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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1.01

Abstract

특집 GLOBAL KOREAN ARTISTS 12 & CURATORS 6 신묘년 새해를 맞아 art는 해외로 시야를 넓힌다. 바로 세계 속의 한국 작가와 큐레이터가 그 주인공이다.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세계'라는 테두리는 더 이상 지역적인 경계도, 혹은 오로지 선망해야 할 거대한 무대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가까운 공간에서 활약하고 있는 작가와 작품만을 익숙하게 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art는 세계 각지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국 작가들을 찾아 봤다. 작가 조사를 위해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6명의 큐레이터를 선정, 총 12명의 작가를 추천받았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도 있고,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덜 알려진 작가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이라는 배경이 작업에 어떠한 영향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는지 역시 제각각이다. 지금, 다양한 형식과 어법으로 글로벌 시대의 아트씬을 그리고 있는 12명의 작가를 소개한다. 이어서 '미술'로 세계를 엮어 가는 큐레이터 6인에게 공통 질문을 던졌다. 특히 특정 기관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행보를 보여 주는 큐레이터들에 초점을 맞췄다. 과연 이들이 생각하는 글로벌 시대의 큐레이터십, 그리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을 향한 조언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큐레이터 김승덕을 심층 인터뷰해, '1세대 글로벌 한국 큐레이터'로서의 풍부한 경험과 에피소드를 세세히 들어 본다.

Contents

01    표지  이지은 <꽃> 캔버스에 혼합재료 160×160cm 2010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온라인 채널 www.artwa.kr 오픈합니다

38    핫피플  
    브뤼노 라투르_예술과 과학의 접점을 찾다  김재석
    모철민_문화 민주주의로 가는 길  호경윤
    이인범_‘도자의 재발견’을 꿈꾸다  김수영
 
42    프리즘    
    정중정(靑爭中靑爭)의 미술시장, 새 돌파구 찾자  정준모
    문화예술 정책, 여전히 환골탈태해야 한다  호경윤

46    포켓 속〉〉〉디카 속〉〉〉이미지 채집
    런던의 겨울  신기운

64    포커스
    피카소와 모던아트展  이선영    
    윤향란展|안경수展  양정무    
    박진아展|헤르난 바스展  정현
    정마리의 정가, 이수경의 헌신展  김성원

80    특집 Global Korean Artists12 & Curators06
    이슬기|장혜연|진  신|유혜리|팀  리|조의숙
    김지은|이재이|천경우|남효준|김성환|알렉산더 우가이
    최빛나|김승덕|김유연|서은아|문인희|이지윤

122    오후의 아뜰리에  
    나의 그림은 수신의 도구  박서보
    
124    아웃 오브 코리아  진영선
    A Contemporary Vision of Fresco  헨리 메릭 휴즈
    
131    테마 스페셜 메이드 인 팝랜드
    이미지 왕국  윤진섭

150    이슈 앤 크리틱 ㅤㅉㅏㄷ 
    신체의 표현과 예술의 사유  김백균

156    이미지 링크  월터 마틴&팔로마 무뇨즈
    
162    동방의 요괴들  
    좌충우돌 ‘요괴들’, 2010년을 결산하다  오선영 조남준 이수연 백곤

170    전시리뷰
    망가: 일본 만화의 새로운 표현|4惟공간: 아주 가까운 풍경
    백남준|김진기|양아치|수니 마코소브
    권오상|차민영|장민승|전소정    

180    전시일정 
    
182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토마스 슈트루트의 실패

슈트루트가 찍었어야 했던, LNG선의 핵심이며 궁극의 테크놀로지의 스펙터클인 LNG탱크 내부. 규모가 너무 커서 임시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인바 특유의 번득이는 질감과 공간감이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슈트루트의 사진 기술로 이걸 찍었으면 분명히 대단한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토마스 슈트루트의 실패
왜 산업적 스펙터클은 사진 찍기 어려운가

글|이영준·기계비평가

내가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조선소를 방문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칙사 대접’이었다. 부산 김해공항에는 차로 치면 에쿠스급에 해당하는 아주 널찍한 임원용 헬리콥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회사에 도착하자 ‘계원조형예술대학 이영준 교수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타이틀로 시작되는 환영 동영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차장 한 분이 온종일 나를 안내해 주었고 점심식사도 회사 구내식당이 아니라 거제도에서 제일 맛있는 갈치조림으로 대접받았다. 그런 대접을 받으며 둘러본 조선소는 그야말로 기계비평가의 천국이었다.
재화중량이 10만 톤이 넘는 큰 배들을 조립하는 현장은 놀랍도록 기묘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철 구조물들의 전시장이었다. 무게가 몇십 톤에서 천 톤에 이르는 선체, 늑골, 덱하우스(갑판실), 발라스트 탱크, 엔진, 프로펠러, 러더(방향키) 등 배의 여러 부분을 이루는 온갖 종류의 철 구조물들은 철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의 숭고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다를 지배하는 거인들의 경연장이었다. 정보와 문화컨텐츠같이 비물질적이고 소프트한 산업이 주로 수익을 창출하는 시대에 철은 더 이상 산업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조선소에서는 여전히 철이 대지의 주인공임을 당당히 내세우고 있었다. 그 다양한 구조물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안토니 카로에서부터 최만린에 이르는 철 조각가들이 궁극적으로 꿈꾸던 필드가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거대한 철 구조물로 된 리처드 세라의 작업은 실제로 조선소에서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만들던 인부가 구조물에 깔려 죽은 적도 있다고 하니 그는 조선소의 철이 가진 위험한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한 조각가가 아닌가 싶다. 조선소는 또한 너무나 많은 포토제닉한 사물들이 넘쳐나는, 사진가의 꿈동산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형태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기능의 아름다움도 있었다. 배는 거친 바다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모든 부분은 생존을 위해 설계되고 만들어진다. 선수 부분은 두꺼워야 하고 프로펠러는 효율적으로 물을 뒤로 밀어내야 한다. 러더는 배의 방향을 잘 조절하면서도 수압에 견딜 수 있도록 유체역학적이면서도 구조공학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하고, 엔진은 큰 부하가 걸려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야 하며 정박할 때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도(dead slow) 제어가 잘 되야 한다. 그것이 기능의 아름다움이다. 하나의 배가 만들어지고 물에 떠서 항해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요소들이 이루어 내는 정교한 안무이다. 그 거친 물건들이 그런 일들을 이루어 낸다는 것은 예술 그 자체였다. 감동으로 가슴이 뛴 나는 그런 안무와 형태와 구조, 기능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기 위해 커다란 백통 렌즈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안내사원은 질겁을 하며 사진은 찍을 수 없다고 했다. 칙사 대접은 거기까지였다.
대우조선해양에서는 좋은 교통편, 좋은 식사, 좋은 동영상은 제공되지만 사진은 안 되는 것이었다. 대우조선해양의 담벼락에는 조선소의 시설을 사진 찍는 사람을 발견하면 회사 보안과로 신고해 달라고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하긴 13000TEU 급의 세계에서 제일 큰 컨테이너선에서부터 LNG선, LPG선, FPSO, 시추선, 벌크 캐리어, VLCC, 그리고 종류를 밝힐 수 없는 배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배를 만드는 곳이니 산업 보안이 중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우조선소를 방문했던 일은 내 생애에 최고의 미술관을 단 한 차례만 보고 온 것과 같은 매우 안타까운 이벤트로 막을 내렸다. 대우조선해양을 몇 번이고 또 다시 가서 샅샅이 관찰하고 사진으로 찍고 연구하여 책을 낸다던가 전시를 하고 싶었지만 명함에 호가 들어 있는 근엄한 홍보 담당자가 (동양화가나 정치가가 아닌 사람 중에 호를 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 “방문을 최소화해 달라”고 했다. 즉 더 이상 오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나의 체험은 거기서 끝났다. 
세계적인 사진가 토마스 슈트루트(Thomas St ruth: 이름 표기에 대해 한 마디 하고 넘어가자. 그는 독일 사람이므로 그의 이름은 독일식으로 읽어 줘야 한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스트루스라고 읽어 줄 이유가 없다. 박찬호가 아무리 메이저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우리가 챈호우 팍이라고 읽지는 않지 않는가)가 대우조선해양을 방문했을 때 느낀 것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거대한 배의 구조물들과 복잡한 형태들, 회로들의 메커니즘에 대해 경이를 느끼고 매료되었던 것 같다. 유럽에는 대우조선해양 만큼 큰 조선소가 없기 때문에 그는 스케일에 압도되었음이 틀림 없다. 그런 곳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형 카메라를 펼쳐 놓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세계적인 사진가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세계적인 사진가의 평이한 사진

그러나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그의 대우조선소 사진은 세계적인 사진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실패작이다. 그가 평소에 자신의 대표작으로 내놓던, 박물관이 얽어 내고 있는 공간 인간 문화 아우라의 복합체에 대한 정교하고 기이한 사진적 해석은 엿볼 수 없었다. 그 사진들은 누구나 가본 박물관이지만 토마스 슈트루트만의 시각으로 매우 미묘하게 만들어낸 사진이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이 들어 있고, 그래서 좋은 작업으로 칭송받는 것이다. 그가 찍은 여러 나라의 도시 공간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가본 곳이지만 그의 사진 속에서 미묘한 해석 작용에 힘입어 새로운 공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그 사진은 사진가의 시선과 박물관 관람객과 공간의 복합적인 조우가 빚어 내는 하나의 이벤트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나 그의 대우조선해양 사진에는 그런 이벤트가 빠져 있었다. 즉 작가가 사물을 마주 대할 때 퍼뜩하고 튀는 그런 섬광이 없었다.
그는 대우조선소를 찍은 사진을 거의 4m에 달하는 대형 프린트로 전시했다. 그가 이런 대형 프린트로 전시를 했을 때 사람들은 현장의 스케일에 다가가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길이로는 수백 미터, 무게로는 수만 톤에 이르는 육중하고 복잡한 조선소의 현장을 4m의 프린트로 뽑던 10m의 프린트로 뽑던 현장의 스케일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진이 현장의 생생함을 살려내는 듯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진의 트릭 효과일 뿐이라는 점은 사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진은 완벽해지면 질수록 현장과는 멀어진 독립된 실재가 된다.
사실 대형 사진 프린트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사진이 회화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은 슈트루트의 사진과 크기가 비슷한 폭이 4m에 이르는 대작이지만 한눈에 보고 끝나 버리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제공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디테일들을 일일이 뜯어보도록 초대한다. 다비드의 그림은 등장인물들의 얼굴, 그들의 옷, 실내장식, 상징물들, 인물 각각의 중요도에 따라 다르게 떨어지는 빛 등 수 많은 디테일로 가득 차 있고, 이들 디테일들은 보는 이들을 일일이 훑어보는 시각적 경험으로 이끈다. 슈트루트의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화면 속의 디테일들을 훑어보면서 미로 속을 헤매듯이 그 사이를 요리조리 헤매는 시각적인 골목을 만들고 그것을 종합하여 시각적 경험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슈트루트의 대형 사진은 회화라는 역사적 참조점을 가리키고 있다. 시각적인 미로를 헤매는 경험은 지렁이가 기어가듯이 느리고 비체계적이었다가, 갑자기 이쪽에서 저쪽으로 점프도 하는 등, 다양한 속도와 방향을 가지고 있다. 사진이 아무리 대상의 실재를 포착하여 그것의 인덱스가 된다는 독특한 존재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보는 경험에서는 회화와 비슷하다. 대개 사람들은 사진을 겉으로 쓱 훑어보고는 건물이네, 사람이네, 이렇게 빠르게 보고 지나가는데 이런 대형 사진은 오래도록 찬찬히 볼 것을 요구한다. 모든 사진이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 전제는 사진 속의 모든 디테일들이 훌륭한 미장센을 통해 잘 배치가 되어 위에서 아래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이리저리 훑어볼 때 다양하고 수수께끼에 가득 찬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슈트루트의 박물관 사진은 분명히 그런 경험을 제공하며, 그의 사진이 박물관에 대한 어떤 새롭고 독특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은 큰 관점이 아니라 이런 디테일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그가 찍은 대우조선해양 사진은 그런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가? 즉 그는 건조 중인 선박의 표면을 찍으면서 사진 전체에 디테일들이 가득 차고 그것들이 팽팽한 긴장 속에 복잡한 시각적 내러티브를 만들도록 사진을 구성했는가? 아니다. 슈트루트는 LNG선을 드라이독의 바닥에서 찍었다. 사진 양쪽에는 거대한 LNG선의 하부 선체가 크게 확대되어 있었는데 이런 장면은 조선소에서 찍은 것 치고는 너무나 평이한 것이다. 선체의 하부는 뭍으로 올라와 죽은 고래처럼 드라이독 바닥에 퍼질러 놓여 있는 형국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 슈트루트만의 시선으로 해석된 어떤 독특한 시각적 경험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파도를 견뎌야 하는 배는 대단히 강도가 센 구조물이고, 슈트루트의 사진은 배의 그런 특성을 토대로 해석했어야 했다. 그가 강철 산업의 폐해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위대함과 놀라움을 표현하려 했다면 말이다. 뒤러가 그린 산토끼가 뒷다리 속에 팽팽하게 숨어 있는 근육과 뼈의 긴장 때문에 언제라도 앞으로 튀어나갈 듯이 보이는 것처럼, 슈트루트는 LNG선을 찍으면서 그것이 대양을 헤쳐 나가는 힘의 근원에 주목했어야 했다.

