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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7.11

Abstract

특집 IT'S GLOCAL ART 글로컬(Glocal). 'Global'과 'Local'의 합성어로 밀레니엄을 갓 넘기면서 생겨난 용어다. 획일화와 상업화라는 글로벌리즘의 한계를 보완하며 지역 커뮤니티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세계화 전략이다. 글로컬은 오늘날 국경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필수덕목인 동시에, 최근 들어 봇물 치는 지역의 국제미술전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서울의 『플랫폼_서울』과 안양의『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7』부터『광주디자인비엔날레』『포천아시아비엔날레』『경남국제아트페어』『청주공예비엔날레』까지... 지난 달 대한민국 방방 곳곳에서는 평소엔 절대 마주칠 일 없는 지자체 관료와 국내외 미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테이프 커팅식을 거행했다. 글로컬 아트의 진풍경 속으로 성큼 다가선다.

Contents

표지 민정연 <물주기> <물주기> 2007

에디토리얼 파리에서, 마르세이유에서_김복기

 프리즘
    국제미술평론가협회 총회를 다녀와서_윤진섭
    누가 신정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_최광진

포커스
    최재은_유진상
    한국 현대사진의 풍경│한국 현대사진 10인_한금현
    이동환│최순녕│정용국_김백균
    주재환│안창홍 정복수_정무정

특별기획 IT’S GLOCAL ART
    (1) 플랫폼 서울_박만우
    (2)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7_김성원
    (3) 지역의 국제미술전_윤진섭

이미지 링크 노구치 리카

해외 취재 민정연
    경계를 넘어, 경계 속으로_김복기

암흑물질 현태준
    별난 아저씨의 수집 만화경_이선화

전시리뷰
    제48회 옥토버살롱│로니 혼│채널1│김찬일│홍순주│이혁준│박헌열
    기억의 기술│허윤희│노준·서순모│박윤영│셀위스멜│김원숙│정경심

온 사이트
    폐허의 미학, 그리고 녹색혁명_김용익

아웃 오브 코리아
    최동열_존 슈터만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이상원│안정주│정아롱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불타는 예술혼-빈센트 반 고흐展

반 고흐의 불타는 예술혼을 느끼다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 서울시립미술관 11. 24~2008. 3. 16

2007년도 마지막 블록버스터 전시의 주인공은 해바라기의 화가 ‘반 고흐’다.
1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불멸의 화가. 이번 전시는 불꽃 같이 타오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한국에서 느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노란 집> <자화상> <아이리스> 등 67점의 엄선된 작품으로 대가를 향한 미적 갈증을 잠재우자.

서울시립미술관은 올 한해 대형 기획 전시로 가득했다. <르네 마그리트전>을 시작으로, <로베르 콩바스전> <클로드 모네전>에 이어, 2007년의 마지막은 <반 고흐전>으로 장식한다.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칭송받는 반 고흐. 해바라기 화가, 태양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이 대가의 서울 방문은 오는 11월 24일 시작한다.
4개월의 대장정에 들어가는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미술관과 오텔로의 크뢸러 뮐러미술관과의 협력으로 탄생했다. 두 미술관은 전세계에 남아 있는 900여 점의 반 고흐 작품을 절반 이상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미술관으로부터 엄선한 작품은 유화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 작품 22점 등 총 67점이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은 반 고흐 미술 세계의 궤적을 좇기 위한 전시 구성 방식을 보여준다. 작품의 변화 과정을 추이할 수 있는 연대기 순의 디스플레이 방식이 그것이다. 반 고흐의 작품 세계는 통례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가난한 농민의 생활상을 담은 초기 네덜란드 시기(1880~1885), 파리 시기(1886~1888), 아를 시기(1889~1889), 셍 레미 시기(1889~1890),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79일간의 오베르 쉬르 우와즈 시기(1890). 초기 반 고흐의 화풍은 어둡고 침울했다. 그러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보여지듯이 가난에 허덕이는 농민을 화폭에 담았던 그의 작업은 이후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와 머물었던 파리 시기에 오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프랑스 남부에 체류했던 당시 반 고흐의 캔버스는 진동을 자아내는 소용돌이치는 붓터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가득했다.
반 고흐의 5대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감자 먹는 사람들>, 파리 시기의 <자화상> 아를 시기의 <해바라기> 셍 레미 시기의 <아이리스> 오베르 시기의 <의사 가셰의 초상>이다. 이 중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은 <감자 먹는 사람들> 판화 작품을 소개하며, <자화상>과 <아이리스>는 유화로 공개한다. 특히 <아이리스>는 1973년 반 고흐미술관의 개관 이래 처음으로 외부에 반출되어 전시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두 작품의 보험가액은 1천억 원에 달하며, 총 보험가액은 약 1조 4천억 원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한편, 아를 시기에 반 고흐의 아틀리에였던 일명 ‘노란 집’을 담은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고갱과 아를에 머무르며 함께 작품 활동을 했던 지난 일화, 나아가 반 고흐가 본인의 귀를 잘랐던 사건 및 그 유명한 <귀를 자른 자화상>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이 밖에, <씨 뿌리는 사람> <우체부 조셉 룰랭>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피에타>도 만날 수 있다.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역경의 세월을 보낸 반 고흐. 그의 위대한 예술혼과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사후에서야 이루어졌다. 생존 시에 단 한 점의 작품이 팔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고흐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정신병원에서 지내기도 했으며 결국은 37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반 고흐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사후 백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그러들지 않고 그를 불멸의 화가로 기억한다.
한국에 반 고흐 작품이 대규모로 소개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의 커미셔너를 맡은 서순주 총감독은 이번 전시를 “문화계의 월드컵을 유치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에 다름 아니라고 평가했다.
요즈음 블록버스터 전시가 봇물 터지듯 앞 다투어 열린다. 유명한 작품 몇 점을 앞세운 상업적 전시 홍보가 심하게 왜곡되는 경우 역시 부지기수다. 문화 향유의 가뭄을 해갈하기 위한 의도는 좋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형 전시 속 부실한 전시 기획은 씁쓸함을 남긴다. 특히 국공립미술관의 지속적인 대관 기획전은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 반 고흐 작품의 서울 나들이가 기대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블록버스터급 전시 기획의 통상적 문제점으로 볼 때 이번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상쇄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반 고흐 전시는 우선 반갑다. 그의 명성에 준하는 아우라만큼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02)724-2903
| 이선화 기자

