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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9.07

Abstract

특집 제53회 베니스비엔날레 세계 최고 권위의 베니스비엔날레(6월 7일~11월 22일)가 문을 열었다. 114년 역사의 베니스비엔날레는 여전히 '비엔날레의 모태'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근자의 세계 경제 위기와 미술시장의 추락 등 미술 기상도의 변화 속에서, 이번 비엔날레는 오늘의 미술을 어떻게 반영하고 내일의 미술을 어떻게 예견하는가. 예술감독 다니엘 번바움(Daniel Birnbaum)은 '세상 만들기(Making World)'라는 주제로 글로벌 시대의 '예술 만들기'를 새롭게 제안한다. 특히 이름 있는 '스타 작가'보다는 사회적 공공적 비평과 큐레이션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을 대거 내세웠다. 한편 최고 국가관에 주는 황금사자상은 브루스 나우만의 작품을 전시한 미국관에, 아르스날레의 본 전시 참가 작가에게 주는 황금사자상은 토비아스 레베르거에게 돌아갔다. 본지는 베니스비엔날레 프레스 오픈에 초청을 받았다. 현지 취재와 전문가들의 리뷰로 특집을 꾸몄다.

Contents

표지  폴란드관의 크리치토프 보디츠코 <게스트> 2009 courtesy of the artist,
Profile Foundation and Zacheta National Gallery of Art, Warsaw

에디토리얼 비엔날레 감상법_김복기 

핫피플 김영호_장승연

프리즘
    정점식 화백, 대구화단의 큰 별이 지다_신용덕
    쥐 눈 속의 연꽃, 완장 찬 순수의 삽질_노순택

아티스트 아틀리에 아카이브
    이길래_이선화


김순응의 줌인 아트마켓 5
    약탈문화재, 몰수미술품


포커스
    엄태정|배형경_최태만
    심문섭_다테하라 아키라
    짐 람비|지니서_유진상
    원문자|이승철_김백균
    오인환_송미숙


특집 제53회 베니스비엔날레
    (1) 영웅과 신들의 전쟁은 끝나는가_이용우
    (2) 총감독 다니엘 번바움 인터뷰_팀 그리핀
    (3) 국가 파빌리온 하이라이트 15_편집부
    (4) 베니스의 미술인들, 말! 말! 말!


아웃 오브 코리아
    김진숙, 환상적 에로티즘_김홍희


아트 포럼
    동방의 불빛, 아시아 미술의 비전을 비추다_윤진섭


나의 얼굴 이샛별

이미지 링크 김병훈

미술 속에 ㅁ가 있다 3
    글씨, 이미지와 문자, 그 불가분의 관계_신지영


월드 아트
    아트바젤, 진정한 컬렉터 시대의 귀환_김정연 


전시 리뷰
    경계|백남준|Alogon Affair|일본현대미술
    이나경|요철|허욱|남대웅|데이비드 코티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송재호|이제형|이대철|김문경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2009아트바젤, 진정한 컬렉터 시대의 귀환

시카고의 리차드그레이갤러리 부스 광경

진정한 컬렉터 시대의 귀환

글|김정연·CONCREATE 대표

올 여름 극장가에 터미네이터가 돌아왔다고 한다. 터미네이터는 벌써 네 번째(25년사이) 돌아왔는데, 미술시장에서 사라진 컬렉터들은 언제 다시 돌아오려나? 국내외적으로 1980년대 후반에서 초반에 걸쳐 미술시장에 큰 호황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것이 2000년대 중반. 무려 10년이 훌쩍 넘게 걸렸다. 만약 지난 가을 사라진 컬렉터들이 이번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현재 미술계에서 일하는 인구의 반 이상이 당장 짐을 싸야 할 것이다.

비루노비숍버거갤러리가 선보인 앤디 워홀의 <대형 회고작> 1979

기대 이상의 호황, 컬렉터들이 돌아오다

지지 않을 듯 활활 타오르기만 하던 미술시장이 지난 가을 금융 위기를 정점으로 하향곡선을 이루기 시작했다. 겨울과 봄을 지나며 더욱 내리막을 달리는가 싶더니 올해 6월 다행이 진정 분위기에 이른 듯하다. 성급한 전망일 수도 있지만 작년 가을 이후로 계속된 미술시장의 위기감은 10월에 열린 런던의 프리즈아트페어, 12월 아트바젤마이애미는 물론 3월 뉴욕의 아모리쇼까지 이어졌다. 금융 위기 이후 미술시장에서 컬렉터들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러나 지난 6월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아트바젤(Art Basel 40)은 미술 시장의 부활을 미리 환영하는 듯 한껏 흥분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예년의 호황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오프닝 첫날부터 많은 참가 화랑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 40회를 맞은 아트바젤은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품 견본 시장으로서 전 세계 미술시장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의 막강한 권위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트바젤에서 이루어지는 미술품 거래 가격은 향후 세계 미술시장의 거래 지표를 형성하며,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적인 화랑, 딜러, 컬렉터, 미술 관계자들이 모이는 연례행사이다. 올해도 1100개의 참가 지원 화랑 가운데 심사를 통과한 29개국의 300여개 화랑이 아트바젤에 참여했고, 2500여명 이상의 작가 작품을 소개했다.
지난 가을 이후로 유수의 국제 아트페어는 물론 경매회사들마저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상업화랑이나 경매회사는 물론 미술관들도 자금난을 이유로 구조 조정에 들어갔고, 결과적으로 미술시장은 물론 미술계 전반에 실직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유발한 것은 단 하나, 바로 미술시장의 에너지인 컬렉터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은 현금 거래를 기본으로 한다. 수십억, 혹은 수백억대의 작품 역시 현금 결제를 통해서 거래하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2008년 9월 2일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불안한 금융시장은 많은 컬렉터들에게 금전적 손실을 입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현금 자본에 의존하고 있는 상업화랑의 경우 컬렉터들의 수혈이 끊기는 것은 치명적인 직격탄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6월 8일 아트바젤의 프리뷰 전날, 바젤공항은 넷젯(Net Jets, 공동 소유 개인 전용기)을 타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컬렉터들로 북적였고, 프리뷰가 열린 6월 9일 당일 오후에는 벌써 매출이 2008년을 앞선다는 과장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는 작은 성공에 크게 감동한다. 그러나 이번 아트바젤의 분위기는 분명 그 이상이었다. 컬렉터들이 돌아온 것이다.
프리뷰 첫날 만난 뉴욕의 피터블럼갤러리(Peter Blum Gallery)의 디렉터 시몬 수발(Simone Subal)은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미친 듯이 팔려 나간다. 작년보다 훨씬 성공적이다.” 이것은 비단 피터블럼갤러리만의 경우는 아니었다. 첫날부터 대부분의 화랑들이 성공적인 판매 성과를 알렸고, 바젤발 《아트 뉴스 페이퍼(The Art Newspaper)》는 ‘프리뷰 세일즈가 모든 기대를 물리치다’라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혹시나’하는 기대감과 더불어 ‘그래도’라는 우려감이 없지 않았지만, 외관상으로는 지난 2008년과 다를 바 없이 잘 차려 입은 세계의 부호들이 미술품 쇼핑에 한껏 빠져 있는 듯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프리뷰에 나타나서 아트바젤을 들썩이게 한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는 데이비드즈바이너갤러리에서 네오 라우흐(Neo Rauch)의 1998년 작품 〈Etappe〉를 100만 달러(한화 12억원 이상)에 구입했다. 그 외에도 런던 화랑 사디콜즈(Sadie Coles)는 존 커린의 〈회색 소녀〉를 45만 달러(56억원)에, 리손갤러리는 아니쉬 카푸어의 신작을 100만 달러에 판매했으며, 뉴욕의 마리안굿맨갤러리는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 〈뒷발로 선 세상〉을 14만 유로(한화 2억5천만원)에, 루링오거스틴갤러리(Luhring Augustine Gallery)는 크리스토퍼 울의 〈무제〉를 37만 달러(46억원)에 판매하는 훌륭한 성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일련의 판매 성과는 프리뷰 첫날 단 하루 매출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 아트바젤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화제의 작품은 미술계의 슈퍼스타 다카시 무라카미와 세계적인 음반 프로듀서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공동 제작한 〈단순한 것들〉이다. 파리에서 온 엠마뉴엘페로탱갤러리(Emmanuel Perrotin Gallery)가 소개한 이 작품은 다카시 특유의 몬스터 캐릭터가 입을 쩍 벌리고, 그 속에 진짜 금은,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장식한 미니어처 펩시콜라캔, 케첩 병, 운동화, 콘돔, 과자 봉지 등이 놓여 있는 조각품이다. 프리뷰 오픈 31분 만에 판매 종료된 2백만 달러(한화 25억원)짜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네 명의 컬렉터들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아트바젤과 올해 행사의 차이는 베니스비엔날레의 개최 여부와 직결된다. 작년의 아트바젤은 축구경기에 밀린 듯했지만 올해는 오히려 베니스비엔날레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마치 축소된 베니스비엔날레를 보는 듯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프리뷰가 아트바젤의 한 주 전에 열렸고, 그 곳에서 목격한 사람의 50% 이상과 바젤에서 재회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의 식상한 인사말이 바로 “바젤 가세요?”일 정도이다.

