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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07.09

Abstract

특집 Hi~! Colorful DAEGU 대구 미술시장이 뜬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까지 파다하다. art는 한 여름 무더위를 뚫고 대구로 향했다. 과연 대구는 미술시장 열기로 가득했다. 특히 8월 한 달 동안 대구시립미술관 기공식, 옥션M 설립과 더불어 대구의 화단과 미술시장은 전반적으로 고무돼 있는 분위기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대구 미술시장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대구 미술시장을 이끌어 가는 화랑, 컬렉터를 소개하고, 더불어 요즘 서울과 대구 할 것 없이 국내 미술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구 출신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덧붙였다. 대구시의 캐치프레이즈 '컬러풀 대구'처럼 대구미술의 색은 참으로 다채롭다.

Contents

표지 오치균 <푸른 지붕과 꽃나무> 캔버스에 아크릴릭 60.5×60.5cm 2003
 
에디토리얼 쯩의 전쟁, 쩐의 전쟁
 
핫피플
    박래경 한국큐레이터협회 초대회장_장승연
 
프리즘
    화집 제작의 ‘저비용 고효율’ 전략_김이천
    진정 어떤 창작자이길 원하는가?_심상용
 
작가 인터뷰
    오치균, 그가 춤을 추는 이유_이선화
 
포커스
    이주요│김소라_김성원
    꽃,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마이클 웨슬리│김지혜_장동광
    이경훈│서국진│송윤주_김백균
    김범│남화연_이대범
 
특집: Hi~! Colorful DAEGU 
    (1) 뜨겁게 달아오르는 대구 미술시장을 가다_호경윤
    (2) ‘대구미술’은 있다_이성희
 
포트폴리오 인사이드 
    R(류현욱)│장숙경│하광석

이미지 링크 AES + F

 전시리뷰 
    상상충전│일기예보│강용면│-scape│윤종구│이강소
    송명진│김일권│나형민│권오상│노세환│한순자│김혜나

이슈와 진단
    광주비엔날레 개혁론에서 폐지론까지
    장석원 이영철 박만우 윤남웅 김준기 이정우 윤정현 노형석 류병학 이인범
 
아웃 오브 코리아
    홍성도_유재길
 
오광수의 현대미술 반세기 (9)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오치균, 춤추는 화가

오치균이 갤러리현대에서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이라는 주제로 대규모 개인전 (9. 6∼26)을 연다. 사북과 진달래 시리즈는 물론 뉴욕 풍경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그의 작품은 매번 경매에서 예상치 못한 파격적 낙찰가를 기록하며 세간의 화제를 낳고 있다. 미술계 최고의 블루칩 작가로 급성장한 작가 오치균을 만났다. 행복의 절정에 서 있는 그가 속시원히 털어놓는다. 왜 우리는 오치균을 주목해야 하는가. 엄숙하고 지루한 작품 이야기는 생략하고 그의 솔직한 일상을 여과 없이 공개한다.

서늘함이 감도는 작업실, 지저분한 행색에 괴팍한 성격, 그리고 말수조차 적다. 어둡고 음침한 색감에 붓도 아닌 손으로 작업하는 작가를 상상하니 이러하다. 때문에 요즘 미술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술시장에서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는 오치균을 인터뷰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설레면서도 적지 않게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수화기 상에서 들려 온 작가의 음성. 내 추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컬러링부터 심상치 않았고 그의 목소리 톤은 활기가 묻어났다. 세간의 이목을 받는 작가의 현실상을 반영하는 듯 목소리 자체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중후하다 못해 다소 어두울 것이라는 오치균이라는 작가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어둡고 침울한 화면을 뒤로 하고 물성 가득한 캔버스에서 요동치는 생명력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이내 가공의 인물이 아닌 현실 속 오치균의 실제 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부리는 작가
오치균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경쾌한 음악 소리가 귀를 찔렀다. 작업실은 어느 작가의 것보다 깨끗하고 아담했다. 설마 이렇게 단정한 곳에서 손으로 덕지덕지 물감을 발라낼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현재 옥션에서 그의 작품은 몇 억원을 호가하며 거래 중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비약적인 인기 상승에 비해 작품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현저히 낮은 오치균 작품의 공급량을 상기하며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사북의 겨울과 진달래 그림 몇 점, 한창 진행 중인 파스텔 작품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작은 물론 이전 작품까지 통틀어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져 내렸던 것은 당연했다. 인터뷰는 9월 예정인 전시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전시 제목이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입니다. 2층이 사북풍경이고, 1층이 진달래죠. 1,2층에는 신작이 들어가는데, 사북 그림이 30여 점, 진달래가 10점 정도 되요. 그리고 지하 1층에는 뉴욕시대 그림이 걸립니다. 사실 이번 전시가 회고전도 아니고 구작 중 어떤 것을 보여주면 좋을지 고심하다가, 일종의 팬 서비스 차원으로 뉴욕 시대 작품을 선택한 거예요. 그 당시가 대작들도 많고, 언뜻 보니 사람들이 뉴욕 그림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두가헌에서는 이전 사북 작품과 꽃 그림 등을 전시합니다. 아직 전시장 인테리어가 완성이 되지 않았는데, 여하튼 이번 전시가 굉장히 기대되요.”
시사회를 앞둔 영화감독은 날카로운 평가의 휘둘림을 예상하며 초긴장 상태로 여러 날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전시를 2주 정도 앞둔 오치균에게선 어떠한 두려운 기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갤러리현대가 자신의 전시에 맞추어 집을 새로 짓고 있고, 작가는 작품을 한껏 뽐낼 전시 공간이 기대된다고 할 뿐이었다.
“이전에는 불만도 많았고 화랑과도 트러블도 있었고, 박차고 나오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원하던 화상과 일하고 내가 원하던 환경이 이렇게 올지 몰랐거든요. 내 생전에 말입니다. 이전에는 못마땅한 부분이 많았었는데. 그림만 꾸준히 그리고 내 나름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니 결국 내가 소망했던 것들이 컴 트루(Come True)됐어요.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초인종 벨이 울렸다. 이번 전시에 맞추어 제작한 화집이 도착한 모양이다. 사북, 뉴욕과 서울 그리고 산타페를 각각 묶은 3권의 도록은 작가의 전 작품을 포함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중량감을 자랑했다. “이렇게 보니 내가 작품을 많이 하긴 했나 봐요”라는 그의 말에서 작가가 현재 느끼는 감회가 어떠할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오치균은 분명 지난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본인이 자비를 들여 도록을 만들었던 기억이 어찌 생각나지 않을까. 현재 그를 둘러싼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도 놀랐겠지만 지켜보는 이들 역시 그러하기는 마찬가지다. 화집 속에는 뜻밖에 소설가 김훈의 텍스트가 담겨 있었다.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가 소설가의 책 표지에 등장하는 경우는 여럿 있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흔치 않은 사례다. 오치균이 갖는 지금의 영향력이 더욱 가중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훈 선생이 작업실에 왔었죠. 손철주 씨랑 내가 인터뷰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갑자기 원고지에 부지런히 적는 거예요. 작품이 너무 좋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예술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굳이 설명을 하거나 스토리텔링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그냥 감동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믿죠. 그 분이 그런 점에서 나와 매우 비슷해요. 둘 다 지식의 껍데기가 없어요. 내가 굉장히 무식해요. 그래서 김훈 선생이 내 도록에 적은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감동을 받았죠.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거 있잖아요. 무식하지 않으면 감동이 줄어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스스로가 더욱 무식해지려고 노력한다는 오치균의 말이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흩어졌다. 작가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뉴욕 브루클린 대학에서 유학했다. 그의 이력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분명히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일회적으로 스치는 관계였다면 그를 ‘용감한 무식쟁이’ 정도로 생각했을 여지도 크다. 그러나 5시간에 이르는 인터뷰와 2차례의 미팅을 가진 짧다면 짧은 시간은 오치균이 얼마나 스마트하고 날카로운 시각을 가졌는지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지적인 면을 강조하잖아요. 이건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작업 방식이 뭐 뻔한 거고. 이런 이야기는 지겹게 나온 거잖아요”라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치균은 정형적인 제도의 틀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부리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담배를 끊고 불어난 몸을 만들어 가는 7년차 헬스 라이프는 물론 그 근육질 몸매를 돋보이고자 구입하는 옷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쏟아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의미심장한 말 역시 잊지 않고 덧붙였다.

“작가를 보호해 줘야 합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의상은 한결같이 타이트하고 화려했다. 근육에 착착 감기는 옷가지들은 오치균의 기쁨조에 다름 아니었다. 2번의 사진 촬영에서 작가는 4벌의 의상을 갈아입었다. 주객을 잠시 혼동할 정도로 적극적이던 인터뷰는 물론 의상에 대한 협조까지 그는 확실히 남다르다. 화두는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상체를 장식하고 있는 나비 문신으로 흘러갔다.
“그냥 했어요. 즉흥적이었던 거 같아요. 우선은 내가 몸이 좋아지니까 문신 생각을 하긴 했죠. 영화 <빠삐용>을 봤는데, 나비의 의미가 굉장히 좋더라고요. 자유에 대한 갈망이나 변태(變態) 등을 상징하는 거잖아요.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문신을 여러 개 하고 싶었고, 결국 나비로 통일해 버렸어요. 주위에서 나랑 나비 문신이랑 의미가 잘 들어맞는다고 하던 걸요.”
오치균은 대다수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문신을 마치 훈장인 양 자랑한다. “어디에 새겨져 있는데요”라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훌훌 웃옷을 벗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면서까지. 이처럼 여러 질문을 받아치는 작가의 대답은 거침이 없고 가끔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 촬영 내내 자신이 정한 룰만큼은 철저히 고수했다. 선글라스 착용은 스스로가 정한 최소한의 보호 정책인 모양이다.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이 싫다며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마다 “작가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연거푸 말했다. 
“가격도 너무 올라가고, 괴담도 너무 많죠. 호당 얼마가 될 거라는 등. 사람들은 작품을 내놓지도 않고, 그야말로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못 잡고 흔들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어지러울 정도로 점프가 됐지만,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갤러리현대니까 잘 컨트롤하고 있죠. 그리고 내가 마치 돈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도 안됩니다. 그걸 생각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어두침침한 그림을 그렸겠어요. 잘 팔릴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지. 그리고 내가 몇 억원에 팔라고 한 것도 아니고, 또한 투기 목적으로 내 작품을 산다고 할지라도 막을 수도 없는 문제잖아요. 옥션가 역시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관심이 너무 집중되고 억측들이 많은데 끈기를 가지고 1,2년 정도는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이번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전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오치균의 작품 가격에 주목하고 있다. 경매가가 버젓이 억대를 돌파하고 있으니, 화랑의 판매 가격이 최대의 이슈가 아닐 수 없다. “돈 문제에서 많이 벗어났어요. 그것만 생각하면 손 떨려서 작업 못하죠. 내가 작품을 직접 팔면 돈 왕창 벌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러면 안되죠. 이제는 내가 공인이 됐고 결국 거기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격문제를 둘러싼 분분한 견해에 그는 거리를 두었다. (개인전 작품은 결국 비매로 확정됐다.)