암흑물질-현태준, 별난 아저씨의 수집 만화경

별난 아저씨의 수집 만화경

현태준 아저씨가 홍대에 ‘떴다’. 지난 9월 7일 문을 연 갤러리상상마당 개관전의 첫 초대 작가다. 전시 제목은 <국산품>전. 비주류 문화인으로 설움 받던 장난감 수집가가 미술관의 벽을 넘은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경사로운 일인가. 아저씨의 작업 세계를 빠르게 스케치한다.
글|이선화 기자

그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친숙할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이자 장난감 수집가인 현태준 아저씨(친숙한 예술가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아저씨’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만화 그리고 책 쓰고 강의하는 평범한 듯 보이는 아저씨의 일상은 그러나 그 특출난 외모만큼이나 범상치 않다는 것도 익숙할 터다. 평범치 않은 생활 속에서 만들어 낸 아저씨의 작품은 그래서 흥미롭다. 어려운 미술사적 지식을 대입해 작품을 해석하지 않아도 좋기에 일단은 감상 자체가 편하니 말이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만화로 재구성한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의 공동 저자로 아저씨를 지난 해 8월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만화가가 아닌 첫 개인전을 연 예술인 현태준 아저씨를 만났다. 대상은 동일하지만 아저씨의 다양한 직업 가운데 기자의 시선이 머문 지점이 다를 뿐이다.
“내가 국산품에 관심이 많아요.” 촌스럽지만 어딘지 ‘있어’ 보이는 전시 제목에 대한 아저씨의 변은 이러했다. 홍대 앞 KT&G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문을 연 갤러리상상마당의 개관전 첫 번째 작가로 미술계에 당당히 입성한 아저씨. 현태준 아저씨의 미적 철학이 가득한 <국산품>전 속으로 들어가 볼까.

‘짝퉁’ 장난감의 자화상

갤러리에 들어서면 먼저 실물 크기를 뛰어 넘는 만화 캐릭터 형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명 아래 광택이 주르르 흐르는 이 인형들은 불끈 주먹을 쥐고 위용있게 서 있다. 척 보아 하니 아톰, 독수리 5형제, 그리고 슈퍼맨이다.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정의로움의 대명사 아톰은 불안정한 표정에 어리숙해 보이고, 슈퍼맨은 하늘을 날기에 연로해 보이는 데다가 기름기까지 좔좔 흐르는 것이 영 믿음이 안 간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이들 캐릭터의 원산지가 일본과 미국이라는 점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자면 현태준 아저씨의 전시 타이틀은 ‘국산품’이 아니던가. 작가는 말한다. “우리나라 장난감을 10년 정도 모았죠. 대다수의 장난감은 일본과 미국의 것인데, 우리나라가 그것을 베낀 거예요. 똑같이 만들었으면 별 말이 없을 텐데, 그럴 만한 실력이 모자라니까 별종들이 탄생했어요. 기본 몸통을 만들고 머리통만 바꾸어 다른 이름의 장난감을 출시하는 형식이죠. 이 작품들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예요.”
이처럼 아저씨에게 한국산 ‘짝퉁’ 장난감은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매개물에 다름 아니다. 인형의 몸뚱이는 건장하다. 그러나 머리통의 형상은 몸뚱이와는 별개인 양 이질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한국 사회의 고도 경제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중의 정신적 문화적 향유. 아저씨의 시선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경제적 성장의 씁쓸한 뒷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아저씨는 이 ‘특별난’ 장치를 줄곧 사용한다. 손쉽게 구입할 수 있으나 동시에 손쉽게 버려지며 잊혀지는 국내산 싸구려 장난감. 이제는 주목조차 받지 않는 이 저질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현태준 아저씨에 의해 예술 작품이 되고, 아저씨는 앞서 언급한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다. 기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겉모습만 보고 아저씨의 수집 작업을 단순하게 생각했었기에.
“오~! 아저씨. 훌륭하십니다.”

