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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9.08

Abstract

특집 섬으로 떠나다: 제주의 미술, 미술의 제주 뜨거운 여름에는 누구나 파란 바다로의 여행을 꿈꾼다. 그 중에서도 남쪽바다 위 푸른 섬 제주도는 육지사람 모두가 동경하는 파라다이스이자, 미술가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 그 자체이다. 지금 art는 미술가들이 담아 낸 각양각색의 제주도의 풍경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름의 열기를 잠시 잊게 해줄 푸르른 자연이 곧 펼쳐진다. 하지만 제주도가 파라다이스이기 전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으며 성장한 바람의 섦이자, 도민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 곳엔 아름다운 자연 사이로 굴곡진 미술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더욱이 지난 6월 제주도립미술관이 개관하며 제주미술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는 이 시점에서, art는 제주미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 미래를 점검한다.

Contents

표지 오병욱 〈Sea of my mind〉 캔버스에 아크릴릭 185×120cm 2008

에디토리얼 한국미술, 영문 아카이브를 시작하다_김복기

프리즘
    새로운 정체성 모색의 기로에 선 아르코미술관_양지연
    ‘주민’에 중심 둔 ‘제주 공공미술’ 되기를_이승택

포커스
    런던 콜링|Unknown Knowns_전영백
    아리랑 꽃씨|미국 속의 한국작가 11인_최광진
    홍승혜展|ENTR'ACT_임근준
    신화의 전시_강수미

특집
    섬으로 떠나다 : 제주의 미술, 미술의 제주
    (1) 미술로 떠나는 제주 여행_편집부
    (2) 지금, 제주에 ‘미술관 시대’가 열리다_하계훈
    (3) 제주미술을 다시 보다, 확장과 토착의 변증_김유정
    (4) ‘포로롱 제주’의 미술을 일구는 사람과 공간_장승연

해외 작가
    마틴 키펜베르거, 요절 작가의 신화적 삶과 예술_정도련

암흑물질
    예술가, 가구에 미치다!!!_편집부

이미지 링크 Alice's Mirror

김순응의 줌인 아트마켓 6
    불황에도 잘 팔리는 미술품

아티스트 인사이드
    곽선경_검은 선의 물결, 공간을 치다_이성희
    박민준_삶과 죽음의 찬란한 축제_박순영

나의 얼굴

리포트 인사이드
    터키와 한국의 미술, ‘다른 유사함’_김정연

전시 리뷰
    변형의 기념비|로메르+로메르|괴물시대|박종규|오병욱
    김익모|알프레도 자|파트타임 스위트|홍범|정경심|윤정숙|변재희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암흑물질-MAD for furniture

예술가, 가구에 미치다!!!

친환경 가구를 만들다
박선기

작가가 직접 나무를 짜맞춰 세련된 미감의 테이블을 만들었다. 소박한 형태와 색채가 오히려 강렬한 인상을 준다. 평소 검은 숯, 단색 FRP를 사용하듯 이번에도 역시 화려하지는 않지만 재료 그대로의 속성을 살렸다. 또한 네모 혹은 원형이 아닌 역삼각형의 상판을, 4개가 아닌 3개의 다리가 지탱함으로써 가구에 품고 있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부순다. 테이블 위와 벽면에 함께 디스플레이된 부조 작품은 존재와 무, 그리고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현대적 조각의 비전을 찾으려 하는 작가의 고민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려내고 묶는  새로운 가구 제작
김희수

오래 전, 뉴욕 메트로미술관에서 일본 가구디자이너 조지 나카시마의 가구를 보고 감명을 받았던 김희수는 이번 전시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다. 대신 나카시마가 사용한 짙은 갈색이 감도는 원목이 아니라, 무언가를 묶기 위해 사용되는 고무줄을 재료로 사용했다. 버려진 공병을 모아 테이블을, 역시 버려진 의자를 기본틀로 삼아 색색깔의 고무줄로 촘촘히 감싸 작품화했다.

장승효

작가는 평소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그 중 오브제만 오려내어 입체적으로 콜라주해 조각 작품을 만든다. 이번에 출품한 2개의 거울은 표면에 각각 남자(여성용)와 여자(남성용)를 그려 넣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성적 욕망을 끌어내려는 의도를 담았다.

의자를 엮어 만든 샹들리에
손진아

이전부터 ‘의자’의 조형성, 그 안에 내재된 주체의 부재와 균열의 상태에 주목해 여러 가지 의자를 만들어 선보인 바 있는 작가는, 정작 이번 전시에서 의자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의자를 모티프로 삼았을 뿐이다. 작가에게 있어 ‘의자’란 자아를 반영하거나 주체를 상징한다. 작가는 작고 귀여운 의자 모형을 엮어 샹들리에를 만들었다. 또한 그 아래에 놓인 심플한 스테인리스 스틸 테이블은 샹들리에의 빛과 그림자를 은은하게 반사시킨다.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려 있는 듯한 의자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현대인을 형상화시키며, 그 밑으로 테이블에 투영된 이미지는 그 간절한 모습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이유 있는 외도, ‘가구의 정원’으로
한기창

<뢴트겐의 정원>으로 익숙한 한기창은 자주 다뤄본 소재인 라이트박스와 커팅지를 이용해 조명과 테이블을 제작했다. 테이블은 안쪽에 주방용품을 정리할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마련, 쓰임새를 강화시켰다. 아일랜드주방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테이블은 작가가 아내에게 선물로 바치고픈 마음에 정성을 다해 제작했다고 한다.

심승욱

친환경 소재 포맥스 판을 겹쳐 만든 작은 테이블 조명은 속에 달려 있는 전구만 제거하면 조각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절제된 조형미가 매력적이다. 근작에서 보여 주던 유선형의 검은 구조물과 정반대의 작품을 두고, 작가는 “밥 잘 먹다가 가끔 짜장면이 생각날 때처럼, ‘외도’에 가까운 작품이다”라고 말한다.

한국 터키 현대미술교류전, a different similarity Towards the Sea

김기라 <WE ARE THE ONE> 2009, 전준호 <형제상> 파이버글래스에 우레탄, 배터리, 모니터 2008

a different similarity Towards the Sea

글 | 김정연·독립기획자

터키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매우 선호하는 나라이다. 특히 이스탄불의 유명한 그래드 바자르나 성소피아 성당, 술탄 아흐멧 등은 파리의 에펠탑이나 런던의 빅벤 마냥 관광 안내서를 도배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승지이기도 하다. 비록 터키의 꽤 넓은 지역이 외교부가 규정하는 여행 자제 지역에 포함되어 있지만, 여전히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상은 친근하고 우호적이다.

진기종 <YTN> 3채널 비디오 설치, 149×117×125cm 2007, <Discovery> 4채널 비디오 설치 119×92×32cm, 60×94×159cm 2007

한국인들이 아는 터키, 터키의 한국은?