토마스 슈트루트 <건선거, DSME(대우조선해양)조선소 거제도> C-프린트 218.8×272.5cm 2007

슈트루트가 찍었어야 했던 것

사실 안전문제 때문에 조선소에서는 아무 곳이나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래서 슈트루트에게 주어진 공간은 기껏 드라이독의 바닥 정도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조선해양이 만들고 있는 LNG선은 RV(regassification vehicle)이라 하여 배에서 액화천연가스를 다시 기화하여 육지로 내보낼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최첨단의 배이다. 따라서 갑판 위의 구조물이 대단히 크고 복잡하다. 그것이 슈트루트가 사진 찍으려 했으나 잡아 내지 못한 그 배의 본질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의 본질을 잡아냈느냐 못했느냐가 아니다. 어차피 사진이란 대상으로부터 독립한 또 다른 실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사진이 산업적 대상에 대한 수많은 사진들 중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산업공학적인 대상을 찍어서 작품으로 만들고 책으로 낸 사진가들은 아주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면 토마스 플로어쉬츠는 제트기의 여러 디테일들을 찍어서 《Jets》라는 책으로 냈고 토마스 루프는 기계 사진들에 약간의 회화적 처리를 해서 《Maschinen》이란 책을 냈다. 슈트루트 보다 훨씬 덜 유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집중적으로 산업기계를 찍고 좋은 해석을 보여 준 사진가들로는 로버트 폴리도리에서부터 에드워드 버틴스키, 미치 엡스틴, 하다케야마 나오야 등이 있다. 물론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는 아름답다》를 낸 알버트 랭커 파취도 있고 미국에는 마가렛 버크 화이트와 폴 스트랜드도 있어서 산업사진의 지형이 훨씬 복잡해진다. 슈트루트 정도의 사진가라면 이런 지형 속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진을 보여 줬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안 찍었는지 못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산업과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에 정말로 매료되었고 그것을 사진으로 나타내고 싶었더라면 찍었어야 할 것이 사진의 뒤쪽에 조그맣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LNG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LNG탱크이다. 높이가 46m, 길이가 50m에 이르는 이 탱크 3개가 붙어서 배 한 척을 이룬다. 섭씨 영하 162℃로 보관돼야 하는 액화천연가스의 특성 때문에 LNG탱크는 열팽창율이 적은 인바(Invar, FeNi36)라고 불리는 철과 니켈의 합금으로 만들어진다. 탱크 내부에 들어가 보면 인바 특유의 질감과 광택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간이 숨어 있다. 공사용으로 임시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정도로 큰 공간이다. 그곳은 누구나 입을 쩍 벌릴 만큼 초현실적인 규모와 느낌의 공간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다. 이 탱크야말로 어떤 사진가든 군침을 줄줄 흘릴 만큼 대단히 포토제닉한 대상이다. 그것은 사물의 디테일이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이다. 슈트루트가 이런 LNG선의 밑바닥만 찍었다는 것은 사물의 핵심에 들어가 보지 않고 겉만 훑은 것이다.
그가 대우조선에서 찍은 또 다른 사진인 <반잠수식 시추선>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반잠수식 시추선을 그라운드 레벨에서 찍었는데, 시추선이 가진 복잡한 구조의 아름다움은 나타나 있지 않고 그저 건조중인 시추선이 로프에 묶여 있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박물관을 찍을 때 박물관 공간과 관객의 특수한 만남이 이루어 내는 이벤트를 꿰뚫어 보았던 시선은 여기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앞서의 LNG선 사진과는 달리, 슈트루트는 반잠수식 시추선을 하나의 모뉴먼트로 보고 찍은 것 같다. 시추선은 4개의 다리로 우뚝 버티고 서 있으며, 그것들을 묶고 있는 홋줄들은 거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이 사진도 평범한 시각에서 찍은 것일 뿐 슈트루트라는 이름에 걸맞는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대우조선이라는 대단히 복잡한 대상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 내용과 감각이 대단히 빈곤한 사진을 만들어 냈다. 그런 결여는 아무리 좋은 프린트 기술에다 좋은 액자를 쓴다고 해도 보충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감각적으로 혹은 지식이라는 면에서 조선소와 선박에 대해 어떤 것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사진은 지식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사진가는 자신이 사진으로 만들어 내는 대상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는가?’이다. 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만일 그가 한강변의 야경을 장노출로 찍어서 인터넷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 slrclub.com에 올리는 아마추어 사진가라면 사진의 대상에 대해 몰라도 된다. 그가 찍은 것이 성수대교건 광안대교건 그는 아름다운 스펙터클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마스 슈트루트가 만들어 내는 사진 행위는 감각 활동이자 지식 활동이다. 사진은 왜 단순한 감각 활동이 아니라 지식 활동인가?
안셀 애담스의 예를 들어 보자. 그라면 당연히 자신이 사진 찍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특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의 사진은 그런 지식이 없으면 찍을 수 없는 것이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이루는 바위의 질은 어떤 계절에 어떤 시각에 어떤 방향의 빛을 받아야 아름답게 빛나는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지리적, 지질학적, 기상학적 지식에 대해 알고 있다. 또한 그의 사진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대한 지식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슈트루트가 만들어 낸 박물관 사진도 박물관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구성하고 있다. 박물관의 기능과 의미를 주제로 다루는 미술사학회나 박물관학회에서라면 ‘동시대 시각예술에 나타난 박물관의 의미’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누군가가 슈트루트의 사진이 어떻게 박물관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점을 제공하고 있는지 진지한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우조선해양 사진을 놓고 조선공학회의 ‘선박의 구조해석에 대한 시각적 접근방법’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누군가 발표를 할 것인가? 아니다. 그의 사진은 그저 광각으로 찍은 평이한 모습이지 선박과 해양에 대해 어떤 지식도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찍은 부산항 감만부두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진의 유일한 특징은 보통 사람은 출입이 되지 않는 컨테이너 부두의 스펙터클을 대형 카메라로 찍어서 좋은 프린트로 보여 줬다는 것 뿐이다. 빨갛고 파란 컨테이너들이 수만 개 쌓여 있는 모습은 분명히 대단한 스펙터클이지만 슈트루트의 사진에서는 의미 없는 색의 패턴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그의 박물관 사진에 나타난 특징과 장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실패작이다. 이런 종류의 사진이라면 슈트루트보다 훨씬 덜 유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집중적으로 찍고 좋은 해석을 보여 준 사진가들이 전세계에 많다. 로버트 폴리도리에서부터 에드워드 버틴스키, 미치 엡스틴, 하다케야마 나오야 등 산업적 스펙터클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그것들을 자신의 주제로 삼아서 차별화된 사진 언어를 만든 작가들이 많은 것이다. 조선소는 그들의 홈그라운드다. 토마스 슈트루트는 남의 홈그라운드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대우조선해양과 거기서 만들어지는 선박의 특성에 대해 이들보다 더 많이 연구해서 다르고 더 좋은 사진을 만들던가 말이다.
다만, 그가 이번에 찍은 평양 사진에는 평소에 그의 사진에 들어 있는, 공간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힘이 보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평양이라는 도시가 대단히 포토제닉한 곳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안드레아스 구어스키(거스키는 미국어식 표기이므로 쓰지 않겠다)가 평양 사진으로 재미를 보았을 만큼 평양은 전세계의 모든 사진가들이 군침을 흘리는 새로운 사진의 보고이다. 평양이라는 곳 자체가 이미 독특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꺼리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삼엄한 감시를 뚫고 버스에서 몰래 찍어 온 도촬 사진에서도 나타난다. 평양에서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하는 사진가라면 바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슈트루트가 찍은 남한의 여러 곳 사진에서는 평소 그 특유의 해석의 힘은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평양은 슈트루트에게 유리한 싸움판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곳에서는 싸움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 그는 남한의 길거리와 대우조선해양에서는 사진의 싸움을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토마스 슈트루트가 선박 사진 전문가도 아닌데 배사진 몇 장 잘못 찍었다고 해서 그를 대역죄인 취급해도 되는 일인가? 한국에서 사진 전시 서문에 많이 쓰듯이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물의 외관 이면에 숨어 있는 변하지 않고 알 수 없는 신비스런 본질을 찍었는데 왜 선박이라는 한낱 소재만 물고 늘어지냐고 따진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 글 쓴 당신, 카메라 들고 단순한 기록 한 번 해보시오. 깡통 하나 있는 그대로 찍을 수 있는지 봅시다) 요즘의 사진은 다양한 지식의 분야들에 팔을 걸치고 있고, 다양한 담론에 비추어 평가가 가능하다. 사진은 단순한 아름다운 이미지 활동이 아니라 감각 활동이며 지식 활동이다. 활동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작동하는 실천(practice)이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가만히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만들어 내고 은근히 강요하고 보는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공평무사하게 평가하기

더글라스 크림프가 <미술관의 낡은, 그러나 도서관의 새로운 주제>라는 글에서 썼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이 나타나면서 사진이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형태로 분류되고 보여질 수 있다면, 그래서 에드워드 루샤의 주유소 사진을 길거리 기록의 범주에 넣어도 된다면 토마스 슈트루트의 한국의 산업적 스펙터클 사진들은 세계 여러 나라의 산업적 스펙터클 사진이라는 영역에서 보여지고 평가될 수 있다. 전세계의 항만과 공항 주변에는 배나 항공기를 자신만의 시각에서 찍기 위해서 밤낮으로 죽치고 앉아서 사진 찍고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가들이 아주 많다. 토마스 슈트루트가 전세계의 유수한 미술관에서 전시한 유명 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찍은 엉성한 산업 사진이 그들의 사진보다 높게 평가될 이유는 없다. 화가 이우환이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어 놓으면 그게 상징이 되고 인간이 되고 세계가 되고 미래가 되는 식으로 무한 확장되는 신비스런 예술적인 아우라의 프리미엄은 사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신즉물주의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사진가들의 사진에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슈트루트의 사진을 어떠한 당연시 되는 전제도 없이, 선수가 메시건 박지성이건 옵사이드를 범하면 축구심판이 바로 깃발을 올려 버리듯이 공평무사하게 보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래서 내가 택한 비평의 방법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대요”식이다. 유명작가에 대해 전제로 깔려 있는 지식들에 일부러 눈을 감고, 작가의 권위나 아우라가 부여해 주는 독특하고 알 수 없는 기대 가치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토마스 슈트루트가 찍은 대우조선해양 사진들과 부산항 사진은 실패작이다.

크리스찬 마클레이

크리스찬 마클레이 <시계> 싱글채널비디오 24시간 2010 ⓒChristian Marclay Courtesy White Cube

영상속의 몇 가지 '결정적 순간'

| 서현석 ·  전시기획자,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1995년에 만든 에세이 영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하룬 파로키는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 장면들이 이후 영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무수히 반복되어 왔음을 인지한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거나, 일꾼들이 건물을 허물거나, 가족이 식사를 하는 상황 등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이하게도 영화사의 주된 모티프가 되지 않은 하나의 특별한 ‘뤼미에르 순간’에 예리하게 집중한다. 바로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다. 파로키는 노동자들의 노동 가치가 만료되는 이 전환의 과정이 자본주의 문화에서 왜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던진다. 영화사가로서의 파로키의 분석적 시선은 보이지 않는 관찰자가 되어 영화 이미지의 패턴에 내재하는 정치적 함의를 날카롭게 헤쳐 본다.
이후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전에 포함되어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된 2006년 작 설치 작품 <110년 동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만들 때까지 파로키는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퇴근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장면 8개를 발굴했다. 8개의 모니터에 나타나는 각 이미지들은 파로키의 소환에 의해 나름의 극적 문맥을 떨군 채 공장의 특정한 장소성에 내재된 사회적인 문맥과 영화 장치간의 구조적인 연관 관계를 드러낸다. 여덟 번 반복되는 공장의 출구와 이를 말없이 빠져 나가는 군중의 파편적 이미지에서 파로키는 혁명의 부재와 자본주의 권력의 첨예함을 읽는다. 촬영지로서의 공장 출구를 보여 주는 작은 모니터들은 사회적 순응을 유도하는 영화의 거대한 권능을 직면하는 장소가 된다. 파로키는 영화적 표현을 역사적인 구조 속에서 인식함으로써 영화적 시선과 쾌락을 관통하며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암묵적 질서를 가시화한다.

크리스찬 마클레이 <비디오 사중주> 4채널 DVD 프로젝션과 사운드 14분 243.8×1219.2cm 2002 ⓒChristian Marclay Photo: Stephen White Courtesy White Cube

‘이야기’ 밖에서 구현된 ‘소리를 보는 경험’

1930년대에 조셉 코넬이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영화 조각들을 재조합하여 원래의 이미지를 초현실적인 생경함으로 전환한 이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를 재활용하는 방식은 영화적 창작의 기반을 카메라로부터 이탈시키는 아방가르드 전략으로서 꾸준히 활용되어 왔다. 카메라를 배제하고 기존 이미지에 내재하는 문화적 표상을 낯설게 하는 이 냉담하고도 열정적인 전략은 브루스 카너 등이 제작한 1950년대 이후의 실험영화와 1970년대 비디오아트를 통해서도 그 정치적 날카로움을 갱신했다. 파로키는 이 묵은 전략의 소진된 파격을 넘어, ‘영화라는 매체가 20세기 역사에 어떻게 위치되는가, 영화 장치가 시선이나 사회 관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한 비평적 성찰로 그 지평을 확장한다. 영화는 그에 있어서 탐구의 대상이자 도구가 된다.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이러한 전략에 추가된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은 ‘원본’의 전환과 처리가 지극히 쉬워졌다는 것, 방대한 분량의 영상을 다룰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편집이 간편해짐에 따라 반복과 같은 음악적 구성을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스위스계 미국 작가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는 이러한 가능성을 풍부하게 전람한다. 24시간 주기로 순환하는 ‘서사(時)’를 위해 마클레이가 재활용한 4000~5000편의 영화 장면은 화면에 나타나는 시각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뒤를 이으며 할리우드의 역사를 가상적인 ‘하루’로 함축한다.
1970년대의 레코드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마클레이는 이 작은 반복적인 모티프를 역사와 매체에 대한 메타비평의 도구가 아닌, 음악적 구성을 위한 재료로 활용한다. ‘파운드 푸티지의 재활용’과 ‘음악적 구성’이라는 그의 2가지 전략은 아방가르드의 늙은 유령들을 불러 들인다. 조셉 코넬과 브루스 카너의 그림자와 더불어, 1920년대에 영화를 문학과 연극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음악을 모델로 삼았던 ‘절대영화(Absolute Film)’의 환영이 마클레이의 스크린에 떠돈다. 전화를 걸고 받고 끊는 여러 장면들을 순차적으로 연결한 <전화>나 음악이 연주되는 장면들을 4개의 대형 스크린으로 재조합한 <비디오 4중주> 역시 ‘소리를 보는 경험’을 제조하며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을 ‘이야기’ 밖에서 구현한다.
그의 솜씨 좋은 (통)감각의 몽타주에서 보다 냉철한 비평적 사유의 단서를 찾게 되는 것은 거의 동시에 국내에 소개된 파로키 작품의 강렬한 잔상 때문일까. 아닌 게 아니라, 마클레이의 음악적 감성에서 심층적인 역사적 의미들을 찾고자 한다면, 파로키의 시각은 매우 요긴해진다. 2대의 모니터로 이루어진 <그리피스 영화의 구조에 대하여>에서 파로키는 초기 영화에서 ‘쇼트(Shot)’라고 하는 영화의 구성 단위가 방과 같은 건축적 공간적 단위와 일치했음에 주목한다. 그리피스가 거부한 이전의 관습은 하나의 제한된 장소를 카메라의 이동이나 편집 없이 하나의 쇼트만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영화의 문법과 건축 구조의 상응관계를 밝힘으로써 파로키는 공간에 대한 인식에 영화적 장치가 어떻게 내통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하룬 파로키 <110년 동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모니터 12개 비디오 설치 2006

시계와 영화가 공유하는 기계적 메커니즘

공간과 이미지에 대한 파로키의 통찰을 통해 마클레이의 <전화>를 본다면, 전화라는 발명품이 영화가 공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어떻게 개입되었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전화는 동떨어진 두 장소를 연결하는 기술이기에, 전화 대화를 전지적으로 묘사하려 한다면 쇼트 하나로는 부족하게 된다.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하는 ‘이중행동선’이 전화로 인해 불가피해진다. 사실 이중행동선을 전달하는 편집 방식인 ‘교차편집’이 일반화된 시기가 미국에서 전화가 급격히 대중화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교차편집을 발전시킨 그리피스의 영화 중에는 <보이지 않는 적>(1912)과 같이 전화로 연결된 두 장소를 번갈아 보여 주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아마 파로키가 전화와 영화에 관해 작업을 했더라면 가장 중요시 여겼을 이 영화는 무성영화이기에 마클레이의 청각 레이더로부터 당연히 소외되었다.) 파로키식으로 인식하자면, 영화 속의 전화의 울림은 영화 문법의 변화를 자극하는 울림으로서의 기억을 머금는다. 세상의 모든 전화 장면은 영화사에서 반복되는 모티프 중에서도 영화사와의 각별한 인연을 진중히 머금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셈이다. 물론 마클레이의 전화 이미지들은 그가 1970년대에 반복적으로 재편집했던 낡은 레코드의 음구절처럼 즉각적인 음악적 메커니즘을 작동, 유지하는 임무에 더 충실하다.
마클레이의 최근 작품들이 영상 매체에 관한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헐리우드의 환영적 스펙터클에 대한 비디오아트의 부러움이기도 할 것이다. 1995년에 마클레이가 제작한 <전화>가 VCR 정도의 저렴한 기술에 의존하여 영화 장면들을 추려 낸 겸손한 작업이었다면(그리하여 전화와 같은 가정의 소품인 작은 텔레비전이 전시 방법으로 적절했다면), 2000년대의 작업은 블록버스터에 가까운 위용을 미술관에 선사한다. 이 두 작품을 통해서 보는 15년의 차이는 그 동안의 비디오아트의 변화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화> 작업에 참여한 6명의 어시스턴트와 고화질 디지털 전환기술만으로도 거대 자본과 첨단 기술에 대한 조셉 코넬의 수공예적인 항변은 이미 왜소해진다. VCR 시대의 작업이라면 불가능했을 대형 고화질 스크린의 광택은 할리우드의 수려한 환영과 매혹을 고스란히 모사한다. (실로 마클레이는 할리우드의 흡입력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이로써 그는 코넬의 초현실적 반향은 물론이거니와, 1920년대 절대영화의 순수한 독립 정신, 수공예로서의 미국 실험영화의 애착과 초기 비디오아트의 정치적 전유, 그리고 파로키의 비평적 ‘메타시네마’ 마저도 배제하는, 감각의 스펙터클을 견고하게 지향한다.
스펙터클의 질감 속에서 아방가르드의 노쇠한 유령들은 시계와 영화가 공유하는 기계적 메커니즘을 지시한다. 즉 ‘시계’로서의 영화의 정체성을 불러 낸다. 이야기 속 시간과 상영 시간의 일치로 인해, 이 시계-영화는 단지 시간을 허구적으로 묘사하는 재현체가 아니라 아예 관객들에게 현재 시각을 알리는 기능적 기계가 된다. 영화 매체는 ‘프레임’이라는 단위로 분절되는, 시간의 측정 도구인 것이다. (실제로 관객이 보고 있지 않는 밤 시간에도 이 영화-시계는 계속 돌아간다. 특별히 밤 시간에 전시를 개방한 리움미술관의 연말 선물을 놓치지 않은 관객에게 편집의 묘가 절정에 이르는 새벽 3~5시 사이의 몽환적 몽타주는 적막 속의 뻐꾸기 소리처럼 밤의 깊이를 알렸다.) 화면 안의 환영과 화면 밖의 현실이 시간이라는 문명적 표상을 매개로 교묘하게 일치하는 순간, 둘 간의 차이 역시 흥미롭게 드러난다. 그리고 일치와 차이의 변증법은 낡은 아방가르드의 질문을 잔상처럼 떠올린다. 매체는 거대한 권력적 질서 속에서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제안하는가? 문제는 이 희미한 질문을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의 유령을 오늘날의 문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이다. 파로키의 통찰에 따른다면 말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몸을 두 번 적실 수 없다