일관된 작업 태도와 열정적 제스춰
여기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오치균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 말이다. 작가는 “글쎄,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더니, 이내 젊은 작가들의 작업 방식과 비교해 그의 생각을 정리했다. 젊은 작가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그것의 지속력에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무식하게, 지독하게, 꾸준하게”를 부르짖는 오치균식 작업 논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때문에 작품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특별날 것 없는 비슷비슷한 소재의 한계를 뛰어 넘어 그를 워너비 작가로 자리매김시킨 것은 작업 태도의 일관성과 손의 열정적 제스춰가 빚은 하모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에 가면 내 스스로가 감동을 받아요. 작품이 너무 좋은 거야. 내가 이걸 그린 건가 하고요. 캔버스에 양념처럼 살짝 올라간 빨갛고 파란 색감 등이 기가 막힌 거죠. 내가 한 것 같지가 않아. 마치 누구의 힘에 이끌려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물감이 서로 엉켜 만들어 낸 색은 미리 계산할 수 없는 부분이죠. 그래서 하늘에서 시켰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웃음).”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에게 작가의 솔직함이 익숙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예상 밖의 답변은 질문자를 가슴 뛰게 한다. 곧이어 자기 표현에 적극적인 그에게 혹 퍼포먼스 같은 이벤트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냐는 질문을 던졌다. 감정기복 심하고 그림으로 먹고 사는 게 녹록치 않았던 때,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무용가라는 직업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춤추는 오치균. 온 몸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무용가라는 대답에 갑자기 웃음이 났다. 작가의 현재 상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손으로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다. 빠른 비트의 음악을 선곡해 역동적인 춤사위를 벌이는 것처럼 작가는 그의 특별 공연 무대인 캔버스에서 그가 최고로 잘 부릴 줄 아는 손으로 작품이라는 공연물을 완성 짓는다는 상상을 했다. 격렬한 제스춰와 함께 물감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고 섞임으로써 역동적인 기교의 잔재를 남기고, 그 반향은 공연 후에도 캔버스 위를 맴돌고 있지 않을까라는 공상에 잠시나마 취해 보았다.
그리곤 “내가 굉장히 이기적이야”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오치균은 작업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 몸만 가꿨지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요”라는 말이 쉬이 믿겨지지 않았다. 작업실에서 본 앙증맞은 크기의 가족사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매번 화집에 딸 진이의 얼굴 초상을 실었던 거 같다. 거칠 것 없이 시원시원하게 안료를 올리는 제작 기법, 특히 뉴욕 시기에 등장하는 거리의 인물군에서 나타나는 뭉그러진 얼굴 형상에 비하건대 진이의 것은 확실히 다르다. 넘치는 에너지와 신이 강림해 내려 주신 기운(?)과는 달리 “손톱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고생 좀 했지”라고 말하던 작가의 표정은 영락없는 아버지 모습 그 자체였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도 1호 크기의 진이 얼굴이 전시장 한 벽면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으니.
부자가 되고 싶고 거지처럼 살고 싶다
디스플레이가 완성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갤러리에서 오치균을 만났다. 공간 연출에 대한 흡족함으로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그 흥에 맞추어 사북 풍경이 걸린 2층의 그레이 톤 전시 공간에서 그레이 톤의 의상을 꺼내 입은 오치균이 춤을 추었다. 나는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우고 사진 기자는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마티에르를 상징하는 것이자 형식적인 격식을 파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짧은 헤어스타일의 작가는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었고, 그에게 오십이라는 나이는 허울뿐이라 생각했다.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림 그리는 게 잘 되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죠. 화가들이 다 그렇잖아요. 한 발짝 물러나면 그게 그렇게 목숨 걸 일도 아닌데. 그림이 잘 된다 싶으면 두려울 게 없죠. 그러다 잘 안 되면 하늘이 무너지고 앞날이 컴컴한 그런 기분 말입니다. 서울대 시절에는 환영 받지 못했어요. 시골 출신인 것도 있었고. 뻣뻣하고 불량기까지 있었으니. 칭찬도 받고 싶었는데 먹히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유학을 가자마자 날개를 달았죠. 장학금도 받고 그림을 너무 칭찬받았으니깐. 그 당시에 느꼈던 작업에 대한 깨달음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옵니다. 유학을 안 갔다면 그림을 안 그렸을 것 같아요.”
인생이라는 사이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힘든 일이 있으면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믿으면 그만이다. 꿈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두는 것이 난제일 뿐. 전시회를 부지런히 다니고 부풀어 오른 뒷담화를 전해 들으며 작가들은 다른 이를 흠모하고 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스스로에게 다짐할 것이다. 본인 이름을 내 건 미술관을 꿈꾸기도 하고 해외 유수의 비엔날레에 참여하겠다는 나름의 위시리스트를 작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치균은 생각이 다르다.
“나는 관심 없어요. 죽으면 끝이라고 봐요. 내가 현실적이예요. 내 이름을 후대에 남기는 거 역시 마찬가집니다. 국공립미술관에 내 작품이 들어가는 것도 중요치 않아요. 시립미술관 등에 내 그림 없잖아요. 그림 사겠다고 여러 번 왔었죠. 그런데 가격 문제 때문에 그만뒀어요. 내가 그런 부분에 욕심 있었다면 그냥 줬겠지 않습니까. 좋은 작품 남겨야지, 미술관에 걸리게 해야지 등등 신경 쓸 게 많으면 작업 못하죠. 마음을 비우고 자유롭게 작업해야지 결과가 좋은 거예요.”
똑같은 소재를 지독하리만치 그려도 작가의 흥은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기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의 소재도 재료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박수를 치며 자신이 생산한 작품을 칭찬해 주는 이들이 많으니 그 흥이 사라지기는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피카소의 말처럼 부자가 되고 싶지만 거지처럼 살고 싶다는 오치균. 돈은 벌고 싶지만 지나친 주목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은 그를 향한 열기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고 작가의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만 머무를 것 같다.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이것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즐거움을 줄이고 작업하는 것 밖에 없던 걸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에만 열중하겠다는 오치균의 말이 연신 스스로에게 당부하듯이 들렸다.

우먼 파워!-조숙진展 외

저물어가는 여름의 더위와 다가오는 가을의 서늘함이 공존하는 9월이 시작됐다. 여름 내내 더위에 지쳐 전시장 방문도 잠시 멈칫했었다면, 이제 더욱 푸르고 높아진 가을 하늘 아래 기지개를 펴고 감성충전에 나서볼 때다.
무더위의 열기처럼 강렬한 흡입력을 지니면서, 가을의 서정적인 감수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5명의 여성작가들의 전시가 도미노처럼 연이어 열린다. 탄탄한 기량과 경험을 토대로 한정된 형식과 매체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하는 여성 작가들의 다채로운 시각적 향연 속에 동참해 보자.
뉴욕에서 활동하는 중진작가 조숙진의 개인전 <버려진 나무와의 만남 20년-뉴욕작업> (아르코미술관 8. 31~ 9. 30)이 열린다. ‘나무 작업’으로 유명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버려진 나무 자재들을 모은 후, 얼기설기 엉켜 있는 나무 둥치 숲을 만든다. 작가가 만든 숲은 나무 자체의 재질감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 산업화로 소외되어 가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온 인간과 친근했던 재료들. 그것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회화적, 조각적 요소를 발견하면서 완전하고 숭고한 작품으로 만들어 가며 기쁨을 느낀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버려진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가의 손길을 직접 느껴 봐도 좋을 것이다.
조숙진 작가가 버려진 나무를 엮어낸다면, 폐기된 도자기 조각으로 새로운 조형미를 창조하는 이수경 작가의 전시가 비슷한 시기 개막한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수경전>(9. 7~10. 14)에서 작가는 완성되자마자 작은 결함을 이유로 파괴된 백자 조각들을 이어 붙여서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낸다. 작가는 조각 사이의 접합면에 황금빛 안료를 칠하고, 익숙한 소재들이 변형되어 내뿜는 낯선 시각적 효과를 창출한다. 각각의 조각을 이어가는 과정은 개념이 앞서는 현대미술의 특성에 맞서는 듯 수작업의 진정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강렬한 형태미를 잃지 않는다. 이번 전시는 <번역된 도자기>시리즈 20여 점과 색연필 드로잉 5점 외에, 부적을 그리거나 경문을 베낄 때 쓰는 경면주사로 그린 <불그림>시리즈 5점을  함께 선보인다.
<IXTLAN STOP>이라는 낯선 제목으로 박윤영 작가가 만들어내는 색다른 공간에 발을 디뎌 보는 것은 어떨까? 9월 11일부터 11월 4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대형 거울, 병풍, 그리고 파이프 등을 이용하여 하나의 공간을 창조한다. 이는 캐나다의 한 농장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인 픽톤(William Pickton)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살해된 여성들이 거주하는 다운타운 이스트사이드의 한 풍경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의 소설 <Journey to Ixtlan>에 등장하는,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의미하는 ‘IXTLAN’을 이번 전시의 타이틀로 정한 이유도 이와 관련된다. 작가에게 있어서 ‘IXTTLAN STOP’은 죽음의 땅으로 가기 전에 거치게 되는 상상의 공간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인간의 어떤 욕망이 배제된 자연적인 공간이자 폭력, 살인, 재앙 등이 닿지 않는 유토피아적인 스페이스를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조각과 회화의 장르를 넘나들며 기억, 소통, 언어에 대해 탐구해 온 황혜선의 10번째 개인전(이화익갤러리 9. 12~10. 2) 도 <기억의 창>이라는 제목으로 마련된다. 작가는 여성적이며 조용한 감성적 어법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현해왔다. 하지만 작은 울림 속에 보편적 감성을 두드리고 흔들어대는 작가의 작품을 단지 조용하다는 수식어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전시 제목인 ‘기억의 창’은 작가의 기억 속에 자리한 모종의 순간들이 조합된 풍경을 담고 있는 사각의 프레임을 의미한다. 전시 작품은 크게 유리 채색 드로잉, 영상작업, 크리스탈 조각 20여 점으로 구성된다. 유리 채색 드로잉과 그의 원본격인 먹 드로잉으로 구성된 <기억의 창>시리즈, 전시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영상작품 <Being There>, 그리고 <흘리지 못한 눈물>이라는 제목의 크리스탈 조각 등 다채로운 매체의 향연을 선보일 것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진 설치작가 최재은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말자. 최재은의 개인전 <루시의 시간>이 로댕갤러리에서 9월 21부터 11월 18일까지 열린다. 작가는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고, 국내에서는 <성철스님 사리탑> 제작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공예, 조각, 건축, 영상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과 도전을 통해 생명과 시간의 끊임없는 순환에 관한 작업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등의 다양한 장르의 최근작들이 소개된다. 생명과 환경에 관한 작업의 배경을 엿보게 하는 새장 설치작업을 비롯해 1991년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마라(Massai Mara)의 지하에 묻은 종이를 발굴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와 삶의 다양성을 표현한 영상물 <희로애락> 등을 선보인다.   |장승연 기자

2007 September Special - Hi~! Colorful Daegu

뜨겁게 달아오르는 대구 미술시장을 가다

최근 대구 미술시장의 활황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렌 대구미술의 역사와 더불어 화랑의 역사 또한 만만치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크고 작은 규모의 여러 화랑들이 대구미술의 유통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art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구 화랑사 40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아울러 대구 미술인들의 숙원 사업인 대구시립미술관 기공식과 옥션M 첫 번째 경매를 지면으로 소개하고, 신생 화랑들의 활약과 대구아트페어 개최 등 대구 미술시장의 앞날을 전망했다.