터키 현지에서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터키인들은 한국을 친구처럼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에 15,000명의 군사를 파병한 것도,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과 터키가 상대 국가의 팀을 마치 자국팀 마냥 응원했던 것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같은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언어의 구성도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무엇이 더 있을까? 양국이 이토록 서로를 가까이 느끼고 있지만, 실제 양국간의 문화 교류는 매우 희박하고 관광산업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관광마저도 한국인들만의 것이고, 터키인들의 한국 관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두 나라 사이의 친근감 대비 교류 빈도수가 비례하지 못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교류 전시를 기획하면서 알게 된 것은 한국과 터키가 상대 국가의 ‘오늘’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한 채,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화들이 신화와 환상이 되어 상대방을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터키의 기획자 펠린 우란(Pelin Uran), 김정연, 서진석이 공동 기획한 한국과 터키의 현대미술교류전 <다른 유사함(A Different Similarity)>은 터키 현대미술을 한국 관람객들에게 소개하고, 한국 현대미술을 터키 관람객들에게 소개하는 두 개의 독립된 전시로 구성되었다. 2009년 1월 서울의 대안공간루프에서 8명의 터키작가들, 알리 카즈마(Ali Kaz ma), 아슬리 차부숄루(Asli Cavusoglu), 아슬리 순구(Asli Sungu), 바누 젠네트올루(Banu Cenneto glu), 엠레 후네(Emre Huner), 이쉴 에이리카부크(Isil Egrikavuk), 하자부주(ha za vu zu)가 참여한 그룹전 <엔드게임(Endgame)>이 열렸고, 6월에는 이스탄불의 산트랄이스탄불(santralistanbul)에서 김기라 문경원 배영환 이세현 이용백 임민욱 전준호 정연두 진기종 홍경택 등 10명의 작가가 <바다를 향해서(Towards the Sea)>에 참여했다. 
처음부터 이 전시는 한국과 터키의 현대미술을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성’, 혹은 ‘터키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특수성이나 정체성을 정의하지 않고자 했다. 오히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대로 보여주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서로의 미술에 대한 주체적인 경험과 이해에 참여하게 하는 기획이었다. 해외에서 열리는 한국작가들의 그룹전의 경우, 한국적 특성의 한 측면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물론 비평가, 큐레이터들도 한국 현대미술의 특질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 현대미술과 같이 국제적인 미술계에 확연히 부각되는 ‘한국성’의 부재를 지적하고, 그것을 모색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가 없는 외국 관람객들에게 이해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단편적인 한국적 주제를 제공하는 것은 자칫 광범위한 현대미술의 장을 파편적으로 전달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터키문화의 ‘오늘’ 바로 보기

실례로 한국인들에게는 터키하면 떠오르는 상투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황금빛 왕궁과 술탄, 터키탕, 하렘 등 서구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이 기록하고 규정한 오리엔탈 이미지들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터키문화들이 대부분 터키의 민속미술이나 전통 문화를 주제로 했기 때문에 이번 현대미술 교류전은 오늘의  터키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
지난 겨울 대안공간루프에서 열린 터키 현대미술전 <엔드게임>의 반응은 한 마디로 ‘터키’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획자가 전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관람객이 어떤 터키적인 속성을 기대하고 전시에 왔다면 헛수고’가 되었던 것이다. 체스 용어인 <엔드게임>은 말이 몇 개 남지 않은 게임의 말미를 의미하는 것으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열린 상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기획 의도는 터키 작가의 작품이나 작품에 담긴 어떤 터키적인 의미를 분류하거나 정의내리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제시하는 열린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시 작품 가운데 엠레 후네의 애니매이션 <파놉티콘>은 터키 사회가 겪어 온 근대화의 혼란 속에서 합리주의의 선형적 사고와 역사관을 비판하고 논리와 질서가 사라진 혼돈을 꿈나라처럼 그려냈으며, 알리 카즈만의 필름 <장애물>은 가전제품 공장과 제철소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며 기계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하기도 했다. 아슬리 순구의 <오점>은 극히 개인적인 생활 모습을 통해서 타인에 의해, 혹은 사회에 의해 통제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처럼 터키 작가들이 전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터키’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 보편적인 시각언어로 관람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터키를 오리엔탈의 관문으로, 실크로드의 종착역으로 이해하는 만큼  터키인들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하기 어려운, 동아시아 끝자락의 작은 나라이다. 한국전쟁과 축구, 최근에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선진국으로 국가 이미지는 상승했지만 터키에는 한국 현대미술은커녕 전통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마저 부재하다. 어쩌면 터키의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세계 어느 나라의 현대미술도 접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 터키는 이스탄불비엔날레의 역사가 벌써 11회를 맞게 되지만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소장하는 미술관이 전국에 단 두 곳, 이스탄불모던과 산트랄이스탄불에 불과하며 이들 모두 사립미술관이라는 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6월 17일, 한국 작가들의 전시 <바다를 향해서>가 열린 산트랄이스탄불은 이스탄불의 신개발 지역에 위치한 미술관으로서 2007년에 개관했다. 100년이 넘은 발전소 건물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이곳은 일부를 현대미술관으로, 다른 일부를 에너지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터키 근현대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대형 국내외 전시를 소개해 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중소 규모의 전시를 주로 소개하는 산트랄이스탄불의 갤러리1에서 열렸다.

홍경택의 작품을 터키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기획자 김정연

다름과 유사함의 미묘한 차이

전시를 찾은 터키 관람객들의 기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국 작가들의 전시 역시 전혀 ‘한국’스럽지 않다는 것이 터키 관람객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전시 제목 <바다를 향해서>는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모두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그 바다를 정의하기보다 그곳으로 흘러드는 일부 물줄기를 소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시에 참여한 10명의 한국 작가들은 각기 다른 관심들-문화,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 등-을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풀어냈으며, 그 속에서 한국적인 것을 추출하는 것은 터키 관람객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 작품이 어떤 컨텍스트에 놓이는지에 따라 관람객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전준호의 <형제상>은 서울 전쟁기념관의 청동조각 <형제상>를 차용한 작품으로, 한국전쟁 당시 남한군이 된 형과 북한군이 된 아우가 상봉하는 일화를 담고 있다. 터키 관람객들은 이 작품이 한국의 분단 상황을 잘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만약 이 작품이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컨텍스트 바깥에 놓인 경우를 가정해 보면 이것이 한국만의 이야기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분단이라는 것은 영토의 개념일 수도 있지만, 이데올로기의 분리, 민족의 분리, 종파간의 분리 등을 포괄하여 전 세계가 공유하는 현실적인 이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세현의 <Between Red> 회화 연작은 분단 상황의 긴장과 공포를 매우 극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DMZ에서 야간 보초를 서며 자외선 투시경을 통해 바라본 붉은색 풍경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적인 공포를 연상시킬 수 있지만, 터키 관람객들에게는 (어쩌면 중국적인) 붉은 색의 전형적인 동양적 산수로 간주될 수 있다. 관람자의 문화적 배경은 작품을 흡수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만, 그만큼 작품을 제시하고 컨텍스트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편 김기라의 신작 <WE ARE THE WORLD>는 붉은색 네온의 선전 문구를 연상시킨다. 전기가 흐르는 불편한 전자음과 함께 전시장 가득 붉은 빛을 발산하는 이 작품은 전체주의적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현실을 드러내었다.
이용백의 <거울>은 유난히 터키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거울이 깨지는 것을 매우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이는 터키의 문화 때문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지는 거울은 그들에게 공포영화와 다름없었다. 임민욱의 다큐멘터리 <스무고개>는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모인 ‘아리랑 축제’를 기록한 작품이다. 한국 사회 속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은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터키 출신 이주 노동자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혹은 진기종의 <YTN>과 <Discoevery>가 드러내는 대중매체를 통한 사실의 오도나 조작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듯이 한국의 현실과 터키의 현실은 꼭 같지 않아도 많이 다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르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의 미묘한 차이는 주관적인 시점에서 정의된다. 관광 책자에서 본 술탄 아흐멧은 실제로 사진 속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그 곳에 꼭 가보려는 이유는 그곳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책에서 얻지 못하는 또 다른 것들을 경험하고 느끼기 위해 그 수고를 감수하고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번 터키와 한국 현대미술 교류전은 이처럼 다름 속에서 유사함을 발견하는 흥미로움, 유사함 속에서 다름을 찾아내는 감동의 장을 제공했다. 
터키와 한국 현대미술계는 지금 유사한 고민에 빠져 있다.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요구되는 때이지만 그로 인해 문화의 다양성이 흐려지는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대미술의 후발주자들로서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서구 미술계가 원하는 것을 보여줄 것인지, 혹은 그 화석화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다양성을 고수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국지적인 미술 경향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를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터키나 한국 작가들도 결국 전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시각언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가장 큰 관건은 동시에 고유 문화와 특수성을 담아낼 수 있는 깊이 있는 사고와 세련된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유사함>전은 이러한 실험의 첫 단계이며, 비록 터키와 한국간의 교류전으로 시작했으나, 더욱 다양한 문화와 관람객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실험의 장을 확대하고 폭넓은 대화를 이끌어 갈 것이다.