<현상의 이면 1003017080220> 컬러 사진 100×143cm 2010

우리는 같은 강물에 몸을 두 번 적실 수 없다

글 | 장승연 기자

2010년 11월 중순의 도쿄는 이미 겨울 언저리로 접어든 서울보다 한층 따뜻했다. 시나가와구 주택가에 위치한 하라미술관은 여유로운 늦가을의 날씨를 맘껏 품은 채 푸른 정적으로 가득했다. 1938년 유명 건축가진 와타나베(渡邊仁)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형식의 건물은 지난 7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듯 고풍스럽다. 1979년 미술관으로 개관하기 전까지 개인 주택이었던 탓인지, 사람의 온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아늑함도 풍긴다. 정원수들의 굵은 두께와 울창한 높이 또한 그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정성스레 관리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수십 년의 연륜이 배어 있는 이 나무들 사이로, 최재은은 미술관 내부에 또 하나의 숲을 일구고 있었다. 바로 ‘아쇼카(Asoka)의 숲’이다.

<영원과 하루> 5채널 비디오 설치 2010

시간을 느끼는 명상의 시간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작가 최재은과 함께 기자를 반긴 것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오래된 나무향이다. 입구 바로 앞 전시 공간(아마도 예전에는 누군가의 방이었을) 안에 기다란 나무대가 가지런히 쌓인 채 뻗어 나오는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이 설치 작품의 제목이 바로 <아쇼카의 숲>,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18세기의 생활 방식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살아가는 ‘아미시(Amish)’인들이 건물을 지었다 버린 나무들을 모아 재활용한 것입니다. 여러 차례 먼지를 닦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색이 다시 나오더군요. 나무향도 너무 은은하지요?” 도끼 자국마저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나무대 너머로, 마침 전시장 벽 가운데에 난 창문에서 정원의 푸른 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인다. 미술관 안과 밖의 나무들이 자연스레 연결되길 바란 작가의 의도를 눈치챌 즈음, 작가가 쌓여 있는 나무대 위를 조심스레 걸어 보라고 권한다. 그리곤 나무 위로 슬금슬금 발을 내딛는 기자에게 말했다. “나무가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은은한 향기를 느껴 보세요.” 이렇듯 이번 전시에서 최재은이 선택한 메타포는 바로 ‘나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작업 <과거-미래>와 같이, 작업 초창기부터 ‘나무’를 작업에 줄곧 다뤄 왔습니다. 이번 전시의 경우는 인도의 대제 아쇼카 설화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불교 전파자로도 유명한 아쇼카 왕은 국민들에게 각기 다른 목적의 다섯 가지 나무를 심고 돌볼 것을 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질병 치유를 위한 나무, 과일을 위한 나무, 땔감을 위한 나무, 집을 짓기 위한 나무, 꽃을 위한 나무였어요. 아소카는 이를 ‘다섯 그루의 작은 숲’이라고 불렀죠. 저는 이 다섯 그루의 나무가 암시하는 본질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근본 의미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최재은은 지난 30여 년의 작업 여정 동안 한결같이 ‘시간과 생명’이라는 주제에 몰두해 왔다. 언뜻 2007년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루시의 시간>전을 떠올렸다. 작가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 즉 ‘루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인류의 기원을 메타포로 끌어 들였다. 당시 작가가 한백옥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루시>를 통해 최초의 인간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거대한 시간의 영역과 그 속의 존재에 대한 인류학적 성찰을 형상화했다면, 이번에는 ‘나무’라는 한결 가까운 소재를 통해 ‘시간’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명상의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2층 규모의 미술관 곳곳에 자리한 작품에는 ‘나무’에 배어 있는 시간과 이것을 관찰하고 작품에 담아내는 작가의 시간이 교차되어 있었다. 후지산의 수 천년된 거대한 나무 뿌리를 클로즈업하여 5개의 영상으로 보여 주는 <영원과 하루>는 거대한 나무 뿌리의 홈부터 이끼 같은, 무수한 세월을 겪으며 생겨난 흔적들을 조용히 비춘다. 언뜻 보면 정지된 화면 같지만 오랜 시간 들여다 보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며 나무를 훑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이 나무에 남겨 놓은 시간성, 이것을 천천히 영상에 담는 과정의 저의 시간성, 그리고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간성이 함께 교차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음악가 다카다 미도리(高田みどり)가 작곡한 장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 나무가 그렇게 거대해지기까지 겪었을 긴 세월의 흔적을 평소보다 몇 곱절 늘어난 느린 시간으로 목도하자니, 자연과 시간에 대한 숭고함이 새삼 마음 한 켠에서 고개를 든다.

<루시> 한백옥 239.5×246×291.4cm 2007

나무, 인간의 진정한 정신적 중재자

나무, 인간의 진정한 정신적 중재자
이번 개인전에서 최재은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 <현상의 이면> 시리즈는 깊은 숲 속 안에 들어가 촬영한 여름 풍경, 멀리서 전체 산을 조망해 촬영한 겨울 풍경을 담았다. 장시간 노출을 두고 촬영했기 때문에, 이미지가 마치 자연의 색으로 그려 낸 한 폭의 추상화처럼 번져 있다. “사진이라는 형식 자체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성 속도 거리를 다루는 과정에서 빛처럼 빠른 속도로 자연을 담을 수 있는 표현 방식이 필요했어요. 계절이라는 시간의 변화를 겪고 있는 자연을 긴 시간 동안 렌즈에 담았습니다.”
돌그릇에 담긴 물에 나무의 영상을 비춰 낸 <또다른 달>, 24시간 동안 하나의 나무를 촬영하고 편집해 시간의 변화를 담은 영상 <흐름>, 좁은 틈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숲속 장면을 비추어 어두운 숲에 들어가기 직전의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숲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가> 등 모든 전시작이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나무와 인간의 영원한 관계와 인생을 아우르는 거대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시간을 대자연과 함께 보냈을 터이다. 여러 사람의 팔을 합쳐도 둘리지 않는 거대한 나무 앞, 한줄기 빛줄기만이 비치는 어두운 깊은 숲 속에서 자연과 대면하는 순간의 감정은 과연 어떨까?
“처음엔 깊은 숲 속에 들어가는 게 두렵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두려움을 즐기게 됐어요. 때론 신성함도 느낍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세계, 그 신성함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까요? 집 뒤편에 숲이 있습니다. 오전 시간을 습관적으로 숲에서 보내요. 나 자신을 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하죠. 매일 만나는 나무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다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전혀 외롭지가 않아요.” 최재은은 “진정한 인간의 정신적 중재자”에 다름 아닌 이 나무들, 미술관 곁을 둘러싼 자연의 숨결 역시 전시장 안 가까이 불러 들여 놓았다. 사진 시리즈를 전시한 공간은 일부러 창문의 블라인드를 반쯤 열어 둔 것이다. “전시를 보는 이들이 바깥 단풍나무에 든 시간도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열어 두었죠.” 나무의 시간성, 작가의 시간성, 관람객의 시간성 외에도 이 오래된 공간의 시간성이 한 겹 더 덧입혀지는 것이다.
하나의 명상 체험처럼 작가의 안내를 따라 차분히 전시를 둘러 본 후, 작가는 최근 베를린으로의 이사 준비로 매우 분주했다고 말했다. 독일에는 사색을 이끄는 숲이 많아서 철학자도 많이 나왔다는 얘기가 생각나서일까. 그가 베를린으로 간다는 소식이 낯설지 않게 들린다. 숲의 사람처럼 이불 하나, 숟가락 하나만 들고 심플하게 떠날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던 작가에게 고향 한국이 그립지 않은지 물었다. 1976년에 일본으로 떠난 후, 그는 지금까지 도쿄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지금 시대는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저 모두가 같은 하나의 행성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늘 새로운 공기가 필요해요.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게 싫더군요. 사실 외국은 늘 긴장하게 만드는 곳이에요. 물론 그 점이 제 성장 과정에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편하게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조금 더 나 자신을 찾아야죠. 더 멋있어져서 죽어야죠.(웃음) 객관성을 두고 외부에서 우리나라를 볼 수 있는 게 좋아요. 그리워할 수도 있고 말이죠.”
이케바나, 생명의 본질에 매료되다
도쿄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 최재은과의 두 번째 대화는 새해를 맞은 후 전화로 진행됐다. 그는 지난 해 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자마자 다시 아프리카 케냐로 떠난 상태였다. 한국과 6시간의 시차가 나는 케냐로 전화를 걸었다. 질문을 던지는 기자의 시간은 저물어 가는 오후이고, 답을 건네는 최재은의 시간은 아침이다. 같은 ‘순간’임에도 각자의 시간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언뜻 낯설다. 지난 만남에서 못다 한 이야기의 물꼬를 트면서, 우선 소게츠 (草月)회관에서 일본식 꽃꽂이인 ‘이케바나(いけばな)’를 접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부터 물었다.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최재은은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을 주도하던 소게츠회관에 적을 두게 됐고, 소게츠의 거장이자 영화 감독인 스승 데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와의 만남은 인생의 방향을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됐다. “소게츠의 이케바나는 단순한 꽃꽂이가 아닙니다. 식물을 소재로 하는 입체 조형예술이죠. 식물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 그것이 놓인 공간에 의해 창출된 조형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케바나의 매력입니다. 시작부터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루는 작업을 하면서 생명의 본질에 매료됐어요. 식물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점점 시들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며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살아 있는 생명이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지닌, 흐르는 시간 속의 존재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죠.”
작가로 본격 발돋움하기 시작하던 1985년, 최재은은 도쿄 소게츠플라자에 설치된 이사무 노구치의 공간 설치 작품 <천국>을 검은 흙으로 덮고 씨를 뿌린 다음, 시간이 흘러 거기서 싹이 나와 잔디가 자란 후 공간이 푸르게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 줬다. 첫 번째 대규모 설치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이 전시를 통해 그는 비로소 ‘자른다’는 이케바나의 기본 행위로부터 해방되어 생명과 시간을 작업으로 풀어가는 새로운 도약을 이루었다고 기억한다. 
이후 펼쳐진 다채로운 작업 중에서도 ‘시간’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가장 물리적이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작업 중 하나는 바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일 것이다. 1986년 처음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 중인 이 작업은 한국 경주, 일본 후쿠이, 케냐 마사이마라와 같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배경을 지닌 지역의 땅 속에 특별 제작된 종이를 묻어 두고, 3년에서 길게는 15년 정도 후에 그 종이를 꺼낸다. 땅 속 미생물이 만들어 낸 흔적으로 가득한 종이는 지상의 공기와 접하면서 또 다른 화학 변화를 일으킨다. 그렇게 자연이 만들어 낸 추상화를 통해 최재은은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람 등 시간과 생명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 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케냐에 다시 가 있다. “루시가 발견된 지역에서 작업하기 위해서 다시 케냐로 왔어요. 아프리카는 영원하면서도 역사적인 곳 같습니다.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 자체가 매우 인상적인 곳이에요. 물론 육체적으로는 다소 힘들지만요. 내년에 프라하와 서울에서 전시 계획이 있습니다. 올해는 재충전하는 동시에 준비를 해야 하는 중요한 시간이 될 것 같군요. 버릴 것은 버리고 좀 더 단순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재은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중, 내가 그동안 ‘시간’에 대해 진중히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정신없이 삶을 사는 동안 나에게 시간이란 때론 빠르거나 느린 것, 남거나 부족한 것, 혹은 아까운 것일 뿐이었고, 나와 시간의 관계에서 주체는 항상 ‘나’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도쿄에서 전시를 보던 중 “작가가 생각하는 시간이란 우리를 스쳐가는 것이지,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작가에게 물었었다. 그때까지도 시간이라는 경이로움을 바라보는 최재은의 깊은 사유를 깨치지 못했기에 던졌을 법한 이러한 우문에, 작가의 현답이 돌아왔다. “통과하나 스쳐 가나 같은 것이죠.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구성하는 본질이죠.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문구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몸을 두 번 적실 수 없다.’ 우리도 결국 하나의 흐르는 존재, 시간 속의 존재일 뿐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기본입니다. 죽음에 도달하는 유한적인 존재로서 누구든 시간론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고요. 그렇기에 시간은 너무나 경이롭고,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적 시각으로 보는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무한히 연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대로 이 무한성 속에서 죽음을 향하는 유한한 존재는 오직 ‘생명’인 것이다. 우리를 구성한 채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이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 거대하고도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시간을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새롭게 경험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도쿄의 어느 오래된 건물 속 숲에서 시간을 느끼고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이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일본종이 흙 1986~현재

민현준_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 설계건축가

민현준_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 설계건축가(사진: 권현정)