8월 9일 오전 10시, 대구에서는 대구시립미술관 건립 기공식이 열렸다. 그토록 염원하던 미술관 건립의 첫 삽을 뜨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바로 그 날, art 취재진은 대구미술의 열기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대구시립미술관 건립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몇 년째 계획이 수정 연기되었던 터라 대구 미술인들의 기대는 더욱 더 컸으리라.
대구는 일제강점기의 신미술 도입기부터 이인성을 위시한 걸출한 미술인들을 배출했으며, 서울 다음으로 활발한 미술문화가 뿌리를 내렸던 미술의 거점도시였다. 특히 서양화의 전통과 저력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했던 곳이다. 1960년대 이후 중앙 집중화 현상이 전개되었을 때도 대구는 1974년부터 대구현대미술제를 통해 한국 모더니즘 운동을 선도하는 힘찬 에너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던 대구가 1990년대 이후 다른 도시에 미술의 주도권을 빼앗긴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광주와 부산이 국제비엔날레 개최로 동시대 세계미술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는 행사를 펼치고 있고, 시립미술관을 개관한 지도 오래다. 이제 대전은 물론이고 웬만한 지역 자치단체에서도 미술관 시대를 맞고 있는 이즈음, 대구시립미술관의 착공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구 미술인들로서는 오랜 갈증을 해소해 주는 ‘단비’ 같은 소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미술문화에서 미술관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대구 지역의 미술관 부재는 지역 미술계의 시스템 작동과 순환에 큰 장애 요소였다. 우선 화랑으로서는 ‘뮤지엄 피스’ 작품을 팔 곳이 없으니 ‘큰 손님’이 없는 셈이다. 또한 대구의 6개 대학에서 배출되는 매년 300명 이상의 졸업생들은 적체돼 있고, 대구 출신의 명망 있는 대가들은 회고전조차 열 곳이 없다. 거시적으로 보면 대구 출신의 훌륭한 작가와 작품을 중앙이나 다른 지역에 놓치는 꼴이 되고 만다.
대구시립미술관 건립 사업은 1997년 대구미술협회를 비롯, 작가 권정호 등을 중심으로 결집된 지역 미술인들의 요구로 시작돼 1998년 건립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사업이 추진됐다. 대구시에서도 1999년부터 미술관 건립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 2005년까지 국비 53억 원을 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기공식이 성사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다. 우선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를 겪은 대구시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비상 시국’이 이어졌다. 시장이 두 번이나 바뀌었고, 건립 자금 조달 방식도 바뀌었다. 결국 2005년 민간투자 방식인 BTL사업으로 미술관 건립 계획이 확정됐고, 이 과정에서 사업자 선정, 협약 체결 등의 문제로 또 한 번 지연됐다.
중요한 것은 향후 대구시립미술관의 행정이다. 당장 미술관 건물은 해결했지만, 소장품과 인력 문제, 요컨대 미술관의 컨텐츠와 시스템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큰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립미술관은 2010년까지 40억 원 규모의 작품 구입비를 확보해 둔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0억 원으로 어떤 작품을 몇 작품이나 구입할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지역 미술인들의 작품을 기증받는 방식은 자칫 ‘향토 미술관’으로 전락하기 쉽다. 대다수의 대구 미술인들은 소장품 문제보다 미술관을 이끌어 갈 학예연구팀의 수준과 규모, 그리고 기획력 있는 전시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에 신경 썼으면 하는 여론이 강하다. 그런 만큼 관장과 학예연구사의 선임이 미술관 행정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구에도 부는 옥션, 아트페어 열풍
미술관 건립은 뒤늦었지만, 화랑가의 열기는 지역 중에서 대구가 단연 으뜸이다. 특히 근자의 미술시장 호황의 여파를 가장 직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곳이 대구다. 지금 대구에서는 옥션과 아트페어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먼저, 대구 MBC가 침체된 대구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겠다고 나섰다. 대구 MBC가 K옥션과 손을 잡고 ‘옥션M’을 설립했다. 방송사에서 옥션이라? 의아해 하는 분이 많을 테다. 대구 MBC는 본사 사옥에 갤러리, 극장 등의 문화공간을 갖추고 그동안 활발한 문화 활동을 펼쳐 왔다. 옥션M의 서영진 팀장은 “서울에 자주 출장을 다니다 보니, 중앙과 지역의 미술 열기가 확연히 달랐다. 서울 미술시장의 활기를 대구로 끌어오기 위해, K옥션과 업무를 제휴하기로 했다”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공영방송의 사회적 공신력과 대중적 인지도를 전문 미술경매 회사의 기술 지원으로 매치시켜 지역 미술의 저변 확대와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계획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항상 신중론이나 반대 여론이 일기 마련이다. 옥션M 설립을 두고 대구 미술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무슨 방송사에서 옥션을 하느냐, 결국 독점으로 운영할 테고, 소규모 화랑들은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서 팀장은 화랑마다 찾아가 “대구에는 서울 같이 대규모 화랑이 없기 때문에 시장이 성장하기 어렵다. 우리는 미술품 유통의 장만 만들겠다. 시장이 활성화돼 수익 구조가 형성되면, 지역작가를 후원하고 영세한 화랑을 키워나가는 데 힘쓰겠다”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했다. 이제는 화랑 측도 경매로 대구 미술시장이 살아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다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젊은 작가를 경매에서 띠우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옥션에 올릴 작품 조달도 쉽지는 않다. 서 팀장은 “처음에 방송국에서 일을 하니까 다른 사업처럼 도움을 많이 받겠구나 생각했는데, 모두 작품 내놓는 걸 꺼려했다. 특히 대구 컬렉터들은 한번 작품을 구입하면 다시 잘 내놓지 않는다. 첫 경매가 잘 되면 그 다음에 내놓겠다는 분들이 많았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작품 조달은 K옥션과 옥션M이 절반 정도씩을 맡았다. 옥션M은 컬렉터와 화랑의 도움으로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확보했다. 전체 경매 작품 151점 가운데 30%인 45점이 지역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옥션M은 경매에 처음 소개되는 대구 지역 작가들의 옥션 결과에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김기수 차규선 허양구 등의 젊은 작가 작품은 물론이고 원로화가 정점식이나 이명미 정태경의 작품이 과연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을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옥션이 하나의 실험무대로 떠올랐다. 원로, 중견 작가들의 작품과 젊은 인기 작가들의 작품을 동시에 옥션에 올리는 것도 옥션 회사 측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결국 서울에서 잘 팔리는 작가의 열기만 더 부추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그러나 지난 8월 28일 열렸던 옥션M의 첫 번째 경매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대성공’이었다. 예상 경매률 80%를 훨씬 웃도는 94%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경매에 나온 149점 가운데 겨우 8점만 유찰된 것이다. 총 낙찰 금액은 40억 5,000만 원. 미술시장 바람이 대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우환의 <바람과 함께>가 8억 1천만 원, 오치균의 10호 <정물>이 1억 5천만 원에 팔리면서 분위기가 고조됐고, 관심을 모았던 지역 작가 작품들도 선전했다. 경매시장에 처음 선보인 이명미의 작품은 최저 예상가, 최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정태경의 작품은 최고 예상가 이상으로 낙찰됐다. 그리고 해외 아트페어에서 이미 상품성을 인정 받은 허양구의 작품은 예상 최고가의 2배에 낙찰됐다.
경매에 이어 12월에 열릴 아트페어 ‘아트대구’에 거는 기대도 크다. 대구에서는 2002, 2003년 2회에 걸쳐 대구아트엑스포라는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맥향화랑의 김태수 대표가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맡았을 때 서울아트페어를 진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구에서 아트페어를 개최했던 것이다. 월드컵과 유니버시아드 특수에 힙 입어 행사는 꽤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대구시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광주, 부산은 비엔날레 도시니 대구는 ‘아트페어’를 특화해 외지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전략으로 대규모 문화 행사 개최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그래서 행사 장소로 낙점된 대구컨벤션센터는 대구화랑협회에 서울의 아트페어와 같은 행사 개최를 의뢰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트대구’는 아트페어 전문기획사 리아트(대표 이희수)가 진행하게 됐다. 아트대구는 엑스코와 공동 주최로 부스 비용 부담을 덜고 운영의 투명성을 위해 전 행정 인력을 운영위원회로 구성했다. 대구 지역을 포함한 국내외 50여 개 화랑들이 참여하고, 대구 작고작가 유작전, 해외 이주 작가 특별전, 신진작가 공모전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아트페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미술축제 아트대구 페스티벌을 8월 27일부터 9월 29일까지 개최한다.

