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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8.06

Abstract

2008 ASIAN ART FAIR ● 세계 미술의 흐름을 양분하는 미술행사 비엔날레와 아트 페어. 지난 5월호에서는 올해 열리는 9개의 아시아 비엔날레를 소개하고, 현황과 문제점 및 비전을 폭넓게 짚어보는 특집을 내보냈다. 이번 호에서는 아시아 아트 페어를 집중 조명한다. 미술시장의 호황과 함께 오늘의 세계미술은 '아트 페어의 시대'를 맞고 있다. 아트 페어가 비엔날레에 버금가는(혹은 그 이상의) 미술 이벤트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아시아 미술이 국제 미술시장에서 크게 약진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의 열기가 아주 뜨겁다. art는 올해 상반기에 열린 아시아 아트페어 현장에 다녀왔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흐름과 각국 아트 페어의 운영 전략 등을 취재해 특집으로 묶었다.

Contents

표지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버려진 백자 파편, 금박, 에폭시 2006

에디토리얼 ART HK08 미디어 파트너로 참가하다_김복기
 
프리즘 
    문화예술 지원정책의 ‘불도저’식 개혁?_백기영
    한국 미술시장이 더 건강해지려면_조명계
 
아티스트 아틀리에 아카이브 
    이기봉_이선화
 
포커스 
    신옥주|김주연_이선영
    게리 웹|정흥섭_유진상
    김홍주 정광호|김병진 강덕봉_조은정
    김홍석_김성원
 
특집 
    (1) World ‘아트페어의 시대’, 무엇이 중요한가_김복기
    (2) Hong Kong ‘월드시티’ 홍콩, 아시아 마켓 이끈다_유진상
    (3) Beijing 중국미술의 ‘국제화 전문화 미래화’_손정화
    (4) Tokyo 일본 미술시장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_우에다 유조
    (5) Dubai 기적의 땅 두바이, 글로벌 미술의 허브로_김새미
 
작가 연구 이수경
    나를 나에게로, 그를 그에게로_황인
 
이미지 링크 옌스 울로프 라스테인
 
리포트 뉴욕 
    2008휘트니비엔날레와 관계성의 미학_박영미
 
특별기획 
    로버트 라우센버그, 컴바인의 마술사_송미숙
 
전시리뷰 
    신상호|한국 드로잉 100년|최기석|송수남|윤영화|김일권
    Reality in Contemporary Art|PRIVACY|이길래|김을
    김희선|신영미|리경
 
아웃 오브 코리아 
    이진용_최지아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김지민|이명진|안두진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2008 June Special - 2008 Asian Art Fairs

김준 <버드 랜드-아르마니> 람다프린트 100×175cm 2008

World Art Fair
‘아트페어의 시대’, 무엇이 중요한가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250여개의 비엔날레가 생겨났다. 이젠, 그 비엔날레가 시들해졌다. 상대적으로 아트페어가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비엔날레의 시대가 저물고, 아트페어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한다. 아트 페어의 역할과 위상이 높아졌다. 국제 교류의 장, 비평 기능의 강화, 미술 이벤트로서의 위력, 대중적 파급력…. 아트페어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글 | 김복기·본지 발행인

이길우 <동문서답-미인도> 장지에 혼합재료 2007

아트 페어의 번성은 세계 미술시장의 경기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다. 새 밀레니엄 이후 뉴욕과 런던이 국제 현대미술시장 매출액의 2/3 이상을 주도하며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고, 이 흐름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미술시장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이후 미국 경제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고, 여기에 고유가 시대를 맞고 있지만, 국제 미술시장의 전반적인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이유는 세계 미술시장의 질서가 예전과 달리 다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품을 왕성하게 구매하는 세력이 미국이나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중동 인도 러시아 한국 일본 등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특히 미술시장의 질서가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세계 미술시장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중심 이동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아트 페어의 기상도를 압축할 수 있다. 쾰른, 바젤, 프리즈, 아르코 아트 페어에서 비서구권 미술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세계의 ‘떠오르는 용’ 중국미술이 버티고 서 있다. 오일 파워 중동과 IT 강국 인도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예 비서구권에서는 아트 페어를 창설하거나 기존의 아트 페어를 국제 규모로 키우고 있다. 과거 비엔날레가 걸어왔던 서세동점의 길을 아트 페어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세계미술계의 판도에서 아트 페어가 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걸까? 그것을 단순히 경제 논리만으로 풀어낸다면 궁색한 답변이 될 것이다. 아트 페어는 원래 아트 딜러와 콜렉터가 작품을 사고 파는 미술품 견본시장, 요컨대 동종 업계의 판매와 정보 교류마당이다. 그러니까 ‘시장 기능’에 일차적 역할을 두는 미술행사다. 그러나 근자의 주요 국제 아트 페어는 그 역할이 크게 넓어졌고, 위상 또한 높아졌다.
첫째, 오늘날 국제아트 페어는 국경을 뛰어 넘어 자유롭게 존재하는 ‘비권위적인 현대미술관’이다. 국제 아트 페어는 오늘의 세계미술 흐름을 집약하는 가장 열기있는 국제 이벤트다. 아트 페어는 시장 기능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비평 기능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딜러들은 비엔날레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작가의 작품을 찾아내 재빨리 아트 페어에 내놓는다. 큐레이터들은 아트 페어를 찾아 비엔날레 초대작가의 윤곽을 그려낸다. ‘비엔날레 작가’와 ‘아트 페어 작가’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있다.
둘째, 아트 페어는 글자그대로 미술축제다. 이벤트성이 강하다. 세계 각국의 아트 페어는 화랑들의 부스 참여라는 기본 행사 메뉴 이외에 특별전이나 젊은 작가 발굴 등의 새로운 섹션을 내세워 독자성과 경쟁력을 다져가고 있다. 아트 페어가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 이벤트에서처럼 동시대미술의 문맥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미술문화의 주요 현안들을 주제로 미술전문가들의 포럼을 개최하는가 하면 전문가 그룹을 위한 프리뷰나 프레스오픈을 일반 오픈과 분리해 이벤트화하고 있다. 강연, 공연, 파티 등도 단골 메뉴가 되었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아트 페어의 위력은 대중적 파급력이다. 짧은 기간, 한 장소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구입까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강점이고 큰 매력이다. 그래서 단 몇일 사이에 수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비엔날레에 비해 행사 사이클이 빠르고, 전시 규모가 부담이 적고, 작품 감상도 안락하고, 내용이 너무 무겁지 않고… 결국 아트 페어는 미술 생산자보다는 미술 소비자의 눈높이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아트 페어의 파급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트 페어가 열리는 기간에 맞춰 갤러리는 물론이거니와 미술관이나 비영리기관들도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전략을 짠다. 아트 페어 특수는 도시 부흥과 지역 경제 할성화로까지 이어진다.