괴물시대展

장지아 〈P-tree〉 300×300×200cm 혼합재료 2007

괴물시대展
6. 24~8. 30 서울시립미술관

글 | 김장언·큐레이터, 미술평론가

이번 전시에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은 단 하나의 이유, ‘괴물’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각했던 괴물이 납량특집을 위한 작가들이 만드는 괴물의 집으로써 ‘괴물’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만약 이번 전시의 괴물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면 그건 당신이 너무나 문화산업에 길들여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더운 여름과 상관없이 ‘괴물’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던 것은 이번 전시가 ‘괴물’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괴물성(monstrosity)’에 대한 동시대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전시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보수라는 이름이 괴물처럼 우리를 배회하고 있고, 이번 전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보수적인 그곳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야의 〈검은 회화〉 연작과 〈사투르누스〉를 단지 괴물에 대한 조형적 탐구라고 이해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사고 능력에 대해 재고해봐야 할지도 모르며, 아니면 당신은 지독한 모더니스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전히 그의 회화를 탐구하는 것은 그가 괴물을 탐구했다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동시대에 출몰했던 괴물적인 상태, 즉 괴물성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고야의 근대성이 무엇인지 발견하고자한다. 또한, 우리가 위젠트 앗제의 〈Au Tam-bour, 63 quai de la Tournelle〉을 주목하는 것은 바로 작은 북 때문이 아니라 상점 입구에 반사된 행인의 괴기스러운 모습 때문이다. 이성과 과학이라는 근대성의 또 다른 타자로서 괴물적인 상태는 우리를 드러내는 또 다른 이름이다. 프랑켄쉬타인이나 지킬박사와 하이드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여전히 동시대성을 부여받는다. 영화에서 괴수영화나 공포영화가 존재 가능한 장르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괴수와 공포 속에 엄연히 살아있는 동시대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시대성으로서 괴물성을 탐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타자성을 고찰할 때 괴물적인 것을 경유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현재를 고찰할 것인가의 질문일 수도 있다. 타자성은 한 시대가 규정하는 자신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 혹은 그 세계관이 포섭시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어떤 반응이다. 이것은 대개 공포와 두려움 혹은 분노의 감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우리는 그것을 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규정짓고자 한다. 괴물은 그러한 가시성의 한 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성 혹은 타자성은 ‘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나’이다(여기에서 ‘나’를 ‘사회’로 바꾸어도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또 다른’을 ‘나’ 앞에 붙임으로써 정상적이지 않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세계관 즉 기준점의 문제일 뿐 어떤 것이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다름을 긍정할 경우 즉 타자성을 긍정할 경우 다르다는 것이 강한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기획자 역시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 역시 괴물의 집으로서 전시를 만들고자 하지는 않았으며, 괴물성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세 개의 섹션은 이러한 기획자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의 묵시록’은 괴물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기획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 섹션은 현대사회의 재앙적 현실에 대한 묵시론적인 반응들로 구성되었다. 군사 정권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으로서 민중미술은 호명되며, 문명사회에 대한 불안은 알 수 없는 초록색 유기체의 증식으로,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미래사회의 불확실성은 폐타이어로 만들어진 생명체로 가시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괴물적 현실은 단지 우리 시대의 우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가 경험하게 될 정치적 현실이며, 이에 대한 비판은 시간성을 초월하는 목소리로써 우리 앞에 가시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 섹션은 사회비판적 태도를 특정 시대 속에 봉인해 버리거나 조형적 대상으로 물질화시킨다.
‘금단의 땅’은 괴물성에 대한 긍정적 차원을 발견하고자 한다. 다르다는 것이 교정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를 교란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혼종과 이종의 긍정적 에너지를 탐구하고자 한 이 섹션은 불가능과 금기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작동되는 현대미술의 언어를 전시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기획자는 금지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이종교배가 ‘자르기와 붙이기’로 이루어지는 조형적 실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면 소변으로 식물을 키우거나 죽어가는 생명체의 풍화작용을 기록하는 것으로 금지된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괴물’은 자아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에서 괴물적 상태를 드러내어 인간 본성에 대해 성찰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획자는 자아에 대한 타자성으로서 괴물적 상태를 단순히 인간의 어두운 측면과 광기로 한정시키는 것 같다. 그는 이러한 태도를 단순히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존재에 대한 공포의 발현이자 심리적 상태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안의 괴물성을 정상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규정짓는 것 같다. 만약 이럴 경우 성찰은 단순히 교정의 차원에 머물러 버린다. 기획자의 이러한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 섹션의 작업들은 비정상적인 것을 광기라는 이름으로 낭만화 시키거나, 자폐적이고 우울한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미학화 시키는 듯 보인다. 혹은 실제의 인간 괴물을 불러들인다. 타자성으로서 괴물적 상태를 한 인간이 대면한다는 것은 자신을 구성하는 존재의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감추고 싶은 자신의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는 새로운 타자를 발견하는 떨림의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놓여졌을 때,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경험해 본적 없는 우리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전시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기획자는 동시대의 괴물적 상태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게 시도하지만, 이번 전시를 단지 작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창조물이자 기괴한 생명체인 괴물을 둘러싼 현대미술의 다양한 해석으로 축소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들의 시선을 이 전시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불협화음적인 시선(dissonant vision)’으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조화의 정치학이 갖는 폭력성과 불화가 갖는 정치적 가능성은 삭제된다. 이로써 이번 전시는 괴물적인 것의 동시대적인 의미에 대한 현상학에 도달하기보다 괴물적인 것의 유형학에 머물고 만다.

김혜숙 〈메타모포시스〉 가죽에 아크릴릭 300×300cm 2007

마틴 키펜베르거, 빠르고 맹렬하게 Fast and Furious

MoMA 회고전 전시장 광경, 왼쪽 벽면에 키펜베르거의 전시 포스터와 그가 직접 제작한 포스터들, 오른쪽은 〈스파이더맨 스튜디오〉 나무, 메탈, 플라스틱, 플렉시글라스, 거울, 브론즈, 스티로폼, 회화 작품, 보드카병, 발사 재목 280×305×393cm 1996

빠르고 맹렬하게 Fast and Furious

글|정도련·MoMA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

시니컬한 시대의 미술계에서는 예술적 천재성, 창조성 그리고 저작성(authorship)을 두고 흔히 ‘모더니즘의 신화’라고 언급한다. 마틴 키펜베르거(1953~1997) 역시 이러한 언급이 마땅하다고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인이 된 독일 작가 마틴 키펜베르거는 최근 몇 십년 사이에 활동한 그 어떤 작가보다도 ‘삶보다 더 큰(larger than life)’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만큼 짧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과 예술은 전설로 남았다.