대구 미술을 움직이는 힘, 화랑과 컬렉터
최근 대구 미술시장에 뜨거운 바람이 부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오래 전부터 대구에는 다른 어느 지역의 도시보다 높은 수준의 화랑이 활동했다. 대구의 화랑 수준이 높았던 것은 기본적으로 대구에 좋은 상품(작가)이 많다는 뜻이고, 또 대구에 미술을 사랑하는 소비자(컬렉터)가 다른 도시보다는 많다는 뜻이겠다. 특히 올해 여름, 갤러리M에서 열렸던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Art Lovers〉전에는 대구 시내 작가 및 화랑 관계자는 물론 언론인(권태근 김봉규 김세화 김종준 김현수 박병선 서덕수 서예란 이상훈 이태수 이하석 전경옥 조문호)과 컬렉터(권승희 김창홍 남성희 류향하 문인수 손인숙 안승국 양명욱 오창우 유수지 이경숙 이수형 정범용 정재간 최호정)의 애장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려 대구 미술애호가들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대구의 ‘큰 손’ 으로 서울까지 소문난 유명 컬렉터가 있다. 바로 안혜령 씨다. 대구의 유명한 한의원의 ‘사모님’인 그는 20여 년 동안 작품을 사 모았다. 그의 애장품 리스트에는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이강소 같은 한국 작가부터 데미안 허스트, 알렉스 카츠, 로버트 인디애나 같은 외국 유명 작가에다, 최근 주가가 오른 중국 작가의 작품까지 두루 올라 와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를 컬렉터라고만 소개할 수가 없다. 그는 올 3월에 리안갤러리를 개관, 갤러리 대표로 전격 변신했기 때문이다.
리안갤러리는 개관기념전으로 〈앤디 워홀〉전을 마련,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개관 당시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서도 작고 20주기 맞은 워홀의 전시가 대대적으로 열렸을 때라 더욱 의미가 컸다. “대구에서도 서울 못지않은 워홀의 주요 작품 60여 점을 볼 수 있다”며 대구 시민의 문화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워홀 전시에는 입장료가 3,000원임에도 총 4천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리안갤러리는 가을에 알렉스 카츠의 개인전, 고낙범과 고명근의 2인전이 연이어 열린다. 향후 3년간 주요 전시 일정이 모두 잡혀 있는 상태다. 안 대표는 오는 10월 20일, 창원 분점을 낼 예정이다. ‘천안의 아라리오갤러리’를 롤모델 삼아 메이저급 화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안 대표는 이우환 등 고가의 애장품들을 팔아 갤러리 운영에 쏟아 부었다. 신생 갤러리이지만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는 만큼, 리안갤러리가 대구 화랑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크다.
리안갤러리 외에 8월 28일 갤러리MJ(손진경 대표)가 문을 열었다. 전시 면적 200여 평의 대규모 화랑으로, 개관전은 중국작가 류츈빙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수석 큐레이터로 김옥렬 씨를 영입, 중국 작가를 중심으로 해외 작가 기획전을 열고, 지역은 물론 전국의 신진 작가를 대상으로 한 공모·기획전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2000년대 들어서 개관한 갤러리는 분도갤러리와 한기숙갤러리다. 분도갤러리는 2005년 1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P&B 아트센터 안에 문을 열었다. 대구 패션계의 유명 디자이너 박동준 씨와 분도예술기획 대표이자 중구청장을 맡고 있는 윤순영 씨가 연극 전용 소극장과 화랑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 ‘P&B 아트센터’를 공동 건립했다. 아트센터는 갤러리분도(2층) 외에, 연극 전용 극장인 떼아트르 분도(지하 1층·120석), 2,000여 점의 예술서적이 비치된 자료실(5층), 패션 부티크(1층), 작업실 및 아웃렛 매장(3∼4층), 레스토랑(6층)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복합문화공간의 아이덴티티를 살려 지난 3월에는 미술과 무용, 음악이 어우러지는 크로스오버 프로젝트 〈바람이 일다〉를 선보여 큰 관심을 끌었다. 분도갤러리의 아트 디렉터를 맡은 박소영 씨는 프랑스 유학파로 수준 높은 전시를 꾸준히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까지 분도갤러리에서는 김호득 정점식 변종곤 임현락 등 대구 작가들의 전시가 열렸다. 1년에 7~8회 정도로 전시 회수는 줄이되, 수준 높은 전시를 선보여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윤순영 박동준 박소영 ‘3명의 싱글녀’는 대구 주요 작가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2002년에 개관한 한기숙갤러리는 대구 지역 작가들, 특히 신진 작가 발굴에 톡톡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개관부터 꾸준히 열어 온 〈블루 비전〉에서 해마다 2~4명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동안 〈블루 비전〉을 통해 소개된 작가로는 윤종주 최린이 김영미 구근화 류현욱 최주영 강윤정 정종구 박헌걸 신경애 등이다. 요즘 미술시장에서 한참 추가를 올리는 이지현의 경우 개관전, 개관 5주년 기념전의 주인공으로 한기숙갤러리의 대표작가로 꼽을 수 있다. 이밖에도 이우림 전종철 정병국 이교준 등의 중진작가들이 받쳐주고 있다. 이지현 이우림 남춘모처럼 노동집약적인 작품을 좋아한다는 한 대표 역시 컬렉터 출신이지만, 이제 갤러리 운영 5년차를 접어들면서 전문 화랑주로 정착했다. 특히 최근 대구화랑협회 회장을 맡아 한 대표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한 대표는 “대구화랑협회에서 주최하는 대구아트페어가 내년 10월 개최 예정으로 사진비엔날레와 연동시켜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구는 소비도시로 유명하다. 1990년대 후반 서울 유통업체(롯데, 현대 백화점)들이 부산으로 진출하자 향토 유통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부도가 났다. 대구 역시 2000년대 초반 롯데백화점이 대구에 2개의 유통센터를 출점했고, E마트와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가 진출했다. 그러나 부산과 달리 대구의 향토 유통업체라고 할 수 있는 대구백화점과 동아쇼핑은 여전히 거뜬하다. 그만큼 대구 시내 수요량이 높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 해도 예전에 비해 대구 경제는 좋지 않다. 1970년대 섬유산업의 호황으로 지역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 대구 경제는 IMF와 섬유산업의 불황, 대형 건설업체들의 부도로 주춤거렸다. 그래서일까? 2000년대와 달리 1990년대에 대구에서 문을 연 갤러리는 많지 않다. 오히려 비영리 공간(스페이스129, 대구문화예술회관, 벽아미술관, 국립대구박물관)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미술시장 암흑기’라고 불리는 1990년대의 서울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화랑이 있었으니, 바로 갤러리신라다. 전체적으로 모던한 느낌의 갤러리 건축 스타일처럼 전시장 안을 채우는 작품들도 모던하고 미니멀하다. 홍승혜 임영균 권부문 이우환 이강소 같은 한국 작가부터 도널드 저드, 리처드 세라, 게르하르트 리히터, 니엘 또로니, 괸터 푀르그까지 갤러리의 ‘색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가들만 선별해 전시를 연다.
사실 이 작가들은 대부분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팔기 아주 어려운 작가들이다. 하지만 갤러리신라는 지난 15년 동안 ‘지방 갤러리’의 한계를 딛고 대구를 넘고, 서울을 넘어 KIAF는 물론 쾰른 등 해외 아트페어까지 참가하고 있다. 갤러리신라의 건물은 ‘ㄷ’자 구조로 이뤄져 전시장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져, 오른쪽은 대관 중심의 ‘Cube C’가 있고 가운데는 레스토랑 ‘이탈리아노 신라’가 있다. 그리고 왼쪽 건물은 기획전 전용 갤러리로 쓰인다.

대구에서 현대미술이 뿌리 내리기까지
1980년대 대구 미술계는 인공갤러리 황현욱 대표와 시공갤러리 이태 대표의 이야기로 채워야 마땅하다. (사실 이태가 운영했던 시공갤러리는 1992년에 개관했지만, 이태가 미술계에 등장한 시기를 감안하면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황현욱과 이태는 화랑 대표였지만 오히려 창작자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이 두 사람은 모두 한참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황현욱과 이태는 ‘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별난 성품 탓에, 작품 고르는 눈도 까다로웠다. 그래서 전시를 잡아 놓은 후에도 막상 작가가 가져온 작품이 눈에 차지 않으면, 가차 없이 돌려보내고 아예 전시를 취소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어깨에 힘만 주고 고압적으로 작가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작가의 입장에서 정말 작가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다. 이들은 작가들과 ‘화랑주-전속작가’의 관계를 넘어서 순수예술을 향한 서로의 멘토가 돼 주었다. 물론 전시 서문도 그들이 직접 쓰기가 일쑤였다. 다시 말하면 대구 화단에서 그들의 역할은 단순히 ‘그림만 팔아먹는’ 화랑주가 아니라,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였다.
두 화랑의 살림은 그리 넉넉지 못했다. 과거 시공갤러리에서 근무했던 이단지 씨는 “얼마 전 리안갤러리가 개관하고 그 건물을 다시 갔을 때 깜짝 놀랐다. 시공갤러리 시절, 겨울이면 갤러리 안이 너무 추워서 마치 바깥에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따뜻하다”고 회상했다. 난방비조차 여유 있게 쓸 수 없는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액자 제작부터 디스플레이까지 전시 자체의 수준은 단연 최고였다.
이들의 열정 탓에 대구 미술계는 ‘변방’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모시기 어려운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같은 대가들마저 대구의 황현욱이나 이태라면 두말 않고 OK였다. 단지 작품만 덜렁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들은 전시에 맞춰 대구에 꼭 내려와 ‘작가와의 대화’ 같은 부대행사를 가지거나, 아니면 술판을 벌여 ‘행사 밖 행사’를 가지며 지역 미술인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눴다. 그래서 대구 미술인들은 굳이 서울을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대구 안에서 예술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대구 미술계에서는 이 두 사람의 미술 열정을 존경하는 일종의 신화가 존재한다.
황현욱은 1970년대에 작가로 활동했으며, 이태 역시 후에 그 ‘무리’들과 가까웠다. 여기서 그 ‘무리’란 누구부터 누구까지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1974년에 시작했던 대구현대미술제의 주축 멤버들을 말한다. 대구 작가 황현욱 박현기 최병소 이묘춘 이향미 이명미 이강소 등은 1970년대 중반 구상 화단이 강세였던 대구 미술계에 모더니즘 미술 담론을 들여와 대구에서 새로운 ‘현대미술의 꽃’을 피웠다.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에는 6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서승원 이건용 하종현 김용익 함섭 허황 김정헌 김홍주 등 타지역 작가들이 포진해 있다. 대구현대미술제는 1979년까지 이어져 한국의 다른 지역미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구가 서울, 부산, 광주 등 다른 지역에 현대미술제를 잇달아 태동시킨 역할 모델이 된 것이다. 결국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전개에 대구현대미술제가 큰 분수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단의 중진 원로작가들 중에는 아직도 1970년대 대구미술의 힘찬 활력을 회상하는 이가 적지 않다.
대구현대미술제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 화랑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황현욱과 이태의 화랑 운영도 이 현대미술제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대구 출신의 화가 이강소는 두 번째 대구현대미술제 준비하면서 기존의 전시 장소였던 대구 계명대미술관뿐 아니라 다른 갤러리까지 연동시켜 행사를 더 확대시키려 했다. 내친 김에 이강소는 직접 리화랑을 냈다. 이강소의 부인이 대표를 맡았던 리화랑과 작가 이명미의 남편이 대표를 맡았던 수화랑은 1970년대에 대구현대미술제 개최 장소로 쓰였을 뿐 아니라 평소에는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개인전 등 좋은 전시가 많이 열인 곳이었다.
1985년에 개관한 댓갤러리는 원래 레스토랑으로 만들려던 공간을 비디오 작가 박현기의 권유로 갤러리로 바꾸었다. 그 동안 수화랑의 큐레이터를 맡았던 황현욱은 수화랑이 문을 닫자 댓갤러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황현욱은 직접 갤러리를 여는 데 이르렀다. 그게 바로 인공갤러리다. 또한 황현욱은 1988년에 서울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냈다. 이 공간에서 도널드 저드, 칼 앙드레 같은 세계적인 작가의 전시를 유치하곤 했다. 그러나 민중미술이 한참 활개를 치던 이 시기에는 도널드 저드가 한국에 와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황현욱과 선후배 사이였던 신용덕이 《공간》지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도널드 저드의 대대적인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서울 인공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대구의 인공갤러리의 활동은 점점 뜸해졌다.
이 무렵 생긴 곳이 시공갤러리다. 건축가 이현재 씨가 건축을 맡았다. 노출 콘크리트 외벽으로 규모 있는 외양을 갖춘 시공갤러리는 당시 침체됐던 대구 현대미술 분위기를 다시 끌어 올렸다. 시공갤러리는 이태가 2005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뜰 때까지 13년 동안 대구 현대미술을 주도해 온 대표적인 갤러리였다. 이태가 세상을 떠난 후, 지난 2년 동안 마치 폐가처럼 버려져 있던 갤러리를 안혜령 씨가 인수, 보수하면서 리안갤러리는 시공갤러리의 현대미술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대구의 인공갤러리는 1990년에 들어서 전시도 있다가 없다가 했는데, 1998년 그 자리를 대구현대미술가협회(당시 회장 정병국)에게 넘겨 대안공간 스페이스129로 바뀔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 셈이다. 황현욱은 2001년 서울 인공갤러리를 완전히 접고 대전으로 옮겼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황현욱이 직접 설계한 대전 비비스페이스(현재 미망인 김춘화 씨가 운영) 건립을 진행했으나 개관을 보지 못하고 2001년 암으로 타계했다.

