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Magazine

Art in Culture

2009.12

Abstract

특집 뉴밀레니엄 10년, 한국미술 핫이슈 10가지 부푼 꿈을 안고 뉴 밀레니엄을 맞이한 것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1999년에 창간한 이래, 아트인컬처가 10년 동안 다루었던 주요 기사를 반추하며 한국미술 10년의 변화상을 10개의 핫이슈로 정리한다. 문화정책, 공공미술, 대안공간, 미술시장, 레지던시프로그램, 지역 미술관, 미술비평, 신진 작가, 큐레이팅, 미술품 감정이 바로 그 이슈들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10년의 흐름을 개괄하고, 앞으로 또 다시 펼쳐질 10년을 전망한다.

Contents

표지  한순자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8

영문초록

에디토리얼

프리즘
    베를린장벽 앞에서 ‘분단’을 생각하며_안규철
    예술 교육, 이제 새로운 여행을 떠나자!_이영준

아티스트 인 코리아  
    유타카 이나가와_김현

포커스
    신호탄_진휘연
    배병우|김홍주_김정락
    정재호|지용현_이선영
    U. S. B_양은희
    포커스 오브 포커스_이우환

창간 10주년 특집  
    뉴밀레니엄 10년,
    한국미술 핫이슈 10가지
    유진상 김윤섭 조주현 김노암 심상용 박만우 최광진 윤제 양현미 김준기

해외 미술  리옹비엔날레  
    과연 더 나은 비엔날레가 올 것인가?_프랑크 고트로

크리티컬 포인트  
    다시, 지역성과 세계성의 ‘공존’을 묻는다_권미원

이미지 링크  배무영

온 사이트
    ‘길 떠남’의 예술, 대지의 생명을 향하여_김주영

나의 얼굴  임춘희

작가연구  
    한순자, 동그라미의 시학_로랑 헤기

전시 리뷰  
    미디어아트, 전기가 나갔을 때 대처방안|마더시티서울|극장
    유근택|제임스 라일리|김유섭|박동인|노정란
    알란 챨톤|곽수|조새미|이세경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최잔|김민형|김주수|박은선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길 떠남’의 예술, 대지의 생명을 향하여

<노마딕 빌리지>는 일정 기간 동안 예술가들이 함께 생활하며 작업하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길 위에서 작업하다’라는 컨셉트로 유럽 일원을 이동하며 활동을 펼치는 언더로드프로덕션이 기획을 맡고 있다. 뉴미디어 분야를 폭넓게 지원하는 오스트리아의 슈미에드(Schemiede) 재단이 후원했다.

‘길 떠남’의 예술, 대지의 생명을  향하여

글|김주영·작가, 홍익대 부교수

디지털 노마드, e-mail 한 통에 길을 떠나다

길을 떠난다. 왜 이리 설레는 것인가. 수 십 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도 다녀보았건만 왜 길을 떠나는 것은 그 순간마다 이리도 가슴 벅찬 것인가. 옥죄인 현실의 밑바닥에서 헤어나는 후련함과, 긍정적이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연민의 회한 때문인가. 무엇보다 닥쳐올 길 위의 불확실한 에트랑제르의 고독과 우울증적 슬픔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길 떠남이어서 인가. 나는 아무래도 그 얽힌 감성의 디오니소스적 제전에 스스로 뛰어드는 제물인 것 같다. 신의 품에 안기는 제물의 환영에는 숭고한 영혼을 향한 환희가 있다. 그것은 희랍적 거대서사가 아니어도 좋다. 배고플 때 쌀 한 줌의 신성, 그것은 생명의 힘이다. 생명성, 아름다워서 숭고한 것이 아니라 숭고하여 아름다운… 그 10일간의 제전.
6월도 끝나가는 초하의 나른한 어느 날, 파리 시절의 친구 프랑소와즈와 마드랜느(Francoise&Madeleine) 동성 커플한테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주영, 안녕. 올여름 바캉스 계획은 뭐니? 우리 그룹 타들라샹스(Tadla- chance:‘당신에게 행운을’이란 뜻. 나(김주영)는 이 그룹의 멤버다)가 〈노마딕 빌리지(Nomadic Village)〉라는 프로젝트에 초대 되었어. 그런데 나는 마드랜느와 작업 계획이 이미 되어 있어서 바캉스 초에 런던으로 들어간다. 너 관심 있으면 혼자 참여할 것을 프로젝트로 만들어 요청해 봐.”
그녀는 커넥션 메일 주소를 보냈다. 메일 주소로 들어가 보았다. 오스트리아 빈에 거점을 둔 ‘언더로드프로덕션(On the Road Production)’이 기획하는 노마드 촌 프로젝트의 기획자 크라우스(Klaus M둯ring)와 교신했다. 마침내 그는 나의 참여 계획을 수락하고 초대장을 메일로 보냈다. 크라우스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으로 록 음악을 즐기는 사진작가다.
크라우스가 이동의 마을, 노마드 촌을 구상한 곳은 불가리아의 초원 지대인 동북 쪽 파브리케니(Pavlikeni)란 마을의 변두리다. 동쪽으로는 구릉과 초지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서쪽으로 마을을 낀, 그러니까 자연과 마을의 중간지대다. 여기서 중간지대란?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도시도 전원도 아닌, 마치 브스타망(도시의 버려진 변두리를 ‘풍경’으로 담는 프랑스 사진작가)의 렌즈가 머무는 곳, 그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한적하고 삭막한 마을 변두리의 버려진 땅이다. 결코 낭만주의 풍의 전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목가적 서정이 능선과 메마른 초지 위에서 마른 풀을 뜯는 소떼들 사이로 적막하게 흐르는 그 잔잔함이 결코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않다. 때로는 폐허가 있고 때로는 서민들의 텃밭, 집 잃은 강아지나 닭들이 뒤지기 좋아하는 쓰레기장이 있기도 한 곳이다. 이동의 마을, 또는 노마드 촌이 자리를 잡은 곳도 쓰레기장을 불도저로 밀어 임시 공터를 만든 곳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서 더운 열기와 함께 파고드는 쓰레기, 마른 말똥 냄새가 이를 예고하고 있었다.
15여 년 간 파리를 중심으로 서유럽에 살았지만 동유럽권에 들어가 본 경험이 없는 내겐 불가리아의 파브리케니라는 마을은 지리학적 공간 추적마저 어려웠다. 수도 소피아에서도 기차로 4시간 거리의 구릉과 초원 지대의 내륙인데 웬만한 지도에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올 기약이 있기에 타자의 땅도 두렵지 않은 나다. 우선 베니스를 거쳐 육로로 파브리케니까지 가보자. ‘길 위에서 작업하다’란 컨셉트로 세계의 유랑인들이 그곳에 모여들 것이다. 그들과 동거 동락하면서 각자 작업하고 프레젠테이션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저마다의 삶의 길로 다시 떠날 것이다. 이것이 이번 노마드, 귀거래사적 구성의 ‘길 떠남’에 관한 구상이었다.

레인보우 히피(Rainbow Hippie)를 아시나요?
“주영, 여기 다수의 아티스트들이 레인보우 히피야.”

프랑소와즈가 귀띔해준 말이었다. 히피,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20세기의 대표적인 청년 문화의 하나를 형성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21세기 히피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이는 문화적 노마드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1960년대 히피들이 표방하던 직접적인 반전(反戰)의 타깃이었던 베트남전이 끝났으나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도가니다. 레인보우 히피들은 언제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혐오한다.
그들의 특징은 1960년대 히피보다 많은 문화 양상의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우선 청년 문화라기보다는 방대한 문화 의식적 집단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성연애자들로 보는데 물론 동성연애자들뿐만 아니라 트리플(3인이 동거) 성애, 독신 등 골고루다. 그러나 우리 노마드 촌에 프랑소와즈 동성 커플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히피가 아니었다. 1960년대 히피는 반사회적이고 약물중독자가 많다. 그러나 레인보우 히피는 사회생활에 적응을 잘하다가도 후딱 접고 히피 그룹에 참여한다. 가령 내 캠프 옆에 자리 잡은 미모의 엘레강스한 영국 여자는 비서직으로 돈을 벌어 은행에 넣고 카라반과 개 한 마리 그리고 현금인출카드 하나만 가지고 떠돈 지 1년이 되었다고 한다. 외모도 물론 가지각색이다. 삭발과 장발, 하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도 치마만 걸친 사내들, 장식을 한가득한 화려한 의상을 아침저녁 바꾸어 입는 여인, 마음대로들이다.
그중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1960년대 히피들은 아날로그적이었다면 레인보우 히피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을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며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디지털 노마드의 장본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1960년대 히피는 비틀즈처럼 록 음악을 중심으로 광장형 집단이었다면 레인보우 히피들은 좀 더 다양하다. 노마드 촌에 모인 레인보우 히피들은 모두 예술가다. 예술은 요리에서 사진 영화 안마 퍼포먼스 설치에 이르기까지, 생태도 금욕주의자 광신자 자연주의자 생태환경전문가 시인 요리사 안마사…. 하나 더, 다른 점은 광장이 아닌 작은 이동식 마을을 형성하며 전전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기본 원칙은 붙박이가 아닌 이동식 집이어야 한다. 노마드 촌을 기획한 언더로드프로덕션은 올해 불가리아에서 내년 영국으로 이동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레인보우 히피: 197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개하고 시의원에 당선되었던 하비 밀크가 피살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한 대대적인 게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무지개 빛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무지개 문양을 동성애의 상징으로 정착시킨 이 사건은 레인보우 히피의 발원이 되었다.
유럽 레인보우 히피들의 경우 양상이 다원적이며 집단 의식도 유연성이 있다. 디지털 노마드의 특성처럼 탈구조적이고 바이러스적 성향이 있으며 그래서 익명성을 보이기도 한다.

동유럽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택하다

8월 16일 아침, 돌이(나의 삽살 강아지)를 이웃 동화작가 집에 맡기고 작업실을 나섰다. 베니스공항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바캉스 시즌인데다 비엔날레가 겹쳐서인지 시내로 가는 심야 공항버스는 여행객으로 빈틈이 없었고, 밤의 열기에도 땀내가 배었다. 난관은 이때부터였다.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기차역전은 숙소가 모두 동이나 버렸다. 계획한 설치작업을 위한 오브제들인 광목 10m, 수지로 뜬 손, 그 외 소품들, 디카와 캠코더, 거기다 노트북까지, 배낭과 가방은 벌써부터 나의 작은 체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봇짐을 끌고 겨우 골목길에 간판도 없는 인도인이 경영하는 숙소를 찾은 것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미 기진한 상태, 이번 여정의 힘겨움을 예감하며 새우잠에 빠졌다.
8월 17일 새벽이었다. 날이 새자 그냥 숙소를 나왔다. 베니스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장 쟈르디니로 가는 배를 타기 전 역에 들어가 파브리케니행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약해야 했다. 동이 트는 베니스역 주변은 배낭족들의 노천 침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비싼 유로와 숙박비를 감안하면 내가 간판 없는 쪽방 숙소를 찾은 것도 사치스러울 정도인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베니스를 수번 왔었지만 처음으로 역 옆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화려하다는 성당에 들어가 조금 앉아 있었다. 그 웅대하고 화려한 그리스도교의 문화, 성전의 금장식 앞에서 난 솔직히 기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인간의 파라노이아적 시뮬레이션 앞에서 무엇을 간구할 것인가. 눈을 감고 생각 없이 앉았다 슬그머니 나왔다.
역전은 금방 여행객들로 활기를 띠었다. 역시 동구와 서구는 커넥션이 쉽지 않아 베니스에서는 소피아까지만 기차 연결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빌라크(Villach)에서 표를 끊어 소피아까지 가고 거기서 파브리케니까지 다시 알아보아야 했다. 그래도 그 순서대로 순조롭게 가면 다행인 것이었다.
그날 저녁, 빌라크의 플랫폼에서 막 떠나려는 기차를 앞에 놓고 역무원은 마스터카드가 통하지 않는다고 현금을 요구했다. 표를 받아 쥐고 기차에 올랐다. 이때부터 나는 동구권 문화를 실감하게 되었다. 기차는 모두 2차대전 때의 것으로 보였다. 무쇠 창문은 거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하오의 열기는 기차 내를 달구어 두통을 일으킬 정도였다. 에어컨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화장실은 질금질금 나오는 물도 끊기고 쩔은 지린내가 바람을 타고 열차 내를 채웠다. 침대칸은 기차에서 직접 역무원에게 10유로를 현금으로 주어야 시트를 건네며 잠자리를 정해 받았다. 전혀 말도 알아들을 수 없고 글씨조차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기차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역의 이름이 무언지 모르는 것이었다.
문제는 역무원에게 기차표를 내밀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차표에는 종착역이 벨그라드(유고슬라비아)로 되어 있었다. 결국 헝가리와 루마니아 국경을 지날 때마다 벌금을 물었는데 나중에 소피아에서 안 것은 빌라크역에서 지불한 요금은 소피아까지였고, 기차표에는 벨그라드까지로만 표시해 준 것이었다. 고의로 속인 것 같다. 한 프랑스 여행객이 충고해 주었다. “나도 그런 일이 있소. 그러니 표를 살 그때그때 확인하는 도리밖에 없소.”
30시간여를 기차에 있는 것은 지루하고 피곤했다. 8월 하순, 동구의 내륙 무더위는 우리네 그것보다 더한 듯했다. 이런 때는 옆자리 동행인에 따라 지루하냐 즐거우냐 정해지는 법이다. 마침 프랑스어를 하는 젊은 연인이 같이 있었다.

소피아에서 노마딕 빌리지로

기차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19일 저녁에 닿았다. 소피아에서 나는 쉴 겸 하루를 머물며 미술관과 도시를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유로보다 아주 싼 불가리아의 화폐 ‘레바’의 환율이 부담을 덜게 했다. 영어로 된 간판의 역 주변 게스트하우스에 방 한 칸을 정했다. 주인 아저씨와 소통은 제로, 눈치로 여권을 맡기고 선불하고 거리로 나왔다. 시내로 들어오니 러시아 정교 저편에 가톨릭교회가 있었고, 그 옆 이슬람 사원이 버젓이 있었다. 모두 들어가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했다. 이슬람 사원은 온 몸을 망토로 두른 엄숙한 청년교도의 지시에 따라 그가 주는 망토를 걸치어 팔 다리를 가리고 들어가게 했다. 빈틈없는 세라믹의 청백색 모자이크가 아름다웠다. 거리의 사람들도 중동의 건장한 체격, 갈색 피부를 가진 남녀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나는 이곳이 유럽이라는 것을 잊곤 했다. 슬라브 문화 속에서도 유구한 지리와 역사의 숨결 속에 흐르는 노마디즘을 읽을 수가 있었다.
중심가에 다다르기 전에 재래시장을 만났다. 식품을 사며 구경했다. 만나는 시민들은 서민스럽고 소박하고 선량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인박힌 사람들이다. 허지만 서구인들을 선망하는 듯이 보였으며 반면 드문 외지인들을 몹시 경계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소피아의 박물관을 돌아보며 미묘한 예술의 정체성에 빠졌다. 가령 고고학박물관에 나란히 놓인 직립 원숭이의 해부학적 골격과 그 옆에 놓인 인간의 그것 사이에 너무나 유사한 구조를 보며 인간의 동물 되기를 실감한다든가, 자연사박물관에 들어갔을 때 식물관의 방대한 채집 표본 전시를 보며 베니스비엔날레의 〈콰드라 메디치날레(Quadra Medicinale: 벨기에관 제프 게이(Jeff Geys)의 전시)〉 보다 더 실감나는 생태적 테마인 예술 콘셉트의 보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감탄했던 점 등이다. 소피아에서 현대미술관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 못됐다. 고전주의, 인상주의 또는 초기 추상미술의 서유럽 풍에 진저리난 나는 피곤하기도 하여 돌아오며 캔맥주 하나, 햄 한 조각 그리고 오이와 당근, 빵을 사들고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 파브리케니행 기차를 탔다. 2등 칸에도 좌석 번호가 예약돼 있지만 승객들은 적당히 앉는 것을 허락할 만큼 심성이 여유로워 보였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삭막했지만 고산지대를 지나며 횡으로 이동하는 동유럽 지형의 수없이 지나는 긴 터널들이 어둡고 무거웠다. 노부부가 나에게 여기서 내리라고 미소 지었다. 이 자그마한 시골 역의 오래된 낡은 역사와 노쇠한 화물차들이 인상주의 풍경화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표를 파는 창구의 여자도 모자를 쓴 역무원도 전혀 한마디 영어를 하지 못했고, ‘노마딕 빌리지’를 알아듣는 이는 없었다. 그 때 꽤 인텔리 모드인 여인과 대학생 같은 청년이 들어오기에 영어로 물으니 소통이 되었는데 그 여인은 자기가 노마딕 빌리지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그곳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마을에 이미 방송으로 우리의 프로젝트가 보도되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일부 지식인 외 주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언젠가 스페인의 작은 마을 까다케(달리의 생가 박물관이 있는 곳)에 갔을 때 세계적인 괴짜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살았었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은 별로 없었던 일을 떠올리면 예술가와 시민의 감성적 소통에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친절한 그 여인의 자동차로 가려는데 어! 이상하다 싶어 짐을 확인했다.
 “큰일 났다. 광목 두루마리를 기차에 놓고 내렸어”
나는 발을 굴렀다. “다 와서 잃어버렸어!” 나는 찾기를 포기하려 했다. 서유럽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끝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침착하게 역무원에게 이야기하고 역무원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통역에 의하면 역무원은 다음 기차가 닿는 정거장에 전화를 했으며 돌아오는 기차가 도착할 때 경찰이 그 짐을 가져다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다음 기차 편에 두루마리가 도착했다. 다행이 투명 비닐에 싸서 속에 이름 장소들을 명기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동구 사람들의 정직성에 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례를 받을 생각지도 않은 듯 무뚝뚝하게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낯선 여인은 낡은 디젤 자동차로 나를 노마딕 빌리지에 데려다 주었다.
마을을 통과하여 낮은 언덕을 지나 공장을 왼쪽으로 끼고 허름한 숲을 관통하니 시야가 트인 들판 앞에 팻말이 있었다. ‘노마딕 빌리지’. 나는 이미 와 있는 프랑소와즈를 차창 밖으로 불러대며 기뻐했다. 여인이 짐을 내려주고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 버린다. 그러더니 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 나의 모든 여권, 재산(?)이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차창으로 돌려주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버렸다. 정직한 사람.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네 식으로 인사를 잘 하고 싶다.