〈사랑하는 화가여, 나를 위해 그려주오〉 시리즈 1979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 전시들

키펜베르거는 1997년, 불과 마흔 넷의 나이에 수년간의 과음이 불러온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파티에 열광했던 만큼 작품 활동에도 열렬히 매진했다. 그 결과 매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회화 조각 사진 드로잉 설치작품과 비평 등을 남겼고, 사망한 이후에도 광범위한 영향력과 명성을 과시하는 작가로 남게 되었다. 지난 몇 년간 회자된 키펜베르거와 관련된 일화나 사건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되새기고자 하는 관심이 여전히 뜨겁고, 그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2년 파리 퐁피두센터는 키펜베르거의 초기 회화 연작에서 제목을 차용한 대규모 기획전 〈사랑하는 화가여, 나를 그려주오: 피카비아 후기작 이후의 구상 회화〉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에서는 키펜베르거의 유작 중의 하나인 〈메트로-넷 프로젝트〉, 가상의 전 세계 지하철 노선도를 칸디다 회퍼의 사진 작업과 나란히 전시해 그의 작업을 사후(死後)에 조명했다. 지난 해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는 레더호센1)에서 주로 입던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죽바지를 입은 개구리가 한 손에는 달걀을, 다른 한 손으로 맥주잔을 들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작품(1990년작)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종교적으로 큰 논쟁을 일으켰고, 심지어 교황까지 키펜베르거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키펜베르거는 생전에 이미 수많은 전시를 통해 작가로서의 인지도를 높여 왔다. 특히 최근에 LA현대미술관(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에서 열렸던 회고전 〈마틴 키펜베르거: 문제적 관점(Martin Kippenberger: Problem Perspective)〉은 미국 내에서 키펜베르거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인식에 불을 당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이 전시는 뉴욕 MoMA에서도 잇달아 진행되었다. 미국(혹은 서구) 근현대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 온 기관 중 두 곳이 그의 작업에 잠재된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당한 재원과 시간을 바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 미술사에서 키펜베르거의 확고한 위치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다. 키펜베르거 작품이(그리고 그의 대중적 이미지와 정체성이)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 작가들과 동시대의 많은 미술인들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찾았거나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마틴 키펜베르거의 ‘신화적 삶’을 간략히 개괄하면서 그의 예술 세계를 신중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Worktimer〉 스틸, 서류가방, 고무 243×257×140cm

배우에서 화가의 길로 바꾸다

키펜베르거는 1953년 독일의 도르트문트에서 출생했다. 그는 함부르크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않고 1976년 자퇴했다. 그리고 같은 해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영화산업의 중심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키펜베르거는 배우가 되는 대신 화가의 길을 선택하고, 최초의 회화 연작 〈너희들 중의 한 사람, 피렌체의 한 독일인(Uno di voi, un Tedesco in Firenze)〉(1976~1977)을 제작한다.
이 최초의 회화 연작은 모두 50×60cm의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로 제작되었다. 그는 관광용 그림엽서 혹은 직접 찍은 스냅 사진의 이미지를 기초로 하여 이 연작을 모노톤으로 그렸다. 키펜베르거의 본래 의도는 완성된 캔버스를 쌓아 올려 그 높이가 자신의 신장인 189cm에 닿을 때까지 그리는 것이었으나, 70점 정도 완성한 후에 10cm를 남겨 놓고 중단했다. 이 초기 연작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이 대체적으로 특출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거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쿠키를 들고 있는 키펜베르거 자신의 손을 그 유명한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보티첼리의 자화상의 이미지처럼 아주 진부한 방식으로 그렸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는 키펜베르거가 탐욕스러우리만치 왕성하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평등하게 모든 주제나 이미지를 소화하고 다뤘다는 것, 두 번째는 그의 작품이 이미지와 미디어에 충만한 시대의 예술 정신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이 작품이 제작되던 같은 시기에, 세계의 다른 한 지역, 미국은 ‘픽처 제너레이션(Pictures Generation)’2) 예술가와 1970년대 중반 전유주의(appropriationism)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미술의 경향과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이 명칭은 최근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대규모 전시에서 크게 조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키펜베르거가 미국의 동시대 작가들과 구분되었던 것은, 그가 이미지와 미디어에 관한 분석적 비평에 무관심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자주 등장했는데,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뻔뻔한 주관성과 심지어 오만한 자기중심성을 때때로 암시하고 혹은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키펜베르거는 작품 활동 초기는 화가로 알려졌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구상 화가로 국한해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회화 양식은 매우 다양하여, 초기부터 말기까지 작품의 양식을 추적해 보면 특정 양식에 머물지 않는 넘치는 창작 기질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신중함이 의도적으로 결여돼 있고, 스펙터클적으로 실패하려는 의지도 보인다. 키펜베르거는 최초의 회화 연작인 〈너희들 중의 한 사람, 피렌체의 한 독일인〉 이후, 곧 〈사랑하는 화가여, 나를 위해 그려주오(Lieber Maler, Male Mir)〉(1979) 연작에 착수한다. 초기 피렌체에서의 캔버스 작업과는 달리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극장 간판그림과 같이 반질반질하며, 매끄러운 화면이 특징이다.
이 회화 연작에서 아티스트로서의 키펜베르거의 모습이 한두 번 등장한다. 그가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정장 차림으로 뉴욕 길가 코너에 버려진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모피 장식이 있는 외투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동독의 기념품숍 앞에서 양손을 허리에 대고 서있는 자세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업이 혹시나 작가가 스스로를 유명 배우들의 영화 포스터처럼 표현하는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쯤, 이 연작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은 양복 주머니에 꽂힌 펜이나, 거리에 팔짱 낀 남자들의 뒷모습과 같은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연작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가치와 의미에 관한 어떤 안정적인 분류 체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 그 길거리에 서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의 남자들과 펜들이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키펜베르거에 못지않게 흥미롭고 매력적이라는 것은, 아티스트란 익명의 대중보다 더 재미있을 것이 없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2009년 회고전 당시 MoMA 2층 아트리움에 설치된〈프란츠 카프카의 ‘아메리카’의 행복한 결말〉 1991

‘나쁜’ 회화, 나쁜 화가?