디자인마이애미/바젤에 참가한 서미앤투스갤러리 부스 광경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바젤 가세요?”

어쨌든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형 전시 형태로 소개되는 작품들의 상당수는 이곳 아트바젤에서 바로 구입이 가능하다. 아르헨티나 출신 젊은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는 베니스비엔날레의 주전시장 내에 대형 홀을 가득 채운 설치 작품을 선보였으며, 이 설치 작품의 작은 버전이 뉴욕의 타냐보나크다갤러리(Tanya Bonakdar Gallery)에 걸려 있었다. 밀라노 화랑 마르코니(Marconi)는 비엔날레 본 전시장에서 애니메이션과 설치 작품을 전시한 스웨덴 출신의 젊은 작가 나탈리 뒤버그의 작품을 화랑 부스와 아트언리미티드(Art Unlimited)에서 동시에 소개했다. 쾰른의 케베닉갤러리(Kewenig Gallery)는 실제로 현재 비엔날레의 러시아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바젤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유사한 경우로 비엔날레 본전시장 전면을 꾸민 존 발데사리, 미국관 대표작가 브루스 나우만, 독일관 대표 리엄 길릭, 영국관 대표 스티브 맥퀸의 작품도 눈에 들어왔다. 한국관 대표 양혜규의 작품 역시 예외가 아닌 듯 국제갤러리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아트 뉴스 페이퍼》는 심지어 ‘베니스비엔날레로부터 아트바젤로’라는 섹션을 만들어 비엔날레와 아트바젤 모두에서 소개되는 90여명의 작가의 명단과 함께 판매 갤러리 부스를 싣기도 했다. 
아트바젤에서 발견된 베니스의 여파는 비엔날레뿐이 아니다. 비엔날레 프리뷰 기간에 새로이 문을 연 사립미술관 푼타델라도가나(Punta Della Do-gana)의 개관 전시 〈스튜디오 매핑하기〉도 비엔날레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개관전 포스터를 장식한 찰스 레이, 개관 전시를 빛낸 시그마 폴케와 루돌프 슈팅겔의 초대형 회화도 어김없이 아트바젤에서 목격되었고,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작품과 거의 유사한 크기, 혹은 매우 유사한 유형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처럼 컬렉터들은 베니스비엔날레를 통해서 작품성을 검증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아트바젤에서 구입할 수 있다. 더욱이 소장하기 적절한 크기의 작품을 구입하거나 혹은 원하는 크기로 주문 제작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트바젤은 격년으로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를 더 큰 ‘매출 기지’로 이용하고, 컬렉터들을 유혹한다. 
재미있는 점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와 아트바젤 양쪽에서 큰 주목을 받은 작가들이 대부분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해 온 중견 이상의 작가라는 점이다. 예년만 보아도 미술계의 수퍼스타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은 마치 한 부스 건너 하나 있을 만큼 흔한 인기 상품이었다. 허스트가 워낙 다작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시장 내의 수요도 높았는데, 올해는 그의 작품이 희박해졌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난 가을 소더비에서 열린 허스트의 성공적인 경매 쇼 이후, 그가 소속된 가고시언과 화이트큐브는 기존의 재고 작품을 모두 털어냈다고 할 만큼 단기 집중 세일즈를 이끌어냈지만 오래지 않아 이 두 화랑이 허스트의 작품을 최고 40%까지 덤핑으로 세일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최근 시장에서 허스트의 인기가 많이 진정된 것이 사실이다. 2차 시장에서 그의 작품 가격이 하락한 것도 말할 필요 없다.
허스트 작품을 찾는 고객이 없는 상황에서 그의 작품을 어렵게 바젤까지 운송해 올 갤러리도 없거니와 특히 허스트가 소속된 화랑들 입장에서는 허스트의 작품 가격을 공공연하게 낮추어 판매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작가나 갤러리 입장에서 이미 올려놓은 작품 가격을 낮추지 않는 것은 지켜야 하는 최후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결국 거래가 거의 사라진 공황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수퍼스타 제프 쿤스나 다카시 무라카미의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장 샤오강이나 위에 민준, 정 판지 같은 중국의 스타급 작가들의 작품도 수량 면에서 확연히 줄어들었고, 나아가 중국인 컬렉터들의 발걸음 역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내공 있는 ‘클래식’ 작가들의 대거 활약

그러나 작품의 질적인 측면에서 올해 아트바젤은 작년보다 훨씬 세련되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수년 간 시장에서 홀대 받았던 클래식들이 대거 돌아왔기 때문이다. 비엔날레를 장식한 원로 작가들은 물론 도날드 저드, 알렉산더 칼더와 같은 미술사적으로 검증된 전후 현대미술 작가들이 현저히 늘어난 것이다. 특히 올해 아트바젤에서 찾은 최고의 작품은 브루노비숍버거갤러리(Bruno Bischofberger)가 소개한 가로 11미터짜리 앤디 워홀의 초대형 회화로, 1979년 제작된 이 〈대형 회고작〉은 종전에는 볼 수 없던 워홀의 최대 역작이다. 비숍버거갤러리는 마치 미술관 같은 부스 디자인에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의자를 제공했고, 부스의 한 벽을 가득 채운 이 740만 달러(한화 1,000억원)짜리 작품 앞에서 컬렉터와 관람객들이 모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 작품은 시장이 매우 좋았던 수년 전에 어느 고객이 8백만 달러에 구입한 작품으로, 이제 그보다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다시 나온 것이다.