열린 미술관을 향하여

민현준_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 설계건축가

글 | 김수영 기자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국군기무사령부 터에 2012년 준공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의 건축 설계안이 지난해 8월 공모를 통해 확정된 가운데, 미술관 설립의 구체적인 윤곽이 서울시의 개발계획안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신년 간담회를 통해 공개됐다. 미술인들의 오랜 숙원 사업인 만큼 새롭게 태어날 미술관의 외양과 내관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오는 5월 기공식을 가지고 올해 말 마스터플랜을 확정한다는 바쁜 일정 속에서 서울관의 건축을 진두지휘하는 민현준 주설계자(엠피 아트 아키텍트)를 만났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이 장소에 새로운 미술관이 조용히 녹아들고 또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공모 설계안에서 ‘형상 없는 미술관(Shape less Museum)’이라는 컨셉트를 제시했다. ‘튀는’ 형상으로 건축물 자체가 이목을 끌기보다는 주변 경관과 아름답게 조응하는 설계를 내놓은 것이다. 기존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재들의 매력을 한층 극대화해 미술관 안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미술 작품 자체가 돋보이게끔 하는 기본적 기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내부에서는 미술품이 돋보이고 외부에서는 주변 역사 유적들이 강조되면서 미술관은 조용히 ‘배경 역할’을 맡고자 한다고.
그는 비어 있고 열린 공간이자 주변의 유물과 랜드마크를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서 ‘마당’을 제시한다. ‘마당’은 사방에서 접근 가능한 출입구와 더불어 ‘개방성’이라는 미술관 건축의 지향을 보여주는 키워드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공간 배열에 있어 건물이 놓이고 남은 공간에 마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형의 마당을 배열한 후 주변의 공간에 건축물을 위치시키는 개념으로, 건물보다 ‘오픈 스페이스’의 위치를 먼저 고려한 설계다.
그가 요란스런 ‘랜드 마크’를 욕망하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이 중심이 되는 ‘비움’의 설계를 제안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서울은 개발 시대 건물들로 이미 가득 차 있다. 이제는 새로 지을 곳을 찾기보다는 새로 비워야 할 곳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아울러 그가 추구하는 것이 ‘공원 같은 건축’이라고 한다. “학교, 병원, 사무실 등 특정한 목적의 기능을 가진 건축은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는 배척하는 모양이 되기 쉽지만, 공원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여러 사람이 여러 목적을 가지고 공존한다.”
롤모델로 삼은 미술관 건축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렌조 피아노의 베일러미술관, 안네트 기곤과 마이크 가이어의 키르히너미술관, 피터 줌터의 브레겐츠미술관과 몰롬바뮤지엄 등을 꼽으면서 이들 모두 화려한 외관보다는 전시라는 미술관의 본질에 충실하도록 세심하게 배려된 미술관이라고 덧붙인다. “아티스트와 관람자에 의해 새로운 가능성들이 계속 발견되고, 전시장으로 지정된 곳뿐만 아니라 마당을 포함한 다양한 장소들이 작가의 창작 공간으로 재탄생되기를 기대한다. 작가들과 방문자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사용되고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는 미술관이었으면 한다.” 열린 공간을 통해 ‘평등과 상생의 도시’를 꿈꾸는 그의 바람이다. |김수영 기자

민현준 1968년 서울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와 UC버클리대 환경대학원 졸업. 미국건축사 A.I.A. 건축사 K.I.R.A. 건축사사무소 기오헌, SOM San Francisco, Stanley Saitowitz Office에서 실무 역임. 행복도시 중앙공원 국제현상설계(2007), 마곡지구 교량 아이디어 공모(2008), 공주미술관(2009), 수변도시 비젼공모(2009) 등 입상. 현재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 건축사사무소 mp_Art 소장

2011 February Special

한국미술의 ‘요란한 미래’를 향하여
2011 동방의 요괴들, 공모에서 BEST 21 선정, 그리고 지난 2년의 성과

글 | 편집부

공모 리포트

또 요괴들의 잔치를 시작한다. art in culture가 한국미술을 아시아와 세계의 중심으로 이끌어 나갈 ‘요사스런 귀신(작가)’ 371명을 뽑았다. 이들 ‘발굴’ 작가와 함께 역동적인 ‘육성’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동방의 요괴들>의 명성이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안적 작가 공모 제도를 표방하는 <동방의 요괴들>은 대안적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9년 241명, 2010년 461명의 ‘요괴들’을 찾은 데 이어, 2011년에는 371명이 새롭게 탄생해, 3년간 누적 인원이 1,073명이라는 ‘대식구’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올해 응모자의 출신 학교가 작년 67개 학교보다 10개가 늘어났다는 점은 <동방의 요괴들>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해외에 체류하거나,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작가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비록 단 한 명이지만 외국인 작가도 응모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미술계의 젊은 바람, <동방의 요괴들>

<동방의 요괴들>에 대한 신진 작가들의 관심이 점점 뜨거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정작가 앙케트 결과 등 젊은 작가들 목소리를 종합해 보면, <동방의 요괴들>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①저널을 통한 효과적인 홍보 이점 ②다양한 프로그램 참여 혜택 ③또래 작가와의 네트워크 형성 등이다. 또한 이번 BEST21 선정작가 중에는 전년도 공모에 지원했다가 탈락했지만, 작업량을 늘리고 퀄리티를 높혀 재도전해 성공한 사례가 있다. 그 밖에도 <동방의 요괴들> 공모를 앞두고 탄탄한 준비를 해 온 작가들도 있다.
이번 공모전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으로 나눠 진행됐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운영위원이 맡았던 예심 심사위원을 art in culture 편집부가 직접 맡았다는 점이다. 예심을 통과한 143명의 작가를 대상으로 외부 초청 심사위원 김노암(상상마당 전시감독),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배명지(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큐레이터), 홍보라(갤러리팩토리)가 본심을 맡았다. 본심은 지원자의 모든 응모 작품을 함께 살펴보며 일차로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합산해 선정작가 후보군을 가려내고, 2차로 진지한 토론을 거쳐 최종 21명을 선정했다.
응모자 분포도를 살펴보면, 성별로는 여자가 243명으로 73%, 남자가 128명으로 27%를 차지한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198명으로 53%, 경인 지역이 110명으로 30%, 영남 43명 12%, 중부 9명 2%, 호남 및 강원 6명 2%, 해외 5명 1%로 분포되어 있다. 장르별로는 서양화가 214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동양화 40명을 포함해 회화가 69%로 작년보다 15% 증가했다. 조소는 52명으로 14%, 사진 36명 10%, 영상 9명 2%, 설치 12명 3%를 차지했고, 그 밖에 도예 퍼포먼스 애니메이션 등 기타 장르가 2%이다.
<2011동방의 요괴들>의 전반적인 작품 수준은 작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다. 그 이유는 응모 작가들의 연령이 다소 높아진 점과 대학원 및 유학 과정을 마쳤거나, 이미 전시 경력이 꽤 있는 작가들이 뒤늦게 ‘요괴’를 자청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작품 경향은 회화 작품이 늘어났다. 그러나 미술시장의 작품 흐름에 큰 영향을 받았던 지난 2년간의 응모작에 비해 트렌드에 편중된 작품은 감소했다. 특히 극사실주의적인 그림이나 팝적인 감성보다는 강렬한 색채의 표현주의적인 페인팅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고 미술제도를 비판적 시각으로 비틀거나, 과정을 중시하는 작업들에서 신진작가만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나 실험성이 잘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소위 ‘블루칩 작가’로 불리는 유명 작가의 그림을 모방한 듯한 작품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은 한국 미술의 긍정적인 ‘징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이어지는 다양한 프로그램

<동방의 요괴들>이 표방하는 ‘대안적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지난 한 해 동안 매달 숨가쁘게 진행됐던 행사 일정과 맞물려 설명할 수 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지속적으로 진행될 프로그램도 있다. <2010동방의 요괴들>은 작년 봄 홍대앞 클럽 ‘오백’에서 공식 발대식을 화려하게 치루고, 본격적으로 연간 프로그램을 펼쳤다. <동방의 요괴들>은 무엇보다 교육적 목적을 중시하기에 작가 재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산아트센터 연지홀에서 개최된 PT(Presentation)-day는 ‘요괴들’ 12명과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와 미학과에 재학 중인 ‘예비’ 평론가 6명을 매칭해 작가마다 평론을 쓰고 토론을 벌였다. 작가들은 각자 PT 자료를 발표하면서 ‘실전’에 대비했다.
또한 서울에 몰려 있는 문화행사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다는 취지에서 지역 전시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2009년부터 대전 프랑스문화원 대흥동 분원 갤러리라노마드에서 매년 개최되는 지역 전시 <물음표[?]>는 선정작가 외에 모든 지원작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올해도 이곳에서 중부 지역 전시를 개최한다. 또한 영남 지역은 대구아트페어의 4개 특별전 중 하나로 기획된 <3대 미디어가 주목하는 현대미술>에 art in culture의 ‘동방의 요괴들’이 초대를 받아 <Colorful 東邦妖怪>전을 열었다. 올 8월에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대구 갤러리M에서 대형 초대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동방의 요괴들>의 공익적 성격에 뜻을 함께 하는 공공기관과 기업체의 협력 사업이 늘어나고 있다. 먼저 충무아트홀 내 충무갤러리의 초청으로  작년 여름 <동방의 요괴들 In the City>전이 열린 바 있다. 또 하이서울페스티벌(10. 9~10) 기간 중 개최된 2010서울시창작공간페스티벌의 특별행사로 <동방의 요괴들>이 초대를 받아 <하이서울아트페어>를 열었다. 야외에서 일시적으로 열리는 전시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컨테이너로 특별 부스를 조성, 총 68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젊음+축제+쌍방형 향수’라는 새로운 개념의 복합미술축제로 개최된 <하이서울아트페어>는 미술애호가는 물론 일반 시민과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아, 올해 5월에도 다시 열려 연례 행사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한편 샘표간장의 이천 공장 외벽을 젊은 예술가들의 캔버스로 쓰며, 신진작가들의 창의력과 실험 정신을 맘껏 발산할 수 있는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아트팩토리>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2011년 4월, 샘표스페이스의 전시와 함께 간장공장이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으로 변신할 것이다.
올해 3회를 맞는 <동방의 요괴들>은 이제 ‘국제화’의 과제에 새롭게 도전한다. 이미 <동방의 요괴들>은 2009, 10년에 두 차례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젊은 아트페어 <게이사이아트페스티벌>에 참여한 바 있다. 또한 ‘요괴들’은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이어 두 번째 아트투어를 떠났다. 2010년에는 리버풀비엔날레와 프리즈아트페어, 피악 개최 시기에 맞춰 9박 10일간 영국과 프랑스의 미술 현장을 찾았다.
올해는 단순한 ‘여행’을 넘어, ‘요괴들’의 작품을 해외 관객에게 본격적으로 프로모션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베이징의 798따산즈 지역에 위치한 갤러리아트사이드와 뉴욕 첼시의 아트게이트갤러리에서 <동방의 요괴들> 그룹전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동방의 요괴들>은 이 시점에서 응모 자체를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시킬 방안을 찾고 있다. 일차적으로 중국, 일본, 타이완 등 인접 국가 ‘요괴들’의 추천 혹은 초대 방식을 목표로 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1,073명 ‘요괴들’의 지속적인 관리 방안이다. 커뮤니티적 성격을 강화하고 ‘요괴들’ 스스로의 횡적인 연대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먼저 ‘요괴들’의 작품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고 온라인을 통해 회원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할 것이다.
작품 성향이 맞는 작가들끼리 소그룹을 결성해 스스로 행사를 기획하고 구체화할 수 있도록 전시기획안을 공모, 선정 작가들에게는 전시장과 홍보를 지원할 것이다. <동방의 요괴들>은 참여작가들의 여론을 폭 넓게 수렴해 오늘날 신진작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보다 입체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적극적으로 프로모션할 것이다.
이제, 한국미술의 ‘밝은 미래’를 향하여 <동방의 요괴들>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1) 전시 프로젝트
①지역 순회 전시: ‘동방의 요괴들’ 지원자 전원이 참여할 수 있는 전시. 홍대앞 갤러리산토리니서울, 대전프랑스문화원 등 전국에서 그룹전을 개최한다. 특히 8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대구 갤러리M에서 대규모 전시를 추진하고 있다.
②선정 작가 전시: 연말에 선정 작가 그룹전을 개최, 1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 점검한다. 전시 준비 과정으로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가 팀을 구성해 작품과 전시에 대한 충분한 사전 대화와 소통의 장을 마련한다. 작가마다 포트폴리오 제작비를 지원, 관람객이 작가에 대해 보다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장에 비치한다. 매입상 및 갤러리와 개인전 매칭 제도를 두고 있다.
③소그룹 전시 공모 지원: <동방의 요괴들>중에 소그룹을 결성해, 전시기획안을 공모하면 심사를 통해 전시장과 홍보를 지원하다.
(2) 교육 프로젝트
①PT-Day: 작품을 프로모션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를 마련, 동시대 젊은 미술인들의 건강한 커뮤니티를 만든다. 예비 평론가와 예비 작가들의 1:1 크리틱 프로그램과 아울러 현장 전문가들을 초청해 작가에게 필요한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배운다.
②강연: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의 초청 강연. 국제 미술동향, 미술시장의 변화, 작품 프로모션 등 대학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미술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실전 교육’을 통해 동시대 미술 흐름을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③레지던스: 2010하이서울아트페어에서 금, 은, 동상을 수상한 다발킴, 정지윤, 송규호가 부상으로 서울시창작공간 금천예술공장에 1개월 씩 입주한다.
(3) 해외 프로젝트
①국제전을 통해 해외 프로모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베이징 798지역 내 갤러리아트사이드와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에서 그룹전을 추진하고 있다.
②해외 아트페어 참가: 응모작 중 심사를 거쳐 도쿄 <게이사이아트페스티벌>에 작품을 출품, 국제 경쟁력을 기른다. 베이징 홍콩 타이페이 상하이 아트페어 등 art in culture와 자매지 art in ASIA가 참가하는 국제 아트페어 부스에 ‘동방의 요괴들’의 포트폴리오와 CD, 출판물을 전시 홍보한다.
③ 아트투어: 베니스비엔날레 및 파리, 런던 등 유럽 주요 미술관, 갤러리 탐방, 현지 체류 작가 아틀리에, 미술대학 견학 등의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4) 출판 프로젝트
①2월호 특집을 시작으로 연간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art in culture에서 지면 중계한다.
②연감: 1년 동안 진행한 ‘동방의 요괴들’ 활동상을 총 수록한 ‘애뉴얼 리포트’를 발간한다.
③ 전시 및 행사와 병행하여 리플렛과 작품집을 발행한다.
(5) 공공미술 프로젝트
샘표식품과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샘표 간장을 생산하는 이천 공장 외벽에 ‘동방의 요괴들’ 6인이 도안을 제작, 도색한다. 2011년 4월 프로젝트 완료와 함께 샘표스페이스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심사평

작가로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 배명지·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큐레이터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대하는 일은 늘 즐겁다. 현실을 비트는 발칙하면서도 통쾌한 그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동방의 요괴들>의 지원 작품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해 주기도, 때로는 실망을 안겨 주기도 했다. 이번 심사는 전시 경험이 전무한 신예 작가에서부터 공공 미술관을 포함, 수십 차례의 전시 경력이 있는 작가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어 동일한 잣대와 기준으로 작품들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지원 작품들은 환상이나 꿈 등의 비현실적 세계를 유기생물체적 이미지로 그려 내거나, 표현주의적 제스처를 사용하여 형체를 흐리게 하고 해체하는 작업들, 그리고 집단적인 도시의 집적 이미지를 다루는 회화 작업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범주에 머무르거나 느닷없이 환상으로 점프하는 예들이 많아 작가적 시선의 폭과 깊이가 아쉬웠다. 이러한 가운데,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악하거나 타자와 주변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작업들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비디오 작업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업을 찾기는 어려웠으나 개념적으로 눈에 띄는 몇몇 작업도 있었다. 특정 학교 출신의 작업들이 대거 양식적 유사성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는 대학 미술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기존 작가들의 작업을 즉각적으로 연상시키는 소위 ‘기시감(旣視感) 형’ 작업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예술가는 감성과 개념,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상식에 저항하며 현실을 다시 들추어 보게 하는 자들이다. 예술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요괴들의 행보를 기대하며 결코 녹록하지 않을 시간을 이어 갈 그들의 삶에 응원을 보낸다. 또한 BEST21에 선정되지 못한 요괴들 역시 좋은 작가들로 성장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예술가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몇 명 심사위원들의 미적 판단 기준이 결코 정답은 아니므로.

