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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9.10

Abstract

스페셜 테마 Art in Nature 자연과 대화하는 녹색 미술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양평환경미술제+에치고츠마리트리엔날레 최근 자연과 환경이라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품에 안은 미술제들이 열렸다. 공공미술의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 생태주의와 결합한 모습이다.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는 물질적 팽창과 생태적 호흡에 대한 사유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며, 『양평환경미술제』는 친환경 농업특구와 생태학습장이라는 지역성을 이용하여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에치고 츠마리 트리엔날레』는 지역민과 공생하는 환경미술의 모델로 이미 국제적 명성을 지닌 '대지의 미술제'다. 생태주의를 외치는 환경미술은 미술관을 벗어나 삶의 현장 속으로 걸어 나온 미술의 필연적인 모습이다. 몸을 낮추고 사회적 환경 속으로 뛰어들면서 우리 삶을 결정짓는 중대한 요소인 환경과 자연에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과 소통하는 미술, 세 개의 환경 미술제를 화보와 함께 소개한다. 이어서 환경미술에 대한 이해와 한국의 실태를 다각도로 조망하는 임재광의 글 「자연과 환경 그리고 미술」을 함께 싣는다.

Contents

표지

에디토리얼 창간 10주년을 맞았습니다_김복기

핫피플 정도련_호경윤

프리즘
    ‘아시안 에디터스 컨퍼런스’에 참가하고_스가와라 노리오
    수퍼로컬, 에밀 고의 삶을 추억하며_토비아스 버거

줌인 아트마켓 8
    Charles Saatchi의 변신 ①_김순응

포커스
    이우환 조각_김복영
    신성희|전광영_윤진섭
    Platform in Kimusa_유진상
    스탠 더글라스|아드리아 줄리아_서현석

특집 art in culture 10th ANNIVERSARY!
    (1) Cover History : 1999.10~2009.10
    (2) Art People Story 120 : 인물로 보는 art 10년_편집부
    (3) Self Interview : “잡지는 매달 새 상품이어야 한다”_김복기

나의 얼굴 신하순

해외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 저 신비한 자연을 본다는 것_편집부

아트 마켓
    KIAF2009, ShContemporary09
    서울-상하이 아트페어를 분석하다!_김현

해외 미술
    이스탄불비엔날레, 사회주의 노스탤지어의 정치적 서사_김정연

이미지 링크 김형섭

리포트 인사이드
    인천여성비엔날레, 여성이 여성을 위해 전시를 할 때_양은희

특별 기고
    조각가 김종영의 서예 정신_정세근

전시 리뷰
    실험실02 : 도시 피크닉|올해의 작가 2009 : 서용선|김주영
    이강우|진 마이어슨|노중기|신지 오마키|이장원
    곽현진|박윤희|강이연|정서영|박진원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서울-상하이 아트페어를 분석하다!

KIAF2009 전경

서울-상하이 아트페어를 분석하다!

글|김현 기자

제8회 KIAF(한국국제아트페어)가 지난 9월 22일 6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경기 침체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종플루까지 더해 걱정을 보탰다. 재채기 한방에 몇 년간 준비해 오던 지역 행사들이 연이어 취소 혹은 축소됐다. 다행스럽게도 KIAF 일정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지난 해보다 전체 관람객 수가 5천여 명 정도 감소한 것은 일반 관람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학생, 주부, 직장인 등 ‘개미 군단’의 발걸음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행사 장소가 3층으로 바뀐 것도 관람객 수가 줄어든 요인 중에 하나이다. 작년까지 페어 장소로 사용되던 코엑스 1층 인도양홀과 태평양홀이 내부 수리중이어서 3층으로 옮겨간 것. 때문에 KIAF가 주목적이 아니더라도 겸사겸사 한번쯤 들릴 수 있는 유동 관객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반기 아시아 아트페어의 시작을 알리는 상하이 ShContem-porary와 타이페이의 아트 타이페이의 결과 또한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했다. KIAF와 비슷한 시기에 개최된 ShContemporary (9월 10일~13일)와 아트타이페이(8월 28일~9월 1일)가 작년에 비해 참여 갤러리 수가 ‘반토막’이 난 채 행사를 종료했다. 하반기 아시아 아트페어의 시작을 알리는 두 행사의 결과가 이러했으니, KIAF도 좋은 실적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KIAF는 시작도 하기 전에 어깨를 무겁게 누르던 짐들을 툭툭 털고 ‘코리아 파워’를 보이며 힘찬 기지개를 폈다. 올해 KIAF는 관람객 5만 6천여 명, 작품 거래 실적 140억 원으로 2008년 대비 관람객 5천여 명, 거래액 4억 원이 감소해 하향세를 보였다. 그러나 여타 국제아트페어의 약세를 감안하면 결코 나쁘지 않은 실적이다. 줄어든 관람객 수를 생각하면, 거래액은 크게 차이가 없는 셈이다. ‘개미 군단’대신 ‘큰 손’들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올해 ShContemporary를 다녀간 관람객 수는 총 3만여 명으로, KIAF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김준 <Bird Land-Armani> C-print 100x175cm 2008

양질고가, 일거양득의 효과

올해 KIAF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몇몇 화랑들의 눈에 띄는 약진이다. 미술호황기에 ‘반짝’떠오른 젊은 작가에게 올인하던 블루칩작가의 시대가 한물 가고 각 화랑들은 ‘진짜배기’ 작가들을 내세워 진검승부를 펼쳤다.
3.5m가 넘는 전광영의 대형 설치 작품을 부스에 설치해 이목을 끌었던 더컬럼스갤러리는 사실상 KIAF에 선보인 작품들 거의 모두가 솔드 아웃되었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KIAF를 위해 오랜 기간 시장 연구와 작가 선택에 심혈을 기울여 전략을 세웠다는 점도 덧붙여 강조했다. 전광영의 설치작품과 평면작품 4점을 포함해, 10월 5일부터 11월 14일까지 전시 예정인 마커스 웨겔만의 작품 4점과 브라질의 빈민가를 디지털 작업으로 재현한 디오니시오 곤잘레스의 작품도 모두 판매 완료되었다. 작품 판매를 목표로 삼았다면, 인기작가의 소품을 많이 내걸어야 했지만, 작가를 먼저 선정한 다음 대작과 수작을 중심으로 셀렉팅했다. 판매보다는 작가 프로모션에 포커스를 둔 까닭이다. ‘양질고가’ 전략은 통했고, 마케팅과 홍보, 모두 성공적이었다. 
아라리오갤러리 역시 억대가 넘는 고가 작품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올 봄, 뉴욕에서 전시한 강형구의 <오드리 햅번>이 1억 8천만 원에, 현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과 천안에서 전시 중인 진 마이어슨의 대형 작품 역시 1억 7천만 원인 높은 가격에 판매되었다. 그 외에도 박세진 2점, 백현진의 1점이 새 주인을 찾았다. 갤러리측은 작년보다 관람객 수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판매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한 유화와 소품을 찾는 젊은 컬렉터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파이프를 문 고흐가 담배연기를 내뿜는 이이남의 영상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던 학고재는 KIAF 첫 날 이명호의 작품을 시작으로 이우환 김창렬 김아타 송현숙 석철주 작품의 거래를 성사시켰으며, 대구의 리안갤러리는 디자인(Dzine)의 설치작품과 리사 루이터의 회화 작품을 각각 1억 2천과 7천 4백만 원에 판매했다. 얼갤러리는 강지만 작가의 작품을 솔드아웃시켰다.
‘협업’으로 큰 성과를 올린 해외 화랑들도 있었다. 독일의 데비스클렘갤러리, 에르하르트위첼갤러리, 갤러리에디션푸르만, 40 로더 등 4개의 갤러리는 한 부스에서 힘을 모았다. 2005년 KIAF 주빈국이었던 독일은 이후에도 꾸준히 KIAF를 찾고 있다. 강렬한 색채와 시적인 정서 그리고 유럽의 독특한 세련미를 갖춘 독일 작품은 한국인들의 감성에도 잘 맞는 듯, 올해 역시 콘라드 빈터, 세리 바르사우어의 회화 작품이 모두 판매되었다. 작년 미구엘 앵겔 이글레시아스의 작품을 솔드 아웃시키며 주목을 받았던 스페인의 호르헤 페르난도 알레코아 역시 올해 좋은 성과를 거둔 화랑 중 하나이다. 미구엘 앵겔 이글레시아스의 작품과 새롭게 선보인 마티아스 크란의 유화 작품이 솔드 아웃되었다.

KIAF2009 실제 잔디를 깔아놓은 갤러리드리

미술 살리는 성숙한 ‘컬렉션과 컬렉터’

KIAF의 학술 행사는 매년 밀도 있는 강의와 관람객의 높은 참여율로 화제가 되었다. 올해는 인도특별전과 국내특별전을 기획한 인도의 가야트리 신하와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의 ‘큐레이터 토크’와 인도 네루미술대학 교수인 파룰 무케르지의 강연이 마련됐다. 그리고 《art in culture》 자매지 《art in ASIA》가 주최한 ‘아시아 에디터스 컨퍼런스’가 열렸다.
아시아의 주요 미술매체 에디터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펼친 ‘아시아 에디터스 컨퍼런스’에는 중국 《비주얼 프로덕션》의 구젠칭,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노리오 스가와라, 인도 《아트앤딜》의 스므리티 라자리아, 한국 《헤럴드경제》의 이영란 부장이 패널리스트로 참가해 각 국의 컬렉션과 컬렉터의 현황에 대해 발표했다.
노리오 스가와라는 예전에는 미술을 논할 때, 작품의 미술학적 계보와 미학적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이제는 다른 국가와의 네트워킹을 통해 작품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되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각 나라간의 연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아시아 미술시장의 구조 위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얘기할 때라고 말했다. 질의자로 참석한 윤진섭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은 “《아트뉴스》에서 매년 200명의 컬렉터를 선정하는데, 그 중 한국은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이 유일하다. 중국미술의 급성장 이면에는 중국미술을 전적으로 후원하는 화교 컬렉터들의 역할이 컸다. 한국미술을 키워내는 ‘큰 손’이 활약해야 한국미술이, 아시아미술이 클 수 있다” 며 성숙한 컬렉팅과 컬렉터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이 국제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시아미술은 수묵화 도자 서예와 같은 고미술품으로 희미하게 인식될 뿐이었다. 아시아미술이 국제 미술계에서 현재의 위치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미술의 공이 컸다. 아시아라는 테두리 안에 속한 공동체 국가들이 서로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고 장기간 긴 안목으로 서로를 끌어줄 때 아시아미술이 미국, 유럽인의 시선이 아닌 아시아의 정서로 이해되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에디터스 컨퍼런스’는 국제 아트페어에서 아시아 각국의 미술 상황을 진단하고 컬렉팅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행사에 참석한 많은 미술애호가와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었다.