대구 구상미술의 본거지
대구 화랑계의 특성은 대구현대미술제를 계승하는 추상미술 지향의 화랑과 양화 도입기부터 뿌리를 내린 구상미술 지향의 화랑이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다. 사실 최근 들어 대구뿐 아니라 서울 미술시장에서 환영 받는 작품이 구상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작품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따로 있다. 대구에는 봉산동 화랑가가 있다. 서울의 인사동 같이 갤러리와 표구, 골동품 집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1980년대에 ‘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성업했다가 최근에는 살짝 기운이 빠졌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15여 곳 화랑은 해마다 봉산미술제나 봉산조각아트페어 등 자체 행사를 운영하며, 열심히 화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에서 동원화랑의 손동환 대표는 봉산동의 문화거리 지정에 큰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동원화랑은 1981년에 개관, 김일해 이원희 장리규 등과 근현대 화단의 대표 작가 전시를 마련했다. 1980년 개관한 송아당화랑은 설립자였던 박춘자 여사의 뒤를 이어 딸 이정원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송아당화랑은 특히 서울에서 잘 ‘먹히는’ 구상 작가들을 이미 오래 전에 발굴해서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수동이 대표적인 작가이고, 윤병락과 이동욱이 그 뒤를 잇는다. 최근에 ‘뜬’ 이수동이나 윤병락의 경우, 서울의 갤러리와 일을 하더라도 여전히 송아당화랑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보면, 송아당화랑과 작가들 사이에는 두터운 신뢰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KIAF2007에서 극사실주의 작가 구자동을 전면에 내세워 시선을 끌었던 소헌갤러리는 곧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헌컨템포러리를 내고 유망주 영입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다. 노화랑(대표 노중기)은 화랑 규모는 작지만 최근 건축기업 홍보마케팅회사와 손을 잡고 모델하우스를 갤러리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이미 지난 7월 13일부터 화성파크드림에서 〈대구 대표화가 7인〉전을 마련했고, 앞으로 SK리더스뷰 등도 예정돼 있다. 그 밖에 봉성갤러리 신미화랑 중앙갤러리 원미갤러리 예술마당솔 민갤러리 예송갤러리 서라벌갤러리 수화랑 석갤러리 그림촌갤러리 대림당 인목갤러리 등 봉산동에 둥지를 튼 화랑들은 지역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 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
대구 화랑의 ‘맏형’은 1976년에 개관한 맥향화랑이다. 올해로 화랑 경영 32년을 맞은 김태수 대표는 구 시립도서관 부근에서 대구 최초의 기획 전문 화랑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범어동으로 확장 이전하면서 맥향공간이라는 소극장도 운영한 적이 있다. 1992년 현재의 대봉동에 자리를 잡은 뒤 지금까지 김 대표는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 맥향화랑은 해외 아트페어에 집중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지난 베이징아트페어에는 〈맥향 4인4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부스를 꾸려 이정웅 김기수 허양구 추종완의 작품으로 80% 이상의 판매율을 올렸다. 2005년 쾰른아트페어에서의 성공은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영남대 출신인 허양구가 주최 측에서 마련한 〈뉴 탤런트〉 섹션에 25명의 참여 작가 중 한 명으로 초대돼 현지 신문에 대서 특필됐고, 작품도 잘 팔렸다. 자신감을 얻은 김 대표는 이후 타이페이 등 여러 아트페어의 문을 두드렸으며, 허양구뿐만 아니라 이정웅, 김기수의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미술계 터줏대감인 만큼 그는 최근 옥션M의 설립과 더불어 이상 열풍이 불어온 대구 미술시장에 애정과 우려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특히 대구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가는 몇몇 중진 작가들의 작품 값에 대해 “오히려 작가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일”이라며 충고를 덧붙였다.
작년 11월에 서울 청담동으로 이전한 이목화랑도 맥향화랑과 같은 해에 대구에서 화랑 문을 열었다. 이목화랑의 임경식 대표는 원래 대구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던 컬렉터였다가, 39세에 화랑주로 ‘전업’했다. 이목화랑은 지난 30여 년 동안 구상 계열의 작가들을 많이 선보여 왔다. 임 대표는 2000년부터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맡아, 2002년 KIAF를 창설시킨 장본이기도 하다. 이목화랑은 비록 대구를 떠났지만, 서울에서 ‘제2의 도약’을 꿈꾸며 박경호 김혜영 이혜인 등의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미술시장의 역할과 과제
두 화랑보다 5년 먼저 생긴 화랑이 있다. 바로 1971년 대구백화점 본점 4층에 처음 마련된 대구백화점화랑이다. 바로 지금의 대백프라자갤러리의 전신이다. 개관 당시 이렇다 할 전문화랑이 없던 대구에 60평 규모의 전시관을 운영했고, 화랑 한편을 경북 미협 사무실로 내준 대구백화점화랑은 대구 미술계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가 극명하게 분리돼 있는 대구 화랑업계에서 유일하게 장르의 경계 없이 모든 대구 미술인들의 교집합 영역을 맡고 있다. 현재 대백프라자의 김태곤 큐레이터는 10여 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면서, 대구 화단의 ‘복덕방’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책장에는 대구미술 관련 기사 스크랩북과 귀중한 미술자료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갤러리 사무실이 마치 ‘대구미술자료실’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대구백화점의 구정모 대표가 이름난 컬렉터이기 때문에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전시를 연다는 것은 단지 전시 개최에만 그치지 않고, 일부 작품은 소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미술관’ 역할까지 떠맡고 있는 것이다.
대구의 화랑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 전문 화랑들이 그동안 상업 목적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미술관 역할까지 수행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랑이 미술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열악한 지역의 미술문화를 가꾸는 일까지 떠맡은 셈이다. 이제 대구 미술인들의 염원인 미술관 건립에 첫 삽을 뜨게 됐으니, 화랑 대표들의 어깨가 좀 가벼워졌을 것이다. 대구 미술시장의 과제도 만만치 않다. 옥션과 아트페어 도입 등 단순히 ‘서울 따라하기’식으로는 곤란하다. 갑작스런 미술시장 붐으로 밀려들어오는 거대 자본 논리에 어떻게 대응할지 묘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대구 미술시장만의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면, 자칫 대구 컬렉터들을 서울 미술시장에 몽땅 빼앗겨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KTX가 생기고 나서  대구 사람들은 웬만하면 큰 병원은 서울로 다닌다는 말이 들릴 정도니 말이다.
또한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대구에는 현재 구상 쪽으로만 시장 논리가 강하게 치우쳐 있다. 작품 양식을 다양화하는 것은 화랑의 과제이자 작가 스스로의 과제이기도 하다. 구상과 소위 대구에서 ‘현대미술’이라고 말하는 비구상의 경계를 작가들이 작품으로써 허물어내야 한다. 대구에는 좋은 작가들이 많은 만큼, 이를 극복해 낼 역량이 충분하다고 본다.
그에 비해 대구는 큐레이터나 미술평론가 등 이론가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 동안 대구 지역 평론가로 활동해 온 권원순 박남희 신용덕 장미진 김영동 등이 있지만, 대구 미술의 현장을 지키며 새로운 미술 담론을 만들어가는 독립큐레이터의 인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대구 미술의 ‘밝은 미래’는 결국, 대구만의 것 그리고 새로운 ‘사람’에 달려 있다.

한국큐레이터협회 초대회장 박래경

‘큐레이터’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참 많이 들렸던 이번 여름이다. 신정아 씨의 학력위조 사건으로 한동안 언론이 떠들썩했다. 뒤이어 각 매체들은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설명하는 갖가지 기사로 가득 찼다. 덕분에 우아하고 고상한 이미지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현실적인 단면이 수차례 기사화되기도 했다. 이쯤이면 큐레이터가 어떤 직업인지 익숙할 만도 한데 여전히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큐레이터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나요?” 문화에 대한 갈증은 점점 커지고, 수준 높은 미술전시를 찾는 관람객이 늘어가는 이 시점에 큐레이터의 직업적 정체성이 여전히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큐레이터 계의 불필요한 기포를 제거해야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 수집과 조사 연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학예전문 인력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문화생산자이자 미술계의 중요한 ‘권력’을 지닌 존재다.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로서 현실을 관통하는 중요한 담론을 생산할 힘을 가지니 말이다. 1969년 덕수궁에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한 지 38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에 국·공·사립을 통틀어 80여 개의 미술관(국립 1, 공립 17, 사립 62)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근무하는 아직까지도 그 구체적인 인원이 공식 집계되지 못한 다수의 전문 인력들과 사설 갤러리에서 일하는 인력까지 포함하면,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단 사람들의 수는 더욱 방대해진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큐레이터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이들의 현황을 파악하고 교류 및 연대를 도모할 공식적인 단체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8월에 분명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드디어 한국 큐레이터의 직업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연대를 모색할 공식적인 첫 걸음이 본격화됐다.
지난 8월 18일 한국큐레이터협회(KAMCA: Korean Art Museum Curators Association)가 아르코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협회 제1대 회장은 박래경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선출됐다. 박래경 회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학예직이 신설됐던 1986년부터 5년간 학예관으로 근무했고, 이후 1996년까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던 ‘한국 1세대 큐레이터’다. 부회장은 장동광(독립큐레이터, 전 서울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박천남(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선출되어 협회를 이끌 첫 번째 사령탑이 구성됐다.
한국큐레이터협회의 시발점은 2000년 6월 창립된 <한국큐레이터포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큐레이터들의 본격적인 연대를 추구한 이 모임은 공식적인 활동이 미미한 상황에서 몇 년 후 해체됐다. 하지만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2006년 11월 협회창립 기초발의가 본격화된 후, 2007년 6월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지난 8월 출범의 결실을 맺었다. 그 사이 신정아 사건이 터지고 큐레이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증폭된 분위기니, 시작부터 협회의 어깨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궁금증은 바로 해소해야 하는 법. 협회 측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듣고 싶어 박래경 회장을 만났다. “유리그릇을 만들 때 기포가 생기면 그 그릇은 못쓰게 됩니다. 우선 큐레이터 계에서 불필요한 기포를 제거해야 합니다. 최근 벌어진 사건으로 큐레이터에 대한 부정적 얘기가 오가는 것이 우려되지만, 그만큼 전문가로서 큐레이터의 제 역할을 모색하는 일을 더 이상 늦출 순 없어요. 이제 전국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의 직업관과 윤리의식을 제도화해야 하고, 직업적 위상을 확립할 시기입니다.” 박 회장은 협회 창립의 의미를 거듭 강조하며 운을 띄웠다.
박회장이 전한 구체적인 사업 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큐레이터십의 방법론적 비전, 미술관 제도의 전문성과 운영 쇄신을 위한 정책적 학문적 연구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한 미술관 전문 인력의 위상을 정립하고 자질 향상을 위한 재교육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국제 미술관 관련 단체와의 협력 및 학술교류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올해 안에 국내 큐레이터의 현 현황을 정리하고, 그간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해 고찰해온 문제 등을 정리한 연구서를 발간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다. 연구서는 학회지의 학술적인 성격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며 ‘학회’가 아닌 ‘협회’의 입장을 명확히 할 생각이다. 또한 연구서 발행과 함께 세미나도 개최할 계획이다. 듣고 보니 ‘아직 큐레이터 계에 이러한 기초적 기반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것인가’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시작할 때라 하지 않던가. 현재 상황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정하고 개선하고자 팔을 걷어 부친 협회진의 행보에 믿음을 실어야 한다. 거창한 포부보다는 실질적인 계획의 설계를 제시하는 데에 신뢰가 가게 마련이다.