“다양성을 존중해야죠”

전시장 가운데 위치한 <국산품 애용의 길>. 바닥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깔려 있다. 작품 감상에 ‘퐁당~!’ 빠지게 하고자 양 쪽에 임시 벽도 설치했다. 깔아 놓은 수집품 위에 유리로 길도 만들었다. 이름하야 ‘국산품 애용의 길’. ‘조명빨’까지 받으니 이 장난감들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다. 감상의 시작은 신발 벗기. 행여 유리라도 깨질까 걱정하면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며 감상 삼매경에 빠졌다. 저금통도 있고, 배용준이 그려진 양말도 있고, 목욕탕 푯말도 있다. 딱히 이름을 붙이기 애매한 그야말로 재미난 것들로 가득하다.
“수집품 일부의 패키지에는 실용신안특허라는 문구가 쓰여 있어요. 아이디어 상품이 상당하죠. 그런데 이것들이 금방 없어지고 있어요. 팔리지 않으니 말이죠. 나는 판에 박힌 공산품보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물건들이 좋아요. 재미있잖아요. 왜 이 수집품들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없는 거죠?”
병적일 정도로 한 대상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 구체적인 목표나 이유 없이 끊임없이 모으고 모으는 수집광. 비사회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고 한 가지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마니아라 부를 수도 있다. 수집의 대상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궁금하지 않나. 수집의 이유 말이다. 누군가는 ‘자아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이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현태준 아저씨식 ‘수집 이론학’은 어떤 것일까.
“자료를 정리하고 보관하는 성격이 강해요. 우리에겐 예전부터 내려오는 것들이 적잖아요. 자기 얼굴, 예쁜 물건이나 풍경은 찍지만, 자신의 주변 생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결국 아저씨가 수집에 열중하는 이유는 후대 사람에게 남겨주기 위함이란다. 오~! 이 얼마나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사명감인가. 타인과 비슷비슷한 취미와 비슷비슷한 옷차림, 비슷비슷한 볼거리. 이러한 정형적인 시각 볼거리에서 현태준 아저씨는 우리에게 취향의 다양성이 주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하다.

벌거벗은 허례허식

마지막 전시 감상 코스는 만화다. 아저씨의 만화는 솔직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짐짓 놀랄 수 있을 만큼 만화에 등장하는 소재는 그야말로‘저질’스럽다. <매월 18일은 바람피는 날> <대낮에 키스하여 밝은 사회 이룩하자> 등의 성적인 표현법은 물론 똥, 방귀같은 배설이라는 낯을 붉히는 소재는 기존의 코믹, 순정, 무협지 등 어느 만화 장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 민망한 것에 천착하는 아저씨. 여기에도 아저씨가 즐겨 사용하는 패러디 이론이 녹아 있다. 허례허식과 품위와 우아함으로 치장한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권위적 질서 체계를 조롱하는 것. 그러기에 이 ‘초저질’ 만화는 유쾌한 블랙코미디와 같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아저씨의 의도된 장치는 아닌 듯하지만…. 아톰과 슈퍼맨 등 인형 감상을 위해 관람자는 허리를 숙인다. 작품의 네임 택이 발 아래 붙여 있기 때문이다. <국산품 애용의 길> 역시 마찬가지다. 신발을 벗고 시선을 온통 발 아래로 집중하기 위해선 허리 굽히기가 필수다. 마지막으로 아저씨의 ‘초저질’ 만화를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기에도 허리를 반듯하게 유지하기는 힘들다. 그러기에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언니, 오빠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 아저씨, 작품뿐 아니라 작품 감상의 틀에 박힌 태도까지 변화시켜주신 건가요?
여하튼 어린 시절 가물가물했던 추억거리를 끄집어 내 주신 아저씨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허리 숙여 ‘꾸벅’~!

현태준 아저씨는 서울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광주비엔날레 특별전(1997), <사춘기 징후>(로댕갤러리, 2006) <Active Wire>(아트선재센터, 200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태준 이우일의 도쿄여행기》(시공사, 2004) 《뽈랄라 대행진》(안그라픽스, 2001)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헤이리에 장난감 박물관 ‘20세기 소년소녀관’을 열었다.