회화의 전성시대 |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심사를 맡았다. 올해도 역시 회화가 많았다. 1990년대 중후반 설치미술 및 미디어아트의 강세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회화가 위기에 빠졌다고 이야기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오랜 전통의 회화가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곧이어 후자의 말이 적중하는 듯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는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한마디로 ‘회화의 전성시대’다. 최소한 한국의 청년작가 사이에선…. 그렇다면 수많은 회화 작품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 어떤 새로운 의미 이슈 역할 시각언어 등을 제공했는가? 물론 비교적 짧은 기간이라 그것을 논하기 어렵겠지만, 만약 그것이 명확치 않다면 오히려 신진작가들에겐 좋은 일이다. 그들이 그 일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심사에선 구상회화가 대다수였다. 1차 심사에서 소재주의에 치우친 극사실 경향의 회화가 다수 탈락해서 그런지, 붓질과 물감을 강조하는 소위 회화적(Painterly) 그림들이 많았다. 이 경향은 형태 색채 구도 등을 변형함으로써 감성적 영역을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매체 자체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현시점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작품이 많았고, 꼼꼼하게 그린 것도 몇 개 있었으며, 기존 이미지를 채집하여 재배치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추상회화도 분명 존재했다. 한편 동양화에선 전통 재료와 새로운 재료의 이질적 만남이 실험되고 있었고(하지만 결과가 좋다고 보긴 어려운), 조각에선 특정 재료와 기법에 대한 집착이 다소 완화되는 것 같았고, 사진에선 사진계의 이슈와 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사진을 출품한 작가의 경우 대부분 사진을 전공했으며, 그래서 그런지 포토샵 효과는 미비했다.) 또한 오직 미디어아트만을 선택한 작가는 여전히 적었지만, 그래도 미디어아트를 회화 조각 사진 등과 병행하는 작가는 상당수 있었다.

인정 시스템 또는 예술적 공모 | 김노암·상상마당 전시감독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이들이 예술에 골몰하고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인생을 건다. 문득 이러한 젊은 미술가들이 관계를 맺는 미술계의 ‘인정 시스템’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공모전을 포함한 여러 인정 시스템의 목표는 결국 무엇일까? 목표가 무엇이건 이 시스템을 구성하고 가동하는 이상, ‘선택’과 ‘배제’라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 당대 예술의 가장 유력한 정의와 그 형식이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새해 우리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엇일까? <동방의 요괴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을 통해 한국 미술계 또는 세계 미술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예측해 볼 수 있을까? 진정한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데 공모전이란 인정 시스템은 불가항력적인가? 이러저런 생각과 함께 나 자신을 포함해 젊은 미술가들, 우리의 삶은 또 어떻게 진행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유사성과 동일성이 다르듯 ‘예술적인 것’과 ‘예술’은 별개이다. 또한 삶이 예술적일 수 있어도 삶이 예술 자체일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둘이 마치 본질적인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것도 매우 빈번하면서도 고집스럽게. 간혹(종종 나도 그렇지만) 삶과 예술을 동일하다고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삶은 삶이고, 예술은 예술이다. 삶과 예술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면 공모전의 경험은 젊은 미술가들이 곧 지나갈 한 때의 영광이나 좌절이 아니라, 막연하지만 목표로 삼은 예술의 가치와 의미가 자신의 삶과 어떻게 균형을 맞춰 나갈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예술적 삶’이란 ‘예술적 예술’이란 말만큼 부조리하다. 그런데 삶과 예술, 예술적인 것과 예술이 다른 만큼 그 둘을 동시에 공유하면서 자기 자신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식으로 존재와 예술이 삼투한다. 공모전은 그런 점에서 젊은 미술가들이 한번쯤은 참여할 만한 사건이고 또 경험할 만한 딜레마이다.

학생과 작가 ‘사이’에서 | 홍보라·갤러리팩토리 디렉터
우선 <2011 동방의 요괴들> 공모전의 심사를 맡게 되어 이렇게도 많은(그것도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예정자가 대부분인) 신진 작가들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접하게 된 것이 꽤나 강렬한 경험이었음을 밝히고 싶다. 비록 본인은 작은 전시 공간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젊은 작가들의 폴트폴리오를 받아 보기도 하지만, 본 심사를 통해 접한 약 150명의 각기 다른 신진작가들의 작업을 접하고 있자니 ‘지금, 여기’에서 가장 ‘핫’한 현대미술 작품의 경향이 무엇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하고 있는데, 대개 비슷한 시대적 고민과 삶의 모습을 공유하는 세대의 작가들로서 작품의 주요 매체나 소재, 주제 더 나아가 기법에 있어서도 유사 작품군 몇 개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공통점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 유사 작품군은 특정 학교들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아직 온전히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전의 단계, 즉 학생과 작가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참가자 각각의 독특하고 단단한 작품 세계를 기대하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사이’ 단계를 인정하고(혹은 참작하고) 심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본 공모전에 참여한 작가들을 보자니 지난 10년간 한국 현대미술의 ‘레이어’가 얼마나 다층적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예술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고민이 빼곡히 배어 있는 신진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가 되었던 사실, 즉 한국 현대미술의 시장주도형 압축 성장에 따라 젊은 작가들이 시장을 지나치게 의식하던 경향도 어느 정도 자정 작용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공모전에는 뉴미디어 작업이나 싱글채널 비디오 등의 영상 작업이 극히 드물었다. 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신선하고 다소 ‘요괴스러운’ 작업으로 기분 좋은 자극을 받고 싶었던 개인적 욕심은 온전히 채우지 못했지만, 예비 졸업자뿐 아니라 경력이 비교적 많은 작가들이 용기 내어 신진작가 발굴육성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며 심사를 한 본인에게도 꽤나 좋은 자극이 되었다.

진정, 신진작가를 위하는 길은? | 호경윤 수석기자
<동방의 요괴들>의 실무를 3년째 맡다 보니, 여타의 신진작가 프로그램에도 가담할 기회가 종종 생긴다. 그 중 최근에 강사로 직접 경험했던 두 사례를 심사평을 대신해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S대학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은 작년 여름부터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자를 포함한 큐레이터, 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강사가 동 대학 출신의 신진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각각 한 명씩 선택해 전시 준비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여기에 재학생들을 어시스턴트로 참여시켜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외부 강사와 재학생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작은 개인전’ 형식으로 열린 전시를 통해 결과적으로 작가는 돋보일 수 있었다. 참으로 ‘좋은 예’라 말할 수 있겠다.
한편 D대학에서는 매년 서울 시내 대학 졸업 작품 중 우수한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한다. 모든 졸전을 둘러보기 어려운데 좋은 작품만 한 자리에 모은다는 것은 꽤 의의 있는 일이고, 이는 <동방의 요괴들>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대학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작품들을 ‘모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품 구성이나 전시 설치 등 기획적 측면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난감했던 장면은 전시 오프닝에 맞춰 열렸던 특강이다. 본인도 그 자리에 강사로 참여했는데, 나 외에 나머지 강사들이 모두 미술시장 전문가였다. 졸업식을 마치지도 않은 예비 작가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알려 줘야 할 팁이 과연 ‘어떻게 그리면 잘 팔릴 수 있을까?’, ‘아부와 운동은 평소에 해야 성공한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나쁜 예’다. 특히 ‘학교’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오기 직전, 심리적 부담이 가장 큰 시기에 ‘작품 잘 팔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을 심어 주는 것은 신진 작가에게 절대로 도움이 안 된다. <동방의 요괴들>에서도 아트페어 등 미술시장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판매’보다는 ‘소통’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며, 그 밖에도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동방의 요괴들>은 이번 공모전을 통해 만난 각양각색의 작업들을 담을 수 있는 다른 모양의 그릇을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진정으로 신진작가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다.

2009~2010 요괴들 참가기

큰 세계로 진출하는 등용문
우와! <동방의 요괴들> 3기가 선정되었다니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요괴’로서 미술계 활동을 한지 2년이나 지난 지금, 저는 송은문화재단에서 지원받아 2월에 개인전을 앞두고 있고, 난지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습니다. 소위 ‘잘 나가는 작가’는 아니지만 능력 없는 제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데는 <동방의 요괴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럽 아트투어입니다. 파리에서 시작해 베니스, 런던으로 옮겨 가며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art in cultu re의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 작가들의 스튜디오, 미술대학 등 일반적으로 방문할 수 없는 곳들도 가 볼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2010게이사이아트페어에도 참여했습니다.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가 기획하는 아트페어로, 일본의 젊은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축제’입니다.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도 많은 전시기획자들이 진중하게 참신한 작가들을 찾아 다니는 모습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또한 옆집 아저씨 같은 무라카미 다카시와는 대화도 나누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어디를 뒤져 보아도 <동방의 요괴들> 같이 지속적으로 젊은 작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지원 작가 전체에게 혜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3기 여러분, 앞으로 지원되는 프로그램을 적극적 활용해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언제든 연락주세요~ 술 한 잔 합시다! |2009권선
1년 전 <동방의 요괴들>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혼자 있을 때 접한 발표 소식이라 홀로 기쁨을 나누긴 했지만, 그때의 환희는 그 이후의 버거운 시간도 버틸 수 있을 만큼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요괴들’이라는 이름으로 보낼 수 있었던 한 해가 끝났다는 게 아쉽고 섭섭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작업에 몰두하고, 그렇게 생산해 낸 작품으로 세상과 열정적으로 소통한 한 해였는데요. 1년의 열정과 두근거림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가슴 속에 남아 작가 인생에 큰 뿌리가 되어 주기를 소망해 봅니다. 더불어 2011년 <동방의 요괴들>에 선정되신 작가 여러분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 해를 되돌아 보았을 때 후회 같은 것은 남지 않도록 부디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2011년 동방의 요괴들 모두에게 건투를 빕니다. |2010이국현

요괴들끼리의 소통이 큰 자극제
한국 미술계의 젊은 작가를 위한 여러 공모전 중에서, 우리는 <동방의 요괴들> 공모전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저는 졸업 직후 어설픈 원서를 보냈지만, 그 때의 제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요괴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세월이 3년째군요. 속담에 비유하자면, 지금의 저는 천자문을 흥얼거리는 서당개의 수준이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서당’인 art in culture는 ‘옥동자와 귀소녀’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저와 같은 ‘하룻강아지’도 배울 수 있게 문을 빼꼼이 열어 두었습니다. (멍멍!) 급격하게 늘어 가는 새 요괴 식구들을 보면서 ‘나는 뭐하고 있나, 언제까지 맴돌건데’ 하며 채찍질을 합니다. 올해 저를 포함한 6명의 요괴들은 샘표간장공장으로 파견되어 ‘공장 괴물’을 물리치라는 미션을 받았지요. 우리는 힘과 지혜를 모을 겁니다. 저는 ‘동방의 요괴들’의 여러 프로그램 중 기획성 있는 전시나 여행, 요괴 사귀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2011년 요괴님들도 프로그램을 열심히 쫓다 보면, 내가 어떤 유형의 작가인지 깨닫게 될 거에요. 공동 작업을 좋아하는 요괴라면,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예술 활동을 하는 것도 신선한 자극입니다. 어쩌면 마음이 열려 있는 요괴들끼리의 소통 과정으로 작업과 삶의 태도 전반에 대한 혜안을 얻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방의 요괴들> 프로그램에 참여하세요. 해치지 않아요. 요괴 친구들을 찾아 불러서 술 마셔요. 웃어요. 걱정을 나눠 봐요. 관심사를 서로 맞춰 보세요. 싸이도 트위터도 좋지만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해요. 작은 인연도 소중히 하면서 실력을 쌓는 <동방의 요괴들>이 뭉친다면 미술계가 촘촘해지면서 50년 이상 끄떡 없겠지요. 그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작업합시다. |2009그리마

2009년 선정 당시 받았던 질문 중에 ‘첫 개인전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 대답은 ‘안할지도 모르고 못할지도 모른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였는데, 드디어 올해 개인전을 하게 되었어요. 줄곧 알 수 없고, 확신하지 못하고,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찬 저에게 ‘올 것 같지 않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동방의 요괴들>에 참여하면서 겪었던 첫 에피소드는 선정 작가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하던 서점에서 펑펑 울었던 것입니다. 손님이 왜 우냐고 물어 봐서 기뻐서 운다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때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네요. 고등학교 때 큐레이터 박파랑 씨가 쓴 《어떤 그림 좋아하세요?》라는 책을 매우 좋아했었는데, 책에 나오는 미술판의 이야기가 즐거워 보였고,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제가 원했던 진심이 통하는 세계였어요. 오래 전부터 꿈꿔 오던 곳을 눈으로 보니 기뻤습니다. <동방의 요괴들>이 그런 세계의 입구가 되어준 셈이지요. |2009박유진

참여한 만큼 얻을 수 있다
공모전 지원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탈락 작가는 떨어진 이유도 모른 채 조용히 버려집니다. 반면 대부분의 선정작가는 명예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경제적인 이득과 미래로의 희망을 획득합니다. 한두 번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현실이 반복되다 보면 사회적 자괴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동방의 요괴들>은 신진작가와 사회의 접합점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해 주었습니다. 사실은 나라에서 해 주어야 할 일을 민간 기업에서 사비를 들여 가며 공익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도한다는 점은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꼭 공모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요? 콩 심은데 팥이 나길 바라듯이, 맨 땅에서 ‘요괴스런 작가’를 발굴하려는 욕심과 그 열정은 긍정적이지만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2010권순민
작년 이맘때 선정작가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마치 ‘새해 선물’을 받은 것처럼 졸업 후 작가로서의 삶이 두렵고 불안했던 내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을 주었습니다. 2010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저에게 많은 기회와 일들이 있었는데요. 첫 번째로 PT-day에서 처음으로 평론가 앞에서 저의 작업을 소개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에선 별문제 없이 발표하곤 했었는데 유난히 떨었던 바람에 실수를 많이 했었어요. 그만큼 준비를 충분히 안했던 것이었고, 결국 프로답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아쉬운 만큼 다음 번엔 준비를 철저히 잘 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이서울아트페어>에 참여했던 일입니다. 처음으로 야외에서 전시를 해본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상까지 받아서 더욱더 갚진 기회였습니다. 세 번째는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능한 큐레이터 분들과 연결시켜 주어서 작업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하면 자신의 발전이 더딥니다. 적극적인 참여와 열정으로 기회를 잡아 노력의 결실에 흠뻑 취해 보길 바랍니다. |2010정지윤

긋고 재배열하는 오늘의 드로잉

윤향란 <산책> 시리즈 캔버스에 파스텔, 종이 116×89cm(각) 2010

긋고 재배열하는 오늘의 드로잉

글 | 양 정 무 ·  미술이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이것을 그리려고 파리에서 25년을 보냈느냐?” 윤향란 작가의 팔순 아버지의 전시회 소감이다. 개발새발 낙서 뭉치의 화면은 뭔가를 잔뜩 기대한 관객에게 허탈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어설프게 그은 막선과 캔버스 위에 너저분하게 붙은 켄트지 쪼가리는 그림으로 낼 수 있는 냉소감의 극치를 보여 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그림에 밀도를 매긴다면 윤향란의 것은 극히 낮은 수치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윤향란의 성글고 애매하게 빈 화면에 낙담했다면 안경수의 최신작으로 눈을 옮겨 보자. 갤러리비원에 새롭게 선보인 안경수의 그림은 언제나 그렇듯 낯익은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의 조율된 필선과 모노톤의 색감은 앞서 본 윤향란의 작업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각적 안도감을 충분히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느낌도 순간일 뿐이다. 그가 펼쳐 낸 산수풍경을 차분히 살펴 보면 그것이 우리 주변의 싸구려 인공자연을 재현했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그의 조형물 군데군데 하수구 구멍 같은 인공물이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릴 만한 풍경이 도처에 즐비함에도 왜 하필이면 그는 도시인들에게 일회용 휴식을 강제하기 위한 인공구조물을 선택했을까? 가짜를 통해 진짜를 알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 자연을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윤향란에게서 확산된 허탈감을 느꼈다면 안경수에게선 응집된 허탈감이 깊게 전도되어 온다. 이 같은 허탈감 또는 공허함은 역설적으로 그간의 친절한 화면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임이 분명하고, 바로 이 점에 동감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이 두 전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된다.