키펜베르거는 수없이 많은 회화를 남겼는데, 이중에서 대부분은 구상 회화다. 그리고 일부는 서투른 구성과 갖가지 색과 형식이 뒤섞여 충돌하는, 심지어 미완성으로까지 보이는 화면을 드러내어 이른바 ‘나쁜(bad)’ 회화로 보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 회화 가운데 상당수는 너무 깊이 암호화되어 난해할 수도 있지만 일종의 ‘농담(joke)’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 동료 화가인 알버트 욀렌(Albert Oehlen)과의 초기 합작인 〈카프리의 밤에(Capri by Night)〉(1982)는 이탈리아의 유명 리조트 타운의 이름을 본 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1960년대 미국에서 서민층을 위해 저렴하게 출시된 스포츠카 ‘카프리’를 칙칙한 갈색이 감도는 살색 물감에 오트밀을 섞어 두텁게 표면을 칠했다.
또한 키펜베르거는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주제조차도 서슴지 않고 회화의 주제로 선택하기도 했다. 〈고인이 된 어머니의 새로운 문제와의 귀환(The Return of the Dead Mother with New Problems)〉(1984)이라는 작품에서는 고속도로에서 앞에 가는 트럭에서 침목이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의 어머니는 가슴과 손에 커다란 바위를 마치 과일이나 감자인 듯 들고 있고, 얼굴은 블루베리의 파란색으로 물든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1986년의 작업에서 그는 아주 드물게 추상화를 그렸다. 동심원의 형태에 〈문제적 관점: 네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네 머릿속에 있는 문제 발생자가 문제다(The Problem Perspective. You Are Not the Problem, It’s the Problem-Maker in Your Head)〉라는 제목을 캔버스에 명기한 작품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 키펜베르거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자를 그림에 삽입하여, 작품의 조형 요소를 통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유추할 수밖에 없었던 관람객에게 일종의 탈출구를 제공했다. 즉 보는 사람이 판독하거나 음미할 수 없는 형태와 색이 ‘문제 발생자(Problem Maker)’ 이상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주제(심지어 자신의 죽은 어머니까지 포함하여)와 형식에서 신성함을 거부한 것은 키펜베르거의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modus oper-andi)을 시사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때때로 그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말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다. 1987년 키펜베르거는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1972년에 제작한 추상 회화를 구입해 〈Model Interconti〉라는 제목의 테이블로 재탄생시켰다. 이 테이블 작품에서 수직으로 걸려 있던 리히터의 회화가 수평으로 눕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이유 자체를 뒤흔들어, 아무런 기능이 없었던 미적 오브제가 커피 컵이나 책을 올려둘 수 있는 평범한 용도의 테이블로 변환된 것이다.
이 작품을 보다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키펜베르거’ 작업이 이 작업의 재료가 된 리히터의 오리지널 회화의 가격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사실은 기존 미술시장의 가치 평가 및 가격 체계를 효과적으로 뒤엎은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특별한 ‘예술적(artistic)’ 변환은 키펜베르거가 지그마 폴케, 안젤름 키퍼, 리히터와 같은 독일의 이전 세대의 대가들에게 대한 일종의 ‘오이디푸스’적 굴욕전-말살이 아니라면-이라고 할 만한 더 큰 정신적 프로젝트의 전조였던 것이다.
안젤름 키퍼는 초창기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나치의 승리 구호인 ‘지크 하일(Sieg Heil)’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퍼포먼스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곧 이 작품은 논쟁의 축에 서게 되었다. 이렇듯 큰 물의를 일으킨 이 미술사적 전례에 대해 키펜베르거는 〈세상 최고의 의지로도 스와스티카를 볼 수 없다(Ich kann beim besten Willen kein Hakenkreuz entdecken)〉(1984)로 응수했다. 이 그림에서 온갖 막대기 같은 형태가 뒤엉킨 모양은 어쩌면 나치의 표상인 스와스티카(만자, 卍)를 연상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하다. 또한 이것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rematism)를 암시하기도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전체주의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표면은 모노크롬 회화의 대표색인 흰색 검정 회색의 둔탁하면서도 강렬한 색채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그 위에 소용돌이치는 선을 가미한다.
이 작품에 대해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키펜베르거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명명함으로써, 과거의 기호를 금기함으로써 억제하려고 하는 역사의 공식적인 언급을 되돌아 볼 계기를 제공했다. 키펜베르거는 스와스티카를 금기시하게 만든 역사적 교훈에 의문을 제기하며, 과거사를 다루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확신을 풀어 헤쳐 버린다.”3)
키펜베르거는 특별히 정치적인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과거를 말소하는 것과 기억하는 행위에 대해 완강한 태도를 견지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키펜베르거는 대중들이 역사를 지우는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사했다.
“베를린 장벽은 독일 역사의 일부다. 이제 장벽의 일부만이 포츠담 광장에 남아 있으나,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장벽을 뚫고 걷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역사란 느껴야 할 무엇이다. 처음에는 나치가 있었고 그리고는 공산주자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벽을 무너뜨리고 참 똑똑하게도 독일 역사의 일부분을 교묘하게 제거한 셈이다. 베를린 장벽은 보존되었어야만 했다. 우리는 그리스에서처럼 발굴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의 역사란 바로 우리 발치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 보이스는 순수하게 미학적인 관점에서 베를린 장벽은 7cm 더 높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기뻐했으나, 이것은 역사를 대하는 그릇된 방식이다.”4)

‘실패한’ 조각가

1984년 키펜베르거는 첫 번째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독일 쾰른의 막스헤츨러갤러리(Max Hetzler Gallery)의 〈페터: 러시아적 입지(Peter: The Russian Position)〉전에서 입체 작품을 선보였다. 독일어에서 ‘페터(Peter)’는 영어에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대상을 총칭하는 말 ‘아무개(thingamajig)’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페터〉 연작은 새롭게 만들어진 요소들과, 기능적이면서 다른 물체나 형상을 지시할 수 있는 발견된 물건들을 새롭게 조합한 결과물로 이상하리만큼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업이다. 이 연작의 작품들은 고도로 절제된 방식으로 공간-형상, 촉각적 질감-시각적 인지, 기하학적 측면-관능성, 초현실주의-미니멀리즘과 같은 현대조각에서 시도되어 온 본질적인 문제와 해결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다소 모호하고 불안정한 방식이라 할지라도 넓은 범주에서 도널드 저드나 로버트 모리스, 리처드 아트슈와거 등의 잘 알려진 작품들이 얼마나 쉽게 인식되는 ‘양식(styles)’화가 돼버렸는지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대다수의 그의 조각 작품들은 오랜 기간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미하엘 크레버(Michael Krebber)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조각 역시 다수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서툴러 보인다. 미국 작가 마이크 켈리(Mike Kelley)는 “키펜베르거는 작품 제작의 질적인 부분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키펜베르거는 실패의 아우라를 지닌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라고 언급했다.5) 이러한 언급은 키펜베르거의 실패가 그의 기술이나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모순과 불일치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키펜베르거의 조각 제작에 대한 노력은 그의 최대 걸작 〈프란츠 카프카의 ‘아메리카’의 행복한 결말(The Happy End of Franz Kafka’s ‘Amerika’)〉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1991년에 그는 별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프란츠 카프카의 미완성 유작 《아메리카》(카프카 사후 1927년 출판작)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여 완성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키펜베르거는 소설의 한 장면인, 주인공이 오클라호마의 거대한 고용센터에 있는 모습을 수십 세트의 탁자와 의자로 구성된 대규모의 설치 작품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페터’ 조각들과 마찬가지로 일부의 가구들은 수집된 것이고, 나머지는 새로 만든 것이었다. 모두 농구장 크기로 축소된 축구장과 같은 녹색 바닥 위에 배열되었다. 카프카의 이야기 속에서 고용 면접 장면과 농구 경기장의 설정을 합성한 것은 이 두 상황이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간의 만남과 경쟁이라는 특징을 암시한다. 키펜베르거는 이 거대한 작품을 1994년 로테르담에서 최초로 설치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5년 후인 2009년 MoMA에서의 미국 회고전 당시 이 미술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공 공간인 2층 아트리움에서 설치되어, 방문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비록 관람객들이 카프카의 원작을 모르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웅대한 오페라적 스케일로 펼쳐진 철저한 ‘진부함’ 그 자체로서의 장면은 보는 이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 모두가 빠져나올 수 없는 그것, 즉 지극히 관료화 행정화된 모더니티 사회의 스펙터클을 상기시켰다.