29일 오후 3시, 퍼포먼스를 위해 작가의 텐트로 모인 예술가들은 광목 띠로 된 표시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정원으로 이동했다.

21세기 디오니소스 제의(祭儀) 현장

노마드 촌, 주변이 낮은 구릉으로 완만한 능선에 둘러싸인 조금은 을씨년스런 외곽지, 금방 지나온 마을의 지붕들이 언덕 위로 조금 보이는 마을의 변두리, 평평히 불도저로 밀어붙인 검은 흙더미는 거의 쓰레기여서 이미 냄새가 주변에 배어 있는 임시 공간이었다. 바람이 스치면 일어나는 흙먼지에도 쓰레기 냄새가 났다.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코와 목이 벌써 알키한데 식사와 집회 기능을 갖는 백색 메인 텐트를 중심으로 이동식 집(이것이 우리들의 규약이다)이 이미 서너 채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간이 변소가 두 동 설치되어 있고 옆에 손 씻는 개수대도 마련되어 있었다.
반대편 그 너머에 집시들이 산다는데 그들은 가끔 마차를 몰고 언덕을 지나가거나 물을 길러 샘가에 오기도 했다. 집시 어린이들이 우리 마을에 구경하러 오기도 했는데 서유럽에서는 집시들이 도둑질을 하거나 어린 소녀 집시가 거지 또는 창녀가 되거나 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인식되어 있었다. 언덕 너머에 그들이 산다기에 가보고 싶었지만, 역시 친구들은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고 멀리서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결국 동네 꼬마들을 모아 그림과 공작놀이를 하던 일본인 청년 캠프에서 집시 꼬마들은 모든 것을 집어 가버렸다.
그러나 내가 만난 집시 가족은 친절하고 선량해서 모든 걸 주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끼게 했다. 나는 집시 가족의 마차를 타고 좋아했다. 기실 집시야말로 서구의 노마드 민족이다. 하지만 몽골의 노마드들도 그러했듯 정착하여 땅 뺏기 전쟁을 하고 자본의 축척에 영악한 머리를 굴리는 자들에게 그들은 문명이란 잣대에 의해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떠돌며 생존의 흔적을 길 위에 여기저기 남겨만 두었으니, 오늘날 우리는 부동산과 펀드에 눈이 어두워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의 노마디즘을 연민의 회상으로 바라볼 뿐…. 그들은 무력하게 전쟁과 자본에 밀려 저 지구의 귀퉁이에서 좀도둑질을 하고, 성을 팔아 연명하는 것이다. 세상은 모순의 카오스. 나는 우울했다. 그리고 나는 허망하나마 노마드의 로맨티즘에 빠지기로 했다. 괴로운 것이 싫었다.
프랑소와즈가 우선 이 프로젝트의 리더 크라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전형적인 북유럽 남자, 무릎이 모두 해진 모드의 바지와 티셔츠, 인민군 모자형의 낡은 창을 누르며 나를 맞는 가느다란 체형의 상냥한 남자였다. 그는 대형 버스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있었다. 지붕에 텐트를 쳐 잠자리를 하고 버스의 내부는 사진 암실, 주방 시설, 실내 잠자리와 책상, 기타와 악기 등, 책들이 산만하게 어질러 있었는데 숙소가 만만찮은 누군가가 잘 수도 있었다. 크라우스는 내게 메일로 원한다면 자기 버스 내에 머물러도 좋고 몽고식 겔도 있다고 했었다. 적당히 세운 임시 팻말 ‘노마딕 빌리지’ 입구에서 조금 내려다보이는 공터 가운데 백색의 중앙 텐트가 있는데 식당 겸 공동 집회장소다. 긴 테이블을 중심으로 대형 코카콜라 마크의 냉장고, 조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크라우스의 버스 뒤에는 엉성하게 천 조각으로 가려진 샤워와 설거지를 위한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에 이 장소는 동양인인 내게 아주 코믹한 풍경으로 비쳤다. 가령 어느 날 밥 먹은 접시를 씻으려고 막 이곳을 들어가려는데 이미 어떤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뒤돌아서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들은 대낮에 샤워를 하고 누드로 수건을 든 채 나오기가 일수였다. 토마의 마누라는 무척 뚱뚱한 여자인데 등에 수건을 걸친 채 나오는 모습이 보테로의 여인처럼 재미있게 보였다. 그런데 이런 진풍경들이 전혀 음탕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못내 거기서 샤워를 못했던 나는 프랑소와즈의 진언으로 초대 손님을 위해 마련한 언덕 너머 호텔방 열쇠를 받았다. 그리고는 이런 수줍음이 오히려 사삭스러워 보인다고 내심 미안했다. 우리가 상상했던 누드촌이 얼마나 자연스런 자연의 모습일까. 나는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끝내 그 노천에서 샤워를 할 수 없었던 나는 자연스런 자연 앞에 위선자인가.
이태리인 마르티나(Martina), 그녀의 선정적 언행은 지중해의 다혈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새벽녘 나의 텐트까지도 그녀의 웃음소리는 간헐적으로 새어 들어오곤 했다. 그녀는 밤새 떠들고 놀고 새벽부터 잔다. 내가 도착한 다음 날 그녀는 아침 식탁 앞에서 선언했다. “내일 떠나기 때문에 오늘 오후 작품 발표를 하겠습니다.”라고. 그녀는 판화가인데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미리 준비해 온 독성이 있는 화공약품에 노마딕 빌리지 주변에서 채취한 야생 열매를 으깨어 그 보랏빛 엑기스를 이 화공 약품과 섞어 물감을 만드는 행위였다. 그녀의 액션에는 산업 독성과 자연물이 물감을 만들어내는 생태계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우리 마을의 한 청년과 사랑에 빠져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마르타의 영화 촬영에 과감히 웃통을 벗고 엑스트라가 되어 주는 행위를 나중에 보여준다.
음악가로 상당히 명성이 있다고 누군가 귀띔하여 준 토마(Thoma& Michaella) 부부, 북유럽 게르만계를 확연히 알 수 있는 몸집 큰 아내와 터키인의 혼혈인 듯한 남편. 미카엘라는 언제나 요란한 웃음을 거침없이 터트리는 유쾌한 여인이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 날 밤 보여준 라이브 음악은 기타와 전자음악 반주를 곁들인 신나는 고별송이었다. 저녁 식사 후 언제나처럼 그날 밤은 미카엘라 남편과 크라우스의 음악 공연이 있었다. 크라우스의 버스 밑 짐 캐비닛을 열고 연주용 악기, 전자 앰프 등 기구들을 조립하고 조명까지 곁들이자 야외 음악공연 무대가 되었다. 이때 객석에 앉은 토마의 마누라는 좋은 해설자로 내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공연 경력에 에피소드, 나중에는 연애와 결혼 얘기까지 그녀의 높고 활달한 음성은 밤하늘에 그녀 남편의 음악만큼이나 퍼져나갔다. 그들은 그 다음 날 우리 마을을 떠났다.
처음에 도착하여 벤(Bean)을 만났을 때 인상은 몹시 조용한 여자였다. 삭발을 하고 어깨와 목을 지나는 끈이 있는 비키니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퍼포머였다. 밤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준 비디오에서 그녀는 구토 장면을 반복시키는 퍼포먼스 필름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인도와 네팔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현장에서 작품은 〈닥터 벤〉이다. 자신의 캠핑카에 뒷문을 열고 환자를 맞는다. 환자는 예술가들이고 벤은 ‘예술가’라는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준다. 프랑소와즈가 베드에 누웠다. 벤은 의료카드에 인터뷰 내용을 기록한다. 처방은 책을 하나 읽으라고 내어준다. 그 책은 김수자의 화집이었다. 벤은 나중에 마르타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등장한다.
라니아(Rania)는 비만한 체구를 가진 상냥한 아가씨였다. 남의 작업을 잘 돕고 거들고 편안히 대화하는 따듯한 성품이다. 사실 이곳에 모인 작가들 중에 미국인은 없었고 영국 여자 미리암 외 모두 다른 자국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으로 영어를 쓰기 때문에 각기 다른 악센트와 서투름이 있었음에도 의사소통에 별 불편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서적 분위기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라니아는 언어학 전공이라 더욱 친절하게 대화의 다리를 놓는다. 그녀의 퍼포먼스도 몇 나라의 언어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레슨 장면을 연출했다.

요리에서 사진 영화 안마 퍼포먼스 설치에 이르기까지

요리를 맡은 월테르(Walter), 그는 외모로 보아 힌두교도인인 줄 알았는데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한다. 큰 키에 수염과 머리 스타일이 힌두교도 같다. 이곳 낮 동안의 열기는 모두의 옷을 벗겨 놓기에 적합하다. 월테르는 문신이 가득한 상체를 언제나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인도인처럼 천 하나를 허리에 두른 그는 단단하고 반듯한 몸매를 은근히 과시하는 듯도 보였다. 첫날 프랑소와즈는 내게 “저 봐, 음식할 때 수염이 빠지는 것 아냐? 뭐 잘 생기긴 했지만….”하고 속닥인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신중하고 특히 음식을 정성껏 만드는데 감동했다. 음식 만들기를 예술로 생각하는 그는 요리가 구도의 길이라고 믿는 것 같다.
아침, 동녘의 지평선으로 해가 올라오면 나는 일어나 물을 길러 가는데 이 때 모두는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월테르는 혼자 묵묵히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이 신중한 점은 그는 해 뜨는 동녘을 향해 요가를 한다. 모친으로부터 배웠다는 완벽한 폼의 절제 있는 요가는 그의 문신이 새겨진 웃통과 나발의 머리 스타일과 함께 인도 사원의 아침 풍경을 연상케 했다. 그의 요리법은 아시아 야채와 소스를 영양학적으로 요리에 적용하고 이 과정은 식사 전 모두에게 설명된다.
아침은 사과 자두 등 과일을 끓인 스프로 시작한다. 그리고 빵 한조각과 밥에 갖은 건과류를 넣어 지은 죽을 먹고 차나 커피를 마신다. 그들은 오전을 대개 그렇게 느릿느릿 보내는 것 같았다. 점심은 늦게 오후 3시 정도다. 샐러드와 빵 그리고 전채로 과일 멜론이나 수박을 먹는다. 연쇄적으로 저녁은 7~8시다. 쿠스쿠스나 스파게티, 소스가 많은 밥, 그리고 현지 산 치즈는 파브리케니 마을에서 직접 만든 두부 같은 색깔과 모양의 단백한 유제품이다. 고기류는 없다. 그들은 채식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맥주를 음료로 많이 마시는데 알코올 중독자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하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미리암, 그녀와 개의 대화는 완벽해 보였다. “거렁뱅이 짓 하지 마라. 남에게 얻어먹지 말란 말야.”라고 말하며 병든 개에게 시간을 맞추어 약을 먹이는 정성을 보면 남달랐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더위를 이기려 애쓴다. 텐트나 자동차의 그늘에서 일기를 쓰는 사람, 몽고식 겔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는 이, 어린이들과 놀이를 하거나 할 일 없이 잡담을 하는 이…. 얼핏 모두 산만하게 보인다. 프랑소와즈와 마드랜느는 샘가에서 할 설치 작품을 준비하고 페인트 통을 들고 나선다. 그녀들 커플은 작열하는 초지의 메마르고 거친, 마른 풀섶 위를 헤치며 태양열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하게 샘가로 간다. 크리스티안은 아들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월테르는 또 저녁 준비에 바쁘다.
마크 마르타(Marc&Marta) 커플은 처음부터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숨 막히는 태양 아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고 더러운 쓰레기 봉지를 거두어 온다. 그들은 불을 사용하기 위해 관청에 들락거려야 했다. 건조기여서 어렵게, 그러나 결국 허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촬영 하루 전날 리허설이 있었다. 여기에 출연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한 노마드 촌의 작가들과 파브리케니 마을에서 자원 봉사 나온 초등학생과 주민들이었다.
다음날 촬영이 시작되었다. 마르타는 감독답게 “큐, 액션” “스톱”을 외쳐가며 장면을 연출했다. ‘미래 공동체, 아버지의 이름으로(Future Communities. The name of The Father, In Memoriam)’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었다. 심술스런 태양도 서산에 기울고 목동들도 말 소 양 염소 등 그들의 가축을 몰고 귀가 할 무렵, 어제 리허설에 참여했던 자원 엑스트라들은 삼삼오오 여기저기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옷을 벗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비키니 또는 상체는 전라에 슬립이나 살색 팬티스타킹을 입고 있어서 멀리서는 인체의 실루엣이 완전 누드로 착각될 수도 있는 형상이었다. 그들은 마르타의 지시에 따라 포즈를 취했다. 눈 뜨고 죽은 사체들이 산재해 있는 모습으로 마당에 나뒹굴어져 있는 인간 시체들의 모습이었다. 카메라 렌즈를 끌어당기면 눈을 뜬 채 부동의 얼굴 표정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효과를 냈다. 다시, 마르타의 신호가 떨어지자 삭발의 벤이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멀리서 나타나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리고 누드의 다른 남자와 이 시체 위로 물을 뿌린다. 가운데 마른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둘은 앉아서 불꽃을 응시한다.
프랑소와즈 마드랜느 커플은 ‘샘/샘(Source/Resource)’을 테마로 샘가에 설치작업을 했다. 주변 쓰레기장을 모두 청소하는데 다 같이 하루가 걸렸다. 다음, 물이 나오는 샘 둑과 벽을 핑크빛으로 페인트칠했다. 내가 “야~ 핑크, 에로틱하다”고 하니까 그녀들은 주영도 웃길 줄 안다는 듯이 같이 웃었다. 그녀들은 키치를 표방하는 유치하고 가볍고 즐거운 놀이를 했다. 마을 장에 가서 조화를 사다가 유치찬란하게 샘가를 치장하고 꽃집에서 파는 정원 장식, 토끼도 한 쌍 사다 놓으며 키득거렸다. 그녀들은 박사학위의 지식인이었는데 늘상 단순 재미 유치한 장면 연출을 앞에 내놓고 슬며시 개념적 텍스트를 내미는 친구들이다. 이번 이들의 종결은 샘 앞의 너른 바닥에 색색의 초크로 각자 자기 모국어로 무엇이든 텍스트를 쓰는 것이었는데 이 기호적 문맥들은 판독할 수 없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의미가 있어 보였다.
크라우스는 이 프로젝트를 주관하며 자기 작업을 하는 가장 바쁜 사람으로 화장실에서도 전화를 받더라고 친구들은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밥 먹을 시간도 없어 보였다. 수시로 마을 사무실에 가서 행정적 컨택을 해야했고 각 작가들은 저마다 요구사항이 달랐지만 그는 늘 친절한 매너를 잊지 않았다. 토마 음악가 커플이 떠날 때도 전 날, 낮에는 토마와 퍼포먼스를 했다. 그날 오후 갑작스런 회오리 바람이 노마드 촌을 휩쓸며 지나갔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메인 캠프 식당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뒤엎어 놓았다. 텐트가 주저앉았다. 냉장고가 넘어지면서 식품들이 나동그라졌다. 월테르는 이웃 캠프에 일본계 니아의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없었다. 니아는 전형적인 레인보우 히피 그룹으로 이 프로젝트 참여 후 다시 그 히피 집단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폭풍이 지나간 우리 마을은 아수라장이었지만 모두 힘을 합쳐 단숨에 원상태로 복구해 버렸다. 나는 내심 그들의 협동정신에 놀랐다.

김주영의 ‘쌀의 길’ 퍼포먼스. 먹물로 발자국을 남기며 광목 길을 따라 걷는다. 땅에 완전히 엎드려 몸을 대지에 대고 양팔을 벌렸다 머리 위로 모은다. 쌀 한 줌을 수지로 뜬 손에 옮긴다. ‘쌀의 길’이 완성된다.

