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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Art in Culture

2012.11

Abstract

지난 9월 일제히 개막했던 비엔날레 레이스가 이제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art는 비엔날레 프리뷰 특집 기사에 이어, 다시 비엔날레를 특집으로 마련했다. 비엔날레를 2년마다 펼쳐지는 왁자지껄한 '미술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무용론까지 거론하며, 미술계 안팎으로 '비엔날레 피로감'을 호소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비엔날레의 '범람'과 '위기'가 공존하는 시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심도있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art는 비엔날레라는 거대하고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 정체성 제도 주제 디자인 비평 도시 교류 등 6개의 주요 사안을 해부한다. 천별일률적 기획력과 담론의 부재, 예술감독 선임을 둘러싼 잡음, 제도화와 권력화, 로컬과 글로벌의 갈등 등 비엔날레의 산재한 문제를 이슈별로 분석한다. 그 비평의 대상은 광주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국내 주요 비엔날레는 물론 상하이 리버풀 카셀도쿠멘타까지, 국내외 대형 미술 행사를 총망라했다. 자, 이제 오늘의 비엔날레를 다시 생각하는 '반성의 시간'이다.

Contents

01    표지  아니쉬 카푸어 <노랑(Yellow)> 섬유유리, 안료 600X600X300cm 1999
               삼성미술관 리움 설치 전경 2012(사진: 권현정) 

34    영문초록

37    에디토리얼  호경윤

38    프리즘
    제6회 아시아 편집자회의를 열다  김복기
    예술인 소셜 유니온, 무엇을 어떻게?  김윤환

42    IMAGE & ISSUE [7]
    한국문화의 정수  이영준

44    오후의 아틀리에
    나는 준비된 B급 화가이고 싶다!  주태석

68    포커스
    이승택展  정연심
    피필로티 리스트展|김수자展  서현석
    임동락展  로버트 C. 모건
    이세경展|장성은展  홍지석
    인생사용법展  임근준

88    스페셜 아티스트  아니쉬 카푸어
    [1]무한의 공간으로  김수영  
    [2]13개의 키워드, ‘카푸어의 우주’를 읽다  편집부

113    특집  Rethinking Biennale
    [1]Identity_누구를 위한 비엔날레인가?  이준    
    [2]Institution_‘작가-작품-전시’ 사이에서  안규철
    [3]Theme_‘소통 시대’의 속삭임 같은  정현
    [4]Design_무겁거나 아주 가벼운 디자인  김상규    
    [5]Criticism_현대미술의 황혼을 보다  강수미
    [6]Inter-City_새로운 돌파구, 도시 네트워크  김준기
    
143    작가 연구  정재철
    실크로드에 피어난 꽃그늘  박만우 

156    아트 포럼 
    미디어아트가 오래 사는 법  박상애

162    동방의 요괴들
     ‘요괴들’, 구속 받지 말고 즐겨라  윤규홍

168    전시 리뷰
    우리|라유슬|이형구|유화수|홍현숙
    이광호|션 스컬리|허은경|구동희
    
178    전시 프리뷰
    Touchable Untouchable|오수환|봉쥬르 창원! 확장된 미술 읽기
    토니 아워슬러|2012서울사진축제|김정욱

186    뉴비전 2012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파이널리스트 3인 본선 [3] 자유주제 평론  강정호 김용진 안소연

194    에디터스 블로그

Articles

‘요괴들’, 구속 받지 말고 즐겨라

〈2012동방의요괴들 지역 순회전- 달구벌에서 만나다!〉전 전경

‘요괴들’, 구속 받지 말고 즐겨라

글 | 윤규홍_예술사회학, 갤러리분도 아트디렉터

최근 1~2년 사이에 벌어진 〈동방의 요괴들〉의 전시를 보면 프랑스의 68혁명이 내세웠던 가치들이 떠오른다. 내가 과잉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1968년 늦봄에 시작되어 60일간 이어진 해방의 요구는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운동이라기보다 개인주의가 밑바탕이 되어 터져 나온 봉기였다. 현대미술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해서 이제는 고리타분해진 단어인 ‘다원성’도 개인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동방의 요괴들〉과 같은 제도적 예술 운동을 프랑스 68혁명에 대입하자면 그 실체가 잡힌다. 당시 프랑스의 권력자인 샤를 드골 대통령의 민족주의는 지금 후위로 밀려난 전통 미술과 닮아 있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그리고 역사가 꽤 흐른 노동운동의 조합주의는 이 땅에 들어온 지 한 세기가 다 되어 교조화된 현대미술과 비슷한 점이 많다.
‘구속 받지 말고 즐겨라’ ‘30세 이상인 그 누구도 결코 믿지 마라’, 이 구호는 68혁명의 메시지인 동시에 〈동방의 요괴들〉이 달궈 놓은 미술 현장의 분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있다. 원래 그런 거다. 구호와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동방의 요괴들〉에 선택된 모든 작가들은 본인이 싫든 좋든 즐겨야 한다. 그들을 보는 심사위원은 모두 30세 이상의 기성세대다.
68혁명의 물결에는 별의별 유형이 다 모였다. 레닌주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가 참여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 주체들이 겉으로 드러내 놓고 혐오했던 소비에트 스탈린주의자들도 끼어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도 기웃거렸다. 〈동방의 요괴들〉과 같은 큰 이벤트에는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고, 객관식 시험처럼 절대적 지표를 두고 평가를 못하는 이상, 내가 볼 때 ‘요괴들’ 가운데에는 어중이떠중이들도 끼어 있다. 신진작가 육성 제도가 고시 제도처럼 주류에 안착하기 위한 관문이라면, 그 어떤 평가 방법도 완벽한 방법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전시 참여 작가들

송민정 〈모퉁이를 위한 싸움〉 가변설치 2012

제도화된 기준과 상식을 벗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많은 요괴들에게서 발견되는 흔적으로, ‘이식된 고민’을 들 수 있다. 이미 현대미술의 장에서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합의된 추상적 영역으로 종종 오르내린 주제를 자신의 고민인 것처럼 진지하게(하지만 또 발랄하게 드러내야 한다니) 포장하는 기술은 몇몇 성공한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계의 답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많은 〈동방의 요괴들〉의 작업은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쳤다. 에너지나 기와 같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지 못하는 용어를 예술사회학자가 쓴 이유는 제도화된 기준이나 상식을 초월하는 태도가 작가 개인에게 일관성 있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태도를 중심에 두고 〈2012 동방의 요괴들_달구벌에서 만나다〉전에 참여한 ‘요괴들’의 출품작을 짚어 볼 수 있다. 이들 작가에 관한 좀 더 자세한 탐구나 정보는 본지 2012년 2월호에서 확인하면 된다.  
천영수의 작품은 허구와 실재 사이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그림이다. 그는 대중들에게 친숙한 영화와 게임, 광고의 장면이나 등장인물들을 자신의 작업 속에 끌어들이는데, 그 그림은 원본과 달리 되려 현실적인 개연성을 갖춘다. 뚱뚱해서 수트가 터질 것만 같은 슈퍼 히어로처럼 내러티브의 몰입을 방해하는(우디 알렌이나 조 단테의 영화처럼 일종의 소격 효과를 꾀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한다. 작가는 허구가 현실보다 더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대중문화를 짚어 낸다.        
강승지의 그림은 과감한 붓질을 통해 색과 균형을 조합하는 추상적 회화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식물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뿌리는 움직임을 포착한 이미지다. 이런 현실 포착은 예컨대 카메라를 이용한 고속 촬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제시되지만, 여기서는 카메라가 아닌 전통적인 미술로 탄생하는 또 다른 이미지 체험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계복제 시대’에 맞서는 회화의 권능을 드러내는 시도로 보인다.
신제헌은 종이 상자를 재료로 쓰며 역사에 남았거나 남을만한 인물들의 상을 만든다. 그가 만든 인물상의 상당수는 존경/혐오의 이중 언로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각 인물의 이미지가 인위적으로 꾸며진 표정 자세 손동작 따위로 이루어진 겉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작업 재료인 종이처럼 가벼운 이미지만이 떠다니는 본질을 꿰뚫고 있다.
주지오의 회화는 형식적인 면을 봤을 때에 일본을 위시한 동양화의 틀을 차용하고 있고, 캐릭터와 구도는 만화에 흡사하다. 의인화된 상어와 유인원, 호랑이를 통해 여러 사회적 상황을 맞는 인간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그래서 관객은 그의 그림에서 예컨대 탐욕 경쟁 협조 질투 존경 과시와 같은 갖가지 정서와 행동을 공감할 수 있다.
나유림의 회화에는 말미잘과 같이 생긴 유기체가 등장한다. 이 괴 생명체는 우리 일상 공간 전체에 끊임없이 개체수를 늘여간다. 이 그림이 주는 혐오스러운 이질감은 도시 중간계급이 가지는 자본의 증식욕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느닷없는 생명체는 무미건조한 무채색 공간을 아름답게 바꾼다.
강민숙의 설치 작업은 익숙한 사물을 비현실적인 것, 즉 탈사회적이거나 반 물리적인 맥락으로 표현함으로서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다. 예컨대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2개의 사물을 결합시킴으로서 우리가 얻는 시각적인 체험을 반영시키는 효과가 그렇다. 대개 이런 작업은 불편한 인지를 끌어내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함과 유머를 바탕으로 산뜻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다양한 매체에 녹아든 ‘세대의 자화상’
신현상은 음료수 캔을 압축시켜서 조각 작품을 만든다. 이와 같은 작업 유형이 우리에게 전하는 미적 쾌는 쓸모없는 폐품이 ‘정크 아트’라는 확정된 의미로 격상되는 과정과 더불어, 알루미늄 캔의 크롬 빛 금속성이 현 시대를 상징하는 세련미란 점에서 발동된다.  
강혁의 사진 작품은 수평선과 지평선을 부두가의 풍경과 겹쳐 놓음으로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평범한 대비를 일종의 ‘유사 기념비적’ 의미로 가공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다른 여러 다큐멘터리 미디어작품이 그런 것처럼 현실에 기초하면서도 전혀 낯선 이미지로 나타나는 역사성이 작품 전체를 감싼다.    
김혜림은 그로테스크한 쪽으로 진화한 한국화의 패턴을 예시한다. 하나의 세포 혹은 알 모양의 가상 유기체는 그 속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 현상이 벌어진다. 이는 작가가 내적 자아를 또 다른 단계로 이행하는 성장통을 알레고리로 보여 주는 것이다.
김희영은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일회용 용기를 도자기로 표현했다. 플라스틱이 가져다 준 생필품의 포디즘은 훨씬 과거에 도자기가 점하고 있던 위상을 빼앗으며 대중사회에서 형식적인 계급 평등을 이뤄 냈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들의 심미안 자체를 바꿨는데, 작가는 대중들의 이러한 미적 기준을 다시 한 번 뒤바꾸어 제시한다.
박보리의 회화는 팝아트로 분류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들은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도시의 여러 건축물 내외장 장식을 소재로 택하고 있다. 평범한 건축물들은 각각의 색이나 패턴이 입혀져 있다. 작가는 우리가 지나쳐버리는 이 흔한 아름다움을 포착해서 캔버스로 옮긴다.
이학민의 그림 속에는 여러 이미지가 뒤죽박죽하게 공존하고 있다. 일종의 콜라주로 수렴되는 그의 그림은 관객들에게 혼란과 불쾌를 주는 악취미가 두드러진다. 관객들은 각각의 이질적인 소재가 모여 있는 부조리를 나름의 내러티브를 구축하며 이야기를 찾아 내려고 애쓴다. 이런 작업은 한 작가의 생애 속에서 안정된 연속성을 보장받을 수는 없지만, 그 자체가 정신분열증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적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전시 전경