‘일템포 델 포스티노’ 출품작,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 아토 린제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Photo: Peter Schnetz

디자인마이애미/바젤 성공, 한국 유치 추진 중

올해 아트바젤은 지난 해와 달리 디자인마이애미/바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이루어냈다. 특히 디자인 마이애미/바젤의 전시장을 아트 바젤의 바로 근처 건물로 옮기고 프리뷰를 하루 먼저 시작하게 하여 일찍 도착한 컬렉터들을 끌어 모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한국 화랑으로 유일하게 디자인마이애미/바젤에 참여한 곳은 서미앤투스이다. 한국의 도예가와 디자이너 권대섭 이헌정 장진 최병훈을 소개한 서미앤투스는 세련된 부스 디자인과 더불어, 브래드 피트와 수보드 굽타(인도 최고의 현대미술가)가 찾아와 작품을 구입하여 페어 기간 내내 국내외 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이 디자인마이애미/바젤은 2012년부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열리게 될 듯하다. 서울시와 아트바젤 조직 사이에 공식적인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서는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한 2012년부터 서울 시민들도 세계 최고의 디자인페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년과 다름없이 아트바젤 기간 동안 함께 열리는 위성 페어들, 리스트(Liste), 볼타쇼(Volta Show), 스코프(Scope Art), 솔로프로젝트(Solo Project), 핫아트페어(Hot Art Fair) 등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아트바젤의 공식적인 집계는 관람객 수가 지난 해보다 늘어난 61,000명이라고 알렸지만 위성 아트페어에서 느낀 관람객의 수는 작년에 비해 대폭 줄어들었다. 시장 상황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오픈 사흘 전에 갑작스레 전시장을 옮긴 스코프아트페어의 졸속 행정,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을 만큼 먼 외곽에 자리 잡은 솔로프로젝트의 경우 페어 조직의 책임이 더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볼타쇼의 경우 올해 시내 중심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오히려 지난 해보다 더욱 완성도를 높였는데 한국 화랑으로는 원앤제이갤러리가 참여하여 이세현의 대형 회화를 1억원에 판매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올해 바젤에서 벌어진 미술시장의 부활은 외형상으로 성공적이지만 동시에 많은 화랑들은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단 컬렉터들이 예전에 비해 저렴한 가격인데도 많은 디스카운트를 요구하거나, 구입 작품의 질적인 측면을 매우 까다롭게 고려한다는 것이다. 작가 이름의 브랜드 가치보다, 그 작가의 수작(秀作)을 골라낼 수 있는 감식안은 미술품 거래를 아주 오래한 화상이나 작품 소장을 아주 오래해 본 경험 있는 컬렉터들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아트바젤에 참여한 역사 깊은 화랑들은 어려운 시장 상황 속에서 판매를 추구하기보다 더욱 수준 높은 작품으로 화랑의 이미지를 선전하려는 경우가 부쩍 많았다. 그리고 그 진가를 인정하는 컬렉터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세현 <Between Red 85> 리넨에 유채 300×400cm 2009

컬렉터는 미술시장의 생명줄이다

양은 냄비마냥 들썩이던 미술 시장이 조정에 들어가자 역시나 투자에만 눈이 멀었던 단기 컬렉터들은 벌써 떠나버린 것 같다. 작년의 바젤은 아시아 미술시장의 거품을 반향하는 듯 동양인 컬렉터와 관람객들로 넘쳐났지만 올해 이들은 종적은 감춘 듯하다. 참여 화랑들도 이구동성으로 들떠 있는 신흥 컬렉터들이 사라지고 진정 미술을 사랑하는 컬렉터들만 남은 것을 대환영하며, 마치 오래 전 미술시장으로 돌아간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난 미술시장의 호황기가 낳은 최대 피해자는 바로 컬렉터들이다. 미술시장은 물론 기관(미술관과 재단 등)을 포함하는 미술계의 힘은 단단한 컬렉터 층이 있어야 유지 가능하다. 이들은 진정한 미술계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작가도, 화랑도, 딜러도, 경매회사도, 심지어 컬렉터들의 작품 기부와 기부금에 의존하는 미술관도 모두 컬렉터들로부터 수혜를 입지만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리던 지난 몇 년 동안 컬렉터들의 역할은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인식되었다. 오히려 컬렉터들은 호황기 동안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황당한 미술품 가격을 지불해야 했고, 인기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화랑 주인에게 잘 보여야 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밀어 넣어야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과장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컬렉터의 개인 신상이나 다른 소장 작품 정보를 기준으로 작품 판매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화랑이 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컬렉터들은 미술시장의 결정적인 에너지원임에도 불구하고 유통 과정의 종착역이라는 이유로 농락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몇 년 전 독일 쾰른아트페어에 나왔던 220만 유로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딜러와 화랑이 관련한 몇 단계 유통과정을 거치면서 며칠 사이 450만 달러짜리 작품으로 돌변했던 일화가 있다. 다행이 이 작품을 구입한 컬렉터는 250만 유로만을 지불했지만 결국 이 일화는 미술시장의 피해자가 컬렉터라는 점을 잘 시사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불합리한 유통 과정을 통해서 유입된 거대한 자본이 모두 화랑과 화상, 작가들에게 들어갔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술시장이 호황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챙긴 데 반하여 컬렉터들은 오히려 손해를 입었다. 그렇다면 컬렉터야 말로 진정한 미술시장의 피해자 아닐까?
물론 작품 구입과 재판매를 통해서 단기간 거액의 수익을 챙기는 컬렉터들도 많이 있었다. 투자를 목적으로 시장에 등장한 이 특정 컬렉터들은 반짝이는 새 상품에 현혹되었고, 작품의 소장과 판매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수익을 올린 이도, 잃은 이도 있지만 이들 모두는 미술품 가격이 가라앉자마자 흥미를 잃고 떠나버린다. 또 미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화랑과 작가들의 말만 믿고 작품을 구입한 수많은 컬렉터들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들 가운데 몇 명이 미술품을 통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까?
진정한 컬렉터는 작품의 가치를 떠나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춘 사람들이다. 올해 아트 바젤에서 1980년대 이전의 작품이 부쩍 증가하고 많은 관심을 얻은 이유는 공장에서 찍어내듯 제작되는 근간의 작품과 달리 80년대 이전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숨결과 손맛, 시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이애미의 유명한 루벨 가문은 1979년부터 지금까지 아트바젤에서만 무려 300여점이 넘는 작품을 구입, 소장하고 있다. 마이애미 시민과 관광객들은 루벨 가문의 소장품을 함께 즐기는 수 있으며, 이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은 시장의 흥망과 관계없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LA 현대미술관의 존폐 위기를 구제한 사람도 바로 유명한 컬렉터 엘리 브로드(Eli Broad)이다. 작품을 트럭으로 사서 나른다고 불릴 정도의 세계적인 컬렉터 브로드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던 LA의 현대미술관에 1500만 달러(180억원)를 기부하였고, 향후 5년간 매년 300만 달러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올해 아트바젤로 날아와 미술관 프로그램 쇄신을 홍보하고 기금 모금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브래드 피트에게 네오 라우흐의 〈Etappe〉를 양보한 사람도 바로 이 엘리 브로드이다.
이 대형 컬렉터들이 아직도 미술 시장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경제 위기로부터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결코 재산이 많다고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남아 있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예술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며 신뢰가 아닐까 싶다. 만약 올해 바젤의 성과가 미술시장의 부활을 알리는 긍정적인 신호라면 드디어 진정한 컬렉터들이 ‘돈 줄’이기보다 소중한 ‘생명줄’로 대우받는 시대가 되길 바란다. 컬렉터들의 경쟁을 유도하여 작품 가격을 올리기보다 진정 예술이 예술로 대우 받고, 컬렉터들이 지속적으로 미술계를 지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길 바란다. 이제 미술계는 컬렉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오인환展, 정체성의 언어놀이