KIAF2009 호안과이타 부스에서 전시중인 에더 산토스의 <Call Waiting>

올 KIAF, ‘이것’이 부족했다

올해 KIAF는 경기 침체, 신종플루 등 몇 가지 악조건에도 크게 흔들림 없이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로서의 위상을 과시했다. 대부분의 화랑이 작년보다 작품 판매가 부진했지만 출품작의 경향이 새로워지고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졌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국내 화랑의 만족스러운 성과 뒤에는 몇몇 해외 화랑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25년간 콜롬비아와 마드리드에서 화랑을 운영한  페르난도 프라딜라는 2008년에 이어 두 번째 KIAF에 참가했다. 올해는 전반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을 뿐더러 유로가 많이 올라 작품 가격을 많이 낮췄다. 페르난 도프라딜라갤러리는 지난여름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던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을 메인으로 내세웠다. 그는 작품을 보러오는 관람객은 많았지만 정작 작품을 사려는 컬렉터들은 많지 않다며, ‘실세’를 페어장에 불러 모으는 마켓팅이 미흡한 것이 아니냐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KIAF에 참가하는 해외 화랑 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가장 높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 엔화가 거의 2배 가까이 올랐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일본 작품에 느끼는 부담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일본의 갤러리테라 디렉터 유카리 아타미는 올해는 네덜란드 작가 루드 반 엠펠과 타츠야 마츠시타의 작품이 인기가 있었고 판매도 이루어졌지만, 엔화가 많이 올라 작품 가격이 높아져 기대만큼의 성화를 거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마유카, 치카 하토리 등 국내에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작가들을 프로모션하는 츠바키갤러리의 디렉터 히로야 츠바키하라도 아쉬움을 표했다. 츠바키갤러리는 2007년을 제외하고 올해까지 총 7회 KIAF에 참여한 해외 화랑의 산증인이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 해외 화랑에 대한 접대와 배려가 충분치 않고, 판매도 저조하다고 말했다. 다른 일본 화랑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며 내년에도 KIAF를 찾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일본 화랑의 경우 작년보다 5개가 줄어 11개의 화랑이 참여했다.
한국‘국제’아트페어, KIAF가 화랑미술제와 다른 점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화랑의 적극적인 참여를 목표로 삼아야 하는 데 있다. 아트페어는 각 화랑들이 주력 작품을 뽐내는 잠재적 콘테스트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미술의 전반적인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다. 막대한 운송비와 부스비를 감당해야 하는 해외 화랑에 대한 ‘대접’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그들의 지속적인 KIAF 참여는 기대하기 힘들다. 2008년 KIAF는 참여화랑 218개 중 해외화랑이 102개로 거의 절반에 가까웠지만 올해는 그에 반도 못 차는 46개에 그쳤다는 것은 국제아트페어의 위상에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빈국인 인도의 ‘스페셜리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올해는 주빈국의 화랑들이 한 자리에 모인 특별 부스가 사라지고, 대신 특별전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인도특별전의 주제가 불분명하고 전시 내용과 작품이 적절히 부합했는지도 의문이다. 인도는 중국에 이어 아시아미술의 새롭게 떠오르는 강자이다. 인도 현대미술의 스펙터클한 변화와 동양철학의 새로운 미적 구현 등 인도미술의 특징을 조망하는 전시가 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진행되었다. 이번 KIAF 인도특별전은 인도미술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보여주기에는 다소 얌전하고 식상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KIAF의 주빈국 제도는 한국과 주빈국을 미술이라는 매개로 잇는,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좋은 제도이다. 내년 2010년 KIAF의 주빈국은 영국이다. 데미안 허스트와 yBa가 먼저 떠오르는 영국 미술은 현대미술의 본거지 미국을 넘어 ‘미술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yBa세대 이후에도 정부 기업 개인 컬렉터의 꾸준한 작가 지원으로 yBa의 맥을 잊는 후대 작가들이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입지에 있는 영국을 주빈국으로 들이는 것은 다소 부담이 될 수 있으나, KIAF와 한국미술이 눈을 높여 ‘국제화’로 나아갈 수 있는 호기로 삼아야 한다. 내년에는 주빈국 제도의 장점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컨텐츠가 보다 많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살루스티아노 <Como si no pasara el tiempo>
캔버스에 아크릴릭 지름 1.5m(부분) 2008

상하이, 니하오!

KIAF보다 일주일 앞서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상하이전시센터에서 열린  ShContemporary는 중국 최대의 국제도시다운 ‘화려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ShContemporary는 베스트 오브 갤러리, 디스커버리, 플랫폼 등 세 가지 섹션으로 나누었다. 실질적으로 페어에 참가한 화랑은 ‘베스트 오브 갤러리’에 해당하며 총 54개에 그쳤다. 그러나 참가 화랑 54개 중 24개 화랑이 일본 한국 이태리 스페인 스위스 프랑스 등지에서 온 해외 화랑들이었다. 대만과 홍콩 화랑의 수까지 합한다면 해외 화랑의 수가 과반수이다. 총 참여 화랑의 수는 KIAF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해외 화랑의 참여 비율을 보면, KIAF 해외 화랑 참여 비율인 20%를 훌쩍 넘는 45%에 달한다. 흥미로운 점은 KIAF에 참가한 해외화랑 46개 중 일본과 독일 화랑이 22개로 거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ShContemporary의 경우 독일 화랑 1개, 일본 화랑은 4개뿐이었다.
중국 최대의 항구 무역도시인 상하이는 본토 중 가장 현대화 국제화된 도시이다. 이미 수많은 외국계 회사들이 상하이에 입성했고, 해외 투자자와 자본가, 사업가가 상해에 정착함에 따라 두터운 컬렉터 층을 확보하고 있다. 일반 오프닝 전날인 VIP오프닝에는, 중국 현지인들보다 외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눈에 띄었다. 작품 판매 역시 현지인이 아닌 해외 컬렉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대부분의 갤러리스트들이 입을 모았다.
해외 화랑을 대거 끌어들인 이유는 상하이의 지역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올해 새롭게 위임된 감독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올해 ShCon-temporary의 총지휘를 맡은 영국-중국계 혼혈인 콜린 치너리는 작가이자 전 울렌스현대미술센터 디렉터로, 중국의 떠오르는 차세대 미술인이다. 콜린 치너리는 페어 시작 전 경제 문제, 홍콩의 신생 아트페어인 아트홍콩과의 경쟁, 그리고 작년 이후 주춤해진 컬렉터의 태도 등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지만, 염려와 다르게 매우 성공적으로 끝마쳤다고 말했다. 치너리는 “중국 현대미술의 경향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과도한 상업주의적 작품과 고가의 작품은 자취를 감췄다. 보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이 젊은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며 달라진 ShContemporary의 경향을 설명했다.

중국 미술시장, 아직 죽지 않았다!

ShContemporary에 참가한 한국 화랑은 아트싸이드 카이스 줄리아나 금산 맥향 박여숙 잔다리 등으로 총 7개의 화랑이 참여했다. 아트싸이드는 히로시 고바야시의 회화 작품과 박승모의 조각 작품이 각각 4천만 원과 1천5백만원에 거래되었다. 올해 처음으로 ShContem-porary에 참가한 대구의 갤러리맥향 역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최근 일본 전시에서 호응을 얻은 이정웅과 송광영의 한국적인 소재의 작품이 높은 관심 속에 판매되었고, 안나 까뜨린느 베커의 사진작품도 거래되었다.
올해 세 번째 ShContemporary에 참가한 마이클슐츠갤러리 부스에서 만난 디렉터 마이클 슐츠는 작년보다 올해 시장의 분위기가 좋아졌다며 중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 위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말했다. 도자로 빚은 컴퓨터에 중국화를 그린 마준의 <뉴차이나컴퓨터>, ‘지문’을 모티프로 유명인들의 초상을 그린 쪼우차오의 <안젤리나 졸리> 그리고 왕쯔지에의 <Little Girl>이 1천5백만~2천만 원대에 거래되었다.
야요이 쿠사마 작품의 주요 모티프인 화려한 도트 스티커로 부스를 장식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일본의 오타파인아트는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을 단독으로 선보였다. 작품 가격은 23억에서 38억 원 선으로 메인에 놓인 2.5m가 넘는 호박 작품의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밝혔다.
베이징에 위치한 뉴 차이나 아트 리미티드는 1983년 출생인 젊은 작가 판 샤오옌과 리 구에이쥔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 중 판샤오옌의 휴머노이드 작품은 이불의 <사이보그>와 같이 동시대 페미니즘의 새로운 코드로 해석되며 차세대 페미니스트 작가로 주목된다. 베이징의 비욘드아트스페이스는  갤러리 고도에서 전시했던 인도네시아 작가 R.E. 하르탄로와 양나의 작품을, 대만의 아키갤러리는 1983년생인 루천펑의 200호 크기 회화와 왕량인의 작품을 약 3천5백만 원과 약 1천2백만 원에 판매했다.
터키에서 유일하게 참가한 이스탄불의 X-IST는 올해 ShContemporary에 처음 참가했지만 성과가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일반 오프닝 전날인 VIP오프닝에서 이미, 세르칸 아딘의 작품에 첫 번째 레드닷 스티커를 붙였으니 말이다. 세르카 아딘 작품에 등장하는  터키 여인들은 아시아인처럼 보이기 위해 양 눈을 길게 늘이려 애쓰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 미술 붐을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X-IST의 디렉터 케림칸 글레리우즈는 터키의 갤러리들 역시 아시아 진출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며 한국의 KIAF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에 당연히 알고 있으며 올해 KIAF와 ShContem-porary 사이에서 참여 여부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가 ShContemporary를 선택한 이유는 상하이가 중국 본토는 물론 한국 일본 홍콩 대만 그리고 서양과의 관계가 개방적이어서 다양한 고객층을 유치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세르칸 아딘의 프린트 작품은 약 1천만 원 정도에 판매되었다.
국제 미술시장에서 바라봤을 때 아시아미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다. 일정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것은 미술시장뿐 아니라 모든 경제 곡선의 가장 안정적인 상태를 말한다. 중국미술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무섭게 상승하고, 최근 주춤하는 현상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전체 컬렉터의 절반 이상이 외국 컬렉터인 ShContemporary에서 여전히 아시아미술의 전망을 내다보는 침착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ShContemporary는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한 KIAF의 후발주자이지만, 국제아트페어로써 더 견고한 필드 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KIAF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해외 화랑의 영입에 적극 투자하지 않으면, ShContemporary나 아트홍콩과 같은 후배들에게 ‘아시아 제일의 국제아트페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지 모른다.

이스탄불비엔날레, 사회주의 노스탤지어의 정치적 서사

비엔날레 개막 행사가 열린 안트레포 전시장 입구.

사회주의 노스탤지어의 정치적 서사

글|김정연·독립 큐레이터, CONCREATE 대표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과연 예술이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경제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지난 9월 10일 시작된 제11회 이스탄불비엔날레는 일견 진부하게 느껴지는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참여의 기능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예술은 이미 오랜 역사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기대보다 미미했기 때문에 이번 비엔날레의 기획 의도는 지루하고, 편협하다는 인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2009년 9월 이스탄불에서 예술과 정치에 대한 고리타분한 논의가 되살아난 이유를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물론 서유럽 국가들 역시 심한 정신적 혼란에 직면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지구의 거대한 면적을 지배했던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상실은 갑작스레 서쪽에서 해가 뜨는 것과 유사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1991년 이후 거의 20년이 흘렀다. 연방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여러 중소 국가들의 독립은 이데올로기의 전환과 수정,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과 더불어 국지적인 민족 분쟁이나 종교적 분쟁을 겪어야 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중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과연 지난 20년간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주었을까?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시장경제 체제의 변화는 결코 그들에게 핑크빛 미래만을 선물하지 않았음을 이제는 안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기존에 겪어 왔던 여러가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은 이들 신생 독립 국가들에게 더욱 크고 부담스러운 짐이 된 것은 아닌지.

2008년 11월 17일에 열린 제11회 이스탄불비엔날레 기획의도 발표 기자회견.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은 크로아티아 출신 기획자 단체 WHW(What, How & for Whom)가 맡았다.