여기 한 줌의 ‘쌀의 길’이 있다

토마와 크라우스는 작은 리어카에 앰프와 기타를 실고 언덕으로 연주하며 리어카를 끌고 걸어갔다. 〈노마드 사운드 스튜디오, 디지털 스튜디오에서의 꿈(Nomadic Sound Studio Drama at the Distel_Studio)〉. 웃통을 벗은 크라우스는 지칠 줄 모르고 전자 앰프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간다. 둘은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한참만에 언덕의 능선 위로 그들이 나타난다.
음악에 도취된 그 둘의 풍경을 보며 나는 〈서편제〉를 생각했다. 파리 시절 나는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난 솔직히 〈서편제〉를 공짜로 보기 위해 영화광인 프랑스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촌극은 벌어졌다. 프랑스 남자는 젊잖게 스크린에 열중하는데 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계속 울고 있는 것이었다. 너른 들판에 펼쳐지는 들풀의 물결을 헤쳐 걸으며 살기 위해 부르는 창의 메아리, 그 피맺힌 영가(靈歌)와 고수 소리가 나를 못 견디게 했나 보다. 거기 논밭이 어우러진 하늘에 닿는 들길, 그 길은 슬픔의 자락이었다. 그런데 파브리케니의 보리밭과 메마른 초지의 언덕은 전혀 다른 정서로 다가왔지만 ‘떠돈다’는 노마드적 맥락에서 사실 애잔한 우울증을 자극하기에 서편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날 밤 토마는 고별 라이브 음악 연주를 하고 자신의 인터뷰를 다큐영상으로 보여주면서 떠났다. 나중에 귀국하여 메일로 본 크라우스의 사진 작품은 흑백인데 마치 드로잉을 하듯 암실에서 수작업한 것을 보여주었다.
8월 29일과 30일, 프레젠테이션을 공개하며 초대 손님과 마지막 파티를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에필로그인데 크라우스는 친절하게 나에게 제의했다. 그는 프로그램 첫 번째로 나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행기 예약 관계로 29일 노마드 촌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후 3시, 태양은 조금도 양보함이 없이 강렬한 30여 도의 햇살을 노마드 촌의 언덕 위에 내리꽂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의 캠프 앞에 동료들이 많이 모여 주었다. 미리 설치해 놓은 광목 띠로 표시된 길을 따라 우리는 나의 ‘비밀정원’까지 걸었다. ‘비밀정원’은 노마드 촌에 도착해서 10일간 아침저녁 물을 주며 가꾼 불타버린 불모의 땅이다. 이런 버려진 땅은 주변에 널려 있어서 나는 50×100cm의 대지를 광목 끈과 조약돌로 경계 짓고 가꾸니 풀잎이 솟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대지는 경이롭다. 나는 광목 길에 먹물로 발자국 흔적을 남기며 작은 제식을 벌였다. 〈쌀의 길(Le Chemin du Riz)〉. 나의 아틀리에 흙(안성 분토골)에서부터 길을 떠나 서유럽에서 동유럽 불가리아의 파브리케니까지의 긴 여로를 회상하며 거기 비밀의 정원에 도달했다. 땅에 완전히 몸을 엎드려 대지에 댄다. 아주 완벽하게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십자로 벌리어 다시 머리 위로 모은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경건한 자세다. 자연의 신께 쌀 한 줌을 바치다. 비단길이 있었고 차마고도, 소금 길이 있었다. 여기 한 줌의 ‘쌀의 길’이 있다.
귀국을 위해 소피아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눈 씻고 볼래도 없는 동양인 세계에서 다행히 택시 기사는 현대차가 좋다고 호의를 보이는 바람에 택시 값을 마구 부른다는 주의에도 두려움 없이 공항까지 왔다. 다음날 아침 7시 비행기를 공항 로비에서 적당히 기다려 보자는 심산이었다. 수도의 공항이라지만 벌써 사람들은 뜨막하고 공항 내는 어둠침침했다. 안전을 위해 고립되지도 않고, 또 주변 사람의 느낌이 좋은 곳을 찾아야 한다. 출국 체크를 하는 스탠드 앞에는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배낭족 또는 서민스런 아주머니가 벌써 벤치를 차지하고 눕거나 봇짐을 다시 챙기고 있었다. 모두 호텔비를 쓰지 않겠다는 심사렸다? 슬그머니 저만치 빈자리에 나도 자리를 잡고 기차역에서 미리 사온 맥주와 빵으로 요기를 했다. 그리고 일기를 쓰고 좀 눈을 부쳐 보리라 짐 보따리를 베고 누웠다. 눕는다기보다는 새우처럼 옹크리고 배낭에 기댔다.
잠깐 꿈속에서 나의 강아지 돌이를 만났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몇 차례 시계를 보다 5시에 일어나 버렸다. 스탠드바에 불이 켜지자 그토록 힘겨운 여정에도 고이 간직한 비장의 식품을 꺼냈다. 컵라면 하나! 바에 가서 커피를 한잔하며 갸르송(서비스 맨)에게 요청했다. “물 값을 낼 테니 이 컵에 뜨거운 물 반만 좀 주세요.” 그는 미소로 돈을 거절하며 커피 내리는 뜨거운 물을 라면 컵에 듬뿍 넣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침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떠난 자의 행복이 더해서인지도 모른다.

김주영 1948년 충북 진천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8대학 조형예술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스님의 명상>이라는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제식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 부교수.

art in culture는 김주영의 퍼포먼스를 특별 기획으로 게재한 바 있다. <DMZ프로젝트-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을 위한 제의>(2000년 11월호). <시베리아 프로젝트-쌀의 영혼제>(2001년 11월호), <현해탄 프로젝트-회상과 노마디즘: 어느 조센진 농사꾼 이야기> (2003년 8월호), <티벳 옌징 프로젝트-하늘에서 소금이 내리다>(2006년 12월호)

과연 더 나은 비엔날레가 올 것인가?

리 밍웨이 〈움직이는 정원〉 인터랙티브설치 2009 Courtesy of the Artist and Lombard-reid Projects, New York. With the Support of Council for Cultural Affairs, Taiwan and the Taiwan Cultural Center in Paris

과연 더 나은 비엔날레가 올 것인가?

글|프랑크 고트로·디종 르콩소르시움 디렉터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9월 중순의 날씨 좋은 날, 제10회 리옹비엔날레가 개막식을 가졌다. 이번 비엔날레의 예술 총감독은 티에리 라스파이(Thierry Raspail)이며, 후 한루(Hou Hanru)가 큐레이터를 맡았다. 제10회 리옹비엔날레는 가능한한 다양한 국가의 예술가들을 최대한 많이 참여시키는 최근의 국제 비엔날레의 트렌드를 따르고 있다. 크고 세계적이고 젊고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대중에게 친근한 전시를 추구한다. 또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며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전시를 추구한다. 그리고 여전히 시각예술 파트를 담당한다!

페드로 카브리타 레이스 〈Les Dormeurs〉 혼합재료 2009 Courtesy of the Artist.
With the collaboration of Haulotte France

기획자 후 한루, 마오쩌둥주의 혹은 마르쿠스주의 노선

1997년 카셀도큐멘타를 맡은 바 있는 카트린 다비드(Catherine David)가 리옹비엔날레 큐레이터직을 사임한 후, 후 한루가 이 전시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최상의 역량을 발휘했고, 거기에 훌륭한 리옹비엔날레 전시팀의 도움으로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전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후 한루의 계획은 많은 설치 작품을 전시하고, 다소 순진해 보이지만 균형감 있는 비디오 아티스트들을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어느 전시장을 들어서건 간에 관람객들은 첫발을 내딛는 순간, 비엔날레에 와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비스듬한 벽에는 깜빡이는 비디오 스크린들이 걸려 있었고(불안해 보이지만 안전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한 암실에는 영상물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를 제외하고는 거대한 전시 공간들은 대부분 비어 있다.
후 한루는 중국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으며,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는 평판 좋은 큐레이터다. 최근에는 뉴욕 뉴뮤지엄(New Museum)에서 주최하는 세계 최고의 큐레이터를 뽑는 행사에 후보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천안문사태 이후 1세대 중국 예술가들을 세상에 소개하면서 명성을 쌓았고, 이후 보다 국제적인 무대로 관심을 확장시키게 되었다. 그는 출신이 다양한 예술가들을 통솔하면서 ‘예술의 바벨탑’을 구축하는 ‘비엔날레형’ 큐레이터로 성장했다. 그의 사회적 관심사의 근원은 아마도 그가 중국에서 교육받은 ‘마오쩌둥주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상은 예술가들은 물론 비평가(이제는 갤러리 인사들로 변모한)와 노조원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새로운 문화와 철학이 중국으로 급속하게 흘러들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독립적으로 보호받으며 명맥을 이어 왔다. 후 한루는 포스트상황주의는 물론 신자유주의적이고 대안세계주의(Altermondialism)적인 색채를 띤 마르크스주의적 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현대미술 비엔날레는 우리 세대의 예술적 문화적 이벤트의 주된 표상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새로운 경향을 대변하는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세계화 시대의 스펙터클한 사회 혹은 소위 ‘글로벌한 제국’에서는 그 내부에 포섭될 수 없는 ‘바깥 세력’이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외부의 부재’의 상황에 비판적으로 맞서거나 이를 타계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간들은 새롭게 생성된다. 현대미술과 문화의 장(場)은 바로 이곳, 이러한 사회적 참여가 접합하는 지점들에서, 하나의 중요한 비판 세력이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상상적 제안을 제시하는 통로로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주장할 수 있다. 만약 스펙터클의 사회가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규율과 지적 예술적 그리고 문화적인 체계를 강요해왔다면, 예술과 문화의 일꾼들은 필시,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전망과 전략을 제시해 세계가 스스로의 미래를 그려보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후 한루가 진술한 이번 비엔날레의 전시 컨셉트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글을 살펴 보자면, 흥미롭게도 그가 ‘예술과 문화의 일꾼들’과 미술시장의 현실, 그리고 현재 미술계에서 벌어지는 ‘스타 시스템’에 대해 상당히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가란 여느 갤러리와 옥션, 그리고 비엔날레와 같은 상황 속에 놓인 일개 노동자라는 것인가? 또한 국제적인 큐레이터란 마찬가지로 ‘엘리트 플러스’(마일리지 카드이름)에서 제공한 비즈니스 라운지에 앉아서 다음에 갈아 탈 비행기를 기다리는 일꾼이란 말인가? 비엔날레가 저항적인 공간이 되기를 꿈꾸는 것은 단순히 순진무구하며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올바른 발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규모의 국제적인 비엔날레들이 출현하게 된 객관적인 배경을 모조리 묵살해 버린 것이다. 국제 비엔날레는 기쁨과 즐거움, 명상과 지식의 공간이며, 결코 미술계의 질서를 뒤틀어 버리려는 의도를 지니지는 않는다. 비엔날레는 오히려 최선을 다하여 예술을 수호하고 유지시키며, 재생산하기 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비엔날레의 형식이 현대의 예술적 맥락에서 낡고 시대에 뒤쳐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엔날레 형식이 존속되고 발전하는 것은 국제화된 미술시장에서 여전히 비엔날레의 역할이 전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비엔날레의 중요성은 이에 따라 저울질되어야 할 것이다. 젊은 세대 작가들이 구사하는 모든 마케팅 전략은 이전 세대 작가(1990년대 초반의 yBa로부터 각종 이름과 색채를 내세우고 출범한 중국의 비판적 팝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가 구사했던 것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해 왔다.

사르키스 〈오프닝〉 송풍기, 신문 Courtesy Lyon Museum of Contemporary Art

집단 작업의 한계

후 한루는 29개의 국가에서 온 60여 명 작가들의 작품을 리옹에 있는 4개의 주요 전시 장소에 나누어 설치했고, 리옹 시내에서 정치적인 폭동이 자주 일어나는 위험 지역에도 일련의 작업을 배치했다. 세련되고 고상한 환경으로 변한 공업용 빌딩들에서부터 고전적인 미술관의 모던한 전시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전시 장소들은 비엔날레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다양한 건축적 상황을 제공해 주었다. 그 덕택에 후 한루는 새로운 세대의 비주류 작가들의 작품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수 있었다. 최근 예술가들이 집단 활동의 결과물을 전시하는 경우 종종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리는데, 이는 오히려 커다란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그 방법은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 진정한 개인적인 관심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예술의 형식을 회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집단 타마(TAMA)의 프로젝트는 집시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여러가지 규칙으로 인해 심미적으로 낙담한 듯하며 심지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이 프로젝트는 가정주부들과 간호학과 학생들을 위한 워크숍의 공허한 결과물일 뿐이다.
-헤헤 집단(HeHe Collective)은 그들이 미술가로서 성공하게 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카이엔 포르쉐 자동차에 의해 야기되는 오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장난감 자동차가 사용된다.
-소시에테 레알리스트(Soci럗?R럂liste)는 웹사이트를 통해서 국제 이민의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짜 입국허가증인 그린카드를 발급했다. 이 카드는 공식 문서로서는 전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지만, 이 작가들이 유명해지면 값어치 있는 예술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작가 3명이 만든 그룹인 시징멘(Xijing Men)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지역에 ‘서경(西京)’ 즉, 시징 (Xijing)이라는 수도를 건설하려는 꿈을 차근차근 구체화시킨다. 이들의 키치적이고, 유머러스한 작업 속에서 지정학적 이슈가 논의된다.
-중국 작가들의 양장 그룹(Yangjiang Group)은 카지노와 레저 공간을 재연하고, 이에 덧붙여 양장(Yangjiang)에 있는 축구 내기장과 전통 중국 정원을 결합시켜 흥미로운 공간을 창출해 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장소에서 본래 일어나는 활동이 이 새로운 공간 속에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내기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사회적 활동을 위해 미술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기능하지 않는 순수한 형태적 모방이며, 핏기와 활기를 제거한 일상적 활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개인이 제아무리 최선을 다 할지라도, 작업의 성패는 그룹에게 주어진 힘에 따라 좌우된다. 이는 작가들이 어떤 집단지성(集團知性, 다수의 개체가 협력이나 경쟁을 통해 얻게 된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집단적 능력)을 입증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비엔날레의 대부분이 개최되는 아시아의 국가들에서는 종종 개인이라는 개념이 무시되거나 심지어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히 혁명과 독재의 시기에는 ‘노동자들(혹은 민중)’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가치가 희생되는 사례가 많았다.

페드로 레예스
〈삽 속에 있는 권총〉 2008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Yvon Lambert, Paris. In Collaboration with FRAPNA, Rhone

대안적 형식을 전략으로 내세운 몇 가지 유형들

대다수의 작업이 맥 빠진 제안을 내놓고 있을 때, 몇 가지 작업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최고조로 높이고 있었다. 여기서 대안적으로나마 간략하게 눈에 띄는 몇몇 작품들을 의미가 아닌 형식적 전략들에 근간하여 유형별로 열거해 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서 소개되는 몇 가지 유형들을 통해 이번 비엔날레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너무나 많은 하위 범주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쪹 유형 1: 거대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 전시된 아주 작은 물체들
-사라 제(Sarah Sze)는 세밀함과 인내심으로 충만한 모형을 만들어 우주를 구축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타카히로 이와사키(Takahiro Iwasaki)는 바닥에 놓인 수건이나 검은색 쓰레기 비닐봉투 밖으로 툭 치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작은 건축적 구조물이 드러나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 일본 작가는 최근 아주 사소한 사건들과 보잘 것 없는 오브제들로 작업해 왔다. 소박함과 연약함의 미학은 역설적으로 어색한 오만함을 창출한다. 
-이안 키에르(Ian Kiaer)의 작업은 값싼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환경에 대해 이와사키와 비슷한 ‘비(非)기념비적’ 접근을 보여준다. 스티로폼, 바람을 넣은 얇은 비닐 풍선, 그리고 마분지로 만든 건축 모형들은 그 배후에 감춰진 어떤 이야기와 모호하게 연관되어 있다.
쪹 유형 2: 구멍가게와 벽면의 그래피티들
그래피티나 구멍가게의 값싼 물건들과 같은 구체적인 오브제를 나열하고, 슬럼가의 일상적 풍경을 뒤섞어 버리는 것은 분명 도회적인 환상이라 할 수 있다.
-마이클 린(Michael Lin)은 <하루가 변화시킨 것(What a Difference a Day Made)>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어느 모퉁이의 구멍가게에서 구할 수 있었던 모든 물품들을 사들여서, 전시장의 작은 공간에 가져다 놓았다. 관람자들은 이곳을 지나쳐서 두 번째 설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여기에는 앞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물품들이 형태별 혹은 용도별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다. 나무로 된 상자 속에 하나씩 놓여 있는 이 값싼 물건들은 이들이 본래 갖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나무상자는 언제나 오브제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즉, 처음에는 나무상자가 값비싼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그 안의 오브제들 또한 값비싼 것이 되고 만다.
-배리 맥기(Barry McGee)는 과감하게도 그래피티 문화와 도시의 폐허가 남긴 마치 해프닝과 같은 흔적을 결합시켰다. 길거리 로고를 캔버스에 옮겨 담고자 실로 안타까운 시도를 거듭했던 그래피티 작가 퓨추라2000(Futura 2000)과 그의 뉴욕 길거리 출신 동료들의 작업이 겨우 잊혀지고 나서, 미술계에 그래피티가 다시 소개된 것은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선사한다. 맥기는 뭉그러진 자동차들을 쌓아 올리고, 그래피티를 통해 도시의 야성적 면모를 드러낸다.   
쪹 유형 3: 전시장 입구를 장식하는 귀여운 벽지
-창 킨와(Tsang Kinwah)는 비엔날레의 메인 빌딩 입구에 있는 낡은 저장고들을 섬세한 꽃무늬 벽지로 장식했다. 그는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은 이 원통형 구조물들을 행복감을 안겨주는 색감들과 구불구불한 곡선을 이루는 문장들로 감싸면서, 마치 집과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
유형 4: 영화와 35mm 영사기의 마술
-알바니아 태생의 안드리안 파치(Andrian Paci)의 작업은 엔버 호자(Enver Hoxha, 알바니아의 정치인)의 숨겨진 발칸 공산주의와 강력한 독재자에 대한 숭배의 세계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파치는 자신의 방에 놓여 있는 35mm 영사기를 포함해서 영화가 상영되는 상황 자체를 환경으로 이용한다. 영사 슬라이드가 돌아가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깜빡이는 빛은 우리가 10대 시절 드나들었던 영화관에 대한 추억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영화 자체는 전시의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울을 깨뜨리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언젠가 외부적인 것의 영역은 무너지게 될 것이며, 그것은 당신을 산산조각나게 할 것이다.

사라 제 〈무제(휴대용 천문관)〉 혼합재료 2009 Courtesy of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Gallery, London 주변 환경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활용하는 방식은 이제 ‘비엔날레 아트’의 프로토-타입이 되어 버렸다. 특히 지난여름 영국 발틱현대미술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던 사라 제는 아주 작은 물건들을 모아 전시 장소에 녹아드는 ‘우주’를 만들어 냈다.

‘일상의 스펙터클’, 그 공허함에 대해

이러한 종류의 비엔날레 전시가 가진 장점은 각각의 프로젝트들이 카탈로그에 소개된다는 것이다. 물론 전시 카탈로그는 전시가 개막하기 전에 인쇄되기 때문에, 실제 작품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카탈로그에는 순도 100%의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며, 혼란과 우둔함의 절정에 다다른 글들이 함께 실린다. 카타리나 세다(Katarina Seda)의 글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난잡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련의 드로잉과 이를 해명하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내러티브로 끝난다.
대부분의 비엔날레는 “제발 조용히만 지내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어느 마을 공동체 전체와 연루된다. 이와 나란히 개발도상국가 지방 부르주아의 목소리에는 복수와 원망의 어조가 담겨 있다. 하지만 뭐 문제될 것이 있을까! 역사는 정치적인 것이건, 문화적인 것이건 간에 다시 씌어져야만 하고, 모든 이들은 모더니티의 테이블에서 환대를 받는다.
다양함과 자율성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대미술 분야로부터 스스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망명을 선택한 나는 예술작품에서 마주하게 되는 혁신과 창조, 기이함의 향취를 검토할 때 매우 신중을 기하게 된다. 나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새로운 ‘민속 의상’을 갖춘 사람들이 내놓는 다양한 제안에 쉽게 현혹되고 싶지 않다. 나는 필요하다면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공정한 ‘판정과 판결’을 내리고 싶다. 하지만 슬프게도 형벌이 없는 것처럼, 보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치에 맞지 않는 실제의 삶을 순수하게 흉내내는 것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일상의 스펙터클(The spectacle of the everyday)>은 실제보다 더 근사한 것처럼 행세하는 일련의 전시에서 드러나는 각종 한계들이 창출하는 스펙터클이다.