아트두바이 부대행사 ‘클로벌 아트포럼’ 장면. 세계 미술계 인사 67명을 패널로 초청해 5일간 포럼을 진행했다.

왜 아트 페어인가

이즈음, 아트 페어는 미술의 대세다. 갤러리스트들만의 비즈니스 무대라는 좁은 범주를 넘어 한 개인, 한 도시, 한 국가의 국제 교류의 마당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오늘날 미술작품의 평가는 비평적 가치에 못지 않게 세계 미술계에서의 인지도, 미술시장에서의 노출 빈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이 2007년 스페인의 아르코 아트 페어에 주빈국으로 선정되어 여러 행사를 열었고, 그 규모와 성과는 어느 국제전 못지 않게 값진 것이었다. 이제 아트 페어는 공공적 성격까지 담보하고 있다. 보다 적극적인 문화 전략이 개입할 시점이기도 하다.
아트 페어의 시대에 한국미술의 약진이 돋보인다. 적극 환영할 일이다. 물론 중국이 이끄는 ‘아시아 바람’ 덕을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메이저 화랑들의 국제화 전략이 상당 부분 성과를 얻고 있다. 해외 지점 개설과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상품 개발 등이 주효하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미술이 무한경쟁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국내 시장과 국제 시장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좀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작가 홍보가 뒷받침된다면, 국제 시장에서 한국미술의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더불어 한국이 아트 페어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짚어야 할 대목도 많다. 현재로서는 KIAF가 아시권에서 내로라하는 아트 페어로 성장했다. 참여화랑만 200개가 넘는다. 그러나 KIAF도 이제는 양보다 질로 전환할 때가 왔다. 200개 화랑 중, 특히 국내 화랑 중에는 국제 미술행사에 참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도 있다. 얼마 전, KIAF에 탈락한 화랑들이 심사 결과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켰듯이 내부의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한국화랑협회에서 KIAF을 운영하기 때문에 협회 소속 회원사의 권익 옹호라는 책임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당연히 KIAF를 화랑협회에서 분리해 독립 운영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아트 페어는 대부분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된 일종의 위원회에서 행사를 조직하고 운영한다. 아트 페어 디텍터는 전시 기획뿐만 아니라 홍보, 재정, 후원, 교류 등에서 글로벌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도 하루빨리 그런 전문 인력을 키워내야 한다. 아트 페어의 시대를 올바르게 헤쳐나가기 위해 미술계 모두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투크랄 타그라 <메트로 폴리스>

자유구상회화의 선구자-로베르 콩바스展

로베르 콩바스 <나무 트럼펫> 캔버스에 아크릴릭 205×305cm 2004

Robert Combas, 자유구상회화의 선구자

글|이정헌 객원기자

유쾌한 망상으로부터

로베르 콩바스(Robert Combas)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서울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아주미술관 등 국내의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작가다. ‘프랑스의 앤디 워홀’ ‘유럽화단의 이단아’ 등 그를 수식하는 문구들이 말해주듯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세계를 구축한 로베르 꽁바스는 프랑스 미술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꼽힌다.
로베르 콩바스는 1963년 프랑스 몽펠리에에 위치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그 당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들은 개념미술, 미니멀아트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아카데믹함을 강조했다. 콩바스는 “미술학교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학교 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시대에 뒤떨어진 옛 히피족 몇 명뿐이었다. 나는 회화를 선택했고 1학년이 끝날 무렵에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추구하는 회화 방식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은, 학위를 따던 해에 에콜 데 보자르의 학위 시험관이었던 셍떼띠엔느미술관장 베르나르 크레송의 눈에 띄게 된다. 크레송의 추천으로 〈고전주의 파괴 이후〉전에 참여하며 주목을 받은 이후, 그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0년대 영국과 미국의 팝아트 이후 이어진, 1965년 미니멀아트의 전파, 1969~71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념미술 등의 미술사적 흐름은 담론의 우위와 엄격함, 표현성 부족, 비개성화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로베르 콩바스의 등장은 미술계에 신선하게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로베르 콩바스는 프랑스 화단에 데뷔할 때부터 1970년대 서구 화단을 지배했던 모더니즘미술과 미니멀아트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작품을 선보였다.
로베르 콩바스는 주로 혼자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순수함을 지향해 나갔다. 콩바스의 작품이 팝아트로 인식됨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성공과 작품의 대규모 생산성을 바탕으로 작업하던 워홀과 상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더그라운드 문화, 반영웅주의, 발칙한 캐리커처, 신화나 설화 등의 영향을 받은 콩바스는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는 즉흥성을 추구했다. 대중적인 소재들과 사회적 문제들을 패러디하거나 키치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이면에 자리한 소비산업사회의 악영향을 드러낸다.
또한 신화 종교 우화 역사에서부터 만화 재즈 록음악 등 대중문화, 그리고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환상 속의 장면 등 콩바스 작품의 소재는 폭넓고 다양하며, 표현은 즉흥적이고 망설임이 없다. 콩바스는 거칠고도 날카로운 드로잉과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색채들을 조화시키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를 창조한다. 형상들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테두리 안에 강렬한 색채가 더해주는 흥분과 활력, 즐겁고 유쾌한 망상, 아이러니와 패러디가 담겨 있다. 또한 내용과 형태 간의 위계를 없애고, 부피감과 원근법이 부재하여 형식이 자유롭다.
이처럼 밝고 풍부한 색채, 힘 있고 자유로운 선, 쾌활하고 활력 있는 구성은 그만의 독보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자유구상회화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5미터가 넘는 화면에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실타래를 풀듯이 빼곡하게 선으로 수놓는다. 자유와 도발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콩바스의 최근 작품들은 그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로베르 콩바스 <네 개의 다리와 발이 달린 자화상> 레진에 채색 125×215×50cm 2004