긋는 행위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윤향란의 전시는 2008년 도쿄에서 연 개인전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5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오랜만에 열리는 전시이지만 2005년 환기미술관 개인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캔버스에 켄트지나 화선지를 찢어 붙이고 그 위에 파스텔과 목탄으로 마구잡이로 선을 긋고 있다. 굳이 차이점을 짚어 내라면 종이 콜라주의 밀도가 더 성글어졌고 필선을 지배하던 기하학적 구조물도 더불어 한층 누그러졌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집요하게 거친 필선과 누더기 종이더미에 매료시키는지 그의 집요함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이 전시에 대한 멋진 소감을 한국을 방문한 노쇠한 영국 미술사학자에게서 먼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바쁜 일정 중에 삼청동의 미술관을 방문했고 이 때 얻은 한 움큼의 카탈로그 중에서 윤향란의 것을 꺼내 보이며 이 전시가 아주 맘에 든다고 나에게 말했다.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 그가 이 전시에서 작가의 솔직함과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후에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작 작가의 부친은 전시장을 찾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 허탈해한 세계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 대중에게는 단조롭고 유치해 보이는 세계가 세계의 각양각색의 시각 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연구자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서고 있는 이 극도의 대조적 사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언어학자가 유아의 발화 장면에서 인류 언어의 신비를 체득하듯이 그 미술사학자는 미술의 원초적 언어의 발화 순간을 윤향란의 작품에서 다시금 느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실 윤향란이 긋기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회화의 본질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작업의 시발점으로 사용하는 ‘긋는 행위(Act of Marking)’는 곧바로 인류에게 있어 말하기보다도 먼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상 그것은 라스코 동굴에서처럼 알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오기도 했고, 빗살무늬처럼 기하학적 패턴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윤향란의 긋기는 형상과 추상의 중간 지대에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산책> 시리즈는 산책 중에 얻은 경험을 순전히 필획으로만 담아 내려 했다. 특히 긋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헝클어진 선들은 어떠한 조형적 기대감도 무력화시키며, 나아가 그의 냉혹한 필선은 리듬감을 철저히 무시한 거친 선에 불과하다. 그가 걸었던 산책의 길은 아마도 거친 고독의 길이며 끝도 시작도 찾을 수 없는 허무한 길이다. 멋도 없고 기교도 없는 그의 필선은 너저분한 종이 조각들에 의해 다시금 잘려 나간다. 많은 화가들이 화면에 필획을 남겼지만 그의 것은 솔직담백함에 있어서 새로운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윤향란의 솔직함은 자기 작품의 철학화까지도 거부할 정도이다. 필획을 강조하는 많은 작가들이 노장 사상이나 불가의 선의 세계를 언급하고 있지만, 윤향란이 들고 나온 것은 일상의 무덤덤한 진실이다. ‘배추’와 ‘영수증’이 그것인데 배추는 그의 필선이 순수한 자기 체험 하에 묶여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서류 위의 <붓놀이> 시리즈도 그 정도로 읽어 낼 수 있다.

안경수 <가혹한 산>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2cm 2010

체계적인 형상 찾기 과정

윤향란은 선이 반복된다고 느낄 때 한참 동안 작업을 멈춘다고 한다. 안경수가 형상을 찾고 만들어 가는 과정은 이보다 더 체계적이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자신의 작업 과정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 짓고 있다. 우선 그는 기억 속에 남은 정물을 재수정하고 다듬어 낸 후 그것을 공간 속에 재배열하여 이야기를 만든다고 한다. 다음 단계로 그것을 인쇄물로 만들어 내고 최종적으로는 이 인쇄물을 먹지 위에 놓고 ‘드로잉’을 통해 화면에 전사시켜 낸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래된 기억 속의 수집물 속에 출발한 이미지는 상상화된 풍경과 뒤섞인 내러티브 드로잉으로 다시 재편집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자신의 평면 작업이 드로잉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막상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드로잉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흔들리게 된다. 먹지 위에 수많은 필획이 그어졌겠지만 그것은 거르고 걸러져 실상 화면에서는 어떠한 개성적 손맛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몰개성한 필선은 도심 속 인공적 산수 조형물과 결부되어 더욱 더 우리의 시선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도심 속 가로수를 휘감은 전구를 보며 생기를 꿈꿔 보고 인공 동굴을 헤매면서 진정한 자연을 느껴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편 안경수는 자신이 강조하는 3단계의 이미지 생산 과정과 별도의 단계를 이번 전시에 추가시켰다. 전시장 앞에 놓인 나무 박스로 만든 어둠상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어둠상자 속에 미니어처 인공 산수를 설치해 놓고 거기에 형광 물질을 골고루 발라 놓았다. 그것을 밝게 비추는 형광등 빛은 어설픈 야자수들과 함께 인공자연의 부자연스러움을 더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어둠상자는 근대 화가들에게 보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도구였다. 어둠상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밝은 형광 물질로 채워지고 커다란 구멍으로 우리의 시선을 어설프게 인도하는 그의 나무박스 속 풍경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카메라 옵스쿠라의 단일한 시선으로 세계를 체계화해 낸 서구의 근대적 시각 세계에 대한 냉소적 부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게 보면 그것은 오늘날의 인공적 조형세계에 대해 작가 특유의 거리두기를 유지하기 위한 소박한 장치이자 도구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앞서 나는 윤향란과 안경수의 작품에서 시각적 공허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물론 이 같은 공허감이 미술의 본질은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난 반세기 세계 실험미술의 한 지류를 분명히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자세가 앞으로의 미술을 바꿔 놓을지 모른다. 볼거리가 지천으로 넘쳐 나는 이 시기에 윤향란의 반미술적 접근이 오히려 돋보일 수 있으며, 가짜 볼거리의 이면을 들춰 내는 안경수의 시도도 앞으로 계속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변적 태도가 거대 권력과 자본 앞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방편이라는 사실에 낙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미학적 도전이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덧글: 앞서 말한 영국 미술사학자는 데이비드 바인드먼(David Bindman) 교수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초청으로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서구 미술에 나타난 흑인이미지에 대해 강의했다.

프레스코에 관한 현대적 시각

<Channeling Time-A Contemporary Vision of Fresco>(2010. 12. 3~12. 14), 갤러리 아트링크 설지 장면 2010, <Winter Jewels> 프레스코 혼합재료 90×70cm 2010

프레스코에 관한 현대적 시각

글 | 헨리 메릭 휴즈  ·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진영선은 지난 30여 년 동안 프레스코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을 시도해 왔다. 백남준과 함께 프레스코에 비디오 아트를 접목했으며, 병풍이나 기하학적 조형물을 활용해 프레스코의 이동성에 새롭게 주목했다. 시간과 음악의 영원성을 테마로 삼는 진영선의 작품은, 단아하며 추상적인 모노크롬 화면과 풍부한 색상으로 우리를 사색의 세계로 안내한다. 40여 년 동안 후진 양성에 힘쓴 작가는 고려대 정년퇴임을 앞두고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새로운 종류의 혼성미

프레스코는 마르지 않은 상태의 회반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린다. 넓은 표면적을 빠르게 채우는 데 적합하며, 건축물에 온전하게 고착된다. 프레스코의 표면은 안료와 바닥재료(회반죽)가 서로 완벽하게 유착되어 습기와 대기 변화에 내성이 강하다.
진영선의 프레스코 작업은 서구와 아시아의 옛 거장들이 주요 공공설치 작품에 적용한 프레스코 기법에 대한 고미술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혁신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전통적인 기법을 활용해왔다. 진영선의 성취는 복원자의 재래 기술을 훌쩍 뛰어넘는 프레스코 응용기술 개발에 있다. 이 응용기술을 통해 그는 현대적인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이젤 미술과 반대 극단에 있는 공공미술에 대한 본래의 의무에 충실하였다.
진영선은 동시대의 프레스코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독특한 특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그는 프레스코를 병풍으로 이용함으로써 프레스코의 이동성을 강조해왔다. 둘째, 프레스코를 2차원적인 벽면의 구속으로부터 탈피시켰다. 셋째, 프레스코 기법을 인쇄 매체와 결부시켜 프레스코 집합체란 기발한 개념을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프레스코를 디지털 매체와 결부시켜 새로운 종류의 혼성미를 창조하였다.
이동 가능한 프레스코의 제작은 새로운 종류의 바닥재 실험을 의미하면서 이동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가벼운 금속 프레임과 스티로폼을 결합해서 그것을 여행 가방에 접어 넣거나, 아니면 포장해서 항공기 화물실에 집어 넣어, 아득한 중세 기독교 장식화의 연상물을 나르는 것은 이 문제의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집적과 교체를 할 수 있는 가벼운 구성물을 사용함으로써, 진영선은 3차원적인 조형물 형체들(입방체, 피라미드, 삼각형 요소와 이에 대한 논리적 귀결인 혼합 미디엄 설치물 등)을 보다 수월하게 개발할 수 있었다. 그는 스크린인쇄의 상을 프레스코 패널에 가함으로써 상이한 미디엄들 사이에 긴장을 독창적으로 조성하고,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나 마사치오의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 등 익숙한 종교 이미지가 전달하는 인류 보편적 메시지를 완전히 상이한 맥락에서 해석하였다.
백남준과 공동 작업한 해인사성보박물관 안의 거대 벽화 프로젝트와 같은 대규모 공공 작업에 잘 나타나듯, 진영선은 프레스코와 디지털 매체를 성공적으로 결합해왔다. 두 작가는 박물관 내부 7.5m 높이에 30m 길이의 벽 중앙에 12대의 비디오 모니터를 설치했다. 이는 박물관의 유명한 소장품인 팔만대장경과 1200여 년 전 부처님의 말씀을 전국에 확산시킨 대장경의 역할을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머리 위 돔 천장에 그린 진영선의 천장 프레스코는 우주 천체도를 상기시킨다.
<시간의 반영>은 비디오 설치예술 분야에서 선구적인 백남준의 작품(1974년의 <TV 부처>에서 좀 더 근작인 1996년의 <하나의 촛불>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간접적인 오마주이자, 그가 자발적으로 프레스코 미디엄에 투여하고자 한 영적 시간적 감수성의 축약으로 볼 수 있다.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설치물은 동양적인 사당과 고딕 양식의 교회를 암시하면서, 수면에 반사된 촛불의 단순한 구성요소를 명멸하는 불꽃과 물결의 투영(投影)과 합치시킨다. 바로 여기서 충만과 공허, 빛과 암흑, 그리고 시간과 영원이 무정형의 상태에서 뒤섞이며 동서양이 만나는 것이다.

<Fresco Mural  Enlightenment - Light and Time> 1998~99, 백남준과 공동 작업 <Haeinsa Fantasy>(11 channel video), 벽화: 750×3000cm, 천장: 600×600cm(Detail)

시간과 음악

아주 진실한 의미에서 시간은 진영선 작품 활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고, 시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그의 프레스코 작품의 핵심을 차지한다. 네 개의 패널로 구성된 프레스코 병풍인 <태초에>는 모호한 굵은 선으로 윤곽이 그려진 거대한 흰색 구체를 내보인다. 구체의 노란색 배경은 기체의 소용돌이, 즉 성운으로 보이는 것들로 방점 찍힌 태초의 물질 혹은 땅을 의미한다. 이 노란 배경을 가로질러 ‘태초에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노라’라는 성경의 창세기 구절이 선명한 주홍 진사(辰沙)로 강렬하게 각이 되어 있다.
백색 천체의 중앙부분에는 검은색 수직선이 자유분방한 붓질로 그려져 있다. 이 수직선은 영어 대명사 ‘I(나)’나 숫자 ‘1’을 구체화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의미상 설치물 <시간의 반영>에서 홀로 명멸해가는 촛불에 비견할 만하다. 무한대의 잠재성을 가진 숫자 제로(즉, 동그라미)는 시각적 물질적 세계의 모든 원소의 근원에 존재하는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며 숫자 1을 낳은 것이다. 병풍 <태초에>는 우리의 개인적 삶과 집단적 의식을 전체적으로 어우르며 묘사하면서(T. S.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의 시작에 우리의 끝이 있노라”), 상이한 구성요소가 이론상 무제한 펼쳐지는 일종의 휴대형 성화벽 역할을 한다. 여기서 서구의 종교 신앙이 동양의 음양 상징과 융합되는데, 이 음양은 구체의 두 반쪽을 통합하는 동시에 그 근원적인 이중성을 강조하는 ‘태극’이나 완두콩 두 쪽 사이의 틈에 배합된 존재의 이원적 원리를 지칭한다. 이 작품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으로서의 시간의 주제와 제로에서 하나라는 수학 개념으로서의 시간 주제에 대한 진영선의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을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음악은 시간과 숫자의 중요한 구현물로서 진영선 작품에 반복되는 또 하나의 주제이다. 사운드와 리듬 가락 주파수 음색 멜로디 화성 진행 등은 진공에서 일어나고 다시 진공으로 가라앉는데, 이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의 백색음에 내재한 음악의 현존과 부재와 유사하다. 백남준 못지않게 케이지를 존경하는 진영선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초안과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을 위한 스케치(‘초안’과 ‘스케치’ 모두 시각화라는 함축적 의미를 띤다)에서 따온 소절을 직접 묘사해 4부 패널 프레스코인 <시간의 목소리>에서 전달한다. 여기서 버팀 패널에 댄 회반죽의 잇따른 면들 사이로 악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표류한다. 작가에게 작품을 창조하고 읽어 가는 실제 과정은 음악의 내재적 사운드 이상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 과정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여타 실크스크린 작품에서 미켈란젤로의 창세기 은유인 신이 팔을 뻗어 아담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맞대는 프레스코를 다룸으로써 상징화되고 있다.
<시간의 목소리>의 표면은 개략적인 초벌 스케치, 3벌에서 6벌에 이르는 채색 작업, 음악 소절(음악적 ‘동사’)의 삽입이란 연이은 세 단계를 각각 명백히 식별하도록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그 표면 자체의 역사적 자취를 담고 있다. 또한 검은색 잉크의 음표와 보표, 그리고 어두운 분홍색 윤곽의 소박한 유토피아 구성물이 희박한 분홍색 표면 속에 묻히고 끼워져서 출현과 소멸을 번갈아 하고 있다. 아름답게 움직이는 표면의 활력은,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의 ‘암호의 세계’란 개념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 세계에서는 숫자와 도형이 우주 삼라만상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시적으로 섬세한 전반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여섯 번까지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화지가 잘 만들어 지면 48시간 이상을 담가 놓았던 안료를 축축한 회반죽 위에 그리는데, 회반죽의 각층 작업 사이에 걸리는 시간은 여섯 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
<시간의 자리>는 프레스코 패널을 고착시키는 단순한 철제를 가지고 조립한 것으로 그 둘레가 160cm인 구(球)이다. 이 구는 물론 우리가 이전부터 줄곧 마주한 문제인 제로를 3차원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서구 사상뿐만 아니라 수가 시간의 상징적 표시이자 우주를 관장하는 자연법칙의 표상이라고 보는 한국의 사상가 진진화의 최근 저서에 감화를 받은 진영선은 그의 수비학(數秘學) 연구를 <시간의 자리>를 통해 심층적으로 형상화했다. 구의 내부 진공은 에너지의 장(場)으로 무한한 발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고, 구 표면 곳곳에 부착된 곡선형 프레스코 패널은 머나먼 은하수를 향한 벡터나 송신기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숨은 의미의 가능성을 내보인다. 더욱 현세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격자무늬 표면의 이 구는 역동성의 잠재를 지닌 위압적인 조형물이자 인간적인 뼈대와 손길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그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고 있다.
끝으로 피라미드라는 주제가 진영선의 개인적인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이상적인 형상을 제공해왔다는 점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작가에게 초(超)시간적인 항상성(恒常性)에 대한 표현이자, 미와 무한공간에 대한 상징적 탐색을 은유한 것이다. 피라미드의 프레스코 네 면은 일종의 만유공통적 약자(略字) 형식으로 수학 상징물을 아랍 숫자, 수메르와 이집트의 상형문자 등과 결합한 형태를 보여 준다. 그의 받침대 없는 소형 피라미드는 준(準)보석이 박혀 있는 듯 빛나며 비밀 암호와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프레스코의 성공적 부활

진영선은 프레스코 전통 기법의 모든 영역에 완벽히 통달한 전문가이다. 그의 작품 전시회에는 작업에 사용하는 재료가 제작 과정의 설명과 함께 제시되었다. 제일 표면에 화지(또는 ‘인토나코’)를 얹은 부분에서부터 사선으로 블록을 절단해 각 층의 몰탈과 초지를 보여 주고, 본인이 직접 사용하는 제작도구인 먹과 벼루, 몇 자루의 프레스코용 화필, 유기안료와 무기안료를 고운 분말가루로 만드는 막자와 유리멀러, 그리고 온갖 낭만적인 이름이 따라붙는 안료 등이 그것이다. 이브 클라인과 헬리오 오이티시카에서 아니시 카푸어에 이르는 현대 예술가들이 원료 그대로의 관능적이고 영적인 색상의 속성에 흥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또한 말라카이트와 아쿼마린, 라피스 라줄리와 심청색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이 붙여진 다량의 여러 순수 안료가 전시된 것을 보고 당연히 흥분하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진영선의 강인한 정신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강인한 정신으로 오래되고 강력한 표현 미디엄인 프레스코를 성공적으로 부활시키고, 동서양 전통 사이와 미학과 철학 사이의 이상적인 통합을 표현하기 위해 한결 같은 집념으로 작업하고 있다.