마르크스주의자 총감독이 불러낸 브레히트

지난 2년간 이스탄불비엔날레는 전 세계 미술계의 유례 없는 큰 관심을 받았다. 제11회 이스탄불비엔날레를 기획하게 된 크로아티아 출신 기획자 단체 WHW(What, How & for Whom)때문이다. 1999년 네 명의 여성 기획자 이벳 출린(Ivet 첖urlin), 아나 드비치(Ana Devi첽), 나타샤 일리치(Natasa Ili첽), 사비나 사보로비치(Sabina Sabolovi첽)와 한 명의 디자이너이자 출판가인 데얀 크르쉬츠(Dejan Krsi첽)가 결성한 기획 단체 WHW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임을 자부한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들이 선택한 올해 비엔날레 전시 제목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What Keeps Mankind Alive?”이다. 이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에 엘리자베스 홉트만(Elizabeth Haupmann)과 쿠르트 바일(Kurt Weill)이 곡을 붙여 유명해진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제목으로서 19세기와 20세기 초 비판적인 서민들의 노래였다. WHW의 관심은 이처럼 사회적 정체성이나 경제적 불합리 구조 등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매우 집약적이고 제한적인 범주 안에서 참여 작가들을 선별했다. 
이번 이스탄불비엔날레에 집중된 관심과 기대는 두 가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우선 지난 10회 동안 바시프 코툰(Vasif Kortun), 르네 블록(Rene Blo ck), 찰스 에셔(Charles Eche), 로자 마르티네즈(Rosa Martinez), 댄 카메론(Dan Cameron), 후 한루(Hu Hanru)와 같은 수퍼스타급 기획자들이 거쳐 간 비엔날레 감독 자리에 유럽의 소국 크로아티아 출신 WHW를 획기적으로 영입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예술을 통하여 사회, 정치, 경제 문제를 논의하는, 어쩌면 매우 식상한 주제를 다룰 것이 뻔한 상황에서 WHW는 세계가 놀랄 만큼 멋들어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지난 해 11회 비엔날레 기획의도 발표 기자 회견장에서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기획자 네 명이 새빨간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 위에 서서 차례로 한 단어씩 전시 기획 의도를 외쳤다. 이들이 벌인 강렬한 퍼포먼스의 힘은 청중을 압도했고 진부한 전시 기획 의도는 눈부신 퍼포먼스 뒤로 가려져 버린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는 결코 브레히트의 부활을 알리거나 그를 새로운 고전적 영웅으로 추대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브레히트가 바라보았던 1920년대의 사회 풍경이 오늘날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측면에서 브레히트의 예술과 예술의 사회적 참여, 그리고 오늘날의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러한 시도가 결코 무의미하거나 식상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WHW의 언급에 따르자면 이번 비엔날레는 자본의 분배, 빈부 격차, 식량과 기아, 정치적 속임수, 성적 차별, 사회적 도덕적 이중 기준, 종교적 위선, 개인의 책임과 억압에 대한 순응 등 수없이 다양한 문제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전시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브레히트를 전방에 내세우며 이스탄불비엔날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행해지는 예술적 노력과 역할을 모색하고, 사회적 경제적 정의 실현의 가치와 방식들의 다양한 층위들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WHW가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배포하는 설문지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이 전시, 혹은 비엔날레라는 대규모 국제 행사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질문지 내용은 역시 브레히트의 작품 속 대목을 변형한 것들로써 “첫째, 이번 이스탄불비엔날레와 같은 이벤트가 관람객들에게 정치적으로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까? 둘째, 예술가들에게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셋째, 당신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시에 담긴 교훈들을 정치적으로 반대합니까? 마지막으로, 당신은 우리의 형식적 선택이 당신의 정치적인 목적에 부합하다고 생각합니까?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로 이루어져 있다.

레나 에펜디 <파이프드림 : 파이프라인을 따라 사는 삶의 연대기> 2002~2007

EU가입과 국제적 자본주의 도입의 음과 양

WHW 역시 이 같은 전시라는 형식이 사회적 정치적 경각심을 환기시킨다거나 실제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않는 듯하다. 중요한 점은 소규모의 국지적 전시보다 상업 자본이 유입되고 관광 수입에 대한 기대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대규모 비엔날레 같은 행사가 그들의 생각을 알리고, 더 많은 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데 분명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엔날레 전시가 열리는 주 전시장 안트레포(Antrepo)의 입구에 들어서면 터키 작가 후세인 알테킨(H웧eyin Bhari Alptekin)의 대형 네온사인 <불평하지 말라(Don't Complain)>가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 사망한 알테킨은 사회학, 철학, 미술을 전공한 예술가로서 서구의 주류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몇 안 되는 터키 작가이기도 하다. ‘불평하지 말라’라는 진술은 발화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문장으로 계층적 사회 구조 속에서 지배의 주체가 피지배 계층을 향한 명령어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의 발화로도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알테킨의 작품은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터키 사회가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유럽공동체(EU)와의 관계 문제를 상기시킨다. WHW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비엔날레의 많은 작품은 유럽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혹은 질문과 관련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들의 고국 크로아티아는 물론 터키 정부는 EU 국가로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오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인접 국가 슬로베니아가 EU에 가입하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부드럽게 잘 운영해 오고 있는 것과 달리 한때는 한 나라였던 크로아티아의 EU 가입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체코나 크로아티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터키마저도 EU 가입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인 양 추종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자본주의는 자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긍정적인 측면과 더불어 자본주의와 체제가 피해갈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소외를 양산하고 그것이 결국 해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인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유럽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연 EU 가입이 사회주의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치인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나아가 체제 붕괴 이전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가 등장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닐 것이다.
레나 에펜디(Rena Effendi)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 거주하는 젊은 여성작가이다. 그의 사진 연작 <파이프드림: 파이프라인을 따라 사는 삶의 연대기 (Pipedreams: A Chronicle of Lives Along the Pipeline)>는 1,700km에 달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원유 파이프라인을 따라 미국과 서구 유럽의 원유 사업이 이 지역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기록한 것이다. 파이프라인의 건설부터 완성까지 5년간 기록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라져 가는 러시아의 흔적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국제적 자본주의의 유입은 삶의 모습은 물론 질적인 변화까지 야기했지만,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동아시아 작가로 유일하게 참여한 조동환 & 조해준의 <다큐멘터리 드로잉> 연작 2000~2009

주변부의 부활, 새로운 세계 중심의 설계

그렇다면 서구 유럽공동체와 그들 식의 상업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 질서, 혹은 대안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새로운 세계 중심의 설계일 것이다. 비록 현대미술이라는 제한된 장에 국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WHW가 기획한 이번 비엔날레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유럽 국가들을, 서쪽으로는 중동 국가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한데 모은 주변부(peripheries)들의 페스티벌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서유럽 출신 예술가들이 주목 받는 기존의 국제 비엔날레식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WHW가 직접 기획한 전시 도록에 실린 11회 이스탄불 비엔날레의 여러 가지 통계 자료들에서 WHW가 의도적으로 서구 중심 헤게모니를 부정하고자 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거꾸로 그려진 세계 지도 위에 참여 작가들의 출신 국가들이 붉게 표시되어 있다. 통계상 중동 지역과 동유럽 지역의 작가들이 총 참여 작가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서구(West)와 나머지(Rest)의 비율이 28% 대 72%이고, 동아시아 출신의 참여 작가로는 한국 작가 조동환 & 조해준이 유일하다. 한편, 참여 작가 가운데 상당수가 고향을 떠나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작업하고 있음은 재미난 사실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은 대략 50 대 50이고, 연령 구성을 보면 27세에서 76세에 이르는 다양한 세대의 작가가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통계 자료의 중요성은 바로 중심의 이탈, 다양성의 촉진, 나아가 WHW라는 기획 단체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들이다. 어떤 지형도를 만들고 각 부분을 균등하게 분할하고 배치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잔재로도 보일 수 있다. 중심의 부정과 주변부의 부활.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수평적 관계의 구성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중심을 창조하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도 다라크베리즈 <이상적인 미디어> 2008~2009

형식을 압도하는 정치적 메시지들

총 세 곳의 전시장(안트레포, 담배 창고, 그리스인 학교)에서 열린 11회 이스탄불비엔날레에는 40개국에서 초대 받은 70여명의 작가들의 작품 141점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길 만큼 시각적인 힘이 있는 작품은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각 작품에 담긴 기나긴 내러티브들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형식을 압도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안트레포에 전시된 예루살렘 출신 유마나 에밀 아부드(Jumana Emil Abboud)의 작품 <석류(Pomegranate)>는 아주 간략하고 짧은 비디오 작품으로 빠져 나와 있는 석류알을 제자리에 꽂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의미 없는 행위의 반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국가를 세우고, 본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행하는 여러 모순적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안트레포에서는 유일하게 조동환 & 조해준의 작품 <다큐멘터리 드로잉 연작>이 소개되었다. 국내에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은 실제 부자지간인 두 작가의 공동 작업으로서 아버지가 직접 경험하고, 아들은 그를 통해 간접 경험한 한국의 근현대사가 냉정하게 서술된다. 또한 소소한 일화들을 통해 식민지 독립과 한국전쟁, 미국이 주도한 자본주의의 도입 과정 등이 개인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번 전시에서 여성 인권에 관한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특히 터키와 중동 지역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여성에 대한 인권 유린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차난 쉐놀(Canan )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한편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에는 젖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여인의 젖가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분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뒤샹의 변기(Fountain)을 패러디하는 작품으로서 서구의 남성중심 미술사를 뒤집는 제스처이다. 한편 그의 애니메이션 <모범(Exemplary)>은 이슬람 전통 세밀화와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서사 구조를 빌어 어느 아름다운 여성의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은 변하지만 여성의 운명은 변화하지 않는 가치관의 괴리는 터키만의 이야기가 아님이 확실하다.
아마도 이번 비엔날레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전시장은 그리스인 학교일 것이다. 다른 두 전시장이 백색 벽으로 구획된 전형적인 전시장의 형태였다면 처음으로 전시장으로 사용된 그리스 학교는 지난 100년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래된 사원과 같다. 2003년 폐교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학생들의 흔적, 교재, 교구들과 한데 어우러진 현장 설치 작업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루지야 출신의 작가인 라도 다라크베리즈(Lado Darakhvelidze)의 설치 작품 <이상적인 미디어(Ideal Media)>은 칠판에 그린 그림과 책걸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 열강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지워지고 새로이 쓰여지는 역사를 지적하고자 그는 칠판을 이용한다. 새로운 가치가 유입될 때마다 쉽게 지우고 쓸 수 있는 편리성은 학교, 기관,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권력의 특성을 상징한다. 함께 소개되는 비디오 작품 역시 드러나는 현실과 지워지는 현실에 관한 것으로서, 작가는 2008년 8월 한 달간 두 개의 TV 채널을 녹화했다. 하나는 베이징올림픽 중계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발발한 러시아와 그루지아의 전쟁에 관한 뉴스이다. 미디어에 의한 현실의 조작과 오도는 흔한 일이지만 미디어는 세상을 나누고, 실제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도 부리곤 한다.

현실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호소력

140여 점에 이르는 전시 작품들을 살펴본 후 이번 비엔날레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올해의 이스탄불비엔날레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미학적으로도 매우 잘 정리된 근현대 역사 도서관인 것이다. 오프닝에서 만난 혹자는 ‘볼 것은 없고 온통 읽을 것뿐이다. 차라리 책을 읽지 전시를 왜 보아야 하는가?’라며 이번 전시의 지나치게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전시 방식을 비판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끝자락에 살면서 가까운 우리 이웃도 돌보지 못하는 내가 그 머나먼 이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동조하고, 슬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매일 아침 조간신문도 읽을 시간이 없는 내가 그들의 삶과 현실을 알면 얼마나 알 수 있을 것이며, 미술이라는 형식이 그러한 정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대로 미술이 아니라면 어느 매체가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다른 매체들도 나름의 역할이 있겠지만 시각 예술이야말로 이미지로 전달하는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 글로도 얻을 수 없는 강한 전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번 비엔날레는 그러한 시각적인 흡입력이 다소 미미했기 때문에 전시를 본 후에도 강한 시각적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소수 중의 소수, 크로아티아의 여성 기획자들이 변화시키고자하는 현실의 모습은 여느 남성 기획자들도 도전해 보지 못한 강한 호소력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강력히 응원하고 싶다. 올해의 이스탄불비엔날레는 남성적, 공격적 야망의 투영도, 원대한 이론적 성취도 아닌, 가려지고 잊혀진 작은 것들을 조용히 일깨우는 여성 기획자들의 섬세함이 빛을 발한 전시였다.

