문인 관장의 참신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미술기관은 타이페이국립예술대학 내의 콴두미술관이다. 타이페이시 북부 콴두 지역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대학 미술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전시 내용이 단단했다. 처음 방문했을 당시에는 준(準)비엔날레 급의 국제미술전 〈희극〉이 열리고 있었고, 지난 2월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동시에 5개의 개인전과 홍콩의 대안공간 파라사이트 작가들이 참여한 그룹전이 진행 중이었다. 타이페이시립미술관, 타이페이현대미술관과 더불어 타이페이에서는 반드시 들러야 할 동시대 미술의 창구라고 할 수 있다. 타이완 주요 국공립 미술관장들 대부분이 이 콴두미술관 관장직을 거쳐 갔다는 사실도 이 미술관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 준다.
타이페이아티스트빌리지는 이미 거쳐 간 한국의 여러 작가들에 의해 그 명성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막상 방문해 보니 그 시설과 참여 작가들의 수준이 한국 국내의 여러 창작센터와 비교해 볼 때 더 이상 부러울 만큼의 수준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다만 아주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내부 전시장은 레지던스 작가들이나 외부의 기획전을 위해 항시 열려 있었고, 무엇보다 타이페이 중앙역에 인접한 옛 도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그 장소성만큼은 부러워할 만했다.

천 지에런 <Military Court and Prison> 영상 2007~2008

타이완의 리얼리티와 신세대 작가들의 감수성

대부분의 큐레이터들에게 리서치 여행이 그렇듯 현지 작가들의 작업실 방문이나 작가 포트폴리오를 검토하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공식이다. 두 번에 걸친 타이완 방문을 통해 많은 작가들을 만나면서 받은 인상은 타이완 작가 사회에는 적어도 표면화된 갈등이나 파벌 의식 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타이완의 미술사에도 분명 리얼리즘과 추상회화 간의 대립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이는 각자가 선택한 미술 노선의 차이일 뿐 세대 간의 갈등이나 집단 간의 대립이 한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 미술계에서와 같이 노골적으로 반목과 불화로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예컨대 타이완 미술의 추상회화 전통은 리 춘센에 의해 도입되어 1950년대에서 1960년대를 거쳐 모더니즘 형식주의에 충실한 회화적 전개를 성취한다. 호 칸이나 리 시치 등에 의해 이어진 추상회화의 맥은 타이완 회화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며 다음 세대인 추 더이 등에 의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이에 필적할 만한 미술사조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타이완의 신화 및 종교 그리고 대중문화의 도상을 자유롭게 혼융하여 하이브리드 형상의 조각 작업을 위주로 하는 양 마오린은 1980년대 타이완 트랜스아방가르드라고 부를 만한 회화 그룹 결성의 주동자였다. 〈101 현대예술그룹〉(1982)나 〈타이페이 현대회화그룹〉(1985) 등이 그가 참여한 단체들이다. 그렇지만 양 마오린은 자신과 상반되는 추상회화 계열의 추 더이와 1990년대 같은 그룹전에 참여했고, 지금도 대안공간이자 아티스트 컬렉티브인 IT파크에 함께 관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타이페이국립예술대학 인근에 위치한 같은 창작촌 안에 나란히 작업실을 갖고 있다. 다문화 혹은 다양성의 공존이 덕목인 타이완 사회의 관행이 여기서 엿보인다.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과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업은 천 지에런을 분수령으로 세대 변화를 맞게 된다. 1987년 집권당인 국민당정부는 40여 년간 지속되어 온 계엄령을 해제하기에 이른다. 1987년 계엄해제를 전후하여 비로소 출현하기 시작한 사회운동은 노동자 여성 원주민 환경보호 및 동성애자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원적 주체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계엄 이후 세대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야오쥐창을 들 수 있다. 흔히 ‘오년급’(五年級) 세대라고도 불리는 1960년대 출생 작가들은 1990년의 대규모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타이완의 민주화 과정을 목격한다. 타이완의 고도 경제 성장의 결과인 대량소비사회의 수혜자인 이들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개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신의 작업 주제로 삼는다.
1980년대 목판화 등을 통해 사회 및 대중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던 후 춘밍 역시 최근 자아의 내적 성찰로 작업 방향의 전환을 보여 준다. 이 세대의 작가들은 1990년대 이후 급성장하고 있는 미술시장의 수혜자들이기도 하다. 1990년대까지 실험적 작가들의 온상이었던 소카아트센터(Soka Art Center)는 이제 상업갤러리로 전환하여 타이페이의 메이저급 화랑으로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최근 한국 신예작가 지용호의 개인전을 통해 출품작 전부를 판매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또 다른 타이페이의 메이저급 갤러리는 과거 동업자였으나 최근 결별한 티나켕(Tina Keng)갤러리와 린갤러리는 서로 경쟁적으로 갤러리 공간을 넓히면서 동시에 베이징에도 지점을 내는 등 사세확장에도 열심인 상업 갤러리들이다. 이 밖에 그랑시에끌(新苑藝術)화랑 소유자 리차드 창은 작년 11월 제1회 〈포토타이페이〉를 주최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 밖에 커다란 창고형 전시공간을 갖고 있는 메인트렌드갤러리를 빠트릴 수 없고, 특색 있는 화랑으로선 인도 뭄바이에 본사가 있는 샥시갤러리 타이페이 지점을 들 수 있다. 갤러리 디렉터와 대담한 바에 의하면 인도 갤러리가 중국도 아니고 타이완에 진출한 동기는 중국의 컬렉터들과 달리 타이완의 컬렉터들은 인도 작가들의 작품도 서슴지 않고 구입하는 개방적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란다. 또한 가까운 장래에 중국 진출을 위해서도 타이완은 우회적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상업적 회로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 타이완의 대안공간들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주변의 리통파크라고 불리는 작은 공원의 이름을 따 IT파크라는 명칭을 갖게 된 이 대안공간은 1984년 설립된 이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주변 건물 지하에 신세대 작가들로 주축이 된 대안공간 VT아트살롱을 분가시켰다. 처음에는 야오 쥐창이 이곳의 디렉터를 맡았으나 최근에는 후배 작가 우 다쿤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타이완 리서치를 통해 만나 본 작가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가는 예 웨이리(Ye Wei-li)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열한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로드아일랜드디자인대학에서 사진 전공으로 석사를 마친 작가다. 2002년 타이완으로 영구 귀국한 후 작가는 2004년 타이완 문화건설위원회가 제공하는 타이페이 서쪽 보장암(寶藏巖) 지역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2개월간 참여한다. 이 경험은 그의 작가적 삶에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어 이후 그가 5년간 매달리는 〈THTP(Treasure Hill Tea+Photo)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다. 보장암 지역은 원래 군부대가 있던 곳으로 1960년대부터 그곳서 근무하던 군인 가족들이 불법으로 거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1980년대에는 약 200여 가구가 모여 살 정도의 달동네 부락을 형성했다. 전기, 상수도 등의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던 주택들은 당시 급격히 팽창하고 있던 타이페이의 도시 정책에 따라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 대상이었으나 도시 빈민들을 위한 사회 활동가 등의 노력과 주민들의 투쟁으로 결국 보존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이르러 겨우 20개 가구 미만의 주택이 보존되고 있었다.

(왼쪽)리 밍처 <Lilypond ar Tzuo Yim>(부분) 캔버스에 아크릴릭 291×1092cm 2004
(오른쪽)리 밍처 <Enjoy a fee and leisurely life>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97cm 1992

예 웨이리의 ‘공간 실천’ 작업의 시사점

이웃 지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머물며 이 지역을 관찰했던 예 웨이리는 이후 2년 동안 이 지역으로 이주해 그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빈집을 아트센터로 변화시킨다. 대부분 보장암 달동네를 떠나는 주민들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로 시작했던 그의 프로젝트는 주민들과 함께 삶을 공유하는 터전으로 아트센터를 구축하는 일로 발전된다. 떠나는 주민들이 버리고 간 물품들을 수집해 전시하는 박물관에서부터 사진을 가르치는 강의실 스튜디오 암실 전시장 야외정원 찻집 그리고 옥상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주민들과 그의 동료작가들이 함께 도시 변두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07년 한국의 문화관광부에 해당하는 문화건설위원회는 타이페이아티스트빌리지에 위탁하여 이곳을 국제 창작레지던시로 발전시키는 계획을 착수한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문화 공동체가 공권력에 의해 도시브랜드화 정책의 일환으로 재개발되는 것에 반대한 나머지 예 웨이리와 작가들은 결국 보장암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 작가가 ‘공간 실천’이라고 불렀던 이러한 현대미술의 도시개입의 사례는 한국의 공공 재원에 의존한 여러 유형의 마을가꾸기 사업과 같은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전망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작가는 현재 타이페이 남쪽 50km 정도 떨어진 양 메이라는 소도시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영화관을 헐값에 임대하여 자신의 작업실 및 대안공간으로 쓰고 있다. 거리의 이름을 따라 뉴데이스트리트로 명명한 이곳은 젊은 작가들의 창작집단인 OCAC의 거점인 동시에 대안적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향후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는 보장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도 아직 모른다고 한다.
현재는 이곳에서 POST.O 프로젝트라고 하는 대안공간 네트워크 전시의 차원에서 예 웨이리와 양준의 2인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에도 이미 소개된 적이 있는 양 준은 큐레이터 만레이 수(徐文瑞)와 함께 타이완 최초의 타이페이현대미술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만레이 수가 큐레이터였던 2008년 타이페이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양 준은 자신이 구상하는 현대미술센터의 컨셉트를 제안했고, 더욱이 이 프로젝트는 다국적 주류기업 리카르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어 제법 탄력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프로젝트의 실현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타까웠다.
타이완은 동시대 미술의 국제 교류를 위해서 두 가지 정책을 동시에 병행하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남진정책이라고 해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범중화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확장정책이다.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화예술은 훌륭한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지역 교류 전략은 양안교류의 차원에서 타이완 중국 홍콩 마카오 4자 간의 문화예술 교류를 활성화하는 상시협의체를 가동하는 일이다. 전시공간 갤러리 옥션 창작레지던시 등 미술 인프라 각 방면에서 이들 간의 교류가 보다 활성화된다면 그 잠재력은 상당하리라 본다. 타이완의 동시대 미술을 위한 좀 더 장기적 안목의 네트워크 구축과 폭넓은 지역 연구가 우리의 미술계에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과 죽음, 그 ‘슬픈 사랑’의 아카이브