<유실물 보관소> 466×254×241cm 2002 Copyright: 오인환

정체성의 언어놀이

글|송 미 숙

오인환은 사진, 광고, 비디오, 이벤트를 이용한 평면과 설치작업에서 작품이 구성하고 있는 영상의 효과나 시각적 스펙터클, 혹은 다양한 현대미술의 방법과 장치들의 실험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텍스트가 내포하거나 외연하고 있는 문맥의 상황 연출에 관심을 둔다. 흔히 개념미술의 범주에 속하는 그의 작업에서 일관된 텍스트는 정체성의 문제다. 정체성이란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이 말했듯이 태생부터 의식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하며 삶과 부대끼며 무의식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온전한 그 무엇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항상 진행 중에 있는 동일시의 과정(Identifying Process)으로 외부로부터 충족되어야 완전성에 이르는 일종의 결핍의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오인환의 작업에서의 화두인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타자/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성정체성과 직결된다. 한국에서의 동성애자/게이/퀴어로서의 삶은 은폐와 소외의 연속으로 제도나 체제 안에 편입되거나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와 공동체를 구성하며 감춰진 상태로 도시 사회 가장자리나 한구석에서 생존한다. 오인환은 이러한 자신의 삶과 직결되고 있는 게이의 은폐된 삶과 언어에 주목해 그들/혹은 자신 개인의 주체성과 가치관을 근간으로 작업한다. 게이의 성정체성을 비롯한 타자와 젠더 이슈는 포스트모더니즘미술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화두였다. 게이/동성애와 미술의 관계는 타자의 이슈와 맞물려 1970년대부터 대두되었으나 게이들의 주체성과 가치관에 대한 인식의 전환 및 ‘몸의 정치학’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 참여는 에이즈의 확산과 공포로 인해 1980년대 말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오인환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 1994년은 바로 이러한 게이들의 저항과 공동체 의식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로서 그 때의 상황은 작가에게 성정체성과 예술 작업 간에 연결 고리를 제공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태극기 그리고 나> 사운드&비디오 설치 2009

언어놀이-변환(trans…)의 장치

오인환의 작업에서 성 정체성이란 단순히 하나의 차이나 다름이 아니다. 그에게 다름은 극복하거나 도전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번안(Translate)되고 전치(Transpose), 변형되거나(Transform) 이동시키거나(Transfer) 아니면 소통되어야 할(Transmit) 대상에 더 근접해 있다. 문자로 빈번히 등장하는 그의 언어는 표상, 기의, 사회적 계약/관계의 수단이라는 언어의 일반적 인식의 전형과 규범을 비틀거나 도전함으로써 기표와 기의간의 차이, 혹은 데리다의 말을 빌리면 차연을 드러낸다. 차연, 혹은 다름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언어가 갖고 있는 권력이 남성, 이성애, 제도/제국의 언술, 혹은 법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며 그는 정체성의 다름을 기존의 작업 방식이나 관념적 틀을 재배치하거나 전복시키는 장치로서-가령 사진의 포커스를 의도적으로 아웃시키거나 카메라를 흔들어 찍는다든지 시각이 아닌 향이나 귀를 교란시키는 신음소리나 소음을 개입시킨다든지, 언어/문자를 사회적 미학적 전범을 부정하는 매체로 기용하여 제시한다.
레바논 출신의 문화이론가인 아민 말루프(Amin Maalouf)는 언어를 문화정체성의 중심축이라고 정의, 언어란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닌 존재의 도구라고 강조한다. 바꾸어 말해 언어의 소통이 단절된 경우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거나 대안을 찾아야만 하며 이때의 언어는 소통을 초월해 ‘생존의 도구’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입각한 작업이 오인환의 뉴욕 빌리지 보이스에 낸 ‘퍼서널 애드’다. 한국으로 돌아와 제작한 작업 중 오인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남자와 남자를 만나는 곳〉(2001~현재)은 바닥에 향 가루 작품으로 게이 바/클럽의 이름, 상호를 적는 프로젝트로 서울에서 시작된 후 베를린, 낭트, 부에노스아이레스, 코펜하겐, 산티아고, 상하이 등에서 진행된 온 고잉(On-going) 프로젝트다. 향은 전시 개최를 시작으로 불이 붙여진 후 마지막 날까지 피워진다. 전시장은 향 연기와 냄새로 진동하며 관객은 시각이 아닌 후각에 의해 프로젝트를 흡입한다. 향의 글씨는 타들어가며 바닥에 그을린 자국을 남기며 이는 시공간의 기억으로 새겨지면서 장소에 이접된 언어와 신체 사이의 관계를 은연중 드러낸다. 언어란 육체의 그것이며 말 자체가 육체의 징후라는 들뢰즈의 주장처럼 언어의 육화/물질화는 그의 다음 작업 〈콘텐츠 공〉(2001~)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우정의 물건> 사진 각 118×81.5cm 2000~