타카히로 이와사키 〈혼란 밖으로(복합체)〉 담요, 목욕수건 2008

비엔날레, 전위가 필요하다

이번 리옹비엔날레는 세계 도처에 퍼져 있는 비엔날레들을 두루 방문하다가 거치게 되는 하나의 거점일 뿐이다. 19세기 젊은 예술가들은 동료와 함께 그랜드투어(Grand Tour,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유럽, 특히 영국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한 유럽 여행)를 떠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역사의 놀라움과 무게를 체험했다. 그들은 함께 지식과 시간을 나누며, 베수비우스 화산재 아래 묻혀 버린 폼페이를 가로질러 나폴리에서부터 로마까지를 여행하며 고대 로마의 유적지들을 방문했다. 도중에 그들은 르네상스 화가들과 건축가들이 남긴 작품을 마주했으며, 매너리스트 조각가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회화와 조각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기존의 작품을 모작할 것인가를 배웠고, 영예로운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과 기쁨을 얻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그들은 그랜드투어를 통해 당대의 미덕을 대변하는 ‘정직한 사람들(Honest Men)’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숭고한 길을 걷는 대신에 원기왕성하고 저속하며, 역동적이며 사납고, 세련되면서도 무지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쓸쓸한 거대도시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여행을 감행해야만 한다. 이들은 이러한 무시무시한 도시에 흡수되어 버린 큐레이터들이 갈고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나는 비서구적인 역사적 노선들을 그리워하며, 서구 중심적 세계에 아무런 향수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키치적이며, 급성장한 사치스러운 폐쇄적 공동체를 지향한다. 
모든 대륙은 그들만의 노선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비단과 향신료, 소금과 안료의 무역, 그리고 순례 여행 등에 의해 닦여진 길이다. 오늘날의 ‘길’은 가상적인 것이면서,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길의 가상성이 탐구되지도 않을 뿐더러, 새로운 경로를 심각하게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길에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을 가진 몇몇 인물들이 지나간 형편없고 희미한 자국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편협한 사람들이 군림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들의 영토는 전세계를 아우르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선구자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발명가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뱀파이어들이 활개치는 기나긴 밤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 비엔날레의 현장을 마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는 루나파크나 디즈니랜드처럼 여기며 방문한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돈과 부산물이 그곳으로 유입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껏 역사적 영웅의 자손들로부터 능욕 당해 왔다는 사실을 지각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뒤를 돌아보고 재빨리 전위를 살펴야만 한다.

변형의 공간, 옛 장소의 의미를 누리다

임옥상, 시모네 카레나, 마르코 브루노 〈놀다가세요(Riot Felice)〉 방패, 방패 프레임, 핑크 페인트 2009

변형의 공간, 옛 장소의 의미를 누리다

글|진 휘 연

최근 미술관 건물을 포함한 외형적 특징이 미술관 자체의 본질과 동일시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어느새 소장품보다는 그것을 수용한 미술관의 가시성이 전면에 부각되고, 미술관 건축이 현대사회 ‘스펙터클’을 향한 애정과 열망의 모본이 되는 듯하다. 강력한 시각적 흥미의 본체는 결국 자본의 집결과 특정 역사와 사회의 취향이라는 전혀 연관성 없는 내용을 앞뒤로 엮어 포장한다. 전시장의 개관을 알리는 행사 역시, 전시의 성격보다는 홍보의 수단으로 변형되어 관객 동원을 향해 프로그램화된다. 그래서 전시장의 오프닝은 전시와 전시장이라는 외관, 그것을 전달하는 포괄적 행사들이 서로 섞이고 혼합됨으로써, 새로운 장소성을 둘러싼 이질적 의미의 파편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분명 출발은 흥분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술 외적 여러 방법들을 통한 사회적 인식을 유발시키려는 의도는 현 사회가 갖는 마케팅 위주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신호탄〉전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역사적인 기무사가 이전하게 되면서 많은 논의 끝에 미술관 서울분관으로 소속된 건물의 새로운 성격을 알리는 기념 전시이다. 기무사 건물과 마당을 모두 전시장으로 사용한 일종의 축하 전시이자, 미술관으로서의 정식 출범을 알리는 말 그대로의 신호탄인 셈이다. 제목부터 그런 시작의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 이번 전시는 같은 공간에서 바로 전에 열렸던 〈플랫폼〉이나 〈아시아프〉와 어느 정도 비교될 수밖에 없는 어려움과, 동시에 매우 미술관과 거리가 먼 동선과 건물의 형태를 고려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서용선 〈감시 B, C, D〉 철망, 판재, 아크릴릭 2009 (‘미술관 프로젝트’ 전경, 소장품: 서용선 〈심문, 노량진, 매월당〉 캔버스에 유채 1990)

공간적 가능성에 대한 고지식한 해석

과거 군사시설로서의 권력적 건물은 이제 미술제도에서의 새로운 권력으로 변했다. 그런데 낡고 조금은 위압적이며 매우 딱딱한 건물은 이런 점에서 오히려 탈권위적, 탈권력적인 부수적 장점을 얻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고전적인 미술제도권 건물이 주는 획일성이나 흰 벽, 흰 방, 그리고 높은 천정은 이제 관객들에게 하나의 권태가 된 듯하다. 그런 점에서 기무사라는 공간은 이전의 기호로서의 의미를 적당히 상실한 채 낯선, 그래서 조금은 재미있는 장소로서 작동하고 있었다.
하나의 방으로 구획된 공간이 한 명의 작가에게 할당된 일종의 기본 유닛이 되고, 각각의 작가가 따로 공간에 배치된 점은 기무사 건물이 갖는 가장 두드러진 조건이자 한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공간 안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즉 선배 작가의 작품에 대해 재해석 변형 숭배 조롱 차용 등을 시도할 것을 권고받은 젊은 또는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이 짝을 이뤄 공존하는 것은 아쉬웠다. 먼저 새로운 작품과 그들의 참고 작품의 관계가 그다지 뚜렷하지 못했다. 이우환을 소재로 한 서승모의 작품 같이 공간과 개념, 형태에서 모두 원작과 통일된 관계를 표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참여 작가들은 그들의 독자성이 더 강하고 두드러져 보였고, 소장품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다. 개개의 작품에 작가명과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채 같은 공간에 전시되기 때문에, 다른 작가의 작품임에도 한 작가의 작품으로 여길 수 있는 오해의 소지도 있었다.
마치 공식적인 행사에 어울리는 격에 맞는 어른들을 모신 듯한 배려도 조금 어색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소장품의 역사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선 다른 방식의 전시가 시도되어도 좋았을 듯하다. 1층 원로작가들을 위한 방만 가벽을 두르고 보편적인 전시장처럼 꾸민 점도 〈신호탄〉전의 전반적 분위기에 어울렸는지 의문이다.
각 방마다 한두 명의 작가를 배치한 점, 공간을 십분 활용하기보다는 공간에 종속된 작품들과 필연성이 떨어지는 짝을 이룬 작품들, 하나의 개념이나 주제어로 수렴되지 않는 내용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있었다. 고지식할 수밖에 없는 공간과 장소의 해석,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이 가진 사회적 의미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고려한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특징들, 이질성과 다양성, 맥락으로부터의 해방은 오히려 이 전시를 흥미롭게 만들어 주었다. 결국 일관되고 통일된 주제보다는 각각의 작품을 통한 소통이 훨씬 직접적이고 매력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군호관(강당)에서 오프닝 퍼포먼스로 진행된 이용백의 〈엔젤 솔저(Angel Soldier)〉는 비디오 영상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전시장에서 상영된다.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100명의 꽃무늬 군복의 군인들은 줄지어 매달린 꽃들과 잘 구분되지 않으면서 시간의 흐름, 공간의 깊이, 움직임과 정지됨, 배경과 주체 등이 서로 섞여 매우 위장된 형태로 관객의 눈을 속였다. 실사의 기록임에도 마치 혼성된 조작처럼 보이는 영상은 군복이라는 기무사의 기호를 덧입고 환영과 실체의 개념을 매우 재치있게 풀어냈다.
또 하나의 역작은 1025마리의 유기견을 주제로 한 윤석남의 작품이었다. 전시된 별관은 본채로부터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고,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나무판 위에 그려지고 조각된 강아지들이 흙바닥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은 전시장을 완전히 압도했다. 버려진 강아지들은 그 곳과 연결된 부속 공간 안에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는데, 낡고 음침한 이 장소가 떠도는 강아지들에게 하나의 안식처가 된 듯 보였다. 노마드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도 정해진 뿌리보다는 열린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다. 결국 유기견을 거두는 할머니에게서 임시 거처를 마련한 유기견들이나 이산(離散)을 사는 우리가 머무는 공간, 그 형태나 존재가 절대적 안식처가 되지 못함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기무사 건물이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할지, 파괴되어 다시 세워질지 알 수 없다는 점과도 비견되는 것이었다.

전수천 〈3D 공간 상상하기〉 혼합재료 2009(‘미술관 프로젝트’ 전경, 소장품: 〈당신의 자화상〉 1994)

제도 속에 갇히지 않는 ‘낯선’ 공간

전시는 최근 많은 관심을 받는 청년 작가부터 연륜이 묻어나는 작가들까지 참여의 폭이 다양했는데, 전체적으로 디자인이나 공예적 방법을 부각시킨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김지민은 핀과 단추는 물론 옷에 다는 라벨 등을 이용한 작품으로 수공예와 장식성을 매력으로 내세웠다. 그는 작가의 노동력, 그리고 거대한 크기와 시간을 주제로 했다. 라벨이 주는 조형성도 놓칠 수 없지만, 시간과 작업에 대한 과정의 중시는 작품의 또 다른 주제였다. 함연주는 머리카락과 레진, 에폭시를 이용하여 스크린과 창을 통합하고, 노동력을 집약하여 비가시적일 수 있는 경계를 지향하는 섬세함을 강조한 축소 지향적 작품을 제작했다. 
유승호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단어들은 언어의 구조와 의미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의 조형성도 발견하는 점에서 흥미를 주었다. 양진우의 왜곡되고 부분적으로 파괴된 카루설(목마)들과 유원지의 풍경은 신호탄을 축하해주는 다의적 의미를 내포했고, 임옥상은 건물을 반파하면서 그곳을 새로운 휴식처처럼 위장했다. 역시 기무사라는 장소성이 뒷받침된 작업이었다. 도서관 지하에 설치되어, 정치적이면서 정확히 채워지지 않은 중심어를 통해 더 큰 공포나 권력에의 강압성을 암시하는 작품들도 그곳의 특징과 이야기를 잘 살려주었다. 박재영은 도서관의 서가를 압수물건 보관창고로 변형시키고 바로 옆에서 취조 장면을 보여 주었고, 김태준의 투명한 거대 인체는 물적 크기와 함께 그것의 허상을 드러냈다. 온실에서 상영된 문경원의 기무사 다큐멘터리도 습하고 더운 열기의 공간과 어울렸다. 뉴미디어 작품으로 전준호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화폐와 권위, 그 속에 숨은 역사에 관한 허상들을 흥미롭게 표현하였고, 김기라의 작품은 현대 사회의 소비에 관한 여러 모양과 형태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폭죽 같았다. 
이번 전시는 경기도 과천에 위치한 현대미술관의 위치와 위상을 서울의 중심부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사건이었다. 기무사라는 매우 낯선 곳이 어느 정도 낯설게 남아 있기를 바라는 점은 미술관의 전형성, 보편성이 현대미술을 오히려 과거의 제도 속에 가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번 〈신호탄〉전은 그래서 기무사 옛 건물이 가장 큰 주인공이었다. 그 점에서 미술관 오프닝의 시사성을 제대로 발휘했다고 한다면 약간의 아이러니일 수 있겠다. 장소 특정적인 작품들의 역량을 포함, 우연히 자리잡게 된 이 공간이 한국 현대미술에 더욱 도움이 되는 흥미로운 장소로서 존재하기를 기대해 본다.

강애란 〈숭고-헤테로토피아의 공간〉 혼합재료 2009 (‘미술관 프로젝트’ 전경, 소장품: 노상균 〈경배자를 위하여〉 1998)

진휘연 성신여대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저서로 《오페라 거리의 화가들》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가 있다.

동그라미의 시학

〈무제〉 (지름)1~14cm 90개의 플라스틱 공에 혼합재료 2008-2009

동그라미의 시학

글|로랑 헤기(Lorand Hegyi)·생떼띠엔느미술관장

한순자의 섬세하게 구성된 회화, 오브제 그리고 벽과 공간의 여러 설치작업은 연약하고 유연하여 마치 유기적이고 자생적인 식물처럼 보인다. 한순자는 이차원 또는 삼차원의 동그라미를 가지고 작업한다. 그 동그라미는 절대적으로 완벽하여 추상적 보편적이고 엄밀한 것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불규칙하고 불완전하여 일상적 실재적이며 즉흥적인 것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작품의 개별적인 요소는 항상 구체적이고 특수하며 다양한 변주 속에서 구현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동일한 원칙에 따라 착상된다. 이런 까닭에 한순자의 작품에는 생물학적 은유가 더 더욱 자주 적용된다.
따라서 한순자의 작품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분리시키는 일은 다소 기만적이고 부적절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언제나 원칙상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아이디어와 착상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본 요소들이 마치 식물처럼 ‘자기 조직(self-contained)’된다는 사실은 모든 재료와 모든 가능한 차원과 다양한 공간적 상황을 통해 제시된다. 이것은 한순자의 작업 일반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창작 메커니즘과 형식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왼쪽·〈무제〉(부분)
오른쪽·〈무제〉 알루미늄 커팅 1056장, 지름 159cm 종이콜라주 소마미술관 설치 장면

자연적 유기체로서의 동그라미

이차원과 삼차원을 넘나드는 한순자의 많은 작품과 설치작업을 따로따로 살펴본다면 어떤 조형적 모순을 감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적 어휘는 엄밀하게 강박적으로 제한된 외형을 지니지만 한순자 작품의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오브제들은 다종다양한 재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순적인 감정이 발생하는 것은 식물적인 가벼움과 자연스러움을 뜻하며, 작품은 대립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오히려 유기적 근본적 생명적 조화의 인상으로 이어진다.
한순자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은 완전히 자율적이고, 우월하며, 자생적이고, 스스로 전개되고 보존되는 어떤 문화를 느끼게 된다. 그 문화는 기존의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하나의 대안적 성격을 지닌다. 그가 동그라미를 제외한 다른 어떠한 형태도 배제하는 형식적 제한은 결코 엄숙주의적인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불순물의 제거, 한계 설정, 또는 완고하고 경직된 태도로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식물적인 특성을 분명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한순자는 이 식물성을 쉽고 자연스럽게 거의 순진무구하게 즐기듯이 바로, 여기, 지금 자신의 형태 속에서 고유한 창조물, 독특한 성과물, 다른 형태와 혼동될 수 없는 자신만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형태로 보여준다.
한순자는 ‘자기 보존’되는 생물학적 식물적 다양성의 맥락 속에서 의도적으로 하나의 미학적 논리에 따라 작업한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모든 실험, 공간에 대한 무수한 탐구, 다양한 재료와 기술을 펼치는 한순자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개념적 메커니즘의 잠재성을 변주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작가가 사용하는 방법과 재료는 종종 놀라울 정도로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기본 체계를 손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한순자가 자신의 작품에 더욱 더 다양한 재료, 다양한 기술과 효과, 뜻밖의 상황을 구사하면 할수록 근본적인 개념적 메커니즘의 ‘일관성(cohenrence)’은 더욱 더 탄탄해진다.
한순자의 작품 구조는 무한정한 탄력을 지니고 있으며, 재료는 다양하고 유연하게 사용되어 작품의 근본적 구조는 한없이 변주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식물의 본성적 능력을 보여준다. 전시장 벽과 공간은 식물적 풍요로움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장 다양한 사물, 이를테면 폐품에서부터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쇄물이나 공산품 등 무수한 일상 사물을 서로 결합시키며,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작품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펼쳐 보인다. 이러한 생물학적 식물적 다양성은 사용 가능한 재료와 사물이 있고, 기후가 적당해 상황이 허락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초목처럼 자연발생적으로 펼쳐진다.