신진 작가의 자아 형성 과정

송민정의 설치작업은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차이를 무색케 하는 뉴미디어의 속성을 냉소적으로 풍자한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대상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한다든지, 반대로 본질과는 상관없이 단편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그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끌고 가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란 사실을 작가는 음울한 농담으로 늘어놓는다.
박자용의 디지털 사진은 창이나 문을 통해 펼쳐진 안과 밖의 공간 구분을 표현한다. 다중으로 겹쳐진 이미지는 마치 우리의 불완전한 기억처럼 선명하지는 못하지만 의식 속에 구성된 간주관적인 공간을 사진 작품 속에 확정시키고 있다.      
유목연의 사진 작업은 하나의 작업으로 분류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피사체에 관심을 둔다. 그 대부분은 실체가 흐릿하게 제시된다. 작가는 대상을 정하고 촬영하고 보정 작업하고 프린트하는 사진 작업의 전 과정에 개입하는 무작위성을 중시한다. 그 랜덤의 방식은 분명히 의도한 것이므로 우연적인 의도와 필연적인 해프닝이라는 이중적 모순이 사진에 담겨 있다.  
이효진의 아크릴릭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본인의 자아가 투영된 존재다. 이 캐릭터는 스스로가 실과 천을 재봉질해서 만드는 인형에 집착한다. 작가는 캐릭터를 만들고 캐릭터는 또 다시 인형이라는 캐릭터를 만든다. 그림 속의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 이효진의 페르소나가 된다.    
이일석의 사진 작업은 한강 고수부지로 이어지는 나들목에서 촬영된 장소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장소성은 소실점을 향해 구성된 점과 선과 면의 간략한 이미지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다. 빈틈없이 제시된 사진 속 이미지는 강 나들목에 흔히 있을 법한 낙서와 생활안내 문구, 오물 등을 제거해버림으로써 다른 일체의 문화적 의미기 배제된 채 순수한 예술 조형만이 부각된다.  
신승주는 긴 가닥으로 이루어진 전구를 설치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각적 의미를 환기시킨다. 불빛은 어떤 경우엔 크리스마스트리나 축제에서 흥을 돋우는 장식적 효과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엔 공사장의 경고등처럼 실용적 기호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어떤 쪽이든 그것이 가리키는 장소는 다른 장소와 경계선 역할을 한다.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이 작업은 미술 전시 공간에 놓이면서 그 예술적 의미를 재귀적으로 드러낸다.    
이상과 같은 18명의 젊은 작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현대미술의 내적 질서 안에서 제각각의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art in culture의 의도에 들어맞게, 혹은 기대를 저버리고 이 요괴들 대부분은 기성 작가군에 편입할 것이다. 그들이 보여 주는 반짝거리는 순발력이나 허세도 크게 보면 현대 예술가들의 자아 형성 과정이다. 내가 앞서 우려한 이식된 고민 또한 학습 모델에 대한 모방의 경향이 불가피하다는 심리학적 근거에 비추어 본다면 시간이 해결하거나, 적어도 덮어질 문제일지도 모른다.

전시 전경

전시 전경

실험예술 50년, 동시대성 읽기

〈녹의 수난〉 혼합재료 1200×200×350cm 1996 성곡미술관 전시 전경

실험예술 50년, 동시대성 읽기

글| 정연심_미술평론가

이승택은 지난 50년 동안 한국 현대미술이 서구와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많은 기여와 족적을 남겼다. 성곡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승택 회고전>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대안적’ 목소리와 방향을 제시했던 이승택이 실험예술, 아방가르드미술, 부정(negation)의 정신, 트랜스그레시브 아트(transgressive art) 등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시도한 제1세대 미술가였음을 보여 줬다. 이승택의 작업은 무의식적인 행위의 표출이 아니라 반예술, 반미학이라는 미적 개념 아래 치열한 자기 고민을 거쳤고, 작가는 사회적, 예술적 가치에 도전을 가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이승택에게 수여한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은 그가 한국 현대미술에 제시한 방향성이 결코 헛되지 않고,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구현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승택의 작업을 두고 재야와 저항, 부정 등과 같은 타이틀로 권위에 도전했던 반미학적인, 반예술적인 태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존의 비평적 시각이 아쉽다. 물론 이러한 성향이 그의 작품의 모든 기저에 깔려 있고, 작품에 임하는 가장 기초적인 태도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정신은 아직도 그의 작업에 생생하게 현현되고 있고, 관람자들에게 이러한 전율을 전달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승택의 작업을 지적인 맥락에서 분석하는 다양한 해석적 지점을 방해할 수도 있다. 때문에 회고전이 열린 지금이야말로 이승택을 바라보는 기존 시선으로부터 일차적인 비평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작가를 향한 비평적 방향을 재설정하여, 이승택의 작업을 서구미술과의 평행선상에서 동시대적 현상과 함께 바라보면 어떨까?

