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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0.01

Abstract

특집 New Decade, Hot Artist 29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뉴 밀레니엄'을 맞이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 10년 동안 동시대 예술은 글로벌리즘의 정착, 신자유주의의 범람, 테크놀러지의 발전, 포스트식민주의의 잔재 등 또 다시 재편된 환경에 놓였고, 시대의 정찰대이자 기수인 미술가들은 새로운 비전을 세상에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급변하는 담론과 형식을 반영하는 예술 행위들은 시각은 물론 청각 후각 촉각 등 우리들의 지각을 총체적으로 일깨우려고 한다. 2010년, 다시 맞이하게 된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지금, 변화를 멈추지 않는 세계미술의 지형도를 또 한 번 그려볼 차례다. 내일을 이끌어 갈 작가,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포착해 내는 큐레이터. art는 국제 무대를 발판 삼아 활동하는 한국 큐레이터 29명을 초대해, 그들이 전망하는 국제 미술계의 흐름과 그 방향을 주도할 작가를 1명씩 소개하도록 했다. art는 추천작가 29명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10년 세계미술의 비전을 찾아 나선다. 큐레이터 29명의 추천 키워드를 요약한다.

Contents

표지 올라퍼 엘리아슨〈Colour Experi -ment no.5 (180colour with Black)〉캔버스에 유채 180×180cm 2009

에디토리얼 Let’s Celebrate!_김복기

프리즘
30년 전으로 회귀하는 ‘삽질 공화국’_최열

아티스트 인 코리아
다니엘 부에티_김현

포커스
정상화|하종현_김복영
신미경|유현미_강수미
아트 인 부산 2009: 인터시티_쿠로다 라이지
노충현|김진_정현
포커스 오브 포커스_김복영

특집 New Decade, Hot Artist 29
올 라퍼 엘리아슨|플라비아 다 린|레이첼 해리슨|로만 온닥|에이 아라카와|차오 페이
유이치 요코야마|웬델리엔 반 올덴보그|GRL|씨엘 플로이에|제레미 델러|히토 스타이얼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하르|로랑 그라소|만다나 모가담|치우 쯔지에|안네 올로프슨
카메론 제이미|리암 길릭|에페 하인|첸 광|마이클 엠그린&잉가 드래그셋
토마스 데만트|이리나 코리나|에어눗 믹|랜디&캐트린|AVPD|마코스 노박|리차드 스트라잇메이터-트랑
김홍희_이대형_김승덕_문지윤_최빛나_서은아_조주현_최경화_김지연_김윤경_임근혜_김희진_
신보슬_박만우_양은희_이원일_배명지_김선정_강승완_한금현_김준기_김정연_우혜수_
서진석_양지윤_홍보라_신현진_고원석_김장언

이미지 링크 홍승희

아트인아시아 글로벌프로젝트
Soul of Asian Contemporary Art

신년 스포트라이트
‘10대 화가’ 이종원의 뛰어난 재능과 열정_선산

리포트인사이드
‘스스로 자라는’ 지역미술가들_전승보

현장 취재
2009 마을미술프로젝트_장승연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지역-테마-과정’의 공공미술

전북 완주 ‘폐교를 활용한 미술 놀이터 만들기’(공모 1)
진창윤 김혜진 〈미술 창작실〉 나무, 한지

‘지역-테마-과정’의 공공미술
서울에서 제주까지 마을 곳곳에 예술을 입히다

글|장승연·본지 기자

언제부터인가 ‘공공미술’이란 용어는 매우 친숙한 단어가 됐다. 문화관광부 주도로 진행된 2006, 7년 ‘아트인시티’가 이번 2009마을미술프로젝트로 이어졌고, 그 사이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시도 단위로 여러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지원해 왔다. 2010년에도 ‘공공미술’이 미술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로 그 자리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렇기에 2009마을미술프로젝트의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12월 17일 이른 아침, 기자는 ‘2009마을미술프로젝트 답사’를 위한 버스에 올랐다. 3일간 진행된 이 답사는 서울에서 강원도를 거쳐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선정 지역 21개 중 총 10개 결과물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보통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홍보를 위해 기자단 투어만이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을미술프로젝트 사무국에서는 별도로 참여 작가들이 서로의 결과물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렇게 마련된 작가들을 위한 자리에 취재를 목적으로 기자가 버스 한 구석에 슬그머니 몸을 실은 것이다. 그 뿐인가. 때마침 찾아온 불청객, 초강력 추위가 3일 내내 동행했다. 길 떠남의 묘미가 적당한 고생에 있다고는 하지만, 맹렬한 추위 덕분에 여정이 더욱 강행군이 되어 버렸다. 그럼 지금부터 작가들과 함께 한 답사에서 듣고 얻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이번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성과를 반추해 볼까 한다.

