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Magazine

Art in Culture

2008.07

Abstract

NEW ERA OF GRAFFITI ● 스트릿 아트(Street Art). 그것은 미술시장의 활황세 속에 위치한 교환 가치로서의 재화가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예술 행위다. 자본의 논리를 떠나 존재하기 때문에 스트릿 아트는 태생적으로 자유롭다. 스트릿 아트는 그래피티(Graffiti)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만 보다 넓은 개념의 '거리의 미술'을 뜻한다. '공공미술'이라는 합법적으로 공인된 영역을 벗어나 거리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시각미술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스트릿 아트는 비주류 인종과 계층의 자기 존재적 발언이자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art는 전세계의 거리를 발언대로 삼는 국제적 명성의 스트릿 아티스트들을 선별해 소개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노르웨이 독일 미국 영국 호주 스페인은 물론 한국의 작가들까지 포함했다. 이와 더불어 지난 5월 런던에서 열린 세계적 스트릿 아트 축제인 캔스 페스티벌(Cans Festival)의 현장을 화보로 준비했다.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도시 공간에 살아 숨 쉬는 스트릿 아트의 현재를 조명하는 기획이다. '그래피티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스트릿 아트의 오늘을 논함으로써, 그 시각화된 의사 표현의 정수로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Contents

표지 빌 비올라 <해변 없는 바다> 영상/음향 설치 2007(연기:블레이크 비올라, 사진:키라 페로브)
 
에디토리얼 New Vision 젊은 이론가를 찾습니다!_김복기
 
핫피플 
    빌 비올라, 인간 내면을 어루만지는 '영상 시인'_장승연
 
프리즘 
    기무사 부지에 미술관 '있다'_정준모

    미.칠.쥐.경. 美.漆.鼠.景._노순택
 
아티스트 아틀리에 아카이브 
    전준_이선화
 
포커스 
    하동철_서성록
    조덕현|김옥선_김정락
    오치균_리차드 바인
    김근중|임동식|신하순_김백균
 
특집 NEW ERA OF GRAFFITI
    (1) 화보_스트릿 아트의 대표주자들
    (2) 글_도시 정글에 피는 꽃들_이태호
 
작가 인터뷰 
    김호득, '문득' 일필휘지로 돌아오다_김복기

이미지링크 수잔 더져스
 
월드 아트 
    2008 바젤아트페어, 예술과 축구의 힘겨루기_김정연
 
암흑물질 
    성기완, 뮤즈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사람_이정헌
 
전시리뷰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미지반전|이미지 연대기|신학철|이상현
    김호준|정현숙|이일|류회민|정영한|이지현|폴 윈스탠리
    우리 안의 신화|정주하
 
아티스트 인사이드 
    지니서, 공간 속 공간의 유기적 흐름_이성희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박은하|서지형|김은지|최은경|이현진|임동열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암흑물질-성시완, 뮤즈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사람

성시완, 뮤즈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사람

글 | 이정헌 객원기자

커버아트에 쏟은 열정

“처음엔 2, 3층 전시장 전면을 음반으로 도배하려고 했습니다.” 성시완의 음반 수집은 ‘무차별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세계적인 희귀 음반 컬렉터’ ‘아트 락의 선구자’ 등의 문구가 그를 수식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특정 장르를 편식하지 않고 무차별적, 무작위적으로 음반을 수집하고 연구한다. 아트 락은 그가 특히 애정을 두고 있는 분야일 뿐, 팝송, 칸초네, 샹송, 제3세계 음악으로 불리는 다양한 월드뮤직들까지 광범위하다. 성시완의 음악 사랑은 거의 병적이다. 그는 북유럽이나 아프리카 지역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노래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려 월급을 받은 후 외국어대학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보이는 문법책은 모조리 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힌두어, 아프리카 스와힐리어까지 말이다.
성시완의 음반 수집은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클래식 음반을 구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큰 누나의 방에 있던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어려웠던 나라 사정과는 상관없이 그는 꾸준히 음반을 수집했다. 가족들은 그가 음반 수집하는 일을 적극 후원했다. 그래서 성시완은 “우리집이 갑부인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성시완은 음반 수집을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다. 미국, 영국 등의 청소년들과 펜팔을 하며 음반을 부탁하기도 했고, 외국으로 향하는 건설근로자들에게 음반 구매를 부탁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발품을 팔고 시간을 투자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음반을 6매 이상 국내로 반입할 경우, 남산에 있던 공연윤리위원회에 가사를 첨부한 서류를 제출하고 심의를 거친 후, 문화공보부에 가서 문화공보부장관의 추천서까지 받아야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성시완은 그 모든 과정을 그대로 이행했다.
음반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컬렉터들은 자신의 컬렉션을 분류 보관하는 일에 큰 신경을 쓴다. 그런데 성시완은 그렇지 않다. 내키는 대로 수집하고, 마음대로 보관한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음반 찾는 데에 보냈다”고 고백한다. 분류 보관하는 일에는 허술하지만, 그는 음악 이름이 나오면, 귀신 같이 러닝타임을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음반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것이 컬렉터이기 이전에 음악애호가인 성시완의 생각이다.
“저는 노래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어쩌면 그가 전시에서 보여주는 1천여점의 음반커버보다 음악에 품고 있는 애정을 더욱 잘 드러낸다. 이 전시는 단순히 음반커버의 미적인 아름다움만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커버아트에 투사된 성시완의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신념을 담은 ‘성시완 히스토리’다.

포스터 형식으로 제작된 ‘튜더 로지(Tudor Lodge)'의 1971년 앨범 <Same>

커버아트의 황금기를 기억하다

음반을 인간에 비유하자면 음악은 마음이고 음반커버는 얼굴이다. 누군가의 외모, 특히 얼굴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면 그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외모보다 마음의 중요성을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음반커버에 예술적인 요소가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이후 1960~70년대 사이 ‘아트락’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음반 커버아트가 꽃을 피웠다. 1960년대 말 레코드사와 젊은 디자이너들이 커버아트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독특한 사진 기술, 초현실적인 삽화 등이 가미된 것이다.
‘사이키델릭 락’과 ‘프로그래시브 락’의 붐 또한 음악과 음반커버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음악의 흐름은 당연히 당시의 시대상을 따라갔고 음반커버 역시 그랬다. 그 당시의 음반커버에서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른바 ‘커버아트의 황금기’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73년 유류파동과 종이 값 인상 등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음반커버 붐은 오래가지 못했다.
커버아트를 향한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은 끝이 없었고, 그 형식의 새로움이 주는 소소한 재미가 음악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시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음악 자체를 사랑하고 커버아트에 대한 관심은 컸지만, “음반커버는 음반 자체를 보호해야 하는 기본적인 임무가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의 음반은 음악을 담고 있는 매체의 개념을 벗어나 커버아트와 어우러져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 영역을 구축한다. 예술적 차원으로 진화한 휘귀음반들이 모인 이번 전시는 컬렉션과 컬렉터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이탈리아 만화의 거장 크레팍스가 그린 가리발드(Garybaldi)가 그린 데뷔 앨범 <NUDA>

훙카 뭉카(Hunka Munka)의 1972년 앨범

2008 Basel Art Fair

예술과 축구의 힘겨루기

글|김정연·갤러리현대 실장

올라퍼 엘리아슨 <One Way Color Tunnel> 256×180×1050cm 스테인리스스틸, 컬러 아크릴릭, 아크릴 거울 2007

시작부터 우려의 여지가 많았다. 올해 유럽축구연맹에서 개최하는 UEFA 챔피언스 리그가 스위스에서 열리는 바람에 바젤아트페어(이하 아트바젤)는 예년보다 일주일이나 일정을 당겨야 했다. 더구나 첫 경기인 스위스 대 체코의 경기가 페어가 끝나기도 전인 6월 7일 저녁, 하필 이곳 바젤에서 열렸던 것이다. 이처럼 미술과 축구의 첫 힘겨루기에서 천하의 아트바젤도 한 걸음 양보를 해야겠다.

축구가 바젤을 살리다?

이미 1년 전부터 예견된 이 악재와 더불어 행사 개최를 한 달여 앞둔 4월 30일, 바젤아트페어 조직위원회는 미술 감독 케이 소피 라비노비츠(Cay Sophie Rabinowitz)의 사임을 알렸다. 결국 전략과 재정 담당 마크 슈피글러(Marc Spiegler)와 아네트 숀홀처(Annette Sch쉗holzer)가 공동 감독이 되어 한 달여 만에 행사가 열린 것이다. 더욱이 날씨 또한 스위스의 맑은 하늘과 초록 풍경을 기대한 방문자들에게 더없이 실망스러웠다. 바젤 방문객들은 옷깃을 여미고 초봄과 같은 차가운 바람과 빗속을 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근간의 경매 결과는 초고속의 성장가도를 달리던 세계 미술시장을 다소 주춤하게 했고, 더불어 고유가로 인한 세계 경제의 어두운 예견들이 속출하는 시점에서 올해의 아트바젤이야말로 향후 전 세계 미술시장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과연 세계 미술시장의 성장은 이대로 지속될 것인가? 올해로 39회를 맞은 세계 최대의 미술 견본시장, 아트바젤은 2008년 6월 3일, 유럽 축구의 열기와 함께 문을 열었다. 아트바젤 VIP 오프닝 행사장에 영국 프리미어 리그 첼시의 구단주이자 러시아 출신 석유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가 젊은 여자 친구 다샤 쥬코바(Dasha Xhukova)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아브라모비치는 불과 한 달도 안 된 지난 5월 뉴욕 경매에서 프란시스 베이컨과 루시안 프로이드, 단 두 점에 120억달러(1,200억원)를 지불하였고, 이번 가을 모스크바에 비영리 미술센터를 오픈할 예정이라서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그의 미술품 구입 목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주로 경매를 통해서 미술품을 구입해 온 아브라모비치가 최초로 아트페어에서 목격되자 300여개의 참여 화랑들은 가슴을 설레었는데, 《아트 뉴스페이퍼(The Art Newspaper)》는 6월 4일자 판에 ‘옥션에서 페어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바젤을 살아나게 하다’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그가 140억원 상당의 자코메티 조각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대서특필했다. 다음날 아브라모비치는 크루지어&씨에갤러리(Galerie Jan Krugier & Cie) 부스에서 자코메티의 1956년작 을 구입하였고,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아브라모치는 이번 페어에서 여러 개의 자코메티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축구계의 거물은 이렇게 2008년 아트바젤의 첫날부터 미술계를 흔들어 놓았다.

올해 행사는 VIP와 프레스 오프닝 등을 제외하고 6월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개최되었다. 아트바젤은 본래 여러 개의 행사로 이루어지는데 300여개의 화랑이 참여하는 갤러리 프로그램과 대형 프로젝트로 구성되는 전시 형식의 <아트 언리미티드(Art Unlimited)>, 아트페어가 열리는 메세플라츠 광장에 대형 옥외 조각품을 설치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Public Art Project)>, 마지막으로 기존의 아트페어 형식과 달리 하나의 화랑이 한 명의 작가만을 홍보하는 <아트 스테이트먼트(Art Statements)>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이와 더불어 필름 프로그램, 작가, 큐레이터와의 대담, 특별 강연 프로그램 등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행사가 페어 기간 동안 열린다. 심지어 올해는 요가 강사를 초빙하여 관람객들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재미난 프로그램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미술품 쇼핑에서 시작된 아트페어의 수가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좋은 미술품을 제공하는 역할 외에도 부가적인 놀이와 재밋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트페어 조직의 새로운 부담이 된 것이 확실하다.