각도인서展, 조각가 김종영의 서예 정신

<불각재> 한지에 먹 33×115cm 1980년경

조각가 김종영의 서예 정신

글|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자아탐구의 길

조각가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선생이 평생 그린 많은 소묘 작업 가운데 80점에 가까운 자화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고호도 광적인 자화상을 남겼고, 렘브란트도 원숙한 자화상을 남겼지만, 김종영만큼 자화상에 지극한 관심을 보여준 것 같지는 않다. 김종영은 조각가답게 나무로도 자신의 얼굴을 남겼다. 자화상이 아닌 자각상인 셈이다. 최종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연필, 먹그림 등 김종영 특유의 유창한 필법으로 젊었을 적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놀라운 인생의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김종영 선생이 왜 그토록 끊임없이 자기 얼굴을 그렸을까 하는 것은 소묘의 예술성과 더불어 많은 이들의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1

아무리 일본의 도쿄미술학교에서 졸업을 위해 자화상을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회적인 것일 뿐 결코 김종영처럼 평생을 두고 많은 자화상을 남길 까닭은 없다. 초창기 자화상 몇 점은 일본 유학시절(1936~1941)과 맞아떨어지지만, 이후 그가 자화상을 반드시 그려야 할 의무는 없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바로 조각도 아닌, 소묘도 아닌, 붓글씨로서의 자화상이다. 일찍이 최태만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종영의 후기 자화상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체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 결과임을 보여준다. 생전에 그는 추사체를 즐겨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말년에 그린 자화상은 고졸하면서 담백하고, 꾸미지 않으면서도 멋과 여유를 지녀 자유로운 서체를 연상시킨다. 어떻게 보면 선화(禪畵)의 기품을 방불케 하면서도 김정희가 말년에 현판에 썼던 글씨의 기운(氣韻)을 느끼게 만든다. 2
김종영의 작품에서 서화로서의 자화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색연필로 자유분방한 필체로 그린 자화상이나 연필로 그린 자화상 이외에도, 종이에 먹으로 그린 자화상이 3 점이나 존재한다. 세 점 모두 붓의 특징을 잘 살려 매우 빠른 필치로 자신의 인상을 그려내고 있다. 비슷한 시점이지만 종이에 먹과 수채로 그린 작품으로부터 점차 더욱 단순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장 간략한 자화상은 6획만으로 자신의 얼굴의 인상을 뽑아내고 있다. 이것은 난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난을 치는 것에는 이념형의 비구상이, 자화상을 그리는 것에는 현실태의 구상이 들어간다는 것 외에는 차별이 없다. 이렇듯 김종영은 얼굴을 그리지 않고 전통적 서예의 방식처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 탐구가 곧 예술이었으며, 예술은 곧 나를 그려내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런 사고는 김종영에게 전통적인 문인화가로서의 자세를 지니게 한다.

왼쪽·<자화상> 종이에 먹 24.5×35cm 1974|가운데·<자화상> 종이에 먹 24×34.5cm 1974|오른쪽·<자화상> 종이에 먹 23×35cm 1975 후반

서예와의 만남

김종영이 서예와 관련을 맺은 것은 실로 오래다. 아버지의 호인 성재(誠齋)를 또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우성(又誠)’으로 지은 것부터 그러하지만, 가학의 전승을 통해 그는 시서화를 어릴 때부터 익혔다. 1932년 18세의 나이로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에서 안진경(顔眞卿) 체로 일등을 수상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는 당시에 벌써 휘문고보의 미술교사였던 장발(張勃)에게 미술 수업을 듣고 있었다. (1948년 장발이 서울대 미술대학장 시절 김종영을 교수로 부른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예술에 입문하면서조차 서예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그것은 평생의 지표가 된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세잔느를 위대한 예술가로서 존경했다.

완당(阮堂)과 세잔은 한국과 프랑스의 근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위대한 예술가이다. 약 오십 년의 연령 차이는 있으나 … 나는 이 두 사람의 예술에 대해서 비록 동서는 다를지언정 이상하게도 많은 공통성을 발견한다. … 완당의 글씨의 예술성은 리듬의 미보다도 구조의 미에 있다. 그들의 예술은 그 당시로는 단연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보겠는데, 이것은 타협이 없는 그들의 초탈한 성격에 연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완당의 글씨는 투철한 조형성과 아울러 입체적 구조력을 갖고 있고 동양 사람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적극성을 띠고 있다. 상식적인 일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작자(作字)와 획(劃)을 해체하여 극히 높은 경지에서 재구성하는 태도며 공간을 처리하는 예술적 구성이며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지성을 말해 주는 것이려니와, 고전을 결코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종횡무진으로 풍부한 변화를 갖는 예술적 창의력과 넓은 견식은 족히 세잔에 비교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보겠다. 3

왼쪽·종이에 먹 37.5×52cm 1973|오른쪽·종이에 펜

김종영이 보는 김정희는 일반적인 서예에서 중요시하는 선의 리듬이 아니라 구조의 미에 탁월한 작가였다. 세잔느도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축조했다고 여기는데, 완당이 바로 이러한 큐비즘적인 공간 구성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입체파적인 해체를 통해 완당은 예술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특히 예서에서 완당의 예술은 가장 ‘면목이 약동’한다.
완당에 대한 김종영의 평가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안 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완당은 대세가 아니었다. 서예의 대가들도 완당의 필체는 보편성이 결여된 기이한 서법으로 배울 수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영은 완당이야말로 ‘진실한 노력과 순수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예술’이며 그것은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큐비즘은 세잔 이후 입체파에 의해 더욱 많은 성과를 냈지만, 완당은 그 자체로 완성이었다. 이를테면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조차 완당의 제자로서 스승을 추종했을 뿐으로 아류에 불과하다는 것이 김종영의 평가였다.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관을 완당의 혜안으로부터 세웠다.
사실 완당은 매우 전통적인 인물이다. 완당이라 자호한 것은 그가 청나라의 완원(阮元)을 존경했기 때문이며, 그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갔던 24세 때 실제로 완원을 만나고 그 후로도 계속 교류를 가졌다. 김정희는 당시 완원과 옹방강(翁方剛)을 만나 큰 문화적 영향을 받는다. 당시 중국에서는 흐르던 물줄기를 거스르는 서예 운동이 있었다. 그것은 ‘종이에 쓰인 글씨보다는 돌에 새긴 글씨가 더 낫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종이나 비단의 글씨는 오랫동안 보관될 수도 없고 많이 옮겨진 것이지만, 돌의 글씨는 원작에서 한 번밖에는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의 글씨는 여성적이지 않고 남성적이었다. 부드러운 왕희지의 글씨보다는 박력 있는 북위비(北魏碑)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완원의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 4이다. 여기에서부터 금석학(金石學)이 탄생한다. 완당이 북한산 순수비를 찾아내고 그것을 중국에 탁복하여 보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김종영은 일찍이 완당으로부터 이러한 정신을 발견했다. 전통적이지 않은듯하지만 더욱 전통적인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김종영이 조각을 넘어 서예에서 예술의 가치를 보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한 예술이란, 완당이 보여준 것과 같은 본래적인 맛, 순박한 맛, 단순한 기교, 넘쳐흐르는 힘, 고졸(古拙)함, 천진함, 유치함 속에서 찾아낸 피난처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無)의 가치에 대한 깊은 이해였다. 그의 말로는 조각가이면서도 조각하기를 거부한 ‘불각(不刻)의 미’ 5였다. 그는 일찍부터 무를 발견했다.

동양에서의 무는 무가 아니라 절대 능력자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본 데 반해, 서양에서는 무는 어디까지나 무 자체이지 유의 근원으로서는 생각지 않았다. 6

서예는 글씨이지만 그것이 예술이 되고자 발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자연적인 예술이다. 조각하지 않아야 가장 좋은 조각임을 깨닫고 있는 조각가는 이런 점에서 글씨에 깊이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예는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줄이는 것이며, 꾸미는 것이 아니고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헨리 무어처럼 작품이 조각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천연스럽게 존재하기를 바랬다. 서예와 그들은 고졸함에서 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태만은 김종영을 ‘절제된 순수미’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그가 그린 산(山)은 선(線)일 뿐이었다. 7

정신은 기술에 앞선다.
노자는 말한다.

有生於無
유는 무에서 나온다. 8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는 이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이상학이다. 있음은 있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서구의 형이상학이라면, 있음은 없음에서도 나온다는 것이 바로 동양의, 그것도 도가의, 더 상세하게는 노자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大音希聲 大象無形
큰 가락은 소리가 드물고, 큰 꼴은 몸이 없다. 9

無形者 形之大宗 無聲者 音之大宗
꼴이 없는 것이 꼴 가운데 으뜸이며, 소리가 없는 것이 소리 가운데 으뜸이다. 10

김종영은 이처럼 도가의 예술철학에 자신을 맡겼다. 그가 서양화의 교육 체계 속에서도 동양적 자기 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러한 정신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한다. 1915년 경남 창원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김종영의 작가 정신은 이런 점에서 동서의 만남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근대적 교육체계 속에서 미술과 조각을 전공했지만 그의 의식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동양적 예술 정신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꾸밈을 최소화함으로서 오히려 고상한 정신의 수준을 드러내는 데 전심했다.
한국미학자 고유섭이 내세우는 미적 표준, ‘무기교의 기교’는 김종영에게 적실했다. 서양 사조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서예가들도 추사의 글씨를 제멋대로라고 보던 시절에, 그는 미니멀리즘을 한국적 세계 속에 접목시키고 있었다. 김종영이 김정희처럼 <세한도>를 그리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1
김종영은 문인화가였다. 정확히는 문인조각가였다. 그의 드로잉이나 데생은 서예의 한 획 한 획과 같았다. 그의 몸은 현대에, 그의 마음은 전통에 있었다. 그가 각백(刻伯)이라는 마스터의 칭호조차 불각(不刻)으로 무화(無化)시키는 것은 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정신의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의 당호를 ‘불각재’(不刻齋)로 짓기도 했다. 정신적 내용보다 기술의 세련에 열중하고, 세련된 기술 자체를 예술로 착각하는 시대를 김종영은 비난했다.