파리 그랑팔레 <모뉴멘타 2010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전시 전경

삶과 죽음, 그 ‘슬픈 사랑’의 아카이브

글|김승덕·르콩소르시움 국제프로젝트 디렉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현재 가장 이름난 프랑스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44년 기독교인 어머니와 유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1살에 학교를 그만둔 이래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자습을 하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볼탕스키는 학교를 증오했으며,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는 혼자서도 집 밖에 나갈 수 있겠다는 용기와 확신을 얻게 되었다. 또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20대 후반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독일군 점령 시기, 볼탕스키의 부모님은 아버지 쪽의 유태인 혈통을 감추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이혼한 상태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집에 있는 지하실 작은 비밀의 방에서 완전히 숨어 지내야만 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마지막 지하철>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볼탕스키가 태어났을 무렵,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은 종결되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습관처럼 함께 붙어 다녔다. 부모님과 2명의 형, 볼탕스키까지 다섯 식구는 항상 몰려다녔다. 여행할 때는 물론, 존경받는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병원에 출근할 때조차도 그들은 매일 함께 이동했다. 볼탕스키는 자기 자신이나 그의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를 감추거나, 아니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을 때까지 끝없이 반복한다. 볼탕스키는 예술가가 되면서 인생의 탈출구를 발견했다. 볼탕스키는 파리의 아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지역인 7구에 위치한 그의 부모님 아파트에 살면서 다락방을 채울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캔버스에 거대한 역사화를 그리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9년, 인생의 동반자인 아네트 메사제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삶에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유년기를 주제로 작업을 했으며,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불가능한 추억’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이상한 사진들과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했다. 예를 들면, 그는 동물 석양 꽃 누드와 같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대상들을 주제로 한 평범한 사진들을 선보이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비극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채택했는데, 이는 대량 학살과 소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흔히 미술계에서 볼탕스키의 예술은 주로 홀로코스트와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곤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포스트-홀로코스트 예술’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것은 유태인 커뮤니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라기보다는 홀로코스트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갖게 된 기억과 자의식에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볼탕스키는 죽음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며, 그것을 시각적인 언어로 표출한다. 이는 또한 ‘모멘토 모리’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문자 그대로 홀로코스트 자체에 대한 표현은 아니다.

‘누군가’에서 ‘아무도’로 전이되는 과정

2010년, 볼탕스키는 그랑팔레의 초대를 받아 그 거대한 글래스 파빌리온(13,500㎡)을 그의 작품으로 꾸민다. 그는 <모뉴멘타>의 세 번째 초청작가로, 그 이전에 1900년 세계 박람회 당시 파리의 중심부에 세워진 이 철근구조물과 씨름했던 작가로는 안젤름 키퍼(2007)와 리처드 세라(2008)가 있다. 현재 그랑팔레의 중앙 회랑에는 볼탕스키의 <사람>(Personnes)이라는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누군가’, 즉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nobody)라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문자 의미 그대로, 그의 전시는 ‘존재’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의 사이, 즉 ‘누군가’에서 ‘아무도’로 전이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때는 과자를 담아두는 데 사용되었을 법한 녹슨 양철통들로 만들어진 높고 기다란 벽이 관람객의 시야를 가로막고, 메인 홀의 풍경을 가려 버린다. 이 벽의 꼭대기에 달린 수십 개의 작은 침실용 조명에서 나오는 가냘픈 불빛이 이 양철통을 비춘다. 견고하지는 않지만, 확실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는 이 벽을 구성하는 양철통의 표면에는 수많은 도장들이 찍혀 있다. 이들은 기록이자 쓰레기이며, 바로 전시 제목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들이다. 이전 1, 2회의 <모뉴멘타> 전시는 각각 여름과 봄에 열렸다. 하지만 볼탕스키는 특별히 이 전시가 추운 겨울에 시작되기를 요구했으며, 전시 기간 동안 난방 설비가 가동되는 않는 상황을 요구했다. 파리의 올 겨울은 유례없이 추웠으며, 따라서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녹슨 양철통의 차디찬 질감은 결코 유쾌한 느낌을 줄 수 없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들은 죽음에 대한 기억과 형식주의에 대한 아주 독특한 추억으로 가득한 볼탕스키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잘 만들어진 거대한 미니멀 조각품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볼탕스키의 메인 작업은 거대한 그랑팔레의 회랑을 온통 뒤덮고 있다. 그는 그 길고 넓은 공간의 바닥을 각양각색의 옷들로 이루어진 수백 개의 사각형 퍼즐로 장식했다. 이 납작하게 깔린 천 조각 퍼즐로 꾸며진 ‘프랑스식 정원’에는 보행로와 통로가 조성되었다. 각각의 정사각형 퍼즐에 있는 4군데의 모서리에는 철기둥이 박혀 있으며, 이들을 관통하는 전선은 각 사각형의 한가운데에 달린 형광등 튜브와 연결된다. 기다란 회랑에 늘어선 수많은 정사각형 퍼즐과 기둥들, 그리고 카페트 같이 엮인 옷들 위에 하나씩 두둥실 떠 있는 직선 형광등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매우 커다란 음향의 오디오 사운드가 전시장 전체에 은은히 울려 퍼진다. 이 소리는 수천 명의 심장박동 소리를 녹음한 것으로 죽음을 상기시키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독특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운드를 들으며 네모난 퍼즐들 사이를 걷다 보면 끔찍한 종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이상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한 장의 껍질(버려진 천 조각들)이 되어 버린 인류의 최후가 바닥에 아주 말끔한 기하학적 구조로 정돈되어 있다. 
입구에 쌓아 올린 양철통으로 이루어진 벽과 대칭을 이루며, 이번에는 무려 15m 높이의 산처럼 쌓인 옷더미가 등장한다. 크레인 한 대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 꼭대기에 놓인 옷들을 한 웅큼 짚은 다음, 높이 끌어올린 후 공중에서 그대로 놓아 버리기를 반복한다. 볼탕스키는 종종 옷을 이용하여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버려진 옷은 한 때(지금은 사라진) 여기에 있었던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옷을 전시의 맥락에서 다시 사용하는 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다시 현재로 불러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작업의 경우, 관찰과 묘사는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직접 작품 속에 들어가 숨 쉬는 것이 진정한 감상이라 할 수 있다. 관람객의 진정한 자리는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사라진 종족들의 잔해 속에서 거주하며 ‘살아 있는’ 증언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여타의 작가의 작품에서와 같이 죽음을 느끼며, 대량 학살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된다. 그의 작품은 종종 형식적인 슬픔과 죄악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이는 종교적이며 동정과 연민이 느껴지는 작업이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또한 아주 근래에 현대미술사를 주도했던 형식주의의 어법(구성과 구조 등)이 스며들어 있다. 시각예술이 라스코 동굴벽화 시대 때부터 보편적인 주제들을 다루어 왔듯, 작가의 작업은 회화와 조각의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조망이라 할 수 있다.   
2007년에 시작된 그랑팔레 <모뉴멘타> 프로젝트는 원래 2000년 시작된 테이트모던미술관 입구에 30m 길이의 터빈홀에 대응하려는 야심으로 시작되었다.  3회 째 맞는 이번 볼탕스키의 전시는 5주라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15만명이나 되는 관객 수를 기록했다. 사실 전시 초기에는 많은 전시 광고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은 수의 관객밖에 없었는데, 방문한 이들의 입소문으로 이러한 설치 미술이 높은 관객 수를 올렸다는 것은 볼탕스키의 작품 세계가 일반 관객들에게도 감동의 메아리가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예전에 볼탕스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교회(실제로 예배를 보는 교회로 사용되는 건물) 에서 <죽은 스위스인 >(Dead Swiss)이라는 제목의 거대한 양철통 설치작업을 했을 때, 한 노파가 그에게 다가와서 뭘 하는 것이냐고 물어본 일화가 있다. 그때 볼탕스키는 노파에게 죽은 스위스인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노파는 그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볼탕스키가 “이 작업은 포스트 개념작가의 양철통을 이용한 설치작업”이라고 설명했다면, 노파는 “신성한 우리 교회에서 뭣하는 짓이냐”고 반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볼탕스키는 언제나 이렇게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작품과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집단적인 기억과 의식을 다룬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현대미술사에서 그는 미니멀리즘 세대에 속하며, 구조와 관련된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형식적인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습득한 형식적인 어휘를 감정적인 요소들과 함께 섞어서 ‘정확함’과 ‘감수성’이 혼합된, 조화로운 ‘칵테일’을 제조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혼합’의 양상 때문에, 그는 지나친 감상주의(이것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진정한 죄악이었으리라!)를 피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장 칼망, 프랑크 크래브지크 <대낮에> 샤트레극장 2004~2005 (Photo: M. N. Robert and A. Marku)