한순자의 파리 아틀리에

가볍고 즐겁게, 솔직하고 자유롭게

한순자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는 아마도 바로 이러한 계획성의 부재, 유희적이고 가볍고 우월한 자발성, 편견없는 반위계적 관용, 솔직하고 즐거운 자유로움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 두어야 할 점은 작품의 근본적인 구조적 메커니즘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일관성과 통합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메커니즘은 충분히 강력하고 섬세하고 일관적이어서 현상들의 가변성과 다양성을 뒷받침한다. 작가는 자신의 근본적인 작품 특징을 어느 하나도 위태롭게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미학적 상황 속에서 한순자의 작품 본질에 관한 진정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순자의 작업은 감성적 시학적 예술적 은유, 즉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구조에 해당되는가? 여기서는 무한히 가변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새롭고 미묘한 구성의 전개를 허용하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통합된다. 이러한 통합은 체계의 유연함, 관대함, 가변성, 이완성 덕분에 느긋하게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한순자의 작업은 현대에 감춰진 노스탤지어를 정확하고 신중하게 효과적인 팽창주의적 전략으로 실현하고 있는가?
다양한 재료가 지닌 자생주의적 향락, 즐겁고 발랄하며 분방한 자발성, 미묘한 뉘앙스의 시적 관능, 공간과 방법과 기술에 대한 느긋하고 자연스러우며 반위계적인 관계 등을 볼 때, 호전적이고 과장된 팽창주의적 전략은 분명히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호전적인 목적론적 전략’과 ‘미학적 자발성의 전복적 특징’ 사이의 대립 관계에 대해 질문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순자는 늘 새로운 재료와 적합한 공간적 상황을 추구한다. 그는 모든 발견된 오브제를 가지고 작업하며, 미리부터 뭔가를 선별하지 않고 미학적 기준을 들이대지 않으며 엄격한 계획이나 프로그램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선험적이지 않고 열려 있으며 위계에 반대하며 실용적이고 하찮고 평범하며 덧없고 유한한 사물들에 민감하다. 그는 작품 제작의 방법론적 원칙과 구체적 상황 사이의 가능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탐구는 자유롭고 열정적 개방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띤다. 그 제작 상황은 현실적이며 독특하고 무한히 가변적이며 복합적이다. 말하자면 한순자의 작업은 특정한 기본 요소들을 끊임없이 변하는 집합체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는 주어진 상황에서 물질적 조형적 요소들을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각각의 특수한 상황을 적절하게 결합하고, 다양한 요소와 개념적 방법론의 물질적 조형적 특수성을 드러낸다. 한순자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결합 혹은 융합되는 복합적인 과정으로 작품을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차별되지 않은 다양한 창작 과정의 공존을 시각조형적 방식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의 다양한 제작 과정은 현란하며 분방하고 개방적 관능적이고, 그 과정의 결합 방식은 가벼움과 장식적 취향을 유지한 채 전개된다. 그 방식은 방법론적인 일관성과무한한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생테티엔 미술관에서 작품 설치 중인 한순자

미학적 자발성의 전복

창작 에너지와 욕구, 자발성과 다양성을 골고루 갖춘 한순자는 얇은 종이나 나무 패널에 드로잉을 하고, 채색하거나 잘라낸 기본 형태로 회화를 제작하며, 여러 다양한 재료를 동원해 익숙하면서도 도발적인 느낌으로 가득 찬 오브제를 만들어 낸다. 그는 우리에게 만들고 모으는 모든 물리적 제작 과정을 충분히 보여준다.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는 선험적인 미학적 고려 없이 되는대로 모은 폐품 부스러기들과 일상 사물들을 하노버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방 한 칸에 설치했다. 그는 진정한 조형적 가치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연약함과 덧없음에 관한 반성의 시적 깊이를 통해 성찰적이고 신비로운 차원을 만들어 냈다. 슈비터스와 마찬가지로 한순자는 자신의 작업실이나 전시실에 동그라미 모양의 생장하는 식물 같은 설치작업을 펼쳐놓는다. 이러한 작업은 색상테이프 비닐봉지 바늘 등으로 강박에 이를 정도로 무한 반복 제작되는데, 그 형상은 달걀이나 둥지 또는 과일을 떠올린다. 메르츠(Merz)라는 수식어로 널리 알려져 있는 슈비터스의 작업에는 이전 미술의 고전 미학, 귀족주의,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영웅적 반항심이 잠재해 있다. 슈비터스는 자연스럽고 분방하며 자발적 충동적 성격을 지닌 비예술과 하찮고 흔한 일상 현실을 작업에 도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는 우연히 모은 현실적 단편들의 시학―관습적이지 않은, 신선하고 참되며 감동적인―이 지닌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인식시키고 지각시켜 주었다.
한순자의 작업은 절제되고 깔끔하며 즐겁고 관대하며 완전히 개방적이어서 아방가르드 같은 과장됨이 없다. 한순자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연한 관점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 전복적 자발성의 시적인 효과는 주어진 현실에 유연하게 개입하는 현대적인 모델을 환기시켜 준다.

왼쪽·2007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장면. 〈Tension, balance〉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200cm 2006(왼쪽) 〈Sic Circles〉 캔버스에 아크릴릭 195×130cm 2006(오른쪽)

한순자 1952년 서울 출생. 1978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3년 파리로 건너가 1986년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 졸업, 현재까지 파리에 거주하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1988년 파리 장-클로드 리차드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2002년 밀라노 비스마라갤러리 2004년 서울 토탈미술관, 현대갤러리, 도쿄갤러리 2005년 부산 조현화랑, 2007년 생떼띠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09년에는 서울 조현화랑과 상하이 번드18크리에이티브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소마미술관의 〈작가재조명〉전(9. 17~12. 6)에서 대규모 전시를 가졌다.

다시, 지역성과 세계성의 ‘공존’을 묻는다

박이소 〈무제(로스앤젤레스/휴스턴의 하늘)〉 2000/2009~10 〈와이드 월드 와이드〉 2003 설치 전경 ⓒ2009 Museum Associate/LACMA

다시, 지역성과 세계성의 ‘공존’을 묻는다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한국 현대미술 그룹전으로 주목 받은 〈당신의 밝은 미래:한국 현대미술 12인〉전. 구정아 김범 김수자 김홍석 박이소 박주연 서도호 임민욱 양혜규 장영혜중공업 전준호 최정화가 참여한 이 전시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6. 28~9. 20)에 이어 현재 휴스턴미술관(11. 22~ 2010. 2. 14)에서 열리고 있다. 이렇게 한국 현대미술을 다른 지역에 선보이는 전시는 ‘한국’이라는 지역성과 ‘현대’라는 시간 개념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글로벌한 시각에서의 평가를 기대하는 우리와는 반대로, 현지에서는 ‘한국적 문화 정체성’을 전시의 키워드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현지 비평가인 필자는 이미 서구의 문화와 교육에 익숙해진 작가들, 그리고 설치와 미디어아트 위주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전시가 ‘한국’의 지역적 정체성과 ‘현대 미술’의 범위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또한 지역적 특수성이 어떻게 글로벌 시스템 속에 통합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 사례와 관점을 제시한다.   
글|권미원·UCLA 교수

로스앤젤레스의 번화가인 윌셔가(Wilshire Boulevard)에서도 볼 수 있고 한인타운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다채로운 색상의 천으로 미술관 건물을 감싼 최정화의 〈웰컴〉과 경쾌하면서도 모호하게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공표하는 박이소의 현수막이 보인다. 이 두 작품은 올 여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이하 LACMA)의 전시 〈당신의 밝은 미래〉를 위해 12명의 한국 현대미술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특히 한글로 ‘당신의 밝은 미래’라고 적혀 있는, 시내 주변에 설치된 밝은 노란색 간판과 앞의 두 작품은 아마도 첫 방문일지 모르는 이 전시장으로 로스앤젤레스 한국 교민들을 이끈다. 어느 큐레이터가 현대미술은 국경을 초월하는 글로벌 언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이렇게 미술의 중제를 통해 한국 교민들이 유례 없이 LACMA에 모이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현대미술에 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문화의 역사와 언어에 대한 다양한 기대와 이해 능력, 그리고 이에 접근하기 위한 복합적이면서도 때로는 실망스러운 만남의 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주요 미술관 중 하나인 LACMA 단지 내의 브로드현대미술관(Broad Con- temporary Art Museum) 2층 전체를 차지하는 규모의 이 한국 현대미술 전시회는 몇 가지 점에 있어 성공적인 문화 행사이다.
첫째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국 교민들을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는 기관으로서 LACMA의 위치가 정립된다는 점이다. 〈당신의 밝은 미래〉전의 개최 시기는 미술관 근처에 위치한 전통 한국미술 화랑의 재개관 시기와 겹쳤는데, 이 갤러리 주변에서 한국식 바베큐, 동양화 워크숍, 전통 무용 공연, 대중음악 공연 등을 포함한 수많은 지역적 이벤트들이 기획되었다.
둘째, 이러한 전시는 모든 기관과 도시들이 부러워할만한 세계적인 문화 기관 및 도시로서 LACMA와 로스앤젤레스시의 명성을 높여 준다. 셋째, 이 전시는 한국 금융 자본의 힘(전시 후원사는 한진해운)에 대한 외국의 관심만큼이나 한국과 해외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는 ‘문화 투자’에 대한 관심을 확인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의 가장 명백한 의미는 이들 작가 12명의 작품을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예로 인정하고, 나아가 그들을 보다 넓은 미술 세계에서의 ‘성공 모델’로 입증해 준다는 점이다.

김홍석의 작품 설치 전경 ⓒ2009 Museum Associate/LACMA

이들에게 과연 ‘한국적’인 것이란?

LACMA의 현대미술 큐레이터였으며 현재 피츠버그 카네기미술관 디렉터인 린 젤레반스키(Lynn Zelevan-sky)와 지난 11월부터 LACMA에 이어 이 전시를 개최 중인 휴스턴미술관의 아시아미술 큐레이터인 크리스틴 스타크만(Christine Starkman)이 공동 기획한 〈당신의 밝은 미래〉전은, 한국 SAMUSO: 대표 김선정이 참여해 전시회 준비와 도록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반적으로 이 전시는 ‘한국 출신’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분모가 없는 12명 작가의 강렬하거나,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절충적으로 소개된 전시였다. 실제로 각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선호하는 형식과 재료, 제작 방법, 배치 등이 워낙 다양해서 이 작가들의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전시회의 실질적인 기획 원리라기보다는 우연히 발생된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최정화를 제외한 모든 작가들이 1980년대 또는 1990년대에 한국을 떠났고, 그중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출신’이라는 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 홍익대와 서울대 등 일명 한국의 명문 미술대학 출신인 이들은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구의 대학원에서 학위 과정을 밟았다. 따라서 〈당신의 밝은 미래〉전의 절충주의(Eclecticism)는 그들이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서구의 교육 환경에서 경험했던 다양한 예술적 소통을 비롯한 각 작가 개인 간의 상호작용을 어느 정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전시는 큐레이터들이 각 작가의 개성과 전기적 요소를 과대포장함으로써, ‘민족’으로 정의된 예술(Nation Defining Art)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민족 정체성이 문화적인 산물을 정의하기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범주라고 보는 일반적인 생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민족주의적인 집단적 사고와 폭민정치로 인식되어 온 한국인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대항하려는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큐레이터들은 이러한 접근 방법을 취함으로써 시장의 헤게모니에 의해 추동되는 현대미술의 파편화되고 동질화된 영역을 헤치고, 나아가 최근 한국 내에서, 혹은 한국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 관객 지향적인 예술적 탐구들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 전시는 동시대 한국 미술가들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들에 관해 보다 광범위한 상황을 제시하거나 예술적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여주기보다는, 이미 평판이 있는 예술가들이 쌓은 개인적인 성과들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였다.

‘언어’와 ‘공간’을 통해 드러낸 문화적 변위

임의적으로 작가를 선별한 전시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분명한 기획 관점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각 전시장을 둘러보며 동일한 의미를 지닌 작품들을 찾아 한 번에 한 작가씩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언어 문제에 초점을 맞춘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서, 추방 이주 순회 세계화 디아스포라와 같은 상황을 다루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공통 주제인 ‘문화적 변위(Cultural Displacement)’라는 개념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홍석이 2004~8년 사이에 제작한 조각과 비디오 작품은 벽이나 바닥 위에 영어와 한국어로 쓴 긴 텍스트와 함께 전시되었다. 만일 관객이 영어나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면, 이처럼 손으로 쓴 이야기는 전시 설명 라벨이 확장된 것처럼 작용하고, 비디오나 조각의 배경 정보를 제공하거나 감춰진 부분들 혹은 허구적인 영역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텍스트는 관객들로 하여금 현재 보고 있는 작품에 관한 설명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즉 김홍석의 2개국어로 된 텍스트는 관객의 기대를 좌우하면서, 관객 스스로 그 내용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각각의 상황에 직면하도록 강요한다.
박주연의 〈독백/독백〉은 화면 전체에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는 비디오 작품으로 여러가지 문화적 변위가 일어나게 마련인 언어 배우기 과정의 서투른 모습을 포착한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 아일랜드 남성의 얼굴이 화면에 보이고, 이 남성의 독백을 립싱크한 한국 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 립싱크는 억양이나 그 밖에 아일랜드의 지역적 특성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흉내 내거나 외국인의 음성 혹은 그 입장을 차용하고 있는 언어 배우기는 야릇한 합성물, 즉 갈망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으나 소통의 가능성은 낮은 이상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 뿐이다.
일부 작가들은 공간의 문제를 통해 문화적 변위라는 주제에 접근한다. 서도호의 〈떨어진 별 1/5〉은 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예로, 그는 미국에서의 첫 거주지였던 로드아일랜드의 건물 측면에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한국의 집이 충돌한 모습을 1/5로 축소시켜 놀라울 만큼 디테일하게 만들었다. 최근작에서 훨씬 더 서사적이고 연극적인 방향으로 전환한 서도호의 건축 구조물은 다른 이의 묘사에 따르면 동양이 서양을 만나 생긴 ‘문화적 충돌’의 장면으로서, 초현실적인 연출 속의 주인공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보석 같은 작품 〈집 속의 집〉은 앞서 소개된 두 건물이 보다 조화롭게 만나고 있는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추상적이고 엄격한 관점을 제공한다. 이 조각 작품에서 그의 한국 집은 미국 집에 흡수됐거나, 미국 집 속에 침투하여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형태를 띤다. 〈떨어진 별 1/5〉에서 보이는 ‘충돌’이나 〈집 속의 집〉에서 보이는 ‘상호 변형’(Mutual Metmorphosis)같이, 각 작품에 나타난 공간적이고 건축적인 구성은 상이한 문화들간의 만남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김수자의 압도적인 6채널 비디오 설치 〈바늘 여인〉은 작가 자신과 작가를 대신한 관객들을 유독 낙후되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전 세계의 6개 도시로 초대한다. 화면 속에서 작가는 형식적으로 스스로를 일종의 중심적인 소실점으로 설정하여 뒷모습만 보여주며, 이는 각 장면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를 세계가 펼쳐지거나 통과하는 조용하고 정적인 근원으로 나타낸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동시에 강조하는 제스처를 통해 작가는 이질적인 장소들, 즉 일련의 복잡다단한 정치적 사회적 광경들을 자신의 ‘바느질 은유’에 따라 함께 ‘봉합’해 단일한 세계의 모습을 창조하고, 이 과정에서 차이와 괴리보다는 인류의 공통성을 강조한다.
원래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제작되었던 박이소의 〈무제(로스앤젤레스/휴스턴의 하늘)〉는 벽이 바닥이 되고 단단함이 공허함이 되며, 위가 아래가 되고 밖의 하늘이 안의 그림이 된 건축과 공간의 엄밀한 전치(Dis-placement)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의 정체성을 드러내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 그의 청색 수채화 〈와이드 월드 와이드〉와 함께 박이소는 도달할 수도 알 수도 없고, 따라서 표현할 수 없는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위·서도호 〈떨어진 별 1/5〉 2008~9, 〈집 속의 집〉 2009 전시 전경
ⓒ2009 Museum Associate/LACMA|아래·전시 개막식. 왼쪽부터 마이클 고번(LACMA 관장), 서도호, 린 젤레반스키(본전시 기획자이자 현재 피츠버그 카네기미술관 디렉터)

강렬하거나, 강렬하지 않거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언어나 공간적 측면에서 문화적 변위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양혜규의 〈창고 피스〉는 그의 작품 자체를 소재로 다루는, 본질상 발견된 오브제 설치물이다. 작가는 팔리지 않는 작품들을 보관해야 하는 딜레마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교묘하게 전시했다. 작가는 전시 기간 동안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임시 보관시설로 취급하는 동시에 팔리지 않은 자신의 작품 포장을 푸는 상황을 퍼포먼스로 보여주었고, 그 포장을 푼 작품들도 전시하였다. 비록 하나의 작품인 〈창고 피스〉가 판매되는 것이 즐거운 역설적 상황을 연출할지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 체제와 그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탈신화화하려는 노력은 예술 관행의 상황을 드러내기보다는, 관객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개념적으로 막다른 길로 보이기도 한다.
전준호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백악관〉은 20달러 지폐 뒷면에 등장하는 백악관 창문을 하얗게 칠해버리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궁극적으로 개념적인 짤막한 농담(One-liner)으로 비친다. 임민욱의 〈잘못된 질문〉과 박주연의 〈절충적 수사학〉은 각각 비디오와 필름 설치물로, 훌륭하게 촬영되었지만 매우 모호한 작품들이다. 김범이 세속적인 일상의 소재들을 직접 조합하여 만든 매혹적인 작은 오브제들은 평범한 것이 주는 친근함을 낯설게 만든다. 또한 이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찾기 힘든 친밀함과 소박함을 보여준다.
구정아는 《천일야화》로부터 참조한 1천 개 이상의 드로잉을 조합한 작품 〈R〉을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영사하여 연속 장면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의 〈Mountain Fundamental〉은 임시로 만든 테이블 위에 아주 미세한 돌가루 더미를 하나의 ‘풍경화’로 연출했다. 이 작품은 갤러리 1층,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강철 조각 〈Band〉를 마주하며 전시된 유일한 작품이었다. 구정아의 두 작품은 모두 수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수수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즐거우면서 때로는 무의미한 장영혜중공업의 애니메이션 화면은 사실 전시장보다도 인터넷, 즉 LACMA의 웹사이트에서 더 효과적으로 전시된 것 같다.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이 작품보다 더 집중력있고 강렬한 연설처럼 보이는 바바라 크루거의 엘리베이터 영구 설치물 옆에 전시됐던 것이다.