배준성, 화가의 옷

배준성

<화가의 옷>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배준성의 개인전 소식이 들린다. 11월 7일부터 25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이번 <The Museum>전에서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인 캔버스에 렌티큘러를 부착한 작품 25점과 비닐 작업 15점, 렌티큘러 3점이 함께 소개된다.

사람들이 벽에 걸린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살롱 스타일로 옹기종기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고풍스런 명화들. 유럽의 어느 미술관인 듯 보이는 친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걸려 있는 그림 중에 유독 익숙한 작품들이 보인다. 옆에서 보면 누드의 여인이, 두 발짝 지나가 다시 보면 옷 입은 여인이 나타난다. 혹은 각도에 따라 네덜란드 정물화와 현대식 주방이 번갈아 교차된다. 많이 본 듯한 이 장면. 맞다. 배준성의 <화가의 옷> 시리즈 렌티큘러(여러 장면을 하나의 화면에 압축시켜 각도에 따라 각 장면을 볼 수 있게 만든 판)가 아닌가. 그의 작업이 직접 그린 미술관 속 옛 대가의 그림 자리에 살짝 걸려 있다. 기존의 단일 작품인 렌티큘러가 일종의 ‘오브제’가 되었다.
“내 그림이 이런 미술관에 걸릴 리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직접 한번 걸어봤어요(웃음)” 사실, 이 호탕한 반응처럼 그의 신작이 쉽고 재미나게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4, 5년 간 해외 전시 때마다 그는 지역 미술관에 틈틈이 들러 다양한 자료를 모았다. 스페인의 프라도미술관, 프랑스의 구스타브모로미술관 등 그가 직접 경험한 공간을 기록하고 담아뒀다. 치밀한 것이 비단 준비 과정뿐이겠는가. 그 동안 비닐, 렌티큘러와 같은 새로운 형식에 가려져 많이 부각되지 못했지만, 배준성은 그림을 참 ‘잘 그리는’ 작가다. 그가 그려 온 화려한 의상들이 이를 확인시켜 준다. 여기서 더욱 발전하여 이번 신작 속 미술관의 풍경은 극사실에 가까운 완성도로 그려졌다. 덕분에 일단 다른 요소는 차치하고라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는 ‘그림’으로서의 재미가 가득하다.
엄격하고 꼼꼼하게 그려 나가는 과정의 고생에 대한 작가의 심술(?)일까. 항상 그의 그림은 보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처음엔 ‘비닐 들추기’ 작업으로 작품 감상의 기본 매너인 ‘손대지 마시오’를 단박에 무너뜨렸다. 이후 렌티큘러 작품 역시 이를 감상하려면 관람객들은 양 옆으로, 앞뒤로 자꾸만 움직여야 한다. 이번 새로운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배준성은 자신의 작업엔 ‘관객’의 참여보다도 ‘작가’의 참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작가이자 감상자예요. 내 그림이 완성되면 나는 제일 먼저 내 그림을 보고 느끼고 평가하죠. 그런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기획자이기도 해요. 내 그림을 새로운 공간에 걸고 새로운 전시를 만들잖아요. 이전 작업에서 현대 모델에 과거의 옷을 입혔듯, 나는 흩어진 것들,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모으고 만나게 해주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이는 작가가 ‘내 작업을 이어가는 축’이라고 말하는 바로 ‘레이어’, 바로 ‘층’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림 위에 ‘비닐’이라는 층을 덮거나, 여러 가지 장면을 한 단면에 집약시키는 렌티큘러까지, 그의 작업에서 ‘레이어’는 중요한 개념적 틀이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지금까지의 기술적 측면의 ‘레이어’를 한층 넘어선다. 작가가 그린 그림 위에 또 다른 렌티큘러 작품이 겹쳐진다. 작품의 ‘층’이 한층 복잡하고 두터워졌다.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가 겹치고, 움직임과 정지가 겹친다. 이로써 이번 신작은 다른 시공간, 흩어진 것들, 모일 수 없었던 것들이 담긴 복합적인 장면이 극대화 되었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기자는 그가 보여줄 이야기들이 너무나 무궁무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작 얘기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추후 구상 중인 작업에 대해 살짝 물어보았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있는 작품을 설명하듯 계획 단계부터 실현방법까지 좌르르 이야기가 쏟아진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의 ‘레이어’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장승연 기자