아트바젤의 후광

기대하는 중소 페어들 아트페어의 양적 증가는 바젤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였다. 다른 여느 대형 아트페어와 마찬가지로 아트바젤 기간에 여러 개의 중소 아트페어가 열리는데, 리스테(Liste), 볼타쇼(Volta Show), 스코프바젤(Scope Basel), 솔로프로젝트(Solo Project) 등이 그것이다. 이 아트페어들은 주로 중소 규모의 화랑들이 참여하여 비교적 젊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홍보하고 판매한다. 한국 화랑으로는 스코프바젤에 원앤제이갤러리가 참여하여 권경환, 김수영, 박진아 등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였다. 한편 판화, 드로잉, 사진과 같은 종이 재료 작품만 소개하는 프린트페어(Print Fair), 디자인 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바젤(Design Basel), 라틴계열 화랑과 작가들에 초점을 맞춘 발레라티나(Balelatina) 등도 있었지만 디자인바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은 페어들이 컬렉터들의 관심을 크게 얻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그나마 1995년부터 젊은 페어로서 바젤에서 자리매김을 한 리스테와 4회째 볼타쇼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페어들은 판매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기간 내내 한산함을 면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관람객들의 관심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최근에 이러한 이야기가 자주 들려오는데, 런던의 프리즈아트페어, 뉴욕의 아모리쇼, 마이애미 아트바젤 기간에는 여러 개의 중소 아트페어가 동시에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지난 봄 아모리쇼가 열리던 기간, 뉴욕에서는 무려 20개가 넘는 아트페어가 동시에 열려 체증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문제는 폭넓은 고객층이 상주하는 대도시와 달리 바젤이라는 소도시에는 상주하는 컬렉터 층이 매우 미미하다는 점이다. 단 며칠간 아트바젤을 찾는 대형 컬렉터들에게 한두 개도 아닌, 실제로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수의 아트페어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번 아트바젤 기간 동안 작은 페어들은 관람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행사장 간의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아트바젤의 VIP 카드 소지 관람객들을 무료로 입장시키는 등 홍보에 특별한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부분 작은 페어장들은 더없이 한산한 모습이었다.

한편 같은 기간 바젤 시내와 근교의 미술관들은 일제히 특별전을 열어 바젤을 찾아온 미술계 손님들을 맞는다. 바이엘러미술관은 페르낭 레제 특별전을, 샤우라거는 안드레아 지텔 (Andrea Zittel), 모니카 소스노브스카(Monika Sosnowska) 등의 매우 아름다운 특별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축구 때문에 피해를 본 미술관도 있었다. 4개의 전시가 열리던 쿤스트하우스 바젤란트(Kunsthaus Baselland, 바젤미술관)는 훌리건들의 테러에 대비하여 미술관을 닫고 전시장을 모두 비워야 했다. 미술관이 축구 경기장과 가까운 탓에 실제로 훌리건들의 테러를 당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예술과 스포츠라는 이질적인 두 문화가 공존하게 된 작은 도시 바젤은 축구라는 매우 남성적이고 거친 문화와 섬세하고 (축구에 비해)여성적일 수밖에 없는 미술이 만들어내는 팽팽하고 생소한 긴장감 속에 처해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아트페어 관람객들에게 바젤이라는 조용한 예술 도시가 이번처럼 생경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트바젤, 조용했지만 결과는 성공

축구 문제 외에도 4월 30일 발표된 라비노비츠의 사임은 아트바젤 내부에 좋지 않은 조짐이 있는 것 마냥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이 일화야말로 어쩌면 일찍이 예상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라비노비츠는 아트페어와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미술 감독을 맡은 후 2007년 단 한 번의 행사만 치루고 사임한 원인에 대하여 2008년 행사가 실패할 것을 예상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라비노비츠라는 인물이 미술 감독이었지만 세계 최대의 미술 견본시장인 아트바젤을 주도하기에는 상업적 바탕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아트바젤에 참여하기 전 라비노비츠는 《파켓(Parkett)》이라는 저명한 미술잡지의 편집장으로서 냉철하고 예리한 미술 비평을 이끌어 나간 훌륭한 인재였으며, 미술사 박사인 남편 크리스찬 레틀마이어(Christian Rattlemeyer) 역시 현재 뉴욕근대미술관 MoMA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매우 학구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미술에 대한 지적 이해가 결코 미술 시장에 대한 이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 경험이 없는 라비노비츠가 아트바젤을 지휘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건 행사 한 달여를 남겨 놓은 그의 사임이 2008년 아트바젤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쳤을 리는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두 명의 공동 감독이 주도한 이번 아트바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진행을 마쳤고, 예년과 다름없이 경제적으로도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비록 이번 아트바젤의 미술품 총 거래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 미술계 인사를 포함한 6만여명의 관람객, 300개의 참여 화랑, 2천여명의 작가라는 통계 숫자만 보아도 가히 그 규모 면의 성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게다가 참여 화랑들의 반응 역시 매우 긍정적이다.

고가의 블루칩 전문 화랑인 엘엔엠아츠(L&M Arts)의 바렛 화이트(Barrett White)는 “작년에는 시장이 미친 듯이 보였던 것에 반해, 올해는 다소 조용해졌지만 결과는 오히려 더 좋았다”라며 매우 만족스러운 평가를 내렸고, 이것은 비단 몇몇 화랑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로화의 상승으로 인해 아트바젤을 찾은 미국인 컬렉터들의 수는 대폭 줄었지만, 오히려 유럽인 컬렉터들은 가격 부담이 줄었던 것이다. 실례로 미국인 컬렉터들은 이번 페어의 작품 가격이 대체로 비싸다고 느꼈으며 구입 결정에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화랑인 존버그룬갤러리(John Berggruen Gallery)는 한 미국인 고객이 무려 다섯 번이나 부스에 들락거린 후에 130만달러(13억원)의 마틴 키펜버거(Artin Kippenberger) 작품을 구입했다고 전했다. 결국 유로화의 상승으로 미국인들의 공격적인 구매나 단기 미술품 투자에 뛰어든 신흥 컬렉터들의 수는 확연히 줄었으나 반대로 우수한 고가의 작품은 어김없이 팔려나간다는 사실이 아직 미술시장의 단단함을 증명한다.

아트바젤에서 판매된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면 <아트 언리미티드>에 전시된 타카시 무라카미의 백금으로 장식된 8톤짜리 대형 조각 <타원형 부처(Oval Buddha)>가 8백만달러(82억원)에 가볍게 팔려나갔고, 뉴욕 아쿠아벨라갤러리(Aquavella Galleries)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두 점을 각각 1,200만달러(124억원)와 180만달러(18억원)에, 밀라노의 마시모데카를로갤러리(Galleria Massimo De Carlo)는 루돌프 슈팅겔(Rudolf Stingel)의 거대한 부조 작품을 100만달러(10억)에 판매하였다. 또한 런던의 리손갤러리(Lisson Gallery)는 애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설치 작품을 90만달러(9억원)에, 바바라글래드스톤갤러리(Barbara Gladstone Gallery)는 쥬세페 페노네(Giuseppe Penone)의 거대한 평면 작품을 90만유로(15억원)에 판매했다. 즉 선별된 소수의 컬렉터 층은 경제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실제로 이번 행사에 맞추어 바젤 공항에는 무려 205대의 개인 비행기가 내렸고, 빅토리 핀척(Victor Pinchuk)이나 스티브 코헨(Steve Cohan), 프랑스와즈 피노(Francoise Pinault) 같은 세계적인 거물급 컬렉터들은 이번 행사에 직접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리인들을 보내 전화로 거래하는 것이 상례인 만큼, 공식적으로 확인되거나 혹은 눈으로 보는 페어장 내의 미술품 거래만으로 총 거래량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중국작가들의 약진

올해 아트바젤의 특이점은 단연 중국작가들의 약진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수의 화랑이 장샤오강, 쩡판지, 장후안, 황용핑, 차이 구어창, 아이 웨이웨이, 얀페이밍 등 중국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고 판매 결과도 매우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럽 미술시장 내에서 아직 중국 현대미술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시아나 미국 시장과 달리 유럽은 중국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컬렉터 층이 일찌감치 등장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장 내의 작품 거래는 아직 미미하다. 그러나 오는 8월 베이징에 전시장을 여는 페이스윌덴스타인(Pace Wildenstein)은 장샤오강의 작품 두 점을 소개하였고, 그 중 한 점이 100만달러(10억원)에 판매되었다. 뉴욕의 데이빗쯔바이너갤러리(David Zwiner Gallery)도 장샤오강의 80호 작품을 3만5천유로(5억6천만원)에 제안하였고, 쩡판지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아쿠아벨라는 쩡판지 작품 한 점을 120만달러(12억원)에 소개했다. 특히 <아트 언리미티드>에 전시된 치우 안시옹(Qiu Anxiong)의 작품 <기억상실증 응시하기(Staring into Amensia)>는 너무나 많은 화젯거리를 남겼는데, 중국에서 45톤짜리 오래된 기차 한 대를 트럭에 실어 바젤까지 오는데 4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차를 제자리에 놓기 위해 17명의 기차 회사 인부가 함께 왔으며, 판매가 될 경우 작품을 또 옮겨야 하기 때문에 인부 17명이 페어 기간 내내 바젤에 체류하였다. 운송비만 40만달러(4억원)가 들어간 이 작품의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유럽의 유수 미술관에서 이미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처럼 중국 작가들이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상황에 실제로 페이스윌덴스타인의 베이징 오픈과 장샤오강의 뉴욕 개인전, 아쿠아벨라가 준비 중인 쩡판지 뉴욕 개인전, 윤페이지(Yun-Fei Ji)와 주젠(Xu Zhen)이 소속되어 있는 미국의 제임스코헨갤러리(James Cohan Gallery)의 7월 상하이 지점 오픈 등 미국의 대형 화랑들이 속속 아시아 시장에 직접 뛰어들면서 중국 현대미술에 대한 세계 미술시장의 관심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며 이들의 여파는 유럽 시장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한국 작가로는 이우환의 작품이 자주 발견되었다. 3~4년 전만 해도 아트바젤에서 이우환의 작품을 소개하는 외국 화랑은 런던의 리손갤러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올해는 리손갤러리 외에도 일본 화랑 스카이더배스하우스(SCAI the Bathhouse), 이우환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페이스윌덴스타인이 여러 점을 선보였고, 제작 시기에 따른 가격 편차로 인해 120호 크기의 작품이 37만달러(3억8천만원), 150호가 20만유로(3억2천만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다. 이우환의 경우처럼 한국작가에 대한 해외 시장의 관심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트바젤에 참여한 국제갤러리는 에드 루샤, 존 챔버레인, 앤디 워홀 등의 해외 고가 작품과 더불어 한국작가로는 조덕현과 샌정을 소개하였으며, PKM갤러리는 이상남을 새로이 영입하고 임상빈, 함진, 이불의 작품을 전폭적으로 홍보했다. 특히 바젤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이형구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오래된 자연사박물관의 환경과 박제된 전시 작품들 속에서 조화로우면서도 이질적인 아이러니를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시장에서의 성공은 오로지 ‘수치’