‘물질적인’ 작업을 ‘비물질화’하려는 시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예술가로 시작하는 초기서부터 자신의 전설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전후 세대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유년시절 주변에 있었던 물건들과 그가 취했던 행동을 재현해 내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 왔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다시 불러 내고 있다.  그는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다거나, 버려진 작은 상자와 조각난 재활용 끈을 자르고 붙이면서 서투른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곤 했다. 혹은 지저분한 공작용 찰흙을 굴리며 작은 구형을 계속 만들면서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형태가 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꼼지락거리면서 만든다든가,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드는 반복 행위를 거의 강압감에 가깝도록 벌이곤 했다.  어쩌면 정규적인 교육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크게 고민을 하지 않으면서, 재빨리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시간을 떼우기 위한 행위였지만,  이는 점차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작업할 수 있게 해 주는 믿음직한 수단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르키스, 정 르 각, 폴 아르망 게트와 같은 미술계 동료들과 만났으며, 이러한 예술가 친구들을 통해서 소나밴드화랑과 손을 잡았고, 미술 외 다른 분야의 사람들 역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로우테크’의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었다. 당시 볼탕스키가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의 형을 찍은 <기침하는 남자>(1968)가 있다. 유년기를 재건하는 작업 외에도, 그는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편지를 써서 붙인다든지, 아니면 여러 예술가들의 책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수백 차례에 걸쳐 국제적인 전시회 (1972년 <도큐멘타 5>에서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이 초청한 것을 시작으로, 내년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의 프랑스관 초대작가에 이르기까지)에 참여했으며, 이를 통해 세계적인 프랑스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국제적인 예술가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그의 작업에 종교적인 색깔과 연민어린 느낌이 가미되기 시작했고, 그에게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유태인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참담한 기억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그의 작업을 향한 미국 컬렉터들과 문화 기관의 뜨거운 반응은 그에게 성공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그가 국제적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 디종의 르콩소르시움(편주: Le Consortium. 1972년 작은 책방에서 시작, 1982년 시에서 공간을 지원 받은 이후 다니엘 뷔렝, 솔 르윗 등의 전시를 개최해 온 대안적 성격의 아트센터. 2011년 재개관을 목표로 현재 확장 공사 중)은 1978년 볼탕스키의 첫 개인전을 기획한 이래, 언제나 그의 든든한 동료로서 그를 지원해 왔다. 첫 전시에서 그는 와이드 앵글 프로젝션으로 벽에 크리스마스 화환과 볼, 사탕의 이미지를 찍은 영상을 상영했는데, 이 작품은 현재 르콩르소시움 컬렉션의 일부이다. 이외에도 디종시(市) 는 볼탕스키의 작품과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73년, 볼탕스키는 디종시의 중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한 장씩 가져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는데, 당시 학생들이 가져온 사진을 다시 촬영해서 주석 틀로 된 액자에 걸었다. 아직도 그 학교의 벽에는 당시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초상사진들이 남아 있어, 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영구히 기록하고 있다. 몇 년 후 볼탕스키는 <기념물>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작업에서 또 한 번 이 이미지들을 빌려 사용했는데, 이 작품은 역시 1985년 르콩소르시움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그 후에도 르콩소르시움과의 친분은 계속 유지되어 다양한 프로젝트와 그룹전, 그리고 책과 관련된 작업들을 함께 기획, 진행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는 2001년에 있었던 <환영>(Welcome)이라는 제목의 작업을 꼽을 수 있다. 공장을 개조해 만든 르콩소르시움의 전시 공간 중 쓰이지 않던 지하실을 무대로 사용해 단 하루 동안 치러진 설치 퍼포먼스 뮤지컬 연극 등의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행사였다. 오페라 조명 디자이너 장 칼망과 음악가 프랑크 크래브지크가 참여했으며, 여기에 아마추어 어린이 합창단이 함께했다. 이 첫 번째 연극적인 시도를 직접 관람한 이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이는 아마도 의도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추후 2003년 리옹비엔날레와 그 외 다양한 기회를 통해 이 행사는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일본의 에치고츠마리트리엔날레에서는 이 행사가 두 차례에 걸쳐 치러졌다.
볼탕스키는 ‘비물질적’ 작품이 가진 이러한 특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작품의 ‘비물질화’를 추구하는 것은 예술 작품이 반드시 물리적으로 보관될 필요가 없으며(그랑팔레에서 열리고 있는 <모뉴멘타> 전시가 그것을 예시하고 있다), 재료의 원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근간한다. 따라서 작품은 마치 악보처럼 남아 음악처럼 연주자 해석에따라 되풀이될 수 있다. 전시가 끝난 후에 물리적으로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해석하는 이들의 의지와 욕구, 그리고 창조성에 따라 모든 것은 영구히 보존되는 것이다. 2008년 볼탕스키는 부르고뉴의 한 마을로부터 가로등을 디자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데, 이때 그는 해골, 빗자루를 탄 마녀처럼 할로윈에 등장할 법한 이미지들을 실루엣으로 오려내어, 마을의 주택가들을 따라서 위치한 가로등을 장식했다. 연극 조명 같은 빛과 함께 이 실루엣의 그림자가 마을의 집 앞면에 드리우면서 마을 전체에는 밤마다 마치 유령들이 춤추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이것은 볼탕스키가 지난 30년에 걸쳐 보여준 작업의 일례다. 그는 그렇게 줄곧 그의 ‘물질적인’ 작업을 ‘비물질화’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림자 놀이> 철판 프로젝터 선풍기 1986 Courtesy Christian Boltanski and Galerie Marian Goodman, Paris/New York

인류에 대한 슬픈 사랑의 표현

최근 볼탕스키는 스스로의 목숨을 어떤 컬렉터의 손에 맡기는, 매우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컬렉터는 배팅에서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박사이다. 그 컬렉터는 호주의 타스마니아 섬 출신으로, 카지노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따서 더 이상 도박장에 출입이 금지된 엄청난 갑부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온라인을 통해 배팅하고 있다.) 또한 그는 죽음을 주제로 다루는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이집트 미라 컬렉션을 갖고 있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가 볼탕스키의 작품을 사고 싶어 했는데, 볼탕스키는 그에게 매우 이상한 협업을 제안했다. 컬렉터가 예술가에게 종신연금을 주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이 작업의 내용은 밤낮으로 예술가의 작업실을 촬영하여 그 실황 영상을 타스마니아의 외딴 동굴로 계속해서 전송하는 것이다.
실제로 볼탕스키는 컬렉터로부터 8년간 연금을 받기로 결정됐으며, 단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볼탕스키가 죽는다면, 이에 배팅을 한 컬렉터가 도박에서 이기게 된다. 8년이라는 단기간의 작업비를 지불하면서 볼탕스키가 8년간 촬영한 작품을 모두 갖는 것이다.  하지만 볼탕스키가 살아 남는다면, 컬렉터는 계속해서 연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컬렉터는 볼탕스키가 8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자신은 지금껏 그 어떤 배팅에서도 돈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고 장담한다. 볼탕스키는 그를 가리켜 ‘운명을 초월한 악마이며, 신보다 강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타스마니아의 악마가 볼탕스키가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일지….
죽음을 좇고, 인류의 존재를 기록하기 위하며 심장박동 소리를 수집하는 볼탕스키에게 주어진 향후의 과제는 무한하며, 그 책임은 막중하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환상이며 자유이고, 인류에 대한 슬픈 사랑의 표현이다. 현대미술사의 아주 흥미로운 교차점에서 우리는 19세기 말의 프랑스 우체부인 팍퇴르 슈발(그는 일생토록 상상 속의 동물과 인물의 형태를 띤 돌멩이와 조개껍질을 쌓아서 상상의 궁전을 지었다)과 진정한 형식주의 ‘화가’로부터 인간이 남긴 잔재들을 수집하는 컬렉터로 전향한 모더니스트 예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만나게 된다. ‘아르 브뤼’(Art Brut) 즉, 가공을 거치지 않은 원형적인 미술은 계속되고 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그가 사는 시대의 시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인류를 향해 끊임없이 실존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철학가 예술가이다.

정치적 풍경에서 시뮬라크르의 재현으로

<정물> 디지털 C-프린트 67×100cm 2009

정치적 풍경에서 시뮬라크르의 재현으로

글 | 최광진·미술평론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학이 시들해진 이후, 미술의 현실 참여를 외치며 등장했던 민중미술은 오늘날 팝아트를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한 물결 속에 묻혀 버린 인상이다. 예술에 사회를 반영하려한 리얼리즘의 진로가 불투명해진 오늘날, 이강우는 1992년 첫 개인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미술이 사회 현실의 토대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일관된 신념을 유지하고 있다.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암중모색 중인 이강우의 작가로서 행보가 꽤 드라마틱해 보인다.
이강우가 지금까지 다룬 주제는 대략 여섯 갈레로 나뉜다. 역사와 자아(1990~1999), 도시, 일상, 기억(1994~2000), 미술읽기(1999~2002), 정치적 풍경-재편지역들(2000~), 정치적 풍경-기로에 선 近代(2004~), 대중문화읽기(1994~)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주로 사진을 활용하지만, 매체의 고유성에 집착하기보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시하는 편이다. 특히 그의 관심은 주로 대중문화 속에 감춰진 계급적인 욕망과 권력적 속성을 들춰내는 데에 맞춰져 있다.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려는 그의 작업 태도는 선배세대의 전유물이던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학시절인 1980년대는 모더니즘의 막연한 본질추구, 그리고 물성주의와 단색주의 미학이 더 이상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진부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시기였고, 미술이 사회 현실과도 멀어져 상당히 공허한 상태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대항마로 떠오른 민중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초기의 회화 작업에서 엿보이듯이 직접적 현실 참여나 계몽적 투쟁보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자신의 내적 울분을 표현주의적으로 분출시켰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눈을 밖으로 열어 놓으려 하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자못 신중한 가운데 역사적인 한계상황 속에 갇힌 실존적 자아를 관조하려한 내향적 기질이 강한 작가로 출발했다. 사회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바탕에 깔린 그의 그런 기질은 이강우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석류> 디지털 C-프린트 100×120cm 2009