기술은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고 내용과 정신은 풍부할수록 좋은 것이다. 12

김종영의 수묵화도 이와 같은 정신에 발로한다. 아니, 그의 창작 모두가 이와 같은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1 최종태 <조각가 김종영·그의 소묘 자화상>《김종영의 김종영》 3쪽 김종영미술관 2003
2 최태만 <가난한 시대의 예술가의 자화상> 앞의 책 9쪽
3 김종영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130~134쪽 열화당 2005
4 阮元 《南北書派論》《北碑南帖論》, 中田勇次郞 편 《中國書論大系》 도쿄 二玄社 제15권 청5 1983, 김정희와 관련해서는 日原利國 역 《南北書派論》 34쪽
5 김종영, 앞의 책 144쪽
6 김종영, 앞의 책 78쪽
7 171쪽 위의 드로잉
8 《老子》 제40장
9 《老子》 제41장
10 김종영, 앞의 책 78쪽
11 김종영, 앞의 책 131쪽
12 김종영 《김종영 인생, 예술, 사랑》 90쪽 김종영미술관 2002

<두보(杜甫) 단청인증조장군패(丹靑引贈曹將軍覇)> 한지에 먹 125×33cm 1949
<제목 미상> 한지에 먹 124×32cm 연대 미상
<한산도(寒山道)> 한지에 먹 64×127cm 1977년
<장자(莊子) 천도(天道)> 한지에 먹 124×32cm 연대미상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 한지에 먹 123×32cm 연대 미상

올라퍼 엘리아슨, 저 신비한 자연을 ‘본다’는 것

<모든 색깔의 360°방> 형광등, 스테인레스 스틸 2002

Olafur Eliasson
저 신비한 자연을 ‘본다’는 것

글|art in culture 편집부

전시를 보러온 관객을 유사(類似) 자연 현상의 체험이라는 독특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은 관객과 소통하는 사회적 미술이라는 다소 진부해진 주제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유효화시키는 ‘스타 작가’이다. 북유럽의 신비한 자연 현상을 모티프로 하여 만들어 내는 스펙터클한 공간은 자연이라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과 평행을 이루며 예술작품의 지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기존의 관객과 작품, 공간 사이의 정적인 관계를 뒤흔드는 그의 작품은 매우 대중적으로, 또 누구에게나 감각적인 인상을 남기며 다가온다.
1967년 코펜하겐에서 아이슬란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올라퍼 엘리아슨은 덴마크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95년 베를린에 그의 이름을 딴 대규모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건축가, 과학자, 테크니션들과의 다양한 협업으로 건축과 기하학, 과학적 원리를 응용한 규모 있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덴마크관 작가로 선정되었고, 같은 해 런던 테이트모던에 거대한 인공 태양을 설치한 <날씨 프로젝트>가 200만명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이후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P.S.1 현대미술센터, 달라스미술관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순회전을 열었다.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작가로서 루이비통(2006)과 벤츠(2007) 매장을 위한  아트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공공미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뉴욕의 맨해튼 다리를 배경으로 초대형 인공폭포를 설치한 <뉴욕시 폭포 프로젝트>(2008) 등 대규모 공공미술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Frost activity> 알루미늄, 현무암, 유문암 2004(Photo by Ari Magg)

전시장에서 체험하는 자연 현상

엘리아슨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은 물 빛 기온 기압과 같은 자연 현상의 요소들을 작업의 재료로 삼아 감각적인 체험의 공간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전시장 안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광을 보여주거나 날씨를 재현하고, 안개나 석양까지 인공으로 만들어낸다. 또한 단순한 기술적 장치들로 복잡한 시각적 현상들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단색 전구들로 방 전체를 노란색 빛으로 물들여 내부의 모든 것들을 한 가지 색으로 바꾸거나, 스피드 플래시가 떨어지는 물의 얇은 막을 비춤으로써 공중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관객을 섬뜩하게 만들기도 한다. 만화경을 통해 무지개를 만들거나 스포트라이트 빛줄기를 거울에 반사시켜 환영의 공간을 형성해 내기도 한다. 또한 자연 현상의 조작을 공공장소에까지 확장시켜 강에 녹색안료를 풀어놓아 강물의 색을 바꾸는 프로젝트를 펼치기도 했다.

지각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맥락

그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런던 테이트모던 터빈홀의 넓은 공간에 태양과 하늘을 재현해낸 설치작업 <날씨 프로젝트>이다. 공간의 맨 끝에 수백 개의 노란빛 전구들로 이루어진 인공태양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가습 장치들은 물과 설탕을 혼합시켜 마치 밖에서 들어온 것 같은 미세한 안개가 공간에 스며들도록 했다. 관객들은 안개가 나오는 기계뿐만 아니라 태양 뒤쪽으로 걸어가서 전구들이 매달려 있는 구조와 전기줄을 확인할 수 있다. 위를 보면, 터빈홀의 천장은 모두 반사판으로 덮여 있어서 관객들은 인공태양의 거대한 오렌지 빛 속에서 작은 검은 그림자로 보이는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관객들이 바닥에 누워 손발을 흔드는 것으로 이 작업에 대한 반응을 보냈으며, 전시를 관람한 관객 중에는 다시 방문하여 이곳에서 일광욕을 하듯 시간을 보낸 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전시장에서의 체험은 일차적으로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정신적 감성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엘리아슨은 완벽한 환영을 만들어 냄으로써 초자연적인 경험에 목표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작업이 설치된 구조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그 환영이 만들어진 매커니즘을 보여주고 실재와 재현, 지각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는 우리가 날씨와 같은 자연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데에 여러 사회 문화적 효과들이 개입한다는 것을 작업의 전제로 삼고 있다. 또한 어디에나 존재하는 가장 일상적인 지각 행위를 전시장 안에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세계를 지각하는 행위 자체와 그것이 이루어지는 맥락들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자연적 현상을 재맥락화하는 작업들은 그의 출신지인 스칸디나비아의 기후와 지리에 영감을 받은 것들로 MoMA에 설치된 순록 이끼로 된 벽과 P.S.1 전시에서 보여준 실내 무지개, 거꾸로 흐르는 폭포 등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장면들 역시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위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문화적 기관들이 우리의 지각을 매개하는 방법을 강조하기도 한다.

왼쪽·<다성음악의 집> 나무, 철, 아크릴글라스, 유리렌즈 2007(Photo by Jens Ziehe)|오른쪽·<모델 룸> 혼합재료 2003(Photo by Terje Ostling)

움직이면서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

엘리아슨의 작품은 우리의 지각이 날씨와 같이 연속적으로 흐르고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가 제시하는 지각에 대한 개념은 작가 자신이 90년대 초 아이슬란드에서 하이킹을 하며 시작한 사진 시리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걷고, 배를 타고, 날아가는 동안에 찍은 그의 풍경 사진 연작들은 ‘본다’는 행위에서 시간과 움직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림을 볼 때처럼 그의 작업 앞에 서 있지 않고 그 안에 걸어 들어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박제된 수동적 지각이 아닌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적이고 사회적인 지각을 체험하게 한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보는 행위’를 ‘사회적 경험’으로 가정한다. MoMA 전시 때 천장에서 머리높이로 매달려 예측할 수 없는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이도록 설치된 전자 선풍기는 움직임 속의 지각에 대한 은유를 결정적으로 던져준다. 엘리아슨은 그의 작품을 통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지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작업 노트에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사용자에 의해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공간의 일시성이 설치 작업의 근간이 되는 개념이라 밝히고 있다. 정적인 대상이나 사물화된 공간이 상업적으로 더 유효하다는 논리가 주체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재창조되는 공간의 가능성을 억압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사물들은 물론 예술작품 역시 정적인 것이 아니며 작품이 보여지는 맥락과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에 의존하는 불안정함과 다양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설치 작업이 제공하는 감각적 경험들이 “작업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관객에 의해 활성화되는 선택지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핵심을 가진 완결체가 아니라 상호작용을 위해 마련된 실험적인 구조물일 뿐이며 관객은 철저히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Notion Motion> HMI 램프, 삼각대, 물, 포일, 나무, 스폰지 2005 (Photo by Jens Ziehe)

사회적 공간에서 능동적으로 '보다'

예술의 사회적 맥락과 참여를 강조하는 많은 작품들 속에서 엘리아슨의 작업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진보적인 철학을 언어적인 매개가 아닌 감각적인 지각을 통해 구현하기 때문이다. 관객의 감각적 지각에 작용하는 그의 작업은 주체의 정신물리학적 경험을 일으키며 시각적 언어적 인지를 넘어선 확장된 미학적 효과를 담보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환경과 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의되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 내며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결국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그는 관객을 공간 속에서 움직이도록 이끌고 감각과 체험의 공간으로 안내하며 작품을 능동적으로 보게 만든다. 작품 속의 신비한 시각적 현상들에 이끌려 모든 감각을 동원해 보는 행위에 빠져드는 사이 작품과 소통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정도련 뉴욕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를 만나다

황용핑 <박쥐 프로젝트 IV> 2004~2005, <세 날개> 2003
(Photo by Gene Pittman, Courtesy Walker Art Center)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것처럼…”
정도련 뉴욕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를 만나다

글|호경윤 수석기자

9월 9일, 아트선재센터에서 ‘뉴욕현대미술관(MoMA) 최초의 한인 큐레이터’ 정도련이 강연을 열렸다. 이날 강연은 250석의 주어진 좌석을 훨씬 넘는 380여명의 신청자가 몰릴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객석을 꽉 채운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대부분은 큐레이터를 꿈꾸는 학생이거나 국제 미술계의 흐름을 보다 생생하게 듣고 싶은 미술가들일 것이다. 무엇보다 MoMA 큐레이터의 위상에 기대감이 컸으리라.
‘모마이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MoMA는 단지 뉴욕의 대규모 미술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1929년 개관한 MoMA는 세계대전 이후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의 국제적인 위세와 더불어 미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은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있다. MoMA는 서구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당이자 미국미술의 얼굴이다. 바로 이 MoMA에 한국 출신의 큐레이터가 최초로 ‘입성’한 것이다. 지난 4월, 정도련이 MoMA의 부(副) 큐레이터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뉴욕에서 처음 들려왔을 때, 한국 미술계는 기쁨과 부러움으로 술렁였다. 백남준이나 이우환 같은 ‘세계적 작가’는 있었지만, 세계 주류 무대를 발판 삼아 활동하는 큐레이터의 탄생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강연에 참석한 관객들은 ‘어떻게 하면 글로벌 큐레이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얻으려는 듯, 정도련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정도련은 오랜 해외 생활로 퇴화된 자신의 한국어 실력에 양해를 부탁하며 발표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것처럼: 큐레이팅과 미술기관>이라는 주제로 미리 정리해 온 발제문을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김홍석 <The Boat> 2007
(Photo by Gene Pittman, Courtesy Walker Art Center)