지난 몇 년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십 수백 개의 아트페어는 큐레이터, 독립 기획자, 비평가, 작가들을 초대하여 기획 전시 프로그램, 작가와의 대화, 초대형 미술 프로젝트 등 미술관 전시와 유사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함으로써 아트페어의 철저한 상업적 이미지를 고급화시키고 나아가 그들 사이의 변별력을 만들어내고자 끊임없는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아트페어가 초청한 유수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특별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다양한 강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이 소개하는 작가는 확실한 검증을 통과한 것으로 간주되어 빠른 속도로 갤러리 컨텍스트에 흡수되고, 동시에 갤러리는 신진 작가나 지역 작가들을 더 넒은 시장에 소개, 홍보한다는 명목 하에 특별 프로그램에 갤러리 작가들을 밀어 넣기 위해 기획자나 비평가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혈안이 된다. 이들의 공생관계야말로 미술계에 새로운 작가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홍보되고, 판매되는 원동력이다. 결국 비상업적 전시 형식인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 미술 행사의 생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트페어의 성공은 비엔날레와 달리 수치로 나타난다. 아트페어에서 잘 팔리는 작품이 꼭 좋은 작품이 아니듯이 미술시장은 시장으로서의 언어와 규칙,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특별’이라는 이름을 단 일련의 이벤트 역시 고급 화랑의 참여를 더 유도하고, 돈 많은 컬렉터들을 더 끌어오며, 유명한 미술계 인사들을 더 모셔오기 위한, 나아가 미술시장의 거대한 자본으로부터 수혜를 얻고자 하는 제스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 아트페어의 조직은 문화 사업이 아닌 수익 사업이고, 갤러리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목적 하에 수준 높은 아트페어에 참가하고자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단 시간에 수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아트페어의 매력이다. 특히 아트바젤에서는 어느 미술관에서도 보기 힘든 수작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문제는 전체적인 컨텍스트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작품들과 잡다하게 벽에 걸리는 작품이 과연 상품 이상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컬렉터의 기분과 대조적으로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다니면서 시장 조사를 하고, 더불어 300여개 화랑이 소개하는 수천 명의 작가들 가운데서 새로운 상품을 발견하고, 다음 시장을 예측하는 것이야말로 시장 관계자의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에 아트페어 관람은 언제나 큰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올해 매튜막스갤러리(Matthew Marks Gallery) 부스에서 선보인 엘즈워스 켈리의 85세 생일을 기념하는 작은 개인전은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이런 전시가 철저히 상업적인 매튜막스갤러리의 이미지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한 작가의 일관된 작품을 돌아보는 것은 분명 다른 갤러리 부스에서와는 다른 경험이었다.

드디어 축구 경기가 있던 7일 오후 3시, 바젤 시내의 대중교통이 일제히 끊겼다. 저녁 7시의 첫 경기를 기다리는 붉은 인파들은 한손에 맥주병을 들고 목청 터져라 응원가를 불러댔다. 바젤 중앙역 앞 광장은 체코에서 원정 온 응원단까지 가세하여 발 디딜 틈조차 없어보였다. 재미있는 점은 같은 시간 아트바젤 행사장 내에는 축구 응원단 티셔츠를 입은 관람객을 단 한명도 목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행사장 내외부는 마치 다른 세계인 양 고성방가와 고요함이 평행선을 이루고, 행사장 내부는 바깥의 축제와 같은 흥분된 상황과 전혀 무관한 듯 관람객들은 유유히 부스를 돌아보고 있었다. 오후 6시, <아트 언리미티드>에서 상영 중이던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과 필립 파레노(Philip Parreno)의 공동작 <지단 (Zidane)>이 멈추는 순간, 아트바젤 조직위는 근처의 대형 홀에서 스위스와 체코의 첫 경기를 라이브로 보여주었다. 아직도 페어는 하루 더 남아 있었지만 올해의 아트바젤은 결국 축구 경기의 시작과 함께 문을 닫은 듯 보였다.

토비아스 레베르거 <Gu Mo Ni Ma Da> 마호가니, 메탈, 글라스, 에폭시, 플라스틱, 폴리우레탄 코팅 431.8×1038.9×350.5cm 2006

임상빈 <Central Park 2> 람다프린트 디아섹 101.6×178cm 2007

세계 거장들이 한자리에-서울국제현대미술거장전

팡리준 <신년> 캔버스에 유채 150×180cm 2005~2006

세계적인 거장들의 현대미술 축제

글|황지원

최근 전 세계는 아시아미술에 대한 관심이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는 대규모 전시 〈서울국제현대미술거장전〉이 7월 16일부터 8월 24일까지 40일간 코엑스 장보고홀에서 개최된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아시아 각 국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한 자리에 모인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아시아의 경제 발전 속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러한 경제적 규모의 성장은 문화의 성장으로 연결된다. 최근 경제와 문화가 급부상하고 있는 아시아권에 대한 주목은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 아시아 현대미술 거장들의 대표 작품과 세계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동시에 전시되는 국제 현대미술 거장전으로서 최근 세계 미술 추세에 맞춰 21세기 아시아 현대미술의 위상과 세계 현대미술의 방향을 살펴 보고자 마련되었으며, 총 180여점이 전시된다.
전시는 크게 4개의 테마로 구성된다. 현대미술사에 있어 비디오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한 백남준의 대형 대표작들 30여점이 전시되는 테마 1 〈비디오아트의 거장 / 백남준〉전, 한국의 추상미술의 대표 작가인 이우환의 대형 작품과 대표작들이 전시되는 테마 2 〈한국 추상미술 대표작가 / 이우환〉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아시아의 일본 중국 인도의 대표 작가들로 구성될 테마 3 〈일본 현대미술 대표작가 / 쿠사마 야요이〉전, 그 밖에도 테마 4 〈인도 현대미술 대표작가〉전, 테마 5 〈중국 현대미술 대표작가전 그리고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세계적인 거장들의 판화 40점이 전시되는 테마 6 〈국제 현대미술 거장 판화〉전으로 구성되었다.

이우환 <조응> 종이에 과슈 31.8×41cm 1997

백남준에서 앤디워홀까지

각 테마를 자세히 살펴보자. 세계적인 거장 백남준의 작품을 전시하는 테마 1 〈비디오아트의 거장 / 백남준〉전은 그의 대표작인 멀티모니터 대표 작품과 영상 회화 사진 등으로 구성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던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전자 영상과 대중 매체의 사용은 매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타워(Tower)〉는 고물 텔레비전과 빈 캐비닛, 20개의 네온 튜브로 쌓아올린 미디어 탑이다. 이 작품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다다익선〉과 함께 통신과 소통을 향한 작가의 열망을 담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탑 모양을 본떠 만들었지만, 영상은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 등 범세계적으로 수집된 다양한 이미지 클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화무쌍한 비디오 이미지와 20개의 네온 튜브로부터 흘러나오는 광채가 정보사회의 속도와 지구촌의 의미를 음미케 한다.
테마 2 〈한국 추상미술 대표작가 / 이우환〉전은 추상회화의 대가인 이우환의 대표작 25여점으로 구성된다. 이우환은 국제무대에서 동서미술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비평가이다. 점과 선으로 동양 철학을 담아내는 이우환은 삶이란 일상의 반복이고, 또한 거듭되는 삶은 새로운 것의 연속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현역 작가이자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27점으로 구성된 테마 3 〈일본 현대미술 대표작가 / 쿠사마 야요이〉전에는 그녀의 조각 오브제 퍼포먼스 소조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일본의 미술시장은 80년대 버블 경제 시기를 겪으면서 일찍이 호황을 누리고 현재는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과거 NICAF를 모태로 부활한 ‘도쿄아트페어’와 새롭게 생겨난 ‘101도쿄CAF’가 동시에 개최되면서 일본 미술시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미술시장과는 상관없이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쿠사마 야요이는 물방울이나 그물을 모티프로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하는 작업들로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의 대표작인 〈밀로의 비너스〉 〈호박〉 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테마 4 〈인도 현대미술 대표작가〉전은 최근 경제의 급성장으로 문화계도 급부상하고 있는 인도의 현대미술이 차지하고 있다. 인도 현대미술의 특징은 여러 문화와 민족이 섞이고, 영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형성된 다문화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인도는 현재 과거와 현재가 결합하고, 동서양이 만나며, 신앙에서 비롯된 영적 세계와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들의 작품은 풍부한 문화적 토대를 갖추고 있는 만큼 범주도 다양하며, 복잡한 현실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번 전시는 중국미술에 이어 최근 ‘블루칩’으로 떠오른 인도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예술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인도 현대미술에 이어 테마 5 〈중국 현대미술 대표작가〉전은 중국 현대미술전이다. 중국은 세계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다. 그만큼 잠재 시장은 폭넓고 성장속도는 비약적이다. 이러한 역동성과 함께 젊은 작가들의 수는 매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중국 내의 중상층의 실질 구매력 또한 크다. 중국미술은 이미 지난 20여년간 전 세계에서 주목받아 왔으며, 미래의 대가들을 점찍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장샤오강, 위에민준, 탕즈강 등 국제적 입지를 굳힌 중국 현대미술 선두주자인 중국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 15점이 소개된다. 여기에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중국의 전통 리얼리즘회화 15점이 포함되어 총 30점의 작품으로 기획되었다. 중국의 경제적 약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등에 힘입어 중국의 현대미술의 인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한 자리에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중국 현대미술이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인 성장과 그 다양성을 지녔음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테마 6 〈국제 현대미술 거장 판화〉전은 아시아 미술은 아니지만 국제 현대미술 거장의 판화 50점으로 구성되었다. 앤디 워홀, 프랭크 스텔라, 로버트 라우젠버그와 같은 미술 서적이나 미술 교과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김호득, 문득 일필휘지로 돌아오다