가변적 해석과 사고의 전환 제시하기

금번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에서 오인환은 이제까지의 작업을 망라한 도록과 함께 몇몇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선보였다. 전시 타이틀인 〈TRAns〉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번안(Translation), 이동(Transfer), 변형(Transformation), 변천(Transition), 전달(Transmission), 전위(Transposition) 등의 단어를 연상시키는 접두어로서 우리가 일상에서 기정사실로 인식하고 있는 정형화된 사회/문화적 코드, 고정관념이나 상황에 도전, 그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들에 대한 가변적 해석과 사고의 전환을 제시하기 위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이제까지 화두로 삼고 있는 정체성/성정체성의 의제는 게이 커뮤니티 〈이반 파티〉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참여와 ‘퍼포먼스’를 유도하는 행위 프로젝트들로서 이들은 미술뿐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 외연하는 사고, 언어체계와 방식의 패러다임 및 그 코드를 해체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일회성으로 완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프로젝트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전시를 위해 작곡가, 애니메이션 작가 등과 함께 특별히 제작한 영상작업 〈진짜 사나이〉다. 이 작품은 군가 ‘진짜 사나이’를 트랜스 풍으로 뒤집어 재편집하고 음악의 비트에 따라 가사를 가나다순으로 해체해 양분된 영상 스크린에 몇 글자씩 때리다가 마지막에 전부 채워가는 랜덤 배열로 구성되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성주의, 마초주의를 유머러스하게 전복시킨 작업이다. 이밖에 국기 게양대와 국기를 세 개의 화면으로 분리해 동영상으로 촬영한 〈태극기 그리고 나〉는 촬영자의 몸의 흔들림과 정지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신체적 고단함을 연출한 신음소리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신성함과 충성의 표상이자 기표인 국기(Flag), 즉 공적/제도 체제의 이미지를 개인의 의미인 사적 수용의 관계와 함께 연출한 프로젝트다.

제주도립미술관 개관기념전 전시총감독 김영호를 만나다!

제주도립미술관 개관기념전 전시총감독 김영호를 만나다!

글|장승연 기자

수려한 천혜의 자연 경관을 보유하여 국내 최대 관광지로 발전한 제주도. 최근 이 곳은 6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개최되고, 9월 세계델픽대회가 열리는 등 정치 경제 및 문화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성장과는 별개로, 그동안 단순한 재미만을 내세우는 가지각색의 이색 박물관들이 제주도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상황 속에 문화 인프라의 내실에 대한 미술계의 아쉬움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여름 드디어 제주도에도 미술관 시대가 본격 도래했다. 지난 6월 26일 ‘제주도립미술관’이 개관한 것이다. 먼발치에 한라산이 보이고, 푸르른 녹색 자연에 둘러싸인 제주시 연동에 들어선 제주도립미술관은 거대한 인공 거울 연못 위에 자리한 현대식 건물로, 첫 인상에 바다 위에 떠 있는 제주섬을 연상시킨다. 건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개관기념전 <환태평양의 눈> 역시 제주도 특유의 환경적 요소와 문화적 특징, 그리고 제주의 미술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성으로 관람객을 맞았다.
전시는 제주도를 상징하는 자연 요소이자 미래의 에너지원인 바람, 물, 빛 등의 요소를 모티프로 삼은 현대미술작품으로 구성된 <숨비소리>, 주요 제주 관련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제주미술의 역사를 정립하고자 기획된 <제주미술의 어제와 오늘>, 세계 어린이들이 표현한 제주 이미지 공모전 <세계어린이 환경미술제>, 마지막으로 제주의 대표작가 장리석 화백의 기증작으로 꾸려진 <바다를 닮은 화가: 장리석>전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제주도립미술관은 아직 미술관 관장 및 학예연구실 등의 소프트웨어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로 개관을 한 터라, 기념전은 별도의 ‘개관기념전 준비팀’이 구성되어 그 성과를 일궈냈다. 각 전시별 공동 큐레이터, 전시공간연출팀, 디자인팀 등 30여명의 스텝들이 짧은 기간 동안 밀도 있게 전시를 준비했고, 이를 총 지휘한 사령탑은 전시총감독 김영호 중앙대 교수가 맡았다. ‘환태평양의 눈’을 꿈꾸며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 첫 발을 내딘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식 날, 김영호 전시총감독을 만나 전시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립미술관 전경

제주도 고유의 특징이 녹아 있는 개관전을 준비해

“제주도의 위성 촬영 사진을 보면 신비롭게도 거대한 야수의 눈을 닮아 있어요. 제주도가 눈이라면 그것은 지정학적으로 태평양의 눈이 됩니다. 사실 눈은 육체와 정신의 경계에 자리 잡아, 두 세계를 연결하는 창문과 같아요. 개관기념전의 주제를 ‘환태평양의 눈’으로 정한 것은 바로 제주도라는 눈으로 밖을 향해 세계를 보고, 또한 안을 향해 제주의 정신과 문화를 발굴하자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 총감독의 언급처럼 개관 전시는 <숨비소리>와 <세계어린이 환경미술제>와 같이 세계 미술 속에 공유되는 제주 고유의 특성들을 부각시키는 거시적인 시각과, <제주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및 <바다를 닮은 화가: 장리석>전과 같이 제주 고유 미술의 역사와 흐름을 정리하며 그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시각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제주 미술문화 형성과 소통을 위해 이슈와 담론을 생성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한 미술관의 출발점으로서 이번 전시의 중요성을 직시한 고심의 흔적이 곳곳에 엿보인다. 기존 미술관 개관전을 조사하며 이번 전시의 차별화된 접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김 총감독은 역시 독자적인 제주도만의 다양한 환경, 문화적 요소들에서 전시의 중요한 영감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역시 관객의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메인 전시인 <숨비소리>다. 11개국 36명의 작가가 참여하며 “준 비엔날레급”을 목표로 준비한 이 전시의 제목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가 물 밖으로 올라와 ‘호오이~’ 하고 내쉬는 숨소리를 말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숨비소리는 자연을 호흡하는 소리이자 생명 현상을 영위하는 행위입니다. 이때 자연이란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대두되고 있는 물, 빛, 바람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 제주섬입니다. 결국 <숨비소리>는 제주 해녀들의 호흡소리를 현대미술의 개념과 조우시킨 작품들을 모아놓은 국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과 인접하게, 실제 전시의 공간 구성이나 작품에서도 ‘제주도’를 시각적으로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전시 도입부는 눈의 안구를 상징하는 거대한 원형 구조물과 제주를 상징하는 돌담으로 공간을 구획하여 관람객의 동선을 이끈다. 또한 각 작품에 대한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고자 공간별로 구획된 전시장에는 빛, 바람 등의 자연 에너지를 작품의 중요한 근원으로 삼는 제임스 터렐, 볼프강 라이프, 테오 얀센 등 해외 거장부터 이배경 최우람 천성명 차기율 김민호 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어부들이 사용하는 집어등을 설치하여 고요한 바다 풍경을 암시한 부지현의 작품이나, 거울 조각과 조명을 이용하여 바다의 파도를 상징하는 설치 작업을 선보인 전가영의 작품 등 다양한 매체를 필두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숨비소리’를 시각적으로 승화시킨다.

<숨비소리> 전시장. 눈의 안구를 암시하는 둥근 구조물과 제주를 상징하는 돌담으로 파티션을 구획했다.