〈자화상〉 사진, 매트리스 가변크기 1991

중제중제

이승택은 ‘비(非)물질로서의 오브제’를 제안함으로써 한국의 조각적인 전통과 더불어 서구의 조형 전통 및 조각 전통에 공격을 가하고, 조각과 오브제의 개념과 경계를 유동적으로 다뤘다. 초창기였던 1950년대에는 <고드랫돌>(1958)에서 보이듯이 돌, 철사 등을 많이 사용하였고, 기와 노끈 나무 철망 시멘트 석고 등 당시로서는 비전통적인 조각 매체를 사용하였다. 청동과 대리석은 서구의 조형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였지만, 이승택은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거나 아상블라주, 파운드 매체 등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재료를 모색하였다. 돌, 철사 등으로 동여 맨 ‘사물’들은 한국 동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화답처럼 보이며, 연남동 작업실에 산재한 초창기의 회화 작업과 매체들은 이승택이 결국 전통적으로 고급예술로 여겨졌던 회화와 조각을 떠나 새로운 시대정신, 예술정신을 찾으려 했던 비평적 고군분투를 입증한다. <고인돌에 링거>(1966)를 투여하는 작품, <매어 있는 토르소>(1961) 등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가의 심리적 상처와 아픔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이승택이 1960년에 각목 노끈 종이를 이용하여 제작한 <비조각>은 전통조각 자체의 매체와 모더니스트적 조각의 받침대를 떠나 노끈을 묶은 각목을 바닥에 배치한다. 관람자들은 이전과 달리 이러한 각목과 종이, 혹은 돌 사이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으며, 이전에는 체험할 수 없던 공간성과 시간성을 물리적으로, 현상학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승택의 초창기 작업들은 매체적 실험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점차 비물질 예술, 개념미술, 퍼포먼스로 그 관심이 바뀌어 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구의 포스트미니멀리스트, 페미니스트들이 진행했던 물, 불, 바람, 연기 등과 같은 비물질화된 예술을 향한 고민과 함께 동시대성을 획득했으며, 흥미롭게도 이승택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와 같은 (포스트)미니멀리스트들보다 훨씬 먼저 연기 등과 같은 자연의 속성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불, 연기와 같은 요소들은 쿠바 출신의 페미니스트로 칼 앙드레(Carl Andre)의 부인이었던 안나 멘디에타(Ana Mendieta)가 제작한 <실루에타 시리즈(Silueta Series)>의 작업에서 실현되었다. 또한 페미니스트였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도 본질적페미니즘으로 돌아서기 전에, 연기나 스팀과 같은 비물질적인 매체를 잠시 시도했었다. 멘디에타는 거의 7년 동안 이러한 <실루에타 연작>을 대지에서 시도했고, 로버트 모리스도 ‘스팀’을 이용했지만, 그 누구도 이승택만큼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비물질적인 매체를 구현하지 않았다.
1960년대 이승택의 작업에 등장한 불, 바람, 대지의 요소는 작가 스스로 몸을 이용해 제작한 퍼포먼스를 통해 한층 시각적으로 강렬해지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성곡미술관 전시에 포함되었다. 1960년에 작가가 한강 백사장에서 ‘연기나는 구조물’을 구상하고, 이러한 행위를 드로잉 작업으로 그렸던 프로젝트 작업은 지금 보더라도 ‘현재성’을 띠고 있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도 해프닝이 동시대적으로 실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신체를 이용한 이승택의 바디아트와 대자연을 대상으로 드로잉을 긋는 그의 행위 등은 여전히 놀라울 수밖에 없다.

왼쪽ㆍ〈무제〉 액자 1972~2012|오른쪽ㆍ〈고드랫돌〉 돌, 밧줄 각목 48×120cm 1958

중제중제중제

1960년에 제작된 <연기>는 이승택의 비예술개념이 서구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반예술적 행위 위에서 자신만의 길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 주는 작업이다. 이것은 서울과 뉴욕에서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비슷하게 진행되던 행위가 서로 얼마나 비슷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두 도시에서 비슷한 미학적 고민과 해결점을 찾던 미술가들이 결국 개념미술 신체미술 퍼포먼스 대지미술 설치미술 등과 같은 새로운 매체적 영역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뉴욕에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집단적으로 이뤄졌고, 한국에서는 이승택과 같은 아주 극소수의 작가만이 모더니즘미술에서 이탈한 ‘반미학’적 세계로 진입해 나갔다는 점이다. 아방가르드, 실험예술 등의 이름으로 묶여 있던 후자의 경향이 이제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탈장르’‘소그룹 운동’ 등과 같은 이름으로 국내 미술계에서 표면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의 일이다.
이승택이 대지를 배경으로 담아 낸 <바람> 작업은 다양한 시기에 각기 다른 매체와 재료들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기본적으로 이 작업은 생목과 각목을 이용하여 헝겊을 휘날리는 작품이며, <바람-민속놀이>(1971)에서 작가는 긴 천을 휘날리면서 바람이 우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미묘한 움직임들을 담아 내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여러 곳에서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일시적이고 장소특정적이다. 그러나 <바람> 퍼포먼스는 완벽한 안무를 보여 주며 의도적으로 계산된 장면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자연의 위력으로 인간이 개입될 수 없는 세계로, 여기서 작가는 자연-순응적이거나 자연과 일체가 되어 바람을 다스리며 천의 드로잉을 연출한다.
서구에서 제1회 <대지미술>전은 1969년 2월 한겨울 코넬대학교의 야외에서 개최되었다. 애초에 이 전시를 기획했던 독립큐레이터였던 윌로비 샤프(Willoughby Sharp)는 물 불 땅 공기를 주제로 전시를 개최하고 싶었지만 결국 대지를 배경으로 한 작업을 전시하며 대지미술 영역을 제시했다. 이승택과 동시대 미술가들이 고민하고 있던 지점들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물론 이들은 서로를 몰랐으며 이승택만이 이러한 4가지 자연요소를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구현해 내었다. 물론 이승택의 자연 속 드로잉 작업과 대지를 대하는 미국작가들의 태도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승택에게 자연은 나를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고, 나의 몸을 담고 있는 자궁이다. 자연과 작가의 몸, 매체들은 서로를 붙들어 매는 존재이며, 유기적으로 함께 호흡하는 요소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것이 사진 매체의 발견이고 사용이다. 일회적인 설치미술과 대지미술, 퍼포먼스를 작가의 작업으로 묶어 주는 매체는 사진일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실현된 퍼포먼스는 거의 대개 사진으로 존재할 뿐 비디오로도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위에 꽃문양을 놓아 제작한 <암각> 작업을 비롯해, 아파트 사이에 기와지붕만 솟구쳐 있는 독특한 풍경은 모두 사진이라는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를 사용한 것이다. 이승택이 사용한 아날로그 카메라는 사진의 지표적 특징을 기록하며, 자신의 몸짓과 바람의 흔적을 지표화하였다. 사진없이는 이승택의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이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진은 ‘기억(memory)’을 지표화해 준다.
이승택이 북한산에서 제작한 <녹색운동>(1975), 도로공사에서 행한 <녹화작업>(1985), 난지도에서 펼친 <녹낙원>(1980)은 그 당시의 퍼포먼스 자료로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러한 작업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사진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승택의 작업들은 비교적 사진으로 대부분 기록되어 있고, 자연 속의 드로잉, 엔트로피의 형태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의 사진은 역사적으로 제대로 읽혀지지 못했다. 리차드 롱(Richard Long)의 사진 작업처럼 이승택의 사진이 다시 정리되어 재조명될 필요성을 제시한다.
성곡미술관에서 전시된 <녹의 수난>은 족색의 장엄한 숭고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개념주의적 리얼리스트인 이승택은 숭고와 몰입으로 우리를 일방적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관람자가 <녹의 수난> 왼쪽에서 숭고와 몰입의 정체를 인식하고 방해하는 한 인물(이승택)을 만나는 순간, 연극적인 행위 대신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한편 작가는 일상적 기록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작업에 사용했고, 그림틀을 노끈으로 묶어 작품의 프레임을 탈기능화화 시킴으로써, 전통적 미적가치를 전복시키며 트랜스그레시브한 미적 기준을 재설정했다. 작업실에 산적한 이승택의 작품들은 금기시된 욕망과 아브젝시옹, 제의(ritual) 등을 역설했던 조르주 바타이유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이승택은 전통적 미적가치와 미적체험 안에만 묶어있던 지점들을 하나씩 경계 밖으로 확장시켜 온 것이다.

13개의 키워드, ‘카푸어의 우주’를 읽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아니쉬 카푸어 (사진 : 권현정)

13개의 키워드, ‘카푸어의 우주’를 읽다

정리 | 편 집 부

아니쉬 카푸어는 새로운 지각 경험을 여는 경이로운 작품을 발표해 세계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왔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단히 방대하여 그에 관한 비평과 수식 또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동양/서양 정신/현상 물질/비물질 기표/기의 형식/내용 주제/소재 등에 얽혀 있는 카푸어의 깊고 넓은 예술 세계를 구체적이고 핵심적으로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편집부는 카푸어의 작품을 관통하는 13개의 조형적 키워드를 추출해, 독자들에게 그의 조형 세계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지름길’을 안내하고자 한다.

〈아니쉬 카푸어〉전 설치 전경 2012│〈나의 붉은 모국(My Red Homeland)〉 앞에 모여든 취재진

01. 비물체 Non Object

아니쉬 카푸어의 대다수 작품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어딘가에서 생성된 듯 보이는 그의 작품은 감춰진 차원을 드러내고 우리의 지각을 변형시킨다. 거울의 조작이나 빈 공간의 효과, 혹은 흠뻑 젖은 색채를 통해 작품은 물체의 상태를 벗어나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2008년 같은 제목의 시리즈 〈비물체, 문〉 〈비물체, 기둥〉 〈비물체, 현기증〉에서처럼 ‘비물체’가 중요한 키워드다. 작품에 반사되어 비치는 관객들의 움직임마저 없다면, 그의 작품은 주위 환경과 섞여 들어가 사라져버린다.