비서구 미술에서 글로벌 비전을 찾다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정도련이 과거 근무했던 워커아트센터의 관장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라고 한다. 2005년 증축을 마친 미술관은 시각적으로는 훌륭한 건축물이었으나 실제로 그 공간을 전시장으로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스탭들의 불만에 관장은 “새 건물은 새 악기처럼 길들이고 소리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단순한 비유이지만 큐레이터로서 막 성숙기를 겪고 있던 그에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고 한다. 정도련은 워커아트센터와 MoMA를 악기로 보자면, 자유분방한 아코디언과 화려하고 다소 고압적이기까지 한 그랜드 피아노로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악기를 손에 넣었으니 제대로 배워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MoMA의 학예팀은 회화와 조각, 드로잉, 판화와 삽화, 사진, 건축과 디자인, 미디어와 퍼포먼스까지 총 7개의 부서로 나뉘어 있다. 정도련은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 조각 부서에 소속되어 있다. “사실 MoMA에 들어오기 전에는 회화 조각 부서에 경직된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막상 안에서 보니 그 구조가 매우 유연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MoMA 내부에서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일한 지 100일이 좀 지났는데요, 지금은 모든 일에 익숙해지는 단계인 것 같아요.”
그가 요즘 MoMA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비서구 국가의 전후 미술을 연구. 일본의 영화와 미술 분야를 시작으로 중요한 마니페스토(Manifesto)나 평론 문서들을 분석하여 연구 자료집을 출판해 내는 것이 1차 목표. 뿐만 아니라 MoMA의 글로벌 비전과 대안을 세우는 일도 그의 몫이다. MoMA의 수장고는 서구 모더니즘 미술품으로만 가득 차 있을 듯하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아시아, 동유럽, 남미 등 비서구의 미술에 대한 연구와 수집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고 한다. MoMA는 다른 지역에 분점을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컨텐츠 교류를 통해 ‘내적인 글로벌화’라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MoMA가 정도련을 영입한 이유도 아마 미술관이 지향하는 이런 특성 때문일 것이다.
“MoMA에서 아시아 미술의 스페셜리스트로서 저를 영입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현대미술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과 능력을 키우지 않고 오로지 아시아 미술에만 집중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정도련은 이미 워커아트센터에서 한국 중국 일본 출신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기획한 바 있다. 가장 최근 전시부터 언급하자면, 워커아트센터에서 마지막으로 기획한 전시 <양혜규: 온전한 내부자>이다. 그래서 이번 서울 강연을 마치자마자 그는 뉴욕이 아닌 미네아폴리스로 날아가야 했다. 또한 지난 해 열렸던 <쿠도 테츠미 회고전: 메타모르포시스의 정원>은 1935년에 태어나 1999년에 사망한 일본 작가의 첫 미국 개인전이었다. 한편 2005년에 기획했던 <황용핑 회고전: 신탁의 방>은 미국, 캐나다 등지를 순회하고 2008년 올림픽에 맞춰 베이징에서 다시 열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양혜규, 쿠도 테츠미, 황용핑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으로 이주해 ‘고향’과 서구를 잇는 예술적 접점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정도련은 큐레이팅을 통해 이 작가들의 존재 방식과 태도를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다.
MoMA에서 아시아 미술을 만나길…
강연을 마친 뒤 정도련에게 소감을 물었다. “막상 강연을 하고 보니까, 사람들이 MoMA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중압감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도련에게는 한국 관객이 지워줬던 부담감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서구 중심으로 서술된 ‘MoMA의 미술사’에, 이제부터 아시아 미술을 덧붙여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도련에게는 비슷한 일을 하면서 서로 힘을 주고 함께 꿈을 키워가는 친구들이 있다. 뉴욕 뉴뮤지엄의 주은지와 LA 레드캣의 클라라킴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이들과는 대학, 대학원 시절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고, 첫 전시를 함께 기획하기도 했다. 이제는 각자 다른 성격의 기관에서 경력을 쌓으며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이 소중한 친구들과 동시대 미술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전시로 발전시켜 실체화시킬 수도 있는 지금의 상황이 참으로 감동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편 정도련은 1년에 한두 번 한국을 방문해 작가들을 만나곤 하는데, 매번 그 짧은 만남이 너무 아쉽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면 ‘조우’를 넘어서 ‘기회’로 발전되곤 한다. 내년 LA레드캣에서 기획하는 <박찬경, 션 스나이더 2인전>이 좋은 예이다. 리서치를 기반으로 냉전을 주제로 작업해 온 두 작가를 처음 미국에 소개하는 전시다. “이런 주제의 전시를 해야겠으니, 당장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면 어떤 작가를 물어와야겠다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네트워크를 넓혀나가면서 관심 있는 작가들과 ‘일’로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쿠도 테츠미 <당신의 초상 1966년 5월> 1966
(Photo by Gene Pittman, Courtesy Walker Art Center)

2009 October Special - Self Interview 김복기

Self Interview
“잡지는 매달 새 상품이어야 한다”

글|김복기 본지 발행인

01 창간 10년을 맞은 소감은?
10주년이라고 해서 잡지가 특별히 달라질 게 없다. 지난 10년 동안 매달 잡지에 온 힘을 쏟은 것처럼 그렇게 또 새로운 한 달을 맞았을 뿐이다. ‘신생 잡지’라는 위태로운 딱지가 따라붙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art 어렵다더라’ ‘art 곧 망한다더라’ 는 뼈아픈 말을 들어야 했던 때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참 빨리 흐른다. 창간 초기에는  잡지의 나이가 성큼 성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다. 창간 10주년을 즈음해 지나 온 길을 돌아보니, 감사해야 할 일뿐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에 감사드린다. 그동안 잡지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모든 스탭, 필자, 광고주들께 감사드린다.

02  잡지 발행 ‘10년’은 미술사에 획을 긋는 일인데…
통권 120호를 쌓아올려 보니, 내 어깨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다. 겨우 이 정도 잡지를 만드느라 내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 부었나, 많은 사람들까지 고생시켰나 생각하니 참 허무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 미술 잡지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창간호=폐간호’의 슬픈 역사로 얼룩져 있다. 10년간 매달 한 번도 빠짐없이 잡지를 낸 건, 내가 조사한 바로는 art in culture를 포함해서 3개 매체뿐이다. 좋든 싫든 art가 한국미술의 구성 인자(因子)로 살아 숨쉬고 있다.

03  art in culture의 위상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평가는 본질적으로 독자들이 맡아야 할 몫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언론 매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영향력과 신뢰도를 꼽는데, 전문지의 경우 이런 잣대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1등이다, 2등이다 그런 상대적인 평가는 너무 진부하다. 그냥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해 주면 좋겠다. 독자들의 잡지 취향은 미술에 대한 취향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럼에도 미술인과 주변 독자들의 반응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종합해 볼 수는 있다. art in culture에 대한 현재의 평판은 대체로 이렇다. 첫째, 일부 구상작가들이나 지역 미술인들에게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잡지, 서구 추종 잡지,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한 잡지, 국적 불명의 잡지다. ‘고약한’ 잡지다. 둘째, 뭔가 새롭게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잡지, 젊은 잡지다. 재미랄까, 긴장이랄까 그런 구석이 있다. 아주 적극적이다. 공격적이다. 그렇지만 어딘가 한쪽으로 편중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잡지다. 좋게 말하면 자기 고집이 센 잡지고, 나쁘게 말하면 독자의 폭을 너무 좁게 잡는 잡지다. 셋째, 마니아 독자들의 반응이다. 여타의 잡지와 확실히 다르다. 페이지마다 알뜰한 정성이 깃들어 있다. 국제적으로 내놓아도 손색 없는 잡지다. 이런 과분한 평가를 해주는 사람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용기를 내서 극찬의 말을 더 옮기면, 귀골(貴骨)한 잡지다. 신령스런 영혼의 울림이 퍼지는 잡지다. 이렇게 말해 준 작가가 있다. 하하.

04  art in ASIA를 창간해 영문 잡지까지 발간하는데…
art in ASIA는 명실공히 글로벌 잡지다. 원래 계간으로 계획했다가 격월간으로 바꿨다. 오래 전부터 영어 잡지를 꿈꾸고 있었는데, 2007년의 창간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백이면 백사람 모두 잘한 일이라고 추켜세웠다. 급속한 정보화 세계화 추세, 국제 아트씬에서 아시아의 부상 등등의 변화 속에서 한국을 넘어 아시아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잡지 ‘원양(遠洋) 사업’을 펼치고 싶었다. 아시아 바람, 요컨대 ‘동풍(東風)’을 불러일으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옛 시대를 딛고 동세서점의 새 시대를 여는 데 잡지가 큰 활력소가 되길 바랬다. 현재 아시아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잡지는 뉴욕에서 발간되는 《ART Asia Pacific》이 선두주자다. 정작 아시아 지역에서는 글로벌 정론지가 없다. 그래서 art in ASIA의 가치가 크다. 그 미래 가치에 주목해 주면 좋겠다. 그러나 작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아시아 미술시장 열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져 광고가 많이 줄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통권 13호를 냈다. 아시아 주요 도시와 뉴욕 등지에서 art in ASIA를 손에 잡은 아트피플들은 “Beautiful~”을 연발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문화 외교에 다를 바 없다. 국가 경쟁력, 문화 브랜드 차원에서 art in ASIA를 지켜봐 줬으면 한다. 더 나은 잡지를 위해서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후원과 협력이 절실하다.

05  연초부터 창간 10주년 행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데…
NAVER의 ‘한국인 시리즈-미술가’ 편의 퍼블리싱이 창간 행사였고, 동방의 요괴들, Asian Editor’s Conference는 연례 행사다. 특히 동방의 요괴들은 거의 매달 크고 작은 행사를 펼친다. 12월에는 아시아 이머징 아티스트들의 전시가 계획되어 있다. 창간 기념행사를 염두에 뒀지만, 잡지 제작과 기존의 행사가 겹쳐 여력이 없었다. 연내로 미술인들을 초청해 소박한 파티라도 한 번 열었으면 좋겠는데….

06  다른 매체와 art가 다른 점이 있다면?
창간 때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미술로 세상을 바꾼다.’‘새 시대의 눈, 살아있는 미술저널’. ‘art는 다르다. 이제부터 art다.’ 이런 문구들이다. 미술잡지를 만들던 내가 새로운 잡지를 창간한다고 뛰쳐나왔을 때는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다. 막연히 40대에는 남의 머슴살이에서 벗어나 내 주관대로 잡지를 만들어 보자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게 실현되었는데, 막상 창간 작업에 들어가니 새 잡지를 만드는 합당한 논리를 갖춰야 했다. 요컨대 잡지의 정체성, 잡지 이념이 필요했다. 따지고 보면, 훨씬 더 나은 잡지, 정말 제대로 된 잡지, 뭐 이런 소박한 각오로 잡지를 창간했지만, 대내외적으로 가시적인 선언이 필요했다. 논리를 가다듬다보니 새로운 잡지는 분명히 달라야 했다. 똑같은 걸 만드려고 잡지를 창간한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잡지 후발주자로 우리의 잡지 이념은 어쩌면 뻔한 것이었다. 차별화, 새로움의 전략이다. 창간 초기에는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우릴 정신적 육체적으로 옥죄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창간 때 내세웠던 잡지 이념이 ‘젊음’과 ‘동시대성’이었다. 우리는 ‘젊음’이란 생물학적인 의미가 결코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자연스럽게 젊은 작가 쪽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또한 국제화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나라 밖의 ‘동시대성’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이제 10년이 지나고 보니, 오늘날의 미술(계)은 우리가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고 국제화되었다. 우리는 확실히 시대의 코드, 시대의 트렌드를 앞서 읽어냈다고 자부한다.

07  잡지 경영이 흑자인가 적자인가?
안타깝게도 적자다. 창간 때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성취하는, 말하자면 ‘좋은 잡지’이면서도 ‘잘 팔리는 잡지’를 만들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그러나 잡지 경영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게 얼마나 어렵다는 건 미술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왜냐하면 내로라하는 한국 굴지의 갤러리스트들도 잡지 발행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않은가. 2007년, 2008년에 일단 재무제표의 수치상으로 흑자를 냈다. 역사상 유례 없는 미술시장의 호황으로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밀린 부채(원고료까지)를 부분적으로 갚아 나가고, art in ASIA에 투자하느라 여전히 어렵다.

08  적자인데 잡지가 계속 나오는  비결은?
이 지구상에서 광고나 판매 자체로 손익을 맞추는 미술 잡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글로벌 잡지 몇몇 정도일 것이다. 대부분의 잡지는 ‘명분’이고, 잡지와 연계된 다른 부대 사업으로 ‘실리’를 챙긴다. 우리 회사도 출판 디자인 사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경기도도자기엑스포, 마르크 샤갈, 렘브란트, 조르주 루오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의 도록과 아트 상품 사업을 펼쳐 잡지의 적자를 보전해 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채 몇 년도 버티지 못하고 잡지가 폐간됐을 것이다. 그런 부대 사업을 펼쳐도 여전히 경영이 어렵다. 그럼 어쩌겠는가. 잡지가 좋아서 시작한 발행인이 사재를 털어서 메우는 수밖에 없다. 근데, 그 사재라는 게… 월급쟁이 출신이 수억 원 투자하게 되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개인의 삶의 존립이 휘청거린다. 몇 년전부터 잡지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 행사 때는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기도 하고, 메세나 지원을 받기도 한다. 인쇄 협찬, 종이 지원을 받기도 한다.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잡지 경영의 경우, 조금 모자라는 수준이 딱 좋다고 생각한다. 지식 사업, 문화 사업은 물질적으로 조금 빈곤해야 영혼이 맑아지는 게 아닌가 싶다. 아~ 너무 낭만적인 생각인가? 

