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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9.04

Abstract

특별 기획 FLOWER POST-FLOWER Life & Death|Sexuality|Politics & History Painterly Touch|Artificial Creation|Contemplation 옛말에 한 송이 꽃만 피어도 봄이 온 것을 안다고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다양한 꽃들이 봄을 수놓는다. 전국을 들썩이는 각종 꽃 축제부터, 꽃을 주제로 한 미술 기획전들이 봄의 화사함을 북돋우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등극한 '꽃남 신드롬'이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았던가. 사실 꽃의 아름다움을 찬양해 온 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 꽃이 피고 지는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한 고대인들도 만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생물 중 하나로 꽃을 칭송했듯 말이다.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예술가들에게 꽃은 자연스레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왔다. 하지만 그 때문에 미술의 역사 속에서 가장 흔한 소재 중 하나가 꽃이라는 불명예를 얻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여전히 작품 속에 꽃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미술 속의 꽃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을까. 지금은 미술 속에 기존의 꽃을 뛰어넘는 다음 세대의 꽃, 즉 'Post-Flower'가 피어나는 시대다. 지금부터 'Post-Flower'의 다양한 얼굴을 소개한다.

Contents

표지 데이비드 코티 <무제> 리넨에 유채 173×244×3.8cm 2008


에디토리얼 미술애호가 K의 울음_김복기


프리즘
    미대입시 실기시험 폐지, 양시양비론_김영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렇게 준비하자!_박성태


아티스트 아틀리에 아카이브
    임동식_이선화

김순응의 이슈 아트마켓
    '세기의 경매'가 남긴 것

나의 얼굴 샌정



포커스
    불 컬렉션: 손의 대화|위대한 손_김정락
    카와시마 히데아키|타다노리 요코오_김정복
    송명진|성낙희_이선영
    7080청춘예찬_진휘연


현지 취재
    뉴욕 미술시장은 건재하다?_이성희
    게이사이, 도전과 희망을 부르다_이선화


특별 기획 FLOWER POST-FLOWER
    (1)화보_Today's Flower in Art_편집부
    (2)글_시대에 따라 꽃도 변한다_신지영


해외 작가 베르나르 프리츠
    (1)고요한 저항의 그림_정현
    (2)색의 충돌, 그 무한한 추상화의 가능성_이달승


해외 미술
    레이몽 드파르동 & 폴 비릴리오_김홍기, 알리스 페트릴리


화가의 앨범 장리석


아트 포럼
    왜 다시 ‘만남을 찾아서’인가?_이인범


이미지 링크 이예린


리포트 인사이드
    Cross Animate_배명지


전시리뷰
    맥:한국현대회화 8인|2009 신진조각가
    이재옥|금호 영아티스트
    기획자 P씨의 죽음|섬과 맞서는 전술
    최수앙|임춘희|달란 그라함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한슬|LESS|박민규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뉴욕 미술시장은 건재하다?

아모리쇼 전시 전경

뉴욕 미술시장은 건재하다?

글 | 이성희 기자

아모리쇼 VIP 오프닝 날인 3월 4일 뉴욕은 지독한 한파로 얼어붙었다. ‘10년 만에 처음’이라는 강추위로 멀리 유럽에서 날아온 관광객들은 움츠러들었고, 주최측도 잔뜩 긴장했다. 며칠 후 다시 완연한 봄기운이 돌면서 행사장들은 활기를 띠었고, 전시장은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올해 아모리쇼는 규모를 더욱 확장하여 기존의 94피어에 92피어를 추가했다. 94피어에는 22개국 154곳의 화랑이 참여하고, 92피어에는 70개의 모던 대작을 판매하는 딜러들을 모았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기 불황을 아트마켓도 빗겨 갈 수는 없었는지 이번 아모리쇼는 예년에 비해 매우 저조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관람객은 전년의 5만2천명에서 5만6천명으로 늘어났다.

첫날 솔드아웃 No! 판매는 천천히

이번 아모리쇼는 새로운 몇 가지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중 하나의 이슈는 중국미술의 퇴출이다. 지난 수년 간 세계 미술시장을 주도했던 중국미술이 일거에 사라져버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국의 정치적 팝 열풍만 걷힌 것이 아니다. 팝의 원조 격인 앤디 워홀의 작품도 자취를 감췄다. 2007, 2008년 아트페어, 옥션에서 고공행진을 거듭하여 국내에까지 ‘워홀 신드롬’을 만들어낸 세기의 아트 스타의 작품은 이번 아모리쇼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신 탐 웨셀만의 회화, 판화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국내 컬렉터들도 이제 웨셀만의 누드 페인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또 장식성 강한 수공예적 작품의 인기를 들 수 있다. 2008년 바젤아트페어에서 전문가들은 2009년에 패브릭과 오브제, 수공예적 느낌이 강한 작품들이 유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2009 뉴욕 아트페어들은 패브릭 열풍이었다. 강렬한 색감, 수공예적 성격에 쓰레기더미에서 건져 올려 재활용한 듯한 ‘너드’한 작품들은 아모리쇼의 94피어뿐 아니라, 볼타, 펄스 등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트페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판매 현황. 많은 딜러들은 예년처럼 VIP 오프닝에 많은 거래가 이루어졌지만, 아트페어 기간 내내 안정적으로 판매가 됐다고 했다. 어쨌든 VIP 오프닝에서 가장 먼저 작품을 판매한 화랑은 베를린의 마이클슐츠갤러리. 시그마 폴케의 작품을 34만 달러에 판매했다. 이어서 뮌헨의 갤러리토마스가 탐 웨셀만의 작품을 4만달러에, 그리고 30분 뒤 파리의 엠마누엘페로틴(Emmanuel Perrotin)이 파올라 피비(Paola Pivi)의 네온 작품 두 개 에디션을 각각 3만2천달러에, 뉴욕의 차임&리드(Cheim & Read)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1백만달러에 판매했다.
이밖에도 런던의 리손갤러리는 아니쉬 카푸어의 조각들을 각 1백만달러, 70만달러에 판매했다. 휴스톤의 시카디갤러리(Sicardi Gallery)는 게고(Gego)의 선 조각을 19만5천달러, 뉴욕의 잭샤인만갤러리(Jack Shainman Gallery)는 닉 케이브(Nick Cave)의 작품을 각 4만5천달러에 판매,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좋은 판매 성과를 거뒀다고 전했다. 또 뉴욕의 에드워드타일러나헴(Edward Tyler Nahem)은 게르하르트 리히터, 샘 프란시스, 윌렘 드 쿠닝 등 블루칩 작가들의 판매가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불황일수록 미술시장은 더 보수적 성향을 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편 파리의 갤러리프랑크엘바츠(Galerie Frank Elbaz)는 지안 판찰(Gyan Panchal)의 개인전으로 부스를 꾸몄는데, 금요일 워싱턴의 유명한 컬렉터가 부스 전체를 구매해 화제가 됐다.
런던 빅토리아미로갤러리의 글렌 스콧 라이트(Glenn Scott Wright)는 “기대 이상으로 판매가 잘 됐다. 올해는 좀 더 진지한 컬렉터들이 아모리쇼를 찾았다”고 했다. 런던 화이트큐브의 갤러리스트는 “상황이 기대했던 것보다 긍정적이다. 힘든 경제 상황이지만, 아모리쇼는 아트마켓이 계속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했고, 갤러리토마스의 질케 토마스(Silke Thomas)는 “처음 아모리쇼에 참가했는데, 아주 좋은 느낌”이라며 이러한 견해에 동의했다.