‘한국적’ 그리고 ‘현대’라는 불안정한 개념

젤레반스키는  〈당신의 밝은 미래〉전의 모든 작품들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예술 세계에 속하는 어휘 속에 ‘지역적인(한국적인) 무언가’를 주입함으로써, 일반적이지 않고 설득력있게 전 세계의 많은 관객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이 작품들은 현대 예술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친숙하지 않은 친근감이나 친숙한 낯설음을 고안해낸 성공적인 작품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나이트(Cristopher Kinght)에게 〈당신의 밝은 미래〉전은 그저 친근하게만 보였다. 그는 “LACMA의 새 전시는 진보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전 세기의 예술적 사고관에 고착된 것 같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부정적인 평가는 이 전시가 너무 넓은 공간과 긴 시간을 요구하는 개념적인 성격의 설치와 거대한 규모의 비디오 프로젝션류의 미술 작품, 즉 1990년대에 세계적인 규모로 대중 매체, 소비 문화, 관광, 오락 산업과 예술간의 결합을 강화했던 형식을 옹호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는 《뉴요커》의 미술평론가 피터 슈옐달(Peter Schjeldahl)의 용어를 빌어 이 전시가 지루한 ‘페스티벌 예술’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유일한 예외로 서도호의 〈집 속의 집〉을 명백히 아름답고 독창적인 ‘포스트 페스티벌 예술’이라고 말했다.)
비록 이 전시에 대한 나이트의 의견이 다른 나라의 문화적 산물이 자신의 나라의 문화적 산물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거나 그보다 뒤쳐진 것이라고 보는 민족중심적인 태도를 비친다 해도, 나는 그의 비판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정교한 멀티미디어 설치에 통합되거나 미로같이 복잡한 내러티브와 중첩되지 않은 회화 드로잉 사진과 같은 다른 종류의 작품이 전시되지 않은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나는 이 전시에서 새로운 기술과 체제를 이용하는 작품(디지털 애니메이션, 비디오, 관계성의 미학, 개념적 퍼포먼스와 설치 등)과 함께, 동서양의 구분을 거부하는 사고와 형식을 추구하는 작가들에 의해, 소위 동양과 서양의 전통적인 매체라고 불리는 것들이 어떻게 미술 작품으로 재창조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전반적으로 이 전시는 미디어아트를 특권화하면서, 전통적인 매체의 작품을 간접적으로 현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혹은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는 실수를 범했다. 왜냐하면 ‘한국적’이라는 용어가 불안정한 구축물인 것처럼, ‘현대적’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시는 ‘한국적’인 것을 구성하는 독특한 공간성과 함께 현대라고 하는 것의 낯선 시간성을 모색하는 데 더 노력했어야 했다.

전준호 〈백악관〉 디지털 애니메이션 2005~6 ⓒ2009 Museum Associate/LACMA

지역성이 어떻게 글로벌 시스템으로 병합되는가

나는 〈당신의 밝은 미래〉전의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으로 전시 도록의 뒷면에 수록된 작가 명단을 들고 싶다. 비록 미술관 문헌에서 한국식 이름을 표현하는 규약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각 작가 이름의 철자법과 양식화에서 보이는 절충적인 면면은 오늘날 국제 미술계에서 몸과 이름이 순환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게 되는 현실을 반영했다.
성을 앞에 놓는가 아니면 이름을 앞에 놓는가? 2음절 이름을 한 단어로 표기하는가 아니면 두 단어로 표기하는가? 두 단어로 표기해야 한다면, 두 음절 사이에 하이픈(붙임표)을 넣어야 하는가, 아니면 두 음절을 띄어 써야 하는가? 아니면 전체 이름을 한 단어로 표기해야 하는가? ‘박’을 ‘Park’으로, 아니면 ‘Bahc’으로 표기해야 하는가? ‘김’은 ‘Kim’으로, 아니면 ‘Gim’으로 표기해야 하는가? 각각의 작가들이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은 성명의 양식화와 철자법으로 한국성을 얼마나 상징할 것인지, 혹은 반대로 국제적 세계주의화를 얼마나 상징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이 두 가지 모두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했을 것이다.
한국 작가들이 자신의 이름에 관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이러한 의문과 선택은 서구 작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하나의 경험이자, 아마도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이는 일반적으로 비서구에서 온 참가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데다, 서구 관계자들과는 완연히 다르게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현대 미술계의 불균등한 기반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전시가 벌어진 현장이 서구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성명을 모국어에서 영어로 변환하거나 번역해야 한다는 이 부당해 보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자체로 현대미술에 있어 하나의 이점이 될 수 있는 변화성 이동성 유동성 등이 포착된다. 즉, 이질성(Foreignness)은 친근한 낯설음 또는 지역성이 가미된 세계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는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보다 전시회 도록의 뒷면에 적힌 작가 명단에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예술 세계에 속하는 어휘와 지역적인 어떤 것’이 병합되는 것을 훨씬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번역할 때 공통된 표준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마도 서로 일치될 수 없는 표준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이 명단에는 지역적 특수성이 어떻게 글로벌 시스템으로 통합되는지에 대한 문화적인 증거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하이픈과 여백, 대문자 표기 등에는 이러한 협상 과정의 정치와 역사가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세계를 위한, 특별히 한국으로부터 온 어떤 것이 있다.

권미원 UCLA 미술사 교수. 1998년 프린스턴대에서 건축사 및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대미술 건축 공공미술 등에 대한 연구와 비평을 발표해 왔으며, 학술지 《옥토버》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One Place After Another: Site-Specific Art and Locational Identity》(MIT Press, 2002)가 있다.

2009 December Special

2009 December Special

2005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미술의 대중화 및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설립한 미술은행. 미술은행은 연간 25억원의 정부 예산으로 작품을 구입한 뒤 공공기관이나 기업 등에 소정의 수수료를 받고 빌려주는 제도다. 추천제 공모제 현장구입제를 통해 작품을 소장한다.

미술 정책 10년의 채점표

글|양현미·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지난 10년 간 미술 정책의 가장 큰 변화는 순수미술 위주에서 디자인 공예 건축을 포괄하는 광의의 시각문화 정책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문화부에서 미술 정책을 담당해 온 부서는 예술정책과이다. 이 부서는 지난 10년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의정부’에 들어서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디자인과 공예가 문화 산업으로 새롭게 인식되었으며, ‘참여정부’ 때 공간문화과가 생기면서 건축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디자인 공예 건축에 관한 정책은 현재 디자인공간문화과가 전담하고 있으며 관련 정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문화부는 이처럼 확장된 미술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개의 산하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1999년 이전에 있었던 기관은 국립현대미술관(1962년), 아르코미술관(1979년), 한가람미술관(199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1998년)이었다. 1999년 이후에 6개 기관이 만들어졌는데 디자인미술관(1999년), 인사미술공간(2000년), 한국공예문화진흥원(2000년), 국립창작스튜디오(2004년), 미술은행(2005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2008년)이다.
문화부가 시행한 정책 사업을 살펴보면, 지난 10년간 미술 정책은 미술의 창작 보급 향수의 선순환 구조를 감안한, 보다 입체적인 정책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예진흥기금은 미술만 따로 산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예술진흥사업비 총액을 비교하면, 1999년 129억원에서 2008년 851억원으로 규모가 6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경기문화재단(1997년), 서울문화재단(2003년), 인천문화재단(2004), 광주문화예술진흥위원회(2004) 등 지역문화재단이 속속 설립됨에 따라 미술가와 단체는 공공 지원의 혜택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창작스튜디오 정책이 시작된 것은 국민의정부에서다. 당시에는 폐교를 창작스튜디오로 전환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몇 년 후 마사회로 이관되었다. 참여정부에 들어와서 국립창작스튜디오가 조성되어 국공립 및 사립 창작스튜디오의 네트워크가 가능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술을 시민에게 보급하기 위한 정책은 미술관 중심에서 대안공간 공공미술 미술은행 등으로 확대되었다. 미술관은 1997년 33개관에서 2008년 128개관(국립 1, 공립 27, 사립 97, 대학 3)으로 4배 이상 늘어났다. 정부는 1999년부터 ‘1시도 1미술관’을 목표로 지방자치단체가 공립 미술관을 건립할 경우 건립비의 30%를 지원했으며, 사립 미술관 운영 활성화를 위해 2004년부터 복권기금을 통해 학예사 인건비와 특별전 사업비 등을 지원했다. 대안공간에 대한 지원사업은 200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인사미술공간을 설립하여 실험적인 신진작가를 지원했다.
공공미술은 미술을 통해 시민의 생활 공간을 예술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는 문민정부 때 의무화되었지만 건축 규제로 분류되어 국민의정부에서 미술장식비용이 1% 이상에서 1% 이하로 낮춰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무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제도 개선을 위해 현재 개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의정부에서 조각공원 조성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면, 참여정부에서는 아트인시티 사업과 미술은행사업을 시행하였다. 아트인시티 사업은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등 지방자치단체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확산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했으며 올해에는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미술은행은 대여를 통해 공공 기관의 민원실이나 사무실을 예술적으로 조성할 뿐만 아니라 미술시장을 활성화하고 미술가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미술시장에 관한 정책은 대중화와 국제화가 추진되었다. 국민의정부에서는 ‘한집 한그림 걸기’ 운동을 통해 미술시장 대중화를 도모했다. 또한 미술시장의 국제화를 위해 국제 아트페어를 지원했다. 1999년부터 세계의 유수한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화랑에게 항공료와 부스비 등을 지원해 왔으며, 2002년부터는 한국국제아트페어를 지원하고 있다.
향수 지원은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미술에 관한 법은 아니었으나 예술 수요자의 역량을 제고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폄으로써 예술수요자 층을 두텁게 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미술 정책 10년을 큰 흐름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올해는 국군기무사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에 대해 미술계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미술계의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향후 10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의 정책이 추진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는 (사)한국화랑협회 주도로 2002년에 설립됐다. 올해는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코엑스에서 개최됐다. 주빈국 제도와 미술은행의 지원 등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이자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로 발돋움했다.

젊은 세대여! 그대의 지평은 어디인가?

글|유진상·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

1999년과 2000년의 〈공장미술제〉 프로젝트 당시만 해도 수도권 지역의 주요 미술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가슴 떨릴 수 없었다. 주변이 논바닥인 이천 외곽의 양말공장이나 서울 북동부 변두리 창동의 간장공장이나 비루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들이 찬란했던 이유는 한 가지다. 수십 년 간 한국미술을 지배해 온 인위적인 아카데미들의 구분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성장하는 다음 ‘세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과 실험 정신, 개방성, 그리고 동지애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한 세대의 페이지가 넘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10여 년 간 서로 다른 미술대학 출신들 간의 이유 없는 서열화나 반목은 거의 사라졌고, 협력과 비평적 시너지를 무기로 삼는 젊은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지난 10년 간의 변화는 그 규모와 내용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내국인의 해외 여행 및 유학 자유화, 인터넷의 발전에 따른 빠르고 정확한 정보 습득, 제반 사회 분야의 민주화, 공격적인 산업화에 따른 기술과 부의 축적이 그 효과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말부터였기 때문이다.
미술에 있어 주요한 변화를 꼽자면, 1)‘세계화’에 따른 결과로서 30~40대 작가들을 주축으로 하는 ‘동시대 미술’의 글로벌한 경향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고, 2)주류 미술대학들이 주도하던 미술계의 주요 이슈들이 비평적 창작 현장과 보다 광범위한 미술시장으로 이전되었으며, 3)공공 및 민간부문에서 적극적인 ‘동시대 미술’에의 재정적, 정책적 지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들을 들 수 있다. 국가와 지방정부 차원에서 마련하는 기금 및 아트페어 경매 공모 레지던시 및 전시축제 등은 이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일각에서는 우수한 컨텐츠와 차별적인 평가 기준 부재의 심각성을 걱정할 정도다.
2008년 〈아시아프〉는 처음으로 지방의 미술대학까지 포함하여 젊은 미술가들에게 여타 분야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불과 1년 만에 젊은 미술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아트페어들이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잡았을 만큼 이 행사는 폭넓은 20대 작가군을 가시권에 떠올렸다. art in culture와 같은 전문지들이 2000년대 초부터 20~30대의 ‘뉴페이스’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것이나 2007년의 〈동방의 요괴들〉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젊은 작가 군(郡)을 대거 발굴해 낸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이후 경제 위기까지 약 2년 간 젊은 작가들의 프로모션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구상회화 및 대중적 취향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활기를 띠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만화 패션 광고 그래픽 타이포 등 다양한 시각적 하위문화들이 이들의 작업에서 재해석되거나 그대로 차용되었다. 이슈는 보다 시각적으로 호소력이 있고 대중적 친화력이 뛰어난 작가와 작품들을 시장에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 시민들이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접근의 문턱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동시대 미술의 진입에는 다양한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이 작가군의 도래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2000년대 전반까지 지속된 실험적이고 비상업적인 경향의 작품들의 수가 현격히 줄거나 수준이 저하된 것은 상대적으로 2000년대 후반 세대의 빈곤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미술에 있어 이슈는 항상 움직인다. 2000년대 초의 이슈가 인습적인 패러다임을 탈피해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최근까지의 이슈가 필요한 제도적 물질적 정신적 인프라를 확보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앞으로의 이슈는 어떻게 미술을 다시 가장 차원 높은 수준으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전제 조건은 다름 아닌 그러한 기준들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작가군이 대거 국제적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었던 1990년대 중, 후반의 상황을 다시 떠올릴 필요도 있을 것이다.
2010년은 다다가 시작된 지 한 세기가 지나는 시점이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작가들이 도래할 시점인 것이다. 2008년 1월 art in culture의 특집 기사인 〈新 한국미술 파워 100〉은 매우 흥미 있는 지표들을 제시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출생한 미술계의 젊은 전문가들을 소개한 것으로 실상 이들이 향후 2, 30년 간 한국미술을 이끌고 갈 사람들이다. 경험적 배경과 경력, 전문성의 수준 등 모든 면에서 이들은 자신의 선배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들이 지평을 어디에 설정하는가에 따라 한국미술의 판도는 지금의 변화 속도보다 더 많이, 폭 넓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들 각자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광범위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10년은 여전히 전환기이자 준비의 시기였다고도 불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소심한 기성세대는 항상 그렇듯 좀 더 젊은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젊은 세대여, 당신들의 지평은 어디인가?”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2006년 10월 경기도미술관 강당에서 개최한 아시아비평포럼. 1956년 이경성, 최순우 등 7명이 발족해 지금까지 국내 미술 평단의 발전과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현재 서성록이 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전에 협회장을 연임한 바 있는 윤진섭은 현재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미술시장의 팽창,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글|김윤섭·미술평론가,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한국 미술시장의 지난 10년은 말 그대로 격세지감의 표본이다. 그 엄청난 시련과 급격한 변혁기를 거쳐 비록 외형은 비대해졌다지만, 온몸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약골이었음을 이제야 실감하고 있다. 현재 공공미술이나 해외 미술품 수출액을 제외한 국내 순수 미술시장의 총규모는 4000억원 내외로 추산된다. 500억원을 채 넘지 못했던 2005년 이전보다는 엄청난 성장이라지만, 데미언 허스트의 최고가 작품 5점도 못 산다. 아직 갈 길은 산 넘어 산. 어쩌면 지금 한국엔 미술시장은 없다고 봐야 옳을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현대적 개념의 미술시장이 이제야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는 과도기의 도입부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 동안 우리 미술시장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미술시장은 특성상 주변의 경기 변화나 사회적 현황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금융실명제의 시행 원년이던 1993년엔 미술품 거래가 거의 중단됐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 1만 달러에 도달한 1995년엔 ‘미술의 해’가 선포되었고 광주비엔날레가 탄생했다. 국내 첫 국제아트페어인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도 이때 출범한다. 곧이어 OECD에 가입한 1996년은 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되며 반짝하는가 싶더니, 이듬해 IMF를 맞아 작품 가격은 폭락한다. 결국 1998년엔 국민소득이 6800달러로 추락하며 화랑의 구조 조정기까지 맞게 되지만, 한편에선 국내 최초의 미술품 경매사인 (주)서울옥션이 설립된다. 1999년 IMF를 힘겹게 조기 졸업하고 각고의 내수 경기 진작 정책에 힘입어 소비 문화가 좀 되살아나지만, 미술시장은 여전히 강남지역 화랑가가 급격히 퇴조하고 인기 및 원로작가 작품가격마저 급격히 하락세를 탄다. 여러 면에서 지금과 10년 전의 모습은 매우 닮은꼴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화랑협회 자료에 의하면 작품 가격은 1991년도 대비 30%~50%선으로 폭락한다. 화색을 되찾기 시작한 때는 바로 2002년 월드컵 이후 사회 전반으로 급속히 번진 경기 회복세 덕분이었다. 더욱이 2003년엔 (사)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출범하여 미술품 유통 과정의 객관적인 신뢰감을 쌓기 시작하는 한편, 13년을 끌어 오던 미술품 양도세 부과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완전 폐기되어 큰 호재로 작용한다. 3월부터 박수근의 유화작품 〈한일(閑日)〉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3억원에 낙찰되어 한국 현대회화 사상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면서 호황기의 전초전을 예고한다. 이 시기에 맞춰 국내 처음으로 미술경제지를 표방한 《아트프라이스》가 10월에 창간된다.
2004~2005년엔 아시아 미술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특히 중국 미술시장의 비약적인 성장세에 힘입어 국내 미술가 역시 해외경매나 아트페어 등에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2005년 3월 유가족이 관련된 ‘이중섭 위작사건’이 터져, 점차 새로운 전기를 준비하던 미술시장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 일로 미술품 감정과 객관적인 작품 유통 질서의 중요성이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9월에 한국미술품시가위원회(이후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로 변경)가 발족된다. 또한 11월엔 가나화랑 중심의 서울옥션의 대항마로 현대화랑 중심의 K옥션이 오픈하면서 드디어 아트옥션 양대 경쟁 체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정부까지 나서 ‘미술은행’ 제도를 시행하면서 큰 활력소를 제공했다.
다음의 2006~2007년은 국내 ‘미술시장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점이다. 일찍이 2006년 만큼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숱한 기록과 화제를 쏟아낸 해는 없었다. 특히 박수근의 〈노상〉이 11월에 10억 4000만원에 팔리면서 국내 회화 가격의 기록을 경신한다. 이는 국내에서 100만달러 이상에 거래된 첫 사례로 꼽힌다. 순수 미술잡지들마저 미술시장 관련 기획기사를 쏟아 내기 시작한다. 특히 art in culture의 2006년 ‘당신은 미술시장을 아십니까?’와 이듬해 ‘STEP UP! UP! 춤추는 미술시장’ 같은 기획물들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이다. 더구나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동유의 유화가 추정가의 25배가 넘는 가격(3억2300만원)에 낙찰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국내 경매시장 역시 낙찰총액이 600여 억원을 기록, 2005년 168억원에 비해 무려 252% 증가율을 보인 한편, 아트펀드 열풍이 가세한다.
2007년은 다사다난(多事多難) 그 자체였다. 신정아 사건, 삼성 비자금 사건, 2005년 이중섭 박수근 위작사건 관련 증거품 2834점 모두 위작 판명 등. 이런 악재 속에서도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시장은 유례 없는 호황을 누리며, 재테크 수단으로 아트펀드 미술경매 아트페어 등이 각광을 받으며 미술시장 열기가 최고조로 치닫는다. 이때 박수근의 〈빨래터〉는 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됐으며, 서울옥션과 K옥션의 실적도 1260억원에 육박해 전년의 2배를 넘어 섰다. 이는 바로 경매사의 전국적인 설립 붐으로 이어졌으며, 국내 화랑들의 해외지점 개설이 확산되는 단초가 된다.
하지만 이후 2008~2009년 연이은 악재와 전 세계적인 불황 여파로 미술시장은 또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경매 낙찰률 역시 2007년 80%에서 50%대로 뚝 떨어지고, 반토막 난 경매시장 규모, 2011년부터 미술품 양도세 시행설, 양대 경매사의 홍콩과 마카오로 진출 등 희비쌍곡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형이다. 이제 남은 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최근 한 강연에서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No Where)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 있다(Now Here)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듯, 현실을 지혜롭게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비평의 난파, 다시 ‘비평다움’을 찾아서