서울 용산 ‘심상의 쉼터(해, 달, 별)’(공모 1)
한국장애인협회 용산구지회 옥상에 마련한 야외정원 전경

지역성 부각, 다채로운 테마 가능성 열어

답사 버스는 3일간 경기 김포, 서울 수유1동, 경기 남양주, 경기 양평, 강원 인제, 충북 청주, 전북 완주, 전북 전주, 경남 부산, 경북 안동에 이르는 긴 동선을 그려 나갔다. 이번 프로젝트가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 고루 진행되었음을 직접 두 발로 느낀 셈이다. 한국의 공공미술프로젝트 대부분이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수도권보다는 다양한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가 살펴본 2009마을미술프로젝트의 경우는 지역에 대한 고찰이 단순한 겉핥기식은 분명 아니었다. 답사에 참가하기 위해 작가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것처럼, 참여 작가 중 대부분이 실제 해당 지역 출신이거나 오랫동안 거주해 온 토박이 작가들이 많아, 각 지역 및 공간의 지역적 문화적 사회적 의미에 대한 밀착된 고민이 보였다. 덕분에 각 결과물에 있어 다채로운 테마가 살아나게 된 계기도 된 것 같다. 더욱이 공모 3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테마가 있는 공공미술’을 주제로 설정하여, 실제 고장의 특성과 테마를 살릴 수 있는 공공미술의 바람직한 가능성을 실험했다고 본다.
답사 첫날 방문한 경기도 김포 사우동 계양천변 산책로 일대는 그 지역의 홍도평 평야가 천연기념물 재두루미의 서식지로도 유명한 점을 토대로, 재두루미를 비롯한 ‘새’와 관련된 모티프의 입체 조형물 6점으로 천변 일대를 꾸몄다. 강원 인제 팀은 인제의 대표적 문학가 시인 박인환을 테마로, 조만간 들어서게 될 박인환기념관 진입로에 그의 시를 모티프로 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방문해 보니, 실제 기념관이 들어설 장소 주변이 큰 대로변에 인접해 다소 삭막한 느낌도 들었는데, 그곳에 자리한 화려한 색감의 조형물들이 앞으로 기념관 주변 분위기 형성에 톡톡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전주국제영화제로 유명한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를 소소하게 장식한 전북 전주 팀, 답사에서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시대부터 자리해 온 반곡역을 그 지역의 역사를 담은 그림으로 구성한 미술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강원 원주 팀이나 부천시에 위치한 펄벅문화마을과 펄벅공원을 벽화와 조형물로 가꾼 경기도 부천 팀 등이 명확한 테마로 진행된 예라고 생각한다.

강원 인제 ‘시인 박인환-만남, 그 세월이 가면’(공모 3),
이원경 이미숙 서정자 배성미 변현수 〈시를 읽어주는 숲〉
스틸, 렉산, led, 모듈, 센서, 스피커, 특수도색 180×100×180~100×10×100cm

지자체와의 매칭 활성화

이튿날, 버스가 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의 한 폐교로 들어섰다. 전북 완주군에 위치한 이 폐교는 추운 날씨에도 공사가 한창이다. 전북 완주 팀이 리모델링한 1층의 마을역사박물관과 2층의 다문화가정 여성들을 위한 카페 및 청소년을 위한 미술 체험장이 완성되었고 이후, 완주군에서 별도의 매칭으로 10억 원을 들여 학교 전체가 개조에 들어간 것이다. 조만간 건물 내에 완주군 특산물 연구 공간이, 뒤편에는 지역 도예작가를 위한 가마가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즉 폐교 건물 전체가 문화 및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이렇게 전북 완주 프로젝트의 경우는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대표적인 사례로서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부산 사하구 팀, 서울 용산 팀, 경북 안동 팀 등도 크게는 시부터 작게는 동에 이르기까지, 지자체와의 매칭을 통해 재정적인 도움을 얻거나 앞으로 프로젝트를 더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일례로 충북 청주 팀은 주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용암동의 산책로에 인접한 아파트 울타리를 다채롭게 색칠했는데,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 올해 지자체의 도움으로 맞은 편 울타리 역시 꾸밀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동네에 벽화를 그려 준 경북 안동 팀의 경우, 벽화를 그리지 않은 집 주민들이 아예 벽을 직접 깨끗이 보수한 후 벽화를 그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각 지자체에 공공미술의 씨앗을 퍼뜨리고, 관심을 유도했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경기 김포 ‘김포 홍도평 생태 스토리’(공모 3)
정명교 〈물잠자리와 개구리밥〉 스테인리스 스틸, LED조명, 태양열집열판, 우레탄 도색 150×50×550cm

과정 중심의 프로젝트들도 방법

서울 수유1동 팀은 동네 한 곳에 자리한 한빛맹아원의 허름한 외관을 보기 좋게 바꿨다. 그 과정에서 건물 옥상 보수까지 이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건물 복도 내부도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직접 벽을 더듬으며 손으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놀이거리들로 꾸몄다. 수유 1동 팀은 그렇게 시각장애인들의 시각과 입장을 생각하며 작업하는 과정 중에 꽤 많은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이렇게 작가들이 과정 자체에서 뜻밖의 감동과 내면의 수확을 얻기도 하듯이, 직접 지역과 공간에 깊이 침투하는 과정의 미덕이 바로 공공미술프로젝트의 크나큰 자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적은 예산으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제시하기란 어려운 문제다.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대부분이 부족한 예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이번 역시 작가의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책정된 아티스트 비용(Artist fee)을 포기하면서까지 작업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도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예산이 충분히 책정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과물 위주로 프로젝트를 평가하려는 우리의 시각 자체에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대중들의 정서에 친밀하게 개입할 수 있는, 그 과정을 중시하는 작업들이 더욱 활개를 친다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마을미술프로젝트 중 몇 개 팀은 과정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이 부각된다.
답사 코스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사무국 측은 전남 함평 팀이 진행한 다양한 노인 대상의 행사들이 빛을 발한 계기라고 덧붙였다. 전남 함평 팀은 마을 가구가 얼마 안 되는 산내리마을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도예 체험, 부채그림 그리기 등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여기서 노인들이 그렸던 스케치나 글 등을 가급적 최대한 반영하여 결과물을 만들었다. 노인 및 주민들의 호응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좋았다고 한다. 물론 마을미술프로젝트 사무국에서도 강조한 것과 같이, 진행 과정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구색 맞추기 식의 불필요한 주민 협업은 분명 배제되어야 한다.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있어 ‘과연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늘 잊지 않는다면, 이것은 분명 어려운 부분이 아닐 것이다.