볼타 뉴욕 입구

아모리쇼의 모던아트 VS 컨템포러리아트

92피어의 입구에 자리한 갤러리토마스는 탐 웨셀만, 로이 리히텐스타인, 엘리자베스 페이톤, 안젤름 키퍼, 프랑크 스텔라, 댄 플래빈 등 20세기 대가들의 작품으로 꽉 채웠다. 로버트뮐러갤러리의 전광영의 종이 부조 작품에서 관람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고, 투명 밀랍 속에 두개골을 가둔 다스틴 옐린(Dastin Yellin)의 작품도 인기였다. 아모리쇼에 처음 참가한 마이클슐츠갤러리는 세오의 대형 캔버스 작품을 전면에 걸었고, 판매 성과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번 아모리쇼에서도 줄리앙 오피의 인기는 계속되었는데, 특히 알란크리스테아갤러리는 비키니 연작을 벽면 가득 설치했다. 첼시의 사진화랑 브루스실버스타인갤러리와 요시밀로갤러리는 마주 보는 곳에 자리해 있었다. 《아트 인 아메리카》가 뽑은 ‘2009 아모리쇼 10대 갤러리’에서 사진화랑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요시밀로갤러리는 한국작가 이명호를 비롯해 피터 휴고, 로레타 룩스, 사이먼 요한 등 소속 작가의 출품작을 모두 솔드 아웃시켰다. 맞은편에서 브루스실버스타인갤러리는 20세기 사진사의 명작들을 내걸었다. 뉴욕 가나아트는 스펙터클한 김인숙의 사진으로 주목 받았다.
92피어는 모던아트, 94피어는 생생한 컨템포러리아트로 가득 채워졌다. 관객들의 발걸음은 당연 94로 쏠렸다. 이곳의 각각 부스들은 관람객의 발길을 잡아끌기 위해 강렬한 설치 작품, 괴기스러운 조각, 징그럽거나 웃긴 작품을 가져다 놓았다. 밀라노 갤러리아리아루마(Galleria Lia Rumma)의 괴물 같은 거대한 조각, 뉴욕 레오쾨니히(Leo Koenig INC.)의 소시지와 생고기로 만들어진 인물 두상 작품은 순전히 관객 몰이용이었다. 이번 아모리쇼에서 특기할 사항은 많은 화랑들이 한 작가의 ‘솔로 쇼’를 선보인 점이다. 로날트펠트만갤러리(Ronald Feldman)는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가인 크리스틴 힐(Christine Hill)의 솔로 쇼로 꾸몄다. 작가는 ‘아모리 약국’이라는 제목으로 눈과 발이 피곤한 관람객들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약장과 카운터, 소파, 테이블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객이 카운터에서 자신의 증상을 얘기하면, 작가는 알맞은 처방을 내려준다. 치료법을 적은 종이 혹은 처방전은 20달러, 작가가 서명한 패키지는 50달러 등 실제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아트페어라는 큰 가게에서 작은 가게를 차려 작가가 직접 자신의 개념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약국’ 프로젝트는 대성황을 이뤘다.

암울한 경제의 대안, 볼타에서 차세대 작가를

이어서 미드타운 빌딩에서 열리는 볼타뉴욕을 찾았다. 항구의 공장에서 열리는 아모리쇼와 달리 ‘시크’한 멋을 풍기는 볼타뉴욕은 여유 있는 작품 감상을 허락했다. 볼타는 아모리쇼의 이벤트 중 하나로, 선별된 화랑이 한 작가의 솔로 쇼를 소개한다. 젊은 작가들의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미래의 ‘스타’ 작가를 점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첫 날에만 5천명의 관객이, 그리고 마지막까지 1만8천명의 관객이 다녀갔고, 비평적 평가나 시장적 측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볼타뉴욕은 빡빡한 스케줄의 ‘아모리 아츠 위크(Armory Arts Week)’에서 메인 이벤트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티에리골드버그프로젝츠(Thierry Goldberg Project’s)에서 선보인 이라크 작가 헤이브 카라만(Hayv Kahraman), 해피리온(Happy Lion)의 알레산드로 디아즈(Alejandro Diaz), 런던 세븐틴(Seventeen)의 수잔 콜리스(Susan Collis), 슈베프로젝츠(Schuebbe Projects)의 크리스티안 쉴러(Christian Schoeler) 등은 가장 판매가 잘 된 작가 리스트다. 또 볼타뉴욕의 스페셜 프로젝트로 초청된 임퍼펙트 아티클즈(Imperfect Articles)는 불황 속 틈새시장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미국의 유명 의류 회사인 아메리칸 어패럴과 합작해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한정판 티셔츠를 제작했는데, 이 감각적인 티셔츠는 쉴 새 없이 팔려 나갔다.
특히 관람객들의 인기를 끌었던 몇몇 작품을 소개한다. 스페인의 에이디엔갤러리아(ADN Galeria)가 내세운 젊은 작가 위제니오 메리노(Eugenio Merino)는 대중매체에서 따온 이미지들로 유머러스한 조각 작품을 만드는 작가. 그는 한쪽 벽면에는 총을 들고 있는 달라이라마, 대각선 방향으로 좌상의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조각을 놓아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벨기에의 호엣베케트갤러리(Hoet Bekaert Gallery)에서는 태국 작가 수라시 쿠솔롱(Surassi Kusolwong)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작가는 실뭉치들을 쓰레기처럼 쌓아 놓고, 그 속에 금목걸이들을 숨겨 놨다. 작가는 재화의 사회적 효용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브라질의 리스멘데스(Rhys/ Mendes)의 페르난도 마스트란젤로(Fernando Mastrangelo)의 부스는 검은 공간, 바닥에 벌집 모양의 거울, 그리고 그 위에 어깨가 굽은 흰색 인물이 서 있다. 그는 코카를 재배하는 힘 없는 농부이자, 그것을 코카인으로 바꿀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마약 시장의 은밀하고 복잡한 경제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억날지 모르겠다. 1990년대 말을 풍미했던 록 스타 마릴린 맨슨. 마치 기계음 같은 목소리로 세기말의 병적 징후들을 내뱉었던 마릴린 맨슨의 작업을 갤러리브리짓센크&101익스히빗(Galerie Brigette Schenk & 101Exhibit)에서 선보였다. 그의 노래만큼이나 강렬하고 음울한 작품들이었다.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 펄스나 스코프, 브릿지 등도 판매가 잘 됐다고 한다. 펄스에 참가한 한국의 원앤제이갤러리는 이세현, 김종구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대가들의 수작은 언제나 그 나름의 빛을 발하고, 또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미래의 가능성으로 빛나는 법. 그래서 이번 뉴욕의 ‘아모리 아츠 위크’는 예년보다 관람객이 더 늘어났다. 아모리쇼 이외에도 젊은 작가들을 선보이는 위성 페어들이 똘똘 뭉치고, 각자 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뭉쳐야 산다”는 속담을 실천하는 듯 뉴욕 미술시장은 상생의 노력을 가시화했다.