신작들로 가득 차는 전시

이번 〈로베르 콩바스〉전은 이제까지 한국에서 열린 그의 전시 중 최대 규모다. 최신 회화 작품 50여점과, 특유의 화풍을 도자기의 형태로 제작한 작품들, 그리고 작가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 등 총 60여점이 전시된다. 출품작들은 ‘재즈 블루스’ ‘초현실적인 금관악기’ ‘과슈화’ ‘아카데미’ ‘세 명의 음악가’ ‘조각과 도자기’까지, 작품의 형식과 소재에 따라 여섯 가지 섹션으로 나눌 수 있다. 〈누워 있는 여인〉 〈보아뱀 여인〉 등 20cm의 작은 크기의 과슈 작업부터, 〈베이스 맨〉 〈빕 제이 맥〉 등 2미터 이상의 대형 작품, 〈다다〉 〈남성과 여성의 대면〉과 같이 신화를 주제로 다루는 작품, 〈네 개의 다리와 발이 달린 자화상〉과 같이 유쾌하고 화려한 조각작품 등 최신작들을 선보인다.
전시는 5월 23일부터 6월 8일까지 서울 평창동에 위치한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된 후, 부산해운대 노보텔 4층에 있는 가나아트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6월 12일부터 29일까지 이어진다. 특히 오프닝이 열린 5월 23일에는 로베르 콩바스가 직접 가나아트센터를 찾아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콩바스는 두 시간 동안 높이 2m, 길이 3m의 골판지에 화려한 붓질을 선보였다. “나는 리듬을 타고 났다”라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거침없는 붓놀림으로 삽시간에 탱크를 타고 있는 군인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콩바스 자신이 기억하는 유년기는 그림과 늘 함께 있었다는 것뿐이다. “마치 본능처럼,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그의 증언은 아마도 유년기나 현재나 같은 의미일 것이다. 유년기에 그림을 시작하면서 품었던 열정을 50여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기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의 그림에서 바로 나타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늘 다작과 함께 활발한 전시 활동을 펼치는 그의 왕성한 에너지에서도 말이다.

스페이스-파리의 예술전문서점

아르타자르 내부

Art book store in Paris

글·사진|장승연 기자

아르타자르 Artazart

83 quai de Valmy, 75010 Paris (메트로 Jacques Bonsergent)
최근 파리 젊은이들에게 각광받는 생마르탱 운하 주변은 관광객이 별로 없는 데다, 세느강 주변보다 소박하면서 조용하다. 1960년대 파리 시내의 비싼 집세와 물가를 피해 밀려든 예술가들이 자리를 튼 이래, 최근 개성 넘치는 상점들과 저렴한 카페, 레스토랑들이 생겨나 또 다른 매력의 파리를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운하를 따라 나 있는 널찍한 콰이 드 발미(quai de Valmy)를 따라 걷다 보면, 주황색의 선명한 간판이 눈에 띄는 ‘아르타자르’가 나타난다. 디자인 전문 서점을 표방하는 이곳은 디자인 각 분야별 서적과 순수미술, 사진집도 구비되어 있다. 편안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사진을 찍으라는 친절한 스텝까지, 하루 종일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런 저런 서적들을 뒤적거리기에 딱이다. 로모카메라같은 얼리어답터 용품도 함께 판매하여 매니아층의 발길을 끄는, 최근 파리의 떠오르는 예술전문서점이다.

라 휜느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

라 휜느 La Hune

170 Bd. St. Germain, 75006 Paris (메트로St. Germain des pres)
파리지앵 누구에게 묻던 ‘오! 라 휜느’하고 바로 아는 그곳. 쇼핑과 유행을 선도하는 생제르맹 거리에, 그것도 오랜 역사와 인기를 자랑하는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예술서적 전문서점이다.
1949년에 문을 연 이곳은 워낙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 교차로에 위치한데다, 그 유명세 때문에 하루 종일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얀색 가구들로 채워진 건물 내부는 독특한 복층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건축, 디자인, 미술 관련 책들이 카테고리별로 구분되어 있는 2층에 올라가면, 마치 다락방에 앉아서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창문 앞에 앉아 비싸서 살 수 없는 화집들을 마치 내 것인 양 가득 쌓아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창문 밖 바삐 길을 걷는 생제르맹거리의 쇼핑객들을 구경해 보자. 시간의 속도가 다소 무색해지는 색다른 경험이 가능하다.

셋엣의 세련된 간판

셋엘 7L

7 rue de Lille, 75007 Paris (메트로 Rue du Bac)
샤넬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운영하는 서점이라고 하여 트렌디한 공간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생제르맹 거리에서 인적이 거의 드문 조용한 릴 골목길로 들어가면 '7L'이라는 세련된 간판의 작은 서점이 나타난다. 좋은 책으로만 승부하려는 듯 절제되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조용한 실내가 도도한 인상마저 준다.
가끔 유명 모델이나 연예인들이 들러 책을 보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는데, 아쉽게도 그날 그 시간의 손님은 오직 기자 한 명 뿐. 건축, 디자인, 현대미술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시집, 아방가르드한 각종 잡지가 진열되어 있고, 역시 그 중에서도 패션관련 책들이 꽤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특히 진열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칼 라거펠트의 패션 사진집이 눈에 띈다. 이 서점에는 그가 직접 선택한 책들만 진열한다고 하니, 샤넬과 그 디자인을 흠모하는 이들에게는 라거펠트의 지적 취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타셴 외부 전경

타셴 Taschen

2 rue de Buci, 75006 Paris (메트로 Odeon)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편집으로 유명한 예술서적 전문출판사 타셴. 생제르맹 거리를 걷다 부치 골목길로 접어들면 왁자지껄 먹거리와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들이 펼쳐진다. 설마 이런 곳에 서점이 있을까하고 두리번거리기가 무섭게 깔끔한 타셴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서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쇼룸으로, 타셴의 신간이나 주요 서적들을 구비하여 책 종류가 많지는 않다. 국내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타셴 책을 보러 굳이 발품을 팔 필요가 있을까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곳이 더욱 유명세를 떨치는 이유는 바로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실내 인테리어 때문이다.
어두운 마호가니 색상의 고급스런 실내는 아르누보풍 문양의 책장, 우아한 곡선을 뽐내는 나무 기둥과 의자들로 적절하게 구색을 맞추고 있다. 물론 세련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끄는 파리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책들도 이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지나가던 길에 잠깐 들러 책과 인테리어를 구경하기에 적절한 규모라 부담이 없다.