02. 색과 단색 Color and Monochrome

색은 아니쉬 카푸어 예술의 근본이다. 색은 작품을 장식하거나 그저 덧붙인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카푸어의 색은 그 자체의 원리에 따라 순수한 상태로 존재한다. 색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1980년대 초반 안료로 뒤덮인 조형물에서는, 순수한 색채 안료를 사원 입구에 배치해 두는 인도의 전통 의식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카푸어에게 색은 비언어적인 것으로 향하는 입구이며, 색은 우리 신체의 숨겨진 친밀감과 공명하기 위해 단색이어야 한다. 카푸어는 말한다. “색채는 물체에 보이지 않는 성격을 부여한다. 형태가 통일된 전체로서 ‘앞’과 ‘뒤’ 그리고 ‘옆’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부여한다.”

〈큰 나무와 눈(Tall Tree and the Eye)〉 스테인리스 스틸 1300×500×500cm 2009 2012 삼성미술관 리움 야외 설치 장면

03. 숭고 The Sublime

카푸어의 예술은 마치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지향했던 것처럼, 다분히 숭고의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작품은 마치 관객이 자연의 원대한 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과정과 같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카푸어는 본래 창조된 상태 그대로를 추구하며 작가의 주관성을 제거하려는 강렬한 표현을 통해, 관객의 지각과 감정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마치 현기증이 날 것 같이 작품 속으로 삼켜 들어가는 듯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 감정은 철학자 칸트가 “상상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리고 이 정점을 뛰어넘으려고 분투하며 다시 상상력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 일종의 정서적 만족감에 도달한다”고 쓴 것처럼 숭고를 향하게 한다.

04. 원초적 신체 The Body Native

카푸어의 작품은 우리의 신체를 바짝 끌어들인다. 관객은 그의 작품에 완전히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신체가 동원되는 것은 비단 개별 신체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작품과의 조우가 가능한 특정 신체와 보편적인 신체의 원초적 합일을 상정하는 것이다. 원초적 신체는 작업에서 작품과 대화하는 중재자로서 내재와 초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의 역설을 드러낸다. 다른 신체와 하나가 되기 위해 정신적으로 뒤섞이는 하나의 신체, 바로 ‘원초적 신체’다.

〈무제〉 코르틴 스틸 지름 800cm 2012 삼성미술관 리움 설치 전경

05. 물체의 표피 The Object Skin

카푸어는 사물의 표면과 겉모양을 가공해 표피 자체를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모든 감각이 머무는 자리인 표피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다. 이러한 중첩된 접합 속에서,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감각의 장소’ 또는 경계의 표시가 된다. 질감,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작품이 세상과 접촉하는 몇 미크론 단위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작가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표피에 대한 작가의 개념은 표면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이끌어낸다. 그의 작품이 지니는 깊이는 물리적인 감각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PVC 막으로 이루어진 〈마르시아스〉(2002) 같은 기념비적 조형물이나 거울로 된 반사 표면을 지닌 〈C-커브〉(2007)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표피는 드러냄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환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때때로 형태와 질량 그리고 내연에 대한 허구의 관념이 여기에서 형성된다.

06. 풍경으로서의 작품 Artwork as Landscape

카푸어는 몇 차례에 걸쳐 도시의 공공 장소(〈구름 대문〉(2004) 등), 혹은 광활한 규모의 풍경(〈테메노스〉(2006)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흔히 ‘대지미술’이라고 불리는 이런 작품은 그 자체로 관념이나 형식을 지향하는 풍경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그 형태들은 새로운 지평선을 그려내고, 각 재료들은 새로운 부조를 형성한다. 각 순간마다 풍경은 그 자체로 세상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포착하고 변형시켜, 새로운 차원으로의 길을 활짝 연다.

〈노랑(Yellow)〉 섬유유리, 안료 600×600×300cm 1999 헬싱키 쿤스트할레 설치 전경 Courtesy Lisson Gallery (Photo: Jussi Tianinen) ⓒAnish Kapoor

07. 빈 공간 Void

모든 물질화를 피하려는 속성으로 인해, 빈 공간은 결핍이면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는 기존의 시각예술의 틀에 도전한다. 그는 형태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빈 공간에 아우라를 부여했다. 빈 공간은 어떤 부름, 즉 작가가 곧 물체로 구현할 다른 곳으로부터 하는 약속이다. 빈 공간이 지닌 종교적 정신적 측면은 비록 이것이 결코 특정 종교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마치 영혼의 음악처럼 강한 마력을 발산한다.

08. 오목함 Concavity

카푸어는 “기하학은 내가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 중 다수는 숙련된 기하학적 조합의 결과물이다. 그 작품은 관객의 지각에 더욱 집요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측면에서, 어원상으로 ‘비워진’으로 정의되는 오목한 형태가 작가의 조형물에 자주 등장한다. 작가에게 이것은 공간 속에 마련된 새로운 공간이며, 튀어 나온 곡면을 저지하려 휘저은 손이 그려내는 곡선인 것이다. 작가는 오목한 형태로 세상의 ‘광학’을 조작한다. 그의 작품은 렌즈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여 우리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이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움푹 들어간 곳은 빛으로 채워지고 색채가 펼쳐지며, 오목함은 그것이 지닌 기하학적 형태 이상으로 더 광대한 공간을 만들어 냄으로써 관객의 시청각적 감각을 확장시킨다.

〈Greyman Cries, Shaman Diesm Billowing Smoke, Beauty Evoked〉 시멘트 2008 Courtesy the artist (Photo: Dave Morgan)

09. 유령 같은 빛 Light as Ghost

대단히 이지적이면서도 동시에 물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카푸어의 작품은 언제나 빛의 문제를 상정한다. 그는 정해진 지점에서 빛을 발산하지 않고 빛을 분산시킨다. 작품은 빛을 ‘포획’하여, 이를 우회적이고 유령 같은 것으로 재창조한다. 우리는 그 빛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으며, 또한 무엇을 향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작품 자체에서 나오는 듯한, 마치 동트기 전의 빛과 같다고 해도 좋다. 나아가 이 빛은 종종 거울의 차가운 표면에 반사되어 액화된 투명성을 가진 순수한 색을 띤다.

10. 허구와 의례 Fiction and Ritual

카푸어는 통상적 의례가 지니는 진지함에 귀를 기울이면서, 조형적 구성을 통해 제의적인 느낌을 능숙하게 표현한다. 그는 이 한없이 오래된 방식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효과를 인지하고, 그 장점을 이용해 관객이 작품에 정신적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이 “일반적으로 예술은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우리 문화의 정수를 뽑아 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생각에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한 작업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더 깊은 층위에서 인간성에 말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의 작품 중 다수는 허구를 받아들이고 물체의 물질성을 제거하기 위해 허구를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작가는 물체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신화를 건설하고 이 신화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물체를 읽는 것이다.” 그는 작품의 본질에 존재하는 가상적인 성격, 이것이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 작품을 뛰어넘도록 하고, “물체의 진짜 공간은 무엇인가? 당신이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 너머에 있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유도하는 것이다.

〈Shooting into the Corner〉 혼합재료 2008~09 빈 MAK     설치 장면 Courtesy the artist(Photo: Nic Tenwiggenhorn)

11. 해부학 연구: 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 Anatomical Study: The Ecorche

마르시아스(산 채로 피부가 벗겨진 사티로스)의 신화적 형상과 카푸어의 유명한 작품의 제목을 참조해 볼 때, 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은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해부학적 용어인 ‘Ecorche’, 즉 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은 피부 아래의 근육을 보여 주는 그림이나 모형을 뜻한다. 르네상스기의 화가들은 이것을 가지고 그림 연습을 하곤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카푸어의 관심은 미술의 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층위에서 그의 작품은 중개자 역할을 하는 피부 없이 삶을 추진하는 동력과 외부 세상 사이에 훤히 드러난 연합에 의존한다. 작가에 있어 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은 그의 유명한 PVC막으로 만들어진 트럼펫들에서 확인되듯이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12. 자기 생성 Self-Generation

‘스스로의 에너지에 의해 형성된다’는 의미의 제목인 〈스바얌브〉(2007)를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자기 생성은 작가에게 매력적인 주제다. 〈나의 붉은 모국〉 (2003)처럼,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주제 의식을 표현하는 모든 예술적 목적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자신은 작품 뒤로 사라지고 작품이 자체의 속도로 존재할 수 있게끔, 작품이 스스로 담고 있는 수수께끼를 홀로 보여 주도록 이끈다. 자기 생성은 인간의 영역 밖에서 사물이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증거이다. 오직 예술과 자연만이 그것의 진정한 증인이다.