국제갤러리 부스 전경

크로스 애니메이트展, 미술에 침투한 이 시대의 ‘해방 언어’

블루 벽화 애니메이션 2007

미술에 침투한 이 시대의 ‘해방 언어’

글 | 배명지·코리아나미술관 큐레이터

‘생명을 부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아니마(anima, 영혼)’에서 유래된 애니메이션은 생명이 없는 윤곽이나 형태에 움직임의 환영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죽은 생명에 영혼을 불어넣는 신의 행위와도 같이 애니메이션은 무활력적 사물에 역동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이미지의 변형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지향하는, 즉 기존의 리얼리티에 대한 수용을 반전시키는 일종의 의미 재생산 작업이기도 하다. 실사영화(live film)가 물리적인 리얼리티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애니메이션(animated film)은 리얼리티의 복제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변형을 통해 디자인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고, 나아가 현실과 일상을 재정의할 수 있는 일종의 ‘메타 작업’인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국제 비엔날레나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의 특징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을 매체로 수용한 작품들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을 기법적인 요소로 끌어들여 작품 제작과 형식 실험에 활용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후반 이후 미디어아티스트들뿐 아니라 회화, 판화 등을 주매체로 하는 평면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동시에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크로스 애니메이트(Cross Animate)〉전의 기획은 최근 현대미술에 나타난 애니메이션의 매체 수용현상을 미학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작가들이 애니메이션에 매료된 것은 그것이 단순히 화면에 움직임을 부여한다거나 시각적 유희를 가능하게 하는 ‘오락 미디어’ 그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통로로 부상해 온 애니메이션과 함께 작가주의적 태도로 작업하는 감독들의 아트 애니메이션을 한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크로스 현상’을 조명해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술작품 내에 실제 움직임과 시간성 도입을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와 디지털이 등장한 이후, 미디어아트와 애니메이션, 특히 실험 애니메이션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미니멀리즘 이후 미술은 음악, 영화, 댄스 등의 인접 예술 장르를 다층적으로 흡수하였고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조차 모호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번 〈크로스 애니메이트〉전에 참여하는 현대미술작가들의 애니메이션과 감독들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역시 구분하기 어렵고 도리어 그러한 장르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크로스 애니메이트〉전은 현대미술과 애니메이션을 구분하기 보다는 오히려 애니메이션의 미학적 특성과 사유 방식이 무엇이며, 이것이 어떤 부분에서 현대미술의 의미 작용에 기여하는지, 왜 현대 미술가들이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는지에 더욱 주목하고자 하였다.

윌리엄 켄트리지 필름 애니메이션 1997

미술과 애니메이션, 교묘한 접점 탐색하기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아마도 움직임의 환상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집착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그려진 8개의 다리를 가진 동물에서부터 16세기 포르노 북으로서 플립북이 유행한 것은 움직임의 환상을 바라는 인간의 요구에 대한 응답에 다름 아니다. 생명 없는 형태에 생명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은 19세기에 환영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기계장치의 탄생을 추진시켰다. 애니메이션의 본격적인 역사는 19세기 영화 발전 초기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세기 시각의 잔상이론과 역할에 대한 관심으로 등장한 일련의 장치들, 페나키스티스코프(1831), 조트로프(1834), 키네마토스포트(1861), 에밀 레노가 만든 프락시노스코프(1877) 등은 정지된 이미지를 조작함으로써 놀라운 움직임을 만들어내려는 영화적 장치들로 애니메이션 영화의 시초인 움직이는 그림을 가능케 하였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가 탄생하는 1895년을 즈음하여 ‘움직이는 그림’ 대신 실제 이미지의 움직임이 가능해지면서 애니메이션도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테크놀로지를 향한 근대의 산물들은 마침내 1908년 에밀 콜이 만든 최초의 장르로서의 애니메이션 〈판타스마고리(Fantasmagorie)〉를 탄생시켰다.
미술의 역사 속에도 애니메이션, 즉 움직임에 대한 노정은 큰 흐름으로 존재해 왔다. 마르셀 뒤샹, 칸딘스키 같은 작가부터 미래주의, 키네틱 아트 등 미술의 공간 내에 움직임과 시간이라는 차원을 도입하려는 모더니즘의 실험은 애니메이션이 추구한 정신과 가치였다. 역으로 애니메이션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색, 형태, 색채 등 미술 언어 그 자체의 형식 실험에 있었다. 20세기 전반 실험 애니메이션은 추상화의 애니메이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레오폴드 쉬르바주, 발터 루트만, 한스 리히터, 오스카 피싱어, 로라 맥라렌, 해리 스미스와 제임스 휘트니 등은 추상 이미지의 언어 개념에 몰두, 이미지와 리듬, 색과 형태 등을 조합하며 연금술적인 생명을 화면 위에 추구하였다. 움직임 내에서 시각적 실험을 끊임 없이 추구한 그들은 회화 자체의 매체적 특징과 시각성 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모더니스트들로서 애니메이션과 미술의 경계에 선 자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로스 애니메이트〉전 참여작가들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현대미술과 애니메이션의 접점에 위치한다. 애니메이션을 실험적으로 활용한 회화작가, 애니메이션 그 자체를 표상 언어로 삼은 미디어아티스트, 지극히 회화적 표현 기법으로 작업하는 애니메이션 감독, 극도의 개념적인 언어를 디지털화시킨 애니메이션 감독 등의 작품들이 혼재되어 있어 어느 것이 현대미술 작품이고, 어느 것이 감독들의 애니메이션인지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참여작가들 중 윌리엄 켄트리지, 부 후아, 션 킴 등은 국제 비엔날레를 비롯한 미술전시에 참여하는 동시에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도 출품하는, 이른바 ‘이종교배자’들이다. 따라서 전시 구성은 현대미술과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구분보다는 애니메이션 언어가 갖는 미학적 가치, 사회적 의미작용, 시대성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안정적 형태를 거부하고 이질적인 시공간을 중첩시키며, 회화 문학 사진 영화 등과 복합장르로 표현될 뿐 아니라 저항의 메시지로도 사용되는 애니메이션은 사실 변이와 접속, 탈주와 혼성을 지향하는 이 시대를 표상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언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작들은 국제 비엔날레뿐 아니라 안시, 오타와, 자그레브, 히로시마 등 세계 4대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시대의 사유 방식을 표상하는 애니메이션 언어의 특수성에 기반하여, 이번 전시는 관습적 내러티브를 해체 변형하면서 일상과 현실을 재정의하는 새로운 형식의 내러티브 애니메이션과, 이야기 전개보다는 이미지의 연속된 뫼비우스적 변형을 보여주거나 선과 색채 사운드 등을 통해 원초적인 사고와 느낌을 전달하는 애니메이션, 그리고 2D나 3D의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만 오락적 유희보다는 개념과 상황을 전달하는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었다.