민정연, 경계를 넘어 경계 속으로

경계를 넘어, 경계 속으로

글 | 김복기 발행인

20대 젊은 작가 민정연이 유럽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파리, 뉴욕, 취리히 등지에서 매년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얻고 있다. 이미 세계적인 화상과 컬렉터들이 이 젊은 동양의 여성을 찜했다. 한국미술의 세계화 붐, 실력 있는 젊은 작가들의 국제무대 약진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신데렐라가 탄생할 것인가. 눈 밝은 국내 미술 관계자들도 민정연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다.
민정연의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성이 매력이다. 섬세한 수공 기법, 파스텔 톤의 산뜻한 색채, 밀도 있는 구성, 독자적인 형상 표현…. 화면 저 구석구석에는 단 하나의 허점 없이 화가의 손길이 촘촘히 뻗어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마치 미로 찾기 게임을 즐기듯, 숨은 그림 찾기에 몰입하듯, 화면에 올라탄 우리의 마음을 저 무한의 상상세계, 현실 너머의 초현실의 세계로 이끈다. 참으로 볼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직설적인 표현은 아주 적다. 낯설고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가 넘쳐흐른다. 자연과 현실 풍경이 뒤섞여 있고, 식물과 동물(말, 곰, 개, 낙타 등)이 사람(대부분 자화상)과 함께 등장한다. 한 화면 안에서 이항대립적인 조형 요소들이 서로 대립 충돌한다. 평면/원근, 큰 것/작은 것, 평평한 것/깊숙한 것, 구상/비구상, 그리기/칠하기, 직선/곡선이 서로 공존한다. 애매모호하고 어정쩡한 공간의 탄생. 이 역시 민정연 작품의 특징이다. 민정연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事象)의 대립 요소를 하나의 공간에 서로 묶는다. 그 이항대립항들의 조화로운 만남이 민정연 작품의 지표다.

민정연은 화석 수집광인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원시생물과 원시동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형태에 매혹되어 그림으로 옮기기도 했다. 화석의 표면은 오묘하다. 미세한 세포 이미지 같다. 시간의 퇴적 속에 잠들어버린 생명의 흔적이리라. 민정연의 즐거운 시간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5년 제2회 개인전 타이틀을 〈양수〉라 했다. 양수는 생명의 생성 공간(현재)이지만 생명이 현실로 태어나기 이전의 공간(과거)이다.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가 엉켜 있는 혼성 공간인 것이다. 2006년 제3회 개인전은 〈통로〉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민정연은 파리 하수구 박물관을 견학했다. 이 지하 세계는 길과 길을 잇는 매개 영역, 땅의 안과 밖, 외부와 내부가 교차하는 통로였다. 하수구의 거대한 파이프 관을 동물의 내장 이미지로 그렸다. 하수구야말로 도시의 내장이 아닌가. 민정연은 내장기관과 같은 생물학적 이미지, 유기적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이 내장기 같은 특이한 형상과 더불어 인간 신체의 변형이 이어진다. 2007년 개인전에서는 현실과 꿈의 중간 단계인 〈졸음〉 시리즈를 선보였다. 현실과 가상이 내파를 일으키는 현대 사회의 시뮬레이션 현상을 시사하는 것일까.
민정연이 던지는 작품 메시지에는 언제나 복선이 깔려 있다. 이명동체(異名同體)의 형상은 해석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다. 공감각 혹은 복합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야자수이자 연꽃이며, 눈알이자 항문이며 고깃덩어리이며, 인체의 내장기이자 지하 동굴의 세계, 저 카멜리온 같은 형상들은 작품의 함의를 무한 확장시킨다. 민정연 작품의 대립적 이중적 공간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삶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제 서양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의 변화가 생겼다. 경계는 허물어졌다. 이젠 온전한 한국인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히 서양인으로 동화될 수도 없다. 화가 민정연은 이 허물어진 경계를 삶의 귀중한 자산으로, 작품의 에너지로 당당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2007 November Special - It's glocal art

소통과 협업과 참여, 그리고 포스트 프로덕션

글|박만우·조선대 겸임교수

서울에서 옛 정취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북촌 지역에서 <플랫폼 서울>이라는 지역 행사를 마련해 눈길을 끌었다. 북촌 지역의 화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행사의 메인 전시로 아트선재센터와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Tomorrow>(10. 6~11. 4)전은 국내외 유명 작가들로 무장해 국제전 성격을 과시했다. 전시 부대행사로 한 달간 참여작가들의 아티스트 토크가 진행됐고, 다양한 비디오 상영회도 열렸다.