'문득', 일필휘지로 돌아오다

글|김복기·본지 발행인

김호득의 개인전을 앞두고, 머리 속에 새삼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2005년 미국에서 김호득을 우연히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때 김호득은 안식년을 맞아 일년간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김호득의 얼굴과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방인의 낯선 객지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기운생동’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가 김호득을 지켜본 것이 20년은 훨씬 넘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활기를 띤 김호득의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히피처럼 길게 기른 머리도 잘 어울렸고, 연신 히죽히죽 웃었으며 말수도 아주 많았다. (그가 그렇게도 수다스런 구석이 있는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서로 작업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눈 적은 없지만, 그는 현대미술의 심장부 뉴욕에서 동시대 작가들의 조형어법을 두루 꿰뚫고 최첨단 양식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김호득은 이미 한국에서 수묵 설치작업을 발표한 터였다. 나는 김호득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과연 어떤 작품을 들고 미술계에 나타날지 사뭇 궁금했고, 또한 다가올 그 시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96년 도쿄에서도 김호득을 만난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김호득의 모습이 워낙 강렬하게 남아 있어 뉴욕에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게 아닌가 싶다. 이젠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일본 국립근대미술관에서 〈90년대 한국미술로부터-등신대의 이야기〉(9. 25~11. 17)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해방 이후 일본의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최초의 한국 현대미술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 전시에는 30, 40대 중심의 작가 14명이 참가했는데, 한국화 장르에는 김호득 한 사람뿐이었다. 이 전시의 개막식에서 김호득을 만났다. (나는 당시 국제교류기금(The Japan Foundation) 펠로우로 도쿄에서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던 차였다.) 그 날의 기억이 아주 또렷하다. 김호득은 병색이 완연했다. 병원 침실에 누워 쉬어야 할 병자처럼 쇠약한 형색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즉, 그렇게 좋아하던 술 때문에 결국 알콜 중독증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단주(斷酒) 이후였지만 아직도 술의 구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김호득의 말과 손은 떨리고 있었다.
도쿄와 뉴욕에서 김호득과의 만남. 그 명암이 극단으로 교차했다. 이제 와서 보면, 바로 그 극단의 시간대는 화가 김호득의 삶과 예술에 획을 긋는 큰 전환점이었다. 사정은 이러하다. 김호득은 1996년의 단주 이후, 1997년 학고재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작품 양식의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정헌이는 그 변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문득, 흔들리다>, 일민미술관 개인전 서문, 2002). “그 이전까지 폭포나 계곡 같이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렸던 김호득은 그 이후에는 바람, 빛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 혹은 아예 외부로부터 눈을 돌려 마음의 결을 드러내는 ‘문득, 흔들림’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로 변신했다. 폭포나 계곡 그림이 일필휘지의 필치로 즉흥적인 붓의 운필의 생생한 자취를 드러냄으로써 기운생동하는 에너지를 전해 준다면, 그 이후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점찍기를 바탕으로 한 연속적인 첨가, 보충, 반복의 제스처로 화폭을 ‘짜 나가는’ 작업이다. 일종의 ‘치기(때리기, 찌르기, 깎기, 베기)’에서 ‘짜기’로의 변화이다.”
김호득의 점찍기 작업은 200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2005년 미국 체류 이후의 작품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그 대답을 들려주는 자리가 이번 학고재 개인전이다.

<돌아선 나> 광목에 수묵 140×250cm 2007

뉴욕에서 보낸 안식년

art 오랜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1986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지금까지 2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거의 1, 2년을 주기로 개인전을 연 셈이다. 술도 많이 마셨지만 작품도 참 열심히 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2006년에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전시는 2004년 조선일보미술관의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이후 오랜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art 서울 개인전의 성격을 스스로 규정한다면?
2005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일년간 생활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많이 보고 많이 느꼈다. 작품을 좀더 다양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주위 눈치 볼 것 없이 더 자유롭게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돌아왔다. 귀국해서 1997년부터 지속해 오던 점찍기 작업을 그만 두고 그 이전 작업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작품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정반합을 모색하며 꾸준히 작품을 준비했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는 지난 7, 8년 간 지속해 온 작품 흐름을 일단락 짓고 새로움을 찾아가는 일종의 ‘준비운동’이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솔직히 고백하자면, 근자의 한국 미술시장 분위기도 적잖게 고려했다. 한국화 전반이 미술시장에서 아주 저조한 성적이다. 작가가 시장에 애써 영합할 필요까지야 없지만, 내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아예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 이거 솔직히 작가로서 결코 편치 않은 문제다. 그래서 남들한테 ‘읽히는 그림’, 좀더 친근한 그림을 그려보자는 생각도 가졌다. 결국 이번 개인전은 내 작품의 예술성과 함께 수묵 그림의 시장성을 가늠해 본다는 나름의 의미도 있다. 작품을 상당히 많이 준비했는데, 그 중에서 일부만 고를 수밖에 없었다.
art 미국에 체류할 때, 잠깐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뉴욕에서 무엇을 했고, 이국 생활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안식년이니까 글자 그대로 일년간은 푹 쉬자고 마음 먹었다. 몸과 마음을 비우는 공백 기간을 가지고 그저 사색하고 휴식하자고 했다. 작품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창작이란 게 작가에게 얼마나 피말리는 일인가 실감하게 되었다. 작품을 하지 않으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살찌는 소리가 들리더라. 웬만한 미술관과 화랑을 돌며 다른 작가들의 많은 작품을 봤다. 무엇보다 작품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 게 큰 성과였다. 그러면서도 서양 사람들의 미술에 관한 체질이 우리와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물질감이 직접 우리의 오감에 와닿는 서양의 그림은 참으로 임팩트가 컸다. 그런데 그 걸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세계 화단에 진입하려 한다면 서양적인 체질과 타협해야 하는가.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는 결국 내 체질에 맞는 작업을 지속하고 천착시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졌다. 외국 생활이 내 나름의 주체성을 찾고 지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흔들림, 문득.-사이> 한지에 잉크 98×183cm 2004

점찍기 작업, 내면으로의 침잠

art 이번 전시 작품을 미리 보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김호득이 점찍기 작업을 종결하고 새로운 작품 방향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논점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전시 작업을 이야기하자면 작품 변화 이전의 점찍기 작업을 빼놓을 수 없다. 점찍기 작업은 김호득의 삶과 작품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점찍기 작업을 두고 김호득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한다’” 고 규정한 바 있다. 새 천년을 맞아 art가 기획한 기사 〈BEYOND 2000 NEW VISION〉에서 김호득은 점찍기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언젠가 아프고 난 후, 화실 뒷산에 올라 흐르는 땀을 식히며 언덕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약수터 물 떨어지는 소리며 언덕 너머 두런두런 사람들 인사 주고받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너무 고요한 오후였다. 늦은 봄, 치열하게 올라온 연초록의 무성한 나뭇잎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쪽에서 한 무리의 잎들이 살짝 흔들리다 마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쪽 가까운 잎들도 미세하게 하늘거리는 게 아닌가. 피부로 느낄 수조차 없는, 볼 수만 있는 조그만 바람이었다. 순간 하늘과 주위를 둘러봤다. 아! 그 아득한 공기의 두께여. 그리고 갑자기 느껴지는 오만 잎들의 그 흔밀한 흔들림이여. 억만 생명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여.”
점찍기 작업은 내가 나를 읽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냥 마음의 흔들림에 따라 짧은 선들을 화면 가득히 채워나갔다. 끊임없는 내면으로의 침잠 과정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정말 도(道) 닦는 기분이었다. 한 점 한 점이 마음 속에 일렁이는 의식의 흐름을 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술을 끊고 나니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 아주 강렬하게 찾아왔다. 예를 들어 시간이란 것도 ‘순간 에너지’와 ‘늘인 에너지’가 결국은 그 속성이 동일하다는 생각, 요컨대 ‘에너지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을 그림에도 적용해 봤다. 일획이란 무엇인가. 에너지가 한 순간에 몰아쳐 나온 것 아닌가. 그런데 아주 사소한 작은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일획이란 큰 덩어리가 될 수 있다. 또한 영원이 곧 찰나이며, 우주가 곧 들풀과 다름 없다는 생각, 그걸 작품으로 실천해 보고 싶었다. 작품 제목을 〈문득〉이라 지었는데, ‘문득’이란 것이 순간이지만 사실은 쌓인 시간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 이게 그림이건 사람이건 다 통했다. 점찍기 작업은 뭔가 아득한 느낌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한 점 한 점의 미세한 변화, 그것은 찰나이지만 그 찰나로 영원을 그리려 했다. 상념이 스쳐지나가는 그 느낌마저 화면에 투영해 보고 싶었다. 작은 점을 연속적으로 찍으면서 이동할 때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지고 결국 현재는 끝없이 변화한다. 점이 하나씩 만들어지면 반대로 공간은 조금씩 지워진다. 화면에는 작용과 반작용, 우연과 필연, 유와 무의 현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겹친다. 선이기도 하고 점이기도 하고 형상 같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꽉 찬 것 같기도 하고 텅빈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림 제목을 〈그냥 흔들리다 문득〉이라고 지어보기도 하고.
art 물론 점찍기 작업에는 여백이라든가 음양, 흔적 때로는 도가사상 등 동양적인 사고 체계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의 결과만 놓고 보면 상당히 미니멀적인 추상으로 드러난다. 서양 식으로 따지자면, 형식주의 미술이 극단으로 갈 데까지 간 작품과 유사하다. 더구나 “그림을 그리지 않고 ‘한다’” 고 했을 때, ‘한다’는 것은 그리는 행위 혹은 그것과 더불어 ‘사고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점찍기 작업은 매우 관념적인 조형 요소의 미묘한 맛과 철학적 사색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내 작품은 서구의 미니멀 추상과 다르다. 작업 과정, 시간성이 아주 중요하다. 점은 순간적인 마음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공간 안에서 헤엄을 친다고 해야 할까. 점들이 화면에서 수없이 증식해 나가는데, 그 증식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룰이 있다. 찾아갈 길과 피해가야 할 길, 그 길을 가다 보면 빈 자리가 생긴다. 규칙적인 점에도 변화가 많다. 아주 은밀한 변화다. 의도적으로 그린 것과 자연스럽게 그린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그 차이를 한눈에 봐도 안다.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을 의도하는 순간 화면은 아주 부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이게 더 어렵다. 도를 닦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의식적인 것과 무위식적인 것을 섞어서 작업을 해보기도 했다. 이렇게 점찍는 일 하나만으로도 조형적인 변주가 무궁무진하다. 단순한 방정식에서 아주 복잡한 방정식에 이르기까지 너무너무 재미있다. 나는 점찍기 작업을 기(氣)의 집합, 기의 덩어리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기의 운용’을 새롭게 시도해 본 것이다. 점찍기를 일종의 ‘수신의 도구’로 삼았다고 해도 좋다.
art 먹점의 반복적인 배열로 채운 흑백의 평면은 모노크롬 회화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내용은 크게 다르다. 모노크롬이나 미니멀아트가 본질로 환원하는 동어반복적인 균질의 화면을 지향한다면, 김호득의 작품은 순간의 흔들림, 마음의 결이 만드는 미세한 파장이 일렁인다. 붓질을 일정한 단위로 반복시킴으로써 시간을 공간화한다.
사람들은 작품의 형식적 결과만 놓고 평가하려 든다. 형식적으로 올오버 페인팅이라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작업을 정지된 무(無)의 상태로만 평가한다. 기가 정지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이거 뭐 하는 짓이냐?” “혼자 자위행위하냐?”며 그림이 너무 어렵다고들 불만이었다. 꼭 이런 비판을 의식한 건 아니지만, 점찍기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지겹기도 하고, 벽에 부딪히는 느낌도 들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그림은 흩트리거나 파괴해야 새로운 것이 나오는 법이다. 일단 어지르다 보면 다시 모아져서 하나의 방향을 찾게 될것이다.