제주 미술의 진정한 ‘눈’이 되기를

김 총감독은 특별히 이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과 함께 미술관 내 장리석기념관이 개관한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사례임을 언급했다. 제주도에 머물며 제주의 풍광을 수많은 화폭에 담은 장리석 화백이 2004년 말 작품 110점을 제주도에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이번 개관전에는 그가 제주의 풍경과 해녀를 그린 작품 36점이 전시되었다. 사실 김 총감독은 장리석 화백과의 오랜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화백이 그린 <남국의 봄>에 감명을 받아 서울 보광동 화실로 찾아가면서, 사제지간의 연을 맺게 되었죠. 화백이 제주도에 작품을 기증하고 난 후 도립미술관 내에 장리석기념관을 만드는 과정까지의 일을 준비위원회와 함께 맡았어요. 물론 기념관의 규모 등에서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아직 미술관 기증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개관식에는 장리석 화백과 더불어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한 미술계 인사들, 그리고 수많은 제주시민이 미술관의 출발을 함께 했다. 사실 미술관 개관과 함께 그의 개관준비팀장 및 전시총감독 임기는 자동 종료되지만, 그는 미술관의 첫 출발을 함께 한 주요 관계자로서 앞으로 인력 충원과 같이 기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며 첫 걸음을 시작해 나가야 하는 제주도립미술관의 행보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미술관장을 행정 관료로 임명하고 전문인을 명예관장으로 운영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명예관장제도는 미술관 운영을 위해 순기능만큼 부작용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기 때문에 제주도립미술관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 유형 무형자산의 풍부함을 보더라도, 제주도는 단순히 한국의 일부가 아닌 환태평양, 나아가 세계와 교류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지리적 가능성이 충분하다. 김 총감독의 언급처럼, 제주도립미술관은 바로 이러한 제주의 풍부한 자원들을 현대미술의 다양한 문맥으로 연계해 이른바 문화를 생산하는 발전소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미술관계자들의 충분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야 제주미술의 역사를 지켜가고, 또 그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문화 중심의 진정한 ‘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가영 <휘파람 부는 바다> 2009

2009 July Special - 영웅과 신들의 전쟁은 끝나는가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 <바다와 하늘-두 그루의 야자나무와 함께> 이탈리아관 설치 작품 2009 Photo: Giorgio Zucchiatti Courtesy: Fondazione La Biennale di Venezia

영웅과 신들의 전쟁은 끝나는가

글|이용우·미술평론가

53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다니엘 번바움 예술감독은 ‘세상 만들기’라는 타이틀을 통해 과연 누가 세상 만들기에 기여한 공로자인지 재정의를 시도한다. 때문에 이번 비엔날레에선 경매장이나 세계 미술의 요지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아니라 큐레이터들이 선호하는 작가들이 중심을 차지했다. 번바움의 ‘세상 만들기’는 전지구화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철학적 반영과 질문, 그리고 제안이다. 그는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 예술 언어로 맺어지는 아름다운 글로벌리즘을 표방한다.

양혜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가사 공동체 시리즈> 7개의 조명 스탠드, 혼합재료 2009 Photo: Giorgio Zucchiatti Courtesy: Fondazione La Biennale di Venezia

팔라디오 건축 양식과 작렬하는 태양, 건물 사이를 미로처럼 연결하는 크고 작은 운하와 그 사이사이를 흐느적거리며 부유하는 곤돌라들, 베니스를 장식하는 초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인 장면들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비엔날레의 현대미술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쌓인 114년의 비엔날레 역사는 그 조직자들과 베니스 시민사회, 국내외 예술가들, 관광객들이 한데 엉켜 독특하고도 이질적인 비엔날레 문화를 일궜다. 모든 비엔날레가 베니스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비엔날레의 모태로서의 베니스가 간직하고 있는 토론의 농도나 색깔, 형식은 화려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밑에 간직한 담론의 무게는 역사적 두께가 있다. ‘세상 만들기’를 타이틀로 내건 2009년 53회 비엔날레도 마찬가지다.

폴 챈(Paul Chan) <사드를 위한 사드> 2009 Photo: Giorgio Zucchiatti Courtesy: Fondazione La Biennale di Venezia

세상 만들기(Making World), 예술 만들기(Making Art)

예술에는 꿈과 신화가, 전쟁에는 영웅 이야기가 언제나 대미를 장식한다. 그런데 예술도 창작 정신보다 인기나 시장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되다보면 신화가 영웅 이야기로 변질되어버린다. 미술시장의 권력이 예술 운동이나 미학, 그리고 예술 이념을 능가해버린 최근 현대미술계의 상황이 그 예이다. 예술이 신화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누가 더 유명하고 얼마짜리 예술작품을 생산하여 시장을 평정했다는 영웅 이야기가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미술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시장에서의 스타나 영웅들이 추앙받고 권력을 누린다. 자본의 힘이 미학적 개성이나 예술철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결과는 그다지 아름답지도, 영속적이지도 않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위험에 봉착할 때쯤이면 제일 먼저 흔들리는 것은 바로 자본화된 예술, 시장 논리에 기생하고 있는 환금 중심의 예술이다. 그리고 그 땅에서의 영웅들과 그 이상의 지위를 누리는 신들은 그들이 누린 권력이나 지위만큼 반납을 요구받는다.
53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다니엘 번바움(Daniel Birnbaum) 예술감독은 ‘세상 만들기(Making World)’라는 타이틀을 통해 과거 영웅 대열에서 누려온 예술가들을 배제하고, 과연 누가 세상 만들기에서 기여한 공로자인가 관한 재정의를 시도한다. 그래서 그가 이번 비엔날레에 선발한 작가들은 시장에서의 스타나 저널에 자주 회자되는 작가들을 ‘번바움의 세상 만들기’에 초대하지 않았다. 베니스처럼, 최근 들어 많은 비엔날레들이 주제 대신 타이틀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아마 작가 선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배타성을 최소화하고 결정론적 시각을 보완하는 대안으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번바움이 선정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경매장에 자주 나타나거나 뉴욕 런던 베를린 밀라노의 중심 화랑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이 아니라 주로 비평가들이나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큐레이터들이 선호하는 작가들, 이를테면 카스텐 횔러나 토마스 사라세노, 나탈리 뒤버그, 토비아스 레베르거, 폴 챈, 구타이 그룹, 조안 조나스, 실도 메이렐레스, 마리예티차 포트르츠,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토니 콘라드와 같은 작가들이 중심을 차지했다. 그리고 한국의 양혜규나 구정아도 사실상 이러한 분류에서 멀지 않다.
번바움은 도록 글에서 “예술작품은 오브제나 상품 그 이상이다”라는 전제를 달고 “예술은 분명히 세상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보여야 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이번 비엔날레의 타이틀인 ‘세상 만들기’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정확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서로 나누고 있는 세상을 더욱 따뜻하고 복되게 한다는 본래의 뜻이 전달된다면 상관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호의 뜻이 교환되면서 문화가 진화하고 바뀌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다니엘 번바움이 내세우는 타이틀 ‘세상 만들기’는 그동안 수없이 다루어져 온 전지구화(Globalization)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철학적 반영과 질문, 제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원전은 넬슨 굿맨(Nelson Goodman)의 책 《세상 만들기의 방법들(Ways of Worldmaking)》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20세기 후반 예술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넬슨 굿맨은 유일무이한 진리, 그리고 허물 수 없는 견고한 절대적 세계라는 고정적 사고의 틀에 대한 해체적 시도를 하면서 그 대안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강조해 왔다. 원래 굿맨의 글에 나타난 담론의 문맥은 “만든다는 것은 이미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을 다시 만든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변경 불가능의 절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세상 만들기란 우리들 손에 있는 기존의 세상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 세상의 존재는 무명한 것으로 본다.