로라 노이부넨 <마지막 뜨개질> 3D 2005

재현의 빈곳, 내러티브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은 독특한 표현 방식에 의해 실제에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둔다. 즉 재현의 질서를 반복하는 동시에 현실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거리두기’, 브레히트 식의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 일명 낯설게 하기)는 사회적 정치적인 이슈를 가장 안전하면서도 전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였을 뿐 아니라, 상징 체계로 언표될 수 없는 욕망 고통 죽음 상실 등 이른바 인간의 ‘어두운 측면(Dark side)’을 화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사회 정치적 메시지나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는 서사적 구조를 따르며 사건들을 재현하는 내러티브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시작 중간 끝이라는 기존 플롯을 거부하고 관습적 리얼리즘을 해체, 변형하면서 오히려 내러티브를 혼란시키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의 작가들로 윌리엄 켄트리지, 전준호, 부 후아, 트로마라마, 시모네 마시, 레지나 페소아, 김신일, 문경원, 릴릴, 유근택, 김한나 등을 들 수 있다.
195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윌리엄 켄트리지는 대학에서 정치학과 아프리카학을 전공할 정도로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애니메이션 영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그의 작업은 그가 태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적 풍경과 정치적 배경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식민적 억압과 사회적 분쟁, 상실 등을 다루면서도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자막 없는 암시와 은유, 음울한 사운드를 통해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그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이슈는 선언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양상을 띤다. 목탄화를 애니메이트한 전시작품 〈Weighing and Wanting〉처럼 사회적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한 인간의 죄의식, 공허함, 슬픔에 주목하면서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이야기를 통해 권력과 거대 담론의 문제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역설과 은유의 힘은 또한 전준호 작업의 한 축을 이룬다. 자본주의, 분단, 탈북, 전쟁, 그리고 최근 개인의 이야기까지 사회 정치적 리얼리티나 개인적 내러티브를 애니메이션 영상을 통해 해체해 오고 있는 작가에게 애니메이션이란, 진지하고 무겁거나 다소 암울한 사회적 내면적 이슈를 희화된 방식으로 폭로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트라우마의 해방을 시도하는 매체인 것이다.
저항과 비판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부 후아나 트로마라마 작품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부 후아는 플래쉬 애니메이션 〈야만적인 성장〉에서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세계화를 만화 영화의 코믹성을 차용하여 비판하고 있다. 트로마라마의 우드 컷 애니메이션 〈Serigala Militia〉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메탈 밴드인 ‘Seringai’의 음악을 위해 제작된 뮤직 비디오이다. 450개 목판을 사용한 이 애니메이션은 나무의 거친 결과 고르지 않은 에칭 기법 등 형식적 특징을 통해 하위 문화의 저항의 메시지를 의미화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감독 중 레지나 페소아와 시모네 마시의 작업은 모두 흑백의 스크래치 페인팅을 기반으로 서사적 구조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기승전결로 이야기가 완결된 전통적 내러티브를 빗겨가며 사회적 문제나 개인적 암울함을 은유적으로 폭로한다. 히로시마, 자그레브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시모네 마시의 〈개에 관한 추억〉은 사랑하는 개가 아버지에 의해 살해되는 충격적 상황이 형성한 작가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시공간이 뒤섞인 중층적 서사 구조와 어두운 톤의 화면 등의 상황들로 드러낸다. 레지나 페소아의 대표작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슬픈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유난히 큰 심장소리가 고민인 어느 소녀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남과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의 모습을 비판한 작업으로 애니메이션이 지닌 환유와 제유의 구조를 드러낸다.
클로즈업된 수술 행위와 선혈이 낭자하는 수술 현장을 묘사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일상적인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게 만드는 릴릴의 〈Plastic Art〉, 두 인물 사이의 인터렉션과 이를 통한 자아 형성 과정을 게임의 형식에서 빌려 온 랜덤 구조의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표현한 문경원의 〈J&H〉 등은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개념적인 상황으로 변형시킨다. 김신일의 애니메이션 〈Painter〉는 색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에 손으로 선을 압인하여 드로잉하고 이를 동영상화한 것이다. 빈 공간에 미세하게 드러난 선의 움직임이 표상하고자 하는 지점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존재와 부재, 공(空)과 색(色)의 교차점이다.
사실주의 내러티브 애니메이션 계열의 작품 중 또 하나의 부류로 기존의 회화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전환시킨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유근택 김한나 등의 작품이 그것인데, 오랜 기간 페인팅을 고집하고 있는 그들의 작업은 화면에 움직임과 시간성을 부여함으로 회화 자체의 프레임을 확장시키고 있다. 주변 풍경과 작가가 마주한 대상을 수묵화로 표현하는 유근택의 한국화는 그 자체 내에 시간성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 먹의 농담으로 이루어지는 수묵화가 0과 1로 치환되는 디지털적 사유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수묵화를 애니메이트한 〈A Hero〉와 〈A Dinner〉는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이라기보다는 그의 회화가 내재적으로 담보하고 있는 시간성과 움직임에 실질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김한나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동화, 일러스트레이션의 감수성으로 한나와 토끼 사이의 애절함을 이야기 구조로 담아낸 리얼리티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회화작품을 동영상으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시공간의 혼성을 제시하며 내러티브 애니메이션의 관습적인 서사 체계를 빗겨가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전준호 디지털 애니메이션 2007