<폭포> 광목에 수묵 152×85cm 2006

다시 기운생동하는 일필휘지로

art 다시 폭포와 계곡의 시대로 돌아왔다. 김호득은 내리누르고 찍듯이 뿌리고 던지듯이 그려나가는 자신의 화법을 부활시켰다. 서양의 그 어떤 추상표현주의 작가나 미니멀 작가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기운생동’하는 ‘일필휘지’의 붓끝에서 벼락치듯 순식간에 태어났을 ‘피튀기는’ 먹물 폭포의 기세 같은 것이 다시 살아났다. 화가 자신의 거친 호흡 그대로를 화면에 분출함으로써 치솟아오르는 생명력의 에네르기를 만끽하려는 듯 보이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큰 점찍기를 했다. 큰 점과 긴 선을 결합해 단순화된 풍경, 추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점과 점, 산과 돌 등 추상적인 형태에서 출발해 점점 더 들이나 평원 같은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art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은 시리즈 별로 크게 〈글자〉 〈문득〉 〈급류〉 〈폭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글자〉 〈문득〉 시리즈가 새로운 작품이다. 〈급류〉와 〈폭포〉 시리즈는 이전에도 다루었던 소재다. 〈글자〉 시리즈는 소재가 파격이다. 글자라는 인공적 요소도 재미있지만, 그 조형 형식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자나 한글을 조형화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이 대표적일 게다. 젊은 작가들 중에 깨알 같이 작은 글씨를 반복해 산수를 그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작품의 경우 글자의 시각적 구성과 디자인을 토대로 일정한 패턴을 만들거나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노리는 작품이 많다. 김호득의 경우, 글자가 풍경의 주요 구성 인자로 등장해 아주 숭고한 느낌을 주는 독특한 작품을 내놓고 있다.
김 글자를 작품에 끌어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산수를 그렸는데, ‘산산산 나무나무나무 물물물’이라는 여러 크기의 글씨를 써서 산과 나무와 물을 채웠다. 일종의 의태어처럼 말이다. 아주 재밌었다. 그땐 여기(餘技)로 조금 하다 그만 뒀는데, 이번에 이걸 발전시킨 것이다. 이번엔 한글의 자모를 아주 크게 써 봤는데, 속이 후련하더라.
art 글자를 반대 방향으로 썼다. 반전(反轉)이 된 모양세다. 그래서 그런지 글자 표정이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밑에 대지처럼 보이는 검은 면이 든든히 자리 잡고 있고, 배경은 은근한 기운이 감도는 발묵으로 표현했다. 글자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글자 ‘가’는 어디론가 급하게 막 내달리려는 느낌을 주고, 글자 ‘나’는 땅에 자리를 차지하고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으려는 느낌을 준다.
한글을 조형화해서 그 자체로 실존감이 드러나도록 하는 작업. 이거 재미있는 아이템이다.

시원의 풍경 속으로

art 〈문득〉 시리즈는 〈글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대지 위에 기념비적인 형상이 우뚝 서 있다. <문득-서다> <문득-누워> 같은 작품은 글자의 한 획이 대지 위에 눕거나 서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글자〉 시리즈가 좀더 단순한 형태로 그려진 듯한 인상을 준다. 둥근 바위나 남근석 혹은 선돌이나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도 등장한다. 이 형상들은 모두가 대지 위에서 하늘로 우뚝 솟아오른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주 기념비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런 주제의 작품은 문명 이전의 저 태고의 시간으로, 그 시원(始原)의 풍경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주헌은 이 풍경을 “거대한 바위에서 정령을 느끼던 태고적 조상들의 감수성”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누구라도 한 눈에 그런 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땅을 딛고 서 있는 형상은 직립한 사람의 모습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형상이 엉뚱한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전의 인물 작품에서도 조금씩 보였다. 나는 체질적으로 너무 현실적으로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 설명적으로 표현하는 걸 싫어한다. 사람 얼굴을 그릴 때도 표정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암시적으로 표현하되 존재감이나 실존을 잘 드러내고 싶다.
art 최근작은 천지인(天地人)을 그린 것이다. 확실히 풍경이다. 마음의 풍경이 아니라 실재의 풍경이다. 〈문득〉 〈글자〉 시리즈는 거대한 평원 혹은 대지에 대한 의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 시리즈에는 땅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지평선이 늘 존재하며, 땅과 하늘 사이에는 풍경이 들어 있다. 대지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기념비적 형상이 중심을 이룬다. 화면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는 먹점들은 작은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잡풀, 벌레나 곤충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저 멀리 우주의 별 같기도 한 작은 먹점들…. 무언가 아득한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다.
공간에 기(氣)가 통하는 느낌을 그리려 했다. 하늘을 흰 여백으로 두지 않고 공기가 통하는 기분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기가 통하는 느낌, 하늘이면서 하늘이 아니고 여백도 아닌, 기의 흐름을 그리고 싶었다. 거석(巨石)이든 사람이든 공간 해석을 달리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공기’를 그리고 있다.
art 새로 시도한 작품은 사의(寫意)와 사실(寫實)의 중간적 형태로서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부류의 작품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가 크다. 〈폭포〉와 〈급류〉 시리즈는 이전과 다른 점이 있는가?
사실 두 시리즈는 손을 푸는 작업이었다. 〈급류〉 시리즈는 폭우에 콸콸 흘러가는 황톳물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리게 된 작품이다. 이전에도 빨리 흐르는 계곡 물을 그렸지만 이번 그림들은 그때의 그림과 다르다. 이전에 계곡을 그릴 때는 물이 주제였음에도 물을 직접 그리지 않고 돌과 주변을 재빠른 붓놀림으로 표현해 물이 느껴지도록 했다. 붓이 속도감 있게 내달리고 먹물이 튀면서 자연스레 물의 운동을 연상하도록 했다. 그런데 맑은 물이 아니라 황톳물에 영감을 받은 이번 그림에서는 물의 표정을 직접 그렸다. 중간 톤의 먹물로 물이 내달리고 튀는 모습을 그렸다. 결과적으로는 물에 색깔을 칠하는 것이지만, 물과 돌, 물살의 관계를 생각하며 물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표현하려 했다. 나는 ‘물의 기운’을 그린다. 지필묵, 아직도 할 일이 많다
art 김호득의 재료 선택이나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병종이 탁월한 해설을 내놓은 바 있다(제1회 개인전, 관훈미술관 서문, 1986). 김병종은 이렇게 쓰고 있다. “김호득은 작업의 전 과정에 있어서까지도 타성적 태도와 규격화를 거부한다. 화선지 대신 화견(畵絹)도 아닌 올 굵고 투박한 광목을 즐겨 쓴달지 중봉(中鋒)이 없는 편필로서 골법적 묘사를 아예 포기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의 작업은 또한 철저히 일회적이어서 하도(下圖)와 본화(本畵)가 따로 없고 설명적 지엽말단의 세기(細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어찌되었건 간에 중요한 건, 김호득이 여전히 지필묵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다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양화를 전공했으니 지필묵을 고집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서울예고 시절부터 서양화, 동양화를 골고루 공부했다. 청년시절에는 유화나 아크릴릭도 다뤄 봤지만, 지필묵에 맛을 들여보니 이게 내 체질에 딱 맞더라.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색채 감각보다 형태 감각이 더 뛰어나다. 일필휘지의 순발력을 즐긴다. 덧칠하고 다듬는 것보다는 순간적으로 그리는 게 내 체질에 잘 맞는다. 서양 그림으로 치자면 드로잉 같은 걸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필묵을 지키자는 약간의 오기나 의무감도 발동했을 수 있을 게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필묵을 내던지고 방향을 바꿔나가니까, 내가 인기 작가는 아니지만, ‘나만이라도’ 하는…. 하하! 따지고 보면 내가 지필묵을 다루는 건 정도(正道)가 아니다. 서양식과 동양식을 서로 얼버무렸다고나 할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현대 감각에 맞게 지필묵을 구사하려 했다. 전통 발묵이나 전통 모필 등 몇 가지는 아예 포기했다. 어떤 평론가는 내 작품을 두고 담묵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담묵은 너무 연약한 묵법이다. 그래서 담묵은 농담의 층을 겹겹이 쌓는 표현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자꾸 설명적으로 흐른다. 나는 필법은 군더더기를 다 빼고 묵법은 농묵만 사용한다. 결국 단순하지만 강렬한 묵법과 필법을 내 조형의 무기로 삼은 것이다. 물론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내 묵법과 필법은 임팩트는 강하지만 깊이는 약하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계산적으로 내 방식으로 몰아왔다. 사실 내가 전통을 지킨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서양화 쪽으로 상당히 경도되었다고 본다. 앞으로도 먹을 포기할 지점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지필묵만으로도 아직 할 게 많다. 농묵으로도 담묵 효과를 낼 수 있다. 또 붓의 속도, 공간의 점유 등 조형적인 숙제가 무궁무진하다. “그저 그림으로 승부하고 싶다”
art 앞으로 계획은?
나는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인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림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그림이고 그림이 곧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그냥 그림만 그리는 사람은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이를 오감, 육감까지 동원해서 표현하는 사람이다. 왜 그렇게 사는가? 이유는 없다. 예술가는 종합적으로 흡수하고 종합적으로 작품에 내뱉는다. 나는 구차한 설명보다 내 안에서 집약되어 나온 표현을 중시한다. 그래서 나는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손재주를 타고났다거나 하는 표피적 평가를 싫어한다. 앞으로도 그저 그림으로 승부하고 싶다. 2, 3년 동안 준비운동으로 시간을 보냈으니 내년에 평면 작업을 더 보완해서 개인전을 다시 열고, 그 이듬해에는 설치 작업을 총정리해서 대규모 전시를 미술관에서 열 계획이다.