붓 대신 카메라로…, ‘빛으로 그린’ 회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수성 재료를 사용하여 표현성이 강한 회화 작품을 만들다가 1994년의 두 번째 개인전부터 사진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술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어느덧 회화를 위협할 정도이지만, 당시 미술계는 사진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미술이나 시각예술의 하나로 인정하고 수용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그가 작업에 사진 어법을 끌어들인 일은 상당한 모험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심미적이고 관념적인 형식주의 미술에 비판 의식을 가졌던 그에게 사진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진은 어쩔 수 없이 외부의 현실로부터 출발되어야 하는데, 그에게 사진의 그런 속성이 사회와의 유기적인 고리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상당히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독특한 힘을 간파한 그는 “사진의 사적인 시각과 공적인 시각 사이에서 파생되는 긴장과 표리가 작업에 어떤 상승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 사진계와 미술계가 명확하게 나뉘어 있던 화단에서 꽤 선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어느 쪽에서도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0년대 중반의 작업에서처럼 사진을 회화적인 감각으로 다루면서 두 매체의 융합에 주력한다. 실제로 그는 붓이나 물감 대신 카메라의 눈을 통한 회화가 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작업을 ‘빛으로 그린 회화’로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과거에는 사진과 미술의 유대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인상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은 사진이 전유해 나간 사실성을 피해 추상화로 나아간 역사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미술은 객관적인 현실 세계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사진을 작가의 창의적인 상상력과 의식이 투영될 여지가 적다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모더니즘 이후에 일기 시작한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필요는 사진과 미술의 화해와 동거를 가능하게 했다. 이강우가 1990년대 중반에 펼친 작업을 보면, 마치 미술과 사진의 간극을 넘나들며 사진도 얼마든지 회화적 구성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순수하게 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여느 작가들과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리얼리스트적인 시각으로 사회적 갈등과 모순 속에서 고달프게 살아 가는 현대인이나 현대성의 단편들을 사진으로 채집한 뒤에 이들을 구축적인 조형감각으로 엮은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이런 구축적 화면에 그는 양념처럼 작품의 주제를 상기시키는 언어들을 첨가하곤 했다. 언어와 사진 이미지의 결합은 이후에도 그의 작업에 주요한 조형어법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방식은 보통 포스터나 광고에 상용되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차용과 텍스트를 선호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종종 수사학적 전략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바르트의 통찰대로, 사진은 별다른 문화적 지식 없이도 알아볼 수 있는 ‘코드 없는 메시지’인 반면, 거기에 부여된 언어적 메시지는 사진의 표면을 부유하는 의미들에 일정하게 코드를 제공하여 그 의미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으로 빠져나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강우는 이미지와 언어의 결합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문자는 서로를 보충해주는 ‘칼리그램(calligram)’이다. 이는 문자의 이미지화와 이미지의 텍스트화라는 두 가지 방향성과 관계성을 동시에 함의하고, 그림이 재현하는 것을 텍스트로 드러내어 말과 사물 사이의 지시 관계를 이중적으로 확보하려는 수사학적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창조성이나 유일성의 신화를 불신하고, 과거 리얼리즘 미술에서처럼 직접화법은 아니더라도 역사와 사회 및 문명을 아우르는 중층적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조형어법이다.

<Colorful Young Persons> C-프린트 242×400cm 2000

소비사회의 세속적 욕망과 정치적 권력 비판

2000년 들어, 이강우는 사진의 속성과 매력에 주목하면서 사진 그 자체의 힘을 보여줌에 더 집중하는 듯하다. 그런 만큼 그의 작업에서 종전의 실험적 구축성은 많이 사라졌다. 이 변화는 아마도 2003년부터 서울예술대학의 사진과 교수로 재직하게 됨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로 인해, 아쉽게도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하고 진전시키기보다 사진으로서의 밀도와 형식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주력하는 것 같다. 
작업의 주제에 있어서는 초기의 사회 비판적 성격이 좀 더 구체화되는 듯하다. 바르트처럼 현대 사회의 문화적 행위들을 기호로 간주하고, 대중소비사회와 그 문화가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들춰내려 한다. 자본주의의 산물인 오늘날의 소비사회는 과거처럼 소비를 단순히 생리적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호 차원의 문제로 전환시켜 놓았다. 이는 먹고 살기 위한 필요나 효용성에 의거한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 교환으로서의 소비 행위를 의미한다.
보드리야르의 지적대로, 오늘날 소비의 민주화는 거기에 일반대중들까지 가세하게 되면서 상징 교환적 행위가 삶의 전면에 부각되고, 그 결과 상품이 상징 기호화됨과 더불어 그것을 소비하는 인간도 결국 기호화되어 버리는 현상을 초래한다. 이러한 소비사회는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지지만, 결국 그 속에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정치적 권력의 허구가 깊숙이 스며들어갈 수밖에 없다. 또 각종 유행과 스타일들이 문화를 지배하고 현대인의 삶 심층에 파고들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개개인의 취향과 다양한 가치들이 획일화되어 버리곤 한다.
이강우는 바로 그런 양상에 앵글의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는 서구적 감각의 패션과 헤어스타일 및 장식품들로 치장하고, 심지어 몸까지 과감하게 성형하면서 상징적 기호물로 만들어간 신체적인 양상들을 포착하여 제시한다. 그리고 사진에 “I am I, But I am not I. I am not you And You are not I either. You are you But You are not you.” 같은 반어법적인 텍스트를 결합하여 상실된 개인의 정체성을 비판한다. 사실 대중문화에 의한 획일화와 정체성의 혼란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치병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그의 시각과 진단은 매우 시사적이다. 학부모들은 ‘강남 엄마 따라잡기’를 외치고, 도시 행정가들은 ‘강남 대체 도시’를 외친다. 또 사회는 공부 잘하고, 키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돈도 잘 버는 ‘엄친아’를 모델로 삼는다. 그렇지 못하면 ‘루저(패배자)’로 간주한다. 개인의 차별화된 가치를 뒤로 한 채 이러한 대중적 스타일을 따라가다 보면, 개성이 제거된 마네킹 같은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강우의 마네킹 이미지는 획일화되고 기호화된 현대인의 초상이자 상징이다. 
소비사회에 은닉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권력은 이강우의 핵심적인 저항점이다.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정치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본성과 특성을 통제하거나 규격화하려고 힘쓰기 마련이다. 그는 마네킹 이미지의 <점령군>과 점점 탈주거화되어 가는 압구정동의 주택들을 담은 <점령지> 등의 작업으로 우리를 일상적으로 둘러싼 소비사회의 환경 이면에 자본의 전략과 정치적 권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노출시킨다. 또 그에게는 코스트코나 휘트니스의 스타일, 그리고 성냥갑을 집적해 놓은 것 같은 아파트의 획일적인 스타일도 바로 그 증거물이다. 그는 푸코가 감옥이나 병원 제도를 통해 보다 고도화된 정치적 권력의 실재를 폭로하려 했던 것처럼 권력과 쾌락의 은밀한 공조를 들춰내고, 점령군들의 달콤한 유혹과 은밀한 전략에 휘말려 점령당한 사실조차 잘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비판한다.