큐레이터협회의 지향점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협회의 문은 활짝 열린 상태가 아니다. 회원 수칙에 따르면, 국·공립 미술관 및 문화관광부 등록 미술관에서 5년 이상 근무한 큐레이터 경력자는 정회원, 3년 이하의 경력자는 준회원 가입이 가능하다. 기준이 나름 까다롭다 보니, 창립대회일 기준 정회원 가입자가 총 24명에 지나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이와 같은 회원 자격 설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국·공립 기관을 먼저 내세우기 때문에 갤러리에서 근무하는 큐레이터들이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근무처를 기준으로 한 회원자격 결정이 또 다른 권력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부정적인 견해가 생길만하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국·공립미술관과 상업 화랑의 큐레이터는 업무 성격 자체가 다르고,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 등의 용어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고 있는 자체가 문제라는 근본적인 지적 또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박회장에게 이 문제에 대한 협회의 생각을 물었다. 현재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미술관 큐레이터로 협회를 시작하지만, 추후 정확한 현황 파악 및 정리가 완료되면 이에 걸맞은 회원 범위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 한다. 흥미로운 점은 큐레이터과 전공 학생들도 이후 협회에 참여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해 볼 계획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한국 미술계를 짊어질 예비 큐레이터들을 관리하려는 협회의 미래 지향적 시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분명 협회는 닫힌 공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 도중, 박회장은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큐레이터는 자신을 더 드러내고 강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어요. 하지만 분명 공적인 일이므로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관의 공익성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렇기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과정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후배들을 향한 원로 큐레이터의 진심어린 충고가 한편으로, 막 시작된 협회를 향한 정언(正言)으로 들리는 것은 단지 기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시작의 의미를 재차 되돌아보며 나아가는 그런 협회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  | 장승연 기자

박래경 1935년 대구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뮌헨대학 미술사학과 수학. 수도여자사범대 교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화교류연구회 대표이자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믹스앤매치-시인 함성호와 강정


예술을 바라보는 두 시인의 불온한 시각

함성호 vs. 강정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인은 자기의 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걸어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다시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하여 세계를 환하게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함성호와 강정. 가끔은 전시도 하고, 집도 짓고, 공연도 하는 그들은 조금은 시인답지 않은 시인들이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본다. 지상의 사람들이 참고해 세상을 밝힐 만한 얘기가 조금은 친절하게 오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고.


문학과 지성사 주최로 모이는 예술가들의 술자리였다. 시인 함성호가 군인이던 문학청년 강정을 만난 것이. 때가 1995년.
그렇게 ‘술 잘 사주는 형님’과 ‘스물 두 살에 등단한 군인’으로 만나 지금껏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것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강정은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문화비평집을 내고 밴드활동을 한다. 최근에 발행한 문화비평집 《나쁜 취향》의 호평으로 대중적 인기도 상당하다. 함성호는 미술평론도 종종 하고, 사루비아다방에서 전시도 한 바 있는 미술판 사람이다. 비록 직함이 건축가 및 시인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불만카페〉전을 열었다. “예술가에게 불만 있으신 분?” 이 불만카페의 모토였다. 함성호는 그가 설계한 9채의 건물 중 지어진 7채의 건물과 공사 중인 건물 2채에 대한 불만을 듣는 장을 마련했다. 강정 성기완 심보선 함성호의 만남을 통해 이 시대 문화의 혼종성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이 전시를 통해서였다.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는 두 사람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조금은 불온한 시각으로, 약간은 나쁜 취향으로.


지금 문화에 불만 있습니다
강정(이하 강) 부산 다녀오셨다면요?
함성호(이하 함) 응. 지금 집 짓고 있는 게 있어서. KTX 타고 오는데 옆자리에 대학교수 같아 보이는 양반들이 비보이(B-boy) 얘기를 하는 거야. 그게 부산대에서 열리는 토론 주제인가 보더라구. 옆에서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들었는데, 비보이가 처음에 는 저항성이라든가 불온성에서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그것들마저 소비해버렸다는 걸 지적하더라고.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걸 소비하게 한다”는 거야. 얘기를 듣다 보니 의문이 들어. 우리 나라 비보이가 뭘 저항하나 하고. 그 애들은 저항한다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집에서 공부 안하고 춤추러 다닌다고 구박받는 정도지, 미국의 흑인들처럼 인종차별이나, 사회차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강 힙합도 그렇고, 락음악도 그렇죠. 1980년대에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1990년대에 락음악 얘기하면서 저항 얘기하고 그랬었잖아요? 그런 게 저항을 했든 뭘 했든 상품화가 돼버렸잖아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묘하게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소위 대중문화라는 것을 지식체계로 가져오면서, 여기에 의미부여를 하니까 허구적이 되는 거죠. 우리 나라에서 그런 식의 저항이 있었던 적도 없고,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건데, 그걸 담론체계로 끌어들이려니까, 거기서부터는 더 이상 자유도 저항도 없고, 그것 자체가 테마가 돼 버리는 거예요.
함 소설을 쓰고 있는 거지(웃음).
강 있지도 않은 것에 의미 부여를 하고, 문화를 움직이는 힘이 지식인에게 부여돼 있어서, 대학교수들이 비보이에 대해 얘기하는 게 코미디인거야(웃음).
함 한 때 유명한 경구가 있잖아.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의심하는 게  ‘한국적이지 않아도 세계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세계적인 것은 한국적인 게 아니지 않나’라는 거 지. 그런 반론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언제 한국적인 것을 정의 한 번 한 적이 있었냐는 거야. 뭘 가지고 한국적이라고 그러는지에 대한 아카이브도 없이, 그냥 담론만 무성해.
강 그러니까 문화라는 것을 독자적으로 인정을 못하는 것 같아요. 국가 사업의 하위 개념으로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을 국위선양에 맞춰버리고. 인디밴드였던 크라잉넛이 외국 가서 인기를 얻고 오면 걔네들은 이제 애국자가 되는 거야(웃음).
함 비보이도 상 받아오면 그렇고, 영화도 마찬가지고. 미술에서 ‘모더니즘에 반대한다’는 게 있고, 건축에서는 이제 막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단계인데, 이상하게 우리 문화 전반에는 그런 근본적인 진단들 있지, ‘모더니즘이란 과연 뭘까, 극복을 해야 되나. 그리고 이게 우리에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하는 판단들은 없는 것 같아
강 서구 이론이나 개념들이 우리 나라에서 뒤죽박죽으로 혼용돼서 쓰이잖아요. 문학에서 말하는 모더니즘 다르고, 미술에서 말하는 모더니즘 다르고 다 다르니까, 그 개념들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는데, 문학 같은 경우는 모더니즘하면 이미지 정치 얘기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근대라는 개념조차 우리 나라엔 제대로 정립이 안됐었잖아요.
함 사실 담론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소스가 있어야 되는 건데, 소스도 없이 유행만 되는 것 같아.
강 트렌드라는 것도 제대로 힘만 발휘하면 굉장히 엄청난 파장이 이는 건데, 그것도 무슨 도마뱀 꼬리같이 붙잡히면 잘려져 버리니까.
함 <불만카페> 할 때, 내가 써놓은 취지문을 보고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모더니즘에 반해서 무엇을 한다’ 이러니까, 이거 너무 불친절하다는 거지.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뭐냐’ 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 다음 그것에 반대를 해서 사람들한테 알려야 되는데, 이게 뭐냐라는 거야. 그래서 모더니즘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니까 서로 또 틀려.
강 네. 그러니까 다들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죠. 자기들이 읽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 들이 있으니까, 처음 발언 지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어야 성립이 되는데, 각자 방향에서 나와서 난투를 벌이니까, 결론이 안나와서 싸움이 되는 것 같고.
함 우리가 소통이 안 된다고. 미술도 소통이 안 되고, 문학도 소통이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결국은 아주 기본적인 언어들이 부재해서야.
강 그 소통이라는 것도 누구랑 어떻게 소통하느냐도 정리가 안 돼 있고, 막연히 어떤 대중과 아티스트들이 거리가 있다는 생각들이 진짜로 그렇게 돼 버렸잖아요. 아예 그런 바탕이 없으니까 소위 말하는 대중들은 ‘예술가는 너무 어렵다’라는 편견을 가져버리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관습화된 것에 딱 갇히는 거죠. 그러니까 대중과 쉽게 다가가려면, 뭘 쉽게 다가가야 될지, 작가도 모르는 거예요(웃음). 나한텐 이게 쉬운 것이고, 확실한 건데, 그걸 어떻게 쉽게 하느냐. 누구에게 맞춰서 쉽게 하느냐. 그런 게 없죠. 대중이라는 말이 정말 대중 없어서 나온 말 같아요.

나쁜 취향
함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앞에서 얘기한 소스에 대한 정확한 정의,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의 해석들, 이런 것들을 정의하지 않고도 예술은 통할 수 있지.
강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가령,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데, 시를 안 읽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어렵다, 이해할 수 없다, 뭐 이런 것들이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이제 유통 구조상 어느 한 구멍을 틀어막고 있는거고, 그것들을 조성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나 이런 것들의 문제고, 돈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워낙 순환 구조들이 여기로 가다보면 여기는 막히는 게 있고, 뚫리는 게 있고, 복잡다단하잖아요. 이제 그런 것들을 일방회로로 만들어버렸으니 시가 안 읽히게 되는 거고.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크다고 봐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아, 이거 모르겠어!’라고 하는 것도 당연한 거고, ‘이거 싫어’ ‘이거 좋아’ 충분히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고, 예술을 선택하거나, 즐기거나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런 취향이 있으니까.
함 취향을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항상 불온성이 있는 것들이더라고.
강 형이 생각한 불온성이라는건 뭐예요?
함 천대받고 핍박받는 거지. 사회적으로. 나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것은 불온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 봐. 말하자면 누가 정말 한 획을 긋고, 다른 세계를 열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새로운 것에 불온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낡은 것에도 불온성이 있을 수 있거든? 말하자면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하던 짓이라든가, 나 어렸을 때 만화방이라든가, 자라면서 주류적인 제도가 만들어내는 미래가 있잖아. 제도가 가르쳐 주는 미래. 그 미래와, 애를 막 쓰는 데도 도저히 섞일 수 없어서 삐져 나가는 사람들, 그런 문화들.
강 중 고등학교 때 밴드하러 다닌다고, 기타 배우고, 껄렁껄렁하게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담배 피고, 그런 애들이 나중에 뮤지션 되잖아요. 보통 그런 경우는 사회나 제도적인 명령에서 이탈하는 경우인데, 불온하면서도 이 세상에 역설적으로 드러나는거죠. 얼마나 가짜고 허구인가. 그런 것들이 역설적으로 거기서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온한게 그거라고 생각을 해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들일 텐데, 안에 있는 걸 툭 내놓으니까 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 존재 자체가 불온해지는 거잖아요.
함 앤디 워홀도 불온성이 있다고 봐. 키스 헤링도 그렇고. 음악은 잘 모르지만 톰 웨이츠도 불온성이 있을 거라고. 그런 불온성들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마치 옷감에 물 빠지듯이 쭉 빠져버린 게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 요즘 우리 나라의 시들을 봐도 분명히 불온성이 있는 시들이 있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불온해지는가’라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아. 어떤 단어를 쓰고, 어떻게 조합을 해야지 이게 불온하게 보이는가라는 것들을 몰라야 되는데,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쓰는 시들이 있어. 그런 거 보면 “어우, 이건 가짜다” 싶지.
강 서태지 같은 경우가 약간 그런 거고, 나는 여성 시인들이 쓴 시를 보면 그런 걸 느껴요. 남자들이 따라 갈 수 없는 강박인 거고, 엄청난 차이가 느껴지는 거죠. 그게 굉장히 부러울 때가 있어요. 남자가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뻔한 것들이거든요.
함 나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 틀어. 여성은 한달에 한 번씩 피를 보잖아. 남자가 피 보는 경우는 남하고 싸우거나, 자해를 하거나 해서 피를 보는 일이 드문데, 여성은 어떤 생리적 주기에 의해서 피를 계속 본단 말이야. 여성의 그 피에 난 어떤 잔인함 같은 것을 느끼거든. ‘어쩔 수 없이 잔인해지겠구나. 이 사람들은.’ 하는 생각도 들고.