전북 전주 ‘Cineme Street-영화로 물들다’(공모 2),
박진희 송상민 김원, 전주 영화의 거리 초입의 문화광장 옆 공영주차장에 설치한 led 조명 640×3120cm

공공미술 작품, 보존과 운영에도 열정 쏟기를

3일간이 여정에서 기자는 작가들로부터 ‘정말 힘들었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예산이나 사업장 여건에 변수가 생기기 일쑤였지만,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이 점점 그들을 이해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주기 시작할 때 큰 보람과 책임감을 느꼈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렇게 작가들의 노력과 땀이 담긴 결과물의 훼손 문제는 전과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지역 주민들의 공공미술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해도, 작품의 일부분을 도난당하거나(답사 과정에서 실제 몇몇 작가들이 도난을 당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이들의 낙서 등 훼손 문제가 눈에 띄었다. 더욱이 작품 자체가 쉽게 변하거나  부식되어 버린다면 이는 얼마 후 처치 곤란의 흉물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경북 안동 팀이 신세동 성진골 일대에 그려 놓은 벽화를 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벽화야말로 한국의 공공미술에서 빠지지 않는 형식이지만, 안동팀은 단순히 벽에 그림을 그려 환경을 미화한다는 개념을 넘어 벽화가 더욱 깨끗이 오래 보존되도록 기본적인 처리에 충실했다. 즉 벽을 그라인더로 갈아낸 후 먼지를 여러 번에 걸쳐 말끔히 제거한 다음, 바니시를 두 번 바르고 내후성이 뛰어난 1급 도료로 페인팅한 후 코팅을 여러 번 덧바름으로써, 벽화의 수명을 최대 15년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작품의 지속성을 높이는 방안을 갖추는 것도 공공미술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기자는 이번 프로젝트가 내용 면에 있어 지난 행사들과 비교하여 괄목할 만한 변화와 성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벽화 혹은 장식 위주의 조형물과 스트리트 퍼니처 형식 등 ‘한국형 공공미술’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실 작품 형식의 한계보다는, 좁히기 힘든 대중성과 작품성의 간극과 격차가 여전히 작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도 있다. 또한 다수의 지역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을 지역 역사관이나 갤러리, 체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활용 내용이 조금 겹치는 인상도 받았다. 그러나 반대로 기본적인 문화 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은 지역들의 인프라 부족 현상을 떠올리자니, 무엇보다 이러한 공간들이 만들어지는 순간의 열정만큼이나 활발히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행사가 지속적으로 마련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2009마을미술프로젝트가 공공미술이 앞으로 나아갈 구체적인 가능성을 몇 가지 사례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앞서 차례로 언급한 테마 혹은 과정 중심의 프로젝트, 지자체와의 매칭 사례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2010년에도 공공미술이라는 단어의 활기찬 행보를 기대한다. 더 넓고 깊어진 시각과 함께 말이다.

‘스스로 자라는’ 지역미술가들

손몽주 <Departure> 고무밴드 가변설치 2009

‘스스로 자라는’ 지역미술가들
부산 뉴폼 그룹, 베이징에서 펌핑 하트(Pumping Heart)전 열다

글 | 전승보. 커미셔너

“전 선생님. 예산 300만원 있는데 해외 전시 만들어 줄 수 있나요? 전시장만 만들어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할게요.” 지난 봄, 뉴폼 대표로부터 느닷없는 전화를 받았다. 뉴폼 그룹의 베이징 전시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이미 한 두 차례 비슷한 제안을 거절한 연유로 또 거절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번엔 청년작가들의 전시라는 것에 솔깃해졌다. 뉴폼 그룹에 소속된 작가들의 면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부산에선 보기 드물게 실험성 강한 설치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뉴폼은 경성대 부산대 신라대 출신 12명의 작가들이 모여 지난 7년간 매년 2회 정도의 그룹전을 열어 왔다. 또한 지난 2006년 부산비엔날레에는 뉴폼의 공동작업(대표 작가 : 장숭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008년에는 김미애와 손몽주가 출품하기도 했다. 
작가들에게는 서운하게 들리겠지만 필자가 전시를 만들면서 이번처럼 편했던 경우는 처음이다. 뉴폼을 갤러리에 단순히 소개만 하면서 전시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베이징에 보낸 후 비교적 수월하게 초청장을 받았다. 새로 문을 여는 MK2 아트스페이스와 중국 현지의 아트에이전트는 어떤 대가도 없이 자신의 일처럼 나서주었다. 우리들은 “이런 작품들은 베이징에 소개할 만하다”로 의견이 일치했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일이 시작된 후 약간의 기금도 지원받아 무모했던 일들이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 베이징 현지 미술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들과 다름을 인정했다. 중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있는 컬렉터 가운데 한 명인 울리 시그(Uli Sigg)는 연신 “재미있다”라며 관심을 표명했고, 큐레이터 가오링(Gaoling)도 “중국미술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뉴폼의 설치작업들은 완성도가 높다. 색다른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작가 창신(Cangxin), 갤러리스트 티엔위엔(Tianyaun) 등도 이구동성으로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들에 관심을 보냈다. 그리고 이런 호평에 힘입어 중국 현지의 미술인들이 하나 둘 전시장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핸드캐리로 전시 작품들을 운송한 노고의 보람이 되돌아 온 것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안게 된 것이다.
  진행 도중에 생겼던 소소한 문제들은 늘 겪는 일인지라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했던 것은 전시회 개막식을 하루 앞둔 날, 혼자 차오창디에서 호텔까지 걸어가면서 이번 전시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생각했던 일이다. ‘젊은 지역작가들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과연 한국 미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베이징 전시는 그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필자와 뉴폼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필자의 지역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겨울에 다가서는 싸늘함이 누런 모래바람과 함께 밀려왔다. 호텔로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만 느껴졌다.