<휘트니스> C-프린트 160×122cm 2005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소비사회와 그 문화에 대한 이강우의 ‘비판 의식’은 작가의 정신적 혈통을 이해하는 단서이다. 팝 작가인 앤디 워홀도 소비사회의 특성에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동경’했다는 점에서 이강우의 입장과는 방향성이 전혀 다르다. 워홀은 미국에서 가난한 이민자 아들로 태어나 차별받는 생활 속에서 허리우드 스타들을 동경했고, 또 기계처럼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대중문화스타나 슈퍼에 진열된 상품들을 기호로 제시하고 스스로 상업예술가를 자처하며 모더니스트들이 추구했던 창조성이나 유일성의 신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비사회를 비판하기보다 찬양했다. 후기구조주의자인 보드리야르가 워홀을 최초의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보는 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와의 관계를 차단하고 작품이 ‘기호의 내재적 질서’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워홀의 작품은 비판적 기능 대신 원본 없는 모조물인 ‘시뮬라크르’이며, 우리 사회와 실재를 지배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이강우의 최근 작업인 <모조물> 시리즈는 실제 같아 보이는 장미, 국화, 나팔꽃, 석류, 포도 등의 조화와 가짜 과일을 소재로 한다. 그는 정갈한 구성과 조화로운 색채로 매혹적인 정물 사진을 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조물이 “실재를 대체하는 지시기호로서 그 자체는 고정된 사물이면서도 색색의 빛과 감각에 의해 피어나는 카멜레온 같은 이미지이며,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과 공간의 곳곳을 누빈다”고 봤다. 그런데 이는 가짜 이미지 기호들에 의해 우리의 현실이 지배당하는 하이퍼리얼리티로서의 소비사회적 국면과 그 특징적 양상을 말하려한 것이겠지만, 종전처럼 그가 작업에서 자주 활용했듯이 언어 메시지의 도움이 빠진 사진들에서 작가의 비판적 입장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것들은 자칫 워홀 식의 ‘동경’으로 독해될 수도 있고,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데리다 식의 ‘해체’로 읽혀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딜레마를 넘기 위해 사회학자이자 마르크스 연구가였던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를 기호적으로 연구하다가 사회학을 떠나 극단적인 후기구조주의자가 된 경우를 참조해 볼 만하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서 출발한 후기구조주의는 언어나 기호가 실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기호 내부의 체계라고 봄으로써 사회적 지시 관계를 단절시켰다.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플라톤주의의 관념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기호 또는 이미지를 보편화된 현실로 내세움으로써 ‘기호의 형이상학’에 도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이 (후기)구조주의를 철학적 형식주의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강우는 접근 방식에 있어서 바르트처럼 대중문화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기호학적으로 풀어가고 있지만, 철학적 입장은 리얼리즘적인 성격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기구조주의보다는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도르노나 제임슨 같은 후기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후기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방법론적 입장은 역사·사회·총체성 등의 개념을 복권시키고, 모든 텍스트 안에 억압되어 있는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내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기호를 사회적 실재에서 독립시켜 그 자체의 상관 구조와 역동적 관계를 설정하려는 후기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삶·사회·역사의 복합적인 인과 관계를 중층적으로 엮어 내어 혼돈의 시대에 인식의 지도를 만들려는 사회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간의 갈등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들어가면서 그 대립과 긴장을 유지하려한다.   
이강우에게는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병행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에는 모조물 시리즈 외에도 탄광지 시리즈를 함께 전개했다. 그는 2004년부터 근대적 풍경과 그 스타일의 변모가 리얼하게 이뤄지고 있는 강원도 남부의 탄광 지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태백의 철암에서 사북으로 이어지는 풍경들로부터 “근대와 탈근대적인 기호들이 마치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처럼 양립”한 현실과 그것이 내포한 정치성을 예리하게 짚어 보려 한다.
보통 그러한 성격의 사진들은 단순히 시각적이고 지정학적인 풍경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문맥이나 문명 비판적 발언 그리고 정치 심리적 효과 등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허나 관람자가 그의 사진들로부터 그러한 다층적인 서사성과 상징성을 읽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전시에서 그는 그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동안 제작한 탄광지의 사진들과 그곳에 내포된 문맥에 준거하여 각색한 텍스트들을 엮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물(50분)을 제작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모조물 사진과는 상반되게 그 영상에서는 계몽성과 리얼리즘적인 색채가 강하게 풍긴다. 그렇게 현재 이강우는 사회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에 토대를 두고 주제를 확장해 가면서 리얼리즘과 후기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는 듯하다. <탄광지> 시리즈가 리얼리즘에 가깝다면, <모조물> 시리즈는 후기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까워 보인다. 그처럼 상이해 보이는 두 가지 스타일을 함께 바라봐야 이강우 작업의 전모를 그려보고 이해할 수 있다. 마치 그는 그러한 줄타기의 스릴을 즐기는 듯한데,  앞으로 그것이 진정되고 정리되면서 자기의 색깔이 좀 더 분명해지리라 기대해 본다.

<사북 동원탄좌> 디지털 C-프린트 150×230cm 2006

사회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조형적 성과와 과제

이강우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각을 사회로 돌려 현실을 읽어 내는 힘을 키워 왔으며, 이제 자신만의 안경을 얻은 듯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그것을 미술 내부로 돌려 ‘사회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독창적 형식을 찾아 사회에 대한 ‘반영’과 ‘비판’을 함께 수렴할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공 모델은 최근 위에 민준, 장 샤오강, 팡 리준 같은 중국작가들로부터 찾아볼 수도 있다. 이들은 전통과 현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급변하는 중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그것을 냉소적이면서도 함축적으로 ‘비판’하는 독특한 조형세계를 펼쳐 보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이강우의 작업에서 ‘비판’의 어법과 형식을 어떻게 가다듬어나갈 것인가가 주요한 과제인 듯하다. 언어와 사진 이미지를 결합하는 칼리그램의 방식을 보다 유용하게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바바라 쿠루거의 내용과 형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만하다. 크루거가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고 사회 내부에 침투한 지배적인 제도와 권력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사진 이미지와 언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점에서 이강우와 비견된다. 크루거가 권위적인 미국 사회에서 소외 계층인 흑인이나 여성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 반면, 이강우는 한국에서 급격하게 진행된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 그 점을 제외하면, 예술과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입장과 그것을 반영한 형식적 측면에 연결성이 있어 보이기에 참조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자신의 정신적 혈통을 찾고, 그로부터 남과 차별화해 나가는 일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종의 숙명이다. 이강우가 추구하는 사회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맹목적 해체와 공허한 허무주의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삶과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 한국적인 정체성과 독특한 자신의 정서가 접목된다면, 중국의 비판적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시각언어가 창출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지향점을 향해 서서히 우직하게 다가가는 작가의 뚝심과 성실하고 진지한 작업 태도는 앞으로의 가슴 뛰는 결실을 기대케 한다.

“예술은 단 한번의 영혼을 표현하는 것”

“예술은 단 한번의 영혼을 표현하는 것”

여기, 런웨이를 넘어 갤러리로 발길을 옮긴 한 명의 디자이너를 소개할까 한다. 마이클슐츠갤러리에서 2월 5일부터 3월 20일까지 개인전 <죽음과 믿음>(Death and Faith)을 열고 있는 볼프강 욥이 그 주인공이다. ‘JOOP!’과 ‘WUNDERKIND’라는 패션브랜드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패션디자이너 볼프강 욥의 개인전이라니, 그의 브랜드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이번 전시가 그의 의상 샘플이나 스케치 등을 모아 놓은 아카이브 스타일의 전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조각과 직물 작품은 볼프강 욥이 디자이너로서 얻은 명성만큼 순수미술가로서의 활동에 깊이 몰입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욥은 지난해 독일 로스톡미술관(Kunsthalle Rostock)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면서 작가로서의 경력을 한층 단단히 다졌고, 당시 전시작 중 18점의 작품과 함께 이번에 한국을 찾은 것이다. 전시 개막과 함께 욥은 난생 처음 한국, 아니 아시아 땅을 밟았다. 브랜드 ‘JOOP!’의 한국 런칭 때도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만큼 그의 남다른 작가로서의 열정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나의 사탕은 쓰고 달콤하다”

러시아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디자인했다는 빨간 체크 셔츠, 일본산 바지, 이탈리아산 구두, 천주교 묵주를 목에 걸고 터키 팔찌를 손목에 건 욥은 자신을 ‘패션계의 티라노사우루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패션 감각만큼이나 화려하고 발랄한 공식석상에서의 매너 또한 스타 디자이너답다. 다양한 포즈로 능숙하게 촬영에 임하는가 하면, 기자간담회가 시작되자 바로 앞에 앉은 어느 기자의 캐리커처를 슥슥 그린 후 선물이라며 슬쩍 건네기도 한다. 1968년 잡지 《Constanze》 패션 콘테스트 우승 후, 패션일러스트레이터 패션저널리스트 프리랜서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볼프강 욥은 1978년 발표한 모피 컬렉션의 성공과 함께 《뉴욕타임즈》가 독일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는 디자이너로 격찬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87년 본인의 이름을 따서 런칭한 패션브랜드 ‘JOOP!’과 2003년 새로이 런칭한 패션브랜드 ‘WUNDERKIND’를 이후 각각 세계적 브랜드로 등극시켰다. 그의 표현대로 때로는 두려울 만큼 하는 일마다 성공가도를 달려 온 지금, 그는 패션계의 스타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니 디자이너로서 최고의 자리를 선점한 그가 순수미술 장르로 일종의 전향(?)을 선택한 것에 대해 숱한 질문을 들어 왔을 법하다. 그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그에게 있어 패션디자인과 순수미술 작업이 각각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아무래도 패션계에서 유명세를 얻었으니, 많은 이들이 저에게 있어 순수미술과 패션디자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묻곤 합니다. 굳이 구분해서 말하자면 패션과 디자인이란 모든 이에게 선택 활용될 수 있는 것이자 우리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모적이고 결국 사라지는 것이죠. 그러나 순수미술은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영혼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패션 작업은 팀으로 이루어지고 나의 정열로 작업한다고 말한다면, 순수미술은 오로지 나 혼자서 해내는, 나의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작품을 통해 패션디자인과는 다른 어떤 감성을 표출하고자 할까.
“나의 사탕은 쓰고 달콤하다.” 이는 욥이 지난 해 로스톡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카탈로그에 적었던 말이다. 쓰고도 달콤한 이중성이란, 사실 그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인 것 같다. 먼저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조각과 직물 작업을 보더라도, 대리석과 얇은 평직의 삼베인 바티스트를 사용한 것에서 각각 딱딱한 단단함과 닳기 쉬운 부드러움, 연약함이 공존한다. 천사의 형상을 조각한 6점의 <새벽에서 황혼까지>(From dawn till dusk)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천사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단단한 돌에서 별 즉 떨어지는 운석을 상상한 후, 그 돌에 날개를 달아 다시 날아갈 수 있도록 표현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무거워 날지 못하는, 하늘과 땅 중간에 존재하는 천사를 암시한다. 또한 직물 작업인 <영원한 신부>(Eternal Bride)와 <영원한 사랑>(Eternal Love)은 영원함을 상징하는 벚꽃, 그리고 해골 모티프나 갓 결혼한 해골 얼굴의 신부를 함께 수공예 자수로 표현하여 불변하는 영원 속에 존재하는 죽음을 암시한다. 작품의 주 재료 중 하나로  직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그의 패션계 경력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아름다움, 믿음과 같이 가치있는 만큼 손상되기 쉬운 존재를 표현하고자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이란 늘 희생을 요구합니다. 태양을 보면 눈이 아프듯이, 아름다움의 절정이란 곧 아픔의 절정이죠.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슬플 때 기쁨을 갈망하며 느끼고, 힘들 때 편안함을 원하고 느낍니다. 이러한 아름다움과 고통을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죠.” 여느 예술가들과 같이 사랑과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 그의 작품에는 어느덧 아름다움과 죽음 혹은 아름다움과 고통이라는 이율배반이 공존하고 있다.