불안스런 것들
강 만약에 여자만 세상에 있다면 전쟁이 없을 것 같아요. 피가 자연 생성이 되니까. 그런데 남자는 피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래서 전쟁하고.
함 난 아주 여성적인 시는 잔인하고 잔인하기 때문 에 불온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래서 여성시를 꽤 많이 읽었는데, 이 여성의 언어도 어떻게 보면 주류 언어, 남성의 언어에 의해서 자기의 언어를 못 찾는, 그리고 남성의 언어로 편입이 되는 것 같아.
강 이번에 있던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에 대해서 이상하게 느낌이 쏠리는데, 피해자나 가해자의 동정은 둘째 문제고, 화약 냄새 진동하고, 아수라장이 된 그 곳에 내가 있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삐딱한 방식이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터지는 순간이었고, 걔를 미화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성이고 불온성인데, 그게 굉장히 극단적인 방법으로, 안 좋게 표현이 된 것 같아요.
함 짐 모리스나 반 고흐 같은 사람들은 그 불온성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통로를 찾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표현이 안됐지만, 조승희 같은 경우에는 통로를 못 찾았지. 나는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예술이라는 건 통로를 열어주는 거다(웃음). 이렇게 손으로 몇 십 명을 쏘아 죽이면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통로를 마련해서 터트리게 하는 것.
강 자기 동영상하고 사진을 찍어서 언론사에 보내고 한 걸 보면, 결국은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였던 거죠. 콜롬바인고등학교 총기난사사건을 구스 반산트가 〈엘리펀트〉라는 영화로 만들었잖아요. 그걸 인터넷에서 오늘 봤어요. 영화가 너무 평화로워요. 아무 표정 없이 게임하듯이 사람을 죽여요. 제목이 왜 〈엘리펀트〉인가 하고, 검색을 해 봤더니, ‘장님 코끼리 만진다’ 그러잖아. 그런 것처럼 언론플레이에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없어지고, 계속 엉뚱한 얘기들이 붙여져서 소설이 나오는 걸 비꼰 거래요. 콜롬비아 사건 같은 경우에는 걔네가 왜 그랬는지 아직 사건 규명이 안됐다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 영화 는 이유 따지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그림만 보여줘요. 수다 떨고 평화롭던 애들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거야. 그런 돌발적인 것들인데, 내가 만약 저 상태면 저렇게 무표정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거예요. 진공상태에 들어가 있는 거잖아요. 진공상태에선 피를 봐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예술도 격정적인 상태가 지나면 굉장히 무심해지잖아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들도 있고. 피카소의 말년에 낙서 같은 그림도 약간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예술도 사람들한테 보여지는 통로들이 일방적으로 닫혔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예전에는 젊은애들 보면서 왜 저렇게 멍청하냐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에는 그냥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게 돼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기성세대가 되어버리는 거죠. 애들이 마냥 귀여운 거예요.
함 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아. 처음엔 젊은 애들한테 막 밀어붙였었는데, 어떻게 보면 표면상으로는 돌아간 것 같은. “자. 이제부터 내가하는 얘기 잘 들어”하는 식 있잖아(웃음). 그게 일상적인 태도에도 반영돼서 요즘 시를 재정의하고 있는 것 같아. 아까도 얘기했지만 기본적인 소스들 있잖아. 이것을 다시 정의하려고 하는 욕망들. <불만카페>전 시를 했던 것도, 무슨 완성품을 보여 주냐. 그런 거 하지 말고 예술이라는 것은 만든 것보다 과정에 있는 거라는 거 보여주려던 거고.
강 나도 그것에 굉장히 동조를 했거든요. 주변에 너무 장인정신이 투철한 인간이 많아서 짜증이 나요(웃음). 앨범 녹음을 하나 하는데도, 그렇게 닦달을 하더라고요. 자기 만족 때문에 그럴 테지만, 결국 자기 만족도 못하고 피폐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결국 예술도 놀자고 하는 짓인데.

너무 아름다운 병
함 근대의 체제 안에서는 독자적으로 살아가야 되고, 불특정 다수에게 팔아 먹어야 되니까 생긴 관례, 습성 같은 게 아닌가 싶어. 내가 그 과정을 보여준다는 건 다시 그런 모더니즘의 체계, 나는 모더니즘을 미학적으로 정의하는 것보다 사실 사회적으로 정의하는 측면인데, 그런 모더니즘의 틀을 깨고자 하는 거. 그냥 일회성. 뚜두두둑해서 딱 끝내고. 완벽한 것 보다는 그냥 대충. 우리가 여행했을 때 얻는 ‘후 루꾸’(웃음). 후루꾸가 어떤가. 그 어떤 진정성만 남 겨 있으면 되지 않나. 그걸로 사기 치려 하지 않고.
강 형은 후루꾸보다는 후까시(웃음). 그 상황 상황에 폼을 잡는 거겠죠. 그리고 완결된 건 없는 거죠. 시도 마찬가지고. 결코 완성될 수 없으니까 계속 시를 쓰는 것이고, 그럴 듯하니까 끄적대고 하는 거죠.
함 그나저나 이번에 자화상으로 전시를 했다며.
강 아는 교수가 있어서 프랑스문화원에서 했는데 자화상이 5분 만에 쓱싹 그려지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그리나 했는데. 그렸더니 내 20대 얼굴이 나오던 데요(웃음). 선배도 자화상 그리시잖아요.
함 요즘엔 자주 안 그리지. 내가 20살 때 고흐자화상을 보고 많이 따라 그렸었어. 화집을 죽 보다가 뒤에 보니까 자화상을 그린 스케치가 있더라고. 나도 그려봐야지 하고 그려보니까 잘 그린 것 같은 거야. 누나한테 가서 어떠냐고 보여주니까 픽 비웃더라고. “실물보다 훨씬 이쁘게 그렸다야” 이러는데 너무 부끄러운 거야. 그때부터 자화상을 계속 그렸지. 내가 그려도 ‘와. 진짜 못생겼다’ 하는 생각이 들 때 까지. 심지어 한 선으로 표현할 때까지 그리는 게 마지막이었는데, 예술이라는 행위가 못생긴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대로 표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를 미화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순간에서 가장 통렬한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그런 거.
강 자화상은 거울도 사진도 안보고 내가 기억하는 얼굴로 그렸거든요. 재밌는 게 자꾸 20대 얼굴이 나오는 거예요. 닮았다 싶게 나오는데, 잘 생기고 못 생긴 걸 떠나서, 희한했어요. 그림 그리는 친구한테 얘길 했더니, 거울을 보면서 왼손으로 그려보라는 얘길 하더라고요. 그림은 보지 말고 거울만 보면서 하면 모양이 나온대요. 그래서 그냥 그려봤어요. 왼손은 잘 안 쓰는 손이니까 자연적인 어떤 것이 나올거라는 얘기를 하더라고.
함 이게 비슷한 얘기인지, 전혀 다른 얘기인지, 아직 까지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경험인데, 내 생의 불가사의. 고등학교 때 내가 그림을 그렸거든. 아리아스 그리고 있었는데 장난치다가 아리아스 가슴이 구멍이 났어요. 그 구멍이 뚫린 것을 장난삼아 그렸는데 그림 그리는 선배 하나가 오더니 “야. 저 구멍은 잘 파라. 명암을 여러 가지로 내”하더라고. 재있는 얘기라서. 계속 보니까 거기에 그라데이션이 전부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 다 그렸어. 그리고 점점 재밌어져서 구멍만 그린 거지 이제. 진짜 열심히 그렸어. 그걸 흡족하게 그리고 나서 다른 걸 그려야겠다 했는데 선이 안 나오는 거야(웃음). 선이 무슨 어린 애처럼 돼. 그리다가 쪽팔리니까 확 찢어버리고 미술실에 밤에 들어와서 또 그리는 거지. 그렇게 일주일을 그렸어. 그래서 그 다음에 그림은 포기해 버렸지. 왜 거기서 선이 안 나왔고, 그때 그 구멍에서 내가 뭘 봤나? 아직까지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허무의 기록
강 우리집에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고모도 미대 나왔고 누나도 디자인하고. 미술시간에 스케치를 했더니 친구들이 계속 보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색칠은 못해요. 그러니까 나무랑 해가 떠있는 풍경을 그렸는데 도무지 색칠을 못하겠는 거예요. 나무 초록색? 초록색은 아닌 것 같아. 근데 다른 애들 그린 거 보면 초록색으로 그렸어. 근데 도저히 저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황칠을 해 버렸어요(웃음). 그래서 이상한 그림이 됐었는데. 색맹은 아니고 내가 뭔 색칠을 하면 다 아니에요. 이게 내가 본 게 아니야. 그래서 색칠을 못하겠더라고요.
함 그건 니가 하고 싶은게 아닌 거지.
강 내가 본 게 아닌 거죠. 일단은. 그래서 계속 덧칠 하다보면 이상하게 되는 거죠.
함 나는 요즘 전시를 가면 아. 이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구나, 아니면 훈련해서 그렸구나 하는 게 보여. 최정화. 그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감각이 있는 것 같아.
강 글도 그런 게 보이죠.
함 많이 보이지. 이 사람이 놀고 있구나. 아니구나.
강 그러니까 이게 쟤 생각이구나. 아니구나 이런 거. 시를 대하는 태도도 보이고요. 시랑 싸우는 구나, 시랑 연애하는 구나, 시를 스토킹하는 구나(웃음). 나는 시가 마누라 같아서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없으면 이년 어디 갔어 이러고(웃음). 그렇다고 이혼하기도 힘들고. 연애하는 심정은 아닌 것 같고.
함 나는 시를 학대하는 것 같아(웃음).
강 요즘 같은 경우는 소설가들이 산문을 못 써요. 소설은 잘 쓰는데 산문은 못 써요. 거꾸로 산문 잘 쓰는 시인이 좋은 시인이에요. 시도 좋아요.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고 툭툭 토하는 그런 산문이 좋은 산문인데, 거기서 뭐 예쁘게 쓰려고 하고 이런 거는 다 들통 나죠. 기본적으로 산문을 쓰는 건 편하죠. 일종의 외도인데, 외도니까 편한 거예요. 뭐 관리도 잘 되고 얽매일 필요도 없고 하고 싶은 얘기 막 해도 되고, 어떤 형식의 제한도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시보다는 에너지를 더 많이 필요로 하니까. 시를 쓰는 에너지를 산문을 통해서 채울 때도 있고요. 그래서 산문을 많이 써서 시를 못 쓰겠다는 게 저로선 이해가 잘 안돼요.
함 그게 에너지가 아니라, 시간과 끈기가 필요해서 그래. 산문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 나 같은 경우는 한 자리에 앉아서 그걸 쓰기가 조금 힘들고(웃음). 끈기가 있어야 돼. 나는 건축 설계를 하다가도 조금 하고 놀고, 하다가 놀고 그래. 마지막 한 문장을 밀고 나가는 힘은 체력인 것 같아. 체력이 안되면 마지막 한 문장을 밀고 나가지 못하고 그냥 말아버리는 거지. 술자리에서는 오래 있는 스타일인데. 사실 술 먹으면서 배우는 게 많지. 시인들하고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막힘이나 이런 것들이 커지는 경우도 있고.
강 그게 이제 관성화가 돼버리니까. 그게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인이 돼 버리는거죠. 시인들이 감각이 둔하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하면 전부 정치인이 됐을 거예요.  | 진행·이나연 기자