팔레드도쿄의 서점

팔레드도쿄 서점 Palais de Tokyo

13 avenue du Preident Wilson, 75116 Paris (메트로 Metro Iena)
젊은 감각의 생동감 넘치는 전시들이 연중 내내 이어지는 팔레드도쿄는 서점 또한 매우 이색적이다. 입구 한 구석에 설치된 투박한 철조망 안에 각종 예술서적들이 가득 차 있다. 기둥이나 벽면 곳곳에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고, 마치 전시 관람객들이 붙여 놓고 간 듯한 각종 문양과 로고 스티커들이 빼곡하다. 뉴욕 할렘이나 영국의 캠든타운에 어울릴 것 같이 펑키한 이곳에는 독특한 스타일의 젊은이들도 종종 눈에 띈다.
특히 벽 한 쪽에 거대한 책장에 일렬로 배치된 미술전문 잡지코너가 이색적이다. 거대한 책꽂이에 잡지들을 정면을 향해 꽂아 놓았을 뿐인데, 다채로운 각양각색의 표지들을 한 눈에 감상하기에도 좋거니와, 이것저것 손닿는 데로 집어 들어 뒤적거리기에도 참 용이하다. 전시를 본 후 서점 안으로 들어가 지난 전시도록들을 쭉 훑은 다음, 지하 스낵코너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을 사들고 바깥 강가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완벽한 코스를 추천한다.

퐁피두센터 서점

퐁피두센터 서점 Centre Pompidou

Place Georges Pompidou, 75004 Paris (메트로 Rambuteau)
파리 현대미술의 랜드마크 퐁피두센터의 서점은 앞서 설명한 여러 서점들을 굳이 찾지 않아도 웬만한 책을 다 찾을 수 있을 만큼 그 종류가 방대하다. 최근에는 감각적인 디자인 노트나 필기류를 좀 더 다양하게 구비해 놓았다. 물론 가격은 저렴하지 않다.
알록달록 컬러풀한 파이프로 장식된 파격적인 건축으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미술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리차드 로저스와 렌조 피아노의 기발함은 서점 천장 위를 가로지르는 파란색 파이프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단지 오랫동안 책을 들여다보기엔 사람이 워낙 많은데다가, 다소 낮은 천장이 답답하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레 자르쉬브 드 라 프레스의 간판

레 자르쉬브 드 라 프레스
Les Archives De La Presse

51 rue Archives, 75003 Paris (메트로 Rambuteau)
전 세계의 오래된 잡지와 신문, 포스터가 가득한 헌책방. 예술 전문 서점은 아니지만 오래된 예술관련 잡지도 볼 수 있으니,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지닌 이들에게는 최고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주인장이 자주 문을 닫아놓으니 꼭 예약하고 가세요’ 라는 책자 구절을 보고 설마하고 찾았더니, 역시나 문이 꼭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쇼윈도를 통해서 오랜 잡지와 신문 더미들을 구경하자니, 손에 닿지 않는 이색 자료들에 대한 호기심만 더욱 커져 이 작은 서점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마레지구를 구경한 후 퐁피두센터를 향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동선을 선택했다면, 지나는 길에 들리기 적절한 위치이다. 혹시 문이 닫혀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쇼윈도 가득 진열된 오래된 보그(Vogue)의 표지모델 변천사를 구경하거나, 누렇게 변한 옛날 포스터와 신문 더미들을 관찰해 보는 것도 충분한 즐거움을 줄 테니까.

이수경, 나를 나에게로 그를 그에게로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버려진 백자 파편, 금박, 에폭시 2006

나를 나에게로, 그를 그에게로

글 | 황 인·아트 액티비스트

“나는 나, 그는 그”(私は私 人は人/니시다 기타로 西田幾多郞). 어떤 작가의 어떤 작업이든 일단은 당사자의 개인적인 표현의 욕구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출발한 작업이라 할지라도 작업을 둘러싼 환경 혹은 관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개인이라는 일인칭과 타자라는 삼인칭 상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안하고 어둡고 변덕스럽고 고집 센 ‘나의 세계’는 투명하고 단호하며 불가항력적인 ‘그의 세계’가 되어 작품의 일관성, 집중력, 예측가능성 등 일정하게 제한된 스펙트럼을 가진 작풍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과 작가 사이에는 분명히 인칭적인 거리가 있다.
작품은 분명 작가의 표현 욕구에서 나왔지만 작가에게는 인격이 작품에게는 독립된 물격(物格)이 있다. 작가가 나(私)라면 작품은 나를 떠난 타자(人)의 세계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을 제작한다는 일은 부단히 나를 버리고 ‘자신과 비슷한 타자’를 만든다는 뜻이 된다. 관객이 느끼는 작가의 개성의 확립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미 삼인칭으로 타자화된 일인칭을 말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일인칭과 삼인칭 사이의 균형을 쉽게 잡으며(잡은 것으로 오해하며) 이 사이의 갈등을 별로 느끼지를 않는다. 평생 작품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일인칭을 고백하지 않고도 프로페셔널한 작가 생활은 가능하다. 그런데 일인칭인 나를 드러낼 때마다 그것이 타자의 상태로 변환되지 못하고 자신에게로 곧바로 피드백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작가도 있다. 이런 경우 작업의 예측 가능성은 참으로 힘들어진다. 타자화되지 않은 일인칭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하며 변덕스러운 것인가? 이수경이 그렇다. 그녀의 작업은 종잡기 힘들 정도로 매우 다양한 변모를 하여 왔다. 오브제, 비디오, 페인팅, 드로잉 등 웬만한 장르는 다 보여준 듯하다. 이는 국내 작가들에 있어서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이수경 <순간이동 연습용 그림>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2