결말을 향해서

사실 불편함과 불안함은 키펜베르거의 작품을 접하는 경험의 근본적인 일부이다. 그리고 경험의 상당 부분은 작가가 기꺼이 선택했던 자아의 다양한 변장의 모습에 순종함으로써 촉발된 것이며, 때때로 그 모습들은 자기찬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화상은 언제나 키펜베르거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의 말년에는 더욱 두드러진 ‘문제(problem)’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980년 말, 이미 신체가 비대해진 키펜베르거는 자신을 그 유명한, 크고 흰 아랫 속옷만 걸친 늙은 피카소의 이미지로 묘사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96년에 작가는 난파와 생존 그리고 식인 행위 등의 실화에 근거한 것으로 알려진 테오도르 제리코의 기념비적인 회화 〈메두사의 뗏목〉(1818~1819) 속의 인물들을 한 명 한 명씩 아틀리에에서 연기하면서, 부인 엘피 세모탄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초년에 배우가 되기를 원하기도 했던 키펜베르거는 언제나 드라마틱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사진들은 16점의 작품으로 도출되었으며, 이 사진 이미지들은 다채로운 색조와 붓질이 융합된 회화적 결과로 표현되었다. 왜 그가 〈메두사의 뗏목〉을 선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한 키펜베르거는 삶과 죽음, 휴머니티와 야만주의, 영웅주의와 광기가 조합되어 있는 제리코의 작품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 즈음에 그는 〈스파이더맨 아틀리에(Spider-man-Atelier)〉(1996)라는 설치 작품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여러 모더니즘의 방식으로 채색된 캔버스로 채워진 작은 다락방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 안에 작가 자신의 대역인 철사로 만든 웅크린 스파이더맨 조각이 자리를 잡는다. 키펜베르거는 작품에서 자기 자신이 비극적이고 영웅적이고 괴물 같은 생존자들이 될 수 있다면, 또한 만화의 슈퍼 히어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자화상 속에서 교묘하게 변화하는 모습처럼, 키펜베르거는 실로 다양한 존재였다. 그는 베를린에 전설적인 모임 및 전시 공간인 ‘키펜베르거 뷔로’를 설립했고, 식당을 경영했으며 심지어 펑크 밴드까지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집가, 출판가, 그리고 큐레이터였고, 그의 어시스턴트였던 다른 작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키펜베르거는 작업 활동에서 많은 어시스턴트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작품 제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손발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다채로운 활동은 아티스트의 역할을 꾸준하게 시도하고 확장시켰다.
키펜베르거가 작가로서 성숙해지고 있을 때, 예술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지배하고 있던 인물은 요셉 보이스였다. 키펜베르거에게 보이스는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향력이 강한 교사이자 샤먼이었다. 젊은 예술 키펜베르거는 이 스승의 존재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을 광대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는 신성함을 거부하고 권위를 훼손하면서,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실패를 통해 기존 예술을 새롭게 정의해 나갔다. 그러나 비평가 디트리히 디데리히슨(Diedrich Diederichsen)이 논하듯, 키펜베르거는 ‘도발을 위한 예술’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가 이룩한 것은 ‘예술을 위한 도발’이었다.6)
키펜베르거가 자신의 죽음 후에 일어난 현상-광범위한 영향과 찬미-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예술적 생산(그리고 그의 삶 자체)은 열정과 열의, 냉소와 회의 모두에 똑같이 자극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평가, 신화 만들기, 그리고 제도화라는 미술 세계의 강력하고 탄력 있는 시스템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성의 권력 조직이 항상 개인보다 거대하고 더욱 강력하기 때문에, 키펜베르거는 사후에 아마도 보이스, 리히터, 폴케뿐만 아니라 미국의 미니멀리스트들, 개념주의 미술가들과 같은 그의 선배들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그를 따랐던 많은 젊은 작가들, 예를 들어 마이클 크레버와 코지마 폰 보닌(Cosima von Bonin)과 같은 독일 작가들이 견고한 중견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사실에서도 그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
키펜베르거의 삶과 경력이 아주 짧았다는 사실은 그의 유산에 이익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노년에 빠지게 되는 권태나 침체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반 고흐 혹은 그보다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극적 예술가’라는 강력한 신화는 포스트모던 해체의 맹습에서 살아 남았고, 그것은 바로 지금 키펜베르거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거푸집이 되고 있다.
우리는 각 세대에서 미술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적어도 한 명의 예술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설령 그 예술가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서 점점 팽창되는 신화가 될지라도 말이다. 20세기 후반 미술사가 여전히 지나치게 논쟁적이고 아직도 쓰여 갈 것인 한, 키펜베르거는 그곳에서 중심적 위치를 지속적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며, 앞으로도 많은 재발견들이 이루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은희 2009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커미셔너 인터뷰

<Van Gogh the Midday Sleep and the Thai  Farmers> Photograph Video 16min 2008

“페미니즘 미술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은희 2009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커미셔너

art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개최를 축하한다. 먼저 행사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
양은희(이하 양)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성작가들이 모여 연례전 형식의 전시를 하다가 야심차게 국제 규모로 키워낸 비엔날레다. 국내 규모로 2004년에 시작해 2회를 치렀고 국제전 형식으로는 2007년에 이어 이번이 2번째다.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여성미술 비엔날레’라는 자부심이 크다. 올해의 본전시는 ‘유동적 내부’ ‘개인적 영역’ ‘갈등하는 공간’ 등 3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된다.심리적 영역에서 사회적 문제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의 주제를 다룬다.
art 이번 비엔날레의 지향점은?
국내외 여성작가의 네트워크 강화에 초점을 두었다. 지역과 글로벌 미술계의 관계를 점검하고자 했다. 이 관계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창의력’이다.
art 어떤 작가들이 참가하는가?
본전시에는 26개국 101명의 여성작가가 참여한다. 유명세나 경력,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한 작가를 선정했다. 주디 시카고와 같은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작가와 파라스투 포루하와 같이 비서구권 출신의 작가가 함께 참여한다. 연령도 갓 대학원을 졸업한 20대부터 88세 고령까지 다양하다. 조율전에는 캐롤리 슈네만, 수퍼플렉스 등 주목할 만한 작가가 많다. 뉴욕 자메이카아트센터의 한행길 큐레이터가 기획했고 여성작가와 남성작가가 5:5 비율로 참여한다. 참여전은 비엔날레를 후원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art 이전 행사에 비해 해외 참여 작가의 수가 대폭 늘어나 보인다.
참여작가의 과반수 이상이 해외작가고 그 중에서도 아시아 지역의 작가를 많이 포함시켰다. ‘가까이’ 있는 지역과의 연대를 위함이다. 수티라트 수파파린야 큐레이터가 아시아 작가를 많이 선정했다. 특히 이번에는 중국 본토에 가려진 대만작가와 근래에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란작가가 많이 참여한다. 역사의 변덕으로 인한 아픈 기억을 가진 곳들이다.
art 전시장소가 일반적인 미술관이나 전시장이 아닌 듯하다.
주전시장으로 쓰이는 인천아트플랫폼은 근대 개화기의 치외법권지역을 복합문화단지로 재조성한 곳이다. 역사적 공간인 제물포구락부 인천기상대 등도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이곳들에 장소특정적인 작품들이 전시될 것이다.
art 커미셔너를 맡은 소감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삶에는 순환과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다. 1996년 최초로 여성작가들이 만든 뉴욕 A.I.R화랑에서 인턴을 했고 페미니즘 미술이론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여성미술비엔날레를 맡는다. 잊혀가고 있던 페미니즘 미술을 다시 살펴보게 되어 과거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딸들은 현대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추구하고 있다.