메타모포시스, 애니메이션 속 이미지의 뫼비우스적 순환

내러티브의 전개보다는 이미지의 뫼비우스적 변형을 보여주거나 선과 색채 사운드 등을 통해 유동적이고 원초적인 사고와 느낌을 전달하는 애니메이션이 이번 〈크로스 애니메이트〉전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논리적 범주화, 선형적 시간, 안정된 형태, 이 모두를 와해하는 ‘정신분열증’과도 같은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특히 이 시대에 주목받을 만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대표적인 참여작가로 이토 존과 아오키 료코, 션 킴, 블루(Blu), 라스코 시릭, 이광훈 등을 들 수 있다. 이미지의 자유로운 변형과 접합을 보여주는 이러한 형식의 애니메이션은 러시아 영화 제작자 겸 이론가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언급처럼 안정적인 형태를 거부하고 어떤 형태도 용인하는 원초적인 원형질(plasma)로서의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변형, 즉 메타모포시스적 능력은 이토 존과 아오키 료코의 공동제작 애니메이션 작품인 〈Children of Veins〉에서 잘 드러난다. 이토 존과 아오키 료코는 1980년대 비디오 게임, 언더그라운드 일러스트레이션과 아동문화에서 끌어온 미학을 바탕으로 인간 이미지와 변형된 야생 동물 등이 모핑하는 환각 풍경을 자수 평면화와 조각, 드로잉, 애니메이션 필름 등을 통해 표현해 온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작가이다. 일상적인 사물들과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단편적인 장면을 통하여 일상 이미지들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해방시키고 변형의 초현실적인 환각여행을 제시하는 〈Child-ren of Veins〉는 ‘시각적 유령의 집’으로 불리며 정신, 신체, 우주 사이의 무의식적이고 물리적인 관계를 탐구한다.
애니메이션의 신축성과 변형 능력은 1920~30년대 오스카 피싱어, 한스 리히터나 1940~50년대 해리 스미스, 제임스 휘트니 등 실험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추구한 가치이기도 하다. 미국 LA의 칼아츠(Cal Arts)에서 실험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션 킴의 〈내재된 슬픔〉 역시 드로잉을 기반으로, 추상 이미지와 인간의 얼굴 이미지가 서로 침투하고 연접하는 연속적인 비정형 이미지가 사운드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20세기 전반 실험 애니메이션 정신을 공유한다. 메타모포시스를 지향하는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상징계로 분리되기 이전의 이미지, 프로이트가 말한 꿈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논리의 범주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선형적 시간이 파괴되는 그러한 이미지 말이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블루의 〈Muto〉는 바로 범주의 작동화를 무효화하는 애니메이션의 메타모포시스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버려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 후 동영상으로 처리한 이 작품은 얼굴, 기하학적 형태, 곤충 등이 자유자재로 변형할 뿐 아니라 실제 공간과 작가가 그린 이미지가 서로를 간섭하며 교묘하게 중첩되어 완전히 뒤섞인 시공간을 보여준다. 선과 형태 변화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가 전적으로 다른 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라스코 시릭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메타모프〉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괴상하고 믿기 어려운 변형 생물체에 대한 일종의 관리 지침서인 이 작품은 씨앗에서 시작하여 식물로 성장, 잎이 날개와 다리로 변형하는 초현실주의적인 변형 과정을 코믹하면서도 진지하게 보여준다. 이광훈의 애니메이션 영상 〈형상적으로 바라보기〉는 면도 크림으로 형상화한 인간 신체의 모습을 한 컷씩 촬영한 후 이를 애니메이트했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의 엉덩이, 남성의 근육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은 성적 정체성이 불안정해 경계를 벗어난 범주적 모호함을 표상한다.
마지막으로 질 들뢰즈가 애니메이션에 대해 언급한 문구로 이번 전시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물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을 대체하는 것, 구체적 대상을 지워버리며 단지 그 대상의 일정한 측면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언제나 잠정적인 것이고 항상 의문스러운 것이며, 대체되고 치환되는 것이다.”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비정형성, 논리적 범주화의 거부, 다층적인 시공간의 혼합, 언제 어디서든 대체 가능한 ‘크로스’적 성격, 그리고 그 어떤 형태도 용인하는 잠재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원형질로서의 애니메이션이 바로 이번 〈크로스 애니메이트〉전의 전시 작품들을 통해 뽑아낼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이 시대를 표상하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시대성과 접목되는 애니메이션의 해방 언어는 바로 애니메이션 감독뿐 아니라 현대미술 작가들을 매료시킨 이유가 되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 현대미술의 의미작용에 기여할 수 있는 한 부분이라 생각해 본다.