나는 결코 그가 될 수 없다

1992년 <나와의 결혼>전(인데코 갤러리)에서부터 최근의 <파라다이스 호르몬>전(몽인아트센터)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인전들과 숱한 단체전에서 보여주었던 실험들은 그 변화가 너무 다양해서 통상적인 관점으로는 작품의 일관성을 발견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런 식의 일관성을 발견하려 애쓰기보다는 그녀에게 있어 일인칭인 작가 ‘나’와 삼인칭인 작품 ‘그’의 거리가 대개의 작가들이 느끼는 감각을 훨씬 넘어서 있다는 데서 어떤 실마리를 찾는 편이 유익할 듯하다. 작풍의 변화가 심하다는 데서 그녀의 ‘나’는 대개의 작가들과는 달리 쉽게 삼인칭의 ‘그’로 되지 못하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그녀에게 있어 일인칭은 쉽게 삼인칭이 되어 중재와 합의를 통해 제한적인 개성이라는 이름의 약속을 하고 이를 지켜나가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나는 나 그는 그”(인<人>이란 일본어는 우리말의 ‘그냥 사람’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주로 절대적 타자인 ‘그 사람’을 가리킴). 이 말은 일본의 근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한 말이다. 일견 아주 평범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가 평생을 바쳐 사색한 결과의 요체에 다름 아니다. 이수경의 입장은 니시다의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니시다에 의하면 나는 결코 그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이 말은 나와 그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의 탄식이 될 수도 있고, 어설프게 내가 그가 될 수 있다는 착각과 교만을 갖지 말라는 경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물론 언제나 존재의 불투명함에 시달리는 개체 의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는 전체 의식 혹은 우주 의식이라는 화엄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나와 그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 사이가 비록 생활 공간적으로는 몇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게 보인다 할지라도 인식론적으로 볼 때 무량대수의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별개의 세계라고 보아도 좋다.
이수경은 이 사이의 간격을 흔쾌히 인정한다. 그리고 섣불리 이 둘 사이의 결합을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이수경만의 작가적 개성이라면 개성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철저히 ‘나는 나’일 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작업을 진행한 결과로 이제까지 펼쳐진 작품들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원래 작가라는 존재가 나와 관객이라는 타자, 혹은 나와 내가 만든 작품이라는 타자와의 부단한 소통의 공간 속에 놓여져 있다고 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합의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작업의 과정이란 이 합의를 원만하고 효과적으로 잘 도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작업의 변화는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하나의 브랜드가 완성된 것도 이를 지켜나가는 것도 타자와의 약속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수경에게는 내가 약속할 그가 없기 때문에 사적인 일기를 쓰듯 작업을 해 왔다. 물론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어(私語)를 구사하면서. 그 사어는 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철학의 작업이 있는 만큼 훌쩍 뛰어넘어 그녀에게는 ‘그는 그’라는 입장의 작업도 있다. 이수경에게 있어 ‘그’의 작업은 당연히 ‘나’와 ‘그’의 합의와 약속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처음부터 곧장 ‘그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이미 타자인 상태를 관객의 설문 조사를 통해 통계적으로 정리하여 이 결과를 조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타자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가장 멋진 조각상), 거기서 더 나아가 작품이라는 타자의 상태에서 한번 더 타자화가 진행된 도자기 파편을 모아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번역된 도자기). 대부분의 작가들이 일인칭과 삼인칭의 사이를 오가며 작업을 한다면 이수경의 경우는 일인칭은 확실하게 일인칭으로 삼인칭은 삼인칭으로, 곧 ‘나를 나에게로 그를 그에게로’ 돌려주는 작업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를 나에게로

이수경은 평면작업 <불꽃> 시리즈는 궁극의 드로잉이다. 여기서 궁극이라 한 것은 이 드로잉을 바탕으로 하여 도저히 변형된 삼인칭의 페인팅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기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페인팅보다 자기 고백적이며 일인칭에 가까운 장르이다. 재료의 물성이 약한 만큼 일반적으로 드로잉에서는 작가의 심상과 작가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틀로서 신체의 흔적들이 강하게 드러난다. 드로잉은 재료의 희박성을 벗어날 수 없지만 대신 자신의 강력한 고백의 표현에는 유효한 방법이다. 이렇듯 드로잉에는 언제나 ‘작가의 일인칭적인 주체’가 따라 다닌다. 이수경의 드로잉에도 작가의 심상과 신체의 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수경의 경우 그것들은 드러내어짐과 버려짐을 동시에 지향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의 심상과 신체의 예술적 표현보다는 그것들의 버림을 요구하는 신앙적 고백과 참회로서의 드로잉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부분의 드로잉은 공간 전체를 순간적으로 지배한다. 작가의 신체가 재료의 저항감 없이 즉발적으로 화폭의 공간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수경이 신체를 드로잉으로 실어낸다고 했다면 그 신체는 실처럼 풀어지고 늘어진 가늘고 끝없이 기다란 신체다.
우리 몸에는 수조개의 세포가 있고 그 세포 하나하나마다 전생과 이승의 업과 습이 담겨져 있다 한다. 그것들을 잘게 부수어 일렬로 세워놓고 업장을 날려 보내듯 화면 위에다 하나하나 풀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일종의 압축파일이다. 이승과 전생의 인연과 이야기가 축적되어 개체의 자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고 풀어내어 경면주사라는 물감을 써서 가느다란 선으로 그어가며 그려내어 간다. 그것들은 대개는 마치 파동을 연상시키는 선의 형태로 나오지만 때때로는 이 파동의 에너지가 군데군데 뭉쳐져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이미지는 용, 괴물, 소녀 등 일종의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 형상화된 패턴의 형식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드로잉의 행위는 개체 의식으로서의 내가 점점 소멸되어 가는 종교적인 참회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경면주사로 그린 최근의 200호짜리 대작들은 제작 기간만 하여도 몇달씩 걸린다 한다. 드로잉치고는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종교적 참회 혹은 종교적 디스플린의 시간을 선분의 형태로 늘어뜨려 이것들이 캔버스에 가득 채워져 겨우 공간이 만들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몸에서 나오는 적절한 기운을 느끼고 받아 그때마다 한줄 한줄씩 그려나간다. 그 선은 마치 주파수의 사인 코사인 웨이브를 연상시킨다. 형태가 있을 때도 있고 형태가 없이 무의미한 선의 흐름이 뜻 모를 방언(方言)처럼 펼쳐진 것도 있다.