여상희 <Untitled> 2008

양은희 씨는 영문학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전공하고 뉴욕시립대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서울 광주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현대미술사연구》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등의 학술저널과 《아트아시아퍼시픽》 《아트인컬쳐》 등의 미술잡지에 기고해 왔다. 뉴욕미술여행에 관한 《아트앤더시티》를 집필했으며 역서로는 《기호학과 시각예술》 《개념미술》 등이 있다. 서울대 이화여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Sali Taylor <Jump> 2007

 

2009 August Special - 제주미술을 다시 보다

2005바람예술축제 중 최문수의 설치 작품 전경 바람예술축제 기획자 김해곤

제주미술을 다시 보다
확장과 토착의 변증

글|김유정·미술평론가,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 큐레이터

오늘의 제주미술은 그야말로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결과다. 근 100년의 역사를 짊어지고 걸어온 자취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더불어 ‘바람의 땅’이라고 부르는 화산섬에 제주도립미술관이 건립된 것은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지역보다도 풍토적인 매력이 더한 제주도에 전체 인구 대비 화가들의 수효가 많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세계사적으로 제주를 바라보면 그 의문은 쉽게 풀린다. 제주는 중세의 세계 제국 몽골의 지배 아래 강제로 북방 문화가 이식되기도 했고,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유배지로서 정치의 1번지가 되기도 했다. 섬은 탐관오리의 착취와 외세의 침략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신음하면서 목 놓아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제주인들이 섬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민중항쟁으로 맞선 적이 몇 번이던가. 비록 그때마다 항쟁의 결과는 처참했고 지배자의 약속은 지켜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제주인들은 파도처럼 일어났다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적도(赤道)에서부터 발원한 쿠로시오(黑潮) 해류는 남방 문화를 실어 왔다. 남태평양의 길목이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빈번하게 표류하는 제주인들이 늘었고, 이 해류의 영향 아래 놓인 국가들의 표류자들은 역으로 한라산 자락 해안에 닿았다. 이 물길은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 대만 중국 베트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해상 실크로드에 다를 바가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표류자들에 의해 서로의 문화가 교차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의 제주는 감옥이었다. 광해군을 비롯한 여러 왕족이 이곳에서 죽었다. 당쟁에 염증을 느낀 유배인들이 제주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대개의 유배인들은 북쪽을 쳐다보며 복권되기만을 기다렸다. 추사 김정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제주인들을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기막힌 역사도 있었다. 특히 여성과 암말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여 섬 밖으로 못 나가게 했던 출륙금지의 시간이 무려 200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인구와 말의 수효를 불리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잠녀(潛女, 해녀)들의 출가(出稼, 해외진출)가 늘었고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그곳의 현금과 문화였다.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식민지 정책으로 제주인들의 일본 진출을 부추겨, 일본 정기 여객선이 제주도를 순회하면서 일본에 부족한 노동력을 충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기에는 제주 곳곳에 결7호 작전의 요새가 구축되어 일본 본토 방어의 최전선이 되기도 했다. 한편 섬은 미국의 세계 체제 재편을 위한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수만의 제주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4.3민중항쟁이 바로 그 결과였다. 결국 냉전 논리로 점철된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는 신식민지로 덧씌워졌고,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독점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확고하게 고착되었다.
제주는 어느 지역보다도 세계 체제에 바람 타는 섬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술의 내용을 풍부히 해주었고, 미술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일본과 지리 문화적으로 가까운 것도 예술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또한 제주 토착민인 고, 량, 부 3성을 빼고 약 40여개의 대성(大姓)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도 제주의 문화적 토양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지점이다.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장지에 혼합재료 97×147cm 2007

제주미술의 정착과 흐름

제주미술의 역사를 거칠게 구분하면, 제주미술 1세대는 해방 전 일본에 유학한 화가들과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세대는 한국전쟁 후 서울에서 수학한 후 1960~70년대 활동했던 세대를 말한다. 제주미술 1세대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제주 경제 상황이 악화된 가운데에도 청운의 뜻을 품고 미술을 위해 유학길에 오른 사람들이다. 1930년대 일본의 노동자로 진출하는 제주인들의 수가 늘면서 제주와 일본과의 거리는 문화적으로 가까워졌다. 대부분 오사카에 연고지가 있는 이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원용식 김광추 장희옥 고성진 송영옥 변시지 양인옥 박태준 조영호 등이 그들이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해방 기간은 미군이 남한을 재점령함으로써 새로운 신식민지의 기로에 접어드는 시기다. 이때 제주를 인연으로 삼으려는 화가들이 하나 둘 입도(入島)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화가가 박노사와 이석주다. 박노사는 1946년 5월 20일부터 25일까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돌하르방> <풍경> <인물> 등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가졌는데 소위 육지 사람에 의한 제주도에서의 첫 유화 개인전이었다. 사실 육지 화가들이 제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해방 공간의 정국이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이석주 박노사 등 화가들이 제주에 입도한 것도 1946~47년경이었으니 미군정의 좌익 탄압의 강도가 높아가는 시기였고, 그들은 제주 4.3민중항쟁 발발 직후 조용히 제주를 떠났다. 그후 이석주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김인지는 1948년 제주인으로서는 처음,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0점의 제주풍물을 그린 유화작품으로 <김인지 양화개인전>을 열었다. 김인지는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상 제주도가 전라남도에 속했기 때문에 전라남도 최초의 조선미술전람회 양화부 입선자가 되었다. 그는 3회의 선전 입선을 통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그의 개인전은 제주미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제주미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시기였다. 바다를 건너온 피난민은 1951년 말에 이르러 15만명에 달했다. 제주도로 피난 온 예술인들을 보면, 해방정국의 정치 체제에 동감했거나 음과 양으로 이승만 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임을 무시할 수가 없다. 피난 온 미술인으로는 이중섭 장리석 김창렬 최영림 홍종명 구대일 옥파일 최덕휴 이대원 등이 있다. 그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임무를 띠거나 피난민으로서 어렵게 살았던 화가들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주에 목가적인 미학을 이식해 놓고 간 사람들이다. 이들 중 제주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화가는 홍종명이다. 홍종명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제주 학생으로는 강태석 현승북 김택화 등이었다. 또한 피난화가 구대일 옥파일 이대원 등도 제주 한국보육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화가들, 그리고 해방공간에 제주에 숨어든 화가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화가들이 제주미술에 끼친 영향은 매우 이채로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가 결성되어 제주미술의 조직이 자리잡는 1950~60년대, 제주미술인들은 공교롭게도 반공 문화전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경험은 작가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독재체제에 순응했거나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시대적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역사는 분명 순수예술을 표방했으나 사회적으로는 체제에 동조했던 한국미술계의 큰 맥락과 동일하다. 또한 초기 제주 미술계에 교육 행정가 등 사회 지도층 인사가 포함된 당시의 현실로 보아 제주미술이 지배 체제와 긴밀한 관계를 끊을 수 없었던 사실 또한 분명했다. 체제와의 긴밀한 관계는 체제의 지원으로 이어지면서 관변 미술의 의미를 띠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피난화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은 학생들이 어느덧 성장해 정규 교육을 받고 제주로 귀향하면서, 1960년대의 제주미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정식 미술교육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했던 미술인이나 서예가들도 함께 미술의 영역으로 포괄했던 기존의 미술계에, 전문적으로 공부한 젊은 미술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제주미술의 새로운 전환기를 예고하면서 제주미술의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1973년 제주대에 미술교육과가 개설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문기선 양창보가 주축이 되었고, 변시지 부현일 허민자 등이 미술교육과 교수로서 이를 이끌었다. 전문미술교육기관의 탄생으로 제주미술의 사회적 확장과 미술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미술 교사가 양성되면서 중등학교 미술반이 조직되었고, 빠르게 제주 미술인 인구가 증가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던 작가 김영갑의 사진작품