김미애 <국제시장 파라다이스> 종이 설치 2007

지역작가의 현실, 이중의 고통

최근 필자는 한국화가들에게 “한국화에 관심 좀 가져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몇 차례 받았다. 비평가나 큐레이터들이 죄다 인기종목인 비디오, 설치로 관심을 돌리거나 잘 팔리는 회화(서양화)나 조각 중심으로 전시 초대를 하고 한국 화가들에게는 기회를 좀체 주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불만이다. 필자는 이런 불평을 이미 10여 년 전 부산에서 공개적으로 받아 본 적이 있다.
당시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라는 요지의 퉁명스런 필자의 대답은 포럼의 질의자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아마 그 상처는 지역의 한국화가에게는 이중의 고통이었으리라. 이제 그것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되돌아 왔다. “서울에서 주목받기 위해 해외에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한다”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한 작가의 말은 필자에게는 아픈 화살이었다. 그것이 비록 자기 정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뉴폼 작가들과 함께 하면서 나 역시 그것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개막식을 끝낸 후 전시 뒤풀이에 참석한 영국인 작가는 “서울에서 전시하는 것이 베이징에서 전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효과적이지 않은가”라고 묻기도 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속사정 모르는 파란 눈의 이방인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지역 미술대학 출신 작가의 경우, 미술비평가나 큐레이터의 눈에 띄어 데뷔하기가 어렵다. 해외 유학을 다녀와도 이런 사정은 거의 변함이 없다.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성장하는 데에는 주변의 관심과 적절한 자극 그리고 미술계의 네트워크 같은 작가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요인들이 있다. 부산을 포함한 지역의 경우, 미술 재생산을 위한 지역의 미술시장은 미약하고 교류와 창의력 개발을 위한 창작스튜디오나 프로그램도 부족하다. 비평가나 큐레이터도 몇 되지 않으며, 뜻있는 몇몇이 진행하는 대안공간도 그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다행히 올해부터 문화예술위원회의 기금 지원이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기에 그나마 가뭄에 단비라지만 사실상 예산 규모는 목숨만 연명할 수준이다. 게다가 지역 미술대학은 경쟁률이 떨어져 미술학과의 존폐 여부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실정이다. 몇 년 후에는 대전 아래 쪽에 소재한 대학의 미술학과들은 모두 문 닫아야 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마저 떠돌고 있다. 예전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작가들의 탄식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서울에 소재한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신청하여 입주하게 된 작가들에게 난지스튜디오, 창동스튜디오, 고양스튜디오는 ‘트리플A’라고 불린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전에 가질 수 없었던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비평가와의 대화나 작가들 간의 상호 정보 교환, 심지어 나이 어린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원하는 컬렉터들까지 창작스튜디오로 찾아와 작업실을 기웃거리기 때문이다. 최근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서울 소재의 창작스튜디오들은 서울의 미술문화에는 르네상스를 가져다 줄 지 모르지만 지역미술의 서울 종속을 한층 공고화하는 셈이다.
“화단의 중심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트리플A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말은 젊은 작가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서 나왔다. 창작스튜디오뿐만 아니라 작품을 발표할 공간의 문제도 여전하다. 시립미술관이나 상업화랑은 이들에게 문턱이 너무 높다. 두어 개의 사설 대안공간이 부산의 젊은 작가들의 실험을 그나마 수용할 뿐이고, (상업 화랑들에게 공공성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상업 화랑들은 시장 가격이 형성된 서울의 중견 원로작가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 지역의 청년작가들은 정보를 교류할 장도, 전시를 할 장소도,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길도 막혀 있는 것이다. 뉴폼 그룹은 그래서 부산의 청년작가들이 스스로 살기 위해서 만난 ‘최후의 피난처’이며 동시에 ‘최전선의 진지’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조형적 이념을 위해 뭉친다거나 친목단체와 같은 그룹은 사치와 다를 바 없다. 뉴폼 그룹의 작가들이 한결 같이 “서로 간에 끓임 없이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보다 장점이다”라고 말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각인각색의 팀 컬러가 돋보이는 이유다.