09  개인 수입은 얼마쯤인가?
창간 초기에는 연봉 1800만원을 받았다. 몇 년 뒤에 2400만원으로 올랐는데, 그 당시 나는 대학 입시생 아들을 두고 있었다. 어떻게 생활했는지 기억도 없다. 현재 연봉이 3300만원 정도다. 내가 신문사에서 간부로 지낼 때 받았던 연봉에 비해 액면가로만 40% 정도 깎였다. 연봉만으로 보면 나는 수십년 이전으로 되돌아 가서 살고 있다.

10  (주)에이엠아트는 자본주가 누구인가?
창간 때 주주 중에 도중하차한 한 사람을 빼면 실제로 그대로다. 신문사에서 퇴직한 선후배들이 직장 생활해서 받은 퇴직금으로 회사를 만들었다. 순수 민간 잡지다. 참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러니 자본과 관련해서 지난 10년 동안 art를 둘러싼 루머들이 심심찮게 이어졌다. 루머는 시간이 경과해 ‘자기 증명’의 힘을 잃게 되면, 한낱 ‘썩소’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내처 앞을 향해 달리는 우리에게 루머는 정신적 결속을 흔들고 조직의 발목을 붙잡는 독버섯 같은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에 더욱 그랬다. 돈 줄이 과연 누구냐는 게 루머의 초점이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 J다. 아니다. 재일 한국인 미술컬렉터 H다. 뭐 이런 따위의 여러 루머가 돌았다. 우리 주주들은 속으로 웃었다.

11  한 때 A갤러리와 art가 한몸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아주 근거 있는 정보로 미술계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 H신문의 미술담당 기자가 정식으로 내게 물었다. “김선배! 사실입니까? 뭐, 못 밝힐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는 내가 즉답을 내놨다. “기분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는…” “예?!” 아리송한 내 답변에 기자가 애가 타는 모양이다. “난 천안 A갤러리 K회장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요.” 사실이었다. 나는 2년 전에 처음으로 K회장을 만났다. 선동적인 거짓 선전, 이른바 데마고기(demagogy)가 사회 변동기나 정치적 혼란기에 번성하듯이 루머도 우리의 힘이 약할 때, 내적 결속의 기반이 허술할 때 생겨나는 게 아닌가 싶다. 아주 최근까지도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내 귓전을 조용히 울린다. “이 어려운 시기에 art가 버티는 걸 보면, 뒤를 봐주는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야. 뉴욕의 한인 갤러리와 결탁돼 있다는데…” 루머는 art를 향한 관심, 사사로운 정의 표지(標識)로 받아들이려 한다. 이것이 루머에 맞서는 즐거운 대응 전략이 아닐까?  

12  발행인이자 편집인(장)을 맡고 있다. 이 시스템의 장단점은?
잡지 창간 때나 지금이나 기자 출신이 발행인을 맡고 있다는 것이 우리 잡지의 특성이다. 다만, 창간 때의 인적 구성은 거의 신문사가 발행하는 출판 매체 수준이었다. 옥상옥의 구조, 인력 거품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고 난 뒤, 지금은 조직 구조가 슬림화되었다. 주식회사의 대표이사, 잡지 발행인 겸 편집인이 나의 법적 직함이다. 아직까지 주간(主幹) 혹은 편집장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사장이라는 직함이 제일 어색하다. 원로들 중에는 아직도 기자라 불러주는데, 사실 나는 그 말이 가장 듣기 좋다. 아무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뒤 조직의 규모나 전문지의 특성 때문에 내가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외국 미술잡지라면 프랑스 《아르 프레스》의 카트린 미에가 발행인이자 편집장을 맡고 있다. 현재 우리 잡지 시스템의 장점이라면 의사 결정이 빠르다는 점, 편집과 광고, 판매 등 마케팅과의 연계가 일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이라면 한 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이 집중돼 조직의 수평적 소통이 허술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

13  art만의 독자적인 편집 컨셉트가 있는가?
독자들은 그 잡지가 그 잡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분명한 편집 방향을 가지고 있다. 우선 미술 잡지는 시각예술을 다루기 때문에 이미지가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미술 잡지의 컨텐츠는 일단 이미지가 존재하고 난 뒤에 텍스트가 따라 붙는다.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좋은 작품, 좋은 작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정말 좋은 작품은 말이 필요없다. 캡션 한 줄이면 된다.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편집, 그게 최우선이다. 창간 초기에 이런 파격적인 편집을 내놨더니, art는 공허한 ‘이미지의 바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것, 이런 편집 원칙 때문에 자연이 잡지의 배열을 상당히 중시한다. 편집이란 요컨대, 한 권의 책을 쪼개고 모으는 작업인데, 그 편집의 흐름을 우리는 상당히 중시한다.

14  늘 표지가 인상적인데, 표지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월간지의 표지는 계절감이나 시사성, 그 달에 특히 힘을 실은 컨텐츠 등 여러 사항을 고려해서 결정한다.  표지란 집으로 치자면 대문 같은 역할을 한다. 가게라면 간판이다. 그래서 표지는 컨텐츠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임팩트를 지녀야 한다. 창간 초기에는 매달 표지를 에디터들이 ‘연출 촬영’을 했다. 그래서 지금 봐도 수준 높은 좋은 표지를 만들어냈다. 표지 한 페이지 만드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 표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놔도 몇 보따리는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 art 표지는 잡지가 발행되기까지 험난한 산고(産苦)의 과정을 거친다. 대체로 후보가 여럿이어서 전 스탭들의 의견을 종합한다. 편집 마지막 날까지 표지가 결정나지 않을 때도 있다. 표지가 욕심에 미치지 않아 다시 인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표지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 화랑 주인들조차도 표지에 실리면 돈을 내느냐 하고 묻는다. 외국 미술잡지 중에는  표지 지면을 파는 일이 관례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전 직장에서도 그랬지만, 표지로 흥정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15  매달 잡지 만드는 일이 지겹지 않나?
정기 간행물이란 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틀에 박힌(routine) 생활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겨운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삶이 또 있을까. 나는 재미있다. 잡지 만드는 일이 너무 너무 재미있다. 왜냐하면 매달 미술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늘 ‘새로운’ 잡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잡지는 매호 매호가 새로운 상품이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을 자주 한다. 1995, 6년 무렵, 내가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하던 미술잡지 편집장으로 일할 때, 회사의 출판 고문께서 간부들에게 제공한 자료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그 당시에는 스쳐지나가는 말로 들었는데, 정말 멋진 말이다. 잡지의 역동성, 제작자의 창조적 자발적 정신과 행동, 그 매력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말이 아닐까? 한편 잡지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섬뜩한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매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좋은)잡지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한 즉, 해답은 뻔히 정해져 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는다. 절대 안주하지 마라! 나태하면 안된다! 늘 노력하라! 사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경구다.

16  매달 만드는 잡지에 늘 만족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겹도록 주물러대는 제작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잡지가 탄생한다. 그러고 나서도 10일에서 보름 동안은, 새로 나온 잡지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잠을 자다가도 아침밥을 먹다가도 잡지를 놓을 수가 없다. 흡족하면 흡족한대로 입가에 미소를 흘리고,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아쉬운 점을 또박또박 다시 점검하고 그 원인을 분석해 본다. 바둑으로 치면, 복기(復碁) 과정과 같다. 이건 잘못된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절대점은 과연 어디인가. 이런 식으로. 이렇게 내 눈에 잡지가 익숙해질 때면, 또 새 달의 잡지 컨텐츠가 나를 기다린다. 

17  잡지 만들 때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들은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 26년간 미술잡지만 만들었으니, 이젠 ‘잡지 9단’ 아닌가? ‘잡신(雜神)’이 뭘 야근까지 해가며 책을 만드는가? 하하! 잡지를 잘 만드려고 하는데, 잘 안될 때 그걸 견뎌내기가 제일 힘들다. 인력의 문제건, 자본의 문제건, 아니면 잡지 제작 협력 업체의 문제건 우리의 열정이 송두리채 실현되지 않을 때가 가장 힘들고 답답하다. 우리는 잡지를 정화수 모시듯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다. 나는 1류 잡지와 2류 잡지는 제목 하나, 사진 설명 하나로 판가름 난다고 믿고 있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잡지 수준을 가늠한다. 갈수록 잘 만드는 일이 어렵다. 왜냐하면 잘 만드는 길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잡지는 원고에서부터 사진 출력 인쇄 제본까지 여러 제작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상품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잡지의 질은 각 과정의 채점이 합산된 것이다. 작은 과정 하나하나라도 그게 모여 결국 잡지 결과물의 최종 점수가 된다. 따라서 인쇄든 제본이든 모든 공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우리 잡지 기자들은 지옥 같은 편집 마감 후에 곧바로 인쇄사로 뛰어가 감리의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잡지의 질을 높이려는  안간힘이다. 나 역시 인쇄사를 이웃집 다니듯 출근한다. 지난 달, 새벽 2시 30분에 인쇄사에 가려고 집을 나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제 막 집으로 들어오는 미술평론가 L을 만났다. “아니, 이 시간에? 오마이갓!” 그도 20여년 전에 나와 같이 잡지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18  잡지를 만들면서 가장 큰 보람은?
얼마 전에 퇴직 사우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잡지 기자 생활이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지옥이란 잡지 마감 때의 야근이다. 이 때는 정신과 육체가 완전 녹초가 된다. 그럼에도 기자 생활이 천국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잡지 기자들이 노력한 만큼 좋은 글이나 기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다. “글 잘 읽었다” “잡지 참 좋더라”하고 짧은 칭찬 한마디해 줄 때, 바로 그때 목에 힘주는 맛이 아주 좋다. 그런 맛에 밤을 지새우며 일하는 사람들이 잡지 기자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한 달 두 달, 또 몇 년씩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젊은 기자 시절, 공모전에 큰 상을 받은 젊은 작가를 인터뷰했는데 그 어리버리하던 작가가 오늘날 대학 교수에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다. 잡지에서 다룬 작가가 그 기사가 발화점이 되어 작품이 잘 풀려나갈 때 아주 큰 보람을 느낀다. 전문지란 ‘이념 그룹’이라고 해도 좋다. 잡지에서 생산해낸 담론이 한 시대의 미술을 추동하고 견인할 때,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는가. 

19  잡지 기자란 무엇인가?
‘잡지(magazine)의 어원이 ‘창고(magazien)’다. 그러니까 미술잡지 기자란 ‘문화의 창고지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기자의 역할=큐레이터+비평가+작가’라는 도식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미술기자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다. 큐레이터나 비평가 지망생이라면 반드시 거쳐볼 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비평가나 큐레이터 중에 기자 출신이 많다.