부 후아 <야만적인 성장> 플래시 애니메이션 2008

베르나르 프리츠, 고요한 저항의 그림

학고재 개인전 전경

고요한 저항의 그림

글|정현·미술평론가, 예술학 박사

1954년생인 프리츠가 프랑스 남부 도시 몽펠리에 미술학교(Ecole des Beaux-Arts de Monpellier)를 다녔을 1970년대는 몽펠리에는 물론 니스를 중심으로 쉬포르-쉬르파스(Support/ Surface) 미술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면, 파리라는 미술의 중심이 아닌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시작된 미술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서구 회화에 대한 반-역사적 의식을 고양시켰던 극단적인 마니페스토였다. 형식적으로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있지만, 구대륙의 역사적 무게감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었다는 것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일 듯하다.
프리츠 역시 이 미술운동에 동참하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그의 추상회화가 표현은 물론 주제마저 거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부분이 더욱 그러하다. 쉬포르-쉬르파스는 캔버스 천, 프레임, 물감과 같이 회화를 위한 물질적인 재료를 분석적으로 해체하면서 이미지 자체가 아닌 회화의 구성물들이 창작의 주제이자 동시에 소재로 전복시킨다는 역설적 접근을 통해 ‘그리기’ 또는 ‘표현’ 자체를 거부하면서 창작 행위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실험이었다. 루이 칸(L. Cane), 클로드 비알라(C. Vialla)로 대표되는 쉬포르-쉬르파스 작가들은 회화를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면서 아방가르드적인 접근을 보여준 반면, 프리츠는 그리기 방식에 몰두하면서 회화의 개념화 구축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컬러필드(Color Field) 작가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그의 작업에 비해, 작가 자신은 색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각설한다. 그리고 그는 창작을 한다는 행위는 형상을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우연이 발생하기 위해 오랜 기다림을 거쳐야 한다는 그의 설명이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저자의 죽음’이 공표하는 것과 같이 작가의 전형적인 정체성이 불러일으키는 창작자의 입장 대신 기계적인 행위를 통해 회화에 투사된 수많은 신화로부터 이탈을 원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프리츠는 화가라는 호칭보다 노동자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시절에 열중했던 맑시즘은 그에게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연장된다. 1970년대, 유럽은 젊은 정신에 의한 권위의 재배치를 주장했다. 프리츠는 이러한 시류에 동참하면서 회화와 물질, 색과 형태를 지우면서 회화가 창조되는 그 과정을 투명하게 제시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회화의 탈 신화화는 그리기의 행위에 일종의 조건을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개념회화라는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그는 붓과 캔버스의 크기, 붓질의 여정에 관한 일정한 규칙을 정한 후, 때론 타인의 참여를 통한 공동 작업으로 작품을 완성시키곤 한다. 그는 예술 작품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오히려 창작 활동을 노동으로 환원한 뒤 공동의 것, 또는 회화의 장이 공통의 장이라는 입장을 실천하고 있다.
이처럼 회화의 민주화를 통해 프리츠는 신성화된 예술과 작가의 관계를 해체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003년 파리시립미술관의 개인전에서 그는 “나는 노동의 방식을 선택했다. 회화는 노동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는 기표/기의라는 사회적 상징체계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는데, 궁극적으로 추상 이미지가 불가항력적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 가능성마저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후기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경우, 재현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연상 작용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화가의 감정적인 충동과 에너지의 발산은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지니고 있었던 미덕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프리츠의 경우, 엄격한 개념적 통제를 발판으로 어떠한 연상 기억 회상으로 빠져 들어갈 틈을 선사하지 않는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이러한 의도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캔버스에 아크릴릭, 레진 100×100cm 2008| 캔버스에 아크릴릭, 레진 100×100cm 2008

시간의 궤적을 담기

“모든 작품의 역사는 화면 위에 가시적이어야만 한다”라고 프리츠는 고백한다. 이 말은 작가의 행위와 질료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붓질의 움직임은 형태를 만들어낸다. 하나의 형태, 한 번의 붓질, 주로 작은 붓을 묶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이 한 번의 붓질은 동시에 여러 개의 붓이 만드는 색의 스펙트럼으로 남겨지는데, 이런 접근은 회화적 형태 이전에 일종의 질료(Material)라는 메타적인 해석에 가까운 듯하다.
그럼에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색채 효과는 물질과 힘의 관계에 의해 생성되는 또 다른 질료일 뿐이다. 그리는 자의 움직임과 그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붓의 함수 관계만이 작가가 정해 놓은 개념의 틀이다. 이 틀은 억압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을 제공하는 이중적 장치인데, 그의 몽상 또는 모종의 저항은 시간의 흐름을 친절하게 드러낸다. 한 번의 붓질은 또 다른 붓질로 덧붙여지지만, 서로의 관계는 우연적인 겹침을 만들면서 시공간의 궤적을 드러낸다.
이 효과는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관찰되는데, 작가는 인터뷰에서 그의 작업이 추상화라기보다는 흔적에 보다 가깝다는 주석을 단다. 그에게 시간이란 겹침은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흔적이 만나면서 화학적으로 반응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리고 이런 겹침에 의한 시각적 반응이 생성하는 붓질의 겹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두께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화면의 표면 위로 부상해 있다. 궤적은 두께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불확실한 얼룩으로 화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프리츠에게 그리기란 행위는 결국 즉물적인 대상이자 실존에 대한 물음이다.
씨실과 날실이 직조되면서 하나의 매듭이 완성되듯 어떤 형상도 닮지 않고, 무엇인가를 연상시키지도 않는 그의 회화는 도리어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처럼 화면을 배회하는 붓질의 궤적은 창작 행위의 과정이자 동시에 결과이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빛의 환영에 더 가깝지만, 그 역시 관객의 주관적인 연상일 뿐이다. 프리츠는 관습적인 색채 구성의 법칙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과연 이미지가 생산하는 그 어떤 기호나 상징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까?

응시에 물음을 던지기

궁극적으로 프리츠는 ‘본다’는 행위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유혹, 알레고리 또는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이야기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기호학 사이의 역학관계를 분리하려는 그의 의지는 아마도 온전히 자신 앞에 있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것’을 바라보고자 함일 것이다. 회화의 이미지가 하나의 브랜드로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관한 맑시스트적 인식이야말로 기호-이미지의 상호성을 거부하는 프리츠의 회화관을 대변한다.
추상회화마저 어느 사이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시켜버리는 시스템의 한계는 부지불식간에 보편화되는 풍토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쩌면 생산과 경제적 가치 사이의 매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인 예술마저 자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프리츠의 회화는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생산하지 않기 위한 각가지 방법을 실험한다. 언뜻 그의 작업은 유사한 ‘것’을 반복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절대로 같은 이미지를 재생하지 않는다. 가설이지만, 작가는 유일성이 가지는 아우라의 상실이 역설적 으로 복제품이 생산한 기호 가치의 아우라로 대체되는 순환 고리를 철저히 부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각은 익숙한 것을 원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의무는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저항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끊임 없이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던 들뢰즈가 예술은 저항의 정신이라고 규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비정치적인 행위를 통해 예술의 저항은 비로소 체현된다. 프리츠의 작업이 모던 회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적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시적인 저항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지식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마도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지식이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고전음악의 대위법을 공부하는 이유가 상투적인 화음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것처럼, 프리츠의 개념회화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각적인 화음을 발견하고자 한다.
꾸준한 그의 탐구 정신은 마치 보르헤스가 꿈꾸었던 ‘모래의 책’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는 그런 회화의 세계를 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 무시무시하게 매력적인 책을 결국 우연을 가장한 채 버려버리지 않았던가. 이 소설 속에서 보르헤스는 소유의 포기를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자유의 의지, 스스로 존재하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존 케이지의 ‘침묵’이 우주의 소리, 소음을 지각하는 실존적 경험을 유도했듯이, 프리츠는 그림을 그리되, 그 어떤 재현도 부정하고 회화에 묻어 있는 수많은 문명의 흔적을 지우면서 시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술 속의 저항은 이처럼 고요하게 이루어진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레진 89×116cm 2008