김호득의 작가적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파격과 저항 정신’ 혹은 ‘부정과 도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사실 한국화를 설치미술이나 입체작품으로까지 극단으로 밀어부친 작가는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김호득의 부정과 저항이 유독 우리 화단에서 미덕으로 남는다면, 그 이유는 그가 전통(혹은 한국)이 지니고 있는 정신의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수묵이란 무엇인가. 이 반복적인 질문을 김호득은 작품으로 풀어내고 있다. 김호득은 “서양과 동양을 포괄적으로 알고 작품을 쓰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나 역시 족탈불급(足脫不及). 오히려 김호득이 눌변으로 툭툭 던진 말들이 깊은 여운을 던진다.
“나는 그림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가슴 속에 그릇이 하나 있다면 그 그릇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데, 그 물이 가득 차면 찰랑찰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쏟아야 된다고, 차기도 전에 자주 비우면 가벼워지고, 다 찼는데도 비우지 않으면 썩는다고.”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쫀득쫀득한 찰떡 같은 것….”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

인간 내면을 어루만지는 ‘영상시인’

글 |장승연 기자

비디오카메라의 이미지는 진실이 아니며,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생 자체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 위치해 있으니, 알고 보면 비디오카메라는 인생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가 한국을 방문했다. 우선 여기서 ‘세계적인’이라는 형용사가 ‘독일 《캐피탈》지의 쿤스트콤파스(Kunstkompass) 선정, 2007년 세계 랭킹 14위 작가’와 같은 다소 딱딱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현재 그의 이름은 비디오아트를 대변하는 하나의 고유 명사처럼 동시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이론적으로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는 중요한 작가들이 전부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하거나, 대중적인 인기를 함께 얻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올라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수용하면서 현존하는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듯 말이다.
이번 그의 세 번째 한국 방문에 맞추어, 모처럼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5월 30일부터 10월 26일까지 작품 <해변 없는 바다(Ocean without a Shore)>가 전시 중이다. 또한 국제갤러리 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6. 27~7. 31)은 <변모(Transfiguration)>시리즈를 비롯하여 2001년 작 <밀레니엄을 위한 다섯 천사(Five Angels for the Millenium)>까지 총 10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더불어 6월 26일에는 400명이 넘는 관람객의 호응 속에서 작가의 강연회가 개최됐다. 많은 미술인들의 관심이 그에게 쏠린 지금, 작가를 직접 만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자가 거친 흑백 영상 속에서 저 멀리 걸어오는 하나, 혹은 둘 셋의 인물들이 보인다. 바로 <해변 없는 바다>와 작가가 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품으로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제작한 <변모> 시리즈 속 장면이다. 어느덧 화면 가까이 다가 온 인물이 투명한 물 벽을 통과하는 순간, 그가 선명한 컬러로 ‘변모’하면서 화면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인물은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순간의 감정을 드러낼 뿐, 다시 물을 통과해 흑백의 뒤편으로 되돌아간다. 작가 특유의 슬로우모션으로 처리된 화면을 통하여 관람객은 각 인물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에서 시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지난해 6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동안 조용하고 엄숙한 산갈로교회 내 제단에 <해변 없는 바다>가 설치되었을 때, 당시 전시를 본 기자의 지인은 잔잔히 밀려오는 감정의 동요로 인해 눈물을 쏟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보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빛의 속도로 ‘통신(Communication)’되는 지금 세상에서, ‘통신’이란 바로 너와 내가 연결되는 것, 나는 너를 만지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자를 매개로 한 그의 작업은 우리의 외피를 넘어 내면에까지 와 닿는다.
“90년대에 차례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다행히 나는 두 분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어요.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죽은 이가 우리 삶에 함께 존재한다고 느끼게 됐어요. 나는 인간 존재가 크게 세 가지로 ‘죽은 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은 죽은 이가 현실 세계로 발을 디딘 후 다시 돌아가는 순간의 망설임, 떨림 혹은 슬픔을 표현한 겁니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의 진정한‘변모’를 포착하고자 한 것이죠.” 평론가들은 비올라의 작업에 대하여 ‘시간을 형식뿐만 아니라 주제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해 왔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 주제화된 ‘시간’이란 1초, 1분, 그렇게 단계적으로 셀 수 있는 개념 이상을 의미하는 듯하다.
불교 선종의 영향을 받아 윤회를 믿는 그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언젠가 한줌의 먼지가 되고 이후 다시 새로운 미래를 얻게 되는 ‘존재의 흐름’을 작품에 담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흐름’이란 다양한 부분에서 그의 작업을 위한 영감으로 작용한다. 이번 신작들뿐만 아니라 그의 지난 작품들에서도 ‘물’이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되었듯, 비올라는 흐르는 물과 전자의 역학 구조가 동일하다는 어느 과학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즉 그는 마치 물의 흐름과 같은 ‘전자의 흐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비디오작업에 ‘시간의 흐름’을 담아 놓는다. 바로 그는 이런 ‘흐름’ 속에 모든 ‘변모’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듯 말이다.
그렇다면 이 정신적인 측면의 이야기들을 시각화하기 위하여 각 연기자들과의 촬영은 어떻게 진행될까. “촬영에 앞서 나는 예술가로서의 내 생각과 아이디어를 연기자들에게 설명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사용’하기를 바라지 ‘경험’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들은 그 아이디어를 사용해서 자신만의 기억을 떠올리며 촬영에 임해요.” 아마 이런 이유로 이번 신작에 등장하는 그의 아들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전문 배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감정에 몰입된 순간을 화면 가득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단순한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온 감정의 결과는 관람자의 마음에 전이되어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물고기가 되고 싶은 비디오아티스트

“6살 때 가족과 캠핑을 갔는데, 그만 튜브를 끼지 않고 물에 빠져서 바닥까지 가라앉았어요. 몇 초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생애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면을 봤어요. 만약 그 상태로 물속에서 죽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삼촌이 나를 꺼내주지 않았다면 말이죠.” 작품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19살 때 처음 비디오를 처음 접하면서 찍은 장면 역시 물에 반사된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의도하고 물을 화면에 담은 것이 아니었듯, 자연스럽게 물을 소재로서 빈번히 다루게 된 이유로 가장 진실했던 경험을 꼽는다. 강연회와 인터뷰에서 내내 강조했듯, 예술이란 의도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제작자도 모르는 사이 탄생되는 것임을 그는 안다. 이후에 자신의 작업을 자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당시에는 모르고 있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듯 말이다. 이처럼 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품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
사실 기자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많은 평론가들이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그의 작품에 대하여 대부분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풀어낸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한 해석들이 한편으로는 일종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 것이다. 비록 그의 작품이 전달하는 내러티브의 감정적 힘이 클지라도, 현대미술에 있어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매체로서의 가능성과 그 분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료한 말투로 조용하고 섬세하게 인간의 내면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전하는 그와의 대화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통신’을 넘어선 일종의 ‘소통’의 경험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을 건드리고 때론 어루만지며 소통을 이루어내는 작품과 현실 속의 작가는 매우 닮아 있었다. 마지막 질문으로, 만일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다시 비디오아티스트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어쩌면 이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 던진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아니요”라고 답했다. “다음 생에 나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요. 물고기는 절대 눈을 감지 않죠. 그들은 눈으로 무언가를 항상 바라보고 항상 물속을 떠다니죠. 그들은 정말 행복할 거예요.” 그러나 이 시적이면서도 유쾌한 그의 대답에서, 분명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현재 비디오카메라의 렌즈로 인간의 내면과 인생 이야기를 천천히 바라보듯, 다음 생에도 그는 무언가에 대한 시선을 포기하지는 않을 듯하다.

<수락(Acceptance)> 플라스마디스플레이에 흑백 HD 비디오 8분 14초 155.5× 92.5×12.7cm (연기:웨바 가렛슨, 사진:키라 페로브, 제공:국제갤러리)

2008 July Special - NEW ERA OF GRAFFITI

스트릿 아트, 도시 정글에 피는 꽃들

콘크리트의 도시 공간에서 꽃피는 스트릿 아트의 역사와 그것의 성격을 집약해 소개한다. 파리 68혁명의 영향과 맞닿아 있는 포스트 그래피티의 역사적 특징은 물론 한국의 스트릿 아트까지를 포함하는 범주다. 스트릿 아트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존재였다. 아는 만큼 보이고 즐길 수 있다는 자명한 논리 아래, 스트릿 아트를 둘러싼 미학적 사회적 의미를 좇아가 본다.

글|이태호

“첫째, 불복종하라; 그리고 벽에 글을 써라.” _68 파리 혁명 ‘십계명’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은 규칙을 어기는 자들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자들이 저지른다.” _뱅크시

스트릿 아트의 성격

우리들이 만나는 미술은 그것이 있는 장소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미술품 전시를 위한 특정한 공간에 있는 옥내미술과, 그러한 시설 밖에서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존재하는 옥외미술이 있다. 옥외의 시각예술이라 하면 벽화와 조각 등 공공미술에서부터 건축과 스트릿 퍼니처 등의 구조물이 있으며, 특별히 도시에서는 광고물도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시각예술들 틈에 ‘스트릿 아트(Street Art)’ 혹은 ‘그래피티(Graffiti)’라 불리는 낙서화들이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그 낙서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피티를 살펴보기에 앞서 나는 길 위에서 펼쳐지는 그 무정부적인 미술 행위와 자취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스트릿 아트를 좋아하며 즐긴다. 때로는 미술관이나 화랑의 제도화된 미술보다 스트릿 아트에 더 흥미를 느끼며 예술적 감동을 체험한다. 나는 시각예술의 가치를 그것이 놓인 장소나, 작가의 이력에 따라 판단하거나, 그것에 따라 ‘고급’과 ‘저급’을 나누는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스트릿 아트’와 ‘뮤지엄 아트’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혹은 보완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고 본다.
스트릿 아트에 내가 매료되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인간의 표현과 유희 본능에서 출발한 순수한 미술 행위라는 것이다. 기쁠 때 콧노래가 나오고 슬플 때 눈물이 나오는 것처럼 인간에게 있어 미술이라는 것도 본래 그렇게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라 본다면, 낙서화는 바로 그러한 최초의 미술 행위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낙서화는 인류와 그 역사를 함께 해 왔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회화인 구석기 시대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의 벽화도 따지고 보면 낙서화이며, 그런 낙서화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등 모든 6대주 문명에서 발견되고 있다.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산타 크루즈 지방에서 발견된 동굴의 벽화를 보자. 이 동굴은 ‘손의 동굴(Cueva de las Manos)’이라 불리는데, 거기에는 기원전 9천년부터 그려진 수많은 손들과 동물의 형상이 있다. 그것들은 동물의 뼈로 만들어진 파이프와 입을 사용해, 흙물과 같은 상태의 안료를 뿌려 자신의 손을 벽면에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방식은 스프레이 캔을 사용하는 현대의 그래피티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거기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유희적 측면과 함께, 그들의 존재 증명에 대한 욕망과 표현 본능을 읽는다. 현대 도시의 그래피티도 인간의 유희와 표현 본능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행위하는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고 증거를 남기는 것에서부터, 영역의 표시, 의견의 표명과 소통, 감동의 나눔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스트릿 아트의 또 다른 매력은 그것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펼쳐 보인다.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매물이 되는 시대에도 그래피티는 본질적으로 교환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고 행해진다. 즉 ‘공짜’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즐기는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의 선물처럼 주어진다. 무상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 아니므로, 스트릿 아티스트 앞에는 고객이 없고, 화랑 주인도 없으며, 전문 평론가도, 미술관의 거대한 자본과 조직도 없다. 또한 그것에는 미학이라든지 미술사 등 미술 행위 주변의 권위 있는 학문과 이론의 중압감이란 것도 없다. 이러한 특별한 자유로움이야말로 1970년대 그것이 시작되고 나서 수많은 사회적 법적 제재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계의 각 도시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간 이유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도시의 모든 길과 광장은 시민 모두의 것이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눈으로 보면 오늘날의 도시는 일부 기득권층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관공서와 시청을 비롯한 도시의 모든 건물과 가로들에는 광고가 들어차 있다. 그것들은 사유 재산 혹은 공공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대가를 지불한다는 명분으로 공공의 장소를 점령하고 있다. 그것들은 일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퍼붓고 있다. ‘합법적’ 절차를 밟아 거기에 서 있는 것이든, 불법적으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든 시민들의 눈과 의식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그것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아 내걸려 있는 것인가. 그들의 일방적인 메시지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도시 공간에서 개인이나 소수 시민들의 의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스트릿 아트는 바로 그러한 공간의 틈을 비집고 표출된 이름 없는 시민들의 의사 표현이자 미술 행위이다. 좀 멋부린 투로 말하자면, 그것은 현대도시라는 시멘트 정글에 핀 꽃이다. 들에 피는 꽃처럼, 도시에는 스트릿 아트의 꽃이 핀다.
말하고 싶은 사람은 말하고, 노래하고 싶은 사람은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사람은 춤추고, 뭔가를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릴 수 있는 도시가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의 도시일 것이다. 돈에 의해 구매되고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도시의 공간, 그 틈새를 비집고 내쉬는 개인의 자유의 숨결, 존재의 비명, 시각화된 의사 표현, 그것들을 스트릿 아트라 말할 수 있다.