변대용 <시력 테스트> 강화플라스틱, 레닌 2009

지역에서 세계로

인구 5만 명에 불과한 뉴멕시코 산타페에 갤러리가 수백 개가 넘는다는 것은 이미 그 지역이 미술시장의 중심지라는 반증이다. 뉴욕과 L.A.에 이어 미국 3대 미술시장으로까지 손꼽히는 이곳은 사막과 푸에블로 인디언 유적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현대미술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전략을 도시마케팅으로 내세웠다. 60년 전인 1949년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폐광촌에 불과했던 이 마을이 이제는 문화예술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꿈을 키우려면 부산을 떠나 서울로 해외로 가야하는 실정이다. 이것은 모든 지역이 마찬가지 사정이다. 아주 오래 전, 부산에서 작업하는 선배에게 서울로 가서 작업하자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서울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유명작가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쯤엔 생산이 문제가 아니라 관리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탓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인구 4백 만의 도시에서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조차 예술 마케팅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대도시의 예술 독점 현상이 있지만 우리와 같은 사정은 아니다. 지역을 거점으로 세계와 교류하는 곳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런 곳의 공통점은 지역 내에서 작가들의 프로모션과 전시 작품 판매에 이르기까지 예술경영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인적자원 개발은 물론, 문화공간 시설 확충, 교류와 소통을 위한 장치 등 예술이 꽃 피울 수 있는 유무형의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서울로 떠난 그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가 없다. 아마 뉴폼 그룹의 구성원들도 슬슬 서울이나 해외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아무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남 탓만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수도권 지역을 제외하곤 어느 지역이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래서 뉴폼의 베이징 전시는 ‘사연’이 많은 전시다. 그룹의 구성원들이 만약 서울 혹은 수도권 지역에 살고 있었다면 몇몇은 벌써 인기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뉴폼 그룹과 같은 울타리나 출혈을 해가며 자청하는 해외전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개막식 전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의 단상 끝에 필자는 이런 말이 생각났다. ‘스스로 자라는 지역미술인’. 이 전시를 통해 뉴폼의 청년작가들이 또 한층 불쑥 자라나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김경화 <Pigeon in the  City> 콘크리트, 시멘트 2009

가상의 공동체, 빈-장소와 비어 있는 얼굴

노충현 〈감시탑〉 캔버스에 유채 130.3×193.9cm 2009

가상의 공동체, 빈-장소와 비어 있는 얼굴

글|정 현

인간은 탄생과 함께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칙이 소속의 문제인지, 또는 ‘함께 존재한다’는 실존적 가치인지에 따라 공동체의 해석은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화의 그물망에서 공동체는 시장경제 구조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1980년대 자유를 찾아 울부짖었던 시절의 공동체와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21세기의 공동체는 분리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공동체가 국가적 이념을 추구했다면, 현대는 도시를 중심으로 개인적인 요구에 따라 선택하는 경향이 더욱 강한 것도 사실이다. 각각의 공동체가 서로 다르게 정의내려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공동체란 공통의 목표를 지닌 집단을 의미하며, 이 집단은 여전히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이 이상향이 이념으로 작용될 경우, 개인은 물론 사회적 가치관은 의외로 급속하게 뒤틀리며 심지어는 도시나 국가의 지형도마저 변형시키고 만다.
사실 ‘공동체’라는 말은 이미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닌 자체에서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장 뤽 낭시는 공동체 대신 ‘함께 있음’이란 단어를 선호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다양한 공동체는 교류와 단절을 반복하면서 필요에 따라 동질화와 타자화 전략을 사용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타자성 문제가 발생할 경우 ‘뱉어 내기’와 ‘먹어 치우기’라는 두 가지 극단적 전략을 사용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언급했다.(《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뱉어 내기’는 타인을 공동체 영역 밖으로 추방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로 병원, 교도소와 같은 푸코식의 다른 공간인 사회적 타자를 은폐하는 공간의 분리를 들 수 있다. 반면 ‘먹어 치우기’는 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질적인 것을 비이질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공동체 영역 안으로 유입시키는 태도로 소비 공간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정치 철학적인 태도를 중심으로, 나와 타인 사이의 인간 관계의 공유지에서 서로 소통하려는 의지를 이중적으로 드러내는 두 작가의 작업을 읽어 보자. 회화 작업을 하는 노충현과 김진은 권력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사회 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시각화하는데, 김진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견고해진 공동체의 현실을 얼굴 없는 거인으로 풍자적으로 제시하고, 노충현은 정치 권력이 디자인한 서울이라는 도시의 단면들을 메마른 감성의 색으로 번역하여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지형도를 그린다.