이수경 <불꽃(Flame)> 한지에 경면 주사 196×260cm(부분) 2008

노이즈가 동원된 묵음화 작업

작가는 최근 영기문(靈氣紋)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영기문은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당초문 형태의 문양인데 최근 고고학자 강우방은 이는 고대인이 기(氣)를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수경도 여기에 동의를 하고 있으며 그녀의 화폭에도 나름대로의 영기문이 등장하고 있다. ‘기’라는 말처럼 너무나 심오하여 오히려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한 것도 없다. 좀 더 쉽게 여기서는 기를 현대적인 용어인 노이즈에 빗대어 표현해 보자.
인체의 CPU가 주변의 대상을 인식할 때 로직을 갖추고 해독할 수 있는 것은 30%밖에 안 된다고 한다. 나머지는 알고리즘이 적용 불가능한 노이즈 상태로 본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를 다 수용하려면 투명하게 로직을 갖춘 이성적인 세계뿐 아니라 더 많은 부분 어둡고 불가해한 요령부득의 노이즈의 세계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노이즈의 세계는 불가시(Invisible)의 세계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더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기의 정체는 이러한 세계에 이르는 통로가 아닐까? 이성을 갖추고 파악하려는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이러할진대 변화무쌍한 일인칭의 개체 의식의 세계는 얼마나 많은 불가해한 노이즈로 가득 차 있겠는가. 인간이 일인칭의 개체 의식에 머물 때는 더욱 불안정한 노이즈로 가득 찬 상태가 된다. 정제되지 않는 에너지가 넘치고 있으며 불가해한 것들의 포화상태인 것이다.
불안정한 노이즈는 이렇듯 불가해한 에너지의 불균형과 로직의 어긋남에서 나온다. 전하(電荷)가 넘쳐나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를 안정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방전(放電)을 시켜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노이즈를 없애는 방법으로는 상(相)이 역전된 노이즈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방법이 있다. 음장공학(音場工學)에서 말하는 일종의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이 되겠는데 소음 즉 노이즈의 파동인 정현파(正弦波/ 사인 웨이브)를 마이너스 사인 웨이브인 코사인 웨이브와 상쇄시켜 묵음화(默音化)시키는 방식이다.
이수경의 작업은 안정된 노이즈가 동원되는 일종의 묵음화 작업이다. 고대인들이 이러한 불가해한 노이즈의 존재감을 예민하게 느꼈던 바, 이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영기문을 사용한 것처럼 그녀도 파동 형식의 영기문을 구사하고 있다. 다만 그가 제목을 불꽃이라 이름 붙인 것은 기라는 것이 결국은 에너지라는 사실을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더욱 나아가 그런 노이즈의 어둠의 불가해한 업보를 자신의 방식으로 태워버리고 싶다는 비원도 들어있기 때문이리라.
불꽃이기에 그려나가면서도 뭔가가 계속 지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워지고 있는 것은 결국 개체 의식으로서의 ‘나’이다. 이쯤에서 그녀의 작업이 어정쩡한 ‘그의 세계’와의 결탁하는 대개의 작가들보다 필경에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우리가 눈치챌 수 있다. 인간은 지워나가는 작업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어지고 남는 세계가 바로 그의 세계이고 화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렇듯 그녀는 단호히 ‘나를 나에게’로 돌리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분명함으로 인해 더 넓은 ‘그의 세계’로 뛰어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이수경 <가장 멋진 조각상> FRP에 채색 190cm 2008

그를 그에게로

일본 에치고 츠마리와 한국의 안양 신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려 이를 토대로 만든 <가장 멋진 조각상>은 그의 세계에서 출발한 작업을 그에게로 돌리는 일종이 ‘퍼블릭 아트’ 작업이다. 공자, 노자, 성모마리아, 예수, 부처, 마호메트, 가네쉬 등 유교, 도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을 대표하는 성인들의 신체 부위를 각각 분리하여 해당 부위에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고르라는 설문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부위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성인상(聖人像))을 만들었다.
‘그의 세계’란 달리 말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퍼블릭(公)의 세계인 것. 궁극의 퍼블릭 아트란 이런 상태인 것. 여기서 작가의 일인칭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매우 분명하고 노이즈가 별로 없는 투명한 세계다. 타자인 그들이 더욱 많이 참가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희박해지고 노이즈는 완전히 사라진다.
주제를 성인(聖人)으로 한 것도 여기서는 그 의미가 심장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인칭인 나를 버리고 삼인칭인 그, 즉 진리의 세계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막상 예수상이나 석가상 자신들은 각각 다른 성인들과 차별화된 고유의 이콘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본의 아니게 사(私)의 형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수경은 이를 설문지 조사와 부위별 조합이라는 방식을 써서 그 사(私)의 이콘을 해체하고 개념적이나마 보다 공(公)에 가까운 새로운 형태의 이콘을 만들고자 한다. 그를 그의 세계로 보내는 데에 이들 성인들도 동참하는 기분으로. ‘번역된 도자기’ 작업은 이보다 좀 더 복잡한 알고리즘을 가진다.
도자기는 잘 깨어지게 마련이다. 도자기 가마에서 도공이 만족할 만한 완성품이 나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뭔가 흡족하지 않은 수많은 결과물들은 가마터에서 무자비하게 박살이 난다. 당연히 도자기 가마 근처에는 버려진 도자기 파편이 흔하기 마련. 도예가의 허락을 얻어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작품을 만들었다. 그 파편들이란 무엇인가. 한때는 흙이었다가 물을 만나 점성을 얻고 도공의 손을 빌어 물레 위에서 회전하며 그릇의 형태가 건조되었다가 강력한 불꽃을 만나 단단한 자기로 변했다가 실패작으로 확인되어 그만 깨어져 버려졌던 것. 그건 애초에 어떤 도예가가 만든 ‘자신을 닮은 타자’이었던 것. 또한 그것이 실패작이어서 망치로 깨어져 파편이 되었을 때는 이제는 더 이상 도예가 자신의 의지마저도 전혀 닮지 않는 완벽한 타자가 되어버린 셈. 이수경은 이를 모아 새로운 도자기를 만든다. 당연히 그 파편들이 맞을 리가 없다.
원래 도예가가 만들려고 한 도자기의 고유한 형태가 있다. 그리고 도자기가 도자기로 되기 위한 일정 부분 제한된 형태가 있다. 그 형태는 우선 물레라는 원운동의 결과인 것. 따라서 대칭성과 부드러운 곡률은 가질 수밖에 없다. 파편을 모아 다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개 이상의 깨어진 도자기 파편이 필요하고 이들 간의 짝맞추기를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일상적으로 보아오던 도자기 고유의 곡률 변화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급격한 곡률의 찌그러진 곡선의 새로운 형태의 도자기가 태어난다. 여기서 묘한 상황이 발생한다. 어긋남을 맞추는 데서 생기는 기묘한 균형감이다. 어긋남끼리 모여서 구축한 새로운 질서라고나 할까. 기존의 도자기가 갖고 있던 안정된 공간감에서는 없었던 노이즈가 파편을 이어 붙이려는 금장 에폭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이즈는 전혀 불안하지가 않다. 그리고 이 부분이 그녀가 창안한 새로운 미의 생성에 기여하고 있다. 뭔가 어긋난 것, 불확실한 것을 적극 수용하는 데서 발생되는 안정된 노이즈에서 그녀의 역량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시 그녀의 일인칭 작업인 드로잉에서 보여주었던 감각들을 방불케 한다. 원래는 노이즈가 없었던 것을 노이즈가 있는 상태로 역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노이즈는 미의 발생에 기여하는 안정된 노이즈라는 점에서.
이런 점에서 도자기 작업은 나로부터 너무나 먼 그의 세계가 나의 세계로 돌아오고 있거나 최소한 이들 사이에 소통의 통로를 열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이 점이 앞으로 그녀의 작업을 더욱 궁금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그를 그에게로’ 보내는 작업은 팝아트에서 흔히 보던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 작가들이 팝아트를 선호하고 있다. 이들보다 앞서서, 개별적이긴 하나 팝적인(팝아트가 아닌) 자세를 갖고서 작품을 먼저 한 세대가 있다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수경 세대가 될 것이다.