2009 April Special - Flower POST-Flower

왼쪽·김지원 <맨드라미> 캔버스에 유채 44.5×34.5cm|오른쪽·김지원 <맨드라미> 리넨에 유채 53×33cm 2006

Today's Flower in art

Life & Death

작은 봉우리에서 피어난 꽃이 활짝 만개한 후 이내 시들어버리는 모습은 종종 인간의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이렇게 꽃이 피고 지는 현상과 그 시간성을 담아내는 미술작품도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순환을 연상시킨다. 독일 출신 사진가 마이클 웨슬리는 장시간 노출을 통해 꽃이 폈다가 시들어가는 과정을 한 장면에 담는다. 유키오 나카가와는 일본 전통 꽃꽂이 ‘이케바나(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꽃이라는 뜻)’의 기존 통념을 깨듯, 꽃이 죽어가는 과정을 설치 작업으로 보여준다. 모두 사진과 영상과 같이 시간성을 포착할 수 있는 매체가 등장했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전통적인 회화 방식으로 생명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들도 있다. 김지원의 <맨드라미> 연작은 막 피기 시작하는 맨드라미의 수줍음부터 자줏빛 붉은색으로 강렬한 생의 의지를 드러내는 절정기, 서리를 맞고 처참하게 주저앉은 마지막 모습까지 묘사한다. 이는 삶과 죽음부터 인간의 욕망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사를 암시한다. 만개한 생화를 얼린 후 큰 규모의 회화로 그려 낸 마크 퀸의 꽃들이 드러내는 생생함은 그 절정기의 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죽음의 유혹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나라든지 장례 절차에 반드시 꽃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픈 추모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얀 페이밍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놓인 꽃을 하얀색의 추상화처럼 표현하여 천상으로의 염원을 담았다. 회화의 조형적 가능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김혜련은 존경하던 소설가 박경리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그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종이 꽃상여의 꽃을 화면 속에 불러들였다. 한편 안성희의 사진설치 작품 <정원방문기>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성 테레사 수녀의 관이 운구되던 마지막 길을 담았다. 성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마음은 길에 가득 뿌려진 아름다운 꽃잎에서 드러난다.

왼쪽·피에르&질 2000|오른쪽·로버트 메이플소프 <꽃> 1983

Sexuality

연약한 꽃잎이 수줍게 피어난 모습에서 여성성(Femininity)을, 혹은 화려하게 만개한 꽃에서 성적인 코드(Eroticism)를 발견하고 시각적으로 극대화시킨 것 또한 예술가들이 한 일이다. 자극적이고 금기시되는 소재를 사진에 담아 성공과 동시에 외설 시비를 불러일으킨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꽃에 성적인 암시를 농후히 담아낸다. 실제로 동성 커플이기도 한 피에르 & 질의 사진에는 원색적이고 인위적인 꽃이 가득하다. 꽃은 그들이 표현하려는 성적 판타지를 극대화시키는 장식 역할을 한다. 컬러와 흑백 기법, 활짝 핀 꽃과 시든 꽃을 교차시켜 보여주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꽃> 시리즈를 흔히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여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독특한 에로티시즘이 말해주듯, 작품 속 삶과 죽음의 과정은 성적인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성을 꽃에 비유해 온 시각은 최근까지도 미술 속에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터키 출신 영상작가 커틀럭 아타만의 필름 <베로니카 리드의 사계절>은 관상용 아마릴리스 구근을 키우는 한 영국 여성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는 과정에서 꽃과 여성의 삶을 조합한다. 사실 오래전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관습적인 시각이 여성을 자연에 비유하여 수동적으로 보는 남성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비판했지만, 오히려 본질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경우는 이를 작품에 역으로 반영하여 꽃과 여성성을 결부시켰다.
쿠바 태생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애나 멘디에타는 그의 <실루에타> 시리즈에서 풀밭에 누운 후 그 주변에 씨앗을 뿌린 다음, 시간이 흘러 자신의 흔적에 따라 꽃과 풀이 자라난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이는 대지와 여성을 동일시하는 모더니즘적 시각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큐레이터, 비평가로 활약하는 홍콩 출신의 앤소니 령 포 샌 역시 2002광주비엔날레에서 꽃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역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해석된다.

뱅크시 <꽃> 런던 폴라스트리트 2007

Politics & History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상이 척박하고 거칠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더욱 아름답고 순수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역사와 정치적 요소들을 비판하기 위해 꽃을 결부시키는 것은 풍자와 역설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목적도 있다. 산야 이브코빅은 2008카셀도큐멘타에서 프리데리치아눔미술관 앞 프리드리히 광장에 양귀비꽃을 심었다. 이 광장은 18세기 프리드리히 2세의 정치 권력의 상징이자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가 행군했던 곳으로, 하루에 2번씩 아프가니스탄과 크로아티아 여인들이 부르는 혁명가가 울려 퍼진다. 작가가 광장에 심은 양귀비꽃은 강대국의 권력이 좌우하는 세계 속에서 글로벌 문화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반어적 기재다.
같은 광장에 떡갈나무를 심었던 요셉 보이스는 1973년 장미가 물을 먹고 결국 시들어 죽을 때까지의 물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눈금 있는 실린더에 장미를 꽂아 놓고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장미>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긴 채 길거리 벽에 시대의 현실을 폭로하는 그림을 남기는 영국의 그래피티아티스트 뱅크시. 그가 런던 폴라스트리트에 그려 놓은 한 줄기의 꽃은 ‘미술계의 얼굴없는 테러리스트’가 길가에 남긴 반항의 외침처럼 느껴진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임옥상이 그린 강렬한 <꽃밭>, 군인의 위장용 카무플라주를 꽃으로 바꿈으로써 폭력을 아름다움으로 대치한 이용백의 <엔젤 솔저>가 대표적이다. 작가 이상현은 <조선의 봄> 연작에서 ‘복사꽃’모티프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예로부터 무릉도원과 같이 어떤 이상향이나 살기 좋은 곳을 상징하던 복사꽃을 조선시대 사진과 합성한 그의 작품은 밀려오는 서양 문화들 속에서 어떻게 우리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마이클 린, 프랑스 릴 팔레 데 보자르 전시장 아트리움 설치 장면