신체의 표현과 예술의 사유

가브리엘 오로스코 <나의 손은 나의 심장이다> 은염사진 23.2×31.8cm 1991 ⓒGabriel Orozco Courtesy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신체의 표현과 예술의 사유

글|김백균 · 중앙대 교수

요즘 공공 미술관의 전시 경향을 살펴보면 사설 갤러리와 공공 미술관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미술관에서 샤갈이나 피카소처럼 이미 너무 유명해서 더 이상 광고 없이도 생색낼 수 있는, 상업적 이익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기획사에서나 해야 될 것 같은 전시를 열고, 오늘날 지적 담론을 생산하는 전위 작가들의 전시는 사설 갤러리가 맡아 슬그머니 치러진다.
물론 공공 미술관 평가의 지표가 관람객의 숫자에 의해 좌우되는 세태에서 미술관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또 흥행이 보장된 이러한 전시가 많은 시민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이고 미술 문화의 영역을 확대하는 대국민 서비스의 한 방식임을 인정하더라도 공공 자금이 투여된 미술관의 안일한 행보에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미술관의 역할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맡아 주는 것에 있다. 그래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설 갤러리가 할 수 없는 지적 담론을 이끌어 줘야 한다.
<가브리엘 오로스코>전(2010. 10. 26~11. 30. PKM트리니티갤러리)과 <장후완>전(2010. 11. 10~12. 31. 학고재갤러리)이 사설 갤러리에서 열렸다. 오늘날 세계 미술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들의 전시가 조그마한 사설 갤러리에서 별다른 이슈 없이 치러지고 미술잡지의 지면 한쪽을 차지하는 것으로 조용히 막을 내렸다. 사설 갤러리에서 치러지는 전시가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조명하기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지만, 실제 전시에 가 본 난 다음의 느낌은 역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의 ‘맛보기 스푼’만도 못하다는 것이었다. 중요 작품들은 모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중요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 미술관들을 돌며 순회전시 중이지 않은가. 오로스코의 회고전이 지금 파리 퐁피두센터(2010. 9. 15~2011. 1. 3)에서 열리고 있는 중이다.
내가 이번 오로스코와 장후완 두 작가의 전시와 작업을 눈여겨 본 까닭은 이들이 지닌 독특한 감각 처리 방식과 전략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 중심의 미술계 안에서 매우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이기는 하지만, 이 둘은 모두 다 비서구권 작가들이다. 물론 오로스코의 경우는 비서구권이라고 하더라도 멕시코 출신의 작가이니 반쯤은 서구권이라 불러도 되겠지만, 장후완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비서구권 출신으로 뉴욕에서 성공한 사례이다.
오로스코는 벽화로 명성을 날렸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멕시코 명문가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유학했다. 브라질과 뉴욕에서 살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움직인다. 막대한 멕시코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정작 자신의 작업은 멕시코와 관계가 없으며, “아트월드가 자신을 입양했다”는 말로 민족주의 논쟁을 피해갔다. 장후완의 경우 1990년대 후반, 말 그대로 인해전술을 펼치듯 중국의 수 없이 많은 작가들이 뉴욕으로 몰려갔지만, 오늘날 단지 10명 안팎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중국 하남성 시골 출신의 이 작가가 어떻게 그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탐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가브리엘 오로스코, 감각을 사유하다

작년 뉴욕 MoMA에서 열렸던 가브리엘 오로스코의 전시를 2번이나 갔었다. 처음에는 그의 작품에 투영된 섬세한 감각을 따라가지 못해 당황했고, 두 번째는 막연하게나마 감각적 사유가 진행되는 것을 느꼈지만 분명히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품이 건드리는 감각의 환기가 내 몸에 전이되어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의 손은 나의 심장이다>의 진흙덩이가 내 손에서 계속 만져지는 것처럼 그 차갑고 부드러운 진흙의 감촉이 끊임없이 연상되었다. 작은 하트 모양의 진흙이 끈질긴 유령처럼 내 의식을 계속 따라 다녔다. 진흙을 손으로 꾹 누른 자국이 마치 벌거벗은 사람의 갈비뼈 이미지와 유비되고, 누르면 누를수록 옆으로 삐져나와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의 박동이 손으로 전달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기다란 게의 다리가 오므리고 펴지는 것처럼 2장의 연속된 사진에서 보이는 손의 열림과 닫힘, 그 개폐의 과정이 생명 순환의 원리처럼 느껴졌다. 펴진 엄지손가락이 마치 곤충의 더듬이처럼 여겨져 삶의 의지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분명한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시 오로스코를 머릿속에서 내려놓았다. 한국에서 다시 오로스코를 보기 전까지.
한국에서 다시 만난 오로스코는 MoMA에서와 같은 흥분과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다시 오로스코를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누군가는 오로스코를 “광택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설프고 엉뚱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 시대의‘동키호테’”라고 하고, 그의 작업을 “뻔뻔스런 농담”이라고 평했지만, 내가 본 오로스코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한 감각으로 우리의 직관을 일깨우고, 담담하고 깊이 있는 사유가 담긴 기교 없는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였다. 물론 그의 감각이라는 게 너무 섬세해서 때로는 그냥 지나치거나 때로는 “이게 뭐야!”하고 무시할 때 조차도 있었지만, 그는 항상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 그 자체의 물질성에 주목하며, 그것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이 생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환기시켰다. 그의 작업은 감각 자체에 대한 회의와 의문 그리고 긍정의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전시의 포스터가 야자수와 전봇대 사이로 터져 나온 엄청난 화산 폭발의 연기가 모든 화면을 뒤덮고 자동차 하나가 그곳을 빠져나오는 화면 위로 미소 띤 아메리카 원주민 어린아이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마치 ‘메롱’ 하며 놀리듯 풍선껌을 부는 사진 콜라주로 기억되는데, 이 사진 작업은 MoMA에서 출간된 도록의 표지 사진으로도 쓰였다. 롭 켄드릭과 알베르토 가르시아의 오리지널 사진을 콜라주로 오려 붙여 만든 작업을 확대한 이 사진이 전시장 입구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산이 터지는 긴박한 상황을 풍선껌이 부풀어 올라 터져 나오는 이미지와 유비시켜,‘터짐’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그 의식의 균형 감각이 놀라웠다.
마치 어떤 감정이 절정에 가 닿는 순간을 묘사한 것 같은데, 어린아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그 끓어오른 감정의 절정을 다시 식혀서 되돌리고 뒤의 화산 폭발이 감정을 다시 부추기고 하는 순환 과정 속에서 대상과 심리적 거리를 두는 섬세한 감정처리가 돋보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만두를 끊이는 과정과 같다. 냄비 위에서 만두를 끊이다 보면 물이 넘쳐흐른다. 물이 넘치면 냄비 바닥의 불이 꺼지고 만다. 끊는 물이 넘쳐 불을 끄지 않게 하려면 찬물을 조금 부어 온도를 내려 주어야 우리는 잘 익은 만두요리를 먹을 수 있다. 감각을 증폭시키기 위해 감정을 극으로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냉철하게 조절하는 섬세한 그의 감정처리야말로 전시의 압권이었다.
이것이 1994년 작품이니까 32살 젊은 나이의 오로스코가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우선 그의 예술에 대한 자각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멕시코 명문가에서 태어나 스페인으로 유학하고 멕시코에 돌아온 오로스코가 자신의 감각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것에서 인간의 감각에 대한 어떠한 확신을 가지게 된 동기는 멕시코 지진 때문이었다. 멕시코 서쪽 태평양 안에서 발생하여 진도 8.1의 강진으로 진원에서 400km 떨어진 멕시코시티를 철저하게 붕괴시켰던 1985년의 멕시코 지진은 사망자 5000명, 부상자 1만명, 이재민 2만 5000명 이상을 냈다. 20대 중반의 청년 오로스코가 인간의 감각에 대해 의문을 품은 계기는 카메라 하나만 달랑 메고 그 처참한 지진 현장을 돌면서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을 보며, 마치 원효가 아침에 일어나 간밤에 마신 해골 물을 보고 사물과 자신에 대한 분명한 자각 의식을 지닌 것처럼, 어떤 각성의 상태에서 인간 존재와 감각에 대한 자각이 들었던 것 같다. 절체절명의 극단적 상황 속에서 조그마한 몸부림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 테고, 인간의 평범한 감각이 명상적 상태를 통과하면서 그 조그마한 감각이 무한히 증폭되어 삶의 보편적 의미를 더듬는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위대한 회화의 시대: 렘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덕수궁미술관 2003. 8. 15~11. 9) 전시 전경

삶의 현실을 포착해 내는 감각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그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빈 구두상자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심코 들어온 관객이 빈 구두상자를 밟거나 찰 수 있게 바닥에 던져 놓고, 그것을 밟거나 차고 난 다음 주위를 돌아보며 그것이 바로 예술 작품임을 자각하는 순간 드는 당혹감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의 의도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되는 그 상황에 대한 감정의 환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선택한 빈 구두상자라니. 사람들이 버리기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구두상자라고 한다. 빈 구두상자는 종이로 만들었지만 단단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나중에 영수증 보관함 같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남겨두지만 결국은 이것이 여러 개 모이게 되고 쓰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존재이다. 마치 조조의 계륵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나중에 뭔가 특별한 것이 될 것 같은 희망 때문에 붙들고 있는 것인데 그 희망은 언제나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처럼 그가 감각을 사용하는 방식은 감각 자체가 환기시키는 물질의 직접성에 기인한다. 오로스코의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Home Run>이 있다. 1993년 MoMA 전시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오로스코는 개인전 기간 동안 MoMA에서 내려다보이는 54번가 타운하우스의 주민들에게 응접실 창문에 종이컵을 놓고 그 위에 주황색 오렌지를 놓아두도록 부탁했다. 이것을 MoMA 창문에서 보면 멀리 날아간 하나의 공처럼 보이게 되는데, 오로스코의 독특한 감각 사용 방식이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야구공이 방망이에 맞아 날아가는 그 순간, 즉 딱 소리가 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숨을 죽이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공이 올라간 지점을 바라보게 된다. 공이 올라간 지점에는 긴장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을 바라보는 관중들의 환호와 비탄이 흘러나오게 된다. 공에 몰입하고 있는 그 순간의 긴장이 직관적 자극을 발생시킨다. 즉 사물을 매개로 어떠한 느낌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가 바로 느낌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감각 사용을 <Black Kites>를 예로 들어 조금만 더 설명해 보자. 이 작품은 해골에 흑연으로 연처럼 보이는 사각형의 장식을 사방연속무늬로 그려 놓은 것인데, 이러한 해골 장식을 놓고 보면 데미안 허스트가 보여 주는 사유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미안 허스트의 <For the Love of God>가 다이아몬드로 해골을 장식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화려한 매체로 마음껏 극단적 표현을 해나간다면(상어나 소를 통째로 포르말린 용액에 담그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오로스코는 매우 소박하게 감각 자체에 대하여 질의하는 방식으로 매체를 사용한다.
해골에 흑연으로 장식을 그려 넣는 행위는 바로 사물의 안과 밖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뒤집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피부에 문신을 한다고 생각한다. 오로스코는 그 문신을 우리가 안이라고 생각하는 뼈에 그려 넣음으로써 안과 밖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어 보자는 것이다. 안과 밖이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삶과 죽음도 바뀔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도 연처럼 가볍게 바람 따라 인연 따라 가는 것처럼 담담하게 삶의 일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된다. 안도 밖도 없는 세계, 그러나 감각으로 인지되는 바로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곧 불이(不二)의 세계이다.
이렇듯 오로스코가 말하는 세계는 형식으로는 가볍고 의미로는 진지하거나 깊은 것이다. <Ronaldo Ballet>나 <Samurai Tree> 같은 작품들 모두 가벼움과 순환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삶은 비장한 전쟁터(축구는 그 축소판이다)이거나, 항상 사무라이처럼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한판 승부의 장이다. 사무라이가 가장 사무라이 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할복의 순간이다. 사무라이의 삶은 죽음과 맞물려 있기에 비장하고, 그 죽음을 초개와 같이 볼 수 있는 인생 태도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오로스코의 <Samurai Tree>에서 가볍게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원들은 그 할복의 순간에 고통을 줄이기 위해 도우미가 뒤에서 목을 침과 동시에 솟구쳐 오르는 피 튀김의 순간, 뒤로 흩날리는 한낱 봄날의 벚꽃 잎처럼 가볍게 부유한다. 원들은 피자처럼 색 조각으로 나뉘어 무거운 색은 아래로 향하고 가벼운 색은 위로 솟아올라 그 자체를 동력으로 해서 전체 원들이 움직이는 회전과 순환의 느낌을 준다.
이러한 시각으로 오로스코의 작업을 살펴보면 그의 감각처리 방식이 매우 동양적이고 명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너무 소박하고 미세해서 화려한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매우 분명하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오로스코 역시 <Dark Wave>에서 보이는 것처럼 단위와 대상이 점점 커져 고래 뼈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거대 작업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감각적 현실을 자기 주변에서 자기 눈으로, 자기 몸으로 포착하는 감각 사용의 방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바다의 고래가 사막에서 화석으로 발견되고 그 물에 살던 생명을 다시 공중에 매달아 놓는 방식으로 삶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보여 주는 예술적 가치는 바로 삶의 현실을 소박하지만 분명한 감각으로 잡아 내는 것에 있다.