노충현 〈경연대회〉 캔버스에 유채 162×227.3cm 2009

빈-장소들: 뱉어 내기

노충현은 서울을 그린다. 그는 서울이란 이름으로 완성된 ‘가상의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실제 장소들에 관심을 가진다. 한강, 동물원으로 시작된 관심은 이번 전시 〈실밀실〉에서 형무소, 교도소, 용산 참사 현장, 박종철기념관과 옛 안기부 건물로 확대된다. 이 장소들은 타인을 타자화하는 배척의 공간이자 권력이 남용되고 법질서의 내외부에서 폭력이 행사되었던 곳들이다. 〈실밀실〉은 밀실의 폐쇄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작가의 조어이며, 삶을 일방적으로 획일화 또는 정형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은유하고 있다. 노충현의 회화는 실제 장소를 그린다는 점에서 재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장소의 선택과 한정적인 색만으로 회화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재현이 아닌 공공적 성격을 띤 개념적 재현으로 정의해도 좋을 듯하다. 작가가 주장하는 폭력은 사건의 이미지가 아닌 심리적인 불안감으로서의 폭력의 증후나 잔상이라는 설명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그의 빈-장소들은 사건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폭력의 질감, 그 공기를 회화적 감성으로 포착해 일종의 침묵의 공간으로 보여준다. 이 침묵은 의도적으로 지워진 소리, 즉 묵음에 가깝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마치 안젤름 키퍼가 색과 질감이 산화해 버린 학살의 공간을 그리면서, 고전주의적 역사화의 서사를 사건의 장소에 남겨진 흔적으로 대신하고 관객의 보편적인 심리적 불안감을 이끌어 낸 것처럼 말이다.
노충현이 첫 개인전부터 꾸준히 시도해 온 지루한 풍경이란 의미의 〈살풍경〉 연작(2004~8)에서, 한강변에 서 있는 존재감 없는 가건물, 철 지난 야외수영장, 장마로 사라져 버린 공원 위에 섬처럼 떠 있는 가건물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배척당하는 공간에 대한 응시였다. 〈자리〉 연작(2005~6)에서는 보다 실존적인 질문이 덧붙여진다. 작가는 동물원이 매우 연극적인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제국주의적 발상이자 근대화의 산물인 동물원 공간을 재해석한다. 〈고도를 기다리며〉(2006)라는 작품에서 동물의 우리는 마치 제목이 시사하듯 베케트의 희곡과 자코메티의 무대를 연상시키는 연극적 공간으로 재현된다. 실존의 의미가 부재하는 이 빈-장소들은 중심과 주변에 존재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밀실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 생성되는 중심이자 버려진 가장자리이기 때문이다.

김진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각 150×150cm 2009

비어 있는 얼굴: 먹어 버리기

김진의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는 정치경제적 입장의 세계화의 원근법을 그리고 있다. 작가 자신은 신자유주의 개념의 자본주의에 대하여 본인은 물론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거인의 이미지는 〈잭과 콩나무〉에서 차용했는데, 딱딱하고 권위적인 감청색 양복과 넥타이, 그리고 무엇보다 뭉툭하고 두꺼운 손은 과장된 원근법을 사용하여 얼굴 없는 권력자의 위상을 더욱 부각시킨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왕관처럼 보이는 덫, 포도주 잔, 사슬과 가면 등은 물질적 소유와 사회적 존재가 동일시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만연을 풍자한다. 동시에 작가는 이러한 자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토로한다.
세계화는 두 가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상품화’를 특징으로 하는 ‘욕망의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로서 인간의 존엄과 평등한 권리를 지향하는 사회 관계가 만드는 공공 공간을 가리킨다.(《세계화의 원근법》 강상중, 요시미 순야) 얼굴 없는 거인과 그의 팔이 붙잡고 있는 자본의 개념들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자, 보다 보편적이고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모든 이의 또 다른 희망을 대신하는 형상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상품과 그 가치에 대한 김진의 이와 같은 사유는 이미 이미지와 실제 물건을 맞교환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된 바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지(재현)와 실재를 대립시키면서 회화와 사회의 본질적인 관계를 묻고, 더불어 자본주의 개념을 비트는 실험이었다. 교환 프로젝트는 예술과 시장 구조의 일차적인 관계를 비교한 반면, 거인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자유시장경제 구조가 생산하는 공통의 욕망, 또 다른 유토피아의 몸의 형상이다.
다양한 자본의 상징과 기표를 쥐고 있는 수많은 손의 과장된 원근법은 회화 공간의 배치 속에서 권력 관계의 구조를 파악했던 푸코식의 사물 질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전시 제목인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로고는 원근법을 따라 디자인되었는데, 이는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삼면화의 배치를 차용하고 있다. 전시의 설치 역시 삼면화의 형식을 좇고 있지만 전시장의 한계가 이런 의지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적 형상과 회화의 근원을 중층적으로 번역하려는 의지는 회화적 재현 속에 포함된 공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현재형의 질문으로 이동시키는 동시대 작가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유토피아는 존재 불가능한 장소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토피아가 현현한 장소, 그곳을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 불렀다. 집단적인 믿음이 만들어낸 세계의 지형도, 지금 이곳이 바로 헤테로토피아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그려낸 세상은 무엇인가? 유토피아는 시대를 막론하고 재현되는 이미지겠지만, 헤테로토피아의 이미지는 실재를 찾아 유목하는 동시대미술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헤테로토피아를 재현하거나 고발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은 아닐 것이다. 두 작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식민지와 같은 가상의 공동체를 그들의 작업으로 어떻게 ‘재현’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김진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각 150×150cm 2009

Chancel J.W. Lee, 상상의 바다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과슈 110×80cm 2007