큐레이터가 전시를 기획하는 가운데 비평적 태도가 자취를 감춘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작가의 성공한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평론가의 자질은 전시기획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물론 공론화 차원의 비평 담론의 실천조차 가치중립을 내세운 객관적 사실의 기술에 머무를 뿐 자신의 논쟁적 성격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기획 행위에만 가치평가적인 임무를 떠맡기는 것도 난처한 일이다. 이제 문학비평은 사라지고 출판리뷰 만이 살아남았듯이 미술비평 대신 전시리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왜 이 작가의 작품이 당신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느냐고 물으면 비평계에서 한결같이 우수한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또 어째서 이 작가의 작업이 좋은가라는 평론가에게 던져진 질문에는 그 작가는 이미 권위 있는 주요 미술관들에서 전시를 해오고 있다는 반응에서 순환논법 그 자체가 확인된다. 이제 잘 나가는 국제적 큐레이터들이 기획한 전시 중에서도 화제 거리가 된 쇼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만을 잘 선별할 수 있다면 큐레이터십은 단지 경영 수완이 척도가 되는 조직의 프로세스만으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동시대 미술의 저변에 흐르는 내재적 전개의 논리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자기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최고급의 미술계 정보 제공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구축만이 조직 경영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이 시대의 경제는 제조업 중심의 생산 행위가 아니라 증권이나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에 의존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의 중심축이 생산에서 서비스로 옮겨감에 따라 노동의 조건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의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말하는 ‘포스트 프로덕션(post-production)'의 개념도 생산자로서의 작가에게 이러한 탈생산 또는 후기생산 시대에 적합한 위상을 요약해 준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편집, 색보정, 특수효과 등의 후반 작업을 지칭하는 포스트 프로덕션이란 용어는 샘플링, 리믹스 등의 작업을 위주로 하는 디제잉(DJ-ing)컬처로부터 동시대미술의 실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문화 영역의 실천 양상을 규정해 준다. 김선정(한예종 교수)과 데이빗 로스(전 SF MoMA 관장)가 기획한 <Tomorrow>전은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의 한 단면을 포스트 프로덕션이란 개념을 통해 작가 작업과 동시에 큐레이팅의 관점에서도 되새기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마이크로토피아와 비생산적 활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베스트를 뽑으라면 양혜규와 시마부쿠의 작업을 강력히 추천하겠다. <Tomorrow>전이 전달하려고 하는 개념적 메시지로 보나 핵심 작가들이 공유하는 미술 실천의 기본적 태도로 보나 개별 작품의 성취도가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두 작가가 스스로 채택한 전시에 개입하는 전략 역시 만만치 않다. 이번 전시는 생산에 기초한 노동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해서 소통과 협업 그리고 참여를 강조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유토피아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마이크로토피아(microtopia)의 내러티브와 그에 따른 상황 설정을 유도하는 ‘관계성의 미학’ 또는 포스트 프로덕션을 대변하는 작업들이 주류를 이룬다. 리암 길릭, 피에르 위그, 사라 모리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토비아스 레베르거 등의 호화 캐스팅이 의당 뒤따랐지만 이 전시는 전혀 이 작가들이 원래 의도하는 바를 살려내지 못했다. 이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하는 태도가 불성실했거나 아니면 전시의 컨텍스트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던 탓일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이 정도의 호화 진용에도 불구하고 연출자의 탁월한 기획 전략과는 달리 예술 전략의 부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매번 전시에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기존 작업들을 재맥락화하는 리암 길릭에게 이번 그룹전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이 지명도 높은 서구 작가들의 부실한 프레젠테이션과 대조되어 양혜규는 큐레이터의 특혜 덕분인지는 몰라도 자신만의 마이크로토피아를 설정해 보여주는 과정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비디오+블라인드+병풍+조개껍질 조각으로 이루어진 설치작품 <내일을 위한 휴일>(2007)은 올덴버그의 <베드룸 앙상블>(1963)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론 평면의 비디오 디스플레이어가 내장된 양혜규의 침대는 인조모피로 덮지 않고 MDF합판 위에 흰색으로 도장되어 있지만, 이 설치작업에는 올덴버그의 연장선상에서 다층적인 의미의 이중성과 애매성이 발견된다. 생산 이데올로기의 패러다임이 자리를 물린 지금 노동과 휴식에 대한 동시대인의 재현에서 엿보이는 이중적 의식을 독백하는 비디오 작업 <휴일 이야기>는 이 전체 설치작업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우선 형식적인 접근에서 보자면 비디오 화면 주변을 에워싸고 설치된 공중에 매달린 블라인드와 바닥에 놓인 병풍은 관람자의 시선을 적절히 차폐하고 방해한다. 작가의 육성으로 흘러나오는 비디오의 내레이션 역시 이웃한 사라 모리스의 비디오 작품의 강력한 사운드 탓에 거의 전달이 안 된다. 이 모든 오디오 충돌 상황이 디스플레이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고려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블라인드 부서>라고 명명한 설치물은 닫힌 블라인드의 일반적 의미가 근무 시간이 끝난 사무실(흰색의 사무실)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문 닫은 공구상의 알루미늄 철제 셔터(파란색의 작업장)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블라인드 위에 채색된 노랑, 빨강, 파랑의 원색의 색 띠가 알루미늄 셔터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내려진 셔터는 잠정적 휴업과 동시에 시지각 경험의 장애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의 지역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색동 띠의 알루미늄 셔터는 골목길과 같은 공공장소의 대중적 미감을 의식한 ‘저급한’ 디자인 산물이지만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리암 길릭의 설치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채색 알루미늄 바를 환기시킨다. 이는 현대미술과 건축, 디자인 대상물의 상관성 속에서 형식보다는 시간성 속의 지각을 우선시하는 토비아스 레베르거 같은 작가들이 공유하는 ‘플레이리스트(playlist)’ 작업의 속성이기도 하다. 긴 명절연휴 텅 빈 도시의 한적함은 목적 없이 방치된 카메라 앞의 비능률적이고 비생산적인 신체동작과 퍼포먼스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반면에 이국적이고 에스닉한 동남아시아 스타일의 병풍은 글로벌 문화관광산업과 노동/휴식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한다. 만약 빠졌더라면 아쉬울 뻔했던 마지막 설치 요소는 비디오 모니터 뒤에 위치한 조개껍질 조각이다. 바지락칼국수 식당이나 조개구이 포장마차에서 소비되는 바다 이미지와 해안의 낭만적 휴일의 이미지가 혼재된 이 오브제는 한 때 마이크 켈리가 주목한 ‘변두리 문화 산물’이 내포하는 의미 영역을 넘어선다. 어제의 비생산적 활동의 일부였던 여가 행위는 이제 일과 놀이의 불분명한 경계 또는 역전된 관계를 겪으면서 이 조개껍질 조각과 같은 ‘우울한 유머’의 시대 정서를 노출한다.