13. 엔트로피 Entropy

엔트로피란 어떤 체계의 무질서 상태를 말한다. 엔트로피는 자체의 혼란스러운 본성을 통해 카푸어의 작품이 지닌 지나치게 세련된 겉모습에 균형을 가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그는 말한다. “마치 바로크 시대처럼 겉모습은 장식적이고 오직 표면에 존재하지만, 그 아래에는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다. 퇴폐와 무질서, 즉 엔트로피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표면은 우리를 심란하게 하고 결점을 보임으로써 내부의 힘을 드러내며, 정리되지 않고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그의 작품 〈Greyman Cries, Shaman Dies, Billowing Smoke, Beauty Evoked〉(2008~09)와 같이 컴퓨터로 생성된 시멘트 조형물처럼 작품에 담긴 균형과 무질서를 뒤섞어 하나의 아찔한 주제로 담아 낸다.

미디어아트가 오래 사는 법

백남준 <블루 부다> 1992~96
독일 카를스루에 아트미디어센터(ZKM) 전경.

미디어아트가 오래 사는 법

글 | 박상애_백남준아트센터 아키비스트

2012년 12월 31일. 대한민국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중단된다. 기술은 매일매일 다르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를 사용하는 우리의 삶도 매일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우리 삶 속의 일부가 된 기술은 현대미술 영역에서도 이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기술을 예술에 도입한 비디오아트나 미디어아트, 시간 기반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첨단 예술’이 존재한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그 소재와 개념의 다양성에서 전통적 미술과의 차별성을 지닌다. 더불어 작품의 보존과 관련한 개념과 기준 역시  전통적 시각예술 작품 보존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2012년은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태어난 지 8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적 시도를 최초로 선보였던 백남준은 기술과 결합한 시각예술의 발전에 있어 독보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백남준의 작품 대다수가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보존과 관련한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발전하고 있는 기술을 도입하는 데 누구보다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백남준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며, 현재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보존 사례는 어떤 것이 있을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 어려운 이 지점들을 의논하기 위하여, 백남준아트센터는 미디어아트 보존 전문가들을 초청해 그들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백남준아트센터가 매해 개최하고 있는 국제학술 심포지엄 ‘백남준의 선물’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심포지엄이 지난 10월 12일 경기도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특히 <인간과 기계, 삶을 이중주하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심포지엄의 오전 세션은 ‘시간, 기술, 그리고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그 보존에 관해’라는 소제목으로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보존과 관련한 이론적 배경과 각 기관의 보존 사례, 그리고 백남준의 작품이 가지는 특성을 보존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자넷 카디프 <크로족의 살해> 사운드 설치 2008

문화적 기억의 디지털화  
첫 발제자는 독일 카를스루에 아트미디어센터(ZKM)

의 수석 큐레이터로 재직 중인 베른하르트 제렉세(Bernhard Serexhe) 박사였다. 제렉세 박사는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 사회학 심리학 미술사 철학 교육 과학을 공부했으며, 프랑스 로마네스크 건축에 관한 복원 및 고고학적 접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 오통의 생-라자르 성당 건축에 관한 연구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에는 유럽의회에서 주관하는 <소통의 새로운 공간, 문화예술창작의 인터페이스> 연구를 자문했으며, 2010년부터는 유럽 연합 연구 프로젝트인 <디지털아트보존(www.digitalartconservation.org)>의 설립자 겸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1994년부터 ZKM에서 큐레이팅, 커뮤니케이션 등의 업무을 담당하며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으며, 유럽 전역의 대학교에서 미디어 예술, 미학 및 박물관학을 강의하고 있다. 또한 건축과 예술, 미디어 이론에 관한 다수의 저술도 출간했다. 심포지엄에서 제렉세 박사는 <‘디지털아트 보존에서의 구조 이해(Understanding Structures in Digital Art Conservation)’>라는 제목으로 디지털아트 보존에 있어서의 구조적 특성, 전략, 본질, 그리고 이와 관련한 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대략의 발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술관의 주요 업무인 수집 보존 연구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이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진 패러다임 전환은 문화적 유산의 형태에도 변화를 야기시켰다. 아날로그 형태로 존재하던 문화 유산들이 디지털화되었으며,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유산의 본질과 구조, 그리고 기관 맥락에서의 이해가 필요해졌다. 독일의 이집트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이 묘사한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은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영구적 위협에 대항하는 지속성과 신뢰성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단지 지난 몇 십 년 동안 발생했던 ‘디지털화’는 문화적 자원의 생성과 처리, 그리고 전송 방식을 매우 쉽게 만들었으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전 지구적 문화의 공유가 가능해졌다. 백남준은 이러한 변화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이미 1973년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를 통해 글로벌 채널 재핑을 논한 바 있다. 즉 문화적 자원의 광범위한 공유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기술의 발전이었다. 인간이 생성하고 인간이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되던 문화적 유산이 인간이 아닌 기계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유산 기록 방식은 문화적 기억의 지속성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민간 영역에서 개발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그 변화 주기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있다. 결국 이로 인해 전통적 문화 계승의 본질인 장기적 지속성의 추구는 자주 바뀌는 새로운 기술 시스템의 도입 주기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기술 시스템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적 기억에 대한 위협은 지속성뿐 아니라 진본성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여기서 기술적 요소를 살펴보기 이전에, 디지털 문화의 본질적 특성과 보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빠른 기술력의 변화 주기만이 디지털화된 문화적 기억에 위협으로 존재하는가? 과연 디지털 문화는 전통적 문화와는 어떠한 다른 본질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까? 디지털 문화에서 시간 개념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모든 정보들이 동시에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현재는 과거와 별개의 개념으로 인식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는 현재 데이터를 활용한 임의적 재구성에 의해 제시된다. 만일 디지털 기억과 예술을 보존하려는 생각을 과거의 일시적 특성과 매우 순간적인 기술을 보존한다는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꽤 보수적인 노력으로 비칠 수 있겠다. 하지만 예술이 항상 동시대와 사회를 앞서 나감에도 그 시대를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문화적 증거들을 보존하는 것은 시간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문화적 기억의 디지털화가 궁극적으로 문화적 기억을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반증하는, 매우 진보적인 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예술의 한 형태인 미디어아트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및 예술적 기법의 개발과 더불어 새로운 예술적 저자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내고, 작품에서 관객 소통의 의미를 증대시켰다. 예술적 창의성의 향상, 민주적 형태의 대중 개입, 그리고 한계가 없는 표현과 배급 등 뉴미디어를 도입한 예술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과 만족에 관해 많은 저술이 생겨났다. 이들이 논하는 미디어아트의 속성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작업과 공동 저자성에 부분이 되는 관객, 그리고 실제의 다중 세계와 가상 세계 사이에서 항상 존재하는 큐레이터 등을 포함한다. 급격한 기술 및 사회의 변화는 전통적 의미의 예술 이론과 양상에 대한 본질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순간성을 지닌 소재를 활용하고 새로운 기술과 접근 방식을 작업에 적용시키는 예술가의 시도는 앞서 언급한 기술 시스템에 내재한 문화적 기억의 속성인 지속성과 본질적 가치, 즉 진본성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실제 작업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디지털 코드에 뿌리를 둔 미디어아트는 문화적 기억의 체계적 변화를 보여 준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빠른 변화 주기는 미디어아트의 보존과 표현 기법에 관한 논의의 제고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예술 작업의 기본 핵심은 무형인 작가의 아이디어에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매체는 결코 무형의 것이 아니며 매체의 물질적 형태 유지를 통한 아이디어의 보존이 필요하다.
문화적 기억의 손실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0여 년간 디지털 보존과 아카이빙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졌다. 디지털 보존의 대전제는 의도적인 공격이나 프로그램 에러 등의 외부적 위협 요인을 모두 극복하고 모든 시스템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이나 비디오 테이프 같은 미디어 매체들은 외부적 위협 요인 이외에도 자체 물성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사진 혹은 비디오 테이프에 기록된 문화적 기억들은 이미 상당히 손실되었거나 혹은 그 과정 중에 있으며, 이들을 재생할 수 있는 하드웨어 역시 향후 몇 년 안에 그 수명을 다할 수 있다. 더 이상 미디어 매체들의 영속성에 관해 낙관적인 기대만을 가질 수는 없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문화적 유산의 디지털화이다. 그 예로 유럽 연합과 유네스코는 지난 몇 년 동안 문화 유산의 디지털화를 위한 연구 및 지원 프로젝트를 시행 중이며, 이 과정에서 대상이 되는 목적물의 선정과 디지털 보존 처리 연구 및 활용에 관한 의사 결정을 어떤 과정을 거쳐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디지털화된 예술 작업의 보존 및 전달과 관련하여 기관과 컬렉터들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가? 기술의 발전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인해 미술관의 주요 업무는 수집 보존 연구 중재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예술과 관련한 이러한 주요 업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내재된 비물질성, 수행적 특성, 다중의 정체성 등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은 항상 동일한 형태로 보전되어야 하며, 시간성을 반복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디지털 코드에 존재하는 ‘핵심’은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지만,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그리고 운영 시스템과 프로그램에 관련한 지식 등은 지속적인 업데이트 및 유지가 필요하다.
디지털 미디어아트의 보존은 전통적 보존과는 또 다르게 많은 예산이 소모되는 작업이며, 전통적 보존과 다른 기준의 수립이 필요하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력과 해당 기술을 활용한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 역시 디지털 미디어아트 보존시 고려해야 하는 주요 논제 중 하나이다. 디지털 미디어아트의 보존에 있어 주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은 수집과 동시에 확보한 관련 문서들이다. 현재 구현 가능한 디지털 미디어아트 보존에 대한 접근법은 작품의 물질적 본질을 분석하고 실제 수리를 실행하며, 기존 기술 장비를 확보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디지털 예술 작품의 기술적 물질적 순간성을 인식하고, 최신의 기술을 도입하여 원본과 동등한 상태의 작품을 지속시키는 것을 들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디지털 문화 유산의 계승 과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연구 및 검토되어야 할 과제이다.