<수락(Acceptance)> 플라스마디스플레이에 흑백 HD 비디오 8분 14초 155.5× 92.5×12.7cm (연기:웨바 가렛슨, 사진:키라 페로브, 제공:국제갤러리)

예술인가, 범죄인가?

스트릿 아티스트들은 자발적으로 그 일에 뛰어든다. 스스로 재료를 사고 구해서, 자기 시간과 열성을 들이며, 어떤 장소에 가서 칠하고 그리고 붙인다. 그들은 적어도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이를테면 너무 유명해져서 주문에 시달리기 전까지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여기에서 스트릿 아트는 전시장에서 하는 미술과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시장의 미술은 작가가 의식하든 않든 시장이라는 맥락 속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상품이 될 가능성을 전제하고 조심스레 보존된다. 그 상품성은 저 모더니즘 시대에 확인되고 강조된 ‘천재’와 ‘유일품’의 신화 속에서 언젠가 높은 가격으로 거래될 수도 있다는 꿈을 은연중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스트릿 아트는 제도권 미술계의 그런 신화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다. 그것은 오늘 그렸다 해도 내일 누가 와서 덮거나 지우면 그만이다. 사라질 운명을 예상하면서, 그때그때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믿는 게 있다. 그들이 믿는 것은, 또다시 그릴 수 있는 벽이 이 세상에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우면 그 지운 것 위에 또 그릴 수 있다는 자신이다. 스트릿 아티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물건과 재화로 보전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거기에 나의 ‘살아 있음(존재)’을 표현한다는 것, 그 행위 자체에 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표현 욕구를 가로막는 것은 사실상 없다. 그래피티가 불법이라 해도, 그것들은 누구를 육체적으로 헤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결정적인 물리적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지우고 싶다면, 다시 한번 페인트를 칠해 덮으면 되고, 부착물이라면 떼어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들에게는 범법 행위라는 의식도 거의 없다.
그래피티를 함에 있어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어떤 기준과 자기가 기대하는 어떤 수준만이 있을 뿐이다. 때로 자신만의 ‘영웅’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긴 하지만, 그 ‘영웅’은 자신에게 용기를 줄 뿐, 표현을 억누르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그 자유로움의 향기는 오늘의 산업 사회에서 자본주의적으로, 관료적으로 물샐틈없이 조직된 시대에, 그것을 하는 사람과 보며 즐기는 사람 모두에게 독특한 해방감과 희열을 선사한다.
스트릿 아트의 가장 큰 특징과 힘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대중들의 삶 속에 위치하고 있고, 그래서 전파력이 크다는 사실에 있다. 미술관이라는 특정한 공간 속에 있는 미술과는 달리,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함께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는 공공의 장소에서 우리의 시선을 끈다. 그것은 입장료나 시청료를 요구하지 않으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의 눈에 닿는다. 그것은 골프장이나 롯데월드 등 특정 장소와는 달리 ‘회원권’과 ‘입장권’ 없이 맘대로 즐길 수 있다. 그것은 상품이나 뇌물처럼 사회적 혹은 심리적 매매와 교환이라는 체재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산에서 저절로 자라는 나무나 스스로 피는 들꽃처럼 거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인(Dain)과 리브스(Revs)의 그래피티. 리브스는 철조각과 용접기술을 이용해 작업하는데, 여타 그래피티 아티스트와 비교해 작업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현대 그래피티의 역사

낙서화를 뜻하는 그래피티는 ‘긁다(Scratch)’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의 복수형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낙서화는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여기서는 현대 도시에서 발생한 낙서화(Modern Graffiti)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모던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의 필라델피아시에서 콘브레드(Cornb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인물이 시내 곳곳에 자신의 별칭, 즉 태그(Tag)를 쓰고 다닌 것을 그 출발로 잡고 있다.
그러나 1971년, 뉴욕 맨해튼의 지하철에 ‘TAKI 183’란 태그를 집착적으로 쓰고 다니던 데미트리우스(Demetrius)가 《뉴욕타임스》에 소개되면서 일약 유명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별칭 쓰기(Tagging) 열풍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TAKI’는 회사와 회사 사이에 서류를 전해주는 직업,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퀵서비스’와 유사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회사의 서류 봉투들과 함께 사인을 받기 위해 마커를 들고 시내 곳곳을 종일 돌아다녀야 했다. 그 마커로 그는 지하철과 벽에 닥치는대로 태깅을 했다. ‘TAKI’는 ‘데미트리우스’의 별칭이었다. 그리고 ‘183’은 그가 사는 집의 주소로서, 그 태그는 말하자면 ‘어디에’ 사는 ‘누구’를 밝힌 것이었다. 《뉴욕타임스》에 기사화된 이후 미국 전역의 공공 장소에서 수많은 태그들이 이름과 숫자를 합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태깅은 10대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놀이의 하나가 됐다.
그런데 단순히 이름을 쓰던 그 태그들에 점점 디자인 감각이 결합하게 되고,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글자들이 커지고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에어로졸 페인트(Spray Can)란 재료가 엄청난 영향이 미친다. 그것이 애용되면서부터 각각 경쟁적으로 글자는 커지고 색채는 화려해지며 갖가지 새로운 테크닉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글씨는 풍선 모양의 ‘버블’과 막대 모양의 ‘블록’으로 입체적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거기에 화살표가 결합하고, 글씨가 비틀어지고 합쳐지며, 깊이와 두께와 운동감이 느껴지는 입체(3D)로 발전한다. 이런 복잡하고 화려한 글자들의 결합을 ‘와일드 스타일’이라 부른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그것이 전파되고 발전하는 과정에는 힙합 문화 특유의 ‘겨루기(Battle)’가 속도를 더해줬다. 그래피티도 근본적으로 힙합 문화와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뉴욕시의 지하철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열차의 관리도 허술했다. 그래피티 라이터(Writer) 등은 그 지하철 열차를 캔버스 삼아 버밍(Bombing)을 시작한다. 밤에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순식간에 열차 한 동의 외벽을 페인트로 뒤덮고 도주하는 것이다. 반짝거리는 재능으로 이제는 신화가 돼버린 돈디 화이트의 작업 <묘지의 아이들>은 열차의 옆면을 유리창을 포함, 위에서 아래까지(Top-to-Bottom) 완전히 뒤덮은 것이다. 지하철 당국과 경찰국은 그래피티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한해에 수십만 달러의 예산을 편성해 그 퇴치에 힘썼다. 그래피티를 지워 없애는 시설을 개발하고, 낙서범 전담반을 만들어 체포에 나섰다. 그러나 좀처럼 그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롸이터들은 전동차를 지하철 노선에 따라 거의 나눠 가지다시피 하고 쉼 없이 그렸다. 이를테면 LEE, DONDI, CAZ 2 등은 지하철 노선을 가리지 않고 그렸지만, SEEN, MAD, PJ, DUST 등은 6번 지하철을, MITCH 77과 PRODY나 MAX183은 4번 지하철을 담당하고 그리는 식이었다.
그래피티가 워낙 빠르게 강한 속도로 퍼지자 그러한 ‘현상’에 대해 인류학이나 사회학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 학자들의 그래피티에 대한 분석 결과는 ‘비주류 인종과 계층의 자기 존재 증명과 발언’으로 흔히 모아졌다. 예술계에서는 그래피티를 범죄 여부와 관계없이 예술로 보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래서 라이터들을 전시장 공간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부터 리 퀴노네스(LEE QUI NONES)와 팹 화이브 프레디(FAB 5 FREDDIE) 등이 유럽의 화랑에 초대되기 시작했고, 1980년의 ‘타임스퀘어 쇼’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초대했다. 또한 그래피티를 취급하는 화랑, 즉 에세스 스튜디오(Esses Studio)와 패션 모다(Fashion Moda), 펀 갤러리(Fun Gallery) 등이 문을 열었다. 결국 돈디 화이트, 레이디 핑크, 리, 퓨투라 2000 등과, 이들과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키스 해링과 장 미셀 바스키아 등이 미술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체포’도 하나의 ‘경력’이었다. 키스 해링은 지하철 광고판에 낙서화를 그리다 경찰에 체포되는 사진을 자신의 카탈로그에 게재하기도 했다.
롸이터는 90년대까지도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열차에 그래피티를 그렸다. 열차의 그림은 효과가 특히 컸다. 그것은 한 장소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전 뉴욕시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일종의 움직이는 벽화였다. 그들은 밤 사이에 버밍을 하고 다음날 자신의 작업을 보러 지하철역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맹렬한 속도로 역에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롸이터들은 박수를 치며 반겼다. 80년대에 들어 미 전역에서 그래피티에 대한 단속과 체포, 법 적용이 매우 엄해졌다. 그래피티는 시 행정의 무능을 의미했으므로, 시장 등 행정관은 그래피티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그 퇴치를 위해 더욱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인지 80년대 후반부터는 열차에 그리는 그래피티의 열기는 많이 식었다. 뉴욕의 지하철 당국은 아예 열차의 외벽을 스프레이 페인트가 부착되지 않고 흘러내리는 스테인리스를 개발해 건조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릴 수 없는 열차가 늘어났다. 어쩔 수 없이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열차보다는 주로 버려진 벽면이나 터널의 벽 등을 찾아 이동했다. 마침내 1989년 5월 12일, 뉴욕의 지하철공사(MTA)는 자랑스레 ‘그래피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선언했다.
이러는 사이 그래피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열병처럼 번졌다. 유럽이나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도시 어디를 가도 그것들은 거의 똑같은 양상으로 발전하며 그려졌다.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의 장벽은 냉전 시대의 상징이었으나, 또한 세계인에 자유스럽게 열려진 그래피티의 경연장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그것은 70년 이후 순식간에 그래피티로 뒤덮였고, 더 이상 여백이 없자 덧칠하며 그려졌다. 1989년 그것이 무너졌을 때, 그 조각들은 무너진 냉전 시대의 상징으로서의 수집품이 됐다.