Chancel J.W. Lee, 상상의 바다에서

글|선산 기자

이종원의 그림 속에 흐르는 저 놀라운 정감의 실체를 과연 어떤 비평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이종원의 그림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충격에 흠뻑 빠진 이후, 위와 같은 하나의 즐거운 숙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그 숙제를 풀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그의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인 요인이 아주 특이하기 때문이다. 이종원은 이제 막 성인으로 접어든 청년이다. 그는 가족주의의 끈이 모질게 질긴 한국의 상황에서 보면, 아직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보호 대상의 아이에 불과하다. 그런 이종원의 그림을 과연 미술 제도의 영역에서 전문적인 논의 대상으로 다루는 게 옳은 일인지. 일말의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종원은 서울과 뉴욕에서 개인전을 펼치는 등 의엿한 작품 활동 경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그림의 크기와 양, 조형의 밀도에 우리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종원의 조숙한 발표 경력을 빌미로 ‘천재성’ 같은 성급한 평가를 들이대는 방정 또한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모든 관심의 초점은 이종원의 그림 자체에 있다.
이종원은 비근한 일상의 체험을 그림에 담고 있다. 그는 해외 여행 같은 시각 체험이나 독서, 음악 감상 같은 문화 체험 혹은 자신의 상상, 희노애락의 심리 변화 등을 그림에 쏟아낸다. 그림의 도상으로는 소 새 호랑이 용 돌고래 메뚜기 뱀 달팽이 하마 말 닭 코끼리 사슴 거북이 곰 공작 양 등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도시나 마을 산 바다 달 화산 나무 꽃 같은 풍경이나 자연을 그리기도 한다. 또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소재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가족이나 자화상 같은 인물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림의 소재가 어린 나이의 감성과 지극히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종원의 그림은 풍경화니 정물화니 인물화니 하는 상투적인 도식으로 묶어낼 수는 없다. 그의 그림에는 동물과 식물, 자연과 사물, 인물과 동물이 서로 교집합 혹은 부분집합을 이뤄내는 복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마치 ‘단어 잇기’ 게임처럼 ‘이미지 잇기’ 게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그림이 있다. 하늘 같은 푸른 배경에 떠 있는 둥근 달, 그 달은 바로 사람의 얼굴, 그 얼굴 속에 정겨운 코끼리 부자가 눈 코 입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고, 그 사람은 꽃무늬 넥타이를 메고 양 어깨에 날개를 달았다. 그뿐이 아니다. 이종원의 그림 한점 한점은 모두가 한편의 동화에 다름 없다. 이렇듯 이종원은 우리들 눈 앞에 펼쳐 있는 삼라만상을 하나의 상상화로 그려내고 있다. 그 상상으로 일궈낸 그림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살아숨쉬는 생명체로 꿈틀거리고 있으며, 그 생명체가 자주 의인화되어 다양한 감정까지 뿜어낸다. 그리하여 이종원의 그림 속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이 소중한 의미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종원의 그림은 가공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종원 자신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 작품 제목과 설명을 유심히 보면,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다. 그는 상상, 환상, 요술, 전설, 꿈 같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림은 시(상상력)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이종원은 그 바다에서 느끼고 그린다. “축음기 소리에서 코끼리의 울음을 듣는다.” “짜릿짜릿한 전기보드용 호신장화를 신고 하늘을 날고 싶다.”“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을 그렸다.” 그리하여 이종원은 화산 사람, 다이아몬드 얼굴, 날개 달린 신발 등 일반적 통념을 깨는 놀라운 형상들을 그려낸다. 그 형상들은 대상의 외형을 거침없이 꿰뚫고 생명의 본질로 육박하기도 하고, 마치 시간과 공간을 진공상태로 몰아넣기도 한다. 가슴 속에 표현의 광기가 넘실넘실 춤추는 그림이다.
이종원의 그림을 지켜보면서 나는 파울 클레와 장 뒤뷔페 같은 화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거장은 20세기 미술이 형식주의 미술로 대변되는 지적인(혹은 철학적인) 예술로 치닫고 있을 때,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예술을 천착했던 인물이지 않은가. 파울 클레는 예술의 근원을 민속박물관이나 아이들의 방에서 찾아냈다. 미개의 부족민과 어린이 그림에서 마치 우주의 생성과 소멸 운동 같은 마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한 장 뒤뷔페는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에 반기를 들고 ‘추한 그림’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두 예술가의 공통점은 그림의 세계를 순수하고 자발적인 내적 충동의 산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들 예술의 바탕에는 프리미티비즘의 건강한 생명력, 어린 동심과 같은 순수성에의 관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종원 그림의 게놈을 찾자면, 바로 이같은 ‘내적 욕구의 예술’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오르는 듯한 정열의 고양, 끝없는 상상력과 창의력, 편집광적인 강열한 도취감, 모든 것들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왼쪽·<감자 열매> 과슈 110×80cm 2006
오른쪽·<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 과슈 80×55cm 2006

2010 January Special - New Decade, Hot Artist 29

로랑 그라소 <노미야(Nomiya)> 팔레드도쿄 옥상 설치 18×4×350m 2009

2010 January special - New Decade, Hot Artist 29
새로운 10년, 새로운 비전
큐레이터가 뽑은 떠오르는 작가 29인

글|편집부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뉴 밀레니엄’을 맞이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 10년 동안 동시대 예술은 글로벌리즘의 정착, 신자유주의의 범람, 테크놀러지의 발전, 포스트식민주의의 잔재 등 또 다시 재편된 환경에 놓였고, 시대의 정찰대이자 기수인 미술가들은 새로운 비전을 세상에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급변하는 담론과 형식을 반영하는 예술 행위들은 시각은 물론 청각 후각 촉각 등 우리들의 지각을 총체적으로 일깨우려고 한다. 이러한 동시대 미술을 수용하는 장소 역시 변화하고 있다. 미술관과 갤러리 등 전시 기관들은 소통이 가능한 유동적이고 유기체적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생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차오 페이 <누구의 유토피아인가(Whose Utopia)> 싱글채널비디오 2006