1970~80년대 형식 이념 미학적 실험의 고착

1970년대 주요 작가들은 한국미술의 새로운 기운이 필요함을 느낀 세대답게 일본미술의 영향보다는 서구미술의 흐름을 한국적으로 변형해 보려는 실험적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 분단 모순이 낳은 갖가지 현상들은 70년대 말 미술계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반서구(反西歐)라는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미몽에서 깨지 못한 현실적 비판의식은 ‘한국성 추구’라는 고답적인 전통의 재해석에 경도된 측면이 없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미술의 아성을 쌓으며, 형식 실험이라는 형식주의 미학의 확산을 낳았다. 1977년 창립된 관점 동인이 시대에 조응하는 추상주의를 도입한 것은 제주미술의 형식적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다. 즉 ‘제주적 내용’을 ‘형식적으로 변용’해 보자는 노력의 일환으로 강광 강요배 오석훈 고영석 백광익 김용환 정광섭 등 당시 2~30대의 젊은 미술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통일된 미학 이념을 주장하기보다는 독자적인 표현을 통해 제주미술의 확장을 꾀했고, 후에 이들의 영향으로 제주에 추상미술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장르별 단체가 창립되는 과정에서 제주미술은 더욱 분화되었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미술 활동으로 페미니즘 미술이 빗장을 열었고, 한편으로 민중미술이 제주에 정착되면서 제주미술계는 미학적 이념적으로 양분되기도 했다. 여성미술가 단체는 고경희 김연숙 등 제주 신성여고 동문 그룹인 ‘에뜨왈’이 주도했다. 동시대 제주에 민중미술을 토착화시킨 것은 1988년 창립된 ‘그림패 바람코지’였다. 강태봉 김수범 김유정 박경훈 부양식 등 그림패 바람코지 회원들은 체제를 향해서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민중을 향해서는 따스한 삶의 언어를 보냈다. 삶과 노동의 현장을 향하여 미술의 민주주의적인 소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미술터는 이제 전시장이 아니라 땀과 눈물이 생생히 살아 숨쉬는 일터였던 것이다.
이 시기 미술 공간들도 늘어났다. 1988년 8월 개관한 세종미술관은 제주미술을 수평적으로 다른 지역 미술과 비교하여 바라볼 수 있는 탄력적인 공간으로서, 서울과 제주, 기타 지역의 문화가 언제나 서로 호흡할 수 있도록 미술의 현실적인 거리를 좁혔다. 같은 해 개관한 제주특별자치도 문예회관 전시실은 지금까지 제주미술의 주요 발표장이 되고 있다. 한편 1989년 제주조각가회의 창립은 조각의 불모지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게 만들었고, 1993년 탐라미술인협의회 창립은 제주에 현실주의 미술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미술의 진정성 회복, 삶과 밀착된 당대 리얼리즘 미술의 추구, 민주주의적인 소통, 제주미술의 정체성 회복에 초점을 맞췄다. 1994년 제주청년작가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제주의 청년미술가들을 발굴, 지원하고 있다. 1995년 제주산업디자인협의회, 1998년 제주도옹기연구회, 1999년 한국미술협회 서귀포지부, 제주판화가협회, 2001년 제주도예가회, 2003년 제주만화가회, 2004년 제주수채화협회 등의 다양한 장르 단체의 창립은 오늘날 전개되는 제주미술의 확장된 지층을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전시는 1991년부터 개최된 <제주미술제>가 있다. 학연과 지연으로 굳게 닫힌 제주 미술계에 앙데팡당의 성격을 부여한 전시회로 창작 성향에 관계없이 제주 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독립미술적인 의미를 띤 전시였다. <제주미술제>는 한국미술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 한라미술인협회, 탐라미술인협회, 한국미협 서귀포지부의 주최로 개최되는데, 해마다 80~140명의 제주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1992년 열렸던 강요배의 <제주 4.3민중항쟁사>전은 제주 4.3을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키고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리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미술이 어떻게 역사와  만나는지, 역사미술의 전형성을 보여준 전시였다. 또한 2004년 미술평론가 김영호가 기획한 <바람의 신화 - 2004 제주현대미술전>은 제주미술의 시간적 흐름을 보여준 역량있는 전시였고, 2005년 필자가 기획한 <제주신화미술제>, 2008년 <제주작고작가미술제>는 제주미술의 주제적 접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옥선 Rich the naturalist 라이트젯 프린트 100×125cm 2007

섬의 지정학, 세계화의 교차점

현재 제주미술인 인구는 근 1천명에 육박한다. 개인, 장르 단체별로 외국, 한국화단의 교류와 진출이 눈에 띄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제주 현대미술의 시작이 근 100년의 연륜에 가까운 지금, 그 규모가 국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모습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국내외 등의 미술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섬이라는 지정학적인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미술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와 오키나와, 몽골과의 연례적인 교류전은 남북방문화의 교차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각 장르 단체별로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발리 오키나와 몽골 등과의 교류전이 열려 언제라도 제주미술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예술적인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탐라미술인협의회의 4.3미술제는 세계 평화와 반전 반핵 인권 문제의 전지구적인 연대에 부응하는 기획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한 2009년 6월 26일 제주도립미술관의 개관으로 제주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개관전 <환태평양의 눈>은 국제전 <숨비소리>, 제주미술의 어제와 오늘 전 <바람의 본향> <세계 어린이 환경미술제> <장리석기념전> 등으로 마련되었다. 개관 이 후 한 달 동안 약 1만 7천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성황을 이루고 있다. 제주도립미술관은 제주미술을 집대성하고, 제주에 세계미술의 진출과 확장, 그리고 응집과 연결을 꾀하는 소통의 공간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태평양을 마주한 섬이자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착지로서 제주는 세계화의 흐름에 비켜갈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이는 이미 중세부터 예견되었고, 국가 정책으로도 이를 장려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 제주미술은 섬이라는 공간을 넘어 서면서도 섬의 색채와 향기를 담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화라는 이름 위에, 다시 개인성과 풍토 그리고 계급과 민족적인 리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려내는 형상이 어떠하든 섬이기에 오히려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 섬의 역사야말로 세계를 가로지르는 시간의 가르침이기에 전방위적으로 열려 있는 세계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지구적 세계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곧 제주미술의 확장과 토착의 변증법적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닌가.

이타미 준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호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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