일인칭과 삼인칭의 떳떳한 드러냄

최근 이수경이 다루고 있는 작업의 주제들은 매우 종교적이다(<이동식 사원>을 포함하여). 그런데 종교는 처음부터 결단코 일인칭의 세계를 허용치 않는다. 종교는 항상 투명한 삼인칭의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에 불투명한 일인칭의 세계에 의지해 온 대개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개성이 무기력해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기가 쉽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종교와 예술 사이에서 맞닥뜨린 이러한 갈등을 고민하고 있다. 이수경은 특이하게 ‘그’의 작업과 ‘나’의 작업을 동시에 하는 작가다. 이럴 경우 대개의 작가들은 ‘그’의 작업을 공식적인 작업으로 표방하고 ‘나’의 작업은 숨기려 한다. 팝아트는 ‘나’라는 일인칭이 극도로 희박하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종교적인 태도의 미술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많은 대중들이 팝아트에 열광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열중하려는 흐름과 어떤 지점에서 일맥상통하다고도 할 수가 있다. 자기고백적인 일인칭 작업은 이런 흐름에서 배제되기가 쉽거니와 ‘나’의 작업이라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작가의 뒷면으로 숨겨지기가 일쑤다.
이수경은 이 둘의 작업을 동시에 그리고 떳떳하게 공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작업세계에서는 일인칭이 소실되지도 않으면서 삼인칭의 쿨함도 동시에 구현되고 있다. 이수경이 하고 있는 ‘그를 그에게로’ 보내는 새로운 작업이, 다시 말해 오늘날의 젊은 세대와는 다소 다른 모습을 띤 그녀의 팝적인 작업 방법론이 종교와 예술의 갈등에 처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한가닥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이 그녀의 작업이 우리에게 선물한 가장 큰 미덕이라고 말하고 싶다.

2008휘트니비엔날레와 관계성의 미학

엘렌 하비 <실패의 미술관:불가능한 물체와 보이지 않는 자화상 컬렉션> 혼합재료 243.9×304.8cm 2007(Courtesy 뉴욕 룩스갤러리)

2008휘트니비엔날레와 관계성의 미학

글 | 박영미·작가, art in ASIA 뉴욕 통신원

‘관계성의 미학’은 1990년대 초 유럽에서 시작된 이래, 지난 10년간 끊임없는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휘트니비엔날레로서는 이번이 최초의 시도인 만큼, ‘관계성의 미학’의 근본 개념에 대한 탐구도 미흡하고 전시 조직자들의 미학적 철학적 관점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관계성의 미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2008휘트니비엔날레는 미국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시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 문명과, 이로 인한 사회의 기계화에 저항하는 예술 작업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긴장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관계성의 미학’과 같은 개념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기도 하다. 즉 이번 휘트니비엔날레가 시도한 방향, 마음을 통한 만남과 상호협력 활동 자체를 미술 작품으로 제시한 것은 예술가와 대중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참여도도 갈수록 늘어나고 그 예술적 표현도 정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코리 맥코클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스틸사진> 비디오 2008(Courtesy 뉴욕 마카론 Inc)