프랑스 출신 WK 인터액트(WK Interact)의 그래피티

후기 그래피티(Post-Graffiti)의 등장

그러나 90년대 중반에서부터 그래피티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어로졸 페인트로 자신의 별칭을 스타일화하는 방식 이외의 표현 형식이나 매체가 나타났다. 표현 형식은 스티커 붙이기는 물론, 일종의 판화 기법인 스텐실로 같은 모양을 여러 곳에 표현하기, 종이에 형상이나 글자를 찍어 벽보처럼 붙이기(Wheat Paste), 모자이크 타일(Mosaic Tiling), 글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미술적 방식(Conceptual Street art), 길 위의 구조물에 입체작품을 설치하기(Installation), 영상 프로젝션 등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름 글자를 가지고 하는 ‘스타일의 전쟁(Style Wars)’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 개인의 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표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거리의 미술들은, 내용에 있어서 형상성 있는 이미지들과 판독하기 쉽고 압축된 글들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형식에 있어서는 판화 기법과 드로잉과 복제 등 평면적 표현 방식뿐 아니라, 입체와 설치 방식 등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 각국의 스트릿 아트를 모아 《반항의 미술(The Art of Rebellion)》이란 책을 발간한 C 100의 표현을 빌리면, 이 새로운 그래피티는 자기의 이름을 써서 이 세계 속에 단지 자신의 ‘존재(What it is)’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경 토로 및 의견 진술로써 세계에 대해 무엇인가 ‘행동하는(What it does)’ 것으로 변화했다.
이제 거리의 미술은 개인적 상상과 감정의 토로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의견 표명과 사회적 메시지까지를 폭넓게 표현하는 매체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다양한 스트릿 아트를 ‘후기 낙서화(Post Graffiti)’라고 부른다. 이는 70년대 초창기의 태그부터 와일드 스타일까지의 이름 중심의 거리미술로부터, 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개념 중심의 거리미술을 구분하는 명칭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완전히 합의된 용어와 명칭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람과 지역에 따라 도시미술(Urban art), 게릴라 아트 등으로 부르는 이도 있다. 그러니까 스트릿 아트에서도 이름을 양식화하며 추상 쪽으로 발전해간 모더니즘적 경향과, 그리고 그 이후 형식보다는 내용과 메시지를 중시하며 형상을 도입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이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용어를 정리해 본다면 ‘그래피티’와 ‘스트릿 아트’는 대체로 동일한 의미로 쓰이나, ‘스트릿 아트’가 보다 넒은 개념, 즉 태깅와 버밍를 비롯해 모든 비공식적 ‘거리의 미술’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함께 공공의 장소에서 행해지지만 ‘스트릿 아트(거리미술)’는 ‘퍼블릭 아트(공공미술)’와 합법적 공인의 테두리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 밖에 있는가에 따라 구별된다. 즉 ‘거리미술’은 ‘공공미술’과는 달리 전통과 법적 제도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행해지는 시각미술 전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포스트 그래피티는 90년 이후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거리미술을 지칭한다.

부산대 앞 온천천변의 Kay2 그래피티. 2006

파리 68혁명의 영향

한편, 이러한 포스트 그래피티는 지난 1968년 파리에서 폭발했던 문화변혁운동과 맥이 닿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68혁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비인간적 관료 제도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문화, 그리고 보다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주창하며 일어난 시민운동이었다. 마침내 드골 대통령을 하야시켰던 그 문화혁명은 또한 길 위에 수많은 구호와 포스터들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무정부주의와 상황주의자들이 주도한 그 혁명의 시기에 파리시에는 ‘첫째, 불복종하라; 그리고 벽에 글을 써라.(‘68 십계명 중에서)’ ‘상상력에게 권력을!’ ‘금지를 금지하라’와 같은 구호와 포스터가 수없이 제작됐다. 당시 파리시에 그토록 시각적 호소력이 있는 포스터가 재빨리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미술대학 에콜드 보자르가 학생과 시민들로 점령(5월 14일)된 후, 그들이 학교의 시설을 이용해 실크 스크린 등의 기법으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68혁명의 전통을 잇고 있는 90년대 스트릿 아트의 지평에서 대중에게 가장 유명해진 작가는 영국의 뱅크시이다. 그는 여전히 진짜 이름과 얼굴을 세상에 알리지 않은 채, 런던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반권위주의’, ‘반폭력-반전’ ‘반자본주의’ ‘반감시체재’ ‘환경보호’의 발언을 계속한다. 유명한 미술관에 자기의 작품을 들고 가 몰래 걸어 그 권위를 야유하는가 하면, 테러 방지란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감옥처럼 둘러싼 이스라엘의 벽에 그것이 뚫리거나 무용해지는 그림 9점을 그렸다. 또한 영국의 군인과 경찰의 위선을 야유하고, 쇼핑과 TV에 중독된 사람들의 세태 등, 그는 블랙유머의 옷을 입고 감춰진 현실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의 유명세는 런던에 그의 그림을 보러 다니는 관광 코스가 생기고, 안내지도가 판매될 만큼 높아져 있다. 뱅크시는 2005년에 발간한 작품집 《벽과 그림(Wall and Piece)》의 서두에서 아래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진술하고 있다.
“그래피티는 미술의 가장 저급한 형식이 아니다. 한밤에 몸을 숨기며 하는 일이며, 주위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며 행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능한 가장 정직한 예술 형식이다. 거기에는 엘리티즘과 허위의식이 없다. 그것은 한 도시의 최고의 벽에 그려져 전시되지만 누구에게도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벽은 언제나 당신의 작품을 알리는데 최고의 장소였다. 우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익을 창출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가치 기준이 오직 돈이라면, 당신의 생각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지역 사회의 타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래피티는 오직 다음의 3종류의 사람들에게 위험할 뿐이다. 즉, 정치인들, 광고기획자들, 그리고 그래피티 롸이터들이다. 우리들의 이웃과 주변을 진정으로 훼손하는 사람들은 건물을 가로지르며 덮고 있는 각종의 거대한 구호들을 휘갈겨 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물건들을 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불충분하다고 느끼게 만들려 하는 버스 광고들이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공간과 표면에서부터 당신의 얼굴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외치길 기대한다. 하지만 결코 당신에게 그것에 대답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다. 벽은 그들에게 반격할 수 있는 선택의 무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보다 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반달족(그래피티를 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 글에서 그래피티를 하는 자신의 입장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그는 포스트 그래피티의 상징적 인물이 돼 있다. 그러나 뱅크시와 그의 방식이 대중매체에 가장 많이 알려졌을 뿐, 그 이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스트릿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오늘의 세계 각 도시들은 성격이 두드러지는 여러 스트릿 아트로 넘쳐난다. 뉴욕과 LA를 비롯한 미국의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런던과 파리, 베를린과 로마, 바르셀로나와 상파울로, 그리고 호주의 멜버른 등은 스트릿 아트의 보고들이다. 포스트 그래피티 세대의 아티스트들은 분명히 자신을 예술가로 의식하고 작업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은 도시의 벽에 작업을 하는 이외에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화랑을 만들고 있으며, 화랑에서의 전시와 작품 거래를 위해 캔버스나 종이 위의 작업을 병행하기도 한다. 이미 그 이름이 잘 알려진 미국의 스운(Swoon), WK 인터액트(WK interact), 쉐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 엘보우 토우(Elbow Toe), 3인의 공동작업인 페일레(Faile), 영국의 디 페이스(D*face), 스페인의 여성 작가 미스 반(Miss Van), 프랑스의 블렉 르 랫(Blek Le Rat)과 타일 모자이크로 유명한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 노르웨이의 독크(Dolk), 그리고 브라질의 오스 제메오스(Os Gemeos) 등은 세계의 도시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고, 또 여러 도시의 화랑에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들 스트릿 아티스트에서 특기할 점은 인터넷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의 홈페이지를 갖고 있으며, 포털사이트나 웹진을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나눈다. 각 도시의 길 위에 그려진 그들의 작업들을 추적하며 즐기는 시민들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으며, 그들의 대중적 인기는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작가들보다 더 높기도 하고 더 넓게 퍼지기도 한다. 이러한 그들의 인기와 높은 인지도의 저변에는 구글과 유튜브 등 인터넷 사이트가 큰 몫을 하고 있다.

한국 스트릿 아트의 현재

한국에서 그래피티는 90년대 초중반에 시작됐다. 이태원 부근에서 주한 미군에 의한 태깅과 그것을 모방하는 일군의 그룹이 스프레이 캔을 손에 잡으면서 그것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힙합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홍익대 주변에 힙합 클럽이 생겨났고, 이러한 힙합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그래피티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미국과 유럽의 40년 역사에 비할 때 한국의 스트릿 아트는 약 10여년의 역사로 매우 짧은 편이다. 그래서 아직 그 아티스트가 적고, 그래피티에 관한 일반인의 인식의 폭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스트릿 아트는 그 특유의 재능과 몰입으로 짧은 시간에 놀라운 수준으로 도약하며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활동을 보인 한국의 스트릿 아티스트를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본다면 Vandal, Koma, 4nG Crew, Tagil, Wontak Crew(Basara, Handi, JINSBH, Kinosita, Menoc, Mesus, PS(피카소), Spiv 등 8명) J&J Crew(Jay, Joe), 가루, ANFG, BFMIN, Hez, GufMott, Mafeel, Oscar, Never, Ninbolt, Rakastyle, Semi, Vast, WK 1, Xeva 등이 있고, 여성으로서 Junkhouse, Kura, Nana 등과,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Jial 1, Kay 2, VS, 그리고 광주를 중심으로는 DRC, Everlazy 등이 활발히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는 홍익대를 중심으로 Double-P 가 본격적으로 스텐실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해 열리는 ‘420ml(한국 스프레이 캔의 페인트 용량이 420ml인 것에서 착안한) 그래피티 전시’는 올해 4회를 맞았다. 이러한 기획전을 비롯해 웹사이트에서의 활발한 의견 교환과 작품 감상으로 한국의 스트릿 아트는 앞으로 더욱 다양하고 의미 있는 작업들이 출현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작가 정신보다는 기예에 집중하는 경향, 즉 태깅과 스타일에의 집중과 상업주의의 유혹 등 우려스러운 측면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스트릿 아트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보다 자세히 그 현황과 특징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스트릿 아트 즐기기

나는 ‘뮤지엄 아트’만큼이나 ‘스트릿 아트’를 즐긴다. 그것들이 모이는 몇몇 지점은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나는 해외여행 중에도 ‘미술관’만큼 ‘스트릿 아트’ 순례에 나선다. 때로 나는 뮤지엄보다도 더 스트릿을 즐긴다. 왜냐하면 스트릿 아트는 갈 때마다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있고, 지금 오늘 우리의 삶을 직선적으로,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보며 걷노라면 그 알 수 없는 한 개인이 남긴 빛나는 재능과 집착,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삶의 통찰과 유머, 시적 상상과 지혜, 솔직한 진술과 통렬한 비판 등이 주는 기쁨에 나는 취한다. 그래서 그 기쁨과 견줄 만한 것이 나의 삶에 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그것들은 내가 허기졌을 때, 갓 구워 나온 빵처럼 나의 허기를 달래준다. 특히 권위의 옷을 입고, 아무런 신선한 내용이 없으면서도, 오만과 허세의 숨소리만 거센 미술관과 화랑의 어떤 미술들에 지쳐 있을 때, 스트릿 아트는 내게 새로운 활력을 되찾게 하는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언제나 반짝거리는 ‘신선한’ 거울이다.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