2007 Basel Art Fair

스위스, 프랑스, 독일의 접경 지역, 라인강변에 위치한 인구 20만의 소도시 바젤, 시내의 행사장 ‘메세 바젤’의 공기는 세계 미술시장의 지글거리는 열기로 유례 없이 뜨거웠다. 한국 화랑으로는 국제갤러리와 PKM갤러리가 참가했는데 국제의 경우 전광영 조덕현 이기봉 문성식의 작품이 매진되었고 구본창 전경 정연두의 판매 성과가 좋았다. PKM에서는 이불 김상길 함진 문범 김보민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베니스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이우환의 작품과, 전광영의 작품, 쾰른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는 김수자의 근작 등이 여러 화랑 부스에서 눈에 띄었다. 신예작가 26인의 개인전 ‘아트 스테이트먼트’에는 양혜규가 독일 화랑 소속으로 출품하였다. 같은 시기에 신예와 중간층 차세대 작가를 위한 위성 아트페어인 리스테(Liste)와 볼타쇼(Volta Show)도 열려 풍성함을 더하였고 볼타쇼에 참가한 두아트갤러리에서는 손동현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오늘날 전례 없는 세계 미술시장의 활황세는 거품 붕괴를 경고하는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4~5년간 지속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작년 세계 미술시장의 규모는 300억 달러(28조 원)로 추산되고 올해 그것이 500억 달러(47조 원)까지 확장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그 원인에 관한 분석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세계적으로 과잉 양상을 보이는 유동성, 주요 국가에서 나타나는 저금리와 완화된 대부 정책, 그리고 부동산 경기의 둔화, 경제개발대국 중국, 인도, 러시아, UAE의 신흥 자본가들의 진입, 투자대상이 마땅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 고수익율의 이점, 헤지펀드와 아트펀드 등 대형 자금의 지속적인 유입, 신흥 부호로서 높은 사회적 신분과 세련된 취향을 과시할 수 있는 미술품 소장에 따른 매력, 그리고 유증자산으로서의 미술품의 이점 등등…. 이들 요인의 플러스 효과가 미술품 투자의 전형적인 단점 (낮은 유동성, 높은 거래 비용, 긴 보유 기간, 양질의 작품과 정보의 만성적 부족 등)의 마이너스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다.

 스릴 넘치고 풍성한 매혹의 장터
이번 바젤아트페어에 출품된 주요 작품의 분포 양상에서도 드러났지만 오늘날 세계 미술시장은 작년 기준 낙찰 총액이 10조 원에 이르는 경매시장이 주도하고 있다. 웹상에서도 세계적으로 일상적인 거래수단이 된 경매는, 경매 가격이 실가치를 반영하는 적정가가 아닐 수 있다는 구조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으로 미술품의 주된 거래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경쟁심, 흥분, 즉각적인 결정의 필요로 혈중 아드레날린을 샘솟게 하는 경매 고유의 속성을 선호하는 오늘날 미술계의 취향 변화는,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다양한 판매자와 작품을 만날 수 있고, 한정된 시간 안에 즉시 구매를 결정하는 아트페어의 성격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다국적의 대형화랑에서 구매자를 못 찾고 수개월씩 전시되던 작품이 바젤 같은 곳에서는 개막 당일 날 판매되곤 하는 것이다. 올해 바젤에서는 세일 날 백화점 개장과 동시에 고객들이 다투어 달려들 듯 작품의 선점 경쟁까지 연출되었다. 오늘 부스의 모습은 내일이면 바뀌곤 한다. 이미 판매된 작품 자리에 다른 작품을 걸기 때문이다. 이전 유수의 아트페어 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애호가들 특유의 섬세하고 은근한 여유와 심미의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 그 점을 아쉬워하는 적지 않은 애호가, 작가, 그리고 도저히 좋은 작품 취득의 차례를 맞지 못하는 공공미술관 관계자의 조용한 불평은 너무도 달라진 분위기 속에 묻혔다.
그런데 바젤아트페어의 특징은 세계 유수의 딜러들이 저마다 위력을 뽐내는 300개의 부스로 이루어진 공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메세 바젤’ 주 전시장, 그 ‘이성을 잃은 듯한’ 시장의 열기 속에서 자본의 위력에 주눅 드는 이들도 눈과 발길을 조금 돌려보면 다양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흥미로운 부대 프로그램들과 만날 수 있다. ‘아트 언리미티드(Art Unlimited) 프로젝트’는 부스 전시의 제약을 뛰어넘을 목적으로 금융기업 UBS의 후원으로 개최되는 행사다. 제목이 시사하듯, 드높은 천장고의 전시장에 발상, 개념, 매재 면에서 예상을 뒤엎는 작품들이 많았다. ‘시장’의 느낌을 덜 풍기게 고도의 기획력으로 연출된 68점의 각 작품들 뒤에는 하우저 앤 비어트와 같은 거물 딜러들이 포진해 있음은 물론이다.
전시장 밖에서는 ‘퍼블릭 아트(Public Art)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치된 대형 야외 설치물을 만날 수 있다. 애니쉬 카푸어의 거대한 오목거울과, 폴 맥카시의 6미터 높이의 외설스러운 산타 등 아홉 점의 조형물은, 현대미술의 장(場)이 “해방된 판타지, 우스꽝스러운 풍자, 적나라한 사회적 발언”(피터 아스프덴)으로 점철된, 우리 마음을 빼앗는 스릴 넘치는 매혹의 장임을 말해 준다. 전문가와 관객이 만나는 대담 행사도 이루어져 급변하는 환경 속 당대 미술관의 새로운 역할과 위상 등에 관한 토론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렇듯 다양하고 풍성한 행사 속에서 경제 논리는 문화의 외장 속에 잘 숨어 있었고 문화적 가치는 적어도 외형상은 경제 논리에 종속되지 않아 보였다.
바젤은 그 미증유의 열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단순한 애호가들이나 비영리부분의 관계자들에게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어우러진 바젤 쿤스트뮤지엄에서는 방대한 규모의 상설전과 함께 재스퍼 존스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고, 바젤아트페어의 산파였던 화상(畵商)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설립한 렌조 피아노 설계의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에서는 빼어난 풍광과 하나가 된 건축물 속에서 전무후무할 규모의 뭉크의 회고전이 빛났고, 기업과 지자체의 합작인 샤우라거미술관은 그 독특한 건축미가 로버트 고버의 대형 전시를 잘 살려주고 있었다.
방금 전 ‘메세 바젤’ 주 전시장의 그 강한 열기가 이 고즈넉한 도시의 한 구석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생경한 느낌으로 기억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화염은 언젠가 잦아지게 마련이다. 과열된 시장이 조정 국면에 들어서기까지 수년 사이에 적지 않은 성공 사례들이 인구에 회자되겠지만 적어도 미술 시장에서 단기 투자의 효과가 증권, 부동산 투자의 경우와 별 다름이 없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시장 가치는 부침을 겪으며 장기적으로 상승할 것이나 단기적으로는 타 분야에서처럼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접근하면 ‘타이밍의 게임’이 되어,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고 큰 성취에는 위험도 따를 것이다.

투자가 아닌 향수의 대상
재 속 깊이 늘 꺼지지 않고 살아 있는 은근하고 진득한 불씨가 없이는 기세 좋은 화염을 생각할 수 없다. 샤우라거미술관과 바이엘러미술관의 입장료는 15프랑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곳은 누구라도 만 오천 원 내외의 돈을 지불하고 최고의 미술관에서 최고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인프라가 풍부한 곳이었다. 시장과 작품 값에 대한 정보도, 구매 능력도 없는 다수 대중도 얼마간의 대가를 지불하면 풍성하기 그지없는 미술문화를 향수할 수 있는 토양이 거기 있었다. 그 위에서 미술 문화가 꽃 피고, 부침을 겪으면서도 미술품의 장기적인 가치 상승이 있고, 불멸의 미술품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십 수년 전 필자가 삼성미술관에서 <팝아트의 슈퍼스타 앤디 워홀>전시를 맡아 할 때 워홀의 대작 수십 점을 대여해 준 이가 브루노 비숍버거였다. 그와 바이엘러 등은 모두 화상이지만, 한 세기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그들 콜렉션의 양과 질은 그것으로 세계적 미술관을 설립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전설적인 헤지펀드의 운용자 슈타인하트나 코언 등은 각각 수십 년 동안 미술 분야에서 수억 불을 투자하고 수억 불을 버는 수집광이기도 한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장의 큰손들이 안목과 애정과 열정을 가진 애호가들이었고 그들이 바로 이 엄청난 시장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강국 중국을 생각한다. 157개의 경매장에서 2조원 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미증유의 활황을 구가하는 현상만이 중국미술의 전부가 아니다. 수십만 명의 큰손 컬렉터가 꽃이라면, 국전이 열리는 베이징과 각 지방의 미술관 전시장을 가득 메우는 허름한 내의 바람에 수천만의 서민 애호가는 그 뿌리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전위적인 중국미술의 ‘후위’에는, 전통적 양식에 기반을 둔 ‘한물간’ 스타일의 중국화와 당대 리얼리즘의 이념과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을 융합시킨 ‘한물간’ 스타일의 서양화와 판화에 천착하는 수십만의 화가와 그들의 노작을 향수하는 수천만의 애호가들이 구성하는 깊고 넓은 수원(水原)이 엄존한다.
한편에서 미술은 바뀌고 있다. 전지구적 주제에 관해 국지성에 입각하여 강력하게 발언하는 전시가 늘고 있다. 제3세계 작가의 역사, 정치, 사회, 문화적 발언이 절묘하게 시각화되어 서구 대중의 공감을 유도하는 ‘시각자료형’ 작품들이 넘쳐나는 곳이 베니스, 카셀, 뮌스터의 전시장이고 바젤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오래 전 한스 하케가 전시 주관 미술관 재단이사들의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시를 시도했듯이, 그들이 비판하는 다국적 기업의 타이쿤들이 그들의 작품 앞에서 우아한 몸태로 호감을 표시하며 개념의 상품화에 앞장서는 역설을 왕왕 목도하지만, 이 거대한 흐름이 머지않아 미술 일각의 개념을 바꾸고 자본의 논리를 뛰어넘게 될 것이라는 상념을 지울 수 없다. 보고, 보여주는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현대미술은 속성상  ‘시장 시스템’의 틀 속에 온전히 가두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리되는 순간 그 가치의 무한한 잠재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베테랑 아트펀드 운용자들은 말한다. 미술품에 관한 최고의 투자는 ‘투자’ 자체에 대한 관심이 가장 적은 투자가에 의해 이루어지곤 한다고. 어느 매니저도 대신 보장해 줄 수 없는 것은 투자자 자신의 열정, 즉 애호심이요, ‘애호’가 투자와 수집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는 듯 보이는 다수 대중의 애호가층이 탄탄해져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유례 없는 활황 국면 속에서 무력감에 빠져있는 많은 이들의 소리 없는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벽에 그림을 잘 걸지 않는 시대에, 넘치는 고질의 영상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투자가 아닌 향수의 대상으로서의 미술품을 매개로 어떻게 대중과 소통할 것인지 함께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미술 시장은 다른 분야와는 달리 한 점 작품당 그것을 구입할 단 한 사람의 컬렉터만 있으면 성립된다. 그러나 한편 시민사회의 미술은 다수 대중에 의해 최고의 조건에서 향수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과거 서구 미술계의 거상(巨商)들이 그러하였듯이, 입장료 정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이들을 배려한 정말 좋은 공사립 미술관의 신설과 그 내실화와 양질의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나눔과 배려의 움직임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로써 부침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성장하고 갈수록 견실해지는 시장을 만들어 가는 길을 닦게 될 것이다.
올 봄 경매에서 생존예술가로서 경매 낙찰 최고가(178억 원)를 경신한 데미언 허스트는 가까운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술품을 사세요. 당신의 이름을 붙인 미술관을 지으세요. 사람들을 무료로 입장시키세요. 그것이 불사불멸(不死不滅)에 가까워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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