백남준 <총체 피아노> 만프레드 몬테베 사진 1963

시간 기반 미디어의 보존 문제

베른하르트 제렉세 박사에 이어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시간 기반 미디어 보존가(Time-Based Media Conservator)로 재직 중인 글렌 와튼(Glenn Wharton)박사가 두 번째 발제를 진행하였다. 와튼 박사는 ‘백남준의 미디어 조각, 미술관에서의 삶’이라는 주제로 백남준의 작품 보존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기준과 MoMA에서 시행된 백남준 작품 보존의 사례를 발표했다.
테이트모던의 연구에 따르면, 시간 기반 미디어는 기술을 활용하여 구현되며 작품의 크기가 작품이 지속되는 시간으로 표현될 수 있는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예로는 비디오 필름 슬라이드  사운드 컴퓨터아트 퍼포먼스 등을 들 수 있다. 2007년부터 MoMA의 유일한 시간 기반 미디어 보존가로 재직하고 있는 와튼 박사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디오 비디오 퍼포먼스 전자미디어 작품 보존을 책임지고 있으며, 또한 뉴욕대학교에서 현대미술의 보존과 미술관적 삶에 대한 대학원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작품 보존으로 뉴욕주립대학교 쿠퍼스타운 석사 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런던대학교 UCL 고고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와튼 박사는 《현대미술의 보존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북미 지역(INCC-NA)》의 창립이사를 역임하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진행되었던 설치 작업들의 보전과 구현 방식에 관한 프로젝트 <설치 작업의 분석: 설치 예술의 보전과 구현>에 참가하여 현대미술의 다양한 보존 방식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와튼 박사의 최근 저서로는 하와이의 왕 카메하메하 1세(King Kamehameha I)의 조각과 관련한 섬 내부의 공동체의 개입을 다루고 있는 <그려진 왕: 하와이의 예술 행동주의와 정통성>이 있다. 공동 제작 시대에 있어서의 저자성과 예술작품의 진위성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와튼 박사는 다음 내용을 발표했다.
미술관들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수용하기 위해 계속해서 활동을 바꿔 나간다. 그들은 전시 공간을 바꾸고 새로운 전시 전략을 개발하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2006년 새로운 전시 기획을 위해 ‘미디어(Media)’ 부서를 만들었고, 시간과 기술에 기반을 둔 소장품들이 늘어남에 따라 2007년 미디어 보존가를 미술관 전문직으로 채용했다. 이후 2009년 ‘미디어’ 부서의 명칭이 ‘미디어&퍼포먼스 아트’ 부서로 변경되면서 본격적인 시간 기반 미디어 전시를 담당하게 되었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예술가들은 점차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매체를 작업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퍼포먼스와 인터랙티브 같은 장르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회화나 조각, 종이 위에 표현하는 작업처럼 사물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위주로 형성된 관습에는 제동이 걸렸다. 큐레이터, 레지스트라, 시청각 기술자, 보존 담당자들은 컬렉션의 변화에 따라 그들 스스로 급진적 변화를 겪게 되자 자신의 역할을 조정하였다. 특히 백남준은 미술관에 특별한 도전 과제를 안겼는데, 이는 그가 활용한 미디어 기술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술을 협력적 실천을 통해 변화시키려는 그의 관심사 때문이기도 하다. 예술 작품은 미술관에 수집되면서 새 라이프 사이클을 가지게 된다. 수집 순회 전시 보존 과정을 겪는 등 미술관 내부에서 고유의 삶을 누리게 된다. 미술관은 관객들이 예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에 관한 제안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며, 동시에 작품들이 미술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 과정에서 미술관 관계자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며, 미술관의 전문가들은 작가의 창의적 의도가 명확하게 표현되도록 지원하기 위해 작품의 의미와 소재를 안정화시킨다. 이러한 패턴은 특히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형태를 지닌 예술 작품의 경우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디어아트가 미술관에서 겪는 삶의 과정은 우선 수집으로 시작된다. 미술관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수집을 통해 작품이 미술관에 편입되며, 수집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취득 과정에서 작품 제반 권리, 소재 및 전시 방식에 관한 작가의 의견 등이 문서로 첨부된다. MoMA는 1980년대부터 미디어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2,000여 점이 넘는 비디오, 필름, 슬라이드, 소프트웨어 기반 작업 등을 소장하고 있다. 미디어 혹은 퍼포먼스 작품들은 기술 의존적이며 관객의 참여 정도에 따라 변화하고, 매번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설치될 수 있는 가변성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미술관의 표준 관행은 더 이상 이러한 형식의 예술 작품에 적용하기 힘들다. 따라서 어떤 오브제가 예술 작품인지 혹은 기록물인지, 해당 오브제는 과연 원본인지 마스터 복제품인지 혹은 전시용 복제품인지 등 새로운 방식의 소장품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의 연구 방식은 순간성을 지닌 기술을 활용한 작품에 있어서는 효율적이지 않다.
미디어 작품의 수집 과정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바로 관련 문서 작성이다. 작품과 관련한 정보들이 문서로 작성되는 이 과정에서 작가와의 인터뷰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작가가 밝히는 작품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작품의 해석 설치 보존에 중요한 정보가 된다. 백남준의 경우처럼 작품에 관한 작가 인터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작품 보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매체의 본질 자체가 영구적으로 존속하기 힘든 미디어 작품들은 하드웨어의 교체, 디지털화 등의 보존 과정을 거쳐 작품의 지속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관객들의 개입 방식도 변화시킨다. MoMA에서는 개별 평면 모니터를 통해 디지털화된 비디오 작업들을 관객들이 원하는 대로 골라서 볼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해 놓고 있다. 이렇게 개별적인 공간에서 보는 비디오 작업은 기존의 CRT 모니터와 재생기기를 통해 작품을 보던 방식과는 다른 경험치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게 된다. 또한 CRT 모니터를 평면 모니터로 교체하여 설치하는 비디오 설치 작품의 경우에도 그 지속 기간을 확장시킬 뿐 아니라 다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1960년대 퍼포먼스 작업 당시 프로젝터 및 소재를 사용하여 원시적 방식으로 관객 참여를 유도하고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했다면, 작가의 개입과 의도가 반영된 하드웨어 및 소재의 교체를 통해 새로운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보존 작업 과정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 간 협업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작업의 흔적들은 작품의 보존 과정에 녹아 들어가 있어야 할 뿐, 관객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작품의 저자성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백남준 <글로벌 그루브> 컬러, 사운드 1973