왼쪽·덴마크와 노르딕관의 포스터, 실제로 이 파빌리온은 나체의 모델이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퍼포먼스를 실행했다. Photo: Nick Ash|
오른쪽·노르딕관 앞 수영장에 살해된 시체(모형) Photo: Boggi Kim

예술언어로 맺어지는 글로벌리즘

번바움은 이러한 굿맨의 사고와 궤적을 같이하면서, 가령 만들어 간다는 것은 이미 고정된 신화나 성상적 아이콘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각예술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갖고 재창조되는가에 관심을 표명한다. 가령 각 국가의 국기는 절대적이고 상징적인 기호지만, 그 성상적 전통을 과감히 해체하고 또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전통은 언제나 유효한 세상 만들기라고 보는 것이다. 전시를 위하여 개발된 디자인과 그 디자인의 언어들은 가속적으로 변화와 진화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적이고 무한한 변주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번바움은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은 또 다른 세상들이 만나는 곳에서 진정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번바움의 이러한 해석은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또는 후기식민사관적 용어로서의 글로벌리즘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 예술 언어로 맺어지는 또 다른 아름다운 글로벌리즘을 연상해 보는 것이다. 이는 최근 들어 자주 논의되는 새로운 우주론적 사고, 즉 점증하는 소통과 여행, 이동, 그리고 문화의 유목현상까지 포함하는 삶으로서의 전지구화를 표방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올 봄 테이트갤러리가 주최한 테이트트리엔날레에서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기존의 모더니티를 재수정하고 제안한 얼터모던(Altermodern)적 속성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새롭게 도래할 또 다른 모더니티로서의 속성을 얼터모던이란 시각예술 언어로 주조한 니콜라 부리요는 모더니즘이 서양적 사고에서 배태된 과학기술적 용어로 그 수명을 다했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이 소멸하면서 새로운 질서의 얼터모던적 사고와 패턴에 주목하고자 한다고 천명한 바 있다.
굿맨의 사고 역시 신학적 사고에서의 절대적 존재이자 세상의 근원인 신, 그리고 신이 만든 세상을 다시 다듬고 가꾼 사람들이라는 두 가지 부류의 만든 자들을 상대론적 입장에서 사고했다. 즉 상대론(relativism)과 유명론(nominalism) 사이의 쟁점을 정리하는 데는 물질주의자들과 비물질주의자 사이의 차이를 노정함으로써 극명하게 사고를 비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번안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주석을 달고 부제를 붙이고 더빙까지 완성하는 것이 창조의 프로세스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철학자가 되기 이전에 보스턴에서 화랑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굿맨은 철학을 문화사회학이나 문화정치학적 입장과 자주 교통함으로써 노암 촘스키 같은 제자를 둘 수 있었고, 오늘날 미국의 중요한 지식인들의 이념 설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번바움이 그의 세상 만들기를 비엔날레에 적용한 것은 지난 52회 베니스비엔날레 감독이었던 로버트 스토(Robert Storr)의 전시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지난 2007년 로버트 스토 예술감독이 표면에 내세웠던 출품 작가들은 오늘날 경매시장을 압도하는 작가들, 이를테면 시그마 폴케나 게르하르트 리히터, 루이스 부르주아, 마크 로스코 등 유럽과 미국의 블루칩들을 다수 선발했다. 그러나 번바움은 이미 우리에게 과거가 되거나 역사적 우상이 되어버린 과거에 대하여 어차피 다시 세상 만들기를 시도해야 하는, 그래서 세상을 만드는 일과 그 가치는 하나의 시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안하고 있다.
지아르디니 내 전시 공간인, 즉 옛 이탈리아관(Palazzo Esposizione)이나 아르스날레는 이러한 주제 의식과 맞물린 신선한 자극들이 다수 선보였다. 아마도 비엔날레가 미술관 전시와 왜 다른가에 대한 논증은 결국 전시 공간의 구획이나 전시 공학이 아니라, 또는 전시 작품이 압도하는 명성이나 부의 가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과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념의 가치들을 점유하는 의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바움의 생각은 여지없이 사회적이고 공공적이다.

스티브 맥퀸 <지아르디니> 2009 ⓒ Steve McQueen

비엔날레와 경제불황

물의 도시 베니스 시내 끝자락에 자리 잡은 비엔날레는 그래서 114년의 역사와 함께 매 행사 때마다 서로 다른 담론을 저울질하고 대입시켜 보는 임상실험실이다. 올해는 경제 불황에다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시장 탓에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적어보였다. 그러나 베니스는 비엔날레와 유명 인사들을 만나고 보러 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뉴욕타임즈》의 캐롤 보겔(Carol Vogel)이 언급한대로 참가자들 스스로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오는 곳이기도 하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의 예산은 지난 해보다 140만 달러(약 18억원)가 줄었다. 이 부족분을 메우기 위하여 비엔날레재단은 입장료를 2만5천원에서 3만원으로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획된 프로젝트들은 약간의 정책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그들 나름의 꿈의 무대에 오르기 위한 예술가들과 관련자들의 노력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베니스를 비롯한 전 세계의 비엔날레들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참가 작가들에게 신작 출품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비엔날레의 제작비는 다른 어떤 전시 형식보다도 생산비가 많이 든다. 이번 베니스는 예산을 이유로 제작비를 작가에게 떠넘기거나 소속 화랑들에게 부담시킨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말하자면 파티에 초대는 하되 먹을 음식을 싸 가지고 오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비엔날레의 주제가 거대담론식의 허례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전시 자체가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접근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넘어가는 지혜의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이에 따른 작업의 메타포와 암시적 표현들이 줄을 이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는 말까지 자주 등장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국가관 전시에는 미국관, 덴마크와 노르딕관, 독일관, 호주관 등이 화제에 올랐다. 그리고 주제전 참가 작가들 가운데는 토마스 사라세노, 나탈리 뒤버그, 존 발데사리,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토비아스 레베르거, 폴 챈, 모나 하툼, 양혜규 등이 명확한 주제 의식과 전시 공학에 대한 이해, 비엔날레 전시 구조에 걸맞는 설치 방식으로 관심을 모았다.
이번 비엔날레는 역대 비엔날레보다는 정치적이거나 폭력적인 작품들이 줄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들은 예술과 정치적 주제의 만남이 아주 특별하고 내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웅변했다. 특히 홍콩 출신 폴 챈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미국이 전개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주제로 매우 가학적이고 전율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독일에서 작업하고 있는 30대의 젊은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는 지아르디니 전시장에서 가장 큰 방을 이용하여 거대한 거미줄을 연출했다. 건축가 벅크민스터 펄러의 건축적 상상을 작품으로 실현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전시장 바닥에서 천정까지 연결되는 대형 거미집 형태의 작품이다. 특히 검정색 고무줄로 연결된 구조물은 오늘날 점조직처럼 짜인 정치, 사회적 긴장감을 나타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 쇼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전달하였다.
덴마크관에서 선보인 <컬렉터>라는 작품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두 작가 엘름그린과 드락셋이 연출한 것이다. 이 작품은 오랜만에 연극성과 문학성, 시추에이션, 상황과 맞닿는 오브제의 사용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인기관이 되었다. 장애가족과 그 이웃, 그리고 게이 커플에 관한 허구적 이야기로 꾸며진 이 작품은 의외적 국면 전환, 그리고 넘치는 해학성, 다국적 감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발터 벤야민의 글 <나의 도서관 풀기: 수집에 관한 이야기>가 시추에이션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번에 베니스비엔날레가 경제 불황을 이유로 적용한 작가 초청 방식과 비엔날레 생산 방식은 향후 다른 비엔날레들에게 하나의 논란거리가 될 것 같다. 비엔날레 재단은 베니스로의 초대가 작가들에게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초청비나 작품 생산비를 전부는 아니지만 축제의 참가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과연 그러한 논리가 설득력을 얻게 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한 사람의 공개적 거부자도 나오지 않은 듯하다.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바 카페테리아-팔라조 델레 에스포시지오니> 2009 Photo: Giorgio Zucchiatti Courtesy: Fondazione La Biennale di Venezia