일 안하는 공동체와 전시 행위의 수행적 모순

시마부쿠는 전시 현장의 장소 이동성과 장소 특수성을 소재로 미술관 제도에 대한 새로운 비판적 작업을 감행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 <아트선재산의 일출>은 해 뜨는 아침 아트선재센터 옥상을 산으로 가정하고 이 정상에서 이번 전시기획 스태프와 동료 작가들을 초청하여 전문 요리사가 준비한 갈치요리를 대접한다. 바다에서 건져낸 갈치를 매개로
‘산 정상’에서 벌이는 퍼포먼스는 작가와 큐레이터들 사이의 설정 가능한 새로운 공모(complicity) 관계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어제의 독립 큐레이터들이 오늘의 주요 현대미술관들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미술관 옥상에서 갈치 몸통을 거울삼아 여명을 거리의 익명의 대중들에게 반사하는 제스처는 현대미술관의 수용자와의 매개적 기능과 더불어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작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해준다.
1970년을 전후하여 사용되었던 수퍼에이트(super-8) 8mm 카메라로 촬영되어서인지 아침 햇살만치 미약하나마 온기를 전해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 앞에선 목적 없는 모터사이클 여행을 그린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의 <이지 라이더>(1969)와 같은 영화도 생각났지만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호텔이나 카페를 운영한 퍼포먼스를 기록한 앨런 러퍼스버그(Allen Ruppersberg)와 같이 작가들을 작업실에서 벗어나게 해준 ‘반스튜디오 미학’ 또는 ‘관계성 미학’의 작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Tomorrow>전은 퍼포먼스, 비디오설치, 월 페인팅, TV방송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매혹적인 작가들의 작품으로 넘쳐난다. 그렇지만 이 작품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전시를 구축할 때 큐레이터는 일종의 포스트 프로덕션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힙합의 래퍼가 자신이 인용하는 모든 곡들에 대해 계보학과 고고학적 접근을 수행하듯이 큐레이터는 자신이 취급하는 모든 출품작들의 발생적 맥락에 대한 정치한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번 출품작 가운데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어디서나 열반으로>(2005)는 소위 탈맥락화 혹은 재맥락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원래 마드리드의 크리스탈 팔라스에서 장소특정적인 설치를 목적으로 집합된 기존의 16점의 개별적인 자신의 설치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전시의 제목 <나는 매일 죽는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이 암시하듯 여기서는 부활의 개념을 통해 현대미술 실천과 관련된 저자의 문제를 다룬다. 산업생산품의 재료인 플렉시글래스나 MDF 등을 사용하는 대상물로서 그 기능성을 유지하면서도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관람자가 획득하는 지각 경험은 적어도 주체와 객체 간의 인식론적 이분법의 해체를 맛보게 해준다. 19세기말 근대적 자본주의의 정수를 철과 유리라는 소재로 구현한 크리스탈 팔라스는 그 구조물 내부 바닥에 낮게 설치된 <어디서나 열반으로>의 플렉시 글래스 표면 위에 가변적인 자신의 문신을 남겨주었다. <Tomorrow>전 속의 <어디서나 열반으로>에선 이와 유사한 전시 장소의 건축적 구조가 반영된 디스플레이 효과를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언어소통의 화용론에서 말하듯 주장하려는 내용과 그것을 주장하는 언어소통 방식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을 ‘수행적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라고 한다. 포스트 프로덕션이란 개념을 지향하는 전시 안에서 작품들을 배치하고 진열하는 절차 도중 포스트 프로덕션 작업은 실종된다. 이는 리암 길릭의 설치작업과 피에르 위그의 비디오 설치작 <이중부정(Double Negative)>에서도 마찬가지다. 2006휘트니비엔날레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이 작업은 제목부터 대지미술가 마이클 하이저의 <이중부정>을 인용한다. 작품의 중심에 접근할수록 경험의 주체가 오히려 작품의 일부가 되는 ‘주체’ 또는 ‘저자’ 해체의 경험이 피에르 위그에겐 더 할 나위 없는 미술사 내의 참고 텍스트였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의 뮤지컬 재현에 참가한 관람객들은 이를 촬영한 비디오 작품에선 보이는 대상으로 치환된다. 아트선재센터 3층 서도호의 오브제와 얀 크리스텐슨의 월드로잉을 이웃한 지점의 고립된 블랙박스에서 상영된 위그의 이 작품은 모든 맥락적 유희와 관련된 국면들이 약화되는 아쉬움을 낳았다.