유지와 지속, 혹은 신기술의 도입

MoMA에 소장된 백남준의 작품 중 보존 대상이 되었던 <무제(Untitled)>(1993)는 작가의 의도가 기록되어 있는 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제작 당시 관련자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비슷한 형태의 또 다른 백남준 설치 작품의 보존 연구 자료를 참고로 하여 보존 작업을 진행했다. 피아노와 모니터, 유매틱(u-matic) 테이프데크, 플로피 디스크 플레이어와 카메라로 구성되어 있는 비디오 설치 작품의 복원 원칙은 원본에 사용되었던 기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최신의 기술을 활용하여 작품의 지속력을 향상시키고 미술관 공간을 통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설치를 진행하는 것이다. 피아노의 경우 구입 당시에도 중고의 상태였음을 감안하여 소리 및 형태 모두 비슷한 상태로 복원하고, 사용된 CRT 모니터의 전체 세트를 백업으로 확보했으며 플로피 디스크 플레이어를 같은 제조사의 MP3 플레이어로 교체하였다. 아날로그 미디어 장치들을 디지털 미디어 장치로 모두 교체하였지만, 관객들이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과연 작품이 생성되던 그 당시의 설치 요소들과 하드웨어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미 디지털화된 미디어 요소로 인해 유매틱 테이프데크는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피아노 옆 바닥에 그 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설치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유매틱 테이프데크 대신 랩탑 컴퓨터를 설치하여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예술 작업을 기념해야 하는가? 작동하지 않는 아날로그 하드웨어를 전시하는 것은 진실되지 않은 것인가?
백남준아트센터 국제학술 심포지엄 <백남준의 선물 5: 인간과 기계 삶을 이중주하다>에서 다룬 미디어아트의 보존 문제는 미디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모든 기관과 컬렉터들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이다. 전통적 매체를 활용한 작품들과는 달리, 미디어아트는 기술 의존적이며 시간성의 개념이 매우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고 비물질적 특성 또한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미디어아트의 보존 방식은 현재 두 가지로 크게 압축될 수 있다. 작품이 생성되던 그 시기의 기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존하는 것과, 새롭게 개발된 기술을 개입시켜 작품의 지속성과 원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현재는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사용되고 있으나 하드웨어 의존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제한된 하드웨어의 수명과 수량으로 인해 첫 번째 방식은 그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백남준의 작품은 비디오 테이프, 비디오 조각, 비디오 설치 등으로 나뉠 수 있으며, 각 특성에 맞추어 보존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작품 제작 및 설치와 관련한 작가의 명확한 입장이 쓰여진 문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당시 공동 작업을 진행하였던 큐레이터 엔지니어 테크니션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존의 기준이 되는 상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수명이 제한된 매체인 하드웨어와 비디오 테이프가 주로 사용된 백남준의 작품은 물질적 특성은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영상을 비롯한 미디어적 구성 요소들은 아날로그 특성이 반영된 상태로 디지털화를 진행하여 지속력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 아카이브 컬렉션은 백남준이 스튜디오에서 직접 사용했던 아날로그 테이프들로 구성된 미디어 아카이브 컬렉션으로, 현재 디지털 방식으로 포맷 변환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백남준의 작품 중 일부는 제작 당시의 기술 특정적 하드웨어로만 구현이 가능한 매체 특정적 작품들인데, 이 대표적인 경우가 <촛불 하나(One Candle)>(1989)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형 3관식 프로젝터 5대의 설치를 통해 구현되는 작품으로 신형 프로젝터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매체 특정적인 작품들의 보존법은 당시의 하드웨어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때도 있다.
기술이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었고, 예술적 상상력을 무한하게 실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문화적 기억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달할 수 있을지, 그 논의가 확대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제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고, 더 새로운 기술이 개입된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1963년 백남준이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예술적 매체로 사용한 지도 이제 내년이 되면 만 50년이 된다. 하드웨어 및 저장 매체의 수명이 다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미디어아트 작품 제작에 작가뿐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이제 작품의 보존을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견해와 실행이 필요하다.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존 기준에 대한 논의와 작품의 원본성과 저자성의 문제, 그리고 앞으로 도입 가능한 새로운 기술과 그 개입의 범주에 대한 연구가 바로 우리 앞에 과제로 놓여 있다.

백남준 <촛불 하나> 초, 프로젝터 5대 1989

누구를 위한 비엔날레인가

구루에온 사카린 온 <자각의 시대에 대한 기념비>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2_2012부산비엔날레 출품작

누구를 위한 비엔날레인가

글|이준_삼성미술관 리움 부관장

현재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비엔날레의 숫자는 어림잡아 10개를 쉽게 넘는다. 올해만 해도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이외에 새롭게 비엔날레 형식의 프로젝트대전이 출범했으며, 중소 규모로 금강자연비엔날레 창원조각비엔날레 익산국제돌문화프로젝트 등이 이미 개최됐거나 진행 중이다. 작년에 열렸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인천여성비엔날레 등을 포함하면 한국의 국제 비엔날레 개최 수는 세계 어느 나라를 능가한다.
전 세계적으로 비엔날레 열풍이 지속되고 있지만, 한국의 이러한 상황은 좀 더 과열된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에서 개최되는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 등 크고 작은 예술 이벤트는 52개 국가에서 150여 개 이상이 개최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비엔날레 하면 으레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베니스비엔날레와 카셀도쿠멘타 그리고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전시 담론이 진행됐다.

구헌주 <빈티지룩> 혼합재료 2012_프로젝트대전 출품작


그러한 비엔날레 문화가 오늘날은 서구권과 비서구권, 중심과 주변 할 것 없이 지구촌의 여러 도시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스탄불 샤르자 리용 아테네 리버풀 모스크바 다카르 시드니 상하이 요코하마 후쿠오카 타이페이 광주 부산 서울 등     이들 지명은 국제 비엔날레를 개최하는 지구촌 주요 도시의 몇몇 사례에 불과하다. 글로벌 현상으로서 비엔날레의 난립 현상을 사회학자 파스칼 길렌(Pascal Gielen)은 ‘창조적인 도시를 위한 신자유주의적인 도시마케팅의 전략’으로 보고 있다. 무한경쟁과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업에 관한 이해의 동기를 조장하고 촉진하고 자극한다. 이런 관점에서 국내의 비엔날레 과열 현상을 분석하고, ‘문화지리학’과 ‘장소특정적 미술’을 하나의 비판적 방법론으로 재고하고자 한다.

누구를 위한 비엔날레인가?

사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베니스비엔날레와 카셀도쿠멘타, 독일의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도시마케팅의 성공적인 사례로서 비엔날레의 출범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 케빈 로빈스(Kevin Robinson)의 주장에 의하면, 도시가 점차 균등해지고 도시의 정체성이 희박해짐에 따라 건축 예술 스포츠 이벤트 등 다방면에서 광고나 마케팅 대행사를 고용하여 도시를 차별화시키는 것이 필요해지고 있다. 비엔날레뿐만 아니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수세계박람회 평창동계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국제 행사 등이 계속 늘어나는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국제 행사는 개최 도시와 국가를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하며, 개최 도시의 이미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권의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제3세계나 신흥국가 및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비엔날레가 확산되는 것은 이러한 국제 미술 행사가 문화 산업과 도시마케팅의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환상 때문이다.
예컨대 이스탄불비엔날레라든가 샤르자비엔날레 리용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 출범 배경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이 비엔날레 개최 도시는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되었거나 문화적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도시로서, 공통으로 비엔날레와 같은 대규모 문화 행사를 도입하여 도시를 재활성화시키겠다는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비엔날레 역시 예외는 아니다. 광주비엔날레의 성공 이후 지역 단위의 도시에서는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영화제 연극제 등 각종 문화 축제를 경쟁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하였다.

왼쪽 · 테네울 티에리 <회오리> 나무 2012_2012금강자연비엔날레 출품작|왼쪽 · 벤저민 암스트롱 <마법사> 나무와 강철 2012_2012광주비엔날레 출품작

국제 비엔날레의 난립 현상 속에서 올해 대전시가 새로운 형식의 비엔날레를 출범시켰듯이, 강원도라든가 제주도, 울산과 같이 아직 비엔날레나 미술관이 없는 지역에서 추가로 설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지역 문화 행사의 적극적인 확산은 무엇보다 지방자치제의 적극적인 실시와 함께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15위권으로 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방의 재정이나 국고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의 비엔날레 열풍이 지닌 문제는 무엇인가? 사실 국제 비엔날레의 수적 증가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속하는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과연 얼마나 문화적 경쟁력이 있으며, 지역과 도시 혹은 국가를 위해서 유의미한가 하는 점이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비엔날레는 기존의 미술관과 대안공간의 기능을 흡수하면서 미술비평과 문화담론을 주도하며, 창작발전소와 같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의 비엔날레 문화는 관람객으로서는 한해 풍성한 볼거리이자, 개최 도시의 시민에게 문화 소통과 예술교육적인 측면에서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개최하는 국제 비엔날레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은 전시기획자나 작가 중심의 연중 행사로 편중되어 정작 중요한 문화적 인프라의 구축에 실패하고 있으며, 도시 간의 차별성이나 지정학적 특수성을 적극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세계화와 함께 세계의 도시는 갈수록 정체성을 잃고, 도시의 정체성도 희박해지고 있다. 전 지구화와 세계주의 명분 아래 국제 비엔날레의 평준화도 우려된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거대한 장치가 된 비엔날레 제도는 소수 큐레이터 집단이나 서구권의 주류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점차 권력 집단화 되었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 개최되는 많은 비엔날레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역사와 풍토, 문화정체성 등 지역사회를 포괄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려 표현하자면) 문화적 아비투스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서구 중심의 타자화된 시선으로 권력 집단을 추종해 왔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날레의 수적인 증가를 다다익선의 긍정적 시각으로만 볼 수 없고,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으로 문화지리학과 장소특정적 미술에 대한 비판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2012대구사진비엔날레 특별전 <사진의 과학>(이영준 기획) 전경