장후완, 신체를 통해 말을 걸다

이에 반해 장후완이 감각을 처리하는 방식은 매우 직접적이다. 한국 학고재갤러리에서 그는 설치와 회화 중심의 작품들을 선보였지만, 본디 장후완은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통해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신체를 직접 이용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존재가 미술계에 각인된 것은 1994년 <12m²>와 <64kg>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2번의 퍼포먼스를 통해서였다. 이 2번의 퍼포먼스 모두 극단적인 자학을 드러내는 실험 행위였고, 여기서 그는 관중이 견딜 수 있는 심리의식의 저항선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의식을 전달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1994년 5월 장후완은 한 마을의 공공화장실 안에서 자기의 몸에 꿀과 물고기 내장을 바르고 파리가 온 몸에 가득 달라붙을 때까지 약 2시간가량을 앉아 있었다. ‘12m²’는 공공화장실의 크기이다. “올해 5월 뜨거운 어느 날 오후, 나는 언제나 가는 베이징 동촌의 한 화장실에 갔다. 어떻게 해도 화장실 안에 발을 들일 수 없어 다른 화장실을 찾았지만 앞의 화장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곧 자전거를 타고 마을 안 부대의 화장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화장실에 갈 때마다‘좀 참고 말지’라며 그 고통을 참아왔던 것이다. 순간 <12m²>에 관한 생각이 이루어졌다.”
장후완 스스로 말하는 이러한 퍼포먼스 동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내의 한계에 관한 것이다. 몸에 바른 꿀과 물고기 내장, 뜨거운 여름, 더러운 화장실, 수많은 파리, 악취와 간지러움. 이러한 이미지들의 순환이 증폭시키는 고통과 짜증스러움을 바라보는 관중의 심리적 저항선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 저항선은 사실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그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한 질의가 아닌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주는 대상이 단지 화장실의 악취와 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같은 해 6월 동촌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던 <64kg>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철사로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60분 동안 250ml의 혈액을 침대 위의 스테인리스 쟁반에 흘러내리게 했다. 스테인리스 쟁반 밑에는 뜨거운 전기난로가 쟁반 위로 떨어지는 혈액을 곧바로 태우도록 해서 역겨운 피비린내가 방 안 가득 퍼지도록 만들었다. 철사, 공중에 매달림, 혈액, 여름날 방안에 가득 찬 혈액의 탄내. 그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하나의 억압으로 인지하도록 만들고 그 억압에 대한 인내력을 신체의 저항으로 보여 준다. 당시 미술계는 장후완의 이런 제스처를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쉬 빙 <천상의 책> 한지 혼합재료 설치 1987~1991 붓으로 쓴 한자를 판화로 찍어 공간 속에 설치했다. 그 한자들은 가공된 서체, 즉 위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서양과 동양, 주체와 타자 사이의 신체

1998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작업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가 뉴욕으로 건너간 실질적인 배경을 무단으로 추측할 수는 없지만, 그 이후 그의 행보는 중국 현대미술의 상업화와 어느 정도 관련을 지니고 있다. 1993년을 전후로 순수한 예술 정신을 표방했던 전위적 중국 현대미술은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1993년 이전 중국 현대예술가들은 비엔날레나 아트페어 같은 대규모의 국제 현대미술 전시에 거의 참가해 본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양의 예술제도와 자본의 달콤한 매력을 알지 못했고, 예술창작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1993년 중국예술가들의 국제 비엔날레 참여는 그들에게 자본과 예술의 밀월에 대해 눈 뜨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장후완 또한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당시 미술의 중심인 뉴욕으로 향했을 것이다.
뉴욕 화단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장후완은 서구세계가 중국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전략을 사용했다. 장후완은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 놓고 중국인이라는 자기 신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쇼크를 주는 방식으로 서구 미술계에 나타났다. 이러한 방식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단지 장후완만의 방법은 아니었다. 천전, 차이궈창, 아시엔, 창신, 쉬 빙, 황용빈 같은 그보다 먼저 유럽과 미주에서 활동하던 많은 중국 예술가들에 의해 종종 이용되었던 방식이었다.
모더니즘의 역사 의식과 오리엔탈리즘을 가공하여 역으로 그들에게 호소하는 것, 그것은 중국의 작가들이 서구세계에 진출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그들은 한자나 서예, 수묵 찻잎 족자 청화자기 실크 치파오 팬더, 명대풍의 가구, 고전적인 중국화나 희곡이나 소설, 화약 인쇄술 나침판 족보 역경, 선종과 노장 사상, 또는 문혁시기의 군중 형상, 표준 사진, 표어, 선전화 휘장 중산복, 마오쩌둥 어록, 군복, 혁명, 영웅 인물과 마오쩌둥 같은 지도자 초상 같은 상징들로 ‘중국의 지혜’‘중국 특색’‘중국 방식’‘중국 형상’을 팔았다.
서구 미술계에서 장후완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요인은 그가 단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방식 그 자체를 뒤집어, 서구세계의 기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대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보는 방식을 취했다. 그의 대범함과 총명함이 여기에 있다. 그동안 선배 중국 작가들이 의도를 숨긴 채 중국적 이미지를 포장하여 서구 미술계에 팔았다면,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Family tree> <S hanghai Family tree>와 같은 작업을 <My Ameri ca>나 <My Australia> <My Japan> 같이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가졌던 퍼포먼스와 비교해서 보면 이러한 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서구세계가 중국에 가지는 기대치를 소재로 해서 무엇인가 다시 한 번 더 의미를 각색한 작품을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Family tree>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3명의 서예가를 초청하여 우공이산(愚公移山) 같이 매우 잘 알려진 중국의 우화를 아침부터 밤까지 얼굴에 쓰게 한다. 글이 얼굴에 써질수록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정체성까지 사라지게 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My America>는 서구가 동양을 보는 시각을 거꾸로 뒤집어 보이는 것이다. 벌거벗은 장후완이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공간의 중심에 앉아 있고 나체의 백인들이 철제 난간을 두른 주위를 삼층으로 둘러싸고 빙빙 돌아간다. 장후완의 주위에는 빵이 던져져 있다. 정황상 원숭이는 중국인인 장후완이 분명한데, 분위기는 묘하게 서양 관람객들이 원숭이처럼 보이게 만들어졌다.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을 한 번 더 뒤집어,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서구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를 역으로 보여 주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서양 입장에서 보면 중국적 이미지란 곧 이국적 이미지이므로, 결국 동서의 문제, 주체와 타자의 문제를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여 풀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시각을 중국 쪽에서 포스트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자기식 해석 버전쯤 되는 것이다. 서극의 영화 <소오강호>(1990), <신용문객잔>(1992)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색채의 동양주의를 일컫는 것으로 중국과 서양, 전통과 현대, 신화와 과학의 융화와 충돌, 동양식 영웅주의를 현대적 언어로 각색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중국적 이미지의 재생산

장후완의 다음 행보는 중국으로 귀환이다. 2005년 상하이에 정착하면서 그는 설치와 거대조각, 그리고 재로 그린 그림을 제작한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소가죽 부처 얼굴> <산으로 돌아온 자유호랑이>와 같은 이번 학고재갤러리에 나온 대부분의 작업들이 이와 관련되어 있으며, 작업 인력이 100명이 넘는 엄청난 공장에서 만들어져 제품처럼 수출된다. 천장에 매달린 부처머리에 향을 꽂고 불을 붙이면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도록 만들어 놓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부질없는 믿음에 관한 깨달음에 관한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사찰에서 매일 수없이 피어오르는 향은 누군가의 애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꿈과 기원을 연기에 실어 보낸다. 그러나 그 염원은 단지 사그라진 재처럼 덧없는 것이다.
장후완은 여전히 사찰과 부처 염원 향 그리고 쓸모없는 부산물로서 재라는 중국적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소가죽 부처 얼굴>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부처에 대한 불경스러움의 표현으로 성스러운 외적 대상의 부정이다. 외적 대상의 부정은 곧 내적 성찰로 이어지므로 주체에 관한 그의 생각이 명확하게 읽히게 된다.
장후완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총명함과 대범한 실천에 머리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속내가 너무 빤히 읽힌다. 의미의 레이어가 거의 1:1로 대응할 만큼 얇아서 되씹어보면 볼수록 그 얄팍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것은 바로 몸에 바른 꿀과 물고기 내장, 뜨거운 여름, 더러운 화장실, 수많은 파리, 악취와 간지러움의 이미지와 사찰과 부처, 염원, 향, 재라는 도식이 일직선에 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로스코와 비교하면 더욱 더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더욱 장후완의 귀국이 미국에 갔던 동일한 이유로 중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경제는 지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2011 January Special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세계’라는 테두리는 더 이상 지역적인 경계도, 혹은 오로지 선망해야 할 거대한 무대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가까운 공간에서 활약하고 있는 작가와 작품만을 익숙하게 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art는 세계 각지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국 작가들을 찾아 봤다. 작가 조사를 위해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6명의 큐레이터를 선정, 총 12명의 작가를 추천받았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도 있고,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덜 알려진 작가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이라는 배경이 작업에 어떠한 영향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는지 역시 제각각이다. 지금, 다양한 형식과 어법으로 글로벌 시대의 아트씬을 그리고 있는 12명의 작가를 소개한다.
이어서 ‘미술’로 세계를 엮어 가는 큐레이터 6인에게 공통 질문을 던졌다. 특히 특정 기관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행보를 보여 주는 큐레이터들에 초점을 맞췄다. 과연 이들이 생각하는 글로벌 시대의 큐레이터십, 그리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을 향한 조언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큐레이터 김승덕을 심층 인터뷰해, ‘1세대 글로벌 한국 큐레이터’로서의 풍부한 경험과 에피소드를 세세히 들어 본다.

이슬기 왼쪽·<이도(IDO)> ⓒSeulgi Lee 2009 | 오른쪽·<코르시카 섬의 아프가니스탄 여인(Une Afghane en Corse)> ⓒSeulgi Lee 2001

이슬기 1972년 서울 출생. 파리 국립미술학교 DNSAP. 파리 라페름므 드 부이송(2009) 파리 콜래파크갤러리(2008)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플라스틱 댄스플로어 페스티벌>(베르사이유, 2010), 보르도비엔날레 <이벤토>(2009), <엘라스틱 터부>(비엔나쿤스트할레, 2007)등에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B-side>(갤러리현대, 2008), 2008광주비엔날레, 2009플랫폼에 참여했다. 파리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장혜연 <(K)now (T)here> 비디오 스틸 2010

장혜연 1968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및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 크랜브룩아카데미오브아트 대학원 졸업. <변형된 이미지>(산타페, 2009) 2006티후아나국제비엔날레 등에 초청됐으며, 한국에서는 <젊은모색>(국립현대미술관, 2000), <USB 해외청년작가전>(2003), <마그네틱파워> (코리아나미술관, 2009)에 참여했다. 1999브루클린아트위원회 국제영화제 1997샌프란시스코 국제아시안아메리칸영화제 등에 참여했다. 현재 미국 뉴욕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진신 <매일의 기념비 (Everyday Monuments)> 혼합재료 약 223×152.4×1371cm 2009

진 신 1971년 서울 출생. 프랫인스티튜트 대학 및 대학원 스코히건 회화조각학교 대학원 졸업. 스코츠데일미술관(2010), 스미스소니언미술관(2009), 뉴욕현대미술관(2004)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뉴욕 현대미술관, 캘빈클라인 뉴뮤지엄 아시아소사이어티뮤지엄과 영국 리먼브라더스에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2002년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에 참가했다. 미국 뉴욕에 머물며 작업 활동 중이다.

유혜리 <야단법석(Hurlyburly)> 캔버스에 아크릴릭, 스프레이 페인트 183×152cm 2010 | 오른쪽·<병상(Sick bed)> 보드에 아크릴릭

유혜리 1970년 출생. 경북대 및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 졸업. 뉴욕 토마스어밴갤러리(2008, 2010)와 미시건 크레스지아트뮤지엄(2009)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첼시아트뮤지엄(2010), 뉴델리 트라반코팰리스(2010), 뉴욕 화이트박스갤러리(2007)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1년 런던 사치갤러리의 <Painting>전에 참가할 예정이다.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한다.

팀리 <String Quartet, Op. 1, Glenn Gould, 1955> 설치 이미지 2010 Courtesy the artist and Lisson Gallery

팀 리 1975년 서울 출생. 알베르타대 졸업 및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대학원 졸업. 런던 리슨갤러리(2010), 런던 헤이워드갤러리(2009), 휴스턴 컨템포러리아트뮤지엄(2008)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08요코하마트리엔날레에 초청됐다. 2009~10년 베를린 DAAD레지던시에 참가했으며, 현대미술관 캐나다국립미술관 테이트모던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조의숙: <3개의 서스펜션 포인트(Three Suspension Points)> 혼합재료 2007 All photo credits: Eui-Suk Cho

조의숙 1969년 서울 출생. 추계예대 졸업 후 프랑스 오를레앙시각미술학교 DNAP, DNSEP. 현재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에 거주하며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2010부르주비엔날레에 참가했으며, 제3회 <뉴욕 파리한인작가교류전>(2007)에 초대받아 개인전을 열었다. 오를레앙 및 클레르몽페랑 시정부 문화부에서 2004년과 2007년에 창작 지원금을 받았다.

김지은 왼쪽·<수집가들: 퍼레이드 (Collectors: Parade)> 종이에 콜라주, 혼합재료 29.8×20.5cm 2009 | 오른쪽·<아이 캔디(Eye Candy)> 종이에 콜라주, 혼합재료 79×54cm(21개 드로잉 설치 중 첫 번째) 2010

김지은 1976년 서울 출생. 오벌린대 종교학, 미술 전공 졸업후 하버드대 종교학 석사, 시카고일리노이주립대 MFA, 말뫼예술대학 크리티컬 스터디스 프로그램 졸업. 최근 스웨덴 예블레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8광저우 트리엔날레에 참여했다. 스웨덴 말뫼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이재이 왼쪽·<Mediterranean> 싱글채널 비디오 (부분) 2009 | 오른쪽·<Mediterranean> 싱글채널 비디오 (부분) 2009

이재이 1973년 서울 출생. 시카고 예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국문화원(2009), 프랑스 파리 갤러리가나 (2007), 서울 갤러리팩토리(2007)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미국과 한국의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9년 경기창작센터 파일럿프로그램 ‘팔레드도쿄 워크샵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2010프랭클린 퍼니스펀드를 받았다.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하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 활동 중이다.

천경우 <Simultan#4> C-프린트 각 60×90cm 2010

천경우 1969년 서울 출생. 중앙대 사진학과 및 독일 부퍼탈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졸업. 베를린 DNA(2010), 한미사진미술관(2010) 토탈미술관(2009), 엠덴미술관(2009)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8브레멘시 공공미술상. 2007한미사진상을 수상했다. 휴스턴미술관과 DKM예술재단, 한미사진미술관 등 다수의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독일 브레멘에 거주하고 있다.

남효준 상하이 뱅가드갤러리 개인전 전경 Courtesy of artist and office339

남효준 1987년 일본 효고 출생. 고베조선고급학교 졸업. 상하이 뱅가드갤러리(2010), 요코하마 NYK갤러리B(2006)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USB 재외한국청년미술제>(2009)에 참가했다. 최근 일본에서 중국 상하이로 활동 지역을 넓히고 있다.

김성환 <강냉이, 그리고 뇌 씻기(Washing Brain and Corn)> HD 비디오, 사운드 2010 Courtesy the artist

김성환 1975년 출생. 서울대 건축과를 거쳐 윌리엄스컬리지 BA 메사추세츠공대 시각연구과 졸업. 토탈미술관(2003)을 시작으로 런던 윌킨슨갤러리(2009), 로테르담 비트드비트(2008)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케이프타운, 유트레히트 암스테르담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미국 및 유럽의 다수 전시에 참여했다. 국내 활동으로는 2010미디어시티서울, 2008광주비엔날레, <아트스펙트럼>(삼성미술관 리움, 2006) 등에 참가했고, 2007에르메스미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국 뉴욕에 머물며 작업 중이다.

우가이 <24시간 노동자(Workers 24 hours)> 디지털 사진 2008

알렉산더 우가이 1978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맨컬리지 수학 후 키르기스스탄국립대학 졸업. 파리 퐁피두센터(2010) 뉴욕 뉴뮤지엄(2009)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2006) 등에서 열린 기획전에 참여했다. 2007베니스 비엔날레 중앙아시아파빌리온과 2009이스탄불비엔날레에 초대됐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에서 거주하며 런던, 텍사스 한국(창동창작스튜디오, 2010) 레지던시에 참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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