산티아고 시에라의 퍼포먼스를 연상시키는 싱가포르 작가 임자춘의 작업 역시 맹목적으로 보인다. 전시 기간 임금을 받고 고용된 퍼포머는 김홍석, 오자와 츠요시 그리고 첸 샤오시옹의 비디오설치 작품을 위한 긴 의자 위에 앉아 주로 책을 읽는다. 반면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과 2006년 베를린비엔날레의 퍼포먼스를 통해 목소리, 언어, 신체 동작 그리고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조화롭게 연출했던 티노 세갈은 이번 전시에서 댄 그레이엄과 브루스 나우만의 역사적 퍼포먼스들을 재해석해 보여준다. 관람자들이 자신들이 취하는 가변적 시점의 중요성을 자각하기에는 전시장 내의 관람 동선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 탓에 이 퍼포먼스 또한 공허해 보이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들 퍼포먼스들과는 달리 금호미술관에서 전시된 마이-투 페레(Mai-Thu Perret)의 비디오-퍼포먼스-설치작업은 ‘웰 메이드’ 설치작업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999년부터 허구적 텍스트 작업을 통해 구축하고 있는 가상의 여성공동체 ‘크리스탈 프론티어’와 맥이 닿는다. 얼핏 페르낭 레제의 아방가르드 영화 <발레 메카닉>(1925)을 떠올리는 이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 로첸코의 연인 바바라 스테바노바(Varbara Stevanova)란 인물을 중심으로 다층적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1920년대의 시대적 양식, 원래의 텍스트에 기초해서 마이-투 페레는 여성의 정치 운동으로서 장식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쓰려는 시도를 한다. 비디오 속의 의상디자인과 비디오가 상영되는 벽면을 장식한 기하학적 패턴의 벽지 모두 바바라 스테바노바의 영향 아래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결과물들이다. 구성주의와 같은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일상생활과 예술을 통합하려 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정의 실내 공간을 심미화하고 정치화시켰지만 작가가 보기에 그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은 결국 그 공간 속에 사는 여성들을 주변화시켰다는 것이다. 흑백의 무성영화가 상영되고 나면 얼마 전 작고한 작가 스티븐 파리노가 작곡하고 작가가 직접 작사하고 부른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벽지만이 남은 입방체 공간에 가득 찬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작품은 장영혜중공업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설치작품이다. 포스트 프로덕션을 개념적 틀로 하는 전시에 ‘중공업’의 참여는 제법 비장한 ‘도전적’ 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제목 <MAGISTER DIXIT>가 의미하는 바대로 권력 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적 힘의 소유자가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발화 내용은 보편적 세계 인류의 목적론적 역사 발전과는 무관한 동서양 도시 생활의 지역적 습관과 그 차이에 대한 사적인 경험의 내용들이다. 모니터 위에 ‘내뱉는’ 플래시 이미지의 텍스트들은 사운드 효과와 더불어 간혹 랩퍼의 퍼포먼스에 함의된 사회적 모럴이나 범속한 차원의 윤리적 자각 경험과의 유사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번 <Tomorrow>전에는 작품 전시 외에도 작가와의 대화나 비디오 상영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포스트 프로덕션 작업들이나 관계성의 미학을 지향하는 작품들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만이 아니라 관객과 관객들 간의 일시적인 심미적 공동체 형성을 시도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전시공간에 출품작의 자격으로 독서 라운지나 바와 같은 참여와 소통의 공간이 제시되지 않았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이 전시는 <플랫폼 서울>이라는 북촌 지역의 미술 축제의 일환으로 개최된 볼거리가 많았던 전시행사였다. 몽인아트센터의 일본 사진작가 노구치 리카의 전시, PKM갤러리에서 열린 김지원 개인전 그리고 아라리오 서울의 문틴 앤 로젠블럼의 최근 회화작품 전시 등이 행사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 전시들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빌어 언급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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