오브제를 넘어서는 관계의 미술

이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는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헨리엣 훌디쉬(Henriette Huldisch)와 동 미술관 협력큐레이터이자 앨트리아 휘트니미술관 분점의 디렉터 및 큐레이터를 역임한 샤밈 모민(Sha mim M. Momin)이다. 참여 작가는 총 81명으로, 그 중 43명은 뉴욕, 29명은 로스앤젤레스와 베이 에리어, 3명은 마이애미에서 선정되었다. 지난 휘트니비엔날레가 휘트니미술관을 주된 전시장으로 삼아 진행되었다면, 이번에는 미술관 건물 이외에 파크애비뉴 아모리빌딩에서도 반 달 넘게 설치작업이 전시되고 퍼포먼스가 열렸다.
두 명의 큐레이터가 전시의 사회 교류적 요소를 중시함에 따라, 아모리 전시에는 순간적이고 참여를 유도하는 설치작품과 이벤트가 주로 유치되었다. 물론 이에 참여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휘트니미술관에도 작품을 설치하거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리고 회화 작품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전시작 대부분은 비디오나 조각, 그리고 작가들 각각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전시장에서 마무리 짓는 형식을 취했다.
큐레이터 모민은 “이번 비엔날레는 90년대 말에 유행하던 미술 용어인 ‘관계성의 미학’의 최신판”이라고 언급하면서 작가들을 선정함에 있어 이 유럽의 미술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번 비엔날레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간과된 듯 하다. 1997년 출판된 니콜라 브리오의 《관계성의 미학》은 1990년대에 미술을 대중에게로 환원시키고자 시도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명료하게 이론화시킨 책이다. 이 경향의 작가들에게 있어 미술작품의 역할은 상상이나 유토피아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미술작품이란 현실에 맞는 삶의 방식과 이에 걸 맞는 모범이 될 만한 행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바(Bar)나 독서용 라운지도 미술작품으로 전시될 수 있었다. 작가들에게 이 설치작품들은 단순한 오브제라기보다는 소통과 교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관람객 그리고 더 나아가 폭 넓은 지역 공동체와 보다 밀착된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하는 매개체로 여겨졌다. 이처럼 동일한 의식 구조를 가진 작가들 간의 사회 조직망을 매개로 한 예술 행위와 협력 등이 ‘관계성의 미학’ 개념의 중심을 이룬다.
이와 유사하게 다수의 2008휘트니비엔날레 선정 작가들은 이미 서로 알고 지내며 관계를 유지하던 사이로, 자신들의 작업실이 아닌 외부에서 공동 작업을 자주 벌여 왔다. 또한 관중들은 24시간 지속되는 댄스 마라톤이나 파자마 파티, 동물 댄스교실 등에 동참하고, 참여 작가인 에두아르도 사라비아(Edu ardo Sarabia)가 설치한 바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술을 마시면서 작가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는 작가들의 공동 작업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미술 방식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퍼포먼스나 상황주의 미술, 플럭서스 그리고 1970년대 해프닝 미술이 연관되어 있다. ‘관계성의 미학’의 새로운 점이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이나 그와 관련된 상황들에 대한 해결점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된 비즈니스 체계는 재화 획득에만 몰두하고 이에 따른 변화를 위한 또 다른 ‘변화’만을 모색함으로써 우리의 문화 생산 욕구나 그에 대한 향수를 마비시켜 왔다. 이 개념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이와 같은 세계화 및 소비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항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예술 활동을 추구한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기계화로 인해 우리가 인간적 교류와 이웃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 개념을 통해 지엽적 구체성을 강조하며 주변과 대화하고 누군가와 악수를 나누는 작은 유토피아를 창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지엽적 교류와 관련하여 전시 큐레이터 훌디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가디 스노우(Aga the Snow)가 주최하는 시식 모임이나, 베를린에 위치한 유나이티드네이션플라자(United nation plaza)라는 협력 공간의 지하실처럼, 작가들을 연결해 주는 지적 사교 모임이 곳곳에 존재한다고 한다. 큐레이터들은 이제 그러한 동일한 의식을 가진 구성원들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경험한 후, 그 모임 자체를 전시 행사로 재구성했다. 모민은 “미술이 단지 미술품이 아니라 인간관계일 때, 이를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그 이웃성(Locality)을 수용하는 것이 우리 임무의 일부이다”라고 말하면서 ‘관계성의 미학’을 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관계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미술품을 만들지 않고 관중들의 교류와 이와 연관된 아이디어나 이벤트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예술적 기준은 과정 자체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전시는 인간 관계 자체나 사회적 교류를 촉진시키는 과정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거창한 오브제는 기피하고 손수 조립된 가구와 같이 검소한 물건들을 진열한다. 관객들은 더 이상 관람자가 아니다. 즉 그들은 작가들이 사람 사이의 관계란 조율될 수 있고 자연 발생적이며 융통성 있게 열려 있다는 생각을 실현시키고자 주최한 행사의 ‘참여자’이자, 변화를 경험하는 ‘동참자’이다.
따라서 2008휘트니비엔날레의 두 큐레이터는 좀 더 새로운 버전의 ‘관계성의 미학’을 제시하기 위하여 순간성과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작품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또한 지엽성을 중요시하고 작품 선정에 있어 검소함과 순간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미카 로텐버그(Mika Rotten berg)의 허름한 외양간 같은 구조물이나, 재활용품과 같은 허름한 재료로 만들어진 제데디아 시저(Jedediah Caesar)의 조각, 새가 떨어뜨린 오물의 형상에 착안해서 제작된 찰스 롱(Charles Long)의 조각 및 발판과 의자, CD 그리고 쓰고 남은 것들을 여기 저기 흐트러 늘어 놓는 미술로 유명한 제이슨 로즈(Jason Rhoades)의 설치 작품, 산업 재료와 천연 재료를 성공적으로 배합시켜 관심을 모은 피비 워쉬번(Phoebe Washburn)의 생태계 설치작품, 검은 비닐들로 만든 로드니 맥밀런(Rodney McMillian)의 조각은 전시 의도를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준 작품들이었다.

아가디 스노우 <하나> 벽돌, 나무, 콘크리트 외 혼합재료 398.8×259.1×152.4cm 2007

미래 세계의 제시, 진정한 ‘관계성의 미학’이란

두 큐레이터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선정 작가들이 이미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게 된 경위는, 대부분 30대에 속하는 몇몇 작가들이 약 2년 전 뉴욕의 로우 이스트사이드 지역에서 시작한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9.11 테러와 제2차 걸프전쟁, 이라크전쟁,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미술에 나타난 정치적 노력의 미미한 영향력 등에 실망한 이들 작가들은 혁명을 외치는 제스처나 그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냉소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체계들은 실패했고 진보란 속임수라고 믿으면서, 이들은 보다 지엽적인 일들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아파트나 지하실로 다른 작가들을 초대해서 세미나를 열고 토론하며, 작은 규모의 전시용으로 조롱 섞인 전시 공고를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 작가들은 이러한 소규모 그룹 활동들에서 재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이것이 사회를 재창조하는 실험과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연주하고 글을 발표하거나 함께 정원도 가꾸면서 “될 대로 되라”라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엔날레 도록의 서문에서 모민과 훌디쉬는 이들 작가들이 심지어 ‘실패’라는 개념도 포용하며 이는 일부 작가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지엽적인 일로 관심을 돌리게 된 점에 대한 설명이 다소 평범하고 피상적으로 들리는 만큼, 유럽 ‘관계성의 미학’의 진정한 근본 의도와 휘트니비엔날레에 선정된 작가들이 제시하는 ‘관계성의 미학’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 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이론화시킨 브리오는, 이 개념의 의도는 미래의 세계를 제시하고 공표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브리오에게 이는 가능하다고 파악되는 세계들을 사회에 모범적으로 제시하면서, 생산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는 일종의 위성 중계지와 같은 장소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모범적인 역할이란 많은 책임이 수반되는 일이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비판적 분석적 그리고 미적인 종합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사회 교류의 가치를 참신한 시각으로 제시하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대화와 열린 마음의 고귀한 가치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작가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는 백인 참여자들에게 흑인의 펑크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펑크 레슨’이라는 일련의 참여 이벤트를 기획한 바 있다. 이 이벤트를 끝낸 후 파이퍼는 “매우 조직적이고 통제된 문화적 조건 안에서 문화적 인종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 모두 자아 초극과 창조적 표현이라는 희열에 찬 과정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미술행위가 설명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번 휘트니비엔날레의 작가들의 소극적 활동보다는 이와 같은 그룹의 공동 노력이 우리가 원하는 모범적인 미래의 세계에 보다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협력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다가올 2010휘트니비엔날레에 바라는 방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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