2009년 독일 로스톡미술관에서 열린 볼프강 욥의 개인전 <영원한 사랑> 전경

“작품을 하다 보면 무언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독일 로스톡미술관 개인전은 한 달 사이 1만 5천명의 관객이 다녀갈 만큼 성황을 이뤘다. 그리고 그 전시를 인상 깊게 본 마이클 슐츠 대표의 기획으로 이번 한국 개인전이 성사된 것이다. 욥은 이번 전시가 상업 공간에서 열리는 첫 번째 전시라며, “예술가로서의 본심을 서울에서 잃어버렸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열린 이번 전시 또한 기간을 연장할 정도로 한국 관람객의 호응이 좋다고 한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욥이 디자이너로서 말고도 순수미술 작가로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미 수차례 자서전과 소설을 출간하며 작가로 활동했고, 잡지와 신문에 꾸준히 글을 기고해 왔다. 특히 그의 딸이자 디자이너인 플로렌티네 욥이 삽화를 그리고, 그가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쓴 동화책 《루비 눈물을 흘리는 소년》은 국내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디자인과 미술, 문학 분야를 가로지르며 창작을 향한 끝없는 욕심과 자질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품을 하다 보면 무언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더 이상 패션 쪽의 고객들이 예전처럼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앞으로 점점 더 순수미술 쪽으로 전향해 나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볼프강 욥은 이제 예순을 훌쩍 넘은 노년의 예술가다. 하지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뿜어내는 정열적이고 활발한 에너지는 마치 젊은이의 의욕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무엇이든 어디로든, 그리고 언제든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흥미꺼리를 찾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욥의 열정은 쉽게 꺼지지 않을 듯하다.       | 글·장승연 기자  사진·권현정 사진기자

2010 March Special - 미술, 출판으로 ‘그리다’

미술, 출판으로 ‘그리다’

호경윤 수석기자

미술과 출판은 오래 전부터 뗄 수 없는 관계로 서로 공생해 왔다. 미술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출판물은 전시 도록일 것이다. 1년 동안 열리는 전시의 횟수만큼 수많은 도록이 발간된다. 물론 여기에는 홍보를 위한 엽서나 리플릿도 포함된다. 도록은 ‘전시’라는 한시적 형식에 대한 기록물이자, 기획의 목적과 의도를 활자화시킴으로써 미술사적 알리바이 역할을 맡기도 한다. ‘남는 건 도록밖에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전시기획자나 작가가 전시 도록 제작에 큰 애착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로 작가는 자신의 평생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는 화집, 즉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를 만드는 일을 작가 일생에서 큰 영예로 여긴다.

미술과 문학의 ‘만남’

그러나 우리 미술계에서 도록 문화가 오늘처럼 일반화되기 이전에 이미 미술은 출판 매체를 통해 널리 보급되곤 했다. 출판이라는 메커니즘과 가장 관련 깊은 장르는 바로 문학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기반하고 있는 예술 행위지만, 그 텍스트를 모아 ‘책’이라는 형태로 제작하려면 미술과의 만남이 불가피했다. 바로 이미지 때문이다. 과거의 미술은 표지화는 물론 삽화 등으로 문학과 만나면서 출판 메커니즘에 ‘슬쩍’ 기대어 발전해 나갔다. 그 만남의 시간만큼,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라는 도식은 이제 상투적일 만큼 보편화되었다. 여기서 파생해 표지의 원화를 전시하는 정도가 가장 적극적인 두 장르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 지금의 일러스트 업계처럼 분업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되살펴보면, ‘문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미술인과 문인 등이 동인이 되어 문예운동을 벌이거나(김복진의 KAPF), 문사적 취향을 배경으로 한 친교(구본웅과 시인 이상, 나혜석과 소설가 이광수의 인연처럼)의 산물이 많이 남아 있다. 아예 미술인들이 수필 시집 소설 등을 발간한 예도 있다. 대개 화가들은 자전적 에세이나 그림을 책으로 묶어 발간했고, 미술평론가는 문학을 통해 등단한 경우도 적지 않아 평론 활동을 겸하면서 본래의 특기를 살려 시집이나 소설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우환과 방혜자 등의 수필집, 오광수와 윤범모의 시집, 최울가의 그림일기, 김병종의 화첩기행, 한풍렬의 카툰 에세이 등 미술인들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출판물도 아주 많다. 이러한 사례들을 모아 얼마 전 〈미술인의 운문과 산문〉전(2009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열리기도 했다. 이 전시에는 희귀본인 월북화가 김용준의 《근원수필》(1948) 초판본, 고유섭의 《전별의 병》(1958), 이중섭의 편지를 모은 책 《그대에게 가는 길》, 천경자의 수필집 등 작가와 이론가들이 쓴 시집과 수필집 80여 권이 선보였다.
역시 미술과 문학의 ‘만남’의 예에서 가장 흔한 방식은 미술가가 그린 표지화나 삽화일 것이다. 고희동과 배운성이 그 대표적인 예로 근대 화가들이 문학지의 그림을 맡는 일은 당시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이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는 김환기로, 그는 특히 195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표지화를 그렸다. “나는 신문 잡지에 커트 같은 것을 그리는 데도 땀을 뻘뻘 흘린다. 번번이 약속 기일을 넘기는 것도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재미난 생각이 안 나고 잘 되지가 않아서이다”(1963년 4월《현대문학》)라는 말처럼 그는 청탁에 의한 수동적인 접근이 아니라 본격적인 작품에 임하는 태도로 접근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가 그린 표지화나 삽화를 보면 해당 책의 내용을 반영한 오브제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김환기 유화 특유의 추상적 패턴으로만 그린 것도 많다. 환기미술관에서는 이따금씩 이런 표지화와 장정을 모아 기획전을 개최하며, 작가의 이러한 특색에 따라 현대 북아트 전시도 열곤 한다. 그 밖에 〈목판화 출판미술〉전(2007~2008 제비울미술관), 〈문인과 화가의 만남, 책과 그림〉전(2008 청계천문화관) 등에서 미술가의 표지화들을 모아 전시했다.
이러한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점점 그래픽디자인이나 북아트, 일러스트레이션 등으로 전문화되어 그 사례가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여러 미술가들에 의해 그 역할이 지속되고 있으며 젊은 작가 중에서는 아르바이트 삼아 동화책이나 잡지의 일러스트 작업을 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작가 고낙범이 2003년 《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집 20권의 표지를 그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꼭 그림이 아니어도 조습, 옥정호 등의 작품이 《월간 문화연대》의 표지로 쓰였던 것처럼 설치미술, 사진 등 다양한 시각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2004년 쌈지스페이스에서 개인전 〈무형경제〉전을 열며 《노트북》이라는 책을 펴낸 이슬기는 시인 이원의 글과 자신의 작업을 담아내면서 “이원 시인의 시와 저자의 미술 작품이 융화되지 않음을 감상할 수 있다”는 말로 이 책을 소개하는 것처럼 미술과 만남의 ‘만남’은 쉬우면서도 또 어려운 일이다.

(왼쪽)이주영 <카니발 매거진 콜라주 시리즈>
(오른쪽)베반패밀리 <영혼을 잃지 않는 서울시민 되기> 2008

북아트, 아트북, 아티스트북?

미술과 출판이 만나는 또 하나의 갈래는 북아트 장르다. 북아트는 실크스크린을 기본 매체로 한 인쇄물을 소량 발간하거나 혹은 예술제본이라는 독자적 분야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판화를 전공한 미술가들의 활약이 크다. 1999년 발간된 《예술가가 만든 책》은 고충환 김찬동 임영길이 공동 기획하여, 미술가들의 책 만드는 행위를 ‘대안적 판화의 모색’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책에는 판화가를 포함하여 강애란 박화영 신장식 오이량 윤동천 정상곤 등 58명의 미술가를 참여시켰다. 참여작가들은 ‘책’이라는 소재에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판화가들은 대개 디지털 기법을 사용한 새로운 판화의 흐름을 선보였으며 순수미술 작가들은 책을 ‘오브제’로만 받아들이는 등 본격적으로 출판의 프로세스를 수용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편 기획자 고충환은 그의 글에서 아트북, 아티스트북, 아트북메이킹의 정의를 영미권과 프랑스의 경우를 참고하면서 ‘책’을 조형적 대상, 혹은 오브제로서 인식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한편 art in culture는 그 이듬해인 2000년 3월호에서 ‘책 속의 책’ 혹은 ‘잡지의 패러디’라는 개념으로 특집 〈Artist's Book〉을 마련했다. 작가들이 스스로 페이지 컨셉트를 잡고 디자인에 적극 참여하도록 해, 국내 최초로 대량 인쇄매체가 가지는 재료와 기법의 한계를 수용하면서 파격적인 잡지 생산 시스템을 시도했다. 이때 참여한 고낙범 김두섭 김홍석 이중재 노석미 홍지연 이윰 서상아 총 8명의 작가들은 ‘책’에 대해 훨씬 현대적인 개념으로 접근, 흥미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특집에서는 여전히 판화와 책이 갖는 공통분모에 주목하고, 판화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일부 발견된다. 
처음에는 같은 곳에서 출발했을 법한 북아트 장르는 1권 혹은 10권 이하 소량으로 제작하는 독자적인 예술 행위로 점차 미술과는 다른 길로 전개된다. 북아트와 관련된 연구소와 공방, 협회까지 설립되고 있음이 이를 대변해 준다. 또한 비슷한 시기 유럽과 미주로부터 북아트 작품을 들여와 전시하기도 하고, 한 권에 몇 백만 원씩 하는 고가의 아트북도 수입되어 유통되기 시작했다. 특히 2005년 설립된 국내 출판사 마로니에북스는 타셴사의 〈베이직아트〉 시리즈 64권과 파이돈의 〈The Art Book〉 시리즈 등의 판권을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번역해 내고 있다.
북아트도 아트북도 아닌, 출판물을 이용해 현대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사례는 (주)쌈지에서 발행한 〈쌈지북 프로젝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물을 이용한 예술적 시도가 기업 메세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 흥미롭다. 1998년 가슴시각개발연구소에 맡긴 《쌈지스포츠》 첫 호는 〈여름 生生〉으로 주제를 잡았다. 이 책에는 쌈지의 브랜드 정신과 신상품을 소개하는 카탈로그의 성격도 있지만, 그러한 요소는 지극히 일부이며(천호균 전 쌈지 대표의 글 2페이지가 전부) 지면을 이루는 대부분의 사진에서는 모란시장 살바 낙원상가 등이 촬영 장소로 쓰이는 등 작가 최정화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같은 해 창간한 《쌈지책》 시리즈는 《쌈지스포츠》보다 훨씬 완벽한 이미지북의 성격을 띠고 있다. 독자들이 보낸 이미지를 조합하여 만드는 방식으로 이 책에서도 가슴개발연구소가 많은 부분 기여했으며, 안상수의 참여도 눈길을 끈다.