20  art를 거쳐간 사람들이 꽤 많은데…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인복(人福)이 있다. 그동안 미술계의 좋은 인력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리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열심히 일해 줬다. 어떤 사람은 밖에서 지면으로만 느낀 art와 나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입사했다가 일찍 그만 둔 사람도 있다. 보아하니 살림도 쪼달리고, 잡지 마감할 때 저 불 같은 김복기의 성질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art OB들은 모두 한국 미술계 곳곳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미술계 전문 인력의 양성, 그것도 잡지의 중요한 역할이고, 또 잡지의 보람이다. 
21  불 같은 성질이란?
나는 신문사 생활에서 몸에 붙은 ‘기자 근성’을 지니고 있다. 좋게 말하면 승부 근성인데, 나는 무슨 일이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나쁜 쪽으로 보면 자기 생각을 잘 굽히지 않는 똥고집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어릴 때 내 별명이 골보’였다. 고집 센 놈이라고.) 여기에다 칭찬에 인색하고, 일에 있어서만은 소소한 인정에 이끌리지 않는 아주 냉정한 사람이다. 여기에다 잡지를 오래 만들다 보니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게 많지 않겠는가. 완성도를 높이려다 보면,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다. 목표가 끝이 없다. 그러니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진 피곤할 것이다. 대체로 옳은 일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만, 지나치게 깔끔 떠는 결벽증은 내 스스로도 문제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회사가 ‘잡지 기자 사관학교’라고 자부한다. 미술 언론의 정통파들이 창간한 잡지여서, 그 진골(眞骨)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22  앞으로 편집 방향은?
언론이란, 정치 구도에서 보면 언제나 야당의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 잡지도 마찬가지 아닐까? 보수보다는 진보, 전위, 새로움 쪽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삐딱이 근성’이라고 해야 할까?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잡지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오늘날 미술대학이나 미술관 혹은 공공기관, 그리고 언론은 ‘공적’인 역할이 서로 습합되어 있다. 모두의 역할이 사회적 기능, 교육적 기능으로 모여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론의 공공성을 비단 잡지 지면뿐만 아니라 잡지 밖에서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art는 ‘종이 밖’에서도 미술 문화 발전에 온힘을 쏟을 것이다. 젊은 비평가 등용문 New Vision, 젊은작가 공모전 New Face, 그리고 신진작가 육성을 위한 전방위 교육 프로그램 동방의 요괴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art가 기획하고 운영하는 행사다. 이건 일종의 메세나(mecenat) 행위와도 통한다.

23  광고 경쟁력은 어느 정도인가?
작고하신 이규일 전 art 대표께서 “월 3000만원 광고를 수주하면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춤추겠다”고 말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동안 미술시장이 확대되면서 광고가 많이 늘어났다. 특히 광고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art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창간 때부터 광고야말로 잡지의 중요한 컨텐츠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광고 배열이나 디자인에 기사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24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서 광고주와의 관계는?
광고주와의 관계가 참 어렵다. 광고가 잡지 생존의 젓줄이기 때문이다. 광고주가 비평의 대상이어야 하는데, 광고주의 힘에 휘둘리면 자칫 편집권마저 흔들릴 수 있다. 광고 한 페이지 싣겠다며 그만큼의 댓가로 기사를 요구한다든지 심지어 표지까지 욕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작가가 광고료 두 배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특정 지면을 요구했다. 나는 작품 수준이 문제여서 고민 끝에 광고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 작가가 광고 담당자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발행인라는 사람이 장사를 하겠다는 거여 안하겠다는 거여. 정말 art하고 있네~” 메이저 화랑일수록 기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 일단 작가와 작품의 수준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화랑들은 기사에 대한 요구나 압력도 적다. 이 정도면 명실공히 ‘잡지 후원자’라고 해도 좋다. 이런 광고주들이 늘 고맙다. 그래서 당연히 광고주들에게 과일바구니 사들고 자주 인사 가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 정말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나름대로 핑계는 있다. 좋은 책 만드려니 정말 시간이 부족하다. 피 같은 돈 지불하고 광고 내는 잡지가 허접해서 되겠는가.

25  판매 경쟁력은?
앞으로 제일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상품(잡지)의 질을 감안하면 구독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야 정상이다. 인터넷의 정보 파급력 때문에 전반적으로 잡지 구독자가 줄었다. 온라인과의 연계 등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사실 지금까지는 정기독자 중심의 소극적이고 안이한 마케팅이었다.

26  art 창간 10년, 얻은 것은 무엇인가?
딱 10년 전, 나는 생애 처음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미술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줄잡아 800명에 이른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이번에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16년 동안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직장이었습니다.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활동 방식에 도전했습니다. 젊은 혈기와 미술에 대한 불 같은 열정이 끓고 있습니다. 보다 능동적이고, 보다 역동적으로 21세기 40대의 삶을 헤쳐나가려 합니다.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부족한 저에게 보내주신 따뜻한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은 힘이나마 한국미술의 밝은 미래를 여는 일에 매진하겠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도록 아낌없는 조언과 질책 바랍니다. 연락처 4월 30일까지 W미술 근무. 5월 1일부터는 서울시 신교동 58-1 전화: 730-1995-6/723-0291 팩스: 723-0290 e-mail: artart@soback.kornet.nm.kr (주)에이앤에이 편집인으로 월간과 계간 미술전문지 창간 준비중.”
새로운 잡지 창간은 가슴 벅찬 일이었지만, 창간 그날부터 고생 길이 시작되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을 맞추는 일만 남았다. 목표를 향한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나는 결코 ‘실패한 언론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목표가 칠흑 같이 막막하고, 바윗덩어리 같은 짐이 어깨를 짓눌러도 그 자존심만은 꼭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잡지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의 40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스스로의 기득권을 버리고, 맨바닥에서 새로운 잡지 만들기에 도전했다. 그 힘겨운 과정의 체험이 내가 얻은 가장 큰 성과다. 2등, 3등의 자리에 서는 일, 그런 설움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와서 art가 ‘성공’했다고 촐랑댈 것까지는 없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27  잃은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 아닐까. ‘art 10주년’을 얻었지만 많은 것을 잃었다. 가족 친구 동지 건강 등…. 특히 창간 초기 5년 동안은 외부와의 투쟁이라기보다는 내부 싸움이 더 힘들었다. 잡지 생존의 과제 앞에 오랫동안 쌓아온 인간적 신뢰도 여지없이 깨지더라. 잡지 때문에 삶의 많은 부면이 흔들리곤 했다.
 
26  개인적으로 어떤 작가와 작품을 좋아하는가?
언론이란 첫째도 공정해야 하고, 둘째도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미술 같은 예술 분야의 가치 평가란 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기가 아주 어렵다. 결국은 개인의  비평적인 취향(taste)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기자를 하면서 문화적 균형이랄까,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는 직업 의식에 얽매인 탓에 나 자신의 비평적인 취향이 과연 존재하는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동안 취재와 글쓰기와는 별개로 그래도 내 취향은 확실히 있다. 구체적인 작가를 거론하긴 곤란하지만, 군더더기를 뺀 미니멀한 작품이 나는 좋다. 적게 말하면서도 여운이 강하고 오래 남는, 그러면서도 무한감이 감도는….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감각적인 포멀리즘을 좋아한다.

29  미술계에 어떤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운가?
미술이라는 전문 집단에 살다보니, 인간 관계도 완전히 미술 쪽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 관계가 아주 어렵더라. 그냥 인정으로만 편안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자연인라면 무슨 대수겠는가. 결국은 작가와 기자, 화랑과 기자, 취재원의 관계에 놓이게 되지 않는가. 그런 관계가 부담이 되다 보면 미술계 사람들을 만나도 사무적인 선을 넘기가 조심스럽다. 일단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그의 작품에서 내가 어느 정도 자신이 서지 않으면 멈칫거리게 된다. 사람은 좋은데 작품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거꾸로 작품은 좋은데 인간적 매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후자가 편하다. 물론 작품도 좋고 사람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내가 한때 사람이 너무 차갑다는 평판을 듣던 터에, 이른 나이에 편집장에 올라 우쭐한 기분에 젖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작가들과의 교제 폭을 부쩍 넓힌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 나대면 되돌아오는 소리가 좋지 않다. 여러 가지 곤욕을 치룬 일도 있다. 그때 많은 삶의 교훈을 얻었다. 공평하게 정을 나눠주자. 사실 미술계에서 나만큼 인맥 풀이 다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연령이나 작품 노선과는 별개로 교재의 폭이 아주 넓다. 그러나 서로 절친한 사이로 꼽을 수 있는 관계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나는 참 고독하다. 어쩌면 이 고독이란 게 공평무사해야 하는 저널리스트의 숙명이 아닌가도 싶다.

30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나?
나는 어릴 때부터 신문 읽기를 좋아했다. 책도 좋아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늘 신문지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갔다. 틈만 나면 사설에서 광고 지면까지 모조리 읽어댔다. 믿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날 두고 한문을 잘 읽는 신동이라 불렀다. 중고등학교 시절 장래 희망은 언론인이거나 외교관이었다. 문학 음악 스포츠 미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결국 미술대학으로 진학했다. 솔직히 말하면 ‘전공’보다는 ‘대학’을 선택했다.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대학 졸업과 함께 언론계에 투신해서 신문사 발행 잡지의 최연소 편집장까지 지냈고, 지금까지 4반세기 동안 이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 정도면 꿈은 이룬 셈 아닌가. 무엇보다 줄곳 미술 잡지를 만들고 있으니 전공과 다른 외도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주에도 이 직업이 잘 어울린다고 나와 있다. 나는 경제적인 욕심은 많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 물질적으로 별볼일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고 있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참 행복하다. 나는 미술 잡지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아주 부족한 사람이다. 이 외길을 끝까지 걷고 싶다.

31  혹시 컴플렉스는 없는지?
컴플렉스? 많다. 사투리에다 어눌하기까지 한 말투도 불만이고,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 못해 외국어에도 컴플렉스가 있다. 또 시골 촌 골짜기 출신이라 인맥도 약하다. 오랫동안 너무 까칠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서 몸집도 불어나고, 생각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최근에는 몰라 보게 부드러워졌다는 소릴 많이 듣는다. 기분 좋다.

32  글쟁이로서 저서 출간 계획은?
기자 초기에는 한국미술사 자료 발굴 및 재조명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 근대미술사의 복원, 북으로 간 화가들에 이어서 디아스포라의 미술, 북한미술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원래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라 소박하게 우리 선배 화가들이 걸었던 굴절의 시대를 관통해 보고 싶었다. 일제강점과 남북분단의 민족사를 미술로 돌파해 보고 싶었다. 국내외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북으로 간 화가들, 고암 이응노 평전, 북한미술 인명사전 등 오랫동안 다듬고 있는 책들이 좀 있는데, 학술적 욕심 때문에 책으로 나오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아직도 공개하지 않은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있다. 언제가 이 자료들을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올 것이다. art 창간 이후에는 아무래도 현장에 치중하다보니 동시대 미술로 더 가까이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기자 생활하면서 50여 차례 해외 미술계 구석구석을 취재하면서 작가와 작품을 몸으로 체험했던 시간이 많았다. 잡지에 매달리다 보니, 나 자신의 연구에 쏟을 시간이 늘 부족하다. 우선 올해는 창간 이후에 쓴  <에디토리얼>을 중심으로 짧은 에세이를 묶어 2권의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현대미술 번역서도 출간할 예정이다.

33  art의 미래가 어떠했으면 좋겠는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만들었던 잡지 《공간》이 올해 7월 통권 500호를 돌파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창간 멤버가 이 세상을 떠나도 그 정신적 유산이 면면이 이어지는 잡지, art in culture도 그런 잡지로 남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잡지가 하나의 엄연한 생명체로서 시대 변화에 따라 진화를 거듭하며 역사 속에 오래오래 살아 남았으면 좋겠다. 《art news》나 《Art in  America》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일본의 《미술수첩》은 통권 1000호를 넘었다.

34  앞으로의 꿈은?
잡지에 관한 한, 나는 아직도 배가 몹시 고프다. 이 허기는 채워도 채워도 영영 채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나라 미술잡지의 수준을 지금보다 더 높이 끌어올리고 싶다. art in culture를 더 잘 만들고 싶다. 여력이 된다면 또 하나의 잡지를 창간하고 싶다. 이번에는 비평 잡지, 읽는 잡지다. 나는 천상 ‘잡지 중독증’에 걸려 있나 보다. 개인적으로는 ‘발행인의 고독’에서 벗어나 ‘기자의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10년 전 art 창간은 새로운 꿈을 꾸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나와 art는 많은 꿈을 실현했고, 또 다른 많은 꿈을 잉태했다. 지금 이 시간 그 미술의 꿈을 간직하고 있음에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이 행복을 안겨준, 나와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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