2010년, 다시 맞이하게 된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지금, 변화를 멈추지 않는 세계미술의 지형도를 또 한 번 그려볼 차례다. 내일을 이끌어 갈 작가,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포착해 내는 큐레이터. art는 국제 무대를 발판 삼아 활동하는 한국 큐레이터 29명을 초대해, 그들이 전망하는 국제 미술계의 흐름과 그 방향을 주도할 작가를 1명씩 소개하도록 했다. art는 추천작가 29명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10년 세계미술의 비전을 찾아 나선다. 큐레이터 29명의 추천 키워드를 요약한다.
2000년 이후 글로벌리즘은 우리의 삶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었다. 추천 받은 29명 작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그들의 출생 국가가 북미나 서유럽에 몰려 있기보다는 아시아, 남미, 북유럽과 동유럽 등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작가의 국적은 동시대 미술에서 의미를 잃고 있다. 추천작가 중에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를 통해 타국에서 일시적으로 체류해 작업하는 작가들이 대다수이다. 또한 아예 다른 국가로 이주해서 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심지어 태생 자체가 ‘다국적’이라고 봐야 하는 작가도 있다. 지역 간의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민족적 정체성은 빛을 잃었지만, 상대적으로 개인 간의 네트워크는 강화되었다. 특히 통신과 운송의 발전은 아트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가와 기획자는 이메일, 메신저, 스카이프(인터넷 화상전화)를 통해 회의를 하고, 역시 웹을 통해서 작품의 데이터(영상, 사진의 경우)를 전송해 전시에 출품한다.

리암 길릭 <프리젠티즘(Presentism)> 런던 코비-모라갤러리 설치 장면 2005

그러나 그 무엇보다 글로벌리즘이 가장 가시화된 장소는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일 것이다.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동원된 대형 전시장은 전시 관람을 위한 장소라기보다 각국에서 몰려온 작가와 기획자, 컬렉터 등 미술인들의 ‘미팅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전시를 위해 작가나 큐레이터를 섭외하기도 하고, 공공 혹은 사적 재산으로 구매할 작품을 흥정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국가간의 경계는 무의미하며, 각 개인은 오로지 단독자로서 서로의 이해 관계에 따라 구속 받고 또 구속하게 된다. 세계 모든 장소가 ‘자유무역지역’인 동시에 ‘공동경비구역’인 셈이다.
전지구적 사회 질서는 해체와 구축을 반복하며 더욱 복잡다단한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전쟁과 테러에 대한 불안과 공포, 문화적 범주 안에서 혼성과 혼종은 이제 그 자체가 환경이 되어 버렸고, ‘떠돌이’들에 의해 생겨난 유목주의와 다문화주의는 우리의 관심을 중심에서 주변으로 인도했다. 또한 앞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나간 자취에 남아 있는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자기 비판과 함께 타자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급변화한 사회적 컨텍스트를 모티프로 하는 작가들의 작품에는 대립 갈등 타협 혼돈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예술이 자본과 정치와 밀접해 지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작가들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 양상으로 갈라진다. 미술시장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그리며 이러한 환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미술을 시대를 비판하는 저항의 도구로 이용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과거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과격하게 외치기보다는 개인적 체험을 객관화하는 ‘논리’를 세우려는 태도가 강조된다. 이때 수반되는 작업이 미시적 접근을 통한 연구, 리서치, 아카이빙이다.

제레미 델러 <이라크전에 대한 대화> 2009 뉴욕 뉴뮤지엄

2010년 이후의 작품 경향 중 가장 주목되는 점은 형식의 변화이다. 최근 현대미술은 공공미술 퍼포먼스 음악 건축 디자인 그래피티 오픈소스 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20세기의 미니멀리즘 프로세스아트 개념미술보다는 관계성과 상호 작용에 대해 주목, 단순한 관객으로부터의 인터랙션이 아니라 관객의 참여 자체가 작품을 완성 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들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어시스턴트팀과의 협업을 통해 오리지널리티를 거부하는 동시에 탈신화화와 수행성을 극대화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미술가의 역할이 프로듀서이자 이론가, 행정가 등으로 확대되었다. 결과물 역시 전시에 조형물을 출품하는 것 외에, 웹사이트 출판 토론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된다. 지적 유희를 즐기며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오늘의 작가들은 창조와 상상력을 통해 미학의 개념을 삶의 공간으로 확장시키며 자칫 빠져들기 쉬운 엘리트주의를 빗겨 나간다. 일상과 사회가 교차하는 지점을 모색하거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모아 행위와 언어 사이의 급진적인 ‘상황’을 제안하는 최근의 움직임들의 배경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한편 2000년 초반, 샛별처럼 떠올랐던 미디어아트는 최근 하이테크놀로지를 신봉하기보다는 스스로 그 이면을 들춰내며 다소 주춤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상 문화가 완전히 현대미술의 환경으로 정착하게 된 지금, 뉴미디어아티스트들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추구하기보다는 리얼리티와 시뮬라크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가상공간의 디지털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작가들과 또한 이들을 발굴해 새로운 미술사를 형성하는 큐레이터들은 서로 간의 예술적 신의를 바탕으로 동료애를 형성, ‘전위’를 향해 함께 또 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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