(왼쪽) 장용석 《+82》2006
(오른쪽) 양혜규 《Grid Blob》2002

공공미술로서의 출판물

2000년을 넘어 서면서 다양한 형태의 출판 프로젝트들이 작가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노석미나 현태준처럼 정식 출판사를 통해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사례도 있지만, 그보다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자가 출판’으로 출발하는 인쇄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출판사가 작가를 섭외하거나 반대로 작가가 원고를 들고 출판사에 의뢰하는 식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기획부터 제작과 유통까지 맡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술적이든 사업적이든 ‘거창한 목표’보다는 매체의 확장에 따라 대량 제작과 이동성이 유리한 인쇄물로 작가들이 눈을 돌린 데서 시작됐다. 또한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협업 체계로 작업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컴퓨터의 보급과 인디자인이나 포토샵 등 편집이 비교적 용이한 프로그램이 개발된 상황도 한몫했다. 작가들은 스티커 버클 찌라시 엽서 포스터 같은 단순한 인쇄물부터 이미지북 드로잉북 사진집 수필집 잡지 등 제본을 한, 제법 책의 격식을 갖춘 출판물을 만들어 냈다. 특히 이 시기를 뜨겁게 달군 공공미술의 맥락을 실행하는 데 출판하는(Publish) 것만큼 공공의(Public) 성격이 강한 매체도 없었다. 마치 삐라나 전단지처럼 인쇄물은 일반인에게 보급하기 쉬울 뿐더러 급진적 메시지를 담기에도 적합했다.
그 효시는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관광안내 책자로 발간된 《Rolling Stock》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자를 제작한 작가는 임민욱이 참여한 ‘피진기록’ 팀이다. 이 책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질 중 구르는 이동성(Rolling)에 주목, 아기 업은 엄마부터 포장마차 지하철 배 등 온갖 ‘탈 것’에 대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모았다. 이후 2004년 임민욱이 작가 프레드릭 미숑과 함께 조직한 ‘피진컬렉티브’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출판물을 이용했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이 (식민지 등에 의해) 토착 어휘들과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순한 형태의 혼성어를 뜻하는 ‘피진’(Pidgin)이라는 팀 이름이 말해 주듯, 피진컬렉티브는 공식화되지 않은 언어들 ‘풀뿌리 정신’의 거친 메시지들을 담아낸다. 《피진버스투어:가리봉동》은 《Rolling Stock》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관광 가이드 책자의 형식을 띠고 있다. 마스터인쇄 등 저예산으로 제작된 출판물이지만, 액티비즘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며 ‘소통’의 기능에 충실한 책이다. “5714번 시내버스의 노선에 따라 이동해야 한다” 등의 행동 강령에 따라 가리봉동 공단 지역을 안내하는 이 책자는 개발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들춰내며, 소외된 도시 풍경을 사회적 철학적 컨텍스트로 가져온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피켓》 《스크랩북》 등의 작업뿐만 아니라, 하자센터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학생들과 함께 가리봉동에 이어 영등포, 창신동 등의 안내책자를 제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때 제작된 인쇄물은 집에서 프린터를 이용해 인쇄하거나, A4용지를 반으로 접어 B5 사이즈의 판형을 만들고, 직접 스테이플러를 박아 제본하는 등 매우 소박한 형태의 자율출판물, 에디션프린트가 대부분이다.
한편 피진컬렉티브는 인미공 아카이브가 창설될 무렵 기관의 비전과 방향을 구성하는 자문으로 참여했다. 이때도 피진컬렉티브는 ‘바코드’를 벗어난 비주류의 유통망을 따르는, 그래서 쉽게 소개되지 않았던 해외 작가들의 출판물을 리스트에 올렸다. 이후 프레데릭 미숑은 작가 윤사비, 여다함과 함께 ‘AC퍼블리싱’을 조직했다. 물론 AC퍼블리싱에서 제작한 출판물 대다수는 역시 전문적인 편집 기술 없이 필요 없는 노래가사집, 플립북 등이다. 그 동안 이곳에서 제작한 책은 10권 내외, 혹은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매우 유동적인 조직이기에 이들의 출판물 수를 정확하게 세는 것이 어렵다.)
2001년 배영환이 제작해 노숙자에게 무료 배포한 〈노숙자 수첩〉도 공공미술의 성격이 강한 출판물의 대표적 예로 소개할 수 있겠다. 이 수첩에는 무료급식소 숙소 화장실 병원 등 노숙자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생활 정보가 수록돼 있으며, 노숙자의 80%가 알코올 중독자인만큼 자가건강체크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06년 한 일간지에서 거대한 공공 조형물을 제치고  ‘공공미술 베스트 5’에 꼽히기도 했다. 최근 배영환은 〈도서관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 형태의 도서관을 제작해 농어촌 같은 소외 지역에 공급하는 프로젝트다. 작년 3월 〈플랫폼 서울〉의 일환으로 아트선재센터에서 목재와 골판지로 만들어진 도서관 설계 모델을 전시 형태로 선보인 후, 5월 경기도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실행시켰다.
한편 수첩이라는 비슷한 외형의 출판물로, 작가 최소연의 공공미술 팀 ‘접는 미술관’에서 2006년 제작한 《명륜동》 《청파동》 등의 시리즈가 있다. 이 수첩은 주민 참여 워크숍과 공공미술 제안 드로잉 전시 등의 과정을 통해 8명의 연구원들과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주제별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수첩 끝 부분에 크레딧 난에 “이 수첩은 복제와 배포를 적극 권장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출판물에 있어서 오리지널리티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림과 글을 모아모아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메모지나 냅킨, 이런저런 종이에 그린다. 생전에 박이소도 설치미술을 하는 젊은 작가에게도 “평소 드로잉을 해라”고 종종 일렀던 것처럼, 작가들의 드로잉은 아이디어 스케치이자 이미지로 된 스테이트먼트이기도 하다. 단, 드로잉의 ‘가벼운’ 특성상 보관이 어렵고, 낱장으로 있어 서사 구조를 읽어내는 데 불편하다. 또한 그 수많은 드로잉을 모두 액자에 끼워서 전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작가들은 드로잉을 모아 책으로 묶어내곤 한다. 이는 단순히 마음에 드는 드로잉을 무작위로 고르기보다는, 어떤 주제를 놓고 그리거나 배열함으로써 책 위에서 펼쳐지는 또 하나의 개인전이 된다.
작가 이주요는 2000년 《일단 한 번 눕기만 하면》이라는 책을 펴냈다. 키 작은 작가가 서구 사회에서 살면서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에 대한 대안을 고안하여 수록한 책이다. 또한 2002년 《가습과 난방》이라는 책은 실내 공기뿐 아니라 사람의 몸 자체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 촛불을 이용해 몸을 덥힐 수 있게 고안한 온열 기구 등을 실었다. 2005년 《Two》에서는 작가가 1999년 이후 3년간 겪어 온 근육통을 해소하기 위해 시도했던 마사지 방법을 소개한다. 큐레이터 김현진은 이주요가 펴냈던 일련의 드로잉북을 두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책은 아무래도 짧은 시간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전시보다는 시공간의 제약을 덜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 비교적 개인화된 매체라는 점에서 책 작업은 친밀하고 구체적인 관계 형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성향에 부합했다.” 사실 이러한 개인적인 성향은 많은 작가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작업실에서(작업실 없는 작가들은 자기의 방에서) 외톨이로 틀어 박혀 조용히 드로잉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란 얼마나 전형적인가? 그 밖에 작가 김을과 김태헌의 드로잉북이 주목을 받았고, 젊은 작가들 중에서는 김혜나 최은경 등도 전시를 겸해서 드로잉북을 출간한 바 있다.
드로잉북을 펴낼 때 글을 함께 써서 싣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는 안규철을 들 수 있다. 안규철은 2001년 《그 남자의 가방》에서 발표한 글과 그림 중 일부를 2004년 로댕갤러리 개인전에서 전시하기도 했고 같은 제목의 산문집을 같은 해 ‘현대문학’에서 다시 펴낸 바 있다. 남화연의 《작전하는 희곡》 《제3세계 심포니》 등도 비슷한 구성을 띠고 있다. 한편 그림 없이 오로지 글만 써서 책을 내는 경우도 있는데, 작가 김범의 1997년 《변신술》은 이미지 없이 텍스트로만 국문, 영문, 일문, 중문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또 다른 책 《고향》은 〈도시와 영상: 의식주〉전(서울시립미술관, 1998)에서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시는 분, 고향을 알아도 감추고 싶어 하시는 분, 어딘가 작은 산촌 같은 곳이 고향이었더라면 하시는 분”을 위해 제작됐다. 전시에서 광고 전단지를 보고 작가에게 엽서를 보낸 관객에게 무료로 선물했던 《고향》은 이제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 박주연 김주현 박화영 구민자 김영은 김범 유병서 등 최근 텍스트로만 책을 내는 작가가 꽤 많아졌다. 특히 최근에 발간된 《본문 없는 주석》은 미술가들이 직접 쓴 소설을 모은 책이다. 기획자는 “텍스트를 드로잉으로 사용하는(것처럼 보이는) 16명의 작가들에게 ‘글쓰기’의 의미을 살피면서, 매체 전환에 따른 상상력의 활성화와 전환을 꾀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글들은 어쩌면 전시장을 찾은 관객보다 많은 수의 독자를 확보하게 되면서도, 전시장에 놓인 작품처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직 시각예술 중심의 미술 현장에서 작가의 텍스트를 평가할 만한 가늠자도 없을 뿐더러, 미술저널에서 조차도 이러한 사례를 다루기가 방법적 측면에서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니다.