글|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가

1. 작품 해석으로서의 비평과 그 끝
비평은 작품의 독해나 해석 같은 미시적 기능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날 예술 작품의 읽기에 적용될만한 미학적 절대성은 눈꼽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미적 기준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었다. 오늘날 비평이 예술 작품의 해석에 관여한다 할 때, 그 동기와 결과 모두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해석은 주관적 에세이로 전락했고, 미적 평가는 시장이 부추기고 황색화된 저널리즘이 뻥튀기는 명성의 소산들을 정당화해주는 관례적 기제가 되었다. 전문가주의에 경사된 분과주의적 비평, 깡통소리 요란한 저널리즘 비평, 문화 권력과 주류 취향으로 환속한 비평 등은 비평의 이름을 가지되 그 부재(不在)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 해석으로서 비평은 표류의 단계를 지나 난파 수준에 도달해 있다. 예술 작품의 의미란 고작 각 개인들의 취향적 선호도를 따라 호불호를 가리면 그만인 초단순하며 즉흥적이며, 자주 잇속에 따라 마구 흔들리는 것이 되었다.  직업적인 비평가의 평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것 역시 범박한 한 시민의 그것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다.
2. 환속(還俗)적 비평, 또는 ‘고분고분주의적’ 비평
비평의 중대한 임무 중 하나는 시대 읽기다. 즉 창작과 그 소통 행위 전반에 반영된 시대의 정신을 가늠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고유의 속성을 지니며, 특유의 과오를 범하므로 비평의 이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 시대의 오류에 합류하거나 편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시대를 읽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은 기꺼이 스스로를 대열로부터 이탈시키고 소외된 문제를 다루는 반성의 간극으로 작용해야 한다.
반면, 환속적 비평은 당대의 주류 대열에 섞이고 트렌드에 합류하며 그것에 스스로 예속되는 정도로 스스로의 성취를 가늠한다. 이를 내부로부터 지지하는 정신은 맹신(盲信)이다. 맹신은 주어진 것을 모든 것으로 믿는 탓에 더 이상 어떠한 것도 질문하지 않는 정신이다. 이는 결국 더 나은 삶과 예술적 성취, 더 진전된 문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현재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극단적 세속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근자에 차고 넘치는 접근들이다. 만일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꿈꾼다면, 그 세계를 구성하게 될 질서와 현 질서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온갖 심기 불편한 질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들은 당대의 위악성에 대한 거의 모든 질문들을 일소해 버린다.
지난 10년 간은 거짓 다원주의 말기적 소산들이, 자유를 가장한 망자(亡者)적 회의주의가 극성을 떠는 탓에 비평적 의문들이 몰수되다시피 해 온 시간이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의미 있다면, 어떤 가치를 다른 가치들로부터 구분하는 자체가 객쩍은 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현 시점에 비평이 취할 수 있는 노선은 고작 주어진 현상을 수긍하고 유력해 보이는 작용들에 앙탈을 부리는 척 동조하는 것이다. 세계에 더 깊이 취하고, 매료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환속적 비평은 모순과 갈등이 소멸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황의 결과이자 원인이 되고 있다.
3. 새로이 도래한 시장 비평
시장의 도약은 비평이 무의미할 뿐 아니라,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더욱 공고히했다. 시장을 존중하지 않는 예술은 존중될 수 없다는 게 근자의 상황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비평은 성공한 미학만을 다루는, 비윤리적이고 반지성적인 것을 자처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퇴락을 반증하고 있다. 미적 질의 최종 평가는 경매장에서 내려지고, 비평은 그 시장적 결정에 아카데믹한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정부나 지자체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간판 상품’ 하나 만들어 달러나 실컷 벌어보는 것이고, 이 역시 비평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결국 비평은 스타를 키우고 세계 무대에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재능으로 착각한다. 비평에 의해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이러한 착각의 결과는 무엇인가? 예술의 첫째 목표가 파는 것으로 설정되어버린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이다.
4. ‘비평다움’의 요인
2009년의 이스탄불비엔날레의 슬로건은 ‘무엇이 인간을 깨어있게 하는가(What Keeps Mankind Alive)’였다. 후쿠오카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삶과 살게 하기: 내일의 창조자(Live and Let Live: Creator of Tomorrow)’였다. 비평이 문필적 재능을 지닌 아첨꾼이 되어온 반면, 오히려 전시는 깨어 있음을 선언한다. 비평이 현세에 깊이 취해 있는 동안, 블록버스터가 내일을 걱정한다. ‘깨달음’과 ‘내일’은 비평 고유의 가치였던 것들이다. 
비평은 오늘날 몹시 게으른 것이 되었다. 의심하지도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다만 주류에 편승하고 시장을 따른다. 힘의 목적에 동조하기 위해 자신의 어떠한 목적도 설정하지 않는다. 딱히 도달해야 할 곳이 없는 고로 나태하고 무력하다.
언젠가 리샤르 지벡(Richard Siebeck)은 “사명이 인간을 만든다”했다. 사명은 비평다움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요인이다. 바라보아야 할 어떤 비전도 없을 때, 비평은 자신을 지나치게 살피고, 덜 움직이고, 그럼으로써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더욱 무지해지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안공간 1호’로 잘 알려진 대안공간루프. 그 이후 대안공간풀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인사미술공간 등 홍대와 인사동을 중심으로 크게 늘어난 대안공간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미술의 젊은 활력과 국제화 열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도화와 경영난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부천 대전 부산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3세대 대안공간’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그 면모와 역할이 다양화됐다.

대안공간의 시스템은 여전히 유효한가?

글|김노암·아트스페이스휴 디렉터

단언컨대 “그렇다!”. 지난 시기 미술전문지는 물론 일간지 문화잡지 텔레비전 대학신문 등 거의 모든 매체들이 한번쯤 대안공간을 다루었다. 대부분의 일간지 또는 문화잡지의 미술기사를 맡은 신임기자들은 마치 신고식을 거치듯 대안공간 기사를 쓴다. 그렇게 해서 주위는 대안공간을 다룬 기사와 원고로 흘러넘쳤다. 1999년 4월 대안공간루프가 처음 ‘대안공간’으로 표명되고 그 이후 비슷한 성격의 공간들이 줄줄이 생겨 났고, 우리는 좋든 싫든 대안공간을 우리 미술계의 매우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왔다.
2002년을 전후로 이미 젊은 미술가들에 대한 미술계 안팎의 관심과 요구가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 직전이었다. 국공립 미술관을 비롯한 사립미술관, 상업화랑 그리고 대안공간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젊고 참신한 미술가를 찾자는 이념에 불탔고 서로 보조를 맞추었다. 이와 함께 새로운 기획과 실천을 둘러싸고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태계, 미적 공동체가 생성되었다.
그런데 대안공간의 변치 않는 딜레마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이나 컨셉트를 제시하는 전시 기획력과 공간 유지를 위한 경영난의 문제가 겹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공간들은 이런 저런 상황에 얽혀 보다 복잡한 국면으로 전개되게 마련이었다. 수많은 풍문이 도는 가운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지자체의 문화재단 같은 공공 영역과, 기업을 포함한 민간 영역으로부터의 속 깊은 이해와 폭넓은 협업이 필요했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당시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젊은 신예 미술가들을 발굴한다는 대안공간의 기본 기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비록 국공립 미술관, 사립 미술관 심지어 상업화랑 또한 동일한 목표와 실천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대안공간의 존재 근거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대안공간이 젊고 참신한 신진작가들의 인큐베이터 또는 도약대 역할을 지켜야 그러한 미술계 전체 환경이 상호 경쟁과 견제, 또는 비교를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지속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미술계를 포함해 한국 사회의 큰 특징은 ‘용두사미’라는 것이다. 시작은 요란한데, 진행하다 어느 순간 스윽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대안공간이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지 이제 10년을 막 지난 시기에 벌써 제도화가 됐다, 주류가 됐다, 이제 그 역할이나 기능이 유효하지 않다, 식상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안팎에서 들린다. 그러나 특정 예술 이념이나 예술의 정치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고유의 기능은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유효하며 적극 권장 확대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오히려 대안공간의 기획과 과제가 매우 성공적으로 성취되어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 모두에서 수용되고 확산되는 것다. 이는 대안공간의 장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문제이지 그 단점을 꼬집어 낼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정당한 비판도 비평도 아니다. 
그렇기에 대안공간이 어느새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며 데뷔시키는 무대로서의 기능은 더더욱 유효하다. 이러한 존립 목표 또는 근거를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고 개발하는 것이 대안공간의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다가오는 미래의 대안공간 또는 대안적 기획을 논하는 것이 생산적이며 정당한 담론의 주제가 될 것이다. 각각의 공간의 주체들은 각자 고유의 미학적 영역을 만들고 기획과 운영의 안정적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보다 창의적인 기획과 실천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대안공간을 포함한 한국 미술계의 젊고 창의적인 기획, 창작의 주체들이 예술적 활동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설득적인 평가의 기준을 제시하고 확대하는 담론, 그리고 대안적 인프라에 대한 고민이 또한 긴급하다.

한국형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정착하다

글|조주현·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지난 10년 한국 미술계의 가장 큰 성장 원동력이 되었던 변화 요소는 바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일 것이다. 90년대 후반 경제 침체로 인해 기초예술 분야의 창작환경이 열악해진 상황에서 작가들의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창작스튜디오 건립 사업은 2000년대를 지나며 각 지자체, 사립기관 등에서 주관하여 봇물처럼 생겨나 그야말로 붐을 이루게 된다. 2009년 한국 미술계는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기를 맞이한 중요한 한 해였다. 이전의 창작스튜디오가 일종의 정형화된 작업 공간과 프로그램들을 지원하는 단계였다면, 올해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건립된 대규모 창작스튜디오 프로젝트들은 글로컬한 문화적 맥락 아래 국제 교류의 구심 역할과 동시에 지역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며 파일럿 프로그램을 가동 중에 있다. 이러한 2세대 창작스튜디오들은 지역과의 연계성, 학제 간 교류 협력, 예술의 공공성을 중심으로 특성화와 차별화를 꾀하며, 급진적으로 진화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는 10년 간 미술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과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다. 
1998년 (주)쌈지가 암사동 사옥을 개조해 실험적인 작가들에게 스튜디오를 제공하는 것으로 출발한 쌈지스튜디오는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기록되며, 당시 신진 작가 발굴과 지원 방식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2000년 홍대 앞으로 이전해 오늘날 홍대 앞 문화의 메카로 자리잡으며 이형구 박찬경 정연두 김홍석 장영혜 고낙범 함경아 김창겸 양혜규 이수경 등 현재 미술계에서 스타급으로 통하는 작가들을 배출했다. 이후 영은미술관의 경안미술창작스튜디오나 가나아뜰리에, 금호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등 개인이나 사립 미술관, 화랑이 주최가 되어 운영 주체의 특성에 따라 일부 작가들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을 프로모션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사단법인 현대미술관회에서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를 건립하고 프로그램매니저 등 전문인력을 선발하여 국제교류프로그램을 확대시키며 국제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2004년 경기도 고양시에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를 개관하면서 그 규모를 확대시켰다. 이 외에도 90년대 중반부터 작업실 제공을 해왔던 광주시립미술관 창작스튜디오와 2006년 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07년 개관한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등은 각 지자체에서 비슷한 형태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지역작가들을 적극 지원하여 레지던스 프로그램 열풍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젊은 작가들에게 창작스튜디오 입주경력은 일종의 ‘어워드(Award)’ 개념으로 자신의 작업이력을 관리해나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처럼 여겨지는 현상이 팽배해져, 국공립 미술창작스튜디오의 경쟁률은 최소 50:1정도를 기록한다. 그러나 이미 다른 기관에서 지원 받은 일부 작가들이 주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중복 지원을 받는 등 미술계 내의 또 다른 엘리트 집단 양성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들도 많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비슷한 운영 목표와 프로그램, 시설 현황을 갖춘 창작스튜디오에서 벗어나 특성화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올해 개관한 2세대 창작스튜디오들은 새로운 레지던시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적용시켜 각 공간이 내포한 장소성과 예술성이 접목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문화 명소로서 역할하는 지역 재생의 거점으로 조성되었다. 서울시에서는 ‘컬처노믹스’ 전략의 핵심 사업으로 유휴 시설의 재생과 프로그램의 다양화를 추구한 서울시 창작 공간들을 차례로 개관하기 시작했다. 구 공업지역의 폐공장을 리모델링해 조성한 금천예술공장은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공동 프로젝트 스튜디오를 지향하는 신개념 예술 공장이다. 구로디지털단지가 인접한 환경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산업과 예술의 협력을 모색하는 ‘아트로봇프로젝트’나 ‘문화마을 만들기’ 같은 지역공동체와 연계하는 프로그램들을 통해 일상과 예술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문화 명소로 자리잡을 계획이다. 한편, 재래시장을 ‘예술시장’으로 탈바꿈한 신당창작아케이드 역시 이러한 생활 속에서 향유되는 예술 활동을 지향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데 주력한다. 2세대 창작스튜디오들의 또 다른 특징들은 하드웨어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9월 개관한 ‘인천아트플랫폼’과 11월에 개관한 ‘경기창작센터’ 등이 그 모델이다. 이러한 창작스튜디오 건물은 각 동에 공방 미디어랩 숙소 스튜디오 수장고 전시실 카페테리아 등의 시설을 갖추고 복합문화예술 매개공간으로 기능한다.
10년 동안 뜨거운 논쟁과 열풍의 중심에서 진화해 온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이제 일부 특정작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더욱 다양화된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장르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찾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앞으로 10년, 한국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세계적인 활약이 기대된다.

쌈지스튜디오 1기 작가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찬경 박혜성 정서영 홍순명 이주요 김홍석 고낙범. 1998년 (주)쌈지가 암사동 사옥을 개조해 설립한 국내 최초의 본격 레지던스프로그램. 2000년 홍익대 부근으로 이전, 대형 전시장까지 갖춘 쌈지스페이스를 오픈하면서, 명실공히 청년 미술의 산실로 급성장했다. 10년 동안 총 10기의 작가를 배출하고, 2008년 말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자치와 분권의 시대, 지역 미술관의 빛과 그림자

글|김준기·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바야흐로 국토균형발전론이 국가적 이슈로 부각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밀집해 있어서 지역성 논의 자체가 매우 버거운 형편에 미술관 문화의 지역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의 미술관 문화의 성장은 한국의 미술 문화를 진일보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지자체 공공 미술관들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서울 대전 부산 광주, 이들 네 도시의 공공 미술관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역 미술관 시대가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이다. 1998년에 부산시립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지자체 미술관의 시대가 본격화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88년에 개관했지만 2002년에 대법원 건물을 개조해서 현재 건물로 이사한 이후에 보다 본격적인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광주시립미술관도 1992년에 문을 열었지만 독립적인 미술관 건물을 갖추지 못하다가 2007년에 들어서야 현재의 건물로 옮겨서 새 출발을 했다.
경남과 전북의 도립미술관은 지자체로서는 한 발 앞선 2004년부터 독자적인 미술관을 설립해서 운영해 왔다. 후발주자이면서도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미술관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배후 지역으로서 중심과 주변의 상황 논리를 어떻게 헤쳐 나갈 지 그 향배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대구가 10년간의 논의를 거쳐 개관을 앞두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미술관이 없는 광역자치단체는 인천 강원 충북 충남 전남 울산 (대구) 경북 등이다. 서울 경기 대전 부산 경남 광주 전북 제주 등 8개의 미술관 있는 지자체와 8개의 미술관 없는 지자체가 반반 섞여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 지역 미술관은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역 미술관 확산의 조짐은 중소도시의 미술관 설립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서귀포시나 양구군 등의 기초 자치단체에서 만든 이중섭 박수근 등 작고작가 미술관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개관을 목전에 둔 포항시립미술관의 경우 인구 50만의 도시에 걸맞은 미술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해 좋은 선례를 남겨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광역자치단체뿐만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의 공공 미술관 건립은 앞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의 경우 3백개가 넘는 공공 미술관이 있다. 물론 경제위기에 따라 이들 미술관들도 안팎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는 하지만, 10여개 남짓한 한국의 공공 미술관 수를 생각해 보면 경이롭기만 하다.
전지구화의 호명이 개인에게 직접 투여되는 시대에 지역의 미술관이 독자적인 가치를 만들고 지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부산과 대전은 해양도시의 개방성과 과학기술도시의 미래 비전을 중심으로 소장품을 늘이고 기획전을 통해 미술 문화를 확산하는 데 주력해 왔다. 광주시립미술관은 하정웅 컬렉션을 바탕으로 ‘예향 광주’의 위상을 찾아 보폭을 넓히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대법원 건물 이전 이후 정기적인 기획전으로 시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 미술관이 지역성을 찾아가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문화적인 보편주의가 지역적 특수성을 잠식한다는 점이다. 특히 블록버스터 전시의 포퓰리즘(populism)은 논란거리이다. 블록버스터는 1천만명이 줄 서서 보는 대박 영화 한 편으로 1년 치 문화 생활을 마감하는 대중들에게 누구나 아는 상투적인 서구 콘텐츠의 확대, 재생산한다. 대신에 미술관이 감당해야할 자생적인 예술을 소개하거나 활성화하는 일과는 거꾸로 갈 수밖에 없다. 시민에게 친숙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이 자칫 포퓰리즘의 폐해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시각이 많은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아마도 기성의 편견에 따르자면 ‘지역 미술관’이란 서울 이외의 지역에 존재하는 미술관을 가리키는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으로 지역을 사유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가령 뉴요커의 시각으로 서울을 재단한다면 어떨까? 서울의 지역성과 서울지역 미술관의 정체성을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중소도시이건 거대도시이건 간에 혹은 수십 개의 기초자치단체를 가진 광역자치단체이건 간에 특정 지역의 미술관은 해당 지역의 미술(관) 문화를 향한 분명한 미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민, 또는 도민과 함께 호흡하는 미술관일 것이다. 어느 미술관이든 이러한 미션을 부인하는 곳은 없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지역에 관한 편견을 씻는 데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중앙과 지역을 나누는 이분법은 퇴행적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수도 서울 한복판에 있다고 해서 중앙 미술관이고 국립현대미술관이 경기도 지역 과천에 있다고 해서 지역 미술관인 것은 아니다. 지자체 미술관의 존재는 자치와 분권을 지향하는 시대정신의 소산이며 모든 지역에 예술 생산과 향유의 기회가 균등하게 존재하는 국토균등발전의 소명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염두에 둘 것은 미술관이 지역의 미술 생태계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문화 생산을 견인할지에 대한 것이다. 대안공간과 화랑, 언론 등의 활성화와 더불어 상생할 때 공공 미술관의 지위와 역할이 더욱 명확해 지기 때문이다. 10년의 짧은 역사 동안 쌓은 압축 성장이 향후 독이 되지 않고 약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제 미술관 밖으로 눈을 돌려 도시생태 전체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큐레이터의 새로운 영역, 그리고 ‘윤리’에 대하여