Painterly Touch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회화 속의 꽃이란 단순한 장식성을 목적으로 하거나, 혹은 ‘바니타스’처럼 상징적 모티프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면서 꽃은 회화의 다양한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대상으로서 화폭에 더욱 생기를 부여하고 있다. 김홍주의 작품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꽃은 흡사 거대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무수한 세필의 흔적이 전체 꽃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렇게 고된 몰입의 행위를 드러내는 작가의 방식은 회화의 오랜 대립 구도인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교묘히 무너뜨린다. 한수정의 작품 또한 꽃을 거대하게 확대한다. 여기서 작가는 보편적인 꽃의 형태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지닌 ‘동물성’과 ‘생명’이라는 본능적 에너지를 극대화시킨다.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에서 처음 등장한 후 무라카미 다카시와 같은 ‘팝아트’ 계보를 통해 미술 속에서 이어져 온 패턴화된 꽃은 최근에 보다 심도 깊은 의미생산 기호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마이클 린은 1960년대 타이완에서 대량생산된 도식적 꽃무늬 패턴을 사용해 공간을 뒤덮는 화려한 회화 작업을 발표했다. ‘꽃’이 아닌 ‘꽃무늬’를 그리는 그의 작품과 팝아트의 차이점은 그의 작품이 공간과 설치라는 경계로까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점에 있다.
문화적인 부호와 기호, 그리고 색상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정형화된 사고의 패턴과 조각들을 회화적 언어로 불러들이는 박미나의 작업 중 에 등장하는 꽃은 디지털 환경에서 문자를 대신하며 사용되는 ‘딩벳(Dingbat) 폰트’다.
민화와 같은 전통 회화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꽃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김근중은 전통적으로 가정의 화목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올오버페인팅처럼 화면 가득히 패턴화시켜 그린다. 홍지연은 민화적 모티프에 개인의 기억이나 사회 속의 숫자 문자 상징 등을 심어 이미지의 의미를 전복시키는 작업을 선보인다.

수다 요시히로

Artificial Creation

꽃의 짧은 생명을 대신하고자 만들어진 조화. 그것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곁에 간직하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화는 사실 생화인 척하는 가짜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그 조화의 인공성은 도리어 미술가들을 매혹시켰고, 미술 속의 ‘가짜 꽃’은 인공적인 조작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개념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키치적인 예술적 감성에서 교집합을 이루는 제프 쿤스와 최정화의 꽃들처럼 말이다.
혹은 진짜와 가짜 사이의 시각적 차이를 교묘히 교란시키는 방식의 인공꽃도 있다. 수다 요시히로가 전시장 구석에 심어 놓은 한 송이의 꽃은 사실 나무를 정교하게 깎고 채색하여 만든 가짜다. 이 극사실주의 조각은 개념이 앞서는 현대미술 속에서 쉽게 찾기 힘든 작가의 수공적 노력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자연과 인공’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언뜻 보면 벚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팝콘꽃이 활짝 핀 장면을 구성한 사진가 구성연은 ‘착각’에서 오는 유쾌함을 포착한다. 또한 무늬가 없는 흰 도자기에 염색된 머리카락을 붙여 17, 18세기 유럽의 전통 타일무늬를 만드는 작가 이세경은 재료의 전복을 통한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한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예술 분야에서 꽃이라는 생명에 대한 인공 조작의 범위 또한 넓어지고 있다. 꽃잎에 컬러 필터를 투과한 조명으로 차가운 색상을 가미하여 전혀 다른 분위기의 꽃을 만드는 엘리스카 바르텍의 사진 작업은 ‘어두움과 슬픔의 꽃’을 은유한다. 조화를 촬영한 이강우의 사진은 현실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기법으로 자연물을 모방한 인공물을 담아내는 이중적인 개념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초충도> 속의 꽃들이 바람에 유유히 흔들리거나 함께 있는 곤충들이 살아 움직이는 이이남의 ‘디지털 병풍’ 역시 과학 기술이 미술에까지 침투하게 된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진 작업이다.

김수자 <연꽃:영의 지대> 프랑스 릴 팔레라모 설치 전경 2003

Contemplation

독일에서 유독 많은 철학자가 배출된 이유는 도심 곳곳의 무성한 숲 덕분에 생겨난 ‘산책 문화’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을 사색으로 이끈다. 그 가운데 꽃은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색과 명상을 북돋우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볼프강 라이프의 주재료는 꽃가루다. 이는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우유 돌 밀랍 등과 함께 자연의 순환과 그 안에 내재한 비가시적이고 영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서구 자연과학을 부정하고, 예술을 통해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라이프가 직접 들판에서 꽃가루를 채집하는 장면은 하나의 사색과 명상의 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수자는 프랑스 릴의 한 공간에 한국의 절에서 가져온 연등을 동심원 형태로 달아 불을 밝히고, 공간 내부에 불교 이슬람교 가톨릭교의 종교 음악을 틀어 놓았다. 여기서 연꽃 모양의 등은 하나의 종교를 초월해 관람자가 자기 내면의 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명상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윤리는 사진의 모델이 된 여성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세계를 포착하고자 초상과 정물을 접목시킨다. 감성적이며 철학적인 그의 작품 중에는 마치 사색에 빠진 듯 잠든 여인의 평온함을 부드러운 꽃에 비유한 경우도 있다.
꽃은 조용한 관조를 이끄는 동시에, 삶과 죽음의 문제부터 다양한 희노애락까지 개개인이 겪는 감정과 기억들을 불러내는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기도 한다. 단순화되고 귀여운 인물이 가득한 작가 전경의 회화는 내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마치 일기와도 같이 사적인 생각과 경험들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꽃이 자주 등장한다. 임주리의 그림은 얼핏 하나의 꽃을 의인화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꽃의 모습은 꽃에 스스로를 빗대어 그 내면을 반영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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