(오른쪽) <박용석 귀국보고전: 소비하고 남겨진 물건들> 리플렛 뒷면 2008 (디자인: 이경수)

범주화하기 어려운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 아트

이렇게 공공미술의 방편으로 출판물을 활용하거나, 글과 그림을 모은 책 외에도 ‘인쇄’라는 매커니즘을 살려 프로젝트화하는 출판물 아트의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카테고리화하기에 애매모호한 점도 많고 여러 가지 특성이 동시적으로 드러난 경우도 많다. 가령 작가 Sasa[44]는 지독한 수집증과 편집증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가 평소에 모은 음식점 영수증, 은행의 순서대기표, 영화표, 교통카드 사용 집계, 통화 내역 등을 ‘연감’으로 모아 2006년부터 매년 내고 있다. Sasa[44]는 2006년 《쑈쑈쑈: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 책자를 시작으로 ‘슬기와 민’과 박미나의 협업으로 《A Revised Inventory of Curating Degree Zero Archive》(2007), 《Heavy Metal (News) Around the World》(2008), 《人事書》(2009),《Our Spot: Tokyo》(2010) 등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다. 또한 작가 홍승혜는 평론가 배리 슈왑스키와 공저의 시집 《Ways》와 플립북 《말나무》, 작품집 《Method of Space Cultivation》(2007)과 《Organic Geometry》(2009)를 펴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한 《지금 여기 서울》(2005)과 미디어버스가 제작한 《공공 도큐멘트: 서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행한 《+82》와 《커뮤니티 프로젝트》 등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활동가들이 워크숍을 기반으로 한 활동 사항을 ‘출판물 아트’로 정리한 경우다. 미술평론가 반이정이 작가 최경태와의 협업으로 대안공간풀에서 열린 경원대 졸전에 서양 고전 명화를 포르노그라피로 패러디한 책자 《예술에 있어서 외설적인 것에 대하여》(2003)도 특이한 사례이며, 《D.T》의 1,2권은 디자인 분야로 분류되어 있지만 미술평론가 임근준 이영준과 작가 구동희 잭슨홍 김상길 박윤영 이동기 권오상 등이 참여해 책 위에서 다양한 실험을 펼쳤다.
‘출판물’을 이용한 작업들은 이제 미대생들의 졸전 작품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신진 작가들 사이에서 트렌드화되고 있다. 특히 이들에게는 포트폴리오를 대신하는 홍보물의 역할도 되어 주고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렇게 출판 프로젝트의 다양화, 활성화 현상을 목격한 작가들은 전시 도록이나 화집을 만들더라도 책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출판 프로젝트가 될 수 있도록 제작하기도 한다. 양혜규의 2009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도록과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생성하는 멜랑콜리 》는 한 작가의 개인 저작물이라기보다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읽는 단행본에 가깝다. 또한 우순옥 양아치 김주현 임흥순 김상돈 등은 전시 도록이면서도 하나의 기록물이나 전시의 배경을 이루는 스크립트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물론 전시를 만드는 기획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발견되는데, 아예 출판물 자체에 주목하는 급진적인 전시도 기획되었다. 2004년 큐레이터 최빛나가 아르코미술관에서 기획한 〈이것은 연애편지가 아닙니다〉전은 참여 작가들에게 전단지를 제작하게 해, 전시 기간 동안 대학로 주변에 배달되는 신문에 이 전단지들을 끼워 배포되도록 했다. 또한 2008년 갤러리팩토리에서 개최된 〈출판_기념회〉전은 ‘선출판, 후전시’라는 방법으로 작가들에게 각자 출판물을 먼저 만들고, 그 부산물로서 전시를 여는 것이었다.

독립잡지 시대, 유통과 보존이 관건

현재 ‘출판물 아트’의 필드에서 가장 뜨거운 분야는 독립잡지다. 사실상 위에 기술한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 아트의 축약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독립 잡지(혹은 대안 잡지)는 문화예술 전반으로 주제를 확장, 사진 드로잉 글 그래픽디자인 등 지면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수록하되, 광고를 받지 않고 비영리에 가깝게 운영되고, 매니아층을 위해 소규모로 정기/비정기로 발행되는 책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움직임의 시초는 1990년대 후반  평론가, 이론가 등이 글을 모아 잡지 형태로 발간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1998년 후반 온라인 게시판에서 확대된 《포럼A》는 동시대 미술과 사회 문화 전반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며 새로운 담론의 창으로 큰 역할을 했다. 미술평론가뿐만 아니라 작가, 문화활동가 등 다양한 이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소통의 창이었다. 실질적으로 《포럼A》를 제작했던 대안공간풀에서는 현재 보다 가벼운 포맷으로 《6페이지》를 제작하고 있다.
2004년 미술평론가 김장언 김현진, 작가 양혜규 이주요, 디자이너 별이 조직한 ‘우적’(Friendly Enemies)은 2005년 비정기 간행물 준비호 《마돈나 루이자 베로니카 치치오네》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변모하고 있는 국제 미술 현장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 국내 현대미술의 제 문제를 짚어 냈다. 잡지는 우적의 멤버들이 실제로 만나거나 온라인 채팅 등에서 나눈 대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화자를 따로 적지 않고 전체 텍스트가 ‘콜렉티브 라이팅’이라는 방식을 최하고 있다. 이 간행물은 이후 2007년에 2-1호를 국문과 영문으로 출간했다.
《워킹 매거진》은 2006년 여름 현시원 안인용 황사라가 창간, 지금까지 7권의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사회적, 문화적 이슈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작가-작품-독자’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또한 갤러리팩토리에서 발간하는 비정기 간행물 《VERSUS》는 작가 최승훈, 박선민이 아트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이 잡지는 특집이나 주제 없이 제호처럼 ‘이미지 vs. 이미지’ ‘텍스트 vs. 텍스트’ 등 두 가지를 병치시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2009년 계원디자인예술대학 내 H-Center에서 발행하는 《양귀비》는 ‘디자인 저널’을 표방하고 있지만 첫 호의 주제 ‘지리 정보와 지리 감각’에서 느껴지듯이 작가와 디자이너, 인문학자와 디자인 연구자, 공학자들이 참여하는 문화지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젊은 디자이너, 문화예술 애호가들이 교류의 통로로 제작되는 독립 잡지들은 홍대 앞 등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가운데 《가짜잡지》 《칠진》 《Nazine》 《쎄진》 《원피스》 등은 비교적 고정적인 발행 기간과 두터운 애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잡지는 태생적으로 영세한 프로세스와 저예산 등의 문제로 운영에 곤란을 겪기 일쑤다. 대형 서점에 입고되기 어려워 유통에 곤란을 겪던 중 최근에는 이러한 출판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의 더북숍, 효자동의 헌책방 가가린, 대학로의 이음 등이 있으며, 온라인숍 유어마인드(www.your-mind.com) 등에서 판매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립 출판의 생태를 발전시키기 위해 소규모 출판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전시나 북페어를 개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출판물 자체의 수집과 보관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김달진자료박물관, 아르코미술관의 인미공아카이브, 원서동의 인문학박물관 등이 주목 받고 있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던 주은지는 비엔날레를 준비하면서 〈어떤 나눔: 공공 재원〉 프로젝트를 마련, 주은지의 개인 소장 도서와 전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와 기관들에게 기부한 자료들이 모아 ‘자가 구성된 도서관’(Self-organized Library)을 아트선재센터에서 9개월간 꾸렸다. 현재 이 도서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책은 시작과 끝이 있는 무엇이며, 독자가 들어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심지어 길을 잃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출구를, 혹은 여러 개의 출구를 찾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 가능성을 찾는 공간이다.”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처럼 책은 미술가에게 자유로운 공간이며, 무한한 우주가 되어준다. 앞으로 출판물은 어떤 모습으로 또 다시 진화하며 새로운 예술을 담아낼 것인가. 출판물 아트의 행보를 ‘독자’로서 지켜만 볼 일이 아니다. 지금 바로 당신도 ‘저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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