글|박만우·전시기획자

동시대 미술은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문화 산업의 한 부분으로 정점을 치닫고 있다. 스펙타클의 문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대사회의 문화 논리는 전시를 통한 문화소비행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아울러 상품미학의 범주를 넘어서 미술품 소장을 통한 물신숭배는 이제 일상 생활의 심미화 또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적 차별화 등으로 발전하면서 미술시장에 투자 혹은 투기의 열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동시대 미술이 점점 ‘글래머러스’해지는 중심에 큐레이터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고 오늘날 큐레이터의 위상과 역할은 이러한 미술 환경과 무관할 수도 없다. 때로는 작가들을 위한 심미적 매니저(Aesthetic Manager), 프로듀서, 미술평론가, 문화경영자, 미술관 건립 기획과 이를 통한 도시 브랜딩 또는 장소 마케팅을 실행하는 도시문화 설계자 또는 개인 컬렉터나 공공미술 컬렉션기금을 위해 자문역을 수행하는 컬렉션 컨설턴트 등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영역으로 큐레이터의 활동 범위는 확장되고 있다. 아마 창조 사회를 지향하는 21세기 문화컨텐츠 기획의 선도적 모델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미술 그 자체가 문화컨텐츠는 아니지만 물리학 수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IT, BT 같은 분야가 발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미술의 ‘전시문화’를 바탕으로 흔히 CT라고 불리는 시각문화산업의 구축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변화와 더불어 미술관의 소장품을 관리하고 조사, 연구하는 ‘콩세르바퇴르’라는 개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최첨단의 당대 미술을 확산시키는 글로벌 전시제작자가 큐레이터의 대표적 이미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거역하기 힘든 전지구화를 통해 우리는 글로벌 미술시장과 글로벌 전시의 도래를 목격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글로벌 전시기획자로서 큐레이터의 이미지는 1995년 광주비엔날레 같은 국제 미술 플랫폼이 도입된 이후 최초로 미술계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초국가적 순환과 교류를 특성으로 지니는 통칭 글로벌 전시라고 불리는 국제 현대미술전은 미술관에 종사하지 않는 소위 프리랜스 큐레이터들에 대한 점증하는 수요를 창출해 낸다. 일반적으로 미술기관의 큐레이터들은 학예연구(전시준비를 포함) 등으로 수년 간 미술관에 묻혀 지내다가 전시를 통해 간헐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글로벌 전시를 기획하거나 조직하는 큐레이터들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대중매체나 미술계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국제적 지명도와 함께 부상하는 스타급 큐레이터의 출현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부대 현상을 초래하였다. 예컨대 비평과 큐레이터쉽이 결별하는 현상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을 선정하고 그들의 출품작을 결정하는 전시기획의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그것이 출판되건 그렇지 않건 일종의 비평문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글로벌 전시는 특정 개념을 중심으로 한 거창한 내러티브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 결과 큐레이터는 관심의 대상이 개별 작가에게 향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하나의 전시를 구성하는 ‘부품 요소’로서 만의 작품인 개별 대상물을 겨냥하게 된다. 그 대상물들의 선택은 얼마나 전시기획자가 제시하는 내러티브 안에서 각각의 역할 분담에 잘 순응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 작가 개개인의 작업 전반에 대한 포괄적이고 심층적 이해는 이러한 글로벌 전시의 큐레이터들에게 기대하기는 힘들어 진다.
비엔날레와 같은 전시의 경우 비평의 반응이 작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큐레이터를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의미 제안 또는 의미 생성은 작가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큐레이터의 몫이 되었다. 마치 희곡 작가와 연출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가 그와 같이 발전되어 가고 있다고 보여 진다. 실제로 미국 미술계의 경우 비평 집단과 큐레이터 집단 사이의 불화는 과거의 상호 융합적인 관계를 완전히 벗어나 적대적인 관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지경이다. “큐레이터는 정보수집과 네트워킹에만 열을 올리느라 개별적 작가와 작품에 대한 비평적 접근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다만 성공한 전시로 중평이 난 전시들에서 잘 가려 뽑은 ‘명품’들로 자신의 전시를 치장하고 나면 일단 그럴듯한 전시를 만들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는 비평계로부터의 비난도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고 본다.
한편 국제적 지명도를 지닌 큐레이터들은 창조적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전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경쟁적으로 유치되는 비엔날레 행사의 프로모션을 위해 부단히 러브콜을 받고 있다.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도시의 브랜드화와 관광산업의 활성화 등과 같은 지역경제에 끼치는 파급 효과를 노리는 비엔날레의 전략적 위치 설정을 위해 스타 큐레이터를 통한 이미지 제고는 필수적인 기획 전략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글로벌 전시기획자들은 거대 내러티브를 통해 문화적 담론 제기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큐레이팅을 통해 글로벌 문화 환경과 지역의 특수한 맥락을 결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야한다. 이를 위해 글로벌 전시기획자는 다양한 지역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이해를 수행해야 한다. 이는 비단 담론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 작가에 대한 연구, 서구 중심의 현대미술이 그 지역에 수용된 역사 그리고 그 지역 미술 제도의 구조와 역능에 대한 이해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역적 맥락에 충실한 새로운 출품작 프로젝트를 기획 및 제작하는 일이다. 예컨대 리옹 비엔날레나 리버풀 비엔날레와 같이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글로벌 전시들은 출품작의 60% 이상을 그 전시를 위해 주문 제작된 신작(New Commission)으로 채우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큐레이터는 신작의 기본구상부터 최종적인 작품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작가와 모든 과정을 공유하고 협업하는 파트너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이때 작품의 제작을 위해 소요되는 예산의 관리와 집행을 담당하는 프로젝트 관리도 중요하지만 큐레이터의 가장 중요한 소임은 작가의 구상(Conception)과 작품의 실현(Realization)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를 유지시키는 프로듀서로서의 역할 수행이다. 때로는 이 역할이 작가와 출판 편집자 사이의 그것과 유사한 관계이어서 수용자의 입장을 철저히 대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은 작가로 하여금 출산을 돕는 산파(Midwife)의 역할과 같다. 큐레이터가 작가와 함께 참여하고 공유하는 리서치의 모든 과정과 절차는 소크라테스가 변증론에서 말하는 산파술(Ma뷷utique)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지금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산파 제도를 보면 산파는 아이의 출산 이후에도 산모와 신생아를 돌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미술 창작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실제로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즉 큐레이터는 전시 이후 작가의 프로모션을 위한 사후 관리는 물론 새롭게 제작된 작품의 물리적 유지 및 보존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작품의 해석과 평가를 위한 비평적 자산(Critical Fortune) 관리의 후견인 역할을 한다. 여기서 인용 주석 해설 비평 등 작품 수용의 역사를 총망라하는 ‘비평적 자산’이란 큐레이터의 핵심적 역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큐레이터는 전시를 통해 작품을 새로운 맥락에서 재조명함으로써 그 작품의 비평적 자산을 증식시키고 그 비평적 운명을 결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대목은 큐레이터의 직업 윤리이다. 도덕은 큐레이터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 점증하는 큐레이터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직업 윤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의사나 법조인의 직업윤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다루기 때문이다. 공공 미술관에서 일하건 프리랜서로 활동하건 적어도 큐레이터의 윤리도 어떠해야 할 지 어렵지 않게 유추될 수 있다. 그들은 딜러와는 달리 전시를 계기로 작가들에게 신작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공 예산’으로 운영되는 미술관 컬렉션을 위해 ‘미술시장’을 통해 작품을 구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공미술 사업 〈도시갤러리〉의 일환으로 망원동과 성산동에서 진행한 ‘동네예술가 프로젝트’. 작가들은 마을버스 종점 근처 공동주택에 ‘꽃밭주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민들과 함께 벽화를 그렸다. 최근 공공미술은 단순히 심미적인 조형물 설치보다는, 지역 사회의 문화적 정서와 수평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커뮤니티 미술’로 변모하고 있다.

미술품 감정의 제도 개혁,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글|최광진·미술평론가

벌써 10년이 지났다. 필자는 당시 art in culture 창간준비호에 변관식의 〈외금강 옥류천〉이 그의 제자의 작품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큰 홍역을 치렀다. 이태호, 유홍준 교수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 도록 표지뿐만 아니라 여러 책에 소정의 대표작으로 소개된 이 작품이 위작이라는 주장은 당시 큰 파문을 몰고 왔다. 당시 30대 후반의 약관의 나이에 저지른 나의 무모한 의협심은 학술적 검증 없이 특정인의 주관적 안목에 의해 좌우되는 권위적인 미술계에 대한 반발이었고, 국전 도록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집요한 노력 끝에 그 작품을 그린 제자의 양심선언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진실은 명확했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작가의 사인을 자르고 판매한 화랑주는 오히려 나와 art in culture를 악질로 몰아세웠고, 이 작품을 일민미술관 전시회에 출품했던 이태호 교수는 변관식이 그려줬다는 논리로 반박문을 발표하고, 뉴스를 내보냈던 MBC방송사를 언론중재위에 제소했다. 국전 도록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고, 그림을 그린 사람과 위조한 사람이 다 드러났지만, 연루된 학자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논쟁 아닌 논쟁이 되었다. 그러나 비전문가인 기자들이 함부로 글을 쓸 수도 없었고, 누구도 이 사건을 판단하고 결정지어 줄 단체가 없었다. 그 후 나와의 논쟁을 중단한 이태호 교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면에서 그 작품이 여전히 변관식의 걸작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정작 이 작품을 발굴하여 걸작으로 만든 유홍준 교수는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고, 문제작이 변관식의 대표작으로 소개되었던 많은 책들은 여전히 연구자들의 자료가 되고 있다.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아마도 이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갈 것이다. 그렇다고 최근 이중섭이나 박수근 사건처럼 해결을 검찰에 넘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현재 미술계 내부에는 자생적으로 위작 문제를 해결해 줄 기구가 없다. 현재 유일한 미술품 감정기관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있지만 공신력이 약해 보인다.
필자 역시 젊은 나이에 그 분들과 교류하며 7년 가까이 감정위원을 지낸 바 있고, 화랑협회에서 감정했던 작품들의 DB작업을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DB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누구도 주인의식과 소명감을 갖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화랑협회는 감정위원들에게 아주 소정의 감정료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감정 시스템 구축보다는 협회 운영에 사용했다. 감정 절차도 매우 허술했다. 시간이 되는 감정위원들이 모여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곤 했다. 가장 잘 본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어떤 입장을 표명하면 나머지는 분위기상 그냥 따라가게 되기 쉽다. 화랑주들은 때에 따라서 본인들이 작품을 사고 판 작품도 감정에 올라오기도 하고 청탁을 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물론 본인의 양심을 지키겠지만, 자유로운 입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감정위원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껄끄러운 사람들은 배제되기도 한다. 필자 역시 몇 년 전 화랑협회 회장단이 교체될 때 감정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화랑주의 현장 경험과 작품을 사고팔면서 터득한 안목은 존중해야겠지만, 특정한 입장이 있는 화랑주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미술품 위조는 화폐 위조와 같은 범죄 행위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검찰청처럼 위작 행위를 담당할 정부기관으로 ‘감정청’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 사리사욕 없이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그 아래 〈과학감정부〉 〈안목감정부〉 〈기록학술부〉를 두어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체계적인 연구와 자료를 축적하면서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그리고 친분이 아니라 엄격한 심사와 시험을 통해 실력 있는 감정위원을 뽑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문가로서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꽃을 찾는 나비처럼 유능한 인재들은 몰려들 것이다. 감정가는 하루아침에 양성되지 않는다. 미술사와 작가에 대한 지식과 작품의 필치에서 작가 내면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직관적 통찰력, 그리고 현장에서 수많은 작품을 보면서 안목을 키워야 한다. ‘감정청’을 만들어 이러한 인재를 키운다면 큐레이터처럼 미술대학 졸업생들의 새로운 직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미술이 만병통치약인가?

글|윤제·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

공공미술의 10년을 되돌아보면, 공공조형물 미술품장식법 현장미술 지역문화 등 여러 입장들이 전후로 진행되다가 2006년도에 그 정점을 이루었다. 2000년대 초중반, 문화 정책의 일선에서는 복지문화와 관련된 많은 제도 시책들이, 학계에서는 서구의 모범 사례들이 강단과 지면을 통해 많이 알려지고 있었다. 또한 미술품장식법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맞섰던 토론장의 풍경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한 노력들은 2004년 참여정부의 〈새예술정책〉에서 그 변화를 만들어 내고 2005년도 민병두 위원이 미술품장식법안의 수정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뒤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문화복지사업과 복권기금예술사업의 일환으로 ‘아트인시티’가 만들어졌다. 또한 ‘마을미술관’과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가 그 뒤를 잇는다. 특히 경기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 등이 마련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성과도 괄목할 만하다. 이들의 전반적인 특징은 탈 미술관적 측면, 지역 문화적 측면, 공동체 예술적 측면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비전을 함께 보여준다.
한편 현장미술의 부활을 위해 척박한 지역에서 외로움을 이겨낸 이들, 그리고 현대미술의 새로운 확장을 위해 거리에서 고생한 이들도 많다. 특히 접는미술관의 ‘명륜동을 찾다’는 마을미술관의 전례를 만들어주었고, 양주혜 외 여러 작가들의 공사판 펜스 작업들은 공공디자인(urban design)의 포문을 열어 주었다. 그 밖에 2000년대 공공미술의 성과로 믹스라이스 플라잉시티 김인규 밀머리미술학교 성미산공동체 스톤앤워터 등의 선두적인 활동이 돋보인다.
많은 이들이 2006년도를 ‘한국 공공미술의 원년’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것은 단지 정부 주도의 ‘아트인시티’ 사업과 여러 지자체의 공공미술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미 2000년부터 〈미디어시티_서울〉 와우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하철에서 많은 공공미술들이 이루어진 바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퍼포먼스그룹 반지하가 〈디지털 인천하우스(지역기록 및 전시)〉을 기록하고 교육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밖에 소소한 공공미술들이 작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2006년을 집착하는 데에는 이 시기에 발표된 작업들이 소통의 몫을 조금 배려하고 낮은 보폭으로 시간과 과정을 함께함으로써, 이전의 전문가 중심의 작업들과 비교했을 때 낯설어 보여서가 아닐까? 다시 말해 2006년도는 공공미술의 원년도가 아니라, 하나의 분수령으로 보아야 이전의 문맥과 지금의 현상을 보다 다양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 영역을 ‘치장’하는 식의 미술 작업들은 그 성과가 바로 보이지만, 그 만큼 주민의 정서와 수평적 공감대가 배제되기 쉽다. 새로운 실험적 영역 확장이라는 미션 아래, 그 성과는 미술계에서 평가되곤 하지만 현장은 임상실험 수술대가 아니다. 공간 규정을 단순화 해버리면 문제는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공적 영역은 전문가 정책 담론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역사(거대 담론의 역사가 아니라)에서 공동체의 감수성까지 아우르는 복잡한 입장들이 있다. 다시 말해 물리적 공간만 보지 말고 공동체의 감수성을 되살리기 위해 그 사이트를 이해하고 많은 배려와 시간이 필요하다. 추상적 접근 보다는 구체적인 문제점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도시 문제만 보자면 원도심 문제, 기억을 통한 도시 재생, 행복을 위한 정주 등 함께 문맥을 찾고 고민하고 공유해야 한다. 주민들에게 지속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문화의 매개자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미술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과 자긍심을 살리는 문화로 그곳의 정체성과 희망을 다시 그려내는 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공공미술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까지의 공공미술은 사라져야 한다. 적어도 ‘새마을 운동’ 연장선상에서의 공공미술, 주민을 모집하고 마을을 치장하는 주민을 계몽하고 방향을 지시 하려는 식의 모든 권력적이고 엘리트적인 자세는 사라져야 한다. 예술가는 특권층이 아니며 공공미술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