글로벌리즘과 아르키펠라고의 위험성

혼성과 다원주의, 그리고 해체주의 미학이 이룩한 성과는 과거 정치적 패권주의로부터 비롯된 미학적 패권주의를 약화시키고 이른바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이룩한 소비중심주의의 우월성들을 개별화시킨 공로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적 의식의 약화와 판단 기준의 파편화에 따른 시장 중심 구조를 육성한 문제가 지적된다.
오늘날 글로벌 사이즈의 미술행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토론 가운데 하나는 미학적 판단이나 비평적 기준에 대한 논리적 충돌이다. 가령 베니스비엔날레 프레스 오프닝 기간 중에 모인 비평가나 큐레이터, 작가들은 53회 비엔날레 전시를 두고 혹자는 “매우 훌륭한 전시다”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한다. 혹자는 “지극히 우아한 전시”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추하다”고 심판한다. 같은 전시를 두고 나타나는 이러한 양극적 판단 현상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미의식이나 예술작품의 의미가 이제는 개인들 각자의 선호도, 기호도에 따라 좋고 나쁘다는 식으로 평가되면 그뿐인 것이다. 비평가의 평가도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 한 개인의 의견 정도로 폄하되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 대한 미학적 절대성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예술에 대한 평가 기준은 저널리즘과 시장에서 부추기는 명성 중심의 작가들이 미학적 성과까지 덤으로 획득하는 절묘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예술은 정신적 가치라기보다는 물질적 가치가 점유하는 거래 중심의 질서가 완성되어 가고 있으며, 시장이 문화적 재미를 첨가시킨 새로운 프로그램까지 등장시킴으로써 예술의 공공성이나 공동체적 가치 등을 제어하는 슬로건들을 만들어낸다. “미술관 전시보다는 아트페어가 재미있다” “비엔날레보다는 아트페어가 유익하다” “공공미술프로젝트는 재미없다”는 등의 문구가 그러하다. 각 기능별 차이와 다변화된 수용의 채널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단순한 독자들은 이러한 시장 중심 기능들에 대하여 절대적 동의를 보낸다. 가령 서로 다름의 아름다움이나 고유한 기능 등에 관한 균형 있는 교육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도 영속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도처에서 잘못 활용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글로벌리즘에 대한 상상력은 그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우수한 정보 가치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획일성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다. 매우 불행한 일이다. 특히 광고나 홍보가 소비시장을 결정하는 전형적 시장경제 체제와 같은 문화 생산과 소비 구조는 과거 아름다운 미학적 행동이 중심을 이루어 온 시각문화 현장의 전통을 마비시키고 있는 부분도 있다.
전지구화는 거부할 수 없는 뚜렷한 현상이자 우리들의 퇴행적 의식을 교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베니스나 아트바젤의 행사를 종합하면서 미국의 어느 월간 미술잡지가 언급한 “고맙다, 전지구화여!”를 외치는 태도는 점차 소비 중심적 화려함이나 파티문화로 인식되어 가는 글로벌 미술잔치들에 대한 재고의 목소리를 증가시킬 뿐이다. 화려한 개막과 파티들, 거기에 등장하는 영웅적 큐레이터와 작가들의 활약상을 통하여 글로벌리즘의 환상을 좇는 이벤트들은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글로벌리즘은 다국적기업들의 다국가적 화폐를 통하여 이윤을 실현시키는 경제 용어로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특히 정보기술의 진화를 앞세운 글로벌 네트워킹과 이에 따른 디지털 유목주의,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의식의 확장과 분방한 사고 등은 오늘날의 시장 중심적 사고를 대변하는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적 사고가 문화 생산의 패턴에 적용될 때는 적지 않은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우선 경제 통합 방식과 문화 수용 방식이 크게 다르고, 문화 생산과 문화 소비 사이에 나타나는 편차가 공통된 술어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엔날레의 전시가 글로벌리즘의 이상을 실천시키는 폭력적 전시장이라는 비판은 본질적으로 전시의 사이즈와 블록버스터식의 경영 방식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현대미술이나 문화를 설명하는 용어들은 과거의 미학적 용어가 아니라 과학기술이나 정보 용어, 심리학, 고고인류학, 철학, 문화정치학 등 용어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하다. 이는 오늘날의 문화 현상이 동종의 단일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종래의 정의와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 확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서로 유기체적 관계를 통하여 생존하고 있으며, 거대한 군도(群島)의 집합체와 같은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이동과 위치 변경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간다. 의식의 ‘정처 없음’을 유도하는 현상들은 과거 견고하던 지리학적 국경들을 허무는데 기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성 문화와 혼합 문화, 교묘한 문화적 지배를 통한 정치 경제적 통일을 생산해 가는 과정으로 인도될 수도 있다.
아르키펠라고는 아름답고 작은 섬이자 섬들의 집합이다. 이 군도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문화 번식의 포자는 과거 혼성이나 복합문화 등 우리가 즐겨 사용하던 담론의 전통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술어로 떠오른다.

아토 린제이 <멀티네추럴(블랙아웃)> 퍼레이드 광경 Photo: Moira Ri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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