방법론의 상투화, 비엔날레 피로감

이런 맥락에서 우선 광주비엔날레부터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광주비엔날레는 지난 두 차례 서구권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스타 큐레이터(오쿠이 엔위저,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에게 단독으로 기획을 맡겼다. 올해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이라크 인도네시아 등 6명의 아시아 지역 여성 큐레이터를 초빙했다. 예술감독 선정의 결과로 볼 때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서구 중심의 타자화된 시선을 벗어나 한국과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성과 정체성 등 지역사회를 포괄하는 문화의 아비투스를 반영할 적절한 기회였다. 문화지리학은 문화가 그 나라와 지역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지리적 특성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은 필자가 기대한 아시아와 관련한 문화지리학적인 접근, 성과 정체성, 문화적 아비투스의 반영이라는 문제를 탈식민주의의 구태의연한 발상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이들은 각자의 이론과 안목으로 여섯 색깔 무지개를 연출했다.
비서구권 비엔날레로서 서구 비엔날레와 차별화를 시도하고자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광주의 예술감독 선정은 〈라운드테이블〉이 함의하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서 결국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라운드테이블〉이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면서 다양한 형태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광주비엔날레 주최 측이 의도한 아시아 여성 6인 예술감독의 선정 이유인지, 명확히 와 닿지 않았다. 적지 않은 참여작가가 광주를 포함한 아시아와 지역 정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예술감독의 각기 다른 개성과 비엔날레의 스타 작가 틈 사이에서 문화적 아비투스와 지리적 특성, 상호 간의 관계의 문제 등은 실종된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이들 예술감독 6인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나 서로 간의 관계성이 느슨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운 6인 감독 체제가 지닌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화제를 올해 부산비엔날레로 돌려 보자. 카셀도쿠멘타의 총감독을 역임한 부산비엔날레의 로저 M. 뷔르겔 감독은 한국이나 아시아를 잘 모르는 겸손함 때문인지, 지역사회에 참여한 ‘배움위원회’를 비엔날레의 전략적 도구로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비엔날레의 스타일은 일반 관람자에게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하나의 스펙터클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관람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개최 도시와 지역 주민을 고려할 때 관람객이 구경꾼의 역할을 벗어나서 예술창작이나 전시기획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관람객의 상당수가 청소년이거나 일반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작가와 관객, 기획자 상호간의 소통역할을 하는 배움위원회는 지역사회의 문화와 역사,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전시 내용 면에서 본다면 로저 M. 뷔르겔이 제안한 배움위원회의 방법론이 과거 프란체스코 보나미가 제50회 베니스비엔날레(2003)에서 소통을 강조하면서 관람객의 역할을 강조한 방법이나, 제5회 광주비엔날레(2004)에서 이용우 감독이 실천한 ‘참여관객제도’와 얼마나 전략적으로 차별화되는지 의심스러웠다. 배움위원회를 통해 특정 주제가 아닌 창작 방식 자체를 실험한다는 전략적 장치, 미술관 전시 형식과 차별화하여 도심의 공사장처럼 과감하게 연출하는 방법론은 비엔날레 특유의 제도비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전시장의 안팎으로 설치한 건설현장의 가림막과 비계구조물은 한국의 역동성과 개발주의를 풍자하지만 (설령 시민으로 구성한 배움위원회의 의견을 채택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낯익은 비판이다. 미술에서 제도비판은 1970년대 이후부터 개념미술 장소특정적 미술과 함께 오늘날 국제 비엔날레에서 전시기획자와 작가가 가장 전략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방법론이다. 하지만 창작방법 자체를 실험하는 이러한 제도비판이나 개념미술, 장소특정적 미술이 방법론적으로 상투화되면서 비엔날레의 피로감이 증가한다는 점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전시기획자, 참여작가를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관객과의 소통의 방법론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명확히 지역화와 차별화에 성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 비엔날레 후발 주자인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2년 전 부터 ‘미디어시티서울’이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와 대구사진비엔날레는 집중과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특정 장르에 중점을 둔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올해 ‘과학도시’ 대전을 표방하며 새롭게 출범한 프로젝트대전은 그 접근 방법론에서 향후 미디어시티서울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의심스럽다. 주최 측에서는 미디어시티서울과 프로젝트대전이 추구하는 ‘예술과 과학의 결합’이 다른 차원이라 역설하지만, 앞으로 많은 부분 중복이 예상된다. 미디어아트는 산업과 과학기술의 결합이 근간이며, 이미 유전공학 생명과학 물리학을 접목한 시도가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서 간헐적이나마 반복 소개됐기 때문이다. 부산비엔날레가 광주비엔날레와 차별화의 과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듯이 프로젝트대전 역시 미디어시티서울과 전략적 차별화에 성공해야 주변부 행사를 벗어날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엔날레의 지역별 차별화가 개최 도시의 미술관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비엔날레는 개최 도시의 공공 미술관과는 무관하게 비엔날레 재단이나 운영위원회를 통해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미술관을 비엔날레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많지만 비엔날레의 출품작이 미술관에 소장된 사례는 거의 찾아 보기 어렵다. 결국 비엔날레가 행사성 전시에 치중하여 문화적 인프라의 구축에 실패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컨대 미디어시티서울이나 대구사진비엔날레가 전시기획 과정이나 마무리 단계에서 개최 도시의 미술관과 협의하여 출품작 중 주요 작품을 수집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각 도시의 미술관이 국내 지역 작가에 의존해서는 국제적인 미술관으로 도약하기는 어렵다.     각 도시마다 공공 미술관의 성격이 차별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대구미술관이 사진 분야를 중점 컬렉션의 계획에 집어넣거나 서울시립미술관이 미디어아트 컬렉션을 강화하는 일은 수집이나 전시 정책에서 공공 미술관의 차별화에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파이샬 바그리쉬 <메시지 프로젝트> 비디오(컬러) 185분 2010_ 2012광주비엔날레 출품작

문화지리학과 장소특정적 미술

마지막으로 각 도시에서 개최하는 비엔날레가 전시공간의 확장과 도시마케팅의 차원에서 시도하는 장소특정적 미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이다. 올해도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프로젝트대전에서는 다양한 장소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광주비엔날레는 지역성의 적극적인 확대를 위한 노력으로 무각사 대안시장 광주극장 등을 활용하였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이 위치한 주변에는 광주시립미술관뿐만 아니라 광주민속박물관 광주국립박물관이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광주나 전남지역이 아닌 외지인이나 외국인에게 광주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유산과 그 역사적 깊이를 소개할 절호의 기회인데도, 국립광주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은 거의 별개의 기관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국립광주박물관은 방문 당시 기획전도 개최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엔날레 전시장과 이웃한 광주시립미술관이 자체 기획전으로 중국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하였지만, 비엔날레와 시너지를 내기보다는 자기만족적인 전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도시마케팅의 유효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광주비엔날레가 인접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협력적인 공간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부서별 기관별 이기주의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못 내고 있다. 부산이나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비엔날레는 부산진역과 광안리 시월드 부산문화회관에서 분산적으로 개최됐으며, 대구사진비엔날레는 기존 전시공간인 대구문화예술회관과 봉산문화회관에 이어 대구예술발전소 (옛KT&G)를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확보하였다. 이러한 전시공간의 확대는 지역사회의 재발견과 도시마케팅의 차원에서 의미 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부산이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부산진역 부산문화회관과 함께 인근의 부산박물관을 함께 엮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으며, 대구는 대구예술발전소가 중요한 전시공간으로 부상했지만 본전시장 (대구문화예술회관)과 전시의 성격이 명확히 차별화되지 못했고, 지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디어시티서울은 서울시립미술관 이외에도 상암동 DMC 홍보관을 제2의 전시공간으로 활용했지만 이동이 불편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기에는 미흡하였다. 미디어아트의 진흥과 도시마케팅의 차원에서 서울시민이 함께 하는 적극적인 모색도 가능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미디어시티서울과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웃한 덕수궁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한 <덕수궁 프로젝트>전이 진행되었다. 서울시민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예술과는 먼 곳으로 인식된 특정 장소를 활용한 미술관의 전시기획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시티서울 측이 이 전시공간을 흡수하여 비엔날레를 기획했다면 전시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포용하는 이러한 장소의 재발견은 비단 덕수궁만이 아니라 문화역서울284 등 서울시내의 다양한 장소와 역사적인 공간으로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한 도시의 미술관 박물관 공공장소 등 서로 다른 공간이 베니스비엔날레 카셀도쿠멘타 뮌스터프로젝트 리용비엔날레 등과 같은 국제미술제를 통해 하나로 강력하게 엮어지는 사례를 자주 보아 왔다. 일본의 에치고츠마리아트트리엔날레는 작은 지역에서 열리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이자 국제 미술행사로서 세계 각지의 미술가와 건축가를 초청하여 지역재생과 자치도시를 위한 일체화된 실행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국제 비엔날레는 기획력과 행정력 부족 때문인지, 행정부서 간의 집단 이기주의 때문인지, 적어도 도시마케팅 차원에서는 강력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문화지리학과 장소특정적 미술에 대한 환기는 일상공간의 재발견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잊힌 공간이나 그동안 주류 문화가 외면해 온 주변적 장소를 재발견하고 복원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메리 앨런 캐롤 <No。 18> 혼합재료 2012_2012부산비엔날레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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